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6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1985년 소설

32.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 불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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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가해자가 먼저 용서한다? 그 절망감을 그린 역작

2015년 11월 05일 (목) 16:35:55 유응오 arche442@hanmail.net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는 영화 <밀양(密陽)>의 원작 소설이다.

먼저, 간단히 <벌레 이야기>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벌레 이야기>는 아이를 유괴 당한 아버지의 입장에서 사건을 서술한 작품이다.

초등학교 4학년인 알암은 얌전한 성격이지만 성적만은 우수한 아이다. 알암은 주산반에 들어간 뒤 주산학원에 다니게 해달라고 조른다. 그러던 중 하루는 알암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알암의 부모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알암이 찾기 운동을 벌인다. 시간이 지나도 알암의 행적은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알암의 실종은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간다. 하지만 아내(알암의 어머니)는 알암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거리로 나선다. 아내는 이웃집 김 집사를 만나 절대자인 신에게 매달리기도 한다. 가련한 영혼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아이를 꼭 찾게 해달라고 아내는 간곡하게 기도를 올렸지만, 절대자는 아내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 알암이 주산학원 근처의 상가 건물 지하실 바닥에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형사들은 알암의 시체가 발견된 건물을 중심으로 추적 수사를 벌인 끝에 주산학원 원장인 김도섭이 범인임을 밝혀낸다.

범인이 밝혀지자 아내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져 버린다. 아내는 원망과 분노와 복수의 집념으로 가까스로 몸을 가다듬는다. 이런 아내를 지켜보던 김 집사가 “가능하면 그(김도섭)를 용서하고 동정을 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인간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절대자뿐이며 사람에게는 오직 남을 용서할 의무밖에 주어지지 않는다.”고 조언한다.

물론 아내는 처음에는 김 집사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다. 하지만 김 집사의 권유에 아내는 교회에 나가게 된다. 아내는 마침내 김도섭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한다. 김도섭을 만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간 아내. 하지만 뜻밖에도 아내에게는 김도섭을 용서할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는다. 김도섭은 아내에게 이미 주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구원도 받았노라고 말한 것이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아내는 화자에게 솔직히 속내를 밝힌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김도섭은 형장에서 “아이의 영혼을 저와 함께 주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시고 살아남아 고통 받는 그 가족분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덜어주고 위로해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이틀 후 아내는 슬픔과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유서조차 남기지 않은 채 약을 마시고 자살을 한다.

이청준 작가는 <벌레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청준 작가는 <벌레 이야기>의 창작 배경에 대해 “광주민주화항쟁 직후 정치상황이 폭압적이어서 폭력 앞에서 인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때 피해자는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이야기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럴 때 피해자의 마음은 어떨까요? 그런 절망감을 그린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가하면, 저자 서문에는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고 있다.

기실, <벌레 이야기>의 제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속죄와 구원라고 할 수 있다. 소설보다 먼저 대중에게 알려진 영화 <밀양>도 그 주제는 원작과 다르지 않다. 다만 몇 가지 설정만이 다를 뿐이다. <벌레 이야기>는 남편이 아내를 관찰하는 반면, <밀양>은 남편이 없는 것으로 설정돼 있는 까닭에 절대자적인 카메라가 신애의 입장을 그리고 있다.

불교적인 서사 문학을 소개하는 <글밭에 핀 만다라> 지면에서 <벌레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독자 입장에서는 다소 생경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굳이 <벌레 이야기>를 이 지면에 소개하는 이유는 속죄와 구원이라는 인류의 오랜 화두 중 하나를 불교적인 시각에서 해법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논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에서 법에는 ‘법보존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이 있다고 역설했다. 말 그대로 법보존적 폭력은 법을 보존하기 위해 행사되는 폭력이고, 법정립적 폭력은 법을 개혁하기 위해 행사되는 폭력이다. 법은 법이라는 이유 때문에 법이 제정되는 순간 법을 보존해야 하는 의무와 함께 법을 개혁해야 하는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법보존적 폭력’을 ‘신화적 폭력’으로, ‘법정립적 폭력’을 ‘신적 폭력’으로 환치하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니오베 이야기’가 대표적인 신화적 폭력(법보전적 폭력)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니오베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테베의 왕비 니오베는 아들 7명과 딸 7명을 두었다. 그런 까닭에 니오베는 자신이 레토(Leto) 여신보다 더 훌륭하다고 뽐을 냈다. 레토에게는 아들 아폴론과 딸 아르테미스 한 명씩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화가 난 레토는 아폴론으로 하여금 니오베의 아들들을 죽이게 하고, 아르테미스는 딸들을 죽이게 하였다. 자식을 모두 잃은 니오베는 울며 세월을 보내다 돌이 되고 말았다.

니오베 이야기에서 레토의 분노가 바로 신화적 폭력(법보존적 폭력)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발터 벤야민은 신적 폭력(법정립적 폭력)의 사례로 구약 민수기에 나오는 ‘고라 무리에 대한 멸살(滅殺)’을 예로 든다. 고라 무리에 대한 멸살 내용은 아래와 같다.

모세의 사촌인 고라는 지휘관 250명과 함께 모세에 반기를 들었다. 같은 레위지파 후손으로서 모세에게만 영광이 돌아가는 데 대한 질투가 그 이유였다.

그러나 모세에 대한 반역은 모세에게 권위를 준 야훼에 대한 반역이기도 했다. 모세가 야훼에게 공정한 심판을 요청하자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솟아 고라의 무리는 한꺼번에 소멸 당했다.

그렇다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들을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를 파괴한다. 신화적 폭력이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는 폭력, 다시 말해 지배를 구축하고 유지하려는 폭력인 데 반해 신적 폭력은 그런 법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폭력이다. 신화적 폭력이 생명체를 희생시킴으로 자족하지만, 신적 폭력은 생명체를 위해, 생명체를 구현하기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근거로 발터 벤야민은 니오베 가족에 대한 살해는 피 흘리면서 이뤄지지만, 고라 무리에 대한 멸살은 피 흘림 없이 이뤄지는 것을 예로 들었다.

다시 말해, 법보존적 폭력(신화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신적 폭력)의 차이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사랑 혹은 자비심이 깃들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발터 벤야민은 법보존적 폭력과 달리 법정립적 폭력은 인권과 맞닿아 있다고 봤다.

기독교 사상은 아담의 원죄를 예수가 보혈로 대속함으로써 완성된다. 물론 이 대속은 거시적인 차원의 희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속죄와 구원이라는 화두를 불교사상에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벌레 이야기>에서 김도섭의 속죄와 구원은 불교 사상에 입각해 보면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가에서는 참회를 할 때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을 나눈다. 그리고 육조 혜능 선사는 참회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참(懺)은 지나간 허물에 대한 반성이요, 회(悔)는 미래를 향한 다짐이다.”

불교사상에 입각해보면 이 세상에 외따로이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참도 사참도 그 개인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지나간 허물에 대한 반성도, 미래를 향한 다짐도 공업중생(共業衆生)이 더불어 이뤄져야 한다.

一揮霜刀斬春風 雪滿空庭落葉
서릿발 같은 칼날로 봄바람을 베니, 눈 쌓인 빈 뜰에 붉은 잎 떨어지네.

이 문장은 청매 인오(靑梅 印悟) 스님이 남긴 선시의 한 구절인데, 설중단비(雪中斷臂)를 묘사한 것이다.

설중단비는 ‘눈 속에서 팔을 자른다.’는 뜻이다. 달마 대사가 숭산 소림사에 은둔하며 면벽 수도에 정진할 때의 일이다. 신광이라는 이가 달마 대사를 찾아와 깨달음을 구했다. 하지만 달마 대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신광은 법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눈밭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런 뒤에야 달마 대사가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찾아왔는가?”
혜가 스님이 답했다.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너의 믿음을 바쳐라.”

혜가 스님은 지체하지 않고 칼로 왼팔을 잘라버렸다. 그러자 땅에서 파초 잎이 솟아나 잘린 팔을 고이 받들었다고 한다.

신광은 단검으로 팔을 잘라서 구법의지를 보임으로써 달마 대사에게 혜가(慧可)라는 법명을 얻게 된다. 설중단비를 통해 스승인 달마와 제자인 혜가가 혈맹을 맺게 됐다고 볼 수 있다.

설중단비 후 혜가 스님이 스승인 달마 대사에게 물었다.
“스승이시여, 제 마음을 편케 해주소서.”
달마 대사가 답했다.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제 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초조 달마와 이조 혜가가 주고받은 이 대화는 너무도 유명한 안심법문이다. 혜가 스님은 이 안심법문을 통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달았다.

혜가 스님과 승찬 스님도 선문답을 주고받는데 그 내용이 안심법문과 유사하다.
나병에 걸려서 얼굴이 일그러진 사내가 혜가 스님을 찾아와 법을 구했다.
“전생의 업으로 나병에 걸렸으니 스님께서 제 죄를 참회하게 해주십시오.”
혜가 스님이 답했다.
“그 죄를 가지고 오너라. 그럼 참회하게 해주마.”
“그 죄를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미 네 죄는 사라졌으니 참회할 것도 없다. 이제부터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해 열심히 수행하도록 하라.”
“스님을 뵙고 승은 알았으나, 불과 법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불인 동시에 법이다. 불법에는 어떤 차별도 없느니라.”

그때서야 나병환자는 안팎은 물론이거니와, 중간에는 더욱 더 죄가 깃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혜가 스님은 나병환자 청년에게 승찬이라는 법명을 내려줬다. 훗날 승찬 스님도 법기(法機)라고 할 수 있는 제자와 법연(法緣)을 맺게 됐다. 수(隋)의 개황(開皇) 12년이었다. 열 네 살짜리 행자(行者)가 승찬 스님을 찾아왔다.

“스승이시여, 자비를 베푸시어 부디 해탈의 법을 일러주소서.”
순간 승찬 스님의 뇌리에는 섬광처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누가 너를 결박했느냐?”
“아무도 저를 결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해탈을 구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금 네 마음은 어떠하냐?” 넌지시 당돌한 사미의 근기를 살피는 질문을 던졌다. 어린 사미도 이에 질세라 받아쳤다.

혜가 스님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마음에서 ‘참된 마음’을 봤고, 승찬 스님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죄에서 일체 ‘분별이 없는 불성’을 봤고, 도신 스님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구속에서 ‘참된 해탈’을 봤다. 이렇듯 애써 구하지 않아도 구족돼 있는 게 바로 불성인 것이다.

이처럼 불성을 발견하면 굳이 죄랄 것이 없으니 속죄할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 분별 없는 불성을 보고 나면 참된 해탈을 얻으니 애써 구원을 얻을 필요도 없다.

<벌레 이야기>를 읽고 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과연 벌레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한 김도섭을 일컫는 것인가? 아니면, 김도섭을 용서하고자 해도 용서할 수 없는 가여운 존재인 아내인가? 아니면, 아이를 잃고 아내마저 잃는 과정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화자인가? 아니면, 아내에게 엄숙한 계율만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김 집사인가?

그러고 보면, 인간과 벌레의 차이는 크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말에 그 해답이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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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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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벌레 이야기
작가
이청준
장르
단편소설
발표
외국문학 1985년 여름호
수록
비화밀교 (나남, 1985)
1. 개요2. 줄거리3. 여담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1. 개요[편집]

이청준의 단편소설. 영화 밀양의 원작이기도 하며, 주영형 유괴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2. 줄거리[편집]

1.
아내는 알암이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악착스럽게 자신을 잘 견뎌나갔다. 그것은 아이가 어쩌면 행여 무사히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과, 녀석에게 마지막 불행한 일이 생기기 전에 어떻게든지 놈을 다시 찾아내고 말겠다는 어미로서의 강인한 의지와 기원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난해 5월 초, 갓 초등학교 4학년을 올라간 아이인 알암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집을 안 거치고 바로 학원으로 간 게 아닐까 싶었지만 오히려 학원 쪽으로부터 알암이가 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는다. 불안한 마음으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어도 알암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학교 쪽이나 친구들 중에서도 알암이의 향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바탕 알암이를 찾기 위한 대대적인 노력이 이뤄진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도 찾기는커녕 단서 하나 잡히지 못한다. 한 달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나 경찰의 수사도 시들해지지만 아내는 아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 악에 받쳐서 아이를 찾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종된 지 두 달도 넘은 7월 22일, 알암이는 끝내 학원 근처의 건물 지하실 바닥에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2.
시체의 모습으로 보아 아이는 유괴되어 피살당한 것이 분명했고, 수사 끝에 주산 학원 원장인 김도섭이란 자가 범행을 저질렀음이 밝혀진다.

변을 당하고 난 뒤 한동안 엄청난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아내는 다행히도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자신을 가다듬게 되는데, 그 계기는 뜻밖에도 이웃인 김 집사 아주머니의 신앙 권유를 받게 되면서였다. 처음 아이가 실종되었을 때 아내는 그를 따라 교회로 가서 제발 아이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하기도 했는데,[1] 아이가 결국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고 범인의 행적도 깜깜무소식일 무렵, 한동안 아내를 찾아오지 않던 김 집사가 다시 찾아와 설득을 시도하자 그동안 넋이 나간 채로 지내던 아내가 그 순간 태도가 바뀌면서 "하느님은 몰라요. 살인귀를 가리켜 보여주지 못하는 하느님, 사랑도 섭리도 다 헛소리예요. 하느님보다 내가 잡을 거예요. 내가 지옥의 불 속까지라도 쫓아가서 그놈의 모가지를 끌고 올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그 이후 범인을 추적하는 데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하게 된다. 신앙을 통해 아내를 바꿔보려던 김 집사의 시도가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아내의 활력을 되찾아준 것이다.

3.
범인 김도섭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가 확실했었고, 아이의 실종 직후 아이를 찾는 일에 앞장서서 나섰을 만큼 교활하고 대담한 인물이었으며, 상당히 치밀한 방식으로 죽은 아이를 숨겨왔지만 집요한 추적과 수사 끝에 결국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자백을 하게 된다. 당국은 범인을 잡아 넘기고 재판에서는 사형이 선고되지만, 그런 걸로 아내의 엄청난 원한이 풀릴 리가 없었다. 자신이 직접 범인에게 그 복수를 행하지 못하게 된 아내는 그 복수심을 여전히 짓씹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내는 김도섭의 사형 집행이 어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치르고 싶어 오히려 사형이 빨리 집행될까봐 걱정하기까지 한다.

그런 와중인 10월경에 김 집사가 다시 아내를 찾아온다. 김 집사는 이제 범인의 죄에 대한 사람의 심판은 끝났으며 이제는 마음을 간추리고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하며, 나아가 되도록 그 범인을 용서하고 동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내는 처음에는 당연히 불같이 화를 냈지만, 아내가 철저하게 복수심에만 의지해 살고 있는 것을 염려한 나까지 거들면서 얼마쯤 지나 마음을 고쳐먹고 김 집사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처음 온전히 아이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만 교회를 다니던 아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참된 신앙심을 품게 되고, 그 전까지 갖고 있던 저주와 원망기가 덜해지게 되었다. 여기에 탄력을 받은 김 집사는 아내에게 범인에 대한 용서를 계속 언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내는 범인 김도섭을 용서하려는 마음까지 가지게 된다. 그해 말의 일이었다.

4.
아내가 범인 김도섭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은 누구보다도 아내 자신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마음속에서 아내 자신이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그 이상은 아내로선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소망을 해서도 안 되었다. 그랬더라면 아내는 적어도 자신의 구원의 길은 얻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내의 마지막 비극을 불렀다. 다름 아니라 아내는 당돌스럽게도 자기 용서의 증거를 원했다. 더욱이 그것을 지금까지의 원망과 복수심의 표적이던 범인을 상대로 구하려 한 것이었다.
마음의 용서를 생각하고 나서 열흘쯤 지난 어느 날, 아내는 내게 교도소로 범인을 찾아가서 직접 자신의 용서를 확인시켜주어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말한다. 나나 김 집사나 좀 지나친 듯싶은 아내의 생각에 불안해하지만, 결국 자리를 마련해보겠다는 김 집사의 말에 내가 덜컥 승인을 해버리면서 오래잖아 면회가 성사되었다. 그리고 이 일은 크나큰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면회를 다녀온 아내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과 상실감에 빠진 채 앓아눕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는 나는 아내에게 이유를 물어보지만 말도 하려 하지 않아 김 집사를 만나 자초지종을 물어보게 되었다. 하지만 짐작과는 달리 오히려 별일이 없었다는 답을 듣게 된다. 김도섭의 태도 역시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포악하고 뻔뻔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아내의 용서를 빌고 죄를 저지른 책벌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도섭은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한 술 더 떠 사후 신장과 눈알을 기증할 약속까지 해두고 있었던 상태였다. 김도섭은 그것으로 주님의 사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고, 따라서 아주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 집사는 이렇게 마음속에 주님을 영접한 김도섭을 만난 아내가 오히려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나도 아내가 왜 그랬는지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유 모르게 막연한 배신감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며칠 뒤 아내의 그 절망감의 원인을 알게 된다. 아내의 믿음을 되돌려놓으려 매일같이 찾아와 설득하는 김 집사에게 아내가 그 이유를 털어놓은 것이다.
"저도 집사님처럼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래 교도소까지 그를 찾아갔구요.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나보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건 제 믿음이 너무 약해서만은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너무 뻔뻔스럽게 느껴져서였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예요.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알암이 엄마, 그 사람은 애 엄마 앞에서 뻔뻔스러워 그런 얼굴을 한 게 아니에요. 알암이 엄마도 들었지 않아요. 그 사람은 이미 영혼 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으로 주님의 사함을 얻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 그토록 마음과 얼굴이 평화스러웠던 거예요."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하지만 김 집사는 그런 아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주님의 용서만을 주장한다. 아내는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용서의 표적을 빼앗겨버리고, 용서를 결심하고 찾아간 사람이 자신에 앞서서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5.
그러나 아내의 절망감과 파탄은 거기서도 아직 다한 것이 아니었다. 보다 더 절망스런 아내의 파탄은, 그렇다고 그녀가 다시 인간의 복수심을 선택할 수도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물론 김 집사의 강압이나 협박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는 이미 스스로 용서를 결심하고 그를 찾아갔을 만큼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은 스스로도 믿음과 사랑의 계율을 익히고 있었다. 그 참뜻과 가치를 깨닫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아내가 그것을 버리는 것은 아내 자신을 버리는 일이었다. 아내는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 속의 '인간'을 부인하고 주님의 '구원'만을 기구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기엔 주님의 뜻이 너무도 먼 곳에 있었고 더욱이 그녀에겐 요령부득의 것이었다.

아내의 심장은 주님의 섭리와 자기 '인간' 사이에서 두 갈래로 무참히 찢겨나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내는 말도 하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지도 않는다. 김 집사는 여전히 아내를 찾아다니고, 나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안타까워만 한다.

그러나 결국 이듬해 김도섭의 사형 집행 소식과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을 라디오 방송으로 들었던 아내는 이틀 뒤 약을 먹고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다.

3. 여담[편집]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밀양 또한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이 보았을 때 특히나 충격이 두 배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문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 소설에서 보이는 단편적인 면에만 심취해 밀양이나 벌레 이야기나 안티 기독교 예술이라고 오독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굉장한 오해이다. 오히려 신학을 제대로 공부했거나 나름대로 교회를 올바르게 다녔다 하는 사람들은 김 집사로 상징되는 신앙인을 가장한 위선자들이 얼마나 사이코패스스러운지를 앞장서서 비난한다. 특히 언제고 하나님을 찾게 될 일이 생길 거라면서 아내를 저주하다시피 하는 김 집사의 행태는 기독교적인 비유로 뱀 같다고 해도 모자라지 않다. 단순히 인간에 대한 고찰을 넘어서, 이 소설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도 절대로 모자란 작품이 아니다. 소설가 이청준은 생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따라서 그가 갖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충실히 반영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주영형 유괴 살인 사건 외에도 모티브가 된 사건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5.18 민주화 운동 이후 벌어진 정치권의 화해 논의이다. 작중에서 아내의 용서 없이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한 범인 김도섭의 묘사 자체가 이를 바탕으로 한 셈. 작가 생전의 인터뷰
[1] 아내는 같은 일을 절을 찾아가서도 한다. 어떤 신앙심 때문에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아이를 찾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그런 일을 한 것이다.
===벌레 이야기 (반양장)  | 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20이청준 (지은이)문학과지성사2013-11-29
392쪽책소개'문학과지성사 이청준 전집' 20권. 20권의 표제작 '벌레 이야기'는 어린 아들이 유괴되어 살해되자 그 어머니가 교회를 찾아가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얻어 붙잡힌 범인을 용서하려 하지만, 이미 사형언도까지 받은 범인이 먼저 신앙적 구원과 사랑 속에 마음이 평화로워져 있음에 절망하여 도리어 자살을 하고 마는 이야기이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하고 전도연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밀양](2007)의 원작소설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1981년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윤상 군 유괴살인사건을 실제 모델로 하고 있다.
이청준은 사랑과 화해라는 정신적 덕목을 종교적 신성성(신/ 믿음)에 빗대어 다루면서도, 한편으로 사회 정화와 국가 질서를 강조하는 신군부 체제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팽배했던 80년 당시의 시대 배경 속에서, 더 큰 범죄의 가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와 피해자를 용서하거나 단죄하고 위로함으로써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 은폐되어버리는 기묘한 담론 질서를 비판하고 있다.
이번 전집에 실린, 1985년부터 1987년 봄 무렵까지 3년여에 걸쳐 발표한 중단편 10편을 통해 작가는, 5공화국의 기묘한 담론 질서와 그 집권 세력인 신군부 체제는 물론이고 1985년 무렵의 끔찍한 모더니티 일반을 겨냥해 비판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하나의 서사 속에 중첩된 주인공의 시간과 작가의 시간을 동시에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차해변 아리랑벌레 이야기불의 여자나들이하는 그림누군들 초장부터 꾼으로 태어나랴흰 철쭉
숨은 손가락흐르는 산심지연(心池硯)
해설/ 끔찍한 모더니티(김남혁)자료/ 텍스트의 변모와 상호 관계(이윤옥)
추천글저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 정희진 (여성학자, 『정희진처럼 읽기』 저자) 극장에서 만났던 나의 화양연화 - 제갈인철 

저자 및 역자소개이청준 (지은이)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40여 년간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춤추는 사제』 『이 제 우리들의 잔을』 『흰옷』 『축제』 『신화를 삼킨 섬』 『신화의 시대』 등이, 소설집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가면의 꿈』 『자서전들 쓰십시다』 『살아 있는 늪』 『비화밀교』 『키 작은 자유인』 『서편제』 『꽃 지고 강물 흘러』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더보기수상 : 2007년 제비꽃서민소설상, 200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8년 김준성문학상(21세기문학상, 이수문학상), 1994년 대산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1985년 대한민국 문학상, 1978년 이상문학상, 1975년 한국일보문학상, 196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68년 동인문학상최근작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새롭게 만나는 우리 명작 한빛문고 18종 세트 - 전18권>,<가해자의 얼굴> … 총 255종 (모두보기)===출판사 제공 책소개비판과 용서가 불가능한 시대 속 실존의 고뇌와 인간적 절망,과거의 재현으로 오늘과 내일을 새롭게 조명하는 문학의 힘
80년 광주의 비극과 87년 6월 혁명 사이에서 모더니티에 대한 두려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새로운 모더니티에 대한 갈망은 이청준 문학의 일관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였다. 이청준은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은 어느 경우나 그 주인공이 뿌리박고 살아온 시대와 사회의 구체적 사실성과 그 소설이 씌어진 시대의 정신풍속이 말해주는 당대성, 바로 그 이중의 뼈대 위에 조건 지어진 삶”이라고 믿었다. 이청준의 문학은 과거를 재현할수록 소설이 씌어지고 있는 당대성을 지니고, 나아가 미래를 새롭게 제시하는 문학적 실천을 띠게 되는 이른바 ‘징후의 문학’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이청준 전집 20권의 표제작 「벌레 이야기」는 어린 아들이 유괴되어 살해되자 그 어머니가 교회를 찾아가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얻어 붙잡힌 범인을 용서하려 하지만, 이미 사형언도까지 받은 범인이 먼저 신앙적 구원과 사랑 속에 마음이 평화로워져 있음에 절망하여 도리어 자살을 하고 마는 이야기이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하고 전도연 송강호가 주연한 영화 「밀양」(2007)의 원작소설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1981년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윤상 군 유괴살인사건을 실제 모델로 하고 있다. 이청준은 사랑과 화해라는 정신적 덕목을 종교적 신성성(신/ 믿음)에 빗대어 다루면서도, 한편으로 사회 정화와 국가 질서를 강조하는 신군부 체제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팽배했던 80년 당시의 시대 배경 속에서, 더 큰 범죄의 가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와 피해자를 용서하거나 단죄하고 위로함으로써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 은폐되어버리는 기묘한 담론 질서를 비판하고 있다. 자율을 통한 기묘한 통제와 비판을 통한 이상한 억압 속에 처해 있던 1985년 무렵의 상황에서 질식해 죽어갔던 자는 「벌레 이야기」의 알암이 엄마나 진실을 발설할수록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숨은 손가락」의 나동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작가의 능숙한 알레고리 작법 안에서, 85년 당시 가장 비참한 현실에 놓여 있던 농축우 문제를 우의적으로 발설하는 「누군들 초장부터 꾼으로 태어나랴」의 희극적 인물인 공만석이나 두호마을의 이응주 역시 마찬가지이다.이번 전집에 실린, 1985년부터 1987년 봄 무렵까지 3년여에 걸쳐 발표한 중단편 10편을 통해 작가는, 5공화국의 기묘한 담론 질서와 그 집권 세력인 신군부 체제는 물론이고 1985년 무렵의 끔찍한 모더니티 일반을 겨냥해 비판하고 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하나의 서사 속에 중첩된 주인공의 시간과 작가의 시간을 동시에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접기===공감순      ˝아내의 배신감은 너무도 분명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었다.˝ 정의와 용서라는 인간의 보편가치에 대해 신이 아닌 인간이 내릴 수 밖에 없는 결론. 아이린 2017-11-16 공감 (2) 댓글 (0)Thanks to 공감     80년대 소설인데도, 벌써 바래진 느낌 madwife 2019-10-14 공감 (1) 댓글 (0)====마이리뷰    [마이리뷰] 벌레 이야기 (반양장) 새창으로 보기점수 : 7 / 10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는 영화 <밀양>의 원작이다. 종교나 절대주의를 비판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인간성을 이야기한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의 인간 본성 말고,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분노와 원망 혹은 저주에 가까운 부정적인 감정도 무척이나 `인간적인` 거니까. 섭리라는 거대담론이 인간적인 감정을 억압할 때, 그 속에서 답답해하고 몸부림치고 종국엔 ˝질식해 죽어가는 인간˝을 그려낸다. 섬세한 사람은 이 작품에서 5월의 광주와 80년대 신군부 체제를 읽어내기도 한다는데 깜냥이 모자란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다.책에는 <벌레 이야기> 외에도 여러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흰 철쭉>과 <숨은 손가락>이 못지 않게 인상적이었다. <흰 철쭉>은 가슴 아픈 분단 이야기를 몹시 서정적으로 풀어내었고, <숨은 손가락>은 흡인력이 대단했다. <불의 여자>나 <섬>처럼 분량이 10쪽 안팎인 너무 짧은 소설은 사실 이해가 잘 안 됐다.설명하기 힘든 인간 내면에 천착했다. 또 (내용과는 별개로) 자연과 감정에 대한 묘사도 뛰어났다.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7점(읽으면 좋은 양서)이다.- 접기교하 2016-08-21 공감(4) 댓글(0)===이청준, <벌레 이야기> : 너무나도 인간적인 절망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가야 하고 사람으로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람에겐 사람으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p66)  "김 집사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 원망스럽도록 하느님의 역사만을 고집했다." (p75)  "아내는 마침내 마지막 절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김 집사는 이제 그 가엾은 아내 속에서 질식해 죽어가는 인간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의 무참스런 파탄 앞에 끝끝내 주님의 엄숙한 계율만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차라리 주님의 대리자처럼 아내를 강압했다." (p76)

  "아내의 배신감은 너무도 분명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었다." (p77) 

_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영화 밀양의 원작이기도 한 단편소설. 사랑과 화해,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용서를 다루는 이야기다.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 어렵게 찾아간 교도소. 유괴범은 그녀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나는 이곳에서 하느님을 만나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그녀는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받은 이 유괴범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지극히 인간답게 절망한다. 
누구도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는 이 현실 앞에, 사람의 사람됨보다 하늘의 계율만 앞세우는 김 집사란 인물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_나는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실 때 완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있었음을. 예수는  어느 한 쪽도 불완전하지 않은, 완벽한 '신인'이었다. 신성과 인성, 즉 완벽한 신이자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이적과 구원에 초점을 맞춘 신성에 관한 이야기를 즐겨 한다. 물이 포도주가 된 이야기,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인 오병이어 이야기, 눈 먼 사람을 고친 이야기, 무엇보다 죄로부터의 구원-.
그러나 그의 완벽히 인간적인 모습은 사람들 이야기 속에 쉽사리 나타나질 않는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무력하고,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패배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걸인처럼 잠잘 곳 없이 돌아다니고, 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동산에서 울고,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한밤중에 끌려가고, 채찍으로 온 몸을 맞으며 모욕 당하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고-. 
마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거나 그보다 못한 사람은 쉽게 무시하면서,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좋아하고, 선망하고, 심지어 동경하는 것같은 현상. 
한마디로 말해 기왕이면 내가 믿는 신이 멋있었으면 좋겠는거다. 내가 이토록 현실에서 무력하고 찌질한 모습이니까 당신만은 그저 그렇게 영웅처럼 남아달라고, 전지전능한 그 모습으로 내 비천한 생활에도 기적을 일으켜달라고, 복을 내려 달라고 말이다. 

_사람이 사람됨을 잊어버리면 사람이 아닌 무슨 존재가 되는가. 그 분도 말씀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다고. 그 분은 사람이 도구가 되는 걸 원하지 않으셨다. 그 분에겐 늘 사람이 우선이었다. 
조금 더 솔직해도 된다. 조금 더 인간다워져도 된다. 조금 더 자유로워도 된다. 
사람이 신이 된양 항상 거룩한 척, 모든 것을 용서한 척, 이 세상 어떤 것도 포용할 수 있는척 하지 말자.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고, 창조주가 아닌 창조물이고, 영원을 알 수 없어 오직 현재만을 살아가는 유한한 사람이기에. 그리고 이러한 사람됨을 인정할때라야 그 분의 구원이 더 간절히 필요해지기 때문에. 
신은 또다른 신을 구하러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신은 인간을 구하러 왔다. 
- 접기아이린 2017-11-16 공감(2) 댓글(0)===
당신들의 천국  |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이청준 (지은이)문학과지성사1996-11-05전자책 9,000원 
459쪽책소개'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권. 이청준의 장편소설. 풍광 화려한 소록도에서 끈질기게 투병하고 있는 주민들의 삶을 통해 우리 저마다가 갖고 있는 유토피아에의 열정과 그것을 배반하는 메커니즘과의 갈등을 예리하게 해부하여 '자유와 사랑의 실천적 화해'를 제시한다.목차1. 사자(死者)의 섬2. 낙원(樂園)과 동상(銅像)3. 출소록기(出小鹿記)4. 배반(背叛) 15. 배반(背叛) 26. 천국(天國)의 울타리
책속에서하지만 주정수 시대에도 명분이나 동기에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게다가 명분이라는 건 언제나 힘있는 자의 차지였다.주정수는 최고 최선의 명분을 그 혼자 독차지해버리고 있었다. 그 주정수 명분 앞에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을 주장할 자기의 명분을 따로 지닐 수 없었다. - 베로니카소록도의 환자들에겐 낙원이 없었다.환자들에게 낙원이 없는 한 소록도엔 낙원이 없었다.그들의 이기적인 소문 속에서만 소록도의 천국은 존재하고 있었다. - 베로니카내일의 꿈을 오늘 미리 가불해주고,그 가상의 현실을 당징 오늘의 그것으로 착각하고 즐기게 하여 진짜 현실의 갈등을 잠재어버리는 말의 요술은 이 섬을 다스려온 사람들의 해묵은 수법이기능 하지만, 그러나 오늘의 삶이라는 것이 늘 힘겹고 짜증나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지극히 손쉽고 효과적인 지배술의 하나였습니다. - 베로니카˝당신은 앞으로 이 섬과 섬사람들을 위해 당신이 시작하고자 하는 일에 일신을 위해서는 물 한 모금 사사로이 취하지 않을 것임을 자비하신 주님과 여기 모인 증인들 앞에서 서약하시겠습니까?˝ -p184, <당신들의 천국> - Hyunjung KimP. 40˝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섬을 나가래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환자들입니다. 이자들은 병을 얻어 바깥세상으로부터 이 섬으로쫓겨 들어왔고, 섬으로 들어온 다음에도 그 바깥세상에 대한 원망과두려움을 끝없이 길러온 그런 환자들이란 말씀입니다. 하지만 모험을 겪으며 섬을 빠져나가려는 친구들은 이미 그런 환자는 아닙니다.그들은... 더보기 - 조지스마일리추천글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책은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록도에 새로 부임한 원장과 그를 맞는 보건과장 사이에 벌어지는 일종의 설전이다. 한센병 환자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곧 이 이야기가 당신과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겨냥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당신들이 희구하는 천국은, 과연 천국인가? 이 지상에서 애초에 천국이 가능한가? 선의의 열정을 지닌 행동파의 목소리와, 인간의 본성과 역사에 대해 끝없이 회의 섞인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 사이의 굵직한 긴장이 이 소설의 날실이라면, 다양한 주변 인물들의 인생행로와 소록도의 과거와 현재를 훑으며 일어나는 사건들이 씨실이 되어 팽팽한 그물을 짜낸다. 독자를 사로잡아 풀어주지 않는 그물을. - 김서정 (KBBY 회장, 동화작가, 평론가) 포기할 수 없는, 타자를 위한 사랑 - 남송우 (문학평론가, 부경대 교수) 천국이라는 이상의 기만과 사랑의 이중성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이 잃어버린 것 - 김형중 (문학평론가, 조선대 국문과 교수) 천국의 성분은 무엇인가 - 고영직 (문학평론가) 선의의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박홍순 (작가, <미술관 옆 인문학>, <저는 인문학이 처음인데요>등.) 지금, 우리들의 낙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 문재원 (부산대.현대소설국문학)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장정일 (소설가, 시인)  - <장정일의 독서일기 2> (범우사 刊)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 2010년 대학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저자 및 역자소개이청준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40여 년간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 『낮은 데로 임하소서』 『씌어지지 않은 자서전』 『춤추는 사제』 『이 제 우리들의 잔을』 『흰옷』 『축제』 『신화를 삼킨 섬』 『신화의 시대』 등이, 소설집 『별을 보여드립니다』 『소문의 벽』 『가면의 꿈』 『자서전들 쓰십시다』 『살아 있는 늪』 『비화밀교』 『키 작은 자유인』 『서편제』 『꽃 지고 강물 흘러』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더보기수상 : 2007년 제비꽃서민소설상, 2004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8년 김준성문학상(21세기문학상, 이수문학상), 1994년 대산문학상, 1990년 이산문학상, 1985년 대한민국 문학상, 1978년 이상문학상, 1975년 한국일보문학상, 196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68년 동인문학상최근작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새롭게 만나는 우리 명작 한빛문고 18종 세트 - 전18권>,<가해자의 얼굴> … 총 255종 (모두보기)이청준(지은이)의 말이 책의 이야기들은 많은 부분을 실재의 섬 소록도와 소록도의 일에 관계된 분들에게 취재하였다. 그러나 『당신들의 천국』은 물론 한편의 소설 작품이며, 소설 속의 이야기들 역시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섬의 실제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설 자체의 법칙과 질서에 따라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이야기와 섬의 실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인명이나 지명·사건 들이 더러는 사실과 유사하게 그려지고 있는 대목도 있으나, 그 역시 소설의 의도에 알맞게 첨삭·변경·재구성된 소설 속의 일부분일 뿐 섬의 실제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나는 지금도 소록도와 소록도 사람들을 위해 성자적인 노력을 바치고 있는 분들의 값진 기여를 알고 있으며, 아직도 그곳에서 불굴의 투병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수많은 원생들의 처지를 알고 있다. 나는 나의 이번 소설이 섬을 위한 그분들의 높은 뜻과 노력에 그리고 원생들의 줄기찬 투병 생활에 어떤 위로와 보탬이 되지 못할망정 행여 다른 바람직스럽지 못한 누를 끼치게 되지나 않을지가 심히 두렵다. 소설의 이야기와 섬의 실제는 매우 다른 것이라는 그 지극히도 당연한 창작 논리를 여기서 굳이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그 점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내기까지 은혜를 입은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연재의 기회를 주신 『신동아』 여러분과 취재를 도와주신 조창원(趙昌源) 전원장님, 그리고 조선일보의 이규태님-특히 한 미숙한 문학 청년에게 제법 야심적인 창작 의욕의 발단을 마련해주었을 뿐 아니라, 소설 곳곳에서 그의 빼어난 취재의 눈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규태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비길 데 없는 자랑이요 행운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1976. 4. 27이청준(지은이)의 말졸작 『당신들의 천국』은 1974년과 75년 간에 씌어졌고, 그 이듬해인 76년 5월에 문학과지성사에 의해 단행본 초간이 이루어졌다. 지금부터 불과 8, 9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그 짧은 세월 간에 우리말이나 문장 감각, 나아가서는 소설 자체가 많은 변화와 발전을 겪어온 것 같아 보인다. 당시로선 으레 당연시돼오던 종조 조판을 횡조 조판으로 바꿔야 하게 된 저간의 사정이 그 증거의 하나려니와, 차제에 누권(陋卷)을 일별해보니 저자 자신에게도 낡고 불만스러운 대목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렇다고 작품을 요즘 감각과 욕심대로 맘껏 수정을 가하거나 다시 쓸 수는 없는 일, 어법과 어순의 변화에 따른 사소한 어미나 토씨, 혹은 부적절한 접속사와 부사 정도만을 최소한도로 수정·첨삭·변치(變置)하였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이야기의 진행상 명백한 비약과 실수로 여겨지는 두세 곳 오문들을 새로운 문장으로 바꿔 연결하였다. 발표된 작품은 낡아가는 대로 그것대로의 나이를 먹어가게 해두는 것이 옳을 듯싶어서다.
하기야 그리 변변치도 못한 작품,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면 이쯤에서 그만 절판을 해버림도 무방할는지 모른다. 한데도 굳이 이것을 다시 횡조 조판으로 재발간함에는 초간 발행 때와 발행인의 자리를 바꿔 앉은 김병익 외형(畏兄)의 넓은 아량과 각별한 배려의 덕(초간 발행 때도 지리멸렬한 연재본을 모아다 다시 손질하여 책을 묶게 한 것 역시 그의 각별한 배려에서였지만)이 크거니와 작자인 나로서도 여기에 조그만 구실 한 가지는 마련해두는 것이 도리인 듯싶어 뵌다. 다름아니라 그것은 이 소설의 제목으로 인해서다. 굳이 사족을 더할 바가 없겠지만, 소설의 제목 ‘당신들의 천국’은 당시 우리의 묵시적 현실 상황과 인간의 기본적 존재 조건들에 상도한 역설적 우의성(寓意性)에 근거한 말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어느 땐가 그것이 ‘우리들의 천국’으로 바뀌어 불릴 때가 오기를 소망했고, 필경은 그때가 오게 될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가 오게 되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사시적(斜視的) 표현이나 그 책의 존재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제 우리에겐 한 작은 섬의 이름으로 대신해 불렀던 그 ‘당신들의 천국’을 ‘우리들의 천국’으로 거침없이 행복하게 바꿔 불러도 좋은 때가 온 것인가. 대답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밝혀둘 것은 다만 발행인 김병익형과 나는 대답이 한곳에서 일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횡조 조판으로 ‘천국’을 다시 간행하기로 한 것-다행스러워할 일이 못 될지도 모르지만-그것이 우리들의 일치된 대답이자, 횡간본 제작에 대한 저자로서의 구차스런 변명이기도 한 것이다.
- 1984년 9월Editor Blog대입 논술제시문 어떤 책 많이 인용했나 l 2006-03-15가 2000년 이후 주요 대학의 논술고사에서 제시문으로 가장 많이 인용된 것으로 분석됐습니다.자주 등장하는 작가로는 제러미 리프킨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꼽혔습니다. * 동아일보 기사 보기===평점 분포    9.0 ===    강요된 천국은 지옥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일깨워줌.  구매엘-리-엇-매-스-니- 2009-08-21 공감 (2) 댓글 (0)--제목의 의미를 곱씹으며 읽어보세요~^^  구매lII윤슬lII 2012-03-13 공감 (1) 댓글 (0)---     명불허전. 한국문학의 위대한 금자탑.  구매赤赤 2012-02-08 공감 (0) 댓글 (0)---    그가 말하는 이상사회의 허실..  구매로시난테 2011-09-03 공감 (0) 댓글 (0)Thanks to 공감더보기마이리뷰구매자 (13)전체 (47)리뷰쓰기공감순      [마이리뷰] 당신들의 천국 새창으로 보기 구매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게 된다. 156
1이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 날때까지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동상이다. 주정수 원장은 자신이 원생들을 위해 사명을 다 하였다는 증거로 동상을 세우도록 암묵적 동의를 하였다. 주원장이 원생들의 낙원을 만들겠다고 한 일들은 동상을 세우기 위한 핑계일 뿐이고 원생들을 착취한 결과이다. 반면에 조백헌 원장은 원생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도록 노력한다. 그 과정에 축구 우승이 있었고, 간척 사업이 있었다. 이상욱은 이러한 결과가 결국 원생들이 원장의 동상을 세우게 만들고 원장은 전임들과 같은 동상을 숭배하는 결과를 만들것이라 우려한다.   섬을 천국으로 만들자는 밑그림과 명분들은 지배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원생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해 행함이 없었다.  스스로 천국을 만들기 위한 명분을 가지고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피 지배자 모두가 자신의 동상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얻어진 동상이 불신과 배신을 하지 않는 자긍심이 된다.  동상이란 스스로 살아 있음을, 내가  스스로 존엄함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마음이 아닌가 한다.
2  이상욱의 끝없는 불신을 대하면 ˝도데체 어쩌란 말이야!˝ 라는 외침이 튀어 나온다. 그의 사고를 쫒아가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지배가가 피 지배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면 그것은 동상을 세우는기 위한 거짓된 행위이기 때문이란다.  이제 이 생각에는 어느정도 동의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동상을 세우려 한다는 욕을 먹더라도 원생들의 삶이 나아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황폐화 시키는 일이 아니라면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사랑은 빼앗음이 아니라 베푸는 길이라서 이긴자와 진 자가 없이 모두 함께 이기는 길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란 실상은 그것의 설계나 내용이 얼마나 행복스러워 보이느냐보다는 그것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택 행위와 내일의 변화에 대한 희망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느냐에 더욱 큰 뜻이 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381

- 접기에크메아 2016-02-26 공감(4) 댓글(0)Thanks to 공감     당신들의 천국에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새창으로 보기 구매당신들의 천국에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미하일 엔데가 쓴 <벌거벗은 코뿔소>에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다 실패하고 마는 코뿔소의 이야기가 나온다. 난폭하면서도 어리석은 코뿔소 코로바다는 숲속의 동물들 위에 군림하려다가, 결국 그들을 모두 내어쫓은 후에 숲속의 왕국을 세운다. 그는 이후 하찮은 새 한 마리의 속임수에 넘어가 스스로 동상이 되어버린다. 자신이 숲속의 왕임을 뽐내기 위해 동상을 만들고자 했지만, 이를 만들어줄 동물들이 없자 자신이 직접 동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꼼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어야만 하는 처지에 빠진다. 결국 그의 동상에 대한 집착이 그를 파멸로 이끌어버린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벌거벗은 코뿔소>가 말하는 동상은 바로 권력을 상징한다. 권력자는 그 본질상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각 개인들 위에 군림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유혹은 특히 정당한 절차를 따르지 않은 부당한 권력일수록 더욱 심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동상을 유형 내지 무형의 형태로 세우고자 애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상은 어느덧 피권력자인 '민(民)'이 이를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민(民)'은 이렇게 스스로 우상화한 권력이 의도하는 동원 체제에 어느새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권력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전제적 통치를 강화한다. 이를 통해 '민(民)'을 소외시키고 억압과 고통에 빠뜨린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1970, 80년대 독재 정권 시절에는 관공서나 학교마다 반드시 대통령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어야 했다. 또한 매일 오후 다섯 시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는 국기 하강식을 지켜보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 권력은 동상 뒷편에서 이를 반대하는 '민(民)'의 목소리에 대해 수많은 탄압을 저질렀고, 공업화라는 이름 아래 엄청난 '민(民)'의 노동을 착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 당시 눈물로 그를 떠나보냈다. 그는 민주화 과정이 오래된 지금도 여전히 제일 존경하는 대통령 1위이다. 경제가 조금이라도 어렵다 싶으면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 그립다고 말하는 우리 사회의 여론을 볼 때, 피권력자가 내면화한 동상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당신들의 천국>은 이와 같은 동상을 둘러싼 권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나환자들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소록도라는 섬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여느 휴먼 감동 스토리와 달리, 이 작품은 인간 사회 속에서 첨예하게 드러나는 권력의 문제를, 새로 부임한 병원장과 나환자들간의 갈등을 통해 치열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는 나환자들과 함께 아름다운 천국을 만들겠다는 꿈으로 자애로운 '통치'를 하고자 하는 원장과 이를 끊임없이 불신하고 갈등하는 원생들의 대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합법적 권력이 만드는 동상이 어떻게 '당신들의 천국'을 만드는지, 그리고 이를 '우리들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진정으로 바람직한 권력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권력이 세운 동상과 배반, 그로 인한 불신당신들의 천국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 새로운 군인 출신의 조백헌 원장이 소록도에 부임했을 당시, 그가 본 섬 원생들의 모습은 무기력과 불신, 침묵 그 자체였다. 그가 부임하자마자 터진 섬 탈출 사고의 원인을 추궁하는 과정에 섬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는 지독히 비협조적이었고 냉소적이었다. 그는 심상치않은 섬 분위기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마을 전역에 건의함을 설치하지만, 이 역시 섬사람들의 비협조로 실패하고 만다. 이후 부임 연설을 통해 자신의 포부와 약속을 말하는 원장 앞에서도 그들의 무반응과 침묵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원장을 보좌하는 보건과장 이상욱은 이를 '죽은 자의 섬'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문제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원장은 이를 신뢰의 문제로 바라본다. 그는 섬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여기저기 뿌리깊은 불신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하나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예컨대, 그는 '나병은 낫는다. 나병은 유전하지 않는다.'는 구호판을 마을 전역에 설치토록 하면서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자 시도한다. 병원 종사자들의 대환자 시료행위도 개선하여, 일체의 구분짓기를 금지시켰다. 또한 병사지대의 환경을 개선하여 직원지대와의 경계를 가르던 철조망도 철거하고, 청결한 환경을 위해 노력하였다. 더 나아가 미감아 아동과 직원 지대 아이들과의 공학을 단행하는 획기적 조치까지 내어놓았다. 그러나 원장의 이러한 노력은 쉽게 성공하지 못한다. 원생들의 냉소와 불신은 여전하다. 원장은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 원생들의 대표를 모아 장로회를 조직하였지만, 불신이 해소될 기미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따로 존재하는가? 원장과 원생간의 신뢰를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뜨린 것은 무엇 때문일까? 원장은 이때 보건과장인 상욱을 통해 '동상과 배신'에 대한 놀라우리만치 지독한 과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은 바로 주성수 원장의 통치 기간의 이야기였다. 일제 시절 당시 부임한 주원장은 부임 연설을 통해 낙원에 대해 놀랍고도 감동적인 약속을 보여준다. 섬을 낙토로 만들어주겠다는 그의 약속에 감화된 원생들은 시설 확장 공사에 자발적인 참여를 보인다. 고된 노역으로 부상자가 속출해도 모두가 기꺼운 마음으로 주원장의 약속에 헌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2차 시설 확장 공사가 무리하게 진행되면서, 원생들의 자발성을 꺾어버리는 여러 조치들이 행해진다. 우선 원생들의 노력 봉사에 의해 경비가 충당되기 시작했다. 자발적 노역 참가가 시들해질 때 즈음부터는 노골적이고 가혹한 강제노역이 동원되었다. 고된 노역으로 인해 대다수 원생들의 병세가 악화되어도 식량배급 및 치료약, 노임은 점차 줄어들었다. 작업에 비협조적이거나 능률적이지 못한 원생들에 대한 폭행은 일상화되어 있었다. 이렇게 원생들의 불만이 폭발할 즈음에 주원장의 동상은 건립되었고, 주원장은 어느 동상 참배일에 분노한 원생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원장의 사례는 합법적 권력이 배반에 빠질 위험과 그 폐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음에 주원장이 보여준 모습은 동상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열정 그 자체였다. 나환자들의 천국을 만들겠다는 그의 진정성이 원생들의 희망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그만큼 공사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좀더 크고 화려한 낙원을 꿈꾸었고,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는 위대한 원장이 되고 싶어하였다. 즉 자신의 동상을 스스로의 내면 속에 세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합법적 권력의 배신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평의회라는 겉으로 보기에 민주적인 자치 조직을 만들었지만, 사실상 이는 정당성 뒤에 숨어 효율적인 통치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관단이라는 집행부를 만들어 노골적인 강제 노역과 탄압을 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수많은 새로운 시설들은 어느덧 '우리들의 천국'이 아니었다. 바로 '당신들의 천국'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러한 배신, 즉 합법적 권력의 배신에 피권력자가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평의회는 그 속성 상 권력자의 통치 원칙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치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평의회는 주원장의 강압적인 노역과 규제 앞에서 저항과 투항 사이에 선택을 강요받았을 것이고, 결국 투항하였다. 평의회가 투항한 이후로 그들이 보여준 권력에의 굴종은 그 도를 넘어섰다. 예컨대 그들은 같은 나환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강제 노역의 끄나풀 역할을 자임했고, 급기야 동상 건립을 자발적으로 발기하기에 이른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치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자에 투항하여 피권력자를 다스리는, 소위 '배반'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합법적 권력의 극적인 배반은 <동물 농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존스 농장의 동물들은 지도자격인 돼지의 유언에 따라 반란을 일으키고 농장주를 쫓아내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열심히 노동에 임한다. 하지만 그들은 최고 지도자인 나폴레옹과 지도부인 돼지들로부터 속임수와 배신을 당하면서, 독재체제의 노예가 된다. 동물들은 끊임없이 노동을 착취당하면서도 특권을 누리는 그들의 여론조작, 즉 동상 세우기(우상화) 작업에 속아 넘어간다. 이처럼 독재와 혁명의 역사는 합법적 권력의 배반이 권력자의 욕망에 따라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합법적 권력, 또 하나의 배반당신들의 천국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2) 하지만 '동상과 배신'에 얽힌 이와 같은 상욱의 해석과 경고를 듣고서도, 조백헌 원장은 선한 통치와 '우리들의 천국'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은 주정수 원장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동상을 결코 세우지도 않을 것이며, 오로지 섬 사람들의 삶의 여건을 개선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리라.'라고 스스로 굳게 다짐한다. 그는 섬 안에 나환자를 팀원으로 하는 축구 모임을 결성하고, 이를 통해 소록도 내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축구팀이 연이어 도대항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신명에 저도 모르게 빠져든다. 조원장은 축구 활동을 통해 원생들의 신명과 단결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 후, 섬 사람들을 설득해 오마도 앞바다를 메워 농토를 만드는 간척사업을 시작한다. 그는 과거에 겪은 '권력의 배반'이라는 뼈저린 기억을 품고 있는 원생들의 불신을 불식시키고자 장로회를 설득하였고, 결국 그들과 함께 '배반과 의심을 상호 신뢰로 바꾸'기 위한 선서식을 갖는다. 이 선서식은 서로 짙은 교감 속에서 원장과 원생 모두의 공동 참여로 이뤄진다. 이후부터 오마도 간척사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주정수 원장 때와 같이 원생들의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와 헌신이 보태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원장의 시도는 과연 과거 주정수 원장의 경험처럼 '동상과 배신'으로 귀결되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신뢰를 통한 창조의 모범'으로 귀결되었을까. 처음에는 그리 될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신명나게 작업에 임했고, 사람들이 서서히 지칠 때쯤 다행히도 제 1 방조제 둑이 물 위로 솟아 올랐고, 그 감격이 채 가시지도 전에 제 2, 3 방조제 돌둑까지 쌓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힘들게 작업한 모든 것들이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원생들의 절망은 그 도를 넘어 원장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채토장 붕괴로 인한 추가 사망사고가 발생하자, 원생들은 원장을 죽이자며 봉기를 일으킨다. 비록 원생들이 다시금 원장과 신뢰의 끈을 유지하는 선에서 매듭이 지어졌지만, 이 사건은 '동상과 배신'에 대한 권력자와 피권력자간의 불신은 언제든지 모습을 달리하며 발생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원생들은 공사의 실패가 원장의 무모한 시도, 다시 말해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원장의 과욕 때문에 생긴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에 강제 동원된 것으로 생각해 원장의 시도를 '합법적 권력의 배반'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한편 원장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은 채, 선서식에서 그들 자신도 함께 한 서약을 어기는 원생들의 모습에 배신감을 느낀다. 이러한 권력자와 피권력자의 불안정한 신뢰의 끈을 유지하는 해답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그 답을 곧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어쨌든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으나, 원장은 곧 원생들과의 허약한 신뢰를 또 다시 확인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공사가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도에서 공사진척도를 파악하고자 공사 실적 평가반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말이 좋아 작업 감사지, 사실상 이를 핑계로 간척 사업을 섬 사람들로부터 빼앗아가려는 시도였다. 게다가 도에서는 원장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도록 원장에 대한 전임 발령을 낸 것이다. 원장은 이를 장로회에 알리고 전임 발령 전에 절강제를 잡는 것으로 하여 제방 공사의 마지막을 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웠다. 원생들도 이에 적극 화답하여 작업열을 불태웠고, 동시에 원장의 전임을 취소해달라는 청원 서명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뒤늦게 불붙은 공사의 열기는 그동안 원장을 보좌해왔던 보건과장 이상욱의 섬 탈출이라는 엉뚱한 사건으로 인해 결국 흐지부지되고 만다. 상욱은 원장이 원생들의 전임발령취소 청원서명운동을 막아달라는 것과 절강제와 상관없이 섬을 떠나달라는 것을 요구한다. 원장이 이를 거부하자, 그는 원장을 압박하기 위해 섬을 탈출한다. 이에 원생들은 상욱의 탈출을 힘든 시기를 피해 섬을 빠져나간 건강인의 도피로 여기고, 더 이상 공사에 열심을 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공사 실적 평가반이 내어놓은 결과가 형편없는 것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원생들은 더 이상 간척사업을 빼앗아가려는 육지 사람들의 악의에 맞설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원장은 원생의 침묵과 무반응을 하나의 배반으로 여기고 허망한 마음으로 섬을 떠나게 된다. 이처럼 조백헌 원장의 새로운 시도는 실패했다. 그는 이전 주성수 원장과 달리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는 대신에 자애로운 통치로 섬을 살기 좋은 곳으로 건설하고자 헌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패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이를 보건과장으로서 원장을 보좌하다가 섬을 탈출한 상욱의 관점을 통해 전개한다. 상욱은 더이상 조원장이 자신의 동상을 세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지는 않는다. 물론 처음에는 이를 의심했다. 만일 낙토의 건설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는 그가 더 나아가 동상을 세우려는 욕심까지 갖고 있다면, 이는 분명히 이전의 주성수 원장과 같은 배반으로 귀결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원장은 그러한 동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상욱은 이를 신뢰한다. 하지만 상욱은 절강제와 원장의 전임발령을 앞두고 원생들이 원장에게 보이는 절대적 신뢰와 추종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또 하나의 '배반'이라고 단정한다. 즉, 피지배자가 자발적으로 권력자의 동상을 세움으로써 권력자의 동상을 내면화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참여하기보다는 권력자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추종자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원장님의 진정 어린 동기에도 불구하고, 제가 걱정하는 것은 원장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 천국의 진실입니다. 오늘의 현실이 아무리 만족스럽고 행복한 것이라 하더라도 선택과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채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천국이라면 이는 지옥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섬 위에 꾸미고 계신 원장님의 천국은 더 이상 원생들의 천국이 아니라 어쩌면 원장님 한 분만의 천국일 수 있습니다.(중략)원생들은 원장님의 소원대로 참으로 환자다운 환자가 되어갔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함부로 섬을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원장님이 그들을 협박하는 대신에 환자다운 긍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철조망을 쳐놓고 겁을 주는 대신에 원생들 스스로 철조망을 높여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천국은 사실상 인간의 존엄을 잃어버린 채, 인간의 천국이 아닌 문둥이의 천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중략)전 결국 원장님과 원생들의 관계에서, 선의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들 사이의 대등한 상호 지배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보는 대신에, 한 지배자가 어떤 불변의 절대상황 속에 갇힌 다수의 피지배자 집단을 손쉽게 저항없는 조작을 행하는 모습을 보아온 셈입니다. 원장님께서 진정 '우리들의 천국'을 꿈꾸신다면, 지금 섬을 나가주십시오. 이 섬의 진정한 주인이어야 할 저들에게도 스스로 자기들을 시험해볼 기회를 주십시오." 상욱이 원장에게 보낸 이 통렬한 공박에는 선의의 권력이 그 선한 동기와 관계없이 피지배자들을 소외시켜 엉뚱하게도 '당신들의 천국'을 만들어버리는 메커니즘이 담겨있다. 이를 '합법적 권력의 배반의 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상의 눈물>이라는 작품을 보면, 합법적이고 선의를 가진 교사(지배자)가 반장과 공모해 여러가지 이미지 조작과 속임수를 저지른다. 그들은 폭력을 저지르는 문제 학생을 제압하기 위해 시험 부정행위를 조작하는가 하면, 거짓으로 미담 사례를 만들어 영화화까지 시도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교사는 문제 학생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고, 더 나아가 반 학생들(피지배자)로 하여금 교사와 반장를 추종하고 그들의 통치에 순응하게끔 만들어버린다. 마지막에 문제 학생은 가출하면서 '무서워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말을 남긴다. 이처럼 합법적 권력이 그 동기의 선악과 관계없이 피지배자를 소외시키는 현상은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다. (역사 속에서의 실제 사례) 그리하여 상욱은 원생들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들의 천국'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자유'의 정신과 아울러 '참여와 자치'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통치 구조를 제안하고 있다. 즉, 통치자로서의 원장의 동상이 각 원생들의 주체적인 사고와 선택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자신들이 직접 자신들의 천국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 원장에게 섬을 떠나라고 촉구하였고, 이를 거절한 원장을 압박하기 위해 섬을 탈출한 것이다. 자유와 저항을 뛰어넘는 창조의 힘, 참여와 자치에 기반한 통합과 신뢰우리들의 천국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그러나 작가는 '자유와 저항'의 정신만으로는 새로운 가치, 즉 '우리들의 천국'을 창조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원장에게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주었던 장로회 황희백 장로와 원장과의 대화를 통해, '사랑'의 정신을 강조한다. 먼저 황희백 장로의 말을 보자. "이 섬에선 아닌게 아니라 자유로밖엔 행할 수 없었고 자유로밖엔 행해온 바가 없었거든. 하지만, 자유라는 게 말처럼 그렇게 되어본 적이 있었나. 언제나 아옹다옹 싸움질만 되풀이되어왔지. 자유라는 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우리 문둥이들한테 갖다바쳐주는 것이 아닌 바에야, 그건 제 힘으로 빼앗아 가져야 하는 거고 그러다보니 싸움과 의심, 원망과 미움을 익히게 된 거지. 따라서 사람들은 오로지 자유로만 행하고 싶어했고 또 그리 행할 줄은 알았어도 남을 용서하고 화합할 줄은 몰랐던 게야. 원장이 문둥이들을 위해 아무리 피땀을 흘려줘도 고마워하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하고 미워했던 것이 바로 우리의 허물이야.(중략)이 섬에서 무언가를 행하고 이뤄야 할 도구는 바로 사랑이어야겠지. 자유라는 건 싸워 빼앗는 길이 되어 이긴 자와 진 자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빼앗음이 아니라 베푸는 길이라서 모두 함께 이기는 길이거든. 하지만 자유로 행하는 것조차 단념하자는 소리는 아냐. 다만 자유가 사랑으로 행해지고 사랑이 자유로 행해지되, 무엇보다 소중한 사랑으로 행해나가자는 말이지.(중략)지금 와서 보면 원장이 이 섬에서 행해온 것은 모두가 사랑으로 해서였던 게란 말야. 그 원장을, 원장과 함께 알량한 자유 때문에 사랑으로 행할 수 없었던 문둥이들이 못났던 거네. 그렇다고 원장이 그동안 해온 일이 모두 허사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원장이 황량한 문둥이들의 가슴 속에 제법 훈훈한 사랑을 보여주려 했거든. 그건 아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랫동안 이 곳에 남아 있게 될 사랑의 동상이 될 걸세." 황장로는 '자유'와 '저항'이 결과적으로 불신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자유'와 '저항'은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 자신의 동상을 강요할 때, 권력자의 배반에 대항하는 피지배자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피지배자들이 오로지 '자유'와 '저항'에 몰두한 나머지 권력자의 선한 통치 행위조차도 무조건 불신해버릴 경우, 결국 아무런 성취도 가져오지 못하고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성취는 권력자와 피권력자 사이의 사랑과 화합에 기반해야 하며, 오히려 그러할 때에 피권력자의 자유의지가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섬을 떠난 상욱이 '자유'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성찰하면서, 원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가 주장하고 있던 이유들 - 자유와 저항 - 이 저나 저의 이웃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진실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도대체 그런 식으로 원장님과 저희들이 그 섬에서 함께 이룩해온 것들을 부인해버리고 난 다음에는 섬이 과연 어떻게 되어가야 하며, 무엇을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아무 것도 대답할 바를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이처럼 '자유'와 '저항'을 넘어 새로운 창조의 힘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이와 같은 과제를 실제로 겪어왔다. 1970, 80년대의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의 과제는 오로지 독재 타도, 단 한 가지였다. 다시 말해, 절대 권력에 대한 부정과 파괴로서의 저항과 자유만이 당시의 유일한 가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과 정권교체, 그리고 두 번의 민주적 정권을 거치면서, 파괴적 저항으로서의 운동은 시험대에 올랐다. 새로운 시대, 다시 말해 진정한 '우리들의 천국'을 만드는 데 있어서, 자유와 저항을 넘어서는 통합과 창조의 가치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장로가 말하는 자유를 뛰어넘는 사랑과 화해에는 하나의 전제가 빠져 있다. 바로 '신뢰'이다. 소록도의 원생들처럼 외부로부터 정해져 '부임하는' 권력의 통치를 받는 경우에는, 도대체 선한 권력과 그렇지 못한 권력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 즉, 주정수 원장처럼 자신의 동상을 세우려는 권력과 조백헌 원장처럼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않는 권력을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통치의 구조에 문제가 있다. 즉, 자신을 통치하는 권력을 자신들이 선출하는 권한을 스스로 갖지 못하고, 임명된 권력의 선함과 악함을 따져물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권력자와 피권력자 사이의 통치를 둘러싼 신뢰는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피권력자가 권력자가 잘못할 경우에 이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뢰'를 회복해야 할까? 작가는 섬을 떠난지 5년만에 섬으로 되돌아온 원장의 모습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조원장은 섬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가 되돌아온 이유는 바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자유를 뛰어넘어 사랑과 화해로 가기 위해 필요한 신뢰,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운명'을 함께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력자가 일방적으로 시혜와 사랑을 베풂으로써 주어지는 천국이 아니라, 함께 하는 운명 속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가운데 진정한 천국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장은 이제 더 이상 원장이 아니었다. 비록 현재의 원장과 의논하는 등 영향력은 갖출 지언정, 그는 소록도의 한 일원일 뿐이었다. 함께 하는 공동 운명체로서 원장과 원생들 사이에는 뿌리깊은 신뢰가 형성되었으나, 이들이 아무런 권력과 힘을 행사할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분명 오랜 세월이 걸리는 작업임에 분명하다.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 원장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원장이라는 직위와 권능이 오늘날처럼 섬사람들의 운명이나 선택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일방적으로 군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어렵습니다. 운명은 자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원장의 직위와 권능은 섬사람들 자신의 의사에 의해 그들 가운데서 선택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언제나 권력은 그 힘 자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이기적인 명분만을 지어내게 마련이니까요. 이것이 이 섬을 실패시키고 있는 가장 깊은 원인이겠지요.(중략)그런 때가 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그 때는 결국 와야겠지요. 그게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라도... 그게 아마도 상상 이상으로 긴 세월이 걸리게 될 일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결국 작가는 상욱이 앞서 말한, '참여와 자치'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야 할 책임과 실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신들을 통치할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할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사람들은 피권력자의 신분에서 비로소 진정한 권력자의 신분으로 바뀐다. 그리고 위임받은 권력과 선출한 권력 사이에는 진정한 신뢰가 싹트게 된다. 그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사랑과 통합의 통치가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단시일 내에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참여와 자치에 대한 자각을 싹틔우고 신뢰와 통합된 힘을 기르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당신들의 천국'이 아닌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어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권력자의 동상과 배신, 이로 인한 피권력자의 자유와 저항과 불신, 이를 넘어서 사랑과 화합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신뢰, 궁극적으로 신뢰를 만들어가기 위한 참여와 자치. <당신들의 천국>은 원장과 상욱, 황장로, 그리고 다수의 원생들과의 치열한 삶을 통해, 진정으로 '우리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한 가치와 과제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가 뿌리 내리기까지의 역사를 상징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어디쯤 와 있을까? 과거의 독재자들은 권력을 쥐면서 항상 국민의 행복과 사회 정의를 약속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온갖 이미지 조작 등을 통해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결국에는 억압과 착취를 통해 국민들을 배반해왔다. 그리고 이는 곧 국민들의 자유에 대한 자각과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독재 권력은 회유와 협박, 탄압 등 온갖 방법을 통해 이를 제압하고자 하였으나, 자유와 저항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결국 국민들은 5.18 광주 항쟁과 6.10 민주화 항쟁을 통해 선출된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합법적 권력의 배반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직까지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만이 자리잡았을 뿐 그 내용은 여전히 비민주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행정, 입법, 지방의 권력을 선출하고는 있지만, 선출되기 전에 그들이 내어 놓은 화려한 약속(공약)은 선출과 동시에 폐기처리되기 일쑤다. 그들은 겉으로는 국민(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온갖 특혜를 누리며 자신들의 이해관계에만 몰두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병역비리, 재산비리 등 부정부패가 가장 많은 집단은 국회의원, 고위 관리직, 지방자치단체장 등 권력자들이다. 이와 같은 배반은 그들이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마음 속에 동상을 심어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법적 권력의 배반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의 참여와 자치는 아직도 제한적이다. 기회주의와 지역주의 등으로 그들만의 리그가 여전하기 강고하기 때문이다. 이는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배반과 불신 속에서는 그것이 설사 합법적인 권력을 선출하는 민주 질서라 하더라도, 통합과 창조의 힘보다는 분열과 갈등의 힘이 더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새로운 창조의 질서로 나가지 못하고 아직도 혼란스러운 이유다. 지금의 시대정신은 시민들의 참여와 자치를 확대시키는 데 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권력과 정치에 대해,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자치가 필요하다. 우선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않고 특권의식을 갖지 않은 정치 세력을 권력으로 선출하도록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또한 선출된 권력이 초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동상을 경계하며 바르게 통치할 수 있도록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더불어 자기 삶의 주변과 일상에서의 자치 또한 필요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중앙에서 결정되는 시대는 지났다. 지방정부와 지역사회, 가깝게는 살고 있는 마을의 살림이 올바로 집행될 수 있도록 자치의 역량을 높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치와 참여에 대한 시민의 자각과 연대의 노력이 있을 때, 사회 전반의 통합과 신뢰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그들만의 리그' 내지 '당신들의 천국'을 넘어서, '우리들의 천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접기초롱이 2007-06-05 공감(4) 댓글(0)Thanks to 공감     당신들의 천국 / 이청준 새창으로 보기 구매근래 이것저것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금 문학에 반영되는 국가별 정서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 '불안'이라는 개념이 지역마다 독특한 형태로 피어오르는 장면들은 묘하게 매혹적이다.
러시아의 인물들은 압도적으로 덮쳐오는 외부의 '불안'에 휩싸이면 곧 무릎을 꺾고 만다. 존재를 무화시키는 광활함 앞에서 왜소한 개체는 그저 우왕좌왕, 엉뚱한 행동을 반복한다. 고민하고 사유할 겨를도 없이 휩쓸려가는 내면의 혼란은 희화된 몸짓과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타난다.
일본의 개인들은 한없이 안으로 침잠한다. 그들은 '불안'이 사회에 뿌리를 대고 있음을 감지하지만 그 얼굴을 직시하지 않는다. 개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불안'은 수시로 미움의 구름이 되어 주변에 내린다. 성찰하면서 공존한다. 눈 먼 자들의 도시와 같은 음습함이 감돈다.
미국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불안'은 완전한 건조상태다. 일본이 습기를 머금어서 축축하다면 미국은 황야의 삭풍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바싹 메말라있다. 사시사철 끝나지 않는 건기 같다. 건드리면 바로 부서질 것만 같은 이 뼈만 남은 공룡은 그러나 여전히 살육기계로 작동한다.
프랑스는 '불안'마저 탐미한다. 죽음충동과 공포, 대립과 우울 등 '불안'에 내재되어 있는 온갖 부정적인 인간 감성을 경이의 눈으로 대하며 완전히 거기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메스로 뒤집어보고 갈라보고 해체하면서 세포의 흐르는 점액질을 맛본다. '불안'을 형상화한다.
중국의 '불안'은 대단히 고전적이다. 거대한 힘에 휩쓸려가는 개인의 절규라는 점에서 러시아와 닮았지만 중국의 개인들은 분산되어 있지 않다. 전통적 공동체를 유지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으로 묶여 있으며 죽음마저 그 안에서 집단적으로 맞이한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오랫동안 고요한 호수로만 떠다니다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바다로 나선 신세다. 급격하게 몰아친 폭풍우에 휘말려 짧고 굵직하게 바다를 표류하다 간신히 어느 해안가에 도착해서, 이제 살았나 싶었지만 어째 여기가 섬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엄습해온다.- 접기nana35 2013-03-26 공감(3) 댓글(0)Thanks to 공감     우리들의 천국, 당신들의 천국 새창으로 보기 구매인종간의 갈등을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그려놓았던 크래쉬라는 영화였는데 미국 내에서 백인과 흑인, 아시아인과 아랍인들 사이의 끝날 것 같지 않은 갈등을 그렸다. 사소하게 시작된 상처들이 또 다른 형태의 갈등으로 전이되는 악순환의 연속이랄까.하지만 실타래처럼 꼬인 끝날 것 같지 않은 세상사도 사랑이라는 작은 행동에서부터 풀어나간다는 내용이었다.
여기 소록도라는 작은 섬에도 충돌(크래쉬)은 끊이지 않았다.한센병(나병, 문둥병) 환자들이 수용된 그곳에 “새 원장이 부임해온 날 밤, 섬에서는 두 사람의 탈출 사고”가 발생한다. 더군다나 바깥세상의 손가락질에 쫓겨 섬에 유배된 그들인데다 전임 원장들의 만들어놓고 떠나버린 ‘동상(섬에 대한 전임원장들의 명예욕, 공명심)’으로 인해 정상인들에 대한 마음의 문이 사라진지 오래였기에 새로 부임한 병원장(조백헌)과 그가 제시한 섬 운영계획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내비치지 않는다.더욱이 이곳 사정을 잘 아는 보건과장(이상욱)은 새 원장의 의욕 넘치는 활동이 섬 환자들의 상처만 더 긁어 놓지나 않을까 못미더운 눈초리로 원장을 주시한다. 그의 눈에는 새 원장 역시 전임 원장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동상만을 채우고 떠나가 버릴 그저 그런 ‘정상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새 원장은 나병 환자들이 맘 편히 생활할 수 있는 섬, 진정한 천국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축구나 대표자회의를 만들기도 하고 섬에서 행해진 차별도 없앤다.그리고 원생들과 함께 바다를 매우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시작한다. 오랜 배신의 섬, 소록도 주민들은 쉽사리 사업에 동참하려들지 않지만 원장의 끈질긴 노력과 집념이 더해진 원생 스스로의 약속으로 사업에 동참한다.둑길이 세워지고 허물어지길 몇 번,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등허리가 굽어지는 길고 지루한 공사 끝에 드디어 330만평의 새 간척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그들을 뒤덮고 있던 눈물의 역사가 걷혀지고 새로운 희망이 쏟아지는 것처럼 광활하게 다가온다.그러나 잘 마무리 될 것 같던 공사는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면서 중단되기에 이른다. 소록도의 나병 환자들에게 나누어질 ‘천국’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만 같은데...
소록도의 원로격인 황희백 노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제 다시 이 섬에 치욕스런 배반의 일어나선 안 될 테니......”라 말한다. 결국 원생들의 배신감과 원장의 공명심만 부추긴 꼴이 되었던 아픈 과거사처럼 전락하고 말 것인가?그러면서 천국에 대한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큰 목적이나 쟁점이 될 수 있는- 여러 질문을 던진다. 천국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과연 나는 그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일상 속에서 ‘천국’이라는 자기만족, 혹은 집단의 목표를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묻는다.하지만 거기에 어르기까지의 과정이 타인의 의도나 강요에 의해서라면 어떤가. 과연 그렇게 도달한 천국에는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 이렇게 찾은 만족은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으로 와전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책에 적힌 한 문구가 기억난다.“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었다.”그리고 말한다. 어쩌면 나환자와 정상인 사이의 인식의 차이 때문에 애초에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고 사랑이라는 수용적인 마음으로 차근차근 접근할 때 진정한 천국이 자라나지 않을까라고.
소록도를 통해 살펴보는 천국의 의미, 삶의 의미...결국 우리 인생 최고의 키워드는 사랑이 아닐는지. 서로간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전제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리라. 사회와 동떨어진 ‘당신들의 천국’이 아니라 사회속의 개개인이 주인이 되는 '우리들의 천국'으로 말이다.
(www.freeism.net)
- 접기프리즘 2006-04-21 공감(1) 댓글(0)Thanks to 공감     천국.... 새창으로 보기 구매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소록도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섬세하게 묘사된 감정들과 일들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정이 2005-11-03 공감(1) 댓글(0)Thanks to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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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이야기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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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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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벌레 이야기
작가
이청준
장르
단편소설
발표
외국문학 1985년 여름호
수록
비화밀교 (나남, 1985)
1. 개요2. 줄거리3. 여담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1. 개요[편집]

이청준의 단편소설. 영화 밀양의 원작이기도 하며,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2. 줄거리[편집]

1.
아내는 알암이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악착스럽게 자신을 잘 견뎌나갔다. 그것은 아이가 어쩌면 행여 무사히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희망과, 녀석에게 마지막 불행한 일이 생기기 전에 어떻게든지 놈을 다시 찾아내고 말겠다는 어미로서의 강인한 의지와 기원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난해 5월 초, 갓 초등학교 4학년을 올라간 아이인 알암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집을 안 거치고 바로 학원으로 간 게 아닐까 싶었지만 오히려 학원 쪽으로부터 알암이가 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는다. 불안한 마음으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이 되어도 알암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학교 쪽이나 친구들 중에서도 알암이의 향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바탕 알암이를 찾기 위한 대대적인 노력이 이뤄진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도 찾기는커녕 단서 하나 잡히지 못한다. 한 달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관심이나 경찰의 수사도 시들해지지만 아내는 아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만으로 악에 받쳐서 아이를 찾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종된 지 두 달도 넘은 7월 22일, 알암이는 끝내 학원 근처의 건물 지하실 바닥에서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2.
시체의 모습으로 보아 아이는 유괴되어 피살당한 것이 분명했고, 수사 끝에 주산 학원 원장인 김도섭이란 자가 범행을 저질렀음이 밝혀진다.

변을 당하고 난 뒤 한동안 엄청난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아내는 다행히도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자신을 가다듬게 되는데, 그 계기는 뜻밖에도 이웃인 김 집사 아주머니의 신앙 권유를 받게 되면서였다. 처음 아이가 실종되었을 때 아내는 그를 따라 교회로 가서 제발 아이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하기도 했는데,[1] 아이가 결국 그런 모습으로 발견되고 범인의 행적도 깜깜무소식일 무렵, 한동안 아내를 찾아오지 않던 김 집사가 다시 찾아와 설득을 시도하자 그동안 넋이 나간 채로 지내던 아내가 그 순간 태도가 바뀌면서 "하느님은 몰라요. 살인귀를 가리켜 보여주지 못하는 하느님, 사랑도 섭리도 다 헛소리예요. 하느님보다 내가 잡을 거예요. 내가 지옥의 불 속까지라도 쫓아가서 그놈의 모가지를 끌고 올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그 이후 범인을 추적하는 데 초인적인 의지력을 발휘하게 된다. 신앙을 통해 아내를 바꿔보려던 김 집사의 시도가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아내의 활력을 되찾아준 것이다.

3.
범인 김도섭은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가 확실했었고, 아이의 실종 직후 아이를 찾는 일에 앞장서서 나섰을 만큼 교활하고 대담한 인물이었으며, 상당히 치밀한 방식으로 죽은 아이를 숨겨왔지만 집요한 추적과 수사 끝에 결국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자백을 하게 된다. 당국은 범인을 잡아 넘기고 재판에서는 사형이 선고되지만, 그런 걸로 아내의 엄청난 원한이 풀릴 리가 없었다. 자신이 직접 범인에게 그 복수를 행하지 못하게 된 아내는 그 복수심을 여전히 짓씹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내는 김도섭의 사형 집행이 어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치르고 싶어 오히려 사형이 빨리 집행될까봐 걱정하기까지 한다.

그런 와중인 10월경에 김 집사가 다시 아내를 찾아온다. 김 집사는 이제 범인의 죄에 대한 사람의 심판은 끝났으며 이제는 마음을 간추리고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하며, 나아가 되도록 그 범인을 용서하고 동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내는 처음에는 당연히 불같이 화를 냈지만, 아내가 철저하게 복수심에만 의지해 살고 있는 것을 염려한 나까지 거들면서 얼마쯤 지나 마음을 고쳐먹고 김 집사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처음 온전히 아이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만 교회를 다니던 아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참된 신앙심을 품게 되고, 그 전까지 갖고 있던 저주와 원망기가 덜해지게 되었다. 여기에 탄력을 받은 김 집사는 아내에게 범인에 대한 용서를 계속 언급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내는 범인 김도섭을 용서하려는 마음까지 가지게 된다. 그해 말의 일이었다.

4.
아내가 범인 김도섭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은 누구보다도 아내 자신을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마음속에서 아내 자신이 그럴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그 이상은 아내로선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소망을 해서도 안 되었다. 그랬더라면 아내는 적어도 자신의 구원의 길은 얻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내의 마지막 비극을 불렀다. 다름 아니라 아내는 당돌스럽게도 자기 용서의 증거를 원했다. 더욱이 그것을 지금까지의 원망과 복수심의 표적이던 범인을 상대로 구하려 한 것이었다.
마음의 용서를 생각하고 나서 열흘쯤 지난 어느 날, 아내는 내게 교도소로 범인을 찾아가서 직접 자신의 용서를 확인시켜주어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말한다. 나나 김 집사나 좀 지나친 듯싶은 아내의 생각에 불안해하지만, 결국 자리를 마련해보겠다는 김 집사의 말에 내가 덜컥 승인을 해버리면서 오래잖아 면회가 성사되었다. 그리고 이 일은 크나큰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면회를 다녀온 아내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감과 상실감에 빠진 채 앓아눕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는 나는 아내에게 이유를 물어보지만 말도 하려 하지 않아 김 집사를 만나 자초지종을 물어보게 되었다. 하지만 짐작과는 달리 오히려 별일이 없었다는 답을 듣게 된다. 김도섭의 태도 역시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포악하고 뻔뻔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아내의 용서를 빌고 죄를 저지른 책벌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도섭은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한 술 더 떠 사후 신장과 눈알을 기증할 약속까지 해두고 있었던 상태였다. 김도섭은 그것으로 주님의 사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었고, 따라서 아주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 집사는 이렇게 마음속에 주님을 영접한 김도섭을 만난 아내가 오히려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나도 아내가 왜 그랬는지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유 모르게 막연한 배신감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며칠 뒤 아내의 그 절망감의 원인을 알게 된다. 아내의 믿음을 되돌려놓으려 매일같이 찾아와 설득하는 김 집사에게 아내가 그 이유를 털어놓은 것이다.
"저도 집사님처럼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래 교도소까지 그를 찾아갔구요.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나보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그건 제 믿음이 너무 약해서만은 아니었어요. 그 사람이 너무 뻔뻔스럽게 느껴져서였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예요.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알암이 엄마, 그 사람은 애 엄마 앞에서 뻔뻔스러워 그런 얼굴을 한 게 아니에요. 알암이 엄마도 들었지 않아요. 그 사람은 이미 영혼 속에 주님을 영접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으로 주님의 사함을 얻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 그토록 마음과 얼굴이 평화스러웠던 거예요."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하지만 김 집사는 그런 아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주님의 용서만을 주장한다. 아내는 주님으로부터 자신의 용서의 표적을 빼앗겨버리고, 용서를 결심하고 찾아간 사람이 자신에 앞서서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5.
그러나 아내의 절망감과 파탄은 거기서도 아직 다한 것이 아니었다. 보다 더 절망스런 아내의 파탄은, 그렇다고 그녀가 다시 인간의 복수심을 선택할 수도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물론 김 집사의 강압이나 협박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는 이미 스스로 용서를 결심하고 그를 찾아갔을 만큼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은 스스로도 믿음과 사랑의 계율을 익히고 있었다. 그 참뜻과 가치를 깨닫고 있었다. 이제 와서 아내가 그것을 버리는 것은 아내 자신을 버리는 일이었다. 아내는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 속의 '인간'을 부인하고 주님의 '구원'만을 기구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기엔 주님의 뜻이 너무도 먼 곳에 있었고 더욱이 그녀에겐 요령부득의 것이었다.

아내의 심장은 주님의 섭리와 자기 '인간' 사이에서 두 갈래로 무참히 찢겨나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내는 말도 하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시지도 않는다. 김 집사는 여전히 아내를 찾아다니고, 나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안타까워만 한다.

그러나 결국 이듬해 김도섭의 사형 집행 소식과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을 라디오 방송으로 들었던 아내는 이틀 뒤 약을 먹고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만다.

3. 여담[편집]

영화 밀양 또한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이 보았을때 충격이 두 배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밀양이나 벌레 이야기나 안티 기독교 예술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굉장한 오해이고, 오히려 신학을 공부했거나 나름대로 교회를 수십년 다녔다 하는 사람들은 신앙인을 가장한 위선자들이 얼마나 싸이코패스스러운지 끔찍해서 못 볼 지경이다(...). 특히 언제고 하나님을 찾게 될 일이 생길 거라면서 아내를 저주하다시피 하는 작품 속 깁 집사의 행태는 기독교적인 비유로 뱀 같다... 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다. 단순히 인간에 대한 고찰을 잘 다룬 것을 넘어서, 이 소설은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절대로 모자란 작품이 아니다. 소설가 이청준은 생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따라서 그가 갖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충실히 반영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1] 아내는 같은 일을 절을 찾아가서도 한다. 어떤 신앙심 때문에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아이를 찾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그런 일을 한 것이다.

2019/12/25

14 "환대의 마을살이", 돈벌이 경제에서 살림살이 경제로의 거대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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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마을살이", 돈벌이 경제에서 살림살이 경제로의 거대한 전환
웹진 10호 | 마을학개론 | 2014.01.20조회수 : 4641


새해가 시작하는 그 주간에 학생들과 함께 행복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한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일본 규슈 해변의 이토시마라는 지역에 모여 사는 이들은 과거와 미래, 자연과 사람, 생명과 생명의 끈을 이어 온 ‘오래된 미래’가 계속 되길 바라는 주민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정규직장에 다니며 돈을 버는 이들도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일하는 프리랜서도 있고 전혀 돈벌이 노동을 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공통적인 점은 이들이 텃밭을 가꾸거나, 옷을 만들거나, 집을 고치거나, 요리를 하거나, 예술적 활동을 하거나, 집 관리를 하거나, 아이를 키우고 아픈 이들을 치유하는 일에 꽤 많은 시간을 바친다는 것입니다. 마을 곳곳에 자연농법을 활용한 크고 작은 밭이 있으며 건강한 먹거리를 파는 가게 겸 식당, 마을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공방들이 있고 마을 장터가 정기적으로 열립니다. 대부분이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지만 독신이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들도 많고 이들은 공동으로 큰 집에 모여 살면서(share house)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있었습니다.



마을 안에서 실천하는 살림살이 경제의 다양한 모습

우리가 간 첫날은 마침 지역 신사들을 방문하는 신년맞이 순례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순례를 이끄는 스님은 아름다운 바닷길을 안내하면서, 순례자들에게 앞으로 태어나 이곳을 걷게 될 다음 세대를 위해 마음을 모아 걷기를 당부했습니다. 그는 북미 원주민들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늘 7세대 앞을 내다보면서 결정을 했다고 점을 주지시키면서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했습니다. 이들이 부활시키려는 전통은 일본전통만이 아니라 전지구상에 존재했던 전통 중 지금 시대인이 되살려야 할 가치였습니다. 농부, 컨설턴트, 공정무역 회사 직원, 제과사, 접골사, 보육사, 엄마, 아버지 등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이들은 2012년에는 ‘이토나미’라는 마을 활성화를 위한 비영리 법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나누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다”는 오래된 진리를 자발적이고 느슨한 관계망 속에서 실현해가고 있습니다. ‘돈벌이 경제활동’도 하지만 ‘살림살이 경제’에 더 비중을 둔 마을살이를 하는 분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자연농법으로 가족의 먹거리를 자급하고 있는 카가미야 씨가 본인의 텃밭을 설명하며 흙냄새를 맡고 있다.



제가 만난 주민 몇 명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27년전에 이곳으로 이사 온 50대 중반의 가가미야미 에츠꼬 씨는 자연농법으로 가족의 먹거리를 자급하는 주부입니다. 1986년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터져버렸고, 당시 일본에서는 방사능 오염을 막기 위해 유럽산 수입과자를 모두 내버리는 등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가가미야마씨는 아기에게 위험한 먹거리를 먹일 수 없다는 생각에 자연농법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가족은 남편 일터와는 멀지만 텃밭을 마련할 수 있는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딸 둘을 그 밭이 딸린 큰 집에서 키웠습니다. 큰 딸은 중학교 때 학교를 싫어해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 자신은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냥 함께 즐겁게 농사를 지었는데 4년 후에 딸은 공부가 하고 싶다며 대학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한 둘째 딸은 보육교사가 되어서 독립해 살고 있고 가가미야마씨의 텃밭은 이제 이곳을 찾는 우리 같은 방문객들을 위한 자연농법학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사토 가와구치 씨는 여섯 명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이자 건축 설비사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그는 40살이 넘어 보육사 자격증을 땁니다. 아이들을 위해 남자보육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어서 직업전환을 하기로 한 것이랍니다. 살고 있는 집 아래층을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개조하고 와꾸와꾸(두근두근)’ 과자가게를 운영하는 두 아이의 어머니와 의기투합해서 세 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와꾸와꾸 보육 클럽’을 열었습니다. 이 보육클럽은 3년이 지난 지금, 19명의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라는 그 지역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보육원이 되었습니다.

마사토씨는 정부 지원을 받으면 간섭이 많아서 지원을 받지 않기로 하고 정부에 ‘보육원’이 아닌 ‘보육클럽’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운영은 아이와 가족의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이루어집니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아 경제적으로는 여유는 없는 편이지만 부모와 이웃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에너지가 살아 있기 때문에 보육원은 늘 풍성하고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 곳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를 다니며 혼자 자유롭게 살았던 비혼 여성 이마무리 사토코 씨는 은퇴 후 일주일에 한 번 이곳에서 아이들 식사 준비를 맡아 하기로 했습니다. 원래 아이를 좋아하지 않던 편인데, 보육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 존재인지를 알았다면서 아이들로 인해 노후에 삶의 기쁨을 만끽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부모들도 자신의 일정에 따라 수시로 보육활동을 도울 수 있고 프리랜스인 부모들 중에는 일당을 받고 이곳 일을 돕기도 합니다. 보육클럽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자라게 하는 곳이자 많은 사람들을 서로 엮어내는 마을 허브인 것입니다.





▲ 시의원에 출마한 후지몽 씨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그의 아내와 동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지역 멋쟁이인 후지몽 부부는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예술가 부부입니다. 생태주의적 전환의 방식을 삶을 살다가 최근 남편 후지이 요시히로씨가 녹색당 후보로 시의원에 출마하기로 했습니다. 별명이 후지몽인데 그는 일본정치는 좌우로 대립한 상태에서 굳어버렸다면서 다시 사람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치라고 말했습니다. 이토시마에는 물론 생태주의적 전환을 하려는 새로운 주민들만이 아니라 예전부터 대대로 그곳에 터를 닦고 살아온 전형적인 농부가족도 있고 일반적인 회사원 가족도 있습니다. 그는 그런 지역주민들이 자민당과 반자민당으로 양분되어 있지만 적어도 자연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자는 점에서는 같은 생각을 한다면서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를 시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을 장터에서 선거운동을 한 셈인데 선거운동의 하이라이트는 후지몽 씨의 기타반주의 맞추어 그의 아내 레이코와 동료들이 평화를 기원하면서 아름답게 훌라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망가진 세상에 대항하여 ‘지속가능한 전환마을’을 노래하다




▲ 이토시마에서 살고 있는 청년들.
학생들의 쉐어하우스가 소개된 잡지(왼쪽), 이토시마의 젊은 예술가들(오른쪽)



이토시마의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이토시마에서 우리가 보고 온 ‘마을살이’의 모습은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지속가능한 전환 마을transition town’의 삶의 모습입니다. 영국에 있는 토트니스(Totnes) 마을주민들은 2020년 경에 석유생산이 정점(Oil Peak)을 이룬다는 소식을 접하며 석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마을살이를 시작했습니다. 에너지 전환을 위한 목적 아래 다양한 삶의 활동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농법으로 텃밭을 만들고, 토종 종자를 보호하며, 집과 정원을 공유하고 그 지역에 맞는 나무들을 심고, 가까운 지역에서 나오는 먹거리를 활용하는 ‘푸드 마일리지’ 운동도 합니다. 이런 전환 지역에는 어김없이 조금 일찍 이런 전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활동해온 촉매자/촉진자(animator/facilitator)들이 있습니다. ‘이토나미’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든 분들처럼 말입니다. 다양한 목적을 위한 품앗이와 두레 등 단골 관계가 활발해지고, 때로 이런 활동은 협동조합과 마을기업으로 발전합니다. 자연스럽게 지역경제가 튼실해지고 사람살이가 안정되는 것이지요. 이런 전환을 해낸 분들이 사는 것에 대해 별로 불안해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습니다. 대형 사고는 이미 수십 차례의 사고들이 난 후에 일어난다고 하인리히 법칙은 말합니다. 경고를 계속 무시할 때 터지는 것이지요. 지구는 초대형 사고들이 터지는 시점에 접어들었습니다. 2011년 9.11일 2996의 인명을 앗아간 세계 무역센터 폭격사건, 2008년 뉴욕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2011년 3. 11 후쿠시마 사건은 모두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물신주의와 맹목적 과학기술주의와 토건주의가 초래한 결과이지요. 보이는 성과와 효율만 강조하면서 돌봄과 양육을 무시해온 근대 ‘사냥꾼들’에 의한 역사는 이제 그 종말에 다다랐습니다. 그 체제가 여전히 굴러가고 있다는 것에 절망하는 이들이 있지만, 거대한 수레바퀴를 단번에 멈출 수는 없는 것이지요. 서서히 그 수레바퀴는 멈출 것입니다. 그리고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출 힘은 지속가능한 전환마을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 기존의 집을 개조해서 만든 학생들의 쉐어하우스(왼쪽), 종종 청년들의 장터 마르쉐가 열린다(오른쪽)



서울에서도 전환마을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럽이나 일본의 경우와 좀 차이가 있다면 시기 때문이지요. 유럽이나 일본은 한국보다 경제성장도 빨랐고 경제 침체도 빨랐습니다. 유럽 사회,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예외적으로 경제선진국 대열에 섰던 일본은 1980년대 경제침체기에 접어들면서 그 때부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특히 1986년대 체르노빌 원전폭발 사태는 위기 인식을 명확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서 카가미야마씨의 경우에서처럼 삶의 방식의 전환을 결심하는 이들이 늘어났던 것입니다.

반면 한국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겪으면서 비로소 성장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가 위험사회에 살고 있다는 위기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근대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거친 한국의 경우, 노동 강도와 불행 지수 등 여러 가지 OECD 지표가 가 말해주듯이 그 위기의 정도는 더욱 심한 편입니다. 층간 소음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멘붕 상태로 외톨이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폭증하는 현실이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교육 시장이나 보험회사의 경쟁 판에 휘말려 과도한 학원비와 보험료를 내느라 과로하는 국민,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셔틀에서 피로해진 아이들, 하우스 푸어와 워킹 푸어, 나날이 불행한 신조어들만 생기는 피로한 ‘토건국가’에서 '마을'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되는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위기를 직시하고 소통하려는 의지, 곧 지역적 삶의 회복력 regional resilience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불행한 ‘토건국가’에서 행복한 ‘마을살이’로

위기의 정도가 심각해서인지 서울에서는 시 정부가 시민들의 마을살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앞에서 ‘와꾸와꾸 보육클럽’이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한 점과 대비 되는 점이지요. 무언가를 새로 만들고 살려내기보다 관리감독에 익숙해진 관이 얼마나 ‘마을살이’를 잘 지원할 수 있을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이 많지만 기본적으로 앞으로의 국가는 토건사업이 아니라 사람살이 쪽에 적극 지원하는 것이 옳은 방향으로 가는 것일 겁니다.

이토시마의 전환적 마을살이가 키워낸 젊은 주민 후지몽 씨가 1월 말 시의원 선거에 당선되면 ‘와꾸와꾸 보육클럽’도 관의 지원을 기꺼이 받는 식으로 제도를 바꾸어내려고 노력을 하겠지요. 그런 면에서 서울시가 산적한 대도시의 문제를 마을살이의 개념으로 제대로 풀어낼 수 있다면 위기에 처한 현 지구주민들을 위한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일 테지요. 인구 1천만이 넘는 초대도시에 웬 마을이라고 의아해하는 분들이 적지 않지만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동네에서 아이들을 함께 키우고 노인을 돌보고 호혜적 경제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기에 오히려 서울에서의 전환마을 운동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토시마에 함께 갔던 한 학생들이 작별의 시간에 말했습니다. “이렇게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가득 모인 곳에 있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안 된다’고 말하지 않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쉐어 하우스 (공동주택)에서 키운 닭을 잡기 전에 따뜻하게 안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게 했습니다. 그 닭 한 마리를 구워서 30여명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 기억들을 안고 돌아갑니다.” “행복하기 위해 돈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필요한 것은 신뢰하는 사람관계라는 것,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갑니다.”




이제 우리는 일상의 삶을 보기 시작합니다. 일상의 실천 속에서 에너지 문제를 풀고 안전한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마을의 안전은 CCTV와 고용된 순찰대원들이 아니라 서로 믿고 사는 이웃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좋은 교육은 비싼 돈을 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놀이터에서 친구와 동네 형들과 언니, 할머니 할아버지와 만나서 신나게 놀고 관계를 맺는 와중에 이루어지는 것이고요. ‘경쟁과 적대의 자아’를 형성시킨 사람은 ‘멘붕’에 빠지기 쉽지만 ‘협동적 자아’가 발달한 사람은 자존감이 높고 안정적이며 창의적입니다. 자연농법을 이용한 지혜로운 텃밭 일구기부터 요리,아이보기, 집수리하기 등 각자 남들과 나눌 재능을 키워가는 주민, ‘자기계발’과 ‘자기 책임’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남과 고민을 나눌 줄 아는 사람, 대대로 이어질 탄생과 죽음의 의례에 참여하며 7대 후손들을 위한 자원을 보존하고 풍성하게 가꾸어가는 행복한 분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새해에는 더불어 하는 기쁨을 만끽하는 나날이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미소를 짓는 시간보다 진심으로 친한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웃과 함께 상부상조 하면서 서로가 비빌 언덕이 되어 오순도순 지내는 ‘마을살이’의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글과 사진_
조한혜정(서울시 마을공동체위원회 위원장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