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3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Alain Badiou

ChatGPT - 영성 종교 철학 의식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Alain Badiou, Translated by Ray Brassier
May 2003 --- 1,000 단어 요약 평론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은 프랑스어 원저 <Saint Paul: La fondation de l’universalisme>(1997)의 영어판으로, Ray Brassier가 번역하여 Stanford University Press에서 2003년에 출간한 111쪽의 짧지만 밀도가 높은 책입니다. 목차 자체가 <Paul: Our Contemporary>에서 시작해 <Paul Against the Law>, <Love as Universal Power>, <Universality and the Traversal of Differences>로 진행되며, 바울을 신학자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주체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보여주는 사상가로 읽습니다.

알랭 바디우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성 바울: 보편주의의 기초>
2003
번역 Ray Brassier

바디우는 왜 무신론자인데 바울을 읽는가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저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철저한 무신론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초월적 진리로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울을 현대 정치철학의 중요한 인물로 불러낸다. 그 이유는 바울이 ‘무엇을 믿었는가’보다 ‘하나의 사건을 믿게 된 인간이 어떻게 새로운 보편적 주체가 되는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바울은 성인도, 교회 신학자도 아니다. 또한 니체가 비난했던 원한과 금욕주의의 창시자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사건(event)의 시인-사상가’이며, 특정한 집단의 전통에서 발생한 사건을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진리로 변환한 천재적인 정치적 조직가이다. 실제로 이 책을 소개하는 출판사 설명도 바울이 유대 율법과 그리스 로고스라는 두 질서를 동시에 돌파하여 새로운 보편적 주체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핵심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이 책은 사실상 바울에 관한 책인 동시에 바디우 자신의 철학에 관한 입문서이다. ‘사건–선언–충실성–주체–진리–보편성’이라는 바디우의 핵심 개념들이 바울이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통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건: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바디우가 바울에게서 발견하는 출발점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

바울에게 모든 것은 이 선언에서 시작한다. 바디우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어떤 사건을 선언하고 그 사건에 자신의 삶을 걸었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이다.

바디우의 철학에서 사건은 기존 세계의 법칙으로부터 연역할 수 없는 새로운 발생이다. 현재의 지식체계나 제도, 권력구조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갑자기 출현한다. 사건은 기존 질서로 증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그것에 충실하게 살아감으로써 그 사건의 의미가 드러난다.

바울에게 부활이 바로 그러한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은 유대 율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으며, 그리스 철학으로 증명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언된다.

여기서 바디우의 급진성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은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바울이 부활을 중심으로 만든 ‘사건의 구조’는 정치·과학·예술·사랑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정치운동이나 새로운 과학적 발견, 새로운 예술형식, 사랑의 만남 역시 기존 질서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다.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아닌 제3의 담론

바디우는 당시의 사유를 크게 ‘그리스적 담론’과 ‘유대적 담론’으로 나눈다.

그리스적 담론은 세계를 하나의 질서 있는 우주(cosmos)로 이해하려 한다. 철학은 이 우주의 보편적 법칙을 파악하는 ‘지혜’이다.

반대로 유대적 담론은 신이 선택한 백성과 신의 표징(sign)에 기초한다. 예언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의 일반 법칙이 아니라 신이 특정 백성에게 보낸 특별한 징표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두 담론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둘 다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자연적·우주적 질서를, 다른 하나는 율법과 선택된 민족의 질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은 둘 다 아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는다”라는 바울의 구절에서 바디우는 새로운 제3의 길을 발견한다. 바울은 지혜도 표징도 아니라 ‘사건’을 선언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주체는 그리스 철학의 현자도 아니고 유대 예언자도 아니다. ‘사도(apostle)’이다.

사도란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선언하고 그 결과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

이 책의 중심은 갈라디아서의 유명한 문장이다.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다.”

바디우에게 이것은 보편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이다.

바울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은 민족, 법, 사회적 지위, 성별 같은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충실성 앞에서 그러한 차이는 진리를 결정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은 계속 유대인이고 그리스인은 계속 그리스인이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의 사회적 차이도 현실에서는 남아 있다. 하지만 진리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에는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바디우 특유의 보편주의가 나온다.

보편적 진리는 모든 차이를 제거하여 모두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가로질러’ 간다.

따라서 보편주의란 “모두가 똑같아져야 한다”는 동질화가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특수한 정체성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디우가 현대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공동체주의를 비판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율법과 죄

바디우가 특히 중요하게 읽는 것이 로마서의 율법 논의이다.

바울에게 율법은 단순히 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다. 오히려 율법이 “하지 말라”고 명령할 때 금지된 욕망이 발생한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탐욕이 죄로 의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디우는 이를 정신분석과 매우 가까운 방식으로 읽는다. 법은 욕망을 억압할 뿐 아니라 욕망을 생산한다. 따라서 법과 죄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 상태를 바디우는 ‘죽음’의 질서라고 해석한다.

여기에서 ‘육(flesh)’과 ‘영(spirit)’도 흔히 생각하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이 아니다. 육은 법과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의 주체적 상태이며, 영은 사건 이후 새롭게 형성된 삶의 주체이다.

따라서 바울의 핵심 문제는 육체를 버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법에 종속된 인간이 어떻게 새로운 삶의 주체가 되는가?”이다.

죽음보다 부활

바디우는 기독교 전통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경계한다.

그에게 바울의 혁명성은 죽음에 있지 않고 부활에 있다.

죽음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죽음 자체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이라는 기존 질서 안에서는 불가능했던 가능성이 출현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죽음과 부활을 헤겔식 변증법으로 읽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부정이 부활이라는 긍정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죽음에서 논리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것’은 과거의 모순이 저절로 발전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사건으로 출현한다.

이 점에서 바디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결정론과도 거리를 둔다. 혁명은 자본주의 모순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사건이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충실성을 통해 진리의 과정이 만들어진다.

믿음, 사랑, 희망

바디우는 바울의 유명한 세 덕목인 ‘믿음·사랑·희망’을 자신의 철학 언어로 번역한다.

믿음(faith)은 사건의 선언이다.

사랑(love)은 그 사건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보편적 힘이다.

희망(hope)은 사건에 대한 충실성이 끝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다.

여기서 사랑이 특히 중요하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자선이 아니다. 사건의 진리가 특정 민족이나 계급의 소유물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따라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바디우에게 윤리적 친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진리 앞에서 타자를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보편주의의 실천이다.

차이를 없애지 않는 보편주의

이 책에서 가장 현대적인 부분은 제10장 <Universality and the Traversal of Differences>이다.

바디우는 바울이 문화적 차이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가능한가?

음식, 할례, 관습 같은 문화적 차이가 더 이상 진리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관습을 가져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 관습이 “나만이 진리의 주체가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문제가 된다.

이를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바디우는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한다.

한쪽에는 “우리 문화만 옳다”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모든 사람을 문화적·성적·인종적 정체성 집단으로 나누어 각자의 진리를 따로 인정하는 극단적 상대주의가 있다.

바디우의 보편주의는 이 둘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둘을 동시에 넘어가려 한다.

차이는 존재하지만 진리는 차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 책의 강점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바울을 교회의 소유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바디우의 바울은 기독교 교리를 세운 성직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모든 자격과 정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성을 창조한 급진적 사상가이다.

특히 “보편성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이 인종, 민족, 성별, 종교, 문화, 국가 등의 정체성을 통해 설명되는 일이 많다. 정체성은 억압받은 집단을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를 정체성으로만 설명하면 인간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공통의 진리나 공동선을 말하기 어려워진다.

바디우는 바울에게서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

“나는 누구인가?”보다
“어떤 진리에 충실한 주체가 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바울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가장 큰 약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바디우가 자신의 철학에 필요한 바울만을 추출한다는 데 있다.

역사적 바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바디우는 그리스도의 신성, 속죄, 종말론, 교회, 성령 등 기독교의 구체적 내용을 거의 모두 제거한다.

그래서 남는 것은 놀랄 만큼 바디우 자신과 닮은 바울이다.

후대의 바울 연구자들은 바로 이 점을 비판했다. 바디우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를 강조하면서도 그 문장의 결론인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구체적 기독교적 조건을 사실상 희석한다는 비판이다. 또한 역사학자들은 바울의 보편주의가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순수한 보편주의가 아니라 유대적 메시아주의 안에서 발생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바디우의 책은 역사적 바울에 대한 충실한 주석이라기보다 ‘바울을 매개로 쓴 바디우 철학’이라고 읽는 편이 정확하다.

더 심각한 문제: 보편주의는 정말 순수할 수 있는가

바디우는 특정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를 원한다.

매우 매력적인 이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보편을 대표한다”는 주장은 위험할 수도 있다. 프랑스 혁명, 공산주의, 서구 문명, 기독교 모두 자신을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특정한 사람들의 경험과 문화를 주변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디우에게도 이 위험이 있다.

특히 그의 바울 해석은 유대교를 ‘율법과 특수성’, 바울을 ‘사건과 보편성’에 배치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율법적인 유대교 대 자유로운 기독교’라는 낡은 도식을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바디우의 바울론은 현대 바울학과 유대교 연구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는다.

종합 평론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은 바울 연구서로 읽으면 문제가 많은 책이지만, 정치철학서로 읽으면 대단히 자극적인 책이다.

바디우가 발견한 바울의 핵심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보편적 진리는 보편적인 장소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사건에서 시작하여 모든 특수성을 가로질러 보편적인 것이 된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극도로 특수한 사건이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보편적 선언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퀘이커의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빛(that of God in everyone)’과도 비교할 수 있다.

두 전통의 근거는 전혀 다르다. 바디우에게 보편성은 초월적 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사건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온다. 반면 퀘이커에게 인간의 평등은 모든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신적 현존과 연결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입장은 중요한 한 점에서 만난다.

사람의 민족, 신분, 성별, 교파, 제도적 자격이 그 사람의 진리에 대한 접근을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퀘이커적 관점에서 보면 바디우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사건에 대한 충실성’만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진리 확신을 어떻게 성찰하고 수정할 것인지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바디우의 ‘militant’, 즉 투사적 주체는 강력하지만 때때로 너무 확신에 차 있다. 퀘이커의 discernment는 진리에 대한 충실성에 침묵·경청·공동체적 검증을 덧붙인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뒤 남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울은 최초의 보편주의자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다.

“특정한 사건에서 태어난 확신이 어떻게 타인을 억압하는 교리가 되지 않으면서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있는가?”

바디우는 바울을 통해 그 문제를 탁월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점 때문에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은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책이라기보다, ‘보편주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기 위한 아주 훌륭한 첫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세진님이 계속 읽어오신 <마르크스–스피노자–바디우>의 흐름에 놓으면 이 책은 더 흥미롭습니다. 바디우의 바울은 신학자라기보다 일종의 ‘혁명적 주체 형성론’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최근 요청하신 <Marx and Spinoza>와도 연결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오츠카 야스오(大塚恭男)[동서 생약고>(東西生薬考)

<동서 생약고> 요약 및 평론 - 

오츠카 야스오(大塚恭男)의 1993년 저서 <동서 생약고>(東西生薬考)에 대한 요약 및 평론입니다.

<동서 생약고> 요약 및 평론

<동서 생약고>는 일본의 대표적인 한의학자이자 의사학자인 오츠카 야스오가 1993년에 출간한 저작이다.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전통 의학이 자연의 약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발전시켜 왔는지를 비교문화사적 관점에서 추적한다. 단순히 약물의 효능이나 화학적 성분을 규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가 질병과 자연을 마주하며 쌓아 올린 지적 체계의 형성과 융합을 조망한다.

<1. 핵심 내용 요약>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인식 차이> 동양과 서양은 모두 식물, 동물, 광물 등 자연에서 약재를 구하는 것으로 의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질병 치료에 적용하는 사유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발생했다. 고대 그리스의 4체액설에 기반한 서양 의학은 갈레노스를 거치며 체액의 불균형을 교정하는 수단으로 생약을 바라보았다. 서양에서는 생약의 성질을 온·열·한·량 등 네 가지 성질과 건·습의 조합으로 파악하여 질병의 원인을 직접 억제하거나 배출(설사, 사혈, 구토)하는 데 집중했다.

반면 동양의 전통 의학, 특히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진 한의학은 음양오행설과 기(氣)의 개념에 기대어 약재를 이해했다. <신농본초경>에서 제시된 상약, 중약, 하약의 분류 체계는 인간의 본성을 기르고 몸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전인적 접근을 중시했다. 단일 성분의 직접적 작용보다는 여러 약재가 이루는 상호작용(군신좌사)을 통해 인체 고유의 회복력을 끌어올리는 방제학이 발달했다.

<실크로드와 대항해시대를 통한 약재의 교류> 생약은 고립된 채 발전하지 않았다. 감초, 육계, 대황, 인삼, 아편 등 주요 생약은 실크로드와 해상 교역로를 통해 끊임없이 동서양 사이를 넘나들었다. 서양의 대황(Rhubarb)은 동양의 장 세척과 열을 내리는 용법과는 다소 다른 맥락으로 수용되었고, 서양의 아편 역시 동양에 유입되면서 통증 완화와 지사제 등 고유의 처방 체계에 편입되었다.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신대륙의 약재인 키나수피(키니네 원료) 등이 전 세계로 확산되며 전통적 질병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약재의 이동은 곧 문화적 번역과 의학적 체계의 재해석 과정이었다.

<본초학과 근대 식물학·약학의 분기> 18세기 이후 서양에서는 린네의 식물 분류학과 화학 혁명이 결합하며 생약에서 유효 성분을 추출·단리하는 근대 약리학이 태동했다. 생약의 복합적 작용은 단일 분자의 화학적 기전으로 환원되었다. 반면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에도 시대 란가쿠(난학)의 유입으로 네덜란드의 의학 지식을 접하면서도, 고유의 본초학 체계를 단번에 버리지 않고 <본초강목> 등의 지식을 바탕으로 자생 약초를 재검토하는 독자적 '고의학(古醫學)'과 실증적 본초학을 발전시켰다. 저자는 서양 약학이 '분석과 순수화'로 나아갈 때, 동양 의학은 '관계와 복합성'을 유지했음을 규명한다.

<2. 평론: 융합적 시선과 근대주의에 대한 성찰>

<탈서구중심적 의사학 연구의 모범>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서양 근대 의학을 발전의 최종 도착지로 두고 전통 의학을 미신이나 전근대적 유물로 치부하는 단선적 진보관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오츠카 야스오는 서양의 생약학 또한 수천 년간 경험주의와 고유의 철학에 기대어 작동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동양 본초학과 서양 마테리아 메디카(Materia Medica)를 동등한 층위에서 비교함으로써, 질병을 다루는 인류의 지혜가 지역적 환경과 철학적 전제에 따라 어떻게 다양화되었는지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환원주의 약리학에 던지는 화두> 현대 약학은 특정 유효 성분만을 추출하거나 합성하여 질병을 표적 공격하는 방식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환원주의적 접근이 생약 특유의 다성분 복합 작용, 즉 성분들 간의 상승작용이나 부작용 상쇄 메커니즘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생약을 복합 처방의 형태로 다루어 온 동양 의학의 지혜는 현대 과학이 규명해야 할 또 다른 미개척 분야이며, 단순한 경험의 집적을 넘어선 정교한 시스템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한계와 현대적 의의> 책의 논의는 방대한 문헌 고증과 사료 분석에 기반하고 있어 인문학적·역사의학적 깊이가 탁월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시점에서 서술되었기에 최신 생약 약리학이나 시스템 생물학적 연구 성과까지는 포괄하지 못한다는 시대적 한계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과 서양의 생약관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지 않고 문명 교류의 산물로 읽어내는 저자의 거시적 통찰은 오늘날 통합 의학이나 천연물 신약 개발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동서 생약고>는 생약이라는 구체적인 매개체를 통해 인간이 질병을 해석하고 자연과 관계를 맺어온 방식을 탐구한 의사학적 수작이다.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동서양 지적 전통의 만남과 분기를 날카롭게 포착함으로써 현대 의학이 잃어버린 생태적·전인적 감각을 되살리는 데 기여한다.


===

大塚恭男 <東西生薬考>(1993) — 1,000단어 요약·평론

<東西生薬考>(동서 생약고)는 오쓰카 야스오(大塚恭男)가 1993년 창원사(創元社)에서 펴낸 310쪽의 책이다. 책은 크게 <1. 東西伝統医薬の流れ―동서 전통의약의 흐름>과 <2. 東西生薬考―동서 생약고>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감초(甘草), 인삼(人参)을 비롯해 동서양에서 오래 사용해 온 생약 73종을 다룬다. 출판사 소개 그대로, 각 생약의 약효만 나열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설화·풍습·역사와 동서양의 사용법을 비교한다. 귀중한 옛 채색 식물도판이 많이 수록된 것도 특징이다.

앞서 읽은 <東洋医学>(한국어판 <일본의 동양 의학>)이 <한방이라는 의료체계>를 설명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그보다 한 층 아래로 내려가 <약 하나하나의 생애>를 추적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약물학 교과서라기보다는 의학사·식물학·민속학·종교사·비교문화사가 교차하는 독특한 저작이다.

1. 핵심 질문: 인간은 왜 어떤 식물을 ‘약’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현대 약리학은 약물을 주로 유효성분으로 이해한다. 어떤 식물에서 특정 화학물질을 분리하고, 그것이 수용체·효소·신경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측정한다.

오쓰카는 그보다 앞선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인간은 수천 년 전 어떻게 이 식물을 약으로 선택했는가?>

어떤 것은 먹어보고 알았을 것이다. 어떤 것은 우연히 효과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식물은 모양이나 색깔 때문에 신성한 힘이 있다고 믿었고, 어떤 것은 신화·주술·종교의 일부가 되면서 약으로 사용되었다. 한 식물이 중국에서는 한 가지 용도로, 그리스·로마나 중세 유럽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와 용도로 쓰인 사례도 있다.

따라서 생약의 역사는 단순히 <과학 이전의 불완전한 약리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해석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관점이다.


2. ‘동양의 본초’와 ‘서양의 herb’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우리는 흔히 동양에는 <본초학 本草學>, 서양에는 근대 약학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서양에도 오랫동안 식물·동물·광물을 이용하는 거대한 전통의 약물문화가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약물학, 중세 수도원의 약초원, 르네상스 시대의 herbals, 민간의 약초 치료가 그것이다. 근대 화학약품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 의약품의 상당 부분 역시 자연물에서 왔다.

오쓰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이 평행성이다.

동양의 <본초서>와 서양의 <herbal>은 문화적 언어는 달라도 놀랄 만큼 비슷한 일을 했다.

식물의 모습을 기록하고,
어디에서 자라는지 설명하고,
어떤 부위를 사용하는지 적고,
어떤 질병에 효과가 있는지 전하고,
때로는 전설과 종교적 의미까지 덧붙였다.

즉 <신농본초경 神農本草經>과 유럽의 고전적 본초서는 서로 다른 문명에서 발생했지만 모두 <자연을 약물의 보고로 읽는 인간의 지식체계>였다.

바로 여기서 책 제목의 ‘東西’가 의미를 갖는다.

오쓰카의 목적은 어느 쪽이 더 우월했는지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멀리 떨어진 문명들이 동일한 식물을 어떻게 발견하고 해석했는가>를 비교하는 것이다.


3. 감초는 이 책의 방법을 가장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가 감초(甘草, licorice)다.

감초는 중국의 <신농본초경>에 등장하는 아주 오래된 약물이면서 유럽에서도 고대부터 사용되었다. 현대 한방에서는 수많은 복합처방에 들어가는 대표적인 생약이다. 감초는 중국과 유럽 모두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문자 그대로 <동서 생약>이다. 현대 연구에서도 감초의 주요 성분인 glycyrrhizin과 그 약리작용이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오쓰카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동일한 식물인데 왜 중국에서는 처방을 조화시키는 약으로 발전하고, 서양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약물로 사용되었는가?>

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중국 한방 특유의 <君臣佐使>라는 사고가 나타난다.

한방 처방에서는 하나의 약이 단독으로 작용하기보다 여러 생약이 군(君)·신(臣)·좌(佐)·사(使)의 역할을 나누어 전체 처방을 만든다. 실제로 오쓰카의 <東西生薬考>는 오늘날 한방교육 자료에서도 이 군신좌사의 설명을 위한 참고문헌으로 인용된다.

따라서 생약 하나를 이해하려면 그 식물의 성분만 봐서는 안 되고 <어떤 약들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사용되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은 오쓰카의 동양의학관과도 정확히 연결된다.


4. 인삼: 약효와 상징이 결합한 식물

또 하나의 대표적인 약물이 인삼(人参)이다. 출판사의 복간 안내에서도 감초와 함께 이 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인삼을 특별히 언급한다.

인삼은 동아시아에서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人参’이라는 이름 자체가 뿌리가 사람의 형상을 닮았다는 관찰과 관계된다. 귀한 산삼을 발견하는 과정에는 산신·꿈·길흉 등의 민속이 결합했고, 중국·조선·일본에서 인삼은 약이면서 동시에 고가의 상품이고 정치적·외교적 교역품이었다.

오쓰카가 이런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약효와 문화적 의미를 역사적으로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근대 약리학은 “인삼의 어떤 성분이 어떤 생리작용을 하는가?”를 묻는다.

전통사회는 동시에

“이 뿌리는 왜 사람처럼 생겼는가?”
“왜 오래 사는 산에서 발견되는가?”
“생명력을 보충해 주는 것은 아닌가?”

라고 물었다.

오늘날에는 후자의 추론 가운데 상당 부분을 과학적 근거로 인정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약물 선택과 이용에 영향을 미쳤다는 역사적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5. 유럽의 약초도 ‘과학적’이지만은 않았다

이 책의 장점은 동양의학만 신비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양의 약초사에서도 종교·점성술·유사성의 사고가 풍부했다.

예컨대 식물의 형태가 어떤 신체기관을 닮으면 그 기관의 질병을 치료한다고 보는 사고가 있었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비과학적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보내는 기호>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금잔화 Calendula의 사례가 좋은 예다. 16세기 유럽 본초서들은 금잔화를 월경, 치통, 눈의 충혈, 피부 치료 등 여러 용도로 기록했다. 오쓰카는 이런 옛 유럽 본초 기록도 폭넓게 끌어온다. 현대 일본의 약용식물 연구기관도 <東西生薬考>에 기록된 이러한 유럽 본초 자료를 소개한다.

즉 오쓰카는

<동양 = 신비주의 / 서양 = 과학>

이라는 단순한 구도를 무너뜨린다.

동서양 모두 자연을 경험하고, 관찰하고, 동시에 상징적으로 해석했다.


6. 생약은 문명 사이를 이동한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또 하나의 주제는 <약의 이동>이다.

식물에는 국경이 있지만 약물지식에는 국경이 없다.

무역로, 전쟁, 종교, 제국, 의사의 여행을 통해 약과 지식이 이동한다.

어떤 생약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일본으로 갔고, 어떤 것은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중국으로 왔다. 반대로 지중해 세계에서 사용되던 약물이 아라비아·페르시아 의학을 거쳐 동쪽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오쓰카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중국의 약>, <서양의 허브>라고 고정해 부르는 것들이 실제 역사에서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형되었다는 사실이다.

마늘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이 책의 229쪽은 고대 서양에서 포도주와 함께 마늘을 사용하는 치료법을 소개하는 자료로 후대 문헌에서 인용되고 있다.

즉 약물사는 일종의 세계사다.


7.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 경험은 미신과 과학의 중간에 존재한다

오쓰카가 전통 생약을 다루는 태도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두 극단을 모두 피한다는 점이다.

첫 번째 극단은

<옛사람들이 사용했으므로 효과가 있다>

는 주장이다.

두 번째 극단은

<현대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모두 미신이다>

라는 주장이다.

오쓰카는 양쪽 모두를 경계한다.

수백 년의 경험적 사용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 경험이 곧 약효의 과학적 증명은 아니다.

반대로 고대 문헌에 신화적 설명이 들어 있다고 해서 그 식물의 실제 약리작용까지 부정할 이유도 없다.

바로 여기에서 오쓰카의 특이한 이력이 힘을 발휘한다. 그는 한방의 대가 오쓰카 게이세쓰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도쿄대 의학부에서 현대의학과 약리학을 공부한 연구자였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전통을 믿을 것인가 버릴 것인가>

가 아니라

<전통 속에 축적된 경험을 현대 과학의 질문으로 어떻게 바꿀 것인가>

였다.


8. 평론: 이 책은 의학책보다는 ‘비교문명사’로 읽는 것이 더 좋다

나는 <東西生薬考>의 가장 큰 가치를 약효정보보다 <비교의 방법>에서 찾는다.

오쓰카는 73종의 식물을 하나씩 들여다보면서 문명 간의 차이보다 공통점을 발견한다.

인간은 어디에서 살든

아플 때 주변의 자연을 살펴보았고,
식물을 먹거나 발라 보았으며,
효과와 실패를 기억했고,
그 경험을 이야기로 전했으며,
마침내 그것을 의학체계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본초학은 자연과학이 시작되기 이전의 단순한 미신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을 체계적으로 관찰하고 기억한 가장 오래된 지식 형태 중 하나>다.

그렇다고 이것을 현대 약리학과 동등한 과학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바로 그 중간지대가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장소다.


9. 지금 읽을 때의 한계

다만 1993년의 책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생약의 유효성분, 독성, 약물상호작용에 대한 지식이 훨씬 많이 축적되었다.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전통적 효능을 오늘날의 의학적 효능으로 곧바로 읽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16세기 유럽에서 이 식물을 월경·치통·눈병에 사용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학사적 사실이지만,

<그 치료법의 효과가 현대 임상시험에서 입증되었다>

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책의 두 층위를 구별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사용했는가>와
<실제로 현대 의학적으로 무엇이 효과가 있는가>

는 별개의 문제다.

이 구별만 지킨다면 책은 오히려 지금도 상당히 현대적이다.


10. <일본의 동양 의학>과 함께 읽으면 보이는 오쓰카의 사상

앞서 읽은 <東洋医学>(1996)과 이 책을 함께 놓으면 오쓰카의 전체 구상이 명확해진다.

<東西生薬考>(1993)은

약은 어떻게 인간문화 속에서 만들어졌는가?

를 묻는다.

<東洋医学>(1996)은

그렇게 발전한 동양의학은 서양의학과 어떻게 다른가?

를 묻는다.

하나는 <약의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의학체계의 역사>다.

그러나 둘을 관통하는 사상은 같다.

<서양의학과 동양의학을 적대적인 두 세계로 만들지 말라.>

서양에는 서양의 전통 생약학이 있었으며, 동양의 본초에도 풍부한 경험적 관찰이 있었다. 현대의학은 이 두 전통을 모두 비판적으로 계승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오쓰카는 전통주의자가 아니라 <통합주의적 역사주의자>에 가깝다.


종합평가

<東西生薬考>를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약초 73종을 통해 쓴 ‘인간과 자연의 세계문화사’>

라고 하고 싶다.

처방을 배우려는 독자에게는 <東洋医学>이나 임상 한방서가 더 직접적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어떻게 약으로 만들었으며, 서로 만나지 않았던 동서 문명은 왜 비슷한 식물을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용했는가>에 관심이 있다면 오히려 <東西生薬考>가 오쓰카의 책 가운데 가장 매력적이다.

특히 앞서 이야기한 <중국 중의학–한국 한의학–일본 한방> 비교와 연결하면 더욱 흥미롭다. 세 나라의 의학제도는 근대에 크게 갈라졌지만, 그 아래에는 훨씬 오래된 <본초라는 공통의 지식세계>가 존재한다. 오쓰카는 바로 그 층까지 내려간다.

그래서 이 책의 진짜 주제는 약초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무엇을 보고, 그것을 어떤 이야기와 경험으로 지식화해 왔는가>이다.

그 점에서 <東西生薬考>는 의학사 책이면서 동시에 종교와 민속, 과학이 아직 분리되기 이전의 인간 정신사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앞의 <일본의 동양 의학>보다 세진님의 관심사에는 오히려 이 책이 더 흥미로운 면이 있습니다. 특히 다음으로는 이 책에서 보이는 <본초학의 자연관>을 <도교적 자연관·신농본초경·서양 중세의 약초와 기독교적 자연관>과 비교하면, 단순한 동서의학 비교를 넘어 <동서양이 자연을 어떻게 ‘의미 있는 세계’로 읽었는가>라는 종교·철학적 차원까지 갈 수 있습니다.

===


===

the first humans started in Africa?

ChatGPT -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

How do religious Jews and Christians handle the idea that the first humans started in Africa?
====

Religious Jews and Christians approach the "Out of Africa" scientific consensus through several distinct theological frameworks, ranging from full scientific integration to outright rejection. Because neither the Hebrew Bible nor the New Testament functions as a modern scientific geography textbook, believers interpret the relationship between Genesis and paleoanthropology in roughly four ways:

<The / Approach Creationist Evolution Evolutionary Theistic>
Many mainstream Christian denominations (Catholicism, Eastern Orthodoxy, mainline Protestantism) and non-fundamentalist Jewish movements (Conservative, Reform, and modern Orthodox thinkers) fully accept the fossil and genetic evidence showing that anatomically modern  evolved in Africa.

: Biological evolution, including hominin origins in Africa, is seen as the mechanism God used to develop the physical human body.

: The Genesis creation narrative is interpreted as theological poetry rather than physical history. Under this view, "Adam" represents the emergence of spiritual consciousness, moral awareness, and the "image of God" (), rather than a specific biological progenitor at a pinpointed geographical coordinate.

: The Garden of Eden is understood as an archetypal sanctuary representing communion with God, not a Cartesian physical site with modern borders.

<Young-Earth (Literal / Creationism Rejectionist View)>
A substantial portion of conservative evangelical Christians and traditional Ultra-Orthodox (Haredi) Jews reject the evolutionary timeline and the "Out of Africa" model altogether:

: Genesis 2 mentions the Tigris and Euphrates rivers, locating Eden in or near Mesopotamia. Because Young-Earth Creationists calculate Earth's age at roughly 6,000 to 10,000 years, they reject the 300,000-year hominin record in Africa.

: In this framework, humanity began in the Near East with Adam, survived the Flood via Noah's family, and dispersed across the globe—including into Africa—only after the collapse of the Tower of Babel. The African fossil record is interpreted either as extinct non-human primates, corrupted post-Babel human populations, or misinterpreted strata from Noah's Flood.

Across both faiths, the dominant intellectual tradition today views Africa as the physical nursery of the human body, while looking to Genesis as a moral and spiritual reflection on humanity's purpose.


===

Most religious Jews and Christians today handle this by distinguishing between two different questions:

  1. science asks where and how Homo sapiens arose biologically;
  2. Genesis asks what human beings are, why they are morally responsible, and what their relationship to God is.

Modern paleoanthropology and genetics indicate that Homo sapiens emerged in Africa roughly 300,000 years ago and later dispersed across the world. For many believers, this does not require rejecting Genesis.

Among Jews, the tension is often comparatively mild. Judaism has never had one universally binding doctrine that Adam and Eve must be understood as the sole biological ancestors of every human being. Many Jewish interpreters read Genesis 1–3 as theological narrative: Adam — Hebrew <אָדָם, adam> — is closely related to <adamah>, “ground/earth.” Thus Adam can represent humanity itself: the earth-creature made in God's image, endowed with freedom and responsibility.

A religious Jew can therefore say: “Human beings evolved in Africa; Genesis tells us that wherever humanity biologically originated, humans are creatures of God and bear God's image.” Orthodox Jews vary considerably. Some retain a fairly literal Adam and Eve, while others accept evolution and interpret the early chapters of Genesis less literally.

Christianity presents a somewhat more complicated problem because of Paul, especially Romans 5 and 1 Corinthians 15. Paul contrasts Adam and Christ: “through one man sin entered the world,” while Christ brings redemption. Consequently, Christians have traditionally attached more theological weight to Adam as an actual person.

Nevertheless, several Christian approaches now coexist.

  • Young-earth or strict biblical literalists reject the conventional evolutionary account. They generally believe Adam and Eve were specially created several thousand years ago, and therefore dispute the mainstream African-origins chronology.
  • Old-earth creationists accept the great age of the earth and often accept much of modern science, but believe Adam and Eve were specially created by God rather than descended entirely through evolution.
  • Evolutionary-creation Christians accept human evolution and African origins. They interpret Adam and Eve as either representative figures, historical people within an already existing human population, or both.
  • Some theologians regard Adam primarily as an archetype: Genesis describes something true about every human being—our capacity for relationship with God and our recurring alienation, selfishness and sin—rather than giving a scientific account of the first Homo sapiens.

One particularly interesting modern proposal is the “genealogical Adam” model. According to this idea, a large population of biologically modern humans could already have existed, originating ultimately in Africa. Adam and Eve might then have been a particular couple whom God called into a special covenantal relationship. After sufficient intermarriage, they could become genealogical ancestors of everyone living later without being the first biological humans. This attempts to preserve both a historical Adam and mainstream population genetics.

There is also an important distinction between “first anatomically modern humans” and “first humans in the theological sense.” A Christian might believe, for example, that evolution produced Homo sapiens gradually, while at some stage God brought human beings into a distinctive moral or spiritual relationship with God. Science cannot identify a fossil at which “the image of God” suddenly appears because <image of God> is a theological category, not an anatomical feature.

For Judaism this distinction is especially natural because the Hebrew Bible does not formulate the later Christian doctrine of original sin. Adam's transgression matters, but Judaism generally does not teach that every human inherits Adam's guilt in the same way that Augustine's Western Christian tradition came to teach. Consequently, an African evolutionary ancestry does less damage to the structure of Jewish theology.

Christianity has had to rethink the question more explicitly. Catholicism, for example, accepts evolutionary science in principle while insisting that the spiritual dimension of humanity ultimately comes from God. Many mainline Protestant churches similarly accept evolution. Eastern Orthodox theologians range widely, but often place less emphasis than Western Augustinian Christianity on inherited guilt, making an evolutionary interpretation somewhat easier.

The deepest issue is therefore not actually Africa. Nothing in biblical theology requires Eden to be in Europe or makes African ancestry religiously problematic. In fact, from a biblical perspective the common African ancestry of humanity could reinforce one of Genesis's central claims: humanity is fundamentally one family.

The real difficulty is the word “first.” Genesis appears, on a straightforward reading, to describe a first man and woman. Evolutionary biology describes populations, not a sudden biological transition involving one isolated couple. That is the point at which religious interpretations diverge.

So the positions can be pictured roughly like this:

Genesis as science → African human evolution is rejected.
Genesis plus science → evolution occurred, but Adam and Eve were specially chosen or specially created.
Genesis as theological narrative → African origins describe our biology; Adam and Eve describe the human condition.

I find one further implication especially interesting for Jewish-Christian theology. The scientific discovery of African common ancestry actually undermines nineteenth- and early-twentieth-century racial theories far more radically than it undermines Genesis. Genetics tells us that Europeans, Koreans, Africans, Jews, Arabs and everyone else descend from the same relatively recent human populations. In that respect, modern science brings us unexpectedly close to the biblical affirmation in Genesis that humanity has a single origin and a shared dignity.

The serious theological debate is therefore less “Did humans come from Africa or from Eden?” than:

<What exactly did the biblical writers mean when they said that all humanity is “in Adam”?>

That question leads directly into the very different Jewish, Pauline, Augustinian and modern evolutionary understandings of Adam.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Alain Badiou,

Saint Paul | Stanford University Press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Alain Badiou, Translated by Ray Brassier
May 2003

128 Pages
Series
Cultural Memory in The Present


DescriptionReviewsAbout the Author


In this bold and provocative work, French philosopher Alain Badiou proposes a startling reinterpretation of St. Paul. For Badiou, Paul is neither the venerable saint embalmed by Christian tradition, nor the venomous priest execrated by philosophers like Nietzsche: he is instead a profoundly original and still revolutionary thinker whose invention of Christianity weaves truth and subjectivity together in a way that continues to be relevant for us today.

In this work, Badiou argues that Paul delineates a new figure of the subject: the bearer of a universal truth that simultaneously shatters the strictures of Judaic Law and the conventions of the Greek Logos. Badiou shows that the Pauline figure of the subject still harbors a genuinely revolutionary potential today: the subject is that which refuses to submit to the order of the world as we know it and struggles for a new one instead.
====

===

<사도 바울: 보편주의의 기초> 요약 및 평론

<1. 집필 배경과 문제의식: 정체성주의와 자본주의적 보편성에 맞서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1997년에 발표하고 2003년 레이 브라시에의 번역으로 널리 알려진 <사도 바울: 보편주의의 기초>는 신학 서적이 아니다. 무신론자인 바디우가 사도 바울을 소환한 이유는 종교적 교리를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두 가지 왜곡된 보편성에 맞설 철학적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바디우가 보기에 현대 사회는 두 축으로 양극화되어 있다. 하나는 전 지구를 단일 시장으로 묶으며 모든 인간적 가치를 화폐와 상품 교환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적 거짓 보편성>이다. 다른 하나는 이에 반발하여 민족, 인종, 젠더, 종교, 소수 집단 등 특수한 정체성에 갇혀 폐쇄적인 벽을 세우는 <상대주의적 정체성주의>다.

바디우는 이 둘 모두 진정한 해방을 가로막는다고 진단한다. 차이에만 매몰되는 상대주의는 분열을 낳고, 자본의 통합 논리는 인간을 상품 소비자로 전락시킨다. 바디우는 특수성에 기반한 차별과 분리를 단숨에 횡단하며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는 <급진적이고 엄격한 보편주의>를 복원하고자 한다. 그리고 바로 이 보편주의의 최초 이론가이자 실천가로서 신약성서의 사도 바울을 재발견한다.

<2. 핵심 논지 요약: 사건, 주체, 그리고 네 가지 담론>

(1) 사건과 진리-절차: 부활의 의미 바디우 철학의 핵심 축은 <사건(Event)>과 <진리-절차(Truth-procedure)>다. 세계의 기존 질서와 법칙 안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단절적 계기가 터져 나오는 것이 <사건>이다. 바디우에게 기독교의 '그리스도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나 기적이 아니라, 순수한 사유의 사건 모델이다.

부활은 율법이나 자연 법칙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의 모든 규범적 잣대를 일거에 무효화하는 단절이다. 바디우는 바울이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이나 기적 행위에 집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 하나에만 집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주체는 이 예측 불가능한 사건에 맞닥뜨려 그것을 참으로 선언하고, 그에 충실하게 헌신할 때 탄생한다.

(2) 유대적 율법과 그리스적 지혜의 극복: 네 가지 담론 구조 바울 당시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던 두 거대한 사유 틀이 있었다. 기적과 표적을 요구하며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민과 이방인을 가르는 <유대적 담론>, 그리고 이성과 논증을 통해 세계의 우주론적 질서를 설명하려는 <그리스적 담론>이다.

바디우는 바울이 이 두 담론을 모두 거부했다고 분석한다. 유대적 율법은 구원을 민족적 혈통과 계명 준수라는 특수성에 가두며, 그리스적 철학은 세계의 지배 논리를 정당화할 뿐 진정한 단절을 일으키지 못한다. 바울은 율법과 지혜를 넘어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라는 제3의 담론, 즉 사건에 근거한 선언을 내세운다.

(3) 특수성의 폐지와 보편적 주체 바울의 유명한 선언인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다"는 구절은 바디우 분석의 정점에 놓인다. 진리는 특정한 민족성, 사회적 신분, 젠더의 차이에 종속되지 않는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기존의 특수성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는 그러한 차이들이 아무런 권리나 특권을 갖지 못하도록 <무효화>하는 일이다. 진리는 만인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을 때만 진리일 수 있다.

(4) 믿음, 희망, 사랑: 진리의 실천 양식 바디우는 바울의 세 덕목을 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 <믿음(Pistis)>: 사건의 발생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결단이자 충실성이다.

  • <사랑(Agape)>: 믿음을 세계 속에서 실제로 살아내고 보편적 연대를 구축하는 물질적 힘이다. 사랑 없이는 보편적 진리가 조직화될 수 없다.

  • <희망(Elpis)>: 사건의 효과가 역사 속에서 지속될 것이라는 지치지 않는 끈기다.

<3. 비판적 평론: 해방의 보편성과 독단의 경계>

(1) 현대 정치철학에 던진 결정적 충격 바디우의 <사도 바울>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시킨 차이의 철학, 미시정치,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통렬하게 짚어낸 명저다. 정체성 정치가 오히려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흡수되어 하위문화 소비로 전락하던 시기에, 바디우는 특수성을 가로지르는 대담한 보편성의 정치를 복원해냈다. 바울을 교회 제도의 창시자가 아니라 '레닌'과 같은 혁명적 조직가로 읽어낸 그의 독해는 2000년대 대륙철학계 전반에 바울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2) 추상성과 형식주의의 위험 그러나 바디우의 사유는 명확한 한계와 위험성을 함께 안고 있다. 첫째, <구체적 삶의 맥락에 대한 탈색>이다. 바디우는 보편성을 세우기 위해 문화적, 역사적 특수성을 지나치게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킨다. 현실의 억압은 젠더, 인종, 계급이라는 구체적인 차별의 축을 통해 작동하는데, 이를 '진리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일축하는 것은 자칫 구체적 차별 투쟁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할 위험을 낳는다.

둘째, <결단주의와 독단성의 함정>이다. 사건은 합리적 근거나 객관적 징후 없이 오직 주체의 충실성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이는 진리와 맹신, 혁명과 파시즘적 광신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철학적 난점을 노출한다. 부활이라는 허구를 모델로 삼아 진리의 힘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결국 진리의 정당성을 증명할 외부적 기준을 완전히 상실한 채 주체의 일방적인 선언에 의존하게 만든다.

<4. 맺음말>

바디우의 <사도 바울: 보편주의의 기초>는 민족적, 국가적, 집단적 테두리에 갇힌 편협한 애국심이나 정체성의 울타리를 단호히 거부한다. 동시에 자본의 획일화에 굴복하지 않는 제3의 길, 즉 만인을 향해 동등하게 열린 해방적 보편성의 가능성을 치열하게 논증한다. 역사적 바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분열과 고립이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차이를 넘어 보편적 연대를 기획할 것인가를 묻는 이들에게 여전히 강력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역작이다.


===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Alain Badiou, Translated by Ray Brassier May 2003 --- 1,000 단어 요약 평론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은 프랑스어 원저 <Saint Paul: La fondation de l’universalisme>(1997)의 영어판으로, Ray Brassier가 번역하여 Stanford University Press에서 2003년에 출간한 111쪽의 짧지만 밀도가 높은 책입니다. 목차 자체가 <Paul: Our Contemporary>에서 시작해 <Paul Against the Law>, <Love as Universal Power>, <Universality and the Traversal of Differences>로 진행되며, 바울을 신학자가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주체가 어떻게 탄생하는가’를 보여주는 사상가로 읽습니다.

알랭 바디우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성 바울: 보편주의의 기초>
2003
번역 Ray Brassier

  1. 바디우는 왜 무신론자인데 바울을 읽는가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저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철저한 무신론자라는 사실이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초월적 진리로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울을 현대 정치철학의 중요한 인물로 불러낸다. 그 이유는 바울이 ‘무엇을 믿었는가’보다 ‘하나의 사건을 믿게 된 인간이 어떻게 새로운 보편적 주체가 되는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바울은 성인도, 교회 신학자도 아니다. 또한 니체가 비난했던 원한과 금욕주의의 창시자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사건(event)의 시인-사상가’이며, 특정한 집단의 전통에서 발생한 사건을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진리로 변환한 천재적인 정치적 조직가이다. 실제로 이 책을 소개하는 출판사 설명도 바울이 유대 율법과 그리스 로고스라는 두 질서를 동시에 돌파하여 새로운 보편적 주체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핵심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이 책은 사실상 바울에 관한 책인 동시에 바디우 자신의 철학에 관한 입문서이다. ‘사건–선언–충실성–주체–진리–보편성’이라는 바디우의 핵심 개념들이 바울이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통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1. 사건: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바디우가 바울에게서 발견하는 출발점은 매우 단순하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

바울에게 모든 것은 이 선언에서 시작한다. 바디우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역사적으로 사실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어떤 사건을 선언하고 그 사건에 자신의 삶을 걸었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이다.

바디우의 철학에서 사건은 기존 세계의 법칙으로부터 연역할 수 없는 새로운 발생이다. 현재의 지식체계나 제도, 권력구조 안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갑자기 출현한다. 사건은 기존 질서로 증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건 이후에 사람들이 그것에 충실하게 살아감으로써 그 사건의 의미가 드러난다.

바울에게 부활이 바로 그러한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은 유대 율법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으며, 그리스 철학으로 증명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선언된다.

여기서 바디우의 급진성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은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바울이 부활을 중심으로 만든 ‘사건의 구조’는 정치·과학·예술·사랑에서도 되풀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정치운동이나 새로운 과학적 발견, 새로운 예술형식, 사랑의 만남 역시 기존 질서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다.

  1.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아닌 제3의 담론

바디우는 당시의 사유를 크게 ‘그리스적 담론’과 ‘유대적 담론’으로 나눈다.

그리스적 담론은 세계를 하나의 질서 있는 우주(cosmos)로 이해하려 한다. 철학은 이 우주의 보편적 법칙을 파악하는 ‘지혜’이다.

반대로 유대적 담론은 신이 선택한 백성과 신의 표징(sign)에 기초한다. 예언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의 일반 법칙이 아니라 신이 특정 백성에게 보낸 특별한 징표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두 담론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둘 다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자연적·우주적 질서를, 다른 하나는 율법과 선택된 민족의 질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은 둘 다 아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는다”라는 바울의 구절에서 바디우는 새로운 제3의 길을 발견한다. 바울은 지혜도 표징도 아니라 ‘사건’을 선언한다. 따라서 기독교적 주체는 그리스 철학의 현자도 아니고 유대 예언자도 아니다. ‘사도(apostle)’이다.

사도란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선언하고 그 결과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1.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

이 책의 중심은 갈라디아서의 유명한 문장이다.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다.”

바디우에게 이것은 보편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이다.

바울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은 민족, 법, 사회적 지위, 성별 같은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충실성 앞에서 그러한 차이는 진리를 결정하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유대인은 계속 유대인이고 그리스인은 계속 그리스인이다.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의 사회적 차이도 현실에서는 남아 있다. 하지만 진리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에는 차이가 없다.

여기에서 바디우 특유의 보편주의가 나온다.

보편적 진리는 모든 차이를 제거하여 모두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가로질러’ 간다.

따라서 보편주의란 “모두가 똑같아져야 한다”는 동질화가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특수한 정체성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디우가 현대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와 공동체주의를 비판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1. 율법과 죄

바디우가 특히 중요하게 읽는 것이 로마서의 율법 논의이다.

바울에게 율법은 단순히 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다. 오히려 율법이 “하지 말라”고 명령할 때 금지된 욕망이 발생한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없었다면 탐욕이 죄로 의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바디우는 이를 정신분석과 매우 가까운 방식으로 읽는다. 법은 욕망을 억압할 뿐 아니라 욕망을 생산한다. 따라서 법과 죄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 상태를 바디우는 ‘죽음’의 질서라고 해석한다.

여기에서 ‘육(flesh)’과 ‘영(spirit)’도 흔히 생각하는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이 아니다. 육은 법과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의 주체적 상태이며, 영은 사건 이후 새롭게 형성된 삶의 주체이다.

따라서 바울의 핵심 문제는 육체를 버리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법에 종속된 인간이 어떻게 새로운 삶의 주체가 되는가?”이다.

  1. 죽음보다 부활

바디우는 기독교 전통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경계한다.

그에게 바울의 혁명성은 죽음에 있지 않고 부활에 있다.

죽음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따라서 죽음 자체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이라는 기존 질서 안에서는 불가능했던 가능성이 출현하는 사건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죽음과 부활을 헤겔식 변증법으로 읽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부정이 부활이라는 긍정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죽음에서 논리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새로운 것’은 과거의 모순이 저절로 발전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사건으로 출현한다.

이 점에서 바디우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결정론과도 거리를 둔다. 혁명은 자본주의 모순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사건이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충실성을 통해 진리의 과정이 만들어진다.

  1. 믿음, 사랑, 희망

바디우는 바울의 유명한 세 덕목인 ‘믿음·사랑·희망’을 자신의 철학 언어로 번역한다.

믿음(faith)은 사건의 선언이다.

사랑(love)은 그 사건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보편적 힘이다.

희망(hope)은 사건에 대한 충실성이 끝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이다.

여기서 사랑이 특히 중요하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자선이 아니다. 사건의 진리가 특정 민족이나 계급의 소유물이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따라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바디우에게 윤리적 친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진리 앞에서 타자를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보편주의의 실천이다.

  1. 차이를 없애지 않는 보편주의

이 책에서 가장 현대적인 부분은 제10장 <Universality and the Traversal of Differences>이다.

바디우는 바울이 문화적 차이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가능한가?

음식, 할례, 관습 같은 문화적 차이가 더 이상 진리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어떤 관습을 가져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 관습이 “나만이 진리의 주체가 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문제가 된다.

이를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바디우는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한다.

한쪽에는 “우리 문화만 옳다”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모든 사람을 문화적·성적·인종적 정체성 집단으로 나누어 각자의 진리를 따로 인정하는 극단적 상대주의가 있다.

바디우의 보편주의는 이 둘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둘을 동시에 넘어가려 한다.

차이는 존재하지만 진리는 차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1. 이 책의 강점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바울을 교회의 소유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바디우의 바울은 기독교 교리를 세운 성직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모든 자격과 정체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주체성을 창조한 급진적 사상가이다.

특히 “보편성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 더욱 중요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이 인종, 민족, 성별, 종교, 문화, 국가 등의 정체성을 통해 설명되는 일이 많다. 정체성은 억압받은 집단을 보호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를 정체성으로만 설명하면 인간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공통의 진리나 공동선을 말하기 어려워진다.

바디우는 바울에게서 다른 가능성을 찾는다.

“나는 누구인가?”보다
“어떤 진리에 충실한 주체가 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바울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1. 그러나 가장 큰 약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바디우가 자신의 철학에 필요한 바울만을 추출한다는 데 있다.

역사적 바울에게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바디우는 그리스도의 신성, 속죄, 종말론, 교회, 성령 등 기독교의 구체적 내용을 거의 모두 제거한다.

그래서 남는 것은 놀랄 만큼 바디우 자신과 닮은 바울이다.

후대의 바울 연구자들은 바로 이 점을 비판했다. 바디우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를 강조하면서도 그 문장의 결론인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구체적 기독교적 조건을 사실상 희석한다는 비판이다. 또한 역사학자들은 바울의 보편주의가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순수한 보편주의가 아니라 유대적 메시아주의 안에서 발생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바디우의 책은 역사적 바울에 대한 충실한 주석이라기보다 ‘바울을 매개로 쓴 바디우 철학’이라고 읽는 편이 정확하다.

  1. 더 심각한 문제: 보편주의는 정말 순수할 수 있는가

바디우는 특정 공동체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를 원한다.

매우 매력적인 이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보편을 대표한다”는 주장은 위험할 수도 있다. 프랑스 혁명, 공산주의, 서구 문명, 기독교 모두 자신을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특정한 사람들의 경험과 문화를 주변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바디우에게도 이 위험이 있다.

특히 그의 바울 해석은 유대교를 ‘율법과 특수성’, 바울을 ‘사건과 보편성’에 배치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율법적인 유대교 대 자유로운 기독교’라는 낡은 도식을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바디우의 바울론은 현대 바울학과 유대교 연구에서 상당한 비판을 받는다.

  1. 종합 평론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은 바울 연구서로 읽으면 문제가 많은 책이지만, 정치철학서로 읽으면 대단히 자극적인 책이다.

바디우가 발견한 바울의 핵심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보편적 진리는 보편적인 장소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사건에서 시작하여 모든 특수성을 가로질러 보편적인 것이 된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극도로 특수한 사건이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보편적 선언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흥미롭게도 퀘이커의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빛(that of God in everyone)’과도 비교할 수 있다.

두 전통의 근거는 전혀 다르다. 바디우에게 보편성은 초월적 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사건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온다. 반면 퀘이커에게 인간의 평등은 모든 사람 안에서 발견되는 신적 현존과 연결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입장은 중요한 한 점에서 만난다.

사람의 민족, 신분, 성별, 교파, 제도적 자격이 그 사람의 진리에 대한 접근을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퀘이커적 관점에서 보면 바디우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사건에 대한 충실성’만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진리 확신을 어떻게 성찰하고 수정할 것인지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바디우의 ‘militant’, 즉 투사적 주체는 강력하지만 때때로 너무 확신에 차 있다. 퀘이커의 discernment는 진리에 대한 충실성에 침묵·경청·공동체적 검증을 덧붙인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뒤 남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울은 최초의 보편주의자인가?”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다.

“특정한 사건에서 태어난 확신이 어떻게 타인을 억압하는 교리가 되지 않으면서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있는가?”

바디우는 바울을 통해 그 문제를 탁월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점 때문에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은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마지막 책이라기보다, ‘보편주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기 위한 아주 훌륭한 첫 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세진님이 계속 읽어오신 <마르크스–스피노자–바디우>의 흐름에 놓으면 이 책은 더 흥미롭습니다. 바디우의 바울은 신학자라기보다 일종의 ‘혁명적 주체 형성론’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최근 요청하신 <Marx and Spinoza>와도 연결점이 상당히 많습니다.

===

알랭 바디우와 조르조 아감벤의 사도 바울 해석 비교 분석입니다.

<알랭 바디우와 조르조 아감벤의 사도 바울 해석 비교 분석>

2000년대 초 현대 철학계에서 일어난 '바울 르네상스'의 양대 축은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 보편주의의 기초>(1997)와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 로마서 주해>(2000)다. 두 철학자는 모두 무신론적 관점에서 바울 서신을 급진적 정치철학의 원천으로 다루었으나, 바울 텍스트를 읽어내는 시각, 율법과 메시아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해방적 주체관에서는 뚜렷한 대립각을 세운다.

<1. 핵심 개념과 방법론의 차이: 선언적 단절 대 메시아적 정지>

두 사상가의 해석 차이는 텍스트를 대하는 방법과 궁극적으로 도출하려는 사유 틀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비교 항목알랭 바디우조르조 아감벤
중심 텍스트고린도전서 (특히 십자가의 어리석음, 보편적 사랑)로마서 첫 문장 (메시아의 부르심을 받은 종)
핵심 범주사건(Event) 과 주체의 충실성(Fidelity)메시아적 시간(Messianic Time)무위화(Inoperativity)
방법론적 성격급진적 단절을 내세우는 영웅적·선언적 모델기존 질서를 안으로부터 해체하는 문헌학적·탈작동 모델
정치적 지향새로운 보편적 진리를 건설하는 조직적 혁명지배 권력과 법적 장치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비활성화

<2. 율법(Torah / Nomos)에 대한 태도: 폐기와 무효화 대 정지와 완성>

두 사람의 가장 결정적인 쟁점은 바울이 유대 전통의 '율법'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있다.

  • 바디우: 율법의 철저한 폐기와 무효화

    바디우는 율법을 '분할과 차별의 원리'로 본다. 율법은 죄와 의, 선민(유대인)과 이방인(그리스인)을 끊임없이 가르는 규칙이다. 바디우에게 부활이라는 <사건>은 율법의 이러한 분할 체계를 단숨에 무력화하고 낡은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과한 주체는 율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은혜와 보편적 사랑 속으로 진입한다. 따라서 바디우의 바울은 율법 질서와의 전면적 결별을 선언하는 혁명가다.

  • 아감벤: 카타르게오(Katargeo) - 율법의 탈작동과 잠재성 회복

    아감벤은 바디우가 바울을 반(反)유대주의적이거나 율법 폐기론자로 오독했다고 정면 비판한다. 아감벤은 바울이 자주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 <카타르게오(katargeo: 작동을 멈추다, 무위화하다)>에 주목한다. 메시아적 사건은 율법을 파괴하거나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Destruction)이 아니다. 그것은 율법의 강제적 집행력을 정지시켜, 율법이 더 이상 인간을 억압하거나 처벌하지 못하도록 <기능을 해제하는 것>이다. 아감벤에게 바울은 유대 율법을 버린 탈주자가 아니라, 율법을 문자적 집행에서 해방시켜 그 본래적 잠재성을 회복(완성)하려는 철저한 유대적 메시아주의자다.

<3. 주체와 실천의 모델: 영웅적 투사 대 '~하지 않는 것처럼(Hos Me)'>

해방을 실천하는 주체의 형상에서도 두 철학자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 바디우: 새로운 보편을 세우는 능동적 투사

    바디우의 주체는 사건을 선언하고 그 진리를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전투적 주체(레닌적 모델)다.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없다"는 선언은 모든 특수성을 초월하는 새로운 평등의 보편 질서를 건설하겠다는 적극적 결단이다. 주체는 사건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충실성을 통해 기존 세계에 대항한다.

  • 아감벤: 상태를 소진시키는 메시아적 잔여(The Remnant)

    아감벤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7장 구절인 <'마치 ~하지 않은 것처럼(hos me)'>을 주체성의 핵심으로 삼는다.

    "아내가 있는 자들은 없는 것처럼 하고,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것처럼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것처럼 하고, 매매하는 자들은 소유하지 않는 것처럼 하라."

    아감벤의 주체는 새로운 정체성을 쟁취하거나 세상을 뒤엎는 혁명 투사가 아니다. 그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모든 신분, 역할, 소유, 법적 지위 속에 그대로 머물면서도, 그것에 완전히 동일화되지 않은 채 안으로부터 그 힘을 무력화한다. 즉, 세상의 장치들을 전복하는 대신 '사용하되 소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권력의 질서를 헛돌게 만드는 존재다.

<4. 종합적 평가: 혁명적 구축과 메시아적 해체>

바디우와 아감벤의 논쟁은 현대 해방 정치의 두 가지 근본적인 길을 보여준다.

  • 바디우의 길은 <구축과 보편>이다. 특수성의 함정에 빠진 현대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기존의 모든 분할을 넘어서는 절대적이고 대담한 단절의 선언, 그리고 그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체적 연대를 구축하려 한다. 그러나 이 길은 필연적으로 결단주의적 독단성과 초월적 영웅주의의 위험을 안게 된다.

  • 아감벤의 길은 <해체와 무위(無爲)>다. 권력과 법이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내부에서 정지시키고,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이 변형되는 메시아적 틈새를 찾아낸다. 그러나 이 길은 현실의 구체적인 정치 조직화나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수동적이거나 종말론적인 무력감에 머무를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결국 바디우가 바울을 통해 '어떻게 새로운 보편적 주체를 조직할 것인가'를 물었다면, 아감벤은 바울을 통해 '어떻게 지배 권력의 법적 장치 자체를 작동 불능으로 만들 것인가'를 사유했다.


===

2026/09/10

왜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 대학지성 In&Out

왜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 대학지성 In&Out

왜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가?
류대영 한동대 명예교수
승인 2026.08.30 



■ 저자에게 듣는다_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 (류대영 지음, 푸른역사, 304쪽, 2026.06)






이번에 출간한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푸른역사)는 마르크스의 종교관을 다룬 책이다. 제목만 보면 책의 주제가 종교라는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원래 내가 생각한 제목은 “마르크스와 종교”, “마르크스와 인간 구원”, “카를 마르크스: 종교적 평전” 등이었다. 그러나 출판사는 인문학 책, 그것도 마르크스에 관한 책에 그런 제목 붙이는 것을 무모하게 생각했다. 하여, 편집진뿐 아니라 아내와 제자들까지 동원하여 수십 가지 제목을 짓고, 검토하는 작업을 한동안 하다가 모두 지쳐갈 때쯤 출판사가 택한 것이 그 제목이었다.

왜 마르크스의 종교관에 대한 책을 써놓고도 “마르크스와 종교”라는 단순 명확한 제목을 달지 못한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마르크스라는 경계심 드는 이름에 종교라는 머리 아픈 주제까지 덧붙이는 일이, 그렇지 않아도 팔리지 않을 인문학 책에는 최악의 조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마르크스도, 종교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피해야 할 주제가 결코 아니며, 둘의 조합은 더더욱 그렇지 아니한가.

카를 마르크스는 1999년과 2005년에 영국 BBC 방송국이 설문조사를 통해 “천 년의 사상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선정한 인물이다. 지난 천 년 동안 나왔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철학자로 많은 사람이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좋아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의 대표적 저술 몇 편은 읽고, 그의 사상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는 하고 있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국내에서 한창일 때 대학을 다녔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혹은 군사독재기의 억압적 분위기에 순응하느라 그를 공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두고두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 부끄러움은 대학에서 역사와 종교, 고전을 가르치면서 점점 더 깊어졌다. 이 책은 젊은 시절 내가 마르크스에 관해 공부하지 않은 데 대한 일종의 뒤늦은 반성문이다.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진입장벽이 높아도 너무 높은 사상가다. 그를 읽고 이해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이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의무감 때문에라도 몇 번 그의 저술을 읽으려 시도하다 결국 도중에 포기하는 이유다. 《자본론》은, 펭귄판 영역본을 예로 들자면, 본문만 제1권 약 810쪽(여기에 부록 약 130쪽), 제2권 약 490쪽, 제3권 약 890쪽 정도다. 분량만 그렇게 방대한 것이 아니라 내용도 어려워, 전문가들이 각 권 내용을 분석하고 해설한 해제(introduction)만 각기 80-90쪽에 달한다. 더구나 이 방대하고 난해한 저술의 시작인 제1권 제1장은 마르크스가 서문에서 “모든 학문의 시작은 어렵다. 따라서 이 책의 첫 장을 이해하는 일이 가장 어려울 것이다”라고 대놓고 경고할 정도로 어렵다. 《자본론》을 한번 읽어보겠다고 굳게 결심한 독자라도 본질적 가치, 사용가치, 교환가치, 추상적 인간 노동,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같은 철학적-경제적-변증법적 개념과 논리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이다 처음 몇 페이지도 넘어가기 못하기 마련이다.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손꼽을 수 있는 거대한 지성 가운데 한 명이다. 그를 조금만 진지하게 공부해 보면, 그를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든, 그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도 시대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가진 사람이었고, 이번 책에서도 그런 점을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놀라운 천재성은 끝없는 탐구심, 그리고 사회경제적 정의감과 만나 인류사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저작들을 남겼다. 마르크스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를 단지 공산주의 혁명가로 알고 있겠지만, 정작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책벌레 노릇”이었다. 그는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다른 무엇보다 좋아했다. 그런데 그가 읽은 책과 써놓은 원고는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었다. 《자본론》만 하더라도 그가 구상한 것은 전체 3권이었다. 그 가운데 제1권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고 그의 생전에 유일하게 출간된, 《자본론》 제1권이다. 그가 미완으로 남긴 제2권은 원고가 너무도 방대하여, 엥겔스가 그의 사후에 두 권으로 나누어 편집해서 출간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론》 제2, 제3권이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3권으로 생각했던 것이 《잉여가치 이론》이라는 제목으로 사후에 출간된 원고인데, 그것만 총3권 분량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렇게 방대한 규모의 《자본론》이 사실은 그가 구상했던 6부작 “경제 연구 통합”의 제1부, 그것도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책을 집어삼킨 후 그것을 변형된 형태로 역사라는 똥 더미에 던져 놓도록 저주받은 기계”라고 자탄한 사람이다. 그가 읽은 책과 그것의 결과물인 저작의 분량은 실로 초인적이어서,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한 일이라는 표현이 맞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읽은 문학에 관한 애정, 지식과 소양은 엄청나서 《자본론》처럼 몇 페이지 읽기도 힘든 딱딱한 책에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단테와 셰익스피어, 괴테와 밀턴, 그리고 동시대의 하이네까지 수많은 문학 작품을 자유자재로 인용·변용하며 책의 내용적, 형식적 층위를 높이높이 쌓아 놓았다.

“과학적 비판에 기초한 의견이라면 모두 환영한다. 소위 여론이라는 것의 편견에 대해서는 나는 한 번도 양보한 적이 없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 서문 말미에 쓴 문장이다. 그는 단테의 《신곡》을 변용하여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인용하며 서문을 맺었다. “너의 길을 가라, 사람들은 떠들게 놔두고.” 마르크스는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냉전기를 대표하는 전쟁을 겪었고 지금까지 분단된 우리나라는 마르크스에 대한 ‘여론의 편견’이 극단적으로 강한 나라다. 이 책은 그 편견 속에 오랫동안 함몰되어 있던 한 필부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쓴 흔적이라고 보면 정확하겠다.


종교

마르크스의 저작은 워낙 방대하고, 거기서 다룬 주제와 함의들 또한 다양하다. 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경제학, 철학, 정치학, 역사학뿐 아니라 문학, 종교, 식민주의, 민족주의, 인종, 생태이론, 여성학 등과 관련해서도 그의 사상을 접목하여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 중심은 그가 정치경제학이라고 부른 경제 이론이다.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 개론 하나 수강하지 않은 그 분야의 문외한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저술, 특히 《자본론》 같은 경제학 관련 저술을 읽어내는 일은 첩첩산중을 헤매는 일과 다름없었다. 내가 그나마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어찌어찌 목숨 부지하고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종교’라는 작은 지도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생애, 사상, 그리고 저술의 여정을 그의 종교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마르크스와 종교라는 말을 들을 때 일단 그 명제부터 떠오른다면, ‘여론의 편견’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높다. 마르크스가 1844년 2월, 자신이 프랑스에서 공동발행하던 《독불연보》에 기고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론에서 그 말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의미는 ‘여론의 편견’과 전혀 달랐다. 또한 ‘여론의 편견’은 그가 그 유명한 명제를, 그 시점에 말하게 된 이유와 역사적, 사상적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는 바로 그런 점들을 밝혀 보려는 노력이다.

마르크스의 삶과 사상은 1842년 《라인신문》 편집자로 부임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그는 본대학에서 베를린대학으로 전학하여 브루노 바우어 등 헤겔의 제자들에게 배우고 청년 헤겔학파 젊은이들과 사귈 때만 해도 철학적 무신론자였다. 이 시기는 마르크스의 생애에서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가장 격렬하게 그것을 비판한 때였다. 철학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예나대학에 제출한 논문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대학에서 학자의 길을 갈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와 유신론을 철학적으로 비판하는 과목들을 개설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국인 프로이센은 정교일치의 기독교적 절대왕정 국가였고, 프로이센과 더불어 독일연맹을 이끌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혁명의 충격과 파장을 극복하기 위해 ‘메테르니히 체제’라는 보수반동적 정치와 외교를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대학교수는 국가 공무원이었다. 왕권과 기독교에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이 대학교수가 될 가능성은 없었다.

대학교수의 길이 막힌 마르크스에게 새롭게 열린 길이 언론이었다. 그는 《라인신문》 편집인이 된 이후 《독불연보》(1844), 《신 라인신문》(1848, 쾰른), 《신 라인신문》(1850, 런던)을 연이어 발행하였다. 이후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도 뉴욕의 《뉴욕 데일리 트리뷴》, 프로이센의 《신 오더신문》에 기고했다. 끊임없이 지속된 것은 아닐지라도 1840~50년대에 걸쳐 마르크스의 유일한 직업은 언론인이었다. 대학교수라는 공적 지식인과 달리 언론인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급진적 생각을 밝힐 수 있었다. 그리고 언론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마주하며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세계였다.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물질적 이해관계”를 마주한 것도 《라인신문》 편집인이 된 후였다. 그는 1841년 출간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을 계기로 철학적 무신론에서 유물론적 무신론으로 전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포이어바흐 역시 역사나 정치 같은 현실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그가 밝힌 것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론은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이 완성된 형태로, 총체적으로 표현된 글이었다. 여기서 그는 그동안 그의 종교관에 영향을 준 헤겔, 바우어, 포이어바흐의 생각을 종합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인간이 종교를 만든다.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종교는 자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이미 다시 상실해 버린 인간의 자기의식이며 자기감정이다.” 그는 이렇게 부연 설명한다.


종교적 고통은 동시에 현실적 고통의 표현이자 현실적 고통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인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다.
민중의 허구적 행복으로서 종교의 폐지Aufhebung[지양]는 그들의 현실적 행복에 필수적인 것이다.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는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한 소절을 할애했다. 요약하자면, “민중의 아편”이라는 표현은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던 아편과 마찬가지로 종교가 민중의 고통을 달래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전제했다. 종교의 현실적 효용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편이 고통을 완화해 줄지언정 근본적 치료를 해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민중이 자본주의 하에서 겪는 “현실적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허구적 행복”에 불과했다. 마르크스는 “현실적 행복”을 위해서 종교를 “폐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후 마르크스의 공부와 저술, 그리고 삶은 민중(프롤레타리아)에게 ‘현실적 행복’을 주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역사적 유물론과 경제학이 그의 주된 관심거리였다. 민중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과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탐구하여 알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가 된 것이다. 이제 종교는 더 이상 그의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종교는 그 자체로 생존할 수 없는 어떤 부수적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허상, 사회경제적 관계들의 한 증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종교와 싸우는 것은 그림자와 싸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는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관계들이 해체될 때, 즉 상품이 “자유롭게 연대한 인간들에 의해 생산되고, 그들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 놓일 때” 종교도 자연히 사멸되리라 생각했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론 이후 《1844년 경제학·철학 원고》부터 《자본론》에 이르기까지 마르크스 주요 저술에서 종교(특히 성서와 기독교)는 그의 논지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한 예시, 비교, 비유, 역설 등으로 사용될 뿐이다.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는 그의 주요 저술에서 종교가 그렇게 사용된 사례들을 찾아서 그 궤적을 살펴보았다. 물론 그 종착점은 《자본론》이다.


다시,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민중의 아편’인 종교를 없애기 위해 싸운 사람이 아니라 민중이 ‘종교라는 아편’에 기대어 현실의 고통을 위무할 수밖에 없는 그 잔혹한 현실과 싸운 사람이었다. 그는 초인적 분량의 독서를 하고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쓴 학자였다. 천재적 지성과 몸을 아끼지 않는 공부가 만나 탄생시킨 저술은 방대했고, 문장은 탁월했으며, 그 내용은 심오했다. 그러나 엥겔스가 장례식 추도사에서 강조한 것처럼, 학자로서의 마르크스는 그의 일면에 불과했다. 그는 혁명가였다. 그의 공부는 어떤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해방이라는 현실적 목적 아래 행해진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언론 활동, 저술 및 출판을 통해 인간해방을 도모한 혁명가였다.

많은 사람이 마르크스를 실패한 혁명가, 예언가로 평가한다. 그가 예견했던 자본주의의 종말은 오지 않았으며, 자본주의는 그의 시대 이후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며 진화하여 오늘에 이렀다. 그리고 종교는 자본주의에 적응하며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위기가 닥치고, 자본주의의 심각한 모순이 드러날 때마다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다시 찾는다. ‘모든 경제적 가치는 인간 노동에 기반하고, 노동의 상품화는 인간 소외를 낳으며, 노동과 생산수단의 분리는 잉여가치와 부의 편중을 낳고, 생산수단의 발달은 그것을 무한히 강화할 따름이다.’ 자본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의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놀라운 이 통찰력은 자본주의라는 제도와 그 문제들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르크스도 잊히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다시, 마르크스를 읽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류대영 한동대 명예교수
한국과 미국에서 영문학, 성서신학, 기독교역사, 미국사를 공부했으며, 한동대에서 기독교, 역사, 고전을 가르치다 은퇴했다.

류대영 한동대 명예교수다른기사 보기

2026/09/03

* 일본 한방의학과 한국 한의학의 핵심적 차이

 ==

일본 한방의학과 한국 한의학의 핵심적 차이를 진단 체계와 제도적 구조를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진단 체계 및 학문적 성격의 비교>

<1. 진단 방식과 핵심 지표>

  • <일본 한방 (방증상대와 복진 중심)>: 진단의 핵심은 <방증상대(方證相對)>다. 환자가 호소하는 자각 증상과 객관적 징후의 묶음(증)을 특정 처방(방)과 1대 1로 직결시키는 방식이다. 복잡한 장부 병리나 형이상학적 이론 대신, 환자의 복부를 손으로 눌러 긴장도와 압통을 살피는 <복진(腹診)>을 가장 결정적인 진단 도구로 삼는다. 맥진이나 설진도 활용하지만 복진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 <한국 한의학 (변증논치와 사상의학 중심)>: 음양오행과 장부경락 이론에 기반한 <변증논치(辨證論治)>를 기본으로 한다. 병의 근본 원인(허실, 한열, 기혈 순환 등)을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처방을 구성한다. 특히 이제마의 <사상의학(四象醫學)> 전통이 강하게 작동하여, 동일한 증상이라도 환자의 선천적 체질(태양, 태음, 소양, 소음)과 심리적 특성에 따라 완전히 다른 약제를 투여하는 체질 진료 체계가 발달했다. 진단에서는 복진보다 <맥진(脈診)>과 <설진(舌診)>, 그리고 환자의 체형 기상을 중시한다.

<2. 이론과 철학적 기반>

  • <일본 한방 (철저한 실증주의와 탈이론화)>: 에도 시대 고방파(古方派)의 영향을 받아 음양오행설과 같은 형이상학적 사변을 철저히 배격했다. "질병의 이론적 원인은 알 수 없으나, 특정 증상에 이 약을 쓰면 낫는다"는 철저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를 취한다. 그 결과 이론 체계는 단순화되었으나 임상적 재현성은 높아졌다.

  • <한국 한의학 (정밀한 병리 이론과 전인주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전통을 이어받아 정·기·신(精·氣·神)의 조화와 인체 내적 균형을 규명하는 이론 체계가 매우 정밀하다. 증상 자체의 소멸뿐만 아니라 신체 내부의 면역력과 생명력의 회복을 목표로 삼는 거시적 병리 철학을 유지한다.

<제도적 구조와 의료 전달 체계의 비교>

비교 항목일본 한방의학한국 한의학
<면허 체계>단일 면허제 (별도의 한의사 면허 없음, 서양의학 의사 면허 소지자가 진료)이원적 면허제 (의사 면허와 한의사 면허가 법적으로 완전히 분리)
<교육 과정>서양의과대학 교육 과정 내 일부 과목(선택/필수)으로 이수독립된 6년제 한의과대학 및 한의학전문대학원을 통해 배출
<제제 형태>148종의 표준화된 엑기스제(과립제/캡슐제) 중심, 건강보험 적용원내 탕전(물약) 중심, 과립제 병용 (탕전약의 보험 적용은 제한적)
<침구 시술 주체>주로 맹인 안마사·침구사 등 별도 국가자격사 또는 일부 의사가 시술한의사가 진맥, 한약 처방, 침·구·부항을 통합하여 직접 시술
<임상 적용 방식>서양의학적 진단(영상, 혈액검사 등)을 보조·보완하는 약물 요법 위주독립적인 한의학적 진단 체계 하에 독립적인 의료 행위 수행

<요약 및 평가>

일본 한방은 메이지 유신 이후 제도가 폐지되는 위기 속에서 서양의학 시스템 안으로 스스로를 적응시켰다. 그 결과 이론의 깊이는 얕아졌으나, 현대 의사들이 거부감 없이 처방할 수 있는 <규격화된 약물 치료 수단>으로 안착했다.

반면 한국 한의학은 일제강점기의 탄압을 견뎌내고 해방 후 독립된 법적 지위(이원화된 의료 체계)를 쟁취했다. 이로 인해 고유의 심오한 의학 철학과 침구·탕전의 통합적 치료 체계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으나, 현대 서양의학계와의 직역 갈등 및 제도적 분절이라는 구조적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

==

오쓰카 야스오, <일본의 동양 의학> — 요약·평론

먼저 서지사항 하나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한국어판 <일본의 동양 의학>(오쓰카 야스오 지음, 이광준 옮김, 소화, 2000)은 일본에서 처음부터 <日本の東洋医学>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책이 아니다. 원저는 오쓰카 야스오가 1996년 이와나미서점의 이와나미신서로 출간한 <東洋医学>(동양의학)이다. 한국어판에서 일본적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의 동양 의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일본 원서는 12장, 본문 213쪽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저자: 大塚恭男은 누구인가

저자의 일본어 이름은 <大塚恭男(おおつか・やすお, Ōtsuka Yasuo, 1930–2009)>이다. 한국어로는 보통 <오쓰카 야스오>라고 표기한다. 1930년 고치현에서 태어나 1955년 도쿄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도쿄대 병원 내과에서 근무했으며, 대학원에서는 약리학을 연구했다. 1962~1966년 서독과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했고 요코하마시립대 강사를 거쳐 1975년 기타사토연구소 동양의학종합연구소에 들어갔다. 1986년 제3대 소장이 되었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일본 근현대 한방 부흥의 중심인물 <大塚敬節(오쓰카 게이세쓰, 1900–1980)>의 장남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한방을 전수받은 전통의학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도쿄대에서 현대의학과 약리학을 배우고 유럽 의학도 경험했다. 따라서 그의 평생 과제는 <한방인가 서양의학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의학적 인식체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연결할 것인가”였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점이 바로 <일본의 동양 의학>의 성격을 결정한다.


2. 책의 출발점: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무엇이 다른가

첫 장에서 오쓰카는 동양의학을 서양의학의 덜 발달한 전단계로 취급하지 않는다. 두 의학은 인간의 몸과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고 설명한다.

서양 근대의학은 질병의 원인을 특정하고, 장기·조직·세포·병원체·생화학적 기전으로 질병을 분석하는 데 탁월하다. 반면 한방은 “무슨 병인가?”에 앞서 “이 환자의 몸 전체가 지금 어떤 상태인가?”를 묻는다.

그래서 한방에서 핵심적인 것은 <証(しょう, 쇼)>이다. 흔히 한국어로 <증>이라고 번역하지만 단순한 증상(symptom)이 아니다. 환자의 체질, 현재의 신체 상태, 증상의 조합, 냉·열, 허·실 등을 종합한 하나의 임상적 패턴이다.

이 때문에 똑같이 위가 아프다고 해도 모든 사람에게 같은 처방을 하지 않고, 반대로 서양의학적으로 서로 다른 병명이라도 동일한 <証>을 나타내면 같은 처방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다. 원서 목차도 <동양의학과 서양의학>, <일본에서의 동양의학의 역사>, <일본의 동양의학과 중국의학>, <동양의 신체관과 질병관>, <본초의 역사>, <한방의 진단법>, <한방약>을 설명한 뒤 소화기·산부인과·노인·소아·통증 치료의 실제로 진행된다.


3. 중국의학과 일본 한방은 동일하지 않다

이 책에서 특히 가치 있는 부분은 일본의 한방을 단순히 <중국의학의 일본판>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의학은 일본에서 수백 년 동안 선택되고 변형되었다. 특히 에도시대의 <古方派(고방파)>가 중요하다. 고방파는 송·명 시대에 발전한 복잡한 이론을 의심하고 장중경의 <傷寒論>과 <金匱要略> 같은 고전으로 돌아가 실제 환자의 증후와 처방의 대응관계를 중시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吉益東洞(요시마스 도도)>이다.

오쓰카가 보기에 이 과정에서 일본 한방은 중국의학과 다른 독특한 경험주의적 성격을 갖게 된다. 이것은 일본 사상사에서 종종 나타나는 흥미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외부 문명을 그대로 보존하기보다 수입한 뒤 대폭 단순화하고 실용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책 제목을 한국어판에서 <일본의 동양 의학>이라고 한 것은 내용상 상당히 적절하다. 이 책은 사실상 <동양의학 일반론>인 동시에 <중국의학이 어떻게 일본의 漢方이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4. 몸을 ‘기계’가 아니라 ‘관계’로 보는 의학

오쓰카가 설명하는 동양의학의 신체관은 현대 독자가 가장 철학적으로 읽을 만한 부분이다.

음양(陰陽), 허실(虚実), 한열(寒熱), 기혈수(気・血・水) 같은 개념은 해부학적 실체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관계와 균형의 양상을 표현하는 언어다.

예를 들어 <虚>는 어느 특정 장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신체의 대응능력이 약화된 상태를 나타낸다. <実>은 단순히 건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병리적 반응이 강하게 나타나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

이러한 사고법의 장점은 환자를 지나치게 병명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검사 결과가 정상이면 “이상 없음”이라고 판정하기 쉬운 증상도 한방의사는 수면, 식욕, 배변, 추위와 더위에 대한 반응, 발한, 갈증, 복부 상태 등을 종합하여 하나의 패턴으로 읽는다.

오쓰카의 다른 책 <漢方と薬のはなし>를 소개하는 일본 도서관 자료가 한방의 목표를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고친다”는 말로 압축하는 것도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5. 진단의 중심: 환자를 직접 만지고 관찰한다

책은 맥진(脈診), 설진(舌診), 복진(腹診)을 비롯한 한방 특유의 진찰법을 설명한다.

특히 일본 한방에서 <복진>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복부를 직접 눌러 긴장, 압통, 저항 등의 상태를 파악하고 이를 처방 선택과 연결한다.

여기에서도 서양의학과의 대비가 나타난다. 근대의학이 검사기계와 수치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면 전통 한방은 의사의 감각과 환자의 이야기, 그리고 반복된 임상경험에 크게 의존한다.

오쓰카는 이를 단순히 과거의 비과학적 유물로 버리려 하지 않는다. 동시에 신비주의적으로 절대화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약리학 배경을 이용해 전통적 경험을 현대 의학의 연구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最新の漢方薬理―漢方薬の科学的な検証と展望> 같은 책을 공동 편집한 것도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6. 한방약은 ‘약초 하나’가 아니라 처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의할 것은 한방을 “자연산 약초를 먹는 치료”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갈근탕(葛根湯), 안중산(安中散) 등의 처방은 여러 생약을 특정한 비율로 조합한 하나의 체계다. 오쓰카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 약물의 화학성분만이 아니라 <어떤 환자의 어떤 証에 어떤 方을 대응시킬 것인가>이다.

그래서 <方証相対>, 즉 처방(方)과 증(証)의 대응이라는 일본 한방의 사고가 중요해진다. 오쓰카는 이미 1973년 <東洋医学をさぐる>와 1983년 <東洋医学入門> 등에서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다루었다.

책 후반부의 소화기질환·산부인과질환·노인성질환·소아질환·통증 치료는 바로 이러한 원리가 실제 임상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평론

7.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 ‘전통 대 과학’이라는 싸움을 피한다

나는 이 책의 가장 좋은 점을 <양자택일을 거부한다>는 데서 찾는다.

오쓰카는 “서양의학은 기계론이고 동양의학은 전인적이므로 동양의학이 우월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방을 미신이나 민간요법으로 밀어내지도 않는다.

그 자신이 현대의학을 정식으로 공부한 의사였기 때문에 두 체계의 장점과 한계를 비교할 수 있었다.

이 태도는 오늘날의 일본 의료를 어느 정도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에 한방의사라는 별도의 국가 자격이 사라졌고, 오늘날 한방약을 처방하는 사람도 기본적으로 현대 서양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이다. 현대 일본에서 한방은 별개의 의료체계라기보다 현대의학 내부에 통합되는 형태로 발전했다. 2000년대 이후 의과대학 교육에도 한방이 다시 본격적으로 들어왔고, 최근 조사에서도 일본 의과대학의 상당수가 한방을 교육한다.

오쓰카가 걸었던 길이 바로 이 일본적 통합모델의 선구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8. 그러나 오늘 읽을 때에는 ‘치료효과’와 ‘의학철학’을 구별해야 한다

여기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다.

1996년에 쓰인 이 책을 2026년에 그대로 임상 지침서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 특히 어떤 한방 처방이 특정 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전통적 경험과 현대적 임상시험으로 효과가 입증되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이다.

실제로 일본 한방계도 2000년대 들어 무작위대조시험과 근거중심의학(EBM)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왔으며, 일본동양의학회도 한방치료의 임상근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대 연구자들도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적 임상근거를 대신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오늘날 이 책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부분은 “어떤 약이 어떤 병을 고친다”는 개별 치료정보라기보다 <인간의 몸과 질병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의학철학이다.


9. 한의학을 아는 한국 독자에게 특히 흥미로운 점

한국 독자에게는 또 하나의 독특한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는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교육기관·면허·전문직으로 분리되어 있다. 중국에서도 중의학이 독립된 전문 교육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지 않다. 한방이 서양의학과 제도적으로 경쟁하는 별도 의료직역이 아니라 현대의학을 공부한 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치료 자원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 단순히 “일본에도 한의학이 있다”가 아니라,

<중국의학 → 일본 漢方 → 메이지기의 서양의학 독점 → 20세기 한방 부흥 → 현대의학 내부로의 재통합>

이라는 매우 특이한 역사적 궤적이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의학서를 넘어 일본 근대사와 일본 사상사의 책이 된다.


종합 평가

<일본의 동양 의학>은 한방 처방전을 배우기 위한 실용서로 읽는 것보다 <일본인은 중국에서 들어온 의학을 어떻게 일본화했고, 근대 서양의학과 어떻게 다시 결합시켰는가>를 설명하는 지성사적 입문서로 읽을 때 훨씬 가치가 크다.

오쓰카 야스오의 위치도 흥미롭다. 아버지 오쓰카 게이세쓰는 메이지 이후 거의 사라질 뻔했던 일본 한방을 되살린 <부흥 세대>에 속했다. 아들 야스오는 그 유산을 현대 약리학·임상의학·의학사와 연결시킨 <통합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부자를 간단히 대비하면,

<大塚敬節 — 한방을 살려낸 사람>
→ <大塚恭男 — 살아난 한방을 현대의학과 대화시킨 사람>

이라는 구도가 선명해진다.

이 책의 진정한 주제는 사실 한방약 자체보다 <두 종류의 합리성이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질병을 객관적 대상으로 분석하는 근대의학과, 병든 인간 전체의 상태와 관계를 읽으려는 전통의학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폐기하지 않고 접점을 찾는다.

이 때문에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읽을 이유가 충분하다.

다만 오늘날에는 한방의 <철학적·임상적 관찰법의 가치>와 <개별 치료법의 과학적 효과>를 분리해서 평가해야 한다. 전자는 이 책이 여전히 매우 강한 부분이고, 후자는 1996년 이후 축적된 임상연구를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오쓰카 야스오의 다른 주요 저서

일본어 제목연도성격
<東洋医学をさぐる>1973편저. 한방·침구·생약·의학철학을 여러 연구자가 논한 초기 종합서.
<東洋医学入門>1983본격적인 동양의학 입문서. 일본 한방의 역사와 논리, 생약·처방 등을 폭넓게 다룬다.
<最新の漢方薬理―漢方薬の科学的な検証と展望>1988공동 편집. 한방약을 현대 약리학적으로 검증하려는 작업.
<新・漢方処方マニュアル>1991공동 기획·편집. 임상 처방 중심의 전문서.
<東西生薬考>1993동서양에서 사용된 73종의 생약을 역사·문화·약효의 관점에서 비교한 독특한 저서.
<漢方と薬のはなし>1994자신의 임상경험과 약물·한방의 역사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풀어쓴 책.
<東洋医学>1996이와나미신서. 바로 한국어판 <일본의 동양 의학>의 원저.
<東洋医学の世界―大塚恭男論文集>1998828쪽에 달하는 논문집으로 그의 연구 전체를 살펴보기에 가장 중요한 자료.
<臨床医の漢方治療指針>1999 개정판장곡천미인·丁宗鉄과 공동 편집한 임상의용 한방 지침서.

이 가운데 <일본의 동양 의학> 다음으로 한 권만 더 읽는다면 나는 <東西生薬考>(1993)를 권하고 싶다. 단순한 한방 치료서가 아니라 <동양과 서양은 식물과 약을 어떻게 서로 다르게 이해해 왔는가>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오쓰카의 관심이 단순한 임상 한방을 넘어 <의학사·문화사·비교문명사>에까지 미쳤다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책이다. 출판사 소개에서도 동서양에서 빈번히 사용된 생약에 얽힌 설화·풍습과 약효를 비교하고 73종의 생약을 다룬 책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세진님이 지금까지 읽어오신 <동아시아 사상의 수용과 변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음에는 <중국 중의학–한국 한의학–일본 한방>을 비교해 보는 것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같은 중국 고전의학에서 출발했는데 왜 한국은 <별도의 한의사 제도>, 일본은 <서양의사가 한방을 처방하는 통합형>, 중국은 <중의사와 서의가 병존하는 체제>가 되었는지를 비교하면, 의학뿐 아니라 세 나라의 근대화 방식의 차이까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