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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의 력사



룡남산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의 력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독창적인 청년중시사상과 령도의 빛나는 력사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 진철 2017.12.31.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력사는 천리혜안의 빛나는 예지로 혁명적청년운동의 가장 빛나는 모범을 창조하시고 청년들을 주체혁명위업의 믿음직한 계승자, 청년강국의 주인공들로 억세게 키우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의 빛나는 력사이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청년동맹이 걸어온 70년의 력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독창적인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의 빛나는 승리의 력사이며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받드는 조선청년들의 열화같은 충정과 애국헌신이 수놓아온 력사입니다.》

반만년의 우리 나라 력사에 청년은 어느때나 있었고 이름을 남긴 청년들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처럼 모든 청년들이 청년강국의 주인이라는 고귀한 영예를 지니고 살며 투쟁하는 존엄높은 청춘의 시대는 일찌기 없었다.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력사가 오늘과 같이 승리로 아로새겨지고 청년들이 혁명의 계승자, 청년강국의 맹장들로 억세게 자라나게 된것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가 있었기때문이다.

언제나 우리 청년들을 혁명의 계승자로 억세게 키우는데 깊은 관심을 돌리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혁명령도의 전기간 독창적인 청년사랑, 청년중시사상을 제시하시고 현명하게 령도하시여 력사상 처음으로 청년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하는 불멸의 업적을 쌓으시였다.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의 력사는 무엇보다먼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독창적인 청년중시사상과 령도의 빛나는 력사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령도의 전행정에서 청년중시의 정치를 베푸시여 청년동맹을 당의 믿음직한 정치적후비대로 강화하고 우리 나라에서 청년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수 있는 근본담보를 마련하시였다.

일찌기 항일혁명의 불길속에서 청년운동의 시원을 열어놓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의 청년운동사상을 제시하시고 청년들에게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시며 청년사업을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돌이켜보면 일제의 식민지통치시기 외세의 대포밥으로 끌려다니며 속절없이 숨져야 했고 망국의 청년이라는 멸시를 받으며 이국의 거리에서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인력거를 끌어야 했던 이 나라 청년들이였다.

식민지청년이라는 수치스러운 오욕을 숙명처럼 감수해야 했던 이 나라 청년들이 자기 운명에서 극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된것은 바로 위대한 수령님을 조선혁명의 진두에 높이 모신 력사의 그날부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체16(1927)년 8월 28일 조선청년들을 《ㅌ.ㄷ》의 기치아래 묶어세워 주체형의 혁명조직인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하신 그때부터 조선청년운동은 진정한 자기의 새 력사를 아로새기기 시작하였으며 고귀한 전통을 창조하게 되였다.

공청의 핵심들을 골간으로 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직을 확대해나가시였으며 광범한 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에 튼튼히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벌려나가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주체19(1930)년 여름에 결성된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 성원들의 대다수도 공청을 통해 육성된 선봉적인 청년투사들이였고 항일전쟁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무명의 영웅들도 공청의 산아들이였다. 공청에서 단련된 청년투사들로 항일유격대가 창건되고 그 청년투사들을 골간으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되였으며 그들의 영웅적투쟁에 의하여 조국해방위업이 성취되였다.

조선의 열혈청년들을 혁명의 전위투사들로 억세게 키우시고 우리 나라 청년운동의 영광스러운 력사를 창조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청년중시사상과 령도는 새 조국건설시기와 가렬처절한 조국해방전쟁시기, 사회주의건설시기 등 혁명의 년대와 년대를 거쳐 줄기차게 이어졌다.

해방된 조선청년들의 기개가 하늘높이 나래치는 속에 보통강개수공사와 같은 방대한 건국사업들이 이르는 곳마다에서 진행되고 민주조선의 위대한 창조물들이 수많이 일떠서게 되였다.

가렬처절하였던 조국해방전쟁시기 청년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청춘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쳐 싸움으로써 영웅조선의 전승신화를 창조하고 제국주의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영예롭게 수호하였다. 당과 수령의 부름에 충실한 청년들은 전후 어려운 시기에도 복구건설에서 빛나는 로력적위훈을 세웠으며 천리마를 타고 질풍같이 내달려 짧은 기간에 자주, 자립, 자위의 사회주의국가를 일떠세우는 영웅조선의 기적을 안아왔다.

해주-하성사이철길과 송남청년탄광, 강계청년발전소와 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 김일성경기장과 주체사상탑, 5월1일경기장, 광복거리…

우리의 도시와 농촌을 비롯한 나라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일어난 세기적인 전변과 우리 인민의 행복한 생활에는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구호를 높이 들고 당의 구상을 한몸바쳐 꽃피운 청년들의 고귀한 피땀이 스며있다.

이처럼 우리 청년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따라 사회주의건설의 여러 전투장마다에서 수령결사옹위의 빛나는 자욱을 수놓으며 청춘을 빛내여왔다.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의 70여년의 력사는 다음으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청년중시사상과 령도의 빛나는 력사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청년중시로선과 탁월하고 세련된 령도로 청년동맹을 당과 수령에게 끝없이 충실한 청년조직으로 강화발전시키시고 청년들을 백두의 혈통을 이어나가는 믿음직한 계승자들로, 주체혁명위업수행의 맹장들로 키워 청년운동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놓으시였다.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해나가는것을 청년동맹의 기본사명, 조선청년운동의 총적목표로 규정하시고 사회주의청년운동에서 나서는 리론실천적문제들에 완벽한 해명을 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청년운동을 수령의 사상과 위업을 빛나게 계승해나가는 가장 혁명적인 운동으로 되게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현시대와 청년들의 임무》, 《김일성동지의 청년운동사상과 령도업적을 빛내여나가자》를 비롯한 수많은 불후의 고전적로작들을 발표하시여 조선청년운동이 나아갈 길을 환히 밝혀주시고 우리 청년동맹과 청년들에게 최고사령관의 예비전투부대, 별동대, 당의 영원한 동행자라는 고귀한 칭호를 안겨주시였다.

조선로동당창건 50돐경축 평양시청년학생들의 홰불행진이 진행되던 그날에는 우리 청년들이 당과 수령을 맨 앞장에서 결사옹호보위하며 당의 두리에 일심단결하여 주체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성해나가는 우리 당의 청년전위가 되기를 바라시는 크나큰 믿음과 기대가 담긴 혁명의 홰불봉을 넘겨주시였다.

청년들의 가슴속에 우리 나라 청년운동의 시원을 열어놓으신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을 깊이 심어주시고 수백만 청년전위들을 영원히 수령님의 전사, 제자로 살게 하시려는 위대한 장군님의 숭고한 뜻은 수령님의 존함으로 빛나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고귀한 부름에도, 장군님께서 몸소 제정하여주신 청년절에도 뜨겁게 어리여있다.

주체적청년운동의 위대한 전통을 만대로 이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청년들을 사랑하라!》는 구호를 제시하시고 청년들을 위해서라면 천만금도 아낌없이 돌려주시였으며 자신의 동상은 세우지 못하게 하시면서도 청년들에 대한 기념탑들을 잘 세워주도록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위대한 령도자를 모시였기에 우리의 청년운동은 년대와 년대를 넘어, 세기와 세기를 이어 준엄한 혁명의 폭풍우를 헤치며 언제나 곧바로, 당을 따라 앞으로 힘차게 나아갈수 있었다.

우리 청년들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최상최대의 믿음과 사랑에 의하여 수많은 청년들이 사회주의건설의 모든 초소들에서 시대의 전형으로, 기적과 위훈의 창조자들로 자라났다.

김광철, 정성옥, 유경화를 비롯한 수많은 청년영웅들이 태여났고 청년영웅도로건설장을 비롯한 대고조전투장들에서 위훈의 창조자들의 대부대가 자라났으며 사회와 집단을 위해 헌신하는 청년미풍선구자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게 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의 운명을 판가름하던 반제반미대결전의 준엄한 시기에 청년들은 위대한 장군님의 선군혁명령도를 앞장에서 받들어 주체혁명의 명맥과 사회주의조국을 결사수호하였으며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사회주의강국건설의 전환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이렇듯 혁명령도의 전기간 청년중시를 국사중의 국사로, 혁명의 전략적로선으로 내세우고 현명하게 이끄시여 력사상 처음으로 청년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였으며 세상에 둘도 없는 청년강국을 일떠세우신것은 우리 수령님들의 숭고한 청년중시사상과 현명한 령도의 빛나는 결실이다.

오늘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업적을 끝없이 빛내여나가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청년동맹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로 일색화된 강철의 청년조직으로, 조선로동당의 정치적후비대, 강위력한 전위대오로 더욱 강화발전되였다.

날로 억세여지는 이 대오속에는 당과 수령에 대한 고결한 충정과 보석같은 애국의 마음을 안고 청춘시절을 빛내여나가는 청년들도 있으며 세계의 하늘높이 람홍색공화국기를 휘날린 체육선수들도, 과학탐구로 사회주의강국건설에 적극 이바지한 청년대학생들도 있다. 그리고 사회와 집단, 동지를 위하여 자기를 아낌없이 바치고 당이 부르는 어렵고 힘든 곳으로 탄원한 청년들은 물론 잘못 살아온 지난날과 결별하고 새 출발을 한 청년들도 있으며 20살 꽃나이에 부모없는 아이들을 친혈육의 정으로 애지중지 키우고있는 《처녀어머니》도 있다.

지난해의 련속적인 철야진군의 앞장에도 바로 우리 청년들이 서있었다. 자력자강의 정신과 과학기술의 위력으로 새 기준, 새 기록을 돌파하며 폭풍쳐 내달려온 선구자, 개척자들도, 시대정신이 맥박치는 혁명적이고 전투적이며 랑만적인 선군청년문화와 아름답고 고상한 도덕기풍을 확립해나가는 훌륭한 젊은이들도 다름아닌 우리의 청년들이였다. 백두산영웅청년정신을 지니고 사회주의강국건설의 선봉에서 힘차게 투쟁해온 청년들의 불굴의 의지는 지난해 전국의 수많은 농촌청년작업반, 청년분조들에서 알곡생산계획을 넘쳐 수행하는 자랑찬 성과가 이룩되고 많은 공장, 기업소들에서 2년분, 3년분 인민경제계획완수자, 만리마기수들이 수없이 배출되게 한 원천으로 되였다.

이러한 청년들의 대부대가 있기에 우리 혁명대오는 그 어떤 난관속에서도 더욱 힘차게 전진하고 사회주의대가정에는 따뜻한 정이 끝없이 넘쳐나고있는것이다.

오늘 세상에는 아직도 력사의 변두리에 밀려나 사회의 우환거리로 버림받는 청년들이 적지 않지만 우리 청년들처럼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우리 당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나라와 민족의 양양한 앞날을 열어나가는 가장 활력있는 부대로, 혁명의 믿음직한 계승자들로 떠받들리우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청년중시사상과 불멸의 업적을 옹호고수하고 길이 빛내이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청년운동사상과 령도를 충정으로 받들어나갈것이다.▲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



룡남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은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의 진로를 밝혀주는 불멸의 대강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 박사 부교수 허천 2017.10.13.


오늘날 세계의 문단에는 부르죠아지의 반동적이고 반인민적인 문학이 범람하고있으며 자기나름의 도덕과 정의의 목소리를 높여보려고 애쓰는 작가들도 제국주의자들의 썩어빠진 사상문화와 부르죠아지의 온갖 반동철학과 패륜패덕의 악영향으로 하여 시대와 인민앞에 지닌 자기들의 사명감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작품창작에서 나아갈 앞길을 찾지 못하여 갈팡질팡하고있다.

우리 시대는 지난날 착취받고 억압받던 인민대중이 력사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세계를 자기의 의사와 요구에 맞게 개조하며 자기의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고있는 력사의 새시대, 자주의 시대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새시대의 요구와 자주성을 지향하는 세계진보적인민들의 념원을 헤아리시고 주체81(1992)년 1월 20일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을 발표하시여 세계진보적문학이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주체의 문학리론은 오늘 인류의 리상인 자주위업을 끝까지 수행하려는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고있는 새로운 리론이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6권 95페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이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의 진로를 밝혀주는 불멸의 대강으로 되는것은 무엇보다도 자주시대의 가장 과학적이며 혁명적인 문예관을 새롭게 밝혀주었기때문이다.

문학예술을 자주시대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창조발전시키는데서 선차적으로 나서는 문제는 시대의 요구를 옳바로 구현한 문예관을 확립하는것이다. 문예관은 문학예술의 본성과 사명, 작품창작의 원칙과 방도, 작품의 사회적가치를 밝히는데서 출발점으로 된다.


장구한 인류력사의 전기간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옳은 문예관을 찾아 오랜 세월 암중모색하며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고대그리스의 철학가인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의 《시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중세 동방의 우리 나라 고려시기 리인로(1152-1220)의 《파한집》과 리제현(1287-1367)의 《력옹패설》, 17세기 프랑스의 부알로의 《시의 예술》 그리고 로씨야의 막씸 고리끼(1868-1936)의 《문학론》을 비롯하여 고금동서의 이름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도서에서 문학에 대하여 제나름으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문학의 개별적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시기 제노라고 하던 《문학대가》들도 문학의 본성과 그 사회적기능을 비롯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실현에 이바지하는 혁명적인 문학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못하였다.

자주시대앞에는 민족해방, 계급해방, 인간해방을 이룩하고 세계적범위에서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여야 할 력사적과제가 전면에 나서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문예관은 자주시대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체현하고있는 주체의 문예관이라는것을 천명하시고 인간과 생활을 그리며 인민대중을 위하여 참답게 복무하는데 인간학으로서의 문학의 본성이 있다는것을 밝히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로작에서 문학예술의 인간학적본질에 대한 독창적인 해명에 기초하시여 자주시대의 문학은 주체의 인간학으로 되여야 한다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시였다. 주체의 인간학은 자주성에 대한 문제, 자주적인 인간에 대한 문제를 내세우고 주체형의 인간전형을 창조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수행에 이바지하는 새형의 문학이다.

주체의 문예관은 사람을 가장 진실하게 그리며 인민대중을 세계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내세우고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진실로 사실주의적인 문학예술을 창조하게 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옳바른 문예관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이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의 진로를 밝혀주는 불멸의 대강으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주체사실주의, 주체사실주의창작방법의 특징을 전면적으로 밝혀주어 자주시대 인민대중의 지향과 념원을 진실한 예술적형상으로 창조할수 있는 참된 길을 밝혀주었기때문이다.

세계진보적문학의 발전사에는 인문주의문학과 계몽주의문학, 진보적랑만주의문학과 비판적사실주의문학 그리고 사회주의적사실주의문학의 발생발전을 기록하고있다.

인문주의문학에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지향을 짓밟고 인간을 신의 노예로 간주하면서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봉건주의와 중세기 종교적광신을 배격하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내세웠으나 그것은 기껏하여 인간의 지성과 리성을 존중하는데 머물고말았으며 계몽주의는 《자유》와 《평등》, 《정의》의 구호를 들었으나 그것도 결국은 부르죠아지의 계급적리해관계를 옹호하는데로 떨어지고말았다. 봉건적 및 자본주의적현실을 비판하고 사회적진보와 정의를 위한 투쟁에로 사람들을 열렬히 호소한 진보적랑만주의는 사회적리상이 뚜렷하지 못하고 그 실현방도를 제시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생활력을 곧 잃고말았다.

사회적존재로서의 인간과 생활의 본질을 깊이있게 밝혀내는 문제는 지난날 동서방의 그 어느 진보적문학사조들에서도 실현할수 없었다.

20세기초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출현한 사회주의적사실주의는 혁명적랑만주의, 비판적사실주의를 비롯한 종래의 진보적인 창작방법을 비판적으로 총화하고 한계단 발전시킨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사실주의창작방법으로서 착취받고 압박받는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한 로동계급의 혁명위업수행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선행한 사회주의적사실주의문학은 객관적현실과 인간의 사회계급적성격을 옳바로 보고 그릴수 있게 하는 유물변증법적세계관에 의거하였기때문에 사실주의적전형화문제를 높은 수준에서 해결할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문예사에 처음으로 출현한 사회주의적사실주의가 제기하였던 력사적과제는 자본의 철쇄와 제국주의예속에서 근로인민대중을 해방하는데 복무하는것이였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창작방법을 요구한다. 주체사실주의는 사람중심의 세계관, 주체의 세계관에 기초하고있으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데 복무하는것을 력사적과제로 제기하였다.

인간과 생활을 어떻게 보고 그리는가 하는 문학의 근본문제는 사람중심의 철학적세계관에 기초하고있는 주체사실주의에 의하여 비로소 완벽하게 해결될수 있었다.

주체사실주의는 자주성을 지향하는 인민대중의 요구에 맞는것이면 긍정적이고 본질적인것으로 보고 그리며 그에 맞지 않는것이면 부정적이고 비본질적인것으로 보고 그린다. 주체사실주의는 인간의 성격을 전형화하는데서 자주성을 기본으로 하여 일반화와 개성화의 통일을 실현할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계급적성격이라는것도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사람들사이에 맺어지는 사회적관계의 반영이다.

주체사실주의는 주체적인 관점에서 인간과 생활을 보고 그림으로써 비록 부유한 가정의 출신이라 하더라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사회적진보와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몸바쳐싸운 사람이라면 그를 애국자로, 혁명가로 내세운다. 인간만 아니라 생활도 자주성을 척도로 하여 보고 그릴것을 요구하는 주체사실주의는 대중의 자주적인 지향과 요구에 맞는 생활을 시대의 본질과 력사발전의 합법칙성을 체현한 전형적인것으로 보고 그린다.

사람, 인민대중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와 현실, 사회와 력사를 보고 자주성을 기본척도로 하여 전형화와 진실성의 원칙을 고수하는 여기에 주체사실주의의 본질적특성이 있다.

우리 문학예술은 주체사실주의창작방법에 의거함으로써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문학예술의 본보기로 활짝 꽃펴나고 인류문예사발전에서 일찌기 있어본적없는 일대 전성기를 펼쳐놓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혁명의 길에 나서신 첫시기에 벌써 자주시대의 요구를 명철하게 통찰하시고 새시대의 문학실천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확고한 주체적립장에서 독창적으로 풀어나가심으로써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적사실주의는 처음으로 우리 식의 사회주의적사실주의, 주체사실주의로 발전하게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문학예술의 혁명적전통을 전면적으로 계승발전시키시고 주체사실주의의 본질적특성을 밝혀주시였으며 혁명적문학건설에서 나서는 모든 사상리론적문제들을 독창적으로 해명해주시여 주체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시였을뿐아니라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예술건설과 발전의 새로운 력사를 펼쳐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이 자주시대 세계진보적문학의 진로를 밝혀주는 불멸의 대강으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생활과 형상, 문학형태와 창작실천에 이르기까지 문학의 모든 리론실천적문제들에 과학적이며 전면적인 해답을 주고있기때문이다.

문학이 사람들의 생활의 참다운 교과서, 인민대중을 혁명과 건설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는 사상적무기로서의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자면 구체적인 형상요소와 문학형태, 그에 따르는 창작실천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다 밝혀주는 문학리론이 있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놓고볼 때 착취와 억압, 예속과 지배의 낡은 사회관계를 유지하려는 착취계급의 리해관계를 반영하고있는 부르죠아반동문예리론은 문학의 본성을 외곡하고 문학을 부르죠아계급의 향락과 리윤추구의 수단으로 본다. 부르죠아문예리론은 문학예술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일신의 안일과 향락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극단한 개인주의와 패륜패덕을 고취하여 사람들을 황금의 노예로 전락시키며 인민대중의 혁명의식과 계급의식을 마비시켜 그들을 언제까지나 착취계급, 지배계급의 예속물로 만들려고 한다.

현대부르죠아문학리론은 어느것 하나 변변한 체모도 갖추지 못하고 제나름대로 문학에 대하여 횡설수설하고있다. 실례로 모더니즘문학은 문학예술의 사상적내용과 인식교양적기능을 부정하고 신비주의와 극단의 리기주의를 설교하며 죽음과 공포, 고독과 절망, 허무와 방탕 등을 찬미하며 허식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면서 문학예술의 내용은 물론 형식자체를 기형화하고 파괴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 력사의 자주적인 주체인 사회정치적생명체가 문학의 영원히 변함없는 형상대상이며 복무대상이라는것을 밝혀주시였다.

문학은 예로부터 인간과 생활을 자기의 형상원천으로 삼아왔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계급이 출현할 때마다 문학의 기본형상대상은 바뀌여지군하였다. 사회정치적생명체는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오랜 투쟁과정에 형성되였으며 사회적집단의 발전력사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른 집단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는 작품의 종자, 성격과 사건과의 관계, 형상의 힘, 문학의 지성세계, 구성, 언어형상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주고있으며 시와 소설, 아동문학 등 문학의 모든 형태를 다양하게 발전시키는데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과학적이고 전면적인 해답을 주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은 부르죠아문예리론의 반동성을 낱낱이 발가놓는데서도 비할바 없는 위력을 나타내고있다. 주체의 문학리론은 세계진보적문인들에게 형형색색의 온갖 부르죠아문예사조와 조류, 류파들의 반동적본질을 낱낱이 폭로비판하는 불변의 사상리론적지침을 마련해주었으며 그들의 정의의 필봉을 더욱더 예리하게 만들어주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시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빛나게 계승발전시켜오신 인민대중중심의 우리 나라 사회주의현실에서 주체의 문학리론은 창작실천에서의 빛나는 성과에 의하여 그 진리성과 정당성, 생활력이 남김없이 확증되였으며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선군혁명령도따라 사회주의문명강국건설의 최후승리를 앞당겨오는데 적극 이바지하고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체문학, 선군문학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이 밝힌 우리 식의 문학창작원리와 형상구성법칙을 실천에 구현함으로써 수천년세월을 두고 착취계급에 의하여 부식된 온갖 반동적인 문학과 그 잔재를 말끔히 가셔내고 진실로 인민대중을 위한 참다운 문학으로 되였다.

이처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은 인류의 리상인 자주위업을 끝까지 수행하려는 인민대중의 지향과 요구를 정확히 반영하여 문학이 오늘의 이 위대한 시대와 발걸음을 같이하게 함으로써 세계의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인민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신심을 안겨주고 그들을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문학창작에로 힘있게 떠미는 강력한 추동력으로 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은 사회적진보와 정의, 민족적독립과 새 사회건설을 위한 세계진보적인류의 정의로운 문학창작활동을 선도하는 불멸의 기치로, 시대의 발전을 추동하고 온 세계의 자주화위업수행에로 세계진보적인류를 선도하는 불멸의 문학대강으로서 력사와 더불어 영원할것이다.

증언과 자료를 통하여 본 조선전쟁의 도발자



룡남산

증언과 자료를 통하여 본 조선전쟁의 도발자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박사 부교수 김병철 2017.7.31.

이 땅에서 전쟁의 포성이 울린지 67년이 되였다.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참화를 들씌운 조선전쟁은 미국에 의하여 강요된것이였다.




그러나 미국은 철면피하게도 수십년이 지나고 세기가 바뀐 오늘까지 우리 공화국을 전쟁의 도발자로 매도하면서 미군의 남조선강점과 반공화국침략책동을 합법화하고있으며 미국의 주장에 순종하는데 습관된 서방세계가 그 론조를 그대로 외우고있다.




1950년 조선전쟁도발책임문제는 단순한 력사적인 학술상의 문제가 아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평화가 깃들지 못하고 세계최대의 열점지역으로 되여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정세가 지속되고있는 조선반도의 엄혹한 현실로부터 이 문제는 누가 진실로 평화를 바라고 전쟁을 추구하는가를 가르는 정치적문제라는것을 실증해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전쟁의 도발자이며 우리 인민의 철천지원쑤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조선전쟁도발의 책임을 우리에게 넘겨씌워보려고 책동하지만 그 무엇으로써도 력사의 엄연한 사실을 외곡할수 없습니다.》 (《김정일전집》 제5권 229페지)




우리에게 전쟁도발의 책임을 넘겨씌우려고 력사적으로 책동해온 미제와 남조선괴뢰들은 사실상 저들자신의 증언으로 저들이야말로 조선전쟁의 도발자라는것을 낱낱이 드러내놓았다.




우선 미국의 정계와 군부의 우두머리들은 조선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후 세계제패를 추구한 미국의 침략적대외정책, 대조선정책의 산물이라는것을 스스로 증언하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특수한 폭력적수단에 의거한 국가정책의 연장이라고 볼 때 제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대외정책, 대조선정책을 고찰하는것은 전쟁도발자로서의 미국의 정체를 폭로하는데서 선차적인 문제로 된다.




미국대통령 트루맨은 1945년 12월 19일 국회에 보낸 《교서》에서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얻은 승리는 세계를 지도할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하였다.우리들은 제1차 세계대전후 윌슨대통령이 우리에게 부여하기를 원하였던 지도적지위를 이제야 인수 하게 되였다.》고 하였다.




트루맨이 미국의 대외정책을 제시하는 《교서》에서 말한 《지도적지위》, 《세계를 지도할 책임》이란 곧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미국이 다른 렬강들을 누르고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 되였다는것이며 따라서 미국이 세계를 저들의 비위에 맞게 재편성해야 한다는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면 트루맨이 세계의 면전에서 로골적으로 세계에 대한 《지도》를 떠든 리면에 무엇이 깔려있는가를 론의할 필요가 있다.




세계제패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날 때부터 추구한 숙망이였으나 미국은 그것을 실현할만 한 힘을 가져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제국주의의 우두머리로 등장하였다.




전후 세계정치구도에서 주도적지위를 차지할 교활하고 음흉한 목적에서 반파쑈련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은 전쟁기간 자기 령토에 포탄 한발 떨어지지 않은 유리한 기회를 리용하여 련합국들에 많은 군수물자를 팔아먹음으로써 세계최대의 채권국으로 되였고 전후 자본주의공업총생산액의 3분의 2를 차지하였다.




반대로 이전시기 미국을 내려다보던 유럽렬강들은 전쟁을 통하여 극도로 쇠약해지고 미국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예속되게 되였다.




도이췰란드와 일본은 전패국으로서 미국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전승국이라고 하는 영국, 프랑스 등도 전쟁기간 국력이 심히 쇠약해지고 미국에 예속되게 되였다.




거만해질대로 거만해진 미국은 드디여 제2차 세계대전직후부터 로골적으로 세계제패를 저들의 대외정책으로 내세우게 되였던것이다.




당시 미국의 거두들은 세계제패를 추구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조선을 지배하는것을 선차적인 문제로 보았다.




트루맨이 《초당파외교》를 제창하면서 국무성의 고문으로 임명한 공화당출신의 덜레스는 고문직에 취임하면서 《나의 새로운 임무의 중점은 극동에 둘것이다. 극동에는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가장 많기때문이다.》고 의미심장하게 확언하였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직후 극동 특히 조선을 중시하게 된것은 당시 조선반도가 차지하고있던 지정학적위치의 중요성에 있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직후 바야흐로 시작되는 《랭전》의 시대에 유럽에서는 도이췰란드, 아시아에서는 조선에서 공산주의와 대치하고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트루맨의 특사로 남조선을 시찰한 포레이는 1946년 6월 22일 트루맨에게 제출한 《조선정세에 관한 견해, 결론 및 권고》를 종합한 비밀보고서에서 《솔직히 말해서 조선은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이 성공하는가 못하는가 하는것이 걸려있는 사상상의 싸움터이다. 다시말하여 패망한 봉건주의에 도전하여 민주주의(미국식민주주의 즉 자본주의-인용자)가 서나갈수 있겠는가 아니면 공산주의가 강하게 될것인가를 시험하는 장소로 된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이의 대결장이라는 의미였다.




지리적으로 볼 때도 조선은 쏘련, 중국과 잇닿아있는 동북아시아의 관문에 위치하고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최고군사지휘권을 가졌고 전후 일본과 남조선에서 미국의 정책을 주도하던 맥아더는 《유럽은 죽어가는 체계》이고 8억의 인구를 가진 아시아야말로 《앞으로 1 000년의 세계력사의 발전을 결정》할것이라고 하면서 일본이 《장래의 도약대》라면 《조선은 대륙에로의 건늠다리》로서 조선반도 전지역을 정복할 때 《우리들은 쏘베트 씨비리와 남방을 련결하는 유일한 보급선을 산산이 끊어버리고 울라지보스또크와 싱가포르사이의 전지역을 지배할수 있을것이다. 그때에는 우리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란 없게 될것이다.》고 주장하였다.




맥아더의 이 주장은 조선을 장악할 때만이 중국대륙을 손에 넣고 쏘련을 위협하여 극동에 대한 지배를 실현할수 있으며 나아가서 전 아시아를 장악할수 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1949년 1월 28일부로 된 미국무성 정보조사국의 《극비문건 4849》 호에서도 《조선이 차지하고있는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지리적위치로 하여 조선과 그 인민을 좌우하는것은 극동에 리해관계를 가지고있는 다른 어떠한 국가》들에도 가치있는것이며 《정치적으로 조선이 미국에 대하여 가지는 중요성은 물론 의심할바 없다.》고 지적함으로써 미국이 일관하게 조선을 극동침략정책의 초점으로 간주하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미국현대사》의 저자 하쉘 메이어가 《실제에 있어서 월가의 조선인민에 대한 전쟁은 그 장군들이 남조선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1945년 9월에 시작되였다.》고 자기의 책에서 서술한것은 우연한것이 아니였다.




다음으로 미국과 일본의 력사가들이 자기의 저서들에서 서술한 적지 않은 자료들은 조선전쟁은 1948-1949년 경제공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미국이 도발하였다는것을 론증하고있다.




제2차세계대전기간에 얻은 전시리윤을 밑천으로 상승하던 미국경제는 1948년말~1949년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전반적경제공황에 말려들게 되였다. 1948년말에 경공업부문으로부터 시작된 공황은 점차 중공업부문에까지 련쇄반응을 일으켜 1949년 상반년에만도 4 600개의 회사가 파산되였으며 실업자가 급격히 증대하여 1950년안으로 1 300만명에 이를것으로 예견되였다.




미국은 1948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을 극복하는데서도 조선전쟁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서는 미국인들자신과 조선전쟁을 연구한 외국인들속에서 이미 공인된 력사적사실로 인정되고있다.




당시 전쟁열에 들뜬 미국지배층에 대하여 《비사, 조선전쟁》의 저자 인 아이. 에프. 스톤은 《…미국의 지도세력은 변함없이 평화가 경제에 미치는 작용을 두려워하면서 공포에 휩싸여있었다. 정치가와 실업계 지도자들의 행동을 좌우하는것이 이 공포였다. 만일 조선에서 평화가 이룩되면 인도지나와 먄마에서도 조선의 뒤를 따르게 될것이다.》 라고 폭로하였으며 영국잡지 《에코노미스트》는 《미국은 위기를 극복할 계기가 필요하였으며 전쟁을 날조하지 않을수 없었다.》라고 썼다.




조선전쟁에 대하여 여러모로 연구하고 이에 대한 책들을 집필한 미국력사가 디 더블유 콘데는 자기의 글에서 《조선전쟁이 미국경제의 경기가 좋지 못할 때 일어난것은 부정할수 없다. 실업가들과 정부지도자들은 트루맨의 조선전쟁개입을 호경기에로의 예고로서 환영하였다.》라고 쓰면서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1951년 5월 5일부가 보도한데 의하면 《트루맨대통령과 톰 코내리상원의원 등 높은 직위에 있는 많은 지도자들이 1949년 가을과 1950년 5월까지의 사이에 전쟁을 바라고있었다.》라고 명백히 지적하였다.




일본의 한 력사평론가도 《조선전쟁은 미국이 직면하고있는 경제위기의 타개책으로 되였다.》고 하면서 《조선전쟁은 1948년 가을부터 시작된 경제공황이 1949년에 이르러 더욱 심각해져 공업생산은 전해에 비해 15%나 감소되고 독점자본의 리윤은 16%나 감소된 사실과 무관계한것이 아니였다.》라고 미국의 조선전쟁도발원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였다.




결국 미제는 《번영이 요구되거든 언제나 전쟁을!》이라는 독점자본의 본성으로부터 《경제공황의 공포》가 극도에 이른 1950년을 전쟁도발시기로 정하게 되였던것이다.




다음으로 미국정계와 군부의 주요인물들과 그의 하수인인 남조선괴뢰상층인물들은 자기들의 증언으로써 저들이 전쟁준비를 발광적으로 다그치고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전범자들이라는것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미제는 괴뢰군조작후 장교들을 체계적으로 미국에 류학보내기도 하고 주일미군부대에 파견하여 미국식군사훈련도 주었다. 괴뢰군에 대한 이러한 류의 훈련은 주로 일본의 규슈와 야마구찌현에 주둔하고있는 미제24사단에서 실시되였다. 미제24사단장 띤의 《회상록》에 의하면 미 24사단에서의 괴뢰군장교들에 대한 훈련은 조선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였다. 남조선주재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도 남조선에서 저들이 괴뢰군을 훈련주고있는데 대하여 미국기자들에게 《실전에 경험있는 500명의 장병(남조선주둔 미군사고문단을 의미-인용자)들의 능률적이며 집중적인 활동》에 의하여 남조선에서 《당신들을 위하여 싸울 10만의 병사들을 훈련》시키고있다고 하면서 괴뢰군을 미국《자본을 지키는 훌륭한 번견》이라고 하였으며 미국은 남조선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거둘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고있다고 자랑하였다.




1950년 9월 22일 미국회에서 한 상원의원 톰 코내리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은 1949년에만도 1억 8 500만US$분의 군사기재들을 주었는데 그중에는 소총, 카빈총, 기관총, 각종 포들과 탄약, 포탄들, 장갑차들, 함정 79척, 비행기 20대를 비롯하여 다종다양한 전쟁장비들이 들어있었다.




미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1951년 5월에 열린 국회에서 전쟁도발전에 남조선괴뢰군의 무장장비를 등한시하지 않았는가라는 공화당출신 국회의원들의 질문에 대하여 미국의 군사경제원조는 충분하였다고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1만 4 000여명의 군대를 유지하였는데 그중 6만 5 000명의 륙군은 미국식보병기재로써 완전히 장비되여있었다. 경찰과 해안경비대의 약 절반은 미국제휴대무기 및 카빈총을 가졌었고 나머지는 같은 종류의 일본제장비를 갖추고있었다. 공격이 개시되였을 당시 이 군대는 우리의 원조로써 15만명으로 증가되였다.》




남조선괴뢰군이 완전히 미국화된 침략군대로, 현대적무장장비를 갖춘 정규군으로 강화된데 대하여 당시 남조선에 주재하고있던 《뉴욕타임스》특파원도 《미국장교들이 훈련시킨 모든 외국군대들가운데서 남조선군대는 가장 미국화된 군대이다. 그들은 미국제군복을 입고있으며 미국제자동차를 타며 미국제무기를 휴대하고있다. 여러해에 걸친 맹훈련의 결과 그들은 미국인처럼 행세하며 많은 점에 있어서 미국인들처럼 행동한다.》고 증언하였다.




하기에 1950년 5월 9일《미국제경제협조처》(《E.C.A》) 남조선원조처장 죤슨은 미국회하원 세출위원회에서 《미국의 무장으로 장비되고 서울의 미군사절단의 지도밑에 미국장교들에 의하여 훈련된 10여만의 남조선군대장병들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며 임의의 순간에도 전쟁을 개시할수 있다.》고 증언하였고 미국방장관 루이스 죤슨까지도 《남조선군은 북조선군이 국경의 건너편에서 다대한 원조를 받지 않는 한 그들을 패배시킬것이다.》라고 확언하였다.




우리 공화국을 침략하기 위한 《북벌》전쟁계획작성도 미국이 주도하였다는 증언도 명백하다.




한때 괴뢰정부의 내무부장관으로서 죤 무쵸의 호출을 받고 자주 미국대사관에 드나들었던 김효석의 증언에 의하면 괴뢰군의 《북벌》 군사행동계획은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의 주도밑에 작성되였으며 괴뢰군1사단장 김석원, 교통부장관 허정 등이 그에 협력하였다. 그 계획에 의하면 작전을 1949년 7~8월경에 전《전선(38゜선)에서 동시에 감행 하되 주공격은 서부전선의 1사단이 담당하기로 되였다.




김효석의 증언은 《북벌》군사행동계획의 기본골자를 밝힌것으로서 이것은 19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해방할 때 괴뢰륙군 본부에서 압수한 《북벌》군사전략계획도에 의하여 립증되였다. 이 군사 지도의 밑에는 1945년, 미군군사지도인쇄소 발행, 축척 1:1 000 000 이라는 영문자가 찍혀있다.




이에 대하여 맥아더사령부참모부에서 근무하면서 조선문제에 대한 미제의 계획에 정통하였던 에이다대좌는 1950년 12월 이란주재 미군사고문단 성원으로 있을 때 이란군참모들과의 담화석상에서 《미국의 계획은 리승만의 직접적인 참가와 미륙해군의 원조에 의하여 조선의 38゜선이북지역을 점령하는것이였다.》라고 증언하였다.




김효석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계획실행을 위하여 1949년 5월에 무쵸는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김효석에게 《미국의 의도를 잘 알고 모든 준비를 유감이 없도록 갖출것》이며 《38゜선 이북에 대한 총진군의 시기》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길수 있게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하였다.




미국의 지원과 부추김을 받은 남조선괴뢰들은 북침전쟁을 통하여 전조선을 《통일》할 허황한 망상에 넘쳐 전쟁도발망언을 련발하였다.




리승만역도는 1949년 4월 10일 조병옥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은 북방을 평정》해야 한다, 《북조선으로 진격하여 철의 장막을 38゜선으로부터 압록강연안》으로 밀어제껴야 한다고 줴쳤고 1949년 10월 7일 미국의 UP통신사 부사장 죠셒 죤슨과의 회견에서는 《나는 우리들이 3일이내에 평양을 점령할수 있다고 확신》하고있다고 허장성세하였다.




리승만역도는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당길 목적으로 미국에서 자기의 적극적인 대변자적역할을 하고있던 올리버에게 1949년 9월 30일에 전쟁도발의 급박성에 대하여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공격을 개시하여 북의 공산권안에 있는 우리의 충실한 지지세력과 합세하여 평양에서 그 나머지 사람들을 숙청해야 할 가장 좋은 시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다음 우리의 방어선을 두만강과 압록강을 따라 강화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비밀편지를 보냈으며 올리버는 10월 10일부 회답편지에서 《북침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거기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공격이 가장 훌륭한, 때로는 유일한 방어로 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하였다.




리승만의 졸개들도 기승을 부리며 북침을 선동하였다.




괴뢰군참모총장 채병덕은 1949년 년두사라는데서 괴뢰군의 과업에 대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신년도에 실지적행동으로 미회복지를 회복하여 조국강토를 통일하여야 할것이다.》느니, 괴뢰국방장관 신성모는 《우리 국군은 …명령만 있으면 이북의 평양, 원산까지라도 1일내에 점령할 자신과 실력을 가지고있다.》느니, 괴뢰국무총리 리범석은 1949 년 3월에 《학도호국단》결성식에 나타나 《학도제군! 이북으로 총진군하자!; 그래서 백두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총을 놓자.》고 고아댔다.




한때 괴뢰내무부장관이였고 국회부의장이였던 윤치영도 1949년 3월 9일 기자회견에서 《남북조선을 통일하는 유일한 방법은 북조선의 실지를 힘으로 회복하는것이다.》라고 떠벌이였다.




이와 같은 증언들은 리승만을 괴수로 하는 남조선괴뢰들이 북침전쟁을 《국토통일》의 기본수단으로 삼고 미국의 계획에 따라 전쟁도발을 기정사실화하고있었다는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미국무성 특별고문 덜레스가 1950년 6월에 남조선에 날아들었다. 6월 17일 서울에 도착한 덜레스는 다음날 미군사고문단과 괴뢰군의 고위인물들을 거느리고 38゜선을 시찰하고 만족을 표시하였으며 19일에는 괴뢰국회에서 《당신들은 외롭지 않다. 당신들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위대한 구상을 실현하는데서 가치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한 절대로 외롭지 않을것이다.》고 괴뢰들을 《격려》하였다.




덜레스의 방문일정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18일에 진행된 리승만과의 비밀회담이였다. 이 회담의 내용에 대하여 해방후 미군정청 고문 겸 하지의 책임고문인 서재필의 1등서기관으로 있다가 그후 유엔주재 남조선대사, 뉴욕주립대학 사회정치학 명예교수, 박사였던 림창영은 《내가 이전에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낸바 있는 전 국군중장 최덕신의 말에 의하면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공산주의와 싸울 각오가 되여있는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이 언제나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확언하였다고 한다. 덜레스는 …리승만에게 공산북조선을 공격할 준비가 되여있다면 미국은 유엔을 통하여 도와주겠다고 시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리승만에게 남조선이 먼저 공격을 받았다는것을 세계가 인식하도록 해야 할 필요성과 그에 따라 행동계획을 짜야 한다는데 대하여 강조하였다.》고 확언하였다.




결국 덜레스가 남조선을 떠나간지 불과 며칠후에 전쟁의 포성이 울렸던것이다.




력사는 결코 위조할수도 외곡할수도 없으며 부정할수도 없다.




력사적증언과 자료들은 조선전쟁의 도발자는 바로 미국이며 미국은 전범자의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미국에 의하여 조선전쟁이 강요된지 수십년세월이 흐르고 세기는 바뀌였지만 미국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도 미국과 그에 빌붙어 잔명을 유지하는 남조선괴뢰역적패당은 1950년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우리 공화국의 《도발》과 《위협》을 떠들며 새 전쟁도발에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다.




그러나 우리 공화국과 미국사이의 전략적구도는 완전히 뒤바뀌였다. 만일 미국이 이러한 현실을 망각하고 이 땅에서 전쟁을 도발한다면 그것은 미국의 자멸만을 가져올뿐이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의 주요특성



룡남산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의 주요특성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박사 부교수 진정철 2017.12.18.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대외경제관계를 다각적으로 발전시키며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를 비롯한 경제개발구개발사업을 적극 밀고나가야 합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우리 나라의 대외관계를 다각적으로 발전시키며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를 비롯한 경제개발구개발사업을 적극 밀고나갈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관광지이며 명승지이다. 여기서 지대란 일정한 관광구획의 단위를 의미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관광구획을 지대‐지구‐구역‐소구역을 단위로 하여 나누는데 여기서 가장 큰 관광구획단위는 지대(1급)이며 대표적인것이 바로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이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우선 지리적으로 관광에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있다.

일반적으로 관광지의 지리적특성이라고 할 때 관광지의 지리적위치, 교통의 편리성, 관광지의 기상기후조건 등을 말하는데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관광수요자들의 요구에 만족되는 관광지는 세계적으로 많지 못하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이러한 요구조건들을 비교적 원만한 수준에서 만족시키는 관광지대이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관광려행에 아주 적합한 위치에 자리잡고있는 관광지이다.

원산은 우리 나라의 동해바다가에 위치하고있는 강원도의 소재지이고 해안도시이며 기묘한 산봉우리들과 바다를 끼고있다. 위치는 조선반도의 동쪽중부에 자리잡고있으며 년평균온도가 10.4℃이다.

원산시는 로씨야와 중국, 일본 등 린접나라들에서 비행기로는 1~2시간이면 와닿을수 있는 거리에 있으며 3~4시간이면 중국홍콩, 중국대북, 상해를 비롯한 인구 100만명이상을 가진 여러 나라의 도시들로 오갈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있다.

국내교통로를 보면 륙로로는 평양-원산관광도로, 철도로는 원산-금강산철도가 있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또한 여러가지 목적의 관광에 유리한 특성을 가지고있다.

일반적으로 관광은 휴양이나 병치료를 목적으로 하여 진행하는데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이러한 목적을 모두 만족시킨다.

주요관광자원들로는 수많은 력사유적들과, 백사장들, 광천자원들, 자연호수들, 자연식물군락들, 관광명소들, 치료에 특효가 있는 감탕을 가진 호수 2개가 있다.

무엇보다먼저 여름철관광기간에 해수욕을 위한 송도원해수욕장,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꾸려져있다.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주체49(1960)년 8월 17일에 창설되였는데 창설당시에는 수백명의 수용능력을 가진 송도원중앙소년단야영소로 꾸려졌으며 주체74(1985)년 8월에 그 능력이 확장되여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로 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주체82(1993)년 3월에 야영소가 현대적으로 건설되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천여명의 수용능력을 가진 웅장화려한 야영소로 발전하였다.

여기에는 국제친선소년회관, 화면반주음악설비가 갖추어진 음악감상실, 실내수영관, 물놀이장, 문어다리유희시설, 수족관 등이 갖추어져있으며 정구장, 축구장, 롱구장, 배구장, 송구장, 탁구장, 뽀트장이 훌륭하게 꾸려져있다. 국제친선소년회관에는 극장, 전자오락실, 음악실, 태권도실, 탁구실, 미술실, 도서실, 소년단실 등이 꾸려져있다. 또한 침실들과 식당, 상점, 진료소, 수리기지 등이 현대적으로 꾸려져있다. 야영은 매해 4월부터 10월까지의 기간에 진행하며 야영기간은 12일간이다.

외국인소년들은 매해 7, 8월을 기본으로 하여 20~25일간 우리 나라 소년단원들과 함께 야영생활을 진행한다.

우리 어린이들을 위하여서는 이 땅의 천만금이라도 아끼지 않으시고 통채로 안겨주시는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를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훌륭하게 개건하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대원수님의 자애로운 영상을 형상한 동상이 정중히 모셔지게 되였으며 김정일애국주의교양실, 국제친선소년회관, 야외운동장과 실내체육관, 실내수영관, 야외물놀이장, 야외활쏘기장, 수족관, 조류사, 동물박제품진렬실 등 야영생활에 필요한 모든것이 종합적으로 꾸려지게 되였다.

다음으로 병치료목적의 관광을 위한 여러가지 온천과 감탕치료장소들을 가지고있다.

통천지구에는 우리 나라 관동 8경의 하나인 총석정이 있으며 이 지구에는 신경통, 소대장염치료에 특효인 동정호와 시중호 등 자연호수와 감탕자원이 있다. 그리고 백사장들과 해수욕장, 관광명소들, 숙박시설들과 치료장, 상점, 식당 등 봉사시설들이 있다.

금강산지구에는 외금강과 내금강, 해금강과 삼일포가 있다.

외금강지구와 내금강지구, 삼일포지구, 해금강지구에는 수백개의 관광명소들과 력사유적, 자연식물군락, 백사장들과 자연호수들, 광천자원이 있다.

이밖에도 골프장, 눈썰매장, 스키련습장, 해수욕장이 있으며 옥류관, 단풍관, 목란관, 온천장도 있다. 여기에 숙박시설들이 훌륭히 갖추어져있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또한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관광을 진행할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있다.

일반적으로 관광지들은 어느 한 계절에만 관광을 할수 있는것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관광의 계절적특성으로 볼 때 일년 사계절 모두 관광을 할수 있는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관광지이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우리 인민들이 최고의 문명을 최상의 수준에서 누리도록 하시기 위하여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를 세계적수준의 관광지로 꾸리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에는 겨울철관광을 위한 세계일류급의 마식령스키장이 훌륭히 건설되였다.

마식령스키장은 강원도 원산시 령저구에 있으며 종합적인 스키장지구로서 스키주로의 총연장길이는 49.6km이다. 스키장에는 화려하고 아담하면서도 산골맛이 나는 마식령호텔이 있다.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바다와 산을 모두 끼고있어 여러 류형의 관광을 할수 있고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관광을 할수 있는곳으로 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관광지이다. 그리고 관광명소들과 휴양지, 치료지의 곳곳마다에 숙박시설들과 문화후생시설들이 훌륭히 꾸려져있으므로 관광객들의 편의를 충분히 보장할수 있다.

원산-금강산관광지대의 매력적인 자연풍경과 1류급의 관광시설조건은 세계의 그 어느 나라들과 당당히 견줄수 있으며 특히 무더운 여름철과 추운 겨울철관광을 모두 보장할수 있어 세계적인 주목을 모으고있는 관광지대로 되고있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사회주의문명강국건설은 더욱더 앞당겨지고있으며 세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국인 우리 나라에서 원산-금강산국제관광지대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로서의 훌륭한 본보기로 꾸려지게 될것이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는것은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중요요구



룡남산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는것은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중요요구
김일성종합대학 평양의학대학 박호영 201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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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나라를 과학기술강국의 지위에 올려세우기 위하여서는 인재를 중시하며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여야 합니다.》

사회주의강국건설에서 오늘 우리가 선차적으로 점령하여야 할 중요한 목표는 과학기술강국이며 과학기술강국을 건설하자면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여야 한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는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대학졸업정도의 지식을 소유한 지식형근로자로, 과학기술발전의 담당자로 준비시키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다.

전체 인민을 현대과학기술로 무장한 과학기술인재로 튼튼히 준비시켜야 지식경제시대의 요구에 맞게 나라의 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주의강국건설을 과학기술적으로 확고히 담보해나갈수 있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는것이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중요요구로 되는것은 무엇보다먼저 그것이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직접적담당자인 과학기술인재대렬을 튼튼히 꾸릴수 있게 하기때문이다.

과학기술에 의거하고 과학의 힘으로 전진하여나가는 오늘 어디서나 요구되는것은 인재들이다.

사회가 발전하고 사람들이 대상하는 자연의 령역이 넓어지며 더우기는 첨단과학기술이 발전하여 사람들의 활동에서 육체적로동보다 정신로동, 과학기술적창조력이 노는 역할이 더욱 높아지는 조건에서 현시기 사회는 더 많은 인재들을 요구하고있다.

과학기술인재들에 의하여 창조되는 새 지식과 기술들은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산업구조를 현대화하고 생산활동에서 경제적효과를 최대한으로 높여 사회경제발전을 추동하고 나아가서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재가 많고 그들의 역할이 높으면 자력갱생의 투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도 세인을 놀래우는 기적을 창조할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조건이 아무리 유리해도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주저앉게 된다.

사회주의강국은 과학기술강국이며 과학기술강국은 곧 과학기술인재강국이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는 사회생활의 특정한 부문, 단위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모든 부문, 모든 단위의 일군들과 근로자들, 사회의 전체 성원들을 대학졸업정도의 지식을 소유하고 능숙하게 활용해나가는 유능한 인재들로 키워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직접적담당자인 과학기술인재대렬을 튼튼히 꾸려나가게 한다.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는것이 과학기술강국건설의 중요요구로 되는것은 다음으로 그것이 과학기술강국건설의 목표를 빨리 달성할수 있게 하는 지름길이기때문이다.

과학기술강국은 나라의 전반적인 과학기술이 세계첨단수준에 올라선 나라, 과학기술의 주도적역할에 의하여 경제와 국방, 문화를 비롯한 모든 부문이 급속히 발전하는 나라이다.

과학기술강국건설의 목표는 가까운 앞날에 종합적과학기술력에서 세계적으로 앞선 나라들의 대렬에 당당히 들어서는것이다.

과학기술력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자원이며 사회발전의 강력한 추동력이다. 나라의 정치사상적위력과 경제력, 군사력도 최신과학기술에 의하여 안받침되여야 비상히 강화되고 더 높이 발휘될수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을 발전시켜도 남들이 걸은 길을 따라만 갈것이 아니라 년대와 년대를 뛰여넘으며 비약해나가야 한다.

과학기술강국의 목표는 어느 한두사람의 과학기술인재들의 힘으로는 달성할수 없다. 과학기술강국의 목표 그자체가 어느 한분야의 과학기술력이 아니라 경제와 국방, 문화를 비롯한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의 과학기술력을 발전시켜 나라의 존엄과 지위를 최상의 경지에 올려세우기 위한 사업인것만큼 과학자, 기술자들은 말할것도 없고 사회의 모든 근로자들도 현대과학기술을 소유한 기술형의 인간, 지식형의 인간이 될것을 요구하고있다.

때문에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실현하여야 나라의 종합적과학기술력을 발전시키는데서 비약을 일으켜나갈수 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과학기술강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유능한 과학기술인재로 키우는 전민과학기술인재화를 목표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려나가고있다.

새 세기 교육혁명을 일으켜 우리 나라를 교육강국, 인재강국으로 빛내여나가려는 당의 의도밑에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이 실시되여 중등일반교육체계가 강화되고있으며 전국의 학교와 대학들이 교육의 현대화, 정보화를 실현하면서 교육내용과 방법, 교육수준을 높이기 위한 불바람을 일으키고 교육조건과 환경을 일신시켜나가고있다.

전민학습의 대전당이며 다기능화된 과학기술보급의 중심기지인 과학기술전당을 중심으로 전국의 도, 시, 군들마다의 도서관과 미래원, 과학기술보급실들에 보급망을 형성하여 새로운 과학기술자료들이 중앙에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물이 흐르듯이 보급되도록 하고있다.

전민학습의 거점인 대학들에 원격교육체계가 정연하게 세워지고 공장대학, 농장대학, 어장대학들이 늘어나고 기관, 기업소, 공장, 협동농장들마다에 현대적인 과학기술보급실이 훌륭히 꾸려져 수많은 근로자들과 일군들이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되여 과학기술지식을 소유한 유능한 과학기술인재들로 준비해나가고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과학기술열풍에 의하여 생산과 건설에서 많은 성과들이 일어나고있으며 특히 국방과학기술분야에서 놀라운 기적들이 다계단으로 련발적으로 일어나고있다.

이 모든 자랑찬 현실은 발전하는 현실의 요구에 맞게 전민과학기술인재화방침을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가는 우리 당의 령도가 있는 한 과학기술강국은 가까운 앞날에 반드시 일떠서고야만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



룡남산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위대한 사상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박사 부교수 장순남 2018.9.17.


오늘 우리 지식인들은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을 높이 받들고 눈부신 과학기술성과로 사회주의강국건설과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투쟁을 믿음직하게 담보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위대한 주체사상의 원리로부터 출발하여 인테리를 로동자, 농민과 함께 우리 혁명의 기본동력으로 내세우시였으며 과학자, 기술자들을 더없이 귀중한 나라의 보배로 여기시고 그들모두를 한품에 안아 과학탐구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시였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5권 483페지)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과학연구수단과 조건보장보다도 과학을 알고 지식인들을 믿고 아껴주는 위대한 령도자, 참다운 스승을 모시는것이다.

오늘 우리의 지식인들이 세계를 놀래우는 과학연구성과로 사회주의강국건설을 믿음직하게 담보하고있는것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이 있기때문이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위대한 사상이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무엇보다도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을 구현하고있는 위대한 사상이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은 우선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규정하신것이다.

혁명의 동력을 옳게 규정하는것은 혁명투쟁에서 혁명력량편성과 그에 맞는 과학적인 전략전술의 수립에서 중요한 문제로 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혁명의 첫시기에 벌써 지식인들의 대부분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나 일제통치하에서 공부하고 일제기관에서 복무하는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가지고있는 반일사상과 애국적량심을 더 귀중히 여기시여 그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보시고 동지로, 투사로 키워주시였으며 주체35(1946)년 8월 공산당을 근로인민의 대중적정당인 로동당으로 강화발전시키면서 우리 당마크에 로동자와 농민, 근로인테리를 상징하는 마치와 낫, 붓을 그려놓도록 하시였다.

우리 지식인들을 혁명의 동력으로 규정하시고 당기발에 지식인을 상징하는 붓을 그려넣도록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 그 어떤 믿음에도 비길데 없는 믿음중의 가장 큰 믿음으로 된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은 또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에게 당과 국가의 중요직책도 맡겨주시며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도록 하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의 당과 혁명에 대한 충정심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을 굳게 믿으시고 해방직후부터 그들을 당에 받아들이고 당과 국가의 책임적인 직책도 맡겨주시는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전에 공부한 오랜 지식인들중의 한 사람인 임록재선생의 한생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임록재선생은 수천종의 가치있는 식물자원들을 수집조사하고 그에 대한 과학연구사업을 진행하여 인민경제발전과 인민들의 건강증진 및 문화정서생활향상에 적극 이바지한 유명한 식물학자이다.

남달리 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임록재선생은 해방전 우리 나라의 풀과 나무에 대한 연구사업을 진행하면서 제 나라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에 조선말로 이름을 붙인 죄아닌 죄로 하여 식물표본통을 가지고 방랑의 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해방후에도 남조선에서 식민지지식인의 설음과 고통을 강요당하였다. 그는 주체35(1946)년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서야 진정한 식물학자로서의 삶을 누리게 되였고 오랜 기간 중앙식물원 원장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북반부의 지식인들은 물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달려온 허헌, 김광진, 계응상 등 여러 지식인들을 굳게 믿으시고 이들모두를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도 애국적지조와 절개를 굽히지 않은 애국적인 지식인들이라고 높이 평가하시면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교육상, 내각무임소상,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비롯한 중책들을 맡겨주시고 우리 당의 지식인이라는 고귀한 칭호도 안겨주시는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은 또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의 정치적생명을 끝까지 책임져주시고 빛내여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이 나쁜놈들의 모해나 사업과정의 본의아닌 실수로 하여 엄중한 과오를 범하고 자기의 귀중한 정치적생명을 잃게 되였을 때에도 그들을 굳게 믿으시고 그들의 정치적생명을 회복시켜주시고 끝까지 빛내여나가도록 하시였다.

우리 나라의 유명한 유전학자였던 계응상선생의 한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속에서 자기의 정치적생명을 끝까지 빛내인 한생이라고 할수 있다.

계응상선생은 주체44(1955)년 여름 마쟈르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보고회에 참가하여 《환경유전설》의 과학성을 부정하는 현대유전학에 관한 문제를 발표하여 참가자들의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국제학술보고회가 끝난 후 조국으로 돌아오던중 이전 쏘련과학자 릐쉔꼬를 만나 주체적인 과학탐구의 길에서 자기가 달성한 연구결과를 가지고 학술적으로 《환경유전설》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과학적인 론증을 하였다.

그러나 종파사대주의자들은 계응상선생이 큰 나라의 기분을 잡쳐놓았으니 큰일난다고 하면서 그에게 사죄할것을 강요하였으며 그를 잠업연구소의 소장직위에서 해임하고 연구소를 해산하려 하였고 잠업학에 대한 강의도 중지시켰다.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종파사대주의자들의 그릇된 처사를 호되게 비판하시고 계응상선생을 훌륭한 과학자로 높이 치하하시였다. 뿐만아니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업연구소를 다시 조직하고 그를 소장직위에서 다시 사업하도록 하시였으며 중지되였던 잠업학강의도 계속하도록 해주시는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이처럼 우리 지식인들의 정치적생명을 끝까지 책임져주시고 빛내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이 있었기에 계응상, 로태석, 강영창 등 오랜 지식인들은 새 조국건설시기와 조국해방전쟁시기, 전후복구건설시기를 비롯하여 혁명과 건설의 여러 단계에서 언제나 우리 당과 운명을 함께 하며 당을 받들어 끝까지 잘 싸울수 있었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다음으로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위대한 사상이다.

주체과학의 70여년력사는 우리 지식인들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 뜻과 정을 주시고 자신의 혈붙이처럼 여기시며 보살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은정에 대한 이야기를 수많이 기록하고있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은 우선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이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세우도록 이끌어주시고 자그마한 과학연구성과도 높이 평가하시며 내세워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이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튼튼히 세우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과학연구사업에서 기본은 우리 당과 우리 혁명이 요구하는 방향에 따라 주체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과학기술을 발전시켜나가는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 지식인들이 모든 과학적문제들을 주체적립장에 튼튼히 서서 당의 의도에 맞게 우리 인민의 지향과 요구, 우리 나라의 구체적실정에 기초하여 진행해나가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의 자그마한 과학연구성과도 높이 평가해주시고 온 나라 인민들이 다 알도록 내세워주시였다.

혁명생애의 전기간 우리 지식인들을 금싸래기처럼 귀중히 여기시고 애지중지 키우시며 친어버이의 애틋한 정을 기울여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에게 주실수 있는 모든 영예를 다 안겨주시면서 온 세상에 보란듯이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각별하고 끊임없는 사랑속에 홍기문선생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어학, 력사학분야의 수많은 도서들과 론문들을 집필하였으며 여러권의 민족고전들을 번역하였다. 그가 조선봉건왕조실록번역사업에서 성과를 이룩하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공민의 최고영예인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위대한 장군님의 직접적인 지도밑에 우리 사회과학자들이 전40권의 당정책해설도서인 《조선로동당정책사》를 집필하였을 때에는 《조선로동당정책사》에 인민상을 수여할것을 제의하시고 집필에 참가한 사회과학자들에게 높은 국가수훈과 학위학직을 수여해주도록 하시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보살피심속에서 우리 지식인들은 과학연구사업에서 주체를 확고히 세우고 우리 당과 혁명, 우리 조국과 인민을 위한 훌륭한 과학연구성과를 이룩할수 있었으며 온 나라가 다 아는 지식인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은 또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이 과학연구사업에 전심할수 있도록 생활조건과 사업조건에 깊은 관심을 돌려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을 나라의 귀중한 보배, 밑천이라고 하시며 주실수 있는 온갖 사랑과 배려를 다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의 생활조건을 일일히 보살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탄생 35돐을 맞으시는 주체36(1947)년 4월 15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과 항일혁명투사들이 마련해드린 검소한 생일상마저 마다하시면서도 얼마 안있으면 5.1절인데 종합대학에는 대학에 와서 처음으로 명절을 쇠는 학자들이 많을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게 명절떡감으로 옥백미와 찹쌀가마니를 집집마다 보내주자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이뿐만아니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일성종합대학 본교사의 터전을 잡아주시던 그때 벌써 풍치아름다운 모란봉기슭, 대동강가의 아늑한 골안에 종합대학 교원들의 살림집을 짓도록 가르쳐주시고 본교사건설에 뒤이어 서재까지 달린 3칸, 4칸짜리 훌륭한 교원살림집마을을 꾸려주시였다.

해방후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던 지식인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시여 손수 위촉장까지 보내시며 김일성종합대학의 높은 교단에 세워주시고 그들의 건강과 가정생활문제에 이르기까지 따뜻이 보살펴주신 사실, 전투원 한사람 한사람이 금싸래기처럼 귀중하였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한개 련대를 풀어 한 과학자의 가정을 적후에서 구원해오도록 하신 사실 등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에게 돌려주신 뜨거운 사랑과 배려는 참으로 많고많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지식인들의 사업조건도 최상의 수준에서 마련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에서 교원생활을 하다가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온 리승기선생에게 전쟁의 어려운 조건이지만 비날론연구를 중지하지 않고 계속할수 있도록 실험실도 꾸려주고 실험설비도 사다주면서 모든 조건을 다 보장해주시였으며 그가 실험에서 성공하였을 때에는 그 성과에 기초하여 전후에 큰 비날론공장까지 건설하도록 하시였다.

일찌기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쳐 함흥과 평성에 현대적인 과학연구기지를 꾸려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과학부문에 투자하는것이 당장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해도 후대들을 위하여 투자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과학연구사업에 많은 자금을 돌리도록 하시였다.

이처럼 우리 지식인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각별한 사랑과 배려속에서 최상의 생활조건과 과학연구조건을 보장받게 되였으며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과학연구사업에 열중하여 조국의 륭성번영과 인민의 행복을 위한 훌륭한 과학연구성과들을 내놓을수 있었다.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에 담겨져있는 위대한 수령님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사랑은 또한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지식인들에게 죽어서도 영생하는 삶을 안겨주신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의 품에서 어엿한 혁명가로 성장한 허헌선생이 잘못되였다는 비보를 받으시고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한명의 군인이 그처럼 귀중하던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시기 무려 3 000여명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그의 시신을 무조건 찾도록 최고사령관명령을 내리시였으며 그의 시신을 찾은 다음에는 시신을 안전한 곳에 두었다가 전후에 다시 잘 안장하도록 하는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고 그의 장의를 국장으로 하도록 하고 자신의 화환도 보내주시였으며 공화국 내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남북의 각 정당, 사회단체의 명의로 부고를 발표하여 그의 투쟁공적을 평가할데 대한 내각결정을 채택하게 하시였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에 갖은 민족적멸시를 받아온 원홍구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품속에서 과학자로서의 값높은 삶을 누리고 눈부신 영예를 다 받아안았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배려에 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당시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사업하였을뿐아니라 로력훈장을 비롯하여 높은 급의 훈장을 받았으며 사망후에는 그의 초상우표까지 발간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는 사랑, 보살피심이 있어 우리 지식인들은 죽어서도 령도자의 추억속에, 온 나라 인민들의 기억속에 살아있는 영생의 삶을 누리고있는것이다.

우리 지식인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는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위대한 장군님에 의하여 더욱 활짝 꽃펴났으며 오늘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에 의하여 그대로 이어지고있다.

이처럼 우리 당의 과학기술중시사상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지식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구현하고있으며 그것은 오늘 우리 지식인들이 더 큰 과학기술적성과로 사회주의강국건설을 추동해나갈수 있는 힘있는 원동력으로 되고있다.

우리 지식인들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 경애하는 최고령도자동지의 그 믿음, 그 사랑에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자기의 있는 지혜, 있는 열정, 있는 힘을 다바쳐가고있다.

한 외국인 녀성기자의 탄복



룡남산


https://en.wikipedia.org/wiki/Anna_Louise_Strong

한 외국인 녀성기자의 탄복
김일성종합대학 문학대학 고영국 2017.6.15.


위대한 수령님은 우리 기자들의 자애로운 어버이, 스승이시였을뿐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진보적기자들의 은혜로운 태양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전에 오스트랄리아의 월프레드 버체트, 일본의 다까끼 다께오, 뻬루의 체까 헤나로 까르네로, 에꽈도르의 움베르또 오르띠스 풀로레스, 인디아의 비슈와나스, 쏘련의 《쁘라우다》기자였던 젬스꼬브를 비롯한 수많은 기자들을 만나시여 뜨거운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이들중에는 미국의 녀성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도 있다.

미국의 녀성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중국주재 UPI통신사 기자였던 애버스런과 같이 1930~1940년대의 적지 않은 나날을 중국의 항일전장들과 해방지역에서 글을 썼다. 중국혁명에 이바지하는 진보적인 언론활동과 중국인민에 대한 깊은 리해와 동정으로 하여 주은래와도 친교가 두터웠다. 중국사람들은 그를 《왕관을 쓰지 않은 녀왕》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던 그가 중국의 산서, 섬서, 동북의 해방지역들을 거쳐 1947년 8월에 우리 나라를 방문하고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받아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나는 년로한 녀성의 몸으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우리 나라를 방문하고 우리 인민에게 고무적인 말씀을 하여준데 대하여 선생에게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김일성전집》 제6권 170페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미국을 떠나 오랜 기간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문필활동으로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인민들의 투쟁을 지지하여준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나를 명성이 높은 청년장군이고 나라와 민족을 구원한 영웅이라고 하였는데 과분한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조선의 진정한 애국자들이 다 그러한것처럼 나도 인민의 아들로서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였을뿐입니다라고, 나는 앞으로도 조국의 자주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한생을 바칠 결심이라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건국사업을 자주적으로 하고있는데 대하여 경탄을 표시하였는데 우리는 새 민주조선 건설에서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있다고 하시면서 그가 어떻게 되여 짧은 기간에 민주건설에서 혁혁한 성과를 달성할수 있었는가 물었을 때에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각계각층의 광범한 대중을 인민정권의 주위에 튼튼히 결속시키고 그들의 애국적열의와 창의창발성을 적극 발양시켰기때문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은 우리 나라에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내가 대통령으로 선거될것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서울의 정부청사에서 나와 다시 상면할것을 기대한다고 하였는데 통일정부의 대통령으로 누가 되는가 하는것은 남북조선 전체 인민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나는 다만 우리 인민의 신임과 사랑을 받으며 조국의 완전독립과 부강발전을 위하여 헌신분투할 생각뿐이라고 하시면서 나 역시 통일된 우리 나라에서 선생과 다시 만날것을 기대한다는 뜻깊은 교시를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국제무대에서 민주와 반동이 날카롭게 대결하고있는 오늘의 복잡한 정세하에서 선생과 같은 진보적언론인들의 임무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진보적언론인들은 정의의 필봉으로 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들의 반동적책동을 신랄히 폭로규탄하고 민주력량의 투쟁을 지지성원하여야 한다고, 선생이 돌아가면 북조선의 민주건설과 나라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을 미국인민들과 세계인민들에게 널리 소개하겠다고 하였는데 그에 대하여 고맙게 생각한다고 그를 고무하여주시였다.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2주일간의 우리 나라 체류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 올린 편지에서 《지금 귀하는 이곳에서 전조선장래의 력사를 창조하고계십니다.》라고 한 말과 영국의 《뉴스 테이츠맨 인드네이슌》지에 북조선민주주의정권의 혁혁한 성과를 찬양하면서 우리 수령님을 통일조선의 대통령이 되기에 가장 합당한 령도력과 자질을 갖추신 분이라고 칭송한것은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없이 겸허하신 품성을 지니시고 인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투쟁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사랑의 한품에 안아 삶을 빛내여주시는 세계인류의 태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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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 Louise 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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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Anna Louise Strong
Anna Louise Strong 1918.jpg
Anna Louise Strong at the time of her recall from the Seattle School Board in 1918.
BornNovember 24, 1885
Friend, Nebraska, United States
DiedMarch 29, 1970 (aged 84)
Beijing, China
Alma materBryn Mawr College
Oberlin College
University of Chicago
Spouse(s)Joel Shubin (1931–1942)
Parent(s)Sydney Dix Strong
Ms. Strong in Moscow, 1937
Anna Louise Strong (November 24, 1885 – March 29, 1970) was a 20th-century American journalist and activist, best known for her reporting on and support for communist movements in the Soviet Unionan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1][2][3][4]She wrote over 30 books and varied articles.[5]

Biography[edit]

Early years[edit]

Strong was born on November 14, 1885, in a "two-room parsonage" in Friend, Nebraska, the "Middle West," to parents who were middle class liberals active in the Congregational Church and missionary work.[6][7][4][8] [9] Her father, Sydney Dix Strong, was a Social Gospel minister in the Congregational Church, active in missionary work, and dedicated pacifist.[10][1][9] With such education, she worked quickly through grammar and high school, and then studied languages in Europe.[6] Living her early childhood, from 1887 to 1891 in Mount Vernon Ohio, her family had moved to Cincinnati in 1891.[7]
She first attended Pennsylvania's Bryn Mawr College from 1903 to 1904, then graduated from Oberlin College in Ohio in 1905 where she later returned to speak many times.[6][7][8]In 1908, at the age of 23, she finished her education and received a PhD in philosophy from the University of Chicago with a thesis later published as The Social Psychology of Prayer.[1][7][4][11][12][8][9] Being an advocate for child welfare while she worked for the United States Education Office, joining the National Child Labor Committee around the same time, she organized an exhibit and toured it extensively throughout the United States and abroad.[1][6][7] When she brought it to Seattle, in May 1914, 6,000 people came to visit it every day, culminating with an audience, on May 31, of 40,000 people.[6]
At this point, Strong was still convinced that capitalism was responsible for poverty, and sufferings of the working class.[6] She was 30 years old when she returned to Seattle to live with her father, then pastor of Queen Anne Congregational Church.[4]labor and progressive, with "radicalizing events" like the Seattle General Strike and Everett massacre.[1][6][4]
Strong also enjoyed mountain climbing. She organized cooperative summer camps in the Cascades and led climbing parties up Mt. Rainier, leading to the Washington Alpine Club, formed in 1916.[6][13]

Political career[edit]

In 1916, Strong ran for the Seattle School Board in 1916 and won easily due to the support she garnered from women's groups and organized labor and to her work on child welfare.[6][7][4][9] She was the only female board member.[1][6] She argued that the public schools should offer social service programs for underprivileged children, with these schools serving as community centers, but other members wanted to "devote meetings to mundane matters like plumbing fixtures."[6][4]
The year she was elected to the Seattle School Board, the Everett massacre happened. The New York Evening Post hired her as a stringer to report on the conflict between armed guards, hired by Everett mill owners, and the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or "Wobblies").[6][4] Quickly dropping her neutrality, she soon became an dedicated spokesperson for workers' rights.[6][4]
Strong's endorsement of left-wing causes set her apart from her colleagues on the school board.[6] She opposed war as a pacifist. When the United States entered World War I in April 1917, she spoke out against the draft[6][4] On one hand, the Parent-Teacher Association and women's clubs joined her in opposing military training in the schools, but the former military veterans of the Spanish–American War, the Seattle Minute Men, took a jingoistic tone, branding her as "unpatriotic."[6][4] The same year, she wrote a letter to the Department of Justice, saying[14]
...it is quite commonly felt in this vicinity that persons with personal grudges need only call in the Department of Justice and lodge complaint, in order to make life miserable for the person they complain against...it has become increasingly evident, however, at least in this vicinity, that the activities of the Department of Justice are doing more than any other one thing to create distrust, suspicion, and dissension among the American people...Wild accusations and attempts to injure persons and organizations who cannot be prosecuted because of lack of evidence does not tend to create confidence in the government...it is my hope that somewhere in your department I may reach some person who sincerely desires to create within this country the unity of democratic loyalty, rather than the hidden disunion of fear
The pacifist stance of the Wobblies led to mass arrests at the Seattle office where Louise Olivereau. The latter was a typist who had been mailing mimeographed circulars to draftees which urged them to become conscientious objectors.[6] [4] In 1918, Strong stood by Olivereau's side in the courtroom, as he was found guilty of sedition and sent to prison.[6][4]
After this, Strong's fellow school board members were quick to launch a recall campaignagainst her due to her association with the IWW, and won by a narrow margin.[1][6][9] She appeared at their next meeting to argue that they must appoint a woman as her successor. Her former colleagues acceded to her request, but they made it clear that they wanted a mainstream, patriotic representative, a mother with children in the schools. They replaced Anna Louise Strong with Evangeline C. Harper, a prominent country club woman in 1918.[6][4][9] As a result, Strong went "elsewhere in search of socialism in practice" with her search bringing her first to the Soviet Union where she stayed from 1921 to 1940 for part of the year, returning to the U.S. "for a lecture tour, usually between January and April."[1][3]

Journalistic career[edit]

Strong became openly associated with the city's labor-owned daily newspaper, The Union Record, writing forceful pro-labor articles and promoting the new Soviet government.[1][6][7][4][9] On February 6, 1919, two days before the beginning of the Seattle General Strike of 1919, she proclaimed in her famous editorial: "We are undertaking the most tremendous move ever made by labor in this country, a move which will lead — NO ONE KNOWS WHERE!"[6][4][15][16] The strike shut down the city for four days and then ended peacefully and with its goals still unattained.
1921 in Samara, Russia, for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t a loss as to what to do she took her friend Lincoln Steffens' advice and in 1921 traveled to Poland and Russia serving as a correspondent for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6][9] The purpose of going was to provide the first foreign relief to the Volga famine victims. After a year of that, she was named Moscow correspondent for the International News Service.[4][9] Strong drew many observations while in Europe which inspired her to write. Some of her works are The First Time in History (preface by Leon Trotsky) (1924), and Children of Revolution (1925).[4][17][18]
After remaining in the area for several years, Strong grew to become an enthusiastic supporter of socialism in the newly formed Soviet Union, supporting herself as a foreign correspondent for varying "radical American newspapers" and others such as The Nation.[6][19][20] In 1925, during the era of the New Economic Policy in the USSR, she returned to the United States to arouse interest among businessmen in industrial investment and development in the Soviet Union. During this time Strong also lectured widely and became well known as an authority on "soft news" (e.g. How to get an apartment) about the USSR. As she continued to "wave the banner for the needy and downtrodden" wherever there was a revolution there was "Ms. Strong," and she became further convinced that "socialism might be the answer" to problems in the world.[7]
In the late 1920s, Strong travelled in China and other parts of Asia. She became friends with Soong Ching-ling and Zhou Enlai. As always her travels led to books: China's Millions(1928), Red Star in Samarkand (1929). It was during this time that she became friends with "Communist leader Zhou Enlai."[4] She would visit China in 1925, meeting with Feng Yuxiang and Soong Qing-ling and again in 1927, witnessing the failure of KMT-CPCcooperation, leading to her book, " China's Millions" which was published in the United States.[11] There were even invitations sent out to "hear Anna Louise Strong discuss her travels in Russia."[21]
In 1930 she returned to Moscow and helped found Moscow News, the first English-language newspaper in the city.[4][7][9] She was managing editor for a year and then became a featured writer. In 1931 she married fellow socialist and journalist Joel Shubin, and they remained married until his death in 1942.[22] While Shubin often accompanied Strong during her return trips to the United States, the two were often separated due to work commitments. According to Rewi Alley's account, Strong later said: "perhaps we married because we were both so doggone lonely ... but we were very happy."[1]
While living in the Soviet Union she became more enthused with the Soviet government and wrote many books praising it. They include: The Soviets Conquer Wheat (1931), an updated version of China's Millions: The Revolutionary Struggles from 1927 to 1935(1935), the best-selling autobiographical I Change Worlds: the Remaking of an American(1935), This Soviet World (1936), and The Soviet Constitution (1937).[4][9] She also wrote several articles for The American Mercury praising Soviet life.[23]
In 1936 she returned once again to the United States. Quietly and privately distressed with developments in the USSR (The "Great Purges"), she continued to write for leading periodicals, including The Atlantic MonthlyHarper'sThe Nation and Asia.[4][9][24]
A visit to Spain resulted in Spain in Arms (1937); visits to China, visiting anti-Japanese "base areas," leading to her book, One Fifth of Mankind (1938).[11] In 1940 she published My Native Land, the same year that she journeyed to China and met Zhou Enlai several times.[11] The following year, she exposed the plot by Chiang Kai-Shek to divide the "united front" against Japan in the 15-page article, "The Kuomintang-communist crisis in China; a first-hand account of one of the most critical periods in Far Eastern history" published in March.[11][25] Other books include The Soviets Expected It (1941); the novel Wild River (1943), set in Russia; Peoples of the U.S.S.R. (1944), I Saw the New Poland(1946) (based on her reporting from Poland as she accompanied the occupying Red Army); and three books on the success of the early Communist Party of China in the Chinese Civil War.[4] In her book, "The Soviets Expected It," Strong wrote that "the unbroken rise of Stalin's prestige for twenty years both within the Soviet Union and beyond its borders is really worth attention by students of politics."[26]
While in the USSR she travelled throughout the huge nation, including the UkraineKuznetskStalingradKievSiberia, Central Asia, Uzbekistan, and many more.[4] She also travelled into Poland, Germany, and Britain. While in the Soviet Union, Strong met with Joseph StalinVyacheslav Molotov, and many other Soviet officials.[4] She also interviewed farmers, pedestrians, and factory workers.[27] She wrote articles for newspapers and magazines, along with pamphlets as well, gaining "many friends and to become very popular throughout the world."[7] At the same time, she created "suspicion regarding her political loyalties" among the Soviets and the FBI who gained a large file on Strong herself.[7][3][9] Through all this, she stayed committed to the Soviet political project, defending the USSR from anti-communism, but favoring the Chinese more than the Soviets as time went on, especially after the Soviets expelled her[3][9][28]
In World War II, when the Red Army began its advance against Nazi Germany, Strong stayed in the rear following the soldiers through WarsawŁódź and Gdańsk. Her overtly pro-Chinese Communist sympathies, which had been fostered by her visits to China in 1925 and until 1947 in which she interviewed Chinese Communist leaders like Mao Zedong, may have led to her "arrest, imprisonment and expulsion" from the USSR in 1949, reportedly claiming she was an "American spy," a charge which was reportedly repeated years later, in 1953, by a Soviet newspaper, Izvestia.[1][4][8][9][29] After this, she was cut off from the USSR, shunned by Communists in the United States, and denied a passport by the U.S. government, settling in California where she wrote, lectured, and "invested in real estate."[1] In 1955, she was finally cleared of Soviet charges against her, which the CIAthought was a "gesture to the Chinese Communists." By 1958 her passport was restored, after she won a case at the U.S Supreme Court, and she immediately went back to China, where she remained until her death.[1][11][8][9][30][31] She was one of the only Westerners to gain "the admiration of Mao Tse-tung."[6]

Living in China[edit]

Strong with Mao Zedong in 1967
Strong met W. E. B. Du Bois, who visited Communist China during the Great Leap Forwardin the late 1950s, with a photograph of Mao Zedong, Anna Louise Strong, and W. E. B. Du Bois taken on one of Du Bois's trips in circa 1959.[32] Neither Du Bois or Strong ever supported famine-related criticisms of the Great Leap. Strong wrote a book titled When Serfs Stood Up in Tibet based on her experience during this period, which include the Chinese incorporation of Tibet, and criticized individuals such as Allen Dulles, calling him "a man bound by dull words."[11][33] By 1966, Strong had become an "honorary member of the Red Guards" who returned to the Soviet Union from time to time.[3][8][9]
Partly from fear of losing her passport should she return to the USA, she settled permanently in China until her death, publishing a "Letter from China."[3][4] During that time she fostered a close relationship with Zhou Enlai and was on familiar terms with Mao Zedong.[34] It was in an interview with her, in August 1946, that Mao propagated his famous catchphrase of "paper tigers".[35][11][36][37]
Two years after that, she made a keynote speech on China's realities and tried to change the stance of the U.S. government in backing the Chinese nationalists.[11] Strong lived in the old Italian Legation in Beijing which had been converted into flats for the leading "foreign friends". They were allocated on the "bleak basis" of seniority; New Zealand civil servant Gerald Hensley recalled that when he visited Rewi Alley in 1973 Alley was living in the best downstairs front apartment which had been allocated to Strong until she died, at which time Alley moved into it and everyone else moved on one place.[34] Through all of this, she became "disaffected with political systems and people" but did not lose her zeal for justice, continuing to write, with Chinese publishers republishing "much of her writing as a Works set."[7][3] She was not stopped, even by her old age, in her dedication to "Marxist doctrine," especially in China and across the world, writing emotional and colorful accounts which were very popular.[8]
In the later part of her life, Strong was "honored and revered by the Chinese," despite reports in the Toronto Star that the Red Guards were calling her an "imperialist agent," and even remained "in the good graces of the Chinese through the cultural revolution" with Chinese leaders considering her "their unofficial spokesperson to the English speaking world."[1][8][38]
Strong died in a hospital in Beijing (then Peking) on March 29, 1970, pulling out her "intravenous tubes and had refused to eat and take medication." Before her death, she had important visitors like Premier Zhou Enlai who encouraged her to cooperate with the doctors in the hospital because "you have important things to do for us and the rest of the world," Kuo Mo‐jo and other "high government officials.[7][4][8][9] After her death, there was "mourning and memorial throughout China" with Strong buried in Beijing's "Revolutionary Martyrs' Cemetery."[39][11]

Legacy[edit]

Strong's papers reside at the Libraries Special Collections at the University of Washingtonin Seattle.[4] Within the papers of Eleanor Roosevelt are "reports from Anna Louise Strong during and after her visits to Russia and China" although this does not mean there was any relationship, professionally, between Strong and Eleanor.[40] Strong's grandson, Maurice F., would play an important role in the environmental movement, including in the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 (UNEP).[41]
Selected works[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