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대학교 중국연구센터 웹진HOME중국문화카페5.4 백주년에 다시 생각해보는 공자의 인생 5.4 백주년에 다시 생각해보는 공자의 인생
5.4시기 중국의 가장 강력한 공자 비판자는 루쉰이었다. 루쉰은 중국을 낙후하게 만든 주범을 ‘식인예교’라고 지목하며 공자를 신랄하게 추궁하였다, 그러나 루쉰의 글을 통으로 읽어보면 공자를 극단으로 몰아세우기만 한 것은 아니다. 루쉰의 공자전이라 칭할 수 있는 「현대 중국의 공자」에서는 공자의 인생을 살아서나 죽어서나 불우한 운명이었다고 평가한다. 살아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죽어서는 ‘대성지성문선왕(大聖至聖文宣王)’이라는 왕자의 칭호를 받고,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까지 문명을 떨쳤던 공자를 왜 불우하다고 본 것일까? 루쉰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소설 「공을기」를 보면, 글은 알지만 가난하여 밥을 빌어먹는 주인공 공을기가 안주로 시킨 회향두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다가 다 떨어지자 “많은가? 많지 않도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이 있다. 이 말은 『논어』에서 공자가 “나는 어려서 미천하게 자랐기 때문에 하찮은 일의 재능이 많은 것이다. 군자가 재능이 많은가? 많지 않다”1)고 한 구절을 빗댄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공을기의 시대착오적인 비루한 삶을 공자의 궁핍했던 어린 시절과 겹치게 함으로써, 중국 문제의 근원을 공자와 연계시키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그러나 공을기의 중얼거림과 공자의 말 사이에는 커다란 맥락의 차이가 있다. 공을기의 중얼거림은 가난의 사지로 내몰린 무기력한 자의 불안감이 배어있다. 이와 달리 공자의 말은 어린 시절부터 힘든 일을 능숙하게 해내어 고상한 군자들에게 없는 많은 재능을 익힘으로써, 이것이 현재의 공자를 가능케 한 배움의 힘이었다는 자부심을 표출하고 있다. 공자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변변한 관직을 얻지 못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는데, 이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등용의 꿈을 굳건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소설 「관문을 떠난 이야기」에서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배움을 청하는 장면 속에 잘 드러난다. 공자는 노자에게 “저는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 등 육경을 연구했습니다. 저로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연구하여 완전히 익혔다고 생각합니다. 72명의 군주를 찾아가 알현하였지만 아무도 채용해 주질 않았습니다. 정말, 사람이란 알 수 없습니다. 아니면 ‘도’란 것이 알 수 없는 것일까요”라고 묻는다. 노자가 선왕의 발자취에 불과한 육경을 신발이라 여겨 도를 얻지 못한 것이라고 대답하자, 이에 공자는 충격을 받고 물러난다. 석 달 후 공자는 다시 노자를 찾아와 “저는 오랫동안 변화 속에 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떠나버린다. 이에 노자는 공자가 자신의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인정하면서, “같은 한 켤레의 신발이라 할지라도 나의 것은 모래땅을 밟는 것이고, 그의 것은 조정에 오르는 것”이라고 평한다. 이 소설은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는 설화에 기반한 것인데, 그 진위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공자 34세 때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를 찾지 못하다가 52세 때인 정공 10년에 드디어 등용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등용 이후에도 공자는 현실의 벽에 막혀 불우가 끊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한때 노나라의 경시총감까지 올랐지만, 바로 추락해 실업자가 되었고 또 권신에게 경멸을 당하고
백성들에게 조롱을 받았으며 심지어 폭민에게 포위를 당해 배를 곯은 적도 있었다.
제자들이 삼천 명이 되었지만 중용한 이는 겨우 칠십이 명이었고 게다가 진실로 믿었던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루는 공자가 분개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를 둥둥 떠다닌다면 나를 따를 이는 자로일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소극적인 계획을 세운 것으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2)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52세 때에 노나라 정공에 의해 대사구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대사구는 지금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루쉰은 이를 경시총감이라고 한 것이다. 당시 노나라는 세 가문의 귀족 연합체인 삼환씨가 실권을 쥐고 있었는데, 공자는 군주에게 권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명분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여겼다. 이에 공자는 삼환씨의 사읍을 개혁하려 하지만 반발한 귀족들이 연합하여 노나라 정공을 압박하면서 공자는 대사구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루쉰은 이를 두고 ‘바로 추락해 실업자가 되었다’고 한 것이다. 이후 공자는 56세에서 69세까지 14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위, 진, 조, 송, 채, 초 등 주변국을 떠도는 망명 생활을 한다. 주유천하를 하는 동안 공자는 여러 제후들과 세력가들로부터 대접을 받기도 하고 냉대를 받기도 하며,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등 험난한 여정을 보낸다. 위나라 영공에게 갔을 때는 후한 대접을 받았으나 예만 알고 군사·전쟁을 모르는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고, 송나라에서는 공자가 나무 아래서 예를 강의하는데 사마환퇴가 나무를 뽑아 공자를 죽이려 했다. 정나라에서는 사람들로부터 공자의 모습이 주인을 잃고 천대받는 ‘집 잃은 개’와 같다는 조롱을 당하고, 진나라와 채나라의 중간 지역에서는 공자가 초나라로 가는 길을 막으려는 세력들에 포위되어 식량이 떨어지고 굶주림에 시달렸다. 루쉰이 ‘권신에게 경멸을 당하고 백성들에게 조롱을 받았으며 심지어 폭민에게 포위를 당해 배를 곯은 적도 있었다’고 한 것은 바로 주유천하 시절의 고난을 설명한 것이다.
주유천하 시절 공자는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 자로, 안연, 자공, 염유 등 애제자들과 고난을 함께 하였다. 제자들이 공자를 찾아온 목적은 대부분 관료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면서 명망가인 공자의 추천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공자는 이른바 관료 양성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강의를 한 것이고, 전승되어온 고대의 문헌 특히 시서는 공자 아카데미의 주 교재였다. 그래서 『논어』는 공자 아카데미에서 진행된 공자의 강의, 공자와 제자의 대화, 공자와 외부 인사의 대화 등을 편찬한 것이며, 주 내용은 군주 및 관료를 위한 정치론과 윤리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이 되었다는 말은 공자 아카데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봐야지 실제 숫자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자 스스로도 등용이 쉽지 않는 처지에서 3천 명의 제자가 있을 정도로 관료 배출률이 높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망명 시기인 주유천하 시절에는 공자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소수의 애제자들만이 곁에 있었을 것이다.
공자가 ‘뗏목을 타고 바다를 둥둥 떠다니겠다’고 한 말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한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자는 직접적인 원망보다는 자기 절제와 초탈한 태도를 통해 비애를 드러낸다. 자기 절제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고’ 등용되지 못한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는 것인데, 이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는’ 끝없는 도전정신으로 승화된다. 초탈한 태도는 공자가 뗏목을 타고 가려고 한 세계나 중원 바깥의 오랑캐 땅 그리고 안연의 삶과 같은 안빈낙도의 태도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관료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이며, 노장사상과 같은 자연에의 귀의나 탈속 자체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논어』는 등용의 꿈을 위한 정치철학론과 아울러, 등용이 좌절되었을 때의 비애와 성찰을 위한 인생론까지 포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주유천하를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등용의 꿈을 내려놓고 남은 생을 학문과 교육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루쉰은 공자가 죽은 뒤에 운이 좀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성지성문선왕’과 같은 놀라운 지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입된 석가모니에 비한다면 아주 불쌍한 처지라고 인식한다. 모든 현마다 공자 문묘가 있지만 일반 서민들이 참배하지 않아 적막하고 영락한 모습인 데 반해, 절이나 신묘는 사람들로 북적이기 때문이다. 서민들은 공자를 성인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권력자의 유성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루쉰의 생각이다.
중국에서 공자는 권력자들이 떠받는 것이며, 그러한 권력자 혹은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성인은 일반 민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 권력자들의 성묘에 대한 열정 역시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를 숭상할 때는 다른 목적을 갖고 있어서 목적이 달성되자 이 도구는 쓸모없게 되고, 반대로 달성하지 못한다면 더더욱 쓸모없게 되기 때문이다.
30-40년 전에 권력을 쥐고자 하는 사람, 즉 관리가 되고자 한 이들은 모두 ‘사서’와 ‘오경’을 읽고 ‘팔고’를 지었는데, 다른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서적과 문장을 ‘문을 두드리는 벽돌’이라고 명명했다. 문관시험에 급제하면 이런 것들은 동시에 망각되는데, 마치 문을 두드릴 때 사용한 벽돌처럼 문이 열리면 이 벽돌도 내던져진다.
공자는 기실 죽은 뒤에 ‘문을 두드리는’ 벽돌의 직무를 맡은 인물인 셈이다.3)
죽은 뒤의 공자는 권력자가 자신의 목적 실현을 위해 떠받드는 것이며 목적이 완료되면 ‘문을 두드리는 벽돌’처럼 바로 망각될 운명에 처한다. 공자의 지위를 높이는 것은 권력자가 공자의 높은 지위를 빌려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함이며, 반대로 공자를 욕하는 것은 공자를 빌려 권력 잡은 자를 비판하여 자신이 그 권력을 소유하기 위함이다. 어느 경우든 공자를 진심으로 대하는 자는 없다. 게다가 바다 건너 다른 세계에서도 공자 존숭의 현상이 벌어진다. 루쉰이 「현대 중국의 공자」를 쓴 계기는 일본 최대 공자묘인 유시마세이도가 1923년에 소실되었다가 1935년 4월에 재건되었는데 후난성 주석 허젠 장군이 자신이 소장하던 공자 화상을 기증한 신문 기사 때문이다. 이 기사를 보면서 루쉰은 만청 일본 유학 시절 도쿄 고분학원에서 중국 유학생들을 집합시켜 오차노미즈 공자묘 참배한 일을 떠올린다. 당시 루쉰과 중국 유학생들은 ‘공자와 그 무리’에 절망하여 일본에 온 건데 이곳에서도 참배를 해야 하는 기괴한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루쉰은 바다 건너 대영제국의 식민지 홍콩에서도 경험하게 된다.
홍콩에서는 대영 제국의 지배하에 공자를 숭배하고 동방문명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매년 공자 탄신 행사를 각계 인사들이 참여하여 성대하게 치른다. 그 목적은 공자의 도를 바로잡아 삼강오륜과 인도(人道)를 혼란시키는 공산주의 선전과 그 위협을 타파하기 위함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쇠락하여 사설(邪說)이 판치는 중국 대륙을 대신하여 홍콩이 공자의 도를 계승하는 대규모의 경축행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루쉰은 이를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려는 공자의 뜻깊은 말씀을 들은 적이 있어, 옳음을 숭상하고 사악함을 멀리하여, 다행히 대영제국의 덕정이 베풀어졌습니다”4)라고 풍자한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여 다른 세계로 가려던 공자의 뜻이 실제로 바다 건너 일본과 홍콩에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만일 루쉰이 18세기 유럽에서 공자 열풍이 일어나 서구 계몽주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았다면 기괴한 감정이 더더욱 솟구쳤을 것이다. 그러나 바다 건너 어느 곳에서도 공자의 본의와 비애를 진심으로 알아주는 자는 없으며, 자신의 정통성과 권력 그리고 사유재산을 위해 공자를 떠받들고 있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공자는 살아서도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고, 죽어서는 왕자의 지위에 오르고 바다 건너 다른 세계에서도 존숭되었지만 결국 권력자의 일시적인 이용대상으로 받들어진 셈이다. 루쉰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공자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불우한 운명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루쉰은 「꽃이 없는 장미」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공자뿐만 아니라 세계 위인들이 함께 겪고 있는 문제라고 인식한다. 아래의 비평은 21세기 중국의 공자 열풍에 대해 살아있는 풍자로 삼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만약 공구, 석가모니,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 신도는 두렵고 당황스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교주 선생이 어떻게 개탄할지 정말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아 있다면 그를 박해하는 수밖에 없다.
위대한 인물이 화석이 되고 사람들은 그를 위인이라고 칭할 때 즈음이면 그는 이미 꼭두각시로 변해 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 말하는 위대함과 미미함이란 자신에게 이용 효과가 큰지 작은지를 가리키는 것이다.5)
5.4 백주년인 올해 중국은 중화제국 재건을 위한 역사의 연속성과 정통성 확립에 분주하다. 백년 전 5.4 정신의 핵심이 주체의 독립과 혁신 그리고 민주주의였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부자의 꿈을 이룬 후손들이 공자를 다시 존숭하며 전 세계를 향해 ‘대동 세계’의 꿈을 발신하고 있다. 그러나 루쉰의 말대로 공자는 탁월한 치국의 방법을 기획했으나 그것은 모두 민중을 다스리는 권력자를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은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고 했다. 이는 국가 경영이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로, 관중은 부민(富民) 정책을 통해 제나라를 춘추전국시대 최초의 패권국으로 만들었다, 풍족한 생활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로서 윤리와 예의를 중시한 공자 역시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논어』「자로」편에서,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제자 염유가 수레를 몰았는데, 공자가 “사람이 많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이에 염유가 “나라에 백성이 많으면 여기에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물으니, 공자가 “부유하게 해야지” 하였다. 염유가 다시 “이미 부유하다면 무엇을 더해야 합니까?” 물으니, 공자가 “교육을 해야지”하였다.
백성을 먼저 부유하게 한 후에 교육을 해야 한다는 공자의 생각은 개혁개방시대를 열어간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을 떠오르게 한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은 유례없는 고속성장을 이루어 세계 1위의 경제대국 귀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부민론의 관점에서는 커다란 곤경에 직면한 상태다. 먼저 부유하게 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관중의 말대로 창고가 가득 차고 의식이 풍족해진 중국(인)이 예절과 영욕을 알게 된 것인지, 공자의 말대로 부유한 다음에 교육이 이루어진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인다. 유라시아 공동 부유를 약속하는 일대일로를 통해 ‘문명 대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지금, 부유한 이후의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쟁점이다.
시야를 전 지구적 차원으로 넓혀보면 문명 대전환의 움직임은 비단 중국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승자독식의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부를 획득하고 이를 지속시키는 서구 중심적 시스템을 탈피하려는 흐름이 흥기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문명과 종교, 지역을 바탕으로 전 지구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대안 세계를 모색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을 문명의 대전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터키, 이란, 파키스탄, 카자흐스탄, 인도네시아 등이 주축이 된 이슬람 공동체, 인도가 중심이 된 남아시아 지역협력연합, 러시아가 주도하는 대유라시아 연합, 동남아 국가들이 추진하는 아세안 공동체 등이 그러하며, 중국이 구상하는 일대일로 역시 이러한 전 지구적 차원의 문명 대전환 흐름 속에 위치한다.
관건은 현행 서구 중심적 자본주의 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제도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할 수 있느냐다. 중국은 공자를 아이콘으로 한 대동세계(인류운명공동체)를 내세우며 유라시아 부의 길(일대일로) 구축에 사활을 걸고 있다. 내세의 극락보다 현세의 실리를 중시하는 지극히 중국적인 방식이다. 상호 이익에 기반한 지리 경제적 영토를 확장하고 신축된 부의 길을 따라 새로운 도시와 문화와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윤을 목적하지 않는 할랄경제와 같은 대안적 경제제도나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공존 협력하며 포용적 정치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아세안과 같은 정치체제는 눈에 띠지 않는다. 이익을 따라 전 세계에 중화경제권을 구축하는 것 이상의, 그야말로 대동세계에 걸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보이지 않는다.
문명 대전환 속에는 인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풍요로운 물질생활이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지, 만물의 영장인 인류는 왜 지구 환경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지 등,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위기감이 내재되어 있다. 문명 대전환의 주체들이 각기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고유의 종교와 문명을 되살려 내부 문제 및 인류 위기의 해법을 찾는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주지하듯이 중국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공자(유교)이다.
그러나 공자(유교)가 과연 다른 문명 대전환의 주체들이 자신의 종교 문명에 기대하는 것처럼,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을 창조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것은 유교가 종교인가에 관한 해묵은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21세기 중국 신문명의 창조가 공자와의 회통을 기반으로 한다면, 그 가능한 방법을 사유해보자는 것이다.‘공자가 살아야/죽어야, 나라가 산다/죽는다’는 애증의 관계를 넘어, 부유한 이후의 문제와 인류 위기의 해법 그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어떻게 공자를 통해 찾을 수 있는지 실천적 논의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전 지구적 문명 대전환에 공자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1) 『논어』 「자한」.
2) 루쉰, 루쉰전집번역위원회 옮김, 『루쉰전집』 제8권, 그린비, 2015, 418쪽.
3) 루쉰, 『루쉰전집』 제8권, 419-420쪽.
4) 루쉰, 『루쉰전집』 제5권, 318쪽.
5) 루쉰, 『루쉰전집』 제4권, 326쪽.
전남대 이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