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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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속 '나'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메타내러티브로 풀어보는 이야기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나'라는 개념, 다시 쉽게 정리해볼까? 그림 그리는 것에 비유해보자. 일단 그림의 배경부터 쫙 깔아둘 거야. 그 다음에 이 배경 위에 '나'를 쓱싹 그려 넣는 거지. 이 배경이 어떤 색깔인지, 어떤 분위기인지에 따라 내 표정, 몸짓, 옷차림, 행동까지 모든 게 정해지겠지? 여기서 이 배경이 바로 우리 인생의 거대한 '메타내러티브' 라고 보는 거지.
근데 신경과학적으로 "아, 이 메타내러티브를 담당하는 게 뇌의 '여기'야!" 하고 딱 잘라 말할 순 없어. 마치 '나 = 쐐기앞부분'이라고 퉁쳐버리는 건 아니라고 전에 얘기했지? '나 = 뇌' 또는 '나 = 솔방울샘'이라고 하든, 이런 식으로 뇌의 특정 부위를 '나'라고 도식화하는 것 자체가 본질주의적 메타내러티브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거든. 예전에 철학이나 과학이 신학의 영향 아래 있을 땐, '나 = 영혼' 아님 '나 = 의식'이라고 퉁치던 게 공식은 같되 내용물만 달라진 거야. 이 부분 헷갈리지? 다시 설명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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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액기스'는 대체 뭔데? – 본질주의의 늪에서 벗어나기
여기서 말하는 본질주의가 뭔지 다시 한번 짚어보자. 이건 시간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어떤 본질, 본성, 핵심, 즉 '나'를 지탱하는 '홍삼 액기스' 같은 게 사람뿐 아니라 모든 것에 있다고 보는 생각이야. 이런 본질의 특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그래서 보편적이라고 하지. 또 시간성이란 게 없어. 어제나 그제나 20년 후나 전이나 그대로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가 아니라 "어떻게 액기스가 변하니?"를 묻는 셈이지."
그래서 뇌의 특정 영역인 후부 대상피질PCC이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 같은 걸 아무리 얘기하고, '메타내러티브'를 아무리 강조해도, 결국 본질주의적 시선에선 이렇게 되묻게 되는 거지: "그래서 뭐가 중요한데? 뭐가 본질인데? 대체 '나'의 '액기스'는 뭔데?" '나'라는 게 어떤 불변의 본질이 있어서 생겨난 게 아니라, 이 '메타내러티브'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나'만 존재한다는 것.
이 지점이 바로 본질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판이하게 다른 부분이야. 이걸 '내러티브 턴'narrative turn, 서사적 전회라고 할 수 있어. (이 부분은 사진의 테이블 차트로 비교해 보면 이해가 훨씬 쉬울 거야.) '나'의 액기스는 허상이고 사회문화생물제도의 영향을 받은 메타내러티브에서 그려낸 '나'만 있을 뿐야. 그러니까 '나'는 어떤 정해진 '핵심'이 있는 게 아니라, 뇌가 계속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엮어내며 만들어가는 역동적인 '이야기' 인 것! (이 부분은 좀 있다가 더 얘기할게.)
우치다 타츠루(2025)가 그의 책 <목표는 천하무적>에서 '팔' 비유를을 예로 들어볼게. 나보다 훨씬 쉽게 설명해.
"가령 우리는 팔이라는 것을 하나의 해부학적 실체인 양 말하지만, 사실 팔은 단독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도적인 움직임에서 '팔'은 견갑골이나 횡격막이나 고관절과 연동하여 몸통과 눈빛과 미세한 변화에도 반응한다. 하나의 동작(예컨대 '칼을 뽑는' 동작)에는 거의 무한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수많은 신체 부위와 기능이 참여한다. 그렇기에 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팔을 들기'라든지 '찌르기' 같은 어느 한 가지 동작이 적절하게 이루어진 다음에 그 동작에 어떠한 '전건'이 관혀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팔이라는 것을 하나의 해부학적 실체'로 보는 게 본질주의적 접근이라는 걸 우치다는 '몸으로 생각'하는 접근과 비교하고 있어. 이 '몸으로 하는 생각'은 시스템적인 접근이야. 실체를 찾는 게 목적이 아니라 어떤 외부 조건에 의해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라보고 유추inference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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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로 이해하는 '나', 내러티브적 자기narrative self는 뭘까?
내 안의 본질이 '나'를 '나'되게 하는 게 아니라 내러티브가 주범이라는 관점은 획기적인 거야. 이 '내러티브'로 이해하는 '나', 즉 '내러티브적 자기’란 도대체 뭘까? 이걸 제대로 알려면 내러티브 자체를 먼저 파고들어야 해. 이 내러티브 개념, 문학에서 정말 중요하지. 이 내러티브 개념에 물꼬를 튼 사람이 바로 인지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Jerome Bruner(1915-2016)와 도널드 폴킹혼Donald E. Polkinghorne(1936-2018)이였어. 브루너가 뭘 주장하는 들어보자.
브루너가 만든 사진의 상단 테이블 차트(Bruner, 1985)를 보자. 이 테이블 차트에서 내러티브적 인지narrative cognition과 패러다임 적/논리과학적 인지paradigmatic/logico-scientific mode cognition의 다른 점을 구분하고 있어. 둘이 뭐가 다를까? 패러다임적 생각은 과학을 연구하는 방식처럼 보편적 타당성과 시강성에 구애받지 않는 반면, 내러티브적 생각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회 안에 처한 자신의 고유성과 맥락을 탐색한다고 보면 대충 감이 올 거야.
패러다임적 접근에서 내러티브적 접근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이것 ‘내러티브 턴’narrative turn이라고 할 수 있어. 사진의 하단 테이블 차트(Pleh, 2020)을 보면 이해가 더 쉬울 수 있겠다.
구심적 접근에서 원심적 접근으로의 이동, 이걸 내러티브 턴이라고 볼 수 있어. 구심적 접근은 내부주의적이고, 원심적 접근은 외부주의적인 거지. 원래 자기 이해는 패러다임적, 논리 중심의 방식에 치우쳐 있었는데, 이게 내러티브를 통한 자기 이해로 옮겨간다는 점에서 턴, 전환turn이 일어난 거야.
내러티브적 인지는 우리가 ‘나’를 구성하고 세계와 타자를 이해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켜. 보통은 ‘나’에 대한 이해를 내면에서 시작했잖아. 근데 이제는 외부, 사회, 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나’를 이해하려는 흐름이 강해졌어.
데카르트는 코기토에서 ‘나’를 찾으려고 했지만, 외부주의적 관점은 ‘나’라는 정체성을 내러티브라는 외부 구조에서 찾는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를 내 안에서만 찾으려던 습관을 멈추고, 내 주변—가족, 사회, 제도, 문화—이런 걸 통해 나를 이해하게 되는 거지. 그게 바로 내러티브 턴이 가져온 커다란 시선의 전환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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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우치다, T. (2025). 목표는 천하무적 (박동섭 Dongseop Park, 역). 유유.
Brunner, J. (1985). Actual Minds and Pssible Worlds. Cambridge/MA, Harvard University Press
Brunner, J. (1990). Acts of Meaning. Cambridge/MA. Harvard University Press
Brunner, J. (1991). The Narrative Construction of Reality. Critial Inquiry. 18, 1-21.
Pleh, C. (2020). Narrative Identity in its Crises in Modern Literature. Hungarian Philosophical Review. 64, 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