橋爪大三郎 <はじめての聖書> — 성서를 ‘신앙의 책’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문법으로 읽기
하시즈메 다이사부로의 <はじめての聖書>는 성서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순서대로 읽으라”고 권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개념과 이야기 39개를 골라, 그것들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입문서다. 책은 크게 <구약성서에서>와 <신약성서에서>의 2부로 나뉘며, ‘성서’, ‘하늘’,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 그리고 ‘하나님’, ‘죄’, ‘세례자 요한’, ‘사랑’, ‘용서’ 같은 주제를 다룬다. 출판사 설명도 이 책의 목적을 “성서를 알면 세계를 알 수 있다”는 데 둔다. 紀伊國屋書店ウェブストア
이 점이 중요하다. 하시즈메는 기독교인이 성서를 믿도록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현대 세계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성서의 사고방식을 알아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 책은 ‘성서 해설’이면서 동시에 ‘서양문명 입문’이다.
1. 성서는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시즈메의 출발점은 <ふしぎなキリスト教>과 같다.
현대 일본은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 그런데 일본인이 살아가는 현대 세계의 제도와 언어 상당 부분은 서구에서 만들어졌다.
법, 인권, 개인, 계약, 국가, 민주주의, 자본주의, 과학 같은 개념이 그렇다.
그 서구문명의 가장 깊은 문화적 배경에 성서가 있다.
따라서 성서를 모르면서 미국이나 유럽을 이해하려 하면 중요한 전제가 빠진다.
하시즈메는 성서를 단지 종교적 경전으로 보지 않는다. 서구 사회가 수천 년 동안 인간·세계·역사·정의·죄·구원에 대해 사고해온 거대한 ‘공용어’로 본다.
이 때문에 그의 성서 입문은 “예수님을 믿으십시오”가 아니라
<왜 서양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2. 성서는 한 권의 책이 아니다
성서를 처음 접한 사람이 흔히 갖는 오해가 있다.
‘성경’이라는 한 권의 책이 어떤 한 사람이 쓴 일관된 저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시즈메는 먼저 이 착각을 깨뜨린다.
성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시대와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문헌들의 집합이다.
역사 이야기,
법,
시,
예언,
지혜문학,
복음서,
편지
등 서로 다른 종류의 문서가 한데 모여 있다.
따라서 성서를 이해하려면 “이 문장은 무슨 뜻인가?”만 물어서는 안 된다.
누가, 언제, 어떤 공동체에서, 어떤 문제를 두고 이 이야기를 만들고 보존했는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하시즈메의 접근은 근대적인 역사비평과 사회학에 가깝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적 전제에서 읽기보다, 먼저 인간 사회 속에서 형성된 텍스트로 읽는다.
3. 창세기 — 세계는 신이 아니다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창조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익숙한 문장이지만, 하시즈메는 이것이 상당히 급진적인 선언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세계와 하나님이 분리되기 때문이다.
태양도 신이 아니다.
달도 신이 아니다.
산도 바다도 동물도 신이 아니다.
모두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다.
이것이 다신교적 세계관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자연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초월한 창조주가 존재한다.
하시즈메에게 이 구별은 이후 서양의 자연관에도 중요하다.
자연을 신으로 숭배하는 대신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근대과학이 탄생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창조주와 피조세계의 분리’가 서구적 자연관의 한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4. 아담과 이브 — 인간은 왜 자유롭고 동시에 죄를 짓는가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하시즈메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 문제를 본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명령을 어길 수 있다.
즉 인간에게 선택 가능성이 있다.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단순한 자동기계가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 결과를 떠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것이 ‘죄’의 문제로 발전한다.
죄는 단순히 법률을 어겼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이탈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인간관에는 묘한 긴장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다.
가치 있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
하시즈메는 이 긴장이 서구의 인간 이해에 깊이 남아 있다고 본다.
5. 노아의 방주와 계약 — 하나님과 인간은 ‘약속’으로 연결된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이야기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개념이 계약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순한 자연적 관계가 아니라 약속과 의무의 관계라는 점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약속한다.
후손을 주고, 땅을 주고, 그를 통해 민족을 이루겠다고 한다.
모세에게는 율법을 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심에는
“우리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다”
라는 자기이해가 생긴다.
하시즈메는 이것을 단순한 종교교리로 보지 않는다.
계약이라는 사고방식은 서양 법문화와 정치문화의 깊은 배경이 된다.
권리와 의무가 명확하고, 약속이 관계를 구성한다.
현대의 사회계약론과 직접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관계는 계약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역사적 토양이 있다는 것이다.
6. 모세와 율법 — 하나님은 왜 그렇게 많은 규칙을 만드는가
구약성서를 읽으면 현대 독자는 당황한다.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
정결과 부정,
제사 규칙,
성생활,
재산,
형벌,
안식일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규정이 가득하다.
하시즈메는 이것을 단순히 낡은 종교법으로 보지 않는다.
율법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조직하는 사회적 장치다.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율법을 지키는 생활양식 속에서 만들어진다.
특히 강대국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정복과 추방을 경험한 유대인에게 율법은 국가와 영토를 잃어도 공동체를 유지하게 해주는 장치가 된다.
따라서 유대교는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삶 전체를 조직하는 규범체계>
가 된다.
7. 예언자 — 종교가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이유
구약의 예언자는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현재의 왕과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이다.
왕이 강하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니다.
국가가 번영한다고 해서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고, 부패하고, 우상을 숭배하면 예언자는 왕에게 맞선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가 나온다.
<정치권력보다 높은 도덕적 기준이 존재한다.>
하시즈메식으로 보면 이것은 서양 정치문화에서 상당히 중요한 유산이다.
권력은 스스로 정당성을 만들어낼 수 없다.
권력 밖의 기준으로 심판받아야 한다.
물론 이후 기독교 교회 자신이 권력화되는 역설도 생겼다.
그러나 권력과 도덕적 정당성을 구별하는 사고방식은 성서 전통의 중요한 요소다.
8. 예수 — 율법을 없앤 것인가 완성한 것인가
신약으로 들어오면 초점이 예수에게 옮겨간다.
하시즈메가 흥미롭게 보는 것은 예수가 단순히 “착하게 살라”고 가르친 도덕교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는 유대교 내부에서 활동한다.
율법을 알고 있고, 율법을 존중한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의 문자적 적용보다 그것의 근본정신을 묻는다.
안식일 문제,
정결 규정,
간음한 여성,
세리와 죄인,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등을 둘러싼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는
“규칙을 지켰는가?”
만 묻지 않는다.
“왜 이 규칙이 존재하는가?”
를 묻는다.
그리고 그 중심에 사랑과 자비를 둔다.
9. 사랑 — 기독교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다
하시즈메가 강조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사랑이다.
일본어의 ‘愛’나 한국어의 ‘사랑’을 보면 흔히 감정을 떠올린다.
좋아한다.
소중하게 여긴다.
애정을 느낀다.
그러나 신약의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강한 윤리적 개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 명령에서 분명해진다.
원수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감정과 관계없이 그 사람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대하라는 것이다.
즉 사랑은 느낌보다 행동과 태도의 문제다.
이 때문에 기독교의 사랑은 개인적 정서를 넘어서 보편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
민족,
신분,
성별,
친족
같은 자연적 관계를 넘어 낯선 사람까지 도덕적 대상으로 포함하게 된다.
10. 용서와 죄 — 왜 기독교에서는 용서가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의 가르침에서 사랑과 연결되는 것이 용서다.
그런데 용서는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 잘못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먼저 잘못이 ‘죄’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죄를 용서한다.
즉 기독교는
죄의식과 용서
를 동시에 강하게 만든다.
하시즈메가 보기에 이 구조는 서구문화의 독특한 특징이다.
책임을 분명히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용서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것은 법과 도덕, 개인의 양심, 사회적 화해 문제까지 연결된다.
11. 십자가 — 실패가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기독교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십자가다.
메시아라면 승리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예수는 체포되고 재판받고 처형된다.
정치적으로 보면 완전한 실패다.
그런데 기독교는 바로 이 실패를 구원의 사건으로 바꾼다.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시즈메에게 이것은 기독교의 대표적인 역설이다.
약함이 힘이 되고,
패배가 승리가 되고,
죽음이 생명으로 바뀐다.
이 역전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 문화의 상당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가 단순히 예수가 죽은 장소의 표시가 아니라 기독교 전체의 상징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2. 부활 — 기독교는 왜 ‘영혼불멸’만을 말하지 않는가
여기서 중요한 구별이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단순히 “죽으면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 아니다.
성서적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부활이다.
하나님이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린다.
이 차이는 상당히 크다.
영혼불멸은 영혼 자체가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반면 부활은 죽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다시 생명을 준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구원의 주체는 인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시즈메는 이런 차이를 명확히 해주는 데 매우 능하다.
동아시아 독자는 ‘천국’, ‘영혼’, ‘부활’을 막연히 하나의 이야기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성서와 기독교 사상 안에서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13. 이 책의 가장 큰 장점 — ‘성서 읽기의 지도’를 준다
<はじめての聖書>의 장점은 성서를 다 읽은 것처럼 만들어준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성서를 직접 읽을 수 있도록 지도를 준다.
성서를 처음부터 읽으면 레위기나 민수기 부근에서 포기하기 쉽다.
등장인물도 많고 반복도 많으며, 오늘날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법률과 의례 규정도 계속 나온다.
하시즈메는 먼저
- 창조,
- 계약,
- 율법,
- 예언,
- 메시아,
- 죄,
- 사랑,
- 용서,
- 십자가,
- 부활
같은 중심축을 세운다.
그러면 나중에 성서 본문을 읽을 때 각각의 이야기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성서 요약서’라기보다 <성서를 읽는 방법에 관한 책>에 가깝다.
14. 그러나 약점도 있다 — 성서를 너무 ‘합리적으로’ 정리한다
하시즈메의 설명은 매우 명료하다.
바로 그것이 문제이기도 하다.
성서는 실제로는 그렇게 깔끔한 체계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서로 다른 이미지가 공존하고,
서로 다른 역사 전승이 겹쳐 있으며,
사이에도 긴장이 존재한다.
성서는 하나의 철학자가 만든 논리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시즈메는 이런 복잡성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정리한다.
입문서로서는 큰 장점이지만, 그 결과 성서의 모순과 다성성(polyphony)이 약해질 수 있다.
성서학자가 읽는 성서와 사회학자 하시즈메가 읽는 성서는 이 점에서 다르다.
15. 또 하나의 한계 — 성서와 제국주의 문제
<ふしぎなキリスト教>에서도 드러났지만, 하시즈메는 성서와 기독교가 근대 서양문명을 형성한 과정을 매우 잘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른 면이 있다.
성서는 인권과 평등의 언어를 제공했지만,
노예제도 정당화에도 이용되었다.
선교와 교육을 촉진했지만,
식민주의와 결합하기도 했다.
유대인의 ‘약속의 땅’ 이야기는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언어로 작동한다.
미국 정치에서 복음주의적 성서해석과 이스라엘 지지는 지금도 중요한 연결고리를 가진다. 하시즈메 자신도 최근 <聖書の同盟 アメリカはなぜユダヤ国家を支援するのか>를 평가하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려면 유대교·기독교와 성서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好きな書評家、読ませる書評。ALL REVIEWS
따라서 성서를 ‘서구문명의 원천’이라고 말할 때는 반드시 두 얼굴을 함께 봐야 한다.
해방의 성서와 지배의 성서가 모두 존재했다.
평론 — 하시즈메에게 성서는 ‘신의 말씀’ 이전에 ‘문명을 해독하는 코드’이다
앞서 읽은 세 책과 연결하면 하시즈메의 관심이 더욱 명확해진다.
<ふしぎなキリスト教>은
“기독교는 왜 이런 종교인가?”
를 묻는다.
<ゆかいな仏教>은
“불교는 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종교가 되는가?”
를 묻는다.
<死の講義>는
“종교는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의미화하는가?”
를 묻는다.
그리고 <はじめての聖書>는 그보다 더 기초적인 곳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기독교 문명의 기본 문법이 들어 있는 성서에는 실제로 무엇이 쓰여 있는가?”
이 네 권을 함께 보면 하시즈메가 전통적인 의미의 ‘종교학자’와 조금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는 종교를 내면적 신앙체험 중심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 기도가 어떤 체험인지,
- 신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 신비주의적 체험이 무엇인지
등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대신 그는
- <이 종교가 어떤 인간형을 만드는가?>
- <어떤 사회규범을 만드는가?>
- <어떤 정치와 법을 가능하게 하는가?>
를 묻는다.
그래서 <はじめての聖書>도 기독교 신앙 입문서라기보다 <성서의 사회학적 독해>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비기독교인에게 특히 유용하다.
성서를 믿어야 이해할 수 있다고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믿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세계가 왜 이런 모습인지 이해하려면 이 텍스트가 어떤 사고방식을 만들었는지는 알아야 한다.”
고 말한다.
저는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본다.
다만 하시즈메의 설명을 읽고 난 뒤에는 반드시 실제 성서 일부를 직접 읽을 필요가 있다. 하시즈메가 너무 잘 정리해주기 때문에 자칫하면 ‘성서를 이해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성서는 훨씬 더 낯설고, 폭력적이며, 시적이고, 모순적이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불편하다.
그러므로 <はじめての聖書>는 성서를 대신하는 책이 아니라,
<성서라는 거대한 숲에 들어가기 전에 받는 지도>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특히 지금까지의 하시즈메 책 가운데 <ふしぎなキリスト教>이 ‘기독교라는 체계’를 설명한다면, <はじめての聖書>는 그 체계가 만들어진 원자료의 핵심 어휘를 설명한다. 두 책은 상당 부분 겹치지만 역할은 다르다. 먼저 <はじめての聖書>로 아브라함·계약·율법·죄·사랑·십자가·부활의 기본 문법을 잡고, 그 다음 <ふしぎなキリスト教>을 읽으면 하시즈메가 왜 기독교를 서구 근대사회의 뿌리로 해석하는지가 훨씬 선명하게 보인다. 紀伊國屋書店ウェブスト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