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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1

불교평론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 / 이홍구

불교평론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 / 이홍구
특집 | 현대 한국불교 10대 논쟁
[62호] 2015년 06월 01일 (월) 이홍구  dagamsa27@hanmail.net
1. 머리말

   
이홍구
동국대 강의교수

현대 한국불교에서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에 대해서는 시기별로 크게 3시기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제1기에 해당하는 박경준의 논쟁은 대승불교 흥기 배경과 인도와 중국, 근대 일본의 대승(大乘) 불설·비불설론 논쟁의 대두와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 나서,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인 연구 논문과 저술이 거의 없음을 지적하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대승경전관의 정립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제2기의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흐름은 김용표가 〈법보신문〉 647호에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경계한다”라는 특별기고를 투고하면서 촉발되었다. 제2기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주요 쟁점은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에 대한 논쟁, 대승불교의 기복신앙, 대승 위경설에 대한 관점 차이, 대승경전의 저자 문제, 한국불교의 정체성 등이었다. 제2기 논쟁에서 홍사성, 마성 스님, 조준호, 전재성 등은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주로 접근하고 있으며 김용표, 진현종, 김성철, 주명철 등은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나름대로 대승불교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논쟁의 주제가 너무나 큰 담론이고 논쟁의 범위와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 라인의 부재와 논쟁의 장이 교계 주간지라는 제약적인 한계로 더 큰 성과를 도출해내지 못한 것은 아쉽다.

셋째, 제3기의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은 권오민이 〈법보신문〉 1008호에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탓”이라는 특별기고를 투고하면서 촉발되었다. 대·소승의 공통된 불설 기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통이나 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법성[진실]에 의지할 것을 전제로, 소승이나 대승 등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오늘날의 비불설 논쟁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제3기 권오민이 촉발한 대승불교 정체성 논쟁의 주요 쟁점은 정법 기준에 대한 논쟁, 불설·비불설에 대한 관점 논쟁, 제 부파불교의 불설·비불설 논쟁, 대·소승 간의 불설·비불설 문제,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논쟁 등이었다.

권오민이 아함과 니까야는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된 불설로서, 상좌부에서 편찬 전승한 경전이라는 주장에 대해 친설론을 가지고 반대하는 마성, 전재성, 황순일 등과 앞의 관점과는 별개의 입장에서 논평하는 조성택, 조인숙, 안성두, 이영철 등의 의미 있는 글들이 있었다. 이 논쟁과 논평은 불교학계에서 보기 드문 이변의 논쟁이었으며, 학자의 범위를 넘어 불교 일반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권오민의 불설·비불설에 대한 논문의 본래 여러 주제와는 상관없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친설·비친설론으로 변질되어 종파적 입장에서 다루어진 것은 크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제1기부터 3기까지의 전체적 흐름을 보면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이 결국은 21세기의 새로운 교판으로서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역할을 위해 필요한 접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주제, 범위, 방법 등에 많은 구체적 접근이 결여된 것이 아쉽다. 즉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의 핵심은 첫째, 불설·비불설 논쟁에서 경전은 특수한 사상 성향을 지닌 그룹에 의해 각기 별도로 편찬 집성되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둘째, 불교권 내적인 문제 제기로 교학과 신행의 체계성과 조직성의 결여를 해결해야 한다. 셋째, 불교권 외적인 문제 제기로 현대사회의 다기한 문제를 해결할 열쇠에 대해 불교 신행의 역할을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근대불교학의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

1)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우월적 가치

고래로 불교의 제 경론을 그 뜻이 불완전한 것[不了義]과 완전한 것[了義], 은밀한 것[密義]과 분명한 것[顯了], 나아가 방편설(方便說)과 구경설(究竟說) 등으로 분별하게 되었고 급기야 후자로 해석된 경전에 근거하여 불교교파나 종파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불교경전은 특수한 사상 성향을 지닌 그룹에 의해 각기 별도로 편찬 집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불교사상사에서 필연적인 것이었다.이러한 불설·비불설의 문제의 흐름에 대해 김호성은 반복사관(反復史觀), 퇴보사관(退步史觀), 발달사관(發達史觀)으로 분류한다.

즉 퇴보사관은 초기불교의 우위적 관점에서 대승불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발달사관은 대승불교의 우위적 관점에서 초기불교를 바라보는 것이고, 반복사관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동등한 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다.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종파적 견해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마성 스님은 초기불교 지상주의자는 아니지만 퇴보사관적 관점에서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이다.”라고 한다. 또한 그는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마성 스님의 이와 같은 관점에 대해 김성철은 발달사관적 입장에서 “대승불전이 설혹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교리는 아함이나 니까야, 율장과 같은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퇴보사관이나 발달사관과는 달리 권오민은 “대·소승 경전 또한 모두 불설을 담고 있는 불교의 경전으로서, 같은 위상을 갖게 된다”고 하면서 문헌적 사료와 경전 형성의 역사적 한계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권오민의 이러한 주장은 반복사관적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3가지 다른 관점에 대해 제1기부터 제3기까지의 학문적 접근방법을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 경전해석학적 접근, 양 접근으로 구분하기가 애매한 경우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이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 그리고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근대불교학적 관점으로 합리주의(rationalism) 사상과 실증적 방법론을 활용하는 것이다.

2)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아함과 니까야 또한 비불설이라고 하는 권오민의 주장에 대해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은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불설로 가탁한 것이라 보면서, 아함이나 니까야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임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권오민은 마성 스님의 비평을 학문보다 상식에 기댄 것이라 비판하면서 아함과 니까야에 대해 “초기경전인가, 유부 혹은 상좌부 경전인가?”라고 반문한다. 또한 상좌부에 대한 정통성의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마성 스님의 주장에 대해 상좌부가 전승한 니까야만이 불설이고 정법이며 정통불교라는 맹목의 폐쇄적 신념은 사대주의라고 논평했다.

전재성은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설일체유부나 상좌부에서 취사선택 편찬·결집된 것이라는 권오민의 주장에 대해 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을 토대로 아함과 니까야는 창작 아닌 리얼리티 자료로서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고층의 경전이라고 논박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권오민은 전재성의 논리 근거인 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에 문제를 제기하며, 불설/비불설(혹은 친설/비친설)과 고층/신층의 문제를 서로 개입시키는 것은 전혀 엉뚱하다고 보았다. 뒤이어 황순일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라는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제를 놓고, 초기경전이 고타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이라는 부파불교의 경전 전승의 전통으로 볼 때 어느 정도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권오민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렵지만 양 경전은 편찬 시기(BC.1~AD.5)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하였다. 또한 부파불교의 경전 전승 전통에서 왜 전문 암송 집단이 필요하였고, 부파마다 그러한 집단이 존재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다양성의 시대에 법성의 획일적 사유, 교조적 획일화, 믿음의 한계 등에 대해 지적하며 현대의 새로운 불교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3) 다신적 신앙과 기복설 문제

〈법보신문〉 648호에서 홍사성은 김용표를 세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대승의 다신적 신앙은 불설과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다양한 시각의 통찰이 필요하다는 김용표의 주장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둘째는 대승불교가 깨달은 사람의 말을 불설로 인정하는 경전관을 반대하는 관점이다. 셋째는 모든 종교 현상은 역사적 문화적 산물이며 따라서 대승 시대에 제시된 관음·정토·지장·미륵신앙을 정법주의 잣대로 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반대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뒤이어 〈법보신문〉 649호에서 진현종은 부처님 친설 고집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초기불교의 이성-합리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마성 스님은 역사적 붓다를 외면하면 외도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대승불교의 포용과 관용성 때문에 순수불교가 갈수록 희석되고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그는 한국불교는 타락한 대승불교라고 지적하면서, 한국불교에 대해 ‘대승 옷 입은 힌두교’라고까지 신랄하게 지적했다.

김성철은 홍사성과 마성 스님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기복-다불 사상도 엄연한 불교이고, 초기불교의 논리가 대승으로 귀결되었으며, 대기설법 정신이 새 사상을 탄생시킨 원동력이라 보았다. 조준호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 대승이 아니며, 기복을 대승이라고 보는 김성철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고, 기복을 죄악시하지는 않지만 다만 기복에서 작복으로 지향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전재성은 대승경전이 무상, 고, 무아의 니까야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대승경전은 초기불교 정신을 계승한다고 보면서 대승을 비불교로 보는 것은 역사·사상에 대한 이해부족이라고 진단했다. 주명철은 대승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석존 정신에 충실한 재해석이라고 전제하고 대승유신론의 폄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면서 대승의 여래 또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김호성은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과거7불’의 존재를 소개하고, 이러한 ‘과거7불’ 사상은 고타마 붓다라는 일불(一佛)에서만 불교를 찾는 것이 바로 불교의 본의가 아님을 상징한다고 분석했다.

3. 현대불교학의 경전해석학적 접근

1) 불설론과 정법의 기준에 대한 논쟁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의 친설론을 부정하고, 상좌부 아가마와 니까야만이 친설이자 정법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대승경전의 정통성과 정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대승경전이 붓다의 가르침에 합치하느냐 합치하지 않느냐를 따지는 두 가지 전개 방향을 설명한다. 하나는 불설의 기준과 해석에 의해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논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파교단이 전승한 니까야와 아가마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는 앞에서 설명했고,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증명하는 사의(四依)와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해 살펴보겠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에 반해 현대학자들의 경전해석학에서 불교란 붓다의 가르침에서 발로하였지만, 그 가르침을 각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 온 노력의 역사적 총체로 보는 관점이다. 먼저, 박경준은 친설론과 정법론에 대해 《대승열반경(大乘涅槃經)》을 토대로 종파와 교판적 관점을 벗어난 법(法)·의(義)·지(智)·요의(了義)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한마디로 불교는 붓다보다도 진리 그 자체를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근본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경전의 권위는 ‘붓다의 직설(直說)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대승열반경》에서는 “사람과 말과 식(識)과 불료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과 뜻[義]과 지혜와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친설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법론의 의미에 대해 사람[人]의 종파적 입장이 아니고 불법 자체의 관점, 말[語]의 언어적 입장이 아니라 의미론적 관점, 식별적 입장이 아니라 지혜의 관점, 불료의적 입장이 아니라 요의(了義)로 판단된 경의 진실의(眞實義) 관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권오민은 불설의 진위를 판단하는 잣대는 원래 4대교법이었지만 그들은 여기에 “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불설이다”는 말을 더하여 수정하였고 나중에 다시 이를 근거로 “4의[依: 人·語·識·不了義]에 의지하지 말고 법(法)·의(義)·지(智)·요의(了義)에 의지하라”를 추가하였다고 설명했다. 즉 이 4가지를 통합하여 갖춘 것이 법성을 갖춘 것으로 불설 편찬의 근거는 불설이 아니라 법성이라고 하였다.

2) 대승경전의 역사적 필연성과 신화적·설화적 가공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불법을 펴신 이후로 승가와 재가는 시대에 따라 불교 신행의 정체성 내지 이상적인 신행 행태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여 왔다. 그러나 대·소승의 유부, 경량부(성실론), 중관, 유식 계통의 논서가 표면의 학설은 달리하였지만 불설의 정의에 관한 한 정확한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는, 먼저 신행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확고한 이해의 기반 위에 시대적인 요구를 수용한 적극적인 대응을 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 신행활동을 강조하는 종단의 소아적인 발상이나 이익집단 결성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들의 신행생활은 타파되어야 한다. 결국 불교 학문을 토대로 하는 신행 시스템 구축은 불교 고래의 그리고 불교 본연의 자리이타 지향적인 교리를 구현하는 자발적인 믿음과 수행을 촉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의 대표학자 가운데 한 명인 김용표는 대승경전의 본성에 대한 해석학적 탐색을 기초로 하여 현대 불교를 위한 창조적 대승해석학의 방향을 사상의 역사성 문제, 경전적 진리의 상황과 맥락적 진리(contextual truth) 성격, 무한히 열린 자유로운 해석 정신[불의 四種釋義]의 세 가지로 제시한다. 특히, 진리란 세간의 전통이나 언어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간 언어의 형태로 나타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론의 해석도 언제나 현대 서양해석학에서 말하는 선이해(先理解)와 일련의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에 조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호성은 대승경전에는 신화적·설화적 가공(架空)의 이야기가 많으므로, 이성적인 초기경전보다는 믿을 만하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2가지로 반박하였다.

① 연기이므로 허(虛)이고 실(實)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가공의 형식-예술적 형식-을 통해서 더욱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보인다는 점에서 대승경전은 미학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시(詩) 〈그림자 극〉을 통해서 말해보았다. ②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현실의 이야기는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지만, 가공의 이야기는 불변의 것으로서 더 진실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허와 실이 서로 역전될 수 있음을 다시 시 〈드라마〉와 〈극락에서 온 메일〉을 통해서 중송(重頌)해 보았다. 시로 말한 것 역시 형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즉 대승경전의 신화적/설화적 가공을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 “극락이나 아미타·지장·관음의 존재는 실로 초기경전의 교설에 반(反)하는 것이 아니라, 아공(我空)·법공(法空)으로 인해서 그 세계는 실재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3)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저자 문제

원래 경(經)의 원어(原語)인 Sūtra는 동사 siv 또는 sīv(꿰매다의 의미)에서 파생된 말로 실, 끈, 줄 등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위로는 진리와 성현의 말씀을 꿰고[貴穿] 아래로는 중생(의 고통과 미망)을 거둔다는[攝持] 것이 경의 ‘근본 기능이요, 존재이유’인 것이다. 부처님이 자신의 가르침을 상류층의 언어인 베다(Veda)어가 아니라 각 지방의 민족어(民族語)로 전하게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즉 초기불교가 친설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언어 인식과 표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어가 되어 중생들의 개아적 언어 인식과 한없는 거리와 간격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따라서 붓다는 자신의 언어를 통해서 제자들로 하여금 법[진리]을 자각게 하려고 했을 뿐이지 자신의 말을 절대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박경준은 “본래가 성전 암송가로서 원시경전의 내용을 해박하게 꿰고 있었고 찬불승[讚佛乘: 佛傳文學]을 발전시켜 오기도 한 법사[法師: 다르마바나카]들이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에 근거하여, 내용적으로는 원시경전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형식, 문체와 체제를 달리하는 새로운 대승경전을 편찬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김호성은 철학적, 해석학적 관점을 기반으로 4가지 다른 관점에서 대승경전의 저자 문제를 논증하고 있다. 첫째, 초기경전은 저자가 있고 대승경전은 저자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저자의 표기에 의해서 저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고유명사를 실체의 드러남으로 바라보는 미망일 뿐이며, 초기경전의 내용 즉 연기의 관점에 서게 되면 고유명사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둘째, 대승경전의 저자들이 대승경전을 제작해서 후대에 많은 평지풍파를 가져왔다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하이데거-가다머 사제(師弟)의 철학적 해석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간성/역사성의 개입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보르헤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저자, 삐에르 메나르를 살펴봄으로써 전 주장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함/니까야를 똑같이 베낀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시공간의 컨텍스트가 반영되어서 이해될 수밖에 없으므로, 아함/니까야와는 다른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게 다르게 이해된 의미의 생성을 문자화(文字化)한 것이 대승경전이다.

즉, 대승경전의 제작은 시간성/역사성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셋째, 대승경전을 불설이라 칭한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에 대해 보르헤스의 또 다른 소설 〈틀뢴, 우크바,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전거로 내세워 “모든 책은 익명이며, 오직 한 사람의 저술”이라는 점을 말하였다. 넷째, 대승경전의 저자들이 스스로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붓다의 권위를 빌려서 그 책의 권위를 넓히고 자설(自說)을 좀 더 쉽게 널리 펼치기 위한 사욕(私慾)에서였다는 주장에 대해 심성사적(心性史的) 방법론과 ‘정황증거’를 가지고 논박하였다.

4. 바람직한 논쟁의 방향을 위한 조건과 과제

1) 화엄원융의 언어인식적 접근

앞에서 언급했던 대승경전이 참된 불설임을 증명하는 사의(四依)와 사대교법(四大敎法)에 대해 화엄에서는 언어인식적 관점으로 3가지 관점을 제공한다. 첫째, 법(法)과 의(義)에서 법 자체의 언어론과 의미론적 입장에 대해 상입(相入)의 무아론적 언어인식의 관점을 제공한다. 즉 무아적 언어인식의 경계는 수십전법에서는 중문(中門)의 상호포섭적 관계로 능구(能具)와 소구(所具)처럼 명칭[名稱: 言說]과 내포[內包: 意義] 간의 상호 주관적인 관계[否定的 同一視]를 가지고 무아의 의의를 나타낸 것으로, 주체와 객체의 상호 경합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명칭은 의의를 가지고 언설을 삼으므로 언설이 의의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언설이 언설이 아니다. 내포도 언설로써 의의를 삼으므로 의의가 언설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의의가 의의가 아니다.
둘째, 지(智)와 요의(了義)에서 지란 자신의 아뢰야식에 의거한 알음알이를 지양하고 지혜로 보는 개인적 깨달음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하면 요의는 깨달음 자체가 되는데, 여기에 대해 상즉(相卽)의 중도론적(中道論的) 언어인식의 관점을 제공한다. 즉 언어적 표현과 깨달음의 중도적 언어인식의 경계는 수십전법에서는 즉문(卽門)의 상호 환원적 관계로 근본[根本: 깨달음]과 지말[枝末: 언어] 간의 상즉인 관계[肯定的 同一視]를 가지고 중도의 의의를 나타낸 것으로, 근본과 지말의 상호 협력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지말은 오증(悟證)된 의의(意義)가 언어에 속한 것으로 고요하면서도 끊임없이 작용하고,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설명한 것이다. 근본도 언설이 오증(悟證)의 표상(表象)에 속한 것으로 작용하면서도 늘 고요하고, 설명하면서도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 언어 매개를 통한 자비 실행이 교분(敎分)의 입장이라면, 언어가 단절되고 증득해서 얻는 경지가 증분(證分)의 입장이다. 하지만 증분의 침묵은 중생에게 들리지 않고, 교분의 언어는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의 의미를 담고 표현되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제불보살의 대자비 본원력의 바탕이 되는 부주중도적(不住中道的) 언어는 중생들의 눈높이에 따라 침묵과 언어가 공존하는 언어표현이다. 즉 연기분과 증분의 관계에서 언어의 궁극적 역할과 의미가 드러난 것이 부주중도의 언어인식이다. 따라서 초기불교가 친설이고, 대승불교가 불법이라고 하면 친설은 일(一)이자 증분, 법설은 다(多)이자 교분이 되어 상입상즉의 원융적 관계를 이룰 수 있다.

2) 학제간 연구와 한국불교의 실용적 좌표

현시대까지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소승과 대승, 상종(相宗)과 성종(性宗), 교종과 선종 등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인식되거나 다만 어느 일방에 의한 요의(了義)와 불요의(不了義), 방편(方便)과 구경(究竟)의 관계로서만 논의되고 있을 뿐 서로 간의 허심탄회한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불교권 자체 안에서 이러한 문제를 확인하는 방법도 좋겠지만, 초기불교의 가치와 대승불교 및 대승경전관 및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논쟁의 방향 설정을 위해 학제간 연구도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불교와 학제간 연구에는 다양한 분과가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했던 화엄원융의 3가지 언어인식적 관점을 바탕으로 3가지 접근을 제안한다. 첫째, 4대교법 가운데 법과 의의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개아와 무아의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심리언어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인지과학적 관점을 기초로 하는 신경·심리언어학의 접근법에서는 1968년 초개인심리학 이전의 서양철학과 서구심리학의 개아를 강화하는 언어인식의 심리언어학적 의미를 평가한다. 그리고 무아의 언어인식적 관점 제공을 위해 유식불교의 12연기 언어인식 메커니즘과 무아의 정문훈습을 통한 제8식의 변화 양상을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학제간 연구를 통해 개아와 무아의 의식 및 무의식의 관점에서 언어인식의 긍정성과 부정성의 양면성과 한계성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둘째, 4대교법 가운데 지와 요의의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개아와 무아의 통합적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통합심리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는 서양과학의 심리학과 동양문화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인 불교학의 만남이자 진정한 융합을 시도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통합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각 층에 대한 개념과 범위를 한국불교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설정하고 접근할 것이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즉 인간존재의 구성 요소인 의식의 스펙트럼에서 1차원적 상호침투의 이질적 등계층의 홀로그래프적 언어인식, 다차원적 상호침투의 홀로키적 온우주론의 언어인식, 절대정신 등이 중요한 테마이다. 1차원적 상호침투는 화엄의 상입, 다차원적 상호침투는 상즉, 절대정신은 법성과의 비교고찰이 의미 있는 연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4대교법을 아우르는 법성의 현시대적 의미를 보다 객관화하기 위해 집단의 언어인식적 관점을 토대로 하는 과학철학과의 학제간 연구이다. 왜냐하면 현시대에 경험주의적 과학지상주의자와 유물론적 실증주의자의 전통 경험과학적 진리관이 일반인들을 혼미하게 오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불교 정체성 정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학제간 연구 가운데 하나인 과학철학(科學哲學, philosophyofscience)은 과학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으로, 철학과 과학을 대비해 생각해볼 때 몇 가지 점에서 고려의 대상이 된다.

3)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필요성 제기

오늘날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에 대한 통합시각을 제안하고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개념 설정을 위해 신행(信行)의 의미를 교학의 관점에서 평가할 수도 있고, 신행의 관점에서 교학을 평가할 수도 있으며, 양쪽 모두 동등한 가치 선상에 놓고 평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신(信)·해(解)·행(行)·증(證)의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현대 한국에서 제기되는 ‘신행’ 관련 논의의 틀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불교권 내적인 문제 제기로서 통불교적인 한국불교의 속성으로 야기되는 신행의 체계성과 조직성의 결여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불교권 외적인 문제 제기로, 현대사회의 다기한 문제에 대한 불교 신행의 역할과 역량 정립이다.

한국불교의 정체성 정립을 위해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유용한 접근이 문화(심리)학이 될 수 있다. 원래 문화학이 발생한 의의는 개별 학문들로부터 나온 개별사건들을 다시각적 관점에서 네트워킹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조정자 역할을 담당하는 초과학적 프로그램으로 학문들 간, 학문과 실천 간을 연결하는 지평과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문화학의 한 범주로서 ‘믿음과 실천’의 연구목적은 ‘문화적 지향’의 인문철학으로서 불교학에서 자신의 학문영역과 이론적 태도의 한계를 넘어 ‘문화적 전체’ 속에서 ‘믿음과 실천’의 의미를 추구하고 동시에 사회적 실천을 위한 방향타의 구실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란 좁은 의미로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넓은 의미로 본다면 불교란 “석존을 개조로 하여 열반 혹은 깨달음을 구하는 것을 최고 구극의 가치 또는 목적으로 하고, 그 실현을 목표로 하여 세계 각 지역에서 전개되는 문화의 종합적 체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문화로써 존재하고 문화로써 표현되며, 문화로써 기능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 ‘한국불교문화’라는 프리즘은 현대 신행생활의 기본방향으로 첫째, 불교권 내적인 문제는 자리행적 신행생활의 관점으로 개인수행 및 정신건강의 측면과 종교 의례문화적 신행 방법 등의 접근이다. 그리고 둘째, 불교권 외적인 문제는 이타행적 신행생활의 관점으로 사회적·역사적·철학적·교육적·예술적 신행 방법 등의 접근이다. 여기서 불교권 내적인 문제는 정신수양과 종교적 행위의 특수적 접근 방법의 신행생활의 성격을 지니며, 불교권 외적인 문제는 사회실천 행위의 보편적 접근 방법의 신행생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5. 맺음말

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에 대해 역사학적, 문헌학적, 고고학적, 철학적, 해석학적, 종교체험과 신행적 접근 등을 통한 선행연구들이 있었다. 대승불교(경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전제조건의 논쟁을 주제별로 보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불설·비불설, 대승불교와 대승경전의 개념 정의와 범위 설정, 초기경전과 대승경전과의 관계, 대승불교(경전)가 지녀야 할 가치와 속성 및 기능, 존재론·인식론·실천론 등의 다각적 관점들이 있었다. 시기별로 보면 대승불교 정체성 주요 논쟁의 제1기에는 대승 불설·비불설에 대한 문제 제기와 논의방향 제시, 제2기에는 대승불교의 비불교적 요소에 대한 관점 차이, 제3기에는 상좌부의 아가마와 니까야 친설 여부가 주요 쟁점이었다.

이 글에서는 3기에 걸쳐 펼쳐진 이러한 논쟁에 대해 2장, 근대불교학의 역사적·문헌비평학적 접근에서는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우월적 가치, 아가마와 니까야의 친설 여부, 다신적 신앙과 기복설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3장, 현대불교학의 경전해석학적 접근에서는 불설론과 정법의 기준에 대한 논쟁, 대승경전의 역사적 필연성과 신화적/설화적 가공, 초기경전과 대승경전 저자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4장의 한국불교 정체성 확립을 위한 통합적 접근에서는 첫째,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화엄의 언어인식을 기저로 하고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원융적 시각을 제공하였다. 둘째, 심리언어학, 통합심리학, 과학철학을 보조적 활용하여 한국불교의 실용적 좌표 확인을 제안하였다. 셋째, 교학과 수행의 통합모델 제공을 위해 문화학과 문화심리학의 활용을 통해 불교권 내적인 문제와 외적인 문제 해결을 제안하였다.

결국, 이 논문은 경전해석학적 접근을 기반으로 하는 화엄원융의 언어인식적 접근을 통해 불교경전이 현대의 다원주의와 통합사회에서 가져야 하는 정체성과 역할을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즉 경전해석학적 관점을 전제로 하고, 무분별적 화엄원융의 언어관을 배경으로 하는 언어인식적 관점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의 심리언어학, 통합심리학, 과학철학, 문화심리학 등의 접근을 보조로 하는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과 신대승불교 운동의 방향 모색을 위한 통합적 접근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바람직한 논쟁의 방향을 위한 조건과 과제는 더욱 많겠지만, 이 글에서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은 차후 과제로 남겨둔다. ■

 

이홍구 / 동국대 강의교수. 대구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석사·박사). 대한불교 조계종 한국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선임연구원, 동국대학교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의상 화엄관행의 연구〉(석사논문) 〈신라 의상의 엄정융회적 신행 연구〉(박사논문) 〈의상계의 엄정융회적(嚴淨融會的) 일승정토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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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7

각묵스님 / ‘마음의 절대화’ 유감 - 불교신문

각묵스님 / ‘마음의 절대화’ 유감 - 불교신문



각묵스님 / ‘마음의 절대화’ 유감
  •  승인 2008.11.2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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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ㆍ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욕먹기로 작정하고 한국불교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쓴 소리를 해보라고 한다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마음의 절대화’를 들고 싶다. 한국불교 전반에서 마음은 외도의 창조주나 하나님이나 천주나 알라나 브라흐마처럼 절대화되고 신성시되어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며, ‘일체유심조’는 신통방통한 주문으로 통하고 있다.

조건발생일 뿐인데…

무아(無我, anatta, 실체 없음)는 불교만대의 표준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아비달마-중관-유식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주류에서는 무언가 변하지 않는 실체가 존재와 세계의 안이나 배후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단지 고정관념(산냐, 相)일뿐이라 하여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교는 무아를 역설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마음을 영원한 그 무엇으로 절대화해버린다면 그것은 즉시에 불교가 아니게 되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마음을 절대화하여 이것을 불생불멸이요 불변하는 실체인양 상정하고 이것을 깨닫고 이것과 하나 되고 이것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것을 불교라고 잘 못 이해하는 불자들이 많다.

요점만 말하자면, 마음은 단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기경전들의 수백 수천 군데에서 마음을 포함한 오온은 조건발생(緣已生, 緣起) 일 뿐이고, 무상이요 괴로움이요 무아라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할 때 염오-이욕-해탈-해탈지가 생겨서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음을 절대화해버린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직설과 정면으로 맞서는 외도의 가르침이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입각처가 생겨야 불교적 수행이 시작된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깨달음은 마음과의 합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 등에 대한 염오(넌더리, 구역질, nibbida)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부처님께서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마음이 무상하고 찰나생.찰나멸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라고. 남북방 아비달마와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찰나(khana)’와 ‘흐름(相續, santati)’으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전찰나의 마음이 사라지면 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서 찰나생.찰나멸로 흘러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등무간연) 유식에서도 아뢰야식을 비롯한 마음은 전변하는 것이요(識轉變), 안혜(Sthiramati) 스님은 이것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이라고 찰나와 흐름으로 멋지게 정의하고 있다. 찰나와 흐름을 이해 못한 교학과 수행은 불교가 아니다.

믿지 말고 보아야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절대화하면 안된다. 그건 불교가 아니고 외도설이요 잡설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깨닫지 못한다. ‘절대’는 복종과 섬김과 충성과 합일의 대상이지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의 믿음은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으로 족하다. 왜 마음을 절대화하여 믿으라고 강요하는가. 마음은 믿지 말고 보아야 한다. 마음의 찰나성과 상속성과 조건성과 허망성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마음의 절대화가 존재하는 한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불교신문 2480호/ 11월29일자]

[요약] 각묵 스님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 불교저널





[요약] 각묵 스님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 불교저널




[요약] 각묵 스님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깨달음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


2009년 11월 22일 (일) 21:12:05 서현욱 기자 mytrea70@yahoo.co.kr


고불총림 백양사 ‘야단법석-깨달음의 길을 찾는다’에서 세 번째 법주로 나선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각묵 스님은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강연을 통해 “불교의 목적을 행복의 실현(離苦得樂)이라고 설명하고 이를 위해 초기불교에서는 ‘온·처·계·근·제·연’를 교학체계로 삼았고 ‘37보리분법’을 통해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보았다.

불교교학은 ‘온·처·계·근·제·연’



▲ 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각묵 스님.
각묵 스님은 “불교 교학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온·처·계·근·제·연’이라고 즉답할 수 있어야 한다”며 “불교 교학의 이론체계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행복에는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이 있다. 스님들의 출가 이유가 궁극적 행복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온’이다”라고 했다. 스님은 “‘나’를 오온(색수상행식)으로 해체해 보면 무상과 고, 무아가 보인다”며 “무상 고, 무아를 봐야 해탈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각묵 스님은 “세계란 무엇인가? 를 알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12처 18계”이며 “진리가 무엇인가?란 의문에 부처님의 답은 고·집·멸·도 사성제이고, 괴로움의 구체적 가르침이 12연기이다. 윤회의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가 곧 12연기이다”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교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37보리분법의 수행이 있어야 깨달음은 실현된다”고 해석했다.

“행복하려면 봉사하는 삶 살아야”

각묵 스님은 먼저 《디가 니까야》 <사문과경>을 인용해 “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 여의고 행복의 실현”이라며 “부처님은 금생의 행복은 기술을 익혀야 한다고 했다. 기술로 세상에 기여하고 이윤을 창출하여 금생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중요한 행복”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의 이 같은 말은 금생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인간의 존재론적 욕망의 사용법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각묵 스님은 “인간은 자기에게 맞는 기술을 익혀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서 “봉사하는 삶은 지계와 보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각묵 스님은 “《숫따니빠따》<마하망갈라경>에는 ‘많이 배움’ ‘기술’ ‘규율’ ‘잘 공부지음’ ‘보시’ ‘공덕을 쌓음’ 등을 금생의 행복의 조건으로 본다”며 “이는 보시, 지계,학문, 기술”이라고 말했다.

각묵 스님은 “내생의 행복을 위해 부처님은 보시와 지계를 강조했다”면서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재가자는 삼보에 대한 믿음과 보시와 지계에 충실해야 내생의 행복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궁극적 행복은 곧 열반이고 깨달음으로 이는 불교만의 고귀한 가르침”이며 “이는 계정혜 삼학을 갖추어야 영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궁극적 행복 실현은 개념적인 존재를 해체해서 법으로 환원해 보아야 하며, 이를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온·처·계의 무상·고·무아에 대한 철견(徹見), 사성제의 통찰, 팔정도의 완성, 12연기의 역관을 부처님은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초기불전은 분명히 팔정도가 도라고 밝히고 있다. 명확한 것이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부처님은 팔정도를 실현함으로써 깨달았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라며 깨달음의 내용이 우리 곁에 있음을 강조했다.

각묵 스님은 이어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깨달음을 실현하는 방법 가운데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무상 고 무아의 통찰을 통한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라며 “주석서들은 한결같이 염오를 강한 위빠사나로, 이욕은 도로, 해탈은 과로, 구경해탈지는 반조의 지혜로 설명하고 있다”고 정리했다.

깨달음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
“부처님은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

각묵 스님은 “초기불교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라고 규정했다. 스님은 “초기 불전에서 설하는 깨달음의 핵심은 ‘해체해서 보기’”라며 《상윳따 니까야》<천 명이 넘음경>과 주석서를 인용 , “부처님은 마음챙김의 확립 등의 부분으로 법을 해체하는 것을 말하셨다”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게 되면, 온처계연 등으로 설해지는 모든 존재들의 무상 고 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면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써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그래서 해탈 열반 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개념적 존재나 명칭이나 말에 속지 않고 단지 오온이고 12처이고 18계이고 연기일 뿐임에 사무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며 “초기불전에 나타나는 수행 방법의 핵심도 나라는 존재를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으로 해체해서 그 중 하나에 집중(삼매, 사마타)하거나 그 중 하나의 무상 고 무아를 해체해서 보는 것(통찰, 위파사나)”이라고 설명했다.

각묵 스님은 이날 강연을 “나와 존재와 세상과 생사 문제를 이처럼 온처계연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소멸을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는 말로 끝맺었다.

장성 백양사=서현욱 기자

[요약] 각묵 스님 질의 응답

문: 고기를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다. 부처님도 걸식을 하실 때 고기를 드시지 않았나.
각묵 스님: 부처님은 삼정육은 먹을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탁발을 하던 상황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해본다면, 살아 있는 생명을 직접 죽여 먹는 것은 불자로서 적절하지 않겠지만 남이 잡은 것을 먹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채식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우리나라 상황에서 쉽지 않으므로 삼정육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신이다.

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설명하며 ‘수’를 느낌이라고 했다. 저는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몸과 주관적인 기억의 조합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기억이라는 부분은 다뤄지지 않고 있다.

각묵 스님: 상좌부 아비달마에서는 기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면 기억은 모두 법으로 심리현상으로 환원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경험한 심리현상이 지금에 일어날 때 기억이라고 한다. 상좌부에서는 무엇인가 기억되는 현상은 심리현상이고, 그것을 지금 일어나게 하는 것은 마음챙김으로 본다.

문: 어제 질문 중에 윤회에 대해 논의했다. 초기불교에서는 윤회가 사상적 체계를 가지고 있나?
각묵 스님: 윤회는 불교 이전에도 있었고 인도에서는 삼사라라는 용어로 설명됐다. 부처님께서도 초기경전 도처에서 윤회를 말하고 있다. 윤회를 설명하는 방법이 다르다. 힌두교는 자아의 윤회로 설명한다. 힌두교에서는 자아라는 고정불변한 존재가 있어 끝없이 윤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굳이 얘기하자면 무아의 윤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하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찰나와 상속으로 다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존재는 한 찰나에 일어났다 사라지는데, 바로 그 다음 찰나에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상속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는 고정불변한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찰나 찰나의 흐름을 윤회라고 할 수 있다. 오온의 찰나 생 찰나 멸의 흐름을 윤회라고 초기불교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문: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 하고 과학은 진화했다고 한다. 불교는 어떻게 보나?
각묵 스님: 초기불교에서는 무시무종으로 설명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범망경에서 보면 전생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깊은 삼매에서 어느 시점까지만 보지 그 이전은 알 수 없다. 중생은 무시무종이지만 아라한은 금생에서 멸하게 되면 끝이 있다.

문: 초기불교와 조계종의 선불교는 깨달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각묵 스님: 저는 견성성불을 무아선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책이 어떻게 존재하느냐? 책됨이 있기 때문이다. 이 됨을 우리는 성이라고 이해한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면 견성성불의 성을 무상 고 무아의 근본 성질을 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문: 초기불교에서는 아미타경의 입장을 어떻게 보나?
각묵 스님: 정토삼경에 나오는 정토, 극락세계를 초기불교에서도 설명해낼 수 있다고 본다. 초기경에는 천상세계를 많이 얘기한다. 욕계천상은 공덕을 지어 태어나는 곳이다. 그 위를 색계천상이라고 하는데 공덕과 계율만으로 태어나는 곳이 아니라 삼매를 닦아야 한다. 정거천은 삼매를 닦고 불한과를 얻은 성자들이 태어나는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북방에서 말하는 극락세계는 바로 이 정거천, 넓게 보면 색계천상까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 대승불교에서는 자성불성이 공이고 연기라고 설명하는데, 스님은 자성불성을 무상 고 무아라고 설명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각묵 스님: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다. 대승의 흐름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중 불성을 말하는 것은 여래장 계열이다. 유식에도 불성의 개념 나타나지 않는다. 여래장 중 대표적인 것이 화엄경 능엄경 능가경 등인데 여기서 불성을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기불교 아비담마 유식은 법의 체계이고, 여래장은 믿음의 체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래장은 믿음을 중시한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근원적인 믿음을 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일심 여래장 등을 말한 것인데, 이를 실체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무아와 연기로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본인의 마음이다.

문: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고 있다. 팔정도의 길을 강조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각묵 스님: 바른 견해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 바른 견해다. 바른 생각은 대표적으로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고자 하는 사유를 들고 있다. 바른 말은 망어 기어 등을 하지 않는 것이고, 바른 행위는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바른 생계수단은 세상에 해가 되는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이다. 간화선은 팔정도 중 정명 즉 바른 마음 챙김에 해당하는 것이다. 화두를 든다고 바른 견해, 바른 사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듯 각자 수행을 하면서도 팔정도를 실천해야 한다.

문: 불교의 대중화를 말하셨다. 교학의 대중화도 중요하겠지만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각묵 스님: 결론적으로는 아직 저도 고민 중이다. 불교 안에서조차 깨달음 해탈에 대해 이야기를 못 하고 있다. 불교 안에서부터 이를 명확히 이해하고 사유한 후 전 국민에게 확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 어떻게 깨달을 것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해체해서 보자는 것이다. 해체해서 보면 무상 무아가 보이고 이를 통해 깨달음이 실현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도법 스님: 이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머릿속에 만들어진 수행, 깨달음의 상, 부처님의 상을 알아야 한다. 이를 들여다보면 굉장히 신비화, 과장되어 있다. 신비화되어진 깨달음, 수행이 있다고 전제하고 접근한다면 갈등과 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테레사수녀는 약자를 위해 인생 전부를 바쳐 헌신했다. 그러나 그분이 쓴 글을 보면 자신의 삶이 늘 암흑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둘로 나눠보면 하나는 어딘가 거룩한 존재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자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그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깨달음의 문제는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2020/10/16

불선근 三不善根- 위키백과, Three poisons, 三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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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선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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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의 6도윤회도(六道輪廻圖, bhavacakra):
  • 제1층, 즉 가운데의 축은 불선근 즉 3독을 나타낸다.
  • 제2층은 을 나타낸다.
  • 제3층은 6도를 나타낸다.
  • 제4층은 12연기를 나타낸다.
  • 윤회의 수레바퀴를 꽉 붙들고 있는 괴물은 실체가 없는 것, 즉 무상···무아인 것에 대한 집착, 즉 근본무명을 나타낸다.
  • 윤회의 수레바퀴 왼쪽 위에 있는 은 6도윤회로부터 벗어난 상태, 즉 열반, 즉 깨달음을 나타낸다.
  • 을 가리키고 있는 붓다는 6도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불선근(不善根)은 3계 중 욕계의 (貪) · (瞋) · (癡)의 3가지 번뇌 또는 번뇌성의 마음작용(심소법)을 말한다.[1] 불선근을 3불선근(三不善根)이라고도 한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욕전탐(欲纏貪: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탐, 욕계에 속한 탐, 욕계의 탐)과 (瞋: 진 즉 유정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작용은 오직 욕계에만 있음[2][3][4])과 욕전무명(欲纏無明: 3계 가운데 욕계에 매인 무명, 욕계에 속한 무명, 욕계의 무명)을 3불선근(三不善根)이라 하며, 각각을 
탐불선근(貪不善根) · 
진불선근(瞋不善根) · 
치불선근(癡不善根)이라 부른다.[5][6] 
즉 탐불선근은 3계의 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욕계의 만을 가리키며, 진불선근의 경우 은 욕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에[4] 진불선근은  그 자체를 가리키며, 치불선근은 3계의 무명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욕계의 무명만을 가리킨다.
또한, 불선근(不善根)은 3독(三毒), 3화(三火) 또는 3구(三垢)라고도 한다. 그리고  ·  · 를 탐욕(貪欲) · 진에(瞋恚) · 우치(愚癡)라고도 하며, (淫) · (怒) · (癡)라고도 하며, 또는 (欲) · (瞋) ·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1][7][8]

성유식론》에 따르면, 불선근을 끊기 위해서는 공통 대치법(對治法)과 개별 대치법을 둘 다 사용해야 하는데, 공통 대치법이란 오직 선혜(善慧), 즉 (善)의 상태의 (慧, 지혜)로써  ·  ·  모두를 대치(對治)하는 것을 말하고, 개별 대치법이란 에 대해서는 무탐(無貪)으로써, 에 대해서는 무진(無瞋)으로써, 에 대해서는 무치(無癡)로써 대치한다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貪)을 끊기 위해서는 선혜와 무탐의 2가지 마음작용으로 대치해야 하며, (瞋)을 끊기 위해서는 선혜와 무진의 2가지 마음작용으로 대치해야 하며, (癡)를 끊기 위해서는 선혜와 무치의 2가지 마음작용으로 대치해야 한다는 것이다.[9][10]

3불선근[편집]

(貪) · (瞋) · (癡)의 3가지 마음작용은 모든 불선(不善), 즉 (惡)을 생기게 하고 북돋우는 근본이 되므로 '불선(不善)의 뿌리[根]'라는 뜻에서 불선근(不善根)이라고 한다.[1] 또한, (貪) · (瞋) · (癡)의 마음작용은 6식(六識: 8식 중 전5근과 제6의식)과 상응하고, 분류시 번뇌에 포함되며, (惡)을 일으키는 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불선근(不善根)이라고 한다.[9][10]

3독[편집]

불교에서는 번뇌는 중생으로 하여금 '출세간의 선의 마음[出世善心]'을 내는 것을 방해한다는 뜻에서 번뇌를 이라고도 하는데, (貪) · (瞋) · (癡)의 3가지 마음작용은 이러한 작용이 가장 심하기 때문에 3독(三毒)이라고도 한다.[7][11]
또한 윤회가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오랜 기간 동안 계속하여 '(苦)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태, 즉 3계에 속박된 상태'로 중생을 묶어 놓고 있으며 이 속박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3독(三毒)이라고도 한다.[7][11]
此三毒。通攝三界一切煩惱。一切煩惱。能害眾生。其猶毒蛇。亦如毒龍。是故就喻說名為毒。名義如是。


이 3독(三毒)은 3계(三界)의 모든 번뇌를 통섭한다. 그리고 모든 번뇌는 능히 중생을 해치는데, 그 해치는 것이 마치 독사(毒蛇)와 같으며 또한 독룡(毒龍)과 같다. 이러한 이유로 비유로써 독(毒)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3독의 명칭의 뜻은 이와 같다.
— 《대승의장(大乘義章)》, 제5권. 한문본

3화[편집]

3불선근 또는 3독, 즉 (貪) · (瞋) · (癡)의 3가지 마음작용은 건물에 불이 나면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善)을 무너지게 한다는 뜻에서 3화(三火: 문자 그대로는 '3가지 불')라고도 한다.[7][8]

3구[편집]

또한, 3불선근 또는 3독, 즉 (貪) · (瞋) · (癡)의 3가지 마음작용은 중생의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을 능히 더럽히는 3가지  또는 더러움이라는 뜻에서 3구(三垢)라고도 한다.[7][8]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곽철환 (2003).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 네이버 지식백과.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K.955, T.1558). 《아비달마구사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955(27-453), T.1558(29-1).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세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618, T.1612). 《대승오온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618(17-637), T.1612(31-848).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운허. 동국역경원 편집, 편집. 《불교 사전》.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K.614, T.1585). 《성유식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614(17-510), T.1585(31-1).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星雲. 《佛光大辭典(불광대사전)》 3판.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세친 조, 현장 한역 (T.1558).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대정신수대장경. T29, No. 1558, CBETA.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세친 조, 현장 한역 (T.1612).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612, CBETA.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중국어)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T.1585). 《성유식론(成唯識論)》. 대정신수대장경. T31, No. 1585, CBETA. |title=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각주[편집]

  1. ↑ 이동:   星雲, "不善根". 2012년 10월 24일에 확인
    "不善根:  梵語 akuśala-mūla。三界諸煩惱之中,欲界五部有三種不善之根,即貪不善根、瞋不善根、癡不善根。此三煩惱,其性唯不善,能生起、資養一切不善之法,故稱不善根。據大毘婆沙論卷一一二載,三煩惱具有五義,故獨立為不善根。五義即:(一)通於五部,(二)遍在六識,(三)是隨眠性,(四)能起粗惡之身業、語業,(五)作斷善根牢強加行。〔增一阿含經卷十三、俱舍論卷十六、大毘婆沙論卷四十七、入阿毘達磨論卷上、順正理論卷四十一〕"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295DTITLEA4A3B5BDAEDA 不善根]". 2012년 10월 24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295DTITLEA4A3B5BDAEDA 不善根]". 2012년 10월 24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2.  세친 조, 현장 한역 T.1612, p. T31n1612_p0849a07. 진(瞋)
    "云何為瞋。謂於有情樂作損害為性。"
  3.  세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618, T.1612, p. 4 / 24. 진(瞋)
    "어떤 것이 진(瞋)인가. 이를테면 유정(有情)들에게 손해 끼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다."
  4. ↑ 이동:  星雲, "". 2013년 2월 14일에 확인
    "瞋: 梵語 pratigha 或 dvesa,巴利語 patigha 或 dosa 。又作瞋恚、瞋怒、恚、怒。音譯作醍鞞沙。心所(心的作用)之名。為三毒之一。係指對有情(生存之物)怨恨之精神作用。於俱舍宗屬不定地法之一,於唯識宗屬煩惱法之一。據俱舍論卷十六、成唯識論卷六所載,對違背己情之有情生起憎恚,使身心熱惱,不得平安之精神作用,名為瞋。又忿、恨、惱、嫉、害等隨煩惱,皆以瞋之部分為體,是為六根本煩惱(或十隨眠)之一。以其不屬推察尋求之性質(見),作用遲鈍,故為五鈍使之一。與貪、癡兩者,共稱為三毒(三不善根)。亦屬五蓋、十惡之一。
     瞋唯屬欲界所繫之煩惱,於色界、無色界則無。貪乃從喜愛之對境所起,反之,瞋則從違逆(不順心)之對境所起。瞋,為修學佛道上最大之障害,經論中常誡之,如大智度論卷十四(大二五‧一六七中):「瞋恚其咎最深,三毒之中,無重此者;九十八使中,此為最堅;諸心病中,第一難治。」「無瞋」即對境不起害心,為對治瞋之精神作用,屬俱舍宗十大善地法之一、唯識宗善心所之一,與無貪、無癡共稱三善根,又為四無量心中之慈無量心之體。〔雜阿含經卷二十七、卷二十八、悲華經卷六、大毘婆沙論卷二十七、卷三十四、卷四十四、卷四十八、顯揚聖教論卷一、順正理論卷四十、阿毘達磨藏顯宗論卷二十五、俱舍論光記卷十六、成唯識論述記卷六末〕"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1078DTITLEBDQ 瞋]". 2013년 2월 14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5.  세친 조, 현장 한역 T.1612, p. T31n1612_p0849a20 - T31n1612_p0849a22. 3불선근(三不善根)
    "復二種。所謂俱生分別所起。又欲纏貪瞋及欲纏無明。名三不善根。謂貪不善根。瞋不善根。癡不善根。"
  6.  세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618, T.1612, p. 5 / 12. 3불선근(三不善根)
    "또 욕계에 매인 탐과 진, 그리고 욕계에 매인 무명을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이라고 하니, 탐(貪)불선근과 진(瞋)불선근과 치(癡)불선근을 말한다."
  7. ↑ 이동:     星雲, "三毒".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
    "三毒: 指貪欲、瞋恚、愚癡(又稱貪瞋癡、淫怒癡、欲瞋無明)三種煩惱。又作三火、三垢。一切煩惱本通稱為毒,然此三種煩惱通攝三界,係毒害眾生出世善心中之最甚者,能令有情長劫受苦而不得出離,故特稱三毒。此三毒又為身、口、意等三惡行之根源,故亦稱三不善根,為根本煩惱之首。"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171DTITLEA4TACr 三毒]".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171DTITLEA4TACr 三毒]".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星雲"[httpetextfgsorgtwetext6search-1-detailaspDINDEX2171DTITLEA4TACr 三毒]".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8. ↑ 이동:   星雲, "三垢". 2012년 10월 28일에 확인.
  9. ↑ 이동: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T.1585, 제6권. p. T31n1585_p0030a21 - T31n1585_p0030a23. 불선근(不善根). 인용 오류: 잘못된 <ref>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T.1585제6권. p. [httpwwwcbetaorgcgi-bingotopllineheadT31n1585_p0030a21 T31n1585_p0030a21 - T31n1585_p0030a23]. 불선근(不善根)"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10. ↑ 이동:  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 K.614, T.1585, 제6권. p. 291 / 583. 불선근(不善根).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FOOTNOTE호법 등 지음, 현장 한역, 김묘주 번역K.614, T.1585제6권. p. [httpebtidonggukackrh_tripitakapagePageViewaspbookNum897startNum291 291 / 583]. 불선근(不善根)"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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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poi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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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ree poisons are represented in the center of the wheel of life as a pig, a bird, and a snake.

The three poisons (Sanskrit: triviṣa; Tibetan: dug gsum) or the three unwholesome roots (Sanskrit: akuśala-mūla; Pāli: akusala-mūla), in Buddhism, refer to the three root kleshasMoha (delusion, confusion), Raga (greed, sensual attachment), and Dvesha (aversion, hate).[1][2] These three poisons are considered to be three afflictions or character flaws innate in a being, the root of Taṇhā (craving), and thus in part the cause of Dukkha (suffering, pain, unsatisfactoriness) and rebirths.[1][3]

The three poisons are symbolically drawn at the center of Buddhist Bhavachakra artwork, with rooster, snake and pig, representing greed, ill will and delusion respectively.[4][5]

Brief description[edit]

In the Buddhist teachings, the three poisons (of ignorance, attachment, and aversion) are the primary causes that keep sentient beings trapped in samsara. These three poisons are said to be the root of all of the other kleshas.[6][7] The three poisons are represented in the hub of the wheel of life as a pig, a bird, and a snake (representing ignorance, attachment, and aversion, respectively). As shown in the wheel of life (Sanskrit: bhavacakra), the three poisons lead to the creation of karma, which leads to rebirth in the six realms of samsara.[1][8][9]

Opposite wholesome qualities[edit]

The three wholesome mental factors that are identified as the opposites of the three poisons are:[10][11]

Buddhist path considers these essential for liberation.[10]

Sanskrit/Pali/Tibetan terms and translations[edit]

The three kleshas of ignorance, attachment and aversion are referred to as the three poisons (Skt. triviṣa; Tibetan: dug gsum) in the Mahayana tradition and as the three unwholesome roots (Pāli, akusala-mūla; Skt. akuśala-mūla ) in the Theravada tradition.

The Sanskrit, Pali, and Tibetan terms for each of the three poisons are as follows:

PoisonSanskrit[12][13]PaliTibetan[12][14]Alternate English translations[12]Skt./Pali/Tib. Synonym[15]
Delusionmohamohagti mugconfusion, bewildermentavidyā (Skt.); avijjā (Pāli); ma rigpa (Tib.)
Attachmentrāgalobha'dod chagsdesire, sensuality, greedn/a
Aversiondveṣadosazhe sdanganger, hatred, hostilityn/a

In the Mahayana tradition moha is identified as a subcategory of avidya. Whereas avidya is defined as a fundamental ignorance, moha is defined as delusion, confusion and incorrect beliefs. In the Theravada tradition, moha and avidya are equivalent terms, but they are used in different contexts; moha is used when referring to mental factors, and avidya is used when referring to the twelve links.[1]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Jump up to:a b c d Robert E. Buswell Jr.; Donald S. Lopez Jr. (2013). The Princeton Dictionary of Buddhism.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546, 59, 68. ISBN 978-1-4008-4805-8.
  2. ^ Damien Keown (2004). A Dictionary of Buddhism. Oxford University Press. pp. 8, 47, 89, 106, 143. ISBN 978-0-19-157917-2.
  3. ^ David Webster (2005). The Philosophy of Desire in the Buddhist Pali Canon. Routledge. pp. 100–105, 177, 236. ISBN 978-0-415-34652-8.
  4. ^ David Loy (2003). The Great Awakening: A Buddhist Social Theory. Simon and Schuster. p. 28. ISBN 978-0-86171-366-0.
  5. ^ Guido Freddi (2019). "Bhavacakra and Mindfulness".
  6. ^ Daniel Goleman (2003), pages 106, 111
  7. ^ Khenchen Konchog Gyaltshen (2010), p. 451.
  8. ^ David Webster (2005). The Philosophy of Desire in the Buddhist Pali Canon. Routledge. pp. 100–105, 177, 236. ISBN 978-0-415-34652-8.
  9. ^ Dalai Lama (1992), p. 4, 42
  10. Jump up to:a b Gethin 1998, p. 81.
  11. ^ Steven M. Emmanuel (2015). A Companion to Buddhist Philosophy. John Wiley & Sons. pp. 435–436. ISBN 978-1-119-14466-3.
  12. Jump up to:a b c Padmakara (1998), p. 336, 414. (from the glossary)
  13. ^ Damien Keown. "akuśala-mūla." A Dictionary of Buddhism. 2004. Encyclopedia.com. (May 29, 2011). http://www.encyclopedia.com/doc/1O108-akualamla.html
  14. ^ Ranjung Yeshe Wiki - Dharma Dictionary. http://rywiki.tsadra.org/index.php/dug_gsum
  15. ^ Damien Keown. "moha." A Dictionary of Buddhism. 2004. Encyclopedia.com. (May 30, 2011). http://www.encyclopedia.com/doc/1O108-moha.html

Sources[edit]

Further reading[edit]

External link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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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毒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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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物に擬せられた三毒(画像中央)。鶏は貪、蛇は瞋、豚は癡の象徴である。

三毒(さんどく)とは、仏教において克服すべきものとされる最も根本的な三つの煩悩、すなわち(とん・じん・ち)を指し、煩悩を毒に例えたものである。

三毒は人間の諸悪・苦しみの根源とされている。ブッダの説いた根本仏教、大乗仏教を通じて広く知られている概念である。例えば、最古の経典と推定される南伝パーリ語のスッタニパータに、を克服すべきことが述べられている[1]。更に中部経典(マッジマ・ニカーヤ majjhima nikāya)においては「三不善根」(skt:akuśala-mūla, pali:akusala-mūla)として記され、3つがまとめて論じられている。三毒(三不善根)は悪の根源であり、それが展開されて十悪となる。

三毒を構成する煩悩[編集]

三毒読み方サンスクリット語パーリ語意味象徴する動物
とんrāga, ラーガlobha, ローパ貪欲(とんよく)ともいう。むさぼり(必要以上に)求める心。一般的な用語では「欲」・「ものおしみ」・「むさぼり」と表現する。
しんdveṣa, ドヴェーシャdosa, ドーサ瞋恚(しんに[注 1])ともいう。怒りの心。「いかり」・「にくしみ」と表現する。
, 痴moha, モーハmoha, モーハ愚癡(ぐち)ともいう。真理に対する無知の心。「おろかさ」と表現する。 [2]

三毒を懺悔する経文として懺悔偈があり、真言宗・禅宗などでは読経の前に、浄土宗では読経の中で必ず唱えることになっている。

大乗仏教[編集]

大乗仏教でも妙法蓮華経譬喩品第三の、いわゆる「三車火宅のたとえ」に「ブッダは、衆生の生老病死、憂い、悲しみ、苦悩、無知、混乱や三毒から解放する為に三界に姿を現したのだ」と説かれ、三毒などの煩悩を家についた火に喩えている他、般若経華厳経にも記載がある。

存覚が「貪欲を生じ瞋恚(怒り)をおこすことも、そのみなもとをいえば、みな愚痴(愚かさ)よりいでたり」と述べるように、三毒の根源は(愚かさ)であるとされる。

なお、別に三惑ともいうが、後世の天台宗学における三惑(無明惑・見思惑・塵沙惑)を指して呼称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現在は三毒と呼称するのが常となっている。

大乗義章』五に「三毒通じて三界の一切煩悩を摂し、一切煩悩はく衆生を毒すること、それ毒蛇の如く、また毒龍の如し(三毒は三界の一切の煩悩を包んでいる。一切の煩悩が人々を毒するのは、毒ヘビや毒龍のようなものだ)」とある。また『法界次第初門』巻上には「毒は毒を以て義とす。(中略)出世の善心を壊すを以ての故に(三毒の毒とは鴆毒すなわち毒薬の意味である。解脱しようとする善の心を壊してしまうからだ)」とある。

三毒の誤解[編集]

俗に、「妬む、怒る、愚痴る」を「仏教の三毒」として紹介することがあるが、そのような用例は仏典にはなく、誤りである。これらも仏教では煩悩として克服すべきものだと考えられているが、この三つは大局的にはに包摂される煩悩である。また、は日本語での「愚痴をこぼす」ということではなく、もっと根源的な人間の「愚かさ」を表す概念である。チベット密教では「嫉妬」(妬み)は「無明」と「悪見」の二つを併せたものとされる

대승 불교 [편집] 대승 불교에서도 묘법 연화경 비름 제품 셋째, 이른바 '세 자동차 굳게 비유」에 「붓다는 중생의 생로병사, 근심, 슬픔, 고통, 무지, 혼란과 세 독에서 해방하기 위해 에 삼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 説か되어 세 독 등의 번뇌를 집에 붙은 불에 비유하고있는 다른 반야경 · 화엄경에도 기재가있다.存覚이 "욕심을 발생 瞋恚 (분노)를 일으키기도 그 근원을 말하면 다 푸념 (어리 석음)보다 말아하거나"고 언급 한대로, 세 독의 근원은 癡 (어리 석음)이라고되어 한다. 또한, 별도로 三惑이라고도하지만 후세의 천태종 학 세 혹 (무명 혹 ·보고 기대 · 塵沙惑)을 가리키는 호칭하게 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세 독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일과가 있다. "대승 義章"다섯에 ​​"불 선근 통해 삼계의 일체 번뇌를 토시 일체 번뇌는 기능 (잘) 구 중생을 독살, 그것은 독사 같이, 또한 독 드래곤 如し (이상득은 삼계의 일체 번뇌를 감싸고있다. 일체의 번뇌가 사람들을 독살은 독사와 독 도마뱀의 일종이다) "라고한다. 또한 「법계대로 初門 "권상은"독은 鴆毒로써의와 있습니다. (중략) 출세의 선심을 끊는로써에 비추어 (세 독의 독은 鴆毒 즉 독약의 의미이다. 해탈하려고 한 선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버리기 때문이다) "라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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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독의 오해 편집 

속칭 "시기하는 분노, 푸념」을 「불교의 세 독 '으로 소개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용례는 불전 아니라 잘못이다. 이들도 불교에서 번뇌로 극복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이 세가지 대국으로 瞋에 포섭되는 번뇌이다. 또한 癡는 일본어로 '푸념'라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 인 인간의 '어리 석음'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티베트 밀교에서는 "질투"(질투)은 '무명'과 '부정 견」의 두 가지를 합친 것으로된다.




脚注[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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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釈[編集]

  1. ^ 一般の発音は「しんい」であるが、連声で「しんに」と発音することが多い。

出典[編集]

  1. ^ パーリ仏典スッタニパータ, 1.蛇の章, 10-13, Sri Lanka Tripitaka Project
  2. ^ 第一回高野山大学ラマ教文化調査団報告書 (PDF)”. 高野山大学. p. 21 (1977年). 2017年8月17日閲覧。

関連項目[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