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1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CRS NEWS 2017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CRS NEWS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7/05/30 [08:43]

창립의 배경과 일본 패망후의 급신장







니와노 릿쿄(庭野日敬)가 1940년대 개조한 일본 신종교 입정교성회(立正佼成会)는 일련종에서 파생되었으나, 일련정종, 창가학회 등과는 전혀 다른 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立正佼成會는 1940년 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일본사회가 패배주의로 위축되어 있던 시절 급성장한 신종교 중의 하나다. 회원 30명으로 출발했으나 1955년 말에는 36만세대, 1970년에 1백만을 헤아리는 부침을 겪었다. 개조(開祖)인 니와노 릿쿄는 세계 종교간대화와 화합을 위해 힘썼으며 그 노력으로 세계종교인평화회의가 만들어지고 이후 종교간 교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한국에는 1978년 문공부에 종교활동을 한 후 미미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는 2천여 세대의 회원이 있다. 일본 신흥종교 입정교성회의 탄생과 부침, 홯동 그리고 한국의 상황을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마치 이슬람 사원과 같은立正佼成会(입정교성회) 대성당의 모습


立正佼成会의 한국 활동과 일본 신흥종교의 부침·교리(上)

창립의 배경과 일본 패망후의 급신장

입정교성회은 재가불교 교단으로 가정이나 직장,지역사회 일원으로 생활하면서 마음을 닦고 사회의 일원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것을 목표로 하고있다. 재가종단으로 가정마다 보전(寶前)이라고 부르는 불단이 있다. 보전은 집안에서 가장 청결한 곳에 모시며 정면 중앙에는 「본존」우측에 「개조·법조의 법호」좌측에 「총계명·택지인연계명」을 안치한다. 본존 앞에는 밥,물,차,꽃,과자,과일을 올린다. 아침,저녁으로 보전을 향해 독경공양을 한다. 기도제목으로 아침에는 새로운 서원을 세우고, 저녁에는 하루를 마치는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각 가정마다 있는 보전은 가족 모두의 귀의처의 역할을 한다.

교성회의 창립자 니와노 릿쿄(庭野日敬)는 1906년 11월 15일 신갈현 산촌 마을인 중어소군 십일련 대자관소에서 중농의 차남으로 태어나, 3대가 같은 집에 사는 대가족 생활을 통해 일찍부터 조상숭배의 예절과 가족상호간의 생활태도 등을 배웠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던 그가 17세되던 1924년 동경으로 올라와 연료상을 하던 석원숙태랑(石原淑太郞)의 집에서 일하게 되면서 부터 그는 온갖 종교신자들을 만나기 시작한다. 고향을 떠나 처음 만난 집 주인 석원은 아국신덕사(石原은 我國信德社)라 하는 칠신신앙과 육요를 접합한 역학으로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집단에 다니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그는 석원으로 부터 역술을 접하게 된다. 그 뒤 1931년 11월에는 그의 장녀가 중이염을 앓은 것을 계기로 근처에 살던 천구불동존(天狗不動尊)을 모시면서 수험도의 가지기도를 행하는 산복 강목매야(山伏 綱木梅野)를 찾아가 기도를 받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그녀의 영술에 감동을 받은 정야(庭野)는 낮에는 장사를 하고 밤에는 강목의 기도소에서 수험도의 수행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 수행(水行), 살물(殺物)을 끊고, 화식을 중단하는 등의 수행을 결행한 끝에 반년정도 지나서는 사범을 대신하여 지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다. 수험도의 수행을 마친 그는 아국신덕사(我國信德社)에서 익힌 점술을 사용하여 모여드는 상담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영술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드디어는 불동강을 열어 장사는 팽개친 채 산복(山伏)으로서의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런 그의 행적을 보다 못한 산복 강목(山伏 綱木)이 찾아와 두가지 일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자, 그는 고민에 빠져 성명학을 하던 소림성고(小林晟高)가 운영하던 대일본홍우회을 찾아가 상담하게 된다. 오히려 小林은 山伏의 일이란 훨씬 과학적임을 설득하여 그는 다시 성명감정을 가계운영과 함께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역학, 성명학, 수험도의 부동수행(不動修行) 등을 전전하던 그에게 일대 전기가 된 것은 그의 차녀가 뇌막염에 걸리게 되면서 부터였다. 당시 이웃에 살던 영우회 신자인 반총(飯塚)이라하는 산파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도 찾아와 영우회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마침 반총(飯塚)의 권유를 받은 뒤 일주일만에 차녀가 고열이 나면서 의식불명의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즉시 가까운 경응병원(慶應病院)에 달려가 진찰을 하니 기면성 뇌막염으로 손쓸 수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는다. 낭패에 빠진 그는 어떻게 해서든 딸을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산파가 가르쳐준 영우회 사지부 신정법좌를 지도하고 있던 신정조신(新井助信)을 찾아갔다. 신정으로 부터 선조공양과 총계명에 대해 들은 그는 즉시 영우회에 들어가 총계명을 하고 선조공양을 올렸다. 그러자 차츰 차녀의 병이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1주일 정도 지나자 거의 완쾌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영우회에 대해 크게 신뢰를 가짐과 동시에 특히 지부에서 행하는 신정(新井)의 법화경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이 당시의 감회를 정야는 이렇게 자서전에서 회고한다.

“법화경 강의를 들으면서 이것이야 말로 바로 내가 찾고 있던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 아무리 그것에 대해 흠을 잡아보려 해도 흠 잡을 데가 없었을 뿐 아니라, 광대무변의 세계 속에서 모든 인간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원하는 완전 무결한 구수강으로 느껴졌다. 마음도 육체도 사회도 무엇이든지 남김없이 다 감싸는 것이다. 정말로 엄청난 놀라움이었다. 솟구치는 피처럼 신선한 감동이었다.

스스로 일생의 스승이라 부르는 신정(新井)과의 만남은 법화경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기도 했다. 신정의 법화경 강의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달리, 풍부한 인생경험이나 신앙체험을 바탕으로 법화경의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서 풀어 가르치는 것이었다. 입회 7개월만에 부지부장이 된 니쯔키요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여 그들을 인도할 목적으로 우유상으로 전업했다. 이 인도생활 중에 1936년 그는 중요한 신앙동지인 장소묘교(長沼妙佼)와 만나게 된다. 그녀는 여름에는 빙과를 팔고 겨울에는 군고구마를 파는 「기옥옥(埼玉屋)」의 여주인으로 그 당시는 자식을 잃고 자신도 만성 자궁내막염으로 고생하고 있던 터였다. 인도활동으로 그녀를 만난 정야는 그녀에게 선조공양을 올릴 것을 권하면서 영우회에 들어 오도록 권유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천리교를 믿고 있던 그녀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정야의 인도가 너무나 간절했기에 일단 會에 들어오기로 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그녀가 정야를 따라 모임에 참가했지만, 그러나 그녀는 계명을 내놓아도 좀체로 관심을 두려고 하지도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정야가 장소(長沼)의 선조대대의 계명을 모아 과거장에 써넣는 계명을 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달 아침 불가사의하게도 그녀의 복통이 가라앉고 출혈도 멈추었다고 한다. 이 신비체험을 한 뒤 그녀는 영우회의 선조공양을 믿게 되고 신정지부의 회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입회 후 그녀는 신정에게 법화경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정의 부인으로 부터 신을 불러내는 영능술을 익히게 된다.

그 후 정야(庭野)와 묘교(妙佼)는 짝을 이루어 많은 회원을 인도하면서 지부내에서 일정한 권위를 쌓아간다. 그러던 중, 1938년 1월 7일 열린 「영우회 전국지부장회의」가 열려 니와노도 신정과 함께 그 회의에 참석했다. 그 회의는 영우회의 발전전략을 위해 논의하기 위한 취지도 있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1935년 이후 잦아지는 교단 분립을 막고 교단본부의 지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이 회의 모습을 기록한 성회측 자료에 의하면 회의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도중에 소곡희미(小谷喜美) 회장이 갑자기 일어나 “자네들은 어느 누구할 것 없이 신자인 주제에 (법화경)설교 따위를 늘어 놓는다 하는데 어떻게된 일인가?”고 하면서 “법화경을 강의하던 시대는 끝났어. 그 따위 짓을 하는 것은 악마야.”라고 질타했다 한다. 이에 정야와 함께 참석하고 있던 신정은 화가 나 자리를 떠 버리고 다음날 아침 정야는 묘교와 상의하고, 석원숙태랑, 신정조신(石原淑太郞, 新井助信)과도 상의하여 영우회로 부터 독립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리하여 1939년 3월 5일 개조(니와노 릿쿄)와 협조(나가누마 미요꼬)는 「대일본입정교성회」를 결성하고 본부는 니쯔키요의 가게 이충에 두고 회장에 국주회원인 촌산일이(村山日裏)를 옹립한다. 이 때 회원은 불과 30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정야는 이미 익히고 있던 성명감정이나 방위감정원을 국주회 회원이었던 촌산일이(村山日裏)에게서 배운 성명학과 기학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상담자들의 상담에 웅하고, 또 국주회의 법화경론을 배워 법화경에 대한 지식을 넓히면서 꾸준히 신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미요꼬는 신정부인에게서 배워 둔 영술이 더 발전되어 엑스타시에 빠지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으며, 이것을 통한 영감지도로 또한 신자를 확보해 나갔다. 차츰 고정 신자가 확보되면서 니츠키요는 주로 법화경의 교의 연마에 전념하고, 미요꼬는 신자들의 교화 육성을 맡게 된다. 이러한 역할분담을 통해 교세를 넓혀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던 1941년에는 신자수가 1천여명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미요꼬의 꿈속에서 받은 계시를 바탕으로 현재 교단 본부가 있는 화전본련(和田本堜)에 1942년 5월 7일 본부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하고, 니츠키요도 그때까지 경영하고 있던 우유배달업을 중단하고 본부로 이주하여 종교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창기의 순탄한 발전은 1943년 3월 미요꼬의 영감지도가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삼병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는 구류사건으로 약간의 시련을 겪는다. 이 사건으로 인해 촌산회장이 물러나고 지부장 반 정도가 회를 떠나게 된다. 그래서 회장에 니츠키요가 취임하고 미요꼬는 부회장을 맡아 회를 이끌게 된다.

종전과 더불어 종교법인령이 공포되면서 나타난 이른바 신종교의 러시아워에는 「대일본입정교성회」도 크게 발전하게 된다. 1945년 회원 세대수가 1,277세대에 이르렀던 교세는 이듬 해에는 3,242, 1947년은 9,542세대로 늘어나게 된다. 1948년에는 명칭도 「입정교성회」로 바꾸고 1950년 10월 1일자로 종교법인으로 등록한다. (삼국유사문화원장·동국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