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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1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 유영모" [1-10]

“없이 계신 하느님”, 비(非)케리크마의 신 - NEWS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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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의 맥락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현장아카데미 원장) 승인 2022.07.06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1)

몇 차례에 걸쳐 <성서와 문화>지에 다석 유영모(1890-1981)에 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지면을 허락하신 관계자분들께 감사하며 방대한 다석 사상의 핵심을 간추려 전달코자 노력할 것이다. 

다석 유영모

이번 첫 글에서는 다석을 ‘다석’ 되게 했던 그의 사상적 배경을 살피고 필자가 다석을 연구하는 이유에 대해서 정리하겠다. 그간 필자는 고 김흥호 선생과 함께 펴낸 <<다석 유영모의 동양사상과 신학(솔, 2002)>>을 비롯하여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모시는 사람들 2009)>>, <<빈탕한데 맞혀 놀이(동연 2011)>> 그리고 <<귀일신학(밀알북스 2020)>>등을 출판했고 다석학회 회원으로 활동해 왔다. 최근에는 <아주경제>에서 단행본 출판을 목적하여 다석 연구자들 12명을 인터뷰했고 연구 동향을 취재했는데 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올해 말 이 책이 출판되면 다석 유영모를 조망하는 다양한 시각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 2008년 세계 철학자 대회가 한국(서울대학교)서 열렸고 여기서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몇 분이 세계적으로 공식화되었다. 불교의 원효와 지눌, 유교의 퇴계와 율곡 그리고 역사는 짧지만 다석 유영모와 그의 제자 함석헌이 세계가 인정하는 기독교 사상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다석 사상은 이 ‘빛을 꺼라’고 명했고 의식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빛, 곧 의식 탓에 인간은 더 큰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영모의 무엇을 세계 철학계가 인정한 것인지를 물어야겠다. 다석(多夕)이란 말에서 보듯 유영모의 호는 저녁 석(夕)자가 세 개씩이나 겹쳐있다. 한 마디로 많은 저녁이란 뜻이다. 그의 사상이 밝은 대낮보다 어둔 밤을 선호, 중시했음을 적시한다. 이는 밤이 지닌 동양적 에토스 때문이었다. 지금껏 서구 기독교는 어둠을 이기는 빛의 종교로서 빛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악을 이기고 어둠을 극복하는 선을 대변했던 것이다. 이 빛은 곧 의식이기도 했다. 빛으로 만사가 드러나듯 일체를 분별, 판단하여 가치를 드러내는 기준이 바로 의식인 까닭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서구는 의식을 앞세워 주체(동일)성의 철학을 탄생시켰고 그로써 세계 지배이데올로기를 정초했다.

하지만 다석 사상은 이 ‘빛을 꺼라’고 명했고 의식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빛, 곧 의식 탓에 인간은 더 큰 세계,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양이 사라질 때 비로소 장대한 우주, 서구가 보지 못한 존재의 여여성(如如性)이 드러날 수 있다. 이로부터 동양은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했고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인 것을 역설해 왔다. 어둠, 곧 ‘텅 빔’ 속에 모든 것이 가득 찼으며 ‘있음이 곧 없음’ 이란 서구에 낯선 논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기껏해야 동일률과 모순율에 익숙한 서구로서는 배중률에 근거한 다석의 하느님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비롯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서구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지를 후술한 글에서 논할 수 있겠다. 김흥호가 다석 사상을 일컬어 ‘동양적 기독교’라 말했던바 서구 철학계의 평가는 이에 대한 긍정이자 인정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석 사상도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그 혼자만의 창작물도 아닐 것이다. 앞선 이들의 영향사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녹여 자신 것으로 만든 치열한 과정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다석 사상을 전후좌우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위로는 동학, 풍류, 천부경에 맥이 닿았고 옆으로는 신채호, 내촌, 톨스토이, 간디 등과 소통했고 아래로는 함석헌, 김흥호, 안병무, 박영호 등에게 영향을 주어 소위 ‘다석 학파’ 내지 씨알 학파‘의 길을 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먼저 다석 사상의 출처부터 서술하겠다. 정작 다석은 동학에 대한 말을 아꼈으나 필자는 양자의 관계성에 주목했다. 다석은 천부경을 오롯한 우리글로 번역할 만큼 이 책을 중시했다. 그 속에 인간을 중심에 둔 삼재사상이 깃들어 있는 까닭이다.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라는 천부경의 생각은 다석과 동학의 핵심이자 풍류적 인간 이해의 본질에 속한다. 다석이 강조한 귀일(歸一) 개념도 결국 ’인중천지일‘의 뜻에서 찾아야 옳을 것이다. 물론 다석 스스로 이런 생각을 언술한 바 없다. 하지만 그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다석 사상은 동학을 기독교적으로 토착화시킨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최근 도올의 동학 연구가 출판되어 세인의 주목을 받는 상황이다. 동경대전을 주해한 것인데 1. 2권의 각각의 부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는 코리안이다‘와 ’우리는 하느님이다‘가 바로 그것이다.

다석 역시 이 점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 그가 천부경을 중시하는 것은 삼재사상 때문이고 그것이 한글 창제의 원리, 특별히 모음(ㅡ, ㅣ, ㆍ)의 원리가 된 까닭이다. 다석에게 한글은 우리 민족을 하늘로 부르는 하늘의 소리(천문)이었는데 그 근거는 삼재에 대한 뜻풀이에 있다. 세상(ㅡ)을 뚫고 하늘(ㅣ)에 오를 때 고통 하는 소리, 아(ㆍ)를 십자가로 봤다. 인간 누구나가 하늘이고 고통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동학의 21자 주문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늘을 품은 인간, ’시천주‘의 자각은 ’인중천지일‘의 다른 표현이자 삼재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후일 긴 논문을 통해 정교하게 밝힐 생각이다.

다석과 동시대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여기서는 다석 이후, 그의 영향 사 속에서 자기 소리를 내는 아래쪽 사람들, 즉 후학들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이렇듯 필자가 다석으로부터 이후의 영향사를 논하는 것은 선불교 바탕에서 신학을 재구성한 일본 교토학파의 기독교 이해와 견줄 목적에서이다.

다석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상적 발전 속에서 앞서 말했듯이 ’다석 학파‘ 내지 씨알 학파’의 기독교를 충분히 말할 여지가 있다. 일본뿐 아니라 서구와 변별된 토착적 기독교 사상을 여기서 찾을 일이다. 민중 신학도 의당 이 속에 포함될 수 있겠으나 그것으로 ‘다석 학파’의 기독교가 환원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그 범주를 훌쩍 뛰어넘는다고 봐야 옳겠다.

동학 시천주의 다석식 표현인 ‘바탈’(성)이 함석헌에게서 역사 속 ‘뜻’으로 해석되었고 김흥호는 그것을 동서를 아우르는 ‘실존’으로 표현했으며 박영호는 ‘얼 나’라는 이름하에 기독교 안팎을 넘나드는 개념으로 확대시킨 까닭이다. 안병무는 이를 씨알 민중이란 계급적 차원에서 이해했다.

이후 여러 신학자들이 이 개념을 부여잡고 나름 신학적 작업을 하고 있는바 이들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속성 차원에서 학파로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가톨릭 성서 신학자 정양모 신부도 이 반열에 서 있고 하이데거 연구자인 이기상 교수 역시 가톨릭을 배경 삼아 다석 언어관을 주목하고 있다.

사실 이 모두는 <<대학>>의 ‘민(民)’ 개념을 ‘씨알’로 풀었던 다석의 본래 해석에 빚진 결과였다. 인간은 누구든지 하늘이 준 바탈을 갖고 태어난 존재로서 그를 씨알로 명명했다. 물론 이들 간에도 상호 차이점은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역사와 개인, 기독교와 이웃 종교, 동양과 서구, 개신교와 가톨릭, 각기 어디에 방점을 두는 가에 따라 다석을 이해하는 차원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인 차이라기보다 학파 안에서의 발전적 동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향후 다석 학파의 기독교는 이런 지향성 하에서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다. 필자가 <<귀일신학>>을 펴내면서 펜데믹 이후 시대를 위한 다석 사상이라 이름한 것도 민중 신학을 넘어 향후 영성 및 생태 신학을 위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잠재되었다고 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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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多夕) 유영모가 품은 사상가들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7.20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2)

이번 호에는 다석에게 영향을 주었던 동시대 사상가 및 사조들에 대해 언급을 할 것이다. 앞선 글에서 다석의 영향사를 <<天符經(천부경)>>에 이르기까지 종적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여기서는 다소 시차는 있지만 횡적 관계망 속에서 다석 사상을 조망할 생각이다. 아무리 천재적인 사상가라 할지라도 시대의 영향 없이 홀로 우뚝 설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석과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들
다석과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들
다석 유영모에게 직간접적인 큰 영향을 주었던 사상가들을 재차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신채호, 여준, 레오 톨스토이, 간디 그리고 우찌무라 간조 등. 이들 영향력이 날줄 씨줄로 엮이면서 다석사상, 곧 씨알철학이 생겨난 것이다. 혹시 이번 지면에 여백이 생긴다면 한글, 훈민정음에 대한 다석의 생각도 살펴볼 것이다. 역시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던바, 다석은 한글, 곧 훈민정음을 <<天符經(천부경)>>의 골자인 천지인 삼재론의 빛에서 뜻을 찾고 구했다. 목하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된 한글은 다석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으나 그가 뜻을 확대 재생산(창조)시키기도 했다. 그렇기에 향후 한류의 전개와 더불어 다석의 한글이해 또한 확산될 것을 소망한다.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는 다석에게 민족으로서의 ‘我(아)’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다. 대종교에 몸담고 상해 임정에도 참여했던 신채호는 후일 아나키스트로 평가받아 부정적으로 취급받기도 했지만 사실 그의 민족이해는 씨알 사상의 단초가 되었다. 

주지하듯 역사를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이라 보았으나 그에게 ‘我(아)’는 고루한 민족주의 차원을 벗었고 약자의 우선성을 내포했다. 강대국들에 맞서 민족을 강조했으나 민족 안에서도 민중과 여성 등 약자는 항존했기에 이들을 ’아‘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다. 당시 서구 열강들이 조선을 비롯한 한국을 정복하는 현실에서 의당 민족이 강조되었을 뿐 ‘아’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항시 달리 표현될 수 있었다. 그가 일제가 주입한 민족 폄하사관, 소위 恨(한)의 민족사를 거부하고 강감찬, 을지문덕, 광개토왕 등의 민족 영웅들 역사, 영웅사관을 소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다석은 이런 기저 하에서 대종교가 중시하는 <<天符經(천부경)>>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순수 우리말로 이 책 81자를 풀어냈고 신채호의 ‘我(아)’를 , 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 즉 후일 그의 핵심 사상이 된 歸一(귀일)의 본원 처로 확대 시킨 것이다. 

여준이란 분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오산학교 시절 다석이 만났던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다. 남강 이승훈의 권유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던 그는 그곳에서 몽양 여운형의 친척인 여준을 만났고 그를 통해 불교 경전, 노자 <<道德經(도덕경)>> 등을 만나 읽고 연구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유교경전에 익숙했던 다석이었으나 여타 동양경전에 대해서는 배움이 없었던 터라 여준을 통해 자신의 사유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좌우합작 론을 주창했던 여운형 집안은 사실 동학교도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단양, 양평 등지에서 해월 최시형과 더불어 활동했던 분이기도 했다. 여운형은 후일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기까지 했지만 여준은 家學(가학)으로서 동양경전에 더욱 심취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다석이 동학의 중요성을 인지 못 한 것이 필자에게 여전히 의아스럽다.

다석의 사상 속에 당대 지성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두 외국인이 있었다. 톨스토이와 간디가 그들이다. 주지하듯 톨스토이는 자신만의 바이블을 만들어 소위 비정통적인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다. 산상수훈이 그를 매료시킨 성서의 전부였고 실제로 그 정신대로 살고자 했다. 

다석이 특히 주목한 것은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 제도와 사유재산제에 대한 톨스토이의 부정적 생각이었다. 우선 神人(신인) 간의 중개자 개념을 부정한 것에 다석은 동의했다. 성직자들의 중개 없이 인간은 누구나 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믿은 탓이다. 예수조차 중개, 대리자가 될 수 없다는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견해와 흡사했다. 이런 이유로 정교회로부터 배척을 당했고 객사한 그의 장례식을 교회가 거부하기까지 했지만 살아생전 톨스토이는 산상수훈 정신만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역설했다. 다석이 자신의 기독교 이해를 비정통이라 여긴 것도 톨스토이 영향 때문이었다. 사유재산제의 부정도 그를 가족들은 물론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은 큰 이유였다. 사후 자기 재산을 시민단체에 기부키로 한 결정을 두고 유족들과 시민사회가 갈등했다. 다석이 자기 재산을 동광원에 기부하며 생을 마감한 것도 이런 사건이 배경 되었다. 

성자로 불리는 간디는 자서전 제목을 ’My Life is my message’로 적을 만큼 삶과 사상의 일치를 꾀한 존재였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거룩한 길을 걸을 수 있음을 확신시켰다. 하지만 자기 삶이 메시지가 되기 위해 인간은 거듭 貪瞋痴(탐진치)와 씨름해야만 했다. 정통 기독교가 말하듯 원죄 상태로의 인간 탄생을 거부했으나 몸을 지닌 인간의 獸性(수성)을 거듭 떨쳐 낼 것을 강조한 것이다. 조혼 탓에 부친 죽음 앞에서도 성욕을 참지 못했던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냈던 간디였지만 이후 다른 삶을 펼쳤고 영국 식민지에 대행했으나 비폭력의 방식으로 적대감을 이겨냈으며 하루 일식을 하며 소유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석이 일식과 解婚(해혼)을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삼은 것도 간디의 영향이 컸다. 다석에게는 이것이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일본 기독교인 우찌무라 간조를 만나면서 더욱 신학화 되어갔다.

물리학 공부를 위해 일본에 유학 갔던 다석은 거기서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를 만났다. 이것은 이후 그의 제자들 - 예컨대 함석헌, 김교신, 김흥호 등 - 이 서로 정도차는 있었으나 무교회주의를 수용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본래 양명학에 심취했던 우찌무라는 기독교를 수용한 이후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 루터의 以信稱義(이신칭의) 사상을 수용했으나 일체 교회 제도는 부정했으며 일본식 기독교를 만들고자 했다. 루터 대속사상에 근거하여 기존 형식에 무관하게 성서를 읽었고 깨친 은혜를 갖고 일본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동양정신에 몰두한 다석은 루터의 대속적 기독교를 수용키 어려웠다.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일을 기독교의 본질이라 여겼던 것이다. 남의 생명을 먹고 생활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 오히려 대속적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 스스로도 자신의 몸을 줄여(십자가) 마음을 확장시키는(부활) 방식으로 하늘과 하나 된 분으로 보았으며 그 예수가 우리 또한 그 길로 부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톨스토이가 촉발한 비정통적 기독교가 우찌무라 간조를 경유하며 동양적 기독교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간디가 말했던 탐진치의 극복이 골자이자 관건이었다. 이에 더해 다석은 이웃을 침략하는 일본적 기독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김교신에 의해 가시화되었지만 다석 역시도 대속적 기독교 이상으로 일본적 기독교에 거부감을 표출했던 것이다. 다석이 <<천부경>> 속의 三才論(삼재론)에 기초하여 자신의 기독교 이해를 도모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한글을 訓民(훈민) 차원이 아니라 백성을 하늘로 이끄는 天文(천문)이라 했고 한글을 통해 가독교를 표현하려는 창조적 노력을 경주했던 것이다. 지면 관계상 한글에 관한 다석의 설명은 다음 호의 주제로 남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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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소리’, 한글에 깃든 다석(多夕)의 사상
 뉴스M 편집부 승인 2022.08.0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3)

지난 호에서 말했듯이 다석은 한글을 ‘천문(天文)’, 곧 ‘하늘의 소리’라 하였다. 이것은 백성을 가르치는 소리, 훈민이라 언급했던 창제자 세종의 감각을 뛰어넘는 한글 이해라 할 것이다. 최근 한글을 자국어로 택한 소수민족도 있다고 들었다. 최근 BTS의 인기에 힘입어 세계인들이 한글 가사로 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으니 한글이 한류의 핵심이 될 미래를 기대해 본다. 감신대를 은퇴한 구약학자 방석종은 몇몇 음역 표기를 보충할 경우 한글이 세계 공용문자로 사용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글이 사람을 하늘로 부르는 소리라면 그 뜻과 소리는 한국인에게만 독점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1446년 한글 창제 반포일은 세계를 구원하는 날일 수도 있겠다. 여하튼 다석이 어떤 이유로 한글을 천문이라 했을지 살필 일이다.


주지하듯 한글은 모음(母音)과 자음(子音)으로 구성되었다. 모음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고 자음 즉 ‘아설순치후’의 다섯 소리는 오행(五行)론과 관계있다. 한마디로 삼재론과 음양오행론이 한글 창제의 원리란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지인, 삼재가 어머니 소리이고 오행론으로 구성된 자음이 그의 소리를 쫓는 아들 소리란 점이다. 어미 소리를 듣고 그가 부르는 곳으로 따라갈 때 즉 모음과 자음이 옳게 만날 경우 정음(正音), 바른 소리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다석은 모음을 하늘소리, 일명 ‘계’ 소리라 했고 자음을 지금 여기서의 소리 ‘예’ 소리라 헸으며’ 소리가 ‘계’ 소리를 따를 때 그것을 ‘제’소리라 일컬었다. ‘제’ 소리가 정음, 바른 소리이자 구원의 길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한글 창제 원리에 있어 삼재론이 의뜸이란 사실이다. 삼재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하 아래의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반도 내 백두대간을 중심하여 시베리아 북부까지 선을 그릴 때 그 오른쪽은 수렵 문화 지역이었고 반대편은 중국 농경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농경문화의 경우 빛의 있고 없음에 따른 음양 철학을 발전시켰고 삼재론은 짐승들의 목숨을 담보로 삶을 이어갔던 수렵문화를 배경 삼았다. 음양 철학이 오행의 관계철학으로 되었다면 삼재론은 ‘없음’을 우선하는 종교적 세계를 상상했던 것이다. 사냥 직전까지 작동한 생명력이 졸지에 사라진 그 현실에 주목한 결과다. 눈앞에 먹거리로 던져진 사체, 그 물질 보다 앞서 있던 생명력에 대한 경외가 수렵문화의 특징이자 삼재론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땅의 기본 철학은 삼재론 중심의 오행론 체계라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고 체제를 담은 책이 바로 <<天符經천부경>>이었다. 이미 <<道德經도덕경>>을 순수 우리말로 번역했고 몇 개의 불경을 풀었지만 다석은 궁극, 최종적으로 <<천부경>> 또한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시적 세계(地지)속에 비가시적으로 현존 활동하는 하늘의 도(天천)를 인간(人인) 속에서 찾을 것을 삼재론을 갖고 역설한 책이 바로 <<천부경>>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다석이 말하는 ‘없이 있음’을 불교 혹은 노장사상의 영향이라 일컫지만 <<천부경>>까지 소급해야 옳다.

몸의 숨만 쉰다고 해서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얼의 숨도 쉬어야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이제 한글 모음의 구성 원리로서 인간을 하늘로 이끄는 삼재론에 대한 다석의 풀이를 말해야겠다. 의당 <<천부경>>, 곧 ’없이 있음‘의 세계관의 토대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탐진치로 만연되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대물림된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탐진치는 다석에게 기독교 원죄와도 같다. 이보다 더 크고 중한 것이 인간 속에 감춰진 하늘 ’바탈‘ 이다. 이런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을 갖고 태어난 인간(l)은 그렇기에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오를 존재이다. 인간이 여타 동물과 달리 직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인간 세상을 뚫고 하늘 본성을 따르기가 결코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인간(l), 그 과정에서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오르는 순간, 세상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 그것이 십자가(+)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늘 뜻대로 하시라’는 예수의 절규가 터져 나온 시공간이다. 이 길은 인간이라면 가야 할 길이다. 누구에게도 ’대신’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예수 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삼재, 즉 ‘-‘. ‘l' 그리고 ‘ㆍ'가 서로 만날 때 ’으이아‘ 즉 고통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것이 인간이자 인간의 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오롯이 인간을 이렇게 부르는 보이지 않는 세계, ’계‘소리 덕분이다. ’계‘ 소리가 있기에 이 길을 걸을 수 있다. ’계‘소리에 ’예‘소리로 답하며 그것을 ’제‘소리로 만들라는 큰 뜻이 한글 속에 담겼다는 것이 다석의 지론이다.

이처럼 삼재 사상은 인간을 하늘로 부르는 어미 소리로서 ’계‘의 세계에 속했다. 예수 역시 이 소리에 답한 존재이다. 그가 짊어진 십자가는 우리를 대속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가다 우리 역시 ’길이 될‘ 것을 주문한다. 이런 길이 우리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 은총이자 대속이라면 대속일 것이다. 

이렇듯 삼재론은 자음, 곧 ’예‘ 소리를 힘껏 추동하여 ’제‘소리로 이끈다. 다른 어떤 외국 언어에서도 찾을 수 없는 3단계 자음 변화가 바로 삼재론과 잇댄 사상적 열매인 까닭이다. 예컨대 ’ㅁ ㅂ ㅍ‘, ’ㅅ ㅈ ㅊ’을 다석은 물음, 부름, 푸름, ‘삶, 잠, 참’으로 풀었다. 삶의 물음을 꽉 물고 불려서 풀어내라는 뜻이고 삶은 죽음(잠)을 통해서만 진실(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가르쳤다. ‘목숨’, ‘말숨’ 그리고 ‘얼숨’이 바로 이런 뜻을 담았다. 몸의 숨만 쉰다고 해서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얼의 숨도 쉬어야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이런 선상에서 다석은 소리글자인 한글을 뜻글자로 풀어내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상술한 내용을 근거로 한글에 상형문자인 한문 이상으로 뜻을 부여했던 것이다. 농사를 ’열음 질‘,즉 열매를 맺는 일로 풀었고, ’얼굴(골)‘을 하늘로부터 받은 얼의 골짜기라 했으며 사람을 하늘에서 받은 바탈을 불사르는 존재란 뜻으로 이해했다. 꽁문이와 꼭대기의 풀이도 흥미롭다. 아랫도리(항문)를 꼭 물어 단단히 조여야 하늘에 꼭 대일(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다석은 한글이 인간을 하늘로 이끄는 천문이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한글로 신학 하기‘란 긴 논문을 쓸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다석은 지금 사용치 않은 꼭지 없는 히읗 등 한글 4자 역시 되살렸고 그를 통해 뜻을 만들고자 하였다. 동시에 표준어 사용 탓에 사라진 지방 언어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사투리가 그저 변방언어가 아니라 뜻이 담긴 언어인 것을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다석은 하이데거가 말대로 한글을 우리 민족의 존재의 집으로 본 것이 틀림없다. 한글을 하늘이 준 소리라 믿고 우리 인간을 ’없이 있는‘ 그 세계로 이끌고자 했던 다석의 노력이 참으로 귀하다. 

다음 호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다석 사상을 서구사상과 견줘 풀어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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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계신 하느님”, 비(非)케리크마의 신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8.19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4): 다석의 신론

이번 글에서는 다석의 하느님 이해, 곧 그의 신관을 살펴보겠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다석은 '있음'보다 '없음'을, 빛보다는 어둠을 우선시했다. 많은 저녁(밤)을 뜻하는 다석이란 이름 속에 이런 의미가 담겼다. 이는 서구 기독교나 그쪽 철학 사상과 견줄 때 대단히 낯설다. 하지만 다석은 이를 대립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없이 있는 하느님’이란 말이 적시하듯 없음과 있음은 결코 양자택일적이지 않다. ‘없음이 곧 있음'이고 ‘빛이 곧 어둠’이란 것은 서구 논리들, 동일률이나 배중률로는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적시하는 다석의 예를 소개한다. 사람들은 나뭇가지에 핀 꽃을 보며 좋아하나 정작 나무와 꽃을 가능케 하는 허공을 보지 못하다는 것이다. 허공 없이는 나무도 꽃도 존재할 수 없다. 허공(무)이 우선이나 나무나 꽃과 둘일 수 없다(不二불이)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다. 이 점에서 다석의 신론은 ’무위적 유위‘를 말하는 노자의 도,현상과 실재의 궁극적 일치(“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를 말하는 불교적 공(sunjata) 사상과도 회통할 수 있다.

하지만 다석의 하느님 이해가 이들 사상과 변별되는 지점 또한 없지 않다. 신적 초월성과 인간의 의지가 이들에 비해 강조된 까닭이다. 초월성은 대종교의 경전이 된 <<천부경>>의 영향이겠고, 인간 의지는 유교적 토양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통섭하여 다석은 십자가에서 정점을 이룬 예수를 설명했다. 인습적 기독교를 떠났지만 예수 없이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대속적 죽음으로 예수를 의미화하는 기성 신학과 어떻게 다른지는 다음 호에서 설명할 것이다.

얼마 전 <<없이 계신 하느님- 절대자에 대해 동양적으로 사유하기>>란 책이 동연에서 출판되었다. 성공회 윤정현 신부가 영국 버밍햄 대학에서 썼던 다석 관련 최초의 박사 논문이다. 2003년에 제출한 논문을 거의 20년 만에 한국어로 재탄생된 것이다. 앞서 말했던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좋은 자료라 생각하며 일독하면 좋을 책이다. 서구인들에게 하느님을 논하는 다른(동양) 논리가 있음을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석 신론의 논리적 전거를 밝히는 일에 주력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한정된 지면을 통해 다석 신론의 속성과 의미 등에 초점을 두고 살필 것이다. 다시 후술하겠으나 다석이 즐겨 사용하는 ‘귀일’(歸一)이라는 말뜻도 소개하겠다.


하느님은 항시 인간 속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인간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다.

없이 있는 하느님, 도대체 이 말뜻은 무엇인가? 초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없음을 강조하고 실체를 부정하면서도 ‘있음'을 말하는 다석의 신관은 서구 기독교적 사유, 교리체계에 안주한 사람들에게는 많이 낯설고 난해할 것이다. 다석 신관의 구조와 의미는 <천부경>의 한 구절 ‘인중천지일’ (人中天地一),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존재한다’는 말 속에 모두 담겼다. 높이 계신 하느님이 육신을 지닌 인간 속에 내주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존재 자체가 초월의 내주라는 뜻이다.

가톨릭 신학자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초월을 초월한 것이 땅 중의 땅인 ‘인간’이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독생자가 될 수 있다. 다음 호 주제지만 예수만이 초월적 육화일 수 없다고 봤다. 인간은 누구나 하늘(초월)을 ‘받’아 몸속에 모신 존재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석이 즐겨 쓰는 용어로- '바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바탈은 ‘받 할’, 즉 위로부터 ‘받’아 ‘할’ 것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받 할’을 자음 접변하여 읽으면 '바탈'이 된다.

이 '바탈'은 유교의 경우 본연지성이겠고 불교에는 불성일 것이며 동학은 인내천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 ’독생자‘로 언표될 수 있다. 이는 모두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살아야 할 인간의 공통된 모습들이다. 인간에게 얼굴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얼굴은 내면의 '바탈'이 드러나는 얼의 골짜기인 까닭이다. 따라서 하늘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이 바로 ‘없이 있는’ 하느님의 실상이다. 하느님은 항시 인간 속에 있다. 태초부터 하느님은 인간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다석의 확신이었다. 이때 바탈은 얼이자 성령이라 말 할 수 있다. 봐도 보이지 않는 비실체적 존재인 까닭이다. 초월의 내주로서 이것은 본디 초월성을 인정치 않는 불교나 노장사상과는 조금 달랐다. 이들 종교들은 세상 ‘밖’을 인정치 않았으나(0도=360도의 세계관) 다석은 ‘밖’을 중시했으니 말이다. 물론 ’밖’을 실체로 여겼던 기독교를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로써 다석은 모든 종교가 저마다의 '바탈'의 실현을 통해 온통 하나가 되길 바랐다. 종교가 하나 되는 것을 통해 세상 전체가 바르게 될 것을 희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일사상(신학)의 핵심이자 골자였다. 한마디로 인간 마음이 곧 빈탕이신(없이 계신) 하느님과 같음을 알라는 것이다. ‘빈탕한데 맞혀 노는 일’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의 할 일이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해왔던 신적 보편성의 실상이다. 여성 신학자 이은선의 말을 빌리자면 성’(聖)의 평범성’일 것이다.

이런 보편성에 이르려면 인간은 거듭 자신의 탐진치를 축소시켜내야 한다. 이는 자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둘이 아닌 것을 알 때 가능하다. 자신의 삶도 하느님 존재가 그렇듯이 없이 있듯이- 빈탕한데 맞혀서- 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인간은 덜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하느님처럼 없이 있지 못하며 늘상 덜 없는 상태로 살고 있을 뿐이다. 바탈이 하늘인 것을 잊었기에, 둘 사이에 분리가 발생한 탓에 없음은 실종되고 견물생심을 일으키는 '있음'의 세계에 미혹된 탓이다. 따라서 ’덜‘ 없기에 더럽게 된 것이 인간의 실상, 곧 죄(인)라 할 것이다. 그럴수록 덜 없는 인간을 없이 계신 하느님으로 이끄는 것이 종교가 할 일이다.

이런 점에서 다석은 ‘목숨’, ‘말 숨’ 그리고 ‘얼 숨’을 순차적으로 구별하며 강조했다. 탐진치에 속한 인간이 목숨, 곧 육체의 숨을 쉬는 반면에 이를 벗고자 애쓰는 존재를 일컬어 '말 숨’을 쉰다고 했다. 종교들의 가르침이 곧 ‘말 숨’인 셈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귀일,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은 ‘얼 숨’에 달렸다는 것이 다석의 지론이다. 세상이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늘과 땅이 인간 속에서 하나가 된 상태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뭇 종교는 자신들 가르침을 절대화시키는 누로부터 해방되어야 마땅하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회통시켜 하나에로 이끄는 ‘영(성령)’인 까닭이다. 이 주제는 인간론과 귀일사상을 논하는 지면에서 재차 다룰 것인바 여기서 더 이상 진척시키지 않겠다.

주지하듯 서구 신학은 그간 ‘비신화화’(불트만), ‘비종교화’(본회퍼), 그리고 ‘비케리그마화’(부리)라는 신학적 방법론을 통해 기성 기독교의 틀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비신화화가 서구 전통 내에서 메시지의 시간적 차이를 극복한 경우라면 비종교화는 기독교 메시지를 윤리적 차원으로 확대시킨 차원일 것이다. 이에 반해 비케리그마화는 기독교 메시지가 공간 차에 따라 달리 의미화 될 수 있다는 신학적 견해다.

다석의 없이 계신 하느님은 이 점에서 비케리그마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말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논할 예수에 대한 이해 역시 신앙의 그리스도와도 다르고 역사적 예수상과도 크게 변별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각각의 공간적 풍토에 따라 케리그마가 달리 표현될 수 있다는 비케리그마화가 다석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그 신학적 배경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글 말미에 사족처럼 덧붙였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없이 계신’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이해된 다석의 예수상을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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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길이 되라"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9.09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5): 다석의 예수 이해

다석의 하느님 이해 –없이 계신 이- 가 서구사고에서 낯설 듯이 그의 예수론 또한 전통적 서구신학의 틀에서 많이 빗겨나 있다. 죄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서구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대속론을 전혀 달리 해석했던 까닭이다. 이는 인간이 탄생 시부터 죄를 품었다는 원죄론에 대한 부정과 맥을 같이 한다.

최근 서구에서 적극 논의 되는 바, 원죄보다는 원은총(Original biessing)을 강조하는 편이다. 물론 다석도 인간 죄성을 인정했다. 인간 몸의 속성(기질)과 연관된 貪嗔痴(탐진치) 즉 욕심내고, 분노하고 치정에 얽힌 인간 삶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 삶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만들어 왔는지를 절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白死千難(백사천난)의 수행과정 속에서 인간이 극복할 일이지 누군가에 의한 속죄의 대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점에서 다석은 톨스토이에 잇대어 자신의 기독교를 스스로 ’비정통‘이라 일컬었다. 여기서 비정통이란 말은 ’동양적‘이란 말과 뜻이 다르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다석은 예수의 유일성을 보편화 시켰다. 앞서 본대로 聖(성)의 보편성을 뜻한다. 예수만이 하늘의 독생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저마다 하늘의 독생자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없이 게신 이가 인간 속에 바탈(본성)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참을 그리워하고 참에 이르고자 애써야 할 존재이다. 다석은 이런 존재를 ’얼‘ 혹은 ’얼나‘라고 불렀다. 성령의 동양적 표현일 것이다. 비록 탐진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를 이길 수 있는 힘, 곧 하늘로부터 ’받‘아서 ’할‘ 것(바탈)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속알‘로서의 ’얼‘이다. 이점에서 예수가 독생자 듯이 우리 또한 독생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독생자인 것, 곧 자신의 ’얼‘을 믿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옳다.

이점에서 예수와 우리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가 없다. 하지만 예수와 우리 간의 구별(차이) 또한 없을 수 없다. 일상 속 우리와 다르게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석은 이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탈각시켰다. 그에게 십자가란 몸(탐진치)를 지닌 예수가 ’자기 뜻 버려 하늘 뜻‘ 구한(이룬) 지난한 수행의 꽃이자 열매였다. 그렇기에 다석은 종종 십자가와 부활을 ’몸 줄여 마음을 크게 만드는 일‘이라 풀었다. 탐진치라는 한계이자 제약을 스스로 해결한 존재, 그가 바로 예수였다는 것이다. 하늘 뜻에 따라 맛을 추구했던 자신의 삶(몸)을 이겨 하늘로 솟난 존재가 되었다. 이런 예수를 길이라 믿고 따르다 우리 역시 길 되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목표이자 이룰 과제이다. 이를 대속과 대별되는 일종의 ’자속‘사상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십자가를 걸머진 예수가 없다면 우리 갈 길도 분명치 않았을 것이다. 이점에서 예수가 갔던 길, 십자가는 그 자체로 은총이자 대속의 또 다른 의미라 하겠다. 길을 걸었던 사람이 앞서 있다는 것 이것이 구원이자 희망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던 바, 이를 우리는 스승 기독론이라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다석 자신도 유불선 모두가 하늘로부터 받을 것은 다 받은 종교이지만 자신의 스승은 오로지 예수뿐이라 말했다. 피한방울을 나누지 않았으나 부모, 자식 지간보다 더 가깝고 무제약적인 존재, 그가 바로 동양적 의미에서 스승이다. 스승, 길을 간 사람이 앞서 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필자는 불교와 기독교 대화에 전념하는 교토학파의 기독론과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예수이해를 다석 사상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토학파의 경우 신과 인간의 접촉에 주목했다. ’신이 우리와 늘 상 함께 한다‘는 ’임마누엘‘ 개념을 불교의 ’불성‘과 연계 시킨 것이다. 인간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과 신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같이 보았다. 하지만 이를 ’일차적 접촉‘이라 보고 진일보된 견해를 피력한 이도 있다. 예수의 경우 임마누엘에 만족치 않고 그 스스로 신이 된 ’이차적 접촉‘을 이뤘다는 것이다. 일견할 때 이들의 일차, 이차 접촉은 각기 다석의 ’얼‘ 사상과 스승 예수 이해와 유사한 듯 보인다. 하지만 교토학파의 경우 예수의 이차 접촉을 각(깨달음), 곧 돈오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다석과 달리 곧 자신 속 獸性(수성)과의 백사천난의 투쟁 차원을 간과했던 것이다. 다석의 시각에서 볼 때 의지의 결핍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토학파와 견줄 때 다석이 불교만큼이나 유교를 중시했던 까닭이다.

반면 역사적 예수 연구는 기존의 교리화된 대속사상을 깨는 측면에서 다석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역사적 연구가 예수의 비유, 어록에 초점을 두는 까닭에 예수는 교회가 고백하듯 결코 대속주가 될 수 없다. 그의 죽음보다 삶이 강조된 까닭이다. 하지만 다석과 비교시 역사적 예수연구도 문제가 없지 않다. 역사 연구는 역사적 예수가 오늘을 사는 우리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 하지 못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이 정작 그와 우리의 관계설정을 방해한 탓이다. 역사적 예수는 기존의 교리적 고백적 차원이 전제될 때만 유의미하다. 하지만 다석은 예수나 우리가 같은 바탈(얼)을 지녔다고 봤기에 역사적 예수 연구의 난점을 극복했다. 모두가 하늘의 독생자란 사실, 없이 계신이의 존재근거란 것을 통해 우리와 예수를 관계시켰다. 반면 역사적 예수에게 얼 기독론은 매우 낯설 수밖에 없다. 바탈(얼)의 힘으로 길가다 길 되신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며 우리 역시 길 되는 것이 스승기독론의 요체이다. 결국 다석 사상은 교토학파를 스승 기독론으로, 역사적 예수연구를 얼 기독론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었다.

다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실컷‘과 ’대충‘이란 두 말이었다.  예수와 같은 ’그이‘가 되고자 한다면 이 두 말과 멀리해야 옳다.

이런 다석의 예수론은 신론에서 언급한 바처럼 비케리그마화의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다. 성서 속 예수 상이 다석에 이르러 동양적으로 재해석(구성)된 까닭이다. 예수가 ’없이 계신 이‘의 삶을 체화시켰다면 서구적 신관에서 비롯한 예수이해와 변별되는 것이 당연하다. 앞서 봤듯이 전통적으로 대속적 구세주가 대세였고 역사적 예수연구는 제국 체제에 저항하는 지혜자 내지 혁명가로 예수를 각인시킨 반면 다석은 비정통적, 동양적 예수 상, 즉 수행적 차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경우 수행이라 해서 사적, 개인적 차원만 생각할 수 없다. 탐진치는 개인적 차원의 수성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탐욕, 사실을 왜곡하는 저널리즘 그리고 N 번방사태가 말하듯 사회의 구조적 차원까지 적시한다. 후술하겠지만 기후붕괴와 구조적 불평등 사회에서 탐진치와의 싸움은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다. 여기서 다석은 전통적인 대속 사상을 동학의 '侍’(모심), 불교의 ’緣起‘(연기)와 같은 차원에서 풀어냈다. 남의 생명을 먹고 사는 일상사가 곧 대속이란 것이다. 종교로서의 대속, 그 의미를 한껏 확장시킨 결과였다. 이는 세상에 관계 아닌 것이 없고, 이것과 저것이 상호적으로 발생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알버트 슈바이처가 말한 생명 외경론도 같은 맥락이겠다. 그럴수록 남의 생명(삶의 의지)을 적게 탐하는 일이 중요하다. 단순하게 사는 삶이 몸 줄여 마음 넓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남의 생명대신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삶이 수행이고, 자속이며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기독론의 본질이다.

다석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실컷‘과 ’대충‘이란 두 말이었다. 실컷 먹고 대충 사는 것을 복이라 여기며 맛을 추구하며 산다. 길을 가다가 길 되려면, 즉 예수와 같은 ’그이‘가 되고자 한다면 이 두 말과 멀리해야 옳다. 이것은 ’자기 몸을 산제사로 바치라‘는 성서 언어와 지극히 대치된다. 그러려면 종교를 통해 복 받는 일과 효용을 얻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옳다. 하지만 대속적 기독론이 가져온 폐해가 너무 크다. 종교개혁이 말한 3개의 ’오직’(Only)교리가 자본주의 체제- 탐진치-를 유지, 존속, 확대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이점에서 다석의 수행적 기독론은 탐욕에 젖은 병든 기독교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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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없어 더러운 존재, 빈탕한데 맞혀 놀이   이정배 교수 승인 2022.09.17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연재 (6): 다석의 인간 이해

다석의 인간론을 쓰려하니 이미 앞에서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에서 기독론- 예수이해 –이 인간 문제 해결을 위한 궁극적인 상수였던 까닭이다. 하지만 다석의 경우 인간을 예수에 종속시키지 않았다. 기독론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교리로 여기지 않은 결과였다. 예수처럼 인간도 ‘빈탕(없이 있음)’의 독생자로 여겼을 뿐이다. 이웃 종교들도 하늘로부터 받을 것은 모두 다 받았다 했으니 기독교든 불교든 인간 이해에 있어 종교 간 차이도 없다.

지난 세월 형성된 서구 기독교의 두 유형, 가톨릭과 개신교의 두 신학원리들- 존재유비(Analogia entis)와 신앙유비(Analogia fidei)–에 의지해서 다석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선험적 죄 성 자체가 부정되었기에 유비(가톨릭)나 역설(개신교)의 논리가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각성은 서구 어느 것보다 깊다하겠다.

이점에서 이 글 제목이 ‘덜 없어 더러운 존재, 빈탕한데 맞혀놀이’로 되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앞서 본대로 하느님은 ‘없이 계신 분’이다. 인간이 하느님 형상이라면 그 역시 ‘없이 있어야 할’ 존재여야만 했다. 하지만 인간 속 獸性(수성), 탐진치로 인해 인간의 현존은 ‘덜 없는’ 상태에 놓였다. 한마디로 소유, 욕망 지향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없음의 존재가 되지 못한 인간 상태, 곧 ‘덜 없음’을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더러움’이 된다. 더러움은 깨끗함의 반대어로서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때 더러움은 서구 기독교가 말했던 원죄와는 많이 다르다. 본래 인간은 없이 있는 존재, ‘바탈’로서 세상에 태어났던 까닭이다. 없이 있는 하느님이 바탈(얼)로서, 좀 더 넓게 화장시켜 말하자면 세상을 가득채운 영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하느님과 인간이 그렇듯이 하느님과 세상도 이점에서 不二(불이)적 관계 속에 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설명을 독점해온 서구 기독교로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탐진치 탓에 더러워진 인간은 자신을 깨끗게 하면 된다. 어기서 ‘깨끗’은 거룩을 표현하는 다석 고유한 언어로서 한번 ‘깨’어져서 ‘끝’을 보라는 뜻을 지녔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 속 바탈에 의지하여 깨끗의 과정을 통해 ‘없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늘 계신 하느님의 거룩하심처럼 너희도 거룩 하라는 성서말씀의 본뜻이라 여겼다. 김흥호는 다석의 경우 인습화된 언어 ‘거룩’ 보다 ‘깨끗’이란 말을 더 선호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없음’과 ‘있음’에 따른 인간이해는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주지하듯 기독교는 영혼을 자신의 육체보다 절대 우월하게 생각해 왔다. 그래서 곧잘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형상과 등가로 여긴 것이다. 여타 피조물과 견줘 인간은 월등히 우월한 존재로 봤다.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유색인에 대한 백인 우월주의로 확장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을 받은 토미즘 신학의 역할 탓이었다. 식물은 生魂(생혼)만을, 동물의 경우 생혼과 覺魂(각혼)을 그리고 인간은 이에 더해 靈魂(영혼)을 지녔다고 가르친 것이다. 생혼과 각혼은 죽음과 더불어 소멸하지만 영혼만큼은 지속하기에 신적 속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몸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죽음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최근 場(장, Field)이론을 근거로 인간 본질인 영혼이 달리 설명되는 추세이다. 몸속에 영혼이 있지 않고 영혼 속에 몸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과학적 개념인 장(Field)과 호환될 수 있는 바, 영이라 불러도 좋고 ‘온생명’이란 말도 낯설지 않다. 거대한 생명공간으로서의 장(영)안에서 개체는 전체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은 차별 없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를 ‘새로운 애니미즘’(New Animism)이라 불러도 좋겠다. 이 때 영, 혹은 장은 다석이 말한 ‘빈탕’ 곧 ‘없음’과 다르지 않다. 그에게 허공이 곧 있음의 근거였던 까닭이다. 텅빈 곳에 영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다석의 생각이었다. 그것이 유교의 경우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었고 불교는 ‘진공묘유(眞空妙有)’로 언표 되었으며 기독교의 하느님을 ‘없이 계신 이’로 부른 이유였다. 이처럼 하느님 영이 줄 곧 우리와 더불어 있었기에 다석은 성령을 받으라는 말을 아주 싫어했다. 한시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었기에 누가 누구에게 베풀 수혜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물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영의 산물로 알라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다석이 성리학의 인식론, 격물(格物)을 盡物性(진물성)이라 달리 표현한 것에 주목한다. 격물은 만물이 동일한 理(이)를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理(이)가 사물의 이치와 교감하다가 어느 순간 주객의 일치가 이뤄진다는 성리학의 으뜸 개념이다. 다석은 이를 ‘진물성’으로 재 개념화 시켜 사물과 인간 본성 간 간격이 사라진 하나 된 상태를 더욱 강조했다. 경물에서 보듯 사물을 대상화 시키지 않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물성과의 일치를 역설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은 주희의 理學(이학)이 아닌 왕양명의 心學(심학)과 유사하다.

동학에서 말하는 내 마음이 곧 네(그)마음이라는 ‘吾心卽汝心’(오심즉여심)의 경지라고 말해도 좋다. 사실 동학이 敬天(경천), 敬人(경인)을 넘어 敬物(경물)을 강조한 것도 이런 선상에서였다. 하지만 다석의 ‘진물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物(물)을 존경한다는 말 속에서 지행합일의 경지를 살폈다. 예컨대 닭을 마음에 품고 귀하게 생각했다면(경물) 사람은 새벽닭이 그렇듯이 부지런한 닭의 성질까지 닮아야 했던 것이다. 닭처럼 부지런한 존재가 되는 것이 진물성의 과제이자 목표였다. 이런 논의는 결국 ‘덜 없어’ 더러워진 존재, 탐진치에 찌든 인간을 치유, 해방 시킬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없이 계신 하느님처럼 존재하기 위한 길이었다. 예수의 십자가가 땅으로부터 하늘로 솟난 길이었듯이 우리 역시 솟난 존재가 되길 바라서였다. 누구든지 자기 몸을 제물삼아야(자속) 가능한 일이다.

다석의 십자가는 이렇듯 ‘덜 없는’ 인간이 ‘없이 계신 이’와 하나 되는 길을 적시한다. 이것이 단적으로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즉 사람 또는 사물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언어로 표현되었다. 주지하듯 ‘덜 없는’ 인간은 뭇 사물에 마음을 빼앗기는 견물생심의 존재이다. 그럴수록 사물의 본성을 알고 그와 하나 되면 자기 마음을 지킬 것을 역설했다. 사물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영의 산물로 알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존재론적 각성은 자연과의 동근원성을 말하는 지점까지 확장되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몸성히(목숨), 마음놓이(말숨)의 단계를 거쳐 자신의 바탈(얼숨)을 실현시킨 ‘바탈태우’의 경지라 할 것이다. 십자가는 대속의 상징이 아니라 스스로를 태워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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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있음의 존재론과 생태학   이정배 교수 승인 2022.10.04 0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7): 기후붕괴 시대의 다석 사상

지난 장에서 우리는 견물생심에 반하는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물건을 보고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논했다.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현실과 맞서는 주체적 인간태도를 다석의 말로 표현한 것이다. 주지하듯 홀로세 말기의 지구생태계가 자본주의 폐해로 기후붕괴시대에 접어들었다. 물건에 마음이 홀려 인류가 욕망 덩어리로 살 경우 2050년 거주 불가능한 지구가 될 것이란 경고가 끊이질 않고 있다. 자연의 질적 파괴가 임계점을 넘어선 탓이다.

이런 난제를 해결키 위해 기독교 내부에서 여러 형태의 생태신학이 등장했다. 우주적 그리스도론이 등장했고 신론의 모형변이, 곧 어머니 하느님 이란 말도 회자되었다. 기독교내부의 뿌리은유-하느님, 그리스도 등-들을 생태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자연과 관계하는 인간의 태도를 바꿀 목적에서였다. 일리가 없지 않으나 이들 경우는 여전히 ‘있음’의 표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전 인류의 생태적 회심을 위해 다석이 말했던 ‘없음’의 존재론적 차원을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없이 있는 하느님을 닮은 ‘없이 있는 인간’이 될 때 자연 역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달리 말하자면 인간위주의 도구적 관점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론적 관점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이점에서 ‘없이 있는 하느님’은 생태학적 회심의 전거라 말할 수 있겠다.

  다석 신론의 요체인 ‘없이 있음’이란 말은 서구 주류 담론 어느 것으로도 해명될 수 없었다. ‘없음’을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초월적 근거이자 전체로 봤던 까닭이다. 더욱이 이것이 인간 속에 바탈- 받아서 할 것-로서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인간 역시 하느님처럼 없이 있어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빈탕의 자녀인 인간은 자연을 욕망 대상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성찰해야 옳다. <다석 일지> 곳곳에 누차 언급 되었던 바, 그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旣成佛’(기성불)이었다. 우주만물을 신의 현현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 속성을 우주 만물 속에서 찾았다는 말을 누차 남겼다. 반면 인간은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未成佛(미성불)상태로 있다. 자신을 없이 있는 존재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망을 지닌 몸으로서의 존재, 탐진치의 삶을 벗겨내지 못한 탓이다. 이런 현실에서 생태적 위기극복은 緣木求魚(연목구어)이고 생태적 회심은 言語道斷(언어도단)일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다석은 성령이란 말로 ‘없이 계신 하느님’과 인간의 ‘바탈’을 상호 소통시키고자 했다. 우주를 지속시키는 ‘하나’이자 자기 속의 ‘바탈’로서의 영을 우주 만물 속에서 봤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 속에 깃든 영을 찾는 것 역시 인간의 할 일로 여겼다. 지난 장에서 언급한 ‘盡物性’(진물성)이란 말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이는 사물(자연)의 본성과 인간이 온전히 하나가 되는 상태를 일컫는 바, 몸나(개체존재)의 극복을 전제한다. 절대생명인 ‘하나’와의 일치를 위해 자신의 바탈을 태울 때(바탈태우) 가능하다. 목숨만이 아니라 말(얼) 숨을 쉬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인간이 져야할 십자가라 했으며 이로써 누구든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자신의 바탈을 태우는 것을 십자가로 본 것이다.

다석은 예수 십자가를 ‘一坐食 一言仁’(일좌식일언인)이란 말로 다시 풀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했듯이’ 자기 몸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란 말뜻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다석에게서 ‘몸 줄여 마음 늘리는 일’로 재구성된 결과였다. “쌀 한 알을 심어 천 알, 만 알 수학하는 것도 이득이지만 斷食(色)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 하느님 아들(그리스도)로 변하는 이득이 더 크다”는 그의 말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몸나가 이웃과 자연을 해치는 탐욕스런 자아이듯 말 숨 쉬는 참(얼)나는 우주만물과 하나 된 존재를 적시한다.

다석은 우주만물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禮’(예)라 했고 그것을 ‘알맞음’(中庸)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렇기에 참 나는 생태적 자아, 곧 생태적 회심을 이룬 존재라 말해도 좋겠다. 이런 차원에서 다석은 대속교리를 다음처럼 생태적으로 풀어냈다. “내가 먹는 낱알과 체소가 나의 생명을 위해 희생되어 힘을 내게 대속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양식이라면 나를 위해 대속되는 만물은 죄다 그리스도입니다.” 등. 그렇기에 앞서 말한 ‘盡物性’(진물성)은 우주만물을 성례전적 대속 제물로 이해하기위한 전거였다. 대속하는 물질(자연)의 본성을 옳게 알아야 인간 역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닭고기를 먹으면 닭처럼 일찍 깨어 기도하고 일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들 생명에 대한 보답이라 여긴 것이다. 한마디로 맛으로, 욕망으로 먹지 말고 뜻으로 살자는 것이다. ‘일좌식, 일언인’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이를 ‘단식’과 ‘단색’으로 줄여 말해도 좋다. 

 一食(일식), 혹은 단식은 見物生心(견물생심)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남의 생명을 탐하지 말고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라는 것이다. 남의 생명 소중함을 깨달아 자기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였다. 見物不可生(견물불가생), 사물을 보고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을 제물로 삼는 일식은 일종의 ’자기 비움‘으로서 인간을 생태적으로 재 주체화시킬 수 있다. 기후붕괴를 여실히 경험 중인 21세기의 화두가 평등도 자유도 아닌 단순성(Simplicity), 곧 최소한의 물질로 사는 일인 것도 일식의 뜻과 무관치 않다.

性(성)의 문제 역시 생태적으로 중요하다. 인류 존속을 위해 필요하겠으나 절제 없어 몸을 망치는 일들로 세상이 시끄럽다. 생존을 위해 살생하고 교미하는 동물과 인간이 같을 수 없다. 자연이 무너지듯 자기 몸을 해하는 욕망은 인간이 失性(실성)했다는 반증이다. 그럴수록 다석은 ’夫婦有別‘(부부유별)을 강조했다. 다석의 , 解婚(해혼)즉 부부로 살되 남녀로 사는 관계를 끊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성에 있어서도 금욕이 필요한 시대가 된 까닭이다. OECD 국가 중에서 포르노 문화가 가장 센 나라가 한국이란 사실이 많이 부끄럽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이 놓이고 자신의 바탈을 불사를 수 있다. 앞전에서 말한 꽁문이와 꼭대기란 말을 다시 기억하면 좋겠다. 다석은 남녀문제를 해결한 존재를 일컬어 ’마음 씻어난 이‘라 불렀다. 

  결국  일식과 단색은 없이 있는 하느님과 하나 되려는 인간의 수행이다. 빈탕한데 맞혀 놀아야 할 종교적 삶의 본질인 셈이다. 다석은 이를 自贖(자속)의 길이라 했다. 빈탕의 큰 하나를 모르면 탐진치의 지배를 벗을 길이 없다. 탕자처럼 매순간 몸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석은 거듭 강조한다. “꽃을 볼 때 온통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을 둘러싼 허공, 곧 빈탕을 보지 않습니다. 허공만이 참입니다.” 꽃을 꽃 되게 하는 것이 빈탕인 한 이것은 소유대상일 수 없다. 꽃만 볼 때 그것은 꺾고 싶고 갖고 싶은 물질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서구 생태학적 위기의 본질이다.

빈탕을 알아야 맛이 아닌 뜻을 따라 살 수 있다. 있음이 아니라 없음에 걸맞게 살자는 것이다. 덜 없어 더러운 인간 삶을 끝내야 인류에게 미래가 열릴 수 있다. 없음에 근거한 생태학적 회심 이것이 자신과 인류 나아가 우주를 구하는 길일 것이다. 기후붕괴 시대에 인간에게 절실한 것은 에코지능이다. 이는 자연 따라 사는 능력(Biomimicry)이러 불러도 좋다. 윤리적 소비란 말도 이로부터 비롯할 수 있다. 자연의 한계를 극복 대상이 아니라 적응대상으로 성찰하는 것이 옳다. 다석이 ’진물성‘ 개념을 내세워 견물불가생의 삶을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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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의 ’없음‘과 성 프란시스코의 ’가난‘   이정배 교수 승인 2022.10.19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8): 없음과 가난

다석은 1959년도 11월 경 <<다석 일지>>를 통해 독일의 신비 영성가 마이스터 에카르트를 두 차례나 연거푸 다루었다. ’없이 계신‘ 하느님을 인간의 바탈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평소 지론을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구분하고 자신을 찾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서구 신비사상 속에서 확인했던 까닭이다. 필자 역시 이 점에 공감하며 이런 구조 속에서 양자를 비교 성찰할 의욕을 느낀다. 하지만 논리적 구조에서만이 아니라 누구 게나 주어진 바탈로서의 ’얼‘이 삶을 통해 구체화되는- 길을 가다 길이 되라- 白死千難(백사천난)의 과정을 생각할 때 에카르트 보다는 가난을 살아냈던 성 프란시스코가 더 적합한 비교 파트너라 확신한다. 프란시스칸 작은 형제회 창립 80주년을 맞아 필자에게 연구과제를 주었기에 당시 이런 관심을 약술한 바 있었다.

사실 프란치스칸 전통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성보다 의지를 강조했고 보편보다 개체를 앞세운 이 전통은 개신교 탄생의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농민전쟁을 진압하고 군주들 편에 섰던 루터와 견줄 때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프란시스코가 더 많이 생각났다. 차라리 가톨릭교회에 속하지 말고 그가 두세기 앞서 종교개혁의 주창자가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고 많다. 프란시스코 교단에 속한 현 교황이 했던 말, ’교회의 복음화 없이 는 세상의 복음화 없다‘는 말을 주목한다. 가난을 통해 예수와 하나 된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의 삶, 아마 그것이 그가 말하는 복음화의 실재(Reality)였을 것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
프란치스칸 정신은 자본세를 맞아 사실적 종말로 치닫는 지구를 구할 백신일 수 있겠다. 그에게 가난은 곧 하느님이었고 그렇게 산 이가 예수였으며 우리를 그 길로 부르기 때문이다. 다석의 말로는 없이 계신 하느님 곧 ’빈탕‘한데 맞혀 사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들은 이것-가난과 없음-을 선이라 일컬었다. 더욱이 ’믿음‘에 근거한 속죄론을 앞세우지 않았고 하느님 주신 자유의지를 중히 여겼으며 오로지 가난-없이 있음-을 통한 신비적 합일을 지향했다. 바로 여기서 관상을 통해 신비적 합일을 이룬 에크하르트와 변별된다. 자연을 토미즘 전통에서 말하듯 신과의 유비(Analogia entis) 차원에서 보지 않고 신적 계시로 본 것도 자연을 旣成佛(기성불)로 여긴 다석과 전혀 다르지 않다.

프란치스칸 전통의 변별력은 ’하느님은 ’선(bonum)‘이고 창조된 모든 것 역시 ’선‘이다’는 말로 축약해서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가난은 선의 다른 말이다. 왜냐면 독생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가난한 자로 살았던 까닭이다. ‘내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의 십자가, 제 뜻마저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은 십자가에서 가난의 절정을 보았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고 세상(피조물)이 선이자 가난이란 것이 프란치스코 신학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하여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들 속에서 선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자연의 전적 타락을 말했던 개신교 신학과는 발상이 동이 서에서 멀 듯 달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의 육화’란 개념이다. 인간을 포함한 온갖 피조물에게 하느님 –가난- 善(선)에 참여케 하는 근원적 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창조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원 축복(Original Blessing)이란 말과 흡사하다. 일차적으로 하느님은 예수에게 자신과 일치된 본성을 갖게 했고 그것이 그가 걸머졌던 가난의 길, 십자가로서 나타났다. 그로써 그는 인간 및 피조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선을 이루도록 도울 수 있었다. 피조물들에게 그리스도의 인간성, 곧 가난(선)을 덧입게 했던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일체가 자기개별화 과정을 통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프란시스코는 이를 육화된 그리스도의 성취로 이해했다. 자연의 창조성에 대한 대 긍정이라 하겠다. 이는 대속에 대한 다석 생각과 정확히 일치된다.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 以天食天, 이천식천)’는 동학의 말처럼 다석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 저마다 상이한 것들이 서로를 살리고-대속하고- 있음을 강조한 까닭이다. 일체의 존재를 예외 없이 利他自利(이타자리)의 차원에서 봤던 것이다. 타자를 위한 방식으로 각기 개별화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육화의 실현이었다.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십자가)가 중요하다. 

이처럼 성 프란시스코는 선, 창조(피조물) 그리고 구원을 하나로 보았다. 그 하나는 결국 완벽한 가난에서 성취된다. 세상을 치유하고 완성하는 길이 가난에 있다고 본 까닭이다. 그에게 종말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하느님 목적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세상 밖이 아니라 그 안에서 말이다. 따라서 자연이 하느님 선을 드러내 세상을 유익(대속)하게 하듯 인간 역시 자신 삶을 가난케 하여 여타 피조물을 살려내야만 했다. 여기서 가난은 세상을 치유하고 살려내는 일로써 ‘그리스도를 행함’, 즉 십자가를 지는 일과 같은 말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칸은 사적인 것을 결코 인정치 않았다. 존재하는 것 일체가 선물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일체 존재가 신적인 사랑의 대상일 뿐 필요나 소유를 위한 것일 수 없었다. 여기서 사적 가난과 사회적 가난은 상호 무관치 않다. 한마디로 ‘共生共貧’(공생공빈)의 가치를 적시한다. 가난이자 선 자체인 하느님 본성에 상응토록 세상 만드는 것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존재이유라 본 것이다.

지금은 본뜻에서 많이 빗겨났으나 수도 공동체 역시 이련 연유로 생겨났다. 다석 역시 이런 차원에서 개신교 공동체, 歸一園(귀일원)건립을 위해 상당한 사적 재산을 기부했다. 말년의 다석은 이현필이 세운 동광원에 머물며 강의하고 예배하는 일을 즐겼다. 수도 공동체가 가난의 실험장이라 생각했던 까닭이다. 이처럼 프란치스코와 다석은 가난이 인간과 자연을 복원시켜 세상을 구원하는 최적의 백신이라 여겼다. 그럴수록 하느님의 선(가난)을 자기 무화의 방식으로 살아 낸 예수들 ‘모방’을 너머 윤리적 ‘합일’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이는 貪瞋痴(빈진치), 즉 욕심, 분노, 치정과 결별할 때 가능하다. 이들 제거하는 일이 십자가였던바 이 과정이 ‘빈탕한데 맞혀 노는’ 일로서 구원이었고 우리 모두를 예수처럼 독생자로 탄생(A Child is new born)시키는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폈듯 다석의 ‘없음’은 프란치스코가 말했던 선(bonum)과 다르지 않다. 말했듯이 선이 곧 가난이기도 했다. 이 선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물 속에 내재(육화)했으며 예수는 이들 피조물을 완성시키고자 하느님처럼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게 사셨다. 자신을 내어준 하느님처럼 가난(십자가)했던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들 인생 목적이었다. 그렇기에 내재된 선에 근거해서 인간은 누구나 예수처럼 살아야 했고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에는 교리화 된 주류 기독교의 속죄론(대속)이 자리 할 여지가 없다. 선행적 은총인 ‘그리스도 육화’란 개념 때문이다. ‘없이 계신’ 하느님이 우리 속에 바탈로서 내주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이렇듯 없음은 善(선)이자 靈(영)이었고 세상을 존속, 유지시키는 이었다. 하지만 하늘 ‘바탈’을 지닌 인간은 기성불인 자연과 달리 외물에 혹해 자신의 선한 본성을 잃고 ‘덜’없는 失性(실성)한 존재로 전락했다. 한마디로 ‘盡物性’(진물성)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럴수록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예수(십자가)가 중요하다. 우리에게 갈 길(십자가)을 제시하며 그 길을 걷도록 추동하는 까닭이다. 길을 가다가 스스로 길이 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렇듯 이들 두 사람은 대속과 모방 차원을 넘어 예수와 하나 되는 신비적, 실천적 길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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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사상과 동학, 이들은 서로 낯설까?
 이정배 승인 2022.11.0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9): 다석과 동학

평소 다석의 글을 읽으면서 큰 물음이 생겼다. 불교, 유교의 경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기독교를 풀이하고 죽음과 부활의 뜻을 펼쳤던 다석 이었지만 정작 동학, 천도교에 대한 그의 언급을 찾을 수 없었던 탓이다. 간혹 말씀이 있었으나 긍정적이기 보다 오히려 부정적 톤이 강했다. 이점은 그의 제자 함석헌에게서도 예외 없이 그대로 이어졌다. 심지어 폄하하는 내용까지 찾을 수 있다. 한글을 천문이라 말하며 그 뜻을 가르쳤으나 최초로 한글 경전을 갖고 시작된 동학을 낯설게 느낀 이유가 많이 궁금했다.

평소 필자는 동학과 다석 사상은 같은 뿌리에 연원을 두었고 동일한 줄기에서 서로 색깔만 다른 열매를 맺은 것이라 여겼다. 동학사상의 본질과 구조를 기독교적 언어로 재구성한 것을 다석 사상이라 여길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필자의 궁금증을 풀고자 이들 두 사상의 공통기원과 사상적 관계를 밝히는 논문을 썼던 적이 있다.<<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모시는 사람들 2009)>>. 2008년 세계철학자대회에서 발표했으나 논의가 많이 확산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3.1선언 백주년(2019) 이래로 동학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필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짧은 지면이지만 본고에서 이 점을 체계적으로 적시해 보겠다.

서세동점시기에 대처했던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우리 것을 지키려는 위정척사와 서구 것을 수용하려는 개화파의 시각이 그것이다. 물론 東道西器(동도서기)와 같은 틈새의 논리도 있었으나 器(물질, 서구)에 대한 道(정신, 동양)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본질상 위정척사파의 관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동학 연구자들 중심으로 온전한 제 3의 시각, 즉 ‘개벽’적 차원이 회자되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나 서구를 답습, 추종했던 것과 달리 독자적 근대를 우리 식으로 잉태했다는 발상이다. 우리에게도 기독교 서구와 다르지만 동학사상에 토대한 ‘개벽적 근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서구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으로부터 벗고자 하는 주체적 태도로서 숙고할 가치가 있다.

본 주제를 갖고 출판된 연구서적 -<<개벽의 사상사-문명전환기의 한국사상(창비 2022)>>-을 참고하면 좋겠다. 물론 논쟁할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동학을 폄하 내지 무시한 듯 보인 다석과의 비판적 대화를 위해 본 논지를 일단 수용할 것이다. 동학에 대한 다석의 부정적 편견 이면에 다음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무엇보다 그가 기독교적 세례를 받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기독교적 세계관, 개화파의 시각을 지녔다고 말 할 수 있겠다. 후일 정통기독교로부터 벗어났지만 기독교 –스승 예수론- 에 근거해서 사유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불선을 통합시킨 歸一(귀일)사상도 결국 기독교적 색체를 강하게 띄고 있다. 다석 연구자들 대다수가 기독교 신학자인 것도 이를 반증한다. 다석이 천체 물리학에 남다른 관심을 지닌 것 역시 개인적 취향을 넘어 근대적 세계관의 영향이었다.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다

영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합리적 사유 또한 중시했던 까닭이다. 하여 비합리와 초합리 간의 범주오류를 범치 않고자 애썼다. 이점에서 전쟁터에서 주문을 외라 가르치는 동학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영부를 불태워 물에 타 마시면 죽지 않는다는 설도 수용할 수 없었다. 오랜 전통을 지닌 유교, 불교와 견줄 때 자생적 종교인 동학이 미신(비합리)처럼 여겨진 탓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一理(일리)를 지닐 뿐 全理(전리)가 될 수는 없었다. 씨ᄋᆞᆯ(민)을 강조했으나 민중 종교성과 접하지 못했고 ‘다른’ 세상을 찾는 개벽의 불온성을 수용치 못한 까닭이다. 이는 다석 사상이 ‘우익’ 민족주의 사유와 연계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지하듯 해방 전후 공간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독립이란 목표는 같았으나 이르는 방법에 있어 입장을 달리했다.

민족주의가 계급적 사유에 냉담했던 반면 사회주의는 민중 모순에 둔감한 민족주의를 비판했던 것이다. 대다수 종교들이 민족주의와 결탁하여 사회주의와 맞섰고 이들 중심으로 나라가 세워졌다. 우익 민족주의가 대한민국의 건국 주체가 된 것이다. 이점에서 다석 역시 사회주의와의 연결점을 갖지 못했다. 이에 반해 동학의 경우 사회주의 경향성을 지닌 그룹과 인물이 적지 않았고- 물론 모두가 그렇지 않았으나- 폭력도 불사한 측면도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다석은 물론 제자 함석헌도 미신성 및 사회주의 성향을 띤 동학에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살아생전 다석이 관계했던 사람들 면모에서 우익민족주의에 경도된 그를 살필 수 있다.(<<다석전기 류영모와그의 시대>> 교양인 2012). 허나 그럴수록 필자는 동학과 다석 사상의 관계성을 역설할 필요를 느껴왔다.

짧은 지면에 이들 연관성을 모두 적시할 수 없지만 골격은 밝혀야겠다. 필자는 다석 사상이 동학을 경유, 최치원의 풍류사상과 만날 수 있으며 누차 언급했듯이 <<천부경>>에까지 소급한다고 생각해왔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실린 ‘玄妙之道, 包含三敎, 接化群生’(현묘지도, 포함삼교, 접화군생)이란 말이 동학의 경우 侍(시)자를 풀이한 ‘內有神靈, 外有氣化, 各知不移’(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란 개념은 물론 다석이 언급한 계소리(하느님), 예소리(예수), 제소리(성령)와 내용 및 구조적으로 비슷함을 넘어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들 사상 모두가 天地人(천지인)삼재사상의 틀거지 하에 있기에 가능한 발상이다. 즉 하늘, 땅, 사람, 곧 삼재론을 펼쳤으며 특히 사람에게서 하늘과 땅이 하나(人中天地一인중천지일)가 되었다는 <<천부경>>에 토대를 둔 사유체제란 것이다. 따라서 이들 각각은 표현에 있어 다르지만 구조 및 뜻으로는 전혀 다를 수 없다.

한국 고유한  道(도), 風流(풍류)는 본질에 있어 <<천부경>>속에 담긴 天地人삼재론과 관계있다. 유불선을 품는 모체이자 일상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힘인 풍류가 바로 삼재론이 산물이었다. 하지만 풍류의 핵심을 멋(조화)에서 봤던 유동식과 달리 필자는 生(생), 곧 살리는 일(接化群生, 접화군생)에 그 본질이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接’이란 말이 包含三敎(포함삼교)의 ‘包’와 합쳐져 후일 동학은 包接 제도를 발전시킨 것이다. 최치원과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모두 경주 崔(최)가로서 家學(가학)으로 연결된 된 것도 이런 관계성을 뒷받침한다.

동학에서 말하는 내유신령은 우리들 속에 거룩한 영이 내주한다는 것이며 외유기화는 이 영이 우주만물 속에서 활동한다는 뜻이고 각지불이는 이들 생명의 영을 누구도 옮기거나 망가트릴 수 없다는 의미를 지녔다. 다석은 이를 순수 우리글을 사용하여 ‘계’, ‘예’, ‘제’ 소리로 풀었다. 계는 인간을 하늘로 이끄는 하늘의 소리, 예는 그곳으로부터 이어 이어져 이 땅에 까지 이른 말씀 그리고 제는 그 말씀을 만나 그와 하나 된 삶(바탈태우)을 일컫는다. 이렇듯 최치원, 동학 그리고 다석 사상은 형식적으로는 삼수 변화에 토대를 두었고 내용적으로는 ‘인중천지일, 곧 사람 속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다’는 사상이며 단순한 조화(멋)가 아니라 세계와 삶 자체를 바꾸려는 뜻을 담고 있다. 짧게 이야기 했지만 이들 사상 간의 골격과 맥을 잡아 함께 이해할 때 우리는 다석을 좀 더 발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동학의 민중성, 생명성이 다석을 통해 드러나길 소망한다.

Tag#다석#동학#최제우#유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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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의 귀일(歸一)사상    이정배 승인 2022.11.25
이정배 교수의 "내가 이해하는 다석(10): 다석과 귀일사상


다석 사상의 핵심이자 결론은 귀일(歸一) 속에 있다. 귀일, 그 말은 하나에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하나’가 뭔지를 묻고 찾고자 지금껏 여러 말을 해왔다. 여기서 귀일은 통일과 많이 다르다. 상호 다른 것을 원만하게 조정하는 것이 통일이다. 이 과정에서 타협과 대충, 속임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귀일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온통 하나’가 되는 길이다. 근원으로 돌아갈 때 남북도 하나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상적으로 다양한 종교들 역시 귀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서구 종교다원주의와 다석 사상이 같을 수 없는 이유이다. 제종교가 하나인 것 이상으로 세상 전체가 정의로울 수 있다고도 확신했다. 마지막 글인 본고에서 다석이 정치적 이념과 종교들을 어떻게 하나로 엮었는지를 서술할 것이다. 필자의 책 <<귀일신학(신앙과 지성사 2021)>>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다석은 유교에서 말하는 대동정의(大同正義)를 ‘온통 하나’란 말로 풀었다. 대동은 크게 같아진다는 뜻으로 어떤 ‘-ism’으로 환원될 수 없다. 세상은 이런 큰 하나를 모르기에 편 나눠 싸울 뿐이다. 인간 속에 이런 ‘하나’로부터 온 소중한 것이 내재한다. 이 하나로부터 수백 수천가지가 비롯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구나 ‘큰 하나’를 간직한 자신 속 깊은 곳을 굳게 믿고 이를 위해 자신을 거듭 비워야 옳다. 즉 전체를 품은 하나가 내주한 곳이 바로 자신의 ‘속알’(본성)이기에 이는 비울수록 커진다. 마치 모든 것을 채우는 허공, 곧 진공모유(眞空妙有)의 우주처럼 말이다. 다석은 이를 ‘속곧이 믿븨’란 말로 표현했다. 자기 속의 하나를 깨쳐서 그를 싹 티워 지속해서 성장시키는 일을 적시한 것이다. 인중천지일로서의 인간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주지하듯 대동의 ‘大’를 둘로 나누면 사람 ‘人’자가 두 개 생긴다. ‘同’을 쪼개면 ‘司(판단)’가 되고 ‘正’은 ‘下’와 ‘止’로, ‘義’는 ‘羊’과 我‘로 파자된다. 이를 종합하면 의견 분분한 사람들이지만 옳은 판단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온 판단을 받아 양처럼 묵묵히 그 뜻을 따라야 한다는 말뜻이다. 온통 하나가 된 세상은 이렇게 이뤄진다. 이를 위한 방편이 경신중정(敬愼重正)이다. 언제든 요지부동한 마음을 갖고 ’하나‘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생각과 삶이 나뉠지라도 다른 것 속에 늘 상 같음이 있어 ’큰 하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일컬어 다석은 ’신종추원‘(愼終追遠). 큰 하나로 돌아가는 것(귀일)이라 불렀다. 온통 하나인 것이 내주했기에 차이가 있지만 서로 닮을 수 있고 그 하나 탓에 모두 옳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사, 곧 예배의 본질로 여겼다. 결국 귀일 사상은 허공(빈탕)과 마음이 하나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절대는 본래 나를 떠나서는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이 하나를 온전히 감(感)하여 지(知)하는 일이 사람이 되는 길이자 사는 이유겠다. 인간이 이런 절대(온통 하나)의 아들로 느껴질 때 누구나가 독생자가 된다. 그렇기에 다석은 예수나 나나 모두 독생자인 것을 강조했다. 다석의 멋진 말을 소개한다. “허공이 공간을 만들고 이 공간에 뜻을 명령하는 것은 시간이다”시자명야(時者名也). 절대 하나를 느낀 바로 그 순간을 일컬어 시간이라 한 것이다. 빈탕(절대 하나)의 활동이 자기 것이 되는 때(시간제단)가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바치는 예배의 자리(공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하나(빈탕)에 맞혀 살면 우리 마음을 빼앗길 여지가 없다. 신앙(믿음)은 자신 속에서 큰 하나를 찾아 그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다. 이것은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과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누고 쪼개진 세상만 알뿐 온통 하나인 그를 외려 배척한다. 그럴수록 다석은 귀일로서만 정의로운 대동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다석은 현상적으로 달라 보이는 종교들 간의 회통을 강변할 수 있었다.

동양적 기독교, 비케리그마적 기독교, 비정통적기독교라 불렸던

다석 신학은 아시아적 ’大孝기독교(론)‘라 불려도 좋겠다

부언하지만 개체는 그에 앞서 존재했던 전체에서 나왔기에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귀일 사상의 핵심이다. 유교의 추원보본(追遠報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귀일 사상은 전체와 개체의 관계를 중시했다. 전체로서의 하나는 비록 알 수없는 것이나(不測)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은 작은 것이 큰 것 속에 흡수 통합되는 러시아 인형 같은 통섭(統攝)이 아니라 마치 소금물처럼 형체를 없이하며 맛을 내는 통섭(通涉)의 방식으로 그렇다. 따라서 기독교를 변증한 종래의 서구적 논리들- 천주교의 존재유비나 개신교의 신앙유비- 과는 전혀 달랐다. 불측의 존재인 큰 하나(빈탕)가 만물 속에 천지인 셋으로 머물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온전히 품게 했던 까닭이다. 이 셋은 오로지 사람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셋의 귀일처가 바로 밑둥(바탈)인 것이다. 이런 하나를 찾아 그와 일치되려는 것이 종교들의 할 일이자 본질이다.

비록 존심/양성(유교), 돈오/점수(불교), 칭의/성화(기독교), 시천/양천(동학) 등 개념적 구별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온통 하나와 일치한 삶을 목적하기에 이들 간 소통은 항시 가능하다. 다석은 이런 삶을 일컬어 대효(大孝)라 칭했다. 그에게 예수는 제 뜻 버려 하늘 뜻 구한 대효의 존재였고 우리에게 그 길로 나설 것을 청하는 존재였다. 석가와 공자 역시 이점에서 차이가 없다. 단지 다석은 예수를 통해 대효의 길을 가려고 했을 뿐이다. 이런 연유로 다음과 같은 등식이 가능하다. 지면 여유가 없어 구조만 밝혀 보겠다. 앞서 말한 계소리/예소리/제소리를 기준하여 이에 상응하는 종교개념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예수(십자가)/성령(기독교), 견성/고행/성불(불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수로지위교(修道之謂敎,유교), 시천주(侍天主)/양천주(養天主)/체천주(體天主, 동학). 말했듯이 이들 개념들 모두는 큰 하나(빈탕)와 일치하기 위해 자기 속 깊은 곳을 곧게 믿고 자신을 비우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속곧이 믿븨‘의 삶을 명시한 것이다. 이점에서 그간 동양적 기독교, 비케리그마적 기독교, 비정통적기독교라 불렸던 다석 신학은 아시아적 ’大孝기독교(론)‘라 불려도 좋겠다. 다석의 귀일사상은 한마디로 大孝의 종교성을 견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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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0건)


없이 계시는 하느님 | 윤정현 - 교보문고 2022

없이 계시는 하느님 | 윤정현 - 교보문고

없이 계시는 하느님
윤정현 저자(글)
동연 · 2022년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종교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일반 > 기독교일반



수상내역/미디어추천
전문기관 추천도서 > 세종도서 우수학술도서 > 2022년 선정

다종교 문화 속에서 하느님 생각하기

다양한 인종이나 민족, 언어,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닌 구성원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를 다문화 사회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많이 써왔지만, 활발해진 국제적인 인적 교류와 유입으로 인해서 한국 역시 다문화 사회에 진입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사실 문화에는 종교가 포함되기 때문에 다종교 문화의 경험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종교적 다원주의 상황과 마주치는 일을 적어도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하다. 흔히 다툼이나 갈등이 야기되는 경험을 가졌을 것인데, 그것은 신불(神佛)로 표현되는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귀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책의 저자는 종교적 다원 상황을 유년 시절부터 겪기 시작했었다고 술회한다. 그런 상황은 그러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지속적이었으며, 드디어 종교적 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하느님 이해를 연구의 주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동양적 사고를 통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이 분야의 선구자 가운데 한 분인 다석 유영모 선생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20년 전의 일이었고, 더욱이 저자는 동양적으로 재개념화한 하느님 이해를 영문으로 발표해 세계에 알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책은 저자의 20년 전 논문을 번역하고 다듬어 우리말로 펴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동양적 종교문화의 언어로 하느님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를 위한 귀한 연구서가 될 것이다.

윤정현 신부님 영성 인터뷰 2 spiritual interview w fath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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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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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교에도 궁극적인 목적에 이런게 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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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프로를 리스트에 크게 이제 유영모 전쟁이 사상의 팩과 저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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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컨설팅 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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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그런 왜 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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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그 탄게 를 넘어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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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종교를 넘어서 나는 영성 주의자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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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체험한 영성 spd 출 리스트 라고 내 그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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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원에 총계 매이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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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 통에 예 넘었어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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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종교는 이제 수직적인 예 관점에서 보면 불교 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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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그리고 힘들겠다 이렇게 부분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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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와 철 제자의 관계를 따 보면 이렇게 벽이 다 있어요 그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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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특색이 부의 수직적으로 했구요 근데 이제 수평적으로 보면 제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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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베타 지위가 있고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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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포괄 죄가 있고 3월 낸 타원 죄가 있고 그 다음에 영성 주지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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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나 다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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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 주의자 정도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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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더 것을 언어는 총재의 매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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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기에 이제 유형 녹아 있는 거예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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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천의 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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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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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시자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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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예수님이 그 제도 종교는 창시자 에 진리 하고 간격 쓰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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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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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교리 신념 체계를 해서 신자들을 자기의 영역 안에 묶어 두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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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제도를 유지 관리하는 데 신경을 쓰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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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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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하고 예수님 막 완결 수 있고 풍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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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하고 관계 없을 수가 있어요 그 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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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알약이 에 신경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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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들을 묶어 룩에서 표리 체계를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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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 체험들 매트릭스 안에 놀게 만드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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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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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용무는 그를 넘어 저 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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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례 신형 책 의미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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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직접 철재 자 체험 할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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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중요시 6월을 종교나 비싼 양상이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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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빌레 들에서 인 제 7단계의 신앙 체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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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상 돼 있는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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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워하고 4만명에 돼서 에 대성 신호의 보면 불교에도 그런 신앙 체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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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 2축 낫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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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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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어느 정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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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앙 체계 라는 교리 책의 의미로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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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다 서기 이제 그렇게 돼 줘도 인데 타서 공보다 이렇게 4
3:19
주역을 탓에 길 나름 대한 주역 도덕경 을 보다 보니까 더더욱 병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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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높은 단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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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깨달음은 겉이 쓰신 7 를 기록한 책으로 이젠 다 느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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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체험의 눈으로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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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필수 안 현상 될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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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이 신비주의의 자들 하고 그 다음에 동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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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식 그 다음에 심 제 자망 그런 수행의 단계 하고
3:54
p 싼 위험해 구인회 조 시간 충실한 화훼 숨을 초절 하는 거죠
3:59
1000점 현내 탄 전 하고 마음 조주 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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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이제 심 제 흐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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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속에 방범 에서 의 에 저희 님의 3매 감액 0 이고 그 다음 자막
4:12
모든 이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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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기 자살까지 줘 걸고 완전히 인생의 평정심 해서 들어가 아예 그런
4:21
그 수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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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노장 서서 이제 그런 스타일로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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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현대 수양의 사막의 교부들 에집트 에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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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의 산 신 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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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통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사회의 사회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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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교우들이 토굴을 폭을 타고 들어가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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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것이 이제 그 파이가 꼭 퍼서 까지 생리 파인 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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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을 뚫어 산수도 잘 색 것이 카파 덕에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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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답한 부캐 요 예 그게 교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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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교부들 넘어서 인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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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토스 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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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k 이스탄불 하고
5:14
예 테살로니키 까 중간에 이렇게 쭉 반도 처럼 다온 중간 점심 수도 0
5:20
하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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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 돈 많이 있는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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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자치 공화국이 해야 아 흑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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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온갖 유형의 이제 수도 있는데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5:37
그리스 의 그 수도 온 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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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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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젠 옷이 아 n 짜르 가 돈을 많이 돼서
5:47
너 샤의 수 돈이 제일 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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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서 도체 1 그 수행자 도 만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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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분들이 이젠 오셔야 로 가서 이젠 러시아의 영성
6:00
노 셰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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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우리 스타렉스 스타렉스 의거 루가노 인양 만들 얘기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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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얘기 좀 스타일 3 근데 토를 톨스토이 너 이제 또 수도의 부 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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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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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뭐라고 이제 번 약해서 낮은 죄악을 해서 참 그 그건 노인인 스타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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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말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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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람 보기만 해도 사람이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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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뜨이게 그 시 친정은 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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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변화시키고 차신 노변 하시는 남들 변화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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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제 토스트에 도 이제 그런 노인들 보고 자신이 편에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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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으셔야 종교에 대해서 공격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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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인질 러시아의 영성 까지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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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교부들 에집트 에 나일 강 위에서 부터 추자 있었지요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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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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끗이 너 시리아 정부에 이제 그 영성 해야 하네요
7:05
정수 라고 할까 이즘 톨스토이 로 나타나요
7:11
그 이제 톨스토이가 이제 그 예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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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던가 시작이라는 다 빼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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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에 7 예수 며 오랜만에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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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요약 보험사가 있어요 폴 수도의 나름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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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를 만들고 그리고 단편 을 쓰면서 사랑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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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드리고 뭐 그 엄청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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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뭐 팍 이 주교가 를 쓰고 그렇게 해서 종교가 된 것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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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하는 있는게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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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이 돼서 맡은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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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후드 쏘 뭐 그 소설이 파는 거에
7:56
예 그리고 너 시아 경계로 떨어져도 파 문명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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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노 해방 시키고 타이 다 토지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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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캑 싸하게 따운 나그네로 살자 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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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간 여행에서 춥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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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지 다한 러시아 그 영성 영향을 받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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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상의 불이 불교 형성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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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소 돼요 다를 게 없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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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날 이들도 담고 싶으면 이제 보니까 이제 나는 아이템을 그걸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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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병 비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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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이렇게 살고 있는 거에 대해서
8:42
어떤 세상적 맥락 세서 그런 실천이
8:48
믿게 될 것인지 그런 것
8:51
시설도 아니고 않아요 크게 아이들 뭐 되어서 키 9
8:56
이러한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추워져서 하는 개인적으로
9:03
에 가장 가장 해서 그랬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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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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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뭐랄까 프로그램을 위해서 또 복지 시설을 만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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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전혀 관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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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아이들이 잡고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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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보니까 그런 생각을 하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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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주향 해요 하늘에서 주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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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하나님의 생명 이라는 생각을 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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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이제 아이를 돌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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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함부로 할 수 없다 무등산 하나님의 생명이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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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수신 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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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겠는데 in 은 이제 내가 낮기 때문에 내 끌어안 생각을 하고 마음들
10:00
해요 우리나
10:02
그는 예 그는 쫒아 검은 하늘 쏘는거 고 하나님의 생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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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의 몸을 통해 선 나왔지만 은 하나님의 생 님 생명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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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잘 섬기고 잘 양육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꼽히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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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버리는데 소유로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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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로 알고 악대 암막 때리기도 하고 혼내기 라고
10:32
그런데 이제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을 하 애들 키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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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0
하나님이 지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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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래 이제 하나님으로 느껴지는 거예요
10:47
그 다음에 내가 이제 함부로 가게 되면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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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가 정말 이어 나를 사랑하는 내 같다
10:54
니까 하나님 사랑을 예 한데 정말 이가 그 그런 질문들을 해요
11:02
그래서 이제 저는 하나님을 여러 모시고 산다 올 때 있었네요
11:07
예 대가리 약간 뭐 감정에 치우친 닫은 예
11:11
어떤 미움에서 하는 바로
11:14
니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게 질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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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거 를 내 늙게 3 그래 나의 하나님으로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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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l 하나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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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선생님을 통해서 우리의 가르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제 깨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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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통해서 오래 해야 알기도 하고 어떻게 네 아이를 통해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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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치게 더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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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아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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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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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에 대해서 금번 좋질 문학에 하는 걸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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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면 얘들이 여럿이 틈이 없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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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전에 101 되나요 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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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제 그 아이의 마음은 끝난줄 알았어 근데 이제 10살 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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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또 어쩌다 이제 9만 한다 끝날 남자가 왜 키울 수도 없고
12:21
힘들다 쉽지 않잖아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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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제는 추가했는데 똥 거야
12:31
도 지난 할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 반대로 했는데도
12:36
을 주어진 것 돼야 돼 아 어떻해요
12:39
앗 아 예
12:42
그래서 키우게 된 거예요
12:51
통계 감사합니다 예
12:59
오 예 처음 만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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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v 있다보니 2 이 앞에 선 3 이용 보다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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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10 4 쌓여 예 그 답 5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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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와 꼬아 아무 통해 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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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5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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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비슷한 그러한 소피의 온리 미쓰도요 막 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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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석 함석헌 선생님은 변신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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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수 건 서울대학교 날때가 미도 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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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면 되게 카 기도 하고 그랬었죠 아예 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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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는 이제 함 선생님은 이제 정치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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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택하고 천시 참 예 이영노 선생님 이제 종교성이 정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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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수 첨엔 약하고 제가 그걸 이제 꼰 앙 고속도로를 쭉 내려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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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 서쪽은 고부 에요 통증을 입 아니고 아 같은 동시대에 서쪽은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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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이고 임 양쪽에는 강증산 있어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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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전 복녀는 정치 참여의 강하고
14:10
강진 사는 청취 참여 것보다도 총 교수님 강의
14:14
아 갭 역사상 을 말하고 총재 잉
14:17
그런 사상을 한데 저는 이제 u 용모와 함석헌 도
14:23
그런 차원에서 생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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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도로 서의 세계 를 바꾸려고 하는 현실 참여 형이라면 장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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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에요
14:33
아 종교성이 깡 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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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괜찮은 둘일 4호 보안이 돼야 한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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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과 대성이 군요 예 그 같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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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만 4 중요하다 할 수 없다고 봐요
14:46
예 그래서 양쪽을 저는 제 보고 있어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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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설 팔트 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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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이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 측은 지신 아 그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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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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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이 무슨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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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거기에는 그 그런 분들이 는 약자들 카라 앉아 등 공감에서 친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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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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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런 것이 3 종료 성을 가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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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오는 에구 줄 굳이 라고 심 등 급히 연락 오자 좋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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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편안한 거 카나에 앉아서 남 호롱 에서 뭐 더 볼 수 있는
15:32
입시 냥 간지 쪽이 강하지 않아요 되게 예
15:35
현대종교 질 추구하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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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 청취자들은 약자들 카나다 소외된 제 친구가 되죠
15:44
공감적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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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하다보니까 현실의 참여할 수밖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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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에 들어가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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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질 그 태어나게
15:58
했는데 그 신발은 딴 현실 참여 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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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나비 저의 생각을 행동으로 낮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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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제 대개 이제 우리가 그 진리 추구 할 때 나와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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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악한 것
22:05
아름다운 부터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1, 2 윤정현 신부 2021



"그분은 제 소리를 냈던 사람입니다"
황호택 논설고문·서울시립대 초빙교수입력 2021-01-13 

===
<윤정현 신부 약력>

-1955년 출생
-1976년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고문을 받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1년 6월
-1982년 연세대 신학과 졸업
-1984년 성공회 사목신학연구원 졸업
-1986년 성공회 부제 서품 후 춘천교회 사목
-1987년 사제서품
-1990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선교훈련원 간사,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파일 폭로 지원
-1993년 청원 묵방교회 관할사제

-1995년 서강대 대학원 입학
-1996년 영국유학
-2000년 정읍교회 관할사제
-2003년 영국 버밍험 대학에서 유영모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2004년 대전주교좌성당 주임사제
-2004년 성공회대 신학전문대학 겸임교수
-2008년 22차 세계철학대회에서 “Non-Existent Existing God” 이라는 제목으로 다석 유영모의 신관(神觀) 발표.
-2010년 청주수동교회 관할사제
-2015년 신부 정년(65)을 채우지 않고 고창 반암마을로 귀촌해 수도 및 연구 활동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① 윤정현 신부 <上>





윤정현 신부는 인터뷰에서 "다석은 동양철학과 기독교 사상을 회통했던 큰 스승"이라고 말했다. [사진=유수민 인턴기자]

​한국이 낳은 위대한 종교 철학자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후반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 지구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근본주의 신앙으로 인한 전쟁과 살육이 그치지 않는다. 한국같은 다원주의 종교국가에서도 종교간 갈등이 심한 편이다. 세계의 한쪽에서는 탈(脫)종교 현상이 번지고, 다른 쪽에서는 근본주의 종교가 세계 평화를 깨트린다. 다석이 서구의 기독교 정신과 동양 전래의 유불선(儒佛仙) 사상을 회통(會通)해 풀어낸 다원주의 종교철학은 종교적 혼돈의 시대 21세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다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 다석을 연구한 학자들을 찾아 큰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인터뷰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다석 유영모의 늙은이 풀이 | 윤정현 - 교보문고 2023

다석 유영모의 늙은이 풀이 | 윤정현 - 교보문고

다석 유영모의 늙은이 풀이

새롭게 명쾌하게 우리말 옛글 <노자> 풀이
윤정현 저자(글) · 이상랑 일러스트
기역 · 2023년 05월 25일

책 소개

1987년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고 성직자로 여러 종교 사상의 맥락과 대화를 이어온 윤정현 종교사상가의 신작이다. 《도덕경》을 우리말로 풀어놓은 다석 유영모 선생의 풀이에 풀이를 더해 새롭고 명쾌하게 우리말로 다석과 노자의 생각을 풀어놓은 책이다. 청소년도 알아차릴 수 있게 펼쳐놓은 〈노자 도덕경 늙은이〉 풀이이다.

저자는 전북 고창 반암 숲에서 명상과 교육을 통해, 동서양 종교 사상의 스스럼없는 만남을 주선해오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 간사 등으로 일하면서 한국 사회 다양한 층위 문제와 직면하고 그 해결을 위해 국내 국회 활동을 이어오게 된다. 1995년 서강대 대학원에서 영성 신학, 신비주의 신학과 더불어 다석 유영모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그 사상적 만남은 2003년 8월 다석의 신론을 주제로 영국 버밍엄대학교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 데로 이어진다. 이 박사학위를 통해 저자는 다석 유영모의 사상을 최초로 해외에 소개한다.

《다석 유영모의 늙은이 풀이》는 저자가 30년 가까이 붙들어온 다석과 그의 평생 노자 읽기에 대한 새로운, 명쾌한 풀이이다. 우리말로 노자 81장을 꼼꼼하게 풀어놓은 다석의 생각과 말, 글을 요새 한국인들의 생각과 말, 글에 어울리게 다시 풀어낸 것이다. 성경, 다석 어록과 주역을 가로지르며 동서양 철학사상이 맥락을 편안하게 이해하도록 이끌어주는 책이다.
미술사학자이자 화가 이상랑 선생의 간결한 라인드로잉을 통해, 노자, 다석, 윤정현 저자의 생각의 결을 새롭게 접할 수 있다.
====
작가정보
저자(글) 윤정현
종교인 

유교 신자 아버지와 불교 신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자는 유년 시절 어머니로부터 신실한 삶과 자비심을 배웠습니다. 열 살부터는 어린 나이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 교회 기도회에 나가기 시작해 고등학생 시절까지 이어갔습니다. 근본주의 신앙의 영향으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굳게 믿어 19 82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성공회 사제가 되기 위해 사목신학연구원에 들어가 1984년 9월 마치고 이듬해 서울 베다교회 전도사로 사목생활을 시작, 1987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사목지를 춘천으로 옮겼습니다. 1990년 7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 간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 사건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선교는 물론 세계선교에도 참여하면서 교회를 넘어 인류 동포애를 가지고 제3세계 가난과 인권 문제를 살폈습니다. 1995년에는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성신학, 신비주의 신학을 연구하였고, 다석 유영모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19 9 6년 7월 영국 셀리옥의 아센션 칼리지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이수하며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장으로서의 신비주의 연구〉 논문을 제출했고, 다석의 신론을 주제로 2003년 7월 영국 버밍엄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박사학위 논문은 다석 유영모 사상을 최초로 해외에 소개한 것입니다. 2008년 7월 제22차 세계철학대회에서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는 제목으로 다석의 신론을 발표하였습니다. 정읍교회, 대전주교좌교회, 청주수동교회 관할사제로 사역하다가 2015년 귀촌하여 현재는 전북 고창 반암산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지은 책 으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접기
그때도, 지금도 그가 옳다
그때도, 지금도 그가 옳다
없이 계시는 하느님
없이 계시는 하느님


2023/09/03

알라딘: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의 자전적 철학 이야기 2022

알라딘: [전자책]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eBook]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 - 최진석의 자전적 철학 이야기 
최진석 (지은이)북루덴스2022-12-30 

책소개

평생 노장 철학을 연구해온 저자의 ‘나’와 ‘가족’ 이야기, 노자와 장자 철학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에 관한 사유를 담고 있다. 육십갑자를 한 바퀴를 돌았다는 회갑 날, 저자는 자신이 태어난 전남 신안의 작은 섬, 장병도를 방문한다. 저자는 그곳에서 이제는 할머니가 된 아버지의 초등학교 제자를 만나 기억에도 없던 어릴 적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꺼낸 적 없는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를 비롯해 큰누나와의 이별까지 인간 최진석의 진솔한 자기 고백과 거기서 비롯된 깊은 철학적 통찰을 보여준다. 평생에 걸쳐 ‘죽음’을 사유했던 저자는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에게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고 영원한 삶을 살아가자고 따뜻하지만 냉철한 어조로 권하고 있다.

저자는 스스로 품었던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내가 자기 삶의 ‘별’로서 빛나는 존재가 되는 것이자 찰나적인 삶 속에서 영원을 경험하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죽음’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나’라는 인간 존재가 한 마리 작은 물고기 곤(鯤)이 억겁의 축적을 통해 대붕(大鵬)으로 날아오르듯, 우주적 존재로서 자유롭고 영원한 비상을 꿈꾼 것이다.

저자는 세계를 ‘지적 탐구의 대상’이 아닌 철학적 사유와 실천을 통한 직접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실현해야 할 장(場)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국민소득으로는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다른 여러 면에서 중진국의 한계에 갇힌 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진단하고 우리 자신이 사회를 변화시킬 역량을 갖춰 역사의 주체로서 선도국으로 건너갈 소명을 다하자고 역설한다.
===
목차
프롤로그-내가 다시 나를 찾은 날

제1부 별 헤는 마음

별똥별의 마음
별을 노래하는 마음
산티아고의 마음
별처럼 빛나고 싶은 마음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

제2부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로

덕이 출렁출렁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로
자신의 고유한 걸음걸이로
영감이 피어나는 순간에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면서
우주를 겨드랑이에 낀 채로

제3부 신의 있는 사람

지적인 사람
성공한 사람
‘장오자’라는 사람
유유자적하고 장수를 누리는 사람
참된 사람
감동과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

제4부 건너가는 시선

야수의 시선
신뢰의 시선
자신의 생각에만 매몰되지 않는 시선
무불위(無不爲)의 시선

제5부 정해진 마음 넘는 법

정해진 마음 넘는 법
‘아큐(阿Q)’로 살지 않는 법
‘내 손’에 집중하는 법
무모해지는 법
종속을 넘는 법
곤(鯤)이 대붕(大鵬)이 되는 법

접기
책속에서
P. 40 ‘별처럼 산다’고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살면서 ‘내가 나로 빛난다’는 뜻이다. 내가 나로 빛나면 유한한 시간 속에 무한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원하는 것’이다. … 원하는 것이 없는 삶은 빛날 수 없다. 원해야 한다!
P. 55 새벽 기차에 올랐다. 익산쯤 왔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7시 조금 안 된 시각. 사람에게는 용건을 듣기 전에 미리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다. 전화벨이 울리자, 임종하는 효도의 길이 이미 지났음을 직감했다.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혼자, 자신이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셨다. “나 인자 그만 먹을란다”라고 말씀하신 후, 8일간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다. 그리고 가셨다.  접기
P. 72 눈앞의 편리함을 위해 공공의 책임감을 포기하거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경박함이 있다. 이런 경박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당하며 인간으로서 품격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덕(德)이 있는 사람이다.
P. 107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자는 그 순간에 영원을 함께 경험한다. 자기 존재의 자각,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성스러운 자리다.
P. 108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책받침 두께 정도의 얇은 틈새를 천리마가 휙 지나가는 것과 같다. 홀연할 따름이다(人生天地之間 若白駒之過隙 忽然而已,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
====
최진석 (지은이)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교장이다. 건명원(建明苑)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59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곁의 작은 섬 장병도에서 태어나 함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베이징대학교에서 당나라 초기 장자 해석을 연구한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成玄英的‘莊子疏’硏究)』(巴蜀書社, 2010)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가(道家) 철학자인 그는 원래 서양철학을 공부하려고 독일 유학을 계획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독일철학... 더보기

최근작 :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 총 33종 (모두보기)


알라딘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최진석 2015

알라딘: [전자책]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eBook]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최진석 (지은이)위즈덤하우스2015-03-20 

편집장의 선택
"노자를 오늘, 다시 불러내야만 하는 까닭"
공자와 노자는 동양문화권에서 가장 자주 호명되는 철학자다. 게다가 둘은 대척점에 놓여 비교되기 일쑤다. 보통 공자는 인위에 기반한 문화론자로, 노자는 무위에 기반한 자연론자로 해석되는데, 이런 해석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도 끝이 없다. 두 철학자가 살던 시대가 오늘과 다르기에 해석이 분분할 테고, 두 철학자가 마주하고 해결하려던 문제는 여전하기에 끊임없이 이름이 불릴 텐데, 철학자 최진석은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왜 굳이 노자를 선택했고, 그 사상을 어떻게 해석한 걸까.

최진석은 우선 동양사상의 큰 줄기를 짚어가며 노자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무언가를 하자고 주장한 게 아니라 나름의 방법을 제시하며 그것을 하자고 주장했다는 말인데, 이념보다 일상에서의 삶에 주목하고, 개인을 구조 속에 통합하는 조직보다는 자발적 개인의 자율적 통합을 강조하는 노자의 사상이 각자의 특성보다 표준화를, 구체적 실재보다 이념을 중시한 기존의 사회 시스템을 넘어설 방법이라 해석한다. 거대 국가 시스템으로 이행하던 노자 시대와 거대 국가 시스템이 한계에 이른 오늘 시대가 맞닿아, 노자를 불러내야만 했다는 말이다. 이런 시선은 당연히 사회 시스템에 그치지 않고 개인으로 연결되는데, 자신을 시스템의 일원, 즉 일반명사로 방치하지 말고, 개별자의 자발성이 발휘되는 고유명사로 살려내라는 결론에 이른다. 최진석의 적극적인 해석 속에서 비로소 노자 철학이 오늘의 철학으로, 노자가 현대 철학자로 되살아나는 듯하다.
- 인문 MD 박태근 (2015.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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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 308쪽, 약 16.4만자, 약 4.1만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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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88960868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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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단순히 노자 철학을 소개하거나 《도덕경》을 해설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노자와 《도덕경》을 화두로 삼아, 인류의 생각과 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여 인생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 개인의 삶을 바꾸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변혁하는 데 노자의 사상이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도 설명한다. 노자의 시대적 맞수 공자의 사상과 치밀하게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헤겔·다윈·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 등 근현대 서구의 사상가들과도 전방위적으로 견주며 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저자의 지적 모험은 인문학적 생각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목차
서문

1. 생각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 인간, ‘생각의 터전’을 마련하다
:: ‘나’라는 존재의 발견
:: 신과 소통하는 내공, ‘예’와 ‘덕’의 출현
:: 천명보다 ‘인간의 힘’을 믿다
:: 덕은 지식이 아니라 동력이다

2. ‘생각하는 힘’이 만든 역사
:: 주변과 중심의 역전, 그리고 ‘철학’의 탄생
:: 철기, 부의 흐름을 바꾸다
:: 하늘의 시대에서 땅의 시대로
:: 법法의 등장이 말해주는 것
:: 인간의 생각으로 닦은 길, 도道
:: 노자, 공자를 꾸짖다

3. 유와 무로 완성한 노자의 사상
:: 공자와 노자, 천명론을 극복하는 법
:: 정의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 본질을 부정하고 관계를 보다
:: 관계론의 총결, 유무상생

4. 가짜에 속지 않는 법, 관계론
:: ‘생각의 틀을 버리는 것’이 무소유다
:: 차이가 없다면 의미도 없다
:: 불교에서 말하는 관계론
:: 《주역》에서 말하는 관계론
:: 관계론 철학의 종착점, 《도덕경》

5. 왜 현대 철학자 ‘노자’인가
:: 철학이란 무엇인가
:: 세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6. 지知가 아닌 명明으로 본다는 것
:: 진실의 세계는 저곳이 아닌 이곳에
:: 해와 달을 품다

7. ‘안다’는 것은 결국 ‘모른다’는 것
::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위대함
:: 사랑과 이별은 하나다
:: 확신하지 않는 힘
:: 자기표현이 안 되는 공부는 끊어라

8. 무위, 변화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 살아 있는 나무만이 흔들린다
:: 코끼리가 살얼음 밟듯이 행동하라
:: 나는 타인의 타인일 뿐
::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 물러서면 앞서고 숨으면 빛난다

9. 불편한 법칙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 보여지는 대로 보라
:: 지배당하지 않는 힘
:: 욕망과 희망의 자발성
:: ‘선善’이라는 이름의 모순

10. ‘고유명사’로 살아간다는 것
:: 자기로부터의 혁명
:: 삶은 결국 ‘내 몸’에 있다
::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 존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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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학고창신學古創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그 길을 바로 ‘도道’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만의 능력이란 믿음의 힘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말해요. 인간은 이제 천명을 따르지 않고 도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도의 출현은 바로 중국 문명에서 최초로 터져 나온 인간의 독립선언이에요. 도의 출현 이전에 중국인이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개의 중심축은 ‘천’과 ‘덕’이었습니다. 도가 출현하고 나자 이제 중국인들은 세계와 관계하고 세계를 해석하며 또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새롭게 갖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도와 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道德’은 바로 이 도와 덕을 붙인 말이지요.---71쪽

노자의 꿈은 인간의 주관성을 완전히 탈피해 자연의 객관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가치’의 세계와 결별하고, 자연이라고 하는 ‘사실’의 세계에서 인간질서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것이죠. 자연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대로 따라서 혹은 모방해서 살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의 질서를 인간의 질서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연의 질서는 누구나 관찰할 수 있지요. 또 누구에게나 똑같은 모습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러니 객관적일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투명하고 어디에나 똑같이 적용되는 보편성을 가지게 되겠지요. 천명론을 극복할 수 있는 객관성?보편성?투명성은 이렇게 확보되었습니다.---87쪽

노자는 거대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작은 나라 시스템인 지방자치제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지방분권이나 지방자치를 하려면 하나의 표준으로 전체를 묶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분리된 곳들 각자에 맞는 다양한 기준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 멀리서 표준으로 기능하는 보편적 이념을 버리고 바로 여기에 있는 구체적인 것들의 자율성을 취하는 방식, 즉 ‘거피취차去彼取此’가 더 적합한 방식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습니다.---160쪽

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어때야 할까요? 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지知’의 방법이 아니라 ‘명明’의 방법이어야 합니다.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해와의 관계 속에서, 해를 달과의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지요. 해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은 해와 달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요. 분리된 것으로서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지’라고 합니다. 반면 해와 달을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하는 것을 ‘명’이라고 하는데, 달과 해가 존재적으로 따로따로 분리된 두 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한 벌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죠. 해와 달을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통찰입니다.---194쪽

대립면의 긴장 상태를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은 과감하지 않으며 광신狂信하지 않아요. 광신은 대개 협소한 믿음에서 옵니다. 앞서 말한 “저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자들로 하여금 과감하게 무엇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한다[使夫智者不敢爲也]”는 말은 사람을 광신하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광신하는 사람은 대개 헛똑똑이라는 말입니다. 충혈된 눈으로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 굵은 팔뚝을 휘저으며 주장하는 사람, 깃발을 들고 소리치는 사람, 머리띠를 하고 내달리는 사람, 서둘러 충고하려 덤비는 사람이 대개 헛똑똑이라는 것입니다. 헛똑똑이들이 판치는 세상은 거칠고 갈등이 심하며 선명성 경쟁이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시 말해 대립면의 경계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진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214쪽

무위란 바로 이런 이념이나 기준과 같은 관념의 구조물에 수동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세계의 변화에 따라 자발적이고 유연하게 접촉하려는 시도입니다. 그래서 ‘유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되지만, ‘무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기준의 지배도 받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세계를 ‘보여지는 대로’ 보고 반응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는 사람은 과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겠죠. 그러니 무위의 태도를 지녀야만 변화하는 진실과 접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244~245쪽  접기
P. 300 거룩함은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바로 여기가 거룩함이 등장하는 원초적 토양입니다. 이상적인 삶은 저 멀리 있는 곳에 도달하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착실한 발걸음일 뿐입니다. 저 먼 곳에 인위적으로 걸어 놓은 기준을 추종하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 자신에 집중해야 합니다.
당신은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입니까, 자기 꿈의 실현자입니까?
당신은 바람직함을 수행하며 삽니까, 바라는 걸 실행하며 삽니까?
당신은 원 오브 뎀 one of them 입니까, 유일한 자기입니까?(306) - miru2003
왜 집착을 할까요? 그 대상을 더 좋은 것 또는 `진짜`라고 가치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137) - miru2003
떠난 버스가 자신이 탈 버스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상을 짓는 행위입니다. 버스는 그냥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일 뿐인데 말이죠. 상을 짓는 행위, 어떤 것을 `자기 뜻대로` 정해버리는 행위가 불교에서 말하는 `소유` 입니다. (중략) 무소유라는 말은 재산을 많이 갖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형상을 지어서 그것을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138~139)  접기 - miru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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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최진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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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교장이다. 건명원(建明苑) 초대 원장을 지냈다.
1959년,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 곁의 작은 섬 장병도에서 태어나 함평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베이징대학교에서 당나라 초기 장자 해석을 연구한 『성현영의 ‘장자소’ 연구(成玄英的‘莊子疏’硏究)』(巴蜀書社, 2010)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가(道家) 철학자인 그는 원래 서양철학을 공부하려고 독일 유학을 계획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독일철학... 더보기
최근작 : <노자와 장자에 기대어>,<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 총 3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당신은 보편적 이념의 수행자입니까, 자기 꿈의 실현자입니까?”
“당신은 바람직함을 지키며 삽니까, 바라는 걸 이루며 삽니까?”
“당신은 원 오브 뎀one of them입니까, 유일한 자기입니까?”
-EBS <인문학 특강> 화제의 명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를 책으로 만나다!

EBS <인문학 특강>에서 최진석 교수가 청중에게 던진 이 세 가지 질문은, 지식과 경험을 쌓아가지만 더 자유롭지 못하고 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줬고, 이후 그의 강연에 더욱 열광하게 만들었다. 저자 최진석 교수는 대학과 기업, 각종 단체를 종횡무진하며 사람들의 생각을 명쾌하게 만들고 허를 찌르는 깨달음과 감동을 선사하는 동양철학의 대가이자 ‘창조 인문학의 전도사’로 통한다. 그는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통해, 2500년 전 노자의 생각법에서 ‘현대인의 생존법’을 끄집어내는 동시에 지금 우리의 삶과 사유를 뒤흔드는 통찰을 전달한다.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은 단순히 노자 철학을 소개하거나 《도덕경》을 해설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노자와 《도덕경》을 화두로 삼아, 인류의 생각과 철학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여 인생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 개인의 삶을 바꾸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변혁하는 데 노자의 사상이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도 설명한다. 노자의 시대적 맞수 공자의 사상과 치밀하게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헤겔·다윈·마르크스·프로이트·니체 등 근현대 서구의 사상가들과도 전방위적으로 견주며 노자를 현대적으로 재탄생시킨 저자의 지적 모험은 인문학적 생각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25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인생 철학의 진수!
자유와 행복에 대한 명쾌한 해법, ‘노자 인문학’으로 답하다

이 책은 노자 인문학을 토대로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대답은 잘하면서도, 질문은 잘하지 못하는 현상을 지적하며 “자기표현이 안 되는 공부는 즉시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인의식’과 관련해서는 역으로 자기가 스스로를 주인으로 생각지 않고 ‘손님’으로 여겨야 상대방과 열린 관계로 상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자살률이 세계 1위인 우리 사회에 대해,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보편적 기준이 너무 강하고 그 기준이 획일화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경고하면서 스스로를 거대한 가치 기준 아래 두고 하찮은 존재로 만들지 말고 ‘각자 사는 맛’을 가져야 함을 설파한다. 책은 우리를 일상에서 좌절하게 만드는 선택, 불안, 사랑, 소통, 행복에 관한 문제들에 명쾌한 해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며,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 길 제시
공부를 끊고 생각을 시작하라!

이 책은 세계가 본질이나 중심이 아닌 ‘관계’로 되어 있다고 본 노자 사상을 꿰뚫어봄으로써 ‘생각하는 힘’을 복원하는 길을 제시한다. 저자는 현대인이 외부로부터 강한 신념, 이념, 가치관, 지적 체계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생각하는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신념이나 가치, 이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계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념과 기준에서 벗어난 ‘나(자기)’로 돌아가야만 ‘생각하는 힘’, 즉 인문적 통찰력이 생긴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자기’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자기 자신을 일반명사 속에 함몰되도록 두지 않고, ‘고유명사’로 살려내자는 것이다. ‘고유명사’로 살아가는 것은 결국 자기로부터의 혁명에서 시작된다는 저자의 메시지는 지금-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큰 공감을 안겨줄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삶의 양식이 자기로부터 나오지 않은 삶,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 자기로부터 나오지 않은 삶은 결코 정상일 수 없습니다. 자발적이지 않은 것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거룩함은 결코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자신이 서 있는 지금, 여기가 거룩함이 등장하는 원초적 토양입니다. 이상적인 삶은 저 멀리 있는 곳에 도달하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착실한 발걸음일 뿐입니다.”
이제 독자들은 최진석 교수가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전해주는 노자의 철학과 생각법을 통해 시대를 살아가는 인문적 힘을 배양하고,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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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유위적인 생활을 하다가 사냥하는 말에서 내려온 때에 무위 철학을 맛보다  구매
Blue 2016-01-13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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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리는 무늬'란 책에 반해 최진석의 책을 구입했다. 반쯤 읽었는데, 좀 어렵고 헷갈려서 집중력이 떨어진다. 근데 덮을려고 하면 좋은 내용이 튀어 나와서 쉽게 포기하기도 애매한 책. 최진석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부터 추천한다.  구매
바다7 2015-03-25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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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에 대해서 가장 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놓은 책. 이해가 당장 안되도 뒤로 가면 갈수록 저절로 이해가 되는 책이고 마음에 꼭 들어 오는 좋은 책이라 생각됩니다. 공자,맹자,노자,장자에 대한 철학적 구분이 조금은 되는 것 같습니다.  구매
머를볼까 2015-10-23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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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사상을 처음 접하는 제경우 편안하게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느낌입니다  구매
momo 2016-07-2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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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사상에 대하여 심도 있는 이해를 도와 주고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알 수 있어요.  구매
yeshot21 2015-12-0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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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의 관계론 새창으로 보기 구매
최진석 교수가 생각하는 노자(老子) 인문학에 관한 책이다.

 

전작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이어 이번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서 노자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노자의 사상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지 정리되어 있다.

 

노자를 빌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에게 집중하라'와 '자기로 돌아가라'로 정리된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서 강조된 '오직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의 메세지가 다시 반복되는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이번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에서는  <도덕경>의 해석을 통해 보다 내용을 심화시켰고, 불교, 주역 등 다른 동양철학과 파르메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등 서양 철학자의 주장을 이용해서 노자의 메세지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며 노자 철학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전작보다 나아갔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최진석 교수의 전체적인 해석에는 동의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도덕경>37장의 해석이다. 저자는 <도덕경>이 천하를 경영하는 학문이며, 이를 '무위'를 통해서 이룰 수 있다고 주장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내용으로 <도덕경>37장을 들고 있다.(p89)

 

道常無爲而無不爲.
도상무위이무불위. (무위해라. 그러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저자는 위 부분을 "내가 말하는 대로 해봐라. 그러면, 가장 강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천하도 네 손 안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해석을 한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반드시 그렇게만 해석되지는 않을 것 같다.

 

'무위(無爲)'를 행해서 이룬다는 의미는 '무위'를 저자가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행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무위'를 하라는 수단으로 해석한 것은 아닐까.
영어에서 'nothing'이 '없다'는 상태를 의미하지 '없음'이라는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무위' 역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또한, 천하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무위'를 행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해석은 자신을 비우라는 내용과는 '목적'과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내게는 위의 말이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가다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로 더 다가온다.

 

이상의 두 가지는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리라 생각하고, 보다 상세한 저자의 생각은 더 깊게 들어간 저자의 또 다른 저서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을 통해 확인해봐야겠다.

 

이 책이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보이는 또 다른 차이점은   저자가 생각하는  '유(有)-무(無)'관계론이다. 저자는 노자의 '有無相生'의 관계를 '대립면의 상호의존' 또는 '새끼줄처럼 꼬임'으로 해석하여, 왕필의 해석을 비판한다.

 

왕필은 '도(道) -> 무(無) -> 유(有) -> 만물(萬物)' 의 생성으로 이해하는 반면, 기본적으로 저자는 '유-무' 의 관계에서 '도(道)'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마치, '유-무'의 관계를 저자는 DNA의 이중나선구조로 파악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유기체의 근원인 DNA의 구조와 만물 생성 이치인 '유(有)-무(無)'는 관련이 있을 것도 같다.


이 책은 'EBS 인문학 특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의 특성상 저자의 생각을 보다 면밀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한계점을 감안한다면, 최진석 교수의 노자 사상에 대한 관점과 현대인들에게 주는 메세지를 같이 살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 책은 유익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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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27 공감(40)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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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도를 아십니까? 새창으로 보기
 

 

 

남들보다 더 살고,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자신의 유능함을 과시하는 성향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부자와 빈자가 구분되는 세상이 되면서 부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단어’를 만든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도 귀족이 되는 부자들은 자신만의 계급의식(class consciousness)을 드러내고 싶었다. 혈연관계 중심으로 신분이 세습되는 고대 중국 사회에서 탄생한 ‘특별한 단어’가 바로 ‘군자(君子)’다. ‘군자’의 반대말은 ‘소인(小人)’이다. 소인은 육체노동을 하는 백성이다. 그러면 군자는 정신노동, 학문을 가까이하는 사람이다. 맹자(孟子)는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를 가지고 군자와 소인을 정의했다. 계급 사회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철기 시대부터 봉건적 계급의식은 공고해진다.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는 인류가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오는 최대의 격변기였다. 이 변화의 과정에서 생산력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고, 비교적 윤택하게 살 수 있게 된 소인들이 군자를 따라 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계급 갈등이 일어난다.

 

자기들만의 이익만을 위한 갈등과 분쟁이 극에 달할수록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는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이때 공자(孔子), 맹자, 한비자(韓非子) 등 제자백가(諸子百家)로 알려진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여기에 노자(老子)가 빠지면 섭섭하다. 노자는 동시대 사상가인 공자처럼 분열과 반목이 이어지는 난세의 시대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노자는 공자와 사뭇 다른 사상적 노선을 취했다. 공자는 바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인(仁), 즉 군자의 덕목을 사람들이 추구하지 못해 사회가 혼란스러워졌다고 생각했다. 반면 노자는 오히려 사람들이 오히려 인위적인 법과 도덕에 얽매여서 자연스러운 본성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노자는 공자의 주장에 반대했다.

 

노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을 잃어가는 것을 일찌감치 우려했다. 그는 인위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가치론적 판단’을 부정하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인 무위(無爲)의 경지를 지향한다. 무위의 경지는 모든 가치 판단이나 사회적 구속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의 단계이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원래 자연 그대로의 순리에 따르는 것은 인간 본연의 회복이며, 자유를 추구하는 삶이다. 유가 사상가들은 도가사상을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자들이 좋아하는 초월적인 사상’이라고 비난한다. 요즘에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가끔 길을 걷다 보면 “도를 아십니까?”라는 말로 사람들에 접근해 귀찮게 하는 수상한 사이비 종교 전도사를 만난다. 사이비 종교 전도사를 만났던 찜찜한 기억 때문인지 도(道)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은 노자의 도를 현실성이 떨어지는 관념적 개념으로 인식한다. 사실 원문 풀이가 제대로 된 《도덕경》을 읽어도 도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노자의 사상에는 시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실전 감각이 깃들어 있다. 건명원 초대 원장인 최진석 교수는 노자를 ‘시대가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아들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성세대로 상징하는 아버지에 반항한다. 노자는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인위적인 기성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했다. 노자가 태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상제(上帝)’라고 부르는 신에게 빌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 노자는 인간이 스스로 깨달아야 할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개인의 자유’라고 봤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은 ‘관계’를 지향하는 사회이다. 최진석 교수는 노자 사상의 핵심을 함축한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현대적인 단어인 ‘관계’와 함께 설명했다. 유무상생. 이 말은 ‘있음(有)’과 ‘없음(無)’이 새끼줄로 꼬여 있는 형태가 되어 서로 어우러져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유무상생의 세계는 ‘대림면의 꼬임’으로 구성되어 있고, 서로 대립하는 사물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수 있도록 수양을 권한다. ‘군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받고, 제대로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는 일반 명사다. 그러나 노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공자가 만들어낸 일반 명사를 거부했다. 그는 인간 존재 그 자체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세상을 원했다. 유가 사상과 도가 사상을 비교하는 순간,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편견이 생긴다. 편견은 우리의 눈과 정신을 가리는 인위적인 거미줄과 같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거미줄 틈 사이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게 좁은 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사회의 다양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나와 정반대인 대상을 만나면 무조건 나빠 보이고, 해롭다고 믿는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은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다. ‘생각하는 힘’이 없으니까 ‘편견’의 거미줄에 걸린 ‘자기 자신’을 구출해낼 능력도 없다. 거미줄에 빠져나오려면 남의 시선, 남의 눈치, 남의 생각 등 인위적인 요소들로 채워진 가짜 ‘나’를 비워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보다 더 혼란스러운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각하는 힘’을 키우려면 노자를 공부해야 한다. 노자의 사상은 현실적인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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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1 공감(32) 댓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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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인 친구가 있다.

가만히 있으면 충분히 대박인데,

꼭 자기 입으로 잘난 척을 하여 초를 치고, 쪽박을 깬다.

 

어젠가는 전날 밤 봤던 달이라며 사진 한장을 보내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쁜 사진'을 보내주는 그 마음씨에 충분히 감동을 했었다.

그래서 연이어 날아온 이런 메시지가,

 

어제 밤 달임

 

저 위의 별도 신기했음

 

Opsc라는 늙은 별이래

논리적으로 오류가 보인다 싶고, 이상하다 싶었지만,

일부러 사진까지 찍어 보내준 성의가 괘씸하여 '이쁘다'며 호들갑을 떨고 말려고 했었는데,

 

자기가 천체물리를 쩜 한다는 걸로도 부족해, 고등학교 선생님들보다 낫다고 하는데서 뚜껑이 열려,

감성과 필 충만한 나는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고,

평상시 옵션으로 달고 다니던 이성을 메인으로 장착해

'Opsc가 뭐의 약자냐, 누구 그러더냐, 저게 몇 시경의 사진이냐...'따위를 꼬치꼬치 캐묻는걸로 부족해,

'그냥 달이랑 별이랑 이쁘다고 하면 될 것을, 꼭 그렇게 잘난 척을 해야 속이 시원하냐'며 말을 뾰족하게 벼렸다.

 

내가 이성을 장착해 주시게 된건, '늙은 별'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는데,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 스스로 폭발하면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내뿜는데,

 그 순간이 마치 새로 태어난 밝은 별처럼 보여 ‘초신성’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어디서 주워들었다, ㅋ~.)

늙은 별이라 함은 에너지가 소진되어가는 온도가 낮은 별일텐데,

마지막 순간이 아니고선 저렇게 밝게 보일수가 없지 싶어서 였다. 



혼자 이러고 노는 날 엿보기라도 했는지,

한참 후에 'Omicron Psc'('물고기의 항성')이라며 자료를 보내줬는데,

그 자료를 보고도 내가 툴툴거리며, 의문을 쏟아내자,

이번엔 이런 사진을 보내줬다.



이 사진에선 잘렸지만,
맨 위 사진에서의 조각달과 어우러졌던 별은 '샛별'정도 될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친구를 향하여, 낭중지추(囊中之錐)라서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겠지만,

이 책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직이불사 광이불요(直而不肆 光而不耀)-'솔직하되 멋대로 하지 않는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다'가 생각났다.

이 문장은 입장을 해석하기에 따라선 나에게 적용되는 구절일 수도 있다.

 

스승이나 상사의 말에 바로 자기 뜻을 이야기하는 것이 솔직하긴 하지만 분명 성숙한 행동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주변의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솔직함 혹은 뒤끝 없음은 종종 유치함을 미화시킨 표현일 때도 있습니다. 솔직하면서 성숙한 모습을 함께 보이기가 쉽지 않아요, 영리하면서 중후하기 어려운 것처럼요.

  영리한 게 뭡니까. 예리한 것이지요. ㆍㆍㆍㆍㆍㆍ"너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ㆍㆍㆍ."

그런데 그게 상대를 위하는 게 아닌 경우가 많아요. 예리하지만 찌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보고 모른 체하는 게 아니라 기다려주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올 시기를 본다거나, 상대가 자연스럽게 깨닫기를 기다려주는 거예요.

  도가에서는 예리함 자체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예리함은 항상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될 때 나오거든요. 대개 가치관이 바른 사람들, 삶의 태도가 바른 사람들이 예리하고 솔직합니다. 그런데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 스스로 가볍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거든요.

  반면 하나의 의미에 갇히지 않고 대립면을 살피며 경계에 있는 사람들은 신중합니다. 어떤 '다름'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아요.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이 편을 가르지 않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니 성인은 방정하되 옳고 그름을 가르지 않고, 예리하되 찌르지 않고, 솔직하되 함부로 하지 않고, 빛나되 눈부시지 않다 [光而不耀]는 겁니다. 대개 빛나고 눈부시길 원하지만 빛나고 눈부시면 오래가지 못하거든요.(220~221쪽)

 

이 책의 띠지를 보면, '바람직한 삶이 아닌 바라는 삶을 살라'고 하고 있고,

노자에 일가견이 있는 강신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살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위 박스 글을 통하여 보게 되면,

가치관이 바른 사람, 즉 삶의 태도가 바른 사람들은 예리하고 솔직하다고 하는데,

예리하고 솔직하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다름을 구별해 내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걸 얘기한다.

다름을 구별하고 차이를 인정한다는 건, 편을 가르게 된다는 의미이고,

나누고 편 가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거슬러올라가서 그 근원이 되는 예리함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미인데,

언뜻 보기엔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사는 것과 상충되는 듯 보여진다.

 

일례로 효(孝)와 관계되어,

힘들어도 부모를 모셔야 하느냐 하는 류의 질문에 대하여,

강신주는 자신의 앞가림을 먼저하라는 말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나답게' 살라고 조언하는데,

최진석은 내면의 목소리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부모를 모시는 대신 그 시간에 자기 개발을 도모하게 되는게 자신이 정말 바라는 일일까,

다른 어떤 가치에 지배되어 그것을 바라고 요구하는 양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되묻고 있다.

 

노자 이전의 천명론이라 불리우던 것들의 속성이 비의성, 임의성, 주관성으로 대두된다면,

자연의 존재형식이나 운행원리를 근거로 한 노자에 이르면 객관성, 보편성, 투명성의 속성으로 옮아가는데,

강신주의 그것과 최진석의 그것은,

임의적이고 개인적이라는 점과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닮은 듯 다르다.

 

이 책이 좋은 것은 제기하는 주장이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억지스럽지 않다.

 

때로 때때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관점이나 가치관으로 그럴듯하게 생각되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로 옮아가보면, 터무니없어져 버리는 상황이 있다.

그런데, 최진석의 경우, 그 시대로 옮아가, 그 시대를 이해학고 몰입하게 만든다.

또 하나, 중국어와 우리말의 어순이 다른 경우,

중국어의 어순을 지켜 해석을 하다보니,

의미가 미묘하게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그게 맞는다 수긍이 가서 고개를 주억이게 된다.

 

개인적으로, 노자를 해설자를 바꾸어가며 제법 여러권 읽었다.

그런 내게도, 그동안의 견해와는 달라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여러 곳 있었는데,

그럴때마다 조곤조곤 자상하게 설명을 해준다.

ㆍㆍㆍㆍㆍㆍ우리가 <도덕경>을 이해하려고 할때는 누구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대개는 왕필의 시각으로 노자를 이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노자의 시대와 왕필의 시대는 시간적으로 7백 년의 차이가 나요.ㆍㆍㆍㆍㆍㆍ위나라 시대의 당면 문제와 춘추전국시대의 당면 문제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즉 7백 년의 시간차를 간과한 채 왕필의 시각만으로 노자를 보면 노자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159쪽)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깨달은 바가 있다면, 현실에에 적용할 수도 있어야 하겠는데,

그렇다면 현대에 노자의 철학을 토대로 살아간다는 건 어려울까?

만약 최진석이 노자를 '현대의 철학자'라고 명명하면서, 노자의 그것으로만 제한시켰다면 이렇게 좋다고 설레발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데, 어떤 단계에 도달하는데 특정한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표현함으로써,

훨씬 자유롭고 넉넉하다.

 

공자를 통하기도 하고 노자를 통하기도 하고,

(또 공부를 통해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 공부를 통해서만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세상 경험 속에서, 일을 통해서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들을 보아왔다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 중에 아주 맘에 들었던 건, 유가와 도가의 차이 부분이었는데,

유가는 채우고 채우고 채워서 그 높이를 우주의 높이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도가는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우주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182쪽)이라고 부분은 너무 멋졌다.

그런데, 여기에 내 개인적인 생각을 첨언하자면,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받아들이는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문이란 들고 나는 일이 교차하는 지점'이라는 논리를 적용하여,

비우고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내주어 우주로 흡수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노자가 얘기하는 건 공감과 소통인데,

나를 비우고 우주(=자연=타인)을 받아내는 것이나,

나를 내주어 우주(=자연=타인)로 흡수되는 것도,

다시말해, 우주에로 번지고 스며 물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비워낸다는 것은 나를 없애고 지우는 것이지만,

나를 내준다는 것은, 번지고 스며 물든다는 것은,

나의 것과 우주의 것이 만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시 말해, 나의 본성을 포기하지 않고,

나라는 고유명사를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는 동시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 책은 두껍지는 않았지만, 동서양을 종횡으로 넘나들며 나를 행복하고 황홀하게 해주었다.

두고두고 관점과 시점을 바꾸어 읽고 생각하고 해야겠다.

관점과 시점을 제한시키거나 조건을 준다는 것은 생각의 자유를 구속한다는 얘기이고,

이건 편견과 선입견, 내지는 독선에 빠질 수 있는 우를 범할 수 있으니 경계하여야 겠다.

 

 

참 좋은 책인데,

*익이 우임금의 아들인 계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지산 산[箕山]으로 숨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해요.(26쪽 밑에서 둘째줄)

*당시 제후들이 기산으로 피한 익을 따르지 않고,(27쪽 4줄)

 

단어를 통일해줄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얼마 떨어지지 않아 지산, 기산 다르게 쓰이다 보니, 다른 지명인줄 착각할 우려가 있다.

 

290쪽의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하는 노자의 도덕경은 제3장이 아니고, 제13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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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3-25 공감(29) 댓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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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무상생‘!! 노자 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새창으로 보기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은 다양한 각도로 재해석되어 왔다. <도덕경>을 병법서로 보는 관점과 제왕의 통치술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책으로 보는 시점에서 소개된 서적을 보아왔던 나에게 최진석 교수의 관점은 참으로 신선했다. 하나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틀에서 벗어난 사실들은 무시해버린다. 왕필본 <도덕경>과 하상 공본<도덕경>을 읽고 있는 나는 두 주석서를 참고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도덕경> 속의 노자의 말을 이해하려 부단히도 노력했다.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최진석 교수의 책은 내가 <도덕경>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본 새로운 <도덕경>의 세상은 무엇일까?


 

1. 최진석만의 탁월한 해석

 

 논어 자로 편에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 보통은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나 소인과 같아지지는 않고, 소인은 같아지기를 바라지만,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라고 풀이한다. 그러나 최진석은 해석이 달랐다. 당시의 신분제 사회라는 점에 유념해서, 군자는 지배계급으로서, 군자와 소인 계급이 다르며, 따라서 차이를 인정하고 각각의 사명을 수행하여 전체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소인은 피지배계급으로서 계급적 구분을 부정하고 군자와 차이 없이 같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라고 말한다. 기존의 현대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보통의 학자들과는 달리 혁명적으로 해석한 최진석의 해석은 나의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패는듯했다. 공자는 기존 질서 유지를 두둔하는 보수적인 학자로 볼 수도 있는 해석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해석으로 <도덕경>을 <논어>와 대비시키며 최진석은 자신만의 <도덕경> 읽기를 한다.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를 최진석은 어떻게 해석할까? '이름 없음은 천지의 시작이요,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이다.'라는 보통의 해석을 최진석은 자신만의 '무'와 '유'의 개념정의로 혁신적 해석을 해낸다. '무'는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몸 안의 공간처럼 비어있으되 기능하는 영역을 '무'라  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 정의한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보다는 '비어있음'으로 '무'를 해석하는 것이다. 비어있는 곳이 우리가 기능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도시의 비어있는 공원이 도시의 삭막함에서 벗어나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주듯이……. '있음'과 '없음'의 극단적인 개념으로 도덕경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던 도덕경이, 최진석의 새로운 관점을 통해서 바라보니, 너무도 쉽게 이해되었다.

 

2. <도덕경>의 핵심 '유무상생'

 <도덕경>의 핵심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 非常名)'을 핵심이라고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최진석은 <도덕경>의 핵심은 대립 면의 공존이라 말한다. 이를 도덕경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 할 수 있다. 유와 무는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새끼줄이 서로 꼬여서 하나의 새끼줄이 되듯이, 유는 무와 관계를 맺고 무는 유와 관계를 맺는다. '노자의 철학 체계 안에서 유와 무는 존재적으로 선후나 차등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층 차에서 공존한다.'는 최진석의 해석은 그가 바라보는 <도덕경>의 핵심이다.

 이러한 관계론적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새로운 관점이 눈에 들어온다. '밝을 명(明 )'에 대한 최진석의 해석을 살펴보자. 그는 '해를 해로만 또는 달을 달로만 아는 것은 '지(智 )'이며, '해와 달을 한 세트로 아는 것'은 '명(明)'이라 말한다. 노자 철학을 관계론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최진석의 해석을 확장하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많은 동양철학의 의문들이 풀린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이 말은 삶과 죽음을 같이 바라보아야, 둘 사이를 관계론적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삶과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철학적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랑과 이별'도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사랑과 이별'이 하나라면, '사랑과 미움'도 하나이다. 사랑하기에 미움도 싹튼다. 연애할 때는 그렇게 사랑하는 연인이 결혼해서 싸우는 것도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무관 심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수많은 관계의 연속이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개념의 연속에서 벗어나서 때로는 대립하는 세차원의 관계 속에서 인생이 펼쳐지기도 한다.


3.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

 '馳騁?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영인심발광)'이라는 말은 '말달리며 사냥하는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한다.'라고 해석된다. 나는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노자는 사냥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말했을까? 사냥은 고대의 군사훈련 성격도 갖고 있기에 군주는 사냥을 많이 다녔다. 그런데 왜? 사람을 미치게 할까? 최진석은 '바람직한 것을 모두 똑같이 수행하는 사회보다 바람직한 것을 없애고 각자 바라는 바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더 강하다.'라고 해석한다. 사냥감을 쫓는 사람들처럼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서 맹목적으로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미쳐 나갔는가? 충남의 00 고등학교에서 모의고사 1% 안에 드는 학생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가 근접한 학생이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져 고민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모두가 같은 목표,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를 향해 달리면서 많은 학생이 미쳐나가고 있다. 자신이 정한 목표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정해놓은 목표의 위험성을 일찍이 노자는 지적하고 있었다. 1등이 아니면 모두가 패배자라고 치부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노자의 구절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고귀이신위천하 약가기천하 애이신위천하 약가탁천하)'라는 말은 '그래서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언뜻 생각하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최진석은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 만드는 국가라면 이미 근본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진단한다.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최진석의 주장은 노자가 말하는 건강한 사회를 이해하게 해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광풍 속에서 수많은 젊은이를 '일본제국'을 위해서 '천황'을 위해서 바치라고 강요했다. 승산 없는 전쟁에, 가치 없는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가 죽었다. 그 죽음의 행렬에 조선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자가 어찌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개인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국가가 국민을 안전하게 보살필 수 없다. 노자는 이미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과연 우리는 자신의 몸을 천하만큼 사랑하는 자에게 이 나라의 운영을 맡기고 있는가? 저 국회에 있는 국회의원 중에서 과연 얼마만큼이 그러할까?

 

 최진석을 통한 <도덕경> 읽기는 나에게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었다.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통해서, 하상공주에 근거한 노자 이해를 주로 해왔다면, 최진석을 통해서 대립 면의 관계성을 강조한 '(有無相生)'이라는 문구를 통한 노자 이해는 <도덕경> 이해를 한 차원 높여주었다. 그리고 '보통명사'로 살기보다는 '고유명사'로 살라는 말을 되뇌며, 학생들에게 남이 정해 놓은 목표를 살기보다는 자신이 정한 자신의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교육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별 자의 독립성보다는 관계성에 주목하고, 나의 삶을 살자! 오늘도 나는 <도덕경> 읽기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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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8-09-01 공감(1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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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동양 철학의 두 주류라고 하면 공자와 노자를 들 수 있단다. 보통 공자는 현실 정치에 꾸준히 참여하려고 했고, 노자는 현실을 떠나 은둔의 생활을 한 사람으로 인식들 하고 있어. 아빠도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가끔씩 교양 서적을 통해서 읽고, 지나면 또 까먹고 그러니까 자세히는 몰라. 그래도 노자의 도덕경 첫 번째 구절은 알고 있단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그 문구가 너무 멋지게 들렸어.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 그리고 노자는 현실을 떠나 무위(無爲), 즉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강조했다고 알고 있었어. 스트레스와 집착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는 아빠로서는 그의 그런 무위 사상이 늘 동경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단다. 더욱이 ‘무위’ 다음에 ‘자연’이라는 말까지 붙여 무위자연이라는 부르기도 하잖니. 자연 속에 묻혀 아무것도 안하고 자연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생각만 해도 여유롭고 평온한 삶이 그려지잖니..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좀더 노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 책을 들었단다.

이 책은 이미 EBS에서 지은이 최준석이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단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강연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어. 아빠는 보지는 못했어. 그래도 강연을 책으로 옮겼으니, 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선택했단다. 강연이 그리 긴 강연은 아니었기 때문에, 책도 노자 전체에 대해 주석을 달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대략적인 내용과 강연을 듣는 사람들이 관심이 있을 내용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사상에 대해 그 전보다는 더 알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았어. 예전에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라는 책을 통해 노자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김용옥이 해석한 것과는 또 다른 해석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김용옥의 책을 읽은 지 오래 되어서 아빠 머리 속에서는 느낌만이 남아 있지만 말이야.

 

 1.

인간은 왜 다른 동물들에 비해 두뇌가 발달했을까? 이것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해주었단다. 불에 익힌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동물성 단백질 섭취가 쉬워졌고, 그로 인해 뇌 발달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생각하는 동물이 되었다는 거야. 고대 중국에서도 사람들이 씨족을 이루면서 살다가 초기 국가 형태에 이르게 되었어. 당시 사람들은 나라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하늘이 점지해주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가 생겼는데, 이것은 하늘의 뜻을 어긴 것이 되었잖아. 그래서 그들은 “덕(德)”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주나라의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었단다. 덕이 있으면 하늘의 뜻인 천명이 오고, 덕을 잃으면 천명도 떠날 수 있다고 했어. 그렇게 해서 덕을 잃은 은나라는 천명이 떠나고, 덕이 있는 주나라에 천명이 왔다는 것이지. 그러다가 철기 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되었단다. 철기를 가진 자들이 부를 쌓게 되고, 그 전에 소인으로 취급된 사람들이 세력을 키워가게 되었어. 그러면서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게 되었지.

그 때가 춘추전국시대였단다. 그러면서 점점 이 세계의 주인이 하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단다. 이때 공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하늘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했어. 그리고 그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인(仁)’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 인(仁)이란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인(仁)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 “예(禮)”라고 했어. 그러면서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로 설명했지. 이것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인간은 인간이 지켜야 할 보편적 기준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예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지. 바로 이 점을 노자가 비판했단다.

노자 또한 인간의 존재를 하늘이 아닌 인간 자체에서 찾으려고 했어. 하지만, 공자와 달리 인간의 보편적 기준을 인정하지는 않았어.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길이 있었다고 생각한 거야. 노자는 공자의 보편적 기준을 따르려다 보면 갈등을 초래한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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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이런 연유로 공자와 다른 방식으로 객관성, 투명성, 보편성이 확보된 질서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공자는 천명론을 극복하고자 자신만의 도를 건립하면서 인간 세계, 인간의 내면성으로부터 인사이트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주관성이라는 틀을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노자는 ‘인간’을 완전히 벗어납니다. 우리 밖에 펼쳐진 ‘자연’에서 인사이트를 구하지요. 자연에는 주관성이나 가치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데, 노자는 이를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자연의 질서에는 더 친하게 여기고 덜 친하게 여기는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어떤 주관적 가치도 개입시키지 않고 아주 평등하게 대할 수밖에 없지요. 이런 의미에서 자연 질서는 매우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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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하자면, 공자와 노자는 모두 신의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로 관점을 바꾸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런 점에서 공자와 노자 모두 도(道)를 추구했단다. 그 도(道)란 것은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길을 이야기하는 것이거든… 그런데 공자와 노자의 차이점은… 공자는 인간의 내면성을 근거로 한 인간의 길을 이야기하였고, 노자는 자연의 존재 형식과 운행 원리로 한 인간의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란다. 자, 그럼 이제 노자가 이야기하는 도와 무위에 대해서 이야기해줄게.

 

 2.

일단, 도(道)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야. 도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라고 할 수 있대. 여기서 무(無)는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비어있다는 의미라는구나. 우리가 지금은 무(無)를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노자가 살던 시절에는 비어있다는 뜻으로 쓰였대. 있음과 비어있음이 서로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 노자로 대표되는 도교는 관계론에 주목을 했대. 도교가 공자의 유학과 가장 큰 차이점 중을 보이는 하나가 바로 이 관계론이란다. 유학은 가치론을 중시했기 때문에 ‘좋다’와 ‘나쁘다’의 주관적 판단이 있었고, 그를 위해서는 구분을 해야 했고 이것은 배제와 억압을 불러왔다는 거야. 이에 반해 도교는 관계론을 중시했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불교, 주역, 포스트모더니즘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대.

사실 불교도 관계를 중요시 했거든. 불교는 이 세계를 고통의 바다라고 해서 여덟 가지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을 넘어서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무소유를 이야기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뜻을 개입하지 않는 자세라고 보면 돼. 소유라는 것은 바로 자기 생각의 틀을 가지는 것이거든. 그렇게 자기 생각의 틀과 현실과 맞지 않아 집착하게 되고 고통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깨달음이 되는 것이고… 불교에서 또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인연’이잖아… 그게 곧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지…

..

도교에서는 도를 행하는 이유는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라고 했어. 그렇게 덜어내고 덜어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르는 것이야. 무위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야. 무위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자세라고 할 수 있어. 세상 사람들이 정의 내린 신념, 이념, 가치관 등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 돼서 자신만의 의식으로 세계와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이지. 좀 말이 어려운 것 같지만, 세상을 볼 때 기준을 갖지 말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자, 그러면 이제 무위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러면 무위를 한번 실천해보자꾸나. 왜, 노자는 이렇게 무위를 주장했을까? 그것은 더 높은 경지를 위해서였던 거야. 무위를 지나 무불위(無不爲)에 이르기 때문이래. 무불위가 뭐냐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뜻이란다. 그러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자가 현실을 초탈하는 철학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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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而無不爲

무위를 실천해봐라, 그러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을 말할 때, 노자의 시선은 절대 ‘무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로 ‘무위’를 지나 ‘무불위’에 가서야 멈추지요. 노자의 시선이 닿고 싶어 하는 곳은 바로 ‘무불위’의 지경입니다. 노자가 무위를 강조한 이유는 무불위의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현실을 초탈하려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현실적 성취를 매우 중시했던 철학자입니다. 세상 속으로 아주 깊숙이 들어간 철학자였죠.

(25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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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면 노자의 가르침을 보고 나서, 세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냥 책으로만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노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꾸나.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 그런데 그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하는 것이 아니야. 자꾸 내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떨까? 그 기준과 변화된 세상과 차이 때문에 문제, 그래, 스트레스가 생길 거야.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내 마음 속의 기준 같은 것은 갖다 버리라는 거지. 바로 그것이 무위의 태도를 갖게 되는 거야. 그럼, 위해서 말한 것처럼 안 되는 일이 없게 된다는 거야. 이것은 비단 세상과 나의 관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란다. 아빠와 너희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야. 아빠가 어떤 기준을 가지고 너희들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것이지. 아빠는 아빠만의 길, 너희들에게는 너희들만의 길이 있다는 것이 바로 노자의 사상인 거야. 그러면서 지은이는 자식에게 세 가지만 해주라고 하는데, 아빠가 생각하기에 그 세가지는 너무 당연한 것들이더구나. 믿어라, 사랑하라,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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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자식을 키우면서 겪은 여러 시행착오들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식에게는 세 가지만 해주면 될 것 같아요. 첫째,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예뻐 보이질 않습니다. 자식의 꿈과 희망을 존중하고 믿어야 합니다. 둘째, 자식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닌 자식의 성공이나 출세를 사랑해선 안 됩니다. 성적이 올라가면 더 예뻐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덜 예뻐진다면 아마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가지고 온 성적표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셋째, 기다려줘야 합니다. 간혹 실패하더라도 기다려줘야 해요. 실패를 통하지 않고는 배울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눈앞의 작은 실패들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학습장을 잃게 됩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다리기. 다만 진심으로. 여기서 가정의 행복이 나오고 창조적 성휘가 이루어집니다. (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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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아빠가 맨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은 노자의 핵심 사상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했다고 했잖아. 노자의 도덕경 전체에 대한 좀 더 심도 있는 책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동양 철학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고 싶은데, 쉽지는 않구나. 나중에 너희들이 크고 나서 너희들이 동양 철학에 관심이 생기게 된다면.. (만일 말이야.) 그럼 같이 공부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다가도… 아빠가 아빠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 노자의 사상에 어긋나는 것인데 말이야 하는 생각까지 이어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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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17-03-01 공감(1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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