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31
1807 “거짓말로 진상규명 방해”…KAL858기 유족, 김현희 고소
“거짓말로 진상규명 방해”…KAL858기 유족, 김현희 고소
“거짓말로 진상규명 방해”…KAL858기 유족, 김현희 고소
[중앙일보] 입력 2018.07.23 13:41 수정 2018.07.2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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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한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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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발생한 ‘칼(KAL)858기 폭파 사건’의 유족들이 폭파범 김현희씨를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김씨, 면담 거절해놓고 방송서 유족들 종북좌파로 매도"
"31년 사건을 대중 기억 속에서 다시 끌어내기 위해 고소"KAL858기 희생자 가족회와 진상규명 대책본부는 23일 오전 11시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후 검찰청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고소인은 김호순 가족회 대표, 대책본부 총괄팀장인 신성국 신부 등 9명이다.
서현우 대책본부 진상규명조사팀장은 “김현희씨는 15차례에 이르는 가족회 면담 요청이나 KAL기 추모제 초청 등을 거부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 당시에는 종편(종합편성채널) 등에 출연해 가족회와 대책본부를 진실을 알면서도 진실이 싫은 사람들, 북한을 옹호하고 김정일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 활동하는 종북 좌파, 민족 반역자 등으로 매도했다”고 밝혔다. 또 “당시 공중파·종편에서는 우리의 입장을 외면해 버리고 일방적으로 김현희만 출연시켰다"며 "지난 적폐 정권 하에서 김씨의 매도성 공격 행위에 대해 이번에 고소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87년 'KAL858 폭파 사건' 당시 김현희씨의 모습. [중앙포토]가족회와 대책본부의 성명서에 따르면 김현희씨는 올해 1월 ‘조갑제 닷컴’의 조갑제 대표와 한 인터뷰에서 대책본부를 “친북성향 단체, 민족반역자들’이라고 지칭했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미국의 소리(VOA)’ 인터뷰에서도 진상 규명 활동을 ‘테러 진실이 싫고 북한을 이념적으로 옹호’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또한 성명서에 의하면 김씨는 2014년 한 종편에 출연해 “(KAL858기) 사건을 뒤집으려는 가짜 공작을 노무현 정부가 주도적으로 했다. 국가기관이 방송사, 대책위를 총동원해 연합해서 했다. 청와대·국정원·경찰이 다 함께했다”며 “대한민국에 해를 끼치는 이런 이적행위, 종북좌파”라고 주장했다.
가족회와 대책본부는 이와 같은 김씨의 과거 발언을 적시하며 “김현희는 거짓 발언으로 공공연히 고소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 허위사실로 희생자 가족들 간의 유대 강화 및 진상규명 활동의 업무를 방해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김호순 KAL858기 가족회 대표가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열린 진상규명 촉구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가족회와 대책본부는 지난달 27일 서울 연희동의 전두환 전 대통령 앞에서 진상 규명 촉구 집회를 열었다. 김호순 대표는 “이 사건은 전두환 기획 하에 안기부가 조작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저희가 진상 규명을 외치고 있다"며 "안기부가 발표한 김현희에 대한 행적이나 발표가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줘야 하는데 답변을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신성국 신부는 “이 사건 때문에 대선에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전두환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며 “사건의 주범은 전두환이고, 김현희는 기획 공작을 실행에 옮긴 종범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당시 신 신부는 김씨에 대한 고소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서현우 팀장은 “이번 고소는 김씨의 엉터리 허위 발언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31년 전 사건을 대중의 기억 속에 다시 불러일으켜 여론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KAL858기 폭파 사건은?
1987년 KAL858기 폭파범으로 체포된 김현희씨. [중앙포토]1987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북한에 의한 공중폭파 테러로 규정한 사건을 말한다. 그해 11월 29일 KAL858기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해던 중 인도양 상공에서 사라졌다. 탑승객과 승무원 115명이 전원 실종됐다. 정부는 유해나 유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에 의한 테러라고 발표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전날인 12월 15일 김현희씨를 폭파범으로 지목하고 입국시켰다. 김씨는 1990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같은 해 사면됐다. 이후 참여 정부 시절에도 재조사를 했지만 북한에 의한 테러라는 기존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유족들은 김씨 주장 외에 별다른 물증이 없는 점을 지적하며 31년째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출처: 중앙일보] “거짓말로 진상규명 방해”…KAL858기 유족, 김현희 고소
1806 “KAL기 폭파는 조작 사건…전두환·김현희 모두 고소할 것”
“KAL기 폭파는 조작 사건…전두환·김현희 모두 고소할 것”
“KAL기 폭파는 조작 사건…전두환·김현희 모두 고소할 것”
[중앙일보] 입력 2018.06.2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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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한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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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김호순 KAL858기 실종자 가족회 대표가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뉴시스]‘대한항공 KAL858기 폭파 사건’의 희생자 가족들이 “사건의 주범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며 진상 규명 촉구 집회를 열었다.
KAL858기 실종자 가족회와 사건 진상규명 대책본부는 27일 오전 11시쯤 서울 연희동 전 전 대통령의 자택 앞에서 “KAL기 사건은 전두환과 안기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기획한 조작 사건”이라며 “진상 규명을 끝까지 하겠다”고 말했다.
KAL858기는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중 인도양 상공에서 사라졌다. 탑승객·승무원 115명이 모두 실종됐다. 정부는 유해나 유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이 사건을 북한이 비행기를 공중 폭파한 테러로 규정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전날인 그 해 12월 15일 김현희씨를 폭파범으로 지목해 입국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희생자 가족들은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 김호순 가족회 대표는 “이 사건은 전두환 기획 하에 안기부가 조작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저희가 진상 규명을 외치고 있다. 안기부가 발표한 김현희에 대한 행적이나 발표가 거짓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줘야 하는데 답변을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차옥정 가족회 전 대표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 잃은 사람이 그 진상을 꼭 알아야겠다고 하는데 왜 그걸 못 알려주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김현희의 진술 외에 정부 당국의 수사 발표를 뒷받침할 물증이 도대체 무엇이냐. 폭발에 대한 물증도, 사고 지점의 확증도, KAL858기의 잔해도, 어느 것 하나 입증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진상규명 대책본부 총괄팀장인 신성국 신부(맨 왼쪽)와 희생자 유가족들이 입장서를 전달하기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대문에 다가서고 있다. [사진 뉴시스]진상규명 대책본부 총괄팀장인 신성국 신부는 “KAL858기 사건 때문에 대선에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전두환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두환에게 가장 필요했던 사건”이라며 “이 사건의 주범은 전두환이고, 김현희는 기획 공작에 의해 실행에 옮긴 종범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신 신부는 “저희는 김현희를 다음달 중에 고소하겠다. 회고록에 이 사건에 대한 허위 사실을 기록한 전두환도 고소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KAL기 폭파는 조작 사건…전두환·김현희 모두 고소할 것”
1805 대한항공 “KAL858 폭파사건, 종료된 사건” - 통일뉴스
대한항공 “KAL858 폭파사건, 종료된 사건” - 통일뉴스
대한항공 “KAL858 폭파사건, 종료된 사건”KAL858가족회, 대한항공사에 10개항 질의서 전달(전문)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승인 2018.05.09 12:40:01
▲ KLA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대책본부는 8일 오전 서소문 대한항공빌딩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질의서를 전달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대한항공사가 파악한 KAL858기의 정확한 사고위치는 어디인가요?”
대한항공(KAL) 858편이 1987년 11월 29일 중동근로자와 승무원 등 115명을 태운 채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사라진지 30년도 더 지난 시점에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 대한항공 측에 다시 제기됐다.
‘KAL858기 가족회’가 8일 오전 11시 서울 서소문 대한항공빌딩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10개항의 질의서를 제출한 것. 그러나 대한항공은 당일 즉각 “종료된 사안”이라고 일축했다.
대한항공은 이날 ‘858기 폭파사건 유족의 진상규명 기자회견 관련 입장’을 발표, “858기 폭파사건은 유족들의 끊임없는 의혹제기에 따라 이미 2007년에 정부 차원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를 발족하여 재조사 실시한 후, 종료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2007년 재조사를 벌인 국정원 발전위가 “사건의 실체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을 정식 확인하는 등 그동안 이 사건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불식”시켰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은 “858기 폭파사건은 31년이나 지난 사건이고, 정부차원에서 대한항공을 비롯해 철저한 재조사를 거쳤고 현지인 증언, 수색작업까지 하여 진실규명 발표까지 공식적으로 이루어져 종료된 사안”이라고 확인했다.
▲ KAL858기 가족회가 대한항공에 보내는 질의서를 대한항공 관계자가 받아가고 있다. 신성국 신부는 7월까지 답변을 요청했지만 대한항공은 당일 '종료된 사안'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이에 대해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대책본부’ 총괄팀장인 신성국 신부는 9일 “어제 우리가 전달한 질의서를 보지도 않고, 질의하지도 않은 내용을 왜 답변하는지 너무 황당하다”며 “어제 대한항공 관계자는 우리 질의서를 잘 전달해 검토해서 답변을 주겠다고 해놓고 우리에게는 답하지도 않고 일반 국민들에게 언론플레이를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신성국 신부는 “이같은 대한항공의 언론플레이 행위는 지난 14년 전에도 질문에 회신하지 않았던 것을 아직도 전혀 반성하지 않은 태도”라며 “일단 기한으로 준 7월까지는 답변을 기다리겠지만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한 “김현희를 상대로 소송하면서 진실이 밝혀지게 되면 대한항공도 거기에 대한 법적인 책임 물을 수 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전날 기자회견에서 가족회 회원들은 자살한 김승일과 함께 KAL858기를 폭파한 ‘북한 공작원’ 김현희 씨를 법정에 세우자며 공동 고소인으로 서명했다.
가족회는 전날 ‘대한항공 858기 사고로 인하여 실종된 피해자 가족회가 대한항공사에 보내는 1차 질의서’를 통해 10가지 질문을 제출했다.
대한항공사가 판단하고 있는 사고 위치는 물론 사고 발생 하룻만인 87년 11월 30일 당시 대한항공 회장 조중훈(작고)과 사장 조중건이 기자회견을 통해 ‘폭탄 테러’라고 발표한 근거 등을 따져 물었다.
또한 “이 사고에서 항공 보안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은 대한항공의 1차적 책임은 간과할 수 없다”며 “대한항공 임원과 직원들은 단 한사람도 법적 책임이나 처벌받은 자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김현희 일행과 중간기착지인 아부다비에서 내린 보안승무원과 한국 외교부 공무원 11명의 신원공개를 요청했다.
가족회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근거로 “KAL858기 사고조사 자체가 조사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고, 총체적으로 부실이었으며 사고조사 자체를 하지 않았다”며 “사고조사의 문제에 대하여 국토부에 재조사를 요구할 생각은 없느냐”고 질의했다.
<질의서(전문)>
대한항공 858기 사고로 인하여 실종된 피해자 가족회가 대한항공사에 보내는 1차 질의서
KAL858기 가족회는 2004년 11월 1일에 대한항공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3개항의 질의서를 발송했지만 14년이 지난 현재까지 회신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대단히 유감스럽고 향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재차 촉구하는 바입니다.
30여년전, 대한항공기를 이용하다 승무원과 탑승객 115명이 실종되었는데, 대한항공사는 이 사고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진적도 없으며, 오히려 책임회피, 사고조사 방해, 사고 진실의 은폐, 심지어는 인권탄압마저 서슴지 않은 행위에 대해 KAL858기 가족들은 항공사측의 진정한 사죄와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대한항공사가 지금이라도 사건의 진실에 적극 협조하기를 간곡히 기대하면서 질의서를 발송하는 바, 성실하고 책임있는 회신이 있기를 요청드립니다.
1. 대한항공사가 파악한 KAL858기의 정확한 사고위치는 어디인가요?
대한항공사 직원 18명이 정부합동사고조사단원으로 발탁되었으며 조중훈 회장도 구성원으로 참여했습니다. 정부 보고서와 미얀마 보고서가 사고 위치를 다르게 발표하여 혼선을 빚고 있고, 아직도 사고위치는 하나로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대한항공사가 판단하는 사고위치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2. 사고 당시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작고), 조중건 사장(작고)은 11월 30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폭탄 테러’, ‘폭발 추정사고’로 발표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항공기의 사고 수색과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 임원들의 이러한 추측성, 사고 예단 발언들은 상식적으로 납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사고조사도 없는 상황에서 임원들이 사고원인을 발표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3. 대한항공사는 KAL858기 사건을 기획한 안기부 문건 ‘무지개 공작’을 알고 있습니까?
4. 항공사는 항공기 사고 예방을 위해 보안업무와 보안 승무원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사고에서 항공 보안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은 대한항공의 1차적 책임은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한항공 임원과 직원들은 단 한사람도 법적 책임이나 처벌받은 자가 없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 사고로 보안 승무원 한명은 실종되었고, 또 한명의 보안 승무원은 김현희 일행과 함께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습니다. 아부다비에서 내린 보안 승무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이 사람은 서울까지 오지 않고, 왜 중간에 내렸습니까? 이 사람은 검찰과 법원에서 왜 증인으로 채택되지 않았나요?
5.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 김포공항까지 오기로 된 한국 외무부 공무원 11명은 누구입니까? 이들의 명단을 공개해주십시오.
“서울로 오기로 된 한국 외무부 공무원 11명이 아부다비에서 내렸다”(일본 주간신조, 아부다비 주재 일본 대사관 1등 서기관 야하라 중이찌 진술. 1987년 12월 17일)
대한항공이 제시한 바그다드-아부다비 간의 승객명단 표를 보면, 총 26명의 승객명단이 있는데 15명의 명단만 공개했으며, 나머지 11명의 명단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내린 11명의 국적, 이름, 직업등은 왜 공개하지 못합니까?
6. 조중훈 회장은 왜 교통부에 사망처리를 서둘러 달라고 요구했는가요?
그 이유를 밝혀주십시오.
정부는 사망결정과 신고를 한달만에 모두 실행하였습니다. 가족들에게 2,3차 피해를 입힌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민법 27조(실종의 선고)에 ‘부재자의 생사가 5년간 분명하지 아니한 때에는 법원은 이해관계인이나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실종선고를 하여야 한다’
또한 항공기 사고에서 실종선고를 받은 자는 1년의 유예기간을 둡니다.
KAL858기 사건에서 정부는 실종자들에 대해 한달만에 사망결정하고, 40여 일만에 사망신고를 해버렸습니다. 피해를 입은 가족들은 시신이 단 한구도 나오지 않아 사고조사와 진상규명에 목메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가족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일괄적으로 사망결정과 사망신고를 단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가족들은 정부에 대한 분노와 불신은 깊어졌습니다.
사망처리의 속전속결 배경에는 조중훈 회장의 요구가 있었음이 가족회가 기록한 대책회 기록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한항공사는 이에 대한 해명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7. 1990년 3월에 ‘서울 88올림픽 로고’가 새겨진 동체 잔해가 발견되었다는 언론 보도가 있습니다. 현재, 동체 잔해들에 대한 보존 유무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잔해들은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고 있습니까? 그 구체적인 장소와 처리과정의 사실을 알려주십시오.
8. 대한항공 858기 사건으로 인한 증인과 참고인으로 대한항공사 직원들이 채택되었는데, 아부다비에서 내린 5명의 직원들은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김석영, 이승규, 김재정, 함연호, 조은경 이상 5명입니다.
이들은 왜 법원과 검찰의 참고인에서 제외되었나요? 10명의 직원들은 모두 증인과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는데, 5명은 아무런 조사를 받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5명의 직책을 공개해주십시오.
9. 사고 후에 합동분향소가 차려졌고, 많은 시민들이 조문을 왔습니다. 그러나 대한항공사 총수 조중훈과 조중건은 조문조차 오지 않았습니다. 자사 항공기를 이용하다가 피해를 입은 실종자 가족들에게 위로와 사죄를 함이 인간적 기본 도의가 아닙니까? 지금이라도 이 사고로 슬픔과 고통에 빠진 가족들을 만나 진정성있는 대화를 나누고 사죄를 표하고, 책임질 의향은 없습니까?
10. 항공기 사고 조사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KAL858기 사고조사 자체가 조사의 원칙을 따르지 않았고, 총체적으로 부실이었으며 사고조사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대한항공은 어떤 입장인가요? 사고조사의 문제에 대하여 국토부에 재조사를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까?
대한항공 858기에 탑승하여 30년의 길고긴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 오직 사건의 진실을 원하는 KAL858기 가족들의 질의에 대하여 대한항공사는 책임있고 성실하게 답변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단, 회신은 서면으로만 받겠습니다.
담당자와 연락처도 함께 기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6월중으로 회신이 있기를 바라면서 만일 회신이 없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반드시 져야할 것입니다.
1710 “30년을, 어떻게 그 세월을 넘어갔지 싶어요”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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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을, 어떻게 그 세월을 넘어갔지 싶어요”[KAL858 30주기①]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전 회장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승인 2017.10.23 12:39:45
오는 11월 29일은 대한항공(KAL) 858기가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운 채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사라진 지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 테러범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폭발물을 두고 내려 공중폭파됐다고 발표했고, 범인 김현희는 울먹이며 범행을 자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나 실종자의 유품과 유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제기됐고,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이용한 ‘대한 항공기 폭파사건 북괴음모 폭로 공작(무지개 공작)’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압송된 김현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은 생생하게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한 수사결과에 대한 의혹제기와 진상규명 요구는 끊이지 않았고, 2001년 14주기 추모식 전후로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의 활동이 본격화 돼 국정원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을 다루기도 했지만 김현희 조사조차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촛불민심으로 앞당겨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오는 11월 29일 30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높다. 가족회와 시민대책위는 국정원이 부분공개한 ‘무지개 공작’의 전면 공개와 유일한 증인 김현희와의 면담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2001년부터 이 사건의 의혹을 다뤄온 <통일뉴스>는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주요 관계자와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추석 연휴인 10월 1일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전 회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남편의 사진과 앨범 등을 준비해뒀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우리 딸이 그러잖아요. ‘맨날 아버지는 엄마 것 밖에 (선물을) 못 사온다’고. 그러면 ‘너는 사가지고 올 사람이 따로 있다’ 이러죠. 하하.”
아직도 기억 하나하나가 또렷하지만 세월의 무게는 이길 수 없는 탓일까.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에 앞장서 온 차옥정 ‘KAL858기 사건 가족회’ 회장의 직책에도 ‘전(前)’자가 붙었고, 방금 전 일도 깜빡깜빡 잊는 증세가 시작된 지도 벌써 몇 년째다.
추석 연휴가 시작된 10월 1일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차옥정(80) 여사는 기자를 기다리며 30년간 부재 중인 남편의 사진과 앨범 등을 미리 꺼내놓았다.
젊은 시절 남편의 사진을 보며 “그렇게 봐서 그런지, 좀 변한 것 같지 않아요? 하여튼 변하는 것 같다”고 애써 기자의 동의를 구하더니 다른 작은 흑백사진을 안방에서 가져와 “다 같은 사진인데, 이것은 잘 안 변해요. 얼굴이 그대로 있는 것 같아요”라며 애틋해 한다.
▲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운동의 첫 자리에는 늘 차옥장 회장이 있었다. 2003년 추모식에서 "이제 큰 침묵의 바다를 건넜다"고 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2005년, 18주기 추모식을 마치고 국가정보원 앞에서 삼보일배를 하며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2004년 6월 3일, 서울 양재동 시민의숲에 세워진 '대한항공기 미얀마 상공 피폭 희생자 위령탑'을 거부하고 이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이다 여경들에 사지가 붙들린 채 연행되고 있는 차옥정 회장. [자료사진 - 통일뉴스]
2001년 KAL858기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운동이 재점화 되면서부터 그 중심에는 항상 차옥정 회장이 우뚝 서 있었다. 평범한 교사 출신 가정주부인 그의 가냘픈 몸매 어디에서 저런 힘이 솟아날까 늘 경탄하면서, 결국 남편에 대한 깊은 마음 때문이리라 결론지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워낙이 서울 사람이다 보니까. 사람한테 아주 친절하게 대하고 이런 게 있어 가지고. 친구지간에도 경상도가 많잖아요. 다 지그 아버지 좋아하죠.”
“별로 서로 다툰 게 없었으니까. 서울 양반이 돼가지고요, 제가 음성이 좀 높으지, 지그 아버지는 음성도 안 높아요.”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6년간 공군에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해 대한항공 기장이 된 남편 박명규 기장은 DC10기 운항을 마치고 KAL858기에 탑승해 귀국하다 30년 전 ‘실종’됐다.
“그러니까 이게 말도 안 되죠. 이제는 항상 가방 들고 나가서 안 들어온 것, 그것만 머리에 박혀 있는 거죠.”
“아휴, 꿈에도 안 보여요. 어쩌다가 한번씩. 뭐 생각하고 이러면 꿈에 보인다는데 그렇지도 않아요. 근데 그냥 그냥 인생무상이지요 뭐.”
▲ 차옥정 여사의 거실에는 출근한 뒤 30년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남편의 초상화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 - 송정미]
중동 근로자와 승무원, 외국인 등 115명을 태우고 이라크 아부다비공항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KAL858기는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국가안전기획부는 1988년 1월 15일 북한 테러범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폭발물을 설치해 두고 내려 공중폭파됐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처음부터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왜냐하면은 지그 아버지가 이 비행기만큼 안전한 게 없다 했었거든요. 철두철미하데요. 비행기 뜰 때까지 정비를 한데요. 내가 신경쓸까 싶어서 그 소리를 자꾸 했는 것 같예요. 지나놓고 보니까. 아, 나 이제 신경쓰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구나.”
차옥정 여사의 ‘의혹’은 확고했다. 누군가 폭발물을 기내 선반에 두고 내렸고, 이 폭발물이 비행기를 산산조각 내서 흔적조차 사라졌다는 것을 애시당초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행기 잔해나 실종자 유품, 시신 한 점도 제대로 확인된 것이 없다.
“대개 사고 나면 잔해가 있어야지 끝을 내든지 하지. 조작이니까 블랙박스가 어디 있냐. 없지. 아무것도 없이 그래 가지고 마무리하는...” 의혹이 ‘조작’이라는 확신으로 굳어져온 30년의 세월이었다.
차옥정 여사는 2002년부터 2013년까지 가족회 회장을 맡아 줄기차게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했고, 국정원 앞 시위는 물론 경찰에 사지가 들려 연행될 정도로 완강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 과정에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와 힘을 합쳤고, 숱한 사회운동과도 연대했다.
“그래도 아휴, 30년을, 어떻게 그 세월을 넘어갔지 싶어요. 아닌 것 같애요. 30년이.”
“하이고, 세월은 진짜. 그런 속에서도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으니까요. 참 희한한 일이죠. 그렇게 몇 십년을 앓았으면 생명 부지도 못했을 텐데 또 말짱하게 살아있고. 그러고 너 아버지 그러고 나서는 내 병원에도 안 갔지? 아프다고.”
인터뷰 자리에 함께한 맏아들 종호 씨에게 ‘지그 아버지’, ‘너 아버지’가 사라진 뒤 병원에도 간 적 없음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요즘 들어 부쩍 깜빡깜빡하는 기억력을 스스로도 좀체 믿지 못하기 때문.
한결같이 진상규명에 매달려오던 그도 결국 11월 29일 추모식조차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져 가족회 회장은 부회장으로 호흡을 맞춰왔던 김호순 씨에게 물려주게 됐다.
그러나 마음만은 여전하다. “그래도 지그 아버지 생각하면 내가 지금 이리 있을 때도 아닐 상 싶고, 내 할 일을 하는 거지.” 그래서 요즘은 주로 기록을 남기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 30주기 인터뷰를 계기로 차옥정 여사의 '기록 남기기'가 시작됐다. 왼쪽은 맏아들 박정호 씨. [사진 - 송정미]
▲ 차옥정 여사의 인터뷰와 '기록 남기기'에는 다큐창작 '소' 소속 정원석 PD(왼쪽)가 함께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내가 정리도 하고 쓰고 할라고 몇 번 시도를 했어요. 혼자 안 되더라고요. 그거를 틀림없이 하기는 해야 되거든요.”
30주기 추모식에 참석할 수 있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니, 나가기는 나가야죠. 하여튼 나갔다 와야 편하지”라면서도 “정권이나 바뀌면 어떻게 될란지 모르지만”이라고 바뀐 시절조차 잊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다.
차옥정 ‘회장’은 2005년 추모식에 자필로 깔끔하게 쓴 ‘추모사’에서 “우리 가족회 입장에서는 김현희가 양심선언 하는 것이 사건이 끝나는 시점으로 봅니다. ‘나는 가짜다’ 이 다섯 자 말입니다”라고 촉구했다.
1711 “김현희, ‘17살 이전 탈북자’ 확신” - 통일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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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 ‘17살 이전 탈북자’ 확신”[KAL858 30주기②] ‘KAL858 시민대책위’ 신성국 신부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승인 2017.11.01 18:40:55
오는 11월 29일은 대한항공(KAL) 858기가 승객과 승무원 115명을 태운 채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사라진 지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북한 테러범 김승일과 김현희가 기내에 폭발물을 두고 내려 공중폭파됐다고 발표했고, 범인 김현희는 울먹이며 범행을 자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비행기의 잔해나 실종자의 유품과 유해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이 사건에 대한 의혹은 사건 발생 초기부터 제기됐고,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이 사건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이용한 ‘대한 항공기 폭파사건 북괴음모 폭로 공작(무지개 공작)’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두고 압송된 김현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은 생생하게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있다.
김현희의 진술에만 의존한 수사결과에 대한 의혹제기와 진상규명 요구는 끊이지 않았고, 2001년 14주기 추모식 전후로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의 활동이 본격화 돼 국정원발전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가 이 사건을 다루기도 했지만 김현희 조사조차 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촛불민심으로 앞당겨 정권교체가 이뤄진 상황에서 오는 11월 29일 30주기를 맞아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높다. 가족회와 시민대책위는 국정원이 부분공개한 ‘무지개 공작’의 전면 공개와 유일한 증인 김현희와의 면담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2001년부터 이 사건의 의혹을 다뤄온 <통일뉴스>는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주요 관계자와의 릴레이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30년을, 어떻게 그 세월을 넘어갔지 싶어요”
[KAL858 30주기①] 차옥정 ‘KAL858기 가족회’ 전 회장
▲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앞두고 10월 18일 서울 마포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신성국 신부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과 만나면서 그분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런 심정을 저에게 보여줬다... 그것을 내가 눈여겨보면서, 정말 힘이 별로 없지만 나라도 어머니들 곁에서 함께 해줘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크게 생겼다.”
천주교 신부로서 우리 사회가 금기시하다시피 한 대한항공(KAL) 858기 사건 진상규명에 뛰어든 계기는 “순수 인간적인” 것이었지만, 이후 그가 겪은 가시밭길은 상상 이상이었다.
6년 반을 “내가 활동을 좀 못하게끔” 해외로 발령을 받았고, 귀국한 뒤에도 교구 소속 신부임에도 성당 사목에 나서지 못한 채 수도원 파견 신부로 “시골에서 노동도 많이”하는 특별한 생활을 하고 있다.
2001년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이하 시민대책위)가 구성되고 이후 집행위원장으로서 진상규명 활동을 도맡다시피 해 온 신성국(56) 신부는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도 이것이 해결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정말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정상적인 그런 사회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헛헛함을 토로했다.
오는 11월 29일, 87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KAL858기 ‘실종’사건도 30주기를 맞는다. 신성국 신부는 10월 18일 서울 마포 소재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가진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테러리스트’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현희 씨에 대해 ‘탈북자’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지금 국정원(국가정보원)이 김현희에 대해 아주 강조하는 게 있다. 뭐냐면 항상 “북한 사람이다”고 이야기한다. 이걸 유독 강조한다”며 “그걸 왜 강조하느냐? 북한에서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운을 뗐다.
그러나 “김현희가 북한에서 살았다는 것과 이 사건과 관련있다는 것은 다른 거다”며 “김현희는 어린 시절 북한에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공민증을 받기 이전, 17살 이전에 탈북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나의 조사 결과 이건 거의 99% 확실하다”고도 했다.
그 근거로 “우선 김현희의 수사기록이나 진술서 내용들을 보면 북한 관련 진술들이 다 허위로 드러났다. 숱하게. 그렇다면 북한을 모른다는 거다”고 전제하고 “특히 가장 핵심적인 게 김현희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신원 문제가 아무 것도 제시된 것이 없다”며 “우리 주민등록증 같은 공민증과 노동당증이 없고, 없다면 번호라도 알아야 되는데 번호도 모른다”고 짚었다.
북한의 공민증은 17세 이상 주민에게 발급되는 신분 증명서로서 공민증 없이는 북한 지역 내에서의 이동조차 불가능하다. 더구나 북한 주민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조선노동당 당원증’의 번호를 모른다는 것은 자신의 생년월일을 모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는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노동당원으로서 차출되어서 7년 8개월을 대남공작원 훈련을 받았다는데 왜 노동당증 번호가 없나?”라고 반문했다. “김현희 스스로가 쉽게 밝힐 수 있는 자신의 신원을 제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 아니냐”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은 김현희 여권”이라며 “김현희 여권에 찍혀 있는 모든 직인, 스탬프는 실제다. 그러면 김현희가 일본 나리따를 출국한 기록을 안기부가 평양으로 바꾼 거다”라고 추론하고 “여권을 보면 김현희는 북한과 관계없이 일본에 근거지를, 거점을 갖고 활동했던 그런 사람으로 증명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 “김현희씨 왔습니까? 손들어 보세요.” 신성국 신부는 이미 5년 전에도 김현희 씨를 초대했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하치야 마유미(김현희) 일본 여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위조여권이라고 발표했지만 스탬프와 직인 등은 위조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1984년부터 일본을 드나든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사진제공 - 서현우 시민대책위 조사팀장]
▲ 1986년 출입국 기록에 이어 문제의 1987년 11월 14일 나리따 공항 출국 스탬프가 선명하게 찍혀있다. 신성국 신부는 1987년 11월 29일 KAL858 사건 당시 김현희가 평양이 아니라 일본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했다. 김현희는 11월 12일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탑승해 모스크바로 도착했다고 진술했다. [사진제공 - 서현우 시민대책위 조사팀장]
그는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11월 29일 오전 10시 반부터 토론회와 추모제가 같이 열리게 된다”며 “그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김현희를 초대한다. 당연히 와야 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김현희 씨는 ‘KAL858기 가족회’와 시민대책위의 공개토론 제안을 한 차례도 수용하지 않았고,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발전위)의 재조사를 위한 면담조차 응하지 않았다.
그는 “김현희라는 사람은 사면 단행할 때 사면 이유가 있었다. 뭐라 그랬냐? “역사의 증인으로 삼기위해 사면시키겠다.” 정부가 그렇게 발표했다. 그러면 역사의 증인이 되도록 김현희를 가족들이 원한다면, 가족들이 만나고 싶다면 만나도록 주선해주고 공개해야 한다”며 “왜 김현희를 저렇게 꽁꽁 숨기나? 피해자 가족들이 매년 추모제를 하는데 김현희는 왜 오지를 않나? 왜 피하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건 30주기를 맞아 시민대책위는 정부 각 부처에 자료공개를 요청하고 있으며, KAL858기 사건을 87년 13대 대통령선거에 악용한 ‘무지개 공작’ 전문 공개도 추진하고 있다. 국정원 발전위는 2006년 ‘무지개 공작’이 존재했음을 밝혔지만 그 내용은 절반 이상 감춘 채 공개한 바 있다.
또한 “사고 당시 미리 전화를 받고 KAL858기에 탑승하지 않아 생명을 건진 외교관 한 명을 찾고 있다”며 “이미 신원은 알고 있다. 사실 규명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필요하면 명예훼손 소송을 각오하고라도 실명을 공개하고 공개증언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말해 주목된다.
그는 “이 사건의 중심에 국정원이 있다. 국정원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한 치의 진실이라도 밝혀지기를 두려워하는 집단”이라며 “김현희는 지금 국정원이 관리한다. 국정원 손아귀에 있다”고 단정하고 “국정원이 불러오면 되는 거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통일뉴스>가 진행하고 있는 릴레이 인터뷰의 일환으로 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마포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진행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 신성국 신부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 국정원이 있다”
“노무현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때도 그들은...”
▲ 신성국 신부는 인터뷰 과정에서 국정원에 대한 근원적 불신과 김현희 씨의 신분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KAL858기 사건이 발생한지 올해로 30년이다. 먼저, 30주기를 맞는 심경은?
■ 신성국 신부 : 이 사건이 하루빨리 진상규명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항상 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도 이것이 해결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정말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정상적인 그런 사회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소감이랄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상식이 통하고, 또 우리 한사람 한사람 인권이 제대로 존중받는 그런 세상이 빨리 와야 한다. KAL858기 진상규명을 하는 나의 진솔한 마음 중의 하나다.
□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이 궁금하다.
■ 제천 시골에서 노동도 많이 하고, 그리고 30주기를 맞아 이 사건 행사 준비에 많이 바쁜 상태다.
□ 천주교 신부로서 본당 사목활동은 안 하나?
■ 제천 마리스타 공동체에서 노동하면서 조용히 좀 자유로운 상태에서 지내고 있다.
□ 예전에 김현희 씨는 민주정권에서 탄압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신부님은 보수정권에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안다.
■ 나는 사실 민주정권이고 보수정권이고 늘 같은 어려움에 있다. 쉽게 말하면 이 사건의 중심에 국정원(국가정보원)이 있다. 국정원은 이 사건과 관련해서 한 치의 진실이라도 밝혀지기를 두려워하는 집단이다.
노무현 정권이나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때도 그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우리와 대화하지 않고, 항상 이것을 감추려는 자세였다. 그래서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오는 어려움, 고통은 똑 같다.
□ 의외다. 일반적으로 민주정권에서는 좀 더 협조적이고 보수정권에서 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상당히 의외다.
■ 사람들은 흔히 그런 이야기한다. ‘이명박 국정원’, ‘박근혜 국정원’이라고 앞에다가 붙이는데 국정원은 앞에 수식어가 필요 없는 데다. 그냥 똑 같은 국정원이다. 그들은 늘 그 실체가 변하지 않고 항상 똑같은 그러한 뭐랄까, 국민들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는, 그리고 늘 권력지향적인, 그러면서 늘 뒤에서 공작을 꾸미는 그런 집단이다. 그들이 뭐 정부기관이다? 그런 거 없다.
□ 이 사건에 뛰어든 계기가 있었나?
■ 계기는 순수 인간적인 차원에서 일어났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과 만나면서 그분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런 심정을 저에게 보여줬다. 그러니까 내가 그분들의 아픔, 억울함, 큰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한,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을 봤다. 보상이라는 것은 특히 심리적인 것이다.
그것을 내가 눈여겨보면서, 정말 힘이 별로 없지만 나라도 어머니들 곁에서 함께 해줘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크게 생겼다.
▲ 신성국 신부의 화두는 '국가정보원'이다. 참여정부 시기인 2004년 9월 21일 국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지만 이후 국외 발령을 받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2003년 11월 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김현희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천주교 신부 115인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그 이후 115명의 천주교 신부들이 선언도 하고, 천주교 쪽이 움직이고 도와주지 않았나?
■ 초기에 천주교 신부들이 이 사건의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다 공감하고 ‘115인 선언’도 해주고 2차로 162명이 선언도 해줬다. 2002년도, 2003년도에 천주교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많은 활동을 했다.
□ 그 이후에 신부님은 천주교 내부에서조차 해외로 밀려나지 않았나?
■ 그 이후에는 내가 활동을 좀 못하게끔 발령도 받았고, 결국 해외로 떠났다.
□ 천주교 내부 흐름이 바뀐 건가, 원래 그런 건가?
■ 본래 그렇다. 천주교는 뭐랄까 좀 이념에 대한 의식수준이 세상하고 똑같다. 더 진취적이거나 깨어있는 상태가 아니다.
□ 해외에 얼마나 머물렀나?
■ 6년 반이다.
□ 자의가 아닌 상태에서인가?
■ 그렇다.
□ 다시 들어 와서도 본당 신부는 맡지 못한 것으로 안다.
■ 갔다 오고 나서도 그렇다. 또 내가 원하지 않았다. 수도원에 파견 식으로 지금 나가있는 상태다.
“우리가 김현희를 초대한다. 당연히 와야 한다”
“미리 전화받고 생명을 건진 외교관 찾고 있다”
□ 꾸준히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해왔는데, 정권이 교체됐고 30주기가 다가왔다. 어떤 식으로 풀어가려고 하는지 진상규명의 방향을 소개해 달라.
■ 우선 제일 큰 밑그림은 촛불시민들의 혁명,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진상규명에 물꼬가 텄다는 감이 든다. 여건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조성이 됐다. 그런 면에서는 희망적이다.
이명박, 박근혜 때의 국정원의 적폐, 여러 가지 정권 차원에서 공작한 것들이 지금 막 국민들에게 분노, 불신을 주고 있다. 국정원이 어떤 기관인가, 또 그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 지금 속속들이 드러나면서 이제 국민들이 국정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고 있다.
국정원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우리 사건도 오버랩돼 우리 사건도 같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상규명 운동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할 하나의 요소로 보고 있다.
▲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진상규명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2013년 1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KAL858기 사건의 주범이라는 김현희를 반드시 재조사해주시기를 바란다”며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참여정부 시기인 2005년 11월 9일 가족회와 시민대책위가 국회에서 언론 보도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고, 임종인, 정청래 당시 의원이 참석했다. 신성국 신부는 “작은 언론사라도 마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수단 방법을 다 가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국민의 의식변화, 국정원에 대한 인식 변화, 이런 것들이 사회 저변의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런 사회적 기류 속에서 KAL858기 사건도 재조명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텐데, 30주기를 맞아 기획하고 있는 것은?
■ 우선 우리가 당장 11월 29일이 30주기니까 그때 우리들이 진상규명 대회를 국회에서 가지려고 한다. 진상규명이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된 자료들을 우리가 제공하고 또 토론하고, 국민적인 관심사를 30주기를 계기로 해서 다시 불러일으키려 한다. 그동안 30년의 결과를 국민들에게 내놓을 거다.
□ 국회 30주기 추모행사를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11월 29일 오전 10시 반부터 토론회와 추모제가 같이 열리게 된다. 그때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김현희를 초대한다. 당연히 와야 한다. 30주기인데.
□ 행사 말고도 여론화를 위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있나?
■ 우리들이 그동안에 재판기록과 수사기록을 정보공개를 청구해서 받아냈는데, 그런 기록을 분석한 것을 토대로 해서 정부 각 부처마다 우리가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미처 아직까지 받아내지 못한 것들을 받아내기 위해, 자료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사고 당시 미리 전화를 받고 KAL858기에 탑승하지 않아 생명을 건진 외교관 한 명을 찾고 있다. 이미 신원은 알고 있다. 사실 규명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필요하면 명예훼손 소송을 각오하고라도 실명을 공개하고 공개증언을 요구할 예정이다.
▲ 2009년 22주기 추모식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신성국 신부가 정보공개를 청구해 미국 정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들을 제시하고 있다. 외국 추방 중에도 KAL858 진상규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2004년 6월 3일 서울 양재 시민의숲에 세워져 있는 '대한항공기 미얀마상공 피폭 희생자 위령탑'을 거부하며 이를 부수는 상징의식을 벌이면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사진 화형식을 벌이다 경찰에 압수당하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아무래도 30주기면 언론의 관심도 높아지지 않겠나?
■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방송이라든지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듣는 팟캐스트라든지 잡지, 신문, 하여튼 언론을 최대한 활용해서 우리의 이러한 운동, 또 우리들이 지금까지 진상규명한 결과들을 다 알려주려 한다.
거대 공중파라든지 이런 데는 자꾸 이 사건을 이념적으로 바라보며 다루기를 꺼려한다. 그래서 <통일뉴스>를 비롯해 우리들의 기사를 실어주고 동참해주는 경우는 작은 언론사라도 마치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수단 방법을 다 가동해야 한다.
우선은 내 개인 페이스북을 통해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또 주변에 내 페이스북 친구들이 많이 퍼날라 주고 동참하고 있다.
“공민증을 받기 이전, 17살 이전에 탈북한 상태였다”
“무지개 공작 전문을 공개받아야 한다”
□ KAL858기 사건 30주기를 맞아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원회’가 주축이 돼서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금 시민대책위 간부는 누가 맡고 있나?
■ 대표는 윤원일 안중근평화연구원 부원장이고 나는 집행위원장이다. 고문은 김병삼 몬시뇰이고, 조사팀장은 서현우 작가다.
□ 어쨌든 시간이 많이 흘렀고, 진상규명 과정도 축적이 돼 왔으리라 본다. 이 사건의 대체적 윤곽을 어떻게 그리고 있나?
■ 우리들에게 30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고, 꾸준히 한발짝 한발짝 더디지만 뭔가 이 사건의 진상규명에 많이 접근해와 있다.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 사건의 실체가 뭐냐? 나는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대선공작 사건’이라고 본다.
□ 최근에 강진욱 <연합뉴스> 기자가 1983년 발생한 미얀마 폭파사건의 의혹을 상당히 깊게 조명한 책을 냈다. 그때도 전두환 정권 시기였다. 그 책을 보면서 KAL858과 상당히 유사한 맥락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생각해보라. 1987년이 전두환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그 해였다. 그런데 전두환이가 가만히 아무 것도 안 하면서 선거가 치러지기를 바랐겠나? 자기가 살 구멍을 찾아야 되는데, 살 구멍이 뭐였겠나? 선거에서 이기는 거였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뭐해야 되나? KAL기 사건이었다.
▲ 신성국 신부와 시민대책위 조사팀장 서현우 작가가 공동 저자인 『KAL858 전두환, 김현희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출판기념회가 2012년 10월 17일 서울 혜화동 '벙커1' 카페에서 주진우 기자의 사회로 열렸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실제로 국정원 발전위에서 ‘무지개 공작’이 존재했다고 발표했고, 그 문서 일부도 공개한 상황이다.
■ 무지개 공작 내용을 보라. 나중에 김현희 진술이 그대로 다 복사되지 않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는 거 아닌가? 무지개 공작 전모를 밝히기 위해 우선 무지개 공작 전문을 공개받아야 한다.
□ 여러 의혹들이 숱하게 제기됐는데, 그 중에서도 최근 의혹 중심으로 간추려서 몇 가지만 정리해 달라.
■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지금 국정원이 김현희에 대해 아주 강조하는 게 있다. 뭐냐면 항상 “북한 사람이다”고 이야기한다. 이걸 유독 강조한다.
그걸 왜 강조하느냐? 북한에서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항상 “탈북자다”고 이야기한다. 김현희가 북한에서 살았다는 것과 이 사건과 관련있다는 것은 다른 거다. 김현희는 어린 시절 북한에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공민증을 받기 이전, 17살 이전에 탈북한 상태였다. 나의 조사 결과 이건 거의 99% 확실하다.
□ 그 같은 추론의 근거를 소개해 달라.
■ 우선 김현희의 수사기록이나 진술서 내용들을 보면 북한 관련 진술들이 다 허위로 드러났다. 숱하게. 그렇다면 북한을 모른다는 거다.
특히 가장 핵심적인 게 김현희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신원 문제가 아무 것도 제시된 것이 없다. 쉽게 말하면 우리 주민등록증 같은 공민증과 노동당증이 없고, 없다면 번호라도 알아야 되는데 번호도 모른다.
당시 안기부가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노동당원으로서 차출되어서 7년 8개월을 대남공작원 훈련을 받았다는데 왜 노동당증 번호가 없나? 그러니까 김현희가 방송이나 언론에 나와서 “나를 왜 믿지 못하느냐? 나를 왜 의심하느냐?” 이렇게 강조하는데 그것은 김현희 스스로가 쉽게 밝힐 수 있는 자신의 신원을 제시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 아니냐.
□ 김현희 씨의 신원 문제 외에도 주요한 의혹이 있다면?
■ 중요한 것은 김현희 여권이다. 여권상에 드러난 ‘일본 출발’ 이런 것들은 사실이다. 안기부는 그것이 위조여권이라는데, 위조할 수 있다. 80년대에는 일본에서 위조여권이 공작원을 떠나서 일반사람들도 많이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풍조가 실제로 있었다.
김현희도 그 여권을 갖고 해외여행을 다녔다. 김현희 여권에 찍혀 있는 모든 직인, 스탬프는 실제다. 그러면 김현희가 일본 나리따를 출국한 기록을 안기부가 평양으로 바꾼 거다. 여권을 보면 김현희는 북한과 관계없이 일본에 근거지를, 거점을 갖고 활동했던 그런 사람으로 증명되고 있다.
□ 김현희 씨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의 양이 상당히 방대한 것으로 안다. 분석이 어느 정도 이뤄졌나?
■ 그건 분석할 것도 없다. 허허(웃음). 우리 서현우 팀장이 일단 그걸 잘 분석해서 책자로 냈다. 나도 심심할 때는 들여다본다. 보면은 진짜 그건 쓰레기통에 버려야 된다.
정말 상식적으로, 일반시민 누구나 그 기록을 보면 ‘이건 수사기록이 아니다’ 금방 알 수 있다. 베껴 쓴 거고 국정원이 자기들끼리 그냥 꾸며낸 것, 그렇게 보면 딱 맞다.
거기에 온갖 엄청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뭐 북한에서 자기가 어떤 활동을 했고, 엄청 방대하게 나온다. 그런데 그것은 전혀 사실 증명도 안 되고 그냥 꾸며낸 이야기라는 게 그냥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렇게 본다.
“가족들의 고통, 이제는 해결돼야 한다”
“김현희, 국정원 손아귀에 있다”
▲ 신성국 신부는 국정원이 김현희 씨를 불러내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30주기를 맞아 정부에 바라는 것은?
■ 이 사건은 복잡하지 않다. 무지무지하게 단순하고 쉬운 사건이다. 왜? 김현희라는 사람은 사면 단행할 때 사면 이유가 있었다. 뭐라 그랬냐? “역사의 증인으로 삼기위해 사면시키겠다.” 정부가 그렇게 발표했다. 그러면 역사의 증인이 되도록 김현희를 가족들이 원한다면, 가족들이 만나고 싶다면 만나도록 주선해주고 공개해야 한다.
그런데 왜 김현희를 저렇게 꽁꽁 숨기나? 피해자 가족들이 매년 추모제를 하는데 김현희는 왜 오지를 않나? 왜 피하나?
정부는 김현희와 가족들의 만남을 반드시 주선해줘야 되고, 공개해야 된다. 가족들이 궁금한 게 많다. 또 국민들도 그렇고. 그러면 가족들에게, 국민들에게 증언할 수 있도록 그런 기회를 제공해줘야 한다.
지금까지 김현희를 둘러싼, 김현희를 비호했던 집단은 다 안기부였다. 그리고 일반시민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검증받아야 하는데 안기부가 감싸고돌았는데 어떻게 검증이 되나?
□ 만약에 직접 김현희 씨를 만난다면 묻거나 따지고 싶은 것이 있나?
■ 나하고 만나면 한 시간만에 정말 김현희는 두손 두발 들고 양심선언 할 것 같다. 이건 뭐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다.
이 사건이 30년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이 분단이라는 구조가 양심을 가지고 살 수 없는 구조였다는 거다. 저런 수 백 명을 죽인 사람이 영웅시되고, 그리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가는 이것이 어떻게 정상적인 인간사회인가?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 사회를 정말 정상적인 사회로 만들려면 이 사건이 풀려져야 한다. 정말.
그리고 김현희는 자기도 이제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정말 자유스럽게 행복하게 살려면 지금이라도 이 사건을 매듭지어야 한다. 저렇게 숨겨서 본인도 살 수가 없다. 불안해서. 그리고 언제까지 국정원이 돌봐줄 건가? 김현희는 판단 잘해야 한다.
□ 그렇잖아도 민주정부에서 자기가 탄압받았다고 말하지 않았나?
■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걸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김현희와 함께, 보호하면서 탄압받았다고 공세적인 자세를 보인 거다. 그것은 안 된다. 무슨 탄압을 했나? 내가 김현희를 괴롭힌 적이 없다.
▲ 줄곧 가족회 곁을 지킨 신성국 신부는 <통일뉴스>와의 이번 인터뷰에서 “나라도 어머니들 곁에서 함께 해줘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크게 생겼다”고 말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이들의 눈물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 2011년 24주기 추모제 헌화 장면. [자료사진 - 통일뉴스]
□ 차옥정 전 회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큰 고통을 겪어 왔는데요, 그분들에게 30주기를 맞아 하고 싶은 말은?
■ 내가 15년을 지켜봤지만 진짜 가족들이 겪은 고통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 아픔, 슬픔이다. 그리고 특히 “이게 나라냐?” 정말 억울한 사람들이 호소할 데가 없는 우리 사회의 매정함, 이것을 보면서 참 맘이 아팠다.
가족들의 고통이 이제는 해결이 돼야 한다. 연세도 많이 드셨다. 지금까지 30년 동안 어려움을 이겨낸 것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가족들의 진상규명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손떼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그래서 나는 시민들이 계속 진상규명이 될 때까지는 그분들과 함께 곁에서 도와줬으면 좋겠다. 그분들이 끝까지 힘낼 수 있도록.
정말 그분들이 지금까지 왔으니까 조금 더 용기 내고, 힘 내고, 또 더 많은 시민들이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 갖고, 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벌써 지쳐서 포기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 보면 참 대단한 분들이다.
□ 정권이 바뀌었는데 실제로 현 정부나 현 국정원이 이 문제를 협력적으로 풀 의지가 있다고 보나?
■ 정부는 풀지 못 한다. 지금 북핵문제라든지 여러 가지 한반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그러면 뭐냐? 결국 우리들이 풀어야 된다. 우리들이 최대한 성과를 올려놓고,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를 제시해주고 그 다음에 정부에서는 그것을 말하자면 받아들이고 인정해주고.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뭐냐? 적어도 자료협조만 잘 해줘도, 우리에게는 큰 성과가 올 수 있다. 감추지 말고. 우리가 진상규명을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 그 정도만 해줘도 우리는 정부에 감사할 것이다.
□ 김현희 씨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없나?
■ 김현희 움직이는 방법은 쉽다. 아주 간단하다. 국정원이다. 국정원이 불러오면 되는 거다. 김현희는 지금 국정원이 관리한다. 국정원 손아귀에 있다.
지금 국정원은 자기네가 손털었다는데, 그것은 국정원 직무유기다. 자기들이 말한 테러리스트를 어떻게 그냥 자유롭게 놔줄 수 있나? 자기들이 관리하고 있다. <끝>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 500년 전통의 공동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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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통의 공동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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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2019.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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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문명을 선도하는 미국에 살면서도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며 단순 소박한 삶을 지켜가고 있는 그리스도인 마을 아미시들을 대상으로 박사학위 연구를 진행한 거투르드 앤더스 헌팅턴을 비롯한 인류학자들은 20세 중반까지도 그들의 문화가 인류역사에서 머지않아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인류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는 커녕 매 20년마다 두 배로 인구가 증가하는 뜻 밖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에서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선교부 김복기 목사가 발표한 내용이다. 이날 컨퍼런스는 ‘아나뱁티스트들이 살아온 오랜 방식’ <공동체를 말하다!>란 주제로 열렸다. 최근 국내에 마을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급중하면서 마을공동체운동의 원조격인 아나뱁티스트 컨퍼런스가 열리자 150여명의 청중들이 참가해 5명의 목사와 교수들의 발표를 경청하고 열띤 질의응답을 펼쳤다.
산상수훈 부르심에 응답한 삶 선택
» 김복기 목사아나뱁티스트는 ‘재세례파’는 뜻이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례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성인이 되어 자발적 의지로 세례를 받아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500년 전 루터와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운동이 관주도개혁에 머무르자 초기교회의 공동체적 모습 그대로 따르려는 이들이 모여 살았다. 이에 대해 발표자인 김난예(침례신학대)교수는 “산상수훈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로 정의했다.
아타뱁티스트들은 전쟁과 폭력을 철저히 반대하고 어떤 명분으로도 살상과 총기와 유아세례를 거부해 군부와 가톨릭, 주류 기독교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고 쫓겨다니면서도 예수의 본질적인 사랑과 비폭력의 삶을 이어오며 인류사회에 큰 영감을 주었다.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는 1735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던중 배가 뒤집어질질뻔한 풍랑을 만나 자신을 비롯한 승객들이 두려움에 떨고있을 때 모라비언들만이 태연하게 찬송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회심했다고 한다. 그 모라비안들이 바로 아나뱁티스트의 선조들이다. 2006년엔 미국 필리델피아 아미시의 한 학교에 침입한 범인이 10명에게 총기를 난사에 5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아나뱁티스트의 일종인 아미쉬인들이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범인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답지하는 성금을 범인의 아내와 세자녀에게 먼저 할애해줄 것을 요청하고, 범인의 가족들을 식사에 초대해 위로해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혼삶 시대에도 왜 공동체로 사는 사람이 늘까
» 김난예교수 아나뱁티스트로는 국내엔 부르더호프공동체가 널리 알려져있다. 그러나 더 많은 아나뱁스트들 그룹인 후터라이트와 아미시, 메노나이트 등이 있다. 모라비안의 후예로 미국과 캐나다에 정착해 14가정씩 개인소유 없이 공동으로 살아가는 후터라이트인구는 1980년 2만4천여명이었으나 현재 4만5천여명으로 늘었다. 아미시는 농촌지역에만 거주하며 자동차 등을 거부한채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고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건강성과 안녕을 우선시하는 삶을 유지하고 있다. 아미시는 1900년엔 6천명에 불과했으나 현재 33만여명으로 집계된다. 메노나이트는 교회 그룹으로 확산돼 현재 9624개 교회에 146만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설은주 목사
산업화, 도시화와 개인의 자유가 중시되면서 핵가족화와 혼삶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렇게 공동체적 삶에 동참하는 이들이 줄기는 커녕 늘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설은주 ‘하늘숲-좋은나무공동체’ 목사는 “관계가 깨져가고 있는데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된다’며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내보고 싶은 욕구의 분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난예 교수는 “현대사회가 물질적 부만을 추구하며 생긴 불평등으로 인한 온갖 문제의 해결책이 공동체에 있고, 특별히 장애인과 노인 등 어떤 사람도 소외되지않은 사회의 필요성으로 공동체가 더욱 필요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김복기 목사는 “통상적인 조직들은 실패하면 서로 욕하고 흩어지기 마련인데, 아나뱁티스트들은 성공과 실패까지 공유해왔다”고 지속성의 비결을 설명했다.
갈등과 두려움을 넘어 어떻게 함께살까
» 최철호 목사 컨퍼런스에선 서울 인수동과 강원도 홍천 등에서 300여명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밝은누리 대표 최철호 목사도 발표했다. 최 목사는 “‘나도 다 해봤는데, 다 부질없는 이야기야!’, ‘생각은 좋은데 현실에 맞지 않아!’라는 생각들은 그 자체가 불신앙, 체념적 삶의 표현”이라며 “일상에서 늘 욕망을 조작하고 불안을 조장해 생명을 고갈시키는 시대 우상이 강요하는 삶에서 탈주해 먹고 입고 자고 즐기는 생활양식과 결혼·임신·출산·육아와 수련, 치유, 교육, 노동, 놀이 등 구체적 삶에서 하나님 나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는 건 개인이나 가정 단위가 아니라 마을이라는 관계망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밝혔다» 크리스 라이스 .
크리스 라이스 메노나이트 동북아책임자는 인종차별의 본거지라는 미국 미시시피주 수도 잭슨에서 백인과 흑인들이 섞여살던 ‘갈보리의 소리’라는 공동체에서 겪은 갈등 사례를 들려주었다. 그는 “우리는 미국에서 인종적으로 가장 잘 통합된 공동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흑인들이 ‘화해모임’을 조직해 ‘인종차별은 사회에 있기에 앞서 우리 공동체 안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며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며 내가 백인으로써 인종문제를 다루는 것은 선택적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즉 언제든 부유한 백인은 다른 부유한 백인 교회로 옮겨갈 수 있었으나 흑인 형제 자매들은 그런 선택이 없었으며, 백인들이 그런 특권을 이용한 해결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얕은 해결책에 머물지않는 진정한 화해를 위한 3단계 과정을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사회적 긴장과 트라우마의 진실,억압, 특권을 극복하려면 정면으로 부딪히고, 애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두번째 진실이 없는 사랑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를 갈라놓고 망가지게 하는 것을 대면하지않는 화해가 있을 수 없으므로 괴로움과 분노의 과정까지 거치면서 진실과 사랑을 함께 결합해야한다는 것이다. 셋째 기독교공동체 화해의 핵심에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한다.”
고독의 시대, 공동체는 어떻게 세상을 돕는가
이날 컨퍼런스에선 아나뱁티스트들이 공동체적 삶의 전통과 지혜를 살려 현대사회인들을 구제하는 사역들이 소개됐다. 6곳에서 운영되는 ‘그린크로프트’라는 ‘돌봄의 공동체’가 대표적이다. 이 공동체 중 한곳은 1922년 인대애나주 뉴 칼리슬의 30만평 숲에 만들어져 150명의 메노나이트 도우미들이 공동체로 살아가면서 배우자를 잃고 홀로 남은 65세 이상 노인들과 함께 총 270명이 살아간다. 또 고센 공동체엔 550명의 전문의료인 및 간호인을 포함해 노인등 1200명이 살아간다. 공동체 내엔 예배당과 소규모 예배실, 상담실, 도서관, 컨퓨터실, 영화관람실, 오락실, 각종 모임방 등이 있고, 건강한 이들은 은퇴 후에도 이곳에서 직업을 갖고 파트타임 일을 하거나 자원봉사에 나선다. 김복기 목사는 “돌봄의 공동체는 양노원이 아니라 메노나이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청지기의 삶으로 함께하는 것”이라면서 “이 공동체들은 외진 곳에 있지않고 도시 끝자라에 위치해 도시 내 자녀들 및 친척들과 공동체성을 잃지안하고 연결되게 한다”고 설명했다. 노령화와 혼삶으로 소외와 고독사가 사회문제가 되고있는 한국사회에도 필요한 돌봄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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