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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14

김진호.보수의 마음 읽기’의 가능성에 대하여 2021. 7.

올빼미의 밥상(김진호. 민중신학자) :: '논평' 카테고리의 글 목록

‘보수의 마음 읽기’의 가능성에 대하여 - 이나미의 〈전환과 통합의 관점에서 본 보수의 마음〉에 대한 논평논평 2021. 7. 3. 20:50 posted by 한때 올빼미


북한대학원대학교의 SSK남북한마음연구센터가 주관한 
<한반도 '문제'의 마음적 전환: 행위자, 장소 그리고 페미니즘>(2021.06.30)에서 발표된 
이나미 선생의 〈전환과 통합의 관점에서 본 보수의 마음〉에 대한 논평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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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마음 읽기’의 가능성에 대하여
이나미의 〈전환과 통합의 관점에서 본 보수의 마음〉에 대한 논평


리처드 로티(Richard M. Rorty)가 처음 사용한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용어를 연상시키는 ‘마음적 전환’이라는 심포지엄 표제는, ‘언어적 전환’이 그랬듯이 이제까지의 지배적인 인식론적 질서의 교체를 도모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까지는 아직 그 이론적 함의가 형성 중인 ‘정동(affect)이론’이나 ‘인지과학적 마음(mind)이론’이 그러한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나미 선생의 발표글은 ‘마음이론’에 기반을 두고 ‘보수’에 대한 마음 읽기를 시도한다.

‘보수의 마음 읽기’라는 문제설정은 그 표현만으로도 짜릿하다. 언어적 개념이나 정치적 이팩트의 관점에서만 이 문제를 이야기해왔던 나로서는 허를 찔린 느낌이다.

가령 언어장애가 있는 이를 치료하려는 심리치료사가 그의 발화를 언어 개념을 통해 해독하려 한다거나 그의 행위가 어떤 정치적 이팩트를 반영하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적절한 치료를 위한 이해에 이를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어떤 이의 욕구, 바람, 믿음 같은 마음상태를 읽어내려는 마음이론이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마음이론은 언어장애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충분한 임상적 해석능력을 갖추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성 중심적이고 합리적 인과성을 전제로 하는 언어 개념적 접근이나 정치적 효과 분석의 한계를 돌파하는 가능성에 대한 시도라는 점에서 마음이론은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개체적으로 발현되는 인지/마음 상황처럼 차별이나 혐오 같이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인지/마음 상황도 있다. 그러한 사회적 인지/마음을 분석하는 것을 사회인지이론(socioconitive theory)이라고 부르는데, 보수의 마음 읽기를 위해 사회인지이론은, 역시 아직은 충분한 연구성과가 축적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용한 접근으로 보인다.

이나미 선생이 이 글에서 기대고 있는 인지과학적 마음이론그레고리 베이트슨의 연구다. 저자는 베이트슨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두뇌와 신체로 이분화된 것이 아니라 통전적 일체로서의 마음이라는 것, 나아가 개체의 마음과 그가 속한 환경은 불가분 연결되어 있다는 것, 즉 개체의 마음은 공간적 전체와 연결된다는 것, 그리고 마음이 공간적 맥락과도 연결되어 있지만 시간적 맥락과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체의 마음은 시공간적인 맥락의 일부만은 아니다. 그것을 재맥락화하는 성찰의 기능까지 포함한다.

이 대목에서 비판적 인상비평을 이야기하자면, 이런 논지는 베이트슨의 이론이 왕성하게 제기되던 1960년대에는 신선한 문제제기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지성사적 맥락에서는 너무 상식적이거나 모호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상식적이라 함은 개체와 그 시공간적 맥락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 그것을 위해 분과학문적 접근이 아닌 통섭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관한 것이다. 모호하다는 점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의 애매함에 관한 것이다. 

가령 “젊은이는 미래에 대한 관심이 많아 사실적인 정보와 합리적 선택을 중시하는 반면 노인은 남아있는 미래가 별로 없기 때문에 현재의 안정과 정서적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나미 선생의 주장은 ‘보수’를 노인층의 연령효과(age effect)처럼 논하고 있는 듯하다. 연령효과는, 특정한 시공간적 환경에서 성장기를 공유한 세대의 독특한 체험과 그이들의 행동양식이나 집합적 의식을 연계시키려는 코호트 연구와는 달리, 그 시공간적 체험의 역사적 독특성에 대해 묻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진보적 노인도 있을 수 있고 보수적 노인들 사이의 보수주의 양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나타다고 있는 행동과 정체성의 역사문화적 배후를 묻는 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는 노인층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시공간을 달리하는 여러 자료들을 제시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또 노인층의 보수성이 어느 시대 혹은 공간에서는 더 강하게 나타나고 다른 시공간에서는 덜 강한 것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다. 내 생각에는 인지과학적 마음 연구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베이트슨뿐 아니라 보다 최근 연구자들의 가설에 기대면서 논의를 펴면 이런 허술한 인상비평을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문외한이 얘기하기는 조심스럽지만, 한때 한국 철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던 ‘확장된 마음’(the extended mind)에 관한 논쟁은 베이트슨 이후의 보다 현대적인 논점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벌어진 토론으로 보인다.

한편 저자가 ‘기독교와 보수’라는 소절에서 다룬 내용에 대해서는 신학자로서 끼어들 여지가 좀 더 있어 보인다. 우선 “1990년대 이후 보수 세력의 헤게모니가 두드러지게 확장됐다.”는 주장과 그것에 연결된 주장들에 관해서다. 이 주장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 현상과 개신교 보수를 이해할 때 유용하다. 
  • 1989년 설립 당시 이 단체는 월남한 개신교 원로 지도자들이 주축이 된 반공적 보수주의 단체였다. 하지만 그때에는 그 존재감이 미미했다. 
  •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현직의 대형교회 목사들 다수가 한기총 활동에 적극 가담하게 되면서 그 영향력이 급상승한다. 
  • 특히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집권하고 불과 보름도 안 된 시기에, 두 번의 대선 패배로 보수주의적 선거연합이 와해의 위기에 있던 상황에서 무려 20만 명을 동원한 3.1절 시청광장집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되고 그것이 이듬해 대통령 탄핵안 국회통과로 이어지게 되면서, 한기총은 일약 보수반공주의적 연합의 주축세력으로 부상한다. 이러한 한기총의 막강한 보수주의적 구심력은 2013년 어간까지 계속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보완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기총은 지금까지도 반공주의적 보수 성향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된 반공보수주의의 개신교적 아성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은 2013년 이후 급격히 무너졌다. 특히 전광훈이 대표화장으로 선출되는 2019년은 개신교 주류교단들 가운데 어느 곳도 한기총에 기부금을 내지 않았으며 주요 교단들 거의 모두가 명시적으로 탈퇴를 선언했다.

두 번째는 “(이념적) 보수의 헤게모니가 ... 확장되었다”는 1990년대는 한기총의 영향력이 전국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보수주의가 개신교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형성하는 시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 시기는 개신교의 성장의 위기가 본격화되던 시기였고, 교회와 목사들에 실망을 강하게 느끼는 이들이 광범위하게 등장하던 시기였다. 나는 이들을 ‘실망신자’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교회에 대한 충성행위를 이완시키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고 특히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도 표현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실망신자의 떠돌이화’라고 불렀다.

그런데 떠돌이 신자들의 상당수는 일부 교회들에 재정착했는데, 그렇게 해서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한 새로운 유형의 교회들이 러시를 이루었다. 과거 고도성장기인 1970~80년대 대형교회들은 새신자들이 대대적으로 교회에 유입됨으로써 탄생한 것이라면, 이 시기 대형교회들은 떠돌이 신자들의 재정착의 결과부상한 경우가 압도적이다. 1970~80년대 새신자는 대개 농어촌에서 이주한 하위계층이 많았다. 그들은 교ㅕ육수준도 낮았고 자산능력도 열악한 이들이었다. 또한 새로 개신교 신자가 되었기에 자존성이 약한, 목사에 대한 팬덤 같은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그런 이들이 절대다수였다. 반면 1990년대 이후 재정착한 떠돌이 신자들은 교회와 목사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품고 있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교회나 신앙에 대한 주장도 강하고 종교적 자존성도 높은 이들이 다수였다. 한편 과거의 대형교회들이 전국 대도시들, 특히 도시 외곽지역에 산개되어 있었다면, 새 유형의 대형교회들은 강남, 강동, 분당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후자의 신자 대중은 빠르게 자산이 상승한 이들이고 교육수준이나 문화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즉 그들은 사회적 자존성도 높은 이들이 다수였다.

나는 이런 새로운 유형의 교회를 후발대형교회로 분류하면서, 이곳에서 발전한 신앙유형을 웰빙보수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이념적 보수 성격보다는 계급적 보수의 성향이 좀더 강화된,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유형의 보수주의가 이들 후발대형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그것이 문화적 웰빙 취향으로 표출된 고급화된 계급현상이 후발대형교회에서 두드러지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시기에 새로운 보수주의가 형성되고 안착할 수 있는 장소로 이들 후발 대형교회와 비교할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논지다. 수천에서 수만 명의 웰빙적 고급취향의 중상위계층이 매주 1회 이상 모이고 그 기간이 수십년 혹은 태어날 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어지는 곳은 교회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시기 개신교뿐 아니라 불교, 천주교에서도 강남권의 종교시설은 신자대중의 출석률이 다른 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것은 종교적 충성심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정 계층의 문화적 계급화를 설명하기에 유용한 장소가 바로 이 시기 이 지역의 종교였다. 그리고 개신교는 그런 현상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주도했다.

이런 유형의 보수적 대형교회는 보수주의적 선거연합을 형성하는 데 반공주의적 보수 그룹보다는 덜 적극적이었지만, 개신교 교회들과 신자들에 대한 영향력의 차원에서는 가장 강력한 보수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반공적 보수에 집중하고 있는 저자의 개신교 보수 논의는 보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편 “교회가 보수적인 이유 중 하나는 월남자 중에 기독교인이 많았기 때문이다.”는 표현과 그것에 연관된 논의도 수정 및 보충이 필요하다. 우선 일제강점기에 개신교 신자의 70~80%가 북한에 거주했다는 것은 사실의 개연성이 적다. 당시 인구통계, 특히 종교인구조사들 중 신뢰할만한 것이 별로 없지만 그나마 가장 신뢰도 높은 자료는 조선총독부의 자료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것에 따르면 북한지역 개신교 신자는 228,509명이고 남한지역은 279,413명으로, 남한 개신교 인구가 전체의 55%를 상회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보수성’과 ‘월남자 개신교도’의 인과성에 관한 것이다. 저자의 설명은 북한 개신교가 보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보수적’이라는 말은 ‘반공주의적 보수’를 뜻한다. 한데 일제강점기에 북한지역 개신교가 보수적인 것은 이념적으로 반공주의가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북한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은 ‘자유주의’에 대비해서 자신을 ‘정통주의’라고 표현하곤 했다. 북한 개신교도의 80퍼센트 이상은 서북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서북지역 개신교의 90퍼센트 정도가 미국 북장로회 출신 선교사들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당시 미국 개신교 내에서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근대주의 논쟁에서 이들 조선의 서북지역의 선교사들 대다수가 가장 강성의 반근대파 성향에 인사들이었다.(1) 그런 맥락에서 근본주의는 반근대주의적 신앙에 가까웠다. 한데 조선에서 이들 근본주의적 선교사들과 그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던 조선인 개신교 지도자들에게서 근본주의는 조선의 토착종교나 문화에 대한 배타주의 성향이 더 강했다. 아무튼 이때까지 반공주의는 서북개신교의 보수성을 특징짓는 요소가 아니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벌어진 일련의 공산주의화 프로젝트에서 근본주의적 개신교 세력들은 반공성향이 강화되었지만, 그것만으로 월남한 개신교 신자들의 강한 행동적인 반공적 보수주의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그것보다는 당시 남한 사회가 압도적으로 좌편향 성향이 강한 상황에서 낯선 곳으로 이주한 월남자 개신교 청년들이 미군정청과 남한의 보수적 엘리트들에 의해 반공 투사로 호명되는 과정에서 학습된 것이 반공적 보수주의였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한기총을 비롯하여 보수적 교회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한국사회의 지배집단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는 표현과 그것에 연결된 논의도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 저자는 앞에서 개신교 보수주의를 반공적 보수에 초점을 두면서 이야기했는데, 지배집단을 과점한 종교로 개신교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선 상장사 임원이나 국회의원 비율 등, 반공주의와 무관하지는 않겠지만 계급적 범주에 더 가까운 관점에서 보수를 말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사회의 파워엘리트 연구에 따르면 전체 파워엘리트의 40퍼센트 이상이 개신교 신자였다. 한데 이들 계급적 보수, 특히 문화계급화된 보수는 보수대연합이 거대하게 형성될 때는 이념적 보수에 견인되어 엮이기도 하지만 보수대연합이 붕괴되거나 약화될 땐 탈정치화되거나 제3의 길로의 방향선회의 양상을 보이곤 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읽기의 관점에서 보수를 논하겠다는 저자의 논지에 가장 부합하는 설명이 드러나는 대목에 관한 것이다. 태극기집회에 참여한 개신교 신자인 노인의 경우 그들의 보수는 정치적 행동의 관점에서는 극우반공주의적 정치세력화의 한 양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 언어적 개념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보수주의가 반공주의적이면서 친미적이고 때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약탈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소극적 반대의 성향과 결합되었고, 반동성애적이고 반여성주의적 태도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한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사회・경제・문화적 자본을 결여한 남성노인이 유난히 많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기에 언어적 개념이나 정치적 행동의 관점은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음 읽기는 태극기집회에 참여한 노인과 그 현상을 이해하고 진단하는 데 유용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들의 사회적 박탈체험이 보수적 행동으로 나타났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저자의 마음읽기 결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그의 분석에 대해서는 충분한 공감을 하기 어렵다. 가령 저자는 개신교, 이슬람, 유대교 근본주의자의 충원이 주로 ‘주변화된 남성 엘리트들’로 채워진다는 종교사회학적 논의를 논거로 제시하는데, 그런 주장은 인지과학적 마음 연구의 장점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인지과학은 학제간 통섭을 강조하는 여러 범주의 학문적 문제제기 중 특히 과학적 논증이라는 점에 강세가 있다. 그런데 위의 논지는 과학적 명제가 될 수 있을까. 유일신 종교가 아닌 종교의 근본주의는 주변화된 남성 엘리트의 박탈체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또 근본주의적 비종교 현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나아가 남성엘리트의 주변화 체험과 비엘리트 남성의 주변화 체험은 각기 근본주의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차이점이 있는가. 이런 부가된 질문들에 대해 위의 논지는 과학적 명제로서 명징한 분석을 향해 열려 있는가? 나의 추정으로는 인류학적 분석으로 소개될 수는 있어도 과학적 명제로서는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또한 유일신 종교들이 주변화된 남성엘리트의 박탈체험과 밀접히 연관된 시공간적 맥락에 대해서 저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시공간적 보편성을 갖는 명제처럼 이야기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한국사회에서 노인의 박탈체험이 태극기집회로 주체화되는 시공간적 맥락에 대해 저자는 깊게 묻지 않으면서 위의 명제를 제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내가 보기엔 태극기집회 노인의 마음 연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시공간적 체험, 그들의 체험이 특정한 정치적 행동으로 연결되게 하는 담론의 양식, 그것을 실행에 옮기게 하는 사건적 양상 등이 제일 먼저 다루어져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나미 선생의 문제제기에 대해 큰 틀에서 동의한다. 특히 그것을 마음 읽기의 관점에서 보려한다는 점, 그러한 생각의 실험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아쉬움이 있다. 무엇보다도 마음 현상의 시공간적 맥락을 사회인지적 관점에서 읽어내려는 디테일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갈증을 느낀다. 그의 글이 보다 완전해지기를 기대한다. □

[주]

(1) 여기서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었던 서북지역의 두 도시가 있었다. 하나는 선천이고 다른 하나는 평양이다. 평양이 더 큰 도시임에는 분명하지만 선천도 서북지역에서 평양 못지 않은 산업화된 도시였다. 그런데 당시 신문의 기사들로 추정한다면 인구대비 개신교도의 비율은 선천이 더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선천의 개신교를 이끌었던 미국 장로교 선교사는 휘트모어(N.C. Whittemore, 1870-1952, 한국명 위대모)는 미주리 주 파크빌시(Parkville)에 있는 파크대학(Park University) 출신으로 교세가 확장될 때마다 파크대학 출신의 선교사들을 초청했다. 
반면 평양의 개신교를 이끈 선교사는 새뮤얼 모펫(Samuel Austin Moffet. 한국명 마포삼열)인데, 그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 시에 있는 매코믹신학대학(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출신으로, 평양의 개신교 교세가 팽창할 때마다 매코믹 출신 선교사를 초청했다.

 그런데 아시아 선교에 앞장서고 있던 두 대학이 파크대학과 매코믹대학은 매우 대조적 성격의 신학을 갖고 있었다
  • 선천 -- 휘트모어 ---- 파크대학은 근대화에 관심이 있었다면 
  • 평양 -- 새뮤얼 모펫 - 매코믹은 반근대주의적 근본주의 신앙의 이식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선천의 개신교는 전국적 영향력을 갖는데 실패한 반면, 평양의 개신교가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해서 서북지역 개신교를 근본주의적 보수 일색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정확한 주장이 될 수 없지만 신앙의 전국적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 서북주의가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성향이 강했다는 것은 타당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s://owal.tistory.com/category/논평 [올빼미의 밥상(김진호. 민중신학자)]

2020/09/07

한국불교학 그 반성과 전망 / 이혜숙 -동국대학교의 현행 교과를 중심으로 2000년

불교평론



한국불교학 그 반성과 전망 / 이혜숙

-동국대학교의 현행 교과를 중심으로

[5호] 2000년 12월 10일 (일) 이혜숙  동국대 강사





1. 들어가는 말



불교학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간간이 제기되어 온 문제이다. 그 포괄적인 반성과 답에 접근해 가는 방식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타의 종교학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비교하는 입장에서도 가능할 것이고, 불교교리의 해석이 자체적으로 안내하는 것들을 따라가는 방식, 혹은 아주 경험적으로 기존의 불교교육과정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들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접근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불교 전문교육과정의 하나인 대학에서 전공교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는 것들이 불교학의 모든 내용을 포함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중요성 인정도(認定度)의 우선순위를 생각할 때 그것들이 비교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가장 오랜 전통의 불교학 산실인 동국대학교 불교학부와 대학원의 교과들을 검토해보면 이 시점에서 한국불교학이 중요시하는 대강의 내용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필자는 기타의 종교학과 비교를 해보기도 하고, 불교교리에 입각한 검토, 더 나아가서는 소비자주의 불교학이라 할까, 불교인으로서 자유로이 불교를 향하여 묻고 싶은 질문들을 종합하는 방식으로 불교학의 내용과 보완의 과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2. 동국대 불교학의 교과목과 연구경향



우선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불교학 전공과정에 개설되어 있는 교과목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1) 각주 1)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2000학년도 신입생 교과안내 자료.



1학년에 인도불교사,

2학년 기초교육과정에는 초기불교, 중국불교사, 종교학, 불교경전의 이해, 불교원전 강독, 계율학, 아비달마불교, 대승불교, 한국불교사(삼국), 한문불전강독,

3, 4학년 전문교육과정에는 한국불교사(고려, 조선), 중관학, 유식학, 정토학, 화엄학, 한국불교사상, 동아시아불교, 불교윤리학, 중국불교철학, 천태학, 밀교, 불교교리사, 불교사회경제론, 세계종교사, 전법교화론 등이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의 &lsquo;불교사학 전공&rsquo; &lsquo;불교교학 전공&rsquo; &lsquo;응용불교학 전공&rsquo;을 망라하여 개설된 교과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2) 각주2) http://www.dogguk.ac.kr/DGUH/에서 인용. 2000년 11월 현재.



석사과정을 위해서는,

근본불교 연구, 신라불교사 연구, 부파불교 연구, 선사상 연구, 반야사상 연구, 중국불교사 연구, 일본불교사 연구, 한국불교사상 연구, 남방불교사 연구, 서장어 불전 연구, 고려불교사 연구, 중관사상 연구, 천태사상 연구, 불전성립사 연구, 밀교사상 연구, 인도불교사 연구, 범어 불전연습, 여래장사상 연구, 대승불교 연구, 불교교단사 연구, 조선불교사 연구, 유식철학 연구, 화엄철학 연구, 대승불교성립사 연구, 정토사상 연구, 계율사상 연구, 팔리어 불전연습, 삼론학 연구, 법화사상 연구, 중국불교사상 연구, 포교학 연구, 불교사회복지학 연구, 불교서지학 연구, 비교종교학 연구, 불교사회학, 불교경제학, 종교교육학 연구, 불교윤리학 연구, 불교의 여성 연구, 불교고고학 연구가 있다.



박사과정을 위해서는,



신라불교사 특강, 근본불교 특강, 정토사상 특강, 불전성립사 특강, 반야사상 특강, 계율사상 특강, 한국불교사상 특강, 서장어 불전 특강, 삼국불교사 특강, 부파불교 특강, 천태사상 특강, 중국불교사 특강, 여래장사상 특강, 범어 불전 특강, 한국근대불교사 특강, 삼론학 특강, 대승불교 특강, 고려불교사 특강, 밀교사상 특강, 화엄철학 특강, 팔리어 불전 특강, 일본불교 특강, 중국불교사상 특강, 유식철학 특강, 조선불교사 특강, 중관사상 특강, 선사상 특강, 법화사상 특강, 불교교류사 특강, 서역불교사 특강, 인도불교사 특강, 비교종교학 특강, 불교사회학 특강, 포교학 특강, 불교사회복지학 특강, 불교서지학 특강, 불교고고학 특강, 불교예술 특강, 사원경제 특강 등 총 79여 개의 교과가 개설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개설되어 있는 교과목들의 상하단계나 상호관련 등 그 내용을 돌아보는 것은 본고의 예정된 범위를 벗어나므로 여기서는 다만 그 이름들을 주의해 보자. 아울러 국내 기독교대학의 예를 들어 비교해볼까 하는데, 학부의 교과들보다는 대학원과정에 개설된 것들이 연구의 중심과제가 되고 그만큼 비중이 있는 것이므로 대학원 교과를 주로 살펴본다.



연세대학교 학부 신학과의 경우3) 특기할 만한 것으로서는 채플, 현대신학사, 신학실천(1)과 (2), 영어 신학원강, 실용영어, 교회와 사회, 사회윤리의 신학적 배경, 최근의 신학, 교육현장론, 목회학 등이 있다. 흔히 예상되는 신약, 구약개론 등의 기독교교과 이외에 필자의 주관적인 기준에서 앞서 소개된 교과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나중에 소개하겠다. 각주3) http://www.yonsei.ac.kr의 대학 및 대학원소개 자료 인용. 2000년 10월 현재.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망라하여 구약학,신약학,조직신학,세계교회사,기독교윤리학,기독교교육학,종교학,실천신학의 세분된 전공 아래 개설된 과목들은 다음과 같다.



구약학 방법론, 이스라엘 역사, 구약원전, 구약학사, 이스라엘 종교, 성서 지리학, 구약과 고대근동세계, 역대기역사, 구약신약 중간사, 신약의 종말론, 신약 원전, 신약 배경사, 마가복음서 세미나, 계시록, 로마서 세미나, 신약본문 비평, 신약기독론, 신약체계론, 현대신학 동향, 신론 연구, 기독론, 초급 라틴어, 고급 라틴어, 교부신학, 중세신학사, 종교개혁사, 현대신학사, 역사방법론, 성령론 연구, 성례론 연구, 창조론 연구, 이데올로기와 기독교, 기독교 윤리학 방법론, 기독교윤리의 성서적 기초, 기독교윤리체계, 기독교 사회윤리의 연구, 기독교 개인윤리, 기독교 윤리사상사, 기독교 교육 교수학습론, 기독교교육학 연구방법론, 종교심리학, 그룹 다이나믹스, 기독교 청소년교육, 성년기 기독교교육, 교회와 커뮤니케이션, 기독교 교육과정, 기독교 교육철학, 한국종교사, 종교사회학, 종교학방법론, 구약신학, 구약고고학, 오경연구, 예언서 해석, 아람어, 이사야 연구, 예레미야 연구, 에스겔 연구, 요한복음서 세미나, 신약학사, 신약 해석학, 예수의 비유, 갈라디아서 세미나, 고린도 후서, 마태복음서 세미나, 신약고고학, 신학인식론, 인간론, 구속론, 종교철학, 한국기독교회사, 이단분파사, 현대교회사, 퓨리터니즘 연구, 상황 윤리, 신학적 윤리, 기독교와 공산주의, 기독교윤리와 정치, 신약의 윤리, 기독교교육신학, 목회상담 연구, 기독교 교육사, 종교 예술, 교회 음악, 기독교 교육의 사회학적 기초, 기독교교육의 현장론, 기독교교육 행정연구, 한국 샤머니즘, 세계종교사, 한국신흥종교, 유교 연구, 불교연구, 기독교와 타종교, 연구지도 1, 창세기 연구, 지혜문학 해석, 시편 연구, 사해 사본연구, 고대근동의 종교, 포로기와 회복기의 역사, 바울서 신해석, 공관복음서 연구, 원시공동체의 윤리, 폴틸리히 신학연구, 칼바르트 신학연구, 철학과 신학, 현대 역사신학연구, 교회론, 이레니우스와 어거스틴의 구속사 연구, 보나벤투라와 아퀴나스 연구, 단테와 마셀리우스 연구, 루터와 칼빈신학 연구, 웨슬리와 에드워즈신학 연구, 교회와 국가, 사회윤리 방법론, 현대과학기술과 인간의 가치, 세례론, 기독교교육의 이론과 실제, 민간 신앙, 종교적 언어연구, 신화학, 신명기와 신명기역사 연구, 구약 해석학, 포로기 예언자 연구, 구약외경 연구, 묵시문학 연구, 구약성서 본문비평, 신약 신학 세미나, 사도행전 연구, 히브리서 연구, 불트만 연구, 누가복음서 세미나, 계시론 연구, 삼위일체론 연구, 현대종말론 비교연구, 의인론 연구, 실존론적 신학 연구, 변증법적 신학 연구, 해석학적 신학, 최근의 신학1, 최근의 신학2, 선교신학, 현대신학 세미나1, 현대신학 세미나2, 미국 신학사, 한국신학사 연구, 에큐메닉스 세미나, 현대기독교윤리학, 현대사회와 윤리문제 세미나, 에큐메니칼 윤리, 설교학, 예배학, 기독교교육 세미나, 원시종교론, 현대문명과 종교, 신비주의 연구, 이슬람 연구, 도교 연구, 연구지도2 등 총 160 여개의 교과목이 열려 있다.



다소 지루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신학 전공의 교과목을 낱낱이 나열한 것은 그 특정 대학의 편성이 우리에게 학문적으로 모델시될 이유가 있어서는 결코 아니다.



다만 어느 점에서의 차이가 있음을 주목하고자 한다. 필자의 임의로 고딕체로 강조한 교과목들과 함께 다른 기독교대학원의 전공교과들을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의 목회지도자 과정과 평신도지도자 과정이 신학,상담,교육,선교 목회,임상목회,목회상담전문,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볼 필요가 있고,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신학과에는 기본적인 성서신학, 교회사, 조직신학, 윤리신학, 선교신학, 목회실천신학의 전공교과들 이외에 환경윤리 세미나, 의료윤리 세미나, 대중문화와 기독교 세미나, 기독교와 사회복지 세미나, 민중신학 세미나, 제3세계 신학 세미나 등을 개설하거나 개설 예정으로 있음을 본다.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에는 기독교 신학과와 목회상담학과, 기독교사회학과, 기독교문화학과 등이 있는데, 기초공통과목으로서 현대신학의 동향, 목회상담의 이론과 실제, 현대사회와 기독교윤리가 개설되어 있다.4) 각주4) http://www.sgcs.soongsil.ac.kr 자료 인용. 2000년 10월 현재.



전공필수과목으로서는 각각 오늘날의 개혁신학, 성경신학, 영성신학, 기독교사회학, 사회사상사 혹은 현대사회학이론, 한국교회와 사회, 목회상담자의 정신건강, 상담의 이론과 실제, 집단상담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그 밖에 선택과목들로 특기할 것은 신학적 해석학, 생명신학, 교회성장신학, 신학자 연구, 21세기 기독교와 타종교, 과학기술과 기독교신앙, 기독교문화 신학, 영적 각성운동 연구, 가족문제와 목회상담, 청소년문제와 목회상담, 성격이론과 목회상담, 위기상담의 이론과 실제, 이상심리와 치유목회, 정신역동이론과 목회상담, 체계이론과 목회상담, 실존주의상담과 목회, 현대상담기법과 목회상담, 기독교와 생명윤리(평화, 환경, 여성), 현대문화와 종교, 기독교심리학, 사회문제와 사회조사, 한국사회연구(도시, 농촌, 산업), 사회봉사학, 교회와 사회사업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부에서부터 석사, 박사과정을 거치면서 듣게 되는 과목들은 예를 들면, 학부에서는 인도불교사로, 석사과정에서는 인도불교사 연구로, 박사과정에서는 인도불교사 특강과 같은 식으로 편성되어 있다. 교과의 이름이 비슷해서 내용이 같으리라고 무조건 단정하고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학원 강의는 전임교원만 할 수 있다는 규정과, 학부의 전공교과들도 전임교원들이 거의 하게 되기 때문에 같은 전공분야에서 다른 강사들에게 강의를 들어볼 기회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할 수가 없다.



학부에서 박사에 이르는 전체 연구과정에서 비슷한 교과를 한 전임자가 담당함으로써 신선한 학문적 자극이나 비판을 포함한 교육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우선 외견상으로 교과이름이 근대 감각적(?)인 점이나 그 내용은 차치하고, 선택의 폭을 비교하더라도, 연세대의 경우는 석사, 박사를 망라하여 160여 개 교과목이 개설되어 있고 동국대의 경우는 80개 정도라는 것이 주목된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필자로서는, 동국대학교 불교학 연구교과들과 신학대 교과목들 사이에서 중요시되는 몇 가지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불교학 교과목들의 경우, 한국의 현재를 살고 있는 불교&rsquo;로서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반영하는 면에서 미흡한 점이 크게 문제라고 생각된다.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의 교과 가운데서 오늘날을 암시 혹은 명시한 교과목은 거의 찾을 수 없고 한국을 명시한 경우에도 &lsquo;불교사를 수식하는 말일 뿐, 오늘날 한국불교 혹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인식과 대응 나아가오늘날 불교학 등등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삼는 연구나 교과가 소개되지 않고 있다.



둘째로는, 불교학 방법론에 관한 교과가 없다는 점이다. 혹자는, 오늘날의 모든 학부가 교양과정 수준이라고들 말하지만, 적어도 대학원 수준에 이르면 학문적 방법론이 소개되고 검토되는 것은 필수여야 하지 않은가 싶다. 방법론 연구란 학문의 초입에서 장차 그러한 연구과제와 연구도구들을 선택하게 될 이유를 밝혀주고, 중도마다 연구자의 입지를 설명하는 객관적 안내표지라고도 할 것이다.



불교학도들이 지금껏 배우고 가르쳐온 과정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 쌓여 있다면 그것이 방법론 연구로 벌써 체계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본다. 지금의 불교학도는 각자 학문적 목적지 말하자면 인도불교, 중국불교, 한국불교, 천태학, 화엄학 등등의 전공분야를 향해 가되, 어떤 경로로 어떤 방법으로 가고 있는지를 묻지도,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가고 있을 뿐이다.



셋째로, 고금을 막론하고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교와 상호작용을 하는 환경적, 반응적 요소들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야 한다는 것이 깊게 고려되지 않는 교육과정들이다. 현재의 불교학 교과들은 주로 불교원론 자체와 그 해석 및 적용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데,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오늘의 전반적인 상황을 포함한 조건아래서 그 해석과 적용을 가르치고 보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단순히 숫자상으로 불교학 석사, 박사과정에서는 80개 교과목, 연세대 신학과의 석사, 박사과정에는 160여 개의 교과목이 크게 비교되는 것이 아니다. 내용적으로도 기독교신학과정에 불교, 유교, 이슬람, 도교, 민중신앙, 샤머니즘 등 다양한 종교 그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이념들, 문화적 특성, 문제들, 전망과 대안들을 연구케 하는 배경과 이유에 관해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넷째로, 기독교신학 교육과정에서는 윤리와 사회적 실천에 관한 내용들이 불교학과의 경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편이다. 기독교 사회윤리, 기독교 개인윤리, 기독교 윤리체계, 기독교 윤리사상, 윤리방법론, 교회와 국가 등 이외에도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대상인구별로, 대상문제별로 개입하는 목회상담학이 독립되다시피 하여 있다. 설교학, 예배학, 교육현장론, 상담학 등등 다양하게 세분되어, 기독교와 신학이 사회적 실천의 전문화를 지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3. 불교교의에 의한 보완과제



거듭 강조하거니와, 현행 불교학의 교과목들과 전공분야 보완의 필요성은 서구학, 신학과의 비교에만 근거하는 주장이 아니다. 종교는, 특히 불교는 실천을 기본 조건으로 하고 있다.



불교교의의 도처에서 실천행을 강조하고 그같은 취지의 교설이 대부분이지만, 그 중에 간단하고도 체계적인 교학용어로서 신(信)-해(解)-행(行)-증(證)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불교학은 말하자면 불교인이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을 주교재로 하여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대상목표로 삼고,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고(信), 이해를 참구(參究)하여(解), 배운 바를 실천으로 구현하고(行), 마침내 목표에 적중한 경지에 이르게 되는(證) 전과정이 교학의 일차적인 연구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일차적>이라는 표현은 다름아니라 개개인의 내적인 경험과 그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의 과제를 우선 생각하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의 어떤 상태인가? 자타간에 신심의 정도는 어떻게 측정될 수 있는가? 그것은 지속적인가 어떤가? 교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지적인 경험인가? 무엇이 교의의 핵심이며 교리를 어떻게 올바로 이해하였다고 보는가?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상징체계들을 충분히 이해하는가? 불교적 신앙행위의 선택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믿음이나 이해와 그 행위 사이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검증하는가? 불교적 수용이나 경지의 증득은 어떻게 측정할까? 어떻게 입증할까?



신해행증에 관련하는 이같은 질문들이 학문으로서 불교를 풀어나갈 실마리가 된다고 본다. 예컨대 <중관사상 연구>라는 교과는, 부처님의 중도교의로부터 용수 등에 의한 신해행증의 틀을 거쳐 발달된 사상체계로 소개될 뿐만 아니라, 오늘 학습자 중심의 신해행증에 의해서 다시금 해석 수용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불교수행자의 입장에서와 같이 호교적(護敎的)일 수도 있고 혹은 비교종교학과 같은 객관적 시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경우일지라도 학문으로서는 기여하는 바가 있다.



다음으로 불교연구의 역사적 접근방법이 곧 불교사학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일정한 기간의 역사적 발전을 통해서 불교사상과 제도의 기원과 성장을 추적하고 그 기간 동안에 불교가 수행해온 힘과 역할들을 측정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고고학적 문헌학적 연구에 기초하여 과거를 재현하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자료가 수집된다.5)



초전법륜 이래 오늘에 이르도록 모든 개개인들에 의한 신해행증의 과정이 집단적 사회적으로 확대되고 시대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불교역사를 이루므로 그로써 불교사학의 연구대상이 성립되는 것이다. 현재 <불교교학 전공><불교사학 전공>,<응용불교학 전공>의 세 분야로 나뉘어 있는 불교학 연구과정을 생각해보면, 위에서처럼 불교의 전모(全貌)인 신해행증을 하나의 분석틀로 삼아서 각기 교학과 사학전공의 과제들을 연구할 수 있다.



거기다가 <응용불교학 전공>은 신해행증의 종교현상학적, 종교사회학적 접근을 내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종류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종교경험은 반드시 표현되고자 하는 것6)으로서, 그 표현의 집단화, 사회화를 종교현상학 혹은 종교사회학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각주 6) 김종서 역 , 앞의 책, p.122.



가장 최근의 명명을 얻은 <응용불교학 전공>에서는, 기독교의 경우 성서해석신학과 역사학 이외의 대사회윤리적 개입과 교회의 경영, 조직화, 목회상담기술, 실천신학, 각종 사회문화적 현안들에 대한 전망이 적극적이고 다양하게 개설되고 있음을 참고해볼 수 있다.



위에 소개된 신학의 교과목들 가운데 필자가 임의로 고딕체를 사용해 강조한 것들을 다시 참고하기 바란다. 불교의 가르침을 믿고 이해하고 그대로 실행한다면 그 결과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서 어떤 현상들을 나타내게 될 것인가? 당대 불교인들의 행동양식을 분석하고 있는가? 오늘의 불교문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의 어떤 교의를 믿고 이해하였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는가? 신해행증의 총체적인 현상인 소위 불교계는 어떻게 연구되고 측정되며 해석될 수 있는가? 불교계 내부의 특징적 현상과 불교계 외부를 향한 대사회적 반영들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현대불교의 당면한 사회적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내용들이 다양하게 연구되고 축적됨으로써 후대를 위한 사료를 구축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현행 교과들은 불교의 위와 같은 현상학적, 사회학적 연구를 이끌어갈 만큼 충분히 다양하게 개설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불교계 안팎을 향한 불교인의 현재의 인식과 주장, 행동양태를 담아내고 그것을 연구, 해석해보려는 불교학 분야는 미흡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4. 불교계, 불교학계 상의성에 의한 연구과제



필자는 앞에서 불교교의가 그 어떤 종교보다도 수행의 실천성을 강조하고 본령으로 삼는다는 이해에 근거해서, 불교학의 많은 분야들이 그러한 실천의 내용을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나아가서는 불교계와 불교학계의 상호의존적 관계 즉 연기법적(緣起法的)인 상호관련을 규명하고 반영하는 연구가 불교학의 필수분야가 아닐 수 없다고 본다.



모든 현상은 예외 없이 인과(因果)의 규칙에 적용되며 상호연(相互緣)하는 법을 핵심으로 삼는 불교와 그에 관한 불교학이, 인과로서의 불교문화와 상호연하는 법계, 장(場)으로서의 사회현실을 연구대상으로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창조주의 절대의지 아래 종속되는 인간관, 세계관을 가진 여타의 종교보다도 오히려 현실연구와 해석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오늘날 불교학의 경향조차도 하나의 연구과제가 된다.



갖가지의 원리와 신념 그리고 그와 관련한 현상 사이에서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 학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구성되어진 세계에 대한 의도적인 개념(intentional conception)을 전제로 하여, 그 의도적인 세계의 원리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사회문화적 환경이 서로의 정체성에 스며들어 상호의존적이며 상호간 어떤 측면도 다른 쪽에 대한 설명 없이는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인간의 주관성과 정신적 삶은 사회문화적 환경으로부터 도출된 의미와 자원을 이해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과정을 통해 수정되어진다7)는 것이다.각주 7) Richard A. Shweder, 김의철, 박영신 역, 《문화와 사고》(교육과학사, 1997), pp.79&sim;80.



이를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과와 연기법의 구현이면서 객관적으로는 불교학이라고 하는 것이 초점을 두어야 할 과제들의 속성이다. 이에 관련한 사회과학적 연구이론 가운데서는 무엇보다도 체계론(Systems Theory)적 관점이 불교적 세계관에 매우 근접해 보이는데, 가장 기초적인 체계관의 하나로서 아더 케슬러(Arthur Koestler)의 &lsquo;홀론(Holon)&rsquo; 개념을 살펴보자.



그의 용어 &lsquo;홀론&rsquo;은 각 사회적 체계가 크든 작든, 단순하든 복잡하든, 하나의 부분임과 동시에 하나의 전체라는 생각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안되었고, 이것이 나아가 인간사 즉 인간행동과 사회현상들의 인과망(causal network)은 일방적, 단선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훨씬 복합적이며 다양한 방향성을 가진다8)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각주8) Ralph E. Anderson/Irl Carter, 장인협 외 4인 공역, 《인간행동과 사회환경》(집문당, 1991), pp.26&sim;28.



이러한 관점은 자연과학적, 생태학적 연구에서 지지되어 왔고, 나아가 사회과학 및 인문과학의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으로 소개되어 왔다.



소위 체계론적 연구 패러다임을 여기서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행하는 혹은 앞서가는 서구학의 방법론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지하다시피 불교의 연기와 화엄, 인드라망 등의 세계 개념들과 밀접하게 상통하는 관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계관이 불교인인 우리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개념이 아니더라도, 오늘의 불교학이 현실의 그 묵은 원칙들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면 다시 한 번 더 강조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교교학전공><불교사학전공>등에서도, 말하자면 불교 원리와 현상 사이의 상호체계적 관련성을 토대로 하는 연구와 이해가 구비되었어야 할 것이며, <응용불교학전공>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불교계, 불교학계는 끊임없이 상호간 환류(feedback)를 담보로 발전한다는 것이 깊이 이해되고 반영되어야 한다.



주시하는 초점의 위치에 따라서는 두 체계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전체계가 되는 여러 가지의 체계들, 예를 들면 불교계 현실과 불교학계라는 두 체계 사이에서 상호환류야말로 자기수정행태(self-correcting behavior)의 핵심이 된다. 환류에 의해서 체계들은 환경적 요동이나 내부적 기능저하로 인해서 생기는 궤도의 이탈을 배제할 수 있고, 내부적 상태와 주변상황을 알려주는 지속적 정보에 비추어서 내부적 환경을 규제함으로써 자체규제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9) 각주 9) 이용필, 《사회과학연구와 새로운 패러다임》(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p.19.



<응용불교학>과 같은 영역이 불교학의 주변학이거나 잡학(雜學)이 아니라 그 핵심으로 평가되고 인식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하여, 필자는 연기법이라는 불교 근본교의와 사회체계론이라는 일반학의 관점을 동원하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자칫하면 학문이라는 것이 실천적 삶보다 이론을 우위에 두고 행동적 삶보다 사변적 삶을 우위에 두는,10) 혹은 이론 구성을 위한 이론으로 변질하게 될 수도 있음을 기본적으로 경계한다. 각주 10) 최종욱, 〈인문과학 위기에 대한 담론분석을 위한 시론〉, 《한국인문사회과학의 현재와 미래》(학술단체협의회 편, 도서출판 푸른 솔, 1998), p.336 참고.



그러므로 기존 학문분야의 이론 틀에 의해서 미리 제한된 가운데 연역적으로만 연구과제를 선정하지 않도록, 불교 원리와 불교문화현상이 수평적으로 대등한 관계로 취급, 연구되도록, 개인적 집단적 불교인의 생활체험들이 불교학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도록, 연구자들 스스로가 개방적인 관점에로의 문제의식 전환이 필요하다. 즉 순수히 경험에 의한 질문과 담론들 가운데서도 불교학의 연구과제를 삼을 수가 있다. 오늘의 한국불교인은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가지고 있을까?



변화하는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현실을 대하며 불교적 신행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불교인의 문화는 무엇인가? 불교인 개인 혹은 집단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정립하는가? 불교계 문화와 산업현장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 안에서 산출되는 것을 개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은 어떠한가? 불교시민단체들의 지향점과 역량은 어떠한가? 종단들의 정치적인 행태에 대하여 불교인의 인식은 어떠한가? 불교인으로서 과거의 반성과 미래의 전망은 어떠한가?



이같은 질문과 연구들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묻고 답하여 <오늘의 불교>를 대내외적으로, 국제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자료로서 충실하게 결집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5. 불교학 보충 교과의 제안



여기서는 필자가 임의로 자유롭게 어떤 교과목들이 더 보충되기를 바라는지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현행의 교과목들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미 논의되고 있을 주제인지도 모르겠으나, 부분적 논의와 독립된 연구과제로 교과목을 삼는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첫째, 불교교의의 이해와 전달에 관련하여 우리의 정황 및 문화환경을 반영하는 교과들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교과들을 더 배움으로써 불교를 수용하기에 혹은 전달하기에 더 수월한 폭넓은 언어와 사고, 상징, 개념적 도구들이 동원될 수 있다. 어떻게 하든지 세계와 인간, 현실 등을 읽는 불교 내적 개념과 불교 외적 개념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지금보다는 원활히 해야 한다고 본다.



시대를 초월한 혹은 통시대적인 개념들, 불교계 안에서조차도 통할까 말까 하는 그런 투의 교과서적인 언어와 인용들을 고집함으로써 불교를 유물처럼 만드는 불교학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해석상의 용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 이해의 출발선인 학습자나 연구자의 관점과 시야가 자기모순에 빠지거나 편협하지 않고 탄력적으로 작동되도록 정지작업을 돕는 교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와 서양철학, 불교와 동양철학, 불교와 심리학, 불교와 정신과학, 불교와 생명 및 물리학, 불교와 자본주의, 불교와 사회주의, 불교와 민주주의, 불교와 생태환경, 불교와 과학문명, 불교와 인간행동론, 불교와 사회문제론, 불교와 시장경제론, 불교와 경영 세계화, 불교와 정보이론, 불교와 현대문화, 불교와 대중문화, 불교와 예술, 불교와 문학, 불교와 음악 등이다.



둘째, 불교학을 비롯한 인문사회학 분야의 산학협동이라는 과제를 생각해 보자. 이론의 불교학이나 과거의 경험들을 표본 채집한 보존용 전시용 불교학이 아니라 지금 살아 움직이는, 숨쉬는 불교의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학문이라는 이름 아래 오늘의 것을 잘 선정, 종합해서 내일의 학습자들이 새롭게 배우고 가르칠 내용을 남겨 주어야 할 책임이 이 시대의 불교학자에게 있다.



불교계 현장과 연계된 교과들로서는, 사찰의 경영관리 부문을 위한 종단 및 사원경영, 신도 관리와 조직화, 사원경제 생산성 연구, 불교 매스컴, 불교계 문화산업, 불교의례연구, 사찰 종무행정 실습, 사원문화의 이해(복식, 음식, 주거양태 등), 불교문화재의 관리, 사원의 건축과 조경 등이 있겠다.



불교인의 신행실천에 관련해서는 불교인 연구, 수행자론, 사회복지론, 자원봉사론, 지역사회 시민운동론(NGO), 불교 신행단체의 실제, 유식과 인지치료, 선과 정신치료, 승가와 집단지도(group work), 승가의 이해, 의사소통기술, 리더쉽 훈련, 신행단체 및 조직의 인턴쉽 등의 교육과 개발이 필요하겠다. 포교 부문을 위해서는 포교매체론, 법회 기획론, 설법 방법론, 상담의 기법, 대인관계 기술훈련, 사회문제 연구, 청소년문제 연구, 가족문제 연구, 사회조사방법론, 불교교육현장의 이해, 불교계 자원의 이해 등등을 생각해 본다.



이러한 교과명들을 보면 틀림없이 누군가는 <불교 잡탕학>이라거나 혹은 그게 무슨 학문 과제가 될 수 있느냐고 평가절하할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지금 어떤 교과들이 개설될 수 있는지, 누가 그것을 담당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어쨌든 불교학이 지금의 불교계 현실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불교학이 아니라면, 불교원론의 연구나 남겨진 자료들로 역사적 접근에 치중하는 것이라면, 결국 불교학의 현재도 미래도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교과 보완과 관련한 마지막 제안은, 소비자주의 불교학이라고나 할까, 동국대학교 혹은 기타의 불교학 전공생들이 졸업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면 좋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를 미리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학문이나 교육의 목표 중에 하나는, 분명 실질적으로 그 정보와 지식으로써 장차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기도 하다.



행여라도 급속도로 변화하는 이 세상의 지식 수요와 학습자의 지적 욕구를 무시한 채, 선행 연구자 혹은 교수자로서 겨우 자기만족적으로 자기류의 정보만을 학습자에게 강제하는 일은 늘 경계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학 전공을 마치면 이론 연구자의 길만이 아니라 불교계 현장 실천가, 실무종사자가 될 수도 있고 더욱이 현재로서는 그런 인력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여론이다.



이미 불교계 언론에서 언급된 바도 있듯이11) 사찰 종무원이든, 불교계 사업장이든 소위 전문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각주 11) <교계 전문인력난>〈불교신문〉, 제1780호, 1면(2000년 8월 29일자) 참고.



이 사회에서 불교계는 그 크기를 보더라도 방대한 현장이고,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일련의 특수성이 있으므로 그에 맞는 인력이 전문교육을 통해서 길러져야 한다. 불교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그런 이해 위에서 장차의 일과 불교문화, 불교계를 창출하도록 안내하는 것 역시 학교의 역할이 아닐 수 없다. 불교학에 벤처 정신은 없는 것인가.



다시금 학문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겨보자. 학문이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사회변화의 속도와 방향에 관련하여 종래의 불교학은 무엇을 하였는지, 못하였는지 객관적인 반성이 필요하다.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학문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출발하되 나아가 더 나은 삶을 목표로 추진되는 독특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원리와 그 적용 사이에서 시간과 정력을 바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찾으려는 모든 구성원들의 생명현상의 반영이 바로 학문이 아닐까? 지금 한국불교학에 불교인의 삶은 살아 있는가? <끝>



이혜숙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미국 Kansas 대학교 사회복지학부 visiting scholar, 이화대학교 사회복지 석사. 현재 동국대 강사, 종교사회복지연구소장. 옮긴 책으로 《불교사회복지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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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11 <생명평화마당> 9월 정기 월례포럼 “한국교회의 갱신과 새로운 교회운동”


 11 <생명평화마당> 9월 정기 월례포럼  “한국교회의 갱신과 새로운 교회운동” 

일 시: 2011년 9월 6일 (화) 늦은7시

장 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지하 이제홀 (서대문역 1/2번 출구)

사 회: 조언정 목사 (마실교회)

발 제:

√ 정재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한국교회의 갱신과 새로운 교회운동

- 지역공동체 세우기를 중심으로”................................. p. 3



√ 이원돈 목사 (새롬교회)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로서 작은 교회를 주목하자!”........ p. 15



√ 양재성 목사 (예수살기,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예수살기>의 교회운동”............................................ p. 23



9월 포럼을 준비하며



늦더위가 한창입니다만, 이제 곧 가을을 맞이하게 될 터이고 금년 하반기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작년 뜻을 모으고, 올해 조직체를 구성하여 사업을 펼치기 시작한 <생명평화마당>도 이번 가을에 소정의 결실을 맺고, 장단기적 안목과 계획을 가지고 내년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월례포럼은 <생명평화마당>의 근간을 이루는 사업입니다. 꾸준하게 펼쳐지는 월례포럼을 통하여 바라기는, 앞으로도 생명과 평화의 담론을 형성하고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의 빛으로 빛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생명과 평화의 빛깔을 내시고 계시는 여러분! <생명평화마당> 월례포럼에서 여러분의 빛을 모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9월 포럼 취지



한국교회는 목이 마릅니다. “추락하기만 하는 한국교회, 왜소해져만 가는 교회운동, 대안이 없다는 말인가?” “예수 정신을 구현하면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교회모델이 무엇인가?” “건강한 교회운동의 방법론은 없는가?” <생명평화마당> 9월 포럼은 교회의 새로운 대안을 묻고자 합니다. 생명과 평화의 사상을 퍼뜨려야 할 1차 영역이 바로 우리들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포럼의 주제는 사실, 생소한 주제도 아니며 이번에 단발적으로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는 그동안 생명과 평화의 사상으로 교회갱신을 실현하겠다는 일념으로 교회현장에서 유용하고 필요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논의를 해왔습니다. 이번 9월 포럼은 그것의 첫 걸음입니다. 무릎을 탁 치며 여럿이 뜻을 모으는 것이 희망의 빛이라 믿습니다. 환하게 빛나는 9월 포럼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알림



1. 오늘 순서를 맡아주신 분들과 9월 포럼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 모임안내1 : <교회위원회> 목회자모임 : 9월18일 (주일) 6시, 양평

3. 모임안내2 : “WCC 부산총회 준비를 위한 ‘생명정의평화’ 진영(JPL) 4차모임

: 9월23일 (금) 5시, 기사연 이제홀

4. <생명평화마당> 공식카페에 가입, 활동을 바랍니다. (http://cafe.daum.net/2010declaration)

5. <생명평화마당> 후원회원이 되어주십시오. (자동이체, CMS - 문의: 김지목 간사)

6. ‘2011 교회의 날’ 행사 : “평등한 교회 상상하기” 9월29일(목)-10월1일(토), 100주년기념관/이화여대

7. 이후 포럼 계획 (매달 둘째주 화요일 저녁7시, 기사연 이제홀)

-10월11일 : “교회와 사회변혁을 향한 신학의 개혁” / 발제-Philip Clayton (클레어몬트신학교 학장)

-11월 8일 : “종교개혁과 여성신학(가안)” / 발제-(미정) / 사회-이은선박사

-12월13일 : “기후붕괴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삶과 전망” / 발제-김준우박사 외



<생명평화마당> 실행위원회

권진관(성공회대 교수), 김경호(들꽃향린교회), 김기석(성공회대 교수), 김정숙(감신대), 김영철(새민족교회), 김은규(성공회대 교수), 김희헌(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실장), 박명철(연세대 교수), 방인성(뉴스앤조이 이사장), 손은정(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양재성(기독교환경운동연대 사무총장), 윤인중(인천평화교회), 이원돈(부천새롬교회), 이은선(세종대 교수), 장윤재(이화여대 교수), 정상시(안민교회), 조언정(양평 마실교회), 조헌정(향린교회), 최소영(교회여성연합 총무), 최헌국(예수살기 총무), 한경호(횡성영락교회)

문 의: 김희헌 총무 (010-2250-2157) / 김지목 간사 (010-2213-9412)











“한국 교회의 갱신과 새로운 교회 운동[1]

- 지역공동체 세우기를 중심으로





정재영 교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 종교사회학)





1. 지역 공동체 운동의 필요성



현재 한국교회는 안팎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3대 종교 중에 개신교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난 이후 특히 권위주의적인 교회 운영에 실망한 젊은 층이 급격하게 교회로부터 빠져나가고 있다. 또한 교회 간 불균형과 쏠림 현상으로 작은 교회는 더욱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밖으로는 교회에 대한 공신력이 약화되어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러한 개신교의 공신력 약화는 교회의 활동이 공공성을 상실한 데에 기인한다.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공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하기보다는 교세 확장과 교회 건물 건축, 교권 유지 등 세상과는 벽을 쌓고 자기들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에만 급급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일련의 일들에서 볼 때 개신교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하나의 이익집단과 같이 여겨지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사회와 소통하려 하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상대방을 단순히 전도 대상자로 여기는 태도를 보여왔다. 절대 진리를 수호하는 입장에서는 전도의 대상자와 타협하기 어려우며 도덕적 우월감으로 상대를 낮잡아보기 쉽다. 이렇게 자신의 집단 안에 매몰된 사람은 더 넓은 사회의 지평을 바라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생활에 열심일수록 사회에 대한 의식수준은 더 떨어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것은 한국 개신교가 더 이상 기존의 성장주의 패러다임으로 교회를 운영하고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의 성장주의식 패러다임의 전환을 심각하게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단순히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에 내실을 기하며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에서 공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이다. 성장주의 패러다임에서는 전국 어디에서든지 심지어는 다른 교회 교인이라도 우리 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고 여겨졌지만, 이제는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에서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한다.

전래 초기 한국 개신교는 사회 부조리를 혁파하고 새로운 가치 질서를 제시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했지만, 오늘날의 개신교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뿐, 공공의 선이나 선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교회가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의 해결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여야 한다. 성숙한 기독교인의 관심은 마땅히 공공으로 확장되고 공동체의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성숙한 공동체는 자신의 존재를 두고 있는 더 큰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닫힌 공동체가 아니라 지역 사회를 향해 열린 공동체여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인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지역 사회와 소통하며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중앙 중심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지역으로 권력이 분산되고 풀뿌리로부터의 참여가 중시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절차상의 민주주의를 이룩한 이후에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시민 사회 관련된 의제들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시민 사회에 관한 의제들을 제기하는 노력에 참여해왔으나, 이러한 한국교회의 활동은 교회 안에 있는 일반 교인들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주로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과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기독교 운동이 전개될 필요가 있다. 특히, 시민 사회는 시민의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이고, 풀뿌리로부터의 실제적인 참여가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들이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고, 울타리 밖의 사회와 의사소통하며 참다운 시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거나 기껏해야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교회 구성원들이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참여자가 될 수 있도록 동기 부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개교회 구성원들이 시민 사회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의 의제와 현안에 관심을 갖고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시민 사회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역 공동체 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전에는 주로 지역 사회 개발 운동으로 지역 사회 주민들의 자주적인 참여와 주도적 노력으로 지역 사회의 경제·정치·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순히 경제 발전이나 개발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역 공동체 세우기’(community building)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통적인 촌락공동체는 붕괴되었고, 현대 산업 사회에서 조직 구조의 거대화와 관료주의화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친숙성이 어렵게 하며 비인격의 인간관계를 초래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성과 인격의 상호성 또한 약해지고, 인간은 결국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이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는 예전의 공동체를 그리워하고 공동체 안에 안주하려는 욕구가 심화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지역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이 ‘새로운’ 지역 공동체는 교회와 시민사회가 만나는 지점을 제공한다. 현대사회에서 국가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요구는 증대하는 대신에 정부의 예산부담은 줄여야 하는 추세가 뚜렷하므로 결국 기대어야 할 곳은 시민사회의 자발적 부문뿐이라는 기대가 점차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교회 역시 시민 사회에 속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적, 물적, 제도적 자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교회가 한 축을 감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교회는 종래 시민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던 사회적 제도―학교, 가족, 정부, 회사, 근린집단, 전근대적 교회 등―가 제대로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생긴 사회적 공백을 메우고 지역공동체를 재조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당위성을 지니게 되었을 뿐더러 현실적으로 그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2. 교회와 지역 공동체



지역사회라는 용어는 영어로는 ‘community’라고 하는 것으로 공동체라고도 불리는 사회학 개념이다. 이 community는 ‘공동’의 뜻을 가진 ‘common' 또는 ‘communal'과 하나로 통합을 이루게 하는 ‘unity'와의 합성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지역사회를 간단하게 정의 내린다면 “지리상의 근접성(지역성)과 사회 차원의 단일성(공동의식) 및 문화 차원의 동질성(공동규범)을 가지는 공동의 사회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역사회는 동질성을 가진 일정한 인구가 자연, 생태, 지리상으로 한정되고 근접한 지역에 살고 있으며, 역사 유산을 공유하여 단일한 의식을 가지고 있고 협동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사회이다.

이러한 지역 사회를 공동체화 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의 공동체 개념은 공간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이렇게 장소의 의미는 내포되어 있지 않은 커뮤니티와 구별하여 지역 공동체는 일정한 지역을 공유하는 인간집단이라는 면에서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local community'의 개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곽현근: 128). 산업화의 결과로 전통의 공동체들이 와해된 상황에서 삶의 기반을 공유하는 지역 사회에 공동 의식에 터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는 과거에 자연발생으로 형성된 촌락공동체와 같은 자연적 공동체가 아니라 새로운 맥락에서 공동의 목적과 이념,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의도적 공동체로 이해되어야 한다(신명호 외: 53). 따라서 지역 공동체는 일정한 지리적 영역 안에 거주하는 지역의 구성원들이 목적과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을 구축해 나가는 일련의 조직화된 활동을 전제로 한다.

교회 역시 교회가 터하고 있는 지역 사회에서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기업, 주민 등과 더불어 지역 사회의 주요한 구성원이다. 교회는 그 지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 사람들을 위하여 세워진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지역사회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회 실존의 근거가 바로 지역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지역사회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교회는 지역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많은 경우, 지역사회의 쇠퇴는 지역교회의 쇠락으로 이어지며, 지역사회의 발전은 어김없이 지역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90년대 수도권 신도시개발 붐을 타고, 구도시지역 교회들이 신도시지역으로 대거 이주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와 지역사회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깊은 태생적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역사회의 욕구와 당면 문제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임하며, 그 해결을 위해 지역사회의 여러 구성원들과 다양한 형태로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최근 시민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마을 만들기’에 주목한다. 이전에는 주로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지역사회 주민들의 자주적인 참여와 주도적 노력으로 지역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조건의 향상을 추구해왔다. ‘참여’를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동체주의 운동 활성화가 필요해지면서, 지역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와 다양한 기관과의 ‘연대’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경제 발전이나 개발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 형성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개인주의 사회가 경쟁을 앞세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원리가 지배한다면, 공동체 운동은 배려와 관심으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추구한다. 마을 만들기는 바로 이러한 취지에서 지역 사회를 재구조화하기 위한 시도로 볼 수 있다.

마을 만들기 운동은 일종의 주민자치운동으로 여기서 ‘마을’이란 시민 전체가 공유하는 것임을 자각할 수 있고 공동으로 이용하며 활용할 수 있는 장을 총칭한다. 대부분의 도시 계획이나 도시 재개발 사업이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이라면, 마을 만들기는 관 주도의 지역 개발 운동에 오히려 저항하며 주민들의 주체적인 참여를 강조하는 것이 가장 큰 대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에서 관변식, 학술적 한자어를 피하여 ‘마을’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이명규: 268-273).

그리고 ‘마을 만들기’란 그 공동의 장을 시민이 공동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말한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는 ‘눈에 보이는 마을 만들기’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 만들기’의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마을’이란 말 그대로 물질로 구성되어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마을을 뜻하는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형성되는 마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을 만들기’는 ‘사람 만들기’를 포함하는데, 곧 시민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의식을 개혁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 운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시민의식은 기독교 정신과도 통하는 것이며,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독교의 가치를 지향할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CHE 선교회와 같이 지역사회를 선교 대상으로 보는 관점도 등장하고 있다(스탠 롤랜드: 1장). CHE는 Community Health Evangelism의 줄임말로 총체적 지역사회 선교의 관점으로 특히 위생 환경이 열악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 우물을 파주는 일 등을 통해 선교 지역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 제3세계 빈곤 국가에서는 이러한 지역 사회 개발이 중요한 선교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일정 수준의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 사회에서는 지역 개발보다는 공동체 마을 만들기에 보다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다만 도시에 비해 생활수준이 낮은 촌락 지역에서는 개발 전략이 함께 모색될 필요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교회는 일차로 예배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 속에 존재하는 시민공동체이기도 하다. 하나의 의례행위로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 윤리의 행위 지향성이 삶의 무대인 사회생활에서 표출되어 나타나야 한다. 특히 한국 교회는 개교회 내부 결속력은 강하지만, 다른 교회와의 협력이나 지역사회에서의 연계 활동은 부족하므로 이에 대한 노력이 더욱 절실한 상황이다. 교회가 지니고 있는 물질과 제도 자원이 지역사회를 위해 효과 있게 활용될 뿐만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이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다른 교회나 시민 단체들과 협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시민공동체가 활성화되고 지역사회가 기독교의 가치를 지향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공신력도 회복하게 될 것이다.





3. 교회가 참여하는 지역 공동체 모델



지역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를 주도해나갈 주민주도형의 협력 체계 곧 결사체 거버넌스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결사체 거버넌스는 지역의 내생적 발전에 필요한 주요 자원을 동원하는 자발적 자원동원 체계이다. 이러한 자원 동원 체계로서 결사체 거버넌스의 원활한 작동은 참여주체자들 사이의 사회 자본의 크기에 달려 있다. 사회 자본은 조직 구성원들 상호간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조정과 합의를 이끌어내는 기본 동력인 신뢰, 규범, 가치 등을 의미한다(로버트 푸트남: 281). 그리고 이 사회 자본은 공동체 회복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Rosemary Leonard·Jenny Onyx). 따라서 이 사회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 요구된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생활공동체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타결하는 참여민주주의 훈련과 주민자치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들을 배양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지역 실정에 맞는 적절한 마을 만들기 사업을 발굴하고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 작업을 가능하게 해 주는 힘이 바로 신뢰와 협동, 자치와 참여라는 사회 자본이다(김영정: 14). 여기서 교회가 하나의 사회 자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원자화된 개인들이 운동 경기를 보듯이 모여 있는 교회 구성원들이, 공공의 문제를 토론하는 사회관계를 발전하게 된다면, 시민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 자본으로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가 참여하는 지역공동체 모델을 도식화하면 아래의 그림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먼저 운동의 제1 주체는 시민 곧 지역 주민이다. 그러나 행정기관과 지역 단체와의 협력은 필요하다. 행정 기관의 역할은 공동체 역량구축을 위한 조력자이자 지원자로서의 역할이다. 행정기관은 지역 내 공동체의 실체와 그 역할을 파악하고, 지역의 각 공동체 역량을 상호연결해주는 ‘네트워크 연결자’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역량은 내부 역량들을 상호 연계하고 결집했을 때의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김구: 74-75).





<그림> 교회가 참여하는 지역공동체모델



























지역 공동체 운동은 주민, 행정기구, 지역 단체가 함께 하는 파트너십이 중요하다. 여기서 지역 단체의 역할은 공동체 운동 주체들의 파트너십 속에서 이 운동의 지속성을 견인하는 성실한 중개자이자 매개자이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지역 단체 활동가들은 관련분야를 폭넓게 학습하고 종전의 감시형, 비판형, 이슈형의 행동양식보다는 참여형, 창조형, 대중형의 행동양식으로 적극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 이 지역 단체에는 지역 교회가 포함된다. 지역 교회 역시 지역 단체의 하나로서 교회가 가진 다양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지역 공동체 운동을 견인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4. 지역 공동체 형성 전략



이제까지 공동체 형성을 위한 교회의 노력이 전혀 없던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지역사회에 관심을 가져왔고 또한 사역을 실천해 왔다. 이러한 활동들은 대개 사회사업, 사회봉사, 사회복지라는 개념으로 대별될 수 있다. 이러한 활동들이 매우 의미 있고 우리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은 많은 경우 복음전도의 수단으로 여겨져 온 것 또한 사실이다. 복음전도의 접촉점을 마련하고자 이러한 방법을 활용한 것이다. 또한, 도덕적 우월감 위에서 시혜를 베푸는 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보다는 시혜자와 수혜자라는 비대칭적 관계에서 수혜자를 대상화해온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는 특정인이 우월한 위치를 점하지 않고, 주종의 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 역시도 다양한 지역사회 구성원 중 하나라는 생각으로 다른 구성원들을 존중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에서만이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복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가치 창조’이다.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산업화 시기에 우리 사회는 성장과 개발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 생존 경쟁의 각축장이 되어왔다. 그러나 탈산업화 시기에는 환경 보존과 지속가능한 성장이 중시되고 경쟁과 배제보다는 배려와 포섭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이러한 탈산업화 시기의 가치는 기독교의 가치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가치를 창조하여 활성화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세우는 데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지역 공동체 세우기 전략은 지역 주민들이 나름대로의 특색을 유지하면서 공동의 의식을 형성하고 주체적인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일반적인 과정과 전략들은 꿈 그리기, 보물찾기, 사람 세우기, 공통의 의제와 일감 발굴하기, 관계 만들기, 민주적으로 협의하기, 더불어 나누기 등으로 나누어진다.[2]

지역 공동체 세우기는 먼저 ‘꿈을 그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일본에서 일평생 마을 만들기에 헌신한 전문가는 마을 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꿈을 그리는 것’을 꼽았다. 꿈은 공동체의 회복, 아름다운 동네, 편리한 시설, 생태적 삶 등을 소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꿈을 그리고 전파하는 단계가 마을 만들기의 시작이자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기독교 정신과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이러한 꿈을 그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기독교인들만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보물찾기’는 특정 지역이 가지고 있는 보물(흔히 쓰는 표현으로 자원)을 찾는 것인데, 이러한 보물을 찾는 경우 매우 큰 추진력과 탄력을 받게 된다. 보물을 소재로 하여 마을의 성장가능성을 발견하고 지향성을 설정하기도 한다. 마을이 전통적으로 구심점으로 삼아온 역사나 자랑거리가 마을의 보물이 될 수 있는데, 기후나 자연 경관과 같은 풍토적 가치와 역사 사건이나 문화유산과 같은 역사적 가치,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이나 행사, 축제와 같은 행위적 가치로 구분된다(다무라 아키라: 70:74). 특히, 비도시지역의 경우 지역 특산물이, 도시 지역의 경우 잊혀진 역사나 문화 유적 등이 좋은 보물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는 ‘에코뮤지엄’이라는 개념이 활용되고 있다. 에코뮤지엄이란 프랑스에서 1960년대 후반에 생긴 개념으로 불어의 에코뮈제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에코뮤지엄이라는 개념은 스웨덴의 스칸센 야외박물관으로 시작한 생활사 복원운동의 전시기법에서 처음 생겼고, 생활 전체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집의 박물관’이라는 아이디어에서 기인했다(오하라 가즈오키: 19). 우리말로 번역하면 ‘생태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에코뮤지엄은 단순히 생태학에 관한 박물관이 아니라 박물관 그 자체가 지역에서 환경생활의 친화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환경보전형 마을만들기’ 활동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윗글: 21-22).

이렇게 보면, 마을에는 공동체 운동의 자원이 되는 다양한 보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유후잉 마을은 한국 언론에도 많이 소개된 사례이다. 녹음이 우거진 분지형태의 온천지대에 위치하여 습온 식물의 보고였던 이 지역에 골프장 건설 붐이 불게 되었을 때 주민들은 ‘유후잉의 자연을 보호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자연 보호를 주장하며 폭넓은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대규모 자본과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지 않고, 료깐(여관) 경영자들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힘으로 친환경적인 생활형 관광지를 만들어 마을 자체가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 박물관이자 관광지로 만든 것은 환경보전형 마을만들기의 매우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사람 세우기’는 현장 일꾼의 역할을 하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과 주체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참여자를 교육하는 것을 포함한다. 성실성과 공평성을 가진 일꾼도 중요하지만, 모든 공동체들의 주체적인 참여가 없이는 공동체 세우기는 불가능하다. 주민 대표가 주도하는 운동이 아니라 모든 주민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진정한 의미의 주민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참여자들 모두 주인 의식을 갖도록 동기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구성원의 합의와 관심의 최대 공약수로서 공통의 의제와 일감을 발굴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의 의제와 일감은 가능하면 많은 수의 구성원이 지지하는 것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폭넓은 지지와 참여를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의제와 일감을 설정하지 않고, 공공의 관점에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이해관계를 중시할 경우, 주민 운동이 자칫 지역 이기주의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례로는 동네 하천 살리기, 생태 농업과 같은 자연 생태 운동이나 마을 공유지 마련, 공동 자산, 트러스트 운동과 같은 공동체 회복 운동을 참고할 만하다.

‘관계 만들기’는 이웃 사이의 관계, 구성원 간의 관계를 만드는 것으로 공동체 회복을 강하게 지향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공동체로 단순하게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적인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이 함께 꿈을 나누며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도록 인격적인 관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에서 바자회 같은 활동을 할 때에도 교인들끼리 하기보다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주민들을 단순히 손님으로 부르기보다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함께 기획하여 진행할 수 있도록 하여 활동의 공동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를 지향하는 바람직한 태도이다.

다음으로 ‘민주적으로 협의’하는 것은 주민자치센터나 반상회 같은 정부 주도의 행정기구가 아니라 주민 위주의 자발적으로 풀뿌리로부터 참여하여 협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의사결정 기구로서의 민주적인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더불어 나누기’는 마을 만들기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중요한 요소이다. 지금까지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정부 중심의 지원정책이 신뢰를 상실한 가장 큰 이유는 공평한 나눔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운동의 성과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참여자들 사이에 공평한 나눔이 이루어져야 하고, 필요한 재정 역시 투명하게 운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역 사회 활동을 효과 있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구성원들의 지역 사회활동에 대한 인식과 참여 의향을 조사하여 지역 사회활동을 전담할 수 있는 전략팀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교회 소그룹을 TF팀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교회 전체가 지역 사회 활동을 하기는 어려우나 각종 소모임들이 지역 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 더 자발성이 있고,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하게 되어 많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이 소그룹 TF팀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를 조사하고 구체적인 공동체 세우기 전략을 모색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5. 운동 사례



지역 공동체 운동의 내용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순히 지역의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약해져가는 현대 사회의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고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 인간미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의제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단순한 봉사나 구제 활동보다는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고 토론할 수 있는 모임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참고할 만한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1) 생태 공동체 운동

1980년대 생협운동과 함께 벌어진 환경과 생태공동체 운동은 생태적 환경파괴가 급증한 최근까지도 높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생태 공동체는 유기농업을 중심으로 지역의 순환경제체계를 만들어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 거대 사회를 대체하는 대안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천의 산물이다.

생태공동체운동센터에서는 생태성, 공동체성, 영성의 세 가지 기준을 강조한다. 여기서 영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생태성과 공동체성 만큼이나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생태공동체의 중심에 영성이 자리하고 있지 않으면 그 내용이 아무리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회 체계와의 차별성은 없어질 것이므로 공동체적 영성, 생태적 영성, 더 나아가 우주적 영성에까지 자아를 확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 생태공동체가 종교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성은 종교와 깊이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적 생태공동체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의식적 노력과 자각을 강조한다(홍성태: 4).

웰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갈수록 커지면서 생태공동체의 가치는 더욱 더 커지고 있다. 이른바 신토불이와 유기농업만이 한국 농업의 실제 희망이라고 한다. 생태공동체는 이 희망을 기르는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그러나 한국의 농촌은 공업적 농업으로 심하게 병들었을 뿐만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멋을 잃은 척박한 곳이 되었다. 생태공동체는 한국의 농촌이 지니고 있던 생태문화적 경관을 되살려야 한다. 한농복구회나 함양 두레마을, 한생명공동체 등은 생태공동체의 좋은 보기가 되고 있으며 지역 경제에도 상당히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강원도 화천의 토고미 마을과 충남 홍성의 문당리 마을도 환경 농업의 대표 사례로 뽑힌다.



(2) 녹색 가게 운동

1991년 서울YMCA 생활협동운동으로 과천생협 공동체가 형성되어 환경교육 및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 보급을 위한 생협활동이 발단이 되어 시작한 녹색 가게 운동은 생활용품을 다시쓰고 바꿔쓰는 생활문화운동이다. 녹색가게는 우리 주위의 소비물품들을 교환하고 순환시켜 자원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실천하여 녹색지역사회건설에 힘쓰는 지역 공동체 운동이다. 이러한 녹색가게는 구체적인 개인의 실천을 유발하며 개인의 실천이 사회공동체화 하도록 돕는 지역 공동체 운동의 센터로 주부 및 청소년, 직장인, 노인 등 다양한 연령층의 주민들이 '녹색가게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민주성과 투명성의 원칙아래 지역 주민 스스로 펼쳐가는 생활 환경 문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4]

또한 기아대책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자선가게라고 할 수 있는 <행복한 나눔>은 지역의 자원을 통해 운영되는데, 교회와 단체는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기부하여 매장을 열고, 각 지역 기관과 주민들의 자원봉사와 물품 기부로 운영된다. 각 지역 매장의 수익금의 50%는 지역의 필요를 리서치하여 진행되는 지역 복지 사업을 위해 사용되며, 50%는 기아대책의 해외 사업장을 통해 전세계 빈곤 퇴치를 위해 사용된다. 또한 지역 매장에서는 지역 내의 취약 계층(특별히, 여성)을 고용하여 지역의 고용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5]

그리고 한국 교계의 사회적 기업 중의 하나인 ‘사랑의 줄잇기 가게’는 자원봉사자들이 중고물품들을 깔끔하게 손질하여 싼값에 판매하고 수익금은 전액 공공복지에 사용한다는 100년 역사의 영국 채리티 샵의 운영 방식과 정신을 이어 한국에 접목한 가게이다. '사랑의 줄잇기 가게'는 새 옷을 싸게 구입해 80% 이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의류회사들이 스톡세일(stock sale·일명 땡처리)을 하는 이월상품이기에 가능하다.[6]



(3) 커뮤니티 비즈니스

지역 공동체 세우기의 한 사례로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소개하고자 한다. 앞에서 지역공동체 세우기 전략의 하나로 ‘보물찾기’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지역 사업을 기획하여 운영하는 것이 바로 일본에서 시도되고 있는 커뮤니티 비즈니스이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1994년부터 일본에서 만들어서 사용하기 시작한 일본식 영어이다. 일본은 버블경제가 붕괴된 이후, 오사카를 중심으로 황폐화된 지역이 증가하는 등의 일본형 도시 공동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하여 도시 내부 문제 연구에 몰두하여 나온 것이 커뮤니티 비즈니스라는 단어이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건강하게 만드는 주민 주체의 지역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부나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와 달리, 주민 스스로 지역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비즈니스로 전개하려는 것이다(호소우치 노부타카 엮음, 20-21).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일반 기업과 크게 다른 점은 ‘지역을 위해서’ 또는 ‘사람을 위해서’ 일의 의미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영리추구를 제일의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사회적 기업이 있다.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나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목적을 추구하여 영업활동을 수행한다. 일반 기업과 달리, 사회적 기업은 이타적 동기를 추진 동력으로 하여, 사회적 공헌을 사업으로 하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기업이 저소득 계층의 빈곤 극복을 목적으로 한다면, 커뮤니티 비즈니스는 지역 사람들을 통해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효과는 다양하게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참여자의 일하는 보람과 자아실현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 다양한 지역사회 문제의 해결, 지역 문화 계승과 창조, 경제 기반의 확립 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속성을 전제로 하면서 적자를 내지 않고 기업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기업이 흑자를 내지 못하면 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커뮤니티 비즈니스가 성공하고 지속적으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정신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 또한 매우 중요하다. 가격과 품질만이 아니라 기업의 사회공헌과 환경보호, 인권존중 등을 고려해 이를 소비해 주는 고객이 있어야 한다. 또한 다양한 조직,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기업이 두루 인정받고 이들이 서로 격려하고 연대하여 힘을 모아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지역공동체 운동의 사례로서 굳이 비즈니스를 논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와 기업의 개념이 지나치게 오염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자본 곧 돈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의미하고, 기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인 양 이해되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상의 주창자라고 할 수 있는 아담 스미스의 사상마저도 아전인수로 왜곡시킨다. 흔히 아담 스미스의 사상을 나타내는 저서로 「국부론」이 얘기되지만, 그의 사상은 「도덕 감정론」에 더 잘 드러나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를 등장시킨 청교도 윤리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7]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 기업에 대하여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고 소수자를 존중하는 태도로 기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최근에 기존의 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공동체 자본주의’이다. 공동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성경적, 시대적 대안으로, 경제자유와 경제정의의 유기적 조화를 지향한다. ‘다 같이 더 잘 사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 약자의 천부인권과 정직(Integrity)을 기본으로 하는 경제정의 하에서 개인들의 경제적 인센티브가 최대한 보장되고, 창의적 방법에 의한 자발적 나눔이 문화가 되는 자본주의가 공동체 자본주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동체 자본주의는 지역 공동체 운동의 전략적인 요충지가 된다. 왜냐하면 지역 사업조차도 지나치게 자신이 속한 지역의 이해관계만을 위해 전개된다면, 우리 사회 전체에 대한 기여보다는 자기 지역만을 위한 사업으로 전락하여 자칫 지역 이기주의로 흐를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자본주의 정신은 지역 사업이 사회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을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포섭하는 데 기여하도록 지침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자본주의는 곧 청교도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근대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태동되었음과, 처음 태동될 때부터 이미 공동체 정신을 그 핵심요소의 하나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자본주의에 터한 지역 공동체 운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다. 본래 청교도 윤리에서 유래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되찾고, 왜곡된 자본주의로 인해 피폐화된 현대인들에게 공동체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운동을 교회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를 포함한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요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활용해서 지역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지역을 활성화하고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교회가 참여하는 커뮤니티 비즈니스의 관건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커뮤니티 비즈니스로 제시할 수 있는 사례가 아직은 거의 없으나 임실치즈마을은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전인 1960년대에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와 예장 통합 교단의 심상봉 목사가 의기투합하여 마을의 빈곤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시작한 치즈 사업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임실치즈마을은 그 시작부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재 운영위원회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으며 민주적인 의사결정으로 마을을 운영해 하고 있다.





6. 나가는 말



교회는 사회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요구되는 교회의 모습도 변하게 된다. 시대마다 특정한 역사 상황에서 특정한 교회의 생활과 형식이 나왔고, 역사상 특정한 신학자들이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교회관이 있었다. 따라서 근본으로부터 교회라는 개념은 주어진 각 시대의 교회의 형태에 의존하는 것이다. 한스 큉은 교회의 본질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형이상학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 가능한 역사 형태로만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교회관은 끊임없이 변하는 역사 상황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요구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모습은 교회 자체와 더불어 필연으로 계속되는 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새로이 시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이 처한 시대를 개혁하기 위해 성서를 가지고 모든 것을 시험하고 그 원리를 적용하면서 그 당시의 문제에 답하는데 전력을 쏟았던 것처럼 이 시대에는 현재의 상황에 맞는 교회관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의 사회가 각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며 시민의 덕성을 중시하는 시민 사회의 성격을 강조한다고 할 때, 교회 역시 이러한 시민 사회에서의 역할을 중요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나치게 물질을 중시하는 경제주의식 사고와 약육강식의 무한 경쟁 체제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현존의 가치를 초월하여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본래의 기독교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가치 및 규범이 우리 사회의 새로운 질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교회가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가치와 규범에 따라 지역 사회에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 때에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의 공공성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지역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한국의 교회들은 대부분 교회가 속한 지역에서조차 환영받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더 이상 지역 교회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교인들도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 오고 있을 뿐 아니라, 교회 역시 지역에 대한 관심이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스스로 공동체라고 하지만, 외부와는 단절된 채 안으로의 결속에만 집중한다면, 교회는 더욱 더 게토화 되고 ‘끼리끼리’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폐쇄적인 종교성의 추구는 설사 그들만의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다원화된 현대 사회의 지평에서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교회는 지역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지역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역에 대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지역 주민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교회는 교회가 속한 지역에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이 땅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에 처한 이웃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으로 다가가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하여 좁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더 넓은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정재영]





도움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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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새로운 생태계로서

작은 생명 교회를 주목하자!”



이원돈 목사 (부천새롬교회,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





한국교회의 상황은 드디어 도저히 눈뜨고 볼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쓰나미 이후 간절히 선한 목자를 바라는 시대 이 시대의 백성들은 지금 내몰림과 따돌림이라는 처철한 목자 잃은 양떼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1. 두 개의 한국 교회



한국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대형 교회 그리고 대형 교회가 되고 싶은 교회. 교회 성장에 매몰된 한국 교회의 세태를 꼬집는 예리한 진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형교회가 최근 큰 위기에 처해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산업화 시대의 무한 경쟁적 승자독식주의 교회를 대표하는 미국 성장주의형 대형교회의 대명사인 미국의 수정교회가 파산을 목격하고 그 여파로 우리나라의 초대형 교회 중에도 몰락 직전의 모습을 보임을 우리는 지금 다 함께 지켜보고 있다.

한국교회 목사님들 부러워하던 수정교회 그래서 한국 목사님들의 미국순례관광의 필수코스였던 성공적인 교회성장의 모델 수정교회를 앞으로 목사님들이 그곳을 방문하여 이렇게 하면 교회가 파산한다는 교회성장주의 운동의 몰락의 현실을 배우는 필수 코스로 자리 매김하여야할 처참한 처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2. 한국 교회의 이미지: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근 노르웨이에서 92명의 목숨을 앗아간 최악의 테러가 발생한 가운데 붙잡힌 테러범이 자신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밝히면서 `근본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노르웨이의 그는 근본주의자라고 한다, 그러면 근본주의자란 누구인가? 오늘 우리 한국사회에서도 걸핏하면 가스통을 들고 나오는 분들이 계시고 단군 상의 목을 짜른다든지 지하철에서 거품을 물고 예수천당 지옥 불신을 외치는 이런 분들이 있는데 이러한 분들을 우리는 대게 극우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불교 사찰에 들어가 불상에 십자가를 그려 넣는다든지 사찰 땅 밟기를 한다든지 하는 이러한 행동을 하는 분들을 우리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두렵게 하는것은 한국 개신교는 광신도, 십자군, 초딩, 개독교, 짝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지금 "한국교회는 '보수'적 경향을 넘어서 근본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 한주간의 사회적 이슈는 무상급식 선거이었다. 이번 선거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번 서울시 무상급식 선거는 한국사회 진보측의 보편적 복지대 보수측의 선별적 복지의 한판 승부이었다. 그런데 결론은 진보측의 보편 복지의 한판승으로 결론이 났다. 무상급식 선거날 제 페이스북에 재미있는 후배글이 하나 올라왔다,

“이번 투표 최대의 패배자는 한국 개신교회다”

왜 한국 교회가 이번 선거의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는가? 이번 선거에서 대형교회들이 무상급식 전면 시행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것은 시장이나 회사처럼 사적기관이 아닌 공적인 기관인 교회가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일은 교회 스스로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적 이익 집단임을 자임하는 행위를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저지르고 있는것을 의미 한다. 과거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약자들 편을 들며 민주화운동에 나섰을때는 이런 욕을 먹지 않았다. 비록 기득권 보수진영으로부터 정치목사라는 말은 들었어도 국민전체로부터는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내놓고 가진자 기득권자들 편을 드는 일부 대형교회 보수 목사들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세상의 비웃움과 조롱거리가 되어버리는 세태가 되어버렸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공공적이고 보편적인 무상의 원리를 공격하고 무상의 원리가 확산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말하는 사람 들과 집단이 바로 대형교회의 보수목사들임을 보고 이들이 이번 선거에서 노골적으로 투표를 선동하고 보편적 복지와 무상 급식을 반대하는 편에 서는 것을 볼때 이들 이야말로 인간에게 무상의 은혜를 무한히 주시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며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더구나 내년 총·대선 앞두고 조용기목사와 금란교회 김홍도목사 김삼환 명성교회 목사등 한국의 대표적인 대형교회 목사들을 내세운 우파 성향의 기독교 정당 결성이 추진되고 있다는 언론의 보고를 들을때 이들이 도대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오늘 한국교회 중 일부 대형교회들이 권력과 돈과 신도 수와 교회건물의 크기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교회가 공적이고 보편적인것을 잃고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선별적이 될때 교회가 정의를 잃어 버릴때 어떠한 심판이 임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3. 기후 생태계처럼 한국 교회 생태계도 급변하고 있다



최근 엄청난 폭우가 또 쏟아진다. 이렇듯 전례 없는 집중폭우는 기후변화의 양상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처럼 지금 지구촌의 생태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들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생태계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우리는 올해 들어 산업화 시대란 무한경쟁 / 승자독식의 시대이었는데 그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는 카이스트학생의 자살 모습을 보면서 이 산업화시대의‘생존경쟁-효율-속도-성과주의’가 파산하여 우리 모두를 자살로 몰고가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이러한 산업화 시대의 무한 경쟁적 승자독식주의 교회를 대표하는 미국 성장주의형 대형교회의 대명사인 미국의 수정교회가 파산을 목격하고 그 여파로 우리나라의 초대형 교회중에도 몰락 직전의 모습을 보임을 우리는 지금 다 함께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생태계와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지금 산업화 시대가 황혼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대는 산업화시대를 넘어서 있는데 우리 한국 교회는 아직도 산업화 시대의 대형교회 신드롬에 옵티마이즈 되어 있다는데 있는 것이다.



3-1. 교회생태계의 변화



① 우리는 한국대형교회의 몰락과 기독교정권의 몰락 이후의 저성장시대의 한국교회를 준비해야 한다.



실천 신학 대학원의 은준관 박사님은 최근 한국교회를 이렇게 진단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선한 싸움이 아니라 교인을 쟁탈해야 하는 무서운 종교 전쟁터가 되었다. 여전히 우리는 교회 성장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학적 색맹이 되어 이 흐름의 비밀을 읽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스스로 영적으로 살려고 젊은이와 지식인이 교회를 조용히 떠나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제 메가 처치와 작은 교회 사이의 싸움이 아니다. 미래의 싸움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세대들과 교회가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가에 있다.

설사 2050년에 한국교회 교인 수가 400~500만으로 축소되는 불운이 온다 해도, 중요한 것은 그 400~500만 명이 하나님나라를 존재 이유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창조적 소수가 되어 역사를 변혁해 가는 남은 자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린다. 우리 한국 교회는 한국교회의 크기가 몰락하고 한국교회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기독교정권의 몰락 이후의 저성장시대의 한국교회를 준비해야 한다.



② 사회적으로 소셜 테이너라고 하는 한국 사회의 새로운 목양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 그동안 세상을 지배하던 산업화 시대의 무한 경쟁적 승자독식주의의 경쟁형 인간 이후에 이제 어떠한 인생이 들이 다시 탄생하고 있는가? 지금은 한 경쟁적 승자독식주의의 경쟁형 인간에서 이제 돌봄과 나눔과 섬김의 목양적 인간으로 돌아서며 그러한 인간형이 존경 받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운데 이 돌보고 나누는 목양적 인간관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교회의 목사인가, 장로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인가, 교회인가?

소셜테이너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가? ‘소셜테이너’는 ‘사회적 발언을 하는 연예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최근 주목받는 소셜테이너는 단연 배우 김여진씨이다. 그녀의 이름 앞에는 ‘개념찬 배우’라는 수식어가 붙는 다고 한다.

그녀는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 소식을 듣고 홍익대학교 본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농성 중이던 이 학교 청소·경비노동자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녀는 트위터로 부지런히 홍대 청소노동자들의 소식을 실어 날랐고, 반찬을 실어 날랐으며, 트위터로 뜻을 모은 시민들과 함께 청소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또 다른 분으로 정혜신 박사라는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이분은 자살의 위기에 직면한 쌍용 자동차 노조원을 심리상담을 하여 주었는데 그녀가 상당하는 동안에 그분들의 아이들을 바깥에서 정말 진심을 다해서, 정말로 열심히 놀아주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평택 쌍용차 해직자 가족을 찾은 가수 박혜경씨와 레몬트리 공작단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는 최근 신문기사에서 영화배우 김여진과 가수 박혜경씨 그리고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박사를 보며 이들이야 말로 파산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시대의 신자유주의의 인간형이후 고치고 싸매고 치유하는 목양적 인간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태일 이후 185일을 고공농성을 하여 3만 명이 부산으로 집결하게 만든 김위원장이라는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 피조물이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소셜테이너라고 하는 사회의 새로운 목양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제는 교회도 성공만을 바라보고 서로 경쟁하는 낡은 시대의 삶의 가치를 버리고 서로 나누고 섬기고 돌보는 내양을 치는 목양적 삶을 사는 부활한 인생들로 새롭게 거듭나 부활 이후의 서로 나누고 섬기고 돌보는 삶을 신나게 출발하는 생명목회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③ 2013의 한국교회 WCC 총회 유치로 교회의 새로운 마당이 준비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세계 기독교인의 올림픽이라고 하는 2013 WCC 제 10차 세계 총회 부산에 유치하게 되었다. 한국 부산에서 열리는 제 10차 WCC 세계 기독인 대회는 우선 그 주제부터가 주목할 만다. 생명 정의 평화가 총회의 주제로 결정된 것은 바로 생명 정의 평화를 절실히 요구되는 바로 아시아와 한국의 상황이 반영된 주제로 환영할 만한 주제가 선정되었다.

둘째로는 아프리카의 파다레(열린마당)와 남미의 뮤티라오(Mutirao)에 이어 한국대회는 마당이라는 개념이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 부산 총회때 우리가 활용했으면 하는 우리 한국의 마당이란 무엇을 뜻하는 개념인가?



첫째로. 마당은 열린 소통 구조 이다. 한국 사회에서 마당이란 우선 가족공동체와 마을과 지역사회과 만나는 열린 소통 공간이듯이 이 마당 공간에서 어떻게 가족과 교회와 마을뿐만이 아니라 세계와 만날 수 있는가하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마당 공간이 펼쳐져야 할 줄로 믿는다.

둘째로 한국의 마당에는 판이 벌려지고 그 판에는 해학과 소통과 해방의 맛이 있다.

셋째로 한국의 마당의 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갑자기 구경꾼과 관중이 무대에 뛰어들기 시작하고 배우과 관객이 어깨동무하고 하나가 되어 대동의 세상을 이루는 그야말로 해방의 절정을 맛보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우리는 이번 10차 세계 WCC 총회때 이 마당의 진행 절정에 관객들이 무대로 뛰어들고 주최측과 참여자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새로운 우주와 새로운 세상과 지구촌이 하나가 되는 우주적 드라마를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5. 새로운 에큐메니즘 즉 공적 영성과 지역 에큐메니즘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교회 생명망을 짜기와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의 가능성이 있다.



한국교회는 목이 마르다. “추락하기만 하는 한국교회, 왜소해져만 가는 교회운동, 대안이 없다는 말인가?” “예수 정신을 구현하면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교회모델이 무엇인가?” “건강한 교회운동의 방법론은 없는가?” <생명평화마당> 9월 포럼은 교회의 새로운 대안을 묻고자 한다. 생명과 평화의 사상을 퍼뜨려야 할 1차 영역이 바로 우리들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는 그동안 생명과 평화의 사상으로 교회갱신을 실현하겠다는 일념으로 교회현장에서 유용하고 필요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논의를 해왔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는 지금 한국교회의 새로운 대안을 5가지 부분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운동을 생태적으로 연결하며 새로운 교회의 탄생을 그려보고 그것을 발전시켜 보려고 한다.



1. 지역사회 복지형 2. 교회시민사회형 교회 3. 생명생태형 교회 4. 도시창조형 교회 5. 교회 2.0 운동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 생명 평화 마당 교회 위원회에서는 이번 종교개혁주일 이후에 오늘 한국 교회의 생태계의 변화를 진단하며 대형교회 시대 이후 중소형 생명교회의 새로운 교회 패러다임과 생태계를 제안하려 하는 것이다.



1. 지역 에큐메니즘에 기초한 지역 사회 생명형 교회:

우리가 새로운 교회의 생태계를 생각할 때 가정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이제 교회를 지역과 사회에서 분리 격리 고립된 한 개교회의 단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스스로 고립되고 자폐된 한 개체 교회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지역과 마을과 자연과 우주와 생태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생태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회의 생태계에서 이제 교회는 마을속의 지역 속에 교회가 되어야 하고 목회자는 교회의 목회자인 동시에 지역과 마을을 목회하는 지역 생명 목회자로 적극 나서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와 마을과 지역을 잇는 영적인 동시에 복지. 교육. 문화적인 지역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마을 한가운데로 공부방, 도서관, 복지관, 주민자치 센타 등의 복지 교육 생태계를 만들고 이러한 복지 문화적 생태계들을 교회의 영적 그물망과 서로 연결 소통할 때 교회는 마을과 지역을 살리는 영적 생명의 구원 망으로 다시 설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교회일수록 지역 사회의 교회가 되어야 하며 자신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지역 사회를 위한, 지역의 교회나 마을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도 개 교회 목사가 아니라 지역 사회의 목사가 되어야 하며 지역 사회에 있는 자원을 연결하고 동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정보화시대의 다품종 소생산체제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보화 다품종 소생 산의 시대의 미래 교회는 작고 영향력 있고 창조적인 다윗과 같은 교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다윗과 같은 미래 교회들은 작지만 아름답고, 작지만 자유롭고 창조적인 교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은 에큐메니칼한 생명 교회들은 창조적 작은 교회들로 작은 생명 생태망으로 지역을 파고들면서 실핏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덩치는 작지만 수많은 작은 다윗들로 분화하기도 하고 다시 연합 연대하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에큐메니칼한 영성으로 무장된 작은 지역 생명 생태형 교회로서 작지만 강력한 영향력과 힘을 발휘하는 지역 에큐메니즘에 기초한 생명 생태적 영성의 생명 교회들이 될 것이다.



2. 공적 영성 상실로 게토화되는 한국 개신교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시민 사회형 교회 :

많은 한국 교회들은 개교회주의·기복주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서 기독교 영성과 사역의 공적 측면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공적 영성의 미발달은 크게는 한국 개신교가 사회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방해하였으며, 작게는 성도 개개인이 사회 속에서 책임 있는 시민의 역활을 감당하는 것을 가로 막았다.

많은 신앙인들의 착각은 한국 개신교의 위가 개인적인 경건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데 있다. 개인적 경건은 하나님 앞에 개인이 가져야 할 필수적인 것이지만, 교회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사역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개인 경건만으로는 부족하다.

교회의 사역을 이끌어줄 시대적 세계관 신앙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적으로 경건한 목회자 혹은 교회라고 해서 공적 영성의 결핍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신학적인 성찰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한국 개신교의 패러다임을 기복적·성장지향적·개교회주의적 영성에서 공적 영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한국 개신교의 영성 코드에 공적 영적을 담아내는 신학적 재구성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지향점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학준 교수 / 뉴브런스윅신학교)

우리는 향린교회 새민족교회 등 지금 이러한 교회의 공적 영성과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한 교회들이 탄생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건강한 의미에서 교회도 성장하고 있음을 보고 이러한 교회의 공적 영성과 사회적 책임이 최근 ‘2012 생명평화 기독교행동’으로 출범하며 새로운 한국교회의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3. 농촌 지역 생명 생태 환경형 교회 : 생명농업포럼



"생명농업과 농촌교회 그리고 지역공동체"



한국 교회의 농촌교회에서 이미 생명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이러한 생명농업과 생명목회는 단순히 농법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의 변화의 문제이고, 생명문화의 문제이고, 세계의 관계를 생명적 관계로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복음사역에 매우 중요한 본질적인 과제가 된다고 보는 생명 농업 포름이 존재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생명 생태 목회가 준비되어 오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최근 기후문제를 중심으로 생태계의 위기를 맞이하며 이러한 생명 생태형 농촌교회들의 존재의 중요성이 부각되며 이러한 생명 생태형교회에 대한 관심이 농촌교회에서 출발하여 도시교회로 그리고 마을과 지역의 생명 생태 살리기 운동으로 확산되어 감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20-30명밖에 안 되는 농촌교회라도 목회자가 마을의 목회자로 생각하면, 목회적, 선교적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WCC 총회가 진정한 에큐메니칼 정신을 우리가 다시 한 번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공론화하고 공감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피조물, 다른 인종, 다른 종단과 함께 사이좋게 잘 사는 것,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다시 한 번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WCC 부산총회를 준비하는 농촌교회 좌담회 중 이태영 목사)



4. 도시지역 도시 창조 목회형 “지역을 변화시키는 창조적 도시목회”

(Creative Urban Ministry for Local Community)



지금 한국의 도시 교회의 일각에서는 "지역공동체 세우기와 마을 만들기"를 통해 도시 교회 공동체와 창조목회를 연구하는 공동체가 “도시 공동체 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대표적인 그룹으로 도시 공동체 연구소는 한국교회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할 대안을 지역공동체를 세우는 지역교회운동에서 찾고자 새로운 도시교회 운동을 시작한다.

도시공동체 연구소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변혁적 능력을 상실한 한국교회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지역사회를 섬기고 지역의 문화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이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금 발생하는 모든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신앙의 공적 책임에 대한 인식부재로 인해 나타난다고 보고, 우리 연구소는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지역과 삶의 현장으로 겸손하게 내려가서 공적인 책임을 다하며 지역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앙의 공적 표현, 실천, 공공신학의 구체적 실천, 교회의 정치적 책임, 사회와 지역에 대한 공적인 의사소통 등의 문제를 다루고 함께 토론하면서 앞으로 연구소가 어떻게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을지, 또 한국교회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5. ‘교회2.0목회자운동’



= 교회 목회도 2.0 시대, “개방, 참여, 공유, 소통”해야

: 참여 공유 연대 web 2.0 매체 혁명 소셜 네트웍크형 교회=



나도 이러한 교회를 다니고 싶다는 교회 소비자 운동과 소셜네트워크의 시대에 교회도 참여 공유 연대로 민주화 하여야 한다는 교회 민주화 운동이 젊은 목사님들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들 젊은 목회자들은 목회자 중심의 독단적인 교회 운영에서 벗어나 평신도 교인들이 교회 내 의사결정 구조에 참여하는 민주적 교회 운영을 제일 큰 목회 방침으로 정하고 있다. 상호 평등한 의식과 협력적인 팀 사역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지도력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결론:



최근 성공회 신학대학의 신용복 선생님이 한 신문사와 대담을 하셨는데 거기서 참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늘 새로운 창조성은 늘 변방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외부와 바깥, 변방과 마이너리티가 대단히 중요 하다는 것입니다. 중심부는 언제나 기득권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영역이다. 그래서 중심부에서는 창조적인 변화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인류역사의 전개과정을 보더라도 문명의 중심부는 늘 변방으로, 변방으로 옮아왔다.

왜 그러냐면 중심부는 늘 보수적 저항이 완고할 뿐 인데 반해, 변방은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새로운 것이 태동할 수 있는 창조의 지반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변화는 변방에서 오고 모든 새로운 에너지는 밖에서 온다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는 밖에서 변방에서 불어온다.

안철수 교수가 한국기업이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의 동물원에 갇혀있다고 하였듯이 한국교회도 지금 대형교회의 동물원에 갇혀있다. 이 동물원에서 탈줄해야 하고 한국교회에도 새로운 변화와 혁신의 벤쳐 생태계가 탄생해야 하는데 그것이 중소형 생명형 교회들의 탄생이다.

혹시 우리 교회만 낡은 산업화 시대의 대량생산 체계를 닮은 대형 교회의 모습을 흠모하고 닮으려하여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작고 빠르고 창조적인 교회의 모습을 상상하며 세상과 새로운 소통을 꿈꾸는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생태계는 급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산업화 시대에 한국 교회를 주도하던 대형교회 중심의 교회 성장운동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급격한 쇠퇴를 경험하고 있고 새로운 교회 생태계로서 공적 영성과 지역 에큐메니즘을 기반으로 한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과 새로운 교회의 생명망을 짜기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와 교회는 그 덩치는 크지만 이미 그 믿음과 도덕성과 사회성과 영성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큰 걱정과 근심과 진통을 앓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서 오는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두려움이 없는 교회라, 작지만 아름답고, 작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인 교회들이 될 것이다.

이처럼 미래에서 오는 교회는 크고 멍청한 골리앗이 아니라 작지만 창조적이고 영향력 있는 다윗과 같은 교회로 올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공적 영성과 지역 에큐메니즘을 기반으로한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과 새로운 교회의 생명망을 짜기를 준비해야할 때이다.

첫째로 "산업화 시대의 개교회 성장 패러다임"을 넘어 정보화 시대에 창조적으로 지역과 소통하는 "지역 섬김형 생명 목회 패러다임"의 교회의 탄생을 기도해야할 때이다,

둘째로 나도 이러한 교회를 다니고 싶다는 교회 소비자 운동과 소셜네트워크의 시대에 교회도 참여 공유 연대로 민주화 하여야 한다는 교회 민주화 운동이 본격화 되어야 할 시기이다,

셋째로 최근 발생하는 모든 한국교회의 문제는 결국 신앙의 공적 책임에 대한 인식부재로 인해 나타난다고 보고, 지역공동체 세우기와 마을 만들기"를 통해 도시 교회 공동체와 창조목회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며 지역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헌신해야 할수 있는 새로운 에큐메니칼한 공적 영성을 준비할 시기이다,

결론적으로 지금 새로운 교회의 생태계를 준비하는 우리로서 가장 중요한 인식의 전환은 이제 교회는 교회와 마을과 지역과 지구촌을 잇는 공적 영성과 지역 에큐메니즘을 기반으로 한 교회의 새로운 생태계의 탄생과 새로운 교회의 생명망을 짜기를 준비해야 할 시기임을 자각하고 준비하여야 할 때라는 것이다.[이원돈]











































































“<예수살기>의 교회운동”



양재성 목사 (예수살기,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예수살기 창립선언문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18-19)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것이 예수를 중심으로 재구성되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역사적 현장을 유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개인화해버렸다. 역사를 외면하고 단지 종교 영역 안에 갇혀버린 기독교, 삶을 간과하고 단지 말의 잔치로 숨어버린 기독교는 지금 극심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이 추락해버린 한국교회 모습은 어느 누구의 책임이라기보다 예수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우리들의 허물임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심정으로 예수 살기의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감히 ‘예수살기’라 이름 하였지만 우리가 예수살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반성과 뉘우침에서 이 모임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는 자리에서 예수를 사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 믿기는 예수 알기에서 시작하여야 하며 예수 따르기, 예수 살기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수는 우리의 전 존재가 자신을 따라 나설 것을 요청하셨다. 부자가 되기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부 자체를 포기하라고 하신다. 예수가 가르친 구원은 개인의 심리적 위안이나 죽은 후에 타계에서 이루어지는 구원만이 아니다. 예수의 구원은 개인의 경건과 사회적 성화, 더 나아가 우주적 성화까지 지향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가 기쁜 소식을 듣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고, 갇힌 자가 놓임을 받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치유와 해방의 메시지였다. 그는 개인을 억압하는 부당함과 사회를 억압하는 불합리와 생명을 억압하는 불의함에 맞서 싸우셨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생명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역사의 진보에 발을 맞추어 책임 있는 행동을 해나가고자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 참된 기독인은 역사의 고비마다 민족과 민중의 고난에 동참하며 예수를 따르는 삶의 순수성을 지켜온 양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할 무렵 기독교는 민족의 자주적 의지를 키워가는 온상이었다. 일제가 기독교신앙을 타계적, 초월적, 개인적 신앙으로 변절시키려는 의도에도 당시 전체 인구의 1% 정도에 불과한 기독인들이 전국적으로 3.1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살해, 구속, 부상당한 피해자 중 기독교인이 과반수를 넘어설 만큼 기독교는 3.1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신사참배에 저항하며 의연하게 순교의 길을 가기도 하였다. 1970년대 유신 정권이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할 때에 기독교는 산업선교 등을 통해 이 땅에 고난 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하였고, 이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촉발시켰으며, 고난의 현장에서 탄생한 민중신학을 꽃피웠다. 한편 한국사회가 통일문제를 금기시하던 때에 한국교회는 해외에서 남북 교회가 만나 화해와 교류를 선언하고, 마침내는 1988년 한국기독교의 통일선언과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으로 이어지는 선도적 투쟁으로 통일운동의 물고를 트기도 하였다.

이렇게 기독교는 역사의 현장에서 가난한 민중과 함께 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고비마다 신앙 양심을 지켜온 사건들에 주목하고 이들에 의해 유지해 온 예수를 살아가는 전통을 계승해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일제 강점기에 신사에 참배한 잘못, 해방 후 이승만 독재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잘못, 유신군부독재의 인권 유린ㆍ억압ㆍ학살을 묵인하고 동조해온 죄악, 아울러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에 동참하여 이웃나라에 고통을 가하는 죄악을 깊이 반성하고 회개하며 민족 앞에 사죄한다. 이러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평가는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이며, 한국교회가 참된 교회로 성장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는 상대적으로 민주화되었고 조금씩 사회의 성숙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비민주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빠져 반사회적, 반역사적, 반민주적인 길을 가고 있으며, 결국은 교회 내 윤리는 실종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자신이 예수의 길을 따르는 삶에 충실하지 못했으며 같은 길을 가는 동지들과 연대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이에 역사에 책임적 자세로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기독인들이 모여 새로운 기독인의 모임 “예수살기”를 세운다. 우리는 이 공동체를 통하여 책임적인 삶을 살아가고자하며 다음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나아가고자 한다.



첫째, 우리는 출애굽을 통해 히브리 민중이 이룬 해방된 공동체를 추구한다.

독재와 억압의 표본이었던 애굽의 바로 아래서의 종살이는 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하였고 삶을 송두리째 파괴시켰다. 이에 야훼 하나님은 신음하던 떠돌이, 가난뱅이들, 노예들을 대표하는 히브리 민중들을 내 백성이라 칭하시며 그들을 해방시킬 것을 선포하셨다. 마침내 애굽과의 투쟁을 통하여 고통과 억압에서 히브리 민중들을 해방시킨 하나님은 해방자이며 그들이 이룩한 히브리 공동체는 해방공동체였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된다. 즉 민중을 섬기는 일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그것이 참된 기독인과 거짓 기독인을 구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는 비인간화, 반생명성을 기독교의 적으로 규정하며 인간과 생명을 억압하는 모든 세력에 대항한다.



둘째,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의 중심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간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다.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의 태어나심, 삶, 죽으심, 부활하심과 가르침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 예수가 평생 붙들고 사신 것은 하나님 나라였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여기에 충실했다. 그의 죽음도 십자가도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였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운동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천사들은 예수의 태어나심이 하늘엔 영광이고 땅엔 평화라고 노래하였다. 예수는 생명을 주러왔고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긴 자를 고치시고, 소외당한 자를 세우시는 등, 생명을 살리고 일으키고 보전하는 일은 예수의 중심 사역이었다. 생명이 무참히 학살당하는 이 시대에 생명을 살리는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다. 또한 예수는 평화를 주러왔다고 자신을 규정하셨다. 때문에 예수는 거짓 평화인 로마제국에 빌붙은 예루살렘 체제와 대결하여 성전을 숙정하셨다. 예수께서 평생을 두고 씨름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의 두 기둥은 생명과 평화인 셈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생명과 평화의 나라다.



셋째, 우리는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정체성을 이룩하여 나간다.

초대 교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성령이었다. 성령께서 임재하시어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하셨고 예수를 따르게 하셨다. 성령은 사람들 안에 분열된 마음을 치유하여 하나되게 하신다. 성령의 역사는 우주가 하나님의 몸이며 그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의 지체로 한 형제요, 한 자매임을 보여준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임받은 공동체이다. 초대교회 안에서 종과 자유인, 이방인과 유대인, 여자와 남자가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갈라진 것들이 하나되는 화해는 공동체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웃과 소외된 자들에 대한 무관심과 오만을 회개하고 그들과 자매, 형제 관계를 회복하는 운동이었다. 또한 성령은 무력한 자들을 일깨워서 세상을 변혁하도록 역사의 현장으로 뛰쳐나가게 하신다.



넷째, 우리는 정의ㆍ평화ㆍ창조질서보전에 앞장선다.

세계교회협의회는 그 중심 과제를 정의ㆍ평화ㆍ창조질서보전과 폭력극복운동에 두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교회는 이 과제에 충실할 의무가 있다. 교회는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고 평화공동체를 건설하고 창조질서를 보전하며, 폭력에 반대하여 생명을 살리는 일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예수살기 신앙고백문



우리는 해방의 역사를 통해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신론)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살아 참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기독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이 생명과 평화의 영임을 믿는다. (성령론)

우리는 예수의 몸인 교회가 생명, 평화 그리고 정의의 세상을 여는

하나님의 일꾼임을 믿으며 (교회론)

성서와 더불어 자연과 역사가 진리와 은총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성경론)

우리는 모든 생명이 자유로이 살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임을 믿는다. (제자도)





예수살기 행동강령



<개인>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자신을 성찰한다. (말씀)

우리는 날마다 교회개혁과 사회변혁을 위해 기도한다. (기도)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보전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에 순명한다. (순종)

우리는 만물을 하나님께 하듯 지극한 사랑으로 대한다. (정체성)



<교회>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사유화하지 않는다. (공교회)

우리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두렵고 떨림으로 성례에 참여한다. (경외)

우리는 올바른 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한다.(개혁)



<사회>

우리는 고통 받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한다. (이웃/봉사)

우리는 겨레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힘쓴다. (통일)

우리는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며 생명, 평화를 위해 일한다. (평화)

우리는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힘쓴다. (평등/정의)

우리는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힘쓴다. (인권)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와 위선에 저항한다. (정의/저항)

우리는 진리를 따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과 연대한다. (연대)

우리는 지구를 살리는 창조질서보전에 힘쓴다. (생태)

우리는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존중한다.(이웃종교와 대화 연대)





예수살기 운동 및 모임 수칙



1.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깊은 동지적 이해와 사랑을 가진다.

2. 우리는 운동의 자율성을 강조하므로, 어떤 전체주의나 자율성을 침체시키는 요소를 경계한다.

3. 우리는 운동의 통일성을 추구한다. 서로 믿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힘을 합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4. 우리는 운동의 역사성에 주의한다. 올바른 역사흐름과 거슬러 흐르는 운동이 되지 않도록 경계한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니고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는 성찰과 분별이 필요함을 알고 있다.

5. 우리는 서로 다른 교파나 종교 단체에 대해서 포용성을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이해하고 대화하며 역사의 공동과제를 위하여 협력한다.

6. 우리들은 각자가 모임에 책임 있는 주체로 참여한다. 우리는 실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월정 회비를 성실하게 납부하여 회원의 의무를 다한다. 매주 목요일을 기도의 날로 정하여 정해진 시간에 회원 상호간 기도의 만남을 가지며 매주 홈페이지(www.withjesus.or.kr)에 들어와 서로의 의견을 나눈다. 건강한 신앙과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학습을 열심히 한다.

7. 우리는 시간은 모두가 공유하는 공유물이므로 정확하게 지킴으로 남의 시간을 늦추거나 빼앗지 아니한다.[예수살기]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의 위상과 역할

<생명평화마당>은 그동안 기독교 사회운동 진영에서 그 위상이 어떠해야 하고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해 왔습니다. 우선 월례포럼을 활동의 근간으로 두고, 신학위원회를 중심으로 대중을 확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차근히 내용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것은 한국사회와 한국기독교의 모순과 폐단을 지적하며, 차세대 개신교의 개혁을 위하여 진지하게 자성하고 생명과 평화의 사역을 펼쳐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구현하기 위하여, 한국교회 영역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당연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 방안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교회위원회의 활성화에도 역량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의 위상

1. 한국교회는 개혁과 새로운 대안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포스트 메가처치의 대안으로 중소형교회가 할 수 있는 교회개혁의 건강한 모델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일각에서 시도되고 있는 지역사회형 교회모델, 시민사회형 교회모델, 생명생태환경형 교회모델, 도시창조목회형 교회모델, 교회2.0목회자운동 등의 시도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기류 속에서 <생명평화마당>이 지향하는 교회모델 또는 교회운동모델을 개발하고 확산시켜 나감으로써, 한국교회, 특히 중소형교회에 활력을 주고 목회의 신명을 더할 수 있어야 한다.

2. 작금에 있어서 교회개혁이란 무엇인가? 근본에 자리한 신앙관부터 개혁하고 진정성 있는 고백에서 기인한 본질적 개혁이어야만 한다. 외연만 그럴싸하게 바꾸는 시늉으로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도출하고 실현가능하여 주효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3. 무너져 가는 한국교회를 새롭게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중소형 교회(농어촌, 도시빈민)모델로써, 실제적인 교회개혁을 이루어간다는 목표로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의 위상을 설정해야 한다.



<생명평화마당> 교회위원회의 역할과 활동계획

1. 우선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동역자 그룹을 형성해야 한다. 새로운 대안에 목말라하고 출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치며 힘겨운 목회를 하고 있는 중소형교회의 목회자들과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현장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목회방안을 연구하기 위하여 다양한 정보를 수집해나가야 한다. 그 같은 자료들을 엮어서 신학위원회나 사회선교위원회와 함께할 논의자료로 제시할 수 있다.

2. 교회위원회 중소형교회의 모델정립의 완성도를 위해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 <생명평화마당> 월례포럼을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월례포럼이 신학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꾸려가고 있지만, 이제부터는 교회위원회와 사회선교위원회가 번갈아서 주도해야 한다. 그럴 때 ‘신학-교회-선교’라는 삼각구도 안에서 내실 있는 포럼이 될 수 있다.

3. 교회위원회의 활동의 결과로 얻은 성과는 전국단위로 적극적으로 유포하고 확산시켜 내야 한다. 이를테면 ‘생명과 평화를 향한 교회개혁 선언’을 선포하고 전략적으로 지역을 순회하면서 함께 뜻을 가진 동역자들의 규합을 도모해야 한다.

4. 또한 이미 우리와 비슷한 내용으로 활동하고 있는 제 단체들과 동지적으로 연대하여 ‘생명평화의 목회’를 위해 힘을 보탤 수 있어야 한다.

5. 목회자 동지들과 끈끈한 정기모임을 기반으로 하고, <생명평화마당>의 내용과 조직을 바탕으로 하며, 연구하여 도출한 생명평화의 교회모델 또는 교회사역모델을 전국단위로 확산해 나가는 활동을 교회위원회 역할로 규명하고자 한다.

6. 창조적이면서 독창적인 모델을 연구하고 제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미래적 대안을 마련하고 한국교회의 새로운 환경을 서서히 형성해가야 할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1] 이 글은 정재영 “교회가 참여하는 지역공동체 세우기의 이론적 기초,” 정재영·조성돈, 「더불어사는 지역공동체 세우기」(서울: 예영, 2010)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2] 이 내용은 이종수, “공동체와 마을 만들기,” 이종수 엮음, 「한국사회와 공동체」(서울: 다산, 2008)의 23-30쪽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3] 생태공동체운동센터 홈페이지(http://www.commune.or.kr)에서 인용.


[4] 녹색 가게 운동 홈페이지(http://www.greenshop.or.kr)에서 인용.


[5] 행복한 나눔 홈페이지(http://www.giversmart.or.kr)에서 인용.


[6] ‘사랑의 줄잇기 가게’는 자원봉사자들이 중고물품들을 깔끔하게 손질하여 싼값에 판매하고 수익금은 전액 공공복지에 사용한다는 100년 역사의 영국 채리티 샵의 운영 방식과 정신을 이어 한국에 접목한 가게이다. ‘사랑의 줄잇기 가게’ 홈페이지(http://www.lovingline.org/)에서 인용.


[7] 이것은 막스 베버가 자신의 저작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서울: 세계, 1988)에서 전개한 핵심 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