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25
Why trust a theory? Epistemology of fundamental physics – Massimo Pigliucci
Why trust a theory? Epistemology of fundamental physics – Massimo Pigliucci
Why trust a theory? Epistemology of fundamental physics
April 24, 2019Massimo
Cambridge University Press has recently published a volume edited by Radin Dardashti, Richard Dawid, and Karim Thebault entitled Why Trust a Theory? Epistemology of Fundamental Physics. I have contributed a chapter to the effort, on “Philosophy of science and the string wars: a view from the outside,” which is available as free download here.
This is the description of the book: Do we need to reconsider scientific methodology in light of modern physics? Has the traditional scientific method become outdated, does it need to be defended against dangerous incursions, or has it always been different from what the canonical view suggests? To what extent should we accept non-empirical strategies for scientific theory assessment?
Many core aspects of contemporary fundamental physics are far from empirically well-confirmed. There is controversy on the epistemic status of the corresponding theories, in particular cosmic inflation, the multiverse, and string theory. This collection of essays is based on the high profile workshop ‘Why Trust a Theory?’ and provides interdisciplinary perspectives on empirical testing in fundamental physics from leading physicists, philosophers and historians of science. Integrating different contemporary and historical positions, it will be of interest to philosophers of science and physicists, as well as anyone interested in the foundations of contemporary science.
2019/04/24
무교회신앙 자료실 | [박상익]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개교51주년 기념강연 - Daum 카페
무교회신앙 자료실 | [박상익]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개교51주년 기념강연 - Daum 카페
[박상익]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개교51주년 기념강연|▶[무교회자료]
박상익|조회 306|추천 0|2009.06.29. 09:15http://cafe.daum.net/nonchurch/Tikv/110
2009년 4월 23일 풀무고등학교 강당에서 행한 개교51주년 기념강연입니다.
김현자 선생님께서 녹취록 작성에 애써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풀무학교에 대해 궁금한 분은 여기로 가보세요.
http://www.poolmoo.or.kr/
http://www.poolmo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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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 선생과 무교회 정신
풀무학교 개교기념일을 맞아 학교의 근본을 밝히는 의미로 김교신 선생의 신앙과 삶을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학교의 근본을 밝히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전적으로 동감했습니다. 그리고 김교신 선생 한 분만이 아니라 김교신 선생의 스승이신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 선생의 제자가 되는 노평구 선생, 이 세 분의 믿음과 사상, 삶의 모습을 함께 살피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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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김교신 선생의 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교신 선생은 1901년 4월 11일에 태어나셔서 45년 4월 25일 만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4자가 많이 들어있지요, 한국 사람은 4를 좀 싫어하죠? 그러나 이 ‘사’자는 그런 게 아닙니다. 사에는 ‘선비 사(士)’자도 있거든요. 김교신 선생에게는 ‘그리스도를 만난 선비’라는 별명이 있어요. 조선 선비 김교신 선생이 그리스도를 만나 기독교인 김교신의 삶과 믿음이 나왔다는 얘기죠. 풀무 개교기념일은 김교신 선생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두 날 사이에 끼어 있죠? 모쪼록 풀무 출신 중에도 김교신 선생 같은 ‘그리스도를 만난 선비’가 많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축’(軸)이란 말을 아시지요? 자동차 바퀴의 가운데 끼는 기둥을 축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추축시대’(axial age)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 말은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라는 분이 한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류 역사의 근간이 되는 종교와 사상은 기원전 5세기경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사야, 부처, 공자, 이 네 분이 추축시대를 만든 분입니다. 세계사의 위대한 종교와 철학이 공교롭게도 이 때 동시에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기원전 5세기를 추축시대라고 한 거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분들이 살던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롭지만 정신적, 영적, 도덕적으로 그 시대를 결코 따라잡지 못합니다.
그러면 ‘풀무의 추축’은 무엇인가요. 저는 김교신 선생으로 대표되는 무교회 기독교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추축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마땅하지, 왜 김교신이냐고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성경, 같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요즘 어디 가서 예수 믿는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일반인들의 기독교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따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떤 문, 어떤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서양사를 전공했는데, 함께 서양사를 공부한 후배 가운데 목사가 셋이 있습니다. 교파도 다양해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이렇게 모두 제각각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장로교 목사 후배가 이런 얘길 하더군요. 김진홍 목사 아시죠? 그 분이 오래 전에 한국 기독교 역사 100년을 기념해서 고전이 될 만한 책 10권을 출간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자료를 수집했는데 그 첫 번째가 『김교신 전집』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결국 10권을 채울 수 없었답니다. 기독교 100년 역사에 길이 남을 고전이 10권도 안 됐다는 것이죠. 한국 기독교 역사가 자그마치 100년, 기독교 인구 1,000만인데 말입니다. 한심하지 않습니까? 일본 대형서점에 가면 우치무라 간조를 비롯한 무교회 신앙인들의 저서가 서점 한쪽 코너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0년 세월에 길이 남을 고전 10권도 못 만드는 기독교입니다. 그래도 교회에 속한 분들 중 김진홍 목사는 이례적으로 김교신 선생 얘기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언젠가 우연히 동영상 설교를 봤는데, 그분 말씀이 김교신 선생이 무교회가 아닌 교회 안에 계셨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더군요. 하지만 뭘 모르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만일 김교신 선생이 교회 안에 머물렀다면 <김교신 전집> 같은 저작도 못 냈을 것이고, 그런 훌륭한 삶을 살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라는 문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다가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 신자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애도했습니다. 천주교는 전교 200년 만에 김 추기경이라는 인물을 열매로 배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대형 교회 목사님들 중 한 분이 타계했을 때 온 국민의 애도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기독교, 이것이 개신교의 문제 아닐까요? 김수환 추기경 같이 민족과 사회의 ‘어른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개신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20세기 전반을 살다 가신 김교신 선생은 기독교인 중 드물게 그 시대의 ‘어른 노릇’을 한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과 신앙과 사상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김교신 선생의 삶과 신앙을 4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무교회는 민족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죠? 김교신 선생에게 이웃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조국과 민족이었어요. 그분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사셨어요. 늘 겨레와 동포를 염두에 두고 사랑하셨습니다. 선생은 젊은 날 3․1만세운동 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배의 갑판을 발로 구르며 “아무래도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절규했습니다. 한국인일 수밖에 없다는 정체성을 절실히 자각했던 것입니다.
2008년부터 전 세계가 경제위기라고들 야단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엔 이런 위기를 미리 간파하고 경고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외국의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경제학 교수들이 우리나라에 수백 명인데, 왜 그럴까요? 그들 대부분은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답니다. 국내 학술지 아닌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면 점수를 몇 배나 더 받거든요. 그런데 미국 학술지는 편집위원이 모두 미국 학자겠죠? 그러니 미국 편집위원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로 그들의 성향에 맞는 논문을 써야 한국 대학에서 점수를 많이 받아서 교수로서의 업적을 인정받고 승진하고 출세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한국 경제에는 관심이 없고, 미국 학술지 편집위원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택해 연구해서 그들 눈에 들 생각만 합니다. 참 희한하지요? 한국 대학에서 한국 학생 가르치면서 월급 받아가며 살지만 한국 경제와 한국 현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굳이 그런 연구 안 해도 교수 생활 하는데 지장 없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더 인정을 받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이 안고 있는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적들을 여러 명 맞아 싸워 이기는 얘기 알죠? 헤라클레스의 적 가운데 안타이오스라는 거인이 있습니다. 안타이오스의 어머니가 지신(地神) 테라입니다. 테라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발을 땅에 딛고 있으면 누구와 싸워도 이기지요. 그러나 결국 누가 이겨요? 헤라클레스가 안타이오스를 번쩍 들어 올려 목을 졸라 죽였어요. 안타이오스는 발을 땅에 딛고 있을 때만 힘을 쓸 수 있어요. 헤라클레스는 그 약점을 알았던 거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데요, 안타이오스가 발을 굳게 땅에 딛는 것, 그게 바로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김교신 선생은 철저히 우리 현실에 발을 딛고 산 분이었습니다. 요즘 경제학 교수들과는 많이 다르지요. 그래서 일제의 극한적 압제 아래에서도 끝까지 친일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1940년대 일제의 단말마적 억압으로 당시 거의 모든 민족 지도자들이 친일의 길을 걸었던 바로 그 때, 김교신, 함석헌, 장기려, 유달영 이런 분들이 <성서조선> 사건에 연루되어 만 일 년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가장 악랄한 억압이 있던 그때에 민족에 대한 충절과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경찰은 김교신 선생과 동지들에게 “너희 놈들은 가장 악질적인 부류다.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혼을 심어서 백년,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될 터전을 마련하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연세대 신학과 서정민 교수는 교회사 전공을 한 분인데, 성서조선을 일컬어 ‘이 시기에 이만한 민족적 신앙 양심을 지키며 나온 간행물을 달리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족과 조국에 대한 정절과 지조를 끝까지 지켜낸 김교신 선생의 신앙은 바로 정체성 확립을 바탕에 깔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교회 기독교는 주체적 기독교입니다.
두 번째, 무교회는 우주교회입니다. 온 우주가 다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실, 논밭, 직장 이 모든 곳이 교회이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안타까운 말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교회 장로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대통령 후보였을 때 그분의 소속 정당 내부에서조차 우려할 정도로 축재 과정에서 갖가지 탈법과 비리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도덕적인 면에서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존경할 만한 대통령이 없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다니던 소망교회에서 일요일마다 ‘헌신적으로’ 주차장 안내 봉사를 해서 장로가 되었다고 하네요.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지극정성으로 봉사해서 ‘성도(聖徒)’ 소리 들어가며 인정을 받지만, 교회 밖으로 나오면 안면을 싹 바꿔서 탈세, 불법, 비리를 저지르며 사는 것이 교회 신앙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평소의 삶이야 어떻든 교회 출석만 잘 하면 만사형통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따로국밥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양두구육(羊頭狗肉) 신앙을 견딜 수 없어서 등장한 것이 무교회 정신, 무교회 신앙입니다.
무교회정신은 기독교에만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요즘 인문학의 위기란 말들 많이 하지요? 그런데 이게 사실은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입니다. 교수들이 캠퍼스 안에서만 인문학을 하지, 바깥세상 사람들과는 소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대학교수들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거든요. 여러분 인문학의 원조는 소크라테스지요? 아테네의 광장을 ‘아고라’라고 합니다. 평소엔 시장으로 사용하다가 필요하면 정치토론장이 돼요.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 가서 시민들을 찾아다니면서 문답법, 산파술을 써서 진리를 스스로 깨닫도록 했어요. 시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인문학 교수들이 이 시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문학 교수들은 대학 울타리 안에서만 맴돕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신앙 생활하는 교회신앙과 똑같지 않습니까? 정당도 마찬가지죠. 나라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당리당략만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무교회 정신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공통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교회 운동은 우리가 서있는 모든 자리에서 바깥세상과 긴밀하게 소통하자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홍성이라는 지역사회와 소통을 긴밀하게 하고 있는 풀무는 아주 돋보입니다. 풀무는 이런 점에서 무교회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겁니다.
셋째, 무교회 신앙은 독립신앙입니다. 김교신 선생이 <성서조선>을 158호까지 내셨는데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내셨다는 게 중요합니다. 독립신앙을 달리 말하면 ‘개인주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즘 개인주의라고 하면 대개 좋지 않은 뜻으로 많이 쓰고 있지요? 과연 그럴까요?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한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개인주의는 귀중하고 이기주의는 비천한 것이다. 개인주의는 존중받아야 하고 이기주의는 배척받아야 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존중하며 자기와 남을 함께 존중하는 마음이므로 그리스도인으로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이다.” <우치무라 간조 전집>에 나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회 시간에 자유주의에 대해 배웠죠?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바로 이 개인주의입니다. 그런데 서양역사에서 이 개인주의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등장했는지 아세요?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이랍니다. 종교개혁이 개인주의를 싹 틔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서를 따지자면 ‘종교개혁→개인주의→자유주의’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인사제주의를 주장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가톨릭 신앙은 사제의 기적적 권능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에서 평신도는 사제를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결국, 가톨릭에서 사제와 평신도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그것을 루터가 깼습니다. 모든 평신도가 들판에서, 공부방에서,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지상주의, 믿음지상주의, 만인사제주의를 종교개혁의 3대 원리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으로 모든 사람이 독립된 인격으로서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신앙, 개개인이 존중받는 신앙이 등장한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종교개혁의 후예를 자처하는 한국의 개신교 목사 중 상당수가 가톨릭의 사제주의로 환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도 등장하면서 가톨릭의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는 교황이 한 명뿐이지만 개신교는 교회마다 교황이 한 명씩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고 있어요.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린 거죠. 독립신앙을 엿 바꿔 먹고 가톨릭 흉내 내기 바쁜 한국 개신교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무교회 신앙은 독립신앙입니다.
넷째, 무교회 신앙은 학문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글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전도의 정신이라는 책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전도자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깊고 넓음에 따라 하나님에 대해 더욱 밝히 알게 된다, 전도자는 우주 만물의 비밀을 세상에 보여주는 직책에 있으므로 전도자가 몰라도 좋을 지식은 이 세상에 없다.” 우치무라 선생에 의하면 넓고 깊은 지식은 하나님을 깊고 밝게 알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누구보다 지식이 필요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신앙만 아는 전도자는 신학생의 교사는 될 수 있지만, 목수, 미장이, 농민, 학자, 정치가의 지도자는 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특히 네 가지 영역의 지식을 강조합니다.
① 경제학, 사회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도자는 사회의 지도자여야 하기 때문에 경제학, 사회과학을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로 이끌어가는 직책이기 때문에 그 원리를 밝혀주는 사회과학을 몰라서는 전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② 자연과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어요. 과학은 물질의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법칙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연계, 물질세계, 우주를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창조의 원리를 알려면 자연과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③ 역사공부를 강조했습니다. 역사는 인류 발달의 기록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밝히 보여주는 학문입니다. 관용의 정신을 갖게 합니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다양한 사고방식을 배웁니다. 풍토의 다양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고 우리의 사고방식만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미덕입니다. 인류 전체의 발전은 한 국가의 발전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국수주의적인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인류 전체 발전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역사입니다. 역사는 인류가 하나라고 하는 시야를 갖게 해줍니다. 역사는 전 인류, 전 세계를 보는 눈을 열어주기에 전도자는 그걸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④ 넷째, 훌륭한 전도자가 되려면 원어를 비롯한 성서 연구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서 연구 없이 전도에 나서는 것은 수학 지식 없이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인간을 알기 위해 사회과학과 역사학을, 자연계를 알기 위해 자연과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알아야 할 것,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 경험을 얘기하자면,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기독교도 몰랐고 공부를 왜 하는지도 몰라서 허송세월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전혀 모르던 사람이 대학 시절 성경을 처음 접하고 나서 문화 충격을 받았어요. 너무도 당혹스러웠어요.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서양사를 전공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기독교적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무교회라는 문을 통해 기독교에 들어간 것을 일생일대의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2006년에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을 썼어요. 그걸 보고 제가 운영하는 카페에 어떤 분이 댓글을 다셨어요. 제가 장로교 같은 기성교단 소속이었으면 좋았을 걸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분은 거꾸로 아신 겁니다. 제가 무교회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을 쓸 수 있었거든요. 만일 교회에 속했더라면 그런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무교회이니까 가능했던 거지요. 저는 무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만난 덕분에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제가 공부를 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도 전적으로 기독교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알고 싶은 것,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더군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 믿는다면서 책도 안 읽고, 학문도 등한시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저는 대학생 시절 노평구 선생께 성경을 배웠습니다. 노 선생께서는 “인간을 모르고 어찌 신을 알 수 있는가?”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특유의 말투로 “대학생들은 공부를 하되, 자기 분야에서 최소한 박사까지는 해라, 그리고 그 다음에 성경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박사라고 하니까 무슨 껍데기 학위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박사학위란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세속의 현실 속에서 자기만의 전공 영역을 갖고, 그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지식을 쌓은 다음 성경공부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상식을 초월하지만, 그렇다고 상식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에 앞서, 인간을 바로알기 위한, 상식을 깨우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개신교회에서 이런 상식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매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여러 해 전 제가 운영하는 무교회 카페에서 알게 된 한 대학생에게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 말이 놀랍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기독교인의 학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더니 목사님, 전도사님이 그런 건 지적 교만이라면서 경계를 하더라는 군요. 그 얘길 읽고 정말 놀랐습니다. 아니 예수 믿는 대학생은 공부 않고 무식해도 좋다는 건가요? 무식할 특권이라도 있는 건가요? 무식하려면 저 혼자 무식하고 말 일이지 향학열에 불타는 청년의 학구열에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이건 앞 못 보는 장님이 두 눈 멀쩡한 사람을 인도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이 바로 공부입니다. 노평구 선생께서는 평소 “사회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신앙은 쓸 데 없는 신앙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이웃, 우리 사회를 향상시키려면 어떤 공부와 준비를 해야 할 것인지를 개교 51주년이 되는 오늘, 깊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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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 매료된 유대인 사상가 마틴 부버 : 네이버 카페
장자에 매료된 유대인 사상가 마틴 부버 : 네이버 카페
장자에 매료된 유대인 사상가 마틴 부버 | 자유게시판
2019.04.23.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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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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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부버
-『나와 너』의 관계를 제시한 20세기 최고의 유대 사상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유대인 사상가 중 하나로 알려진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1878년 2월 3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다뉴브 운하가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았지만 네 살 때 어머니가 가출함으로 어린 마틴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영토 갈리시아에 살던 할아버지 집으로 옮겨가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 솔로몬 부버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도 부유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미드라쉬Midrash라는 성경 주해 방식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유대교 학자이기도 했다. 어린 부버는 열 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히브리어 성경, 유대인 구전문학 등을 공부했다.
마틴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집안에서 금기사항이었다. 어린 마틴은 영문도 모른 채 오랫동안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여러 해가 지나서야 기다리기를 포기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어느 장교와 함께 러시아로 도망가 거기서 두 딸을 낳고 살고 있었다. 마틴이 서른네 살 때 어머니가 찾아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마틴 부버가 14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그때부터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폴란드 계의 김나지움에 다녔다. 유대 전통에서 떠나 칸트, 키르케고르, 니체 등을 읽었다. 18세가 되었을 때 비엔나 대학에 들어가1년 정도 머물다가 라이프치히, 취리히, 베를린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철학, 고전어, 독문학, 미술사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베를린에 있을 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은 딜타이(1833~1911)와 짐멜(1858~1918)이었다. 20세경에는 베를린에서 시온주의Zionism 운동을 접하게 되었다. 시온주의란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1860~1904)의 제안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재건하자는 운동이었다. 부버의 경우 시온주의의 주요 과제는 유대인들의 정신적·사회적 성숙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라 본 데 반해 헤르츨은 그것을 철두철미한 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 하나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밀고 나갈 뿐 종교나 문화의 필요성을 무시했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부버는 시온주의 운동과 결별하고, 자기의 학업을 계속하여 1904년 비엔나 대학에서 신비주의 사상가들인 야콥 붸메Jakob Boehme와 니콜라스 쿠자누스Nikolaus Cusanus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마틴 부버가 시온주의 운동과 결별했지만 그 운동에 참가하므로 얻게 된 수확은 컸다. 무엇보다 그동안 등한시했던 자기의 민족적 뿌리를 재인식하게 되고, 이에 따라 유대인 전통, 특히 하시디즘의 가르침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버는 학위를 받은 후 유대교의 신비주의 전통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목적으로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하시디즘 연구에 몰두하면서 스스로도 신비주의 체험을 경험해보기도 했다. 그 이후 그는 근대 하시딤의 창시자 바알 셈 토브에 관한 재료를 모아 1908년 『바알 셈의 전설』 같은 책을 출판하는 등 유대교 신비주의에 관한 책을 내기 시작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09년부터 마틴 부버가 중국 사상, 특히 도가道家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양 말로 된 『장자莊子』 번역서들을 참고하여 1910년 『장자의 이야기와 비유』라는 제목으로 『장자』의 상당 부분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자기 나름대로 풀이한 책을 펴냈다. 그 외에도 『도道의 가르침』(1910), 『중국의 귀신 및 사랑 이야기』(1911)라는 책도 출판하고, 출판은 되지 않았지만 노자 『도덕경』에 대한 강연 모음도 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버가 도가 사상, 특히 『장자』를 접한 것이 후기 그의 사상의 핵심이 되는 ‘나와 너’라는 대화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다. 부버 전문가 허만Jonathan R. Herman에 의하면 부버에 있어서 『장자』는 “그의 ‘나와 너’라는 나비가 나오게 한 유충幼蟲”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12년 이후 부버의 주관심은 신비주의 일변도에서 점차 ‘대화對話’ 쪽으로 넘어갔다. 점차 ‘상호성’이라든가 ‘만남’이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된 것이다. 개인적 황홀의 경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적 몰입보다 인간 상호간, 인간과 신, 나와 너와 같은 인격적 만남을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하려 한 셈이다. 1916년 대화에 관한 책을 내리라는 계획을 수립하고, 1919년 『나와 너 Ich und Du, I and Thou』라는 책의 초고가 나왔고, 이것이 퇴고를 거듭하여 1923년 완결판으로 나오게 되었다. 『나와 너』는 짧은 책이지만 마틴 부버의 주저主著라 할 수 있다. 그가 쓴 그 이후의 책들은 어느 면에서 이 책에 나온 기본 사상들을 설명하고 보충해주는 주해서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버는 저술활동 외에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에서 유대인의 교사들, 청소년들, 성인들, 랍비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에도 힘썼다. 1935년 나치로부터 공적활동 금지처분을 받고 1938년 가족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민,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서 1951년 은퇴할 때까지 가르쳤다. 그 후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에 다니며 강연과 대담 등으로 여생을 보내고, 80세가 지나 각각 철학과 성서와 하시디즘에 관한 그의 저술을 모아 세 권의 전집을 내었다. 그리고 1965년 87세로 타계했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마틴 부버는 무엇보다 그의 책 『나와 너』를 통해 가장 많이 알려졌다. 이 책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버에 의하면 관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나와 그것Ich und Es, I and It’이라는 독백monologue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너, Ich und Du, I and Thou’라고 하는 대화dialogue의 관계라는 것이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이나 사물들을 그 이용 가치로 따져보는 관계이다. 일정 정도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사물을 그렇게 보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이 나의 이기적 목적에 어떻게 부합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서 대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마음으로부터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 자신을 완전히 열어놓지 못하고 뭔가 움츠리고 감추려 한다면 삐걱거리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마틴 부버는 이런 관계를 청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나와 너’라고 하는 대화dialogue 관계에 들어가 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가면이나 체면치레나 가식이나 체하는 일 없이, 심지어는 말하지 않고도 진정으로 이해하고 서로 통하는 관계를 말한다. 독일어에는 ‘너’ 혹은 ‘당신’이라는 이인칭 대명사로 ‘Du’와 ‘Sie’가 있는데, Du는 친밀한 사람들끼리 쓰는 것이고, Sie는 공식적, 외교적인 관계에서 쓰이는 것이다.
부버가 ‘나와 너’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물론 ‘Ich und Du’였다. 영어의 경우 ‘I and Thou’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현재 Thou라는 말은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번역이라 할 수는 없다. 우리말로는‘나와 그대’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너’의 관계는 서로가 아무런 전제 조건이나 이해관계를 고려함이 없이, 순수한 두 존재가 그대로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긴 유대관계에서는 서로서로 북돋아주고 서로서로 자라게 해주는 일이 가능해진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두 연인, 고양이와 그 주인, 기차에서 만난 두 사람 등이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나-너’의 관계가 한 번 성립되면 언제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끊임없이 ‘나-너’의 관계에서 ‘나-그것’의 관계로 넘나든다. 또 의식적으로나 억지로 ‘나-너’의 관계를 이루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너’는 다시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결국 ‘나-그것’의 관계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열어놓고 진정한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뿐이다. ‘나-너’의 인격적 관계는 경험을 통해서만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부버에 의하면 ‘나-너’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는 관계라고 한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시가 모두 이런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매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 부버는 이런 관계를 신에게까지 적용한다. 부버에 있어서 신은 우리의 ‘영원한 그대’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거나 신을 정의하려는 것은 신과 우리의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로 전락시키고 마는 일이다.
‘영원한 그대’에게 무조건 우리 스스로를 열어놓고 기다리면 그와 ‘나-너’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이런 관계에 들어갈 때에는 말이 필요 없게 된다. 그야말로 언설을 넘어서는 경지라는 것이다. 신과 ‘나와 그대’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나 자연이나 예술과의 ‘나-너’의 관계를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부버에 의하면 경전은 ‘영원한 그대’인 신과 인격적 관계를 체험한 사람들의 기록으로서,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그 기록을 읽고 우리 스스로를 비움으로 그런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을 읽을 때 분석적으로 따지면서 읽으면 안 된다.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하므로 참된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부버에게 있어서 법이 정해주었기 때문에 그대로 행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내가 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 ‘나-너’의 관계에 들어갈 때 그 반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행동이 진정으로 의미 있고 바람직한 행동이라 보았다.
부버의 관계철학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만물동체라든가 천지합일, 무극이나 불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도 나와 그대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에서 뭔가 궁극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와 그대’의 대화 관계만 있어도 세상은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까?
#마틴부버 #장자철학 #근대하시딤나와너IchundDu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예수는 위대한 인간인가? 신인가?
리차드 루벤슈타인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
정병진(naz77) 기자
ⓒ2004 정병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섣불리 설명하려 들지 마세요. 아무리 훌륭하게 설명한다고 해도 치우치기 마련이라 삐끗 잘못하면 이단으로 몰리기 쉽습니다!"
신학대에 다닐 때 교회사 시간에 들은 충고다. 이단으로 몰리면 어떻게 되느냐고? 세르베투스라는 사람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삼위일체 교리는 엉터리다"라는 주장을 폈다. 과격한 젊은 신학자이던 그는 이런 자기 견해를 가지고 유명한 종교개혁자 칼뱅에게 논쟁을 걸기도 했다. 그러나 완고하고 잔인했던 칼뱅은 합리적 논쟁 대신 그를 이단자라며 화형에 처하는 것으로 응수해 주었을 뿐이다. 세르베투스 자신은 죽기까지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이단자로 낙인찍힌 그는 범죄자나 된 듯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의해 처형되고 만 것이다.(1553)
불행하게도 이런 터무니없고 끔찍한 일들이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끊임없이 벌어졌다. 하나님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를 놓고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서로 이단으로 정죄하고 추방하고 더 나아가 숱한 살육까지 서슴지 않았다. 사랑의 화신이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이 벌인 일이라고 보기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른바 종교적 열광주의가 낳은 비극이 그리스도교의 교리논쟁 과정에서 거듭해서 나타났다. 그러니 무슨 진리 수호라는 미명 하에 도그마(교리)에 목숨 걸 것이 아니라 본래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교회는 왜 이다지도 쓸모없이 보이는 도그마 논쟁을 사력을 다해 벌여온 것일까? 박해받는 하층민들의 종교이던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에 이르러 제국의 종교로 탈바꿈하면서 교리논쟁이 격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예수의 정체성을 둘러싼 교리 논쟁 자체를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헤게모니 다툼을 일삼은 것이라고만 단정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왜냐면 그 이전부터 이미 교회 내에서는 예수의 신적 지위에 관한 교리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제들만이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말이다.
개종한 신자이던 콘스탄틴 황제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로 제국의 정신 통일을 이루기 원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 불거진 아리우스 논쟁이 교회를 양대 진영으로 갈라놓는 엄청난 위기를 야기하는 것을 직시하고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 논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그가 소집한 최초의 에큐메니칼 회의인 니케야 공의회는 그렇게 해서 열리게 된 것이다.
예수는 위대한 인간인가? 신인가?
신학자 틸리히에 따르면 아리우스 논쟁의 핵심에는 구원문제가 깔려 있다. 인간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가 피조물이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예수는 하나님에 가까운 위대한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심각한 충돌을 일으킨 것이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주교가 있었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닮은 위대한 인간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인가를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을 벌였다. 이에 대해 동방교회는 대체로 아리우스를 따랐고 서방교회는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는 편이었다.
이 책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는가>는 아리우스 논쟁의 양상을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소설처럼 실감나게 재구성해 보여주면서 이들의 논쟁이 결국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말해준다.
아리우스 논쟁은 아리우스의 주장이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출발하여 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381)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는 단편적인 사실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 논쟁이 끝났을 때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라는 신관의 확립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넘으로써 유대교와 이슬람과 대화할 수 있는 통로를 잃어버렸다.
유대인인 저자가 이 논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파고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 따르면 아리우스 논쟁이야말로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또한 어디에서 나뉘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며, 폭력적인 분열상이 미래에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지에 대한 길을 암시해 줄 수 있다.
지금의 서방교회와 동방정교회는 니케아 신조를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니케아 신조는 사분오열한 교회일치를 이룰 수 있는 에큐메니칼 신조로 부각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훌륭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니케아 신조를 비롯한 교회의 여러 신조들이 과연 어떠한 사회, 정치, 문화 배경과 역사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는지를 찬찬히 잘 헤아려 볼 일이다.
니케아파를 대표한 아타나시우스가 무려 다섯 차례나 걸쳐 유배와 복귀를 거듭한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니케아 신조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정치적 투쟁과 타협의 산물이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때 아리우스파의 주장도 교회의 공식 교리인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절대불변의 교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교회는 과거로 회귀할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반성하고 오늘의 시대 상황에 적합한 새로운 신앙고백을 해야함을 이 한 권의 책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2004/05/14
ⓒ 2004 OhmyNews
정병진 기자는 현재 여수에서 솔샘교회(http://solsam.zio.to) 담임 교역자로 일하고 있으며, 교회 내에 어린이 전문 도서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퀘이커의 창시자 조지 폭스 - 물소리 오강남의 심층종교 : 네이버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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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의 창시자 조지 폭스 - 물소리 오강남의 심층종교 | 자유게시판
2019.04.23. 23:34
soft103a(soft****)
나눔회원
https://cafe.naver.com/yooyoonjn/1708
퀘이커를 아십니까? 퀘이커와 그 창시자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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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폭스
-내 속에 있는 신을 깨달으라고 가르친 퀘이커교 창시자
서양 종교 중에서 선불교 전통에 가장 가까운 종교를 하나 꼽는다면 많은 사람이 주저하지 않고 퀘이커교Quakers를 지목할 것이다. 영국인 조지 폭스George Fox(1624~1691)에 의해 시작된 속칭 퀘이커교는 본래‘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로서 한국에서는 ‘종교 친우회’, 혹은 ‘친우회’라 한다.
퀘이커교에서는 내 속에 ‘신의 일부that part of God’가 내재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퀘이커교도들은 내 속에 있는 신을 직접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다고 믿고 이런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힘쓴다. 퀘이커 내에도 일반교회와 비슷한 예배 형식으로 예배하는 ‘프로그램으로 하는 예배programmed worship가 있기는 하지만, 퀘이커 예배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프로그램 없는 예배unprogrammed worship’로서, 기본적으로 ‘친우들Friends’이 한 자리에 모여 한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 내 속에 빛으로 계신 신의 움직이심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보내는 침묵예배이다. 그러다가 누구든지 내면의 빛이 비추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하여 짧게 몇 마디씩 간증을 한다.
그러기에 이들에게는 직업적인 목사minister가 없고 모두가 모두에게 ‘봉사’하는 ‘봉사자들ministers’만 있을 뿐이다. 십일조 등 전통적인 예배의식을 배격하고 특정한 교리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퀘이커 교도들의 깊은 영성과 이런 영성을 통한 열성적인 사회봉사는 널리 알려져 있다. 종교학의 대가 루돌프 옷토Rudolf Otto는 그의 유명한 책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개신교에서도 퀘이커교에서 실행하는 이런 침묵의 예배가 널리 채택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1, 2차 세계대전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와 영국 퀘이커 봉사위원회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내가 만일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나는 퀘이커 교도가 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퀘이커 운동은 미국 역사 초창기에 독립운동, 흑인해방운동, 평화운동, 여성운동 등에도 지극히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는 그 별명 ‘Quaker State’가 말하는 것처럼 퀘이커 지도자 윌리엄 펜William Penn(1644~1718)이 1681년 영국 왕 찰즈 2세로부터 얻은 땅에 평화와 관용이라는 퀘이커의 이상을 실험하기 위해 세운 주이다.
그 주에 있는 가장 큰 도시 ‘필라델피아’는 그리스어로 ‘형제우애’라는 뜻으로, 시청 첨탑 꼭대기에는 윌리엄 펜의 동상이 서 있다. 2009년 기준 전 세계적으로 35만 정도의 교인들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평화운동이나 사회개혁 운동에서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종교 사상가 함석헌(1901~1987) 선생님이 퀘이커 지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필자도 캐나다로 유학 가서 1975년 이후 지금까지 부정기적이나마 캐나다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고 그들의 활동에 이런 저런 모양으로 참여하고 있다.
마침 한국 친우회 홈페이지에 퀘이커교의 창시자 조지 폭스에 관해 훌륭한 글이 올라와 있기에 이를 간추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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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영국 사회는 그야말로 격랑의 시기였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공화정에서 다시 왕정으로 뒤바뀌는 정치적 격변은 물론 지금까지 내려오던 가톨릭과 종교개혁으로 새로 등장한 개신교 간의 갈등으로 사람들은 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톨릭이나 개신교 어느 파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런 사람들을 ‘구도자Seekers’라 불렀는데, 그들은 주로 신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새로운 계시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조지 폭스도 이런 ‘구도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사람들 중 일부를 모아 일종의 신앙 운동을 전개하고 이것이 오늘 퀘이커라 불리는 종교의 시작이 되었다.
조지 폭스는 영국 중부의 청교도 신앙이 강했던 레스터셔, 지금의 페니 드레이튼이라는 곳에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 불리던 방직공紡織工 아버지와 다른 부인들보다 뛰어난 교양을 지닌 어머니 사이에서 네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조지 폭스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고, 공식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 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나이에 비해 신앙심이 깊고,생각하기를 좋아했으며, 침착하고 분별력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그의 십대 시절, 폭스는 신부가 될 것을 바라는 친척들의 희망을 뒤로한 채 어느 구두 제조업자겸 목축업자 밑에서 일했다. 그는 우직할 정도로 정직하고 성실했다. 물건을 속여 팔던 시대에 사람들은 그의 성실과 정직을 비웃었지만, 결국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윌리엄 펜에 의하면, 폭스는 양치는 일을 아주 좋아해서 양치는 솜씨가 훌륭했는데, 양치는 일은 순결하고 고독했던 폭스의 성격과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일로서, 후에 하느님의 종으로서 사역하고 봉사하는 일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1644년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에 그는 심각한 고뇌에 휩싸였다. 친척들이나 여러 목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와 해결을 구해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사는가, 그들의 신앙의 실상이 어떤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번민과 좌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를 두고 친척들은 결혼을 시키려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치에 입문하라고도 했다. 그러나 영적 진리에 민감한 젊은이에게는 그러한 제안이 슬프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이즈음의 심경을 자신의 일기Journal에 이렇게 기록 했다.
“내 몸은 그야말로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으로 메말라 있었고, 그러한 고통들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거나 장님으로 태어나 사악하고 허망한 것들을 보지 않게 되거나, 벙어리로 태어나 헛되고 나쁜 말들이나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들을 결코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게 나았을 것 같았다.”
고뇌하던 폭스는 하나 둘 깨달음을 얻어 가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일이 “주께서 내 마음을 여시어 된 일”이라 했다. 신이 그에게 열어 보이신 깨달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개신교도이건 가톨릭교도이건 모두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신의 자녀로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이어야 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될 자격을 온전히 갖추는 것은 아니다”, “신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계신다”, “여자들은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남녀는 평등이다” 하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깨달음들이 있긴 했지만 폭스의 고뇌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번민을 씻기 위해서 ‘열림’의 경험을 한 다른 사람들을 열심히 만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도달한 결론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바로 그때, 그에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분, 한결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그분만이 네 처지를 말해줄 수 있다.”
폭스는 이 음성에 너무 기뻐서 펄쩍펄쩍 뛰었다. 이 음성은 영의 문제로 고민하고 진리를 고대하던 그에게 이전의 다른 어떤 깨달음보다도 더욱 크고 뚜렷한 것이었다. 폭스가 들었던 그 음성이 후에 ‘내면의 빛’이라 불리게 된 바로 그것이다. 그 빛은 또한 ‘속에 계신 그리스도’,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것’,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증거’ 등으로도 불리게 된다. 그 빛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그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것이다(요한복음 1장 9절). 이 음성은 이후 폭스 자신의 생애와 퀘이커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체험이 있은 후에도 그에게 성경이 크게 열리는 체험이 있었고, 사물의 이치가 훤히 보이는 경험이 있었다. 그는 신의 무한한 사랑과 위대함을 깨닫고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모든 체험들을 계기로 그는 자신이 ‘마치 새로이 만들어져 바뀐 것처럼 용모와 사람이 바뀌었다’고 했다. 변화된 폭스에게 이제 세상은 온통 거두어 들여야 할 신의 씨앗들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후 미주에도 건너가 얼마동안 머물면서 자기의 생각을 전하기도 했다.
우리는 변화된 한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조지 폭스의 경우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조지폭스 #퀘이커 #윌리엄펜 #친우회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한국 교회 친일행적 말할 때 됐다"
CBS-TV 8·15특집 다큐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조호진(mindle21) 기자
▲ CBS-TV 8·15특집 다큐멘터리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타이틀.
ⓒ2004 CBS-TV
해방 이후 59년간 금기시 돼왔던 한국 기독교의 친일 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CBS(기독교방송) TV본부가 8.15 특집 다큐멘터리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PD 김동민)'를 통해 그들의 친일 역사를 최초로 방송, 파장이 예상된다.
특히 교단 총회장과 지도급 인사였던 목사들이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심지어 교회 종까지 떼어다 바쳤으며 ▲십계명과 정면 배치되는 신사참배를 하면서 황국신민사상을 전파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에 내모는 등 적극적 친일 행위를 한 것이 드러남에 따라 친일 목사에 대한 재평가 및 한국기독교의 정통성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빚어질 전망이다.
김동민 PD(35·시사 프로그램 'CBS저널' 담당)는 12일 "CBS저널에서 '한국교회, 친일의 추억'이라는 꼭지를 진행했다"며 "정치권의 친일진상규명 논란과 네티즌에 의한 친일인명사전 모금운동 등의 흐름 속에서 한국 기독교의 친일문제를 60분 짜리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됐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김 PD는 또한 "기독교계가 금기시 했던 친일 행위에 대해 기독교방송이 스스로 보도한다는 게 의미가 있다"며 "한국기독교가 친일에 대한 자기 반성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는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채널 162)을 통해 네 차례(13일 밤 11시30분, 14일 낮12시, 15일 낮12시·밤 12시) 방송된다. 라디오방송에 주력했던 기독교방송은 2002년 TV 시범방송을 시작으로 위성방송 등으로 그 영역을 확대했다.
친일 목회자가 교단 지도자로 추앙 받는 한국교회... 친일문제 금기시
▲ 1943년 일본 나라(奈良)신궁 참배 후 한국 목회자들의 기념 사진.
ⓒ2004 CBS-TV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제작팀은 친일 목회자들이 교단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친일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 목회자들은 교회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친일이었으며,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강변하며 교계 지도자로 건재했다. 다음은 '한국교회의 친일을 말한다' 방송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 지도자일 정도로 기독교는 1919년 3·1운동 당시까지 자주독립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제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벌이며 파쇼화 체제로 돌입, 조선인에 대한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기독교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교리를 어기고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가장 먼저 항복한 교단은 감리교였다. 감리교의 양주삼 초대 총리사는 1936년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또한,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기독교 최대 교파인 장로교마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면서 기독교의 친일 행위가 본격화됐다.
당시 장로교총회 부회장이었던 김길창 목사는 각 노회 임원들을 인솔해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왔다. 또한 일제가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킨 1940년대에는 장로교를 비롯한 한국 교회는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교회 종(鐘)을 떼어다 바쳤다. 심지어 교회를 통폐합 한 뒤 교회 건물과 부지를 일제에 상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상해 임시정부의 외부차장을 지내다 귀국한 정인과 목사는 친일 성향의 기독교 신문을 창간하고 교회의 헌법 교리 의식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등 친일 인사로 변절했다. 일제는 예수를 왕으로 표현하거나 재림에 대한 찬송가를 일체 금지시켰으며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찬송 또한 부르지 못하게 하는 등 교회에서는 찬송가와 함께 기미가요가 울려나왔다.
신사참배를 가장 먼저 결의한 감리교는 1940년 감리교 혁신안을 발표하면서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이른바 내선일체론에 가담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정춘수 감리교 감독은 교회의 철문을 뜯어 헌납하고 교회 통폐합을 실시해 일제의 전승을 위한 물질 지원에 앞장섰다.
한때 독립운동가였던 박희도 전도사는 1939년 <동양지광>이라는 친일잡지를 창간한 뒤 이 잡지를 통해 정인과, 전필순 등 친일파 교계 지도자들이 일제의 전쟁을 옹호하고 기독 청년들을 전쟁참가를 독려하도록 도왔다. 이처럼 일제 초기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 말기가 되면서 기독 청년을 비롯한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제 침략전쟁에 내모는 친일 주력인사들이 됐다.
친일 목사인가 독립유공자인가? 민문연, 독립유공자 이승길 목사 재심청구
▲ 장로교가 헌금해 만들어진 일본군 전투기 '조선장로호' 신문 보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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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2월 국가보훈처에 20명의 독립유공자에 대한 재심을 요청했다. 이들 재심 대상자에 이승길 목사와 김응순 목사가 포함됐다. 이 목사는 장로교 총회장과 평양노회 등의 노회장을 지낸 인물로, 1910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105인이 구속된 사건에 가담한 공로가 인정돼 독립유공자가 됐다.
이승길 목사의 소속 교단 대학인 총신대학교 백년사는 이 목사가 친일파 오문환에게 포섭된 것으로 기록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장로교를 회유하기 위해 평양기독교 친목회를 이용했는데, 친목회원이던 이승길과 김응순 등은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변절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일본에서 발행하던 기독교신문 '복음신보'는 1938년 8월 이 목사가 교회에 국기게양대를 최초로 세운 인물로 소개하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군인들에게 의연금을 모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장신대 김인수 교수는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주동한 인물로 이 목사를 지목하고 있다.
이 목사는 폐교된 평양신학교를 다시 개교시키면서 1941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총신대 백년사에서는 이 목사의 평양신학교는 채필근, 오문환 등 친일 세력이 학교를 장악한 친일교육기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인수 교수는 평양신학교가 "복음이 우선이기 보다는 일본 제국주의 천왕이 앞에 나오게 되기 때문에 변질된 신학교"라고 지적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평양신학교는 일본적 기독교의 사역자 양성기관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도 평양신학교가 일본화에 합당한 기관이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유가족들은 평양신학교가 순수한 교육기관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또한 친일파였다면 어떻게 해방 이후에 김구선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 목사의 아들로 광복회 인천지부장을 지낸 이준경 장로는 자신의 부친을 친일파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격분하고 있다.
친일 목사들 이승만 정권 거치면서 교계 지도자로 군림
▲ 1938년 장로교 27차 총회 총회록에 실린 신사참배 결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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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면서 친일청산이 무산됐듯이 기독교계 내의 친일청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친일 목사들이 이승만 정권과 군정을 거치면서 교계 지도자로 군림하게 된다.
감리교 초대총리사를 지내면서 시국연설 등을 통해 황민화 정책에 앞장섰던 양주삼 목사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지만 곧 무죄로 풀려난다. 해방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낸 양 목사는 6.25 당시 납북돼 현재 행적을 알 수 없다.
시국강연 등을 통해 전쟁참여를 독려한 장로교의 전필순 목사는 친일활동에 대한 신임을 묻었고 교인들은 '다 같이 죄를 범했는데 누굴 돌로 칠 수 있겠냐'며 신임에 동의했다. 전 목사는 해방 이후에 총회장을 지낸 것을 비롯해 연세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지내며 친일 활동을 펼쳤던 김길창 목사는 반민특위로부터 황민화정책의 수뇌부 역할을 한데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김 목사는 '말씀따라 한평생'이라는 회고록에서 친일 활동은 교회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해명했다.
김 목사는 해방 후 고향 부산에 내려가 중·고등학교, 대학교, 신학교 등을 설립하며 교육사업가와 지역유지로 등장하며 교계의 노회장을 지냈다. 고신의 전호진 총무는 "(김 목사는) 그야말로 학교의 황제로 군림했으며 교주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며 "친일,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어른이 해방 후에 교계 주도적인 역할 (하는데 대해) 교인들은 실망했다"고 밝혔다.
성결교는 일제의 강요의 의해 자발적인 형식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는 등 교리에 대한 폄하 등의 문구가 담긴 성결교 해산 성명서를 발표한다. 당시 성결교 총회장 이었던 이명직 목사는 성결교 해산에 앞장섰으며 교단 해체 이후에도 일제 부역에 협조했다. 그러나 성결교 인물전에서 이 목사는 과(過)보다 공(功)이 많은 위대한 인물로 기록돼 있다.
고 한경직 목사 "신사 참배한 죄인"이라고 고백… 교단 차원의 공개적 회개는 전무
▲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출옥한 기독교 성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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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
1992년 당시 영락교회 원로 목사이던 고(故) 한경직 목사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자리에서 이처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한 목사의 친일 고백은 교계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충격을 주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지만 한국교회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는 지난 2002년 평화통일남북공동기도 주일을 맞아 자신의 조부인 고 조승제 목사의 부일 행적을 열거하며 교회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를 고백한다고 밝혔다. 조승제 목사는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 장로교단이라는 어용교단 창설에 협력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한신대학교 이사장과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했다.
조헌정 목사는 "(조부의 친일행위에 대한 고백에 대해) 저 자신에게 괴로운 부분이었고 가족들에게, 자녀들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하는 아픔이 있다"며 "당시 많은 지인들과 목사들이 일제에 항거해 투옥과 죽음을 당한 것을 생각할 때 일제 전쟁의 승리를 빈 조부님의 부일 행각은 민족의 지탄이 되는 중차대한 죄임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교단 차원의 친일 고백과 회개를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장로교가 1948년 총회에서 1938년 일제하에서의 이루어졌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재차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이는 데 그쳤다.
김양선 목사는 1956년 한국기독교 해방 십년사에서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취소 결의 어디에서도 진정한 참회와 고백을 찾을 수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장로교는 1958년 제43차 총회에서 김 목사의 책이 교단을 모독했다며 출판금지 결정을 내리는 등 친일청산에 대한 비판마저 차단시켰다.
'한국교회 친일을 말한다'는 신앙의 양심을 지키다 숨진 기독교인들의 희생이 깃든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한켠에 자리한 권언호 전도사를 통해 신앙 회복을 촉구했다. 작은 시골교회 전도사였던 그는 일제의 종교탄압이 극심했던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설교를 했다가 천황모독 등으로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고문을 받았다.
권 전도사의 사위인 조명호 목사(평택 제일교회)는 장인의 평전을 펴냈다. 조 목사는 장인이 "삼천리강산이 다 감옥인데 내가 감옥에서 나간다고 풀려날 리도 없고 난 우상 숭배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며 일제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한 신앙인의 승리를 후대에게 전했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가르침과 교리를 부정한 친일 목사들의 승승장구로 인해 친미, 반공화 되면서 보수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빛과 소금의 사명보다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한국교회, 물량적 팽창으로 각종 권력을 갖게 된 한국교회가 진정한 국민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친일 고백과 청산이 급선무라는 지적이다.
2004/08/13 오후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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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미리내 | 2004/08/18 16:22 | 기독교의 개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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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truthking at 2004/08/26 13:17
일제말기 기독교의 친일행위와 삼신론이단옹호세력[1]색출 및 <뉴스앤조이>본질파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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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말기 기독교의 친일행위
Ⅰ서론
일제 말기 한국 개신교를 오늘 이 시점에서 볼 때,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전통과 유산, 그리고 부끄러워해야 할 오점은 무엇인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은 앞으로 계속 살려가야 할 것이고 부끄러운 것은 그것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 연구는 일제의 식민통치 말기 한국교회의 친일적 행위를 규명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따라서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통치의 실체와 한국교회의 친일적 행위를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일제 말 한국교회의 행태에 관한 현재까지의 연구는 대략 세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어 왔는바, 그것은 이 시기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등을 강요함으로써 '참담한 수난' 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일제의 박해와 한국교회의 순교정신을 부각시키고자 한 연구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개별적 친일 행위에 주목하면서 이 시기 한국교회의 친일적 성향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외적 요인과 함께 교회구조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에 있었음을 규명하고자 한 연구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역사는 충실한 사실을 제공하는데 힘써야 하며 진실해야 한다." 는 관점으로 이 시기의 '영광과 치욕'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자 한 실증주의적 연구이다.
이상에서 보듯 기존의 연구들은 훌륭한 연구 실적이지만 두 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오욕의 역사' 이기에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은폐론적 사고로써 다른 시기 연구보다도 소략한 연구상태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둘째는 이 시기의 부일 연구가 신사참배 문제에 편중되어 있어 부일의 전체적인 연구 실적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이 점에서 유념하여 연구하였다.
연구자료로써는 일본말기 친일행위를 소상하게 담고 있는 <기독교신문, 각 교단에서 발행한 신문, 신앙지>, <각 교단의 총회록> 등을 이용하고자 하며, 기타 관련 논문을 이용하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상의 자료와 기존의 연구를 주의로 하여
Ⅱ장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기독교라는 제목과 함께 친일행위의 개념과 구한말 일제시기 초기에 건너온 선교사들의 한국의식을 알아보겠다.
Ⅲ장에서는 기독교의 친일행위라는 주제 아래에서 황국신민화의 첫 걸음으로써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한국교회의 갈등, 그리고 이 정책에 협조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실태를 살폈고, 일부 친일적 지도자들이 한국교회에게 어떠한 방법으로 황국신민화 사상을 고취를 거쳐 이루어졌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며, 한국교회가 종전 이전 침략 전쟁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의 공급으로 징병과 징용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그리고 이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헌금, 출정 군인과 가족들을 위한 위문 행위, 군수품 헌납등의 규모에 관하여 기술하려 한다.
끝으로 일제 말 한국교회의 이러한 친일적 행태를 실증적 작업을 통하여 검토하려 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비판이 없는 역사는 환상으로 그 자체를 잃어버릴 것" 이라는 시각으로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하는 기독교사 연구에 한 사례를 제공하고자 하며, 기독교를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더 많은 부분을 부정적인 측면으로 볼 것을 미리 이야기한다.
Ⅱ.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기독교
1. 친일행위의 개념
우리 민족사에서, 일제 말엽의 친일행위는 학문으로든 감정으로든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다. 최근에는 많은 서적이 나왔지만 그들의 친일행위를 나타낸 것이지 '친일파란 어떤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간의 막연한 반응으로 나타난 친일행위에 대한 내용들을 몇 가지를 알아보면,
첫째, 오욕의 역사니까 건드리고 싶지 않다는 은폐론이다. 그러나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다. 또한 오욕으로 말하면 임란·호란 국치와 분단이 전부가 오욕이다. 계절에 사계가 있듯이, 민족사에도 영욕의 소장은 있는 것이다. 3·1 운동이 여름의 무정한 기록이라면, 친일은 참담한 동면이다. 동면기를 모르고 건국이라는 맹아기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친일은 결코 은폐의 대상일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당자나 가족의 체면을 위해서 덮어두었으면 하는 인정론도 있다. 그러나 사를 위해서 민족사를 파묻어 버릴 수 는 없다.
셋째, 친일행위를 인식공격의 자료로 삼으려는 경향이다.
그럼 친일행위란 무엇이고 친일파는 무엇인가? 건국후 우리 나라에서도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을 당한 후 독일에 접근하여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처벌을 완벽하게 처리를 하고 나라를 정립했던 것 같은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반민특위이다. 이 반민특위는 당시 소장파 의원들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초기에 활발히 움직이다가 이승만의 집요한 술책에 의해 결국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인하여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이때 이들이 친일파로 규정한 내용이 나오는데,
①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통모한자. ② 한국의 국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이를 모의한 자. ③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④ 일본 국회의 의원이 된 자. ⑤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한 자. ⑥ 중추원 부의장과 고문 또는 참의가 된 자. ⑦ 칙임관 이상의 관리가 된 자 ⑧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⑨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일제기관의 중앙간부를 지낸 자. ⑩ 군경으로 악질행위를 한 자. ⑪ 국내에서 비행기 또는 탄약공장을 경영한 자. ⑫관리들 중에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 ⑬일본국적의 취득을 위한 각 단체의 간부 중 악질 행위를 한 자. ⑭ 종교·문화·사회·경제의 각 방면에 걸쳐 반민족 행위를 자행한 자. ⑮ 반민 언론 또는 저술을 통해 일제에 협력한 자 및 특별히 개인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
로 규정을 하였다.
허나 이러한 친일파들도 다르게 생각해보면 또 하나의 시대적 피해자이다. 군대와 결탁한 총독부의 무한대한 권력 밑에서, 황도조선을 외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민족앞에 죄인이 되어 버린 소위 친일파들은 일제 통치의 참담한 제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살기 위해서 어쩔수 없었다는 변명이 통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어 전폐를 주장한 자, '일한합병 공로자 감사위령제'를 지낸 자, 창씨를 적극적으로 한 자, 선거법위반까지 해가면서 도회·부회 혹은 중의원에 출마한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이 정녕 살기 위해 부일을 한 자들인가?
황민화를 위한 탄압은 남녀노소와 유명 무명의 구별이 없이 누구나가 똑같이 당하던 악몽이었다. 해방은 되었고 사람들은 황민화의 탄압에서 벗어났고 새로운 나라도 탄생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친일파들이 끼친 해악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다.
고로 연구자는 친일행위라는 개념을 폭 넓게 보고 싶지는 않다.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 시대에 살았다는 이유 자체가 친일이라는 개념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김성수 같은 인물은 한편으로 문화재 보호자의 일인자로, 또 다른 면으로는 적극적 친일행위자로 규정한다. 친일행위, 친일파의 개념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삶을 지키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행위, 자신의 영달의 위해 자기민족을 죽음으로 내몬 극단적 행위를 친일행위라기보다 반민족행위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러한 예는 형사, 총독부 관리 등 적극적 부일자들이 해당 된다. 이들은 삶을 위한 행위가 아닌 반민족행위로 동포를 팔아먹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폭 넓은 개념을 사용한 친일행위를 사용하지 않겠다. 자신들의 영달의 위해 자신의 종교와 민족을 팔아먹은 이들의 행위를 친일행위 즉 반민족행위를 친일행위로 보고 서술해 나아가겠다.
2. 기독교 선교사들의 한국인식
일제말 개신교의 부일 행위를 알기 위해서는 한말과 일제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특히 초기에는 우리 나라 사람보다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교단을 좌지우지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이 당시 우리 나라의 상황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따라서 그 교단에 속해있던 우리 나라 사람들의 행동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이후에 교단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들의 평가는 현재 대체적으로 우호적이다. 근대적인 학문을 들여왔으며 그러한 학문을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었고, 병원도 만들었으며 서양과 접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다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맞다. 그들이 했던 행동들은 분명 그 당시 우리에게는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그리고 배워야만했던 내용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행동들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한번 뒤집어서 다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한말과 일제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면 아쉽게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당시 많은 미국인 선교사를 가지고 있던 개신교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선교정책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이 친선교사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미국은 일본과의 밀약을 통해서 한국에서는 대체적으로 정치적인 행동을 수습하는 단계였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대군주 폐하 탄일 경축회등의 민족적 행사등 정치적인 사안 등은 자발적으로 거행하였다기보다는 포교를 우선시한 선교사들의 의도대로 거행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행한 업적 중 하나로 꼽는 것이 근대화 운동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근대화 운동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선교수단이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는 등의 행동을 그들이 우리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 세웠다기 보다는 대체로 백인 우월주의에 빠져서 가난하고 못난 동양의 한 소국을 교화하는 차원의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를 들어서 한글로 번역된 성서를 배포하여 민족언어인 한글을 보급하고 그로 인해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은 개신교의 모든 선교지역에 해당된다. 개신교는 항상 선교지역에서 맨 처음 성서의 자국어 번역을 시도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 개신교가 세계 모든 지역에 산재해 있는 민족들의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성서의 자국어 번역을 각 민족의 민족의식 형성에 기여했다기보다는 복음을 폭넓고 확실히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학교의 운영에서도 그들의 행동은 민족교육에서 멀어진다. 사실 각 선교회는 개신교계 학교에 무엇보다도 종교적 교화의 기능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입신 출세와 학문습득을 위해 영어를 포함한 일반교과의 교육을 기대하였다. 즉 학생들이 일차적으로 희망하였던 것은 기독교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인 또는 국가와 결부된 근대적 학문이고 근대 교육이며 근대 문명이었다. 하지만 교회측에서는 영어를 정규과목에서 빼는 것을 골자로 한 개편을 시도하자 학생들이 반발하였고, 이에 배재학당은, 교사진의 대부분이 미국인 선교사이고 학생들에게 고등지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예비지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교재와 교과서가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교육제도 및 사회의식이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근대 학교에 어울리는 고등교육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즉 개신교계 학교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민족적 역량을 창출해내는 기능을 일부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친미적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개신교 교육의 반일적 측면을 곧바로 민족적 주체성의 확립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실학 이전의 숭명배청론이 지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신교 교육의 반일·친미적 성격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개신교의 근대화에 대한 기여를 반봉건이라는 측면에서만 살피고 개신교 활동을 전반적으로 민족운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개신교의 반봉건, 즉 근대화운동에 의해 한국문화의 정체성이 상실되었고, 나아가 서구문화에 대한 종속성을 조장해주었다는 이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일제의 통치가 시작되자 선교사들은 우리의 독립보다는 단지 그들의 선교가 우선이었다. 즉 일제의 정교분리원칙을 그들은 철저히 따르는 자세를 가지는 데, 그리하여 장로교 선교위원회 총무 브라운(A.J.Brown)은 일제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를 표명하였다.
"일본 통치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 거기에는 네 가지의 태도가 있다. 첫째는 적대요, 들째는 무관심이요, 셋째는 협력이며, 넷째는 충성이었다. 넷째의 충성은 내가 믿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온당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의 예와도 일치된다. 그리스도는 일본보다 더 악한 정부에 자기의 충성을 바쳤고 그의 사도들에게도 충성을 다하라고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울의 교훈, 로마서 13장의 말씀과도 일치된다. 평양에서의 한국 선교회에서 이 네 가지 입장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충분히 토의를 거듭한 결과 충성의 입장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또한 멕켄지(F.A.Mckenzie)는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과정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복종하라. 그리고 여러분 자신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 당신들은 지금 무력으로써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당신들의 자녀들을 교육하라... 당신들도 그들(일본인)만큼의 자치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
그리고 피셔(J.E.Fisher)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준법적이요. 수헌적(守憲的)인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을 뒤밀어서 일정(日政)에게 항거하거나 불복케 할 사람들이 아니다. 더구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게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근본 교리에 배치되고 따라서 그것은 죄가 된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정책이란 이름 아래 이와 같이 일본의 종교정책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정책을 비호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초기의 개신교가 부분적으로 '교'를 통한 '민족'의 구원을 바라는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정교분리 정책이 확립되면서부터는 전반적으로 민족구원의 신앙형태보다는 비정치적 개인 구원의 신앙형태로 전개되어갔다. 따라서 근대 개신교의 정교분리 정책은 결과적으로 개신교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민족주의 논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게 하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다음장부터는 이러한 사상을 가졌던 교단이 일제말 어떻게 부일행동을 하는가를 살펴보겠다.
Ⅲ.기독교의 친일행위
1.신사참배 강요문제와 기독교
a.기독교내의 갈등
처음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처음 거부하였을 때 그들이 내세웠던 논리는 민족적인 저항의 형태의 논리가 아니라 단지 십계명에 위배되는 우상숭배에 걸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이후 신사참배를 하였던 것을 정교분리의 형태의 종교적인 것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더 나아가 친일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행했던 행동들을 이렇게 규정하는 이유는 첫째로 신사참배를 '국민의 의례' 라고 강요하고, "신사참배를 우상종교라고 거부하는 것은 불경죄에 가깝다." 고 주장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계속적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의 목적인 종교적인 변절보다는 친일화로의 유도에 더 주력하여 아세아대륙에서 <신동아건설>을 위한 내선일체, 황민화 정책을 마련하고 그 거점으로 신사참배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신사란 일제 황실의 조신인 태양신(天照大神)과 나라에 특별한 공헌을 한 인물들인 전열장병에 참배하는 것인바, 일본인들이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종교행위, 국가의식이라기보다는 보양을 하는 즐거운 행각이었다. 따라서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전(前) 까지만 해도 한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만주사변은 <군국주의자>들에게 일본정부내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게 하였고, 아세아 침략의 명분을 주었다. 이어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키므로 일제에 대한 한인의 충성과 헌신이 긴급한 과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인을 보다 더 충실한 신민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한 가지 수단으로써 일제는 모든 한인이 신사에 참배하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므로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의 목적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여 국민정신의 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국민의례로서의 신사참배가 천황 중심의 침략전쟁을 위한 사상 통합이었고, 이것을 군국주의자들이 주체가 되어 대일본제국을 건설하는데 이용하였다.
일본 파시스트의 정신적 상징인 신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세워진 것은 1925년 10월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이다. 일제는 1919년 제국의회에서 조선신궁을 건립할 것을 결의한 후, 이 신사를 약 4년의 기간과 157만원의 돈을 들여 완공하였다. 그후 조선신궁은 총독의 공적 신사로써, 또는 국가행위에 사용하는 목적을 가졌기에 일황에 대한 충성의 장소가 되었다.
그후 1933년까지 신사가 급증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1935년 11월 평안남도 지사(知事) 안무직부(安武直夫)가 기독교 학교들에게 신사참배 할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한국교회는 대체로 거부하였다. 이때 정면으로 거부한 평안숭실전문학교 교장인 맥퀸은 1936년 1월 20일 교장직에서 해임되고 숭의여학교 교장인 스누크여사는 추방되었다.
이러한 강열한 저항에 부딪친 일제는 1936년 1월 29일 윤치호와 양주삼이 총독부 학무국을 찾아 갔을 때 국장인 도변(渡邊)은 " 신도의식은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민으로서의 의식이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예배행위가 아니라 조상에 대하여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행위다." 라는 설명을 통하여 교회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이해시켜 주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신사참배가 계속해서 교인들 사이에 문제화될 때, 감리교 통리사(通理使) 양주삼은 감리교보 제 39호에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으로부터 통보받은 내용을 전문 번역하여 실었다.
①신사의 봉사(奉祀)는 종교가 아니다. (신사와 종교의 주관부서가 다르다. 종교는 문부대신이 관장하고 신사는 내무대신이 관장한다.)
②각 개인의 신교는 자유다. (신사참배는 신앙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인바, 양통리(梁通理)는 신사참배가 신앙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示唆)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37년 그해 10월 모든 학교와 기관의 집회에서 공적으로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사>를 호창 할 것을 명령했다. 따라서 신도의식에 참가시키기 위한 일제의 강요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고도의 제국주의적 정책인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한국교회내에서는 신사참배에 대한 의견의 분열이 심각하게 나타났다. 신사참배가 하나의 국민적 의례로써 정치적 의미만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한국교회가 인정하듯이 종교적 성질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지, 또 설사 종교적 행위라 할지라도 교회를 폐쇄시키면서까지 참배에 거부 할 까닭이 있는지의 여부가 현안의 초점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신사참배가 애국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제의 회유 때문에 한층 더 깊어 갔다. 선교사들의 태도는 세 가지 입장으로 나타나는바, ㄱ.감리교회 선사들은 미온적인 태도 표명 ㄴ.미국 북장로교회 선부 소속 선교사들은 강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 ㄷ.언더우드등 일부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결의는 당연한 것이다." 라는 표명을 하였다.
이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내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과 교회들이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민족의 긍지를 가진 채 적극적인 투쟁을 하였다.
b.기독교 신사참배의 실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는 와중에서 <기독교와 시국>이라는 글에서는
「조선기독교도는 황국신민으로 이상 제(諸)행사를 충성스럽게 행하여야 할 것이요 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황국신민의 의무와 행사를 행하는 것과 종교를 신앙하는 신심과 하등의 틀린 점이 없는 것이다. -생략- 그러므로 황국신민으로 국가의 선조를 숭배하는 신사참배 곧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이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고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감리교회는 이미 총리사가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에서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다' 라는 공문으로 신사참배를 묵인하였으므로 이 두 가지 사건은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38년 2월 9일에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평북노회가 노회장 김일선에 의해 소집되어 선천에서 모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신사참배를 논의한 결과 '신사는 국가의식' 이라 하여 참배를 결의하였으며, 총회에 상정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고무적인 현상에 자신감을 얻은 일제는 가장 강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있는 장로교 총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수용을 총회에서 결정하도록 방법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평양기독교친목회> 지도인물 오문환, 이승길, 김응순, 장운경 등을 1938년 5월에 일본에 다녀오게 하는 회유책을 썼으며, 6월에는 일본기독교 의장 도미다(副田滿)을 초청하여 평양시내에 있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을 집합시켜 신사참배 강연을 듣게 했다. 그리고 평양 기독교친목회를 통하여 신사참배 결의에 성공할 수 있도록 조종하였다. 또한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들을 사전에 검속(檢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총회가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렸다. 회무중(會務中) 평양, 평서, 안주 삼노회 대표 박응율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 라고 하면서 참배 결의와 성명서를 채택을 제안하자 한국과 함께 살아왔던 장로교가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 는 결의를 하였다.
「아등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은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여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하고 추이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통후(統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成)을 다하기로 기함.」
결국 한번 굴복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기관, 지도자 할 것 없이 붕괴되어져 갔다. 1939년 6월 8일 전북노회는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외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교역자 등 150여명이 전주신사에 참배했다. 동년 9월 27일에도 진주의 27개 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신사참배 결정과 행동에 대해 강한 반발이 일어났는 바, 장로교총회중 크로더스 목사외 25명의 연서로 "총회의 결의는 헌법에 위배된다." 는 항의 등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40년 7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하여 검거한 수가 2,000여명이나 되었고, 50여명이 순교하고 나머지는 해방후 풀려났다.
감리교회에서는 목사직을 파면, 면직, 정직, 강제로 사임케 된 목사들이 50여명 있었다.
이러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강하게 나타나자 「청년」지 주필인 강백남은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님> 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근래에 국가의식 즉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조선교회에 막대한 동요가 있었음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라고 전제한 후, 「-생략- 기독교인은 그러한 의미에서 참배함은 절대로 아니요, 국가의식에 국민의 의무로서 참배함이 당연할 줄로 각오(覺悟)하고 시인한 즉 양심이 평안하고 충군 애지심국(愛之心國)이 날이 감을 따라 두터워 집니다. 그런 즉 신사참배하는 일을 우상숭배라고 한다면 이는 불경죄에 가깝다고 말하여 둡니다.」라고 신사참배를 지지하였다.
결국 1938년 27회 장로교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정과 김종우· 양주삼(감리교대표), 김기찬·홍택기(장로교 대표), 이명직(성결교 대표) 등이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 하므로 신사참배 논쟁은 일단락 되고 이후부터의 한국교회는 집회나 행사 때 마다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의 일환으로 실시하였다.
고로 교회의 최고 상회기관인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매 총회 때마다 시행하여, 중요한 집회에서도 신사참배를 하므로 한국교회는 완전히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협조해 가는 모순을 낳았다.
이후, 새로운 단계의 신사참배의 형태로 변하는바, 적극적이고도 다양한 방법, 참배자의 수가 대폭적으로 늘어났다.
일제는 1940년 7월 30일 부여신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는 바, 국체명징(國體明徵)과 내선일체의 선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총독 미나미(南次郞)은 내선일체의 역사가 멀리 백제시대에 소급한다고 해서 <일선동조동근론>을 주장하여 백제와의 교섭이 깊었다는 응인천황, 제명천황, 천지천황, 신공황후의 영을 모시게 하였다.
이 신궁 건설에 한국 지도자들을 노력 동원케 하는 일제의 의도는 노력 동원으로 작업의 큰 진전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을 노렸다는 점이다. 1941년 6월 17일 국민총력 조선야소교장노회총회연맹이사장(朝鮮耶蘇校長老會總會聯盟理事長) 이름으로 부여신궁 근로봉사단원 모집에 관한 공문을 각 노회대표 앞으로 보냈고 동년 10월 30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다음 날 7시 부여에 도착하여 노동봉사를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근로봉사대원은 경성노회외 22개 노회에서 대표로 참석한 김형준회 73명 이었다.
감리교 또한 1941년 10월 9일 경기교구를 대표하여 27개 교회가 노동봉사대원 51명을 신궁 건설에 참여케 하였고 1941년 1021일 교단연맹이사회에서는 5개 항목을 결의하여 각 교구와 교회에 하달한 내용 중에서 경기교구외 다른 교구의 목사, 신도대표 각 4, 5인씩을 근로봉사 할 것을 지시하였다.
1943년 3월 3일에는 장노회총회 대표 김종대 등이 일본기독교 제 1회총회에 참석하여 윤세신궁을 참배하였다. 이어 5월 11일 의산노회 소속 교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28명이 일본으로 성지참배를 떠나므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절정에 다다랐다.
이상에서 나타난 신사참배 문제에 관하여 몇 가지 정리를 하면
① 신사참배는 일제의 강압만으로 된 것이 아니고 일제에 의해 회유되고 매수되었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② 신사참배는 신앙양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 행위가 곧, 일제에 투항, 친일을 하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이유는 신사참배를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후 갖가지 친일행위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인식된다.
③ 흔히 신사참배 거부는 종교적 동기에서 시작된 항거이라고 하지만 일제의 계속적인 회유로 인하여 부일의 밑거름 이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④ 하지만 또한 많은 목사들과 신도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투옥되기도 하여 일면으로 기독교가 신사참배에 관하여 무저항적인 친일행위를 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2.황국신민화 정책과 기독교
a.기독교의 황국사상의 고취
일반적으로 지배국의 식민지 민족에 대한 사상적 세뇌는 토착민의 민족적, 문화적 독자성을 멸시 내지 말살하는 것이 그 공통점이 되고 있다. 일제는 한민족에 대한 통치정책을 소위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전쟁 정책에 중점을 두었으며, 이 일을 위해 철저한 사상통합을 진행하였다.
일제가 의도한 사상통합의 정책을 조직적으로 추진한 사람은 제 7대 총독 미나미(南次郞)이었다. 그는 1936년 8월 총독으로 취임하기 전에는 관동군사령관이었었고 일본정부내 군국주의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내선일체>를 강조하였는 바, 1938년 2월 22일 도지사회의중 말한 내용에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조선인의 완전한 황국신민화에 의한 내선일체를 조선 지배의 근본으로 하고 그것에 의하여 조선을 대륙병점기지화하여 아세아 침략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에 그는 더욱 황민화의 실질적 집행을 위하여 광분하였다. 미나미(南次郞) 일명 <조선통치 5대 지침>의 정강을 발표하였는바, 이 지침은 국체명징, 내선일여, 교거진작(敎擧振作), 농공병진(農工倂進), 서정별신(庶政刷新) 등으로 일제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실천방법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宮城遙拜), 국가국기의 존중, 일본어의 보급 등을 요구하였다.
또한 일제는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조직하여 황국정신의 현양(顯陽), 내선일체의 완성, 전시생활혁신, 전시경제정책에 협력, 근로보국, 생업보국, 군인원호강화 등을 부르짖게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조직 강요에 1939년 9월 8일 장로회는 신의주 제 2 교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장로회연맹 결성식(궁성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 황군장병 및 동양평화를 위한 기복)을 갖고 선서를 하였다.
대체적으로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는 정부는 종교를 대함에 있어서 정책적 요소를 갖고 있다. 그리하여 ㄱ.종교가 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종교로 하여금 기존하는 정부의 기본적 정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시킨다. ㄴ.종교를 통해 그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게 하려는 기능적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한다. 일제는 이러한 종교정책을 통하여 한국의 기독교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1)신앙지와 교계신문
「활천」(성결교회 신앙지)은 1939년 12월 <팔굉일우의 대원리>이란 사설에서 「팔굉일우의 대이상은 일본제국의 건설 정신이요, 이상이다.」라고 정의 한 후, 일청, 일로전쟁과 만주사변을 이 사상을 사실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미나미 총독이 강조하는 내선일체도 바로 이 정신을 고조하는 것으로서 이 정신이 황도정신이요, 동시에 성경정신이라고까지 극찬하였다.
1940년 2월호 <황기(皇紀)이천육백 기념식년에 당하여>란 사설에서는 「우리는 황기이천육백년을 당하여 황조황가의 성덕을 흠향(歆饗)하며 천황폐하의 성수무강(聖壽無彊)을 봉축하는 동시에 -생략- 더욱 조국 정신을 발양하며 황운부익(皇運扶翼)의 실을 거함으로써 국운무한의 발전에 진할 것을 맹서하자」고 하였다.
「청년」(감리교계통의 신앙지)은 윤치호의 <내선일체에 대한 사견>이란 글을 실었다. 이 내용은 「현재의 내선일체는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으로는 가히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정신적인 내선일체는 아직 미흡한 바, 황국신민서사의 2조 "우리들은 합심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다한다."를 이루는 것이 시급하며 또 하난 천황폐하의 적자가 된 형제 의식을 갖고 서로 믿는 일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하였다.
「기독신보」(장로회)는 1937년 10월 12일 <기독교인의 국가봉사>라는 사설에서 「기독교인은 여력이 다하도록 황실을 봉재하며 만분의 일 이라도 황은에 봉답하며 국운을 유성하게 함이 의무이다.」라며 황운(皇運)을 부익(附益)하자고 했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각 교파에서 발행하던 기관지들을 강제 폐간시키고 일제의 정책을 전시하 지시, 전달 하고자 하는 의도로서 <기독교신문>을 창간케 하였다. 동년 4월 18일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회의실에서 기독교신문협의회 창간 제 1회 이사회가 열렸다. 창간 이사회는 총독부 경무국 이사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 동과 검열계 주임이 참석한 가운데 장노교에서 3명, 감리교에서 2명, 성결교에서 1명, 구세군(救世軍)에서 1명 등이 참가하여 1942년 4월 29일 창간호를 냈다. 창간된 기독교신문의 강령에서 발행취지와 목적을 열거하고 있는 바, 황민화적 내용으로 분류될 수 있는 내용들은
①반도기독교내 국민총력운동의 강화
②종교의 국민정신진흥과 국민사상 계도
③필승체제의 확립에 관한 계도
④내선일체 완성과 국어생활의 철저 등이다.
2) 예배 및 행사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서도 황국신민화적 내용이 포함되어 가는 이질적 현상이 나타난다.
예배에서는 황실융성을 위한 기복, 전승기원예배 등으로 이질적 내용으로, 행사에서는 주로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천황폐하 만세, 그리고 시국강연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또한 예배와 회의도 단축 또는 간소화 형태로 진행되었는 바,
제 36회 전북로회에서는 구주탄생일은 대정천황제일이므로 24일로 변경하여 간소한 축하예배만 드릴 것이며, 매주 3번의 집회는 단축하여 당분간 1회만 할 것을 소속 교회들에게 제시하였다. 감리교회는 '교단 규칙 제 108조와 114조에 의한 상임위원회는 총회를 대신하고 구성임원회는 교단회의로 하고, 금년 2월 개최하려던 정기교구회 및 금년 4월에 개최할 정기총회는 무기한 연기한다.' 고 발표하였고 예배시간 단축실시에 관한 이유를 「한 시간이라도 노동시간을 늘여 생산에 매진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방법론으로 주일 밤에 모이는 예배를 1회로 단축하고 기타 예배는 그 교회의 사정에 따라하고 당국의 요청에 따라 시간을 변경하는 조치를 교회주관자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협조를 요청했다.
3)찬송가
1907년 6월 20일에 발행된 「찬미가」는 15곡이 수록된 찬송이었다. 이 찬송 중에는 애국사상을 고취 시킨다는 일제의 생각에 의해 3장의 찬송가가 있었는데, 1장 4절, 10장 2절, 그리고 14장이었다.
그후, 1923년에 간행된 「청년찬송」은 일하러 가세(남궁억), 금주가(임배세) 등이 실려 있었다. 1931년에는 각 교단이 찬송가 합동문제를 논의한 결과 장로회, 감리교 두 교단에서 주관하여 「신정찬송가」를 만들기로 하고 편집, 발행하였으나 감리교회에서만 사용하고 다른 교단에서는 기존의 찬송가를 보완하여 사용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황민화 현상이 시급해 진 일제는 찬송가를 변형시키는 일에 착수하여 먼저 '일하러가세'와 '금주가'를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고 신정찬송가도 삭제와 가사를 바꾸게 하였다.
1943년 5월에 조선야소교장노회(朝鮮耶蘇敎長老會) 종교교육부 주관으로 기존의 찬송가를 전체적으로 개편하였는 바, 새로 개편하는 이유와 목적을 「복음이 전파된지 반세기를 넘어 서면서 대동아공영권의 획기적 역사의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게 될 때, 본 성가에 대하여도 국체를 중심으로 한 재 검토의 시기에 이르렀다. -생략- 이러하기에 당국의 지도하에 거의 반년의 세월을 들여 본 성가에 있어도 재삼 검토를 하여 국체에 일치하도록 가사를 수정함은 물론, 특히 권두에 국가(國歌)와 유미유까바, 국경절(國慶節)에 부르는 노래, 국민서사 등을 실어 특수한 집회시마다 국민으로서의 필요한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서만 이루워졌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4)지도노선
감리교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지도노선은 「기독교조선감리회 혁신조항」에 잘 나타난다.
제1. 사상지도
① 신동아 건설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철저히 인식케 할 일
② 기독의 일가주의가 팔굉일우에서 구현됨을 철저히 인식케 할 일
③ 충군애국정신을 철저히 인식케 할 일
제2. 교학진작 ①항 국어보급(國語保給)
제3. 사회교육 ②항 황도의양(黃道宜揚)
통리자(通理者) 정춘주가 각 교회주관자 앞으로 보낸 공문에서도
① 매월 8일 대동아 전쟁에 관한 봉재식을 거행할 것
② 예배시간을 노동봉공에 지장을 주지말 것
③ 애국헌금 기타 국민의 의무 수행에 성의를 다할 것 등으로 교단 차원의 일로 협조를 요구했다.
장노회의 지도노선도 「일본기독교조선장노교단 실천요목」에서 잘 나타나는 바,
제1. 국가에 봉공
① 대동아 전쟁의 목적 완달(完達)을 위하여 사상 완벽을 기할 것
② 전시 체제하 국가적 요청에 청헌(請獻)할 것
③ 징병 의무 및 정신을 강조 할 것
④ 통후봉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실시할 것
ㄱ)황군상병장병(皇軍傷病將兵) 및 가족 위문, ㄴ)군사지원사업, ㄷ)국민저축실시, ㄹ)귀금속류 헌납, ㅁ)전시노동봉사 ㅂ)매월 일정액 국방헌금 ㅅ)신사참배 및 필승 기원 등을 실천으로 옮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상과 같이 황국사상을 고취시켰던 일들은 주로 교단의 집행부에서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다.
b. 한국교회의 일본적 기독교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교회중의 하나인 조합교회(組合敎會)를 한국에 상륙시켰다. 1913년 8월 15일 서울에서 제 1회 일본기독교조합교회 한국대회가 개최된 이래 이 교파는 철저한 침략주의에 앞장섰다. 조합교회는 조선총독부와 일본 재벌들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 조합교회가 한국내에서 주로 한 일은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인식시키는 동시에 한일동조론을 내세워 일제의 어용적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갔다.
1939년 <종교단체법>이 군국주의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일본국회에 제출되자마자 통과되었다. 종교단체법의 형식상 내용은 국민정신의 선도에 종교의 역할을 평가하고 종교의 지위를 명확히 하며, 종교를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 정책에 교회가 보조를 맞추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국가의 이름으로 교회를 탄압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일제는 일본 교회를 이용하여 통치의 편의상 한국교회와의 통합을 추진케 하였다. 우선 교회수 50, 신도수 5,000명 이상의 교회만을 문무성에 등록하게 하였다. 이렇게 한 결과 일본의 3대 교파인 일기, 조합교회, 감리교와 일곱 교파만이 문무성에 등록케 되었다. 일제는 이들 교파들에게 한국교회와의 합동을 추진케 하였는 바, 이렇게 한 의도는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예속시켜 침략전쟁에 순응케 하기 위해서였다.
1)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
1938년 10월 3일 제 3회 조선감리교 총회에서 일본감리교회와의 합동을 결의한 후, 1939년 10월 19일부터 열리는 일본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양주삼 등 7명이 기차편으로 서울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10월 18일 동경 청산학원안에 있는 해리스館에서와 가마쿠라 목사관에서 모여 합동에 관한 8가지 조상의 결정을 하였다.
결정한 사항을 요약하면 내선일체, 황도의양을 위하여 양측의 교회가 합동은 하되 곧 추진할 것과 양 교회의 친선에 관한 것들이었다.
성결교회는 「활천」1940년 5월호에서 이사장의 일본교회와의 합동문제에 관한 결과 보고에서 「일본성교회와 우리 성결교회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보아 형제간이라 할 것인데 지금까지 별반 교통이 없이 지내 왔으나 내선일체가 실현되어 가고 각 교파가 내지와 조선이라는 구별을 잊게 연합 또는 합동문제가 회합 때마다 제출되는 마당에 왔다. 이것은 정치의 의미가 포함되지 않고 오직 신앙의 입장에서 친밀하게 하고자 하는데 있다.」고 전제 한 후, 「동경에 가서 일본성결회와 동일하게 교회명을 변경하는 일, 교역자를 서로 교환하는 일, 년회에 서로 대표를 파송하는 일 등이 체결되었고 제반 문제는 양 교파에서 3인씩 연구위원을 두어 구체적으로 연구중이다.」라고 보고하였다.
2) 조선기독교 연합회
일본교회와의 합동을 통한 예속화와는 별도로 일제 한국교회 안에서의 교파합동을 위에서와 같은 목적으로 추진하였는바, 먼저 1938년 5월 8일 년 후 2시, 서울 부민관에서 총독부 학무국장, 경기도 지사, 경기부윤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인 목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경기기독교연합회 발회식>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임원을 맡은 사람은 정춘주, 김우현, 신재명, 김종우, 원익상, 장홍범이며, 81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황궁요배, 황국신민서사등의 시순을 진행한 후, 성명서를 발표한 바,
「현하 아국시국의 중대성을 감(鑑)하야 국시(國是)를 체(體)하며 국민정신의 진작을 도(圖)함은 가장 긴급사임을 인하고 자에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 협력하야 동포의 정신작흥에 자(資)하고 일층 전도에 정진하야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의 성(誠)을 치(致)하기를 기(期)함」
경성기연(京城基聯)의 성격이 성명서의 내용에서 나타나며 이 모임으로 인하여 교회일각이 굴복하자 지방의 연합회와 각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1938년 7월 7일에는 <조선기독교회합회>가 기독교의 황민화, 내선일체의 완성을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는 바, 김종우, 차재명, 원익상, 이명직, 김우현, 윤치호, 장홍범 등과 경성에서 30명, 지방에서 30명의 목사들이 참여하였다.
3)조선기독교 혁신교단
일제는 1943년 4월, 서울에 있는 친일파 목회자들과 감리교를 주축으로 하여 조선혁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 모임에 장로회의 윤인구, 최석주, 전필순이 참여하였고 전필순이 의장이 되어 교단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런데 경성노회 김영주 목사는 경성노회에서 혁신교단에 참여하기고 결정한 일이 없다며 전필순 목사의 제명론이 거론되자 의장직을 사임하였다.
혁신교단에서는 일제가 눈에 가시같이 역기는 구약의 출애굽 사상과 신약의 예수의 해방적 교훈과 행동을 제거하려 하였다. 또한 위의 내용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을 빼며 묵시록을 제거하였으며, 복음서에서는 산상중훈만이 경전이라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혁신교단의 주축이 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내에서 혁신교단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이 일기 시작했고 결국 혁신교단은 몇몇 친일자의 모임으로 유명무실해졌다.
4)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
1942년 12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제 2회 정기총회에서 통리자가 된 변홍규 목사는 혁신교단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으므로 일제는 공작 끝에 변목사를 사임케 하고 친일적인 교단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교단명칭을 바꾸고 교단규칙을 제정, 발표하였다.
규칙 내용에서 「1943년 8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다시 혁신을 단행하여 명실공이 대 일본의 종교임을 밝히게 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어 1943년 10월 14일 <교단규칙실시방법 통달의 건>에서 각 교회 명칭을 변경하라고 제시했다.
5)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장로회 역시 혁신교단 문제로 진통을 겪다가 1943년 5월 4일 피어선 성서학원내에 있는 장로회 총회사무실에서 당시 총회장 김응순에 의하여 제 31회 총회에서 선출된 상치위원(上置委員) 및 그리고 헌법개정위원, 교파합동위원들이 모여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초안을 심의하는 줄 알았으나 이본기독교조선교단안이 나오자 논란이 심하였다. 그러나 김응순이 규칙초안은 총독부 보안과의 검인을 이미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찬반이 엇갈려 회의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다음 날 제 2차 회의에서 규칙안을 수정없이 통과시켰고, 다만 채필근이 제안한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명칭만은 수정하자는 것으로 가결하였다.
1943년 5월 7일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의 총회 임원과 의장이 선출되었는바, 통리(通理)에 채필근, 부통리(副通理)에 김응순, 총무에 김종대 목사가 되었다.
교단 총회 임원에는 의장에 조승제가 선임되었다.
이날 오후에 이들의 취임예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종교정책에 잘 길들여진 교단으로 변절하였다.
1941년 심명섭(감리교 본부위원)은 「교파합동에 기함」이란 감리교보사설에서 「교회내 분파적 항쟁을 자성 회개해야 한다.」고 전제한 후, 「교파마다 특색과 습관이 있겠지만 겸양의 태도로써 노력하면 난(難)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제시했다.
1943년 9월 부전(富田, 일본기독교단 대표)은 조선호텔로 각 교파 간부들을 초대하여 한국교회의 합동을 강조하였는바, 이 모임에 참석한 각 교파대표들은 박연서, 이동욱, 최지화,정인과, 전필순, 이명직 등이었다.
이들의 회동 이후, 장로회단은 1942년 10월 16일부터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린 제 31회 총회에서 <조선내 기독교 교파합동의 건>을 가결하고 그 교섭위원 선정은 중앙상치위원에게 일임한다고 결정했다.
감리교단도 동년 12월 2일에 열린 제 2회 총회에서 교파합동을 가결하였는 바, 합동에 관한 명분을 「그리스도 정신에 기인하여 조선기독교 각파를 합동하여 단일교단을 조직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교파합동 전권위원 8인을 선임하여 타 교파와 교섭할 것을 결의했다.
1943년 1월 12일 조선기독교 교파 각파 합동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제 1회 모임을 중앙교회에서 가졌는바, 모인 교단은 다섯 교단(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일기(日基)조선교구회)으로 김자종대(金子鐘大)의 사회와 국민의례, 기도(이명직 목사)로 시작하였다. 다섯 교파들이 합동키로 하여 다음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 합동의 범위
② 준비위원 비례 : 장로회(9명), 감리교(9명), 성결교(4명), 일기조선교구회(4명), 구세군(4명)
③ 제 1차 준비위원 모임 : 1월 26일, 새문안 예배당
④ 합동 임시군무소 : 정목장로교회 사무실
이 준비 모임에서 결의한 대로 1943년 1월 26일과 3월 16일에 열린 두 번에 걸친 회합을 새문안 교회에서 모였으나, 각 교파마다 역사가 다르고 교리적 배경이나 교회법이 달랐기 때문에 합동문제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각 교단의 상황속에서도 일제는 재차 교파합동을 요구한 바, 1945년 7월 19일 교파합동 찰핍위원회를 정동교회에서 열어 장로회 대표 27인, 감리교 대표 21인, 구세군 대표 6인이 참석하여 교파합동을 추진한다는 합의가 이루워 졌고, 1945년 8월 1일에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을 조직하였다. 이때 위임진은 투표에 의해 선출하려 하였으나 총독부가 요구하는 대로 김관식 목사를 통리로 동의하였고, 총독부 정무총감 고오도의 치리(治理)를 받게 되었다.
3.전쟁동원과 기독교
a. 징병, 징용에서의 역할
1) 징병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부터 전쟁 인력의 부족을 느껴 지원병의 형태로 한국 청년을 전쟁에 이용하기 위하여 육군특별지원병령을 1938년 2월 2일 칙령 제 95호로 공포하고 동년 4월 3일부터 시행했다.
지원병 실시에 윤치호는 지원병제도를 실시히여 조선인들을 믿어 주신데 대하여 크나큰 감격과 감사를 느낀다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면서, 다만 염려되는 것은 당국의 신뢰에 관연 조선 청년들이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릴까 걱정이라면서 청년들에게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지원병 모집 내용은 지원병을 전후기 합쳐 400여명을 선발해서 훈련시킨다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발표에 의하면 1938년 8월까지 약 3,500여명의 지원자가 살도(殺到)해서 6.7 : 1 이란 높은 지원율을 기록했고, 징병령이 실시되기 이전인 1943년까지 약 1만 8천 가량의 한국 청년이 일분군에 지원 입대하였다. 이들 가운데 일시적 흥분으로 철없이 지원한 경우도 있었지만
① 농촌 피폐에 못 견디어 살길을 찾아 지원한 경우
② 일제의 교묘한 술책에 현혹되어 지원한 경우
③ 지원병 제도를 찬양한 이른 바, 지도자들의 강력한 권유로 지원한 경우였다.
①의 상황은 농촌 생활의 궁핍으로 노동 이민으로 가는 것보다 차라리 군대에 간다라는 생각을 하여 지원을 하는 사람들로서 증가의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②의 경우는 ㄱ.지원병 축하회등 분위기를 형성하는 작업 ㄴ.신문등을 동원하여 선전케한 바, 지원병에 입대하여 최초로 전사한 이인석에게 훈장을 추서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③항은 대개 지식인들이 참가했는데, 강연회 개최, 선동적 활동 등을 통해서 지원병 모집에 광분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주로 시국강연반을 구성하여 전국을 돌며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동아안정 세력으로써 일본의 지도적 위치를 인식시켰는 바, 약 1주일 또는10일 정도의 일정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주로 강연을 한 자들은 김영섭(감리교 목사), 김우현(장로회 목사), 양주삼(감리교 총리) 등이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1940년 1월 이후, <1정(丁)연맹 1명>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강연회, 좌담회등을 통해서 지원병 권유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감리교회에서는 1940년 9월에 발표한 <기독교조선감리회 혁신조항>에서 「교도들이 지원병에 다수 참가할 것과 교도들에게 병역의무를 철저히 인식케 할 것」을 각 교회주관자들에게 협조 요청을 하였다.
일제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 전쟁이 시작되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미국과 관련이 깊은 교회에 대하여 먼저 미국을 증오토록 유도케 한 바,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교계 대표들이 모여 미, 영 타도 좌담회를 개최케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양주삼외 17명이었으며 좌담회 내용은 미, 영에 대한 비방일색이었다. 미국과 영국에 대한 비방은 일본의 전쟁정책에 의한 협조적 색채가 강하게 난다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몇 안되는 진실한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을 오히려 미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로 공격하는 모순도 보이고 있다.
<표1. 미·영 타도 좌담회 참가자 및 화제내용>
<최원규 엮음. 일제말기 파시즘과 한국사회. 서울: 청아출판사, 1988 p291-341>
1941년 12월 10일,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부민관 대강당에서 결전보국대강연회가 열렸는 바, 신흥우는 「세계의 교란자는 누구인가」라는 강연 중 「한번 결전하는 이상 제국 행로에 종(腫)으로 있는 적성국가는 분쇄시켜 세계 인류의 참된 평화와 신동아 건설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라고 전제 한 후, 여기 모인 제군들은 세계의 교란자가 누구인가를깊이 인식하여 그 책임자를 격멸(擊滅)하자고 결론을 지었다.
또 한동년 12월 27일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열린 <부인대회>에서 김활란은 <여성의 무장>이라는 강연을 하였는 바, 「흑노(黑奴) 해방의 싸움을 성전이라 했고 십자군 싸움도 성전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성전은 정말로 내려진 것이다. -생략- 희생(犧牲)의 투구를 쓰고 적성(赤性)의 갑옷을 입고 긴장과 자각으로써 허리띠를 매고 제 1선 장병과 보조를 같이하여 미·영을 격퇴하여 버리자」고 호소했다.
전쟁이 확산되고 전선에서 전황이 치열해 지자 일제는 결전 비상조치를 취했는 바, 1942년 5월 8일 총독부는 조선동포에 대하여 1944년부터 징집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한다는 결정이 보도되자 친일자들은 일제히 환호를 올렸다. 그리하여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견해표명, 감사예배, 결의대회, 감사전문 보내기 등을 대규모로, 계속적으로 해 나갔다. 사실 이러한 제도가 생길 때마다 친일자들은 감격해 하였다.
윤치호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축하 메시지에서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와 각오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 얼마나 감격적인 소식입니까 -생략- 오늘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되니 오늘부터 우리는 내지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보조하여 대동아 전선에서 싸우게되는 감격을 새롭게 가지게 되며 온 반도인들은 오직 감격해 사모(思募)칠 것이다.」 라고 축하의 변을 토했다.
1942년 5월 11일 각 교파 연합으로 승동예배당에서 <징병제감사기독교 신도대회>가 1,000여명의 신도들과 창무(創茂) 조선군 보도부장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신도대회 내용은 국민의례, 감격사, 결의(수상 이하 관계당국에 감사전문을 타전), 강연(보도부장 : 징병제를 실시하게 된 경위, 고미(高尾) : 일제의 이상), 성명서 낭독, 성수만세(聖壽萬歲) 등으로 이어졌다.
성명서에서는 「30여년간 조선 시정(施政)중 최대의 업적이며 내선일체 이념에 현실적 요소를 넣은 것이며 황국신민의 대도가 열린 것이다. -생략- 이 감격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황국신민의 감격을 표했다.
감사전문은 「조선 청년에 대해서 징병제 실행의 결정에 아등은 감사 감격한다. -생략- 황은에 대하여 맹세코 받들어 보답 할 각오이며 일사순국(一事殉國)의 결의를 나타낸다.」는 의지를 전문에 담아 보냈다.1942년 5월 16일 야소교성결회(耶蘇敎聖潔會) 이사장 이명직의 이름으로 각 교회주임교역자에게 보내는 <반도에 징병제도실시 축하의 건>이란 공문에서 「천황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 하시는 성지를 인하여 징병제 실시를 강조하면서 축하회를 개최하되 당국에 문의하여 지도를 받아 형편에 따라 식순을 가질 것, 축하예배 순서는 경계, 국가봉창, 궁성요배, 성명서 낭독, 감사전보, 황국신민서사 제창, 천황폐하 만세」를 넣도록 하였다.
뒤이어 1942년 5월 17일 경성지역 성결교회 연합으로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성결교신도대회를 열고 징병제 축하강연회를 갖고 성명서를 채택하였는 바, 요약하면 「반도에서 징병제 실시 방침확립은 내선일체의 구현이며 2천 4백만 동포는 기쁨과 감격에 달했다. 성결교 신도들은 신명을 바쳐 대동아건설에 만전을 기하며 무궁한 황은에 감사하여 봉공하며 진충보국을 결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재경(在京) 구세군단원 연합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 강연의 밤을 열고 감사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각 지역별로도 징병제 실시에 대한 대회들을 개최하였는 바, 진남포 지역에서는 구세군 서선지방 본부 주최로 1942년 5월 17일 중앙회관에서, 동년 6월 8일 해주에서도 강연회와 국방헌금, 그리고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6월 10일 용강에서는 평서로회 주최로 징병제도 축하식을 거행하였고, 6월 17일 청송군 현동면 도평 장로교회에서도 징병제 실시 감사회를 열었다.
장로교 제 31회 총회에서 총간사 정인과가 보고를 한 바, 「1943년 2월중 본부 주최로 대동아전쟁의 목적과 기독교도의 의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연사를 파견해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자 하며 징병령 실시를 철저하게 촉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신문 이사 박인덕은 <징병제 실시와 반도여성의 각오>란 사설을 실었고, 조선구세군본부의 회원정의(檜原正義)도 <열혈남아는 결전장으로 나서자>란 촉구문을 실었다.
<표2. 친일자들이 징병을 위한 활동>
<임종국,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 p172-217>
2)징용
일제가 제 2차대전에 총력을 기울임에 따라 군대의 증강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력 또한 청장년의 대량 진출에 인력난과 군수산업의 폭발적인 노동수요 증가는 1942년부터 '국민동원계획'으로 수정 강화되었고 1943년 10월 8일의 '생상증강노무강화대책요강'은 국민 징용령에 의한 유휴불급(遊休不急)노무의 전면도원의 전용과 근로보국대의 강화, 군 비복무자의 노무동원과 여자노무의 대체이용 강화 등을 규정한 것이었다.
징용은 현원징용(現員徵用) 및 친규징용(親規徵用)으로 대별되며, 친규징용은 특수징용과 일반징용으로 구분되는바, 한국에서는 일반징용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이유는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드 끌어가려는 계획이었다.
이러한 강제적 연은 상부로부터 일정한 숫자를 할당받은 면사무소의 노무계 담당자와 마을 구장(區長)등이 계획을 세워서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곧바로 징용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일을 일본인도 아닌 말단의 부일한국인의 행패가 더욱 심하였다.
강제로 연행하기 위한 집단적이고 조직적 방법인 국민동원 계획에 의한 동원을 하였다. 하지만 목표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원인이 조선총독부 보고서에 나타나고 있는 바, 「최근에 일반징용의 실시가 발표되자 일부 지식층 및 유산계급 중에서 재빨리 도피하거나 혹은 주거를 전전하는자, 그리고 병(病)에 걸리게 하여 자기의 수족에 상처를 내어 불구자가 되어 징용을 기피하는 자들이 생겼다.」는 보고를 한 사실에서도 파악된다.
이 보고서에서 징용의 처참한 현상이 나타나는 바, 민심의 이러한 동향을 외면하면서 친일자들은 국민개로(國民皆勞) 산업보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징용동원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교회내에서도 나타나는 바, 기독교신문은 1944년 1월 25일과 2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국민징용령이란 무엇인가? 라는 내용을 연재한 바, 「징용은 병역에 다음가는 중요하고도 영광스런 의무이기에 징용된 사람은 충성을 다하여 명한 바 일에 충실하여야 되는 성스러운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징용
Commented by 송재근 목사 at 2015/04/22 01:56
이런 내용들을 절대로 삭제하지 말아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압력에 굴복하여 많은 참고 자료들이 삭제되어서 너무 안타갑습니다.
일제 말기에 변질되었던 그때 보다 지금은 더 많이 변질되었는데 교회들이 타락의 잠에서 깨어
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을 짓밟도록 인도하고 기도를 하지 않는 분위를 만들어 주고
예수는 구원에 이용이나 하려고 하는 그런 신앙들이 한국교회를 쓰나미처럼 덮어 버렸는데
이글을 읽는 분들은 기도를 하십시요 누가 어떻게 해도 주님은 뜻은 이루어 진다. 할렐루야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김교신은 누구인가?
교회, 교리의 무덤에 갇힌 기독교 : 김교신은 누구인가?
김교신은 누구인가?
- 가톨릭 교우들의 카페 어둠속에 갇힌 불꽃 (http://cafe.daum.net/bulkot) 교회쇄신 게시판에서 재인용합니다. 金敎臣은 누구인가?
1938년 당시 37세때의 모습
金敎臣의 人生
선생의 인격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의 선비'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젊은날 공자의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십 년 단축하여 '육십이종심소욕불유구(六十而從心所欲不踰矩)'를 달성해 보리라고 야심을 품었으나, 막상 '팔십이종심소욕불유구(八十而從心所欲不踰矩)'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도덕적인 '낙망의 심연'에 떨어졌다가, 기독교에 입문하여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선생은 기독교를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로 만들 것을 목표로 일생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를 박은 기독교를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일체의 '인공적인 부흥(復興)의 열(熱)'을 배제하고 '천품의 이성과 인간 공유의 양심'을 견지하면서 '냉수를 쳐가며' 냉정한 중에 성경을 연구했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쉬다가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리니 불역열호(不亦說乎)'라고 말한 선생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조선 선비의 풍모를 접하게 된다.
선생은 진리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는 분이었으며, 선생이 추구한 진리는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의 진리였다. 그리고 선생이 제 158호까지 '성서조선'을 간행한 것은 '성서의 진리' 위에 '조선'을 세우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의 실천에 다름 아니었다. 1942년 '성서조선사건'으로 선생과 그 동지들이 옥고를 치를 때 취조에 나섰던 일본 경찰들이 그들에게 한 말은 역설적으로 선생이 일생 추구한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 놈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부류들이다. 결사(結社)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파뜩파뜩 뛰어다니는 것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5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
후일 선생은 일본 경찰의 힐난에 대해 '일본 경찰이 보기는 바로 보았거든'하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선생이 일생 심혈을 기울인 것은 '성서조선'의 간행이었다. 선생은 '성서조선'을 위해 실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성서조선'은 전호에 걸쳐 적자로 출판되었다. 그리고 선생의 표현을 직접 빌자면 '의식(衣食)의 여분으로 잡지 출판을 한 것이 아니라 출판의 여분으로 생활을 해야'했다. '성서조선'은 그야말로 선생의 삶에서 최대의 것이요, 전부였던 것이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金敎臣의 信仰
김교신을 지도자로 출발하여 소수의 무리들에 의하여 이 땅에 맥맥하게 이어져 온 무교회운동의 핵심적 이념은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공간을 점유한, 눈으로 보이는 회당을 진정한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모여 기도드리는 바로 그곳이 교회라고 부르짖는다. 또 성경을 읽는 바로 그 자리가, 그리고 기독자가 봉사하는 온 생활의 마당이 교회라고 믿는다.
둘째, 그들은 성직제도에서 비롯한 갖가지 교회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치적 조직 못지 않게 관료화된 계층구조와 그에 따른 갖가지 비본질적인 구속.규제는 오늘날의 교회를 각 개인의 순수한 복음신앙생활의 질곡으로 화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은 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성서해석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천국의 열쇠는 교회를 대표하는 법황이 쥐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요, 하나님만이 끝까지 쥐고 계신다고 믿으며, 성서의 구절의 참뜻은 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만이 풀이하는 것이 절대 아니고 신자 각자가 하나님에게 받은 믿음의 분수와 은총의 분수대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성서의 구절의 뜻풀이로 야기되는 교회의 분열과 중세기식의 '종교재판' 따위를 그들은 무의미한 일로 여긴다.
넷째, 그들은 섭리사관에 입각하여 신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고유하고 독특한 세계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자각, 정립하는 것을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과제로 삼는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金敎臣의 業績
- 민족적 기독교의 이념의 탐색 및 생활화
- 종교적 신앙과 교육적 실천의 이상적인 조화
- 교육에 있어서 인격적 감화력의 절대성을 나나내 보임
- 개인잡지를 통해서 소신을 밝힘으로써 온 민족사회를 교육의 대상으로 포섭
- 자신의 사상을 다음 세대에 계승,발전시킨 '코이노니아'의 육성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을 꾀한 독립운동에 몇 가지 유형을 볼 수 있다. 그것을 크게 나누면 서재필, 이승만으로 대표되듯이 국제여론 환기에 힘쓴 외교독립방식이요, 둘째는 안창호로 대표되듯이 자아혁명을 통해서 독립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려 했던 인격혁명방식이요, 셋째는 김성수로 대표되듯이 민족 독립의 경제.산업적인 기초를 다듬으려 했던 산업입국방식이요, 넷째는 김구로 대표되듯이 힘에는 힘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항쟁방식이요, 다섯째는 이 모든 유형에 공통적인 교육입국방식으로서 그 대표자는 이승훈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교신은 이런 세속사적인 독립방략보다 더욱 차원 높은 사상 및 독립방략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 기여해야 할 교유.독특한 세계사적 사명을 자각.정립하고 이러한 민족의 섭리사적 '존재이유'에서 민족의 세속사적 독립을 꾀하려 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입국방식'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다.
민족을 통해서 신의 섭리를 자각하고, 민족을 통해서 세계사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 이것은 되풀이 되풀이 음미돼야할 귀중한 사상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민족정신사적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몇 천 년에 걸쳐 이 땅에 터잡고 영고성쇠의 역사를 경영해 온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이것을 외국의 신학자가 다듬어 줄 것인가? 또 외국의 역사가가 알려 줄 것인가? 그게 아니다고 외친 사람이 김교신이었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이상적 한국인상
김교신은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한국인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한국의 이상적 인간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선비상'일 것이다. 이 선비상은 영국의 신사상, 독일의 장인상, 중국의 군자상, 일본의 무사상에 필적하고도 남음이 있고,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 터하면서 우리가 고이 가꾸어 온 이상적 인간상이다. 선비상으로 기대되는 인격적 특질은 무엇인가?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지사적 기질이다.
그런데 '선비'라고 할 때 그것이 갖는 한계성을 긍정적인 면보다는 더욱 크게 부각시켜 '선비상' 자체를 부정적으로 흠집내기도 한다. 특히 일본관학의 식민사관의 입장에 서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부정적인 것만을 크게 부각시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깎아 내리려 한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의 피 속에 맥맥히 흐르고 있는 '선비' 상에 대하여도 심하게 헐뜯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선비'의 부정적인 측면은 첫째 그것이 계급적 지칭이라는 데 있다. 사농공상이란 봉건적 신분질서 안에서 선비는 지배계급이었고, 그러기에 봉건질서 계승을 위한 보수적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비생산성을 든다. 선비는 노동을 하지 않으며, 민중의 희생 위에서 여가를 즐기는 유한계급이며, 그러기에 그들의 논의가 또한 하나도 생산과 결합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파당성이다. 선비는 지나치게 명분만을 내세워 파당을 형성하고, 그러기에 늘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성으로 해서, 선비는 조선 500년의 역사에 주인공 노릇을 했으면서도, 그것이 신라기와 고구려기처럼 진취적이지 못했고 생산적이지 못했으며 건설적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민사관적인 그릇되고 왜곡된 선비관에 대하여 우리는 얼마든지 반론을 펼 수 있다. 선비상이 갖는 글정적인 특질, 즉 학자적 기질, 예술적 기질, 지사적 기질을 들고서 말이다. 학자적 기질이란 삶을 진리 자체를 묻는 데 바치는 생애를 이름이며, 예술적 기질이란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생애, 그리고 지사적 기질이란 정의의 실현을 위해 살며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들에 묻히는 재야적 생애를 이름이다. 이러한 세 기질이 그의 인격 속에, 삶 속에 맥박칠 때 우리는 이것을 선비라고 일컫는다.
조선조 500년 중에서 우리는 이런 좋은 의미의 선비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학자적 기질이 가장 크게 나타난 선비로서는 이퇴계를 들 수 있고, 예술적인 기질이 크게 나타난 선비로는, 선비적 특질이 여성에 나타난 신사임당을 들 수 있으며, 지사적 기질의 대표적인 선비로는, 선비적 특질이 민중의 삶 속에 나타난 동학 농민군의 전봉준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선비상이 지니는 한계성 또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장점 또는 긍정적인 면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된다. 우리 민족이 지금도 '선비'라는 말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장점과 긍정적인 면을 피부로 느끼고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정한 선비는 그러기에 한 계급적 지칭도 아니요, 비생산자도 아니며, 파쟁만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계급이 지향해야 할 인간상이요, 건설적으로 작용하는 생산자며, 진취적으로 관여하는 창조자다. 그러기에 그것은 우리 온 민족, 온 민중의 정신적 유산이요 소유이어야 한다.
김교신은 위에 든 선비가 지니는 세 가지 특징을 온몸에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전통적 선비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다른 두 가지 기질을 더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적 기질과 눈물 많은 다혈기적 기질이었다. 그의 이 다섯 기질은 선생에 있어 기독교의 최고 덕목인 사랑 안에 하나가 되어, 선생의 온 활동, 온 생활에 응고되어 나타났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학자적 기질
선생은 학자적 기질의 소유자였고, 꼼꼼하게 사리를 밝히며 원리.원칙을 잘 책기는 일면이 있었다. 이러한 기질은 그로 하여금 직관적인 사물의 본질에 대한 인식 위에 터하는 문학의 세계보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인식에 터한 자연과학의 세계에 보다 친근감을 갖게 했다. 문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고, 그의 적성에는 자연과학적 학문이 맞다는 뜻에서다. 선생이 처음에 동경고사의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뒤에 자연과학에 보다 가까운 지리.박물과로 전학한 것도 이런 기질에서였다고 풀이된다.
무교회클럽이 학자들의 모임이라든가 또는 학자적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말을 세인들은 곧잘 하는데, 이런 모임에서도 특히 김교신과 함석헌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석헌은 오산고보 학생들을 골방에 모아 놓고 과외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독창적인 관점에서 강의하였거니와 김교신은, 전 158호에 이르는 '성서조선'과 전 6권에 이르는 그의 '전집'이 증명하듯이, 일개 중등학교 교사로서는 경이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것은 물론 그의 신앙의 소치이겠으나 그 신앙을 학문적으로 다듬어 나가는 그의 학자적 기질의 소산이라 여겨진다.
특히 그의 이런 기질은 그의 담당과목인 지리수업 방식에 잘 나타나 있다. 교과서의 내용은 50분 수업 중 20분 정도로 끝내 버리고, 처음 10분간은 시사적인 이야기, 나중의 20분간은 지리와 관련된 역사, 철학, 종교, 문학 등의 이야기를 했다 한다. 40 전후의 나이로 이렇게 자유자재하게 수업을 진행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해박한 지식의 덕택이며, 그의 학자적 기질의 교육적 발로라 할 것이다.
그의 지리수업 방식은 참으로 특이했다 한다. 당시의 지리 교과서에는 한국의 지리에 관한 내용은 극히 적은 양이었다. 그는 교과서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한국 지리를 많이 다루었고, 지리시간은 가히 철학시간이자 세계사시간이라 일컬을 수 있을 정도로 이와의 관련에서 참고될 이야기를 많이 해서 학생들의 끝없는 흥미를 촉발하고 학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제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어 상급학교 입학시험에 별로 비중을 차지하는 과목이 아니었는데도 지리과에 학문적 관심을 퍽 많이 갖게 했을 뿐더러, 그의 시간에는 인생철학까지도 들을 수 있다는 기대를 부풀게 했다 한다. 제자들은 이런 수업방식을 최선의 방법이덨다고 지금도 회상하고 있다.
그의 저서 '조선지리 소고' 같은 내용을 선생님의 입을 통해서 듣는 젊은 영혼들의 가슴은 얼마나 흐뭇하며 자랑스러웠을까. 우리도 충분히 추측하고 남음이 있다. 이런 방식은 천성적으로 교사로 태어난 그의 인격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한편 의식적으로 짜낸 것 같은 -좋은 의미로- 면도 있다. 그의 일기를 보면 여러 곳에 이런 방식을 저녁에 회상하고 메모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제 4학년 지리시간에 노량진 6충신묘와 양주 덕양산의 권율 도원수의 사적을 다루었고(1937.9.7), 하와이 몰로카이 섬과 신부 다미앙을 말하면서 우리 소록도 이야기를(1937.10.11), 북부 중국의 자원의 전부보다 곡부산 공자가 더 크다는 것(1939.2.13), 지리수업을 한 시간 쉬고 -저들이야 알 리가 만무하지만- 인생의 목적을(1940.1.31), 청년들과 함께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대통령 재취임 연설을(1940.6.29) 다루고 있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학문의 내용 그 자체보다는 학문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학문이 몸에 배인 교사에게서 표출되는 것이지, 결코 기교나 연기로 되는 것이 아니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예술적 기질
중등교사로서 수업, '성서조선' 주필로서 원고집필과 발간사무, 그리고 경성성서연구회의 강사로서 성경강의, 이렇게 그는 일인 3역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회상에 의하면 과로의 탓인지 그의 눈은 늘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부르터 있을 때가 많았다 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성서조선'의 발간사무는 육체적인 고통과 노력을 요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과 좌절감, 회의심이 늘 따르는 어려운 일이었다.
다달이 발간할 원고가 될 때마다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며, 조판이 된 후에도 몇 번식 교정을 봐야 하고, 또 책이 되면 독자들에게는 자기가 직접 우체국에 가서 우송해야 하며 시내의 독자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자전거로 배달해야만 했다. 시내의 독자들에게 왜 직접 배달했는지, 그 이유를 자신은 피력하지 않았지만 아마 한시라도 빨리 보여주고 싶은 조급함과 이왕이면 따뜻한 마음으로 전해 주자는 사랑에서 이리라고 필자는 추측하고 있다. 그가 갖은 고생 끝에 새 책을 만들어 자전거에 싣고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시내 독자에게 전해 주며, 시국이야기, 신앙이야기를 자전거를 받쳐 놓은 채 문간에서 나누는 광경을 상상하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가슴도 훈훈해진다.
이런 고된 생활에 그 자신도 짜증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그러기에 그는 '제소와 패소'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둘째 제소: 한 사람 몫의 직분을 가진 자가 일주의 6일간을 근무하고서 주말 휴가를 가질 것은 생명 부지상 절대로 필요한 일인 것을 당신도 아시는 바일 뿐이오리까. 여호와 당신께서 제정하신 법칙이 아니오니까. 주간 6일을 벌써 힘에 넘치게 지치고서 또 주일을 쉬지 못한 지도 대략 십여 년. 그동안 우리의 외침을 들은 사람이 몇 사람 있었습니까?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당신은 나의 못난 것을 이용하셔서 장터에 나가 피리 불라 하셨으나 어디 춤추는 인간 하나 있습디까? 일주일 내내 교단에 섰던 자가 일요일에까지 강의하는 것은 그 내용의 여하는 논할 것 없이 그 행위 자체가 피를 뽑아 주는 일이요, 살점을 분배하는 일이 아니오니까? 그런데 누가 들으러 왔댔습니까?
심문: 네가 나를 믿기 전보다 지금은 얼마나 약해졌느냐. 피로로 인하여 얼마나 감수된 듯하냐.
답신: 입신 이전에는 허약해서 약병만 차고 다니던 것이 근 20년내로 큰 병에 누워 본 일이 없고, 짐작컨대 어떤 사회에 가든지 저와 동년배 중에서는 가장 건강한 편일까 합니다.
심문: 그럼 또 무슨 말이냐.
답신: .... (1939년 10월)
이 '제소와 패소'라는 글은 하나님께 두 가지 따지자는 글이었다. 제 1소는 '그 비용을 저축했더라면 자녀교육에 염려 없을 뿐더러 노후의 안정을 이미 얻었으리라'고 믿어지는 돈과 노력으로 '성서조선'을 발간해 왔으나 진정한 독자가 없는 데 대하여 하나님께 따진 것인데, '당신이 주신 것으로 출판하고 먹고 입과 남은 부스러기 열두 광주리 올시다'는 자답으로 패소하고 마는 내용이고, 제 2소는 위의 글에서 보듯이 일은 고되었지만 도리어 건강하게 되었다는 자답으로 역시 패소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이렇게 바쁘고 고된 나날이었지만 그는 늘 자연의 즐거움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맛보며 여유를 갖고 살았다.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는 것, 이것을 나는 예술적 기질의 단적인 표현으로 보고자 하는데, 그 의 일기의 거의 전부에 이런 마음의 여유가 보인다. 다음에 가장 대표적인 일기 하루분만 소개한다.
산기슭을 아침에 떠나 인쇄소 - 총독부 - 정릉리(원고) - 인쇄소 - 총독부 - 양정학교 - 인쇄소 - 북한산 기슭, 이렇게 뛰어 다녔다. 2월호의 정기일 발송이 이렇게 어그러지게 되었다. 잡지 발송용의 겉봉을 쓰려니 어깨가 매우 오그라지는 듯 아팠다. 피로가 축적된 까닭인가? 사람의 비열하고 추잡한 일면을 보고 심화를 일으키다. 그래서 밤 10시경부터 동네 움집에 나가 자정 넘도록 한담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다시 달빛에 눈을 밟으면서 오전 2시 넘도록 시냇가를 오르내리다. 삭풍은 나무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내 손에 일장검 짚은 것이 없으나 내 영혼이 별들을 향해 긴파람, 큰 한소리 아니하지 못한다. 건달이 도리어 호유하듯이 분망한 오늘밤에 시간적으로 크게 호유한 셈이다. (1939년 1월 31일[화], 맑음)
이렇게 바쁘고 갖가지 핍박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늘 자연의 미를 찾고 창조의 섭리를 음미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아름다운 삶과 예술적 문장을 듬뿍 남겨 주었다. 그가 당시에는 인적 드문 북한산 기슭 정릉리에 거처를 정한 것도 이런 예술적 기질에서였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지사적 기질
그는 지사적 기질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가 명문인 동경고사 출신이며 입신영달의 기회가 많았는데도 굳이 민족사학을 골라 교직에 투신한 것도, 또 수틀리면 그담둘 생각으로 언제나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 것도, 또 그를 회유하기 위해 관립사범학교라는 좋은 자리를 마련하여 그를 꾄 총독부 학무국 관리에게도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 것도, 또 민족사학인 양정고보 재직시에도 감투 쓰기를 싫어하고 늘 '평교사'로 임하려 한 것도, 또 '성서조선' 독자 중세서도 소록도의 환자들을 가장 사랑하여 기회있을 때마다 원조의 손길을 뻗친 것도, 또 학생들을 한치 한오리의 어김도 없이 명분대로 다스려 두 날이 다 시퍼렇게 선 '양칼'이라는 별명을 받은 것도, 또 흥남질소비료공장의 한국인 강제징용 노무자들을 위해서 뛰어든 것도 다 이런 지사적 기질의 표현이다. 신앙적 지사 최태용(崔泰瑢)을 찬미한 다음의 일기 한 토막이 그의 이런 기질을 웅변하고 있다.
오후 2시에 다니엘서 공부를 필하고 동일 오후 6시부터 최태용씨의 환영회를 본사에서 열다. 최형은 지금부터 16,7년 전에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였으니 당시의 동창학우들과 같이 출세하였으면 현금은 상당한 지위나 재산을 소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는 세상에서 얻은 것이 없을 뿐더러 다소의 소유까지도 주 예수를 위해 없애버리고 지금은 '몸뚱이'만 가지고 그리스도의 육탄이 되어 세상을 향하여 던짐이 되고자 한다.
예언자는 고향에 용납 안된다고 하지만, 조선에서도 전도사처럼 쓸쓸한 것이 다시 없을 것이다. 비행사가 고국을 방문할 때와 소녀가 공회당에 공연할 때와 마라톤 선수가 올림픽에서 귀국할 때에 민중들은 마치 구세주를 맞는 슷이 하였다마는 독립전도자 하나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길바닥에서 아사한들 40만 경성부민에게 무슨 아픔이 되며 2천만 민족에게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1인보다 2천만이 가련하여 못 견딜 일이다. 반도에 기독교가 포교된 지 반세기에 처음으로 외국세력이나 조직, 기관 등에 의지함이 없이 조선 스스로가 비치는 전도자 하나가 섰다. 금후의 반도 영계에 처음으로 기골 있는 사람을 보리라. (1933년 6월 4일 [일])
김교신이 이렇게 찬양한 최태용은 뒤에 후꾸모도(福元唯信)로 창씨개명하고 앞장서 친일 훼절하여 그를 크게 실망시킨다. 당시의 관립고보 졸업생들이 총독부 식민지 관리나 되고, 판검사나 되고, 의사나 되어 세속적 행복을 구하며 개인적 입신영달을 꾀하는 모습에 언제나 분개하였다. 그의 일기의 도처에 이런 비판의 말이 나오고 있는데, 1934년 3월 15일자의 일기에는 그것이 아주 구체적,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강습소 선생을 구하는 데가 많지만 그 박봉을 감수할 사람이 없으며 농민학교 선생을 구하는데 농사의 경험과 신앙을 겸비한 사람을 찾아 보기 힘들며, 중등학교 교사를 초빙하려 하여도 70원보다 80원, 80원보다 90원, 이렇게 월급을 계산하며, 또 도시로만 가기를 원하여 의주보다 평양, 평양보다 경성으로 쏠려 교육적 사명은 찾을 길이 없고, 사람들은 타인을 이용하려고만 들지 타인을 위해 일할 줄을 모르고 있으며, 그러기에 '취직'이라 하면 '직무에 취임한다'는 뜻이 아니요, 먹을 것을 덮친다는 뜻에 불과한 것이라고 현실을 신랄하게 파헤치고 있다. 일자리는 많고 사람은 많이 필요한데 모두 자기 중심의 세속적 욕망만 채우고자 하고 있으니 어디 천거할 사람이 하나 있는가 하고 장탄식하기도 했다.
소위 일류명사 또는 저명인사들을 대하기를 그는 아주 싫어했다. 물론 이승훈 선생처럼 신앙의 투사이자 서민적인 냄새가 피부로 느껴지는 분은 존경해 마지않았지만, 일한답시고 돈이나 거둬 자기 배나 채우고 글 쓴답시고 환상적인 꿈이나 비도덕적인 야욕장면이나 그려내고, 전도한답시고 부흥집회나 전문적으로 쫓아 다니며 일시적으로 종교적 감정이나 충족시켜 주고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대전도사들을 아주 싫어했다.
이런 명사들을 비꼰 글이 1935년 3월 26일자 일기에 해학적인 필치로 담겨져 있다. 자기에게는 보약과 명사는 금물인데, 자기는 생래적으로 보약을 먹지 못할 팔자이고, 또 명사들을 대하면 흉금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사는 도리어 망원경으로 멀리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흉금이 열리는 사람들은 도리어 회개한 세리와 창기와 빈자와 병자들이라, 자신은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자 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재야적 기질이 잘 담긴 말이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종교적 기질
선생은 종교적 기질이 풍부했다. 그가 종교가임이 이것을 증명하기에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다고도 여겨지나, 그의 종교적 기질은 직업적 종교가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그 특질을 역시 이 자리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종교적 기질이란 무엇인가? 우선 절대적 가치기준을 이 세상에서 구하지 않고 저 세상에다 두는 기질을 말하며, 또 모든 가치 및 활동을 여기에 맞추어 평가하는 삶의 ㄱ 기본적 자세를 말한다 할 수 있다.
독일의 뛰어난 철학자이고 심리학자이자 교육철학자였던 쉬프랑어는 '생의 형식'이란 명저에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여석 가지로 유별하고, 이 여섯가지 작용 중에서 어느 작용이 그 사람에게 가장 힘차게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적 특질 또는 인간 유형이 생긴다고 논하였는데, 우선 그 6가지 유형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기실현, 자기보존을 추구하는 정치적 유형, 2. 실용성, 물질적 효용성을 추구하는 경제적 유형, 3. 환상적 자기세계, 새로운 미의 형식을 추구하는 심미적 유형, 4. 진리탐구, 우주의 질서를 추구하는 이론적 유형, 5. 동포에의 봉사, 공동체에의 참여를 삶의 동기로 하는 사회적 유형, 6. 양심의 명령에의 순종, 신 또는 절대자에의 귀의를 기하는 종교적 유형이다.
그런데 쉬프랑어는 이 6가지 유형, 또는 6가지 유형의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종교적 가치라고 말했다. 이런 쉬프랑어의 분석에 덧붙여 종교적 기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요약, 정리한다면, 그것은 양심의 명령에 순종하며 창조주의 부름에 귀의하며, 모든 가치를 이에 따르게 하는 삶의 기본적 자세라 할 수 있다. 김교신은 이런 관점에서 참으로 종교적 기질로 삶을 일관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마치 해바라기가 생명의 근원인 태양을 보듯이! 그가 얼마나 자주 하늘을 우러러 보고,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기도 속에 살았는가는 그가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이웃 약사사(현재에는 봉국사로 잘 알려지고 있는 정릉동 소재 사찰) 계곡에 가서 냉수로 목욕하고, 스님들의 목탁 소리에 맞추어 자신도 기도, 찬송한 나날의 경건한 사색과 생활이 잘 말해 주고 있으며, 다음 두 일기가 그것을 또한 잘 말해 주고 있다.
오후 짙은 안개에 흐림. 우리가 보는 은하보다 5만배나 더 큰 은하가 발견되었다고. 그 세로는 5천만 광년, 가로는 2천만 광년인데, 우리 지구에서 1억만 광년의 거리에 서로 있다고. 우주는 크고 넓다. 하나님의 능과 지와 애를 누가 능히 헤아려 내랴. (1937년 11월 12일 [금])
새벽 5시의 우리 마당은 오리온좌로 차일을 하고 천랑으로 등을 달고 북한 연산으로써 병풍을 두룬 것 같다. 인생이 무엇이관대 그 머리 위의 하늘이 저다지도 찬란하고 그 좌우의 산령이 이다지도 엄숙한고! (1938년 10월 17일 [월], 쾌청)
그는 창조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격정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 무레사네 >(물에 산에)라는 등산 클럽을 만들어 자신의 전공인 식물채집도 겸하여 학생들을 들로, 산으로, 바다로 인솔하고 다녔는데, 한번은 단풍이 너무나 아름답게 진 북한산 계곡에서 어찌나 감동했는지, 학생들을 보고 무의식중에, '이놈들아, 너희들도 느껴라, 울어라!'고 소리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창조의 아름다움에 너무 감동되어 울고픈 격정을 금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풀이된다. 그는 공부를 하다가도 중추의 달이 유혹적이라고 서재를 뛰쳐나가 공중에 솟은 달을 우러러 보기도 하고 물 속에 잠긴 달을 굽어 찾기도 했고, 또 가을벌레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씻으면서, 이 은혜가 자기 혼자에게만 주어진 듯, 내 살림 오늘 하루도 이로써 족하도다 하면서 자정이 지나도록 하늘을 바라보며 환희에 젖기도 했다.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눈물이 헤푼 기질
슬픔이나 기쁨이 극에 다다를 때 우리는 운다. 그러나 이렇게 감동이 극에 다다를 경우란 우리에게는 흔한 일이 아니다. 또 우리는 서러움이 북받칠 때 울기 쉽지 아름다움에 감동해서 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김교신은 유난히도 울음이 많았고, 더욱 그것은 슬픔이나 기쁨보다는 어떤 순수한 강렬한 감동을 억누르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여간 그는 눈물을 자주 흘렸다. 라디오에서 심청전을 듣다가도, 자녀의 전학수속을 하다가 문득 어머니와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고도, 학업성적과 품행이 나쁜 학생을 타이르다가도,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읽다가도, 산에 가다가 단풍의 아름다움을 보고도, 그리고 시편을 공부하다가도 울었다. 1939년 5월 14일자 일기에는 새벽 4시 반에 깨어 시편 42, 43편을 주해하고자 정독하다가 감동되어 눈물로서 손수건 두 장을 다 적셔 버렸다고도 적고 있다. 다음에 눈물을 다룬 일기를 하나만 들어 본다.
등교 수업. 제 4,5학년 생도들은 오늘 저녁 8시 반 등교하여 밤 새면서 야외교련하게 되다. 귀도에 인쇄소에서 교정하고 또 시내에서 미국유학생 모씨를 만다 그곳 소식을 많이 듣다. 산기슭에 돌아와 묘포를 김매고 거름주다. 저녁에 새로 두 시까지 원고 쓰기. 이번 10월호의 권두문은 눈물의 점철로 이루어졌다. 특히 '제소외 패소'를 쓸 동안은 여러 차례 펜을 던지고 호곡하였다. 인간인 나로서는 원한이 골수에 맺혔다고 형용할 것이나 신앙에 눈 뜬 때의 나는 은총이 내 잔에 넘쳐 소리쳤다.
이 양극의 조화된 감정을 무엇이라 형용해 내랴? 자정 지난 후 때때로 멀리 군가 들려 오니 밤새면서 행군하는 경성중등학교 생도 연합교련대가 경성 동부를 공략함인 듯. (1939년 9월 22일 [금] 맑음)
김교신 선생에게 경기중학교에서 배움을 받은 심리학자 김성태(金聖泰)는 선생님의 눈물의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눈물은 단순히 감격이 아니고, 자연.인간.신의 참모습을 몸소 느끼고 합일되어 그 참모습의 입장에서 이 세상을 안타까워하여 도맡아 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생각된다.
충무공도 좋은 경치, 밝은 달밤이면 이에 도취하여 슬퍼서 잠 못 이루는 대목이 그의 일기에 자주 나온다. 매슬로우(Maslow)는 황홀경이 그리고 외경의 감정이 합친 어떤 신비적 경험을 자주 하는 것이 성숙된 인격의 특징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 자아몰각적이고 초월적이며 자아향상을 느끼는 사람됨이라 하겠다. 유교에서는 의로운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면 이루어지게 되는 성현의 인격의 특징을 호연지기가 충만하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볼 때ㅑ 선생의 울음이 헤푼 성향은 단순한 그의 기질적 특성만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고, 선생이 자연.인간.신의 참모습을 직감하여 이에 몰입하였던 그의 인격의 진지한 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닉가 본다.(외솔회 '나라사랑' 제 17집, 김교신 선생 특집호, 1974년, 87쪽)
金丁煥 著 [ 金敎臣 그 삶과 믿음과 소망 ]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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