2017/08/12

알라딘: 천년의 만남 - 도선비결이 말하는 한국의 통일과 새로운 문명

알라딘: 천년의 만남 - 도선비결이 말하는 한국의 통일과 새로운 문명


전택원 (지은이) | 흐름출판 | 2015-06-05


도선국사의 「도선비결」에서 통일의 비전을 전하는 책이다. 조선심학(心學)을 연구한 철학박사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한 저자가 북경주재특파원으로 굶주림 사태에 직면한 북한사람들의 실상을 접하면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분단현실을 씨줄로 엮고 진리를 탐색하는 노정에서 접한 도선비결과 동학을 날줄로 엮어 도선과 수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만나고 있음을 ‘천년의 만남’으로 말하고 있다.

풍수도참서로만 알려졌던 「도선비결」을 엄밀한 독해와 연구, 오랜 심득(心得)을 통해 민족 통일과 인류문명 대전환의 텍스트로 재해석해냈다. 쓰다가 다시 덮고, 엎었다 다시 쓰고 20년을 매달린 역작이다. 「도선비결」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풀이하고, 그 안에 담긴 통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의 비전을 보여줌으로써 몸도 마음도 분단 70년의 고통 속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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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열며 ‘중심’을 다시 생각합니다

1부 마음의 여정 Ⅰ
나는 누구인가

되돌아보다
어느 날 엿본 해월의 하늘 | 찔레꽃이 이슬방울을 품을 때 | 봄에 생명의 신비에 귀 기울이다
나의 작은 영토 | 나비와 춤추다 | 마음에 파인 샘물

떠돌다
1980년의 여행길 | 하숙방의 푸른 강물 | 친구의 마음속으로 날아들다
마지막 사람 | 나는 티끌도 없이 사라졌다 | 흰 장미꽃 덮인 주검
금강경을 읽고 결혼하다 | 내 안의 악마와 만나다 | 악마가 따로 없다 | 시린 청포도, 슬펐던 청춘

2부 마음의 여정 Ⅱ
동서 문명의 만남

스스로 그러하다
『주역』의 세계에 눈뜨며 | 두물머리에 선 검단산 | 스스로 그로한 바다엔 우연이 없다, 해인(海印)
두꺼비의 해탈문 | 내가 읽은 『주역』과 세상

사유로는 나를 찾을 수 없다
나르시스, 나의 그림자 앞에서 죽다 | 나 자신에게 물어라, 소크라테스
우리를 방황하게 만든 아리스토텔레스 | 3개의 매듭 |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를 죽인 뒤
이성의 나라의 장님과 절뚝발이 | 단 하나의 해답 | 새로운 문명으로 가는 길

3부 예언 속으로
도선비결과 동학

도선은 누구인가
도선비결 271자
첫째 매듭: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둘째 매듭: 경주의 수수께끼
셋째 매듭: 떨어진 꽃잎과 피의 세월이 오리라
넷째 매듭: 아무도 진리를 말하지 않는 시대
다섯째 매듭: 어두운 임금이 다스린다
여섯째 매듭: 죽음으로 세상을 깨우치다
일곱째 매듭: 조선에 황혼이 오다
옥호루
여덟째 매듭: 시련 속에서 생명은 피어나고
나의 친구 최서림 | 새야 새야 파랑새야 | 젊음의 한낮 | 봄의 첫날
이 땅의 청춘 | 공(公)이 죽은 시대 | 해월의 말씀 | 진리의 길에 뿌리는 피
아홉째 매듭: 갈라졌으나 하나가 되리라
수운의 말씀 | 삼절(三絶)
열째 매듭: 통일은 새 문명의 서곡이다
아주 작은 지혜 | 전읍(奠邑) | 서추(西酋) | 빛나는 눈동자
열하나째 매듭: 모두 하나로 돌아간다
마지막, 열두째 매듭: 큰 전쟁 끝에 큰 평화가 있다
계룡산 | 다시, 삼절을 생각하며 | 뒤풀이

4부 우리가 사는 세상
남과 북의 만남

분단이 만든 나의 적
말로만 통일
내가 지닌 선의가 가치 있는 일이라면
대동여지도
왜 우리는 하나가 아닌가
어머니
얼어붙은 대지의 뜨거운 눈물
은빛 등대
광장에서

글을 마치며 새로운 문명의 길은 어디 있는가




P.189~190 : 스핑크스의 질문은 결코 답이 없는 근원에 대한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사람이란 무엇인가?”인 것입니다. 자신의 출생을 모르는 기구한 운명의 오이디푸스에게는 치명적인 질문입니다. 그는 길목에서 우연히 부딪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합니다. 모르고 한 짓입니다. (…) 스핑크스란 ‘목을 졸라 죽이는 자’란 뜻입니다. 하필이면 목을 조릅니까. 사람은 목을 조르지 않아도 죽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인생이 무엇인지 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지상에 왜 왔는지 답도 모른 채 영원히 죽음의 망각 저편으로 사라진다. 스핑크스는 그런 의미입니다.

P.228 : 도선도, 해월도 제 자신도 우주 속에 던져진 한 알의 씨앗일 것입니다. 지식에서 답을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답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사람의 삶 자체가 답입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지구에서 어디선가 생명을 받아 머물고 가는 인생입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면서 아무도 놀라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P.120 : 절뚝발이와 장님. 아인슈타인이 근원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있어 불완전한 과학은 절뚝발이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신앙을 장님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신앙과 과학의 동반관계가 서구문명입니다. (…) 서구문명은 그렇게 지금도 근원에 대해서는 눈먼 채 과학이라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걷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문명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서구문명이 근원 인식에 관한 한 맹점을 지니고 있음을 오이디푸스는 그의 운명을 통해 보여줍니다.




유세희 (전 한양대학교 부설 중국-소련연구소 소장. 아태지역학대학원장)
: 분단의 극복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상황이 또 한 번 요동치려는 시점이다. “국운(國運)”이나 “민족의 숙명”을 믿건 아니건 간에 이 땅의 장래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읽기를 권한다.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구도(求道)의 자세로 임한 도선비결의 세계는 경건함과 희망을 주며 이 땅에 태어남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석규 (OECD 대한민국정책센터 사회정책본부장)
: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채 70년을 살아온 우리에게 도선이 하고 싶은 말을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진리를 알아 실천하고 내 것을 덜어 너에게 보태는 것이 한반도에 통일을 이루고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이며, 진리를 먼저 말한 도선(道詵)을 넘어 새로운 천년을 세우는 것이 아닐까? 나를 찾고 한반도가 하나 되는 길을 찾고자 하는 모든 분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믿는다.





저자 : 전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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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천년의 만남>,<마음에 이슬 하나> … 총 2종 (모두보기)
소개 :
1945년 경상남도 진영읍 여래리에서 태어나 함안군 가야, 칠북 등 시골에서 자랐다. 마산, 부산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서울에서 대학생이 되어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가장 쾌활한 순간에도 자기 안의 슬픔을 응시했고, 낮에는 자주 잠들고, 밤에는 혼자 깨어있고는 했다. 오래도록 한국 고유의 사상을 찾아 고심했으나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그는 말한다. 조선시대 심학(心學)의 비조인 정제두(鄭齊斗)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쉰 살 무렵이었다. 첫 직장인 신문사에서 강제해직된 것이 1980년, 9년 뒤에 복직이 되어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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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비결』271자, 9세기 도선은 21세기 한국을 어떻게 말했는가!
1860년에서 2040년까지 180년간의 예언!
도선비결 271자 가운데 200자 남짓이 이 시기를 말한다.
병자호란과 동학, 명성황후 시혜와 6,25 등
역사속의 예언이 펼쳐진다.
문명의 응축기를 지나
2010년 시작된 마지막 30년,
낡은 문명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고 있다.
이제 남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25년,
한국은 평화통일로 동서 문명의 구심점이 되어
새로운 문명을 열 수 있을 것인가?

통일의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된다(一國是安)
“진리로 하여 한반도에 통일이 이루어지고 새 문명이 시작된다” 도선국사의 『도선비결』에서 통일의 비전을 전하는 책『천년의 만남』이 흐름출판에서 출간되었다. 조선심학(心學)을 연구한 철학박사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한 저자가 북경주재특파원으로 굶주림 사태에 직면한 북한사람들의 실상을 접하면서 글을 쓰게 된 것. 분단현실을 씨줄로 엮고 진리를 탐색하는 노정에서 접한 도선비결과 동학을 날줄로 엮어 도선과 수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만나고 있음을 ‘천년의 만남’으로 말하고 있다. 책은 풍수도참서로만 알려졌던『도선비결』을 엄밀한 독해와 연구, 오랜 심득(心得)을 통해 민족 통일과 인류문명 대전환의 텍스트로 재해석해낸 것. 쓰다가 다시 덮고, 엎었다 다시 쓰고 20년을 매달린 역작이다.
『천년의 만남』은『도선비결』을 오늘날의 관점에서 풀이하고, 그 안에 담긴 통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의 비전을 보여줌으로써 몸도 마음도 분단 70년의 고통 속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진리를 찾는 노정
저자는 “분단된 땅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파고들면서 자신의 삶과 생명의 근원에 대한 동양철학적 관점과 서양철학적 관점을 두루 살펴본다. 그의 관점은 오늘날 우리의 의식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상식과 보편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서양적 사고방식의 한계와 허점을 날카롭게 집어준다. 진리는 대상이 아닌 자신을 바로 깨닫는 것이며, “동양적 사고구조에서 진리와 예언은 마음을 통해 비로소 열리는 세계”며 “홀로 아는 것”, “자문자답”(245쪽)임을 말한다. 그리고 도선, 동학, 주역, 서양철학, 진리, 통일 등 무거울 수밖에 없는 주제를 스스로 거쳐 온 마음공부의 행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진솔하게 말한다.

도선은 왜 천년을 넘어 동학을 말하고 있는가
『천년의 만남』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나는 누구인가’에는 지은이가 어린 시절부터 하나하나 경험하고 체득해 나가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 사회와 역사에 대한 단상을 실었다. 문학적 자전이라고 할 만한 격조 높은 수필로 읽힌다. 2부 ‘동서 문명의 만남’에서는 서양철학을 비롯해 불교, 주역 등 지은이의 지적 편력과 더불어 지은이가 어떻게 『도선비결』을 접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동학사상을 재발견하게 되었는지를 밝힌다. 3부 ‘도선비결과 동학’에서는 본격적으로『도선비결』을 풀이하고『도선비결』이 동학사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상세하게 밝힌다. 4부 ‘남과 북의 만남’에서는 지은이가 북경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목격하고 체험한 바를 바탕으로 뼈아픈 분단 현실을 진단하고, 이러한 엄중한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 희망을 찾을 것인지를 말해준다.

통일의 주역은 이 땅의 젊은이
통일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진실로 하여 열리는 세상”(402쪽)이고 “사람마다 지닌 진실한 마음으로 풀릴 수 있는” 것이다. 내 마음에 자리잡은 분단의식이나 마음속의 철조망이 사라질 때 통일시대 또한 열리게 된다. 도선비결에 의하면 통일의 주역은 이 땅의 젊은이다. “한반도의 참담한 분단현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회며 축복으로 바뀐다. 그것은 “죽임의 문명”에서 벗어나 온 인류가 기다려왔던 “살림의 문명”이 지구상에서 시작되는 것. 그 힘은 사람마다 진리를 알고 실천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총명신예에서 나온다”(14쪽)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점점 더 첨예해지는 분단 70년, 우리 앞에 놓인 분단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 자료]

*지난 2015년 3월 10일에 있었던 저자와 담당 편집자의 인터뷰 녹취록을 요약 발췌한 것입니다.

책 제목을 ‘천 년의 만남’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지요?

천 년이라는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닙니다. 물리적 시간을 넘어서는 것,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진실로서 서로를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도선이 827년에 태어나서 898년에 돌아가셨는데 해월이 그와 딱 천 년 차이입니다. 해월이 1827년에 태어나서 1898년에 돌아가셨어요. 천 년입니다. 물론 숫자 장난일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숫자상의 그런 우연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천 년 세월을 넘어 도선과 해월이 만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두 분과의 만남은 실은 내 자신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진리를 직접 아는 만남, 이것이 천 년의 만남이 되는 거죠.

‘옛날 책에 통일이 된다고 씌어있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텐데요?

피상적으로 보자면 가장 안일하게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운명론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하나의 결과를 이루는 전 과정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것 또한 운명입니다. 운명에는 이런 양의적인 개념이 있죠. 그래서 그냥 방관자가 되어서 기다리면 저절로 되겠지 하는 그런 측면의 통일도 있겠지만, 사실은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그런 통일도 있는 것이겠죠. 어느 쪽으로 더 믿음이 갑니까? 방관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한테 진지하게 대답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그렇다면 통일은 예언된 것입니까, 아니면 ‘해야만 한다’는 당위이고 의지입니까?

이 분단 시대를 유지하는 가장 큰 힘은 제가 볼 때는 증오심입니다. 그러니 통일을 하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게 답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면 내가 나를 속이겠습니까? 자기로서 최선을 다하고 자기로서 가장 소중한 것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진리입니다.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방향이니까요. 진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반드시 상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을 떠나서 다른 답은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하늘인 세상입니다. 다른 답은 전혀 없습니다. 답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구하지 말고 나를 닦으라는 겁니다. 사람이 나서 죽는 것보다도 그렇게 치열하고 또 감동적이고 위대하고 그 자체가 질문이자 그 자체가 답인 사람을 떠나서 달리 없습니다. 바로 이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데서 힘이 나오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그것이 통일입니다.

오늘의 세계는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는 물론 분쟁, 테러 등등 정말 험악합니다. 에릭 홈스봄이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했는데, 21세기 역시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선생님의 생각이 낭만적이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홈스봄 같은 분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 문명을 진단하고 시대의 위기를 다양한 현상을 분석해서 과학적으로 제시하는 작업이 산더미입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지요. 그런데 그것은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답은 내 자신에게 있는 겁니다. 내 자신을 소홀히 하고 내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고 있는데 그런 문제가 아무리 많은들 어떻게 바늘에 실을 꿸 겁니까? 가장 소중하고 답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사람 하나입니다. 그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공감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생기고 사회가 시작됩니다. 그 기본적인 것에 대한 충족 없이 그것을 건너뛰어서 답이 있는 것처럼 추구한다면 그런 사람은 반드시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는 겁니다.

통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자조적 관점도 있습니다만?

통일을 안 하겠다는 사람들은 통일에 대해서 생각한 것이 거의 없다는 뜻이죠. 생각한 게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주입했거나 다른 것에 의해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죠. 결국 통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 이해관계가 더 많다는 뜻이죠. 그러면서 표현을 통일에 반대한다, 이렇게 갖다 붙이는 거죠. 실제로 통일이라는 것은 뭐냐면 내 인생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답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은 살아가면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진리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진리를 안다면 그것이 곧 생명이고 생명을 안다고 하면 생명의 본래 모습은 어떠한 역경에도 어떠한 난관과 희생과 좌절에도 원형을 회복하는 그 자정력에 있습니다. 자기를 복구하는 힘이 있는 겁니다. 그 원형이 뭐겠습니까. 민족으로 보면 통일이고 개인으로 보면 사람다운 삶입니다. 사람다운 삶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고 진리를 알고 진실되게 살고자 하는 그 자체가 위대한 영혼입니다. 위대한 영혼이라고 하면 마하트마 간디인데, 그가 집이 컸습니까. 옷이 많았습니까.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영국 식민지 상에서 인도인의 자존심 위해서, 제일 먼저는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눈을 떴었죠.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그건 스스로를 포기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스스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벌거벗고 나서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지 사람이 물질의 이해관계 속에서 그것을 더 많이 보태주고 더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뜻에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결국 가거든요. 가는데 죽음이란 게 또 얼마만한 축복이고 씨를 맺지 못하면, 씨가 없으면 그건 하나의 저주입니다. 생명에 대한 배반이며 생명에 대한 일탈이고 생명에 대한 포기입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영혼이라 했지만 이건 곧 영혼의 씨입니다. 씨앗이 어떻게 맺히는지를 모든 것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세월이 가면서 충실할 때 씨앗으로서 생명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 거룩한 과정 전체가 진리의 과정입니다. 여기를 벗어나서 다른 답은 없습니다. 시대가 특이한 하나의 조건 아래서 분단이 되었다면 결국 우리는 새로운 생명의 힘, 진리의 힘으로 그 원형을 회복하는 또 새로운 시대와의 대화 속에서 주어진 사명을 자연스럽게 이루자는 것이지, 억지로 하자는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