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공 空.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공 空. Show all posts

2022/06/30

알라딘: 의미의 깊이 - 동양 사상으로 본 언어, 언어 철학 이즈쓰 도시히코

알라딘: 의미의 깊이 - 동양 사상으로 본 언어, 언어 철학 
이즈쓰 도시히코
(지은이),이종철 (옮긴이)민음사2004-04-25
원제 : Meaning Language (1985년)






정가
14,000원


책소개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이슬람 철학과 동양 철학 분야의 석학, 언어학자 이즈쓰 도시히코(井筒俊彦)의 저서. 
일반 언어학의 표층주의를 비판하며 '심층 의미론' 을 주장한다. 
이 책에는 철학과 종교 텍스트를 언어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여덟 개의 글이 실렸다. 
  1. 유식(唯識), 
  2. 화엄 철학, 
  3. 자크 데리다의 에르리튀르론, 
  4. 이슬람 시아파의 순교정신, 
  5.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 
  6. 흥법 대사의 구카이(空海)사상, 
  7. 장자의 혼동 사상 
속에서 
의미의 심층을 찾아낸다.

=======
목차


1부
1. 인간 존재의 현대적 상황과 동양 철학
2. 문화와 언어 아라야식 - 이문화 간 대화의 가능성에 대해

2부
3. 데리다 속의 유대인
4. 쓰기 - 데리다의 에크리튀르론에 대해

3부
5. 시아파 이슬람 - 시아적 순교자 의식의 유래와 그 연극성
6. 수피즘과 언어 철학
7. 의미 분절 이론과 구카이 - 진언 밀교의 언어 철학적 가능성
8. 혼돈 - 무와 유 사이

지은이 후기 - 동양 철학에서 언어의 문제
옮긴이 후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즈쓰 도시히코 (井筒俊彦)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14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게이오대학에서 니시와키 준자부로를 사사했고, 언어학자로서 출발해 그리스 신비사상사, 러시아 문학 등을 강의하는 한편, 『아라비아 사상사』, 『신비철학』, 『아라비아어 입문』 등 초기 대표작을 간행했다. 1949년부터 시작된 연속 강의 「언어학 개론」을 바탕으로 1956년 『언어와 주술』(영문 저작)을 발표했고, 이 책 덕분에 로만 야콥슨의 추천을 받아 록펠러재단 펠로로서 1959년부터 중근동, 구미에서 연구 생활을 하였다. 1959년 코란의 윤리적 용어 구조를 밝힌 『의미의 구조』(영문)를 발행했다. 1960년대부터 맥길대학과 이란 왕립철학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연구와 강연, 집필 활동에 종사했으며, 『코란에서의 신과 인간』, 『이슬람 신학에서의 믿음의 구조』, 『수피즘과 노장사상』 등 영문 저작을 정력적으로 발표했다. 1967~82년에 거의 매년 스위스 에라노스 회의에서 노장사상과 선 · 유교 등 동양철학에 대해 강연했으며, 일본에 귀국한 뒤로 해외에서 오랫동안 연구한 성과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철학을 일본어로 저술하기로 결심하고 『의식과 본질』, 『의미의 깊이』, 『코스모스와 안티코스모스』, 『초월의 언어』 등 대표작을 발표했다. 1993년 자택에서 서거했다. 접기

최근작 : <이슬람 문화>,<의식과 본질>,<이슬람> … 총 49종 (모두보기)

이종철 (옮긴이)

한국학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철학(불교철학) 전공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인도철학·불교학으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불교사상과 인도 불교사상의 비교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The Tibetan Text of the Vy?khy?yukti of Vasubandhu-Critically edited from the Cone, Derge, Narthang and Peking editions-(Tokyo, 2001), 『世親思想の硏究-釋軌論(Vy?khy?yukti)を中心として-』(Tokyo, 2001), 『중국불경의 탄생』(2008), 『구사론 계품·근품·파아품-신도 영혼도 없는 삶』(2015), 『몽어노걸대 연구』(공저, 2018), 『金剛經 多言語板本』(2018)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圓測 『解深密經疏』 <無自性相品>>,<圓測 『解深密經疏』 <地波羅蜜多品>>,<원측 해심밀경소 분별유가품 - 한장교감 표점 교정본> … 총 15종 (모두보기)

2022/06/29

깨달음의 교학적 의미 / 김성철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깨달음의 교학적 의미 / 김성철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깨달음의 교학적 의미 / 김성철
기자명 김성철
입력 2008.12.07


1. 들어가는 말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在家者든 出家者든 깨달음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신행생활을 한다. 그런데 막상 ‘무엇이 깨달음이냐?’고 물을 경우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과거 러시아의 大 불교학자 Stcherbatsky조차, ‘불교라는 종교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또 그 철학이 무엇인지 여전히 오리무중에 있다’고 토로할 정도였으니, 일반 불자들이 느끼는 혼란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재 전 세계 불교권은 남방상좌부의 소승불교권(Hīnayāna)과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권(Mahāyāna), 그리고 티베트의 금강승불교권(Vajrayāna)으로 삼분된다. 인도불교의 전파시기에 의거하여 이 세 지역의 불교권을 비교하면, 소승불교권의 경우 서력 기원 전의 인도불교가 전파되었고, 대승불교권에는 서력 기원 후부터 8세기까지 대승활동기의 인도불교가 전파되었으며, 금강승불교권에는 8세기 이후 13세기까지 금강승 전성기의 인도불교가 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 소승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고, 대승과 금강승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권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 불자들 대부분은 선불교에 의거해 신행생활을 해 왔다. 그런데 선불교가 불교인 이상, 그 궁극적 목표 역시 불교적이어야 할 것이다. 대승을 능가하는 최상승이라고 자부하는 선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소승과 대승과 금강승의 교학에 비추어 볼 경우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알게 된 禪僧의 정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 아라한인가, 아니면 부처인가? 아니면 제3의 누구인가? 앞으로 최상승인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 역시 교학적 견지에서 명확히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연구의 기초자료로 삼기 위해, 소승과 대승, 그리고 금강승의 교학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의미를 비교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2. 소승의 깨달음

소승불교의 수행자는 아라한을 지향한다. 아라한이란 모든 번뇌가 소진되어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게 된 최고의 성자를 말한다. 아라한果를 얻은 수행자는 일률적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의 삶은 이미 다했으며 청정한 행은 이미 세웠노라. 할 일을 다 했으니 내생에 다시 삶을 받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아노라.

戒行을 어기지 않고 살며,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가 소진된 아라한은 결코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계행이 완성될 경우 三界 중 欲界의 정상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계행만으로 아라한과를 얻을 수는 없다. 계행과 함께 좌선이 겸수되어야 한다. 계행을 갖춘 수행자의 마음은 좌선을 통해 욕계를 초월하여 色界의 初禪, 2禪, 3禪, 4禪의 상태로 향상하게 된다.

그리고 제4선의 상태에서 연기의 지혜를 추구할 때, 비로소 아라한과가 열려 有餘依涅槃에 들게 되며,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오는 無餘依涅槃 역시 제4선에서 이루어진다. 색계 제4선에 윤회로부터의 탈출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계정혜 삼학이라고 부른다.

수행자는 지계행 이후에 선정을 닦고 선정 이후에 지혜를 닦아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혜학의 단계는 철정한 계행과 제4선의 선정력에 의해 뒤받침되고 있다. 제4선의 경지에서 계, 정, 혜 3학이 竝修될 때 모든 번뇌가 정화되어 깨달음을 얻는다. 그 결과 아라한은 자신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自知不受後有).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혹이 생길 수 있다. 불전에서는 ‘如來는 死後에 존재하는가, 아닌가?’라는 문제가 無記答으로 처리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의 사후에 대해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는 반면, 깨달은 자인 아라한은 ‘내생의 삶을 받지 않는다’(不受後有)고 선언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잡아함경󰡕에서는 焰摩迦(Yamaka) 비구의 일화를 통해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염마가라는 이름의 비구가 ‘번뇌가 모두 사라진 아라한은 열반한 이후 존재하지 않는다(漏盡阿羅漢身壞命終更無所有)’고 주장하자 많은 비구들이 염마가를 ‘惡邪見의 비구’라고 말하며 이를 사리불에게 이른다. 그 때 사리불은 염마가를 별도로 부른 후 비유를 들어 타이르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재산이 많은 한 장자가 하인을 구하는데, 장자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 하인으로 가장하고 들어와 온 정성을 기울여 일을 하여 장자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래서 하인을 좋아하게 된 주인이 방심하게 되자, 하인은 장자를 칼로 찌르고 달아난다. 장자가 하인의 정성이 거짓임을 알 경우에는 결코 방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윤회하는 세속의 진상에 무지하여 세속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세속이 마치 원한을 가진 하인과 같이 자신을 해치는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럴 경우 세속에 대해 집착하지 않게 되어 스스로 열반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부자를 속인 하인은 윤회의 세계인 세속을 비유한 것이고, 부자는 어리석은 비구승들을 비유한 것이다. 삶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어리석은 비구승이나 일반인들은 세속적 삶이 자신을 해치는 것인 줄 모른다. 마치 부자가 지극 정성의 하인으로 가장한 사람이 사실은 자신을 해치는 자객으로 돌변할 것을 모르듯이 …. 부자에게 그 하인의 음모를 알려 주어도 부자는 이를 곧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하인이 당장 자신에게 큰 행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인 부자가 방심한 틈을 타서 하인으로 가장한 자객은 부자를 해치게 된다.

우리의 삶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지금 이곳은 행복한 곳으로 착각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이곳은 무상한 윤회의 세계일 뿐이며, 윤회의 세계에서 그나마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바다 밑을 헤엄치던 눈 먼 거북이가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얼굴을 내밀다가 우연히 그 곳에 떠 있던 널빤지의 구멍에 목이 끼게 되는 정도의 확률’을 갖는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지금 전 인류의 대부분은 내생에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축생 이하의 세계에 태어나게 된다. 우리가 다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은 수만 년, 수억 년 후의 일이다. 그 때까지 우리 대부분은 축생이나, 아귀, 지옥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윤회의 진상, 윤회의 고통을 정확히 자각할 경우,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임을 자각하게 된다.

열반 후 어딘가에 존재하든 않든 문제가 안 된다. 다시는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가득하다. 이런 자각이 든 자에게 ‘無로서의 열반’은 행복으로 다가오지만, 아직 세속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열반 후 사라진다는 말을 들을 경우 공포심을 느끼게 된다.

염마가(Yamaka)의 주장을 비판했던 비구들 역시 세속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여래나 아라한이 死後 어딘가 있는지(有), 아니면 아예 사라지는지(無) 여부에 대해 물을 경우, 세속에 대해 집착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無)로 답할 것이 아니라, 먼저 세속의 고통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세속의 진상인 無常, 苦, 空, 無我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라한 死後의 無’는 공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로서의 열반은 고성제를 자각하지 못한 세속인들에게 더 큰 괴로움과 절망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무상, 고, 공, 무아의 苦聖諦를 徹見한 사람에게 ‘아라한 사후의 無’는 평화와 安穩으로 다가온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라한 死後의 無’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소승 아라한을 지향할 경우 세속이 모두 고통임을 철저히 체득하는 수행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희구하며 진심으로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소승불교에서 추구하는 아라한이 될 경우 우리는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를 위해 수행자는 탐욕(貪), 분노(瞋), 어리석음(癡), 교만한 마음(慢), 불교에 대한 의심(疑), 자신의 몸이 있다는 생각(有身見), 인생에 끝이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邊執見), 이런 생각들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는 것(見取見), 잘못된 종교의식을 옳다고 보는 생각(戒禁取見), 인과에 대한 부정(邪見)등의 번뇌들을 하나하나 끊어야 한다. 이와 같은 번뇌가 남아 있는 한 내생에 그 번뇌가 초래하는 삶을 다시 받게 되기 때문이다.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모든 번뇌가 사라진 위대한 성자, 즉 아라한에게만 가능한 축복이다.

3. 대승의 깨달음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성불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불은 무엇일까? 소승에서 말하는 아라한이 된다는 것과 부처가 된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아라한이라는 호칭은 부처에게도 부여된다. 교진여 등 다섯 비구를 교화한 후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선언하셨다. 그러면 아라한과 부처는 같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것일까? 󰡔대지도론󰡕에서는 부처와 천신과 二乘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갖추고 있다. 첫째는 대공덕의 신통력이고 둘째는 모든 번뇌의 소멸된 지극히 청정한 마음이다. 천신들의 경우 복덕의 신통력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번뇌를 소멸하지 못했기에 그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 또,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통력도 역시 적다.

그리고 성문과 벽지불은 비록 번뇌를 소멸하여 그 마음이 청정하지만, 복덕이 약하기 때문에 그 세력 역시 적다. 부처는 두 가지를 완전히 갖추었기 때문에, 누구든 이기지만, 다른 자들은 모든 자를 이기지 못한다.

아라한은 그 마음이 청정하다는 점에서 천신과 구별되지만, 마음의 청정과 복덕의 세력이 부처에 못 미친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를 끊어 깨닫긴 했어도 전생의 習으로 인해 번뇌의 기운이 남아 있다. 사리불에게는 진에의 습기가 남아 있고, 난타에게는 음욕의 습기가 남아 있으며, 필릉가파차에게는 교만의 습기가 남아 있다고 󰡔대지도론󰡕에서는 각각의 例話를 들어 설명한다.

성문과 연각의 이승과 부처 모두 색계 제4선에서 깨달음에 든다. 그리고 깨달음에 들기까지, 초야, 중야, 후야에 걸쳐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이 차례로 열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三明의 힘에서도 아라한은 부처와 차별된다. 󰡔대지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三明은 대아라한과 벽지불도 획득한다.
문: 그렇다면 부처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답: 이들은 비록 三明을 획득했지만 그 밝기가 완전하지 못하다. 그러나 부처는 완전하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문: 어째서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인가?
답: 아라한과 벽지불들의 숙명지는 자신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완벽하지 못하다. 전생 하나만 아는 아라한도 있고, 2생, 3생, 10생, 천겁, 만겁 내지 팔만겁까지 아는 아라한도 있지만 이 이상을 넘어가게 되면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안통이 완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라한과 차별되는 부처의 복덕과 지혜는 어떻게 얻어진 것일까? 󰡔대지도론󰡕이나 󰡔성유식론󰡕 등 대승논서는 물론이고 󰡔구사론󰡕이나 󰡔아비달마대비바사론󰡕 등 소승 논서에서도 부처와 아라한을 구별하며, 부처의 복덕과 지혜는 3아승기겁의 수행을 통해 축적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승기(asaṃkhya)란 無數, 또는 無量으로 번역되며 인도에서 사용되는 숫자 단위 중 가장 큰 단위이다. 세 번의 아승기겁 각각에서의 보살행은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첫 번째 아승기겁 동안에는 자신이 부처가 될 것인지, 부처가 되지 않을 것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두 번째 아승기 동안에는 자신이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알긴 하지만, 그것을 발설하지 않는다. 세 번째 아승기 동안에는 자신이 부처가 될 것을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공연히 발설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제3 아승기겁의 보살행이 끝나면, 100겁에 걸쳐 三十二相의 과보를 초래하는 공덕을 짓게 된다. 부처가 삼십이상으로 몸을 장엄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고, 비단 지혜와 선정 등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성불을 위해 우리는, 초발심 이후 3아승기 100겁의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 이는 대소승 논서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초지 보살이 되기 이전에 제1 아승기겁의 수행을 완성하고 초지에서 제7지까지 향상하는 기간이 제2 아승기겁이며, 제7지에서 제10지까지가 제3 아승기겁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무량한 세월 동안 수행해야만 가능할 수 있는 성불을 지향하며 윤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경우, 3아승기겁의 보살행 기간 동안 수많은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며, 성불한 이후에도 그 공덕의 힘으로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과의 경우, 鈍根機는 최소 3생의 수행, 利根機는 최대 60겁의 수행만 하면 성취된다. 부처가 되든 아라한이 되든 대열반의 의미는 마찬가지다. 대열반에 든 자는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승불교에서 지향하는 성불이란 이렇게 至難한 일이며, 그 동기는 모든 생명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전생에 3아승기 100겁의 수행을 모두 마치고, 현생에 성불하는 수행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그는 태어날 때부터 三十二相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량한 세월 동안 무량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조바심 내며 기다려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불이라는 목표는 지워버린 채, 항상 깨달음을 추구하며 수행하고(상구보리), 항상 남을 도우며 살아갈 때(하화중생), 미래세에 언젠가 성불의 과보가 나타나게 된다.

다시 말해 수억 겁에 걸친 무한한 과정적 신행을 통해 귀결되는 것이 대승불교의 깨달음, 즉 성불이다. 그리고 이렇게 久遠劫 이후의 목표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이 대승불교의 보살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한다. 나는 그럴 자신이 있는가?

4. 금강승의 깨달음

밀교 또는 ‘불교 Tantrism’으로 불리는 금강승은 크게 보아 대승에 속한다. 대승과 마찬가지로 성불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과 차별되는 점은 ‘3아승기 100겁’이라는 보살행의 기간을 현생의 1생으로 단축시킨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성불의 기간을 단축하는 이유는 보다 빨리 더 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3아승기겁 동안 무량한 공덕을 쌓아야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 기간을 1생으로 단축시킬 수 있을까? 부처가 된다는 것은 부처의 몸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의 몸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는 法身과 報身과 化身의 三身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몸을 모두 성숙시켜야 한다.

법신은 空性과 無我에 대한 조망을 통해 성숙한다. 그러나 법신만 성숙시킬 경우 소승 아라한이 될 뿐이다. 그래서 금강승의 수행에서는 보신과 화신의 성숙을 목표로 삼는다. 보신은 일반적 공덕을 지음으로써 성숙한다.

그리고 금강승에서는 이렇게 ‘3아승기 100겁’ 동안 지어야 할 공덕들을 현생에 농축적으로 짓는 수행을 하게 되는데, 그 요점은 자신의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의 三業을 부처의 身口意 三業에 그대로 일치시키는 것이다. 수행의 결과인 부처의 모습이 그대로 수행 수단으로 사용된다. 대승은 보살행의 因을 통해 불과를 얻기에 因乘이라고 부르며, 금강승은 수행의 結果인 부처의 보신과 화신을 수행의 因으로 삼기 때문에 果乘이라고 불린다.

大日如來를 主尊을 삼아 觀想하며 손(身)으로는 手印(mudra)을 짓고, 입(口)으로 진언(mantra)를 암송하며, 만다라(maṇḍala)를 보며 마음(意)으로는 자신이 부처로 출현하는 모습(生起次第)을 관상하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부처의 몸으로 성숙시키기도 한다.(究竟次第). 이런 수행을 통해 우리의 육체는 급격히 化身으로 성숙하고, 우리의 영혼(= 中陰身)은 신속히 報身으로 성숙하게 된다. 금강승에서 卽身成佛을 기치로 내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Ratnakaraśanti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성에 대해서만 명상할 경우 성불은 무량겁이 걸린다. 반대로 佛尊修行(deity yoga)만 할 경우 성불은 완전치 못하다. 공성에 대한 명상과 불존에 대한 명상을 겸할 때 성불의 시기는 단축된다

여기서 말하는 불존수행(deity yoga)이란, 자신을 부처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부처의 보신으로, 또 자신의 육체를 부처의 화신으로 성숙시키는 수행이다. 그런데 이러한 금강승의 수행은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달라이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겔룩파의 경우 󰡔보리도차제론󰡕 체계에 의거해, 不淨觀과 慈悲觀이 철저히 완성되고, 止觀 수행을 통해 공성에 대한 조망을 어느 정도 갖춘 수행자에 한해 금강승을 수행할 자격을 부여한다. 금강승의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수행자는 먼저, 세속에 대한 욕심을 버리게 하는 부정관을 닦고,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키우기 위해 자비관을 닦아야 한다. 그 후 三昧力도 훈련하고 공성을 파악하는 논리적 사고도 훈련해야 한다.

금강승의 수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철저히 보살을 닮아 있어야 한다. 아직 세속적 음욕이나 재물욕, 명예욕이 남아 있고, 질투심과 분노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며, 선정력이 깊지 못하고, 공성에 대한 지혜를 갖추지 못한 자에게 금강승의 수행은 금지된다. 藥이 오히려 毒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살로서의 마음이 철저히 갖추어진 수행자는 10만 번의 오체투지를 하고, 자신이 金剛薩陀(Vajrasattva)로 된 모습을 명상하며 100자 진언을 10만 번 암송하여 업장을 정화하며, 쌀과 보석 등의 공양물들을 만달라 판 위에 올려 쌓고 허물기를 되풀이하며 기도문을 10만 번 암송한다.

그 후 금강승 수행으로 이끌어 줄 스승과 자신이 하나가 됨을 관상하며 스승에게 귀의하는 기도문을 암송하는 구루요가(guru yoga) 儀式을 치른다. 이런 모든 의식을 마쳐야 비로소 금강승, 즉 밀교 수행에 들어갈 자격이 부여된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불교의식을 치르는 것은 보살로서 살아가며 3아승기 겁에 걸쳐 지어야 할 공덕을 농축하여 현생에 짓기 위해서이다.

3아승기겁에 걸쳐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공양을 바쳐야 하는 대승 보살의 수행과 비교할 경우 10만 번의 오체투지, 10만 번의 진언암송, 10만 번의 공양기도는 그 양이 너무 적다고 하겠다. 이러한 금강승의 교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철저한 믿음이 티베트 불교인들의 자발적이고 강력한 신행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소승의 깨달음과 대승의 깨달음 그리고 금강승의 깨달음을 비교해 보았다. 소승 수행자의 경우 아라한을 지향하고, 대승과 금강승 수행자의 경우 부처를 목표로 삼는다. 금강승의 경우 3아승기겁 수행 후의 성불을 현생의 ‘즉신성불’로 단축시킨다는 점에서 대승과 차별된다.

그러나 이 삼자에 공통되는 것은 아라한이 되든 부처가 되든 내세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세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 위해서는 윤회하는 세속의 고통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自問해 보아야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에 공감하는 우리들 중 다시는 태어나지 싶지 않을 정도로 苦聖諦, 즉 一切皆苦를 깊이 자각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고 …. ‘지금 위빠싸나 등 소승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불자들 중 내생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고 ….

또,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갖춘 수행자의 마음에는 ‘나만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다시 태어나지 않게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다음과 같이 自問해 보아야 한다: ‘현재 대승 또는 금강승의 수행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중에 다른 모든 중생을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고 ….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역시 위와 같은 조망 하에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선승의 깨달음은 아라한의 깨달음인지, 부처의 깨달음인지, 아니면 제3의 무엇인지 ….


김성철
서울대 치과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초기불교에서 바라 본 마음[心], 마노[意], 알음알이[識])

Facebook  문준덕
===

초기불교에서 바라 본 마음[心], 마노[意], 알음알이[識])

각묵스님 
  · 
1. 들어가는 말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 한다. 한국의 불자들은 ‘마음 깨쳐 성불한다.’거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일체유심조).’라는 말에 익숙하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불교를 심학(心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심리학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초기불교에서는 과연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 이러한 관심에서 홍법사의 대중논강 첫 번째 주제를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으로 잡았을 것이다.
먼저 염두에 두어야할 점은 부처님 가르침은 무아(無我, anatta, 실체 없음)를 근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무아는 불교를 특징짓는 말로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반야/중관과 유식을 망라한 모든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뜨만이니 자아니 대아니 진아니 하는 무언가 변하지 않고 영원한 실체가 나라는 존재나 세계의 안에 혹은 배후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단지 개념(산냐, 相)일뿐이라 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만일 우리가 마음을 영원한 그 무엇으로 생각해버린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아를 역설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한국불교 일반에서는 마음이니 자아니 대아니 참나니 진아니 심지어는 대승불교의 여래장이나 불성 등의 가르침조차도 무언가 존재의 배후에 불생불멸로 존재하는 불변하는 실체인양 상정하고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불교라고 잘 못 이해하는 불자들이 실로 많다. 
그래서 오늘 첫 번째 홍법사 대중논강의 주제를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으로 잡았다고 발제자는 이해한다. 발제자는 이제 몇 가지 측면에서 이 주제를 소화해내고자 한다.

2. 마음의 사전적 의미

먼저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마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우리말 마음의 의미를 다음의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① 사람의 몸에 깃들여서 지식·감정·의지 등의 정신 활동을 하는 것, 
또는 그 바탕이 되는 것. 예: 마음의 양식이 되는 책. 
② 거짓 없는 생각. 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다. 
③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하여 일어나는) 기분. 느낌. 예: 홀가분한 마음. 
④ (어떤 사물이나 행동에 대하여) 속으로 꾀한 뜻. 예: 마음을 고쳐먹다. 
⑤ 심정(心情). 예: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다. 
⑥ 사랑하는 정. 예: 그에게 마음을 두다. 
⑦ 성의. 정성. 예: 마음을 다하다. (준말)맘. 
한편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마음’은 ‘정신’에 비해 훨씬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뜻으로 쓰이는 일이 많고, 그 의미 내용도 애매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육체나 물질의 상대적인 말로서 철학상의 ‘정신’ 또는 ‘이념’의 뜻으로도 쓰이는 막연한 개념이 되었다.
다음 백과서전에서는 한자 심(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래 사유기관을 가리킨다.〈맹자〉의 고자(告子) 편에서 “심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다”(心之官則思)라고 하였는데, 심은 보통 인간의 의지·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객체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 리고 백과사전들에서는 중국 철학자들의 용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 혹은 심(心)라는 용어는 참으로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되며 다양한 사람에 의해서 다양한 뜻으로 정의되고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말 마음 혹은 중국어 심만을 가지고는 불교 특히 초기불교에서 설명하는 마음을 알기가 어렵다.
이제 마음에 대한 이 정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 그것도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살펴보자.

3.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불교술어는 심(心)과 의(意)와 식(識)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문으로 옮긴 심․의․식의 범어 원어를 살펴보면, 심(心)은 citta(Sk. citta)이고, 의(意)는 mano(Sk. manas)이며, 식(識)은 viññāṇa(Sk. vijñāṇa)이다. 心으로 옮긴 citta(√cit, to think)는 초기경들에서는 주로 생각하는 그 자체를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나고, 意로 옮긴 mano(√man(to think)는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기관 혹은 기능[根, indriya]이나 감각장소[處, 入, ā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나타난다. 識으로 옮긴 viññāṇa(vi분리하여+√jñā, to know)는 여섯 감각 장소[六內處]와 여섯 대상[六外處]이 관여할 때 일어나는 6가지 알음알이[六識]로 나타나고 있다. 초기경들에서는 이렇게 심․의․식의 용처가 다르다 할 수 있다. 
여러 초기경에서는 ‘안다고 해서(vijānāti) 알음알이라한다’고 알음알이[識]를 정의하고 있으며, 다른 몇 경들에서는 “마노로 법을 안다(manasā dhammaṁ vijānāti - S.v.451)”라고도 설명하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를 종합해보면 ‘마노[意]를 통해서 법(대상)을 아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서 문헌에서는 마음(citta)을 “대상을 사량한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대상을] 안다는 뜻이다.(cittan ti ārammaṇaṁ cintetīti cittaṁ; vijānātīti attho - DhsA.63)”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동의어로 설명되고 있다.
한편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마음[心]과 마노[意]와 알음알이[識]의 셋을 같은 것이라 한결같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북방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주석서 문헌에서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완전히 동의어로 쓰인다. 그리고 마노[意]는 대상을 아는 기능[根, indriya] 혹은 장소[處, 入, āyatana]의 의미로 쓰이지만 대상을 안다는 것으로는 이 셋은 동의어로 쓰인다.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대상을 아는가? 이를 정밀하게 설명해내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아비담마의 설명을 종합하면 마음은 여러 심리현상들(心所法, cetasikā)의 도움을 받아서 마노를 통해서 대상을 안다. 마음이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심리현상들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하는데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 일어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 7가지와 때때로 일어나는 6가지와 해로운 심리현상 14가지와 유익한 심리현상 25가지의 총 52가지 심소법들을 들고 있다. 특히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곱 가지 심리현상들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7가지 마음부수들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반드시 같이 일어난다. 
첫째,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감각접촉이 같이 일어난다. 이 감각접촉(phassa, 觸)의 기능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과 맞닥뜨릴 수 없다. 
둘째, 느낌(vedanā, 受)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경험할 수 없다. 
셋째, 인식(saññā, 想)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넷째, 의도(cetanā, 意思)가 없다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작위도 행할 수가 없다. 
다섯째, 집중(ekaggatā, 心一境, 定)이 없으면 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어떤 정도의 집중이 없으면 대상을 알지 못한다. 
여섯째, 생명기능(jīvitindriya, 命根) 즉 생명이 없으면 마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곱째,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 作意) 즉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은 역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아는’ 기능뿐인 마음은 이 일곱 가지를 통해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마음이 임금이라면 일곱 가지는 최측근의 대신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일곱은 항상 마음과 같이 일어나고 마음과 같이 멸한다.

4.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 saññā, 이성적이고 지적인 초기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오온의 화합 혹은 무더기로 이해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독립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몸(물질, 色, rūpa)의 무더기(蘊, khandha)와 느낌(受, vedanā,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의 무더기와 인식(想인 측면)의 무더기와 여러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a, 오온의 문맥에서는 항상 복수로 나타나며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뜻함)의 무더기와 알음알이(識, viññāṇa, 수와 상과 행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하는 것)의 무더기가 함께 뭉쳐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薀]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인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불교는 마음(citta/viññāṇa)과 정신(名, nāma)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정신은 수온, 상온, 행온, 식온, 즉 느낌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심리현상들의 무더기, 알음알이의 무더기인데 정신 가운데서 대상을 아는(요별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우리는 알음알이[識]라하고 마음[心]이라한다. 마음(알음알이)은 느낌[受]과 인식[想]과 심리현상[行]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了別]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우리의 정신적 영역 가운데서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을 뜻할 뿐이지 마음이 우리의 정신영역 모두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초기불교는 밝히고 있다. 
이제 이처럼 심리현상들(마음부수법들)의 도움으로 마노를 통해서 대상을 아는 것으로 정의되는 마음의 중요한 성질을 초기경에 준해서 살펴보자.

5. 마음은 무상하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마음을 비롯한 제법(유위법)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초기경을 통해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니면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하고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 인식은 … 상카라[行]들은 … 알음알이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니면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여.” 
“무상하고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M26, M109)
“자 매들이여, 여기 기름 등불이 타고 있다고 칩시다. 그 기름도 심지도 불꽃도 불빛도 모두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기름과 심지와 불꽃은 무상해서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 불빛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그 기름과 심지와 불꽃이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그 불빛 또한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 와 마찬가지로 자매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을 반연하여 느끼는 즐거움, 괴로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제각기 나름대로 조건을 반연하여 그에 상응하는 느낌들이 생겨나고, 조건들이 멸하면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느낌들도 멸하기 때문입니다.” 
“장하십니다, 자매들이여. 장하십니다, 자매들이여. 이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는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M146)

6.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이다

이 처럼 마음(알음알이)을 위시한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 그래서『증지부』에서는 특히 마음의 무상성을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citta)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A.i.9)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무상을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첩경이다. 무상을 통찰할 때 우리는 고를 절감하고 실체 없음(무아)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서들에서는 한결같게 이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하였으며 각각 무상(無相)해탈, 무원(無願)해탈, 공(空)해탈이라 불렀으며『화엄경』 「정행품」등에서도 이 공․무상․무원은 거듭 강조되어 나타난다.
마음을 위시한 제법은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는 카나(khaṇa, 찰나, 순간)로 정착이 된다. 찰나의 규명은 주석서 문헌을 통해서 이루어낸 아비담마 불교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담마 불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존재를 법들의 흐름(santati, 相續)으로, 찰나의 연속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위시한 법들은 일어나고 사라짐, 그것도 찰나생․찰나멸의 문제이다. 그것은 있다․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대승에서도 많이 인용하는「가전연경」(S12:15)에서도 세상의 일어남을 보기에 없다하지 않고 세상의 소멸을 보기에 있다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으며 이런 것을 중(中)의 견해라고 하고 있다. 찰나는 초기불교의 도처에 나타나는 무상의 가르침과 법들의 일어남, 사라짐, 머문 것의 변화함이라는 가르침을 철저하게 계승한 것이다. 
수행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흐름, 변화, 무상성, 찰나를 제거해버린 수행이 다름 아닌 사마타수행 혹은 삼매수행이다. 삼매는 변하는 대상에서 변하지 않는 표상(nimitta, 니밋따, 이것은 법이 아닌 개념에 속함)을 취해서 거기에 집중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위빳사나 특히『청정도론』18장부터 22장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 위빳사나는 변화와 무상을 주시하는 수행이다. 변화와 무상을 관찰해 들어가서 찰나를 만나고 이런 찰나생․찰나멸하는 법을 내관하는 수행법이다. 제법의 찰나생․찰나멸을 직시하여 매순간 무너지고 있는 법의 무상이나 법의 고나 법의 무실체성을 직시하여 무너짐(해체)의 지혜(bhaṅga-ñāṇa)로써 ‘나’니 ‘내 것’이니 하는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제행에 대해서 평온(우뻬카, 捨)을 유지하는 지혜를 개발해서 도와 과를 증득하는 체계를 위빳사나수행이라 하고 있다. 이처럼 찰나는 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법을 통찰하는 위빳사나와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리고 주석서는 더 나아가서 이 찰나도 다시 일어나고 머물고 무너지는(uppāda-ṭṭhiti-bhaṅga) 세 아찰나(亞刹那, sub-moment)로 구성된다고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게 된다. 찰나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흐름 그자체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자가 사용한 아찰나(sub-moment)라는 술어는 서양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 주석서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아비담마에서는 아찰나란 단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아찰나라는 단위를 인정한다면 다시 아찰나를 구성하는 아아찰나(亞亞刹那)를 인정해야 하고 다시 더 짧은 단위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은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면서 존속하는 최소단위가 찰나이고 이것은 위빳사나의 대상이다. 그래서 법은 찰나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7. 마음은 흐름이다

마 음이 찰나생․찰나멸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는가?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 citta-srota, 금강경: 心流注)이니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남북방 불교에서 공히 강조하고 있다. 초기경의 비유를 살펴보자.
“찟따여, 예를 들면 소로부터 우유가 있고 우유로부터 응유(curd)가 되고 응유로부터 생 버터가 되고 생 버터로부터 정제된 버터(ghee)가 되고 정제된 버터로부터 최상의 버터[제호]가 되는 것과 같다. 우유가 되어 있을 때에는 응유라는 이름을 결코 얻지 못한다. 생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때에는 오직 우유라는 이름만 얻을 뿐이다. 응유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생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정제된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최상의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우유라는 이름을 결코 얻지 못한다. 응유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생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때에는 오직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만 얻을 뿐이다.”(D9)
이러 한 마음의 상속은 전찰나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에 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이 후찰나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에 후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 이렇게 쉼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으로 대표되는 탐욕․성냄․어리석음(탐진치)이 다할 때 까지 흐르는[相續] 것이다.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이 무아라면 윤회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거기에 대한 답이 바로 이 흐름이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흐름으로 파악한다. 탐·진·치로 대표되는 수많은 심리현상들이 용틀임하며 흘러가는 것이 윤회요, 바로 중생의 삶의 현주소이다. 이런 흐름을 과거·현재·미래나 전생·금생·내생이라는 틀로 부르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매 찰나의 흐름일 뿐 과거·현재·미래라는 실상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금강경』에서는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미래심도 불가득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금강경』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금강경』에서는 마음을 마음의 흐름(citta-dhāra, 心流注, 18장 현장 역, 구마라즙은 心으로 옮기고 있음)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유식에서도 아뢰야식의 전변을 흐름(srota)으로 인찰나의 소멸과 과찰나의 일어남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무튼 초기 - 아비담마/아비달마 - 반야/중관 - 유식에서 공히 마음은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지 결코 고정불변한 마음을 상정하지 않는다.

8.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 대상이 없는 마음은 일어나지 못한다.

거 듭 말하지만 마음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상(ārammaṇa)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緣]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난다. … 마노[意]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난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M18 등) 
그리고 이것은 아비담마의 가장 중요한 전제 중의 하나이다.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마음(식)은 크게 여섯 가지로 일어난다. 형상(혹은 색깔)이 대상이 될 때는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소리가 대상이 될 때는 귀의 알음알이가, 같이 하여 코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몸의 알음알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난다. 
한편 아비담마에 의하면 의식(마노의 알음알이)의 대상은 ① 감성의 물질(pasāda-rūpa) ② 미세한 물질(sukhuma-rūpa) ③ 이전의 마음(citta) ④ 마음부수들 ⑤ 열반 ⑥ 개념(paññatti)의 여섯 종류라고 한다. 이 여섯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이 여섯은『아비담마 길라잡이』319-321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우리는 이 여섯 가지 혹은 12가지 가운데서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여 내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매순간 살펴서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은 피하고 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을 향해서 마음이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혹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통해 해로운 업을 일으키지 않고 이로운 업을 일으키도록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yoniso manasikāra, 如理作意)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가 우리에게 간곡히 전하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다.

9. 마음은 연이생(緣起, 조건발생)이다.

연기(혹은 緣而生)는 세 번째 논강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초기경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도반들이여,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緣]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觸]입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하여 느낌[受]이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인식하고(sañjānāti, 想) 인식하는 것을 생각하고(vitakketi, 尋) 생각하는 것을 퍼져나가게 하고(papañceti, 戱論) 퍼져나가게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산냐라는 헤아림이 함께 일어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들에서 그러합니다. 
도반들이여,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마 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觸]입니 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受]이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인식하고 인식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퍼져나가게 하고 퍼져나가게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산냐라는 헤아림이 함께 일어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마노로 알아지는 법들에서 그러합니다.”(M18)
“도 반 사띠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좋은 일 이 못됩니다. 세존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반 사띠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지워져서 일어남[緣起]난다고 설하셨습니다.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어부의 아들 사띠 비구는 그 비구들과 더불어 반문하고 대꾸하고 대화하였지만 그 삿된 견해를 완강하게 국집하고 고집하여 주장하였다. 
“도반들이여, 저는 세존께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건너가고 윤회한다.'라고 설법하셨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 사띠를 데리고 세존께 가서 지초지종을 다 말씀드리자 세존께서 사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띠여, 그러면 어떤 것이 알음알이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좋고 삿된 업들의 과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참으로 나는 많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지워져서 일어난다고 설하였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스스로 잘못 파악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자신을 망치고 많은 부덕을 생기게 하는구나.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니 그대는 긴 세월을 이익됨이 없고 괴롭게 될 것이다.” <중략>
“비구들이여, 마치 무엇이든 그것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그것에 의해서 용어가 생기나니 장작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장작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지저깨비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지저깨비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짚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짚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소똥을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소똥불이라는 용어가 생기며 왕겨를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왕겨불이라는 용어가 생기며 쓰레기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쓰레기불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무엇이던 그 조건을 반연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바로 그것에 의해서 용어가 생긴다. 눈과 형상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눈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귀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코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혀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몸과 감촉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마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중략>
“장하구나,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하고 나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한다. '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 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
“그는 눈으로 형상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형상에는 홀리게 되고 사랑스럽지 않은 형상에는 혐오한다. 그는 몸에 대해서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머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그에게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무슨 느낌이든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치우쳐서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다. 그가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므로 기쁨이 일어난다. 느낌들에 대한 기쁨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
귀로 소리를 듣고서, … 코로 냄새를 맡고서, … 혀로 맛을 보고서, … 몸으로 감촉[觸]을 닫고서 … 마노로서 법을 분별하여 알고서 사랑스러운 법에는 홀리게 되고 사랑스럽지 않은 법에는 혐오한다. 그는 몸에 대해서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머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그에게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무슨 느낌이든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치우쳐서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다. 그가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므로 기쁨이 일어난다. 느낌들에 대한 기쁨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M38)
“왓차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그대 앞에 불이 붙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불이 붙고 있다면 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 것입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붙고 있는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붙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고 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붙고 있는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붙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내 앞에서 붙고 있는 불은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붙고 있습니다.’라고.” 
“왓차여, 만일 그대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그대는 ‘내 앞에 있던 불이 꺼졌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저는 ‘내 앞에 있던 불이 꺼졌다.’라고 알 것입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꺼진 그 불은 꺼진 후에 어떤 방향으로 갔는가, 동쪽인가, 서쪽인가, 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고 따마 존자시여, 그것은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하여 타올랐던 불은 그것을 다 써버리고 다른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연료가 없어서 꺼졌다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M72)

10.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이 상의 여러 인용문들에서 봤듯이 고정불변한 마음이란 불교에는 없다. 마음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며 연이생(緣而生, 조건발생, 연기)일 뿐이다.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다. 고정불변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외도의 아뜨만(자아) 이론이 되어버린다. 불교는 마음을 비롯한 일체법(유위법)들의 무상과 고와 무아를 설하는 가르침이며 그래서 무상․고․무아 혹은 무상․무아․열반은 삼법인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발제자가 마음은 무상이라고 하고 찰나생․찰나멸이라 하고, 연이생이라 하고, 실체가 없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 마음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냐. 그렇다면 불교는 허무주의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마음이 무상이요 찰나생멸하고 흐름이며 연이생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고정불변한 마음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 은 흘러간다.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 탐진치가 있는 한, 우리가 의도적 행위(업)를 계속해서 짓는 한 마음은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하여 쉼 없이 연속적으로 지속적으로 거듭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중생의 삶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쉼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이다. 갈애가 다 할 때 마침내 이러한 흐름은 끝이 나게 되며, 이것을 무여열반이라 하고 반열반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무상이나 찰나생멸이나 실체 없음을 강조하여 설한다고 해서 결코 허무주의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매찰나 지금여기에 충실하게 된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 만나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11. 무상․고․무아와 연이생을 보는 것이 해탈이다

그 러면 왜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위시한 제법의 무상․고․무아와 연이생을 강조하셨는가? 이것을 봐야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탈․열반은 무상이나 고나 무아의 통찰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탈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무상과 고와 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주석서들은 강조하는 것이다. 
초기경들에서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오온에 대해서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는 경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존재(5온․12처․18계)에 대한 염오-이욕-소멸-고요-최상의 지혜-깨달음-열반을 강조하시기도 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마음을 위시한 일체법의 무상, 고, 무아, 연이생 등을 강조하신 것은 이러한 제법의 보편적인 특징에 사무칠 때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무슨 불변하는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과 계합하고 그것과 하나 되려는 발상을 가지면 그것은 관념놀음에 지나지 않게 되어 결코 해탈․열반을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금강경』은 자아[我]니 영혼[壽者]이니 인간(진인, 人)이니 하는 것을 단지 산냐(saññā, 相, 想)일 뿐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론송 삼제계로 잘 알려진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 역위시가명 역명중도의에서도 인연소생법 즉 제법의 연이생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을 체득해야 공과 중도를 철견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유식에서도 식을 의티기로 이해하며 식전변을 연이생과 찰나생․찰나멸로 이해하고 있다.
이제 몇 가지 초기경을 인용한다.
“비 구들이여, 눈과 형상들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만남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아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다. 그에게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지 않다. 그는 괴로운 느낌에 닿아서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에게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지 않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서 그런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지 않다.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탐하는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적대하는 잠재성향을 없애버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 무지한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서 무명을 버리고 영지를 일으키고 지금 여기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있다.”(M148)
“비구들이여, 눈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형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알음알이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에 눈에 집착하지 않고 형상들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알음알이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감각접촉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미혹하지 않고 달콤함을 찾지 않으며 머물 때에 미래에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들이 쌓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가 버려진다. 그의 육체적인 곤란이 버려지고 정신적인 곤란도 버려진다. 육체적인 성가심도 버려지고 정신적인 성가심도 버려진다. 육체적인 열병도 버려지고 정신적인 열병도 버려진다. 그는 육체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린다.”(M149)
“비 구들이여, 그러므로 어떠한 물질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물질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서 보아야한다. 어떤 느낌이든 … 어떤 인식이든 … 어떤 심리현상[行]들이든 … 어떤 알음알이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알음알이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서 보아야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염오하고 느낌에 염오하고 인식에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염오한다.”
“염 오하기 때문에 탐욕이 빛 바랜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라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비구들의 마음은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했다.(M109)
“보 라, 아난다여. 그 모든 형성된 것[行]들은 지나갔고 소멸하였고 변해버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형성된 것은 견고하지 않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형성된 것들은 안식을 주지 못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모든 형성된 것[諸行]들은 염오하여야 마땅하며 빛바래도록 해야 마땅하며 해탈하여야 마땅하다.”(D17)
한편 초기경들을 이해하는데 가장 바른 지침서로 알려진『청정도론』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일 어나고 사라짐을 파악하여 흐름[相續]이 해체될 때 무상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계속되는 압박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행동거지가 드러날 때 괴로움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여러 요소로 분해하여 견고함이 해체될 때 무아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이 가운데서 ① 무상이란 무더기 다섯 가지[五蘊]가 무상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혹은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것이 무상의 특상이다. 혹은 있다가 없어짐이라 불리는 형태의 변화(ākāra-vikāra)가 [무상의 특상이다]. 
②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S.iii.22 등)”라는 말씀 때문에 그 무더기 다섯 가지가 괴로움이다. 왜 그런가? 끊임없이 압박받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압박받는 형태가 괴로움의 특상이다. 
③ “괴로운 것은 무아다.(S.iii.22 등)”라는 말씀 때문에 그 무더기 다섯은 무아다. 왜 그런가?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형태가 무아의 특상이다.”(청정도론.21.3-5)

12. 무상․고․무아는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이다

먼저『청정도론』22장을 인용한다.
“이 지혜가 [무상, 고, 무아의]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의 관찰로 일어날 때 [믿음, 삼매, 통찰지]의 세 가지 기능(根)들 가운데 하나의 지배력으로써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무 상이라고 [형성된 것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行]들은 부서짐으로 나타난다.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들은 공포로 나타난다.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들은 공으로 나타난다.(Ps.ii.48)” 
그들은 표상 없음, 원함 없음, 공함이라는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① 확신(信解,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無常)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얻는다. ② 편안함(輕安, passaddhi)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얻는다. ③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공한 해탈을 얻는다.(Ps.ii.58)” 
이처럼『청정도론』을 위시한 모든 주석서들에서는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상은 무상(無相)해탈을 실현하는 관문이고 고는 무원(無願)해탈을 실현하는 관문이며 무아는 공(空)해탈을 실현하는 관문이다. 이 이외에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법의 세 가지 특상인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을 반야라고 하며 위빳사나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무슨 정해진 열반이나 자아나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이나 진리를 상정하고 그것을 체득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과 하나되는 것으로 깨달음을 설정한다면 그것은 단지 관념이나 상놀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부처님께서 간곡히 설하신 해탈과 열반은 아닌 것이다.

13. 맺는 말

이 상으로 간략하게 초기경에서 언급되는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그래서 괴로운 것[苦]이요 실체가 없는 것[無我]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비담마에서는 찰나생․찰나멸로 규정하고 있으며 심찰나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런 전통은 유식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편 이러한 무상한 마음의 생멸은 연이생(緣而生, 緣起, 조건발생)이다. 모두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이 소멸할 때 소멸한다. 마음은 대상이 있을 때 일어나며(所緣緣) 앞 심찰나에 조건지워져서(等無間緣) 일어난다. 한편 마음은 과거의 심찰나에서 지은 업의 결과로도 일어나는데 이를 업연(業緣)이라 부르며 이때 일어난 마음을 이숙식(異熟識, 과보의 마음)이라고 아비담마와 유식에서는 부르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불변하는 실체를 세우면 그 순간 그것은 관념이 되고 만다. 그래서 아무리 그 실체 혹은 본체와 하나 되는 것으로나 그것을 직관하는 것을 설해도 그것은 이미 관념적인 것(산냐, 相, 想)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을 실현하고 해탈․열반을 체득하는 길은 오직 마음을 비롯한 일체법(유위법)이 무상이요 고요 무아요 연이생일 뿐임을 이해하고 이러한 것을 지금여기 내 안에서 분명하게 볼 때 실현되는 것임을 초기경들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초기불교에 서 본 마음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이다. 무상은 찰나생․찰나멸로 정리가 되고, 무아는 연이생(연기)의 다른 이름이며, 고는 사성제의 고성제로 정리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일 뿐이며 불변하는 실체란 없다. 만일 고정불변이요 영원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집착이요 삿된 견해이다. 집착과 삿된 견해가 남아있는 한 깨달음도 해탈도 열반도 결코 실현하지 못한다.
//////////////////////////////////////////////////////////////
각묵스님   강의  자료임...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The Pale Blue Dot.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지구별∙여행자 2018. 12. 1. 08:09
『아비담마 길라잡이』 강의 참고자료
각묵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 차 례 -
1. 아비달마 불교란 무엇인가?
2. 부파불교란 무엇인가?
3. 아비달마를 특징으로 하는 불교는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 한다
4. 아비달마 불교의 특징
5. 아비달마 불교가 주류불교(主流佛敎, Mainstream Buddhism)이다
6. 북방의 아비달마(Abhidharma)와 남방의 아비담마(Abhidhamma)
7.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8. 법(法, dhamma)이란 무엇인가
9. 초기불교에서 법(dhamma)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10. 아비담마에서 법(dhamma)은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이다
11. 법(法, dhamma) 혹은 구경법은 해체(vibhajja)했을 때 드러난다
12.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있는가
13. 이러한 법들은 여러 가지 영역으로 분류가 된다
14.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법(dhamma)의 분류 - 4位 82法
15. 법은 찰나와 상속(相續, 흐름, santati)이다. 여기에 사무쳐야 한다
16. 법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파악해야한다
17. 제법은 철저한 상호의존에 의해서 존재한다
18. 아비담마는 위빳사나 수행의 이론적 토대이다
- 아비담마에서 본 마음의 특징
- 부록: 여러 가지 도표들


1. 아비달마 불교란 무엇인가?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Pali: abhidhamma)를 교학체계로 하는 불교를 아비달마 불교라 한
다. 아비달마는 부파불교의 교학체계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신 뒤 100년쯤 뒤부터 나누어
지기 시작하여 후에 18개 혹은 20개로 나누어진 부파불교는 아비달마라는 방법론을 토대로 한 불교
이다. 그래서 부파불교를 교학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부를 때는 이를 아비달마 불교라 한다. 
불교 2600년 역사는 초기불교 - 아비달마(아비담마) - 반야․중관 - 유식 - 여래장 – 정토 – 밀교 – 선
불교로 전개되어 왔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 갈라짐’을 뜻하는 ‘부파(部波)’라
는 용어는 초기교단을 제외한 불교 2600년사에 존재했던 모든 불교교단에 적용되어야하는 술어이
다. 그러므로 아비달마를 토대로 하는 불교교단만을 부파불교라고 불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인도,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등의 북방불교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의 남방불교에서 아주 많
은 교파, 종파, 부파로 나누어진 것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모든 불교의 교단적인 특징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같은 대승불교의 흐름에 속하면서도 각 교파의 교학적인 특징을 따서 반야를 교학의 토대로
하는 불교를 반야중관 불교라 하고, 식전변을 토대로 전개하는 불교를 유식 불교라 하며, 여래장과
불성을 근본 교의로 하는 불교를 여래장 불교라 하고,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불교를
정토불교라 하며, 다라니(진언) 수지를 기본으로 하는 불교를 밀교(진언불교)라 하고, 참선수행을 근
간으로 하는 불교를 선불교라 부르는 것처럼, 아비달마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는 당연히 아비달마 불
교라 불러야 마땅하다.

2. 부파불교란 무엇인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신 뒤에도 단일한 교단체계를 유지해 내려오던 불교교단이 부처님이 입멸
하신 후 100년쯤 뒤에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누어진 이후의 불교교단을 학자들 특히 일본의 불교학
자들은 부파불교(剖波佛敎)라 부른다. 부파불교는 그 후 200~300년에 걸쳐 이들 두 교파로부터 다시
분파하여 20여 개의 교단(敎團)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이러한 불교를 통틀어서 부파불교(剖波佛敎)라
한다. 
초기불교의 단일 교단이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 Sthavir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aṅgika)로 나누
어진 것을 근본분열이라 한다. 북방불교의『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다시 대중부에서 본말
을 합하여 9부가 전개되고 상좌부에서 본말을 합하여 11부가 나누어져서 모두 20개 부파로 전개된
다고 한다. 남방불교의『도사』(島史, Dīpavaṁsa)와『대사』(大史, Mahāvaṁsa)에 의하면 대중부 계열에
는 6개의 부파가 전개가 되고 상좌부에서는 본말을 합하여 12부로 나누어져서 모두 18개 부파가 된
다. 이처럼 두 교파에서 18개 내지 20개 부파로 나누어진 것을 지말분열이라 한다. 지말분열은 BC 2
세기경이 절정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분열의 이유 등은 분명치 않다고 한다. 불교교단의 분파와 각
부파의 명칭에 대해서는 『인도불교의 역사』 136쪽 이하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편 이러한 부파불교의 전개양상을 잘 알 수 있는 자료로는 첫째, 남방 상좌부불교에서 전승되어오
는 『도사』와 『대사』와 『논사 주석서』를 들 수 있고, 둘째, 북방불교의 설일체유부에 속하는 세우
(Vasumitra)가 지은 『이부종륜론』이 있으며, 셋째 BC 2세기부터 AD 5세기에 만들어진 인도의 불교
비문들을 들 수 있다. 첫 번째로 든 『도사』나 『대사』등에 의하면 모두 18부파가 존재하였고, 두 번째
로 언급한 『이부종륜론』에 의하면 20부파가 있었으며 세 번째로 든 인도 각지에서 발견된 비문에 나
타나는 부파명을 근거로 앙드레 바로우(A. Bareau) 교수는 34개의 부파명을 들고 있다. 다양한 종족
과 언어와 문화를 가진 광대한 인도에서 교통까지 불편하던 시대에 불교가 인도의 여러 지역으로 전
파되어 가면서 이러한 부파가 나누어진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3. 아비달마를 특징으로 하는 불교는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 한다
의정스님의 『남해기귀내법전』과 『이부종륜론』등에 의하면 그 당시 교단을 니까야(Nikāya, 部, 모음,
집단, 교단, sect, school)라 불렀다. (『인도불교의 역사』 131쪽) 이를 토대로 일본의 학자들이 이 시대
의 불교를 부파불교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CBETA로 검색해보면 한역 대장경에는 부파란 명칭이 검
색되지 않는다.)
지금도 남방 상좌부 불교에서는 불교의 교파 혹은 종파(sect) 혹은 종단(order)을 니까야(Nikāya)라
부른다. 예를 들면 지금 스리랑카의 가장 큰 종파를 시암 니까야(Siam Nikāya)라 하는데 1753년에 서
구 열강의 침략으로 계맥이 끊어진 스리랑카 불교가 태국(Siam)에서 계맥을 다시 전승하여 스리랑카
불교를 중흥시킨 교파이다. 그 외에 유력한 종파로는 1800년에 미얀마의 계맥을 다시 전승한 아마라
뿌라 니까야(Amarapura Nikāya)와 1864년에 설립된 라만나 니까야(Ramanna Nikāya)가 있다. 현재
태국에는 마하 니까야(Mahā Nikāya)와 담마윳띠까 니까야(Dhammayuttika Nikāya)가 대표적인 종단
으로 자리하고 있고 미얀마에는 투담마 니까야(Thudhamma Nikāya)와 쉐긴 니까야(Shwegyin
Nikāya)가 대표적인 종단이다.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를 막론하고 불교 2600년 역사에는 수많은 교단 혹은 교파 혹은 부파 혹은 종파
들이 존재하여 왔다. 중국에는 5-7세기에만 13개 이상의 종파가 있었으며 후대에 더 많은 종파들로
분파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불교에도 5교9산을 위시한 많은 종파들이 있었고 지금은 100개
가 넘는 종단이 있으며 일본불교와 티벳불교 역시 마찬가지이고 남방불교의 여러 국가들에도 마찬
가지이다. 그러므로 특정시대의 불교에만 한정시켜서 그 불교를 부파불교(Nikāya Buddhism)라고 칭
하는 것은 엄정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잘 전승하여 이를 연구하여
아비달마라는 엄정한 교학체계를 완성하여 이를 수행에 적용시켜 해탈열반을 추구한 불교를 부파불
교라 칭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교는 그 교학체계의 가장 큰 특징이 되는
아비달마 불교라 불러야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비달마 불교는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사라져버린 불교가 아니고 인도에서 불교가 사
라질 때까지 항상 주류(mainstream)가 된 불교이며 지금도 남방의 불교국가에서 면면부절로 전승되
어 오는 세계의 주류불교이다.

4. 아비달마 불교의 특징
첫째, 아비달마 불교는 초기불교를 계승하는 불교교단의 정계(正系)이다. 아비달마(abhidharma)라는
술어는 ‘법(法, dharma, 다르마)에 대해서[對, abhi, 아비]’라는 일차적인 뜻을 가지며 그래서 아비달
마는 ‘법의 연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현장스님은 구사론에서 이를 ‘대법(對法)’으로 옮겼다. 여기서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佛法, Buddha-dhamma]과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을
뜻한다. 아비달마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면하여 연구한[對, abhi] 것이다.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초기불교라 하며 이것은 일차결집에서 율장과 경장으로 전승이 되
었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가르침 즉 다르마를 연구하여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체계화하고 표
준화 한 것이 아비달마 불교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 발전시킨 교학체계를 아비담마/아비달마라고
하며 이것은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으로 확정이 된다.
둘째, 아비달마 불교는 제자들[성문, 聲聞, sāvaka, śrāvaka)의 불교 즉 성문들의 불교이다. 아비달마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 즉 다르마(법)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아비달마 불
교는 제자들의 불교 배우는 입장의 불교 전통을 계승하는 불교이다. 이러한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입
장의 불교이었기 때문에 후대 대승교도들은 이를 성문승(聲聞乘, Śrāvaka-yāna)이라 불렀다. 성문(聲
聞)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즉 제자들이라는 뜻이다. 성문은 특히 아비달마 불교시대에는
출가 제자들에게만 한정되었다.
셋째, 이처럼 아비달마 불교는 출가주의 불교이다. 그들은 출가하여 비구 혹은 비구니가 되어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하였다. 재가와 출가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고 출가를 전제로 하여 교리나 수
행형태를 조직하였다. 
그러므로 아비달마 불교는 승원에 머물면서 금욕생활을 하고 교학과 수행에 전념하였다. 당시 교단
의 주된 관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한 교리의 해석이었으며, 자연히 출가자와 승원(僧院)
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불교의 성격을 띠어갔다. 따라서 출가를 전제로 하여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
서 수행하고, 또 타인의 구제보다는 자기 수행의 완성을 우선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후대의 대승불교
로부터 소승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대승에서 소승으로 지칭하는 불교는 바로 이 아비달마 불
교 혹은 부파불교를 뜻한다.
넷째, 국왕이나 왕족이나 큰 상인들의 후원을 받았다. 출가 수행자들이 승원에서 교학과 수행에 전념
할 수 있었던 것은 국왕이나 왕족이나 큰 상인들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대한 장원을
사원에 희사했다. 아쇼카 왕이 불교에 귀의하여 인도의 10곳으로 전법사단을 파견한 것은 아비달마
불교가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고 아비달마 교학이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나
(『인도불교사』70쪽) 카니시까 왕이 설일체유부에 귀의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인도
에서 만들어진 여러 비문들은 그 지방의 유력한 인사들이 교단에 토지를 보시한 사실을 적고 있다.
다섯째, 아비달마 불교는 수행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불교였다. 특히 불교의 정계(正系)임을 자부하
는 상좌부 불교는 아비달마(아비담마)가 철저하게 위빳사나 수행의 토대가 됨을 강조한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8장 §1의 [해설]2를 참조할 것.) 빳냣띠(paññatti, 施設, 槪念)를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빠
라맛타, paramattha, 究竟法)로 해체해서 드러나는 구경법들 가운데 열반을 제외한 71가지 구경법들
이 위빳사나 수행의 토대가 된다고 강조한다.(72가지 법들은『아비담마 길라잡이』제1장 §2의 [해설]
2와 제2장 §3과 특히 제7장 §1을 참조할 것.)
아비달마 불교 시대의 출가자들은 생활의 걱정 없이 출세간주의를 관철하여 연구와 수행에 주력하
였으며 이렇게 하여 분석적이고 치밀한 불교교리를 완성시켰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남방 상좌부의
칠론( 七 論 )과 설일체유부의 칠론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논( 論 )’이라는 말의 원어가 ‘아비다르마
(abhidharma)’이고 이를 한역(漢譯)한 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 阿毘曇)이다. 북방 아비달마를 집대성
한 것으로는 세친스님의『아비달마 구사론』을 들 수 있고 남방 아비담마를 토대로 부처님의 가르침
을 정교하게 해석한 것으로는 붓다고사 스님의 『청정도론』을 들 수 있다.
여섯째, 넓혀서 생각하면 아비달마뿐만 아니라 더 후대의 반야중관, 유식, 여래장, 정토, 밀교, 선불교
도 모두 ‘법에 대해서’ 혹은 ‘법의 연구’로 번역되는 아비달마 불교에 영역에 넣을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 2600년사에 존재하는 모든 불교는 모두 부처님의 법(달마)을 그 시대 혹은 그 지역에 맞게 연구
하고 해석한 불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 2600년 역사는 모두 초기불교와 아비달마 불교
의 둘로 대별할 수 있다.

5. 아비달마불교가 주류불교(主流佛敎,Mainstream Buddhism)이다
이처럼 부파불교에서 완성한 교학과 수행체계인 아비달마 불교는 지금까지도 남방의 스리랑카, 미얀
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에 전해져서 지금까지도 단절됨이 없이 전승되어 온다. 그러므
로 초기불교의 핵심인 법을 대면하여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하여
계승하고 있는 아비달마 불교는 불교역사에서 단절된 적이 없는 불교체계이다.
대승불교가 생긴 뒤에도 부파교단은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대승불교를 압도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AD 399년에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로 성지순례를 한 법현 스님은『법현전』에서 그 무렵 인도에는 소
승을 학습하는 절과 대승을 학습하는 절과 대승과 소승을 함께 학습하는 절 등의 세 가지가 있었다
고 적고 있다. 여기서 그는 소승불교가 유행하던 나라 9개국, 대승불교가 유행하던 나라 3개국, 둘을
겸학하던 나라 3개국을 들고 있다. 
현장 스님(602-664)의『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소승을 배우는 사원 60개소, 대승을 학습하는 곳 24개
소 둘 다를 겸하는 곳 15개소이다. 이처럼 소승불교 즉 부파불교 쪽이 훨씬 많다. 
한편 671년에 인도를 탐방한 의정스님(635-713)의『남해기귀내법전』에 의하면 이 시대에도 소승불
교는 대승을 압도하고 있었다.(이상『인도불교의 역사』147-148쪽 참조) 
인도에서 불교가 없어질 때까지 인도불교의 주류는 바로 이 부파불교 혹은 아비달마 불교 혹은 소승
불교였다. 인도만 한정해서 말하면 대승불교는 한 번도 주류였던 적이 없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지
금도 불교 정계임을 자부하는 상좌부 불교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그들의 절대적인 귀의를 받으며 엄정한 교학과 수행체계로 면면부절하게 전승되어 온다.

6. 북방의 아비달마(Abhidharma)와 남방의 아비담마(Abhidhamma)
강사는 아비담마(Abhidhamma)라는 용어와 아비다르마(Abhidharma)라는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
고 있음을 밝힌다. 아비담마는 남방의 상좌부(Theravāda)에서 전승되어온 교학체계를 뜻하고 아비다
르마는 유부나 경량부 등 북방에서 심화된 교학을 말한다. 이 아비다르마는 중국에서 아비달마(阿毘
達磨, 阿鼻達磨)로 음역이 되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아비담마는 중국에서 아비담(阿毘曇)으로 음역
된 듯하다.
이처럼 남방불교에 전승되어오는 아비달마의 가르침은 빠알리어로 표기하여 아비담마
(Abhidhamma)라 칭하고 북방불교에 전승되어오는 아비달마의 가르침은 산스끄리뜨 아비다르마
(Abhidharma)의 음역인 아비달마(阿毘達磨, 阿鼻達磨)라 구분하여 부르는 것이 학계의 흐름이다. 이
둘을 통칭할 때도 후자인 아비달마로 칭한다. 필자도 본 교재에서 이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이하 본 강의 교재는 남방 상좌부의 아비담마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아비담마
(Abhidhamma)로 표기하고 있음을 밝힌다.

7. 아비담마(adhidhamma)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아비담마(abhidhamma, Sk. abhidharma)’는 접두어 abhi와 명사 dhamma로 분석된다.
여기서 접두어 abhi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① about(~에 對해여)와 ② above(~의 위에
= 뛰어난, 수승한[勝])이다. 
그러므로 전자로 해석하면 아비담마는 ① ‘법에 대해서’라는 뜻이 되어 ‘법의 연구’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현장 스님은『아비달마 구사론』에서 아비다르마를 대법(對法)으로 옮겼다. 아비담마는 초기불
교의 핵심인 법(담마)을 대면하여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한 것이다.
(standardization) 
후자로 해석하면 아비담마는 ② ‘수승한 법’이라는 뜻이 되어 ‘법의 핵심’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승법(勝法)으로 옮기기도 하였고 무비법(無比法)으로도 옮겼다. 특히 붓다고사 스님은『담
마상가니』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에서 ‘abhi’라는 접두어를 ‘뛰어나다, 특별하다’라는 뜻 즉 후자로
정의하고 있다. CBETA로 검색해보면 중국에서도 후자 즉 승법(勝法)이나 무비법(無比法)으로 옮긴 경
우가 더 많다.
한편 주석서 문헌들은 경의 가르침을 방편적인 가르침[方便說, pariyāya-desana]이라 부르고 아비담
마의 가르침을 비방편적인 가르침[ 非 方 便 說 , nippariyāya-desana]이라 부르고 있다.(DhsA.154;
MAṬ.ii.123 등) 경의 가르침은 듣는 사람의 처지나 입장을 고려한 것이고 아비담마의 가르침은 그런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법만을 대면하여[對法] 법의 핵심만을 드러낸[勝法] 가르침이기 때문이
다.

8. 법(法, dhamma)이란 무엇인가
법(法, 담마, dhamma, Sk. dharma)은 인도의 모든 사상과 종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술어이며
또한 방대한 인도의 제 문헌들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
다. 초기불교 문헌에서도 dhamma(Sk. dharma)는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이다. 
빠알리『삼장』에 나타나는 담마(dhamma)의 여러 의미를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는『담마상
가니』(法集論)의 주석서인『앗타살리니』(DhsA.38)에 나타나는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이 가장 잘 알려
져 있다. 여기서 스님은 dhamma를 ① 빠리얏띠(pariyatti, 교학, 가르침) ② 헤뚜(hetu, 원인, 조건) ③
구나(guṇa, 덕스러운 행위) ④ 닛삿따닛지와따(nissatta-nijjīvatā, 개념이 아닌 것)의 넷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 』 (MA.i.17)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모든 법[ 諸 法 , 一 切 法 , sabbadhammā, sabbe dhammā]’을 설명하면서 법(dhamma)의 용처를 아래의 열 가지 경우로 설명하고 있
다. “‘법(dhamma)’은 ① 교학(가르침, pariyatti), ② 진리(sacca), ③ 삼매(samādhi), ④ 통찰지(paññā),
⑤ 자연적인 현상(pakati), ⑥ 고유성질(sabhāva), ⑦ 공성(suññatā), ⑧ 공덕(puñña), ⑨ 범계(犯戒,
āpatti), ⑩ 알아야 할 것(ñeyya) 등을 나타낸다.
법(dhamma)에 대한 경들과 여러 주석서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법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 가르침(교학, 진리, 덕행)으로서의 법이요, 둘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하는 법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요즘 서양학자들은 전자를 대문자 Dhamma로 후자를 소문자 dhamma로 표
기한다. 전자는 불법(佛法, Buddha-dhamma)으로 정리되고 후자는 일체법(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佛法]과 일체법은 같은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에서도 “일체법이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一切法 皆是佛法,
제17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佛法]이 바로 법(dhamma)이
요,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밝힌 것이며[一切法], 이것은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과 깨달음을 실현
하는 토대가 된다.

9. 초기불교에서 법(dhamma)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초기불교에서 법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교학과 수행으
로 구성된다. 세상의 모든 학문과 사상과 종교는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
교도 역시 그러하다. 불교에서는 전자를 교학(빠리얏띠, pariyatti, 배움) 이라 부르고 후자를 수행(빠
띠빳띠, paṭipatti, 도닦음)이라 부른다. 초기불교에서 교학은 아래의 여섯 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수행은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된다. 이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자세한 것은『초기불교이해』
를 살펴보기 바란다.
① 교학으로서의 법
『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들은 교학으로서의 법을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의 여섯으
로 정리하였다. 이것은『초기불교이해』제2편의 제6장부터 제16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여
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온(蘊, 무더기, khandha): 5온 = 물질[色, rūpa], 느낌[受, vedanā], 인식[想, saññā],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ā], 알음알이[識, viññāṇa]의 다섯 가지 무더기이다.
처(處, 감각장소, āyatana): 12처 =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內
處]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六外處]인 12가지 감각장소이
다.
계(界, 요소, dhātu): 18계 = 12처의 마음[意, 마노, mano]에서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독립시켜서 모
두 18가지가 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
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耳識], 코의 알음알이[鼻識],
혀의 알음알이[舌識], 몸의 알음알이[身識],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의 여섯을 합하여 18가지가 된다.
근(根, 기능, indriya): 22근 = 22근은『초기불교이해』제10장의 자료를 참조할 것.
제(諦, 진리, sacca): 4제 =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
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
리[苦滅道聖諦]의 네 가지 진리이다.
연(緣, 조건발생, paccaya, paṭiccasamuppāda): 12연기 =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나타낸다.
『초기불교이해』제15장과 제16장을 참조 것.
② 수행으로서의 법
주석서들은 37보리분법(菩提分法, 助道品, bodhipakkhiya-dhammā)을 들고 있다.
4념처(마음챙김의 확립), 4정근(바른 노력), 4여의족(성취수단), 5근(기능), 5력(힘), 7각지(깨달음의 구
성요소), 8정도(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 八支聖道)의 일곱 가지로 분류되며 법수로는
모두 37가지가 된다.(.(이들에 대해서는『초기불교이해』제3편의 제17장부터 제25장까지를 참조할 것.

10. 아비담마에서 법(dhamma)은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이다
불교에서 법(dhamma)은 ① 부처님 가르침[佛法, Buddha-dhamma]과 ②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法,
諸法, sabbe dhammā]을 뜻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비담마는 이러한 법(dhamma)을 연구하는(abhi,
對) 체계이다. 그러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아비담마는 법을 연구하는가? 아비담마는 ‘고유성질[自性,
sabhāva, Sk. svabhāva]’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하여 부처님 가르침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분
류하고 분석하고 고찰하여 체계화하고 있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법을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것
(attano sabhāvaṁ dhārenti ti dhammā - DhsA.39)”으로 정의한다. 북방 아비달마의 논서인『아비달마
구사론』에서도 현장스님은 능지자상(能持自相) 혹은 임지자성(任持自性)으로 옮겼다. 
아비담마는 먼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유성질을 가졌는가 가지지 않았는가라는 기준으로 고찰하여
① 고유성질을 가지지 않은 것들을 ‘개념’ 혹은 ‘개념적 존재(빤냣띠, paññatti, Sk. prajñapti, 施設, 假
名)라 하여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개념적 존재는 허공 꽃과 같고 토끼 뿔과 같고 거북이 털과
같아서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비담마는 이렇게 개념적 존재를 해체하거나 배제하고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②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을 아비담마에서는 궁극적 실재, 혹은 구경법[勝義法, paramatthadhamma]이라 부른다. 아비담마 전반에서 별다른 설명이 없는 한 법(dhamma)은 바로 이 구경법을
뜻한다. 아비담마는 이처럼 부처님이 설하신 다양한 법들을 고유성질을 가진 것[任持自性]이라는 측
면에서 연구하고 분류하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고 표준화한 것이다.
아비담마에 의하면 존재에는 ① 인습적인 것(sammuti)과 ② 궁극적 인 것(paramattha)의 두 가지가
있다.(VbhA.95 등) 
① 인습적인 것은 보통의 개념적인 것(paññatti)과 인습적 표현(vohāra)을 지칭한다. 예를 들면, 중생,
사람, 남자, 여자, 동물 등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우리의 분석적이지 못한 밑그림을 구성하는, 외관
상 견고하게 남아 있는 산, 바위, 나무 , 집 등 여러 대상들이 모두 인습적인 것(sammuti)에 포함된다.
이런 개념들은 궁극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나타내는 대상은 그들 자체로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개념적인 것이지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 아비담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
은 고유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진 실재가 아니다. 여러 궁극적인 것들이 모여져 이루어진 것들을
편의상 각각 다른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을 뿐이다.
② 궁극적인 것은 그와는 반대로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sabhāva)을 가진다. 이것은 최종적인 것이
요,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존재의 구성성분이며, 경험을 정확하게 분석한 결과로서 존재하는 구극
의 단위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 한다. 예를 들면 사람 남자 여자 등은 인습적인 것
이지 구극의 단위가 아니다. 사람이란 지·수·화·풍의 사대와 그에서 파생된 물질인 눈·귀·코·혀·몸 등과
마음, 이 마음과 같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정신작용들[마음 부수]이라는 최소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
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땅의 요소나 물의 요소, 감각접촉, 느낌, 의도 등은
더 이상 분해되지 않는 그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가진 궁극적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것은 인습
적인 존재의 영역에 속하며 땅의 요소 등은 궁극적인 실재라 부른다. 
이처럼 우리가 아비담마의 분석적 도구를 가지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보면 이런 인간이니 자연
이니 너니 나니 하는 등의 개념 그 자체는 궁극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정신-물리적[名
色, nāma-rūpa]인 과정일 뿐이 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정신-물리적인 과정들은 모두 최소단위들이
매순간 특정한 조건하에서 서로 조합되어 생멸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런 그들 자신의 고유성질
(sabhāva)을 가진 최소단위(dhamma)들을 아비담마에서는 궁극적 실재(paramattha, 혹은 구경법, 究
竟法, paramattha-dhamma)라 한다.
이런 궁극적 실재는 정신-물리적인 현상의 구체적 본질로서 존재하지만 너무 미세하고 심오해서 훈
련이 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은 이것들을 인식할 수 없다.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은 개념(paññatti)들로
뒤덮여 있어서 궁극적 실재를 보지 못한다. 대상에 지혜로운 주의[如理作意, yoniso manasikāra]를
기울임으로써 인간은 개념을 넘어서 보게 되고 궁극적 실재를 앎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므로
궁극적 실재는 최상의 지혜[智]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1장 §1의 [해설]에서
인용)

11. 법(法,dhamma) 혹은 구경법은 해체(vibhajja)했을 때 드러난다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의 특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니까야에서는 존재를 온․처․계․근․제․연 즉 5온․
12처․18계․22근․4제․12연기의 법들로 해체해서 설하고 있고, 아비담마/아비달마에서는 존재를 고유
성질의 차이에 따라서 82법, 75법, 100법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ññatti]을 해체한다. 인간은 실로 개념의 동물이다. 인간은
수많은 대상을 대하면서 무수한 인식이나 관념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 요소
를 뽑아내어 종합하여 특정한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즉시 그
것에 의미부여를 하게 되고 그것을 실체화하여 그것에 속아버리게 된다. 개념들에 묶여있는 한 진정
한 자유, 진정한 해탈이란 없다.
여기서 ‘개념’ 혹은 ‘개념적 존재’는 빤냣띠(paññatti, prajñapti)를 옮긴 것이다. 이를 중국에서는 시설
( 施 設 )로도 옮기고 『 중론 』 에서는 가명( 假 名 )으로도 옮겼다. 그러면 무엇으로 해체하는가? 법들
(dhammā)로 해체한다. 나라는 개념, 중생이라는 개념, 세상이라는 개념, 미인이라는 개념, 돈이라는
개념, 권력이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을 법들로 해체한다. 이런 것들에 속으면 그게 바로 생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체해서 드러나는 궁극적 실재를 구경법(究竟法, paramattha-dhamma)이라 한다.
해체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불전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영감이 가장 뛰어난 분
으로 칭송되는 왕기사 존자는 부처님을 “부분들로 해체해서 설하시는 분”(S8:8)이라고 찬탄하고 있
다. 여기서 해체는 위밧자(vibhajja)를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이 위밧자라는 술어는 빠알리『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위
밧자와딘(vibhajja-vādin, 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 불렀다.
그래서『상윳따 니까야』「와지라 경」(S5:10)에서 와지라(Vajirā) 비구니 스님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읊고 있다.
“왜 그대는 ‘중생’이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들[行]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553}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 {554}
여기서 ‘중생’은 개념적 존재[施設, paññatti]이고 ‘형성된 것들[行]’과 무더기들[蘊]은 법들(dhammā)
이다. ‘마차’는 개념적 존재의 보기이고 ‘부품들’은 법들의 보기이다. 불교에서 ‘나’라는 개념적 존재
[施設, paññatti]를 오온이라는 ‘법(dhamma)’들로 해체해서 보는 것은 이처럼 오온무상(五蘊無常)과
오온개고(五蘊皆苦)와 오온무아(五蘊無我)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해체해서 보기의 가장 좋은 비유로는 「대념처 경」(D22)에 나타나는 백정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세존
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길 네 거리에 이를 벌
려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
(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D22 §6; M10
§12 )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슨 뜻인가? 백정이 소를 키울 때도 도살장으로 끌고 올 때도, 끌고 온 뒤에 묶어서 둘 때도, 잡을
때도, 잡혀 죽은 것을 볼 때도, 그것을 베어서 부분마다 나누지 않고서는 그에게 ‘소’라는 인식은 사
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뼈로부터 살을 발라내어 앉아있을 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고기’라는 인
식이 일어난다. 그는 ‘나는 소를 팔고, 그들은 소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고기
를 팔고, 그들은 고기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이 비구가 이전의 재가자이었거나 출가
를 하였어도[명상주제를 들지 않는] 어리석은 범부일 때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덩어리
를 분해(해체)
하여 요소별로 따로따로 반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DA.iii.770; MA.i.272;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183)
나와 세상 등을 온․처․계․연 등의 법들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법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그는 불교
적 수행을 하는 자가 아니다. 개념적 존재로 뭉쳐두면 속는다. 법들로 해체해야 깨닫는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12.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있는가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 법이라면 당연히 이 세상에는 몇 개의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법이 있는
가를 규명해야한다. 이것은 아비담마의 출발점이요 토대요 기초이다. 상좌부에서는 82법을 들고 있
고, 설일체유부에서는 75법으로 결론짓고,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에서는 100법을 들고 있다. 
예를 들면 화학에서는 이 세상에서 각각 다른 고유성질을 가진 물질을 원소기호로 정리하여 최근에
코페르니슘을 112번으로 명명하였으며 비공식적으로는 118번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방
법론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물리와 화학은 물질만을 다루지만 아비달마는 정신의 영역까
지 고유성질을 가진 법들로 해체해서 설하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화학에서는 원자는 고유성질을 가진 최소단위이지만 물질은 원자상태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남․북방 아비달마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한다. 물질은 최소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나라 깔
라빠(kalāpa) 상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물질 기본적으로 여덟 가지 법들의 무리(깔라빠)로 이루어져있
다[八事具生]고 남․북방 아비달마는 이구동성으로 강조한다. 여기에 대해서는『아비담마 길라잡이』제
6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13. 이러한 법들은 여러 가지 영역으로 분류가 된다

존재하는 모든 법들은 일체법으로 분류가 되고, 일체법은 다시 유위법과 무위법으로 분류가 되며, 유
위법은 다시 심법과 심소법과 색법으로 분류가 되고 이 가운데 심소법은 다시 공통되는 것들, 해로운
것들, 유익한 것들을 분류가 되며 이는 다시 반드시들과 때때로들로 분류된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참조) 이것은 생물학에서 생물을 ‘계․문․강․목․과․속․종’으로 분류하는 것과 같은 방법론이라 할 수 있
다.
이러한 일체법을 상좌부에서는 심․심소․색․열반의 4위(位)의 4가지 영역의 82법으로 분류하고 설일
체유부에서는 여기에다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을 설정하여 모두 5가지 영역[五位]의 75법으로
분류하고 대승 아비달마인 유식에서는 다섯 가지 영역[五位]의 100법으로 분류한다.(도표를 참조할
것) 이 가운데 심(心)․심소(心所)․색(色)․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은 유위법이고 열반은 무위법이
다.(아래 도표 참조)
상좌부와 설일체유부의 법수들의 심․심소․색․열반의 4위(位)의 법들은 대동소이한데 설일체유부에서
심불상응행법을 설정하는 것이 남방 아비담마와 북방 아비달마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14. 고유성질[自性]을 가진 법(dhamma)의 분류 - 4位 82法

① 마음[心, citta]: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ārammaṇaṁ cintetī ti cittaṁ).”(DhsA.63.) 마음
은 대상을 안다[了別]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다양하게 일어나더라도 안다는 특징으
로만 본다면 하나이지만 그 하나인 마음을 아비담마에서는 여러 유형으로 구분짓고 있다. 이런 유형
들은 복수로 ‘마음들’이라고 표현하는데 ① 마음이 일어나는 곳[地, bhūmi, 경지]와 ② 업과 과보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89가지로, 더 자세하게는 121가지로 구별한다.(<도표> 참조)
② 마음부수(마음附隨, 心所, 쩨따시까, cetasika):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며, 동일한 대상
을 가지고 동일한 토대를 가지는, 마음과 결합된 52가지 법을 마음부수들이라 한다.”(『아비담맛타 상
가하』II.1) “사람들이 비록 ‘왕이 온다.’고 말하지만 왕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그는 항상 수행원들
과 함께 온다. 그와 같이 마음이 일어날 때는 결코 혼자 일어나지 않고 항상 마음부수라는 수행원들
과 함께 일어난다.”(DhsA. 67) 공통되는 것 13가지, 해로운 것 14가지, 아름다운 것 25가지로 모두 52
가지로 분류한다.(<도표> 참조)
③ 물질[色, rūpa]: “변형(變形)된다고 해서 물질이라 한다.”(S22:79) “‘변형된다(ruppati)’고 했다. 이것
은 물질(rūpa)이 차가움 등의 변형시키는 조건과 접촉하여 다르게 생성됨을 두고 말한 것이
다.”(SAṬ.ii.210) 변형(ruppana)은 변화(viparinnāma)와 다르다. 변형(變形)은 형태나 모양이 있는 것이
그 형태나 모양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물질만의 특징이다. 느낌, 인식, 심리현상들, 알음알이
(수․상․행․식)와 같은 정신의 무더기들의 경우 변화는 있으되 형태나 모양이 없기 때문에 변형은 없
다. 그래서 변형은 물질에만 해당된다. 물질은 구체적인 물질 18가지와 추상적인 물질 10가지로 모
두 28가지로 분류한다.(<도표> 참조) 
④ 열반(涅槃, nibbāna): “출세간이라 불리고, 네 가지 도로써 실현해야 하며, 도와 과의 대상이고, 얽
힘이라 부르는 갈애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열반이라 한다.”(아비담맛타 상가하 VI.30)


15. 법은 찰나와 상속(相續,흐름,santati)이다. 여기에 사무쳐야 한다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 법이다. 그리고 열반을 제외함 모든 유위법들은 찰나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아
비담마에서 설명하는 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찰나(刹那, khaṇa)를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으로 이해한다. <주1>
<주1>
예를 들면, 설일체유부에서는 찰나를 “하나의 법이 지닌 온갖 상(즉 생․주․이․멸)의 작용이 모두 이루
어질 때”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법(존재) 자체를 획득하고서 무간(無間)에 바로 소멸하는 것”라고 정
의하기도 한다.(권오민 역,『아비달마 구사론』251쪽, 244쪽, 593쪽 참조)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는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이라고 찰나를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학자들은『아비
달마 구사론』을 분석하여 아비달마의 찰나는 75분의 1초 정도의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상좌부 주석
서들의 설명을 보면 상좌부의 찰나는 훨씬 더 짧은 시간이다.
그리고 이 찰나는 다시 일어남[生, uppāda]과 머묾[住, ṭhiti]과 무너짐[壞, bhaṅga]의 세 부분으로 이
루어져 있다고 주석서들은 말하고 있다.(『아비담마 길라잡이』제4장 §6과 해설 참조) 서양에서는 이
것을 sub-moment라고 옮기고 있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아찰나(亞刹那)’라고 옮겼다. 그러나 이
아찰나라는 술어는 주석서의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찰나는 전문술어로 인정하지 않기 때
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고유성질이 없기 때문이다. 찰나를 아찰나로 쪼갤 수는 있고, 아찰나를 다
시 아아찰나로 아아찰나는 다시 아아아찰나로 … 이렇게 쪼갤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아찰나로 쪼개
버리면 법이 가지는 고유성질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전문술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그
래서 찰나는 ‘법의 고유성질을 드러내는 최소단위의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찰나동안에 존재하는 법은 당연히 조건발생 즉 연이생(緣而生)이다. 그리고 전찰나의 법이
멸하면 바로 다음 찰나의 법이 조건발생한다. 그러므로 단멸론도 절대로 될 수 없다. 이것을 남․북 아
비담마/아비달마와 유식에서는 등무간연(等無間緣, samanantara-paccaya)이라 하여 아주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전찰나가 멸하면 후찰나로 흘러간다.[相續, santati] 그러니 법은 단멸론도 상주론도 아
니다. 아비담마는 이렇게 법들을 찰나(khaṇa, Sk. kṣaṇa)와 흐름[相續]으로 멋지게 설명해낸다.
찰나와 흐름(상속)은 모든 불교 특히 남․북방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 교학의
양대 축이 된다. 상좌부 아비담마 뿐만 아니라 모든 북방불교의 교학적 토대가 되는『아비달마 구사
론』전체에서 찰나와 상속은 아주 많이 나타나고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유찰
나(有刹那) 즉 찰나적 존재”(『아비달마 구사론』제2권 593쪽)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찰나란] 법(존
재) 자체를 획득하고서 무간(無間)에 바로 소멸하는 것을 말하니, 이와 같은 찰나(kṣaṇa)를 갖는 법을
‘유찰나(kṣaṇika)’라고 이름한다.”라고 찰나를 정의한다.(Ibid) 그래서『아비달마 구사론』의 역자는 “찰
나적 존재를 설하는 유부에 있어 존재(법, dhamma)와 찰나는 동의어이다.”라고 강조한다.(제3권 925
쪽)
그리고 찰나와 상속 특히 상속은『아비달마 구사론』제9품「파집아품」(破執我品)에서 자아 등의 실체
가 있다는 삿된 견해를 척파하는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강조되고 있다. 그래서 ‘온의 상속’, ‘제온의 상
속’, ‘오온의 상속’, ‘유루온의 상속’ ‘찰나생멸하는 제행의 불이(不異)의 상속’이라는 표현이『아비달마
구사론』제9품에는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아비달마 구사론』권오민 역, 제4권 1340쪽 등과 특히
제4권 1379~1380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 찰나와 상속은 대승불교의 아비달마인 유식으로 그대로 전승되어서 유식의 가장 중요한
이론인 식전변설로 전개된다. 세친 스님의 제자인 안혜 스님은『유식30송』을 설명하면서 이 식전변
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으로 멋지게 해석한다. 그리고 유식의 여
러 주석서에서는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薰種子),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의 구조
로 식전변을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成唯識論疏抄』등) 
이처럼 남․북방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대승 아비달마인 유식도 유위법을 찰나와 흐름[相續]으로 설명
해 낸다. 이것이 아비담마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여기에 조금이라도 사무치지 못하면 아비담마
와 유식은 한낱 고승들의 언어적 유희에 불과하게 되고 말 수 있으니 두려운 일이다. 
나아가서 윤회는 이러한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그래서『청정도론』등은 “무더기(蘊, 온)
와 요소( 界 , 계)와 장소( 處 , 처)의 연속이요, 끊임없이 진행됨을 윤회라고 한다.”(Vis.XVII. 115;
DA.ii.496; SA.ii.97)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상좌부 아비담마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물․심의 현상은 생멸을 거듭하지만 물질이 생멸하는
속도와 마음이 생멸하는 속도는 서로 다르다고 설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물질이 머무는 동안
마음은 16번이나 일어났다가 사라진다고 가르친다.(물질이 일어나는 순간까지 합치면 17번이 되고
그래서 1:17로 정리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상좌부 아비담마의 인식론은 정교하게 체계화되었다. 이
렇게 인식과정을 정리해 보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 같은 우리 마음은 너무나 엄연한 법칙에 의해서
매찰나 생멸하고 있다는 것을 아비담마는 가르쳐주고 있다.


16. 법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 파악해야한다

이것은 모든 불교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이다
“법들에는 보편적인 특징[共相]과 개별적인 특징[自相]의 두 가지 특징(lakkhaṇa)이 있다. 이 둘 가운
데서 물질의 무더기[ 色 蘊 ]는 변형되는 것이 개별적 특징[ 自 相 , paccatta -lakkhaṇa = sabhāvalakkhaṇa]임을 밝히셨다. 변형되는 것은 물질의 무더기에만 있고 느낌 등(즉 수․상․행․식)에는 없기
때문에 개별적 특징이라 불린다.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은 느낌 등에도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보편적
특징[共相, sāmañña-lakkhaṇa]이라 불린다.”(SA.ii.291∼292)
중국에서는 보편적 특징을 공상(共相)으로 개별적 특징을 자상(自相)으로 옮겼다. 이 자상(自相)과 공
상(共相)은 법(dhamma)을 파악하고 구명하고 이해하고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론으로 아비담마/
아비달마와 중관과 유식과 여래장 계열의 모든 논서에 적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자상과 공
상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교교학을 논할 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담마․아비달마 특히『아비달마 구사론』에서 보듯이 북방 아비달마가 이처럼 제법의 자상의 입장
을 너무 많이 강조했기 때문에 반야부의 경들은 제법무아로 특징지어지는 공상(共相)을 강조하고 있
는 것이 분명하다. <주>
<주> 自相謂一切法自相。如變礙是色自相。領納是受自相。取像是想自相。造作是行自相。了別是識
自相。如是等。若有為法自相。若無為法自相。是為自相。共相謂一切法共相。如苦是有漏法共相。
無常是有為法共相。空無我是一切法共相。-『대반야바라밀다경』
그러나 <주>에서 보듯이 반야부의 경들에도 제법의 자상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상을 말
하지 않으면 우리는 법들의 구분이나 차이나 분류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야․
중관은 단지 공상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반야심경』은 오온[자성]개공(五蘊[自性]
皆空)을 강조하고 있다.


17. 제법은 철저한 상호의존에 의해서 존재한다

찰나동안에 존재하는 법은 당연히 조건발생 즉 연이생(緣而生)이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24가지
조건[緣, paccaya]을 통해서 모든 법의 상호의존[paṭṭhāna] 혹은 상호관계를 밝히고 있고, 설일체유부
에서는 6인-4연-5과로써, 유식에서는 10인-4연-5과로써 제법의 상호의존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상호의존은 크나큰 힘(satti, śakti)을 가진다. 화엄의 중중무진연기는 이러한 상호의존이 발달된 것이
지 이것을 초기경의 12연기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북방의『아비달마 구사론』에서는
제법의 상호관계를 6인-4연-5과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데 용어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6인: 능작인, 구유인, 상응인, 동류인, 변행인, 이숙인
② 4연: 증상연, 등무간연, 소연연, 인연
③ 5과: 증상과, 사용과, 등류과, 이숙과, 이계과
이렇게 남방불교의 핵심인『청정도론』과 북방불교의 요체라 할 수 있는『아비달마 구사론』은 이러한
상호의존[緣]을 통해서 제법의 상호관계를 심도 깊게 설명해내고 있다. 상호의존은『아비담마 길라잡
이』제8장을 참조하기 바란다.


18. 아비담마는 위빳사나 수행의 이론적 토대이다

위빳사나는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이다.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것
은 그 대상이다. 사마타의 대상은 닮은 표상이라는 개념[施設]이고 위빳사나의 대상은 바로 이 법이
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는 위빳사나 수행의 이론적 토대가 된다. 특히 이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는 법
을 구경법(究竟法, 勝義法, paramattha- dhamma)이라 부른다.
위빳사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施設, 假名, 빤냣띠, paññatti)이라는 술어와 법(담마,
dhamma)이라는 술어를 구분해야한다. 예를 들면 ‘사람, 동물, 산, 강, 컴퓨터’ 등 우리가 개념지어 알
고 있는 모든 것은 모두 빤냣띠 즉 개념적 존재이다. 이것들은 다시 여러 가지의 고유성질을 가진 법
들로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적 존재(빤냣띠, paññatti)는 이런 여러 가지 고유성질을 가진 법
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강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최소 단위인 물의 요소(āpo-dhātu)를 위시한
고유성질을 가진 물질의 법들이 모여서 흘러감이 있을 뿐 강이라는 불변하는 고유의 성질은 없다. 그
들은 마음이 만들어낸(parikappanā) 개념이지 그들의 본성(sabhāva)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재는 아니
다. 
사마타의 대상은 개념(빤냣띠)이요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담마)이라는 것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구
분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므로 숙지하고 있어야한다. 그래서 위빳사나는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법들에 대해 무상․고․무아의 세 특상을 꿰뚫는 것(paṭivedha, 洞察,『청정도론』IV.48.) 혹은 수관(隨觀)
하는 것(anupassanā, PT)으로 정의된다. 위빳사나는 이처럼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각각 무상(無相)
해탈과 무원(無願) 해탈과 공(空) 해탈을 실현하는 체계로 설명이 된다.(DA.iii.1003~1004) 
그래서『무애해도』는 “① 확신[信解,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無常)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얻는다. ② 고요함[輕安, passaddhi]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
하면서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얻는다. ③ 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
서 공(空)한 해탈을 얻는다.”(Ps.ii.58)라고 이 세 가지 해탈을 설명하고 있다.
■ 아비담마에서 본 마음의 특징
⑴ 먼저 마음(citta)은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리고 마음은 상속(相續)한다. 이것을 마음의 흐름[心相續,
citta-santati]이라한다. 우리가 세간적인 차원에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들의
흐름,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것이다. 아비담마의 마음은 한순간에 생겼다가 멸하는 것이
다.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나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수행하고 멸한다. 그러면 그 다음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이렇게 마음은 흘러간다. 이들은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보통의 눈으로는 각
각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⑵ 불교 특히 아비담마에서 마음은 항상 ‘대상(ārammaṇa)을 아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
음은 대상을 안다는 것으로서 오직 하나의 고유성질[自性, sabhaava]을 가진다. 마음은 일어나서 대
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하고서 멸한다. 그러면 인식과정의 법칙(niyama)에 따라 다음 순간의 마음이
일어난다. 아비담마 전체에서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므로 반
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담마빨라(Dhammapāla)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대
상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잘못”(Pm.454)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식에서도 마음은 언제나 대
상을 가진다. 아뢰야식도 반드시 종․근․기(種․根․器, 종자와 신체와 자연계,『주석 성유식론』194~195
쪽 참조)라는 대상을 가진다. 대상 없는 마음이란 결코 상정할 수조차 없다.
⑶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서는 하나이지만 찰나생․찰나멸하기 때문에 불가설․불가설의 마음이
일어나고 멸했고 일어나고 멸하고 있으며 일어나고 멸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그 종류(jāti)에 따라
서 넷으로 분류가 되는데 ‘유익한[善] 업을 짓는 마음’과 ‘해로운[不善] 업을 짓는 마음’과 ‘과보로 나
타난(vipāka) 마음’과 ‘단지 작용만 하는(kiriya) 마음’이다. 이 넷의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
하다.
⑷ 마음은 대상을 알면서 업(業, kamma, 의도적 행위)을 짓는다. 업이 중요하고 무서운 이유는 업은
반드시 과보[異熟, vipāka]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업과 과보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아비담
마의 가장 큰 관심 가운데 하나이다. 업의 과보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① 삶의 과정
중에 과보가 나타나는 것이고 ② 다음 생의 재생연결을 결정짓는 것이다. 
⑸ 무수히 짓는 업은 당연히 ① 삶의 과정(pavatti) 중에 무수한 업의 과보를 생산한다. 이러한 무수한
과보 때문에 존재는 삶의 과정에서 무수한 대상과 마주친다. 대상과 마주치는 이러한 무수한 마음을
‘과보의 마음(vipāka-citta)’ 혹은 ‘과보로 나타난 마음’이라 한다. 
⑹ 한생에서 지은 무수한 업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업의 과보에 의해서 ② 다음 생이 결정된다. 다음
생을 결정하는 업은 한 생의 맨 마지막 자와나(javana, 速行) 과정에서 ‘업’이나 ‘업의 표상’이나 ‘태어
날 곳의 표상’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그러면 이것을 대상으로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이 결정되어
일어난다.
이렇게 하여 일어나는 다음 생의 최초의 마음을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ññāṇa)’이라 하며 이것은
당연히 업의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재생연결식이 결정되면 이 재생연결식은 그 생에 있어서
바왕가 혹은 존재지속심으로 찰나생․찰나멸하며 한 생 동안 상속하고 그 생의 맨 마지막 마음인 죽
음의 마음으로 끝이 난다. 그러면 또 그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위와 같은 과정으로 일어난다.
⑺ 이렇게 업의 과보는 ① 삶의 과정 중에서도 무수히 나타나며 ② 재생연결식이 결정되어 존재를
지속하게 한다. 유식에서도 전자는 인전변(因轉變)과 관계가 있고 후자는 과전변(果轉變)과 연결되어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전자를 인식과정(vīthi-citta)에 개재된 마음(제4장)이라 부르고 후자를 인식과
정을 벗어난(vīthi-mutta) 마음(제5장)이라 부른다. 전자는 대상과 마주치는 역할을 하고 후자는 윤회
를 하고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⑻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음은 업을 짓는다. 업은 과보를 가져온다. 과보는 ① 대상과
마주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②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로도 나타난다. 이처럼 마음은 대상을 만나
서 이를 알고(경험하고) 업을 짓고 과보를 가져오고 또 만나고 알고 업을 짓고를 거듭하면서 찰나생․
찰나멸을 거듭하면서 계속해서 흘러간다(상속). 이것이 우리 마음의 실상이다 이처럼 아비담마와 유
식은 철저히 마음의 찰나와 상속에 바탕하여 법의 이론을 전개해간다.
⑼ 마음은 ①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대상을 아는가? 이것을 설명하
는 것이 인식과정(vīthi-citta, 제4장)이다. 이러한 인식과정은 남방 상좌부 아비담마에 상세히 설명되
는데 이것은 가히 불교인식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인식과정은 물질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물질찰나)과 마음이 일어나서 머물고 멸하는 시간
(심찰나, citta-khana)은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한 번 물질이 일어났다가 멸하는 순간에 마음
은 17번 일어났다가 멸한다고 전제하는데 이것은 상좌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설명이다.
인식과정은 크게 외부의 대상을 인식하는 五門인식과정과 마음의 대상을 인식하는 意門인식과정으
로 나누어진다. 오문인식과정에서 예를 들면 눈에서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는 ‘같은 대상’을 두고
17번의 마음이 생멸한다. 이것도 대상에 따라서 ① 매우 큰 것 ② 큰 것 ③ 작은 것 ④ 매우 작은 것
의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지는데 매우 큰 대상일 경우에 17번 일어나는 마음들은 바왕가(지나
간 바왕가, 바왕가의 동요, 바왕가의 끊어짐), 오문전향, 받아들임, 조사, 결정, 7가지 자와나(javana,
速行), 2가지 등록이다. 그러나 충격이 매우 작은 대상들은 바왕가의 동요만 일으키고 인식과정이 끝
나 버린다.(<도표 4.2> 참조) 의문인식과정은 오문인식과정보다 단순한데 그 이유는 오문전향, 받아
들임, 조사, 결정의 과정이 없고 의문전향 다음에 바로 자와나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념해
야할 것은 각각의 인식과정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잠재의식을 거쳐서 그 다음의 인식과정으로 넘어
간다는 점이다.
⑽ 마음은 ② 존재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마음을 상좌부에서는 존재지속심
[有分心, 바왕가, bhavaṅga, 잠재의식, life-continuum]이라 하고 유식의 아뢰야식(阿賴耶識, 알라야윈
냐나, ālaya-vijñāna, 藏識)의 이론으로 발전한다. 마음은 이처럼 찰나생․찰나멸을 거듭하면서 존재를
지속시키면서 흘러간다. 마음을 비롯한 오온의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이 내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재
생(再生, puna-bbhava, rebirth)이라 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재생 즉 금생의 찰나생․찰나멸의 흐름
[相續, santati]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을 윤회(輪廻, saṁsāra, vaṭṭa)라고 정의한다.
(Vis.XVII.115; DA.ii.496; SA.ii.97)
특히 마음의 흐름과 재생연결의 원동력인 업에 대해서 상좌부 아비담마는 16가지로 자세하게 설명
하고 있는데 남방 아비담마에서 제시하는 業說을 나 자신의 삶에 비추어서 이해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 관련주소
☞ [BBS불교방송] 
☞ [BBS불교방송] 각묵스님의 아비담마 길라잡이
☞ [유튜브] 아비담마 길라잡이
☞ [다음카페] 초기불전연구원
* 출처: 초기불전연구원


2022/06/27

정신교육(교재)

나 아닌 내

내, 아는(알려지는) 대상 속엔 없는, 무언가를 아는 내 자신입니다. 
아는 주체인 내 자신을 모르고, 알려지는 나를 내 라고 여겨짐(혼동)을 착각이라 한다. 
모든 내면적 장애의 근본 원인이다.


정신교육(교재)
2020. 2. 24.

1. 정신교육, 왜 필요한가 - 그 이유와 목적.

2.. 정신이,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3. 저 자신을 깨닫기.

4. 제 본분을 깨우치기.

5. 아는 것(주체, 행위, 객체=意識)

6. 현명과 우매,

7. 자유(自由)와 유자(由自)

8. 실험과 확인.

9. 훈련.
===

'정신교육(敎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 정신교육, 왜 필요한가- 그 이유와 목적.2020. 2. 25.

사람이 하는 일을 기능별로 크게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겠다.

1. 생명체의 본성(本性- 유전자에 입려된)이 하는 생명체로서의 성장, 유지관리 이다.

2. 생명체의 두뇌가 하는 심성(위의 1에 소용되는 정보(識)와 평판(意)의 생성과 실행) 활동이다.  

3. 생명체의 정신이 하는 자성(스스로 하는)으로 위의 본성을 보조하고 심성을 통제하는 활동이다.


위의 1 본성(本性)은 본래 부터 죽는 순간까지 불변이고, 생명이 스스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음이나 정신은

보조 작용을 할 수 있을 뿐이고 그로써 필요, 충분하다.

2. 심성(心性)은 본성(本性)을 보조하는 기능이 최우선이니, 본성에 장애가 되지 말아야 한다.

3. 자성(自性-자유, 자율)은 심성이 본성에 기여하는지 장애를 유발하는지 점검, 예방, 시정하여야 한다.


위의 세 기능 중에서 교육과 훈련의 필요가 가장 중시되는 기능이 무엇인가는 자명해 진다.

생명(본성)은 교육의 필요도 없고, 교육할 타 기능도 없다, 그냥 그대로 보조만 해 주면 족하다.

마음(심성)은 컴퓨터(두뇌)에 생성되는 자료(정보와 판단) 같은 것 으로, 스스로 누구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가 될 수 없다.

결국, 본성을 보조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하는 정신만이 교육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있고, 그럴 필요도 있는 대상이다.


본성이 하는 본능적인 일은 상대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고, 무조건 존중되어야 할 일 이다.

심성이 하는 의식적인 일은 본성을 기준으로 하여 (상대적) 비교, 평가, 선택, 판단, 결정등이 가능하고 필요하기도 한바,

그런 상대적인 평판을 수행하는 기관이 바로 정신의 자성(스스로 하는 일) 이다.


이상으로, 정신의 역할, 그 비중이 엄청나게 중차대(重且大) 하다는 것이 이해되리라.

동시에, 그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정신의 능력 계발이 긴요하기 때문에 교육과 훈련도 필요한 이유도, 목적도 이해되리라. 

마음이 잘못 되어서 본성을 위시한 인생에 도움은 적고 해로움이 크다면, 그걸 예방, 시정, 교정하는 역할을 정신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 60억이 넘는 인류가 살고 있다.

각 자의 마음대로 살려고 한다.

그러면 어찌 되겠으며, 지금도 어떤 상태로 인류가 공존하고 있는가?


공존 공영이냐, 공멸이냐의 갈림이 개인마다의 마음에 달려 있고,

그 마음의 목적 방향이 그 정신이 결정하기에 달려 있고,

그 정신의 -공존 공영으로의- 결정은 교육과 훈련으로만 가능하다.


함께 잘 살래!?.

함께 공멸할래 !?  

===
2. 내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2020. 2. 24.

내가 어디에 있는가?

1. 태허(太虛)라는 영구(無始無終), 부한, 불변, 절대의 텅빔(宇라 하자)에,

2. 공(空 ; 불교적 용어), 또는 [콩알 우주]라는 질량불변(質量不變)인채로, 항상변화(恒常變化)하는 와중(渦中)에 있는(宙)라 하자),

3. ㅇㅇㅇ 은하계, 태양계, 지구, 한반도, 세종시에 살고 있는,

4. 한 사람의 두뇌 속에 있다는 것은 자인(自認)할 수 밖에 없다.

(이 사람이 살아 온 기억이 두뇌 속에 있고, 그 것을 내가 알려면 두뇌 속의 그 기억 가까운 곳에 있을 수 밖에 없으니..)


내가 어디에 있는가는 알았지만, 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모를 뿐만 아니라 알 길이 전혀 없다.

왜냐, 내가 내를 알려면 아는 자(주체)로서 알려지는 자(객체)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하나이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둘이라고 가정해도, 알려지는 자를 "아는 자는 하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는 자 하나가, 동시에 아는 자(주체)와 알려지는 자(객체)로 두 곳에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그래서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면, 바로 그 묻는자 자신이 내 이다.

대답은 "내가 내다", "내가 내 자신이다", "내가 내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내가 아는 것 일체가 내 아니다" ,

"내가 내 자신이라고 안다는 것이야 말로, 그 것이 내 자신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할 수 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내(自) 아닌 것(他)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름을 무엇이라 지어서 자칭(自稱)하느냐 뿐 이다.


남이사 내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으니 전혀 알 수가 없다.

단지, "저 사람의 정신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구나", 어떨 땐 "술이 취하여 정신이 (거의)없구나" 할 때도 있으니,

내 또한 내 이름을, 사람들의 보편적, 객관적인 이름을 따라 "정신"이라고 하자.

자칭할 때는 "내", 또는 "내 자신"이라 하고. 


내는 두뇌 속에 있는 정신이다.

잠들면 아무 것도 모르고, 내가 어디에 잠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깨어 나면 스스로  온갖 일을 한다.

===
3. 내가 자각(自覺, 生覺)하기.2020. 2. 24.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아는 주체로서, 내를 알려지는 객체로 삼을 길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고 나면- 너무나 쉬운 일 이다.

그렇지만, 이해하지 못 하면 알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 한 일 이다.


그래서, 시대의 고금(古今). 양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 자신을 찾고, 만나서, 알겠다고 나섰지만

누구도 성공할 수 없을 수 밖에.

게다가 그 일이 성공할 수 없는 원인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헛수고만 크게 하였지....  


그래서 "내가 내 자신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구나" 하는 정도로만 알고, 왜 부가능한지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 하였던지,

그 후로는 "생각(生覺)하라, 깨달음(覺)을 내라(生)"고 가르쳤지만, "깨달음"이란 말의 뜻을 또 "말로 가르칠 수 없다",

"오직 스스로 깨달아서 증득(證得)하는 수 밖에 없다"고 하니, 도대체 깨닫기를 하라는건지, 말라는건지....

알지도 못 하는 일을 무슨 수로 하라, 한다는 건지.....,


필자는 아주 쉬운 방법을 하나 제시한다.

자, 심호흡을 한번 하고 지금 부터 내 스스로 무엇이건 해 보자.

단지, 내가 스스로 하고 말고를, 어떻게 하고 말고를 주도하면서 한다는 걸 잠시도 잊지 말고.


그렇게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던 일을,

 "자, 멈추고 돌이켜 보자" 하고는 "내가 지금 조금 전에 한 일을 되 돌아 보고 있다"고 명확하게 말 하시라.

 그 다음엔 지금 무엇을 하고 있건, 그 일을 멈추자 하고는 일단 멈추자 하라.


그런 다음에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한 자가 누구냐(무엇이냐)?"를 확인해 보시라.

알고 있는 모든 일을 확실히 알고는, 그 일은 일단 제외하고 남는 게 무엇인가?

바로, 그 일을 한 자가만 남는다. "그게 바로 내 였고, 지금도 여전한 내 이구나" 하는 것이 깨달음, 자각이다.


두뇌에다 스스로 질문이나 명령하는 말을 걸어 놓고, 그 말을 내가 했구나, 그 말과는 따로 -그 어떤 말을 하건 말건-내가 있구나 하는

깨달음(覺)을 만들어 냄(生)을 생각(生覺)이라 한다.

아는 일(知)이, 대상(객체, 他)를 향하여 [후랫쉬]를 비추어 나아 가는 일 이라면, 깨달음(覺)은 내를 향하여 [후랬쉬]를 되돌아 비춤(返照)과

같다.


쉬운 예를 들자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일을 무엇이 하는가?"

그 일을 하는 자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일"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 일 모두를 제외하고 나야, 그 일을 한 자를 알 수가 있다.

바로 두뇌 속의 내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자"고 하였음을 망각(忘覺)하지 않았다면.


무언가를 찾는 자는, 그 찾는 행위나 몸 표면에는 없다, 두뇌 속에서 찾자고 명령하고 있으니까.

걱정하는 나를 찾아 보라, 걱정 속에도 없고 걱정한다는 행위에도 없다, 두뇌 속에서 "걱정스럽다는 나"는 보고 알 뿐 이다.

깨달음을 왜 강조하고 권하느냐 하면, 깨닫지 못 하면 착각에 빠져서 내 일을 제대로 못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라고 아는 모든 것은 -착각의 소산일 뿐-  내가 아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제외하고 나서 남는 유일무이한 내 이다.  

 


===
4. 제(自) 본분(本分)을 깨우쳐 알기.2020. 2. 25.

"깨우치다"를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쓰고자 한다.


깨다 : 단단한 것을 부수다, 둘러 싸고 있는 껍질을 까다는 뜻 이다.

우(愚) : 어리석음. (모르는 줄도 모름) 

치(痴) : 어리석음. (제가 알고 있는 그대로를 맹신, 맹종함)

깨우치다(脫愚痴) : 알려고도 못 하고, 고집불통인 정신자세를 깨고 나오다.


본분(本分) : 본래 부터 짊어 지고 있는 불변의 소임이다.


이 사람의 정신인 내 타고 난 본분이 무얼까?

이런 질문을 두뇌 속에 하려면, 첫째 내(自)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 둘째, 내(自)를 무엇이 왜 만들었을까?를 -과학적 연구는 불가능하니- 논리적으로 탐구해야 하고,

셋째, "아하 그 것(내를 만든 자)이 그래서(그런 목적으로) 내를 만들었구나" 수긍할 결론을 이끌어 내도록 까지

갖 가지 가설을 제시해 가면서 검토해야 한다.


이 사람을 만든 자는, 어차피 내가 알 수는 없는 이 사람 창조자 이다. (太虛? 空?, 콩알우주? 절대신?)

그가 이 사람 안에 내(自)라는 정신 기능을 만들었을까?

"내가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그래서 이 사람의 인생을 잘 살게 운전하라는 명령을 부여해서"

그걸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생명(生命 ; 본성대로 살개 하라), 운명(運命 : 두뇌(意識)를 잘 운전하라)이라고.


이 둘이 내 본분인지 여하를 확인해 보자.

1. 내가 할 수 있고, 내 이외의 무엇이 할 수 없는 일 인가?

2. 내가 올바르게 하면 이 사람의 인생에 도움이 되고, 하지 않거나 잘못 하면 인생에 해로움이 되는 일 인가?

위의 두 가지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만이 가능하다면, 내 아닌 누구의 일 이라 할 수가 없으니, 내 본분이 아니라 할 수도 없다.


깨어 나 있으면서 자기로 부터의 생명과 운명 수행에 성실해야 하고 말고.

내 만의 유일한 본분이니까. 

===
5. 내(아는 주체)가 스스로(自) 아는(觀) 것(意識).2020. 2. 26.

사람마다의 그 내가 아는 것이야 너무나 많지만,

"내가 아는 것" 이라는 말의 뜻은 거의 모른다.

그저 "내가 아는 것이, 내가 아는 것 이지" 하는 동어반복식으로 아는 줄 믿고 있을 뿐 이다.

이하의 설명을 듣고도, 과연 그리 알고 말는지...그의 결정이지만.


1. 내는,

그 사람의 내부에서 아는 일을 하는 기관, 즉 아는 행위의 주체이다. 

고로 내가 없으면 아는 일을 할 자가 없으니, 아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아는 주체이기 때문에, 아는 일을 하지 않아도 내가 없지는 않지만, 그 반대(내가 없이 아는 일이 있는)는 없다.


2. 아는,

내가 대상을 대(對)하여 아는(觀) 일 이다.

여섯 가지 식(識)과 두 가지 마음의 소리(意語)를 대(對)하여 아는 일을 본다(觀)고 한다. 

두뇌 속에서 떠 올려 본다, 들어 본다, 맡아 본다, 맛 본다, 만져 본다, 느껴(마음을) 본다 하는 등등이 모두 아는 일 이다.


3. 것.

내가(1), 아는(2), 대상인 것(3) 으로 두뇌 속의 내(1) 앞에 아는(2) 대상으로 등장해 있는 의식(意識)이다.

색성향미촉(前 5識) 다섯가지 정보와 인간관계에서 획득된 언어(문자) 정보(제6 述語識)과, 그 정보들에 부가되어 있는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적인 말(意語)로 남으로 부터 전해 진 평판(제7 他意語), 내 자신이 만든 평판(제8 自意語),그리고 심층의식(제9 의식)이다.


내가 무엇이냐, 내가 무엇을 아느냐 하는 두 가지 질문은 밀접한 관련을 지을 수가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 알면, 내 앞에 무엇이 있느냐를 알기 쉽고,

내가 아는 것이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를 알면, 그걸 아는 내가 무엇인가를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

아는 자와 아는(알려지는) 것은 가까이, 마주 대(對)하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 몰라도,

내가 온갖 기억이나 상상을 안다는 것, 그 기억이나 상상이 두뇌 속에 떠 올라 있어서 안다는 것은 안다.

그러니 내 또한 두뇌 속 기억과 상상 가까이에, 마주 대(對)하여 있으면서 아는(觀하는) 내(自稱), 즉 정신(통상적 호칭)이라고 안다.


이상 내(주체), 아는(행위), 것(객체)을 정확히 이해하여,아는 모든 것이 [내 스스로 아는 의식]임을 명념하고,

특히 내 스스로(自) 깨달음(覺)을 놓지지 않아야 본분(生命과 運命 수행)에 충실할 수가 있다.

실제 그대로를 전부 아는 것도,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마음대로" 알면서 그걸 사실 그대로라 오인함을 경계, 확인해야 한다..


그러니 현명, 겸손, 신중, 침착, 성실등등은 아무리 강조, 명심해도 지나치다 할게 아니다.


===

6. 내(정신), 현명(賢明)과 우매(愚昧).2020. 2. 27.

현명(賢明), "지혜롭고(賢) 사리에 밝다(明)"고?

"무엇이 지헤이고 사리이냐?" 물으면 뭐랄텐가?


우매(愚昧),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고?

역시 "무엇이 어리석음이고, 사리가 무엇인데?" 물으면 뭐랄텐가?


어차피 언어의 뜻은 그걸 사용하는 사람 개, 개인의 두뇌 속에 있지, 달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여기서는 내 나름의 뜻 이라고 제시해 보이련다.


정신의 아는 능력의 본원(本源)을 지혜라 하련다. 

자각능력, 탐구력, 관찰력, 기억력, 상상력, 사고력, 분석력, 종합력, 비교력, 평가력, 판단력, 추리력, 논리력, 반성력, 결정력 등등..

내가 하는,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의 원천을 지혜라 한다고.


본래의, 불변의, 원천(源泉)적 능력이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더(加)해 지고, 덜(減)해지지 않고, 본원에서는 변하지도 않지만,

현현(顯現)되는 능력은 정신이 스스로 계발해서 쓰기 여하에 달려 있다.

고로, 남이 충고나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하여 남의 지혜를 계발헤 주고 받거나, 감소케 하고 감소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비유하자면, 동굴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을 비추는 등불(정신)의 빛(지혜)과 같아서, 그 등불을 쓰는 사람이 쓰기 여하에 따라서 비추어져서 알고 쓸 수 있는 보물이 찾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고로 지혜를 계발해서 쓰려면,

가장 먼저, 내(개인의 두뇌 속 정신)가 지혜라는 빛을 쓰는 등불과 같다는 자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잠 들면 등불이 꺼짐과 같고, 잠 에서 깨면 켜 짐과 같다고.

등불로 빛의 강약과 방향을 조절하는 것이 내 기능이고 역할이라고.


다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열거와 분류별 종합을 해 보자.

1.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감각신경을 움직여서 관찰(정보획득)을 해 보자. (예 : 눈을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서)

2.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운동신경을 움직여서 (의식을) 실행해 보자.(예 : 손으로 이런 저런 일을 하기)

3.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언제, 어느 때를 기억해 내어서 보자.(예 : 초등학교 졸업식 장면을 추억하기)

4.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내일, 어디서, 무엇을 할지를 상상해 보자.(예 : 내일 몇시에.......거쳐서 병원에 가서...를 상상해 보기)   

5.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앞으로 어떻겟 살아 갈 것인가 여러가지 구상을 해 보자.(예 : 법관, 공무원, 군인, 농사꾼...)

6. 두뇌에다 질문을 걸어서 "그 사람을 그리워(또는 미워) 하면 무슨 효과가 발생하나?" 대답을 요구해 보자.

7. 두뇌에다 명령을 하여 "백해무익한 마음은 께끗이 청소하자"고 해 보자.

8, 두뇌에다 질문과 명령을 섞어 가면서 이런 저런 사고(思考)를 형성해 보자.

9,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내 자신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대답을 들어 보는 문답을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해 보자.

10,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내 아니라고 부정(否定)하기를 끝까지 하고, 더 이상 부정할 것이 없을 때, 지금까지 모든 걸 내 아니라고 부정하던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보자. (있기는 있는데, 찾아지지 않는구나...바로 찾는 내가 내 이구나...깨닫기 까지)

11. 희망을 만들기, 희망을 스스로 버리기를 해 보자.

12. 누군가를 나쁘다고 말해 보고, 무언가를 좋다고 말해 보자, 그리고는 그걸 버리기를 해 보자.

13, 내를 무엇이, 왜 맍들었을까 질문하고, 내 스스로 납득이 되겠금 추리를 해보자.

14. 내게 삶을 도우라는, 운전하라는 명령을 누가(무엇이) 부여해 놓았을끼?

15. 우주란, 시간과 공간은, 만물의 시작은...등등의 말을 해 놓고 두뇌 속에서 그 답을 만들어 보자.

이하 무궁무진하므로 생략하련다.


이런 거의 무진장에 가까운 능력을 제대로 계발하여 쓰지 못함을 우매(愚昧)라 한다.

등불(정신)이 빛(지혜)을 제대로 밝히지(明) 못 하여, 어둑컴컴한 새벽같은 상태라는 비유로 우매라 한다.

현명한 정신, 우매한 정신이 다른 게 아니고, 본래의 실상으 ㄴ같지만, 단지 입고 있는 옷이 밝고 화려한 빛이냐, 어둑칙칙하냐의 차외와

같을 뿐 이다. (고로, 우매한 옷의 안 에는 현명한 잠재력이 계발해 쓰라고 대기하고 있지만...) 





===
7. 자유(自由 = 내 스스로 말미암아)와 유자(由自 = 이유가 내를...)2020. 2. 29.

자유(自由), 글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내 스스로(自) 말미암아(由)"이지만,

쉽게 풀이하자면 "내 스스로 만드는 이유, 구실, 의도, 목적등등.."라는 뜻 이다.

내가, 이유등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지배한다는......


유자(由自), 통상적인 용어기 아니라, 위의 자유와 상반되는 뜻으로,

"이유, 구실, 의욕, 의도, 목적 등등이 내를 지배하는 것 처럼" 이란 뜻 이다.

이유가 내를 (사실상)지배한다는. 내가 이유에 지배당하면서 그런 줄 모르는 경우이다.


예컨대, 자살폭탄 공격에 나서는 사람의 정신이,

생생한 각성(生覺, 自覺) 상태에서, 자주적으로 이유와 목적을 만들어서 그걸 실행, 실현하는 경우라면 자유(자신의 이유)라 하고,

제가 알게 된 이유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정신 상태를 유자(이유에 종속적인 자신)라 한다는 뜻 이다.

대부분의 자살폭탄 공격자는 확신범적 자유에 빠진, 실제로는 그 자유에 지배당하는 유자(由自, 자유의 자식같은)에 불과하다.


정상적, 합리적인 정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고집불통에 빠진 사람에게 물어 보라.

그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할까, 그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이 "무조건 내 하고싶은대로(그걸 자유라고) 할꺼야" 할까? 


용어나 풀이가 불완전 하여 이해하기 곤란하더라도, 대충 그런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로는 이해되리라. 

자유와 유자의 사이에 "자유 같은 유자"라 할만 한 것이 있으니 바로 "자의(恣意)"이다.

마음(意)이긴 한데, 내 자유의 산물인 내 마음(自意)이 아니라, 두뇌 속에 멋대로 형성된 -경험적 습성과 학습의 소산인- 만든 자 불명의 마음(意)이 사실상 주인 노릇을 하는 경우이다. (일종의 방자한 마음이다) 


확고한 자각(自覺)으로 본분 수행을 위하여 구사하는 내 스스로의 합목적적인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마음대로할 자유"는, 진정한 [자유]와는 정반대인 사이비 자유라 해야 옳다.

그래서 "(사이비)자유로 부터의 (내) 자유"니, "(사이비) 자유에 대한 (내) 자유"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 이다.


이 구별만 헷갈리지 않게 할 수 있으면, 그래야만 진실한 자유를 누리게 될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