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1

천리교, 왜색종교 반감 불구 발전 거듭 [3.1절 기획] 한국의 일본신흥종교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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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 왜색종교 반감 불구 발전 거듭
[3.1절 기획] 한국의 일본신흥종교①



2007년 02월 27일 (화) 00:00:00 전정희 기자 gasuri48@hanmail.net




▲ 대한천리교 신도들의 길거리 포교 모습

올해로 3.1운동 88주년을 맞았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이후 이에 호응한 각계각층의 참여로 거의 1년간 지속된 거족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총칭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3.1운동의 참여로 비로소 ‘민족의 종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일제 총독부는 종교탄압정책과 함께 신도(神道)나 조합교회와 같은 일본적 종교를 지원, 장려하여 민족적 종교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을 폈다. 그리하여 왜색종교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듬해에 일본 정토진종 본원사의 별원을 부산에 설치해 종교를 통한 조선침략을 획책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에 상륙했다. 문화침투전략의 일환으로 문화적 이질감이 적은 종교를 적극 활용한 것이다.

이후, 1945년 패전한 일본이 우리나라를 떠나면서 신도나 불교, 각 종단 등 대부분의 종교교단이 되돌아갔으나 천리교 등은 토착세력으로 남게 되었다. 또, 1965년 한일간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일본 불교의 각 교단과 맹렬한 기세로 일어난 일본 신흥종교들이 다시 한국에 전래되었다. 현재까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산 신흥종교에는 천리교, 창가학회(SGI), 입정교성회, 일연정종, 생장의가, 세계구세교, 선린회, 입정교정회, 천지대조교 등 30여 개 교단이나 된다.

이들은 주로 부산, 경남, 대구, 경북 등에 집중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광복 이후 반세기가 넘으면서 어느덧 가계종교로 자리 잡고 포교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천리교, 창가학회, 메시야교에 대해 앞으로 3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전정희 기자 주>

천리교의 시작

▲ 천리교 교조 나카야마 미키의 초상화


천리교(天理敎)는 1938년 10월 23일. 일본 나라현 미시마조에서 나카야마 미키(中山美伎, 당시 40세, 女)라는 여인이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직접 굿을 하다 접신이 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26일까지 3일간의 신내림 동안 미키는 식음을 전폐하고 강신한 신의 말을 하였는데, 자기가 ‘하늘의 장군’, ‘참된 신’ 또는 ‘다이신궁(大神宮)’이며 “3천 세계를 돕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했다. 이후 천리교에서는 현재까지 매년 10월 26일을 ‘어버이신님으로부터 가르침이 열린 날’이라며 창교일로 지키고, 4월 18일 교조탄생대제와 함께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한다.

교조 미키의 가르침에 따라 천리교는 창조주이자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신의 이름을 ‘천리왕님’이자 ‘어버이신님’이라 부른다. 천리교의 이 어버이신은 ‘죄와 벌을 주는 신이 아니라, 즐거운 삶을 누리도록 보살펴 주는 신’이다. 곧 질병이나 재난 없이 즐겁게 사는 것이 바로 창조주 신이 의도했던 이상세계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천리교는 “천국이나 극락은 죽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것”이며 “인간의 혼은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닌 죽어서 인간으로 바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천리교는 또 지금 이 세상에 ‘즐거운 삶’과 반대되는 질병, 재난, 불행이 많이 있는 이유는 천리왕님이 자신의 뜻을 인류에게 가르치며 반성을 촉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버이신님은 그동안 이 가르침을 위해 많은 성현들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신의 참뜻을 깨닫지 못해, 마침내는 교조 미키의 몸을 통해 직접 하강하여 ‘최후의 가르침’을 일러준 것이라는 주장이다. 천리교는 이 신을 믿고 3개 교훈과 8계명(戒銘)을 잘 지키면 스스로 구원받아 질병과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이 세계는 감로(甘露)의 세계, 즉 지상천국이 된다고 한다.

천리교의 성지는 교조 미키의 생가가 있던 장소로 그곳에 일본천리교 본부가 있다. 신도들은 이곳을 ‘본고장’, ‘터전’이라고 부르는데, 이 본고장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한 지젼이라는게 천리교의 주장이다. 그 증거는 ‘감로대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천리교가 포교용 전단에서 설명하는 터전을 살펴보면 천리교인들이 이 본고장을 어떻게 각별히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 일본천리교 본부 정문


▲ 일본천리교 본부 교청 전경


“어버이신님은 태초에 인간세계를 창조하실 때 설정한 도구들과 약속한 연한이 된 1838년 10월 26일 터전에 직접 나타나시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태의 혼인 으뜸인 인연이 있는 교조님을 신의 현신으로 삼아 구극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 창조의 목적인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진실한 길을 가르쳐 주셨다. 터전은 세계창조와 인류구제의 본원의 장소이며 세계전인류의 안테고향이다. 그곳에 천리왕님의 신명이 내려져 있고 어버이신님(천리왕님)이 진좌하고 계신다.”

이밖에 천리교의 경전으로는 교조 미키가 신의 가르침을 받아 직접 붓으로 기록했다는 친필(親筆)과 신악가(神樂歌), 그리고 구두(口頭)로 행한 교리 지도서(指導書)가 있으며, 의식으로는 매일 조석에 행하는 근행(懃行), 매월 26일의 월차제(月次祭), 연 4회의 정례 의례(儀禮) 등이 있다.

▲ 일본천리교 신도들의 교조 묘소 참배 장면


일본의 천리교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당시 수백 명에 불과했으나 이후 계속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도수가 날로 증가하여 1908년에는 독립된 신도 교파로 공인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해외로도 진출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가 통제 하에 교리의 변경을 강요당하기도 했지만 패전 후 다시 부흥하여 충실한 조직을 갖춘 대(大) 교단으로 성장했다. 현재 일본의 천리교는 교회 수 1만 7천개소, 신도 수 235만 명이 넘는다. 천리교의 본부가 있는 덴리시(天理市)는 일대 종교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덴리대학을 비롯한 여러 학교와 도서관, 체육시설 등 문화활동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천리교의 한국유래

▲ 한국천리교의 정기간행물 대한천리교 표지. 가운데 그림은 천리교의 신앙대상인 감로대다.


“절대 내 딸이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야. 엄마를 믿어! 신님이 널 버리시진 않을 거야. 그러니 우리 신님께 반성하고 참회하며 살려 달라 애원하자. 넌 살 수 있어! 신님이 반드시 살려 주실 거야! 절대 약한 마음먹으면 안돼.”

2005년 4월 격월간 <대한천리교>창간호의 ‘독자투고란’에 대구에 사는 한 신도가 기고한 글의 일부분이다. 이같이 천리교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 실천하면 어떠한 어려움도 천리왕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믿는 한국의 천리교는 현재 전국에 500개의 교회, 700개의 포교소(布敎所), 신도수 37만 명을 헤아리고 있다(천리교측 통계).

천리교가 처음 한국에 들어온 것은 한말인 1901년 사와무라(澤村)라는 일본인 포교사가 마산에 사는 김선장에게 교리를 전파한 것이 효시다. 이후 1917년 서울역 앞 동자동(東子洞)에 천리교 포교관리소가 세워지면서 포교활동이 활발해졌다. 일제강점기에 모든 종교들, 특히 기독교가 심한 탄압을 받아 교회가 해산되는데도 천리교는 아무런 장애 없이 광복 후에도 발전을 거듭했다.

▲ 서울 용산구 청파동 소재 대한천리교 본부 전경


천리교는 왜색종교라는 이유로 한때 위축된 적이 있었지만, 1948년 천경수양원(天鏡修養院)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고 교단을 재정비, 활발한 포교활동에 나섰다. 1952년 ‘대한천리교연합회’로 다시 개칭하였다가 1963년 종교단체 등록 때 문공부에 정식인가를 취득, 다시 ‘대한천리교’로 고쳐 현재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본부를 두고 있다. 이후 1965년 8월 내무부가 천리교를 ‘민심을 현혹하고 민족주의의 주체성을 어지럽히는 유사종교단체’로 규정하여 창가학회와 더불어 활동에 제한을 가했으나, 1970년대 들어 사회봉사활동을 하며 사회적 신뢰를 쌓고, 1975년에는 한국종교인협의회에 가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브리태니커대백과사전> 2002
<현대불교>, 1998년 8월호(통권 186호)
<일본의 종교>, 무라카미 시게요시, 1993, 예전사
<한국기독교의역사>Ⅱ,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2, 기독교문사
<일본의 신흥종교와 민족종교>, 모리야마 사도시, 1987, 국제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