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7

이인자 한살림광주 동학사상 다시 읽기 제7강 천도교의 탄생

 

한살림광주 동학사상 다시 읽기
제7강 천도교의 탄생
1898년 해월 최시형의 처형이후 동학은 해월의 삼대제자 손병희,손천민,김연국의 집단지도체제로 이어진다. 한 사람은 1900년 처형되고 한 사람은 옥살이 후 1904년에 석방되고 1901년 의암 손병희는 일본행을 택하면서 개화의 수용으로 천도교로 넘어가는 시기가 된다. 1902년 일본의 권동진,오세창과 합류 1903년 삼전론을 말한다. 도전,언전,재전

1904년 러일전쟁때 이용구 중심의 진보회(나중 일진회)가 여러 방법으로 일본을 돕게 된다.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편하게 된다. (새로운 민족종교 천도교를 창시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이이화님은 말한다.)
왜 종교가 필요했을까?
(동학농민전쟁이 수많은 민중의 희생을 치르고 끝난 뒤 끝내는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그들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희망을 잃으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이럴 때 그 민중은 하나의 희망을 천도교에 걸었다고 한다.)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기본 강령 발표ㅡ독립의 기초,정부 개혁,군정 재정 정비,국민의 생명 재산보호 등
교도의 수행지침 오관ㅡ주문,청수,시일,성미,기도
갑진혁신운동,
지탄을 받고 있는 일진회 축출운동을 벌여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한자강회 등과 손잡고 여러 사회 운동을 하며 1906년 이후 교세가 급속도로 상승하게 되고 성미를 통한 자금이 쏟아져 교단 재정이 넉넉하게 되었다 한다.)
(대도주 자리를 김연국에게 넘겼으나 독자적 행동을 하는 것 때문에 1908년 박인호에게 그 자리를 주게 된다. 교주 호칭도 정하게 되는 데 1대 대신산 최제우,2대 신사 최시형,3대 성사 손병희,4대 대도주 박인호
경전으로는 동경대전,용담유사,해월신사법설,의암성사법설 등)
1910년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 들어가게 되고 천도교회 월보가 창간된다.
1919년 삼일독립운동(의 횃불을 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에 따라 제기된 민족자결원칙과 파리강화회의 개최를 앞두고 일대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한다.1월부터 49일의 기도회를 갖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에 두는 구상을 한다.동학농민전쟁의 폭력적 항쟁이 실패하고 갑진년 혁신운동이 과격했다고 판단해 민족 내부의 역량 결집 등 새로운 방략을 제시한 것이다 한다.)

[삼일독립선언문 전문]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우리의 이 선언은 5천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2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기 위한 것이며,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기 위한 것이다.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우리 민족이 수 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받은 지 10년이 지났다.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민족의 존엄함에 상처 입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아,그동안 쌓인 억울함을 떨쳐 내려면,지금의 고통을 벗어 던지려면,앞으로 닥쳐올 위험을 없애 버리려면,억눌린 민족의 양심과 사라진 국가 정의를 다시 일으키려면,사람들이 저마다 인격을 발달시키려면,우리 가여운 자녀에게 고통스러운 유산 대신 완전한 행복을 주려면,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우리 이천만 조선인은 저마다 가슴에 칼을 품었다.모든 인류와 시대의 양심은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방패로써 우리를 지켜 주고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나아가 싸우면 어떤 강한 적도 꺾을 수 있고,설령 물러난다 해도 이루려한다면 어떤 뜻도 펼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이 1876년 강화도조약 뒤에 갖가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우리는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도 급해서 과거의 잘잘못을 따질 여유가 없다.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양심이 시키는 대로 우리의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이지 결코 오랜 원한과 한 순간의 감정으로 샘이 나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단지,낡은 생각과 낡은 세력에 사로잡힌 일본 정치인들이 공명심으로 희생시킨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잡아,자연스럽고 올바른 세상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이 바라지 않았던 조선과 일본의 강제 병합이 만든 결과를 보라.일본이 우리를 억누르고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을 만들고 있다.과감하게 오랜 잘못을 바로잡고,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서로의 재앙을 피하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울분과 원한에 사무친 2천만 조선인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은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동양의 안전과 위기를 판가름하는 중심인 4억 중국인들이 일본을 더욱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하여 결국 동양 전체를 함께 망하는 비극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다.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또 중국이 일본에게 땅을 빼앗길 것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 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인가!
아,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구나.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구나.지난 수천 년 갈고 닦은 인도적 정신이 이제 새로운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는구나.새 봄이 온 세상에 다가와 모든 생명을 다시 살려내는구나.차디찬 눈보라에 숨막혔던 한 시대가 가고,화창한 바람과 따뜻한 볕에 기운이 돋는 새 시대가 오는구나.온 세상의 도리가 다시 살아나는 지금,세계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우리는 원래부터 지닌 자유권을 지켜서 풍요로운 삶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다.원래부터 풍부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세계에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꽃피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떨쳐 일어나는 것이다.양심과 진리가 나와 함께 나아간다.남녀노소 구별 없이 어둡고 낡은 옛집에서 뛰쳐나와,세상 모두가 함께 즐겁고 새롭게 되살아날 것이다.
수천 년 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우리를 돕고,온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우리를 지켜주니,시작이 곧 성공이다.다만,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
세 가지 약속
하나,
오늘 우리의 독립선언은 정의와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번성하며 살아가려는 민족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로은 정신을 드날릴 것이요.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멋대로 하지 말라.
하나,
마지막 한 사람까지,마지막 한 순간까지,민족의 정당한 뜻을 마음껏 드러내라.
하나,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을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년 삼월 초하루(1919년 3월 1일)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흥식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출처:www.together 100 go.kr
(대통령직속 3ㆍ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삼일독립선언서를 개벽으로 다시 읽다.
평화사상의 원천은?(두고 두고 생각해봐야 화두이다.)
"3.1 만세에 민족의 자주와 거룩한 민족의 존재를 천명하는 속에서도 비협력과 비폭력이라고 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었어요.그것이 바로 동학의 정신이예요."라고 무위당 장일순은 말한다.
1920년「개벽」창간
개벽사상의 키워드ㅡ전환,도덕,개척
선천과 후천,수운의 다시 개벽,해월의 인심(도덕)개벽,활인도덕,활물도덕(경물),기화,생명평화,생태평화(후천도덕),미래를 여는 개척,....
묵은 하늘에서 새하늘로
삼일운동의 도덕주의
도덕의 시대의 신문명의 도래
해월의 개벽사상
동학의 새윤리
개벽불교의 개척사상
삼일운동의 개척정신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네 많아.. 난제로다~)

* 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늘의 자손이다 하면서도 민족 종교가 없었을까?
(모 학자는 유학의 영향과 무속화된 부분을 언급하는데 생각해 볼 문제이다. 민족 종교가 세계 종교가 되는데는 개인구원 부분과 사회구원 부분이 같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동학은 개인구원 부분으로는 시천주 천주를 모심으로 군자의 자격을 갖고 보국안민으로 사회를 구원하는 부분으로 나간다 한다.)
* 동학의 흐름을 본다. 동학 이전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온 사상 철학.이어진다는 느낌은 이런 느낌들인가?(!) (말 못혀.............)
*동학농민혁명 대상 11회 수상자로 박맹수 원광대 총장이 선정되었다.(원불교 교무ㅡ성직자/눈총을 받았을 법한^^ㅡ이기도 한 박총장은 1995년 7월 일본 훗카이도 대학 한 창고에서 '한국 동학당 수괴'라는 글씨가 적힌 유골을 발견해 학계 안팎으로 보고하고 96년에 유해봉환위원회를 통해 유골을 국내로 송환하게 된다.한ㆍ일 동학기행단 한국대표를 맡아 16년간 동학 민간사절의 임무를 수행한 공로를 인정했다 한다. )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2010년부터 조례가 제정되어 수상자들을 선정해서 상금과 상패를 주었다는데 개인과 단체가 궁금하여 검색했는데 제8회 수상자만 모르겠다. 궁금 궁금??)
*나철의 대종교는 결이 다를까?라는 질문과 동학이 천도교로 넘어가면서 종교적 외피를 입는 부분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대답은 있었지만 생각해 볼 문제이다. 흠 숙제가 또 늘어난다~ 아흐..)
*다른 이야기이지만 같은 이야기
최근 교육기본법에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빼자는 이야기를 해서 혼구멍이 난 사람들이 있다.(말 그대로 혼이 나갔다.자신의 뿌리가 어디에서 났는지를 모르는 어리석은.그들에게 사상과 철학이 있는지.공부가 필요한 사람들.같이 공부합시다!)
(나도 공부가 많이 부족한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한 마디 하고 싶어 떠든다.)
홍익인간 이화세계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청수 한 그릇 앞에 두고
천 3배
지 3배
인 3배
108배까지 계속 정진
崔明淑, 이병철 and 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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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용철
    그리하여 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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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崔明淑
    할머니가 동학이셨다고 하더군요. 모임에 쌀을 이고 다니셨다고..위의 세를 확장, 성미라는 글을 보고 생각났어요. 왜 동학 수뇌의 유골이 홋카이도대 창고에 있었을까 미스테리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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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자
      崔明淑 찾아보니 1906년 한 일본인에 의해서 불법 반출이 됐나 봅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처형된 무명의 동학군 지도자의 머리뼈인데 1995년 홋카이도 대학에서 방치되어 있던 것이고 "메이지 39년 진도에서 효수된 동학군 지도자의 해골,시찰 중 수집 "이란 문구가 적힌 상자가 발견돼서 유골 반환 후 진도군에서는 유골을 가져오기 위해 소를 제기했는데 법원은 전주시에 손을 들어주었네요. 신원확인이 안되어 전주역사박물관에 23년동안 있다가 나중 1999년 6월에 전주녹두관에 안장되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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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崔明淑
      이인자 와...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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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자
      崔明淑 동학교도이신 할머니가 있으셨다니 제 주변에선 처음이라 존경스럽네요.ㅎ
      아직 할머니가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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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 崔明淑
      이인자 서산에 사셨는데 저희 어머님 연세가 87이니 1890년대 생일 것으로 추정되네요. 성미모으던 이야기에 쌀을 이고 모임에 가셨다고 하는 말에 연상이 되었어요 엄마 말로는 똑똑하고 난사람이었다고 표현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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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 h

알라딘: 사람이 하늘이다 1

알라딘: 사람이 하늘이다 1


사람이 하늘이다 1 | 가해 강론집 1
강영구 (지은이)불휘미디어2020-01-25





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종교 > 가톨릭 > 가톨릭신앙생활
마산교구 소속으로 1975년도 사제 서품을 받고 교구 내 8개 본당에서 사목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여 지리산 청학동 인근 원묵계 앙산재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강영구 신부의 『사람이 하늘이다』 제1권. 저자는 사목 현장을 떠나 백수 사제 생활을 하는 자신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는 교회에 작은 보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해 강론집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목차


머리글 _ 5

◈ 대림 시기 - 오시는 예수님
대림 제1주일 어두운 시대를 잘 살아가는 길_ 12
대림 제2주일 회개 - 자신을 태우는 삶 _ 20
대림 제3주일 기쁨을 꽃피워라 _ 28
대림 제4주일 믿음의 큰 그릇, 요셉 _ 35

◈ 성탄 시기 - 태어나신 예수님
예수성탄 대축일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_ 44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 _ 52
청정심(淸淨心)으로 맞아야 할 성탄 _ 61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_ 69
평화의 날 꿀벌 같은 삶_ 76
주님 공현 대축일 현자(賢者)들의 가르침 _ 83
성가정 축일 가정의 바탕, 믿음과 사랑 _ 91

◈ 사순 시기 - 죽으시는 예수님
재의 수요일 대면하는 계절_ 100
사순 제 1주일 유혹의 계절_ 105
사순 제 2주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들_ 111
사순 제 3주일 생명(生命)의 물 예수_ 117
사순 제 4주일 실로암 예수_ 123
사순 제 5주일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_ 129
수난 성지주일 예수의 길 _ 135
주님만찬 저녁미사 너희가 사랑을 아느냐? _ 141
성금요일 십자가의 신비 _ 147

◈ 부활 시기 -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 부활 대축일 나자렛 사람 예수의 부활: 새로운 생명 _ 154
부활 제 2주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_ 160
부활 제 3주일 도반(道伴) 예수 _ 166
부활 제 4주일 거룩한 부르심(성소) _ 172
부활 제 5주일 마음의 뿌리 _ 178
부활 제 6주일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 _ 184
주님 승천 대축일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하늘이다 _ 190
성령강림 대축일 성령의 시대 _ 196
삼위일체 대축일 대자대비(大慈大悲) 하신 하느님 _ 202
성체성혈 대축일 예수를 먹는 사람들 _ 207
출판사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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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강영구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75년 천주교 마산교구 소속 사제로 서품을 받고 교구 내 8개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펼쳤다. 로마 라테란 대학에서 사목신학을 공부하고 마산교구 초대 교육국장, 가톨릭 사회교육회관 관장, 가르멜의 오후 수녀원 담당, 부산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를 거쳐 마산교구 통대리를 역임했다. 지금은 사목 일선에서 은퇴하여 지리삭 청학동 인근 원묵계 앙산재仰山齋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작 : <사람이 하늘이다 2>,<사람이 하늘이다 1>,<한 권으로 읽는 이야기 창세기> … 총 3종 (모두

2021/05/06

‘베트남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었나

 https://brunch.co.kr/@bearnut/21



흔히 말하는 ‘베트남 전쟁’이란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사이에 벌어진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의미한다.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분단된 남북 베트남 사이의 내전임과 동시에 냉전 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전이었다. 응오딘지엠이 쿠데타로 통치하고 있던 남베트남 정권은 부정부패와 실정, 불교도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과 학살으로 이미 지지를 잃고 있었다. 남베트남에서는 불안정한 정권을 잡으려는 군부의 쿠데타와 민중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다. 호치민이 지도하는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안에 민족해방전선을 꾸려 유격대(베트콩)를 조직하고 남베트남 민중들과 함께 통일과 해방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남베트남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게릴라 사이의 내전은 본질적으로 정치 권력 투쟁으로 군사 교전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이해하지도 않았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분단된 베트남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커져가는 걸 경계했고, 이에 자국의 국민들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목표는 남베트남의 촌락 3분의 2를 사실상 통치하고 있는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 즉 베트콩을 제거해 남베트남 정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1964년 8월 2일, 영해를 침범한 미국 구축함과 교전한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한다.




베트남 전쟁의 시작이었던 통킹만 사건은 2003년부터 8년 동안 진행된 이라크 전쟁의 ‘대량살상무기’처럼 불분명한 전쟁명분이었다. ‘악의 축’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 무장 해제하자던 이라크 전쟁이 실제로는 석유와 중동 지배권을 위한 전쟁이었던 것처럼,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냉전 체제의 일부에 불과했다. 1971년 뉴욕타임스가 미 국방부 관련 보고서(펜타곤 페이퍼스)를 입수하여 공개하면서 윤곽을 드러냈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펜타곤 페이퍼스'를 인용해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고 폭로하여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 전쟁을 일컬어 ‘더러운 전쟁(Dirty War)’라고 말했다. 미국은 도미노 이론에 따라 베트남의 공산화가 아시아 국가들의 공산화를 촉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른바 “자유세계의 수호”는 미국이 베트남 사태에 개입하는 유일한 명분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선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분단된 남베트남에서 이뤄졌고,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전과 북베트남 정규군인 베트남인민군의 정규전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1964년 8월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개입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1965년 미국, 대한민국 등이 지상군을 파병하였다. 이후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그 해 3월 말까지 미군이 전부 철수하였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북베트남이 무력 통일을 이뤄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제공권을 장악한 압도적 군사력의 미군이 폭격과 공습, 포격, 수색 섬멸 작전 과정에서 네이팜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투하하고 고엽제 등 화학 무기를 사용하여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희생시킨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기본 전술은 ‘탐색과 격멸(search & destroy)'이었다. 2차 대전에서 미군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이 전술을 활용했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이를 똑같이 적용하였다. 하지만 게릴라전을 앞세운 베트콩의 전술에 밀려 미군은 전혀 승기를 잡지 못했다. 이에 미군은 한국, 일본,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조약기구 국가들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설날인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은 ‘구정 대공세’를 일으킨다. 명절에 공세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과 전격전이 일어나면 남베트남 민중들과 군인들이 호응할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초반에는 베트콩이 미군과 남베트남의 주요 시설을 빠른 시간 내에 점령했지만, 곧장 미군과 남베트남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내 존속했던 베트콩이 궤멸 직전에 이른다. 하지만 미국 내 반전운동이 일어나는 등 국제 여론이 반전 여론으로 쏠리면서, 북베트남에게 전술적 승리 대신 전략적 승리를 가져왔다. 이 때문에 구정 대공세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승리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새롭게 미국 대통령이 된 닉슨은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여 남베트남 군이 스스로 영토를 방어하도록 만드는 ‘베트남화’ 정책을 펼친다. 닉슨은 여론을 반영하여 지속적인 철군을 약속하고, 소련 및 중국과 핵무기 감축을 약속하는 데당트를 하고 정전 협상을 준비하면서도,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군사 개입을 계속했고 1972년 12월에는 10일 동안 히로시마 원폭의 5배에 해당하는 12만 톤의 폭탄을 북베트남 하노이와 하이퐁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했다. 1973년 1월 15일 닉슨은 북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다고 발표하고, 1월 27일 “종전과 베트남의 평화 복원을 위한” 파리 강화 협정에 조인한다. 이후 1975년에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함락하면서 베트남은 통일된다.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62만에서 200만, 그 중 베트남인은 96만에서 381만, 해외군 사망은 6만 5천으로 캄보디아·라오스에 이어진 내전 사망자까지 합치면 총 전사자가 129만에서 421만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 중 대부분은 연합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발생하여 347명에서 504명을 미군이 학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라이 학살, 1968년 2월 22일 한국의 청룡 부대가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에 위치한 하미 마을에 비무장 민간인 135명을 학살하고 가매장한 하미 학살,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마찬가지로 청룡 부대에 의해 430명의 마을 주민이 학살된 빈호아 학살,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 디엔반 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청룡부대에 의해 70여 명이 학살당한 퐁니·퐁늣 학살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군 파병’은 모두가 바라던 일이었나



한국은 1964년 9월 22일에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 파견을 시작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육군 수도사단 맹호 부대, 육군 제9사단 백마 부대 등의 전투 부대와 비전투 부대를 파병하여 1973년 3월 23일 철수할 때까지 연인원 32만여 명이 참전해 평균 약 5만 명이 상시 주둔했다. 이는 연합군 내에서 미국(53만) 다음으로 많은 수의 파병이며, 3위인 타이는 1만 명을 파병했다. 한국군은 5천 명의 전사자와 1만 명의 부상자를 냈다. 미국의 전사자는 5만 명, 부상자가 30만 명, 타이는 350명, 1300명이었던 걸로 치면 많은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흔히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고 알려져 있지만 박정희 정권은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미국이 원한다면 파병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왔었다. 당시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자극할 것으로 예상해 이를 거절했으나, 월남전 상황이 악화되자 1964년 파병 요청을 하게 된다. 1965년 2월에 케네디를 승계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은 박정희를 미국으로 초청해 성대한 퍼레이드까지 해주었다.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 역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 파병의사를 밝힌 바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정한 군부독재의 정당성을 미국으로부터 승인받을 필요가 있었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 병력을 얻기 위해 이를 승인했다.




베트남 전쟁 특수는 박정희 정권의 치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965년에서 1972년까지 한국은 베트남전쟁으로 약 10억 3,6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분명 베트남 전쟁을 통해 벌어들인 돈이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었던 점도 일면 맞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많다. 가장 기본적으로 전쟁과 학살을 통한 국가적 이익의 획득에 대한 반대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은 국내에서는 자국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희생으로, 국외에서는 베트남 국민들의 죽음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크게 발달한 산업 중 하나가 군수 산업인 것 역시 이를 입증한다. 민주화를 억압하고 권력을 잡은 군부라는 부정한 정권의 문제 역시 연루되어 있다. 미군이 철수하는 1968년 이후 상황에서도 박정희는 정일권 국무총리를 닉슨에게 보내 “북베트남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쟁 지속의 의지를 보였다. 베트남 파병이 안보와 직결된다는 주장도 엉터리였다. 북한은 북베트남을 지원하고자 대남 도발을 강화했다.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원이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실패했고,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하려다 나포되었다. 비무장 지대의 소규모 교전은 1965-1966년 한 해 30-40건에서 1967-1968년에 400-500건으로 증가했다.




베트남 전쟁의 경제적 이익으로 돌아와보자. 10억 3,600만 달러 중 장병 송금이 19.6%, 파월 기술자들의 송금이 16%로 전체 1/3 이상이 ‘목숨을 걸고’ 벌어온 돈이었다. 전쟁 특수의 이익은 공평하지 않았다. 당시 참전군인이나 기술자들의 수당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적은 편이었고, 오히려 특정 기업에 이익이 집중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땅콩 회항으로 유명한 ‘한진 그룹’과 ‘현대 건설’이다. 한진은 1억 646만 달러라는 막대한 사업 실적을 얻었고 이는 한국의 베트남 특수 전체의 10%에 해당한다. 현대처럼 베트남에 진출한 건설회사들은 항만·도로·기지 건설을 통해 66년부터 3년 동안 거의 5천 만 달러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이 실적의 대부분은 임금 갈취에 의한 것으로, 당시 기술자들은 주당 70시간 이상의 살인적 노동을 하면서 초과근무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에 분개한 노동자들이 한진 빌딩에 점거하고 불을 지른 유명한 사건이 바로 ‘칼 빌딩 방화 사건’이다.




베트남 특수의 또 다른 부정적 결과는 부동산 투기였다. 베트남에서 번 외화를 주체 못하는 기업과 부동산 개발로 정치자금을 만들려는 박정희 정권은 투기를 조장했다. 1960년대 말까지 논밭이었던 서울 강남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개발되어, 압구정동 땅값은 63년에서 70년 사이 25배로, 신사동은 50배로 올라왔다. 벌어온 외화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몸집만 불린 기업들은 69년 이후에 부실기업 판정을 받고 우르르 도산 위기에 처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1972년 ‘8·3조치’를 통해 사체 이자를 원래 계약보다 낮춰서 채권자의 재산을 빼앗아 기업에 돈을 주는 특혜까지 주었다. 이들은 나중에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분명 베트남 특수는 존재했다. 미국 시장의 개방과 군수 생산 시설을 통한 중공업화는 1960년대 경제 성장과 1970년대 중공업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일하고 죽어간 이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일은 없었다. 32만 명의 한국군은 독립국가를 염원했던 베트남인들을 죽이고 땅과 마을 파괴했다. 그들만큼 가난했던 한국인들은 베트남에 가서 ‘돈 벌고 살기 위해’ 살인을 하고 전쟁 기계가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파병을 추진하던 초기에 경제적인 이유는 부차적이었으나, 파병의 정당성 확보가 쉽지 않자 점점 더 경제적 이유를 부각했다. 초기에 강조하던 명분은 도미노 이론의 한국판인 ‘제2전선론’으로 제2의 한국전쟁에 대한 공포 심리와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거나, 한국전쟁 때의 은인인 미국에 은혜를 갚자는 ‘보은론’, 한국군 파병을 하지 않는다면 주한 미군이 베트남으로 파병된다는 ‘주한미군 철수론’이었다. (물론 미국은 ‘주한 미군 병력 유지’라는 약속을 어겼고, 1971년에는 미군 2만 명 철수를 완료해버렸다.) 박정희 정권이 정권 초기에 미국 몰래 화폐 개혁을 하는 등 경제적 자주 노선을 추구한 것 등으로 미루어볼 때 파병에는 박정희 군사 정권의 강한 질서에서 크게 한몫잡고 싶었던 소제국주의 야망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밖으로는 긴장을 유지하면서 1968년 예비군을 창설하고 주민등록제도를 추진해 국민 통제를 강화했다. 국민교육헌장 암송을 교육 과정에 의무화시킨 때도 이때였다.




파병이 결정되자 당시 한국군의 가장 큰 걱정은 탈영이었다. 하루 60여 명의 도망병이 나오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까지 파월 기피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게 각급 소대장의 주된 임무였다. 장교들은 진급을 위해 전투 경험을 쌓는 것이 유리했으나, 사병들은 굳이 목숨을 걸고 싶을 리 없었다. 그래서 파병은 기본적으로 강제 차출 방식이었고, 자기 부대가 파병된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차피 죽을 거 차라리 감옥에 가자는 것이 당시 사병들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형식적으로 파병이 자원의 형식을 갖추기도 했지만, 2004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의 조사에 따르면 65%라는 지원자 중 60% 이상은 실제로 지원하지 않았는데 지원한 경우거나 상관의 강압에 의해 자원서를 썼다고 말했다. 사병들이 베트남 파병을 수동적으로나마 받아들였다면 그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베트남은 이념 때문에 가는 곳도 아니고 국익을 위해 가는 곳은 더더욱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이 미국과 체결한 1966년 ‘브라운 각서’를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포터는 “한국 정부는 베트남의 5만 한국군을 ‘알라딘의 램프’로 생각하고 있다”고 미 국무부에 전문을 보냈다. 미국은 ‘싼 값’으로 한국군의 생명을 사서 베트남 전쟁에 썼고, 박정희는 그 생명을 담보로 미국으로부터 원하는 것들을 얻어냈다.



한국은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고 있는가



한국군이 주로 주둔한 곳은 중부 4개 성(꽝남, 꽝응아이, 빈딘, 푸옌)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가장 컸던 것 역시 이곳들이다.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 전사자의 10배에 가까운 4만 여명의 베트남인을 사살했다. 이미 한국전쟁 때 국내 빨치산 소탕으로 게릴라전 대응에 능했던 한국군은 미국과 달리 ‘소탕과 확보(clear & hold)’ 전술을 택했다. 소규모 병력으로 촌락에 들어가 숨은 베트콩을 죽이고, 주민들을 회유하는 방식으로 효과를 본 것이다. 한국군의 전적이 ‘1:10 살상률’로 그 ‘용맹’을 자랑했던 것도, 또 그만큼 한국군 사상자가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더불어 악명높은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을 한국군이 일으킨 것도 어쩌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외교부장이 발표한 한국군의 공식적인 민간인 학살 건수는 약 3천 건에 이르며, 꽝남 성 30건에 4천 여 명, 꽝응아이 성 18건에 1,700여 명, 빈딘 성 8건에 1,581명, 푸옌 성 22건에 1,729명으로 희생당한 민간인 수만 9천 여 명 가까이 된다고 한다.




한국군은 대체로 미군이 폭격한 마을에 직접 들어가는 보병이었고, “보이는 것은 모두 베트콩”이라는 전술 지침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당시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이 내린 지침은 소탕과 확보 전술에 기초하여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베트남 전쟁은 한국 자신의 전쟁이 아니었고, 본질적으로 정치적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일본군의 난징 학살처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집단 살상은 아니었고 대민 사업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군의 명령으로 민간인 집단 살상이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러나 권력으로 통제되지 않은 집단적인 증오와 광기를 그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병사들에 의한 민간인 살상을 방조하거나 조장한 정황은 이미 너무나 많다. 한국군의 게릴라 전술은 민간인 보호를 위한 구체적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베트콩과 민간인이 섞여있는 상황에서 한국군의 전술은 고문과 강간, 무차별적 살상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실제 한국군은 전술지침이란 것은 사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긋이 파괴한다”, “놓치는 것보다 오인사살이 낫다”, “어린이도 첩자다”, “땅굴이 있는 집은 모두 베트콩이다” 등이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죽어간 이들은 대부분 베트콩이 아니라 여성, 어린이, 노인이었다.




한국군은 마을을 수색하다 베트콩에게 저격당하거나 부비트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면, 인근 마을로 들어가 ‘싹쓸이’를 해버렸다. “한국군은 총소리만 들어도 다음날 마을에 들어와서 사람을 죽인다”는 베트남 생존자의 증언처럼 한국군은 수색과 보복, 민간인과 베트콩의 경계는 이미 구분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베트콩을 자유국가의 적으로 취급해왔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은 중대장급이 1935년 전후에 그리고 일반 병사는 해방 전후에 출생했다. 그들은 자라면서 자신이 겪은 모든 불행이 ‘빨갱이’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교육받았다. 그러나 파병 전에 사상 교육을 받고 전투 현장에 투입되었다고 하여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증언에 의하면 병사들도 처음부터 살인을 쉽게 했던 건 아니었다. 강요된 살인과 동료에 대한 보복심리, 전쟁의 긴장과 공포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죄책감조차 무너뜨렸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한국군은 무자비한 학살을 조직적으로 수행하도록 했고, 상부에서는 이를 묵인했다. 한국군은 대체로 통역관을 수행하지 않아 베트남 민간인과의 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고, 낯선 환경에서의 긴장과 공포 속에서 참전 병사들 역시 무차별적 살육을 감행했다. 학살 사건은 대부분 대규모였고 학살 당시 전후로 총소리나 지뢰 폭발이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단순한 실수나 부대원 개인의 일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수색 소탕 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 폭격한 후 현장에 투입되어 남은 주민들을 즉결 처분하고 집을 불태운 뒤 불도저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처리되었다고 한다. 강간을 한 여성은 죽여서 입을 막았다. 생존자가 적을수록 전쟁범죄를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 드러난 학살들은 미군의 증거를 남겼거나, 베트남 생존자의 증언, 참전군인의 증언을 통해 알려졌다. 더 많은 학살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제대로 여전히 사죄하지 않고 있다. 분명 몇 번의 시도는 있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과를 하기도 하였다. 2001년 8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도 일본이 한국에 사과하는 수준의 사과는 했다. 한국은 주로 한국국제협력단 등을 통해 무상 원조 등을 통해 베트남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과 부녀강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와 배상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베트남 정부 역시 민간에서 세운 베트남 피에타상을 보고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일 정도다. 1999년 <한겨레21>의 보도를 통해 베트남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한국의 대응은 미적지근했다. 한편 전쟁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대한민국 기업인들과 군인들이 현지에서 베트남 여성들과의 사이에 낳은 2세들인 라이따이한 문제나 한국인 참전군인들의 고엽제 후유증 문제는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다뤄지고 있다. 거의 모든 교과서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문제는 다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인의 고엽제 후유증 문제, 라이따이한 문제 등은 한 줄이라도 다뤄지지만 한국군이 무참하게 학살한 베트남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적어놓은 교과서는 없다.




1999년 이래 <한겨레21>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현지 취재를 하고, 당시 베트남 통신원이었던 구수정 박사가 관련자의 증언을 기사화하면서 한국 사회에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문제가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호찌민대 역사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1999년, 구수정 박사는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국내에 전하면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 후 1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베트남에 머물면서 전쟁의 피해자를 도우며 한국과 베트남의 민간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2011년에는 지인들과 함께 한국 베트남 간의 공정무역과 공정여행을 위한 기업 ‘아맙’(AMAP)을 설립했고, 최근에는 한국과 베트남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한국-베트남 평화재단’을 설립하였다. ‘한-베 평화재단’은 최근 한국의 군사주의 정책에 반발, 제주해군기지 반대로 투쟁해온 강정마을에 ‘베트남 피에타상’을 세웠다. 올해 4월에 설립된 한-베평화재단은 평화기행, 평화교육, 장학사업, 베트남 피에타 건립 운동 등을 진행하면서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의 해결과 평화운동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고 있다. 청년들의 흐름도 있었다. 1999년 이후 <나와우리>라는 단체가 구성되어 피해마을에 들어가서 한국과 베트남의 젊은이들이 평화를 위한 행동을 진행했다. 2002년 <나와우리>는 아시아의 평화라는 주제로 자원 활동가들로 구성된 한-베 평화캠프를 위한 사전 준비 캠프를 진행하였으며, 응웬 티 니 할머니(한국군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하고 할머니는 턱이 날아가는 부상을 당함)의 집을 짓는 활동을 시작으로 2002년 1차 한-베 평화캠프를 진행했고, 2010년까지 피해마을에 들어가 위령비로 가는 길 만들기, 병실, 유치원, 학교 짓기 등을 진행하였다.



우리는 한국의 민간인 학살과 ‘광주민중항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전쟁은 정의로울 수 있을까, 전쟁살인은 용납될 수 있을까. 평화는 전쟁을 통해 가능할까. 한국전쟁을 전후해 우리나라의 군인과 경찰 그리고 우익 단체에 의해서 학살된 민간인은 100만 명이나 된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죽인다는 것 자체도 문제시되어야 하지만, 사실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는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희생자는 이념과 무관하게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었다. 국내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크게 한국전쟁 전면전 이전에 발생한 대구 10월 항쟁, 제주 4·3 항쟁, 여수·순천 사건, 1949년 문경 민간인 학살, 1950년 거제도 민간인 학살 등이 있고, 전면전 중에는 거창, 함양, 구례 등 빨치산 소탕을 빌미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20만 명의 민간인을 적에게 동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죽인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 있고, 9만 명을 굶어죽인 국민방위군 사건이 있다. 한국전쟁 후에는 4·19혁명 당시의 학살과 5·18 광주 민간인 학살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었던 대통령 이승만은 반공주의 외에 어떤 정치적 신조나 이념도 갖고 있지 않았고, 학살을 지휘한 이들이나 서북청년단은 모두 개인의 방어와 권력 강화를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빨갱이’에 대한 살육은 도덕적 책임과 무관하다는 입장에서 그들은 국가주의와 반공 이데올로기로 살육과 집권을 정당화해왔다. ‘빨갱이’에 대한 시선은 ‘종북’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고,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싸웠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이미 재평가받았음에도 교과서에서조차 역사적 현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진 베트남과 광주의 학살에서도 마치 민간인 학살은 있지 않은 사실처럼 조작되어 있다. 이들에게서 이어진 권력들은 여전히 이 사회의 기득권층에 있고 이러한 기억을 되살릴 사실 확인과 유해 발굴 등을 철저하게 금지해왔다.




광주민중항쟁의 주범인 전두환은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등 신군부의 핵심 인사들이 이때 베트남 전쟁에서 경력을 쌓은 직업군인이다. 전두환은 이 전쟁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여 세운 무훈으로 군대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갔으며 이를 바탕으로 군사정변을 일으켜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민간인 학살’이란 교전 중이 아닌 상황에서 비무장한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을 말한다. 베트남과 한국의 민간인 학살은 비슷한 점이 많다. 무차별적이고 통제된 상황에서의 학살, 반공 이데올로기와 죄의식의 상실, 권력 안정을 위한 민간인 학살이나 교전 경험의 연속성 등이 그렇다. 한국 사회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지도, 군대 내에서 책임을 져야 할 이들에게 제대로 책임을 묻지도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베트남으로 간 한국군은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어떤 입장이나 제대로 된 지침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 때 전쟁을 겪은 전두환 일당은 훗날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한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과의 교전경험은 베트남 전쟁의 대규모 학살로, 베트남 전쟁의 군사작전 경험은 광주에서의 학살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를 외면한 대가를 한국은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한국이라는 나라, 보다 정확히는 국가권력을 차지해왔던 모든 정권들은 우리 역사가 저질러온 부끄러운 한 장면인 ‘민간인 학살’을 제대로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경험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한국 전쟁 전후로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다. 전쟁이라는 것, 평화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성찰해보지 못한 우리는 역사 어느 지점에서 끊임없이 또 다른 희생을 반복하고 있을지 모른다. 가깝게는 진보라고 여겨졌던 노무현 정권의 이라크 파병 결정이 그랬다. 한국은 미국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에 명분 없는 동조를 해온 몇 안 되는 국가다. 성주 소성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드 배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세계체제 계획에 한국이 뛰어들면서 동아시아 정세와 북한과의 관계는 경직되고 있고 국민들은 전쟁 위험을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대립을 이용해 국민을 분열하고 판별했던 ‘빨갱이’가 효과가 없어지자 이는 곧 ‘성소수자’에 대한 공격으로 변했다. 보수 기독교와 정치인들의 연합은 또 다른 2등 시민을 발견하고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을 지정하고, ‘국민 밖의 국민’을 차별하고 배제하며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격하시키는 정치는 우리가 평화를 어떻게 바라봐야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왜 누군가는 끊임없이 광주의 역사를 지우려고 하고 조작하려고 하는가. 왜 여전히 ‘광주’는 빨갱이들의 짓이었고 부당한 저항이었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역사를 기억하고 올바르게 바로잡아가는 일이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기 때문이고, 그 일을 배우고 퍼뜨리는 일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인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서로를 바라보게 만드는 일이라면 그것을 거부하는 일은 어떤 외피를 쓰든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권력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교묘하게 이용할 때 그 이익이 실체없는 국가와 민족에게 돌아오느냐가 아니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억압받고 희생당하는 인간들에게 돌아오느냐를 묻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틀을 깨고 나갈 수 없다. 연합군의 전쟁 개입에 맞선 ‘베트콩’의 저항은 빨갱이들의 짓이었고 부당한 저항이었나. 정말 머뭇거리지 않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는 이상 우리는 똑같은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전쟁 파병이 옳다고 말할 때, 사드 배치가 옳다고 말할 때, 어쨌든 군대는 가야한다고 말할 때, 군대 내 성소수자는 어쩔 수 없이 억압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의 평화는 또 다시 무너질 것이다.




한국 국민 대부분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대해 명백히 일본의 책임을 이야기하고, 피해자들을 지지하고 나선다. 오랜 기간 베트남 사죄운동을 해온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베트남 문제에 대한 해결 없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도 불완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달랐다는 환상을 이제 버려야한다. 우리 스스로 이러한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태도는 또 다른 민족주의, 또 다른 국가주의의 발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국가나 정권, 정치적 이익이나 경제적 이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위치에서 평화를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고 이 문제 앞에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촛불 대선을 통해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에 빠져있는 이때, 우리는 이 문제들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고 있는가. 평화는 도래했는가, 아니면 우리는 평화를 향해 또 다른 한 발을 내딛어야 하는가. 베트남 전쟁의 반성을 통해, 80년 광주의 저항을 통해 우리는 한 발을 내딛기 위한 용기를 내어야 한다.



* 이 글은 1999년 <한겨레21>에 연재된 구수정 통신원의 기사, 이규봉 작가의 <미안해요 베트남>, 오준호 작가의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 현대사>의 ‘베트남 전쟁’ 부분과 기타 민간인 학살 등에 관련한 논문을 참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 개신교회의 태도

종교학 벌레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 개신교회의 태도

http://bhang813.egloos.com/1876620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베트남 전쟁 파병 때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하였는가? 다음 인용문들은 한국기독교역사학회 2004년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류대영 교수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 개신교의 태도”에서 뽑은 것이다.




(처음 참전한 부대의 부대장이 공교롭게도 개신교 신자였다) 이소동 백마부대장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NCC 전도부장 김활란은 “인간의 자유”를 지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위장 없는 영구한 평화를 아시아에 심고자” 몸 바치고 나선 그들을 “자유의 십자군”이라고 부르며 신의 가호를 기원했다... 김활란은 백마부대 장병들이 “우리가 곤고할 때” 위로하고 도와준 “우방들의 태산 같은 신세”를 갚기 위해 “어려운 처지의 이웃나라를 돕고자” 나섰다고 칭송하였다.

한국대학생선교회 대표 김준곤도 전쟁 그 자체는 악한 것이지만, 공산주의자들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므로 베트남 전쟁을 “공산 노예화로부터의 해방, 인류의 노예화 방지”를 위한 것, 즉 더 많은 희생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의미부여 했다.

지명관은 동남아 기독교협의회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비판하면서... 한국처럼 “공산주의에 의한 국토의 분할과 무서운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을 겪어본 사람들만 공산주의가 “극악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논리를 폈다.

유호준은 백마부대 장병들에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악을 누르시는 하나님”이 월남, 한국, 아시아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기 위해 그들을 베트남에 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6년 8월 20일자 [기독공보]: 무신론자의 군대, 적마의 마수를 분쇄하는데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을 한 군대이기에 그 이름은 더욱 빛날 것으로 자유세계의 국군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비둘기부대 군목이었던 박민수는 귀국 후 [기독교사상]에 기고한 글에서 베트남에 가서 “공산주의자들의 만행과 악랄한 수법”을 보면 “반공사상과 애국심”이 생기고 “민주적 사상”까지 자라게 되며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활동한다는 자신감도 갖게 되므로 “가능한 한 많은 군대가 더 갈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금의 상식에서 본다면, 베트남 전쟁은 자유를 지키는 숭고한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피를 흘린 전쟁(베트남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으로 많은 이들이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35년 전 한국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교회에서 전쟁을 지원하는 발언을 한 것 자체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눈여겨 볼 점은 한국 개신교회가 한 목소리로 전쟁을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위의 인용문에는 보수적인 개신교인의 목소리도 있지만 진보적 개신교인의 목소리 또한 있다. 그들의 주장은 매한가지이다. 베트남 전쟁 파병을 공산주의자를 무찌르는 성전으로 칭송한다.

당시 세계 개신교회들의 움직임들에 비교해 본다면 한국 교회의 태도는 확실히 예외적이다. 많은 나라의 교회협의회들이 전쟁에 반대되는 성명을 발표했다. 심지어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개신교회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존재했다. 근본주의적 성향을 지닌 교단에서는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이 확고했지만, 다른 교단에서는 찬반이 엇갈리고 특히 라인홀드 니버와 같은 기독교 지성인들은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한 사례들과 비교할 때 한국 교회는 예외적일 정도로 일치된 목소리로 전쟁에 찬성하였다. 당시 한국 개신교회는 반공주의의 틀을 벗어난 사유가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반공의 논리 안에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 숨겨져 있다. 공산주의 치하의 사람들이 악이 아니라 외세에 맞서 베트남의 독립을 지켜낸 세력이라는 사실이, 당시 한국 개신교인들에게는 승인 불가능했을 것이다.


류대영 교수는 당시 상황이 “기독교적 이성과 가치관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압도당한 것”이라고 잘 정리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독교적 이성과 가치관은 무엇인가? 그것이 이 땅에 있었던 적이 있단 말인가? 오늘날, 기독교적 이성과 가치관이 다시 시험받고 있는 시점, 한국 교회는 어떤 것을 갖추어 나가고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검색해보니 베트남 스님의 분신 장면 사진을 구할 수 있었다.


베트남 불교와 한국 개신교가 "종교의 이름으로" 생각한 것이 이처럼 달랐다.)


Nancy Fraser, Climates of Capital, NLR 127, January–February 2021

Nancy Fraser, Climates of Capital, NLR 127, January–February 2021

NANCY FRASER

CLIMATES OF CA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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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imate politics has moved to centre stage.footnote1 Even as pockets of denialism persist, political actors of multiple hues are turning green. A new generation of activist youth is insisting that we cease to evade the mortal threat posed by global warming. Chastising elders for stealing their future, these militants claim the right and responsibility to take all necessary steps to save the planet. At the same time, movements for degrowth are gaining strength. Convinced that consumerist lifestyles are driving us into the abyss, they seek a transformation of ways of living. Likewise, indigenous communities, North and South, have been winning wider support for struggles only lately recognized as ecological. Long engaged in defending their habitats and livelihoods from colonial invasion and corporate extractivism, they find new allies today among those seeking non-instrumental ways of relating to nature. Feminists, too, are infusing new urgency into long held ecological concerns. Positing psycho-historical links between gynophobia and contempt for the Earth, they mobilize for forms of life that sustain reproduction—both social and natural. Meanwhile, a new wave of anti-racist activism includes environmental injustice among its targets. Adopting an expansive view of what it means to ‘defund the police’, the Movement for Black Lives demands a massive redirection of resources to communities of colour, in part to clean up toxic deposits that ravage health.

Even social democrats, lately complicit with or demoralized by neoliberalism, are finding new life in climate politics. Reinventing themselves as proponents of a Green New Deal, they aim to recoup lost working-class support by linking the shift to renewable energy with high-paying union jobs. Not to be left out, strands of rightwing populism are also greening. Embracing eco-national-chauvinism, they propose to preserve ‘their own’ green spaces and natural resources by excluding (racialized) ‘others’. Forces in the Global South are also engaged on several fronts. While some claim a ‘right to development’, insisting that the burden of mitigation should fall on northern powers that have been spewing greenhouse gases for two hundred years, others advocate ‘commoning’ or a ‘solidary and social economy’; while still others, donning the environmentalist mantle, utilize neoliberal carbon-offset schemes to enclose lands, dispossess those who live from them and capture new forms of monopoly rent. Finally, corporate and financial interests have skin in the game. Profiting handsomely from booming speculation in eco-commodities, they are invested not just economically but also politically in ensuring the global climate regime remains market-centred and capital-friendly.

Eco-politics, in a word, has become ubiquitous. No longer the exclusive property of stand-alone environmental movements, climate change now appears as a pressing matter on which every political actor must take a stand. Incorporated into a slew of competing agendas, the issue is variously inflected according to the differing commitments with which it keeps company. The result, beneath a superficial consensus, is a roiling dissensus. On the one hand, growing numbers of people now view global warming as a threat to life as we know it on Planet Earth. On the other hand, they do not share a common view of the societal forces that drive that process—nor of the societal changes required to stop it. They agree (more or less) on the science but disagree (more than less) on the politics.footnote2

Yet the terms ‘agree’ and ‘disagree’ are too pallid to capture the situation. Present-day eco-politics unfolds within, and is marked by, an epochal crisis. A crisis of ecology, to be sure, but also one of economy, society, politics and public health—that is, a general crisis whose effects metastasize everywhere, shaking confidence in established worldviews and ruling elites. The result is a crisis of hegemony—and a ‘wilding’ of public space. No longer tamed by a ruling commonsense that forecloses out-of-the-box options, the political sphere is now the site of a frantic search not just for better policies, but for new political projects and ways of living. Gathering well before the Covid outbreak, but greatly intensified by it, this ‘unsettled atmosphere’ permeates eco-politics, which perforce unfolds within it. Climate dissensus is fraught, accordingly, not ‘only’ because the fate of the Earth hangs in the balance, nor ‘only’ because time is short, but also because the political climate, too, is wracked by turbulence.

In this situation, safeguarding the planet requires building a counter-hegemony. What is needed is to resolve the present cacophony of opinion into an eco-political commonsense that can orient a broadly shared project of transformation. Certainly, such a commonsense must cut through the mass of conflicting views and identify exactly what in society must be changed to stop global warming—effectively linking the authoritative findings of climate science to an equally authoritative account of the socio-historical drivers of climate change. To become counter-hegemonic, however, a new commonsense must transcend the ‘merely environmental’. Addressing the full extent of our general crisis, it must connect its ecological diagnosis to other vital concerns—including livelihood insecurity and denial of labour rights; public disinvestment from social reproduction and chronic undervaluation of carework; ethno-racial-imperial oppression and gender and sex domination; dispossession, expulsion and exclusion of migrants; militarization, political authoritarianism and police brutality. These concerns are intertwined with and exacerbated by climate change, to be sure. But the new commonsense must avoid reductive ‘ecologism’. Far from treating global warming as a trump card that overrides everything else, it must trace that threat to underlying societal dynamics that also drive other strands of the present crisis. Only by addressing all major facets of this crisis, ‘environmental’ and ‘non-environmental’, and by disclosing the connections among them, can we begin to build a counter-hegemonic bloc that backs a common project and possesses the political heft to pursue it effectively.

This is a tall order. But what brings it within the realm of the possible is a ‘happy coincidence’: all roads lead to one idea—namely, capitalism. Capitalism, in the sense I shall define below, represents the socio-historical driver of climate change, and the core institutionalized dynamic that must be dismantled in order to stop it. But capitalism, so defined, is also deeply implicated in seemingly non-ecological forms of social injustice—from class exploitation to racial-imperial oppression and gender and sexual domination. And capitalism figures centrally, too, in seemingly non-ecological societal impasses—in crises of care and social reproduction; of finance, supply chains, wages and work; of governance and de-democratization. Anti-capitalism, therefore, could—indeed, should—become the central organizing motif of a new commonsense. Disclosing the links among multiple strands of injustice and irrationality, it represents the key to developing a powerful counter-hegemonic project of eco-societal transformation.

That, at any rate, is the thesis I shall argue here. In what follows, I unfold it on three different levels, which complement and reinforce one another. Making the case, first, on the structural level, I contend that capitalism, rightly understood, harbours a deep-seated ecological contradiction, which inclines it non-accidentally to environmental crisis. But far from standing alone, I claim, this contradiction is entwined with several others, equally endemic to capitalism, and cannot be adequately addressed in abstraction from them. Shifting, next, to the historical register, I chart the specific forms that capitalism’s ecological contradiction has assumed in the various phases of the system’s development, up to and including the present. Contra single-issue ecologism, this history discloses the pervasive entanglement of eco-crisis and eco-struggle with other strands of crisis and struggle, from which they have never been fully separable in capitalist societies. Turning, finally, to the political level, I contend that eco-politics today must transcend the ‘merely environmental’ by becoming anti-systemic across the board. Foregrounding global warming’s entwinement with other pressing facets of our general crisis, I claim that green movements should turn trans-environmental, positioning themselves as participants in an emerging counter-hegemonic bloc, centred on anti-capitalism, which could, at least in principle, save the planet.

NEXT
Francis Mulhern
Caution, Metaphors At Work
BY THIS AUTHOR
‘Notes for a Feminist Manifesto’
‘A New Form of Capitalism?’
‘Contradictions of Capital and Care’
‘Behind Marx’s Hidden Abode’
‘A Triple Movement?’
‘On Justice’
‘Feminism, Capitalism and the Cunning of History’
‘Reframing Justice in a Globalizing World’
‘Rethinking Recognition’
‘Heterosexism, Misrecognition and Capitalism: A Response to Judith But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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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4

언더우드(H. G. Underwood)의기도문 ‐그사용사(使用史)와비판적성찰

V.53-1_07고훈.pdf

언더우드(H. G. Underwood)의기도문 ‐그사용사(使用史)와비판적성찰(1984-2019) ‐

조선의 아이 사랑이 선교사 부인이 구한 조선의 아이들 [ 양장 ] 로이스 H.스와인하트 저

조선의 아이 사랑이 - YES24

조선의 아이 사랑이 선교사 부인이 구한 조선의 아이들 [ 양장 ]
로이스 H.스와인하트 저 / 송창섭 역 | 살림출판사 | 2010년 10월 11일


출간일 2010년 10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186쪽 |

책소개
『조선의 아이 사랑이』의 저자 로이스 H.스와인하트는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와서 1911년부터 1937년 사이에 광주 지역을 배경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 이야기는 저자가 선교활동을 하던 당시에 '사랑이'라는 아이로 상징화되는 당대 조선의 신분이 비천한 여자아이가 어떤 고난을 거치며 성장해야 했는지, 또 선교사들이 이런 가운데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자 문학이다. 저자는 남편을 도우며 조선 여성들의 교육에 힘썼는데,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세 편의 선교 문학 작품 중 한권이 이번에 출간되는 『조선의 아이 사랑이』이다.

무당의 딸로 태어난 사랑이는 어머니가 무당이라는 이유로 또래 사이에 놀림과 기피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궁핍한 환경은 그녀의 어머니로 하여금 사랑이를 기생집에 팔기로 하는데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저자는 사랑이를 구출하기로 마음먹는다. 우여곡절 속에서 저자는 혼란스러운 조선 말기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하나 소중한 꽃들임을 알려주며 그들을 보살핀다. 이 기록을 통하여 과거 우리의 옛 모습을 외국인 선교사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어떠한 문제점이 있었는지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며, 우리의 할머니, 혹은 할머니의 어머니였을 그 많은 소녀들의 삶을 형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1. 옛날 나라 한국의 꽃 한송이
2. 올가미
3. 사랑이 구출
4. 김 씨
5. 막둥이
6. 산에서
7. 수도승의 집
8. “가장 작은 것 하나”

저자 소개
저자 : 로이스 H. 스와인하트 Lois Hawks Swinehart
남편인 마틴(Martin Luther Swinehart, 1874-1957, 한국명 '서로득'과 함께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로 1911~1937년 사이에 광주 지역을 무대로 선교와 봉사활동에 힘썼다. 남편 마틴은 교회 및 학교 건축과 교육 활동에 종사하고, 로이스는 간호학교를 비롯해 주로 여성과 아동의 복지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신사 참배 문제 등으로 일본 당국과 부딪쳐 강제로 귀국하였다. 1920년대에 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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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송창섭
경희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노던 일리노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셰익스피어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영어학부 교수로 있다. 주요논문으로는 「『햄릿』과 셰익스피어 비극의 정치성」, 「한국영문학 속의 비교문학, 비교문학 속의 한국영문학」 외 다수가 있다.


책 속으로
유서 깊은 나라 한국에서 여자 아이 사랑이가 용의 해에 태어났다. 애 아버지는 아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첫 애가 여자 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노발대발하며 집을 나가 먼 촌 구석으로 사라진 뒤 다시는 소식을 알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엄마는 남편한테 버림받은 뒤, 돈 많은 남자들의 변덕과 욕정에 얽매인 창부이자 무희가 되었다. 이들은 잔치나 명절 때 그녀를 집으로 불러 손님들의 흥을 돋우었다. 아름다웠던 자태가 시들면서 그녀는 귀신 불러내는 일을 시작했는데, 점도 치고 굿도 벌여 밑바닥 세계의 사람들한테서 먹고 살 돈을 뜯어냈다. 그들은 이를테면 그녀의 밥줄이었다. 그녀는 기만과 타락의 삶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었고, 결국 술, 아편 그리고 나쁜 무리의 친구들이 어미에게서 아이에 대한 정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 pp.10-11

“나리, 전 애를 좀 전에 만났답니다. 이 아이 엄마가 앨 유곽집 주인한테 팔았답니다. 저 애는 나한테 보호해달라고 사정을 했죠. 이렇게 난처한 때 조선의 법은 어떤지요”
“우리 유서 깊은 제국의 법이 여자에 대해서 할 말이 뭐가 있단 말이오” 지방관은 대답했다.
“성인이라면 여자로 인해 왈가왈부하지 않소.”
“하오나 이 애를 구할 아무런 방도가 없단 말씀인가요”
“먹고 입을 게 그득할 터인데 그런 곳에서 아이를 누가 일부러 데려가겠소이까”
이처럼 투박한 물질주의와 야만적 인생관에 서부인은 혐오스럽다는 반응을 몸으로 보이며 돌아섰다.
“허나 아이는 앞으로 노예보다 나을 게 없고 아이가 발 디딜 인생은 바로 지옥이죠.”--- p.23

외국 여자는 다시 목이네에게 아이를 보호할 책임을 맡기고 작은 방의 문을 닫은 뒤에 밤길을 나섰다. 신령나무의 그림자 속에서 그녀는 초가지붕을 머리에 얹은 나지막한 오두막을 되돌아보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오두막은 희미한 별빛 아래 잿빛을 띠고있었다.
“난 아이를 늑대로부터 살려냈다.” 그녀는 혼자 말했다. “하지만 내 아인 아냐. 아직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어. 아침에 잠을 깨면 엄마를 만지려고 따스하고 보드라운 손을 내밀겠지. 난 그 여자가 정말 싫어.”--- p.34

“마리안네 학교 아이들은 활기가 넘치는 게 분명해.” 부인이 말했다. “사랑인 기숙사에 넉 달 있었을 뿐인데 방림 학교 남학생들을 산수를 아는 것만큼 잘 알고 있더라니까.”
“맞아, 틀림없어.” 교장이 대답했다. “한국은 요즘 활기가 넘치는 게 분명해. 여기 엄마들은 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거야. ‘지금 시대는 우리 어릴 때와 다르다. 결혼하고서도 닷새가 지나기까지 난 네 아빠 이름도 몰랐다. 닷새 뒤에 집에 가서야 대문에 이름이 쓰여 있는 걸 처음 보았지.’ 시대가 바뀌어서 그 엄마의 마음이 몰래 좋아 흥얼거리는 걸 모르지는 않겠지? 자기 딸 스스로 결혼할 남자를 고를 수 있게 되어서이기도 하고, 딸이 시어머니한테 노예가 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야. 살아서 세상을 이렇게 더 좋은 쪽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게 기쁘지 않아? 나는 기뻐.” --- p.157

“난 아줌마가 날 찾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 사람은 죽었어. 점석이도 죽었어. 난 소나무와 등불이 달린 그 집을 찾아 헤맸지. 하지만 마을은 잊어버렸고 발은 아프고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 달이 좀 있으면 뜨겠지. 여기 남아서 얘기 좀 들려줘. 낙타를 타고 별을 쫓아갔나”
“막둥아, 그랬단다. 그 여행은 이제 끝나고 보고 싶던 걸 찾았단다. 김 씨가 지게에 널 지고 옮기기 위해 여기 올 때까지 이 벽에서 움직이지 마라. 넌 오늘 밤 병원에 가는 거야. 네가 나으면 얘기를 더 나누자꾸나. 네가 들을 첫 번째 이야기는 ‘가장 작은 것’을 오래 전에 얘기한 그분에 관한 거란다. 그분은 막둥아, ‘너’같은 사람을 두고 말씀하신 거란다.”
--- pp.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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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문학으로 형상화된
20세기 초 조선 아이들의 삶

희귀한 장르인 선교 문학의 한 사례

『조선의 아이, 사랑이』는 엄밀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서 부인’이라고 불리는 미국인 선교사가 자신이 체험한 것과 들은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킨 기독교 선교 문학의 한 가지 사례인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불리는 조선의 한 여자아이의 배경과 출생, 그리고 성장과 역경에 대한 이야기는 당대(1920년대)의 조선에서 신분이 비천한 여자아이가 어떤 고난을 감당해야 할 운명이었는지, 그리고 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전파시킨 새로운 감수성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어떤 역사적 기록보다 더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