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8

아침숲속 * 마음공부

아침숲속 * 마음공부



마음공부 가이드북/마음공부 연구 논문

아침숲속 2010. 1. 18. 20:54
「마음공부」와 「원불교 마음공부」



1. 「마음공부」가 보편화 되고 있다.


대종사께서는
「천하에 벌여진 모든 바깥 문명이 비록 찬란하다 하나
오직 마음 사용하는 법의 조종 여하에 따라
이 세상을 좋게도 하고 낮게도 하나니,
···················
그러므로 그대들은 새로이 각성하여
이 모든 법의 주인이 되는 용심법(用心法)을 부지런히 배워서
천만 경계에 항상 자리 이타로 모든 것을 선용하는
마음의 조종사가 되며,
따라서 그 조종 방법을 여러 사람에게 교화하여
물심 양면으로 한 가지 참 문명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노력할지어다. 」(대종경 교의품30)라고 말씀하셨고,


정산종사께서는
「사람의 뿌리는 마음이라 무엇보다 먼저
마음공부에 힘써야 훌륭한 인격을 이루나니,
이 마음공부를 여의고
어찌 혜복의 결실을 바라리요.」(정산종사법어 무본편 9장)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급속한 과학 기술의 발달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하였지만
마음의 여유와 평화는 물질적 풍요와 더불어
함께 찾아오지 못한 채 오히려 인간 관계가 삭막해지고,
헛된 욕심에 이끌려 더 괴롭게 생활하는 사람들을
언론 매체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풍요가
꼭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어서 인지
사회에서는 점점 ‘마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어렴풋이 나마 ‘혜복의 결실을 얻으려면
사람의 뿌리인 마음을 알고,
또 마음공부를 해서 훌륭한 인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 것이지요.


이에 따라 여러 영성단체에서도 ‘마음공부’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각 영성단체의 이념에 따라 ‘마음공부’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음을 맑히고 밝히는 도덕사업을
여러 곳에서 함께 하게 되었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공부’의 수요자 입장에서는
시장에서 제품을 고를 때처럼
각 영성단체에서 내어놓은 ‘마음공부’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가장 실용적이고 효율성 있는 공부길을 잡아
꾸준히 공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원불교 마음공부」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나?


「원불교 마음공부」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원불교 마음공부」는
성리(性理) 즉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하여(性理大全)
남·녀·노·소·선·악·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실생활에서 마음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을 밝히고 있습니다.



1)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 성품의 원리인
       대소유무의 이치를 실생활에 그대로 활용한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 성품의 원리인
성리를 대·소·유·무(大·小·有·無)로 밝혀서
성품의 대소유무의 이치를 그대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대소유무의 이치의 의미를 살펴보면
대는 진공, 빈자리, 소는 천차만별 나타난 자리,
나타난 그것이 무한하게 변화하는 것이 유무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대·소·유·무로 나누어 본다면
한 생각 나오기 전을 大(眞空)=분별이 없는 자리, 변함이 없는 자리....
한 생각 분별하여 나올 때가 소(妙有)=분별이 나타나서, 차별이 생겨나며...
나온 그 생각이 취사선택으로 죄복간 변화되는 것을
有無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은현자재 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그러나 한가지 유의할 점은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하여 마음공부 할 때
대·소·유·무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대·소·유·무가 양면적이고 동시적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심지(心地)를 흔히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을 없다고 하는데
대종사님은 대소유무의 원리로 원래 요란함·어리석음·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자리란 대소유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자리라고 하셨습니다.

정산종사께서는 도운편 31장에서
「불교의 진수는 공(空)인 바
      그릇 들어 가면 공망(空妄)에 떨어지며,
유교의 진수는 규모인 바
      그릇 들어 가면 국집하며,
도교의 진수는 무위 자연인 바
      그릇 들어 가면 자유방종에 흐르며,
과학의 진수는 분석 정확인 바
      그릇 들어 가면 유(有)에 사로 잡혀 물질에만 집착하나니,
이 네가지 길에 그릇 들어가지 아니하고
모든 진수를 아울러 잘 활용하면
이른 바 원만한 법통을 이루며 원만한 인격이 되리라.」하셨는데
네가지 길(불교·유교·도교·과학의 진수)에 그릇  들어가는 원인은
바로 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로 떨어진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대소유무가 양면적이며 동시적이라는 사실을 놓쳤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품이나 심지, 자성, 진리를 이야기할 때도
성품은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는 자리,
고요하고 텅 빈자리라는 무언가 깊은 수행을 통해
깨쳐야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관념에 잡혀있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요란한 마음이 일어남은 수행의 미숙이요,
참 마음이 아니므로 빨리 없애려하고 (-없게 하는 것으로서...)
세우고 돌려야 한다는 데 많이 걸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품은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건마는(大=眞空)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小=妙有)
그 마음을 통해 공부하여 변화되는(有無=造化) 것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마음이 아니라 한마음입니다.
대종사께서는
「사람의 성품은
정한 즉 선도 없고 악도 없으며(無善無惡)
동한 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나니라.(能善能惡)」(대종경 성리품 2장)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품은 없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원래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것입니다.
밉고, 예쁘고, 옳고, 그르고, 화나고, 짜증나고,
즐겁고 등등으로 변화무쌍하고 다양하게 나타나는 마음은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 그대로가 온전한 것이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천지의 일기도 어느 때에는 명랑하고
어느 때에는 음울한 것과 같이,
사람의 정신 기운도 어느 때에는 상쾌하고 어느 때에는 침울하며,
주위의 경계도 어느 때에는 순하고 어느 때에는 거슬리나니,
이것도 또한 인과의 이치에 따른 자연의 변화라,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그 변화를 겪을 때에
수양의 마음이 여여하여 천지와 같이 심상하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 변화에 마음까지 따라 흔들려서
기쁘고 슬픈 데와 괴롭고 즐거운 데에
매양 중도를 잡지 못하므로 고해가 한이 없나니라」(대종경 인과품 6장)
라고 말씀하셨습니다.(中道, 圓滿, 八正道)
그러므로 무시선법에서도 ‘사람이 만일 참다운 선을 닦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진공(眞空)으로 체를 삼고 묘유(妙有)로 삼으라’ 는
원리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참회문에서도 이참과 사참의 원리로 참회하는 것입니다.

항상 마음이 즐겁고, 양보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따라 화나고, 짜증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
인과의 이치에 따른 자연의 변화이며 마음의 원리입니다.
다만 
그 어떤 것이 마음을 통과하더라도
그것을 간섭하지 않고
그 있어지는 마음에
끌리는지 안 끌리는지 잘 살피는 것이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란한 만큼 마음공부하면 정력(定力)이 쌓이고,
어리석은 만큼 마음공부하면 혜력(慧力)이 밝아지고,
그른 만큼 마음공부하면 계력(戒力)이 얻어집니다.

일어나는 마음과 내는 마음은 다릅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모든 성인들이
아만심(我慢心),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을
내지 말라 했지, 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정전 교의편 일원상의 신앙에서도
일원상의 진리를
대소유무의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로 믿으며,
선악업보가 끊어진 자리로 믿으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 믿으며,
그 없는 자리에서 공적 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으며,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는 것을 믿으며,
언어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는 것을 믿으며,
진공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이

일원상의 신앙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하고 깨끗한 것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마음도 생겨납니다.
다만 보조국사가 수심결에서
“생각(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침(대조)이 더딤을 두려워하라.”하며,
또 이르되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치라. (앗! 경계다)
깨치면 곧 없어진다.”하였듯이(신앙=이완)
경계따라 있어지는 마음을
공부만 하자는 것입니다.(믿는 것이 곧 일원상의 신앙=처처불상)

「원불교 마음공부」는 이처럼
우리 성품의 원리인 성리를 대소유무로 밝혀서
온통(性理大全) 활용하면서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치를 보는데 걸림이 있으면
    대소유무로 풀어가고
일을 하는데 걸림이 있으면
    시비이해로 풀어서
    (의두는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이며
     과거 불조의 화두 중에서 의심나는 제목을 연구하여 감정을 얻게하는 것.)
실생활에 다달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은 一切唯心造 時代가 아닌
用心法 時代에는
이치의 대소유무와 일의 시비이해로 공부하지 않으면
어리석다(愚)고 하셨습니다.
(愚라 함은 대소유무와 시비이해를 전연 알지 못하고 자행 자지함을 이름이니라.)



2)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대도를 체험하고 깨치도록 한다.

대산종사님께서는 청년 회원들에게
“『팔만대장경을 설해 주신 부처님의 근본 뜻과
  칠대교서(七大敎書)로 가르쳐 주신 대종사님의 근본 의의를
  한말로 표현해 보아라.』
『공(空)입니다.』
『그럴듯하다. 부처님께서는
 일체가 다 마음의 짓는 바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셨다.
 대종사님께서는
「마음을 잘 쓰라. 용심법(用心法)」이라고 하셨다.

 마음 하나 잘 쓰면
 그 사람은 가정에 있어도 성공하고,
 국가에 있어도 성공하고,
 어디에 가도 그 사람은 성공한다.”(대산종사 법문 수행편 1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의 用心法 性理의 특징, 마음공부의 특징은
바로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실지로 훈련하여
구전 심수(口傳心授)의 정법 아래
사람사람이 그 대도를 체험하고 깨치도록 하였다는 점입니다. (대종경 수행품22)
이에 비하여 과거 일체유심조의 佛敎 經典인 팔만 장경은
성리를 많이 아는 것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性理(마음의 원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지만
실제 생활에서 쉽게 원리를 알아 마음을 사용하기에는
내용이 번거하여 공부길을 잡는데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대종사님의 用心法 性理는
쉬운 말로 그 원리를 밝힌 데에 차별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부인들은 삼가 많고 번거한 옛 경전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마땅히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뛰어난 역량(力量)을 얻은 후에
저 옛 경전과 모든 학설은 참고로 한 번 가져다 보라.
그러하면, 그 때에는 십년의 독서보다
하루 아침의 참고가 더 나을 것입니다.(대종경 수행품 22장)


원불교의 마음공부인
대종사님의 用心法 性理는
‘우주만물의 본래 이치와
우리 자성의 원리를 해결하여 알자는 것’입니다.
과거 일체유심조의 佛敎 性理는
성리를 많이 알아서 해결 할려고 하였는데
원불교의 성리는 원불교 교리 전체가 一圓 性理이므로
유무식 남녀노소 선악귀천이 없이
法 대로 하면 일상 생활(경계)속에서
해결하여 알아 집니다.(=운전하듯)
성품의 대소유무 이치를 그대로 실생활에 활용하는 사람이
원만한 공부인 입니다.(人道上 要法=性理 大全)




3. 「원불교 마음공부」는 어떻게 하나요?
         -通萬法 明一心의 공부법 <일상수행의 요법>


대산종사께서 ‘대종사님은 교리 전체를 성리화시켜
주물주물 온갖 복혜를 다 만들도록 해주셨다.
이 또 대자대비가 아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듯이
원불교는 교리 전체가 성리입니다.
정전 교리도를 보면 일원상 밑에 사은사요 삼학팔조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이 다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교리 전체가 성리이기 때문에
일원 성리를 알면 모든 교리의 참뜻이 다 통하고
또한 교법으로 사는 분은 바로 성리로 사는 분입니다.

원불교 성리 공부는 삼학 공부로써 하게 됩니다.
우리 성품의 원리가 진공 묘유 조화(空圓正)의
세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세가지 속성을 삼학으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정신수양으로 성품의 빈자리(진공)를 잘 지키고 기르며
사리연구로 성품이 밝고 밝아서
모든 분별과 차별이 나타나는 자리를 잘 알고 깨달아서
작업취사로 성품의 변화무쌍한 조화(造化)의 자리를
잘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원불교 교리 전체는 우리 성품의 원리를
온통(性理大全) 활용하면서 살 수 있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마음의 원리(性理), 대소유무의 이치인 성리(性理)를
가장 쉽게 실생활 속에서 해결하여 알게 해주신 법문이
일상수행의 요법 1, 2, 3조입니다.
一圓相의 진리, 신앙, 수행, 서원문, 법어의
큰 역량을 실생활 속에서 해결하여 알아가는
一圓 性理로 마음공부의 기본이고, 기초 공부가 되어
通萬法 明一心, 明一心 通萬法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마음공부는 見性을 중요시하였지만
새 시대는 견성보다 원만한 심법(대소유무)이 중요한 시대이므로
(법강항마위는·····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으며,
출가위는······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라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하며, -법위등급
佛供하는 것을 보면 견성한 것을 안다 -대산종사
견성유무는 事事佛供에서 확인
       대종사님은 [정전]에서 見性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심.)


[일상수행의 요법]을 생활 속에서 대조하여
通萬法 明一心하는 공부를 할 때
수행을 위한 삶이 아니라
삶을 위한 수행이 되어져서
삼학이 3가지 과목이 아니며,
(우리가 경전으로 배울 때에는
삼학이 비록 과목은 각각 다르나,
실지로 공부를 해나가는 데에는
서로 떠날 수 없는 연관이 있어서
마치 쇠스랑의 세발과도 같나니,-대종경 수행품 21)
팔조가 8가지 조목이 아니며,
솔성요론 16조가 16가지 조목이 아니고
삼십 계문이 30개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한 마음 밝히는 한가지 공부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많고 번거한 경전을 통해
문자화되고, 고정된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자신에게 벌어지는
대소유무의 이치와 시비이해의 일을 공부하므로
실제 생활 속에서 깨치고 쉽게 응용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그대들에게 많고 번거한 모든 경전을 읽기 전에
먼저 이 현실로 나타나 있는
큰 경전을 잘 읽도록 부탁하노라. -수행품23)


영문법을 공부만 하다보니,
궁극적 목적인 영어 회화가
말을 먼저 배운 어린이들 보다
더 서툴고 두렵고 안 되듯이
우리 기성 세대가 마음 공부하는 것도
어린이들처럼 쉽고 간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교리를 마음공부를 통해 하지 않아
오히려 교리 때문에 마음공부에 어려움이 더 많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지식적인 사고가 절대 가치로서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힘이 되었지만
또한 한계이기도 하였습니다.


萬法을 공부만 했지
通萬法 明一心 공부가 약해서
항상 교리와 수행에 대한 가난과
지적인 교리 해석의 사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교리와 모든 법들이
결국 마음 공부를 통해 한 마음을 밝힐 수 있게 하여
明一心 通萬法 공부로
진리적이고 사실적인 우리의 실명화된,
생활법에 대조하는 마음공부입니다.


정산종사께서
?天下의 大道는 簡易하나니,
공부길을 잡은 이는 팔만장경을 단련하여
한두어 마디로 강령잡아 실행하나니라.?(정산종사법어 법훈편 8장)
라고 말씀하셨듯이
일상수행의 요법은
생활 속에서 실행할 수 있도록 내어주신 강령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이 너무 간이하여
가볍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종사께서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그 뜻을 새겨서 마음에 대조하여
대체로는 날로 한번씩 대조하고
세밀히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잘 살피라?고 하셨으며,
(‘앗! 경계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말고 - 무시선법
=here & now
=순간마다 공부 챤스 경계마다 공부거리-좌산종법사)


정산종사께서는 
?참다운 자성 반조의 공부는 견성을 하여야 하게 되지마는
견성을 못한 이라도 신성 있는 공부인은
부처님의 법문에 의지하여 반조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바,
그 요령은 정전 가운데 일상수행의 요법을 표준하여
천만 경계에 항시 자성의 계 정 혜를 찾는 것이요?라고
하셨으며,
대산종사께서는
?일상수행의 요법에
전 생령이 구원을 받는 삼학팔조와
세계 평화의 근본인 사은에 대한 보은 불공생활과
온 인류가 서로 잘 사는 묘방인 사요?가
다 담겨있다고 하셨습니다.



4. 「원불교 마음공부」와 사회운동은 둘이다?


마음공부를 혹 한 개인의 공부같이 여길 수 있지만
자신의 마음공부를 근본으로 하여
세상을 밝히는 지혜와 힘을 기르는 공부가
마음공부입니다.(一心은 宇宙의 中心-大山-,응용하는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 하기를...,
                    개인에 비치면 개인이 도움을 얻고, 가정에..., 사회에..., 국가에..., 세계에...
                    자력은 타력의 근본, 타력은 자력의 근본)


정산종사께서는
?측량하는 사람이 먼저 기점을 잡음이 중요하듯이
우리의 공부 사업에도 기점을 잡음이 중요하나니,
공부의 기점은 자기의 마음공부에 두고,
제도의 기점은 자신의 제도에 둘지니라.
그러나 자신을 다 제도한 후에 남을 제도하라는 말은 아니니
마음공부에 근본하여 모든 학술을 공부하고,
자신 제도에 힘쓰면서 제도 사업에 힘을 쓰라 함이니라.? (정산종사법어 무본편 13장)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 5조에서 9조까지에 ‘돌리자’라고 하였는데
경계따라 있어지는 것(요란함,어리석음,그름,원망 생활,...공익심 없는...)을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 경계를 마음 공부로 돌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원리가 대소유무로 되어있는 것을 알기에
‘아! 원래는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것이구나’하고
그 마음 그대로 받아들이고 신앙(일원상의 신앙=대소유무)하여
감사 생활 하고자 하는 내가
원망 생활하는 나를 불공의 대상으로 삼아 돌리는 것입니다.
일상 수행에서는 돌리는 기쁨, 돌리는 재미, 돌리는 힘이
곧 신앙의 힘이 됩니다. (일원상의 신앙=전체 신앙=처처불상)
        (‘아는 사람 책임이고, 힘 있는 사람이 아쉬운 것입니다’-大山)
사회 운동 또한 마음 공부를 통한 신앙 없이
사회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만 하면
서로서로 반목하며 상대방을 비난하는 마음만 자라나서
오히려 참다운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산종사께서는
?불공에는 자기 불공과 상대 불공이 있는 바,
이 두가지가 쌍전하여야 하지마는
주종을 말하자면
자기 불공이 근본이 되나니,
각자의 마음 공부를 먼저 하는 것은
곧 불공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니라.?
(정산종사법어 권도편 13장)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마음을 비운 만큼 은혜롭고
내가 은혜를 느낀 만큼 마음은 비워지는 것입니다. (無我=大我)


감사 생활하는 사람(경우에는)은
원망 생활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대 우주만유 불공)
    원망 생활하는 사람(경우에는)은
    감사 생활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자력 생활하는 사람(경우에는)은
타력 생활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타력 생활하는 사람(경우에는)은
    자력 생활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잘 배우는 사람(경우에는)은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배울 줄 모르는 사람(경우에는)은
   잘 배우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잘 가르치는 사람(경우에는)은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가르칠 줄 모르는 사람(경우에는)은
   잘 가르치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고,
공익심 있는 사람(경우에는)은
공익심 없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아
   공익심 없는 사람(경우에는)은
   공익심 있는 사람을 불공의 대상을 삼아(대 인류 불공)

서로서로 신앙하며 불공할 때
비로소 대립이 사라지고
은혜롭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大山 宗師는 일상수행의 요법을
<法대로 하면,  1-4조는 大 中和力
 5조는 大 感化力,  6-9조는 大 均等力이 나온다.>하셨습니다.  



5. 「원불교 마음공부」는 ‘마음대조공부’


「원불교 마음공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원불교 마음공부」의 특성은
성리(性理) 즉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하여(性理大全)
남·녀·노·소·선·악·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실생활에서 마음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법을 밝히고 있으며,
원불교 교리 전체는 우리 성품의 원리를
온통(性理大全) 활용하면서 살 수 있게 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불교 마음공부」는 ‘마음대조공부’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마음을 사용할 때는 대소유무의 이치에 대조하고,
진리를 공부할 때는 ‘일원상의 진리’에 대조하고,
신앙의 길을 찾을 때는 ‘일원상의 신앙’에 대조하고,
수행의 어려움을 느낄 때는 ‘일원상의 수행’에 대조하고,
서원에 반조할 때는 ‘일원상 서원문’에 대조하고
일상 생활 속에서 공부해 나갈 때는 ‘일상수행의 요법’에 대조하고,
참회할 때는 ‘참회문’에,
불공을 할 때는 ‘불공하는 법’에 대조하는 것입니다.
교리 전체가 우리의 마음의 원리인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하여 짜여졌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법대로 대조만하면 됩니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막연히 마음을 공부하는 아니라
법대로, 대소유무의 이치에 자신의 마음을 대조하여
공부해 나가는
‘마음대조공부’라는 것에 그 차별성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 작용 하나하나에서부터
진리, 신앙, 수행, 서원과 생활 속에서 생기는
수행상의 모든 것을
확인 받고 공부길을 잡아갈 수 있는 공부법이야말로
마음공부를 통해
마음의 자유와 행복을 얻으려는 공부인들에게
가장 쉽고 바른 공부가 될 것입니다.


 글 : 박선태 교무



출처 : 원불교용원교당
글쓴이 : 원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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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觀相)과 심상(心相) < 신길우의 수필세계 < 특별기획 < 기사본문 - 동북아신문

관상(觀相)과 심상(心相) < 신길우의 수필세계 < 특별기획 < 기사본문 - 동북아신문



관상(觀相)과 심상(心相)

기자명 동북아신문 기자  승인 2007.01.12



<신길우 수필 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운명(運命)을 알고 싶어한다. 때로는 남의 운수를 알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짐작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간혹 용하다는 이가 있다고도 하나 맞추는 확률이 남달리 높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흔히 사람의 운명을 알아보는 방법으로는 사주와 관상을 꼽는다. 사주(四柱)는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간으로 그것을 따져서 그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는 것인데 글자 수가 여덟 자라 팔자(八字)라고도 하며, 관상(觀相)은 그 사람의 실제 생김새를 보고 운수를 알아보는 것이다. 둘 다 일종의 통계학(統計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사주는 같은 시간대에 난 쌍둥이의 경우는 사주가 같을 수밖에 없는데, 관상은 똑같은 모습의 사람은 없기 때문에 똑같은 관상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흔히들 사주보다는 관상이 보다 정확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주와 관상보다도 더 정확한 것으로 심상(心相)을 들기도 한다. 심상은 그 사람의 마음 바탕과 마음가짐을 보고 판단하는 것으로 그 어느 방법보다 낫다고 한다.



중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의 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를 가끔 들려 준 일이 있다.



옛날 어느 양반이 아주 늦게 아들 하나를 두었다. 온갖 정성을 들여 길렀고 아이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생김새도 출중한 데다가 총명하여 공부도 잘 하였다. 비록 늙마에 얻은 아들이었지만 늙은 부모는 아이가 훌륭하게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쁨과 즐거움 속에 나날을 행복하게 보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어느 날 이 집에 스님 한 분이 동냥하러 왔다. 어머니는 양식을 듬뿍 담아 아들을 시켜 보냈다. 아이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공양 주머니에 양식을 쏟아 넣었다.



이러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스님은 그 아이의 잘 생긴 얼굴과 예의바른 행동을 눈여겨보고는 돌아서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가 뒤돌아보고는 참 안 됐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되돌아갔다.



스님의 그러한 행동을 본 아이는 어머니에게로 달려가서 그 사실을 일러 드렸다. 어머니는 평범한 스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그 스님을 모셔 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아이를 보고서 어인 일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를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스님은 매우 난처해하기만 하고 말하려 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정중하고도 간곡한 부탁에 스님은 결국 말해 주었다.



이 아이는 관상이 참으로 훌륭하다. 그러나, 열 세 살밖에 살지 못한다. 그래서 혀를 찼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 명운(命運)을 늘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 아이의 아버지는 낙심천만(落心千萬)이었다.



 ‘이처럼 잘 생기고 똑똑한 아이가 열 세 살에 죽다니……’



그 뒤부터 그는 아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게 두었다. 가르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지만 무엇보다도 일찍 죽게 될 아이를 귀찮게 하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이러한 아버지의 태도에 아이가 그 연유를 물었다.



“전에는 공부하다가 조금만 놀아도 ‘그만 공부하라’고 이르시더니 요사이는 공부를 하고 있어도 ‘그만 나가 놀아라’고 하시는데 그 연유가 무엇이옵니까?”



아버지는 안쓰러워만 하다가 할 수 없이 그 스님의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열 세 살밖에 살지 못한다면 도리어 더 열심히 공부를 하여야 마땅합니다. 남들은 60년을 사니 놀아가며 공부해도 되지만 13년밖에 살지 못하는 저는 그들보다 4,5배는 더 서둘러 부지런히 공부를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공부하지 마라고 이르시는 것은 크게 잘못 생각하신 것이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새로운 기운을 얻어 그 아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렇다. 네 말이 맞다. 그리고, 너는 절대로 열 세 살에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거라.”



그 아이는 그 뒤 몇 배로 학업에 힘썼고, 또한 열 세 살에 죽지도 않았다고 한다. 도리어 높은 벼슬을 하며 훌륭하게 오래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마치고 끝으로 꼭 덧붙이시는 말씀은 이랬다.



“아무리 사주(四柱)가 좋아도 관상(觀相)만 못하고, 관상이 아무리 좋아도 심상(心相)만 못한 것이다. 모든 일은 자신이 어떻게 마음먹고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날 적마다 가끔 떠오르는 이야기이다. 못난 아들에게 훈계하신 말씀 가운데의 한 가지이지만, 누구나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이다. ☺

#관상(觀相), 심상(心相) 그리고 덕상(德相) : 네이버 블로그

#관상(觀相), 심상(心相) 그리고 덕상(德相) : 네이버 블로그



'관상은 심상만 못하고, 심상은 덕상만 못하다.' 

상호불여신호(相好不如身好)

얼굴 좋은 것이 몸 건강한 것만 못하고,

신호불여심호(身好不如心好)

몸 건강한 것이 마음 착한 것만 못하며,

심호불여덕호(心好不如德好)

마음이 착한 것이 덕성 훌륭한 것만 못하다.



위 내용은 중국 당나라의 ‘마의선인’이 쓴

바람난풍령*자연도시

#관상(觀相), 심상(心相) 그리고 덕상(德相) 풍령

2018. 11. 27.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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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상서(일종의 관상학)에 나오는 유명한 내용이다.

‘마의 선인’이 하루는 시골길을 걷고 있는데

나무를 하러 가는 머슴의 관상을 보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마의선인’은 머슴에게 “얼마 안 가서 죽을 것 같으니

너무 무리하게 일하지 말라”고 당부하게 된다.

그 머슴은 그 말을 듣고 낙심하여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을 할 때

산 계곡물에 떠내려 오는 나무껍질 속에서 수 많은 개미떼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보였다.

그 머슴은 자신의 신세와 같은 개미들에게 연민(憐愍)을 느끼고

나무껍질을 물에서 건져 개미떼들을 모두 살려 주었다.

며칠 후 마의선인은 그 머슴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부귀영화를 누릴 관상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마의선인은 그 젊은 머슴이 개미를 구해준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아

마의상서 마지막 장에 남긴 말이 바로 위의 글귀다.

마음이 곱고,

심성이 착하고,

남에게 배려하고 베풀어 덕성을 쌓으면

사람의 관상은 은은하고 편안하게 변한다고 한다.

그래서 선하게 살면 해맑은 얼굴로 꽃피고

세상을 불편하게살면 어두운 얼굴로 그늘이 지게된다.

마음의 거울이 바로 얼굴이기 때문이다.

만상불여심상(萬相不如心相)

심상불여덕상야(心相不如德相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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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상, 심상(心相) 그리고 좋은 생각]



마음의 상, 심상(心相) 그리고 좋은 생각 

마음의 상, 심상(心相) 그리고 좋은 생각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얼굴에 드러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의 얼굴 을 보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하며 살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부자로 살 상이니 오래 살 상이니 하는 말은 얼굴의 상, 관상(觀相)을 보고 하는 말입니다. 손금 을 보는 수상(手相)도 있고 골격을 보는 골상(骨相)도 있지만 무엇보다 관상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한 사람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고 예측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관상 이니 사주니 팔자니 하는 예정론이 오랫동안 우리 삶을 정서적으로 지배해온 것이 사실이지 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삶이 얼마나 변화무쌍한 것인지를 이해 한다면 예정론 자체를 수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상, 심상(心相)은 다릅니다. 마음의 바탕을 보는 심상은 사람의 운명을 정확하게 예측 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진짜 관상가는 수상, 관상, 골상보다도 심상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 각하고 사람의 운명을 점칠 때 그 사람의 태도, 표정, 말 등을 자세히 살핍니다. 심상을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태도, 표정, 말 등을 통해서 그 사람의 심상을 짐작합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마음을 착하고 곧게 가지라’는 말은 ‘좋은 심상을 가지라’는 다른 표현입니다. 수상이나 골상, 관상은 억지로 바꿀 수 없지만 심상은 우리 의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심상을 바꾸면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항상 좋은 생각, 밝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좋은 심상을 유지하면 좋은 운명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수상, 관상, 골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심상이 좋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심상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표정을 지으며 좋은 행동을 합니다. 좋은 심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면 당연히 하는 일들의 결과도 좋아집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일수록 외부 환경과 다른 사람들에게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내 안의 심상에 더 관심을 가지고 미래를 쳐다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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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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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지구별> - 중요부분 요약 영성 / 독서

2012. 5. 7. 1:34


https://blog.naver.com/true_fruit/110137856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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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후기


누구나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다. 넋두리처럼 늘 존재하는 일상 속의 어려움이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커다란 사건이든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 앞에 놓여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때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 “왜?”라는 물음을 던지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할까?” 하지만 사실 그 ‘왜’라는 물음에 속 시원한 답은 없다.

이 책의 저자는 이때 그 물음을 이렇게 바꾸어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이 일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을까?”

저자는 이처럼 인생의 커다란 시련 앞에서 ‘왜’라는 물음을 ‘어떻게’라는 물음으로 바꾼 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가 만난 이들은 날 때부터 장애를 갖고 태어난 사람, 극심한 장애아를 자녀로 둔 부모, 불의의사고로 사지마비가 된 사람, 사랑하는 이를 연거푸 잃은 사람, 반평생을 알코올 중독자로 보낸 사람 등 어느 하나 그 고통의 무게가 가벼운 이가 없다. 그런데 그들이 이 책의 저자와 함께 영매와 채널러 들을 만나 자기의 ‘전생 계획’을 알게 되면서 지금의 고통 속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그로써 고통을 전혀 다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전생 계획이란 태어나기 이전, 영원한 영혼 상태의 우리가 지금의 생을 위해 짜놓은 계획을 말하는데, 그 계획에서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의 자녀로 태어날지, 어떤 학교를 다니고, 살면서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미리 정한다고 한다. 물론 그 안에는 삶의 어떤 시련을 겪을지도 들어 있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토록 고통스러워 보이는 시련을 계획하는 것일까? 바로 그 고통을 겪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우리 영혼이 더 높은 존재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혹 견디기 힘든 고통을 스스로 계획했다는 말이 충격적으로 들리거나 전생 계획과 같은 개념이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초점이 거기에 있지는 않다. 저자 역시도 독자에게 전생 계획을 전부 납득시키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며, 중요한 것은 “만일 그 말이 맞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지, 내가 정말 태어나기 전에 이 경험을 계획한 것이라면 나는 왜 그랬던 것일지” 한번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삶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가는 여행”이라는 문장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다. 저자가 이 책을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기를 권했듯이, 시련을 껴안고 용기 있게 고통의 숨은 의미를 찾아 들어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독자들도 공감의 마음으로 읽어 내려간다면 좋겠다.



1. 태어나기 전에 삶을 계획하다.




“만일 그 말이 맞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정말 태어나기 전에 이 경험을 계획한 것이라면? 나는 왜 그랬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도 삶의 시련에 새로운 의미가 생기고, 자기 발견의 여정이 시작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마음으로 읽기를 권한다. 마음은 머리보다 더 높은 형태의 앎, 더 위대한 지혜를 준다. 지적인 분석이 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영원한 영혼인 당신이 이번 생을 계획했을 때 중요한 것은 머리가 알게 될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물질계에서의 삶으로 인해 생길 여러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감정은 머리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머리는 장벽이 된다.

많은 의미에서 삶이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겨가는 여행이다. 우리가 삶의 시련을 계획하는 것은 바로 이 여행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이고, 닫힌 마음을 깨뜨려 열기 위해서이며, 그리하여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가치를 더 잘 알기 위해서이다.



지구로 들어올 때 우리는 영혼이었던 우리의 기원을 잊는다. 신성한 영혼인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기억해 내는 과정을 통해 자기를 더 깊이 알게 될 것이기에 우리의 진짜 정체성을 잊는 쪽을 선택한다. 우리는 이처럼 더 깊은 앎을 얻기 위해 기쁨과 평과, 사랑의 세계인 비물질 영역을 떠난다. 거기서는 자신의 반대항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빛만 있는 세계를 상상해 보라. 어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빛을 어떻게 이해하고 온전히 음미할 수 있겠는가? 빛이 무엇인지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것, 궁극적으로 기억해 내게 하는 것은 바로 빛과 어둠의 대조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혼란이 존재하기에 평화의 의미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으며, 때로 증오를 품기에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전생계획은 ‘진정한 내가 아닌 나’를 경험하는 방식으로 세워지는데, 이는 그 경험을 통해서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깊은 연민의 마음을 가진 어떤 영혼이 연민 자체인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알고자 소망할 때 그는 불화가 깊은 가족 사이에서 태어나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는 연민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며 연민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깊이 절감하게 된다. 무엇인가의 가치와 의미를 가장 잘 가르치는 것은 바로 그것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바깥 세계에서 연민을 찾을 수 없으므로 내면으로 눈을 돌려 자기 안에 있는 연민을 기억해 내게 된다. 영혼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배움의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은 일시적이고 짧지만, 그로 인해 얻는 지혜는 진실로 영원하다.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는 것은 삶의 시련을 넘어서는 한 방법이다. 예를 들어 자신을 몸으로 규정하는 사람은 몸을 심하게 다치면 극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몸을 다쳤을지라도 자신을 영혼으로 규정하는 사람은 그보다 고통을 덜 느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삶에 닥친 시련의 의미를 자각하거나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시련에 긍정적으로 반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시련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에너지의 길’을 낸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 모두가 에너지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세상에 그토록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기회인 동시에 우리 모두가 지고 있는 큰 책임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이 세계의 현재 진동수 안에 심어진 씨앗과 같다. 우리가 시련을 통해 성장하며 자신의 진동수를 끌어올릴 때 세상의 진동수 역시 안으로부터 상승한다. 물잔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우리 각자는 세상 전체의 색조를 바꿀 수 있다. 비록 산꼭대기에서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쁨의 느낌을 만들어냄으로써 다른 이들이 기쁨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되는 파동을 보낸다. 평화의 감정을 만들어낼 때는 전쟁을 끝내는 데 도움이 되는 에너지를 퍼드리는 것이며, 누군가와 사랑을 할 때는 그 만나는 사람뿐 아니라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더 잘 사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알려주듯 우리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시련을 계획한다. 공통된 목적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치유다. 특히 지난번의 생애에서 풀어버리지 못한 ‘부정적인’ 에너지의 치유다. 예를 들어 어떤 생에서 두려움에 잠식된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이 있다. 그 생애를 마감할 때 그에게는 두려움의 에너지가 흔적으로 따라 붙는다. 그가 깊은 두려움에 직면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특히 그렇다 두려움이라는 낮은 파동의 에너지는 영혼들이 사는 높은 파동의 비물질적인 영역으로 고스란히 옮겨지지는 않지만, 에너지의 잔여가 영혼의 세계로 전달된다. 그는 이 에너지의 잔여를 느끼고 앞으로의 삶에서 사랑의 표현으로 이를 치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카르마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시련을 계획하기도 한다. 카르마는 때로 우주적인 빚으로 개념화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와 균형이 맞지 않는 에너지로 설명되기도 한다. 우리는 각기 자기 영혼 그룹과 함께 카르마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이전 생애를 함께했으며 진화의 같은 단계에 있는 이들이다. 그 과거의 삶에서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영혼에게 배우자, 자녀, 형제자매, 부모, 가장 친한 친구, 숙명의 적 등 많은 역할을 맡겼다.

예를 들어 같은 그룹에 있는 어떤 영혼이 몸이 아픈 누군가를 돌보는 데 삶의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하자. 만일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맡은 그 영혼이 다음 생에서 병을 앓는 시련을 겪기로 계획했다면, 보살핌을 받았던 그 영혼이 그의 병수발을 들어줌으로써 에너지 교환의 균형을 맞추고자 할 것이다. 그렇지만 몸을 가지고 태어나면 두 영혼 모두 그런 계획을 세웠다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보살핌을 주는 자가 되기로 선택한 이는 누군가를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에 부담을 느낄 수 있고, 어쩌면 전생에 잘못을 해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처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카르마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단순한 소망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연기할 역할을 미리 대본으로 짜놓았기 때문에 희생양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 누구에게도 탓할 일이 아니다.

우주는 ‘나쁜’ 일들을 일으켜서 우리를 벌주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카르마는 마치 중력처럼 세계를 작동시키는, 중립적이고 공평한 법칙이다. 우리는 넘어지거나 고꾸라졌을 때 중력을 탓하거나 중력의 희생양이 되었다거나 중력이 우리를 벌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르마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시련에 대한 원망, 희생양이 되었다는 감정, 벌을 받고 있다는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 그 대신 우리가 배우기를 희망했던 것을 배우게 될 것이고, 영혼을 더욱 성숙시켜 준 시련에 깊은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영혼인 우리는 윤회를 거듭하며 그 사이에 많은 것을 배우지만, 배움은 물질계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때 더욱 깊이 각인된다. 영혼의 세계에서 배우는 것은 교실에서 배우는 것과 같지만, 이 지구의 삶에서 배우는 것은 배운 것을 적용하고 시험할 수 있는 실습과 같다. 그리하여 앎은 깊어지며, 이는 영혼에게 더없이 중요한 경험이 된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사랑 그 자체다. 삶의 시련은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그리하여 사랑인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하는 기회를 준다. 이와 같은 사랑은 공감, 용서, 인내, 판단치 않음, 용기, 균형, 받아들임, 신뢰 등 많은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사랑은 또한 이해, 평온, 신념, 선한 마음, 감사, 겸손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 병을 앓기로 계획하다




존의 이야기-에이즈와 자기 존중




존은 1956년, 앨라배마 주의 인구 2,500명 정도 되는 리빙스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미국 남부는 인종 차별이 심하고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존은 십대가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신문의 고민 상담란 기사를 보여주며 자신의 성적 지향을 털어놨다. “그러니까 아버지, 저는 …. 동성애자예요.” 아버지는 오열했다. “정신 차려. 넌 엘모어 집안의 독자야. 우리 집안의 대를 끊어놓을 작정이냐? “

학교에서는 그의 성적 지향을 눈치 챈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반 친구들은 그를 ‘호모’라고 부르며 따돌렸다. 존은 또 자기가 자란 지역의 종교적인 분위기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저희 집안은 감리교였어요. 감리교에서는 동성애를 하느님께 죄를 범하는 거라고 보죠.”

“리빙스턴에는 주로 어떤 교파의 신자들이 많았나요?”

“침례교요”

“존, 당신의 인생에서는 학교든 시구들 사이든, 심지어 종교적으로 까지도 늘 수치심이 붙어 다녔네요. 그런데 당신은 한 인종 전체가 공공연하게 수치를 당하는 곳에서 태어나기로 선택을 했어요. 제게는 그 점이 참 특이하게 생각되는군요.”

“맞아요. 수치심이 늘 붙어 다녔죠. 그렇지 않았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난 수치심을 주는 가정에서, 수치심을 주는 학교에서, 수치심을 주는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어요.”

에이즈는 수치심과 직결되는 것이었는데, 이런 일은 존이 미국 남부라는 곳에서 늘 보아온 것일 뿐 아니라 직접 경험한 바이기도 했다. 에이즈 진단을 받았을 당시의 심정을 말하는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말하자면, ‘드디어 벌을 받는구나’ 그런 기분이었죠.”

그 후 존은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는 임사 체험을 했다.

“존, 에이즈와 임사 체험이 수치심을 극복하는 데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었나요?” 내가 물었다.

“수치심을 극복하는 긴 여정에서 꼭 대면해야 하는 시련들이었지요. 두려움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거예요. 그렇게 다정하게 껴안으면 두려움은 사라지지요. 임사 체험을 하면서 ‘그들’이 나한테 더는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웃과 교사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 내게 손가락질하고 사라지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들은 이제 내게 존재하지 않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사는 거, 진실하게 사는 것뿐이에요.”

“수치심을 경험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요?”

“수치심을 주는 말들은 내 인생에서…. 옮길 수 없는 단단한 무엇이라고나 할까요? 단단하고 옮길 수 없는 것이 앞에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밟고 올라서 넘어가야지요.”



글레나 디트리히와 세션




채널러 글레나 디트리히가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면 다른 존재의 의식이 그녀를 통해 말했다.

“당신들이 셋이므로 우리도 셋이 왔습니다.” 접신된 존재가 입을 열었다. …

“존은 이번 생에서 에이즈 환자로 살겠다고 태어나기 전에 계획했나요? 그렇다면 까닭은 무엇이지요?”

“물론입니다.” 천사가 답했다. “성장을 방해하거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을 가로막는 무거운 에너지 같은 것은 이 세계(비물질적 세계)에 없습니다. 우리 영혼들은 사이 시간(죽은 뒤 몸을 얻어 다시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시간)에 다음 단계, 다음 상태로 올라가기 위해 영혼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의논하고 계획합니다. 당신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

서로 돕기 위해 한데 모인 영혼들은 각자의 성격, 각자가 존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모두 동원하여 그가 넘어야 할 장애물을 세웁니다. 그 장애물은 존으로 하여금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분명히 보게끔 해주지요. 이는 장애물 경기와 아주 흡사합니다. 같은 장애물을 많이 맞닥뜨리다 보면 여유가 생겨 나중에는 장애물 위로 몸을 날리기도 하고 아래로 기어가기도 하고 빙글빙글 돌아가기도 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그것이 더는 장애물이 아닌 것이 됩니다.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중요하지 않다거나, 사랑 받을 가치가 없다거나, 소중하지도 존엄하지도 않다거나 하는 생각을 존이 더 이상 하지 않을 때 그를 막고 있던 장애물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의 말을 듣고 시련의 근본적인 목적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어떻게 현실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시련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갖고 있던 감정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이런 점에서 시련은 선물이다. 지혜가 있다면 우리는 시련이 선물임을 알아볼 수 있다.



“존이 에이즈라는 병을 경험함으로써 어떻게 영혼의 성장에 도움을 받지요?”

“진정한 자기를 보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만이 가진 가치를,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믿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 끝없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라는 신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존의 전생 계획에 참여한 영혼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게 될 조건적인 사랑을 계획했어요. 기존의 가치 체계에 들어맞지 않는 존의 정체성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사랑해 주지 않았습니다. 존의 자아는 이런 식으로 형성되었지요. 즉 자기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고, 다른 이의 기대에 부응해 인정을 받을 때만 사랑 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말이에요. 여기서 혼란이 시작됩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믿어온 그 인격체는 쪼개지고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에이즈라는 병은 자신이 사랑 받을 만하지 않다는 믿음과, 조건 없는 사랑을 향한 갈망 사이의 분열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존의 영혼이 안에서부터 빛을 발하고 존의 인격체가 그 빛이 자신임을 믿을 때 치유가 일어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윤회는 더 낮은 어둠의 단계를 거치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증오의 진동이 있습니다.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분리의 진동이 있고, 받아들여지지 않음의 진동이 있으며, 두려움의 진동도 있습니다. …

그런 세계에 있는 여러분은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지요. 여러분은 자신이 두려움이고, 증오이고, 받아들여지지 않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죽이는 일도 일어납니다. 누군가를 해치고 착취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더 낮은 파동으로 행동합니다. 영혼이 몸으로 들어올 때 명철한 지혜가 대부분 사라지므로 인간인 당신은 당신이 곧 몸이라고 믿게 됩니다. 당신이 영혼이라는 기억이 멈추어버리는 겁니다. 이것 역시 계획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신성을 잊어버린 채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니까요. 그 진실은 엄청난 힘을 일으키고, 믿음을 굳게 하며, 파동을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것입니다.”



“존의 영혼 그룹에 있던 영혼들이 그에게 에이즈 환자로 살겠느냐고 물었고, 그가 동의했으며, 다른 이들은 그의 주변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를 판단하고, 거부하고, 그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 않는 역할을 맡기로 동의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제 말이 맞나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꽤 위험한 계획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존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강요한 믿음을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그래서 자신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결론지어 버렸을지도 모르잖아요.”

“맞습니다. 존은 그 이전 여러 번의 생에서 그랬습니다. 그것은 자기 영혼의 치유를 위한 과정의 일부입니다.”

“왜 그런 식이어야만 하나요? 조건 없는 사랑을 풍족하게 받으며 기쁘게 사는 삶은 왜 계획하지 않나요? 누구나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걸 배우게 하는 게 더 쉽지 않을까요?”

“균형은 빛과 어둠을 모두 경험할 때라야 얻어집니다. 여러분의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영혼은 여러 번 태어나기를 거듭하면서 빛과 어둠을 다 경험합니다. 인간 종 정체를 멸종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고, 아동을 학대하는 삶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삶은 배움과 앎의 단계를 만들어냅니다. 여러분이 사는 이곳은 선과 악의 양극이 존재하는 영역입니다. 빛과 어둠, 선과 악의 균형을 찾으면 비로소 그 영역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이원성이라는 개념을 버릴 수 있으며, 자기 내면에 만유의 주재에 대한 믿음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존의 영혼 그룹은 기쁨과 사랑의 삶뿐 아니라 에이즈와 같은 시련을 주는 삶도 동시에 거치도록 함으로써 수치심을 극복하게 하려 한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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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心相)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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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타행자의 편지 482개의 글목록열기

심상(心相)  4. 미타행자의 편지 

2019. 8. 8. 6:23

복사https://muju5.blog.me/221609361431

예전에 관상(觀相)책을 독파한 적이 있습니다.



지은이가 맨 마지막에 한 말이 관상(觀相)은 심상(心相)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하였고 운명이 박복한 사람을 어떻게 하여 복 있는 운명으로 바꾸어줄까 하는 것이 연구 과제라고 하였습니다.

 아무개 씨가 대통령이 되었을 적에 관상가가 코가 좋아서 대통령 당선이 되였다고 하였는데

하는 말이 관상에서 코가 1순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코가 잘나서 대통령은 했는데 심상이 옹졸하고 권력을 쥐고 재테크나 하는 천박함 때문에 말년에 교도소에서 지넬 형편이 되었습니다.

관상이 심상을 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이런 경우이고 심상(心相)이라는 것은 절집말로 용심(用心)입니다. 어른스님들께서도 늘 용심을 잘 내는 것이 도(道)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잘 쓰는(用心) 것이 관상을 뛰어넘어 운명을 바꾸는 길입니다. 마음을 잘 쓴다는 것이 결국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수행자가 지켜야할 6가지 덕목 즉 육바라밀 가운데 첫 단추가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바라밀을 법보시도 있고 재보시도 있고 무외시도 있지만, 친절!

모든 중생에 대한 친절이 가장 좋은 심상이자 용심이며 보시바라밀입니다

누구나 마음을 일으키면 할 수 있는 친절이 운명까지 바꿀 수 있는 참 보시바라밀입니다.



여담으로 가끔 무당과에 계신 분들도 운이 막힌 분들에게 보시를 처방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느 말사에 인연 있는 분이 계시여서 방문을 했더니 전통사찰은 아니고 개인이 창건하여 본사에 등록한 사찰인데 절을 창건하신 분이 절을 지어 보시하면 집안이 잘된다는 용한? 분의 말을 듣고 절을 지어 본사에 기증하고 나타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사에서는 적당한 분을 주지로 발령 내어 보냈다고 하는 대, 어느 분인지 시주한 것으로만 깔끔하게 마무리 지은 무주상보시를 실천하신 참 대단하신 분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출처] 심상(心相)|작성자 미타행자


2020/10/07

불교에 명상기법들 , '현대인의 심신 이완'을 목적으로

 

希修

  commented on her own post:"'


상식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오히려 퍽 건전하고 꽤 모범적인 인간인데, 불교 공부를 하다 보니 나에게 탐진치가 있다는 둥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자꾸 이래서 기분 안 좋다' 이렇게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아 몇 자 적습니다. ^^ . 

불교에 명상기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고, '현대인의 심신 이완'을 목적으로 그 정통적인 명상기법들을 변형하여 온갖 프로그램들이 쏟아져나와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발견한 한 가지가 있는데 혹시 맘에 드시면 트라이 해 보셔요. . 

1. 허리를 펴고 앉습니다. (두꺼운 책을 놓고 그 위에 방석을 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엉덩이가 무릎보다 약간 높은 위치에 유지되도록 하시면 좋습니다. 두 무릎이 방바닥에 닿게 앉는 양반다리 자세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필수는 아닙니다.) 

2.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힌 후 일생동안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아마도 할머니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기억이나 아이/반려동물과 교감하던 기억 등이 떠오르실 거예요. 그 중 하나에 집중하면서 행복하고 감사한 '느낌'을 마음 속에서 충분히 느껴 보셔요. 

3. 그러다 보면 '아, 내가 살면서 많은 다른 존재들에게 마음의 빚을 졌구나. 나도 남들에게 그런 사랑이나 이해를 베풀며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4. 누구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한 명 마음에 떠올립니다. (가족이나 애인은 집착이나 소소한 불만 등이 모두 얽혀 있을 가능성이 많아서, 그렇게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보다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친구가 더 바람직합니다.) 

5. 2번의 감정을 유지하면서 마음 속에서 4번의 친구 얼굴도 동시에 유지하세요. 내가 느끼는 그 따뜻하고 행복한 마음을 4번의 친구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길동이가 행복하기를' 이렇게 마음 속에서 되뇌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매 10초마다 마음이 distract될 텐데, 그 마음을 그냥 명상 주제로 다시 갖고 오시면 됩니다. 마음이 잡념에 의해 distract되는 시점과 그걸 알아차리는 시점 사이의 시차가 작을수록 좋으며, 시차가 제로가 되는 것이, 그 미세한 움직임도 알아차리는 수준의 각성이 목표.) 

6. 여기에 익숙해지면 나중엔 4번에서 가족, 애인, 나랑 데면데면한 사람,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 등 그 누구를 떠올려도 됩니다. 그 사람을 대상으로 이 명상을 하고 나면 그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이 아마도 조금은 부드러워질 거예요. (그 사람을 억지로 좋아하라거나 세상 모든 사람들과 무조건 즐겁게/편하게 지내라거나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 

불교의 Mettā는 personal한 것도 아니고 '느낌'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명상법은 '일단 술을 끊기 위해 술 대신 아이스크림을 이용하기' 정도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의식하든 못 하든 인간은 끊임 없이 감각 (5감+정신)적 자극과 쾌락을 추구하는데, 그 자극/쾌락을 외부에서 찾기 보다 내부에서 자가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불교는 말합니다.

제가 위에서 언급한 명상법은 'personal한 느낌'이긴 하지만, 부분적으로나마 내 스스로 일으키는 행복이죠. 과거의 기억과 좋은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여전히 그에 의지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지금 당장 그 친구에게 전화해서 내 하소연 들어 달라고 하거나 우울한 느낌을 없애기 위해 TV를 보며 내 자신으로부터 내 자신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distract 시키거나 이런 일들보다는 조금은 더 건강하고 독립적인 방법이라는 것이죠. 

내 행복을 타인 포함 외부에 덜 의존할수록, 내가 타인과 맺는 관계들도 실은 오히려 점점 더 건강해질 거라고 불교는 말합니다. 타인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좋은 마음을 보내는 것이 이 명상의 의의입니다. :)"

원효대사와 이광수 - K스피릿

원효대사와 이광수 - K스피릿




원효대사와 이광수

박성수 명예교수
pr@ikoreanspirit.com
승인 2015.09.23

박성수 명예교수의 역사에세이 34편

속아서 한평생이란 말이 있다. 누구나 속고도 속은 줄 모르고 한세상을 보낸다. 우리가 속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2000년 고조선의 역사를 잃고도 잃은 줄 모르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이병도에게 배운 강단사학자들에게 물어보아야 그들은 모른다. 차라리 소설가 이광수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다. 이광수는 일제 말기인 1942년에 소설『원효대사』를 썼다. 거기에서 우리나라 역사는 고조선에서 시작되었는데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 고유의 신교가 있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친일파로 낙인찍혔던 춘원에게 뜻밖의 발언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가 광복 후 북의 6.25남침으로 납북되어 영원히 소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최근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를 다시 읽다가 저자가 원효대사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광수는 원효대사를 보다 넓은 세상으로 끌어내어 그의 사상을 보다 깊게 보려고 한 사실을 역력히 보여 주었다. 불교는 머나먼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래 종교였다. 이차돈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가 목숨을 버리고 받들어 모신 부처님이 원효대사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 한국종교가 되었다. 아직도 한국불교가 외래종교로 보는 조계사 종무원장이 있어 한국불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형편에 있다.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다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를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한국에는 큰 가르침인 선도仙道라는 이름의 신교神敎가 불교를 가로막고 있었다. 지금은 불교가 세계종교의 하나라고 큰소리를 치고 있으나 그때는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宣敎에 실패하였고 한국에 들어와 겨우 자리를 잡은 인도의 외방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노교 즉 도교가 중국인의 마음을 꼭 잡고 있고 일본에서는 신도가 불교를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만은 불교가 한국의 선도와 손잡아 한국종교로 동화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원효대사야말로 그 일등공신이었다. 이광수는 불교신자인 원효대사의 눈을 통해서 고조선의 고신도(古神道)를 알았다. 다시 말해서 춘원은 불교를 통해서 죽은 선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역사학자들은 모르는 것을 문학을 하던 이광수가 선도를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우리에게 지금 공동묘지에서 다시 살아난 단군이 있다. 그러나 춘원의 소설이 없었으면 단군을 영영 살아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이광수가 불교와 원효대사를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고 있을 때 한 일본인 학생이 다가오더니 “너 조선인이잖아? 금강산에도 못 가 보고 어떻게 조선인이라 할 수 있나. 나는 금강산에 가보고 놀랐다. 너도 가보고 조선인다운 조선인이 되라!” 일본인의 굴욕적인 한마디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귀국 후 이광수는 벼르고 벼르던 금강산에 유람을 갔다. 금강산이 무어 길래 일본 놈까지 홀리는가. 그러나 그의 소설 『마의태자』를 읽어 보면 내금강산 어구에서 본 장관은 엄청난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외금강산으로 들어가 금강산을 보지만 금강산으로 들어가야 금강산의 진면모를 보는 것이다. 마의태자뿐만 아니라 숙적 왕건까지도 내금강산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광수는 실제로 그런 내금강산을 보고 장안사에 들어갔는데 어떤 젊은이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다가가서 말을 건네 보니 자기 형님이 아닌가. “형님이 여기 웬 일이십니까? 하고 물으니 만주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쫓겨서 여기 와서 숨어 있는 거야” 라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그때 불교에 관심이 있어 형님을 따라 장안사에 묵으면서 불교 공부를 시작하고 원효대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불교를 알고 보니 불교보다 더 큰 우리 종교 선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마치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과 같은 사건이었다. 이광수는 타고난 글재주로 28독립선언서를 썼다. 그리고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독립만세 소식을 알리고 『독립신문』에 애국적인 글을 썼다, 그러나 조국에서는 일제의 방해로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신문에 글을 써서 일생을 망치느니 고국에 돌아가서 『동아일보』에나 글을 쓰자 하고 「민족개조론」을 썼다. 그러나 그 글은 친일언론이었다. 그러나 춘원은『마의태자』(1925)『단종애사』(1928, 동아일보)『원효대사』(1942 매일신보) 등 역사소설을 써서 타다 남은 겨레의 애국정신의 지푸라기에 불을 지펴 주었다.

신문기자가 된 이광수는 사학이 문학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학과 철학이 하나란 사실도 알았다. 이것을 모르는 오늘의 신문기자들은 지금 역사가들과 같이 일생을 망치고 있는 것이다. 문사철文史哲을 따로따로 공부하면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진리와 멀어지는 것이다. 이병도에게 배운 제자들은 사학이란 좁은 골방에 갇혀 역사를 쥐구멍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단순한 소설로 알고 그 속에 귀중한 역사세계가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역사는 그림이다. 그림은 화가가 그리는 데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논문이라는 작은 밑그림을 아무리 많이 그려서 찍어 붙여도 그것이 큰 그림이 되지 않는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이라 하였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에 소각小覺과 대각大覺이 있는데 대각은 부처님만이 가능한 일이고 보통 사람은 기껏해야 소각으로 끝난다.

역사는 주제가 중요하고 이야기 줄거리 또한 중요하다. 그리고 현장을 답사해야 한다. 그리고 또 그 글이 무엇에 쓰이는가도 중요하다. 이광수의 원효대사는 좋은 주제와 이야깃거리 그리고 현장성까지 갖추었는데 그 쓰임새가 좋지 않았다. 이광수가 일제식민사학에 이용당한 것이다. 원효대사가 남긴 책은 세 권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어렵기 짝이 없다. 이광수는 그런 어려운 원효의 불교학을 아주 쉽게 해설해 주었다. 불교와 선도가 만나는 장면을 마치 목격자인 것처럼 설명해 준 것이다. 필자에게 지금 『원효』라는 철학자의 논문집 한 권이 있는데 그 속에 열다섯 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광수의 소설『원효대사』 한 권만 못하다. 한국불교를 알려면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읽어야 한다. 이광수는 원효대사의 사상을 한 마디로 설명하라고 하면 무애행無碍行과 비아非我라 대답해 주고 있다. <무애행>이란 “거침없이 행동하고 살아라.” 는 뜻이고 <비아>란 “매사에 자기를 버리라”는 것이다. 이광수는 또 원효대사에서 신라의 통일을 배웠다.

원효는 삼국통일기의 신라에 태어났다. 때문에 통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방략을 고민하고 알아냈다. 무산 전투는 신라의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라군과 백제군이 싸워서 피아에 3,000명의 전사자를 낸 대전투였다. 그 무산이 바로 필자의 고향인 전북 무주 설천이었다. 설천은 핏빛으로 변한 강 이름을 흰 눈의 강 즉 설천으로 고쳤다. 무산전투는 신라와 백제의 생사를 건 통일 전쟁이었다. 백제로서는 나폴레옹이 패전한 워털루 전투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말로만 통일을 부르짖지 말고 무산 전투의 현장에 가서 무덤 앞에서 추모제라도 한 번 지내야 하지 않겠나.(계속)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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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허스님과 춘원 이광수 8촌지간 어릴 때부터 스님은 춘원의 ‘멘토’ - 불교신문

운허스님과 춘원 이광수 8촌지간 어릴 때부터 스님은 춘원의 ‘멘토’ - 불교신문




운허스님과 춘원 이광수 8촌지간 어릴 때부터 스님은 춘원의 ‘멘토’

하정은 기자
승인 2014.09.01

문학 속 불교이야기 (16) 이광수와 봉선사

남양주 봉선사에 가면 역대 고승들의 부도탑 사이에 춘원 이광수(1892~?)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동갑내기 8촌동생 운허스님(1892~1980)과의 인연 때문이다. 운허스님의 속가이름은 이학수.

독립운동과 역경사업 등을 통해 근현대 한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운허스님은 해방이 되자마자 1946년 광동중학교를 설립한다. 이 때 친일변절자, 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혀 갈곳없이 헤매던 8촌형님 이광수를 운허스님은 봉선사 다경향실이라는 방에 들여 집필활동을 이어가도록 도왔다.

당시 춘원은 봉선사에 머물면서 광동중학교에 잠시 교편을 잡고 영어와 작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운악산 구름속이 우리들 배우는 집’으로 시작되는 광동중학교 교가 역시 춘원이 작사했다. 현제명이 작곡한 이 교가는 지금도 광동중 교가다.
남양주 봉선사 입구에 세워진 춘원 이광수 기념비. 불교신문자료사진

운허스님은 정신적인 혼란에 휩싸였을 춘원에게 마음을 쉴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한 셈이다. 집안이 가난했던 춘원은 어릴 때도 운허스님 집에 얹혀 산적이 있어 두 사람의 관계는 친형제처럼 각별하다.

춘원이 지은 기행수필 <금강산유기>에는 1922년 봄과 여름에 걸쳐 춘원이 서울 청량리에서 출발하여 금강산 곳곳을 두루 다녀오기까지 여정과 수려한 풍경, 감회 등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금강산 답사길에 만난 한 노스님의 소개로 <법화경>에 심취했다는 내용도 있다.

춘원은 <법화경>을 공부하고 운허스님과 맺은 불연으로 <원효대사> <꿈>과 같은 소설을 집필했고 불교문학사에 큰 획을 그었다. 고려대장경 역경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일 정도로 춘원의 말년은 불교와 벗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원 이광수와 운허스님을 주제로 논문을 쓴 신용철 경희대 교수에 따르면 춘원의 생애에서 가족을 제외하면 어릴 때부터 1950년 납북될 때까지 서로 가장 많이 접촉한 사람 역시 운허스님이다.

신 교수는 “춘원과 운허스님, 두 인물이 가는 길은 달랐어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존경했으며 일생동안 돕고 의지하는 친척이자 친구였다”며 “이들의 발자취에서 일제 식민시대를 살았던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와 갈등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였고, 문학계에선 ‘천재’로 불리는 춘원이 자신의 친일행적을 후회하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불심에 더욱 귀의했으리라 보인다.

[불교신문3037호/2014년8월30일자]

불교평론



불교평론



불교적 상상, 한국소설의 여명을 밝히다 / 유한근
특별기획 - 현대소설에 나타난 불교적 세계 ①


[77호] 2019년 03월 01일 (금) 유한근 yhkpoet@hanmail.net




- 이광수 〈꿈〉 김동인 〈조신의 꿈〉과 한용운 〈박명〉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다. 불교는 비언어적 마음을 바탕으로 성취된다. 본체는 언어 이전의 것이며 비언어적인 것은 침묵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선(禪)은 비언어화의 시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한 선어적 인식으로 소설이 써졌을 때, 그 소설은 불교소설의 원형이 된다. 그러나 타락한 세계가 타락한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리얼리즘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국면이다. 언어화를 통한 침묵의 깨우침, 언어화 과정을 통한 비언어화 상태의 심적인 깨달음에 이르려 하는 선적 마음을 타락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양식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는 불교 혹은 불교적인 모티프로 쓰는 소설은 선방에서 지향하는 언어도단과 불립문자의 경지를 담보할 수 없다.

더욱이 불교소설에 관심이 있는 작가들은 불교의 본체는 이해하지만, 그것이 어떤 인식논리에 의해서 현현(顯現)되고 있는가는 놓치게 되어 체(體)와 용(用)이 엇나가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불교 용어의 이해하기’에 다급한 나머지 교리의 본질을 놓치고 불전 속의 창작적 모티프 탐색에만 그치기 쉽다. 그래서 불교를 소재로 한 소설이 많이 있을 수 있지만, 진정한 불교소설을 접하기는 어렵다.

불교소설은 ‘불교’와 ‘소설’이 결합된 말이다. 그런 만큼 여러 성격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 소설, 불교 교리를 수용한 소설, 불교 포교를 위한 소설 등 그 개념들이 여러 의미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합하는 개념으로 ‘불전(佛典) 속에 나타난 허구성’과 ‘소설작품 속에 나타나고 있는 불교사상’을 불교소설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에세이의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는 없다. 이 점을 전제로 하고 한국 근대 불교소설을 일별한다.

소설 속에 나타나는 불교사상을 찾는 일이 불교소설의 몫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해내야 할 몫이다. 물론 경전 속에 나타나는 허구성을 찾아내는 일도 불교문학의 몫이긴 하지만, 문학 연구가의 불교 이해 능력의 한계가 자명하기 때문에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런 점에서 김운학(金雲學)의 ‘불교문학의 이론’ 연구는 문학 쪽에서 불교문학을 연구하는 데에는 소중하다. 특히 불교적 비평논리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값지다고 할 수 있다. 직관과 자오(自悟)에 의해서 창작하는 우리 문인들의 정신구조를 서구 논리로는 분석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우리 문학비평 논리를 불교의 인명논리(因明論理)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은 값지다는 의미다.

이를 또 다른 전제로 해서 신소설 이후 해방공간 이전(1906~ 1950)까지의 불교소설을 탐색해보려 한다. 이 시기의 불교소설은 양건식의 〈석사자상〉을 비롯한 〈한일월〉 〈아의 종교〉 〈오!〉 등, 이광수의 〈이차돈의 사〉 〈원효대사〉 〈꿈〉과 한용운 〈박명〉 김동인의 〈조신의 꿈〉 현진건의 〈무영탑〉 등이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불교소설 작가는 친일행적 문제와는 관계없이 이광수이다. 근대문학으로서 최초의 불교소설이 양건식의 〈석사자상〉이고, 한용운 선사의 〈박명〉이 있지만,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는 이광수이다. 3편의 불교소설 중 〈이차돈의 사〉와 〈원효대사〉는 신문에 연재된 장편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 집중탐색에 적합하지 않아 이광수의 〈꿈〉을 중심으로 하여 이 시기의 불교소설 판도를 일별하려 한다. 또한 같은 모티프의 소설인 김동인의 〈조신의 꿈〉과 대비 고찰하려고 한다. 그리고 한용운의 〈박명〉을 일별하면서 이들 불교소설이 열어놓은 전망을 가늠하고자 한다.


1. 〈꿈〉의 신화 원형구조와 《삼국유사》



이광수(1892~1950)


김동인의 〈조신의 꿈〉(1935)과 이광수의 〈꿈〉(1947)은 꿈을 모티프로 한 소설이다. 그리고 모티프와 구조원형을 《삼국유사》의 ‘탑상(塔像) 제4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에 나오는 조신설화를 차용하고 있어 이 두 작품을 대비해서 탐색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경계를 갖지 말라고 한다. 《장자》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장자는 심지어 현실과 꿈의 경계조차 가지지 말라고 한다. 《장자》 〈제물론〉의 “방기몽야 부지기몽야(方其夢也 不知其夢也). 몽지중우점기몽언 각이후지기몽야(夢知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차유대각이후지차기대몽야(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가 그것이다. “꿈꾸고 있는 때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점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꿈에서 깬 후에야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문장은 장자의 유명한 ‘호접몽’의 앞 문장이다. 이 말이 지니는 의미는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는 없다는 말이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척도를 잴 수 있는 잣대는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또 한편으로 불경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반야심경》의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 그것이다. “공(空) 중에는 색(色)이 없고, ‘수상행식’이 없다. 감각과 이미지와 행위와 분별이 없다”는 의미이다. 공(空)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 무의식, 모든 인식도 없기 때문에 분별력이라거나 경계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무(無)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도 그러하고 불경도 그러하기 때문에, 이 소설의 경우는 결국 ‘무(無)’를 말하려는 화두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고 말한다. “일체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잠깐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 이와 같이 여길지니라”에서 ‘이와 같다’ 혹은 ‘이와 같이 여기다’는 말이 ‘여시관(如是觀)’이다. 하나의 단순한 긍정적인 언어가 아니라, 불법이 함축된 언어이다. 《금강경》의 핵심사상인 공사상(空思想)과 반야사상(般若思想)을 함축한 언어이다. 함축된 언어는 우리 삶의 표상적인 의미인 ‘꿈’이다.

김동인의 〈조신의 꿈〉과 이광수의 〈꿈〉의 원형은 《삼국유사》의 ‘탑상(塔像) 제4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의 설화이다. 이 설화는 조선조의 몽자소설(夢字小說)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입몽(入夢)→몽중(夢中)→각몽(覺夢)이라는 이야기 구조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원형비평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모든 문학작품을 원형이나 신화의 전형적인 형태의 재현으로 해석하고 그런 작품을 바람직한 작품으로 인정한다. 그들은 문학작품에는 어느 시대이든 어떤 공간에서든 역사적 흐름이나 변화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신화적 패턴 또는 원형(archetype)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은 그 원형을 신화에서 찾으려고 하고, 문학작품 분석의 중요한 척도로 삼는다. 그래서 원형비평과 신화비평을 혼용해서 사용한다. 이렇듯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데 신화(myth)를 원형으로 삼을 수 있는 자료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저서 《야생의 사고(The Savage Mind)》(1966), 제임스 G. 프레이저(James G. Frazer)의 《황금가지(The Gol-den Bough)》(1890∼1915), 그리고 카를 융(Carl Jung)의 집단무의식 이론 등이 척도가 된다. 그리고 신화 · 원형비평의 구체적 실천학자는 노드롭 프라이, 로버트 그레이브, 조셉 캠벨, 레슬리 피들러 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편적 원형을 통한 문학작품의 조망 의도는 보편성의 척도 판단이라는 국면에서 환원주의(reductionism)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동인의 〈조신의 꿈〉과 이광수의 〈꿈〉은 그 오류를 전복시킨다.



(……) 조신은 장원에 이르러, 태수 김흔(金昕) 공(公)의 딸을 깊이 연모한다. 여러 번 낙산 되었다.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남몰래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몇 년 뒤 그 여자에게 배필이 생겼다. 조신은 다시 관음 앞에 나아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리워하다 지쳐 얼마 뒤 선잠이 들었다. 꿈에 갑자기 김 씨의 딸이 기쁜 모습으로 문으로 들어오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하였다.

(本寺遺僧調信爲知莊. 信到莊上, 悅「太」守金昕公之女, 惑之深, 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又往堂前怨大悲之不遂己,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忽夢金氏娘, 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위의 인용문은 김동인의 〈조신의 꿈〉과 이광수의 〈꿈〉의 서사 원형구조인 《삼국유사》의 조신설화의 서두 부분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그리고 그리워하다 지쳐 얼마 뒤 선잠이 들었다”는 이 설화의 입몽(入夢) 부분이다. 꿈속으로 들어가는 이 부분을 이광수 〈꿈〉에서는 이렇게 표현된다,



등잔불 하나에 비추어진 관음전은 어둠침침하였다. 그러한 속에 조신은 가부좌를 걷고 앉아서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신의 눈은 언제나 관세음보살님의 얼굴에 있었다. 반년나마 밤이면 자라는 쇠가 울기까지 이 법당에서 이 모양으로 앉아서 이 모양으로 관세음보살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칭호를 하였건마는, 오늘 밤에는 특별히 관세음보살님의 상이 살아 계신 듯하였다. (……)

절에서는 대중이 모두 잠이 들었다. 오직 석벽을 치는 물결 소리가 높았다 낮았다 하게 조신의 귀에 울려올 뿐이었다. 그리고는 조신이 제가 치는 목탁 소리와 제가 부르는 염불 소리가 어디 멀리서 울려오는 남의 소리 모양으로 들릴 뿐이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조신이 몸이 피곤함을 느낄수록 잡념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 “이거 안 되겠다.” 하고 조신은 자주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사흘 동안이야 설마 어떠랴 하던 것은 어림없는 생각이었다. 조신의 정신은 차차 흐리기를 시작하였다. 조신은 무거워 오는 눈시울을 힘써 끌어올려서 관세음보살을 아니 놓치려고 힘을 썼다. 그러나 어느 틈엔지 모르게 조신은 퇴 밑에 벗어놓은 김랑의 분홍신을 보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

조신은 목탁이 부서져라 하고 서너 번 크게 치고, “나무 대자대비 서방 정토 극락세계 관세음보살 마하살.” 하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요, 또 수마(睡魔)는 조신을 덮어 누르는 듯하였다. 이번에는 앞에 계신 관세음보살상이 변하여서 김랑이 되었다. 분홍 긴 옷을 입고 흰 버선을 신고 옥으로 깎은 듯한 두 손을 내어밀어 지난봄 조신의 손에서 철쭉을 받으려던 자세를 보이는 듯하였다. 조신은 벌떡 일어나서 김랑을 냅다 안으려 하였으나, 그것은 허공이었고 불탑 위에는 여전히 관세음보살님이 빙그레 웃고 계시었다.

조신은 다시 목탁을 두들기고, “나무 관세음보살 마하살.”하고 소리높이 불렀다. 얼마나 오래 불렀는지 모른다. 조신은 이 천지간에 제가 부르는 ‘관세음보살’ 소리가 꽉 찬 듯함을 느꼈다. 김랑도 다 잊어버리고 제가 지금 어디 있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저라 하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오직, “나무 관세음보살” 하는 소리만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때였다.

“똑, 똑, 똑, 똑.”

“달그닥 달그닥.” 하는 소리가 조신의 귓결에 들려왔다. 또 한 번, “달그닥 달그닥.” 하는 소리가 났다. 조신은 소스라쳐 놀라는 듯이 염불을 끊고 귀를 기울였다. 이때 용선 스님이 잠근 문이 삐걱 열리며 들어서는 것은 그 누군고? 김랑이었다. 김랑은 어제 볼 때와 같이 분홍 긴옷을 입고 흰 버선을 신고 방그레 웃으며 들어왔다.

“아가씨!”

조신은 허겁지겁으로 불렀으나, 감히 손을 내어밀지는 못하고 합장만 하였다. 조신은 거무스름한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고 있었다. (……) 조신은 가사를 벗으려 하다가 잠깐 주저하고는 관세음보살상을 향하여 합장 재배하고,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님 고맙습니다. 제자의 소원을 일러 주시오니 고맙습니다.”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홰홰 벗어서 마룻바닥에 내어던지고 앞서서 나온다.



이광수의 〈꿈〉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삼국유사》의 조신설화를 모티프로 해서 창작된 소설이다. 이와 유사한 모티프의 동명 단편소설이 《문장》(1939.8)에 게재된 것으로 연구되어 있지만, 이 소설은 광복 후인 1947년 면학서관에서 발행되면서 발표된 중편 분량의 소설이다.

이 소설의 서사는 ‘첫째 권’ ‘둘째 권’ ‘셋째 권’으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은 ‘첫째 권’의 일부이다. 승려 조신은 세달사 농장일을 하다가 꽃놀이를 나온 진골 김 태수의 딸 달례(月禮, 15, 6세)를 보게 된다. 그녀에게 반해 조신은 석벽에 핀 철쭉 한 포기를 꺾어 그녀에게 준다(이 부분의 경우도 신라가요 수로부인 관련 설화 〈헌화가〉의 원형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일이 있고부터 조신은 달례를 잊지 못해 고민 끝에 낙산사 용선대사를 찾아가 참회한다. 용선대사는 그에게 그저 관세음보살을 암송하라고 할 뿐이다. 그 후 김 태수 일가가 불공을 드리러 낙산사에 오게 되어, 달례와 재회한 조신은 그녀가 곧 모례라는 남자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조신은 마음이 급해 용선대사에게 달려가 달례와 연을 맺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만, 용선대사는 그에게 사흘 동안 법당에 들어가 참선하라고 명한다. 참선을 하다가 지쳐 잠깐 잠이 든 조신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난다. 놀랍게도 달례가 그를 찾아와 자신과 함께 달아나 주기를 청한다. 그로 인해 조신은 달례와 집을 나온다. 이 서사가 입몽 구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여기까지의 스토리는 김동인의 〈조신의 꿈〉도 유사한 구조를 이룬다, 이광수의 〈꿈〉이 중편 분량이기 때문에 부정적 인물인 평목 스님의 이야기가 추가로 전개된다거나 〈꿈〉에서는 조신이 세달사 승려인 데 반해, 김동인의 〈조신의 꿈〉에서 단편 분량으로, 조신을 낙산사 승려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뒤의 공간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가 다소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조신설화의 원형구조를 일탈하지는 않는다. 조선조 소설에서 몽자소설의 몽중 구조는 신선놀음과 같은 판타지 세계와 꿈이라는 것은 일장춘몽과 같은 것임을 교시하기 위해 시련과 갈등구조를 이중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광수의 〈꿈〉의 몽중 이야기는 조신과 달례가 태백산 깊숙한 곳에 터를 잡고 2남 2녀를 낳고 단란하게 사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낙산사 승려인 평목이 나타나면서부터 그들의 삶을 어려워진다. 평목이 가능하지 않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협박하자 조신은 그를 목 졸라 죽이고 시체를 동굴에 유기한다. 그러나 죄악은 드러나기 마련, 후일 모례가 태수의 안내로 사냥을 오게 되어 조신이 안내를 맡게 된다. 모례가 쏜 화살에 맞은 사슴이 동굴로 들어가는 바람에 평목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로 인해 조신은 교수형을 당한다. 조신이 살려 달라고 고함을 치는데, 누군가가 엉덩이를 차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용선대사가 웃으며 서 있고, 관음보살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부분이 각몽(覺夢)하는 부분이다. 잠에서 깬 조신은 달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덧없음을 깨닫고 다시 불도에 정진하여 대사가 된다는 이야기로 소설은 끝난다.



김동인(1900~1951)


김동인의 소설 〈조신의 꿈〉에서 조신은 김랑과 살림을 차리고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사십여 년 동안 살게 된다. 견디기 힘든 가난이 그들을 괴롭힌다. 사랑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궁핍한 생활 때문에 고향을 떠난다. 가던 길에 그들은 기아로 큰아들을 잃고, 내외가 모두 몸져눕게 된다. 조신은 어쩔 수 없이 큰딸에게 구걸을 해오게 하는데, 구걸 나간 큰딸은 개에게 물려 죽고 만다. 결국 조신은 오십 년간의 부부 생활을 접고 김랑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아내를 북으로 떠나보낸다. 그리고 문득 잠에서 깬다. 이것이 각몽 부분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결말 부분은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깨닫고 안도하며 조신이 부처의 큰 뜻에 감복하며 삼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 소설도 《삼국유사》의 조신설화도 같은 스토리로 전개한다. 가난으로 인해 자식을 잃고 구걸하다 개에게 물린 여아의 이야기, 그 비참한 조신의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조신의 꿈〉이 그의 다른 소설처럼 문학사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서사의 중심구조를 《삼국유사》의 조신설화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점이다. 모티프의 원형을 살렸다는 점에서는 주목될 수 있지만, 신화원형에 창의적인 스토리를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수의 〈꿈〉은 조신이 욕망으로 파계한 후, 본래 지니고 있었던 자기 정체성이 파편화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 특히 삶에 대한 허무의식을 섬세하게 그리고, 그것의 결과물로 조신의 살인이라는 스토리로 구성하고 있는 점은 소설의 허구화 미학을 주목하게 한다. 〈꿈〉의 스토리 라인은 애욕→욕망의 성취→갈등과 파탄→자아정체성 회복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구성미학으로는 입몽→몽중→각몽으로는 몽자소설의 원형을 지키면서 허망하고 덧없는 사바세계(娑婆世界)를 환기해준다.

현실과 꿈의 세계를 교차시켜 《금강경》의 진공묘유(眞空妙有) 사상을 환기해주기도 한다. 인간 삶의 본체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가운데 묘한 것, 그것이 진공묘유이다. 조신의 몽중 이야기가 꿈속의 이야기만도 아닌 것처럼, 조신의 입몽 전과 각몽 후의 현실적인 삶이 꽉 찬 공간이 아닌 비어 있는 세계일 수 있다는 진공묘유 사상을 이 소설을 보여준다. 공(空)을 근원으로 하여 존재하는 현상인 진공묘유. 그 마음은 모든 분별이 끊어진 부처의 마음일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최상의 마음이고 지혜의 언어다.

《삼국유사》의 조신 이야기는 김동인과 이광수의 소설 결말 부분과는 달리 각몽으로 끝나지 않고 후일담처럼 그 뒤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형개(形開)하니 잔등(殘燈)이 흐리게 토했다. 야색(夜色)이 점차 흐려졌는데, 또 새벽엔 수발(鬚髮,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니 망망연(惘惘然) 달리 인간세의 뜻이 없었다. 노생(勞生)을 이미 싫어하기가 백년신고(百年辛苦)에 배부름과 같고, 탐염지심(貪染之心)이 씻은 듯 얼음 풀리듯 했다. 이에 참회하여 성용(聖容)을 대하니, 이미 참회하고 씻을 것이 없었다. 해현(蟹峴) 아이 묻은 무덤으로 가서 파니, 석미륵(石彌勒)이었다. 물로 씻어 이웃 절에 봉안(奉安)하고는 경사(京師)로 돌아와 장임(莊任)을 면하였다. 사재(私財)를 기울여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고 백업(白業)을 근수(懃修)했다. 후에 마친 바는 알 수 없다. 의(議)하여 말하되, 이 전(傳)을 읽고 책을 덮고 이를 거슬러 풀이해 보면, 하필 신사(信師)의 꿈에만 그러하겠는가? 지금 인간세(人間世)의 즐기는 바가 흔흔연(欣欣然) 역역연(役役然), 특히 이를 깨닫지 못한다. 이내 사(詞)를 지어 이를 경계해 말한다.



조신은 꿈에서 깨어나 참회하고 꿈속에서 잃었던 아이의 무덤을 찾아가 파 보니, 석미륵(石彌勒)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미륵상을 잠깐 이웃 절에 맡겨 봉안했다가 사재(私財)를 털어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한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조신설화를 마친 뒤 설화의 의미를 되새긴다. “하필 신사(信師)의 꿈에만 그러하겠는가? 지금 인간세(人間世)의 즐기는 바가 흔흔연(欣欣然) 역역연(役役然), 특히 이를 깨닫지 못한다. 이내 사(詞)를 지어 이를 경계해 말한다.”라고 덧붙인다. 이 부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조신의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일 것이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매우 기쁜 것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일연은 사(7언 배율)를 지어 제시한다.



快滴須臾意已閑 즐거운 시간은 잠시뿐 마음은 어느새 시들어

暗從愁裏老蒼顔 남모르는 근심 속에 젊던 얼굴 늙었네
不須更待黃粱熟 다시는 좁쌀밥 익기를 기다리지 말지니
方悟勞生一夢間 바야흐로 힘든 삶 한순간의 꿈인 걸 깨달았네
治身臧否先誠意 몸을 닦을지 말지는 먼저 뜻을 성실하게 해야 하거늘
鰥夢蛾眉賊夢藏 홀아비는 미인을 꿈꾸고 도적은 장물을 꿈꾸네
何以秋來淸夜夢 어찌 가을날 맑은 밤의 꿈으로
時時合眼到淸凉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의 세계에 이르는가



이 시는 조신설화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강조하는 운문으로 “바야흐로 힘든 삶 한순간의 꿈인 걸 깨달았네” 그리고 끝 구절의 “어찌 가을날 맑은 밤의 꿈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의 세계에 이르는가”에서 진공묘유 사상을 통해 청정한 마음을 가져야 함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두 편의 소설에서는 교시적인 기능을 유보한다.

그럼에도 이광수의 〈꿈〉은 곳곳에서 불교적 진리를 접할 수 있다.



달례도 법사의 소리를 맞추어 옥같이 흰 두 손을 머리 위에 높이 들어 관음상에 주목하면서 나부시 절을 하였다. 그러고는 관음참회례문이 시작되었다.

“옴 아로륵계 사비하.” 하는 멸업장진언(滅業障眞言)은 법사의 소리를 따라서 일동도 화하였다. 달례의 맑고 고운 음성이 중들의 굵고 낮은 음성 사이에 울렸다. 조신도 전생 금생의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줍소서 하는 이 진언을 정성으로 염하였다.

“백겁에 쌓은 죄를(百劫積集罪)/ 일념에 씻어지다(一念頓蕩除)/ 마른 풀 사르듯이(如火焚枯草)/ 모조리 사르어지다(滅盡無有餘)” 하는 참회게를 이어,

“옴 살바 못댜모리바라야 사바하. 원컨댄 사생 육도(四生六途)에 두루 도는 법계 유정(法界有情) 목숨 있는 무리 이 여러 겁에 죽고 나며 지은 모든 업장을 멸하여지이다. 내 이제 참회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오니, 모든 죄상을 다 소멸하여 주옵시고 세세생생에 보살도를 행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는 참회 진언과 축원이 법사의 입으로 외어질 때에는 일동은 한참 동안이나 엎드려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이 모양으로 몸으로 지은 업과 입으로 지은 업과 마음으로 지은 업을 다 참회한 뒤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고 불, 법, 승 삼보(佛法僧三寶)를 공경하여 빨리 삼계 인연을 떠나서 청정 법신을 이루어지이다 하는 원을 발하고는 삼보에 귀명례한 후에, “삼보에 귀의하외/ 얻잡는 모든 공덕/ 일체유정에 돌려/ 함께 불도 이뤄지다.” 하고는 나중으로, “이몸 한 몸속에(我今一身中)/ 무진신을 나투와서(現無盡身)/ 모든 부처 앞에(遍在諸佛前)/ 무수례를 하여지다( 一一無數禮)/ 옴 바아라 믹, 옴 바아라 믹, 옴 바아라 믹.” 하는 보례게(普禮偈)와 보례진언(普禮眞言)을 부르고는 용선 대사는 경상 위에 놓았던 축원문을 들어서 무거운 음성으로 느릿느릿 읽었다.

“오늘 지극하온 정성으로 재자 명주 날리군 태수 김혼공은 엎데어 대자대비 광음대 성전에 아로이나이다./ 천하 태평하여지이다./ 이 나라 상감님 성수 무강하셔지이다./ 큰벼슬 잔벼슬 하는 이 모두 충성되어지이다./ 백성이 질고 없고 시화 세풍하여지이다./ 불도 흥황하와 중생이 다 죄의 고를 벗어지이다./ 이 몸과 아내와 딸 몸 성하옵고 옳은 일 하여지이다./ 딸 이번에 모례의 집에 시집가기로 정하였사오니, 두 사람이 다 불은 입사와 백년 해로하옵고 백자 천신하옵고 세세생생에 보살행 닦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몸 죄업 많사와 아직 아들 없사오니 귀남자 점지하여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위의 인용문은 소설 〈꿈〉에서 태수 김흔 공 가족들이 세달사에서 불공드리는 장면이다. 법당에서 법사와 스님, 그리고 달례 가족이 행하는 관음참회예문의 진언 의식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관음예문은 ‘관세음보살을 초청하여 덕을 찬양하고, 보살핌을 발원하는 관음신앙 의식’이다. 그 의식 절차는 거불(擧佛)→보소청 진언(普召請眞言)과 청사→관세음보살 도량 초청→귀의 예를 통해 관세음보살에게 참회하는 진언을 외우며 발원하면 된다.

불교를 아는 분이면 익히 알지만, 관세음보살은 현생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해주는 보살이며,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보살이다. 위의 인용문의 ‘멸업장진언(滅業障眞言)’은 관세음보살 진언으로 모든 업을 소멸하기 위해 드리는 진언이다. 이에 반해 지장보살 진언은 멸정업진언(滅定業眞言)으로, 이미 잘잘못을 통해 업을 생성한 중생이지만, 그 업까지도 소멸시키겠다는 지장보살의 큰 원이 담긴 진언이다.

이러한 관음참회예문 장면을 위에서처럼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소설가 이광수의 박식한 불교 교리, 그리고 소설 창작에 대한 깊은 조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행각을 했던 자신의 과거 잘못을 참회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광복 후 파행적으로 진행되었던 우리 해방공간의 역사와 사회문제를 다루지 않고 불교소설인 〈꿈〉을 창작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도 그러하다. 위의 참회게의 “백겁에 쌓은 죄를/ 일념에 씻어지다/ 마른 풀 사르듯이/ 모조리 사르어지다”처럼 과거의 잘못을 불태워 소멸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3. 대승불교사상의 소설적 가치로서 수용



한용운(1879~1944)


이광수의 〈꿈〉 이외에 잘 알려진 불교소설은 〈이차돈의 사〉와 〈원효대사〉이다. 이 소설들은 불교 모티프 취향적 역사소설이다. 양자의 공통적인 특징은 시대적 배경을 신라시대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과 세속적인 사랑의 욕망과 불심과 불법과의 갈등, 그로 인해 성(聖)과 속(俗)의 변증법적 합일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불교 역사소설인 〈이차돈의 사〉와 〈원효대사〉는 순교자의 영웅적인 삶과 대승불교의 실체가 어떻게 보여질 수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었고, 〈꿈〉은 신화원형적 불교소설의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 있었다.

한용운의 장편소설 〈박명(薄命)〉은 이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불교 역사소설도 아니고, 삼국유사 신화원형 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계모설화 모티프와 인신매매 모티프 소설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용운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부터로 장편소설 〈흑풍(黑風)〉(1935년), 〈후회〉(1936년), 〈박명〉(1938), 단편소설 〈죽음〉 등 몇 편의 소설이 전한다.

소설은 장르 특성상 타 장르보다는 직접적으로 현실세계를 반영한다. 불교는 현실초극 종교이며, 초역사성과 초시대성을 지닌 영원의 종교이다. 상구보리만을 추구하지 않고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불교소설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한다. 그래서 소설 속의 불교사상은 소승불교 사상보다는 대승불교 사상 즉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의 표상인 보살사상’을 추구한다. 또한 ‘생사즉열반’이라는 말은 불이(不二)를 실천하는 보살사상이다. 그래서 부처를 ‘초세간적(超世間的) 존재’로 본다. 깨달음에 도달했으나 중생구제를 위해 성불을 뒤로 미루는 보살을 이상상으로 삼고 속세간에 존재한다. 이로 인해 소설에서 수용할 수 있는 불교사상은 대승불교 사상이다.

한용운의 장편소설 〈박명〉은 여주인공 장순영(張順英)의 일대기를 순차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고대소설과 신소설의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차용하고 있다. 개연성이 없는 구성 즉 우연성의 남발, 그리고 인물 성격 창조의 전형성 등이 근대소설의 특성을 드러낸다. 장순영, 그녀는 조실부모하고 시골에서 계모의 슬하에서 핍박을 받고 살다가, 송씨 부인과 친구 운옥의 유혹에 빠져 상경하게 된다. 수양 엄마가 되어준다는 송씨 부인과 친구의 유혹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하는 단초가 된다. 그녀는 상경 중 원산항에서 실수로 바다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 한 남자가 그녀의 생명을 구해준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보은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비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서울에 오자 송씨 부인은 약속과 달리 그녀를 색주가에 팔아넘긴다. 하지만 그녀는 색주가에서도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우연히 생명의 은인인 남자 김대철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향락주의자인 남편은 경제적으로 무능력자였고 이혼을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아이를 잃는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그녀는 마약중독자로 다시 나타난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한다. 남편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 그녀는 친구 운옥으로부터 원산항 앞바다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한 사람이 남편인 김대철이 아니라 환희사의 여승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로 인해 그녀는 남편이 죽자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이것이 장편소설 〈박명〉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스토리 라인은 평범하고 믿음을 배반한 사람들 때문에 비극적으로 산 한 여성의 삶을 그렸기 때문에 전형적이고 진부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 보여주는 종교적 가치는 대승불교의 이타행의 하화중생 사상이다. 대승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을 이해해야 한다. 중관사상은 용수가 확립한 이론이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실체성을 믿는 나머지 영원불변성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온갖 번뇌망상에 시달린다. 이러한 마음을 초극한 경지를 용수는 ‘무상정득각의 세계’라고 한다. 그리고 그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고 부른다. 한용운의 〈박명〉에서 장순영의 삶은 보은한다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희생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고 부질없다는 생각 때문에 불가에 귀의하는 것은 중관과 유식설을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생(生) · 멸(滅), 상(常) · 단(斷), 일(一) · 이(異), 거(去) · 래(來) 등 이러한 여덟 종류의 극단적인 상반된 4가지의 성격을 부정한 세계가 팔부중도관(八不中道觀)인 중관과 용수의 허무주의적 사상을 보완하기 위한 사상인 미륵사상, 무엇도 집착하지 않는 무착(無着) 그리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대승 행위인 세친(世親) 등을 실천하기 위한 보살행이다.

소설이라는 문학 양식이 작자의 자아표현의 주 도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방편으로 적절한 양식이라고 할 때, 불교를 모티프로 하는 불교소설은 상구보리보다는 하화중생을 현현해내고 실천하는 데 적합한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문학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 이전의 소설인 한용운, 이광수, 김동인의 불교소설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후에 전개될 불교소설의 전망을 가늠케 해준다. ■






유한근
시인 ·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명지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등단.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역임.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평론집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인간, 불교, 문학》 등 저서와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동국문학상, 월산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간과 문학》 주간.

“운허ㆍ이광수 ‘망국의 한’ 서로 같아” - 불교신문

“운허ㆍ이광수 ‘망국의 한’ 서로 같아” - 불교신문



“운허ㆍ이광수 ‘망국의 한’ 서로 같아”

 승인 2008.09.27 10:04 호수 152 댓글 0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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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철 교수, 춘원연구학회 논문서 주장

독립운동과 역경사업 등을 통해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운허(耘虛, 1892∼1980)스님. 또 운허스님의 8촌 형으로 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였지만 친일행적으로 스님과는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일제 강점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한집안 두 인물의 삶을 재조명한 논문이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가 ‘춘원 이광수와 운허스님-망국과 해방, 분단과 전쟁을 겪은 20세기의 두 위인’을 주제로 지난 9월25일 2008년도 춘원연구학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신용철 교수는 서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강당에서 열린 이날 세미나에서 “춘원의 생애에서 가족을 제외하면 어릴 때부터 1950년 납북될 때까지 서로 많이 접촉하고 영향을 미친 사람은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8촌 동생 운허스님(속명 이학수)”라고 소개하고 “두 인물이 가는 길이 달랐어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존경했으며 일생동안 돕고 의지하는 친척이자 친구였다”고 밝혔다. 또 “이들의 발자취에서 일제 식민시대를 살았던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와 갈등을 엿볼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에 따르면 춘원과 운허스님은 조선말,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대한민국 정부수립 등 격변의 시기를 살면서 우리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두 인물 모두 무너져 가는 대한제국을 보면서 비통해 했고,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는 일에 몸을 바쳤다.



하지만 난국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전혀 달랐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일본에 유학하며 문물을 접한 춘원은 조국의 낙후를 가슴 아프게 고민했고, 외국을 가 본 적이 거의 없는 운허스님은 전통적인 민족의 역사 속에서 답을 찾았다. 신 교수는 “두 사람은 모두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바로 가느라 애썼지만, 춘원은 결국 민족을 배반하고 굴절된 길을 선택함으로써 후세의 비판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신 교수는 같은 시기를 살며 엇갈린 행보 속에서도 밀접한 만남을 이어갔던 두 인물의 인연에 주목했다. 그는 “불과 50리 떨어진 동향의 8촌간인 두 사람의 인연은 1950년 춘원의 삶이 끝나는 시기까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됐다”면서 “특히 춘원에게 운허스님은 가정의 부유함이나 꾸밈없는 성품 등에서 어릴 적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자 의지처였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또 춘원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운허스님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주장했다. 그는 “운허스님은 일제 말기 당시 친일행적 문제로 괴로워하는 춘원에게 <법화경>을 건네며 위로했고, 이후 춘원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불심에 더욱 귀의해 <법화경>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63호/ 10월1일자]


이광수 소설의 대승불교 사상 연구

이광수 소설의 대승불교 사상 연구







문학과 종교 , 2012년, pp.1 - 23

A Study of the Mahayana Buddhism in Lee Gwang-soo's Nov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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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Chunwon Lee Gwang-soo's Buddhism was based on his childhood, and continued throughout his life. He not only read Buddhist scriptures such as the Avatamska Sutra, the Sutra of the Lotus, the Sutra of perfect enlightenment, Prajn?-Paramit? Sutra, and Shurangama Sutra, but also practiced Buddhist asceticism. Therefore, his Buddhism was widely extended to cover the whole Mahayana Buddhism thoughts.First, Lee Cha-Don's Death, the Love, and Saint Wonhyo well illustrate the importance of 'Bosalhaeng'(Way to Buddhism) that a boddhisattva has to practice or 'six paramita' for enlightenment. Second, “Mumyung” and "the Dream" show the fundamental reality that the first reason and even one's reality do not exist. Third, in "Yukjanggi"(Record of House Selling) and "Nanjeoh" showed Lee Gwang-soo was practicing Buddhist asceticism. In "Yukjanggi", the Sutra of the Lotus and silent reading of the Buddhist scriptures were well expressed, and in "Nanjeoh," Ganwhaseon asceticism is presented. Fourth, the Great King Sejo analyzes that Great King Sejo had not reached true penitence in the end due to self-awareness of existence through karma.Chunwon's Buddhist novels are connected to traditional novels on thoughts in terms of quantity and quality. Especially the Mahayana Buddhism on his novels still has values as 'traditional cultural thoug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