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입력 : 2012.10.12
곽차섭 | 부산대 교수·사학과
15세기 리얼리즘 회화서 중세의 마지막 빛을 보다
르네상스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비켜가기 어려운 두 역사가가 있다. 스위스의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네덜란드의 요한 하위징아(회이징아라는 표기가 더 적절하지만)가 바로 그들이다. 둘은 모두 미술사가라는 점, 특히 15세기 유럽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이들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5세기에 대한 상반된 해석이다.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에서 이 세기를 ‘근대의 시작’이라 본 반면,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1919)에서 같은 시기를 중세의 절정이자 마감이라고 간주했다. 이후 두 사람의 해석은 르네상스 문화를 바라보는 대표적인 관점으로 자리 잡았다.
그들의 출발점은 15세기 회화의 리얼리즘이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 시기를 아직은 덜 성숙한 “아이의 천진함” 정도로만 치부해 왔던 종래의 시각을 거부하고, 15세기 전반기의 이탈리아에서 이미 새로운 정신이 감지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도나텔로의 조상(彫像) ‘막달라 마리아’가 표현하고 있는 극단적 자연주의에 경악했음을 고백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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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점점 더 실제 세계의 모습을 그려내려 했던 당시의 경향이 교회가 요구하는 신앙적 기준보다는 현실의 인간과 사물이 몸담은 자연적 기준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교회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인간적 개성이 발현된 결과가 곧 리얼리즘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화가들의 개성은 곧 르네상스적 개인의 발현과 동일한 것이었다. 근대인의 결정적 승리는 15세기에 일어났다고 한 그의 언명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부르크하르트와는 달리 하위징아는 15세기 리얼리즘을 오히려 중세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쇠퇴의 징후로 보았다. 그는 반 에이크 형제와 그들을 계승한 플랑드르 회화가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는 리얼리즘을 근대의 전령이 아닌, 중세의 광휘가 마지막으로 빛을 발한 국면으로 간주한 것이다. 반 에이크의 걸작 ‘롤린 상서(尙書)의 마돈나’를 보자. 그는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세부적인 것의 섬세함은 가히 황홀할 지경”이라면서, “만약 호기심에 이끌려 너무 가까이 가서 보는 무모함을 저지르게 되면 끝장”이라고까지 경고한다. 그 세밀함에 사로잡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는 바로는 바로 이 세밀함에 ‘기적’이 있었다. 세세하고도 정밀한 묘사는 결코 종교화의 기준을 넘지 않으며 그것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15세기 리얼리즘에서 근대적 개인성과 세속성을 보는가 혹은 중세 내내 견지되어 온 종교적 조화를 보는가가 둘 사이의 좁힐 수 없는 차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하위징아는 이러한 회화적 관점을 15세기 전체의 역사에 투영하고자 했다(부르크하르트 역시 그랬다). 가을은 그동안 가꾼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때이다. 하지만 추수가 끝난 후 남는 것은 황량하고 텅 빈 들판이다. 하위징아가 굳이 ‘가을’을 제목으로 쓴 것도 바로 이러한 이중적 함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15세기 플랑드르 회화가 구현한 극적인 리얼리즘은 그에게 중세의 찬란한 광휘이자 동시에 그 사멸로 느껴졌던 것이다.
현대의 많은 역사가들은 부르크하르트적 ‘인간의 발견’이 넓게 잡아 14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까지의 150여년 사이에 새로이 등장했음을 인정한다. 동시에 르네상스기를 반드시 중세와의 단절로 간주하기보다는 아직도 중세적 요소가 다수 혼재되어 있는 일종의 과도기로 생각한다. 이런 점은 사실 부르크하르트보다는 하위징아의 입장에 더 가깝다.
얼마 전 타계한 저명한 미술사가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반 에이크 형제가 그린 겐트 제단화가 “말의 눈에 어린 빛이나 가죽의 주름까지도 볼 수 있을” 정도라서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고 경탄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이로움에도 그들은 회화를 여전히 관례의 문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중세적이라고 평가한다. 회화를 일종의 과학으로 생각한 당시 이탈리아(특히 피렌체) 화가들의 근대성과는 뚜렷이 대비된다는 의미다. 이 역시 하위징아의 해석과 대동소이하다. 하위징아의 문체는 부르크하르트에 비해 좀 더 심미적이고 시적이다. 종종 멜랑콜리의 느낌마저 준다. 르네상스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중세의 가을>(연암서가)을 통해 ‘가을’이 주는 다양한 향취를 음미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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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1 16: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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