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1

법화경의 전도사 니치렌(日蓮) - 불교닷컴

법화경의 전도사 니치렌(日蓮) - 불교닷컴



HOME 오피니언 칼럼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법화경의 전도사 니치렌(日蓮)
김춘호
승인 2013.10.15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1. 가마쿠라신불교(鎌倉新仏教)⑤지난 강좌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가마쿠라 신불교의 여러 조사들 중에서 호넨(法然)과 신란(親鸞)은 정토신앙, 에이사이(榮西)와 도겐(道元)은 선사상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호넨은 종토종, 신란은 정토진종, 에이사이는 임제종, 도겐은 조동종의 종조가 된다. 이번 강좌에서 살펴볼 니치렌(日蓮:1222-1282)은 철저한 《법화경(法華經)》 신앙자로서 일련종(日蓮宗)의 종조이다.



니치렌은 1222년 아와노쿠니 나가사군(安房国長狭郡, 현재의 치바켄 카모가와시)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계나 유년시절의 성장과정에 관해서는 정확하지 않고, 12세에 인근의 기요미즈야마(清水山)의 세이초지(清澄寺)로 들어가 도우젠보우(道善房)를 스승으로 수학한다. 당시 세이초지는 천태종의 유력 산악 사찰로서 법화경 신앙을 비롯한 정토, 밀교 등을 겸수하는 도량이었다고 한다.

16세 되던 1238년 출가하여 제쇼우보우(是生房) 렌쵸(蓮長)라는 법명을 얻는다. 그리고 1242년 세이초지에서 내려와 교토의 히에이잔(比叡山)으로 유학한다. 이때부터 1253년 세이초지로 다시 돌아가 법화경의 전도를 선언할 때까지 약 12년간 교토와 나라의 사원들을 돌며 당대의 고승들을 찾아 수학한다.



▲ 니치렌(日蓮). (사진:http://ja.wikipedia.org/wiki/)
천태종 소속의 젊은 승려 니치렌이 경험한 당시 불교계는 세속화에 찌들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기성종단의 무기력함과 염불만을 주장하며 민중을 현혹시키는 정토교의 융성이었다. 이를 바로잡고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민중들을 위해 니치렌이 찾은 해답은 부처님의 정법인 법화신앙의 부흥이었다.



1253년 세이초지로 돌아온 니치렌은 4월 28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향해 ‘남묘호렌겟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외우고 법화경의 전도를 선언한다. 현재 일련종(日蓮宗)에서는 이날을 입교개종(立敎開宗)일로 기념하고 있기도 한데, 법화경신앙의 선양과 더불어 정토신앙을 강하게 거부하는 그의 행보가 공식적으로 이날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니치렌(日蓮)으로 개명한다.

1254년 니치렌은 당시 정치적 수도 가마쿠라(鎌倉)에서 본격적인 홍교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1257년 8월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가마쿠라는 거의 초토화되었고, 거기에 홍수와 질병, 기근이 뒤따르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낳는다.

법화경 신앙자 니치렌의 눈에는 그러한 천재지변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 일본이 정토신앙이라는 사법(邪法)에 물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저술하여 정토신앙을 버리고 법화경에 귀의하여 현실세계를 불국토로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만약 위정자들이 법화경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국내에서는 내란이 일어나고 외국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즉, 니치렌은 정토교에 대한 강한 배척은 물론 위정자들의 종교적 책임을 함께 묻는 것이었다.

니치렌의 이러한 입장은 당연히 막부의 노여움은 물론 정토교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일생동안 위정자들의 탄압과 정토신자들의 살해위협이 계속된다. 일련종에서는 이를 법난(法難)이라고 한다.

1260년 8월 정토교의 신자들이 니치렌이 기거하던 초암을 불태우는 사건(松葉谷法難)이 일어난다. 그리고 니치렌의 포교활동은 금지되었고, 1261년 5월 체포되어 현재의 시즈오카켄 이토시(静岡県伊東市)로 유배된다.(伊豆法難)

1264년 유배에서 풀리자 가마쿠라에서 포교활동을 재개하지만, 같은 해 11월 정토교 신자 도우조카게노부(東条景信)의 습격을 받아 제자 2명을 잃고, 니치렌 자신도 왼팔과 미간에 상처를 입는다.(小松原法難)






▲ 카나가와켄 후지자와시(神奈川県藤沢市) 류코우지(龍口寺). 류코우법난(龍口法難)당시 니치렌의 처형장에 세우진 사찰(사진::http://ja.wikipedia.org/wiki/)
그런데 1268년 그의 예견이 적중한다. 몽고가 항복과 입조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니치렌은 법화경 신앙으로의 귀의를 더욱 강하게 주장하게 되고, 몽고와의 결사항쟁을 결정한 막부는 1271년 니치렌과 그의 제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려 한다. 그러나 형장에서 광명이 빛나는 기적이 일어났고, 결국 니치렌은 현재의 니이가타켄 사도(新潟県佐渡)로 유배된다.(龍口法難)



사도에서의 약 3년간의 유배기간 동안 니치렌은 《개목초(開目抄)》,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 법화만다라(法華蔓茶羅) 등을 완성한다. 특히 《개목초》에서는 수난을 당하는 것이야 말로 말법시대를 사는 법화경신자로서의 증거라고 하여 계속되는 법난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었던 교단과 신자들의 동요를 달래고 있으며, 스스로를 ‘상행보살(上行菩薩)의 응현(應現)’이라고 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내 일본의 기둥이 될 것이며, 내 일본의 눈이 될 것이며, 내 일본의 배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니치렌의 삼대서원(三大誓願)이 유명하기도 하다.

1274년 봄, 유배에서 풀려난 니치렌은 막부에 소환되어 몽고침입을 재차 예언하였고, 실재로 그로부터 5개월 후에 몽고가 침입하지만, 법화경에 귀의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후 니치렌은 현재의 야마나시켄 미노부산(山梨県身延山)에 쿠온지(久遠寺)를 개산하고 그곳에 머물며 제자들과 신자들의 지도에 전념한다. 그리고 1282년 10월, 제자 6인(日昭, 日朗, 日興, 日向, 日頂, 日持)을 후계자로 세우고 향년 61세로 입적한다.



▲ 야마나시켄(山梨県) 쿠온지(久遠寺) (사진:http://ja.wikipedia.org/wiki/)
니치렌 사상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법화경》 신앙이라는 점이다. 특히 그는 말법시대의 중생들은 ‘남묘호렌겟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唱題) 것만으로도 성불 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법화경이야 말로 석존 깨달음의 참 모습을 전하는 경전으로 가장 수승하며, 니치렌 스스로가 법화경의 유포를 석존으로부터 부촉 받은 상행보살의 화신이라고 주장한다. 즉, 철저한 법화경 신자요 전도사인 것이다.



일생동안 계속되었던 권력으로부터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한 사람의 법화경 신앙자로서 자신의 신념을 통한 중생구제와 불국토 건설을 꿈꾸었던 니치렌은 가마쿠라시대가 낳은 또 하나 거성이었다. 현재, 니치렌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는 단체로는 불교종단으로서 일련종(日蓮宗)을 비롯하여 신자조직인 창가학회(創價學會), 정치조직인 공명당(公明黨) 등이 유명하다.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 강사로 불교문화를 가르친다. 전남 여수 출생. 원광대학교 동양종교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에서 불교문화를 전공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일본불교사연구소, 사적과 미술(史迹と美術) 등 한·일 학계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고대 한국과 일본의 불교 문화재나 유적, 불교신앙 등을 주된 연구테마로 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일본의 역사」(2010, 역서), 「고대 한국과 일본과 일본의 불탑수용과 그 전개」(박사학위논문), 「아스카·나라시대 불탑의 전개에 대하여」, 「고대일본의 경전신앙」, 「고대 일본의 민간포교」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