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7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다 김용옥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다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다
혁신교육감 시대를 위한 도올의 교육입국론 l ② 공부론

수정 2014-06-17 



우리말에 “공부”라는 말이 있다. 이 “공부”라는 말은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육을 생각할 때, 그 함의의 99%를 차지한다. 나의 자녀를 “교육시킨다”는 말은 “공부시킨다”는 말과 거의 같다. 나의 자녀에 대한 자랑도 “우리 아이는 공부를 잘해요”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공부를 잘한다”는 뜻은 과연 무엇일까?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를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우리 일상언어의 가장 평범한 의미체계를 정직하게 밝히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것은 “학교 시험 점수가 높다”는 뜻이다. 우리 아이 공부 잘한다는 의미에 실제로 딴 뜻이 없다. “학교 시험 점수가 높다”는 것은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뜻이고,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것은 서울의 몇몇 일류대학에 입학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우리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생각하고 저 현묘한 허공에 무한히 펼쳐진 갤럭시를 생각할 때, “공부”가 겨우 요따위 밴댕이 콧구멍만한 서울의 시공에 집약된다는 것은 감내하기 어려운 위선이요 치졸함이건만, 우리 5천만 동포의 현실적 가치관은 공부의 다른 의미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공부의 본래적 의미를! 공부를 한자로 쓰면 “工夫”가 된다. 이것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그 자형에서 “공장 인부” 정도 이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런데 이 “工夫”는 우리 현대어에서 실제로 영어의 “to study”라는 말과 상응한다. 그 라틴어 어원인 “studēre”도 “학문을 한다”는 뜻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노력해서 습득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 개념적 지식의 한계를 넓힌다는 뜻으로 인간 이성의 확충이라는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엘리트주의적 함의를 갖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동양 삼국의 서양언어 번역이 일치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스터디”의 번역어는 일본에서는 “벤쿄오스루”(勉強する)


로 되어 있고, 중국어에서는 “니엔수”(念書)로 되어 있다. 일본말의 “벤쿄오스루”는 “억지로 힘쓴다”는 뜻이니, 사실 공부라는 것이 억지로 해야만 하는 괴로운 것이라는 매우 정직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니엔수”는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스터디”의 실제 행위 내용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선비를 “뚜수르언”(讀書人)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스터디”의 번역어로서는 일본어나 중국어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만이 유독 “공부”(工夫)라는 요상한 자형을 선택했을까? 일본어나 중국어에는 “공부”라는 말이 없을까? 물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스터디”와는 거리가 먼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일본어의 “쿠후우스루”(工夫する)는 “요리조리 궁리하고 머리를 짜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국어의 “工夫”는 그것을 과거의 웨이드자일시스템으로 표기하면 “kung-fu”가 되는데, 그것을 그냥 표기된 영어로 발음하면 “쿵후”가 된다. 다시 말해서 중국말의 공부는 이소룡이나 견자단이 펼치는 “쿵후,” 즉 무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공부”의 원의는 사실 중국어의 “쿵후”가 보존하고 있는 의미를 계승한 것이다.

“工夫”라는 글자는 선진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당나라 때 고승들의 어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당대에 이미 구어로서 정착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工”은 “功”의 약자이고, “夫”는 “扶”의 약자이다. “工夫”는 “功扶”를 의미한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도와서(扶) 공(功)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성공한다”는 말도 단순히 “출세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공을 이룬다”(成功)는 말을 신체의 단련을 통하여 어떤 경지를 성취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한국인의 다양한 무술적 성취야말로 공부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공부”라는 개념을 가장 많이 활용한 사상가가 바로 신유학의 에포크를 마련한 주희(朱熹, 1130~1200)라는 인물이다.

주희는 그가 편찬한 신유학의 앤톨로지인 <근사록>(近思錄) 속에서 송학(宋學)의 선구자 정명도·정이천 두 형제의 사상을 표현하면서 “공부”라는 말을 자주 썼다. 그리고 그의 <어류>(語類)에서 그 자신의 독특한 수양론을 펼치면서 “공부”라는 말을 무수히 활용하고 있다. 우리가 서양 언어인 “스터디”를 번역하는데 “공부”를 고집한 것도, 바로 우리나라가 정통 주자학의 완강한 전통을 연속적으로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인이 사용하고 있는 백화적 표현에서 “꽁후우”(나의 씨케이시스템으로 표기한 “쿵후”)는 쿵후라는 좁은 무술의 개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 단련을 통하여 달성하는 모든 신묘한 경지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선반공이 쇠를 정교하게 깎는다든가, 용접공이 철판 용접을 감쪽같이 해낸다든가, 서예인이 능란하게 붓을 휘두른다든가, 어느 학동이 암산을 귀신같이 한다든가, 도축업자나 요리사가 식칼을 자유자재로 놀린다든가 하는 것을 중국인들은 “他的工夫不錯”(그 사람, 공부가 대단하다)라고 표현한다. 희랍철학에서 덕(德)이라는 것을 “아레떼”(aretē)라고 표현하는데, 아레떼는 바로 칠예(七藝)의 모든 방면에서 한 인간이 신체적·정신적 단련을 통하여 달성하는 탁월함(excellence)을 의미한다. 공부와 아레떼는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옛 한석봉의 고사에서 한석봉이 학업을 중단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모친이 어두운 밤중에 떡을 써는 장면이 있다. 다시 말해서 모친이 도마 위에서 떡을 써는 것과 아들이 종이 위에 글씨를 쓰는 것은 동일한 “공부”의 경지로서 비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판소리 소리꾼들이 득음을 하는 수련을 “소리공부”라고 하는데, “갸는 공부가 되얏서”라고 내뱉는 소리꾼의 명제는 바로 “공부”라는 말의 원의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할 것이다.

왜 한국만이 유독 ‘공부’(工夫)라는
요상한 자형을 선택했을까?
중국어 ‘工夫’를 영어로 발음하면
‘쿵후’가 된다.
중국말의 공부는
이소룡이 펼치는 ‘쿵후’
즉 무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공부’의 원의는
중국어 ‘쿵후’의 의미를
계승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도덕”(道德)이라는 말을 서양말의 모랄리티(morality)에 해당되는 말로서 의식 없이 쓰고 있는데, “도덕”이라는 말은 본시 노자(老子)의 사상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것은 도(道)와 덕(德)의 합성어이다. <도덕경> 51장에 보면, “도는 생(生)하는 것이고 덕은 축(畜)하는 것이다”(道生之, 德畜之)라는 함축된 명제가 있다. 도는 생생(生生)하는 천지 그 자체를 일컫는 것이라면 덕이란 그 천지의 생생지덕을 몸에 축적해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도는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이다. 그것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다. 교육이란 축적해 나가는 과정, 즉 덕(德)의 측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도가 자인(Sein)이라면 덕은 졸렌(Sollen)이다. 축적이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교육이란 시간의 예술이다. 이것은 교육의 모든 주체가 철저히 시간성에 복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육에는 “선험적 자아”는 부재한 것이다.

“공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보자! 어느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기 위하여 “시간(짬) 있니?”라고 말하는 것을 현대 중국어로 표현하면, “你有沒有工夫?”가 된다. 다시 말해서 “공부”는 디시플린(=아레떼)을 의미하는 동시에 시간(時間)·틈(暇)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공부”가 반드시 시간을 요한다는 철칙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의 선험적 구성이나 비시간적 깨달음이 아니다. 그것은 축(畜)되어야만 하는 덕(德)이다. 그 덕이 바로 교육이요, 우리가 말하는 도덕(morality)의 핵을 형성하는 것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에 이런 말씀이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 5:28) 생각만으로 이미 간음죄를 범하였다는 것인데, 사실 한 인간의 내면적 상상에 관해서는 우리가 측량할 길이 없다. 정죄란 그것이 사회적 행위로 표현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행동 이전의 사유에 대하여서도 도덕성을 요구하였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다. 그런데 더 본질적인 문제는 저 여자를 음탕하게 쳐다보는 것이 나의 몸의 요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저 여자를 음탕하게 쳐다보지 않는 것은 마음속에서 상상하고 지우는 관념적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몸의 공부(쿵후), 즉 몸의 단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기나긴 시간을 통하여 공부를 축적해 나갈 때만 가능한 것이다.

퇴계의 말년 걸작인 <성학십도>(聖學十圖)에는 우주와 인간 전체가 상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명”(天命)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인간에게 명령하는 하늘, 인격적 주재자의 가능성으로서의 천(天)이라는 관념이 소실되어 버린 것이다. “천명, 즉 하늘의 명령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퇴계는 명쾌히 대답한다: “천(天)은 리(理)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 천(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행위는 나의 책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늘은 곧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은 곧 리(理)며 성(性)이다. 나의 마음은 나라는 존재의 일신(一身)을 주재한다. 그런데 그 마음을 주재하는 것은 경(敬)이다. 그래서 퇴계의 철학을 경의 철학이라 말하고 그의 교육론을 경의 교육론이라 말한다. 주희(朱熹)는 학자의 공부로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이사(二事)를 말했는데, 그는 암암리 이 양자가 호상발명한다고 말하면서도 궁리, 즉 객관적 사물의 탐구에 더 역점을 두었다. 퇴계는 거경과 궁리를 근원적으로 포섭하는 경의 철학을 확립하고 철저히 우리 몸의 내면의 본질을 파고든 것이다.

경이란 우리가 여기서 말한 “몸의 공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명이 사라진, 이 지상에 던져진 고독한 인간이 스스로의 자각에 의하여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Process)인 것이다. 경(敬)은 우리말에서 보통 “진지함”(earnestness) “공경함”(reverence)을 뜻한다. 그런데 신유학의 독특한 용어로서는 일차적으로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의미가 된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가 하나에 전념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다. 경은 현대심리학에서 말하는 “어텐션”(attention)으로 환치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집중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집중력이야말로 모든 학습의 효율성을 지배하는 근원적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학생이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의 양이 곧 공부의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 공부의 핵을 형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중하는 마음의 상태가 경(敬)인 것이다. 이러한 경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공부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우리 민족사상사의 획기적인 분수령을 기록한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崔水雲, 1824~64)의 좌잠(座箴)에 이런 말이 있다: “나의 도는 넓고 넓지만 또 간략하기 그지없다.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별다른 도리가 아니요, 성(誠), 경(敬), 신(信) 세 글자일 뿐이다.”(吾道博而約, 不用多言義. 別無他道理, 誠敬信三字) 성(誠)은 우주적 운행의 성실함(Cosmic Authenticity)을 말하는 것이요, 경은 집중하는 진지한 마음상태를 말하는 것이요, 신(信)이란 신험 있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수운은 제자들에게 성·경·신 이 세 글자 속에서 “공부”(工夫)를 할 것을 당부한다. 그의 <동경대전>은 “공부”라는 용어의 전통적 의미를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의 맥락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고 거시적 테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교육의 역사는 “공부의 역사”였던 것이다.

공부는 몸(Mom)을 전제로 한다. 몸이란 정신(Mind)과 육체(Body)의 이분법적 분할을 거부하는 인격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니, 그것이 곧 “수신”(修身)이다. 공부는 몸의 디시플린을 의미하는 것이다. 몸의 단련이란 몸의 다양한 기능의 민주적 균형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어느 부분의 기능도 그 탁월함(아레떼)에 도달했을 때 가치상의 서열을 부여할 수 없다. 개념들의 연역적 조작에 영민한 학생이 수학을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나 운동선수가 탁월한 신체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나 음악성이 뛰어난 학생이 악기를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을 동일한 가치의 “공부”로서 인정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몸”이라는 우주의 총체적인 조화로운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 일어나고, 세수하고, 밥 먹고, 걷고, 생활하고, 독서하고, 놀이하고, 쉬고, 잠자는 모든 일상적 행위가 경(敬)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 진지함 속에 개인과 사회와 우주의 도덕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교육의 원리로서 자각해야 한다. 자녀에게 성 모랄을 가르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기 방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매사에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을 스스로 공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몸의 모랄을 깨닫게 하는 더 유용한 도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서구적 자유주의의 파탄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유구한 일상적 규율의 원리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의 외래어 표기는 씨케이시스템에 의함)

김용옥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