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1

불교평론 욕망과 권력 그리고 성담론의 상관관계 / 김영란

불교평론







욕망과 권력 그리고 성담론의 상관관계 / 김영란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김영란 ranyharu@naver.com




들어가는 말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소장


미투(Me too, 나도 말한다) 바람이 드세다. 피해자들의 고발과 증언은 성차별과 성폭력이 ‘괴물’ 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성차별적인 권력구조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주었다. 혹자는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 운동을 두고 제2의 민주주의 운동이라고도 한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 동안에도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받아온 견고한 성차별 구조를 깨뜨리려는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는 성차별과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억압과 차별의 구조에 대한 변화가 더 이상 늦춰져선 안 된다는 외침이다. 지난 2016년의 촛불혁명을 통해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을 바꾼 후 일상에서의 적폐청산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성차별이라는 불균형적인 그러나 견고한 권력관계에서의 폭력들도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미 여성계에서는 ‘성평등이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슬로건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성평등을 주장해왔다.

미투는 수직적 위계 문화 속에서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폭력적 남성성에 대한 문제 제기다. 시대가 바뀌고 시민의식이 성장했음에도 여전히 가부장적 인식에 사로잡혀 여성을 동등한 시민이나 동료로 보지 않았던, 그래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여전히 여성은 성적 매력을 풍기며 남성의 요구에 순종적으로 응해야 한다고 여기며, 배제하고 비하하고 희롱하고 무시하고 때리고 성폭력을 행사했던 남성들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3.7%가 미투 이후 사회 변화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63.0%) 또는 ‘매우 긍정적’(20.7%)이라고 답했다. 미투 운동을 통해 ‘성적 농담이나 신체적 접촉을 조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라거나 ‘술자리나 식사 등 회식문화가 건전해지고 있다’ ‘성추행, 성희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거나 도움을 주는 분위기 형성됐다’라며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 미투로 인해 ‘사소한 언행까지 문제 제기해 조직 분위기가 경직되고 있다’라거나 ‘무고한 사람을 가해자로 지목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라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또한 성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이성과는 회식이나 모임을 하지 않는 펜스룰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 조사에서 눈여겨보게 하는 응답은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도 일부 책임이 있다’라는 의견이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도 있다, 피해자가 문제가 있다’라는 피해자 유발론은 ‘야한 옷차림은 문란하게 보이거나 남성을 유혹한 것이다’ ‘여성이 강력하게 저항하지 않은 것은 동의한 것이다’ 등 과거의 가부장적 성 관념들에 근거해 있다. 이러한 통념은 최근 미투 피해자에 대한 의심과 비난의 시선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이는 2차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젠더 기반 폭력(Gender Based Violence)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여성성과 남성성 즉 젠더에 바탕해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도 불리는 젠더폭력은 성폭력, 성적 착취, 강요된 성매매, 인신매매처럼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가해지는 폭력이나 가정폭력, 성기 절단, 명예범죄같이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지는 폭력 등을 포함한다. 젠더 기반 폭력은 여성을 차별하는 개인적 인식과 함께 사회 구조적인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 즉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사회적 신념과 불평등한 권력관계, 성차별적인 공식적, 비공식적 사회제도 등에 의해 일어난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침해가 일어날 때마다 성적 욕망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인데 무조건 폭력으로 몰고 간다거나, 욕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젠더 고정관념을 들어 반박한다. 이 글은 권력에 기반한 욕망이 어떻게 표출되는지 젠더 기반 폭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페니스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권력이 문제다

“복수하기 위해서 그랬죠. 그 여자한테 무시를 당했는데 혼내줄 방법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강간해버렸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성폭력 가해자들의 집단상담에서 성폭력 가해행위를 한 이유라며 듣게 되는 대답이다. 사실 이런 대답이 늘 나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범죄 행위자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항변하기 위해 가해행위를 축소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 여성이 유혹해서 그랬다’ ‘꽃뱀에게 걸렸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딱 한 번 그랬다’ ‘잘 몰라서 그랬다’라는 대답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누군가 복수하려고 강간했다는 말을 꺼내면 ‘아,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보다’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복수의 동기를 꺼내는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로부터 무시와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그 남자는 그 여자에 비해 학력이나 지적 능력, 재산, 자신감 등 뭐 하나 나은 게 없다. 처음에는 내가 못나서 그렇지, 욕이나 하며 뒤돌아설까 생각하다 ‘내가 남자인데 왜 여자한테 당하냐? 저 여자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는 무기가 내게 있잖아.’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주변 누구라도 동조하면 그 생각은 힘을 받는다. 낮은 자존감이나 낮은 공감 능력과 같은 흔히 성폭력 가해자의 특성이랄 수 있는 개인적 성향 외에, 여자는 남자를 무시해서는 안 되며 그런 여성은 혼내도 된다는 남성성이 발현된다. 폭력은 처음부터 자신이 의도해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을 화나게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따라서 그 여성은 강간을 당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성폭력인데도 성폭력은 극악한 흉악범에 의해서나 일어나는 범죄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행동을 상대에 행동에 대한 반응 또는 호감이 있던 상태에서 이뤄진 거친 성관계 정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에게 페니스는 어떤 의미인가

흔히 성관계를 ‘성기 결합’이라고 하기보다 ‘삽입섹스’ ‘삽입했다’라며 페니스 중심으로 사용한다. 성관계의 중심이 남성에게 있는 것이다. 어린 여아들이 “나도 오빠처럼 서서 소변보고 싶어.”라는 말에 많은 부모들이 “너는 없어서 안 돼!”라고 한다.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에게 있는 성기가 아니라, 페니스가 있는 남자와 페니스가 없는 여자로 나누는 것이다. 페니스를 가진 자는 페니스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능력을 갖춘 것이며 특별한 존재로 인정된다. 페니스를 가진 남성은 남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우월감을 갖고 행위의 대상이 되는 객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의도대로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식하며 성장한다.

이러한 남근주의 또는 페니스권력은 성기 삽입이 성적 쾌락을 넘어 삽입되는 대상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상징한다. 성폭력이나 성매매 가해자들에게서 성적 만족을 얻었다는 대답이 적게 나타나는 이유는 그 행위가 성적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적 만족 이외의 것을 충족하기 위해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즉 행위를 주도하는 지배자 위치의 만족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성폭력이나 성매매 청소년 피해자들이 진술한 피해 내용을 보면 성적 유린의 과정에서 보통의 남성들이 얼마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지배자의 경험을 누리려 했는지가 드러나 있다.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성적 욕설이나 비하적인 말, 치욕적인 체위 등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어린 여자아이들이기 때문에 더 가능했던 것이다.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의 저자 우에노 지즈코는 방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을 만나 어떤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지를 물어보면 남성들은 대부분 ‘내가 다루기 쉬운 여성, 나보다 열등한 여성’이라고 답한다.”라며 “그들은 ‘강자’나 ‘나보다 큰 여성’들 앞에서는 작아진다.”라고 하였다. 성별 관계에서 남성은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젠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우위를 입증하기 위해 또는 그 우위가 위협을 받으면 폭력적 방식을 채택한다.


성을 밝히면 안 되는 여성들

2011년부터 진행되고 있는 슬럿워크(slutwalk) 즉 ‘잡년 행진’은 ‘슬럿처럼 입어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인식에 반기를 들고, 여성이 옷이나 술을 먹는 방식 때문에 성적인 공격을 당할 수 없다는 항의로 시작된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대 앞 슬럿워크 1인 시위’ 또는 페니스파시즘을 파괴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거나 “잡년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고 주장하며 활동해왔다. 무엇보다 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성적 존재임을 드러내지 말라며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여성을 성녀와 창녀, 처와 첩 등 이분법으로 나누어 객체화하는 것에 저항한다.

‘슬럿처럼 입는다’는 것은 성을 밝히는 헤픈 여자, 문란한 여자라는 의미이다. 성적인 욕망을 드러내고 성을 밝히는 것은 정숙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이며 이런 여성은 보호받을 가치가 없으며 성적 폭력을 당할 만하다는 것이다.

성별 분업은 주도적이고 중요한 일은 남성이 하고 보조적이거나 하급직은 여성이 한다든지 성별에 따라 다른 태도, 업무가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성적 욕망, 성행위에서도 남성은 주도적이고 경험하는 자이고, 여성은 선택되고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이다. 여성의 성적 욕망 역시 남성과 차이가 없으며 성적 존재로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하면서도 성적 욕망은 여전히 남성의 영역에 속해 있다. 여성은 성적 욕망을 갖는 것도 억제해야 하며 성적 경험에서도 주도적이거나 적극적이어선 안 된다. 여성은 언제나 남성을 기다리고, 남성이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많은 연구가 보여주듯이, 사랑이라는 감정이나 성적 욕망 역시 자연발생적이라기보다 사회화 과정의 학습결과이다. 어떤 상황에서 욕망이 드러나는지, 욕망과 감정들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강렬하게 경험되는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관습과 사회화에 따라 정해진다. 욕망이 즉각적이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고 성취하느냐는 사회화의 결과이다. 즉 사랑과 연애, 성적 욕망은 사회문화적인 산물로서 주어진 ‘성 각본(sexual script)’에 따라 특정한 젠더 역할을 수행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여성이 성적 주체성을 이야기하거나 성관계에서 자기 결정권을 강조한다면, 그 여성은 사회적 지탄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의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성적 욕망을 표출하기에는 사회적 시선이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성적인 욕구에 늘 죄의식을 느끼며, 숨기거나 무시하게 된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후에도 자신이 성적인 태도를 보여서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죄책감을 느낀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도 혹시 성적으로 유혹한 것은 아닌지, 연애감정은 없었는지 묻고 의심한다. 그런 시선을 미리 감지하게 되면 결국 성폭력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하고 숨기게 된다.

성에 대한 태도, 각본은 청소년 시기부터 자연스럽게 구성된다. 청소년기, 청년기에 강한 성적 욕망을 보이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욕을 가진 존재로, 섹스하는 존재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즉 연애는 인정해도 섹스는 불편해한다. 섹스, 피임, 임신, 낙태, 출산에 대해 드러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이런 주제들이 삶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적 욕망을 다루지 않을수록, 마치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외면할수록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성적 대상화가 진행되고, 그들의 성적인 삶은 불편하고 수치스럽게 인식된다.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하지만 ‘욕망의 주체’가 되는 존재로서는 익숙하지 않다.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 정체성을 형성하며 그 사회의 문화, 관습, 종교에 의해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것으로 ‘자연화’ ‘내면화’되어 왔다. 대상이 되는 여성은 욕망을 표출하는 것도 불편해하지만 성적 상황에서 거절하는 것도, 동의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성적으로 수동적인 사람이 되도록 요구를 받으며, 성관계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 ‘문란하다’는 프레임이 씌워지기 때문에 성적 주장을 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여성의 ‘노(No)’는 오히려 강력한 ‘예스’라는 왜곡된 통념이 형성된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인정하지 않거나 금지하는 가장 극단적인 문화가 바로 여성 할례이다.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만,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여성 할례는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최근에는 유럽, 미주 국가까지 약 30여 개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1억 3천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할례를 받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매년 시술을 받는 여성들의 수는 200~300만 명에 달하며 하루에만 6,000명 정도의 여자아이들이 할례를 받다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할례는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인 아프리카나 이슬람 문화권에서 한 남편이 여러 아내를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여성의 성적 의도를 막아 보려는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성 인권침해이다. 여성 할례는 사춘기 즈음하여 여성의 성기에서 성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제거하여 성적인 쾌감을 평생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범죄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할례 시술을 받지 않은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성욕을 억제하는 신뢰성이 없어 정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할례가 신체에 주어진 성적 억압이라면 헤프거나 문란한 여성이라는 개념은 정신적 억압이다.

문제는 여성에게 ‘무성적인’ 혹은 ‘순결한’ 자세를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여성 역시 자신의 ‘성욕’에 대해 느끼고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성적인 욕구인지, 혹은 자신의 성적 욕구를 어떻게 표현하고 해소해야 하는지 모른다.

성적 존재로서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적 대상으로서만 존재하게 한다. 성적 대상화는 돈으로 상대방의 성을 지배할 수 있다거나 나의 욕망만이 중요하다고 여길 때 가능해진다. 상대도 욕망을 가진 존재임이 고려되는 사회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일방적 관행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근 여성을 주체적 성욕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변화가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에서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성적으로 자유롭거나 성적 파트너가 여러 명인 여성을 일컬어 ‘걸레’라고 불렀다면 최근에는 ‘보슬아치’라고 한다. 헤픈 여자를 걸레라고 불렀을 때도 성적 욕망을 드러내고 성취하는 여성에 대한 비하가 있지만, 보슬아치 역시 그에 대한 비하의 표현이다. 남성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욕망으로 자신의 몸으로 성을 선택 가능한 존재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감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거침없는 변화와 같이 여성성에 대한 오랜 편견과 왜곡의 벽을 부숴버리는 자립적이고 당당한 여성상의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욕망이라고 가르치는 무수한 통념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대부분의 교정교육 프로그램은 여성주의와 인지행동이론에 기반해 있다. 성폭력 가해 행동이 과거 심리적이거나 애착과 같은 개인적인 요인보다는 성에 대한 왜곡된 인지에 의해 발생한다고 보고 왜곡된 인지를 바꾸는 것이 재발을 방지한다고 보는 것이다.

흔한 인지왜곡은 ‘여성이 약하게 저항했다면 성폭력 당한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 ‘여성이 조심하면 성폭력을 피할 수 있다’ ‘남성의 경우 여성이 적극적으로 유혹하면 성적 충동을 조절하기가 어렵다’ ‘여성이 남자와 숙박업소에 들어갔다면 성관계 의사를 암묵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등이다. 이러한 통념들을 얼마나 강하게 확신하고 있느냐에 따라 행동으로 실현될 가능성도 커진다. 예를 들면 어떤 남성이 ‘여성이 적극적으로 유혹하면 남자들은 성적 충동을 조절하기 어렵다’라는 통념을 지니고 있을수록 여성이 친절하게 웃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혹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 남성이 그 여성보다 조금 더 힘을 갖고 있는 위치라면 성적 접촉을 시도한다. 그 시도가 성공하고 상대의 저항이 없었다면 두 번째 세 번째는 훨씬 수월하게 시도할 것이다. 상대 여성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고 먼저 유혹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과정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성욕은 억제할 수 없는 자연적인 본능이라는 성적 규범이 깔려 있기 때문에 성폭력이 ‘폭력’의 형태라 할지라도 ‘남성성의 본능’으로 이해된다. 성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므로 성추행, 성폭력도 본능의 차원으로 정당화한다. 본능론적 접근은 이성애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과 남성으로 범주화하여 남성과 여성 간에만 성폭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한다. 동성 간 성폭력은 ‘장난으로’ 또는 ‘친해지기 위해서’라는 말로 쉽게 가려지며 피지배적 위치에 놓인 피해자는 합의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학교, 군대, 감옥 내의 남성 간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는 여성화된 지위, 즉 남성성의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말하거나 신고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는다.

‘여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가만히 있었고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다’ ‘강력하게 방어하는 여자를 혼자서 강간하기 어렵다’라는 통념은 가해 남성들의 개인적인 경험만이 아니라 성폭력에 대한 기존의 믿음체계에 기반한 것이다. 믿음체계는 자주 행동으로 나타난다. 성폭력 각본은 우월한 남성성, 강간 신화, 강간 통념 등의 믿음체계로서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익숙하며 오랜 세월 동안 내면화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은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성폭력은 ‘폭력’의 형태에 ‘성’이 개입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가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라며 가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해석한다. 성폭력이란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신체적, 언어적, 비언어적인 성적 접근이나 행위이다. 성폭력은 성욕이 일으킨 폭력이 아니라 성별, 지위 등의 권력 관계를 이용하여 성욕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폭력’을 택한 것이다.

최근 미투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모 정치인이 ‘수컷이 많은 씨를 심으려 하는 것은 본능’이라며 성폭력이 아니라 남성의 본능이라며 옹호하자 한 인류학과 교수의 반론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성희롱, 성추행, 강간의 행위는 씨를 뿌리는 일이 아니다. 설사 강간의 결과로 임신이 되고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이는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생식 행위라기보다는 사회학, 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권력에 의한 폭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본능이라는 프레임은 성폭력 행위의 중심에 있는 권력과 폭력에서 관심을 돌리게 한다. 우리 사회의 남성은 틈만 나면 정액을 뿌리고 싶은 본능에 움직이는 수컷으로 자리가 매겨지고, 제도는 그러한 자연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수단이 되고, 여성은 수컷의 강한 본능을 억누르면서 보호해줘야 하는 암컷으로 자리가 매겨진다. 남성은 씨 뿌리는 수컷이 아니고 여성은 수컷이 뿌려대는 씨에서 보호받아야 할 순결한 처녀도 아니다. 왜곡된 본능에 인간을 자리매김하는 일은 과학 지식의 잘못된 전달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문제는 욕망이 아니라 권력이다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 음란물에 빠져 그대로 시도해보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같은 학급에 있는 한 여학생에게 성추행 가해행위를 시도했다. 학급에 여러 여학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여학생을 선택해서 그런 행동을 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여학생들은 놀림을 받거나 장난치면 화를 내거나 대드는 데 평소에도 놀림을 잘 받던 그 여자아이는 아무 대응도 하지 않고 피하기 일쑤였어요. 아, 저 여자아이한테 하면 ‘아무 문제 없겠구나, 항의하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자 중학생이 여자 동급생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실현하려고 할 때 그 일이 가능한지 아닌지 탐색한다. 동급생 간에도 내가 좀 더 우월한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탐색은 스스로 알아차릴 만큼 항상 명료하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 남학생도 이런 질문을 몇 차례 받고 생각해본 후에야 사건 당시 언뜻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발견해냈다.

성폭력은 할 만한 대상에게 가해하는 행위이다. 미투 피해자 중에는 가해자가 지금은 사회적 인지도가 있지만 과거 무명이었던 때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성폭력은 권력범죄인데 ‘아무 권력도 갖지 않았을 때 무슨 성폭력을 행사했겠냐?’며 반감을 드러낸다. 권력은 지위, 직급, 연령, 종교 성직자, 경제력 등에만 있지 않다. 일상의 관계에서도 힘의 차이는 발생한다. 성적 지향이 다르다, 술에 취했다, 개인적 약점을 알고 있다, 하루 일찍 입사해서 일을 좀 더 잘 알고 있다는 이유 등, 상대를 제압할 힘은 다양하다. 만약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권력이 없다면 성폭력이 아닌 것인가? 성폭력은 힘의 차이가 있는 관계에서 일어나며 힘의 차이는 일상에서도 일어난다. 성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서 권력이 동원되는 구조화된 폭력으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인지, 그리고 ‘NO’라고 했을 때 이후의 불이익이나 피해가 예상되지 않는지가 성폭력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나영(2018)은 젠더 자체가 권력관계를 의미하기 때문에 성별 권력관계와 무관한 권력형 성폭력이란 개념은 애초에 성립 불가능하다고 한다. 즉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성별(gender) 자체가 위계적 관계로 구성돼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효과이자 새로운 권력관계의 원인”이라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남성은 특정인의 잘못으로 개별화되지만, 여성의 경우 ‘여성 집단’ ‘여성성’의 문제로 과잉일반화 된다.”고 지적했다.

성추행 의혹을 받은 연출가 이윤택은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예술가들의 순수한 동기를 이용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착취한 ‘권력’을 이야기하지 않고 욕망이라고 한 것이다. 폭력이 ‘성’(性)이 아니라 ‘권력’에 있음을 무시한다. 여성에 대한 성차별 및 성폭력 고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미투가 문제 삼는 것은 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이다. 특히 연극계와 영화계 미투와 같이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된 비정상적인 조직문화와 같이 권력을 견제하기 어려운 구조의 취약함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임을 폭로하는 것이다.

미투를 통해 성폭력은 가해자 개인의 성욕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폭력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권력구조에 관심을 돌린다. 구조를 성찰하지 않고 욕망의 문제로 화살의 끝을 돌리는 이상 그 구조에 공모하게 된다. 욕망이 아니라 폭력의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


입증하기 어려운 성폭력

여성차별 문제를 다룬 유엔 최초의 문서인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 철폐 협약(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은 국제여성 인권선언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협약에 의해 창립된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국제여성 헌법 격인 이 협약을 비준한 나라들의 이행 상태를 심의하고 있다. 최근 이 협약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이행 상황을 심의하는 자리에서 성폭력에 대한 안이한 대응으로 질타를 받은 바 있다. 특히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을 무고죄로 고소하거나 이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는 모든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로 강간죄를 규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한국 형법은 강간을 너무 엄격하게 정의하고 있어 문제’라며 일반권고에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설정토록 하고 있다.’라며 이에 대한 수정을 요청하였다.

국내에서도 가장 개선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법 개정으로 꼽는 것이 형법상 ‘강간’의 정의이다. 현행 형사법 체계에서 성폭행은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에 이르는’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폭력과 협박이 없으면 강간죄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피해자는 그런 폭력과 협박에 ‘저항해야만’ 범죄 피해를 인정받는다. 지적장애가 있는 여성이나 미성년 여성이 피해를 당해도 ‘저항했는지’를 따지고, 죄를 입증하기 위해 수사기관에서 ‘왜 저항하지 못했느냐?’라는 물음에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일은 바로 이런 법규정 때문이다. 단호한 거절 의사를 밝힌 것만으로도 강간죄가 성립된 판례가 있는 나라도 있지만, 저항규정을 따르고 있는 나라의 경우 ‘저항하기가 곤란한 상태’로 규정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피해자가 저항하기 현저히 불가능한 상태’와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규정은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을 했는지, 상황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었느냐를 피해자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가해자와 알던 사이였거나, 도움 요청이 없었다거나, 사건 직후에 곧바로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면 불리해지는 규정이다.

성폭력을 당하는 순간에 저항했어야 하는데 왜 저항을 못했을까?

성폭력은 권력관계, 힘의 차이가 있는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는 설명될 수 없다. 취업 추천을 하고 자리를 보전해주고 역할을 주고 좋은 평가를 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성폭력을 거부하거나 문제 제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이 성폭력이기 때문이다.

직장 내 가해자의 대부분은 상사이다. 10인 이상 규모의 사업장에서는 절반 이상의 비율로 가해자가 상사이고 소규모 사업장은 사장에 의한 성희롱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최종 인사결정권자인 사장에 의한 성희롱은 해고 등 직접적인 고용 불안정으로 이어져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고, 문제를 제기해도 직장 내에서 조사나 조치가 취해지기도 쉽지 않다. 여성노동자회의 조사에 의하면 “직장 내 성희롱으로 고용노동부에 진정해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진정 사건은 2012년 249건에서 2016년 556건으로 2배 이상 늘었으나, 같은 기간 검찰 기소 사건은 단지 9건에 불과했다. 시정조치도 대부분 진정취하나 시정완료 등 행정종결에 그치고 있다”. 여성노동자회는 “직장 내 성희롱 상담의 증가는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이 직장 내 권력관계의 하위에 위치하며, 남성 중심적 직장 문화 속에서 여성 노동자가 성희롱의 대상이 되기 쉬운 현실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많은 피해자가 ‘꽃뱀’의 낙인과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 업무상 불이익, 해고 등 다양한 형태의 불리한 조치를 경험한다. 직장 내에서 성희롱 피해 사실이 알려지거나 피해의 처리를 요구하면, 가해자를 감싸거나 피해자는 ‘진지충’ ‘성격이 예민한 사람’이라거나 ‘참을성이 없는 사람’ 등 피해자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원치 않으면 거절하거나 저항했어야 한다는 비난과 폭력뿐만 아니라 연애사로 끌고 가려는 주변의 시선이다.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처럼 얼마나 저항했는지가 아니라 가해자가 피해자의 ‘적극적인 동의를 얻었는지’가 성폭행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동의는 어떤 행동을 했는가에 대한 기술적 정의 대신 동의의 유무, 관계의 대등성 강요성을 성폭력 여부의 판단 기준으로 한다. 동의는 단지 ‘yes’라는 한마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령이나 발달 수준, 자발적인 결정, 발생할 수 있는 결과 및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하는 등 동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다.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고 정의하듯이 성폭력의 기준을 동의 여부로 하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불편함에 대한 해석

데이트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면접연구(배수희 외, 2016)에서는 면접 참여자들이 ‘다시 생각해보니까’ ‘헤어지고 나니까’라는 말을 시작으로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으로 언어화해낸다고 하였다. 성폭력이라고 판단 내리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를 통한 자기 해석적 행위라고 보는 것이다. 이후의 해석을 통한 경험의 재구성 과정에서 여성은 그 남자와의 성관계가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였으며 성관계에서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었는가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같은 연구에서 켈리(Kelly, 1988)는 ‘성폭력의 연속선’ 개념을 통하여 이성애에서 성관계 경험이 동의 아니면 성폭력으로 이분화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서 압력, 강제 그리고 힘으로 나아가는 연속선상에 있다’고 강조한다. 즉, 성관계가 여성의 동의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 동의가 암묵적인 강요에 따른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성폭력의 연속선’ 개념은 성폭력뿐만 아니라 성행위 전반에서 여성이 느끼는 불편함을 설명하며, 성폭력 상황에서 피해자가 즉각적으로 성폭력을 인식하지 않더라도 사후에 성폭력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성별 권력이 작동하는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점이 대립하는 폭력의 경우 여성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재현할 언어가 부재한 현실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엇을 데이트 성폭력이라고 명명할 것인가 혹은 어디까지 ‘범죄’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이전에, 성폭력이 여성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 혹은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사실은 곧 ‘젠더 감수성’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성차별적인 문화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성별 권력의 영향력을 무시하고는 성폭력을 설명할 수 없다.

여성의 경험이 성 중립적 또는 남성과 동일한 언어로 묘사되고 특히 성폭력 경험 역시 단지 ‘범죄다, 범죄가 아니다’로만 판별하려는 시도 속에서 성폭력이 어떤 경험인가에 대한 젠더적 섬세함이 요구된다.
나오는 말

차별과 억압, 폭력을 정당화하는 젠더 고정관념이 각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있고 법과 사회제도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사회에서, 권력에 기반한 폭력피해를 드러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폭력은 조신하게 행동하지 않은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해서 일어난 일이며, ‘밤늦게’ ‘술에 취해’ ‘거절을 잘 못해서’ 일어난 일이며, 그런데도 문제를 드러낸다는 것은 뭔가 정치적 의도가 있거나 숨겨진 의도가 있을 거라고 해석된다. 그나마 성폭력은 강간 등 성적인 폭력에 한정되어 있다.

폭력이 일어났다고 말할 때 ‘무엇을 성폭력으로 볼 것인가?’ 논쟁이 오간다

무엇 때문에 성폭력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 피해자 유발론, 본능론 등이 주장되면서 사회적 갈등이 일어난다. 그나마 아동이나 지적장애인이나 나이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관계에서 일어난 성폭력의 경우 또는 소위 ‘피해자다운 피해자’인 경우에는 ‘상식적’으로 피해자로 인정한다. 그 이외의 피해자는 그 증언이 사실인지 조작된 거짓말인지 판단하기 위한 의심과 비난과 역고소를 감내해야 한다.

누구의 상식이며 누가 만든 규정인가? ‘상식’은 분명 본능 중심, 남성 중심의 언어 논리일 것이다.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성폭력 피해 사실이 여성의 입장에서 성립하려면 광의의 성폭력 개념이 필요하다. 넓은 의미의 성폭력은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의 성을 매개로 행해지는 모든 유형의 폭력으로 개념화하며 성별 권력관계 자체를 문제시한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주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폭력을 젠더 권력의 문제, 즉 젠더 폭력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다. 권력의 문제이기에 인식 개선, 교육만이 아니라 가해자 입증 책임, 처벌, 그리고 그것의 ‘제도화’가 뒤따르게 된다.

성폭력은 공적인 공간에 나와 있는 여성을 여전히 사적인 존재로 여기면서 공적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적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볼 때 일어난다. 미투는 성폭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공적인 문제 제기이다. 사적으로 희롱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문제라고 공표하는데도 공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있다. 사법적 처벌과 같이 공적으로 처리되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는 두려워하고 가해자는 재기를 꿈꾼다. ■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소장. 연세대학교 간호학과, 동 대학원 졸업. 성폭력전문상담원, 사회복지사, 내러티브상담사, 반(反)성폭력 활동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학교에서의 성인권 교육교재 연구 활동으로 《학교폭력 위기개입의 이론과 실제》(공저) 어린이를 위한 성교육만화책 《사춘기》 《채연이의 일기》 등을 펴냈다.



ⓒ 불교평론(http://www.budreview.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기사 (전체 7건)




·[특집] 욕망과 권력 그리고 성담론의 상관관계 / 김영란 [새창] 김영란 2018-06-01
·[특집] 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 / 이필원 [새창] 이필원 2018-06-01
·[특집] 율장을 통해 본 성욕과 성윤리 / 이자랑 [새창] 이자랑 2018-06-01
·[특집] 성폭력 문제 이해와 한국불교 권력구조 / 조승미 [새창] 조승미 2018-06-01
·[특집] 기회와 공모: 종교계 성범죄의 발생과 은폐*/ 권최연정 [새창] 권최연정 2018-06-01
·[특집] 순결담론과 성의 상품화에 대한 불교적 관점 / 옥복연 [새창] 옥복연 2018-06-01
·[특집] 불교윤리의 관점에서 본 한국인의 성윤리 / 박병기 [새창] 박병기 2018-06-01



1



--
범계 비판도 좋지만 불교 바로잡는 재가운동 돼야
기사승인 2015.12.24  10:01:41

- 작게+ 크게
공유
- [특집 좌담] 재가불자가 미래불교의 힘이다!
   
▲ 재가불교운동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대담자들.
 

지난 한해 한국불교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도박, 은처, 절도 등 승단을 향한 각종 범계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몇몇 종단은 종권 다툼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어둡고 긴 터널로 들어선 듯한 한국불교를 그나마 지탱한 것은 과거와 달리 한국불교의 현실을 지적하고 승단에 자정을 촉구하며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재가자들이었다. 이번 대담은 ‘깨어있는 재가불자가 한국불교의 미래를 이끌어갈 힘’이라는 전제에서 재가불교의 현실을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했다. 대담자로는 김재영 청보리회 지도법사, 우희종 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서울대 교수),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소장이 참여했다. 대담은 12월 16일 오후 2시 본지 회의실에서 열렸다. <편집자 주>

맹목적 깨달음 지상주의가 불교 망쳐…고통의 문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출가와 재가 삶의 방식 차이 있을 뿐 역할은 평등…재가 사부대중의 공동주체

재가불자의 정의

우희종 : 재가불자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한다.

김재영 : 재가불자는 출가승을 외호하는 역할도 있지만,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라고 하는 불교공동체의 주체이다. 그 본질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김영란 : 재가와 출가의 공통점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공동체 안의 한 구성원이라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출가자 외호를 재가자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것을 시대적인 흐름을 따지지 않고 어느 시대나 관통하는 절대적 개념으로 볼 수는 없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재가자들이 우리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해 나가느냐가 중요하다.

김재영 : 현재 재가는 종단의 모든 영역에서 오로지 추종자로서 출가자들을 외호하고 공경하는 자들로만 평가되고 있다. 재가는 사부대중공동체의 주체로서 역할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데, 출가 우월주의가 강조되다 보니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의 추종자들로 왜곡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불교를 참담하게 하는 것 중 하나가 종단의 모든 문제를 오로지 출가자들이 결정하고 재가자들은 아무 말 하지 못하는데 있다.

우희종 : 외호는 수행하는 분들을 보살펴주는 것인데, 그 말 속엔 굴종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굴종의 신앙으로부터 주체적 신앙으로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김영란 : 외호는 출가자가 아니라 상가 자체를 외호하는 것이다. 상가 안에 재가불자도 포함돼 있는데 스님만 외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외호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재가불자의 지위와 역할

우희종 : 21세기에 재가불자가 갖는 지위와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김영란 : 재가자들이 출가자들에게 사부대중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해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상가의 일원이고 불법을 전파하고 지키는 주체자라고 선언하는 태도와 실천이 필요하다. 재가운동이 가야할 방향은 출가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 스스로 왜 불법을 믿고 왜 수행을 하는지에 대한 자각과 스스로가 불교운동의 주인이라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 김재영 청보리회 지도법사김재영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 차이는 있지만 출가자들은 출가라고 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 재가자들은 재가자라는 삶의 방식을 통해 불교의 목적을 추구해 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재가자가 추구해야 할 본질적인 역할은 불교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현대적 의미로 사회적 평화의 실현이다. 이것을 해결해야 될 책임이 우리 재가불자들에게 있다.
우희종 : 재가자의 지위는 과거나 현대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근본적으로 출·재가는 출발부터 평등하다. 현대사회라고 해서 지위가 바뀔 것은 없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재가불자의 역할이 더 커질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출가해서 깨달음을 전문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 중요했다면, 대승불교에서는 삶의 현장에서 상구보리하화중생의 보살의 삶을 실천하기 쉬운 이들이 재가자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불교가 과연 우리 사회에서 건강한 사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돌아볼 때 우리 재가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묻고 싶다.

한국불교의 병폐는?

김재영 : 한국불교는 이 사회를 이끌지 못하는 무능한 추종자로 전락했다. 7,80년대는 절에 가면 절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넘쳤다. 그런데 2015년 이 시점에선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다. 학생들은 법회에 나오지 않고, 대불련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나 다름없다. 한국불교는 사회적 역할을 상실하고 무능한 추종자로 전락했다. 이 한 마디 속에 한국불교의 병폐가 다 들어 있다.

김영란 : 부처님은 초전법륜에서 고통의 원인과 해결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다. 불교가 해야 할 일은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벗어나게 할 것인가 알려주고, 그 고통도 사실은 실체가 없다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몇몇 권승이 권력에 탐착하는 모습을 보면 불교가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너무 격리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불교는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다. 불교의 수승한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역할을 함으로써 수승한 법을 유치한 원시신앙 형태로 떨어뜨리고 이다. 이것이 가장 큰 병폐다.


   
▲ 우희종 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우희종 :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 스님들부터 사찰관리인 또는 불교자본가로 전락한 데 문제가 있다. 조선 개국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는 우리 사회에서 주류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7,80년대 경제 성장기와 더불어서 사찰이 부유해졌다. 신도 한 명 한 명이 돈 얼마다 하는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한국불교가 수행과 회향이라는 좋은 틀을 잃어버리고 불교자본가로서 안주하게 됐다. 한국불교는 사회에 기여하거나 신도들을 수행으로 이끌려는 의지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한국불교가 깨달음만을 강조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깨달아야 한다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거의 없다. 대승불교라면 깨달음은 삶의 현장에서 회향돼야 한다. 그런데 깨달음만 강조하다보니 수행과 회향을 분리시켜 놓고 수행 장사를 한다. 여기에 한국불교의 병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재영 : 깨닫고 한 소식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환상에 빠져 있다. 본질적으로 얘기하면 2700년 동안 내려오면서 세계불교 전체가 부처님 본래의 불교 모습을 상실한 채 허상에 빠져 있다. 깨달음을 위해 모든 것을 매몰시키는 깨달음 절대주의, 맹목적 깨달음 지상주의가 불교를 망가뜨리고 있다. 부처님 본래의 불교는 고통의 구원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통에 차 있다. 부처님은 “나는 오로지 고통의 원인과 치유에 대해서 말할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깨닫는다고 고통이 모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깨달음에서 고통으로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통의 문제로, 고통의 현장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출·재가나 세계불교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 아닐까 생각한다.

우희종 : 고통의 현장, 즉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깨달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깨어있는 삶이어야 하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고통의 화택인 삶의 현장에서 너와 내가 함께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고득락으로 가고자 하는 ‘깨어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깨달음의 형태’로 제시하면서, 고통의 현장에서 이고득락으로 가고자 하는 깨어있음을 방해하는 게 한국불교의 현주소다.

김재영 : 삶의 현장에서 보살행을 하면 그 자체가 깨달음이다. 삶의 현장에서 고통을 같이 나누며 그것을 치유하려고 애쓰는 보살의 삶이 깨달음이다.

김영란 : 우리도 깨닫지 못했으니까 부처님 말씀이나 선사의 말씀에 근거해서 깨달음이란 이런 거구나 유추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깨달음의 정의가 다양하다. 고통의 현장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불자로서 근본적인 삶의 태도라고 생각하지만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도 맞다고 본다. 그래서 깨달음을 절대적 개념으로 볼 것이 아니라 다층적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전제로 다양한 실천적 삶이나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깨달음을 추구하고 어떤 분들은 삶의 현장에서 보살행을 추구하는 다양한 태도나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희종 :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 보면 보살행의 삶을 살기 위해서 강조되는 것이 사상(四相)이다. 조계종도 소의경전인의 가르침처럼 사상을 버리고 그것에 바탕해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소의경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마치 깨달아야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식의 논리로 많은 사람들을 혼란시킨다. 소의경전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수행체계를 만들지 않고 깨달음을 절대화시켜 깨달음 장사를 하는 게 참으로 아쉽다.

김재영 : 금강경 기본 정신 가운데 하나가 깨달음 절대주의를 타파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내가 깨달은 바, 깨달을 바 법이 없다고 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눈이 생겨났다”고 표현했다. “눈이 생겨나서 있는 그대로 본다”고 했다. 정신 차리고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면 그게 깨달음이다. 그러니 무수히 다양한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정신 차리고 있는 현실 그대로 보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위하면 그게 깨달음이다. 아버지는 아버지 자리에서, 기업가는 기업가의 자리에서, 현실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위하는 그것이 깨달음이다.

우희종 : 한국불교의 병폐를 개선하기 위해서 재가불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 달라.

김영란 : 한국불교의 병폐를 인식하고 행동에 나서는 재가자는 극소수다. 그래서 재가 내부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하고 재가불자들이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설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먼저 운동해야 한다.

우희종 : 문제의식을 공유해기 위해선 재가자들이 한국불교의 병폐를 인지해야 한다. 그런데 워낙 굴종적으로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문제를 지적만 해서는 안 되고 재가자들이 제대로 수행하고 회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된 모습의 재가자상은 무엇인지 제시해 줘야 한다. 저는 그걸 ‘바른불교운동’이라고 말한다.

재가불교운동의 방향

김재영 : 재가운동을 얘기할 때 꼭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은퇴해 멀리 떨어져서 보니 제대로 활동하는 재가단체가 없다. 7,80년대에는 재가불자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어린이·청소년, 대학생, 청년 단체만이 아니고 기성 단체들도 많았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소멸 상태에 들어갔다. 승단의 끊임없는 분열과 물리적 투쟁 시기와 겹친다. 그 당시 재가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내부 분쟁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몇 개 안 되는 단체가 싸우기만 한다. 싸우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불교운동을 세속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불교재가운동의 방향 중 하나는 불교적인 방식으로 재가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희종 : 부처님은 육사외도를 찾아가 다 논파하셨다. 지금 재가단체가 승가를 비판하는 것은 승가가 파벌을 형성해 승단을 분열시키고 이권 다툼을 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승가 문제를 공론화해서 바로잡는 단체와 그렇지 않는 단체를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 길지는 않지만 재가단체의 활동을 1년 정도 들여다보니 특정 스님 파벌을 대변해 싸우고 있는 단체가 있다. 재가운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권 다툼의 모습이 아닌, 종단 내부의 문제를 공론화해서 치료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다만 한국불교의 병이 워낙 깊다보니 불교적인 비폭력적 방법으로 접근했을 때, 공론화되지 않고 덮이는 상황을 어떻게 공론화하고 문제화할 것인가 고민해 봐야 한다. 전국선원수좌회가 두 번이나 찾아가 이야기기해도, 재가자들이 1080배를 하면서 지적해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상태에서 이런 점은 현실적인 문제다.


   
▲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소 소장김영란 : 앉아서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 다 수행이다. 손가락을 저쪽으로 가리키고 비판하고 시정하라 요구할 때도 우리 내부에서는 그 운동을 수행의 연장선상에서 해야 한다. 재가자들은 생업이 있다 보니 재가운동은 급하게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문제 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조심하려고 해도 비불교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운동을 하게 된다. 공격적이거나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그런 과정 때문에 수행도, 운동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우리가 너무 성과에 급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같다. 그래서 상대가 빨리 변화하길 바라고, 왜 빨리 변하지 않느냐고 투쟁의 강도를 높일 것이 아니라, 속도와 상관없이 함께 운동하는 이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투쟁방식과 전략을 고민했으면 좋겠다.
우희종 : 재가단체에서 승가의 문제를 지적하고 싸울 때 상대방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지적하고 싸워야지, 그것이 분노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이 재가단체 안에서 공유되지 않는 것은 상당수 재가단체들이 스님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란 : 스님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 재가단체가 꽤 많다. 스님들의 보시로 유지되고 그 분들이 마지막 의사결정을 내리는 종속적 관계가 이루어지다 보니 불교시민운동이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없다.

김재영 : 출가 승단의 불의에 대해서 재가들이 비판하는 것은 불경이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승단이 싸우니까 코삼비 시민들이 공양거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승단에 대한 비판은 불교적인 방식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스님들을 비판하는 것보다 불교를 바르게 하는데 초점을 둬야 한다. 스님들 잘못하는 것만 생각하면 거기에 휩쓸려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들의 큰 에너지를 불교를 바르게 하는 운동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불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포교원에서 재가법계제도를 만들었다고 하던데, 좋은 의도로 만들었겠지만 불교사에 없는 일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스님들한테도 법계제도가 없었다. 원로 스님에 대해서는 ‘존자여’라고 불렀고, 후배 스님에 대해서는 ‘도반이여’라고 불렀다. 재가원로도 ‘존자여’라고 불렀다. 부처님 당시 출·재가 차이는 생활 방식의 차이였을 뿐이다. 출·재가는 대평등이었다.

출가와 재가의 바람직한 관계

우희종 : 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재영 : 흔히 불교공동체를 상가라고 부르는데, 기본적으로 오류다. 부처님 당시에는 불교공동체를 빠리사라고 불렀다. ‘둥그렇게 둘러앉다’라는 뜻이다. 부처님 당시 불교공동체는 평등하게 둘러앉아 자유롭게 토론하고 대화하는 공동체였다. 사부대중의 바람직한 관계는 평등 속에 상호 존중이어야 한다. 우리는 당당한 빠리사의 대중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불단에 가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의미로 세 번 절하는 것은 신앙의식으로 마땅히 해야 하지만, 스님 개개인에게 삼배를 요구하는 것은 본분에서 어긋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 출가나 재가나 서로 먼저 인사하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 불교가 살아난다.

김영란 : 현대는 굉장히 복잡하다. 사람들이 수많은 고통 속에 있고,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교단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부대중공동체가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각자의 역할들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그것을 확립해 나가는 방식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비구승단에게 요청하거나 부탁해서가 아니라, 당당하고 분명하게 사부대중공동체의 일원임을 주장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불교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사부대중공동체로 가야 한다는 점을 많이 공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희종 : 평등의 문제는 달리 보면 굴종으로부터 주체적으로 일어서는 자세의 문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가장 먼저 의식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신도들을 굴종화 시켰을 때 그 이면에는 이권이 있다. 종단의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도 이권 다툼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사찰이 풍요로워지고 주지가 전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 되다 보니 그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최소한 평등한 사부대중공동체로서 주체적인 신도회를 만든다면 사찰재정은 투명해지고 돈 선거는 필요 없어진다. 그래서 각 사찰에 주체적인 신도회를 건립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주체적 신도회를 하려고 봤더니 종헌 종법에 그런 규정이 없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조항만 있을 뿐이다. 바른불교재가모임에서는 주체적인 신도회 구성을 법제화할 수 있도록 종단에 요구하고 있다.

김재영 : 재가운동하는 분들에게 부탁한다. 승단을 비판하되 매몰되지는 말아야 한다. 또 재가역량을 끊임없이 확대해 가야 한다. 그것이 스님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재가지도자 육성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재가가 한국불교의 희망이기 때문에 정예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게 시급한 목표가 돼야 한다.

김영란 : 모든 힘은 누가 부여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나온다. 내가 부처님의 제자라는 것, 부처님 법을 받들고 수행하고 있다고 하는 스스로의 각성이 필요하다. 그런 분들이 있지만 소수이기 때문에 흩어져 있는 재가 역량을 모으고 결집해야 한다.

정리 = 이창윤 기자

이창윤 기자 budjn2009@gmail.com

<저작권자 © 불교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특집] “2016년 한국불교, 이렇게 바뀌었으면”
--

--
순결담론과 성의 상품화에 대한 불교적 관점 / 옥복연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옥복연  byok2003@hanmail.net
1. 들어가기

   
옥복연
종교와 젠더연구소 소장

얼마 전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 피해 사실을 고발한 이후,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는 미투 운동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기독교나 천주교 역시 여성 신자의 폭로가 이어졌지만, 유독 불교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이는 성범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피해를 당하고도 여전히 ‘말하기’를 꺼리는 것으로, 불교는 피해자가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억압적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불교계에서 왜 미투 운동이 일어나지 않는지 의아해하면서도, 나름대로 저마다 그 이유를 추측하기도 했다. 붓다가 세속적 욕구를 버리고 출가한 것처럼 불교는 세속적인 일에 관심이 없다거나, 모든 일이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해결되므로 애써 개입할 필요가 없다거나, 붓다가 사회개혁가가 아닌 것처럼 불교는 여성의 지위나 성차별 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관심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불교계의 반응은 다양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가해자를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굳이 지난 과거를 들추어낼 필요가 없다는 ‘과거 묵인설’, 전생에 나쁜 업을 저질러서 이런 일을 당했다는 ‘피해자 업설’, 불자로서 자비를 베풀어야지 복수를 하면 안 된다는 ‘자비 실천설’, 그리고 여자가 유혹했으니까 성폭력도 일어난다는 ‘여성 유혹설’ 등도 있었다.

그런데 가부장제하의 순결담론은 성의 상품화와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즉, 성별 권력이 작동하는 성규범(性規範) 아래서는 남성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고, 순결한 여성을 지킬 수 있다는 이유로 성을 거래하는 행위를 합법화한다. 그 때문에 우리나라는 2004년 ‘성매매특별법’의 시행으로 성매매가 불법이 되었지만, 마사지업소나 휴게텔, 키스방, 귀청소방 등 변종 업종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영화나 게임, 만화 등에서도 ‘보이는 성’은 언제든지 ‘사고팔 수 있는 성’으로 유혹한다. 그리하여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하에서 성매매 여성은 필요악이 되는데, 섹스와 쾌락의 역학관계는 무한한 경제적 이익에 의해 보장되고 대체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대상화, 상품화되는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주의가 등장했다. 불교 내 성평등을 추구하는 불교여성주의도 여성이 억압받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각과 함께 이러한 억압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변화 가능함을 인식하고,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여성해방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온 생명의 존귀함과 평등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2,600년 전 가부장제 인도 사회에서, 불교는 순결이나 성의 상품화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었을까? 기녀가 당연시되었던 사회에서 성을 사고파는 행위에 대해 경전에서는 어떻게 전해 내려올까?
이 글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순결 담론과 성의 상품화는 동전의 양면처럼 나타나는 가부장제 성규범에서 필수적인 현상임을 분석하고, 경전에 나타난 순결 이데올로기와 성의 상품화를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해오는 경전에는 순결과 관련된 가르침이 많지 않기 때문에,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윤리인 오계(五戒,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의 계율) 가운데 하나인 ‘불사음(不邪淫)’을 통해 알아볼 것이다. 왜냐면 ‘사음’에 대한 정의를 통해 무엇이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인지 분명히 알 수 있고, 또한 ‘순결한 성관계’의 의미를 통해 순결과 성의 상품화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불사음’과 관련해서는 인도의 대승불교 승려인 나가르주나가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불교계의 대표적인 논서이자 백과사전인 《마하프라즈냐파라미타사스트라(Mahaprajnaparamitasastra, 대지도론)》 프랑스어판을 참고로 할 것이다. 또한 이 책을 구마라습이 한문으로 번역하고, 석법성이 한글로 번역한 《대지도론》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과 관련된 주요 내용은 붓다의 원음에 가깝다고 알려진 초기경전 니까야를 참고할 것이다.


2. 가부장제적 성규범: 순결담론과 성의 상품화

1) 가부장제와 성담론의 변화

가부장제(patriarchy)는 고대 로마의 가장권(patria potestas)과 유사한 형태로 출발했는데, 남성 가장은 가족, 특히 여성을 사고팔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절대적 지배자였다. 삼종지도, 열녀, 여필종부 등은 여성의 필수 윤리였고, 여성의 기능에 따라 아내, 하녀, 여성 노예, 기녀 등 여성 내부의 위계도 존재했다. 이러한 여성의 지위는 2,600여 년 전 붓다 재세 시 인도 사회와 매우 유사했음을 당시 인도 사회의 법과 규범을 제시한 《마누법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여성의 본성이 어리석고 악하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하는 이 법전은 여성의 순결을 당연시하지만, 남성의 성충동을 해소하기 위한 기녀의 존재도 자연스러웠다. 즉, 가부장제는 순결 이데올로기와 성의 상품화가 당연한 성규범으로 남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특정한 사회의 성적 관습이나 규범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사를 통해 보면, 신라시대는 공주와 평민의 사랑 이야기인 〈서동요〉가 전해오며, 김유신 부모의 연애결혼 사실과 김유신의 누이 문희와 김춘추의 연애담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고려 말 원나라가 침공하여 조공으로 젊은 여성을 요구하면서 이를 피하기 위해 조혼제도가 급격하게 성행하기 시작했고,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로 변해갔다.

유교가 정착된 조선은 후기부터 부부유별, 남녀칠세부동석, 칠거지악과 같은 ‘순결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며 성규범을 법과 제도로 규제하는 순결담론은 여성을 출산과 육아의 주체인 ‘부인’과 남성에게 성적으로 서비스를 하는 첩이나 기생 등으로 이분화하기 때문에, 여성의 성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한국사회에서 순결담론은 1920년대 신여성의 등장과 함께 ‘자유연애 담론’과 경합하게 된다. 교육받은 전문직 젊은 여성인 이들 신여성은 축첩과 조혼, 과부 수절 등은 낡은 관습이라며 거부하고 자유연애를 주장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신여성으로 최초의 여류 화가, 여류 소설가 그리고 이혼녀였던 나혜석은 1934년 발표한 〈이혼고백서〉에서,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인간임을 주장했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이렇게 남성이 제시한 법과 규범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던 당시 다수의 신여성들은 ‘나쁜 여자’로 낙인찍히고 가정과 사회에서 쫓겨나는 처벌을 받기도 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이 중시되면서 국가 주도의 출산억제 정책으로 인해 적게 낳아 건강하게 키울 것을 강조하는 ‘성적 건강권 담론’이 등장했다.

한국사회에서 성담론이 쏟아져 나오게 된 계기는 1980년대 발생한 부천서 여대생 성폭력 사건이나 노동운동의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행해진 일련의 성폭력 사건들이다. 한국 여성운동의 발전으로 인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거나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남성 중심적인 성문화에 도전하였고, 보수적인 지배문화에 저항하였다. 한국사회에 페미니즘이 등장한 1980년대 중반부터 성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여성의 성적 억압이 여성억압의 핵심 기제가 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억압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남성 중심적인 성문화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제기 속에서 다양한 성담론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순결담론과 경합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90년대에 들어서면, 여성의 몸은 아기를 낳을 몸, 아기를 낳는 몸, 그리고 아기를 낳은 몸이므로 소중하다는 ‘생명 중심 성담론’, 2000년대에는 스스로 성적 행동을 선택하고, 그 행동에 대한 책임성을 부여하는 ‘성적 자기결정권 담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후 우리 사회에서 여성운동의 발전과 함께 반(反)성폭력이 공식 담론으로 등장하는데, 성을 매개로 하는 개인적, 집단적 억압의 원인을 밝히며 성폭력을 젠더 권력관계로 분석하며, 나아가서 성평등을 추구하는 ‘성평등 담론’이 등장했다. 특히 여성부의 성인지적 정책의 수립과 시행 과정에서 양성평등이 강조되고 성차별적,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권력관계와 심리 구조를 해체하고 여성 차별적 요인들을 제거함으로써 여성 내부에서 내면화된 성별 권력관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시도했다. 하지만 최근의 미투 운동에서 ‘여자가 유혹했으니……’ ‘제 발로 호텔에 들어와서는……’ 등의 댓글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순결담론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2) 여성의 섹슈얼리티 통제와 성의 상품화

역사학자 거다 러너에 의하면 성을 사고파는 관습은 기원전 사원 매춘이 기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원 매춘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풍요의 숭배의식의 한 과정으로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최고의 권위를 가진 여사제들에 의해 집행된 종교의식이었으므로 오늘날의 매춘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달랐다. 성매매의 본격적인 도입은 기원전 2000년경, 부족 간의 전쟁으로 인해 노예제가 확립되면서 일부 노예 소유주들이 자신의 여자 노예를 매춘부로 만들거나 빈곤한 농민들의 딸들이 가족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되면서 상업적 매춘이 자리 잡게 되었다.

러너는 사유재산의 소유와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중산층 가족의 여성 성통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고대문명의 맹아기에 친족집단의 재산 소유와 부계제의 출현이 여성의 출산력과 생산력을 함께 사유화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녀는 모계 중심 사회보다는 모처 거주제와 남성에 의한 생산력의 소유 및 통제로 인해 여성의 예속은 고대부터 이미 효율적인 제도로 확립되었던 것으로 주장한다. 부족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남성 전쟁포로는 죽임을 당했지만, 여성은 정복 부족의 집단으로 받아들여져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혹은 성적 노예로 취급받게 되었다. 여성을 노예로 다스려본 경험은 노예제의 기반이 되기도 하는데, 부계 중심 체제가 권력 확장을 위한 기반으로서 확립되었고, 고대국가가 형성되자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위를 자식에게 상속시키면서 권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결혼 체계가 정교화되면서 여성이 직접 교환되기도 했으며, 여성들 중에서도 정숙한 여성과 성적 도구로서의 노예 여성으로 이분화했다. 또한 부인과 대역 부인, 여자 하인과 첩, 여성 노예 등 한 남성에 속한 여성들 간의 위계화 과정은 여성들 간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집단적 저항이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기관의 통제, 종교, 법, 신화, 상징체계, 공사 영역의 분리들로 성(Sexuality) 통제를 내면화했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즉, 여성의 성은 상품으로서 드러내놓고 사고파는 것이 당연시된 것이다.

엥겔스는 재산의 소유와 함께 노예 노동과 임금 노동이 발생하고, 여자 노예나 빈곤한 자유민 여자가 매춘녀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매춘이 양면성을 띠고 있다고 보는데, 한편에서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게 해주는 측면이 있고, 남성의 성적 자유를 보장하면서 남성 지배를 사회의 기본 법칙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실제로 성은 개인의 영역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성은 사회적으로, 공적으로 통용된다. 예를 들면 푸코는 개인의 섹슈얼리티에 권력이 어떻게 개입했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푸코는 역사적으로 성은 억압되어 왔으며 그 억압의 동기를 권력의 통제로 보았다. 18세기 말 어린이의 성, 성도착 등에 대한 관심의 급증은 비정상적인 성을 엄격히 통제하겠다는 권력의 의지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러한 권력이 문제적 성의 위기의식을 심어주면서 각 가정의 성을 권력이 통제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린이의 자위행위 등 여러 가지 변태적 성을 의학의 대상으로 부각시켜, 출산을 통한 부부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인구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퇴폐적 쾌락을 정신병으로 규정함으로써 결혼제도 속에서 자녀 출산을 위한 성을 정상적인 성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아무런 제재 없이 여성의 성은 상품으로서 사고팔기가 행해졌다. 19세기로 넘어오면서 성매매는 사회적인 교류보다는 성기 중심의 성적 서비스 제공을 강조하는 상업적인 성이 등장했는데, 도시 노동계급 남성이 증가하고 성비가 불균형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여성의 임금 노동이 감소하여 여성의 성적 서비스만을 제공하는 성매매가 증가했다고 본다. 상업적 성은 시장, 국가, 위생주의, 상업적 효율성과 공공성을 강조하는 여러 기관에 의해 점점 더 구조화되면서 근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다양한 형태의 성매매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3) 경전에 나타난 성적인 존재로서의 여성

디가니까야의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이 나온다. 이 세계가 생성하는 시기에 대부분의 뭇 삶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져서 기쁨을 먹고 스스로 빛을 내며 허공을 날아다녔지만, 균류나 바달라따초, 그리고 쌀 등 단단한 음식을 먹게 되자 몸에서 빛나던 광명은 사라지고 몸이 거칠게 변하면서 남녀의 성기가 나타났다고 한다. 즉, 남자와 여자는 단지 몸의 생김새가 다를 뿐이고, 어느 몸이 우등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위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녀가 자신과 다른 몸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자신과 다른 성에 대한 성욕이 생겨나 성관계를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처럼 음식에 대한 욕망에서 남녀의 성 기관이 생기고, 그 결과 성욕이 발생한다는 연속적인 연관성 때문에 ‘불만족’이라는 번뇌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성적 욕구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 가부장적 사회에서 태동한 종교인 불교는 남녀 이분법적인 성규범을 제시할까? 불교에서는 성욕을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인정하며, 금욕이 깨달음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라고는 제시하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으로 이끄는 성욕 그 자체가 죄악이 아니라, 해탈이라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를 억제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의 《여자의 경》과 《남자의 경》에서도 알 수 있다.

아난다, 나는 여자 이상으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어떤 소리나 냄새도, 맛도, 감촉도, 여자와 관계된 것 이상으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없다.
……
마찬가지로 아난다여, 나는 남자 이상으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소리나 냄새도, 맛도, 감촉도 남자와 관계된 것 이상으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없으리라.

《여자의 경》에서는 남성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대상이지만 《남자의 경》에서는 여자가 그 대상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붓다는 여성 또한 성적인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성적 행위에서 재가신자는 ‘오계’ 가운데 ‘불사음계’, 즉 성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합법적인 아내/남편이 상호존중하며 성관계를 한다면 이는 순결한 성관계이며, 아내는 물론 남편도 배우자에게 순결해야 함을 가르친다. 부부 사이의 성평등을 강조한 이 가르침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 매우 파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재가신자와 달리 붓다는 출가자에게 철저한 금욕을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조직의 기강을 위한 규범 체계나 윤리조항일 뿐만 아니라, 수행을 방해하며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금욕할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출가자에게 ‘사음’은 참회를 해도 용서받을 수 없으며 다시 승가로 돌아올 수도 없는 큰 죄(바라이죄)이다.

재가자가 지켜야 하는 ‘오계’ 가운데 ‘불사음계(不邪淫戒)’는 불자가 지켜야 하는 성규범인데, 그렇다면 사랑을 나눔에서 잘못된 행위, 즉 ‘사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율장에서는 사음의 정의를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행위’, 즉 후춧가루만큼의 양을 넣어도 ‘행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율장에는 불사음과 관련된 승가의 처벌로 바라이죄를 설명하면서, 세 종류의 여인을 설명한다. 즉, 음행을 하는 대상인 여성은 인간 여성, 천신 등 비인간 여성, 그리고 축생의 암컷을 의미한다. 물론 세 종류의 남자(인남, 비인남, 축생남)도 음행의 대상에 포함된다. 음행을 하는 장소로는 여성의 항문, 요도, 그리고 입이라는 3가지 기관을 칭하고 있는데, 율장은 성적 행위와 관련된 규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3. 가부장적 성규범에 대한 경전적 해석

1) ‘잘못된 성관계’ 보호와 금기의 경계

‘오계’ 가운데 ‘불사음계’는 불자가 지켜야 하는 성규범인데, 초기 경전인 맛지마니까야의 《쌀라 마을 장자들에 대한 경》에서는 성관계를 해서는 안 되는 여성에 대해 나온다.

사랑을 나눔에 잘못된 행위를 합니다. 어머니의 보호를 받고 있고,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고,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고, 형제의 보호를 받고 있고, 자매의 보호를 받고 있고, 친족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이미 혼인했거나, 주인이 있거나, 법의 보호를 받거나, 심지어 약혼의 표시로 꽃다발을 쓴 여인과 관계합니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열 가지 유형의 여성과는 성관계를 금하고 있는데, 아버지나 남편, 아들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자매의 보호 아래 있는 여성도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어 집안 여성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불교가 사회법보다 여성의 인권보호에 훨씬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불사음과 관련된 내용은 초기불교 이후 등장한 대승불교의 대표적 논서인 나가르주나의 《대지도론》에도 나오는데, 이 논서에 의하면 ‘사음(邪淫, Kāmamaithyācāra, 잘못된 성관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만약 여성이(strī)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있고(pitṛrakṣitā), 어머니의 보호를 받고 있고(mātṛ-), 형제(bhrātṛ-)의 보호를 받고 있고, 자매의 보호를 받고 있고 (bhaginī-), 남편의 보호를 받고 있고(pati-), 아들의 보호를 받고 있고(putrarakṣitā), 법의 보호를 받거나(loka-dharma), 왕의 법의 보호를 받고(rājadharma) 있다면, 이런 여성과 성관계를 하면 ‘사음(Kāmesumicchā cārī)’이다.

성관계와 관련된 여성(strī)은 소녀들(kūmarī)이 아닌 것으로 보아, 여자아이가 아니라 성인여성을 대상으로 함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법(dharma)의 보호를 받는 여성과 왕의 법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은, 출가한 비구니(pravrajitastrī)와 아직도 집에 머무르고 있는 여성(gṛhasthā) 가운데 밤낮으로 계를 지키는 여성(rātridivasaśīla), 즉 재가 여성 신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서는 성적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대상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만약 힘(bala), 재물(dhana) 또는 속임수(vañana)로 유혹했다면, 혹은 어떤 사람의 아내(kalatra)라 할지라도 계를 받았거나(samādānaśīla), 임신했거나 (garbhiṇī), 젖먹이를 키우고 있거나(pāyayanti), 혹은 금지된 방법으로(amārga) 성관계를 하는 것도 잘못된 성관계이다. 기녀(gaṇikā, veśyā)에게 약혼의 표시로 꽃장식(mālāguṇaparikṣipta)을 주면서 원하는 것은 ‘사음(Kāmesu micch-ācārī)’이고, 이처럼 갖가지를 범하지 않는다면 ‘불사음(kāma mit-hyācāravirati)’이라 한다.

성관계를 해서는 안 되는 여성을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으로 비교하면, 맛지마니까야에서는 거론되지 않았던 남편과 아들이 《대지도론》에서는 포함된다. 이는 초기불교보다는 대승불교로 넘어가면서 가부장성이 보다 명백하게 제시된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친족으로부터 보호받는 여성이 《대지도론》에서는 빠진 반면, 아래의 표처럼 초기 경전에서는 거론되지 않았던 성관계를 금지하는 여성 유형이 일곱 가지나 더 첨가되어 있다. 성관계를 금지하는 여성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보호하고 존중하는 여성이 증가한 것으로 여성의 인권이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초기불교보다 대승불교에 이르러 여성의 지위가 더욱 높아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 ‘성의 상품화’로서의 ‘사음(邪淫)’

《대지도론》에서 금지하고 있는 ‘사음(邪淫)’은 오늘날의 성범죄 범주와 매우 유사하다. ‘힘으로 범하는 것’은 오늘날의 ‘성폭력’, 즉 성희롱, 성추행(강제추행), 성폭행(강간)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결혼한 부부일지라도 ‘아내가 임신했을 때, 젖먹이를 키울 때, 그리고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의 성관계를 금지하고 있다.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이라 함은 성기가 아닌 기관에 성관계를 하거나, 부인이 싫어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것으로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부부강간’과도 유사하다. 당시 인도 사회는 아내는 남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붓다는 아내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삿된 음행으로 규정할 정도로 여성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재물(dhana)’을 주거나 ‘꽃장식을 기녀(gaṇikā, veśyā)에게 주면서’ 범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매매’와 유사한 개념인데, 이는 삿된 음행이라고 붓다는 규정했다. 붓다 제세 시 인도 사회는 웨시야(vesiyā), 가니까(gaṇikā), 나가라소비니(nagara-sobhinī) 등으로 불리는 다양한 기녀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전한다.
고급 기녀 가운데 망고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암바빨리가 있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워 이웃 왕자들이 서로 차지하려는 바람에 전쟁이 일어날 정도여서, 원하는 남성들은 누구나 그녀를 안을 수 있도록 국왕이 기녀로 만들었다고 한다. 즉 공창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암바빨리는 아름다운 미모에 춤과 노래, 악기 연주에도 능숙해서 많은 남성이 모여들어 그 도시가 번창할 정도였다고 하며, 신하들은 왕에게 국가 재정을 위해 더 많은 기녀를 유치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녀는 기녀 생활로 엄청난 돈을 벌어 붓다께 숲을 통째로 기증하기도 했으며, 훗날 출가해서 아라한의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 또 다른 유명했던 기녀 살라바띠는 국왕이던 빔비사라왕이 종종 찾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그녀 역시 나라의 재정을 확보할 목적으로 만든 기녀였다. 이처럼 국가가 관리하는 공창과 함께, 개인적으로 몸을 파는 기녀도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인도 사회에서 성의 상품화가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붓다는 이러한 기녀에게 그 직업을 비난하거나 꾸짖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웃따라가 붓다께서 참여하는 안거를 가기 위해, 자기 대신 남편에게 시중을 들도록 기녀 시리마를 집에 데리고 왔다. 웃따라는 붓다의 재가 10대 여성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붓다께서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이라고 칭송한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이 기녀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는 것은 아내가 집을 비울 때 당시 관습은 아내를 대신할 여자를 데려다 놓아야 했음을 짐작할 수 있고, 그러한 임시 아내 역할을 기녀도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녀인 시리마가 웃따라 대신에 아내의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아내의 지위가 취약했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시리마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웃따라에게 기름을 끼얹고 난 후 용서를 빌었을 때, 웃따라는 그녀를 데리고 붓다께 갔다. 하지만 붓다는 시리마가 성을 파는 기녀라고 비난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르침을 설해서 시리마가 그 자리에서 수다원과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두고 마치 붓다가 성매매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앙굿따라니까야의 《판매의 경(Vaṇijjā-sutta)》에서 붓다는 다섯 가지 장사를 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즉, 무기, 사람, 동물, 술, 독약 장사를 금지했는데, 사람 장사란 빨리어 주석서에서 ‘사람을 파는 것(manussa-vikkava)’으로 설명한다. 인신매매는 물론이고 여성의 성을 사고파는 것 또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붓다는 성매매를 금지했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결코 성매매를 모른 척하거나 용인하지 않았으며, 이를 ‘잘못된 성관계’로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3) 아내의 위계화와 베일의 정치학

붓다 제세 시 인도 사회에는 다양한 유형의 아내가 존재했는데, 《근본유부율》에서는 열 가지 종류의 아내를 설명하고 있다. 즉 재물로 산 아내, 욕망으로 데려온 여자, 물건 등을 주고 데려온 여자, 의복을 주고 데려온 여자, 부모나 보호자가 결혼시킨 여자, 생계가 어려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 여성 노예를 아내로 삼은 여자, 하녀를 아내로 삼은 여자,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아내가 된 여자, 잠시 빌린 여자 등이다. 재물이나 의복, 물건 등을 주고 아내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성의 상품화와 동일한 맥락이다. 아내의 유형 가운데 마지막 유형인 잠시 빌린 여자는 시리마의 경우처럼 기녀로 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욕망 때문에 여자를 아내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다양한 아내들의 위상은 각기 다르게 자리매김된다. 여성역사학자 거다 러너는 여성들 간의 위계는 가부장 사회에서 귀족이나 평민 등 신분제도가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왕족이나 귀족계급은 남성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아내나 딸들의 성을 엄격하게 규제하는데, 이처럼 지체 높은 집안 딸들의 순결은 재산이나 지위로 맞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존중받는 여성’인 반면, 하녀나 유녀 등은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들은 그들의 성을 겁탈하거나 돈으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중기 아시리아법 40조에는 ‘존중받는 여성’과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을 구분하기 위해 여성에게 베일을 씌웠다. 베일은 존경받는 여성의 표시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슬람 사회에서도 여전히 베일이 전승되고 있다.

베일은 불교 경전에서도 등장한다. 부처님이 싯다르타 태자이던 시절, 태자비 야소다라는 결혼 직후 싯다르타의 궁전으로 들어올 때 베일 쓰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라 붓다의 뛰어난 10대 재가 여성제자 가운데 교단의 어머니로 칭송받았던 위사카도 결혼해서 시댁으로 들어올 때 베일로 얼굴을 감싸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왔다. 이 두 여성처럼 베일을 거부한 여성의 삶은 기존 여성들의 삶과는 달리 매우 당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베일로 구분되는 여성들 간의 차별을 엄밀하게 살펴보면, 이들은 출신 성분이나 계급보다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남성의 숫자에 따라 구분됨을 알 수 있다. 한 남성을 위해 성적 서비스를 하는 여성들은 베일이 씌워지고 ‘존중받을 만한 여성’들로 인정받았고, 여러 남자와 성적 행위를 하는 여성들은 ‘공공의 여성(public women)’이 되어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이 되었다. 또한 이들 여성에게는 서열이 존재했다. 최상층에는 결혼한 숙녀나 그녀의 미혼 딸이 있고, 그 아래 결혼한 첩이 있으며, 맨 아래에는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으로 분명하게 표시된 매춘부와 여성 노예가 있다. 즉, 법은 여성과 관련된 규칙을 정했을 뿐만 아니라 매춘부가 베일을 쓰면 법으로 엄격하게 처벌할 정도로 국가가 법과 제도로 여성들을 서열화했다.

그렇다면 붓다는 아내의 유형을 나누고 위계화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을까? 재가자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 담긴 디가니까야의 《씽갈라에 대한 훈계의 경(Siṅgālovāda Sutta)》에서 붓다는 우리에게 《육방예경》으로 알려진 아내와 남편의 상호 의무를 가르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고, 경멸하고 모멸하여 말하지 않고, 바람을 피우지 않고(anaticāriya), 권한을 넘겨주고, 장신구를 사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여기서 ‘바람을 피우지 않고’에 대한 주석서의 상세한 설명은 “그녀를 넘어서서 밖으로 다른 여성에게 믿음을 주고 사귀는 경우 신의를 저버린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표현한다.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의 의무도 이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아내는 맡은 일을 잘 처리하고, 하인이나 주위 사람들을 잘 챙기고, 바람피우지 않고(anaticārinī), 가산을 잘 보호하고, 모든 일에 숙련되고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즉, 붓다는 아내만이 아니라 남편도 동일하게 배우자에게 상호존중하면서 다른 이성을 사귀지 말고 서로에게 충실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4. 나가기

2,600여 년 전, 인도 사회는 가부장적 이중적인 성규범으로 여성의 지위가 매우 열악했다. 여성에게 순결을 강조했지만, 여성을 위계화하여 아내와 기녀로 나누었고, 그 결과 남성은 성적 쾌락을 위하여 여성의 성을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붓다는 불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오계 가운데 ‘불사음계’를 포함시켜, 사랑을 나눔에서 잘못된 행동을 삼갈 것을 요구했다. 잘못된 성관계는 독을 가진 뱀 또는 막기 어려운 큰 불과 같은 재앙(upa-drava)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아내는 물론 남편도 배우자를 존중하고 상호 배려하는 성관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당시 인도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만의 순결, 성의 상품화, 아내의 위계화 등 가부장적인 이중적 성규범을 배격하였다. 붓다는 맛지마니까야의 《평화에 대한 분석의 경》에서 수행자들에게 “저속하고 비속하고 거칠고 천박하고 무익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과 관계된 즐거움에서 오는 쾌락을 추구하는 자라면, 누구나 고통을 수반하고 상처를 수반하고 불안을 수반하고 고뇌를 수반하는 것으로 잘못된 길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남녀 모두 쾌락을 추구하는 자라면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붓다는 만약 ‘사음’을 하면 부부 불화가 일어남은 물론, 선한 성품이 줄어들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재산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내생에 자신도 동일한 업보를 받는다고 한다. 또한 부인을 외롭게 하여 부부 사이에 신뢰를 잃고,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은 물론, 친척들로부터 배척당한다고 한다. 더 나아가서 《숫타니파타》의 《파멸의 경》에서는,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vesiyā)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랑을 나눔에서 잘못된 행위는 파멸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한 붓다는 가부장제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절대적 권리를 가지며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거나 여성을 성적 도구로 취급하여 사고파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의 《결혼생활의 경(Paṭh-amasaṃvāsa sutta)》에서 붓다는 여러 종류의 결혼 가운데 삿된 음행을 삼가며 오계를 지키는 남성과 여성의 결혼을, 마치 신(神, deva)과 같이 훌륭한 남자와 여신처럼 존귀한 여자가 성스럽고 고귀하게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신과 여신이 만난 결혼”으로 부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부는 현세에서도 즐거움이 끊이지 않고 다음 생에서도 천상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도 예언했는데, 이처럼 붓다는 부부간에 상호존중하며 서로에게 충실한 평등 부부가 될 것을 강조했다.

불교는 ‘고(苦)’를 강조하기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이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남이 아니라 ‘나’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선업(善業)이란 나도 좋고 남도 좋고 나와 남이 좋은 행위를 말하고, 악업(惡業)은 나도 나쁘고 남도 나쁘고 나와 남도 나쁜 행위를 말한다. 즉, 모든 것이 ‘나’의 행복에서 출발해서,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붓다는 남성의 성충동을 위해서 여성의 성을 도구화하고, 여성은 무조건 남성에게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가부장적 성규범을 2,600여 년 전에 이미 극복하고 있다. 남녀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남편과 아내는 상호존중하고 배려하는 평등 부부라는 부부관을 제시한 것이다.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신(神)들과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는 붓다의 전도 선언도 불교가 얼마나 성평등을 주장하는 종교인지 분명히 보여준다고 하겠다. ■

 

 

옥복연
종교와 젠더연구소 소장. 미국 코네티컷주립대 석사, 서울대학교 박사(여성학 전공). 서울대 여성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민대 강사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붓다의 10대 재가 여성제자에 대한 불교여성주의적 분석〉  〈경전에 나타난 여성혐오적 교리의 재해석〉 등이 있고, 저서로 《붓다의 길을 걷는 여성》(공저) 《불교와 섹슈얼리티》(공저) 등이 있다. 여성의 관점으로 경전을 읽고 교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다.

--
성폭력 문제 이해와 한국불교 권력구조 / 조승미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조승미  namuhan9@naver.com
1. 미투: 시대정신으로서의 공감과 연대

   
조승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성폭력이라고 하는 판도라 상자가 열린 듯하다. 오랫동안 꾹꾹 눌려 지하에 있었던 것들이 세상에 마구 쏟아지고 있다. 정치, 예술, 학계, 종교를 막론하고 명망 있는 인사들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폭로되면서 많은 사람이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우리는 이 폭로들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 얼마나 많은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고, 피해 여성들의 삶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짓밟아왔는지 함께 듣고 목격하는 중이다.

과거에도 성폭력 사건은 일어났고 고발 또한 없지 않았지만, 최근의 이 성폭력 고발 운동 즉, 미투(#Me Too)는 예전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은 피해자가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면서 동시에 가해자의 신분과 함께 가해 사실을 폭로한다. (물론 모든 피해 여성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는 것은 아니며,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성폭력이 주로 과거에는 비밀이 보장되는 치료공간에서 이야기되었다면, 미투는 이것을 공개적으로 실명 폭로하여 많은 사람이 알게 하였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또 다른 피해 여성으로부터 ‘미투, 나도 당했다’는 연대 지지를 얻는 방식이다. 즉, 미투 운동은 이처럼 공개성과 연대성을 통해서 강한 파급력을 가지게 된 것인데,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바로 시민들의 ‘함께함(with you)’이다.

미투의 이와 같은 성격들이 가능하게 된 물적 조건으로 사회적 연결망 즉 SNS(Social Network Services)가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정보를 중앙에서 관리하는 기존 미디어 시스템에서는 검열과 억압 등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정보를 횡적으로 소통하는 소셜 네트워킹 시스템 속에서 여성들의 외침이 그대로 전파되었고 또 그들의 이야기가 곧바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작년 2017년 미국에서부터였는데, 우리 사회에 곧바로 전달되어 전파되는 배경에 이러한 사회 연결망 활성화의 영향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변화가 정치 지형을 포함한 많은 시대적 변화까지 이끌고 있다는 점은 여러 전문가가 이미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물적인 조건을 바탕으로, 의식적인 변화 역시 이 운동에서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사회는 최근 촛불혁명으로 민주의식이 한층 더 성숙해져서, 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감수성이 높아졌다. 이 때문에 성폭력 사건에서 작용하는 권력남용의 문제와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이 커지면서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미투 운동은 촛불의 연장선이며, 미국 유럽에 이어 한국에서 유독 미투가 빠르게 확산되는 것도 이 요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촛불혁명을 통해 공감과 연대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키는지 목격했다는 것이다. 미투는 단지 성폭력 가해자를 폭로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지 않다.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조직 내에서 불가피하게 침묵해야 했거나, 문제를 제기하면서 더 큰 불이익을 받고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렇게 조직 내에서 무시되면서 해결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신의 부당한 경험에 대해 사회적 고발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의 말하기 자체가 치유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치유는 각성된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를 통해서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정의의 회복을 위한 사회적 치유의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미투 운동을 불편한 폭로 그리고 개인적인 일탈과 성적 스캔들 문제로만 제한하여 바라보아서는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와 지향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투에 대한 공감과 연대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시민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이 운동과 어떻게 사상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불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다음의 경전 말씀이 여기에 잘 부합하지 않나 생각한다.

모든 생명은 폭력 앞에서 떨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내가 그것을 두려워하듯 남도 그러하니, 그 누구도 괴롭히지 말라.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하여 남에게도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는 윤리적인 준거는 인간의 가장 성숙하고 합리적인 태도를 이끌어낸다. 폭력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경구가 있을까. 불교의 생명사상은 이처럼 폭력에의 두려움이라는 공감에 기반하여 제시되어 왔다.

성폭력은 폭력의 문제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의 욕망을 관철하려고 하는 행위이며, 이때 성(sex, sexuality)이 매개가 되어 일어난 폭력이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불교의 관점이 성폭력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도록 막는 요소는 무엇인지, 미투의 목소리를 통해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보도록 하자.


2. 성폭력 문제에 대한 이해와 발생의 구조 분석

1) 성폭력과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

성은 친밀한 관계의 표현이자 쾌락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행위이기 때문에, 성폭력 또한 쾌락의 시각에서 종종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은 실제로 자신의 의사에 반한 이 강압적 행위에서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의 무력감을 경험하는 죽음과도 같은 폭력을 느낀다. 성폭력 피해자들 가운데 종종 자살을 시도하거나 실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은 이것이 ‘인격 살해’라고도 불릴 정도의 폭력성을 갖기 때문이다. 즉, 성폭력의 문제는 성의 문제로 보기보다 폭력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례가 있다. 소위 야한 농담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하는 성희롱을 잘하는 불교계 인사가 있었다. 남녀가 여럿이 동석한 자리에서 그의 언어 성희롱이 길어지자, 한 여성이 참다못해 이를 더 노골적인 성적 이야기로 맞받아쳤다. 사람들은 인제 그만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에 한바탕 웃고 말았으나, 그 남자 인사는 얼굴이 매우 굳어졌고 이후 뒤에서 그 여자의 입이 더럽다며 매우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그가 단지 성적 희롱을 즐기는 것이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태도이다. 자신이 들으면 불쾌한 소리일망정 남에게 함부로 떠들어댈 권력이 자기 이외에 있지 않다는 지독한 만용이었다. 성희롱 역시 성보다 권력과 연관된 폭력의 문제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 또한 심각하다. 일반적으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연민은 대체로 심한 육체적 손상을 초래하여 무력하게 된 경우 즉, 전형적인 피해자일 경우에만 적용되곤 한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이 같은 사회적 고정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무력한 여성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거나 때로는 적극적으로 피해를 폭로하고 개선하려고 행동하면 뭔가 불순한 동기를 가진 것으로 의혹의 시선을 받게 된다. 성폭력 피해자가 적지 않은 고통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을 나약한 모습으로만 규정하고자 하는 의식은 또 하나의 젠더 이데올로기라고 지적된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서 불교인들이 종종 보여주는 편견이 있어 사례와 함께 소개해 보고자 한다. 몇 해 전, 주지 스님들 연수교육에 ‘현대사회의 성문제와 불교’를 주제로 강의하게 되어, 관련 주제에 대해 스님들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강의가 끝나갈 무렵 한 비구니 스님이 내내 답답한 표정을 짓더니 질문했다. 스님의 먼 친척뻘 되는 미성년 여자아이가 원조교제를 하는 등 문제를 일으켜서 억지로 절에 와 있는데, 도통 이 아이를 교육할 방법이 없다는 호소였다. 스님이 “네 업이 두터우니 참회의 절을 하라.”고 하였더니 더 어긋나서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그 스님에게 원조교제를 한 미성년들의 경험은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는 연구보고를 말씀드렸다. 시간이 많지 않아 긴 이야기를 하지 못했지만, 그 스님은 순간적으로 표정이 누그러지며 진지한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다음 주에 이어진 강의 시간에 매우 밝은 표정을 지었는데, 스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아이에 대해 처음으로 찡하는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드디어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스님들은 출가자로서 중생구제의 서원을 세우기 때문에,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연민의 마음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는 것을 보곤 한다. 하지만 종종 스님들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연민이 발휘되기보다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문제에서 그 고정관념은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성의 일탈이라는 나쁜 업을 참회하는 것은 분명 불교의 중요한 수행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업의 문제 이전에 그들이 고통에 빠져 있다는 사실과 그 고통이 어떤 성격인가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가 분노에 가득 차 남성 전체를 적대시하고 우리 사회를 갈등으로 분열시킨다는 우려 내지 비난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런 견해를 점검하기 위해 다시 성폭력 피해자가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동기로 이 폭로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고통은 물리적인 폭력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 즉 피해 경험에 대한 트라우마 그리고 자기비하와 우울증, 이로 인한 자살 기도 등이 있다. 사회적인 공포 또한 적지 않은데, 성폭력 문제를 스스로 자초했다는 비난과 오명, 정조 등 여성성이 훼손되었다는 낙인, 특히 자신의 피해 사실 자체를 의심받게 될 두려움이 크며, 보호받거나 구제받지 못하는 절망 등도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명상 프로그램을 통해 필자가 직접 만난 여성들 가운데에서도 적지 않은 수가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하였다. 친족이나 학교 선생님 그리고 직장 상사 등에게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그들의 고통은 대부분 주변에 제대로 얘기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마음에 묻어두고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나 정신적 후유증은 결코 조용히 묻히지 않았다. 이성은 물론이고 사회에서 사람들과 신뢰와 유대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보호해주지 못한 가족에 대한 원망 등으로 가족 관계에서도 문제양상이 나타났다.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리는 경우에서도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는데, 집단적으로 피해자를 왕따 시키고 비난하는 방식의 2차 폭력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에서든 많은 피해 여성에게 고통스러운 문제는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쉬지 않고 작동하는 것이었다. 폭력을 당한 것에 대해 사과를 받기는커녕 보호와 위로도 없고 심지어 자신의 피해사실이 인정되지도 않았던 것에 대해 강한 분노를 느끼지만,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좌절과 무력감에 자기 자신을 끝없이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유독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자신의 시각 확대에 있음을 알아가고 있었다.

미투 폭로 여성들도 한결같이 자기비난의 고통을 말하였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이토록 강한 두려움과 심한 좌절 그리고 자기비난의 고통 속에서도 폭로의 방법을 선택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이 일을 겪지 않도록.”

딸아이의 엄마는 다음 세대에 이런 악습이 전해지지 않게 하려고 용기를 냈다고 한다. 여전히 두렵지만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정의감과 이타적 관심으로 인해 외친다고 그녀들은 말한다. 자신의 분노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러한 용기를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의 외침을 더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2) 성폭력은 어떤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가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 두 가지 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첫째는 가해자의 특수한 일탈이나 병리적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에 더 강한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의 차이는 대체로 젠더의 경향성으로 분석되는데, 여성들은 후자의 방식 즉,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성폭력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현실의 조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포를 느낀다.
성폭력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가를 살펴보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와 연관된 문제인지, 무엇을 개선해야 할 것인지 알 수 있다. 폭로된 내용을 보면 대체로 성폭력은 힘 있는 윗사람이 약자인 아랫사람들에게 저지른 위계에 의한 권력범죄 형태를 띠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의 교수나 학교 교사들이 학생에게, 문화예술계 감독이 소속 배우나 지망생들에게, 군대와 검찰, 직장에서는 상사가 부하에게, 그리고 종교의 성직자들은 신도들에게 말이다.

가해자들은 각각의 분야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어 이를 따르지 않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혹은 지위나 인사에서 막강한 힘을 쥐고 있기 때문에 불이익에 대한 우려, 또는 협박으로 폭력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계적 범죄가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 차별적 성격을 띠고 있음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폭력을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의 구도로 바라보면서 지나친 젠더 갈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94%가 여성이라는 압도적인 비중 속에서 성폭력을 성차별과 무관하게 보는 것 자체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성폭력의 근본적 원인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통제를 정당화하고 여성을 약자로 간주하는 성차별주의에 있다고 지적된다. 실제로 성범죄자들의 여성관을 보면 여성혐오나 여성멸시 의식을 가지는 경향이 매우 높다고 보고되었다. 따라서 성폭력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성차별 제도와 의식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어렵다고 하겠다.

특히 한국사회의 남성 중심의 성문화는 구조적인 젠더 불평등과 폭력성을 매개하면서 유지, 재생산되고 있다. 성적이라는 것이 남성의 관점에서만 구성되고, 여성의 위치가 권력의 우위에 있는 남성의 사적 소유물로서 공고화된다. 그리고 이런 경향이 공고한 사회구조일수록 여성에 대한 폭력이 남성의 욕망과 성적 폭력의 대상인 여성의 위치를 확인하고 재생산하는 기제가 된다고 지적된다.

성폭력이 발생하여 피해 사실을 알려도 문제가 개선되기 어려운 점은 어쩌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부분일지 모른다. 피해 폭로 사례에 따르면 많은 여성이 겪고 좌절한 내용이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성폭력 가해자를 견제하지 못하고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없게 하는 폐쇄적인 구조의 문제이다. 이것은 조직의 가부장적 문화 또는 비민주적인 운영과도 연결된다.

성폭력이 일어난 곳은 대부분 주위의 견제를 받지 않는 왕국과도 같은 곳들이었다. 이 왕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남성이 여성들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군림하였고, 저항하거나 문제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불명예를 씌우거나 나쁜 소문으로 괴롭히고, 불이익과 퇴출 등으로 고통을 주었다. 가해자가 이렇게 함부로 권력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조직은 대체로 묵인하거나 무관심하였는데, 피해 여성이 성폭력을 외부에 폭로할 경우에는 오히려 그 조직이 적극적으로 은폐하거나 방어하는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인권이나 사회정의보다는 조직을 보호하는 것이 더 우선인 조직 중심주의로 인해 성폭력 피해자들이 더 아픈 상처를 받기도 하였으며, 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게 하는 핵심적인 장애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성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의 요소들을 분석해 보면, 성차별을 기반으로 하여 위계 권위주의로 인해 발화되고, 폐쇄적인 조직구조가 이 문제를 지속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한국불교의 권력구조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현재 한국불교계 또한 여타의 종교계와 마찬가지로 성폭력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부분에서 개선과 변혁이 필요한지 도출하는 과제가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3. 한국불교의 성폭력 문제와 권력구조

한국의 미투 운동은 종교 지도자들의 성폭력 가해 또한 폭로하여 세인들에게 더 큰 탄식과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여기에는 현재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가톨릭 신부와 몇몇 개신교 목사 외에도 불교계 승려들까지 포함되어 있어, 종교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양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종교인들의 성범죄는 보통 종교 내적인 계율의 측면에서 먼저 언급되곤 하지만, 검거되어 입건된 비중에서 이들의 범죄가 전문직군에서 가장 높다는 보고가 있어 종교인 성범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즉, 경찰청이 공개한 ‘2010~2016년 전문직군별 성폭력범죄 검거 인원수’ 자료에서는 종교인의 숫자가 의사, 예술인, 교수 등보다 많은 681명으로 1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종교인의 비중과 비슷하게 다음으로 의사 직군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정신적 분야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종교 지도자와 몸과 정신의 건강에서 권위자인 의사가 성범죄 직군의 1, 2위를 나란히 차지한다는 점은 이 문제가 얼마나 위계적 권위구조와 연관되어 나타나는지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종교인들의 성폭력에 대해서는 금욕주의 방식의 독신제도 문제가 늘 함께 제기되어 왔지만, 기혼자인 개신교 목사들의 성범죄도 적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문제의 원인을 그 방향에서 찾는 것은 한계를 지닌다고 본다. 또한 남성의 성적 욕망이 성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견해는 오랫동안 여성주의자들이 도전하고 비판해온 관념이기도 하다. 문제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욕망이 관철되는 구조에서의 권력에 있다는 것이다.

뒤에서도 다시 살펴보겠지만 종교에서 견지해 온 금욕주의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기보다는, 성에 대한 억압적인 의식이 여성을 멸시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차별과 혐오는 성폭력의 한 조건으로 제기되었다. 자발적으로 욕망을 포기하는 것은 여전히 종교의 중요한 수행의 하나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금욕제도는 성직자의 위계적 권위가 확보되는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에, 성폭력 범죄와 같은 권력남용이 일어날 경우 이들에게 더 강한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승려들의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이런 양상이 그대로 나타나는데 즉, 개인의 ‘위선적’이고 ‘뻔뻔스러운’ 일탈로 주로 비판되면서 몇몇 문제적 승려들만 ‘제거’되면 집단의 ‘청정’함이 유지될 수 있다는 기대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성문제에 연루된 불교계 승려의 경우, 특히 ‘은처승’이라는 명칭이 빈번하게 제기되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불교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 시각이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처(妻)가 있는가, 없는가로 구분하는 명칭 자체가 남성의 관점에서 부여된 것이며, 성폭력의 문제를 숨겨둔 부인이 있는 문제로 희석화시키기도 한다. 즉 문제의 초점에서 폭력은 사라지고 부인이 있는가로 전환되어버린 것이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여러 유명 인사들에 의해 발생한 성폭력 문제의 원인을 자체적으로 진단하면서, 이 분야의 ‘남성 중심적인 권력구조’를 제기하였다. 지금 한국불교계에서 드러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도 권력구조에 대한 분석 없이 근본적인 원인 규명을 시행할 수 없다고 본다. 개인의 일탈과 파계로만 이것을 바라보아서는 종교인으로서 각성 외에 다른 대안을 모색하기 어렵다.

따라서 앞에서 도출한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구조의 세 가지 조건 즉, 성차별주의, 위계구조, 그리고 폐쇄적인 조직문화가 한국불교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나아가 어떤 권력구조가 한국불교의 심각한 위기와 연결되어 있는지 개략적이나마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성차별주의

종교인의 성폭력 범죄에서 성차별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그 연관성이 제기되어 왔다. 특히 종교 교리를 가부장적으로 해석해온 전통의 영향도 언급되었다. 불교의 경우, 남자로 태어나는 것에 대한 특권의식을 포함하여 남성우월주의와 여성멸시 등의 교설이 경전에 반영되어 있어, 불교의 성차별주의가 교리적인 명분에서 세워지기도 한다.

한국불교에서 가장 영향을 미치는 성차별적 교설은 변성성불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밖으로 크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비구니 스님들 사이에서는 여성의 몸으로 성불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깊이 내면화되어 있고, 그래서 여성성이 드러나는 것을 매우 경계하여 차라리 남성성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한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계율의 측면에서 보면 비구니들이 남성들과 가깝게 자리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여성들과의 분리를 지향하는 이런 점 때문에 공양이나 여러 의식의 자리에서 여성보다 남성 쪽에 주로 앉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성 신도들에게 특히 많이 언급된 교설은 여성의 성역할론과 결부된 《옥야경》이다. 높은 보살의 서원을 세운 승만 부인 또한 재가 여성이 지향할 바로 종종 제시되어 왔지만, 일반 여성들의 일상에 보다 가까운 가르침으로 왕성하게 해석된 것은 《옥야경》 쪽이었다. 남편과 시집의 어른들에게 순종적이고, 가정 내에서 주부와 아내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옥야의 맹세를 찬탄한 이 경전의 이야기는 라디오 법회 등을 통해 널리 보급되어온 단골 법문 내용이기도 했다.

한편, 외국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한국불교 역시 가부장적인 유교문화의 성격이 강하다고 지적되곤 한다. 서구에서 불교는 매우 진보적이고 평등한 성격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아시아 특히 한국불교에 와서 보니 너무 남성 중심적이라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숭산 스님의 첫 번째 제자이기도 한 여성 법사 바바라 로즈(Bar-bara Rhodes, 법명 성향) 또한 이런 경험을 소개했는데, 한국에 와서 자신은 스님의 제자가 아니라 하인이 된 것 같았고, 남자들의 그림자같이 행동해야 했다고 말해, 한국불교 문화의 가부장성이 명백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불교는 유교화된 불교의 성격을 강하게 견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불교가 극복되지 못한 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현재 한국불교가 자기 위상을 전통문화의 담지자로 확보하고 있는 점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불교계 지도자들은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문화를 떨쳐내어 한국의 불교를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나아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통문화에 대한 찬미와 결부된 ‘한국불교’ 자체를 강조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한국불교의 성차별성과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근현대 불교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하여 고찰되는데, 자세하게 논하기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어 추후 후속 연구를 통해 발표하고자 하며, 여기서 대략적인 면만 언급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근현대 한국불교는 개항기 기독교로부터 씌워진 여성적 이미지-나약하고 비지성적인-를 탈피하고자 했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위 ‘치마불교’라는 명칭은 그래서 매우 복잡한 산물인데, 기독교가 불교를 여성화하고, 또 불교가 자신의 여성성을 스스로 떨쳐내고자 했던 과정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비구 · 대처 정화운동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은 비전통적이고 비정통적인 일제의 대처문화를 극복했다는 명분으로 한국불교의 적자 위치에 서서 현재 주요 사찰을 점유하고 있는 압도적인 주류 종단이다. 정화운동에서 비구니들의 참여 비중이 적지 않았다고 연구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운동은 ‘청정비구’ 전통의 계승으로 명명될 뿐이다. 즉, 정화의 주체는 비구이며, 나머지는 정화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에는 부인을 둔 승려, 비구가 아닌 자, 여성들이 차례로 포함된다. 불교정화운동에 대해서는 조계종 중심의 해석만 제시되어 왔기 때문에, 다양한 각도에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특히나 성폭력 문제와 관련해서 정화운동의 부정적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폭력에 대한 불감증은 물론이고, 청정함에 누가 될까 여성을 혐오하고 성에 대해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 시기에 강하게 심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오기 때문이다.

불교가 여성을 혐오하는 것처럼 보인 것은 애욕을 떨쳐내어 지혜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강박적인 여성혐오는 지혜보다 집착이며 폭력이다. 성문제를 일으킨 범죄자들이 성과 여성에 대해 혐오적 시각을 더 강하게 갖는 것을 보면 이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불교는 결코 혐오적 가르침이 아니다. 불교를 혐오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이 가장 큰 폐불일 것이다.

2) 출 · 재가 위계구조

종교 성폭력 문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성직자의 절대적인 권위와 위계구조에 따른 폭력이라는 것이다. 세간에 이슈가 된 한 대형교회 목사가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면서 여성들에게 순종을 강요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일찍이 급진주의 여성해방 신학자 메리 데일리(Mary Daly)가 지적했듯이 “신이 남자면, 남자가 신이 된다”고 하였는데, 한국에서 드디어 신이 된 남자(목사)가 출현한 것 같다.

불교에서는 이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을까? ‘내가 부처님이다’라고 대놓고 군림하는 승려는 역사적으로는 종종 발견되지만, 적어도 현대사회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한국불교에서 너무나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문화 속에 부처님과 동급의 승려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삼귀의 의례 문구와 승려 삼배가 그것이다.

불교는 부처님과 법 그리고 승가를 삼보로 여기며, 여기에 귀의하는 것을 불교 신앙의 근간으로 삼는다. 승가(saṅgha, 僧伽)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승려 개인을 승가라고 지칭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즉 불자가 의지처로 삼아 돌아갈 곳은 승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서의 승가(좁은 의미에서는 성자의 계위에 오른 승가)인 것이다.

승가가 한역에서 단순히 승(僧)으로 축약되면서, 승은 공동체와 승려 개인을 모두 지칭하는 중의적인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이 의례문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스님들’로 고착되고, 공동체로서 승가의 의미가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불자들은 거룩한 부처님과 가르침에 이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삼보가 된 스님에게 부처님처럼 세 번의 절을 하는 것이 불교의 의례가 된 것이다. 승려 개인을 귀의 대상으로 삼고 부처님과 동급의 예를 올려도 좋은가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한국불교에서 이와 같이 (남성)승려의 위상이 부처님 같은 높이로 격상되어가던 무렵,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불교 영화에서는 성적인 희롱과 추행들이 마치 큰 가르침인 것으로 위장한 내용이 마구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근엄한 노비구승이 어린 사미니에게 깨우침을 주겠다고 옷을 다 벗으라는 장면이나, 치열한 비구니 수행자의 구도를 시험하겠다고 성추행을 견디게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강간 장면이 영화나 미디어에 미화된 형태로 많이 표현될수록 실제 강간 사건이 매우 증가한다는 연구가 지적하는 것처럼,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이처럼 구도를 가장한 폭력이 무비판적으로 노출된 것이 불교 성폭력을 얼마나 부추겼을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남성에 대해 거부하기 무척 어려운 형태로 이루어지며, 종교의 경우 근엄하고 진지한 분위기로 위장하여 더욱 교묘하게 행해지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출 · 재가 그리고 남녀의 이중적이고 뚜렷한 위계문화는 이러한 성폭력 발생조건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라고 판단된다.

3)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사찰 조직

마지막으로 점검할 내용은 성폭력이 은폐되고 고발되어도 해결되기 쉽지 않은 구조에 대한 것으로서 사찰의 폐쇄적인 구조 그리고 비민주적인 운영방식 문제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는 무리 지어 수행하는 공동체를 승가라고 하며 이 승가를 삼보로 여겨 중시해 왔다.

승려를 비하하는 용어로 쓰이지만, 무리를 뜻하는 중(衆)은 승려들의 생활방식이자 정체성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불교 승려들은 더 이상 무리 지어 살지 않는다. 강원, 선원 등 일시적인 기간에 함께 머물기는 하지만, 개별 소유의 사찰이 따로 있으면서 홀로 지내는 승려가 대다수라는 것은 불교계의 상식이 되어 버린 일이다.

성폭력으로 입건된 승려들의 사례를 보면 대체로 개인 소유 사찰에서 범행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으며, 공사찰의 경우에도 견제하고 감시하는 눈이 없는 경우가 많아, 이와 같은 폐쇄적인 사찰 구조가 성폭력 문제의 한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찰의 폐쇄성은 비단 공간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사찰 재정의 불투명은 오랫동안 불교계 안팎에서 비판되어온 내용이기도 한데, 이런 점은 성폭력과 성일탈 등이 아무런 제재 없이 자행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인간은 지켜보는 타인의 눈이 없이는 인간다운 행동을 견지하기 쉽지 않은 존재이다. 수행자는 무리 지어 함께 생활하지 않고는 청정한 계율을 유지하기 어렵다. 개인 소유화된 한국불교의 사찰 구조와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일부에 의해 독점적으로 전횡되는 사찰 재정 문제가 결국 성폭력을 지속시키고 개선하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의 성폭력 문제를 다루면서 사회의 여러 분야와 비교하고, 한국불교계의 독특한 구조와 연결하여 살펴본 이유는 이 문제가 결코 하나의 문제가 아니며, 불교 내부의 시각만으로 제한해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성폭력의 문제는 여성들만의 외침이 아니다.

그리고 불교계 내부에서 스스로 자정하는 노력이 없다면 사회적 지탄을 받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많은 불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사회가 현재 시민들의 지켜보는 눈과 소통하는 입으로 정의를 바로 세워가고 있듯이, 한국의 불교 또한 시민운동의 힘이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연민(karuna)’에서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고통 또한 실체가 없으니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조언은 연민을 잃어버린 불교라고 생각한다. 연민을 기반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폭력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민감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불자들이 많아지면, 이들이 모여 이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풀어가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조승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강사. 이화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석사, 박사) 졸업.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조교수 등 역임. 저서로 《여성주의 불교수행론》 공저서로 《한국 비구니 승가의 역사와 활동》 《한국 여성 종교인의 현실과 젠더 문제》 《불교와 섹슈얼리티》 등이 있으며, 역서로 《열정적 깨달음(딴뜨릭 불교의 여성들)》(미란다쇼 지음) 등이 있다.

--
율장을 통해 본 성욕과 성윤리 / 이자랑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이자랑  jaranglee@hanmail.net
1. 서론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나도 그랬어’, 일명 ‘미투(Me too) 운동’이 최근 들어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주변 곳곳에서 성과 관련하여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사안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언가 모를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성추행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 같다는 누군가의 푸념이 어찌 한 사람만의 일일까. 일상에서 겪게 되는 비교적 가벼운 언어적 · 신체적 성적 수치심까지 감안한다면, 우리는 거의 무방비한 상태로 성폭력의 피해에 노출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기본적인 욕망이다. 하지만 성욕은 다른 욕망과 달리 자신의 욕구 해소를 위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을 예로 보아도, 지위나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방의 의사와 무관하게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행 등을 가하고 있다. 상대방이 겪을 심리적 · 육체적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오로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데 급급하다. 절제되지 못한 성욕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에게까지 치명적인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불교에서도 성적 문제는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재가불자의 기본 실천 규범인 오계에서는 ‘불사음계(不邪婬戒)’라고 하여, 자신의 배우자 이외 사람과의 성행위를 금지한다. 사음은 자신의 배우자를 배신하는 행위이자 상대방의 배우자에게도 상처를 주는 행위이다. 모든 생류에 대한 자애심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용납될 리 없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게 될 율장(律藏)을 보면 출가자의 경우에는 모든 성관계, 나아가 이성과의 가벼운 신체적 접촉이나 음담패설 등에 이르기까지 성과 관련된 모든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다. 더구나 그것은 모두 중죄로 다루어지는데, 특히 가장 중대한 죄로 분류되는 바라이의 경우 제1조가 ‘음행’, 즉 성관계를 금지하는 내용이다. 비구 · 비구니가 되기 위해 받는 구족계(具足戒) 첫머리를 ‘음계’가 장식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어떤 감각적 욕망보다 성욕을 가장 강렬하고 위태로운 욕망으로 인식하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출가자에게도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지만, 이를 제어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게 되는 갖가지 환난(患難)은 수행자로서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 이 글에서는 율장에 나타난 성 관련 조문과 그 인연담 등을 검토하며 불교가 출가자의 성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 성욕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성소수자의 입단 금지 규정을 고찰하고자 하는데, 이 규정은 출가자의 성적 범계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도 밝히고 있다. 출가자라는 특수한 신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성욕이라는 욕망이 갖는 특징과 그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하나의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2. 출가자와 성욕의 문제

비구 · 비구니가 지켜야 할 규범인 율(律, vinaya)을 가리켜 흔히 ‘오편칠취(五篇七聚)’라고 한다. 오편이란 바라이(波羅夷) · 승잔(僧殘) · 바일제(波逸提) ·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 · 악작(悪作, 突吉羅)의 5종이며, 칠취는 이 5종에 투란차(偸蘭遮)와 악설(悪説)을 추가한 7종이다. 오편칠취에는 비구 · 비구니가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바라이와 승잔에 해당하는 범계 행위는 중죄(重罪), 그 이외는 경죄(輕罪)로 취급된다. 경죄에 해당하는 범계 행위는 한 명이나 두세 명의 비구 앞에서 혹은 마음속으로 혼자 참회하면 죄에서 벗어나 청정 비구(니)로서의 원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지만, 중죄의 경우에는 다르다. 바라이죄를 저지르면 ‘불공주(不共住)’라는 처분을 받고 더 이상 비구(니)라는 정식 승려의 신분으로 머물 수 없게 되며, 승잔죄의 경우에는 일정 기간 별주(別住)하며 속죄한 후 20명 이상으로 구성된 승가에서 동의를 얻은 후에야 원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성에 관한 모든 행위는 중죄인 바라이와 승잔에서 취급한다. 이로 보아 율장에서 성문제는 중대한 범계 행위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관련 조문인 바라이 제1조 ‘음계(婬戒, methuna-dhamma)’를 먼저 살펴보며 출가자와 성욕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 조문은 ‘음을 행하는 것’을 금지한다. 음을 행한다는 것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말하며, 대상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암컷, 심지어 비인녀(非人女)까지 포함된다. 율이 수범수제(隨犯隨制), 요컨대 악행을 저지르는 자가 나타날 때마다 그 행동을 금지하는 형태로 제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음행이 승가에서 나타난 최초의 악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수행자에게 성욕을 억제하는 일이 본능적으로 무엇보다 어려웠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조문의 인연담에 의하면, 수딘나(Sudinna)라는 비구는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하고 있었는데, 기근이 들어 걸식이 어려워지자 친족을 찾아 고향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그가 환속하여 보시 등을 통해 공덕을 쌓으며 재가자로 살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수딘나는 거절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후손이 없으면 모든 재산을 왕이 몰수해 간다며, 대를 이을 후손만이라도 남겨달라고 애원하였다. 수딘나는 차마 그 청까지 거절하지는 못하고 출가 전의 처와 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조문이 아직 제정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수딘나의 행위는 불범(不犯)이었지만, 그는 심한 자책과 후회에 시달리며 나날이 초췌해져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동료 비구들의 질문에 수딘나는 음행 사실을 고백하였고,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비구 승가를 소집한 후 “음욕법을 행하는 비구는 바라이이다.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학처를 제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한 비구가 음식으로 암컷 원숭이를 유혹하여 음행을 저지르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는 부처님이 금지한 것은 인간과의 음행일 뿐 축생과의 음행은 대상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붓다는 “어떤 비구라도 음욕법을 행한다면,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 바라이로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을 조문에 추가했다. 조문 해설에 따르면, 여기서 말하는 ‘내지’에는 축생만이 아닌 비인녀, 3종의 황문(黃門), 3종의 이근자(二根者), 3종의 남자 등 성관계를 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이 다 포함된다. 황문과 이근자는 각각 성적으로 특이한 취향을 가지거나 남녀의 성기를 모두 갖춘 자를 가리킨다. 남자란 비구의 성적 대상이 될 수 있는 남자, 즉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종의 황문이란 인(人)황문 · 비인(非人)황문 · 축생황문을 가리키며, 3종의 이근자 역시 인이근 · 비인이근 · 축생이근을, 3종의 남자도 인남 · 비인남 · 축생남이라고 하여 사람(女 · 男)과 비인, 축생으로 분류한다. 성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을 다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상의 문제는 개인적인 취향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절제되지 못한 인간의 성욕이 어디까지 대상을 넓혀가며 부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사건 이후에 발생한 일이다. 웨살리에 머물고 있던 왓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원하는 대로 먹고 자고 씻었다. 욕망대로 산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이 해이해져서 결국 난잡한 마음으로 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그 결과 친족도 재산도 잃고 병까지 들자 후회하며, 아난다 존자에게 만약 자신들이 다시 구족계를 받을 수만 있다면 열심히 수행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그들을 위해 이미 제정한 학처를 번복할 수는 없다고 하며, 대신 한 구절을 추가하여 음계 학처를 확정한다.

어떤 비구이든 비구들의 학(學)과 규율을 갖춘 채로 학을 버리지 않고, 힘이 약함을 고하지 않고 음욕법을 저지른다면, 내지 축생과 함께한 것에 이르기까지 바라이로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

“비구들의 학(學)과 규율을 갖춘 채로 학을 버리지 않고, 힘이 약함을 고하지 않고”라는 구절이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구로서의 수행은 지속하고 싶지만, 성욕의 유혹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하겠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학과 규율’, 즉 붓다가 율로 제정한 학처를 버린다는 의지를 표명하라는 것이다. 즉, 사계(捨戒)의 의지를 표명하면 더 이상 비구가 아니기 때문에 음행을 저질러도 바라이가 되지 않는다. 비구의 신분으로 음계를 어겨 바라이로 처벌받게 되면 두 번 다시 비구의 신분을 회복할 수 없지만, 환속한 후의 행위는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율장에서는 환속이 몇 번까지 가능한지, 그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환속 후 몇 번이라도 다시 구족계를 받고 비구로서 수행이 가능하다. 결국 이 한 구절의 추가는 바라이죄를 저질러 비구로서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일종의 배려이자 편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바라이 조문은 음계 외에, 5전 이상의 도둑질을 금지하는 도계(盜戒)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살인계(殺人戒), 깨닫지 않았으면서 깨달았다고 거짓말하는 대망어계(大妄語戒)를 넣어 총 네 개로 구성되는데, 사계의 편법이 인정되는 것은 음계뿐이다. 이는 성욕이 매우 절제하기 힘든 욕망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사계의 과정은 간단하다.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저는 우바새가 되겠습니다.” “저는 부처님을 버립니다.” “저는 법을 버립니다.”라는 등의 간단한 말을 하면 된다. 누군가 특정인의 동의도 승가의 동의도 필요치 않으며, 본인이 결심하고 그 뜻을 타인에게 전달하면 된다. 다만 상대방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이나 어린아이 앞에서 한 사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계 형식으로 미루어 볼 때 역시 비구로서 수행을 지속하는 힘의 원천은 본인의 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미처 사계하지 못하고 음행을 저질렀을 경우에도 범계 후 숨기려는 마음 없이 곧바로 승가에 참회의 뜻을 밝히면 ‘바라이학회(波羅夷學悔)’라는 신분으로 승가에 머물러 수행을 계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비구의 신분이 아닌, 사미와 유사한 낮은 신분으로 머물게 되므로 사실상 비구 신분으로 음행을 저지르면 원래의 비구 신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원칙에는 변함없다.

이상의 인연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음계는 수딘나 비구의 부정행→축생과의 음행→계를 지킬 힘이 없는 자에 대한 사계 인정이라는 세 단계에 걸쳐 완성되고 있다. 이는 성욕이 매우 강렬한 욕망으로서 다양한 상황에서 집요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특히 ‘계를 지킬 힘이 없는 자에 대한 사계 인정’ 규정은 출가자에게도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욕망이라는 점, 그리고 율장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출가자의 신분을 유지하는 이상, 성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바라이라는 극중죄로 다스려질 만큼 출가자의 성행위는 극도로 기피되고 있다. 사미 역시 음행을 저지르면 멸빈(滅擯)당한다. 다만, 사미의 경우 멸빈당한 후의 재출가 가능성 여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출가자의 직접적인 성행위 외, 성욕과 관련하여 나타날 수 있는 갖가지 행위 역시 율장에서는 금지한다. 바라이와 더불어 또 하나의 중죄로 간주되는 승잔에서는 제1조부터 제4조에 이르기까지 성과 관련된 행위가 총 네 가지 금지된다. 승잔 제1조 고출정계(故出精戒), 제2조 촉여신계(觸女身戒), 제3조 추악어계(麤惡語戒), 제4조 구음욕공양계(求婬欲供養戒)이다. 고출정계는 스스로 정액을 흘리는 행위, 즉 자위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며, 촉여신계는 비구가 욕정에 사로잡혀 여인의 몸에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문이다. 손을 만지거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 모두 금지된다. 추악어계는 남녀의 성에 관한 말이나 여성의 성기에 관한 말 등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이다. 구음욕공양계는 성욕을 갖고 음욕공양, 다시 말해 자신과 같은 훌륭한 수행자에게 음욕을 공양하면 공덕이 있다고 여인 앞에서 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계이다.

이처럼 율장에서는 직접적인 성관계를 비롯하여 자위행위, 성욕을 갖고 여인의 몸에 접촉하는 행위, 성과 관련된 말을 하는 행위, 음욕 공양을 부추기는 행위 등 성욕을 자제하지 못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를 바라이와 승잔이라는 중죄로 헤아리며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3. 성적 행동은 왜 금지되는가?

사계라는 일종의 구제책을 마련해줄 만큼 욕망으로서 성욕이 갖는 강렬한 욕구를 인정하면서도, 출가자의 신분으로 음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율장에서는 무슨 이유로 출가자의 성적 행위를 이토록 기피하는 것일까? 단 한 번의 성관계로 비구 혹은 비구니라는 신분을 완전히 박탈당한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율장에서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관련 조문들에 보이는 부분적인 기술을 통해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바라이 제1조 ‘음계’의 인연담을 보면, 수딘나의 음행 사실을 알게 된 붓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행동을 꾸짖는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는 부적절하고, 부적당하며, 어울리지 않으며, 사문답지 못하고, 합당하지 않으며,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렇듯 잘 설해진 법과 율에 출가하고도 어찌하여 너는 평생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을 실천하지 못한단 말이냐.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여러 방법으로 탐욕으로부터 떠나라고 법을 설했지 탐욕을 가지라고 설하지 않았다. 속박으로부터 떠나라고 법을 설했지 속박당하라고 설한 것은 아니다. 집착을 없애라고 법을 설했지 집착하라고 설한 것은 아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내가 탐욕을 떠나라고 설한 법을 너는 탐욕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속박을 떠나라고 설한 법을 속박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착을 떠나라고 설한 법을 집착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여러 방법으로 탐욕을 떠나라고 법을 설하고, 교만의 파괴를 위해, 갈증의 제어를 위해, 집착의 근절을 위해, 윤회의 단절을 위해, 갈애의 소멸을 위해, 탐욕으로부터의 떠남을 위해, 멸진을 위해, 열반을 위해 법을 설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나는 실로 많은 방법으로 감각적 욕망의 단멸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의 개념 작용에 대한 완전한 앎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증의 조복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의 근절을 설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병의 가라앉힘을 설했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차라리 맹독을 지닌 뱀의 입안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남근을 넣어서는 안 된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차라리 검은 뱀의 입안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남근을 넣어서는 안 된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차라리 타오르고, 활활 불타며, 이글거리는 불구덩이에 남근을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남근을 넣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이 어리석은 사람아, 전자를 인연으로 해서는 죽음이나 죽음과 거의 유사한 괴로움을 받게 될지언정,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이로 인해 결코 악처나 악취, 악생, 지옥에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리석은 사람아, 후자를 인연으로 해서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악처나 악취, 악생,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와 똑같은 구절이 승잔 제1조 고출정계의 인연담에서도 등장한다. 성욕으로 인해 마음의 안정을 잃게 된 셋야사까(Seyyasaka)라는 비구는 범행(梵行)을 실천하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고, 그 결과 육체의 조화를 잃어 점차 몰골이 초췌해져 갔다. 그러자 우다이라는 장로는 “만약 범행을 닦는 것이 기쁘지 않다면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자고 마음대로 목욕해라. 그래도 기쁘지 않고 정욕이 일어나 마음이 괴롭다면 손을 사용하여 정액을 흘려라.”라고 충고했다. 욕망대로 살라는 것이었다. 셋야사카는 찜찜하게 여기면서도 우다이 장로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것이 허용되는 행위라 생각하고 따라 했다. 그 결과 셋야사까는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혈색이 좋아졌다. 이를 이상히 여긴 비구들이 연유를 물었고, 결국 셋야사까가 자위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전해 들은 붓다는 위의 인용문과 동일한 내용으로 셋야사까의 행동을 꾸짖고 있다. 성욕을 자제하지 못해 발생하게 되는 타인과의 성관계 혹은 자위행위 등을 똑같은 이유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발언을 보면 왜 출가자에게 성적 행동이 금지되는지, 그 이유는 자명하다. 성욕과 같은 감각적 욕망의 배후에는 탐욕과 속박, 집착 등 수행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는 선하지 못한 요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요소들은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지속하는 데에 큰 방해 요소이다. 감각적 욕망의 제어와 깨달음의 상관관계는 초기경전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문제로 양자는 밀접한 관련하에 언급된다. 예를 들어, 《숫따니빠따》 제467게에서는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이겨낸 자는 태어남과 죽음의 끝을 알고 시원한 호수처럼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였으니, 여래는 헌과(獻果)를 받을 만하십니다.”라고 하여, 감각적 욕망을 이겨내었을 때 완전한 열반의 성취가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또한 《담마빠다》 제215게에서는 “욕망에서 슬픔이 생겨나고, 욕망에서 두려움이 생겨난다. 욕망을 벗어난 자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슬픔과 두려움이 욕망에서 비롯됨을 설한다. 이 외, 니까야나 아함 등에서도 애욕을 떠난 생활이 평안하며, 안락하다는 점을 누누이 설하고 있다.

불도 수행이 계 · 정 · 혜 삼학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탐욕이나 집착, 갈애 등으로 인해 어떤 욕망보다 심하게 마음이 요동칠 수 있는 성욕은 지양해야 할 욕망임이 틀림없다. 앞서 언급한 왓지족 출신 비구의 예를 보면,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과 같은 기본적 욕구의 제동이 풀어졌을 때 온몸이 해이해지면서 더욱 왕성하게 일어나는 욕구인 것 같다. 즉, 성욕의 힘이 증대하는 것이리라. 육체의 충동적인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정신은 육체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정신이 육체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선정의 힘을 요구하는 정학을 실천하고, 나아가 반야의 지혜를 증득하는 혜학의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계학이란 ‘육체의 충동적인 욕구’ 이면에 존재하는 선하지 못한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육체가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육체 위에 정신을 두고자 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수행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얻게 될 때 선정을 실천할 수 있는 힘도 생겨난다. 이러한 힘, 다시 말해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힘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정신과 육체의 안정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과적으로 정학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음행을 극중죄의 첫 번째로 거론하는 것을 보면, 율장에서는 감각적 욕망 중에서도 성욕을 탐욕이나 갈애, 집착 등의 불선법을 내포한 가장 위험한 행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성욕이 식욕이나 수면욕 등의 다른 감각적 욕망과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대상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더 강렬하게 품을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음계 제정의 단초를 제공한 수딘나 비구의 경우를 보면, 어머니의 청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음행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목적은 자신의 후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자손 번식의 욕망이야말로 인간이 갖게 되는 가장 본능적이고도 강렬한 욕망 가운데 하나이며, 이는 성욕과 불가분의 관계이기도 하다. 성욕은 성행위의 대상, 결과물로 태어나는 자식 등으로 집착의 영역을 확대해 간다. 단지 본인의 욕구를 채우는 차원에서 끝나는 욕망이 아닌 것이다. 고의 원인인 갈애가 어떤 욕망보다 치열하게 그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욕망이 바로 성욕이다. 처자식을 두고 출가를 감행해야 했던 고따마 붓다에게, 성적 욕망은 단지 개인의 성욕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보다 뿌리 깊은 욕망으로서 인간의 정신까지 지배할 수 있는 강렬한 본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성욕의 본질을 꿰뚫어 본 붓다이기에 성적 행위에 대해 이처럼 완고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4. 성소수자의 입단과 차법

단음(斷婬)을 철저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아울러 성욕을 부추기지 않는 주변 여건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율장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성소수자(性少數者, sexual minority)의 입단 금지 규정 역시 이런 시각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율장에서는 성소수자의 입단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구가 되기 위해 구족계를 받을 때는 차법(遮法), 요컨대 비구가 되는 데 결격 사항은 없는지 승가로부터 확인받아야 한다. 차법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해당 사항이 있으면 구족계를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차법 리스트 중 성소수자에 관한 항목이 눈에 띈다. 즉, 황문(黃門, paṇḍaka)과 이근자(二根者, ubhatovyañjanaka)의 출가는 허용되지 않는다.

황문은 빤다까의 한역어로, 빤다까는 기존에 ‘거세자(去勢者, eu-nuch)’나 ‘성적 불능자’ 혹은 ‘동성애자’ 등으로 해석되어 왔다. 율장에 등장하는 용례를 보면, 대부분 변태성욕을 지닌 동성연애자로 묘사되지만, 주석서에서는 5종의 황문을 언급한다. 즉, 다른 남자의 성기를 입으로 핥아 사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가라앉히는 자(āsitta-paṇḍaka), 다른 사람들이 성교하는 모습을 훔쳐보면서 질투심을 일으켜 자신의 욕망을 가라앉히는 자(usuyya–paṇḍaka), 특별한 도구를 이용해서 정자를 빼내야 하는 자(opakkamiya-pa-ṇḍaka), 보름 동안만 황문으로 사는 자(pakkha-paṇḍaka), 태아일 때부터 성기가 존재하지 않는 자(napuṃsaka-paṇḍaka)이다. 이를 보면, 황문은 항상 혹은 일시적(보름)으로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성적 자극을 얻거나, 태어날 때부터 성기가 없어서 사정도 불가능하고 생식 능력도 없는 성적 불능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황문은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를 폭넓게 가리키는 용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근자란 양성구유(兩性具有), 즉 태어날 때부터 여성의 성기도 남성의 성기도 함께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 이 외, 원래 남성이었던 자가 비구로 출가하였는데 도중에 여성의 성기가 몸에 생기거나, 여성이었던 자가 비구니로 출가하였는데 도중에 남성의 성기가 몸에 생기는 경우에 대해서도 율장은 언급한다. 이 경우에는 그 혹은 그녀가 받은 구족계나 그 시점까지의 법랍(法臘)이 모두 인정되며, 바뀐 성에 따라 다시 수행을 지속하면 된다고 한다. 즉, 이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황문과 이근자처럼 성적으로 문제를 지닌 이들의 출가는 왜 허용되지 않았을까? 당시 인도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며 억압받았던 낮은 계급의 사람들조차 받아들이면서 평등을 강조했던 불교의 가르침을 고려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원칙이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의 입단 불가 원칙을 일각에서는 차별이라는 시점에서 파악하며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규정이 처음에 왜 생겼는지 율장에 전해지는 인연담을 살펴보며 그 진의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율장에 의하면, 어떤 황문이 승가에 출가했는데 그는 젊은 비구들이나 사미, 코끼리 조련사 무리 등에게 다가가 자신을 더럽혀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조련사 무리 등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이를 알게 된 세간 사람들은 ‘석자 사문은 황문이다. 황문이 아닌 자들도 황문을 더럽혔다’라며 비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황문의 출가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황문은 처음부터 입단이 금지되었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음란한 행위를 하여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금지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은 수동적 동성연애자로서 난잡한 생활을 즐기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황문은 출가가 허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출가했다 하더라도 황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는 즉시 승가로부터 추방당한다. 이근자의 입단 금지 인연담도 황문과 유사하다. 이들 역시 출가 후 동료 비구 · 비구니를 유혹해서 성관계를 갖기도 하고 갖게 하도록 부추기기도 하는 등 승가에서 문란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입단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들도 출가 후에 발각되면 승가 추방의 처벌을 받게 된다. 이근자의 경우에는 신체상 남녀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 중 어느 쪽에 소속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결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양쪽을 다니며 음란한 행위를 할 수 있어 황문보다 한층 더 폭넓게 성적 문란을 일으킬 여지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율장에서 황문이나 이근자와 같은, 이른바 성소수자의 입단을 금지하는 이유는 승가에 성적으로 문란한 상황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승가 운영은 현실적인 문제이다. 공동체 생활을 전제로 하는 승가의 경우, 본인의 의지로 성적 욕구를 제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승가를 형성하여 일정한 공간 안에서 함께 생활해야 하는 불교의 출가자들이 이러한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음계’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승가 운영에서도 큰 문제이며, 승가를 바라보는 일반 사회와의 관계라는 시점에서도 중대한 문제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의 행동이 일반 사회에 알려지게 되면 승가 전체가 문란하고 비도덕적인 공동체로서 비난받게 되기 때문이다.

율장 곳곳에서 붓다는 율을 제정하는 이유, 다시 말해 율을 실천함으로써 얻게 될 이익을 열 가지로 설명한다. 이른바 ‘제계십리(制戒十利)’라 불리는 것이다. 제계십리는 승가의 구성원이 안락하게 머물며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재가자의 신심을 일으키고 증대시키며, 정법을 확립하는 것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한다. 즉, 승가의 발전과 영원한 존속을 기대한다. 따라서 승가 운영에 있어 현실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처한다.

양모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찾아와 출가를 청원했을 때 붓다가 거절했던 배경에는 물론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무엇보다 성욕의 직접적인 대상인 여인들이 승가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들의 경우에는 이성이기 때문에 따로 승가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방법도 있고, 또한 성욕을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자들이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한편, 성소수자는 다르다. 이들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절제하기 힘든 성적 욕구가 있는 사람들이므로 승가에서 함께 생활한다면 수행에서 그토록 기피되는 성적 문제가 수행자들 간에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성적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만큼 주변 여건 역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성해가야 한다. 이 점에서 이들의 입단 금지는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후대가 되면 성소수자의 수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표명하는 경전들도 등장하지만, 적어도 성소수자의 입단 금지가 승가의 규범으로 정착하게 된 과정을 율장에서 보면, 이 규범은 출가자들의 수행 여건에 대한 배려가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결론

불교에서 성욕은 다른 어떤 욕망보다 진지하게 다루어진다. 재가자의 경우에는 배우자와의 성관계는 용납함으로써 성욕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삿된 관계는 철저하게 금지된다. 이는 절제되지 못한 성욕이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됨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에게도 해나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출가자의 경우에는 성욕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모든 성적 행위가 철저하게 금지된다. 사계를 통한 편법을 인정해 줄 만큼 성욕에 내재한 강렬한 욕망을 인정하지만, 출가자의 성행위는 한 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성관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위행위나 성적 접촉, 음담패설, 음욕공양을 부추기는 말 등과 같은 행동 역시 모두 중죄로 다스려진다. 이것은 성욕 뒤에 탐욕, 속박, 집착, 갈애 등과 같은 불선법이 존재하며, 이러한 악한 감정은 수행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욕이나 수면욕 같은 욕망과 달리 성욕은 성행위를 하고자 하는 혹은 이미 한 대상에 대한 집착이나 애증 혹은 후손을 남기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 등으로 이어지며, 어떤 욕망보다 강렬하게 인간의 심신을 지배하고 번뇌 속에서 고통받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계 · 정 · 혜 삼학을 닦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출가자라면 성욕은 반드시 제어하고 끊어야 할 욕구인 것이다.

이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듯이 최근에 성 피해와 관련된 미투 운동이 여기저기서 불붙듯 일어나고 있다. 정치계, 문학계, 예술계, 교육계, 체육계, 종교계 등 어느 분야도 예외가 없다. 고발당한 사람들의 지위나 신분도 다양하다. 각자의 지위에서 조금이라도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아낌없이 남용하여 성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성욕이 얼마나 강렬한 욕망이기에 이처럼 물불 안 가리고, 때로는 자신이 오랜 세월 쌓아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빠져드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탐욕하고 집착하며 그 감정에 스스로를 얽어매는, 성욕 뒤에 숨겨진 위험한 감정과 그로 인해 나타나게 될 결과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알면서도 절제하기 어려운 것일까? 성범죄자로 고발당한 후에도 깊은 죄의식이나 진심 어린 반성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은 것을 보며 욕망이 때로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으로 표출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욕망에 사로잡혀 한 치 앞도 못 보는 장님과 다름없다.

모두가 출가자처럼 일체의 성욕을 끊고 단음하며 살아갈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절제되지 못한 성욕이 초래하게 될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욕망이든 절제되지 못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경험하기 마련인데, 특히 성욕은 자신의 욕구를 해소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주의해야 한다. 일시적인 감각적 쾌락에 매몰되어 주변 사람에게 치유될 수 없는 큰 고통을 안겨주고 스스로도 언젠가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

 

이자랑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학 인도철학 · 불교학 전공 석사 및 박사과정 졸업. 〈초기불교교단의 연구-승단의 분열과 부파의 성립〉으로 문학박사 학위 취득. 초기불교 교단사 및 율장에 관한 50여 편의 논문과, 《나를 일깨우는 계율이야기》 《붓다와 39인의 제자》 등의 책을 썼다. 본지 편집위원.
--

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 / 이필원
특집 |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불교
[74호] 2018년 06월 01일 (금) 이필원  nikaya@naver.com
1. 미투로 이슈화된 성욕

   
이필원
동국대 경주캠 파라미타칼리지 교수

요즘 사회적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뜨겁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태평양을 넘어 한국에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다. 반면 이웃 나라인 일본에서는 한국만큼 이 운동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 점도 우리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왜 한국에서 유독 이 문제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것일까? 한국사회에 그만큼 왜곡된 성의식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국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훨씬 성에 대한 억압이 강하게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성적 욕망이 왜곡되어 드리워진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으로 일본보다는 피해자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 시스템적 장치가 훨씬 더 잘 마련된 것일까? 아마 이런 문제는 사회학을 연구하는 분들에게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시선을 불교로 돌려보자. 불교의 제일 명제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모든 것은 괴로움으로 귀결된다.’이다. 필자는 개고(皆苦)의 의미를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로 이해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에서는 접어두기로 한다. 이 제일 명제의 근거는 바로 ‘욕망’이다. 말하자면 불교는 ‘고통을 욕망으로 분석하여 드러내고, 이를 통해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불교의 핵심 키워드는 ‘고통’과 ‘욕망’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필자는 ‘욕망으로서 성욕에 대한 불교적 관점’을 바로 이 두 키워드를 통해 기술해 보고자 한다.

고통(dukkha)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불만족’이다. 한편 욕망 역시 그 특징은 ‘불만족’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경전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해서 탐욕이 생겨난 사람이 만일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그는 화살에 맞은 자처럼 괴로워한다.(Sn. 767)

황금 산의 황금 모두가 두 배나 세 배가 되어도 한 사람에게조차 충분치 않네. 이렇게 알고 바르게 살아야 하리라.(SN. I, Rajjasutta, p.117)

욕망은 그 본질이 불만족이기에, 끊임없이 추구하는 성향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욕망의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욕의 문제 또한 욕망과 고통이라는 두 키워드를 통해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이 불교, 즉 붓다의 가르침을 통한 올바른 이해의 시도가 될 것이다.


2. 욕망의 관점에서 ‘성’

어떤 사람은 불교를 출가주의 종교라고 한다. 과연 불교는 출가주의일까? 이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출가인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이다. 출가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표현이 있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집(agāra)은 단순히 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출가란 ‘소유와 욕망의 포기’를 의미한다. 소유와 욕망은 우리를 속박된 상태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 출가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출가는 ‘감각적 욕망을 구하지 않는 것’으로도 제시된다. 만약 출가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불교는 출가주의가 맞다. 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 출가를 말한다면 불교는 출가주의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맛지마니까야에 《마하왓짜고따숫따(Mahāvacchagottasutta)》가 있다. 이 경전은 왓차고따가 붓다를 찾아뵙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흰옷을 입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재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구분되는 점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삶의 방식보다는 소유와 욕망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는 몸의 출가보다는 마음의 출가가 더 본질에 가깝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추구의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욕망은 떠남의 대상이 된다. 이것을 이욕(離欲)이라고 한다. 수행의 관점에서 욕망은 철저하게 파악되고, 통제되고, 제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이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욕망으로서 성욕은 통제되고 제어되며, 나아가 떠남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 된다.

이제 붓다는 성적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고,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욕망의 대상은 넘기 어려운 수렁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n. 945)

인용된 경문은 《숫따니빠따》의 《폭력을 휘두르는 자에 대한 경(Attadaṇḍasutta)》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욕망의 대상(kāma)은 성적인 욕망의 대상을 의미한다. 보통 까마(kāma)는 성적 욕망의 대상을 의미한다. 남성에게는 여성이, 여성에게는 남성이, 동성애자의 경우는 동성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넘기 어려운 수렁(paṅka duraccayo)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빵까(paṅka)는 수렁, 늪, 진흙 등의 의미로 해석된다. 깊은 뻘을 생각해도 될 것이다. 한번 빠지면 좀체 빠져나오기 어려운 수렁이나 뻘이다. 성적 욕망의 강력함을 너무나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경문이 아닌가 싶다. 수렁은 다른 말로 ‘중독’의 관점에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0년 미국 매케이 연구팀의 연구 내용을 소개해 보자.

연구팀은 사귄 지 9개월이 지나지 않은 ‘열정적 사랑’ 단계에 있는 대학생 커플을 모집했다. “열정적 사랑 단계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시기를 뜻합니다. 상대를 향해 강렬한 감정적 끌림을 느끼는 거죠. 상대에게 온통 집중하고 상대를 항상 생각하는 시기입니다. 가까이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떨어져 있으면 괴로운 단계죠. 뭔가에 중독된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당연히 그럴 겁니다. 이것도 중독이기 때문입니다.”

중독에서 벗어나기는 정말 어렵다. 담배 끊는 것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인용문에서도 보듯이, 가까이 있으면 좋고, 떨어져 있으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고통을 회피하고 즐거움을 취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용문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를 실험대상으로 했지만, 이것이 과도하게 되면 연인에 대한 집착과 속박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즐거움에 너무 도취되면 그것이 가져다주는 위험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된다.

욕망의 대상에서 위험을 보고서, 그것에서 벗어남을 안온으로 보고 나는 정진하기 위해 갑니다.(Sn. 424)
위 내용은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pabbajjāsutta)》의 경문이다. 막 출가한 수행자 고따마에게 마가다국 빔비사라왕이 정치적 제안을 한 것에 대한 답변이다. 여기서 욕망의 대상(kāma)은 성적 욕망의 대상을 포함하면서, 보다 넓은 의미로 감각을 통해 추구하는 욕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욕망의 대상을 ‘위험(ādīnava)’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즉 성적 욕망은 우리를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결국 이는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님을 밝힌 것으로 이해된다. 즐거움이 우리에게 위험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을 자제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그 순간이 주는 즐거움에 탐닉하다 보니 결국은 헤어나오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성행위로 인해] 지금껏 그가 가졌던 명예와 명성을 모두 잃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성행위를 끊도록 배워야 합니다.(Sn. 862)

성행위(methuna)를 직접 언급하고 있는 이 경문은 수행자로서 홀로 살다가 성욕에 탐닉하게 되면 직면하게 되는 위험을 언급하고 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그 일 하나로 그동안 애써 쌓았던 명예와 명성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매우 유사한 말을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작가들의 연구실까지 불쑥불쑥 찾아와 수치스러운 염문을 일으키기도 하고, 친구의 깊은 우정도 순식간에 끊어 버리며 건강과 부귀영화도, 높은 지위나 권력도, 참으로 소중한 행복도 간단히 파괴하는 위력적인 폭약이다.

이 문장을 보면, 쇼펜하우어가 붓다의 가르침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욕을 말한다. 그는 아무리 로맨틱한 정신적 사랑을 나눈다고 자부해도 본질적으로는 성욕을 근본으로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뉴스 등을 통해 목도하는 수많은 일을 보면, 붓다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됨을 알게 된다. 각고의 노력을 통해 명예와 인기를 얻었지만, 성욕에 사로잡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욕망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결국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모든 것을 잃게 됨을 본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소중한 행복도 간단하게 그 앞에서는 부수어지고 만다.


3. 욕망의 특징을 통한 성욕의 이해

앞서 성욕을 욕망과 고통이라는 두 키워드로 살펴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이제 욕망의 특징을 통해 성욕을 이해해보자.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욕망으로서 성욕은 위험이며 넘기 어려운 수렁이다.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가는 사람은 없다. 굳이 헤어나오기 어려운 수렁에 일부러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성욕은 제어되어야 하고, 나아가 끊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이에 동의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성욕이 아름답게 포장되기 때문이다. 성욕이 ‘사랑’이란 말로 포장되고, 로맨틱이란 이름으로 꾸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욕이란 말보다는 ‘사랑’이란 말을 더 좋아한다. 성욕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사랑이라고 하면 긍정적인 의미가 도드라지게 된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붓다는 욕망을 욕망으로서 바르게 볼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환상을 버리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볼 때, 욕망이 나에게 나아가 이 사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알게 된다. 바르게 보아야[正見] 바르게 알게 된다. 바르게 알아야, 그에 알맞은 대처가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욕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환상도 버리고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성욕을 버려야 하는가?’

우리는 나에게 나쁜 것은 멀리하고 버린다. 그런데 반대로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옆에 두거나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성욕을 버려야 할 것으로 본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성욕은 나쁜 것일까?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욕망이 지닌 특징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구체적으로 욕망이 부정적으로 기술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욕망은 대단히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성욕, 재물욕, 식욕, 명예욕(권력욕), 수면욕 등이 있다. 이들 욕망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다양한 관점이 가능하겠지만, 욕망의 주체로서 ‘나’와 그것을 주체가 지배하는 ‘소유’의 관념이 이들 욕망의 배경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아(我)’와 ‘아소(我所)’로 설명한다. 이를 간단한 명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명예를 갖고 싶다.
나는 잠을 자고 싶다.
나는 섹스를 하고 싶다.
나는 재산을 갖고 싶다.
나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위의 명제는 주체와 주체가 갖고 싶어 하는 소유, 즉 욕구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욕구의 내용이 충족되지 않으면, 이것을 ‘결핍’으로 설명하게 된다. 결핍은 불만족의 특징이기도 하며, 이것은 ‘고통’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욕구의 주체인 ‘나’가 욕구의 결핍을 통해 대단히 불만족하고, 불유쾌하며, 불편한 상황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불만족과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강력하게 욕구의 충족을 갈망하게 되고, 이를 통해 욕망에 지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욕망에 지배되면 우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카오스의 상태가 된다. 이를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탐욕(gedha)은 거대한 거센 흐름이라고, 열망(jappā)은 끌어들임이라고, 집착(ārammaṇa)은 혼돈(pakampana)이라고 나는 말합니다.(Sn. 945)

거센 흐름에 휘말리면 그 흐름에서 벗어나기란 좀체 쉽지 않다. 그 흐름은 우리를 끊임없이 끌어당겨 결코 놓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욕망에 사로잡히면 그곳에서 벗어나기란 매우 힘들다. 그리고 그 욕망에 사로잡힘, 즉 집착은 우리를 커다란 혼돈과 떨림으로 몰아넣게 됨을 이 경문은 말하고 있다. 이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서는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혼돈이 지속된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그 혼돈 속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판단’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붓다는 욕망에서 ‘떠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성욕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

온갖 성적 욕망의 대상에 대해(kāmesu) 탐욕하고, 열중하고, 미혹되고, 비열하며 바르지 못한 행위에 빠진 사람들……(Sn. 774)

성적 욕망의 대상에 정신을 잃고 빠져드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한 행위에 미혹되어 해서는 안 될 행위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모든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말하자면 붓다는 욕망 자체가 악하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빠져들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부주의함과 어리석음에 주의를 환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지만, 그것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성질을 갖고 있기에 그것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래서 애초에 그러한 욕망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동굴에 집착하고, 온갖 것에 덮여 있고, 유혹 속에 빠져 있는 자, 이러한 사람은 멀리 떠남과는 거리가 멀다. 참으로 세상에서 욕망의 대상들은 잘 포기되지 않는다.(Sn. 772)

‘잘 포기되지 않는다(na suppahāya)’는 말은 성욕에 사로잡히면 생각처럼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욕이란 다양한 모습으로 덮여 있어, 그것이 정확하게 포착되기란 쉽지 않다. 성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잘못된 방식의 삶을 선택했을 때, 그가 다양한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성욕이 포장되기 쉽다는 것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유혹되며, 자기 편리한 대로 정당화시키면서 욕망에 집착하는 것을 붓다는 ‘파멸’이란 말로 경계한다.


4. 통제되지 않는 성욕은 파멸의 문

《숫따니빠따》에는 《파멸의 경》이라는 작은 경전이 있다. 이 경에 성욕과 관련된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여색에 미치고 술에 중독되고 도박에 빠져 있어 버는 것마다 없애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 106)

자기 아내로 만족하지 않고 매춘부와 놀아나고, 남의 아내와 어울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 108)

젊은 시절을 지난 남자가 띰바루 열매 같은 가슴의 젊은 여인을 유인하여 그녀를 질투하는 일로 잠 못 이룬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Sn. 110)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타오르는 불구덩이를 피하듯, 깨끗하지 못한 행위를 삼가라. 만약 깨끗한 행위를 닦을 수 없더라도, 남의 아내를 범해서는 안 된다.(Sn. 396)

위의 경문을 보면, 이는 재가자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오늘날 제기되는 다양한 성문제에 대한 붓다의 입장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초기경전에서 성 혹은 성욕과 관련된 문제는 대단히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이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성욕이라는 욕망 자체가 나쁘다는 입장보다는 그것이 갖는 중독성과 흡인력이 강력하기에 충분하면서도 확고하게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여색에 미친다(itthidutto)’는 주석서에서 “여자에 매혹되어 가진 것을 모두 주고 점점 여자에게 사로잡힌다.”는 의미이다. 자기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매매를 한다던가 불륜을 저지르는 것은 파멸로 가는 것이며, 나이든 남자가 젊은 여인을 좋아하여 희롱하고 질투하는 마음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것 또한 파멸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욕이 갖는 특징의 또 하나가 여기서 나온다. 그것은 ‘질투’라는 정서이다. 질투는 중요한 번뇌 가운데 하나이다. 질투는 분노를 야기하며 파괴로 이어지게 된다. 《말룽까뿌따경(Māluṅkyaputta-sutta)》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혼란된 사띠로 형체(rūpa)를 보고 나서, 사랑스러운 모습에 마음을 기울이고, 애욕으로 물든 마음을 지닌 자는 그것에 집착하여 경험하고 머문다. 그 집착된 마음을 지닌 자에게 다양한 형체에서 기인한 감각(vedanā)들이 자라나고, 탐애와 분노가 마음을 파괴한다.(SN. IV, p.73)

사띠란 ‘(바른) 알아차림’ ‘(바른) 기억’ 등을 의미한다. 반면 혼란된 사띠(sati muṭṭhā)란 ‘잘못된 알아차림이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욕망으로 대상을 보면, 우리는 대상에서 욕망과 관련된 부분에 시선이 가게 된다. 그렇기에 사랑스러운 모습에 마음을 기울이고,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것은 욕망으로 대상을 물들이기에, 대상/상대는 본인의 의지와 관련 없이 욕망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욕망이 해소되기까지 욕망에 물든 자는 욕망의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를 《담마빠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자의 여자에 대한 욕망의 덤불은 그것이 조금 있더라도 제거되지 않으면, 젖먹이 송아지가 어미에 매이듯, 그와 같이 그의 마음은 속박된다.(Dhp. 284)

반대로 ‘여자의 남자에 대한 욕망의 덤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욕망의 덤불(vanatha)이란 ‘애욕의 숲’이라고도 이해된다. 잡목이 무성히 자란 곳에 들어가면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상상해 보면 성적 욕망이 우리를 얼마나 속박하는지,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성적] 욕망의 즐거움에 물들고 [성적] 욕망의 탐욕에 홀려서 마음을 빼앗겨 사람들은 과오를 깨닫지 못하네. 사슴이 쳐진 그물을 모르듯, 과오는 나중에 쓴 맛이 된다네. 결과가 악하기 때문이라네.(SN. I, Appakāsutta, p.74)

오늘날 ‘미투 운동’에서 폭로되는 내용,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가해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위 경문의 내용과 상당히 유사함을 보게 된다. 핵심은 스스로의 잘못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다. 욕망에 마음이 홀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과 말을 하는지 모르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그것의 과보가 어떤지에 대해서 알게 된다.


5. 판타지의 성욕을 벗어나기 위해

오늘날 야기되는 많은 성문제는 성에 대한 과도한 해석과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성에 개방적인 사회에서 오히려 성에 대한 이상하리만치의 무지가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성에 덧씌워진 관념들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데이비드 로이의 견해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오늘날 (성과 관련된) 그 문제는 죄책감이나 억압 같은 게 아니라 포르노그래피 중독과 같은 여러 유형의 강박이다. ……중략…… 가부장 사회에서는 남성에게 성욕을 배출할 통로를 개방하고 여성의 성과 출산은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우리의 문화는 성으로 푹 젖어 있다. 성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상업화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적 만족에 몰두하면 삶의 커다란 의미들이 붕괴되는 데서 오는 공허를 메우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의 중요성은 부풀려졌다.

앞서 연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사랑은 중독과 같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성은 중독성을 갖는다. 하지만 성행위를 경험한 모든 사람이 중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중독은, 로이의 해석처럼 그 의미가 부풀려지거나 왜곡과 억압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리고 성 자체가 자본과 결탁하면서 ‘상업화’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어 ‘성욕’은 판타지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갔다. 우리는 성욕을 그저 ‘스포츠와 같은 것’으로 치부하면서, 대단히 쿨(cool)한 척하지만, 그것이 바로 판타지이다.

왜 이런 판타지가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잘못된 ‘자아’에 대한 관념과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즐긴다’ ‘내가 경험한다’와 같은 관념이 성을 ‘관계’가 생략된 단순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것을 자본이나 즐겨야 할 어떤 것과 동일시하게 된다. 자본이나 즐겨야 할 어떤 것은 그것을 소유한 자의 것으로 본다. 그렇기에 ‘욕망으로서 성욕’에는 대상화된 욕망만이 존재하게 된다. 대상화된 욕망의 내용은 ‘즐거움’ ‘쾌락’과 같은 것이다. 포털에서 ‘성생활을 즐겨라’와 같은 검색어를 넣으면 생각보다 많은 기사가 검색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성에 대한 잘못된 억압과 왜곡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성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은 분명 왜곡된 성의식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즐겨라’와 같은 것은 또 다른 왜곡과 억압의 표상일 수 있다.

충분히 억압되었기에 이제는 즐겨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단순화된 논리이다. 우리는 하나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 다른 왜곡을 범하는 잘못은 없는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오늘날 이른바 비만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비만은 잘못된 식습관이나 음식에 대한 조절장애, 기타 유전적 요인 등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잘못된 식습관이나 기름진 음식에 대한 노출에서 찾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성에 대한 자극적인 묘사에 자주 노출되거나 또는 성적 쾌락을 직접 경험하게 되는 환경에 자주 노출되면 자연히 성에 대한 왜곡이 일어나기 쉽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미 충분하게 성이 노출된 사회이다. 그런 상황에서 ‘즐겨야 한다’는 것을 성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의 한 축으로 강조하는 것은 성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의 가능성이 있다.
불교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다. 그것은 성적 욕망을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성적 욕망과 관련된 용어에 대한 경(Kāmādhivacanasutta)》이 있다. 여기에서는 성적 욕망(kāma)과 관련하여 ‘두려움, 괴로움, 질병, 종기, 화살, 애착, 진흙, 모태’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이 내용은 용어 자체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가 충분히 강하다. 왜 그럴까. 성욕은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게 된다. 굳이 배우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성욕에 대한 갈망은 생겨난다. 그리고 그 쾌락을 경험하게 되면 그것에 속박된다. 그 속박에서 성에 대한 다양한 왜곡과 판타지가 생겨난다. 그렇기에 성적 욕망이 갖는 내적 특징과 사회적 특징을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앙굿따라니까야의 경문을 비롯한 불교의 비판적 입장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적 쾌락이 주는 달콤함과 그 이미지들로부터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욕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쾌락은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 역시 학습되는 것이다. 그래서 긍정적인 측면이든 부정적인 측면이든 성욕은 바르게 이해되고, 학습되어야 한다. 그럴 때 판타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6. 성욕은 통제되어야 하는 욕망

불교의 관점은 일관된다. 즉 모든 욕망은 올바르게 이해되고,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통제의 의미를 억압의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앞서 주체와 소유란 측면에서 간단하게 언급하였는데, 바로 주체와 소유의 해체가 통제의 의미가 된다. 욕망하는 주체와 소유에 대한 비판적 경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명한 자라면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희론적 개념의 뿌리를 모두 제거하십시오.(Sn. 916)

눈으로 탐내지 말아야 하고, 저속한 이야기에서 귀를 멀리 해야 하고, 맛에 탐착하지 말아야 하고, 또한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라도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Sn. 922)

보고, 듣고, 맛보는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욕망하는 주체에 대한 관념이다. 그리고 그렇게 경험된 것들이 내 것이라는 소유의 관념이다. 즉 주체와 소유는 모두 관념인 것이다. 이것을 희론(papañca)이라고 한다. 희론은 개념적 확산이란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다.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확산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관념이 욕망을 왜곡하게 한다. 바로 그 점에서 성욕이 이해될 때, 비로소 통제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성욕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욕망이다. 그런 만큼 성욕은 자칫 사람을 대상화하기 쉽다. 성욕에 사로잡히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욕망의 대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를 혹은 남자를 사람으로 보는 것이 훈련되어야 한다. 그것이 되어야만 성욕은 긍정적으로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방식은 무엇일까. 《대반열반경》에 참조할 만한 내용이 전한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어떻게 여인을 대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쳐다보지 말라.
세존이시여, 쳐다보게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말하지 말라.
세존이시여, 말을 하게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아난다여, 사띠를 확립해야 한다.(DN. II, p.141)

이는 수행자로서 올바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성욕의 근원인 여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여기에 붓다는 ‘사띠를 확립할 것’을 말한다. 사띠의 확립이란 올바른 기억이며 올바른 알아차림이다. 여인을 여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아야 함을 의미한다고 이해된다. 남자나 여자는 모두 사람이다. 여기에 성별을 붙여서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부분적 이해일 뿐이다. 그래서 온전한 이해는 성별에 구속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할 때 가능해진다. ‘사띠의 확립’은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띠가 확립될 때 욕망은 통제된다. 하지만 혼란된 사띠를 갖게 되면, 대화를 나누는 앞의 사람이 여자나 남자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성적 대상으로 보이게 됨을 의미한다. 앞의 사람이 여자 혹은 남자의 이미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는 성욕이란 욕망의 수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올바른 사띠의 확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몸과 말과 뜻으로 자제해야 함을 역설한다. 그것이 바로 위험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이란 가르침이다.

몸으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말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뜻으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고 부끄러워하는 자는 보호받는 자라고 말해진다. (SN. I, Attarakkhitasutta, p.73)

위의 경문은 부처님과 꼬살라국의 왕 빠세나디의 대화이다. 좋은 것 혹은 훌륭한 것(sādhu)은 우리의 행위가 자제될 수 있을 때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몸으로, 말로, 생각/뜻으로 행위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의 방식이다. 그 모든 행위의 방식은 자제될 수 있어야 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도덕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다. 내가 보호받기 위해서이다. 앞서 《숫따니빠따》의 《파멸의 경》 경문을 통해서 보았듯이, 자제하지 않으면 보호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평생을 노력해서 얻은 것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 존경의 눈이 경멸의 눈으로 바뀌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그리고 성욕에 물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쉽고 간단하다. 쉽고 간단하기에 무엇보다도 강력하다. 우리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욕의 힘을 너무 간과하게 되면, 그 힘에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우리는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성욕은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고, 적절하게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

 

이필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 청주대학교 철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졸업. 일본 북쿄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阿羅漢の研究〉(박사논문) 〈사무량심의 ‘해탈도’적 성격 고찰〉 〈초기불교의 연기이해: 수행론적 관점에서의 새로운 접근〉 등이 있으며, 저서로 《불교 경전은 어떻게 전해졌을까》(공저)와 번역서 《사성제 팔정도》 등이 있다.











규탄사하는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 소장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규탄사하는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 소장

이지솔 인턴기자 (space7@newscj.com)
승인 2017.08.17 




[천지일보=이지솔 인턴기자] 조계종 적폐청산시민연대가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우정국로 조계사 일주문 앞에서 조계종의 ‘은처승 및 성범죄 연루 비구 산문출송 요청’ 긴급 기자회견을 연 가운데 나무여성인권상담 김영란 소장이 규탄사를 하고 있다. 김영란 나무여성인권상담 소장 - 천지일보 - 새 시대 희망언론

"힐링, 인간의 깊은 내면과 거대한 사회 구조를 동시에 얘기해야죠" < 이웃종교의 향기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힐링, 인간의 깊은 내면과 거대한 사회 구조를 동시에 얘기해야죠" < 이웃종교의 향기 < 신학과 영성 < 기사본문 - 가톨릭뉴스



"힐링, 인간의 깊은 내면과 거대한 사회 구조를 동시에 얘기해야죠"

기자명 문양효숙 기자
입력 2013.01.03
[이웃종교의 향기-3] 나무여성인권상담소 김영란 소장

나무여성인권상담소는 지난해 12월 29일로 문을 연지 꼭 4년이 되는 불교계 첫 여성인권단체다. 여성 불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서원으로 시작해 그간 성폭력 피해자 및 가해자 상담, 중고등학교의 성폭력 예방교육 등 다양한 상담과 교육 활동을 펼쳐왔다. 김영란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의 치유에 “‘나’라고 규정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없다”는 불교적 관점이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나무여성인권상담소 김영란 소장 ⓒ문양효숙 기자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해 몸이 더렵혀진 것이 아니라 ‘폭력’을 당한 것임을 알게 하는 회복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명상과 종교적 차원의 깨달음을 통해 보다 깊이 있는 차원의 치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더러워진 나’도 없으니까요.”

이런 생각으로 상담소에서는 꾸준히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흔히 위빠사나 수행이라 불리는 MBSR(Mindfulness-Based Stress Reduction)을 비롯해 매주 수요일 별도의 명상모임을 하고 있다.

피해자 상담이 ‘치유와 회복’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가해자 교육과 상담의 중심은 ‘변화’다. 교도소에서 집단 교육을 진행하는 김 소장은 “교육을 통한 가해자들의 변화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몇 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몇 십 시간의 교육으로 바뀌길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이라고 말한다.

“그들을 ‘내가 알고 살아온 것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고 흔들어 놓을 수 있기만 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보통 성에 대한 통념이 강할수록, 성 역할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성폭력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성에 대한 통념은 오랜 시간 사회에서 학습된 결과물이죠.”

가부장적인 사회라는 견고하고도 거대한 공간에서 한 인간은 거기에 세팅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니 흔들어 놓을 수만 있어도,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반문할 수만 있어도 효과는 있다는 것이다. 영구적으로 전자발찌를 채우고 영구적으로 격리시킬 수 없다면 말이다. 김 소장은 ‘화학적 거세’도 성폭행의 본질을 오랜 시간 형성되어 온 가부장제 사회 때문이 아닌 ‘욕구’로 보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결국 한 개인의 변화, 혹은 치유는 사회 구조의 문제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서.

일상에 널리 퍼진 성폭력,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당한 일은 그런 게 아니다'

김 소장은 최근 언론에서 아동 성폭력이 많이 보도 되면서 “저렇게 심한 것만 성폭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아동 성폭력이 급격히 증가한 게 아닌데 언론이 선별적으로 보도하다 보니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성폭력에 대해서는 ‘뭘 그 정도를 가지고?’ 라고 하찮게 생각하게 되는 거죠.”

나무여성인권상담소에서 진행하는 가해자 개별상담 중에는 고소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피해자들이 교육을 원한 경우도 있고 가해자 스스로가 상담을 필요로 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가해자들은 대부분 머리로는 ‘그런 행동은 나쁘다’고 인지하고 있다. 다만 자신들은 물리적 압력을 가한 것이 아닐 뿐 더러 ‘호감의 표시’였기 때문에 ‘넘어가 줄 수도 있는 문제’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이런 일들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고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훨씬 더 많다. 이 때 피해자들에게는 “나에게 닥친 일은 ‘그런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가해자들에게는 “나는 그런 사람(성폭력 가해자)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래서 김 소장은 “다양하고 섬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해석'과 '원뜻', "너와 나의 구별없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존중하라"

성폭력 상담과 더불어 불교 안에서 여성의 인권을 고민하는 김 소장에게 ‘여인불성불’(女人不成佛,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고 다음 생에 남성의 몸으로 성불해야 한다), ‘비구니 팔경계’(비구니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계율, 100세의 비구니라 할지라도 신참 비구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조항 등을 포함하고 있다)등 기록된 대로라면 성차별이 분명한 불교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물었다. 김 소장은 “중요한 것은 원뜻” 이라고 답했다.

“불교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생명 그 자체로 존중하고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고 하죠. 부처님은 여성이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았던 시절에 여성도 출가자로 수행의 삶을 살도록 하셨어요. 하지만 불교가 종교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부장적 사회의 역사관이 많이 개입되었겠지요.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해석’이 아닌가 해요. 문구 자체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원래의 뜻으로 해석해야겠지요.”

그러나 김 소장은 총무원장 선거와 관련해 비구니 스님들에게 피선거권이 없고 수적으로는 5000여명으로 비구 스님과 비슷한데도 선거권은 현저히 적은 문제와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의 위계적 문화 등을 거론하며 “현실적인 불평등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차분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조금만 깨이면 출가자들의 불평등 문제에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비구니 스님들이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들고 나오는 게 맞지요. 하지만 종교라는 틀이 너무 견고하다면 주변 여성들이 더 목소리를 내는 게 좋겠다 싶어요. 우린 걸리는 게 없으니까요. 재가 여성들이 비구니 스님들의 힘이 될 필요가 있어요. 여성들이 공동으로 해야 하는 일인 거죠. 대다수인 여성들이 깨이지 않으면 오히려 그 체제를 더 두둔할 수 있어요. 사찰에서 나이든 보살님들이 더 위계적이시기도 하거든요.”

신행(불교에서는 ‘신앙생활’ 대신 ‘신행’이라고 쓴다)에서 문화를 바꾸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김 소장은 얼마 전 양성평등 사찰가이드북을 만들었다. 제작 과정에서 사찰 내 성차별 피해사례를 모으기도 했다. “결국 사부대중(불교에서 출가와 재가, 성별에 따라 불자들을 구분하는 말로 비구니와 비구는 출가한 여성과 남성, 우바이와 우바새는 재가 여성과 남성을 일컫는다)이 함께 가야 하니까요. 문화를 바꿔나가는 게 중요해요”

정토회를 만나면서 시작한 불자의 길, "모든 것은 내가 원한 것이다"

1990년대 말, 마음이 힘들었던 때 우연히 정토불교대학을 접하며 불자가 된 김 소장은 정토회의 수련과 초창기 법륜 스님의 100일 즉문즉설에 함께 했다. 대학교수를 목표로 달려왔던 김 소장은 그 시간을 거치며 “대학교수가 아니어도 괜찮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결정했다. 그는 모든 건 우연이 아니라 ‘자신이 원한 일’이라고 했다.

“제가 원하니까, 그 때 정토회를 만났을 거예요. 좋은 일도, 고통스러운 일도 모두 제가 원했던 일이예요. 그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거구요.”

그러면서 김 소장은 10여 년 전, 법륜 스님의 녹취를 풀면서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산에 올라갈 때 나는 좀 거뜬한데 옆 사람 짐이 무거워 보이면 들어줄 때가 있잖아요. 나는 그냥 내가 할만 해서 한 거니까 정상에 올라갔을 때 상대방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죠.”

그는 그렇게 바라지 않고 가보고 싶다고 했다. 결심과 맹세보다는 할 만한 일을 하면서 말이다. 나무여성인권상담소의 ‘나무’는 불교에서 부처에 ‘귀의(歸依)’함을 뜻하면서 동시에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에게 나무 그늘과 같은 쉼터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은 이름이다. 그 이름처럼, 연구소는 오늘도 자연스럽고 가볍게, 하지만 깊이 있는 뿌리로 상처 입은 이들과 불평등으로 어그러진 세상의 곁을 지키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문양효숙 기자 free_flying@catholicnews.co.kr

[도올김용옥] 중용 22강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고독감 - 색은행괴, 인부지이불온





===
초등학생을 위한 논어 성독(1)
백태명 울산학음모임 성독반  / 기사승인 : 2020-09-24 00:00:33
-+인쇄
백태명의 고전 성독
성독(聲讀)은 소리 내어 읽기다. 성독을 하면 낭송이 된다. 근대에는 사라진 중세의 공부법이다. 묵독(默讀)과 가창(歌唱) 사이에 낭송(朗誦)이 있었다. 낭송은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생생한 공부법이다. 한시를 소리 내어 읽다가 어느새 낭송을 하게 되는데, 초등학생들이 특별히 잘한다. 무슬림은 누구나 <쿠란>을 낭송하도록 하는 교리가 있어 우리가 본받을 만하다. 낭송은 지적 수준을 높이고 문화 창조의 기틀을 다진다.


초등학생들을 위한 한문 문장 공부 자료를 만들어보자. 남녀노소 누구나 동참하는 소리 놀이판을 벌려보자. 초등학생이 스스로 한문 공부를 하기는 어렵다. 부모와 함께 성독하고 의미를 풀면서 서로 의견을 나누자. 내용 공부와 글자 공부와 문장 공부를 동시에 할 수 있다. 해설에서 뜻을 찾고, 글자풀이에서 한자를 익히고, 글귀풀이에서 한문해석법을 공부하면 된다. 받들어 모셔야 할 성인의 말씀이 아니라 토론거리로 삼아 옛날과 오늘이 만나 한판 신명을 풀며 앞날을 내다보자.

<해설>
인류사에서 성인들 가운데 예수는 잠자지 않고 기도하라 했고, 부처는 먹지 말고 명상하라 했다. 공자는 먹고 자면서 공부하라 했다. 어느 것이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보통 우리는 공자의 말에 따라 살아간다. 공자는 공부를 하며 친구를 잘 사귀고, 됨됨이가 반듯한 사람이 돼 서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한다.


배우는 것은 선생님께 배운다. 배운 것을 스스로 익히다 보면 알기에서 하기로 넘어가 체득된다. 벗은 토론의 상대다. 以文會友(이문회우)라 해 글공부를 하며 벗을 사귀자고 했다. 독학이 초래할 편협함에 빠지지 않고 열린 마음과 융통성을 갖출 수 있다. 내가 공부하는 것은 남에게 나를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주권을 발현해 내심의 만족을 누리며 공익에 이바지하자는 것이다.


공자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스스로 학습과 친구 사귀기와 사람 됨됨이를 다시 살펴보자고 한다. 이것을 초등학생은 목표로 삼고, 학부모들은 반성자료로 삼아 충분히 토론해볼 만하다. 고전은 짧아도 많은 토론거리를 제공한다.

<글자풀이>
習(습)은 새끼 새가 날개짓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說(설)은 말씀 설, 달랠 세, 기쁠 열의 여러 가지 뜻을 품고 있다. 樂(악)은 음악 할 때는 악이고, 즐겁다 할 때는 락이다. 慍(온)은 성을 낸다는 뜻이니 마음이 불편하다는 말이다. 人(인)은 다른 사람 인자다. 乎(호)는 감탄사다.

<글귀풀이>
子曰 :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學而時習之 : 배우고(而) 그것을(之) 시시때때로 익히면
不亦說乎 :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乎)?

有朋 : 벗이 있어
自遠方來 : 먼 지방으로부터(自) 오면
不亦樂乎 :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慍 :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而) 성을 내지 않는다면
不亦君子乎 :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성독>
子曰學而時習之(자왈학이시습지)면 :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시시때때로 익히면
不亦說乎(불역열호)아 :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유붕)이 : 벗이 있어서
自遠方來(자원방래)면 : 먼 데서 찾아오면
不亦樂乎(불역락호)아 :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慍(인부지이불온)이면 :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不亦君子乎(불역군자호)아 :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論語(논어)> ‘學而(학이)一(일)’


백태명 울산학음모임 성독반

===
수신修身
질투와 시기

프로파일
 아우디 박주임 ・ 2020. 10. 8. 16:22
URL 복사  이웃추가
[백영옥의 말과 글] [163] 질투와 시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오랜 속담은 이런 인간 심리를 잘 드러낸다.

사람은 이웃의 기쁨과 슬픔 중 어느 것에 더 잘 동화될까. 슬픔이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타인의 슬픔은 아무리 나눠도 마음이 무거울 뿐 진짜 내 것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이웃의 기쁨을 진심으로 나누는 경우는 좀 더 힘들다. 가족이나 정말 친한 친구가 아니고서는 대개 그렇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오랜 속담은 이런 인간 심리를 잘 드러낸다. 독일어에도 비슷한 단어가 있다. 샤덴프로이데가 그것인데, 고통을 뜻하는 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Freude의 합성어이다. 사람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은밀히 즐기는 심리가 있다.

아니, 옆집 젖소를 죽여줘!

러시아 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운 좋게 마술램프를 발견한 농부가 있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 지니가 나타나 소원을 말하라고 했다. 농부는 옆집에 젖소가 있는데 온 가족을 다 먹이고도 남아서 그들이 우유를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농부의 얘길 듣던 지니가 "옆집처럼 우유가 잘 나오는 젖소를 구해드릴까요?"라고 물으니 농부가 대답했다. "아니, 옆집 젖소를 죽여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속 깊은 질투와 시기심을 말해 버린 것이다.

축구에서 골을 넣은 선수는 기쁨에 환호하지만 상대편의 골키퍼는 고통으로 얼굴을 감싼다.

미국의 소설가 고어 비달은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처럼 축구에서 골을 넣은 선수는 기쁨에 환호하지만 상대편의 골키퍼는 고통으로 얼굴을 감싼다.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시기와 질투는 존재한다. 기회와 과정이 공정하다면 입시와 승진, 사업의 성공을 보며 사람들이 느끼는 샤덴프로이데의 심리를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다. 그러나 모두가 합격하고 성공해서 행복해지는 건 그저 동화의 세계일 뿐이다.

무디타(Mudita)는 타인의 행복을 즐기는 기쁨을 뜻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인간이 야박하고 세상이 비정해 보인다. 그러니 이쯤에서 불교의 무디타(Mudita)의 지혜를 말하고 싶다. 무디타는 타인의 행복을 즐기는 기쁨을 뜻한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도 이런 글을 남겼다. "누가 내 등잔의 심지에서 불을 붙여가도 불은 줄어들지 않는다."



- 작가 백영옥



작가의 통찰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옛 속담이 더욱 공감되는 현시대입니다.

저의 상황으로 빗대자면 실적이 조금 부진한 때에 동료 직원이 계약을 많이 성사시킬 때가  그렇더라구요.


내 일과 같이 기뻐해 주고 축하해 줘야 마땅하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때가 많았습니다.

주위에 경사가 났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글의 마지막 인용구처럼 "내 등잔의 심지에서 불을 붙여가도 불은 줄어들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가슴에 새기며 다른 사람의 기쁨을 진정으로 축하해 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살아야 겠습니다.





글 출처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1/2020082104328.html


===

[불편한 상담] 스스로 설득된 만큼 마음이 움직인다 음양관 인부지이불온. 이해가 되면 용납이 쉽다 028

프로파일 정연호 ・ 2019. 12. 11. 12:50
URL 복사  이웃추가 

_ #음양관 의 관점으로 생각하기

_앎이 깊어질수록 그 #마음 이 드러나기 쉽다

_상황을 만났을 때 내 마음의 움직임 확인. 나의 현재 상태가 드러난다

_기본 개념( #의지사려지 ,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습득 후, 단편소설로 연습

_최종적으로 나의 삶을 음양관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실천해 나간다

_ #인부지이불온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않는다

_그런 사람의 존재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항상 있다

_건강한 마음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 그러므로 그 사람을 욕하지 마라. 내 문제다

_스스로 설득된 만큼 마음이 움직인다

_목적지를 정확하게 알자

_이해가 되면 용납이 쉽다. 생각의 토양이 지혜로워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