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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6장 진정한 요가(1)
작성자 바보새 16-01-22 01:48 조회1,6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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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진정한 요가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행위의 결과에 붙어 있음이 없이, 마땅히 하여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산야시요, 요기지, 한갓 제사의 불을 피우지 않고 제사의 의식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니라.
산야시 산야사(내버림)를 하는 사람, 출가승.
요기 요가를 닦는 사람.
이 장에서는 참으로 요가를 성취하는 방법, 다시 말한다면, 마음과 마음의 활동을 어떻게 훈련해갈 것이냐 하는 데 대하여 가르치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여기서 불이라 한 것은 할 수 있는 행동의 모든 기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취하여야 할 것이다. 불은 희생을 바치려 할 때는 그것을 써가지고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물레질이 일반적으로 하는 봉사에 필요한 수단인 오늘에 있어서는 물레를 내버린다고 해서 산야시가 될 수는 없다. —간디
스승은 산야사, 즉, 내버림은 외적 행동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마음의 태도에 있다. 산야시가 되기 위해서 제사의 불과 매일의 예배의식을 내버릴 필요는 없다. 내버림의 정신없이 그런 것들을 버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샹카라는 ‘케발람’(kevalam)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서 이것을 “제사의 불을 켜지 않고 의식을 행하지 않는 사람만이 오직 산야시는 아니다” 하는 의미로 해석했으나, 그것은 문맥으로 보아 옳은 것 같지 않다. —라다크리슈난
앞장들에서 말할 때 크리슈나는 산야사와 요가의 두 길이 끝에 가서는 같은 경지에 간다 했고, 두 길의 목적도 같은 것이라 했다. 그리고는, 그렇지만 행동의 요가, 곧 카르마 요가가 산야사보다도 더 나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 둘은 서로 다른 길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절에서는 크리슈나는 산야시와 요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둘을 하나로 만드는 공통 요소가 적어도 한 가지는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즉, 행동을 하는 동안 그 행동의 결과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태도다. 크리슈나는 이것을 산야시에나 요기에나, 또는 내버림의 지경에서나 하나됨의 지경에 있어서나 표준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됨의 지경이 내버림의 지경과 같은 것이라 하면 모순인 듯이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리인 것이 우주적 의식 안에서 분명해진다. 이 지경에서는 마음이 신과 하나됨이, 즉 (대)자아의식이 부동의 지경에도 달한다. 그것이 곧 완전한 하나됨의 지경이다. 이 지경에서는 자아는 또 행동에서는 분리되어 있음을 체험한다. 이것이 곧 내버림의 지경이다. 하나됨과 내버림은 이렇듯이 해서 생명의 한 경지 속에 함께 있을 수 있다.
마음이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는 자아가 행동과는 떨어져 있음을 체험하는 결과로 오는 것이고, 그것은 또 2장 45절에서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가르쳐준 방법을 통하여 초월적인 복된 의식에 들어가는 것을 연습함으로 인해서 얻는 하나됨의 결과로 오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보고 ‘마땅히 하여야 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가 가르쳐준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행동하려고 한 것을 오해하고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서 한 말이다. 만일 그러지 않다면 잘못 생각한 사람이 살인이나 도둑질을 하면서도 자기는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행동했노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르마 요가의 가르침은 사람이 생각하는 마음의 상태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고, 의식의 상태, 바탈의 상태에 기초를 둔다. 그 목적하는 것은 바탈이 마음 성질 속으로 스며들어서 거기 항구적인 상태로 설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다. 그러면 그것이 사상과 말과 행동의, 인간생활의 전역에 걸쳐서 항구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강요나 긴장이 없는 행동으로 초월적인 명상을 닦음에 의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성취할 수 있다.
카르마 요가도, 산야사도 그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통전(統全)된 생활 속에 서도록 하자는 데 있다. 여기서 산야시나 요기에게 독특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 집착이 없다는 것은 마음의 특별한 지경이지 바탈의 지경이지, 결코 생각의 지경이 아니다.
행동을 하는 동안 행동의 결과에 대해 집착을 아니하는 것을 기분적으로 하려 해서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한 느낌을 생각 정도에서, 혹은 기분 조성으로, 지식적으로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순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행동을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 혹은 의무를 위해서 할 뿐이지, 그 결과에 대한 아무런 욕망도 없다. 내가 행동을 하는 것이 사실은 사실이지만, 실지로 내가 그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브라만이요, 행동도 브라만이요, 행동의 결과도 또한 브라만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라 해도 나 자신밖에 될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자아를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니 그 행동의 결과를 생각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느냐?” 이러한 식의 생각은 카르마 요가와 산야사에서 말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한 무집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말이요, 그가 어떤 사람이거나간에 그러한 생각 위에서 무집착의 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다만 자기를 속일 뿐이다. 그런데 몇 세기를 두고 카르마 요가와 산야사는 바로 그런 오해 속에 내려왔다. ……바탈(性, Being)을 체험하는 것이 카르마 요가와 산야사의 전제적 요건이다. 의식의 경지에서 말한다면 산야사와 카르마 요가는 마찬가지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그 마음을 다하는 이는 그 바탈을 알고, 그 바탈을 알면 하늘을 안다. (盡基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맹자(盡心)
2. 세상에서 이른바 산야사란 것이, 그것이 곧 요가인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오, 판두족의 아들아, 어떤 사람도 (이기적인) 목적을 내버림이 없이 요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니라.
5장 6절에는 이와는 반대로 요기가 아니고는 산야사는 할 수 없다고 한 것을 참조하라. —마하데브 데자이
산야사, 곧 내버림은 필요한 행동을, 속으로 결과를 얻으려고 애씀이 없이, 성취하는 데 있다. 이것은 곧 참 의미의 요가다. 즉 자신을 확고하게 통제해나감이요. 완전한자지(自持)다.
이 절 말씀은 자기를 다스림(요가)은 내버림 (산야사)이나 마찬가지로 귀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라다크리슈난
‘욕망의 동기’ (본문의 ‘이기적인 목적’을 마하리쉬는 이렇게 번역한다)는 산스크리트말로 산칼파(sankalpa)를 번역한 것인데, 그것은 욕망으로 싹터 나올 씨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크리슈나는 여기서 요가를 공부하는 자에게 가장 요긴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요가를 닦으려면 산칼파를 뿌리 뽑지 않으면 안된다.
크리슈나는 이미 산야사와 요가를, 그 결과에 있어서, 같은 지반 위에 세워놓았다. 내버림과 행동의 요가는 다 같이 지극한 선에 이른다. 그 어느 한쪽에 굳건히 선 사람은 양쪽의 결과를 다 얻는다. ……크리슈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한 사람은 요기를 만들고 한 사람은 산야시를 만드는 한 가지 특성을 지적한다. 그는 말하기를 “아무도 욕망의 동기를 제거함이 없이 요기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요기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인데, 그러한 초월적 의식에 있어서는 욕망의 동기는 뿌리 뽑혀 있다.
그러면 문제가 일어난다. 만일 요기가 되기 전에 산칼파를 내버리지 않으면 아니되고, 또 산야시에게서도 그것이 특성이라면, 실지로 누가 능히 산야시나 요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왜냐하면 인간생활은 가정에서 하거나 은둔처에서 하거나, 언제나 산칼파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대답은, 누구나 산칼파가 없는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크리슈나의 토론의 목적은 세속사람을 위해서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러한 마음 상태를 만드는 것은 뉘게나 가능한 일이 아니면 아니된다.
마음이 산칼파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는 방법으로서 그 원리를 크리슈나는 2장 44절에서 아르쥬나에게 가르쳐주었고, 이제 이 장에서 더 설명한다. 명상을 하는 동안 마음이 점점 맑은 지경에 들어가는 것을 체험하여 나중에는 지극히 맑은 것도 초월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하여서 마음은 초월적 의식상태에 이르게 되어 완전히 산칼파의 영역 밖에 서게 된다. 이것이 요가의 지경이다. 이것이 또한 마음이 모든 것을 내버리고 자기 혼자만이 남는 산야사의 지경이다. 그와 같이 하여서, 마음을 도와서 산칼파를 초월하는 지경에 가게 하는, 초월적 명상의 방법이 곧 요기 혹은 산야시가 되는 방법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3. 요가의 경지에 오르고자 하는 성자에게는 행함이 그 방법이니라. 요가의 경지에 이미 올라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고요히 함이 그 방법 이니라.
성자(muni) 침묵(mauna)을 지키는 성자. 혹은 은둔자. 고대 인도에서는 그런 무니는 비상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서 존경도 하고 두려워도 했다. 예를 든다면 불 속에서 혹은 단식을 하며 명상을 하고 고행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서 모든 부정(不淨)을 깨끗이 제해버리고 평등관에 도달한 사람은 자아의 실현을 용이하게 성취할 수 있다. 그것은 요가의 절정에 이른 사람이 세상을 지도하기 위해 일함을 업신여김으로 본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것 아니다. 그에게는 일함이 자기 콧구멍 속의 숨 같다기보다는 바로 숨쉼 그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그것을 순수한 자기 의지의 힘으로써 한다. 4절을 보라. —간디
우리가 해탈을 향해 정진할 때에는 올바른 정신과 내적 내버림으로 하는 행동이 도움이 된다. 일단 스스로 얻음의 지경에 이르면, 그때는 무엇을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식에 닻을 내림으로 인하여 하게 된다. 일을 통해서 우리는 자제함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자제에 도달하면 평화를 얻는다. 그렇다고 그 다음에는 모든 활동을 그친다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4장 1절에는 진정한 요기는 일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성취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마(sama)는 카르마의 중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혜의 원인(karana)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완전해진 성자는 이미 지혜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12절에서는 말하기를 요기는 행위의 결과를 내버림에 의하여 완전한 고요에 도달한다고 했다. 그는 완전한 평등심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발적인 생기에 넘치고 있으므로 무슨 일을 하건 자기의 무진장의 역량에서 나오는 관대함을 가지고 일을 한다. —라다크리슈난
무니란 산스크리트 말을 번역하면 ‘생각하는 사람’ 이라할 수 있다. 무니는 그 성취의 길이 사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람이다. 그의 공부는 신체적 활동의 분야에 대립되는 마음의 분야에 있다. 그것을 밝히기 위하여서는 마음이 어떤 경험을 보존해두려면 그에 상당한 신경계통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과 신경계통 사이의 관계로 인하여 어떤 경험이든보존이쪽에서도 자극시킬 수 있고 저쪽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다 요가(hath yoga)란 생리적 신경조직을 훈련 신경조직을을 제어함으로써 초월적인 의식의 을을 제어함자는, 그래서 결국은 우주신경조직에까보존이함자는 실현방법이다. 그와는 반대로 이 절있고에서 말하는 명상의 실습은 직을을 훈련함으로써 신경조직을 통제하고 련 신경조직을 일으켜서 종국에는 우주의식에까지 이르려는 실현의 길이다. 이 심리적인 방법이 무니의 길이다.
이 ‘무니’라는 말을 씀으로써 크리슈나는, 행동은 행동의 사람에게만 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서 가자는 사람에게도 역시 길이 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요가의 지경에 오르고자 한다’는 것은 그는 아직 산칼파를 빼버린 마음의 경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행함이 그 방법’이라는 것은 행동이 산칼파 없는 마음의 지경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4장 18절에 있는 것과 같은 역리적인 말이다. 거기서 크리슈나는 “행함에서 행함 없음을 본다”고 했다. 여기서 그는 행동을 통하여 고요를 지어내라고 하는 듯하다. 크리슈나의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크리슈나는 “행함이 그 방법이라고 한다” 했다. 이것은 요가의 길, 곧 산칼파 없는 마음의 지경을 지어내는 길에 대한 비밀의 전부를 드러내는 말이다.
행동이 요가의 지경에 오르는 길임을 말한 다음 크리슈나는, 요가의 지경에 든 후에는 고요히 함이 중요한 것을 가르친다.
‘요가의 지경에 올라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깨어 있을 때의 의식에서 초월적 의식 상태에 이른 사람이다. 그는 마음이 거룩한 이와 완전히 하나된 상태다. 이러한 초월적 의식 속의 요가는 고요히 함이 늘어감에 따라 우주적 의식 속에 영구화하게 된다. 다른 말로 한다면 하나님(Being)이 마음의 성질 속에 스며들어오시게 된다. 그래서 크리슈나는 요가의 지경에 든 후에는 고요히 함이 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고요히 함은 우주적 의식의 요가에서 신의식의 요가로 올라가는 길이다. 우주적 의식에서 고요히 함은 자아가 행동에서 독립하는 체험을 주지만 신의식 속에서는 고요히 함이 하나님의 빛으로 변화해버린다. 그 안에서는 자아와 행동의 이원(二元)이 사라져버린다.
이 영원한 침묵의 신의식은 우주적 의식 속에서 체험했던 고요히 함이 한층 더 나아간 지경이다. 이것은 생명의 하나됨의 산 고요히 함이다. 그것이 우주적 활동의 바닥이 되는 동시에 또 하나님을 완전히 우주적 활동에서 따로 서시게 하는 기반이 된다. 우주적 의식 속에서 체험하는, 그리하여 자아를 행동에서 독립시키는 고요히 함은 무한히 작은 규모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주적 활동의 기반이 되고 하나는 개인 활동의 기반이 된다. 그 둘의 근본적 차이는 여기 있다. 즉, 우주적 의식에서는 고요히 함과 행동이 같은 수준으로 양립 되는데 신의식은 이원적 대립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그와 같이 고요히 함에는 세 단계가 있다. 초월적 의식 속에서는 고요히 함 속에 어떤 행동의 흔적도 없다. 우주적 의식 속에는 자아의식이 행동과 병립하고 있다. 신의식 속에서는 그 행동과 고요히 함의 병립이 신의식의 하나됨으로 변화해버린다. 이 신의식의 고요히 함이 가장 높은 정도로 발전된 고요히 함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전능 정도에서의 존재다. 이것은 스러움(神性, godhead)의 무소부재, 무소불능, 무소부지의 고요히 함이다- ᅳ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고요히 함’을 마하데브 데자이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말은 산스크리트어 사마(sama)인데 14장 12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아사마(asama)에 대립하는 말이다. 아사마는 안식 없음(restlessness) 혹은 안정 없는 일(toil without tranquility)이다. 그러기 때문 사마는 아늘드(Mathew Arnold)의 말을 빈다면 ‘일은 하되 마음의 안정은 잃지 않는다’ (toil unsevered from tranquility)라 해야 할 것이다.” 아마 이 절 전체의 의미를 잘 표현하려면 노자의 말을 받아서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말 아닌 가르침과 함 없음의 더 함 있음”(不言之敎 無爲之有益)을 통해서 요가의 절정에 이른다고.
노자의 오천언(五千言)이나 장자의 십만언(十萬言)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도(道)는 허무, 적막, 염담(恬淡),무위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마하데브 데자이는 과연 옳게 봤다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너무 유위(有爲)에 치우친 하나님인 듯이 뵈는 때가 많으나, 또 그러기 때문에 적극주의(積極主義)의 길을 달리다가 이 막다른 골목에 든 서양문명에 대해 기독교가 책임의 한몫을 져야 할 것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성경을 옳게 보면 그렇지 않다고 나는 본다. 천지창조를 말하는「창세기」는 또 안식의 하나님을 말한다. 안식이 뭔가? 무위, 무언(無言) 아닌가? 창조를 상대적 차원에서 하는 말이라면 안식은 절대적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는 안식 정신으로 하고 안식은 창조 정신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아닌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식 지키는 것을 생명으로 아는 유대인은 극성스러운 민족이 됐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한다” 한 예수의 제자들은 이 안절부절 못하는 동류상식(同類相食)의 최고 문명을 만들어냈다. 신약을 보면 평안, 평화란 말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가?
상대, 절대 두 차원을 하나로 사는 것이 생명이요 사람인데, 상대에서는 일함이 길이요, 절대에서는 잠잠함, 고요함, 쉼이 길이란 말 그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함으로써 쉬고 쉼으로써 일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어떤 특별한 도를 닦는 심정으로가 아니라, 일상생활로 그것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천당엘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살기 위해 그것을 알아야 한다. 요가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가 바로 요가 도장이다. 만물이 요기다. 이 병든 문명, 망할 인간에게 약이 있다면 단 한마디 “잠잠하라!”뿐이다. —함석헌
4. 감각의 대상과 일에 매달림이 없는 사람, 일체의 욕망의 씨를 제해버린 사람, 오직 그 사람을 가리켜 요가의 경지에 올라갔다고 하느니라.
욕망의 씨를 제해버린 사람 사르바산칼파산야시(sarva-sankalpa-sannyasi)
우리는 좋고 언짢고를 내버리고,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우리 자신을 내버리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목적을 내던짐에 의하여, 이기적인 나(ego)를 극복함에 의하여, 지극히 높으신 이의 뜻에 온전히 항복함에 의하여 요가에 정진하는 자는 여기 영원에 방불한 지경을 성취할 수 있다. 그는 자기가 터득하고자 하는 그것의 분열되지 않은, 시간 없는 의식에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해방된 영혼은 욕망도 없이, 집착도 없이, 욕망이 나오는 이기적인 의지도 없이 일할 수 있다. 마누(Manu)는 말하기를 모든 욕망은 산칼파에서 나온다고 했고,「마하바라타」(Mahabharata)에서는 “오 욕망아, 나는 네 뿌리를 안다. 너는 산칼파 혹은 생각에서 나왔지. 내 너를 생각지 않으리라. 그럼 너는 존재하기를 그칠 것이다” 했다. —라다크리슈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마태복음」(16:24)
네 몸을 올바르게 하고 네 봄을 하나로 하면 하늘 고름이 장차 이를 것이요, 네 앎을 걷어잡고 네 헤아림을 하나로 하면 이 네 속에 와 계시므로 속이 장차 네 아름다움이 되고 길(道)이 네 있을 곳이 되어, 갓난 송아지처럼 네 눈이 멀뚱하여 그 까닭을 찾음이 없으리라. (若正汝形 一汝視 天和將至 攝汝知 一汝度 神將來舍 德將爲汝美 道將爲汝居 汝瞳焉如新生之犢 而無求其故) —장자(知北遊)
5. 자아로 자기를 높이 들게 하라. 자기로 자아를 떨어뜨리게 말지어다. 자아만이 자기의 벗이요 자아만이 자기의 대적이기 때문이니라.
6. 자기의 자아로 자기를 정복한 사람만은 제 자신이 자아의 벗이 될 수 있으나, 자기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므로 자신에 대해 적의를 품는 사람은 그 자아조차도 원수가 되느니라.
자아 아트만(atman), 대아(大我).
자아가 자아의 주님이시니라. 다른 누가 주님이 될 수 있겠느냐? 자아를 잘 정복하면, 만날 수 없는 주님을 만나느니라. —「법구경」(160)
제 죄가 저를 더럽히나니 죄를 멀리하면 자신을 깨끗이 지킬 수 있느니라. 깨끗해지거나 더러워지거나 제 자신에 의하여 되는 것이요,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느니라. —「법구경」(165)
비구는 모름지기 자아로 자아를 높일 것이요, 스스로 자기의 이웃이 되어야 하느니라. 그렇듯이 스스로 보호하고 스스로 가지는 자는 행복하니라. 「법구경」(379)
자아는 자아의 주요, 자아는 자아의 목적이니라. —「법구경」(380)
나는 나의 번역에서 대아인 아트만과 소아를 구별해서 썼지만 간디가 그렇게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참대로 말한다면, 아트만은 친구도 아니요 원수도 아니다. 그러나 낮은 자아가 자기를 아트만에까지 끌어올리려 하느냐, 그에게서 끌어내리려 하느냐에 따라 그를 친구로도 만들고 원수로도 만든다. 자기를 도덕적으로 완성하기 위하여서는 소아는 대아를 “목적으로, 증인으로, 피난처로, 친구로” 바라보아야 한다. (9:18) 그러나 이 연약한 인생들에게서는 그에게 진력을 내서 오히려 원수처럼 아는 일이 많다. —마하데브 데자이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지을 뿐이다. —「코란」
성령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네 자신처럼 네게 성가시고 사나운 대적은 없다. —그리스도 모방 중의 말
7. 자아를 정복하고 완전한 고요함에 이른 사람은 그의 최고의 자아가 춥거나 덥거나, 즐겁거나 괴롭거나, 명예에서나 불명예에서나 변함없이 안정하니라.
8. 요가를 닦는 자가 만일 지혜와 지식으로 혼의 만족을 얻고, 감각을 제어함으로써 부동의 자리에 서서, 흙이나 돌이나 금을 평등으로 보면, 그를 가리켜 요가의 통일을 얻은 자라 하느니라.
9. 친지나 벗이나 대적 사이에서도, 무관심한 사람이나 치우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도, 미워하는 사람이나 친척 사이에서도, 또 성자나 죄인 사이에서도 평등한 이성을 갖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니라.
‘평등한 이성’, 이렇게 속으로 영원히 스스로 만족해하는 태도 때문에 그 요기의 마음은 잠잠한 가운데 머물러(安住) 있다. 이 잠잠함 위에 놓여 있으므로 그의 이성은 반드시 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하는 말의 뜻은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같은 모양으로 대한다는 말이 아니다. 요기는 각양 각색의 인륜관계의 차이가 있는 것을 몰라서 그것을 혼동하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나 그러한 복잡한 인륜관계 속에서도 그의 이해는 생명의 평등 관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결코 흔들리는 일이 없다. 그는 변함없이 머무른(止)다.
앞절에서는 밖의 대상을 평정한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을, 그가 그 자리에 오는 것을 삼캬로 했거나 카르마로 했거나간에 요가를 통한 사람이라 했다. 지금 이 절에서는 ‘뛰어난’ 요기의 표준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지가지의 명상을 말한 다음크리슈나는 이어서 다음 절에서 그 자세한 방법을 설명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0. 요가를 닦는 사람은 은밀한 곳에 홀로 남아있어, 몸과 마음을 억제하고, 모든 욕망과 가진 것을 버리고, 늘 정신 모으기를 힘써야 하느니라.
10절에서 16절까지의 문맥 안에서 ‘요기’라 할 때는 대개 요가 정진자 즉 요가를 닦기 시작한 사람을 뜻한다. 요가라 할 때는 마음과 이성과 기(氣)를 모아서 신체의 모든 기관을 ‘아트만’에다 통일하려고, 즉, 자아를 자아(大我)에 통일하려고 함을 말하는 것이다. 10절에서 14절에 이르는 부분에 관하여는「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Svetashvatara Upanisad)를 참조하라. 거기 자세와 처소와 그 밖에 여러 가지 조건에 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한 것이 있다. 그외의 부분은「기타」그 자체가 요가에 대하여서 하는 말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여기서 스승은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Patanjai's yoga sutra)의 계통에 따라 정신통일 하는 방법을 설명해준다. 그 목적은 우리 의식을 평상시의 깨어 있는 상태의 것에서 보다 높은 의식으로 이끌어서 지극히 높으신 이와 하나됨에 이르게 하자는 데 있다. 인간의 마음은 보통 외계를 향하는 법이다. 생활의 기계적 물질적 면에만 몰두하면 의식의 균형을 잃은 상태에 빠진다. 요가는 의식 속의 경계를 개발하여서 의식과 잠재의식을 통전(統全)하려 하는 노력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서 모든 감성적인 욕망을 제거해버리고, 주의를 바깥 것에서 끌어들여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18장 72절을 보라. 거기서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보고 마음을 한 점에다 모으고(ekagrenacetasa) 자기 가르침을 듣고 있느냐고 묻는다. 목적이 맑은 속봄(vision)에 이르는 데 있기 때문에, 이것은 마음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밀하게 확고부동하게 하기를 요구한다. 우리에게 현시의 차원이 우리 존재의 구경의 지경은 아니다. 마음의 전력을 모아 그것을 한 점에 집중시킴에 의하여 우리 교섭을 경험적인 것에서 참된 것으로, 겉봄에서 속봄으로 올려서, 정신이 우리의 전존재를 차지하게 한다. 구약「잠언」에는 “사람의 영혼은 주의 촛불”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생명의 가장 깊은 속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불이 켜질 수 있는 무엇이 있다.
‘늘’ (satatam)에 대해서 살펴보면, 훈련은 ‘늘’ 하지 않으면 안된다. 명상을 했다가 말았다가 해서는 소용이 없다. 보다 높고 보다 강한 의식을 발달시키려면 계속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은밀한 곳’ (rahasi)이란 한적한 곳, 고요한 곳으로서 정진자는 이런 곳을 골라야 한다. 강가 언덕, 혹은 산꼭대기 같은, 심신을 상쾌히 하고 안정시켜주는 자연 환경 속이다. 날마다 소란을 더해가는 이 세상에서 문명한 사람이 할 의무는 생각하는 고요한 시간을 가지는 일이다.「마태복음」6장 6절의 “너는, 기도하려 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라. 우리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서 외계의 혼란을 피해야 한다. 오리겐(Origen)이 첫째 은둔자들에 관해 기록한 말을 참고하라. “그들은 거친 들에 산다. 거기는 공기가 더 맑고, 하늘이 더 활짝 열리고, 하나님이 더 친숙혜지는 곳”이라고 했다.
‘홀로’(ekati)란 구도자에게 스승이 강조하는 점이다. 부드러운 압력을 느끼기 위해서, 고요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
‘자기를 억제’ (yatacittatma)한다는 것은 흥분이 되어도 긴장해도 걱정을 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고요하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제자숙하는 생활함을 의미한다. 아트마는 데하(deha) 곧 몸의 뜻으로 썼다. (샹카라에 의하면) 골방에 들어가는데 신문과 사무 문서를 가지고 들어가서는 의미가 없다. 비록 그것들을 방 밖에 놓고 문과 창을 닫았다 하더라도, 걱정이나 열심 때문에 고요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안절부절못하거나 떠들썩해서는 못쓴다. 생각을 통해 지성에 호소하고, 침묵을 통해서 생명의 심층부에 접촉해본다. 마음이 정결한 자만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비치게 하려면 심정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저 깊은 고요에까지 정신을 집중해 가라앉혀 빛을 우러러야 한다.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너희 아버지와 교통하라.” 하나님이 와 계심은 받는 사람의 역량과 필요에 따라 침묵 속에 나타나신다. (워즈워즈는 “시는 정적 속에 괴는 정서에서 솟아난다” 했고, 릴케는「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이것밖에는 다른 어떤 조언도 할 것이 없다. 너 자신 속에서 물러가, 그리하여 네 생명이 솟아오르는 그 바닥을 샅샅이 뒤져보아라.”)
플라톤의「메논」(Menon)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다. “묻노니, 소크라테스여, 덕(德)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답하기를 “덕은 가르쳐줄 수 없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게 할 수는 있다. 돌이켜 생각함은 제 자신을 다시 한데 모으는 일이다”고 했다. 즉, 제 혼 속으로 물러감이다. 이 돌이켜 생각함의 교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저 자신 속에 물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그 자신의 중심이요 그 자신 속에 진리를 가진다. 필요한 것은 그렇게 하자는 의지와 인내를, 끝까지 추궁하는 인내를 가지는 일이다. 선생의 할 일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배우는 자가 자기 자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이다. 묻는 자는 참 대답을 자신 속에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다 그 진리를 제 속에 가지게 되는데, 객관세계에 얽매이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린다. 우리 자신을 객관세계와 하나로 봄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천성에서 쫓겨남 혹은 소외를 당하게 된다. 외계에 정신이 빠져서 우리는 깊음을 내 버린다. 물질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객관을 초월함에 의하여 우리는 자유의 영역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욕망을 버리고’ (nirasi)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필요, 즉 돈을 벌고 쓰는 것으로 걱정하는 것은 명상을 방해하여 정신생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욕망이나 걱정, 탐욕과 두려움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구도자는 자신을 이러한 심리적 속박에서 떼어 모든 미혹, 편견을 떠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모든, 마음으로 무엇을 좋아하는 것, 생존적인 목적, 가족과 벗에 대한 애착으로 연연한 생각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을 기대해서도 아니되고 무엇을 고집해서도 아니된다.
‘가진 것을 버리고’ (aparigrahah), 이것은 정신의 지경이지 물질적 조건이 아니다. 소유물에 대한 탐욕을 억제해야 하고, 붙어 있는 것들의 포학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자기중심적이거나, 자랑이나 고집이나 소유의 감정의 지배를 면하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기타」는 진정한 행복은 내적인 데 있음을 가르쳐준다. 우리의 생활양식, 인간적인 의식상태에 주의하라고 일러준다. 그런 것은 다 생활의 외적 구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은 죽고 세계는 지나갈 수 있지만, 정신적인 생명은 영원히 있다. 있다가 없어질 세상 재물이 보배가 아니요, 영원히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보배다.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물질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한다. —라다크리슈난
여기서 요가를 닦는 사람이라 한 것은 요가를 성취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미 성취한 사람은 훈련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그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훈련을 계속할 필요를 말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아직 정진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요기란 말은 이미 하나됨의 지경을 가리켜 말하기도 한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 요기란 말을 바로 해석하려면 그것은 이미 대아(大我)의식에 들어간 사람, 즉 사마디(samadhi)에 도달한 사람, 그러면서도 아직 우주적 의식, 즉 니챠사 마디(nity samadhi) 혹은 지반묵티(jivan-mukti)에는 도달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그러한 요기는 더 열심으로 훈련을 계속하여 그 대아의식이 영속적이고도 확고부동한 자리에 가서, 마음이 상대적인 경험 자경역에 나아가 있는 때에도 본체의 지경에서 떠남이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주적 의식의 지경이다. 즉 성취된 요기의 상태다. 우주적 의식에 이르려면 요기는 고요한 곳에서 명상을 한 후에는 활동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절에서 크리슈나는 요기가 명상할 때에는 아래와 같은 조건 아래 할 것을 강조한다.
① 조용한 곳에 머물러 있을 것.
② 홀로 있을 것.
③ 몸과 마음을 억제할 것.
④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 것.
⑤ 아무것도 가지지 말 것.
‘조용한 것’이 절대 필요하다. 마음이 직접 초월적인 복된 의식에 들어가는 길인 초월적 명상이란 것은 아주 오묘한 것이다. 그것은 방해를 받음이 없이 저 하는 대로 두어야하는 것이다. 만일 명상의 장소가 조용치 못하면 방해를 받기가 쉽다. 명상하는 동안은 마음이 사색과정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있는데, 그때에 방해를 받아 갑자기 감각적 인식의 조잡한 세계에 돌아오게 되면, 인식의 오묘와 조잡의 심한 대조를 경험하게 된다. 그 갑작스런 대조는 마음의 안정을 해하여서 신경조직을 망가뜨릴 우려가 있다.
만일 명상을 홀로 하지 않는다면, 누가 옆에 있다, 혹은 지켜보고 있다 하는 감정이 초월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방해하게 된다. 그러면 복스러운 의식에 들어가는 길이 더디게 되고, 마음에 지나친 긴장을 주어 거기 따라 신경계통에 긴장이 온다.
‘몸과 마음의 억제’에서 억제라는 말에 특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마음은 행복의 체험으로 억제가 되는 것이다. 명상 동안 마음은 계속 사색의 오묘한 지경을 경험하고 있으므로 그것이 점입가경식으로 올라간다. 이러한 점점 더해가는 행복감이 명상하는 동안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 주는 것이다. 마음이 이런 모양으로 정복되면 마음의 상태에 따라 신경조직도 흔들림이 없이 가만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이 어떻게 가장 자연스럽게 억제되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수련자가 자기 몸과 마음을 정복하기 위해 부단히 힘을 써야 하는 것으로 알아서는 오해다.
정진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 자신을 모으고 고요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을 때 크리슈나는 또 동시에 무엇을 기대해서는 아니된다고 경고했다. 이 자기를 모으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장차 올 단계 혹은, 어떤 특정한 체험을 기대해서는 아니된다. 조금이라도 목적에 성공적으로 도달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어서도 아니된다. 이 말은 2장 47절에서 “너는 네 행동만을 통제할 것이지, 그 결과를 통제하려 하지 말라” 한 말의 뜻을 잘 밝혀준다.
기대를 해서는 아니된다는 경고는 매우 긴요한 말이다. 명상에서 마음이 사색과정의 가장 오묘한 지경을 경험하고 있을 때 그것은 계속 높아 가는 황홀의 길에 놓여 있는 것이다. 거기서 무엇을 기대하거나 바라거나 하려는 경향이 생기면 그만 그 길에서 떠나게 된다. 마음은 그 본성이 그러한 점점 높아가는 행복감의 과정에서 떠나 긴장상태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기대’는 마음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 몸까지도 따라서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기대하지 말라는 규칙을 여기 내세운 것이다.
‘가진 것을 버리라’고 함은, 명상은 마음을 소유의식에서 본체의식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소유편에서 본다면 무소유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자아가 저 혼자만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환경과 몸을 잊어버림에 따라 수도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가졌다는 의식, 곧 소유의식까지 잊게 한다. 크리슈나가 무소유가 되라고 한 것은, 명상에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는 물건이 없다는 것, 왜냐하면, 그것은 보다 더 큰 행복의 경지로 가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 또 동시에 그 과정은 사람을 모든 것이 저절로 떨어져나가는 자리에 가져다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것이다.
그 가르침에는 명상을 할 때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라는 뜻도 있다. 외계에 대한의식을 잃음에 따라, 명상자는 그 없어지는 것을 슬퍼할 것이 없게 된다. 명상을 시작할 때 요기는 무엇에나 매달리려 해서는 아니된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그는 본체로 가서 자신을 깨고 세상으로부터는 잃어져야 한다. 그 결과 그는 세계의 소유 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가짐 없이 하라”는 말은 본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크리슈나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했을 때 그 말은 아르쥬나에게 명상을 하는 동안 실지로 어떤 것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것이다. 명상을 하려고 왔을 때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욕망하지도 않으려 하며 아무것도 가지기를 바라지 않으려 한다면 잘못이다. 그러려고 하는 동안 마음은 그것을 잊기 위해 다른 것을 또 가질 생각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잊으려고 하는 일이 잊고자 하는 물건을 기억하게 만든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명상의 과정은 조잡한 물체를 잊어버림을 기초로 하고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오묘한 체험의 세계에 대해 힘쓰는 것을 기초로 하여 되기 때문이다. 잊자는 노력은 미워함과 저주함에 뿌리를 박고 있는데, 명상 동안 사색의 오묘한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되는 체험은 보다 큰 행복의 길로 가려는, 즉 하나님 실현의 길로 가려는 마음의 천성인, 즐거이 하는 받아들임의 기초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인생 일생의 생활양식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아니된다. 요기가 되기 위해 실제 인생에서 물러나 있는 승려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요기를 언제나 사회에서 떠나, 혼자서, 무엇을 위해 향상하려 하는 노력을 쏟는 일도 없고 소유하는 일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만일 명상할 때의 시간과 명상에서 나와서 쓰는 시간의 구별을 할 줄 모른다면 이 절과 이 다음에 오는 절은 오해되고 말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1. 깨끗한 곳에 자기를 위하여 자리를 꽉 잡으라. 너무 높지도 않게, 너무 낮지도 않게. 그 위에 거룩한 풀, 사슴가죽, 그리고 옷을 겹쳐 깔라.
거룩한 풀 쿠샤 풀(kusha grass)
12. 그 자리에 올라 앉아,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고, 사념과 감각을 제어하여, 자기 혼을 정결케 하기 위하여 요가를 닦을 지어다.
장소나 자리에 대해 주의할 요점은 장시간 동안 밖에서 오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방해를 받음이 없이, 그리고 사람의 몸이 피로해짐이 없이 견디어갈 수 있도록 하며, 마음의 활동이 깊은 정신적 체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순조롭게 되어가도록 하자는 데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淸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그런 지경에 가려면 많은 훈련을 쌓은 후에야 되는 것이고, 처음에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육신 속에 있는 것이므로, 생리적인 법칙을 무시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침착한 마음으로 지킬 것을 지켜가며, 불급불완(不急不緩)의 겸손한 태도로, 단계적으로, 제 분에 맞는 대로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특히 기독교 개신교 사람들이 주의할 것은 개신교에서는 신앙을 강조하는 나머지 개인 자질에 생리적 심리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생각 않고, 아직도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제멋대로 열심을 내어 구하기만 하면 된다 하기 때문에 잘못되는 일이 많다. 초심자는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체험 있는 이의 지도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을 보면 주의 깊게 그 사람과 경우를 생각하여서 지도하신 것을 알 수 있고, 바울도 처음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나 일단 폐단이 생긴 후는 그것을 바로 지도하기 위해 애쓴 것을 알 수 있다. 정신에라고 결코 법칙도, 원리도, 순서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아직 샤머니즘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데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도 있겠지만, 이 점도 확실히 그 하나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함석헌
12절에서 요가라 한 것은 자나 요가(dhyana yoga) 즉, 명상을 말한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실제적인 이해관계에서 놓여나지 않고는 아니된다. 그런데 실제적 이해란 우리 사는 외계의 물질적인 세계와 서로 얽혀 있다. 그 주된 조건은 잘 수양된 가라앉은 마음이다. 우리는 사물을 대할 때 될수록 자유롭게 비틀리지 않은 지성으로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자신을 국외에 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왜 자기 자신을 철학자라 부르느냐 하는 질문을 당했을 째,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한다. 그는 인생을 올림피아 같은 큰 축제에 모인 가지각색의 군중에다 비했다. 어떤 사람들은 저자에서 장사를 하러 가 재미를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경기에 나가 상을 타려고 가고, 그리고 또 어떤 이는 단지 그런 것을 보려고 가는데, 이 나중사람이 철학자라고 했다. 그들은 직접적인 문제나 실제적인 필요에 버물려들지 않는다. 샹카라는 지혜를 탐구하는 자의 가장 근본적인 자격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못한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과, 현세적 내세적 행동의 결과를 누리자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음과, 자제와 정신적 자유에 대한 갈망이라고 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모든 지식의 목적은 선(善), 즉, 삶과 앎에 다 같이 근원이 되는 선의 관념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를 높여주는 데 있다. 따라서 이상적인 철학자란, 인생을 힘껏 다 살고 난 끝에 가서, 그의 목적이 언제나 고요하고, 안으로 향해 잠잠하고 고적하며 떠나 있는 살림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살림 속에서는, 세상이 그를 잊음으로 인해, 그는 세상을 잊고 자기의 하늘을 선에 대한 외로운 명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그것만이 참 살림이다. “마음이 정결한 이는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 혼의 정화는 훈련에 의해서야만 얻어진다. 플로티노스는 “지혜는 안정 속에 있는 심성의 한 상태라” 했다. —라다크리슈난
크리슈나가 밝히고자 하는 것의 첫째는 명상은 반드시 앉은 자세로 할 것이지, 눕거나 서서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누우면 정신이 둔해지고, 서면 마음이 자아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을 때 쓰러질 염려가 있다. 명상을 시작하려면 마음이 정상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 마음이 둔해져도 못쓰고 너무 활발해도 못쓴다. 둔하면 잠이 와서 체험할 능력이 없어지고, 너무 활발하면 이 조잡한 의식 속에 남아 있어서, 말하자면 오묘한 체험 속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셈이 된다. 마치 수면에서 활발하게 동작하면 물속에 빠지지 않는 것과 같다. 명상한다는 것은 마음이 자아의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일인데, 만일 섰을 때와 같이 마음이 너무 활발히 작용하면 그 빠져드는 과정이 시작되지 못한다. 그래서 명상은 앉아서 하라고 한 것이다.
‘한 점에 집중하고’에서 한 점에 집중하려면 마음이 점점 더 오묘한지경에 들어가는 대로 두어두어야만 잘 된다.
‘사념과 감각을 제어’해야 함은 모든 경험은 마음과 대상이 감각을 통하여 접촉하는 데서 생기기 때문이다. 명상을 할 때는 마음이 감각의 오묘한 지경과 접촉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가장 오묘한 지경에 이르고 마침내는 대상을 초월하는 지경에 들어 본성(本性, Being)의 지경에 이른다. 그렇게 해서 마음과 감각의 활동이 점차적으로 정복된다.
‘혼을 정결케’ 한다는 것은, 절대의식의 지경에서 마음이 온가지 상대적 규제에서 벗어나 가장 맑은 지경에 이름을 말한다. 그것이 요가의 경지다. 크리슈나가 “네 혼의 정화를 위하여 요가를 닦으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 의미는 이 경지에 이름으로 인하여서 몸과 마음과 혼이 다 정결해짐을 얻는다는 뜻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3. 몸과 머리와 목을 꼿꼿이 일직선으로 가져 움직이지 말고 눈으로 코끝만을 들여다보며, 사방으로 눈을 팔지 말라.
몸과 머리와 목을 곳곳이 일직선으로 하여 등뼈를 바로 하면 호흡의 길이 빨라져서, 들숨 날숨이 다 편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 듬을 가만히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몸을 가만히 가지고 있기를 가르친 다음, 감각을 가만히 가지고 있기를 가르친다. 감관 중에 가장 심히 활동하는 것이 눈이다. 그러므로 눈이 가만있으면 다른 것도 자연 가만있게 된다. 눈은, 모든 감관이 다 그렇듯 마음으로 인해 움직인다. 마음의 활동은 숨과 관계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과 감관과 숨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코끝에 주의를 모으라고 한다. 그 코끝은 시선과 숨이 만나는 곳이다. 그렇게 하는 결과로 마음과 감관과 호흡의 활동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고, 그러므로 모든 비정상적인 작용이 없어지게 된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안정되어 한 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감각을 조용하게 만들고 숨을 고르게 한다.
‘들여다보라’는 것은 거기를 향했다가 쉬었다가 하라는 말이지 줄곧 거기만 주시하란 말은 아니다.
‘사방으로 눈을 괄지 말라’는 것은 첫째는 여기 봤다 저기 봤다 하지 말라는 뜻, 둘째는 꼭 코끝만을 뚫어지게 보지 말라는 뜻, 셋째는 눈을 감으라는 뜻이다.
이 가르침에서 가장 오해되는 점이 코끝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샴카라 는 말하기를 만일 코끝만을 보라는 말이 거기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마음은 거기에 가 있고 하나님께는 가 있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몸의 자세에 관해 말하는 것은 몸, 마음, 숨, 어디거나 긴장시키라는 뜻이 아니다. 이 절의 말들은 마음이 바탈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 방법들을 통해 주의를 잡다한 외계에서 돌려, 외계를 경험하는 이 범역에 있으면서도 고요하고 잠잠한 지경에 돌리라는 말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4. 바탈의 고요 속에 두려움을 버리고, 브라마차랴의 맹세에 굳게 서서, 마음을 정복하고, 생각을 내게 맡기고, 정신을 통일하고 앉아 나만을 지상으로 전념하라.
‘바탈의 고요’란 마음이 감각적인 경험의 분야에서 아트만의 지경으로 옮겨졌으므로 외계의 장애가 없어져 한없는 평화의 지경에 들어간 상태를 말한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브라마차랴의 맹세’란 요가를 닦는 자는 성욕을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힌두교는 처음부터 브라마차랴를 주장해왔다.「챤도가 우파니샤드」에는 브라마가 인드라신에게 101년 동안의 브라마차랴를 지키게 한 이후에야 실재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브라마차랴는 성교를 어떤 조건이나 어떤 곳이나 어떤 때에도 생각으로도 말로도 행동으로도 아니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들은 브라마차랴와 참회로써 죽음을 극복 했다고 한다.
자기 사랑하는 여자 하나를 얻기 위하여 이상도, 최고의 비전도, 자기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어떤 것도 다 내버리지 않을 사람이 천에 하나인들 있을까? 현대인 중에는 동정(童貞) 생활은 우둔한 동시에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에게는 힌두교가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하나의 기괴하고 과장된 것으로 보일 것이다.
브라마차랴라 할 때는 금욕적으로 독신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절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힌두 전통으로는 가정을 가진 사람이 성 생활을 조절해가면 그것도 성 생활을 전연 하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브라마차랴로 알아준다. ᅳ라다크리슈난
동정의 맹세를 세운 사람의 모든 정력은 위를 향하고 있어서 몸, 마음, 감각의 모든 흐름이 진화의 보다 높은 층을 향해 흐르고 있으므로 그 정력이 아래로 흐를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맹세를 하는 그 행동이 아니고, 정력을 위로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로만 튼튼한 마음을 가지고 쓰는 그 일에 있다.
‘생각을 내게 맡기고’란 나를 생각하라는 말이 아니라 생각하는 권(權)을 내(만유의 주)게 넘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생각하기를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생각하기를 무집착의 태도로써 해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명상을 하는 동안 명상자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께 넘겨드린다는 기분을 가질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다 넘겨드린 것으로 알고, 벌써 내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온전히 무관심한 태도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5. 그처럼 자기 마음을 정복하여 요가를 닦는 자는 언제나 자아를 통일하여 내 안에 항상 있는 지상 니르바나의 평화에 도달하느니라.
니르바나(nirvana) 해탈, 열반.
16. 그러나 아르쥬나야, 요가는 지나치게 먹는 자도 이것을 얻지 못하고 지나치게 먹지 않는 자도 얻지 못하며, 지나치게 자는 자도 이것을 얻지 못하고 지나치게 깨어 있는 자도 얻지 못하느니라.
먹는 여기서 먹는다는 것은 대상으로 감각을 먹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때 감각에다 그 대상을 너무 많이 주어 길러주어도 아니되고, 또 전연 주지 않아도 아니된다.
‘잔다’는 것은 감각이 활발치 않은 것을 말하고 ‘깨어있다’는 것은 반대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감각이 너무 자고 있어도, 너무 깨어 있어 도, 자고 깸보다 높은 지경에 올라갈 수가 없다. 그런데 요가에서는 자고 깨는 지경을 초월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도의 행해지지 않음을 내 알겠도다. 아는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믿지 못하는구나. 도의 밝아지지 못함을 내 알겠도다. 어진 이는 지나치고 불초한 자는 믿지 못하는구나. —「중용」
17. 그 음식 섭취와 쉼을 알맞추 하고, 그 활동에서 힘쓰기를 알맞추 하며, 그 자고 깸을 알맞추 하는 사람에게는 요가는 고통을 꺼버리는 힘이 되느니라.
18.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아에만 안주하며, 쾌락을 바라는 일체의 욕망에서 벗어나면, 그때에 비로소 정신통일을 이룬 자라 하느니라.
진리를 보는 데는 작은 나를 완전히 말살해버리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건이다. 진리를 알려면 개성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모든 편견과 성벽을 다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절들에서 스승은 구도자가 어떠한 과정을 밟아서 궁극의 자아를 체험하는 데 이를 수 있는지 그것을 보여준다. 외적 또 내적 세계의 평상시의 경험에 있어서는 우리의 참 자아는 몸과 연합하여 있기 때문에 언제나 현상계의 복잡한 모습에 가리워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혼속에서 모든 특수한 작용을 내쫓아버리고, 마음의 모든 상(相), 모든 특수한 표현, 모든 서로 다른 작용을 제해버려야만 한다. 이것은 부정적인 절차다. 의식 속에서 모든 상을 내쫓아버려서 나중에는 정결, 단순한 텅 빔만 남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스승은 그 부정적인 절차를 취하는 목적인 순수한 자아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 복스러운 전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임을 설명해준다. 그러한 외양 보기에는 부정뿐인, 그러나 그러면서도 아주 발랄한 신비로운 명상을 통해서, 침묵은 완전한 지경에 이르고 빔은 극점에 달하여 마침내 혼의 능력의 긴장상태를 가져온다. 이것은 모든 지식을 초월한 체험이다. 왜냐하면 참 자아는 관념으로 표현할 수 있는, 또는 마음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언할 수 없는 주관적인 것이다. —라다크리슈난
마음이 완전히 가라앉았다는 것은 초월적인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때 마음은 물결 하나 일지 않는 무한하고 잠잠하고 순수한 의식의 바다가 된다. 그것은 또 우주의식이라 할 수도 있다. 거기서는 사상과 체험의 물결이 아무리 일어도 그 때문에 바다의 고요가 어지러워지는 일이 없다. 그러면 이런 반대를 할 수 있다. 마음이란 그 본성이 어떤 경험의 대상 속에서나 완전히 안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 증거로는 2장 67절에서 이러지 않았는가? 사람의 이성이 감각으로 움직여지는 것은 마치 배가 바다 위를 부는 바람으로 움직여지는 것과 같다고. 그러고 보면, 감각의 힘으로 끌려가는 마음은 감각이 대상과 접촉할 때에 완전히 안정함을 얻어, 거기서 오는 쾌락을 누릴 수 있지 않느냐고. 그런 반대로 인한 오해의 여지를 없이하기 위해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했다. 자아에만 안주하며라고.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초월적인 의식의 단계에서와 우주의식의 단계에서다. 초월적 단계에서는 자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아의 성질은 순수한 의식이다. 우주적인 지식, 우주적인 존재, 우주적인 생활, 영원한 실재, 절대의 복이다. 그것은 초월적이요, 언제나 불변이요, 불멸이다. 그것은 지극히 작은 것보다도 더 작은 것이다. 그것은 침묵이다. 자아란 말은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인 생명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마음이 그 지경에 들면 개성을 잃어버리고 순수한 실재로서의 참된 본성을 가지게 된다.
우주적인 의식단계에서 ‘자아에만 안주’한다는 말은, 사람이 어떤 행 동 속에서나 즉, 상시, 꿈 속, 잠 속에서 활동을 하거나 쉬거나, 자아는 행동과는 완전히 독립한 것임을 깨달아, 자아 속에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을 가진다. —마하리쉬 마헤슈 요기
19.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은 펄럭거림이 없나니, 생각을 정복하고 자아의 통일을 닦고 있는 수도자를 비하여 말한다면 그와도 같으니라.
어떤 객관적 경험도 마음이 감각을 통하여 그대상과 연결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예를 든다면 어떤 생각에 대해 명상을 할 때 그 생각에 대한 조잡 또는 오묘한 경험은 마음이 말의 감각과 접촉하는 데 달려있다.
명상하는 동안 경험의 대상은 점점 줄어드는 상태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의 가장 오묘한 상태가 초월될 때, 그때 마음은 이때껏 그것을 통해서 경험하던 대상과 감각을 벗어나게 된다. 마음이 감각과대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때까지는 마치 바람에 펄럭이는 등불과 같다. 그러나 그 영향을 한번 벗어나게 될 때 바람 없는 곳에 있는 등불같이 부동하는 것이 돼버린다.
마음이 대상과 연결되는 한은, 그것은 아직 경험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경험의 대상이 줄어들다가 나중 아주 없어지는 지경에 이를 때, 마음은 경험하는 마음이기를 그만둔다. 의식하는 마음이 의식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 변화의 과정 동안에 그것은 우선 첫째로 개성의 가장순수한 상태를 얻게 된다. 이 절의 말이 마음의 부동을 말하지 않고, ‘생각’의 부동을 말하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다. 거기에 쓰인 산스크리트 말은 ‘칫타’ (chitta)다.
그것은 고요하고 잠잠한 인상의 집합이라 할까, 혹은 욕망의 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