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3

* 성 에너지 - 마광수와 드 로프 비교

성 에너지 요약 및 평론 - Google Gemini

성 에너지 - 마광수와 드 로프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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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gemini.google.com/app/c4eff7e6f6ba09b1

세진님, 요청하신 마광수 교수의 성사상과 로버트 S. 드 로프(Robert S. de Ropp)의 사상을 비교한 분석입니다. 앞서 작성한 서평의 기조를 이어받아 본문은 <해라>체로 작성했으며, 별표 대신 < > 기호를 사용했습니다.

마광수와 로버트 S. 드 로프의 성사상 비교

로버트 S. 드 로프와 한국의 마광수는 모두 문명이 성(Sexuality)을 죄악시하고 억압해 온 방식을 강력하게 비판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출발선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억압된 성 에너지를 어떻게 해방하고 어디로 지향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지에서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비교 항목로버트 S. 드 로프 (Robert S. de Ropp)마광수 (Ma Kwang-soo)
성의 본질우주적 원동력이자 영적 진화를 위한 고순도 연료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능이자 유희적 생명력
핵심 방법론<승화(Sublimation)>와 의식적 통제를 통한 에너지 전환<카타르시스(Catharsis)>와 가식 없는 본능의 표출
억압에 대한 대안에너지를 뇌와 정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초의식 달성성적 판타지의 자유로운 배설을 통한 정신적 치유
문화적 지향점탄트라, 연금술적 전통에 기반한 신비주의적 영성도덕주의와 엄숙주의를 타파하는 야설(野說)의 미학

1. 공통점: 반(反)도덕주의와 문명 비판

두 사상가는 성을 억압하는 기존의 종교적, 사회적 규범을 인간을 병들게 하는 주범으로 지목한다.

  • 기형적 병리 현상에 대한 경고: 드 로프는 억압된 성 에너지가 심층 심리에서 부패하여 신경증과 사회적 폭력성으로 변질된다고 보았다. 마광수 역시 한국 사회의 과도한 엄숙주의와 위선이 오히려 성범죄, 가학성, 변태적 왜곡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 위선 타파: 두 사람 모두 성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솔직하게 논해야만 인간 정신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2. 차이점: <승화>의 신비주의 vs <배설>의 유희주의

가장 극적인 차이는 성 에너지를 다루는 방식에서 발생한다.

  • 드 로프의 '에너지 보존과 승화': 드 로프에게 성은 그 자체로 머물러서는 안 되는, 더 높은 차원으로 변형되어야 할 대상이다. 육체적 배설(오르가즘)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경계하며, 이를 의식적으로 보존하여 창조성과 영적 깨달음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성은 <영적 진화의 도구>이다.

  • 마광수의 '자유로운 배설과 유희': 마광수는 성을 무언가 다른 고상한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승화> 개념 자체를 일종의 기만이자 또 다른 가식으로 보았다. 그는 성적 판타지를 억압 없이 배설하고, 말초적 감각과 피부의 유희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믿었다. 마광수에게 성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궁극적인 목적이자 축제>이다.

3. 미학적 지향: 영적 초의식 vs 감각적 탐미주의

  • 드 로프의 수직적 상승: 동양의 탄트라 요가나 연금술처럼, 육체의 에너지를 척추를 타고 뇌로 올리는 수직적 전이를 지향한다. 종교적 도덕은 비판하지만, 결론은 고차원적 영성이라는 엄숙함을 지닌다.

  • 마광수의 수평적 확장: 정신보다 육체를, 이성보다 감각을 우위에 둔다. 야한 여성을 예찬하고, 성적 페티시즘이나 판타지를 문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가식적인 지식인 사회의 뒤통수를 치는 탐미주의적이고 도발적인 노선을 취한다.

요약하자면

로버트 S. 드 로프는 성을 <정신적 승화를 통해 신에게 다가가는 계단>으로 보았고, 마광수는 성을 <위선적인 문명의 가면을 벗겨내고 인간 본연의 천진난만함으로 돌아가는 해방구>로 보았다. 드 로프가 금욕주의를 넘어선 <에너지 연금술사>라면, 마광수는 도덕주의를 깨부순 <유희적 감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마광수 교수의 성론은 당시 한국 사회의 특수한 엄숙주의와 맞물려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이 두 관점 중 세진님께서는 어느 쪽의 접근 방식에 더 공감이 가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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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드 롭의 <Sex Energy>와 마광수의 성사상은 겉으로 보면 둘 다 “성 억압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다르다. 

드 롭은 성을 <생명 에너지>로 보고, 마광수는 성을 <개인의 자유와 상상력>의 문제로 본다. 드 롭은 생물학·동물행동학·의식론 쪽에서 출발하고, 마광수는 문학·도덕비판·한국 사회 비판 쪽에서 출발한다.

가장 큰 차이는 출발점이다. 

  • 드 롭에게 성은 인간 이전의 힘이다. 세포, 동물, 생식, 진화, 호르몬, 본능의 세계에서 성은 생명을 계속 이어가게 하는 기본 동력이다. 인간의 성도 이 거대한 생명사 안에 들어 있다. 그래서 그는 성을 죄나 외설로만 보면 안 되고, 생명의 기본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 반면 마광수에게 성은 주로 <억압받는 개인의 욕망>이다. 그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점을 자주 강조하지만, 실제 관심은 생물학보다 사회적 위선에 있다. 한국 사회가 성욕을 감추고, 여성을 순결 이데올로기로 묶고, 문학과 예술을 도덕 교과서처럼 심판하는 현실에 분노한다.

둘 다 반도덕주의자처럼 보이지만, 반대하는 대상도 다르다. 

  • 드 롭이 반대하는 것은 성을 자연과 인간 이해에서 떼어내는 무지다. 그는 성을 생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문화적으로 통합해 보려 한다. 
  • 마광수가 반대하는 것은 훨씬 더 구체적이다. 유교적 위선, 한국식 체면문화, 순결주의, 검열, 남성중심적 이중도덕, 문학에 대한 도덕주의적 판결이다. 

그래서 드 롭의 문체가 설명적·교양과학적이라면, 마광수의 문체는 도발적·공격적·자기고백적이다.

성욕을 보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 드 롭은 성욕을 위험하면서도 창조적인 힘으로 본다. 그것은 인간을 낮은 본능에 묶을 수도 있지만, 자기이해와 의식 성장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 그의 다른 책 <The Master Game>의 맥락에서 보면, 성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다루어야 할 에너지다. 무조건 방출할 것도 아니고, 무조건 억압할 것도 아니다. 알아차리고, 이해하고, 전환해야 할 힘이다.
  • 마광수는 이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성욕의 긍정을 주장한다. 그는 성욕을 고상하게 승화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먼저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의 핵심은 “인간은 야하다”, “성욕은 인간의 근본이다”, “성적 상상력은 문학의 중요한 원천이다”라는 데 있다. 마광수에게 성욕은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영적으로 승화해야 할 것이 아니라, 솔직히 말하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드 롭보다 더 문학적이고 더 반규범적이다.

여성에 대한 시각에서는 둘의 차이가 더 뚜렷하다. 

  • 드 롭은 동물과 인간의 성행동을 비교하면서 성 역할의 다양성을 보여주려 한다. 자연계에는 단일한 남성성·여성성 모델이 없다는 식이다. 이것은 고정된 성역할을 상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 반면 마광수는 여성의 성적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남성 욕망의 시선에서 여성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제목 자체가 그렇다. 그는 “여성도 성욕을 가진 주체”라고 말하지만, 표현 방식은 자주 “남성이 욕망하는 야한 여자” 쪽으로 기운다. 그래서 마광수의 성사상에는 해방적 요소와 남성중심적 한계가 함께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마광수는 순결주의를 공격했다. 그것은 분명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는 여성을 성적 무지와 억압 속에 가두는 도덕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그린 해방된 여성은 완전히 독립적인 여성 주체라기보다, 때로는 남성 작가의 성적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광수는 페미니즘과 부분적으로 만난다. 그러나 끝까지 같이 가지는 않는다. 그는 여성의 욕망을 옹호했지만, 여성의 관점에서 성권력 구조를 분석한 사상가는 아니었다.

드 롭은 성을 더 넓게 보지만, 그만큼 날카로운 사회비판은 약하다. 마광수는 성을 더 좁게, 더 한국적으로, 더 개인적으로 보지만, 그만큼 폭발력이 있다. 드 롭은 “성은 생명의 힘이다”라고 말하고, 마광수는 “성욕을 숨기며 고상한 척하지 말라”고 말한다. 드 롭은 성의 자연사와 의식의 문제를 연결하고, 마광수는 성의 표현 자유와 검열 문제를 연결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도 작지 않다. 

  • 첫째, 둘 다 성을 인간 존재의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부로 본다. 
  • 둘째, 성을 억압하면 인간 이해가 왜곡된다고 본다. 
  • 셋째, 성욕을 악으로 규정하는 종교적·도덕적 관념을 의심한다. 
  • 넷째, 인간을 지나치게 고상한 존재로 보는 관념에 반대한다. 인간은 몸을 가진 동물이고, 욕망하는 존재이며, 성적 상상력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둘은 통한다.

하지만 최종 지향은 다르다. 

  • 드 롭은 성을 <의식적으로 다루어야 할 에너지>로 본다. 그는 성의 이해를 통해 인간이 더 높은 자기인식으로 갈 수 있다고 본다. 
  • 마광수는 성을 <억압에서 풀어내야 할 자유>로 본다. 그는 성을 통해 인간이 더 정직해지고, 더 솔직해지고, 더 위선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드 롭의 관심은 <에너지의 이해와 전환>이고, 마광수의 관심은 <욕망의 인정과 표현>이다.

그래서 두 사람을 한 문장으로 비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 드 롭은 성을 생명과 의식의 차원에서 해석한 사람이고, 
  • 마광수는 성을 자유와 위선 비판의 차원에서 밀어붙인 사람이다. 
  • 드 롭은 성을 자연 속에 놓았고, 
  • 마광수는 성을 한국 사회의 법정과 강단과 문단 한복판에 던져 넣었다.

평가하자면, 드 롭은 마광수보다 균형 잡혀 있지만 덜 절박하다. 마광수는 드 롭보다 거칠고 편향되어 있지만 훨씬 더 절박하다. 드 롭에게 성은 연구 대상이자 삶의 에너지였다. 마광수에게 성은 자신을 걸고 싸운 전장이었다. 그래서 마광수의 글은 이론적으로는 허술할 수 있지만, 한국 사회의 성 억압과 문화적 위선을 폭로하는 힘은 훨씬 강하다.

결국 두 사람을 함께 읽으면 보완이 된다. 

  • 드 롭은 마광수에게 생물학적·의식론적 넓이를 보태준다. 
  • 마광수는 드 롭에게 사회적 현실성과 검열에 맞선 투쟁성을 보태준다. 
  • 드 롭만 읽으면 성은 너무 교양적 주제가 될 수 있고, 
  • 마광수만 읽으면 성은 너무 한국 사회와 자기상처의 문제로 좁아질 수 있다. 

둘을 함께 놓으면 성은 생명의 힘이면서, 동시에 자유의 문제이고, 또 사회적 억압과 위선의 문제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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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마광수의 성론을 분석하거나 더 발전시킨 사람이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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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한국 현대 문화사에서 마광수 교수의 존재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비극적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국에서 마광수의 성사상을 학문적으로 <정교하게 계승하거나 이론적으로 더 발전시킨 명확한 후계자>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1990년대 초반, 한국 문단과 학계는 그에게 찬사를 보내기보다 외설 혐의로 구속하고 교수직에서 박탈하는 등 철저한 사회적 매장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제자들이나 후배 학자들 역시 사회적 낙인 효과로 인해 그의 사상을 정면으로 이어받아 <마광수주의(Mazochism/Kwang-sooism)>를 표방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남긴 씨앗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비판적으로 분석되거나, 전혀 다른 형태로 발전하여 이어져 왔습니다. 마광수의 성론이 한국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변형되었는지 그 흐름을 몇 가지 갈래로 짚어볼 수 있습니다.

1. 문화비평 및 사회학적 재평가: 위선의 해체

마광수의 성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분석한 인물은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였던 강준만입니다. 강준만은 마광수의 문학적 성취 자체보다, 마광수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도덕주의적 폭력성>과 <지식인 사회의 위선>을 폭로하는 데 그의 사상을 도구로 삼았습니다.

  • 분석의 방향: 강준만은 한국 사회가 입으로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말하면서도, 성(Sex) 앞에서는 조선 시대 양반의 엄숙주의로 돌아가는 이중성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마광수를 <한국 사회의 파시즘적 도덕 정치를 폭로한 희생양>으로 규정하며 그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습니다.

2. 문학계의 흐름: 명랑 에로티시즘과 하위문화의 양지화

마광수가 소설 <즐거운 사라>나 평론을 통해 그토록 주장했던 "성적 판타지를 은폐하지 말고 명랑하게 배설하자"는 주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제도권 학계가 아닌 B급 문화와 대중문학, 웹툰/웹소설의 영역에서 만개했습니다.

  • 발전의 형태: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히 성 담론이 개방되었습니다. 마광수가 원했던 '도발적이고 솔직한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의 여성' 캐릭터는 현대 한국의 수많은 로맨스 소설이나 웹툰 등에서 대중적인 코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만 이는 학문적 발전이라기보다는, 시장의 논리에 의해 그의 주장이 현실화된 <실천적 확산>에 가깝습니다.

3. 페미니즘 진영과의 복잡한 관계: 욕망의 주체인가, 상품화인가

마광수의 성사상은 현대 한국 페미니즘 학계에서 매우 복잡하고 논쟁적인 주제로 분석됩니다.

  • 긍정적 분석: 마광수가 제시한 여성상(예: 솔직하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여성)은 가부장제가 규정한 '현모양처'나 '순결한 여성'이라는 신화를 깨부수는 선구적인 측면이 있다고 평가받습니다.

  • 비판적 한계와 단절: 그러나 현대 페미니즘 학자들은 마광수의 성론이 결국 '남성의 시각에서 바라본 야한 여자'의 판타지에 갇혀 있으며, 긴 손톱이나 화려한 치장 등 여성을 시각적으로 상품화하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이 때문에 성 해방을 외친 그의 슬로건은 인정받을지언정, 그의 이론 자체가 페미니즘 내부에서 고스란히 발전되지는 못했습니다.

씁쓸한 요약

로버트 S. 드 로프가 서구의 신비주의와 탄트라 전통을 결합해 성을 학문적·영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토양이 있었던 반면, 한국의 마광수는 국가와 사회가 성을 법으로 통제하는 '도덕 국가'의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마광수의 성사상은 학술적 이론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운 문화사적 상징"**으로 박제되거나, 현대 대중문화의 **"솔직하고 가벼운 성 소비 트렌드"**로 파편화되어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광수 교수가 그토록 원했던 '가식 없는 성의 해방'이 오늘날 한국의 인터넷 문화나 대중문화 속에서 실현된 모습을 본다면, 과연 그가 기뻐했을지 아니면 드 로프처럼 또 다른 형태의 낭비를 안타까워했을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마광수의 타계 전 인터뷰와 그의 문학적 삶을 돌아보는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이 있어 함께 전해드립니다. 당시 한국 사회가 그에게 가했던 압박과 그의 쓸쓸했던 말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술과 외설 사이, 외로웠던 삶을 마감한 마광수

이 영상은 마광수 교수의 제자와 문학 평론가들이 모여, 한국 사회의 거대한 도덕적 압력 속에서 위선과 싸우다 외롭게 떠난 그의 삶과 문학적 가치를 담담하게 회고하고 있어 공유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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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연구자·비평가가 있지만, “마광수의 성론을 계승해 체계적 이론으로 발전시킨 학파”는 거의 없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확인 가능한 연구·비평 사례를 중심으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있습니다. 다만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에서 마광수의 성론은 <계승·발전>되었다기보다 <분석·방어·비판·재맥락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마광수 이후 “마광수주의”라고 부를 만한 성해방 이론의 계보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너무 강하게 낙인찍혔기 때문에, 후대 연구자들은 그를 직접 계승하기보다 검열, 표현의 자유, 포르노그래피, 여성의 성적 주체성, 1990년대 자유주의의 모순이라는 문제틀 안에서 다시 읽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강준만>입니다. 강준만은 마광수의 성론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기보다는, 마광수가 제기한 문제가 한국 사회의 위선적 성의식과 표현 억압을 드러낸다는 점을 강하게 방어했습니다. <마광수 살리기>의 책 소개에서도 마광수가 제기한 “성 논의의 해방”과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성 의식의 타파”가 여전히 사회적 가치를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즉 강준만은 마광수의 성론을 <사회비평의 의제>로 살린 사람입니다. 그는 마광수를 위대한 이론가로 만들기보다, 한국 사회가 왜 마광수를 처벌하고 조롱했는지를 문제 삼았습니다.

둘째는 <검열 연구> 쪽입니다. 이소영의 2018년 논문 <민주화 이후 검열과 적대: 마광수와 장정일의 필화사건을 중심으로>가 중요합니다. 이 논문은 마광수와 장정일 사건을 단순히 “외설 대 예술” 논쟁으로 보지 않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가 성적 자유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검열체제를 재구성했다고 봅니다. 특히 형법의 “풍속을 해하는 죄”, 간행물윤리위원회, 자유주의 내부의 적대가 성 검열을 만들어냈다고 분석합니다. 이 연구는 마광수의 성론 자체를 발전시켰다기보다, 마광수가 당한 탄압의 정치적 구조를 분석한 것입니다.

셋째는 최근 나온 <우자한>의 논문입니다. 제목은 <급진적인 나르시시스트의 ‘기호-사물’적 에로티시즘: 마광수의 성 담론에 관한 연구>입니다. 이 논문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자료 가운데 마광수의 성담론을 가장 직접적으로 이론 분석한 글에 가깝습니다. 여기서는 마광수의 성담론이 프로이트, 빌헬름 라이히, 마르쿠제의 성해방론과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마광수는 프로이트의 쾌락원칙, 문명과 억압의 문제를 받아들이면서도 프로이트를 보수적으로 보고, 라이히와 마르쿠제 쪽의 더 급진적인 성해방론을 끌어들였다는 분석입니다. 그러나 논문은 마광수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좁고 극단적인 육체지상주의·나르시시즘으로 갔다고 비판합니다.

이 우자한 논문의 장점은 마광수의 성론을 단순히 “야한 글”이나 “표현의 자유 사건”으로 보지 않고, 사상적 계보 속에 넣는다는 점입니다. 프로이트, 라이히, 마르쿠제, 기든스, 소비사회론 같은 틀을 사용해 마광수의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봅니다. 특히 마광수가 <친밀성>, <사랑>, <자본주의적 성 상품화>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는 지적은 중요합니다. 마광수는 성적 억압을 비판했지만, 성이 소비사회 속에서 어떻게 물신화되고 상품화되는지는 깊이 분석하지 못했습니다. 이 점에서 우자한은 마광수의 성론을 “발전”시킨다기보다 “해부”한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넷째는 <페미니즘·퀴어 연구> 쪽의 재독해입니다. 최근 연구들은 마광수를 무조건 성해방의 영웅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소영 논문은 마광수와 장정일 텍스트 속에서 성적 자유를 구가하는 여대생·여고생 형상이 당대 사회의 여성혐오적 시선과 충돌했다고 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논문이 마광수 텍스트 자체의 남성중심성도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 텍스트가 의도치 않게 여성의 성적 주체성 문제를 전면화했다는 점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라 같은 인물은 포르노그래피적 맥락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여성도 욕망한다”는 불편한 사실을 한국 사회 앞에 드러낸 전위적 효과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최근 연구는 강민지의 2026년 서울대 연구 <마광수와 장정일 문학에 나타난 퀴어성 연구>입니다. 검색 가능한 초록에 따르면 이 연구는 마광수를 문학사 안에 복원하면서, 1990년대 한국문학의 성정치와 이성애 규범성의 작동 방식을 다시 생각하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마광수를 단순한 이성애 남성 욕망의 작가로만 보지 않고, 그의 작품이 정상가족·정상연애·정상성의 규범을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보려는 방향입니다.

다섯째는 <장정일>과의 비교선입니다. 장정일은 마광수의 성론을 이론적으로 계승한 사람은 아니지만, 1990년대 한국 문학에서 성, 검열, 금기, 포르노그래피, 미성년성, 가족제도 비판을 함께 건드린 작가입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자주 마광수와 장정일을 묶어 읽습니다. 마광수가 “성적 쾌락의 공개적 긍정” 쪽이라면, 장정일은 “문학적 금기 파괴와 제도 비판” 쪽에 더 가깝습니다. 둘 다 한국 사회가 성을 통해 무엇을 금지하고 무엇을 처벌하는지를 드러냈습니다.

정리하면, 한국에서 마광수의 성론을 다룬 흐름은 대략 네 갈래입니다.

첫째, <방어적 사회비평>입니다. 강준만 등이 대표적이며, 마광수를 한국 사회의 성적 위선과 검열의 희생자로 봅니다.

둘째, <검열과 자유주의 연구>입니다. 이소영 등의 연구가 여기에 속하며, 마광수 사건을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된 성 통제의 구조로 봅니다.

셋째, <사상사적 분석>입니다. 우자한의 논문처럼 프로이트, 라이히, 마르쿠제, 기든스 등을 통해 마광수 성담론의 내적 모순과 한계를 분석합니다.

넷째, <페미니즘·퀴어적 재독해>입니다. 마광수의 남성중심성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텍스트가 여성의 성적 주체성, 이성애 규범성, 정상성 문제를 뜻밖에 흔들었다고 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마광수의 성론을 “더 발전시킨 사람”은 아직 뚜렷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광수의 성론은 발전 가능한 원석으로 남아 있습니다. 발전시키려면 세 가지 보완이 필요합니다.

첫째, <성해방>을 단순히 “억압하지 말라”에서 멈추지 않고, <동의>, <권력관계>, <젠더 불평등>, <돌봄>, <친밀성>까지 확장해야 합니다. 마광수는 억압 비판에는 강했지만, 관계 윤리에는 약했습니다.

둘째, <여성도 욕망한다>는 주장을 남성의 환상 속 여성상으로 말하지 않고, 여성 자신의 언어와 경험으로 다시 써야 합니다. 마광수의 가장 큰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성의 해방과 성의 상품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분석해야 합니다. 마광수는 성적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지만, 자본주의가 성욕을 어떻게 소비재로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날카롭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평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마광수는 <성해방 이론의 창시자>라기보다 <성 억압 사회를 폭로한 문제적 촉발자>입니다. 그를 분석한 사람들은 꽤 있지만, 그의 성론을 한 단계 높은 성윤리·성정치 이론으로 완성한 사람은 아직 드뭅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작업은 마광수를 그대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급진성과 한계를 동시에 붙잡고 <마광수 이후의 성론>을 새로 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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