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첫 한글 번역’ 피터스 목사를 아시나요?
피터스 전기 펴낸 박준서 교수
“한국 개신교에서 거의 잊혀… 은혜 갚는 마음으로 책 썼죠”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입력 2021.10.27
최근 최초의 한국어 구약성경 번역자 피터스 목사의 전기를 펴낸 박준서 연세대 명예교수. 박 교수가 들고 있는 것은 피터스 목사가 깨알같은 글씨로 적은 설교문 노트. /이태경 기자
“우리는 그분을 완전히 잊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한글로 구약(舊約) 성경을 읽게 해준 분인데 말이죠. 보은(報恩)의 의미로 전기를 쓰게 됐습니다.”
구약학 원로인 박준서(81) 연세대 명예교수의 얼굴엔 미안함이 스쳤다. 박 교수가 말한 ‘그분’은 알렉산더 피터스(1871~1958) 목사. 박 교수는 최근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대한기독교서회)를 펴냈다.
전기에 따르면 피터스 목사의 삶은 드라마틱하다 못해 기구할 정도. 피터스 목사의 본명은 ‘이삭 프룸킨’. 우크라이나 태생의 정통파 유대인이다. 유대인 차별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는 23세에 고향을 떠난다. 호구지책을 찾아 1년간 이집트, 인도, 싱가포르 등을 떠돌던 그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계 미국인 선교사 알버터스 피터스 목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한다. 세례를 준 피터스 목사의 성을 따라 개명도 했다. 이어 미국성서공회가 파견하는 권서(勸書) 즉 책 판매인으로 1895년 한국에 온다.
입에 풀칠을 할 방책이라는 뜻이니, 겨우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방책
피터스 목사 사진(왼쪽). 오른쪽 사진은 구약성경 개역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이원모 장로, 피터스 목사, 레이놀즈 목사(왼쪽부터). /박준서 교수 제공
당시 영미계가 대부분이던 선교사들은 신약성경 완역에 매진하고 있었다. 구약 번역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 히브리어로 암송한 피터스에게 구약은 너무도 익숙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구약 시편 150편 중 62편을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번역, 1898년 ‘시편촬요’(촬요는 ‘선집’이란 뜻)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한국 크리스천이 애송하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이 여기에 포함됐다. 순한글에 띄어쓰기까지 돼있는 최초의 우리말 번역 구약이었다.
이후 피터스는 미국 시카고 매코믹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해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선배 선교사들이 번역한 구약성경을 다시 번역하는 것은 그의 필생의 목표. 1938년 마침내 개역 구약 원고가 한국성서위원회의 공식 승인을 받아 출간된다. 박 교수는 “한마디로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의 한국어 번역을 시작했고, 공인 ‘개역 구약성경’을 완성한 분”이라고 말했다.
개인적 고통은 말도 못했다. 한국에서 두 아내와 사별했고, 청력(聽力) 난조와 이명(耳鳴), 어지럼증, 두통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선교비 지원이 끊길 위기도 숱했다. 그런 와중에도 세브란스병원에 수술실, 전남 여수 한센인 마을(훗날 애양원)엔 주택 40채를 기부했다. 그러나 1941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한국 개신교계에선 완전히 잊힌 사람이 됐다. 신약을 최초로 번역한 존 로스 목사는 한국 개신교가 기념관을 세워 기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박준서 교수가 펴낸 피터스 목사 전기(왼쪽)와 피터스 목사가 번역한 최초의 구약 '시편촬요' 영인본. 박 교수는 최근 두 권을 한 세트로 펴냈다.
박 교수가 본격적으로 피터스 목사의 자취를 찾게 된 것은 지난 2016년 LA 인근 풀러신학교 방문연구교수로 간 것이 계기가 됐다. 피터스 목사는 은퇴 후 LA 인근 패서디나에서 생활하다 별세했다. 어렵게 찾아간 묘원엔 잡초가 우거져 표지석을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박 교수는 몇몇 교회와 뜻을 모아 묘원에 기념 동판을 설치하고 후손들도 찾아냈다. 2019년초엔 기념사업회도 결성해 피터스 목사의 두 부인이 잠들어 있는 서울 양화진선교사묘역에 기념비 건립, 설교집 출간, 기념 강좌 등의 사업을 펼 계획. 박 교수는 “러시아 유대인인 피터스 목사가 개종하고 한국에 와서 구약을 번역한 전 과정은 우연의 반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라며 “감사할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사람 된 도리 아니겠냐”고 말했다.
피터스 목사 사진(왼쪽). 오른쪽 사진은 구약성경 개역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이원모 장로, 피터스 목사, 레이놀즈 목사(왼쪽부터). /박준서 교수 제공
당시 영미계가 대부분이던 선교사들은 신약성경 완역에 매진하고 있었다. 구약 번역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 히브리어로 암송한 피터스에게 구약은 너무도 익숙했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구약 시편 150편 중 62편을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번역, 1898년 ‘시편촬요’(촬요는 ‘선집’이란 뜻)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한국 크리스천이 애송하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이 여기에 포함됐다. 순한글에 띄어쓰기까지 돼있는 최초의 우리말 번역 구약이었다.
이후 피터스는 미국 시카고 매코믹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해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선배 선교사들이 번역한 구약성경을 다시 번역하는 것은 그의 필생의 목표. 1938년 마침내 개역 구약 원고가 한국성서위원회의 공식 승인을 받아 출간된다. 박 교수는 “한마디로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의 한국어 번역을 시작했고, 공인 ‘개역 구약성경’을 완성한 분”이라고 말했다.
개인적 고통은 말도 못했다. 한국에서 두 아내와 사별했고, 청력(聽力) 난조와 이명(耳鳴), 어지럼증, 두통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선교비 지원이 끊길 위기도 숱했다. 그런 와중에도 세브란스병원에 수술실, 전남 여수 한센인 마을(훗날 애양원)엔 주택 40채를 기부했다. 그러나 1941년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한국 개신교계에선 완전히 잊힌 사람이 됐다. 신약을 최초로 번역한 존 로스 목사는 한국 개신교가 기념관을 세워 기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박준서 교수가 펴낸 피터스 목사 전기(왼쪽)와 피터스 목사가 번역한 최초의 구약 '시편촬요' 영인본. 박 교수는 최근 두 권을 한 세트로 펴냈다.
박 교수가 본격적으로 피터스 목사의 자취를 찾게 된 것은 지난 2016년 LA 인근 풀러신학교 방문연구교수로 간 것이 계기가 됐다. 피터스 목사는 은퇴 후 LA 인근 패서디나에서 생활하다 별세했다. 어렵게 찾아간 묘원엔 잡초가 우거져 표지석을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박 교수는 몇몇 교회와 뜻을 모아 묘원에 기념 동판을 설치하고 후손들도 찾아냈다. 2019년초엔 기념사업회도 결성해 피터스 목사의 두 부인이 잠들어 있는 서울 양화진선교사묘역에 기념비 건립, 설교집 출간, 기념 강좌 등의 사업을 펼 계획. 박 교수는 “러시아 유대인인 피터스 목사가 개종하고 한국에 와서 구약을 번역한 전 과정은 우연의 반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라며 “감사할 일에 감사할 줄 알아야 사람 된 도리 아니겠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