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8

종교와 영성 :길희성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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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영성 길희성 원장의 종교 에세이

http://blog.naver.com/simdohaksa/221118922421


I. 종교, 영성, 현대


최근 우리 사회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종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종교에 대한 관심과 영성에 대한 관심은 반비례 할지도 모른다. 이는 현대 한국 종교계를 보면 곧 드러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종교가 번성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인구조사를 해 봐도 스스로를 이런 저런 종교 교단이나 단체에 속한 신자로 간주하는 사람이 족히 전 인구의 반에 육박하고 있으며, 그 중에 상당수가 활발한 신앙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적극적인 신자들이다. 이는 ‘탈종교’ 시대를 살고 있는 서구 국가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며, 아마도 이슬람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종교가 융성하고 있는 나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한국인들이 그만큼 종교적 영성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무교나 각종 민속신앙은 물론이고 가장 많은 신자들을 보유하고 있는 불교나 그리스도교의 경우, 신자들 대다수가 기복신앙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세속적 복락을 추구하는 기복신앙은 종교의 범주에는 속할지언정 결코 영성(spirituality)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통해 인간의 각종 세속적 욕망을 채우려는 기복신앙을 우리는 영성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종교와 영성의 괴리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이유로 서구 종교계 내지 현대 사회 일반의 특징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서구 사회는 이른바 철저한 세속화(secularization) 과정을 통해 탈그리스도교, 탈종교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의 문화적 전통 내지 관습, 혹은 집단적 정체성의 힘으로서는 종교가 여전히 건재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규제하는 힘을 상실한 지 오래고 종교의 제도적 권위 또한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낮은 교회 출석률은 이를 입증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그밖에도 피임, 유산, 동성애 등 가족윤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가톨릭 전통이 매우 강한 사회들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화된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의 퇴조가 반드시 현대 서구인들의 영적 관심의 부재나 퇴조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핵이자 존재 이유라고도 할 수 있는 영성이 더 이상 그리스도교라는 제도와 전통의 울타리 내에서 추구되고 있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서구 사회에서 불교를 위시한 동양 종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이른바 뉴 에이지 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명상 운동들이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세속화가 반드시 세속주의(secularism)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초월적 자유를 향한 인간의 영적 갈망은 형태와 채널을 달리 하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종교와 영성은 반드시 같이 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 신자들이 영성에 관심을 갖는 것도 아니고 영성에 관심이 있다 해서 반드시 어느 특정 종교에 소속된 신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이 영성이라는 현상이 지닌 한 매혹적 측면이며, 어쩌면 이것이 영성의 본질을 드러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성은 제도권 종교 내에 머물기도 하고 초월하기도 하며 종교와 비 종교의 경계선을 허무는가 하면 종교 간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매우 유연하고 무정형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영성은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의 의식 내지 경험이다.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인 한 영성 자체도 초월적 성격을 띠며, 초월적 실재가 보편적 실재이며 그것과의 만남이 인간의 보편적 현상인 한 영성도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다. 이것은 물론 영성이 특정한 역사적, 사회문화적 맥락 없이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순수 초월적 현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영성의 본질이 어떠하든, 영성의 촉발이나 발현은 언제나 일정한 문화적, 종교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다. 영성의 실현은 맥락 의존적이고 문화 상대적이며 항시 특수한 역사적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특히 종교 전통들 ― 신화, 교리, 신학, 신앙 등 ― 은 영성을 배양하는 토양과도 같다. 사실 인류 역사를 통해 영성은 주로 특정 종교 전통 내에서 함양되고 고취되어 왔다. 비록 영성이 초월적, 보편적 실재와의 만남이기에 궁극적으로 특정 종교의 울타리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해도, 일반적으로는 종교 의존적이어 왔다. 특히 영성은 항시 일정한 신관 혹은 신학, 형이상학 내지 존재론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영성이 신학 내지 형이상학을 전제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신학이 곧 영성은 아니며, 신학자가 반드시 영성가인 것도 아니다. 영성은 영적 실재, 초월적 실재, 혹은 신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고 경험이다. 영성은 또한 신앙(faith)과도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신앙과 영성은 초월 지향적이라는 면에서는 일치하지만, 영성에는 신앙적 영성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신앙은 인간과 초월적 실재와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 한다. 신앙은 믿는 자와 믿는 대상, 신앙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하지만, 영성의 여러 형태들 가운데는 이러한 관계적 영성을 넘어서서 초월적 실재나 절대적 실재와 완전히 하나 됨을 추구하는 영성도 있다. 신앙의 영성도 있지만 깨침의 영성도 있고 지혜와 관조의 영성도 있다. 대체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과 같은 유일신 종교는 전자, 즉 신앙적 영성을 주로 하는 반면, 동양 종교들의 영성은 주로 깨침과 관조의 영성이 주종을 이룬다.



과거에는 영성이 주로 특정 종교 전통 내에서 함양되어 왔지만, 현대 영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탈종교적, 초종교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데에 있다. 현대 세계에서는 종교 전통들이 신앙과 영성, 즉 초월적 실재와의 만남을 촉발하고 배양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가 되는 역리 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목적이 영성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종교 전통과 제도들이 현대인의 영적 관심에도 불구하고 영성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난해한 교리나 개념들, 낡은 신관이나 신학 등은 곧 거기에 근거했던 영성의 위기로 이어진다. 현대 영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많은 영성 운동들이 특정 종교의 제약을 받지 않고 혼합적 성격 내지 무정형적 성격을 띤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눈에는 분명히 어떤 특정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그것과 무관하다고 자처하거나 심지어는 스스로를 ‘종교’가 아니라고까지 주장하는 영성 운동들도 나타나고 있다. 가령 인도의 힌두교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각종 명상 운동들이나 우리나라에서 크게 번성한 단학이나 한마음수련 운동 같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단적으로 말해 전통적인 제도 종교가 현대인에게 관심을 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감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영성이 문화제약적이고 종교 의존적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종교는 물론이요 종교와 비종교, 혹은 종교 간의 차이마저 초월하는 보편성을 띨 수 있는 이유는 영성이 지향하고 있는 실재 자체가 초월적이기 때문일 뿐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고 있는 인간 존재 자체의 어떤 보편적 특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인간은 영적 존재(spiritual being)라는 말이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의 토대가 되는 물적 조건을 확보하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고 사랑하며 지성을 사용하여 자연의 상태를 벗어나 문명을 구축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이 모든 활동 이상의 초월적 관심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다. 인간은 자신을 제약하고 있는 물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초월을 향한 갈망을 지닌 존재로서, 가시적 세계를 넘어서거나 그 근저에 있는 초월적 실재와 하나가 되려는 영적 욕구를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영성가들은 하나 같이 인간 존재 안에는 바로 이런 영적 욕구를 산출하고 있는 어떤 본성적 근거가 존재한다고 증언한다. 인간은 세상과 세간에 속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거기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초세간적 관심을 지닌 존재이며, 유한한 사물들을 넘어서거나 포괄하는 무한한 실재, 변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실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갈망을 지닌 존재로서, 초월적 실재를 향해 열린 존재라는 것이다.



이 초월적 실재의 성격은 종교 전통들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지만, 반드시 비물질적인 혹은 초자연적인(supernatural) 실재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이해하듯이 초자연적 신일 수도 있고 자연의 이법 혹은 자연 안에 내재하는 어떤 신비한 힘일 수도 있다. 영성이 추구하는 초월적 실재는 또한 물질이나 육체를 무시한, 혹은 사회와 역사를 외면하는 이른바 순수 ‘영적’ 혹은 ‘정신적’ 세계일 필요도 없다. 다만 초월적 실재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구가 물질적 혹은 생물학적 욕구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영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물론 회의적 시각은 이러한 영적 욕구마저도 또 하나의 변형된 생존의 욕구, 불로장생이나 영생불멸을 원하는 인간의 자연적 욕구의 연장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자기 이해에 명백히 반하는 일이며, 영성의 세계를 접해 보지 못한 세속적 지성의 시각일 뿐이다. 영성은 곧 초월적 실재와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초월성과 직결되는 현상이다. 영성은 오히려 때로는 보이는 현상 세계를 허망하다 하고 초월적 실재를 참다운 실재로 간주하기도 하며, 세속적 자아를 거짓 자아로 간주하고 영적 자아 혹은 형이상학적 자아를 참 자아(眞我)라 부르기도 한다.



인간이 초월적 존재이며 영적 존재라는 사실은 물질적 욕구가 어느 정도 해소된 사람들, 특히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서도 그러한 욕구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말해 주고 있다. 탈종교, 탈형이상학 시대를 살며 고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그것만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영적 욕구가 엄연히 존재한다. 현대인은 한 편으로는 물질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노심초사 밤낮으로 몸과 마음을 괴롭히며 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리 해도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이 존재한다. 욕망을 없이 하고 욕망의 늪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역설적 욕망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출세간적 욕구이며 불도를 구하는 불심 혹은 불성의 발로이다. 에릭 프롬은 그것을 <소유>보다는 <존재> 지향적 욕구라고 불렀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와 쾌락과 사치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은 어쩌면 최고의 쾌락은 아무런 쾌락이 필요 없는 상태, 혹은 모든 쾌락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쾌락주의의 역설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기원』이라는 그의 말년의 저서에서, 현대 산업문명이 신비주의적 영성과 금욕적 영성에 바탕을 둔 소박성(simplicity)으로 회귀할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다. 대중적 향락주의가 아니라 역설적 향락주의, 사물의 정복이 아니라 욕망의 정복을 힘으로 여기는 중세적인 금욕적 영성이 새롭게 부상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영성은 대체로 세속적 욕구의 성취보다는 포기, 소유보다는 존재, 일보다는 유희, 차이보다는 통합, 대립과 갈등보다는 화해와 일치, 투쟁보다는 평화, 역사보다는 자연에 더 친화적이며, 이러한 특성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발달된 자아의식 내지 개체 의식과 소외감을 넘어서 자신보다 더 크고 깊은 어떤 무한한 실재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한다. 영성은 탈종교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제 3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에 흥미를 잃었으나 그렇다고 세속에 함몰된 삶에 만족하지도 못하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영성은 하나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모든 과감한 정치적 실험과 사회변혁이 한계점에 이른 듯 ‘역사의 종언‘과 탈 이데올로기 시대를 맞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답답한 현실을 탈피하고자 하는 초월의 갈망은 거부할 수 없는 내면의 소리로 다가오고 있다. 물질이 풍부하면 할수록 물질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 감각적 쾌락이 짙으면 짙을수록 감각적 쾌락 너머의 행복을 갈망하는 영성의 요구 또한 더욱 절실해진다.



그렇다고 영성의 추구가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는 현실 세계와 역사를 외면하는 도피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니다. 초역사적인 형이상학적 영성의 추구가 단순한 현실 도피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영성은 동시에 존재의 차원에서 현실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긍정하는 영적 토대를 마련해 준다. 영성적 세계 긍정은 세계에 대한 단순한 즉자적 긍정이 아니라 강한 부정을 수반한 긍정이며, 영성이 추구하는 삶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는 사즉생(死卽生)의 영성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성가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초월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의 초월, 혹은 현실 속으로의 초월을 추구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현대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진단은 크게 보아 현대 한국 사회에도 타당하다고 본다. 한국 사회는 이제 5,60년대의 처절했던 가난과 7,80 년대의 치열했던 민주화 투쟁의 시기를 거쳐 이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둘 다 이룩한 세계 몇 안 되는 나라들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아직도 사회 각 방면에 걸쳐 거칠고 미숙한 면이 많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으며, 무엇보다도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안고 있지만, 현대 한국인들의 정신적 주소도 이제 서구 선진 사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차이가 있다면, 서구와는 달리 끈끈한 가족의 유대와 유교적 인간관계가 여전히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며, 특히 제도화된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서구사회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인간관계도 점점 더 원자화될 것이며 제도화된 종교들도 사양길에 접어들 것이라고 나는 본다. 특히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기복신앙의 한계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조잡한 물질주의와 배금주의, 향락주의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정한 영성에 대한 갈망도 더욱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 사회의 영성은 어떤 양태를 띠게 될 것이며 그 영성의 자양분은 어디서부터 올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한국보다 한 발 앞서 역사의 발전을 경험한 서양의 영성적 상황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이에 준하여 한국 사회의 영성적 미래를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교 신자가 인구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그리스도교가 번성하고 있는 사회라는 점에서,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의 전통과 그 성격에 대한 고찰은 우리에게도 직접적인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 글에서 서구적 영성의 뿌리와 성격, 그리고 그것이 현대세계에서 처한 문제점들을 고찰할 후, 동양적 영성이 과연 현대인들에게 대안이 될 수 있을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오늘의 한국 종교계에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어느 것 하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방대한 논의를 요하지만, 거시적 안목에서 나의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II. 서양의 영성 전통


서구 영성의 핵심은 성서적 신앙에 뿌리를 둔 영성이다. 이 성서적 영성은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영성과 만나면서 적어도 중세 시대까지 서구의 영성 전통을 지배해 왔으며, 종교개혁이나 근ㆍ현대 신학의 다양한 새로운 흐름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근본 패러다임은 지속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리스 철학의 지배적 영향 하에 형성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영성 또한 그리스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교부시대의 그리스도교 신학과 영성에 끼친 플라톤 철학 내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그리고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에 끼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은 지대했다. 그 후 근대 과학의 지배적 영향 아래 전개된 근대 서구 철학은 그리스도교 영성을 뒷받침해 줄 만한 사상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 영성은 고전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신교의 성서 중심 신학, 인간의 종교적 경험이나 윤리적 관심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을 정초하려는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 인간 실존의 자각과 분석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석하려는 실존주의 신학, 하느님의 계시에 신학을 정초하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마르크스적 시각에서 전통적 신학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해방신학,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기초한 과정신학 등이 그리스도교 신학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들었으나, 결코 그리스 철학의 지배적 영향 하에 형성된 전통적인 신학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비록 서구의 지배적인 영성 전통이 성서적 영성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그리스 철학의 영성, 특히 신플라톤주의 영성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형성되었다고는 하나, 만물을 일자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간주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일원론적(monistic) 실재관 내지 세계관이나 신을 부동의 제일 원인으로(causa prima, unmoved mover) 간주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관은 신을 무에서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의 역사를 주도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사에 개입하는 인격적 실재로 보는 성서적 신관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따라서 서구 신학과 영성을 지배해 온 주도적 패러다임은 성서적 신앙에 기초해서 신과 세계, 성과 속, 초자연과 자연, 계시와 이성, 은총과 자연, 종교와 문화, 그리고 교회와 국가라는 이분법적 구별 위에서 그 관계를 논하는 사고의 구도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전통적인 구도가 현대 세계에 이르러 심각한 도전을 받아 흔들리거나 와해되게 되었다. 현대 서구 사상사는 간단히 말해, 성서적 계시와 초자연적 신관에 대한 믿음이 붕괴되고 세속화된 이성이 홀로 독자적 길을 걸어온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이성 또한 보편성의 권위를 상실하게 된 현대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의 위기, 서구적 영성의 위기는 일차적으로 성서적 신관과 이에 기초한 영성의 위기로 규정될 수 있다.

성서적 영성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의 하느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창조주로서 인간의 생사화복과 역사를 주관하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고 인류를 구원하며 역사의 종말에 심판과 구원을 베푸는 인격적 신으로 이해된다. 성서적-그리스도교의 신앙적 영성은 간단히 말해서 창조(creation)와 구속(救贖 redemption)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하는 영성이다. 창조와 구속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양대 주제로서,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러한 신학적 테두리 내에서 형성되어 왔다.

창조의 영성은 우선 창조주와 피조물의 엄격한 질적 차이와 존재론적 간격에 의거하여 우상숭배, 즉 피조물의 절대화를 거부하는 영성이다. 자연이나 인간, 그리고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제도나 권위도 초월적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 창조 신앙의 영성은 이성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서구적 비판의식의 초석을 이루어 왔다. 초월적 하느님 앞에서 어떤 피조물도 신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제도나 체제는 어떤 것도 절대화될 수 없으며 항시 신의 초월적인 도덕적 의지와 권위 앞에서 심판의 대상이 된다.

창조의 영성은 동시에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어 존재를 부여받은 것임으로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긍정의 영성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하다.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등의 이원적 대립을 넘어서 하느님이 존재를 허락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다. 특히 하느님의 창조 행위로 이루어진 자연 세계에는 하느님의 선함과 지혜가 깃들어져 있으며, 세계의 존재와 질서는 이미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보편적 은총의 질서로 이해된다.

성서적 창조 영성은 피조 세계 가운데서 인간 존재의 특수한 위치를 인정한다. 인간은 여타 피조물과는 달리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하느님의 초월성과 인격성, 자유와 주권에 동참하는 존재이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실현하고자 하는 영적 존재로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원형이자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닮고자 갈망한다.

“윤리적 유일신론”(ethical monotheism)으로 규정되는 성서의 신관은 인간에게 도덕적 헌신을 요구한다. 창조의 영성은 도덕적 영성이다. 창조주 하느님은 도덕적 의지를 지닌 인격신으로서, 인간은 그의 도덕적 명령 앞에 서 있는 존재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곧 세계와 인생의 도덕적 의미에 대한 긍정을 뜻하며, 그 실현을 위한 실천적 헌신을 요구한다. 창조의 영성에서는 따라서 하느님과 도덕성, 영성과 도덕적 실천은 불가분적이다.

성서적 영성은 또 창조 영성과 더불어서 구속의 영성이다. 창조의 세계는 그 근본적 선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파괴되고 왜곡되어 있음을 성서적 신앙은 말한다. 성서적 영성은 따라서 인간의 죄악성을 성찰하고 고백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영성이다. 특히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는 영성이다. 성서적 구속의 영성은 이와 동시에 타락한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며 죄악에 물든 자신을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삶을 살려는 실천적 영성이다.

주목할 점은, 하느님이 지은 세계의 선함을 긍정하는 창조의 영성과 타락한 세계와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는 구속의 영성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이원적 대립이 아니며, 창조 영성나 구속의 영송 모두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근거한 영성이다.

이상과 같은 성서적-그리스도교적 영성은 현대에 와서 여러 면에서 커다란 시련에 봉착해 있다. 우선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은 인격적 의지로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 밖에서 세계를 다스리고 때때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인류 역사에 개입하여 인간을 구원하는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어렵게 만들었다. 뉴턴 유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다윈 유의 진화론적 시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 밖에서부터 자연과 역사의 과정에 특별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초자연적 신에 대한 믿음을 어렵게 만들었고, 세계의 배후에 어떤 인격적인 의도나 도덕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수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동양의 자연주의적 세계관과 영성에 대한 서구인들의 관심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성서적 신관, 초자연적 신관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전통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로 이해되어 왔다. 신이 자유로운 의지적 결단의 행위를 통해 피조물들을 무로부터 유로 불러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의 배후에는 우선 창조신의 존재론적 배타성과 우선성을 보장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신만이 스스로 존재하며, 세계의 존재나 여타 사물들은 전적으로 신에 의지하여 존재를 확보하기 때문에 그 자체 내에 허무의 그림자를 안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무로부터 유가 생길 수 있는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 무란 것이 어떻게 사고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등의 근본적인 물음들은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세계는 전적으로 신의 자의적 결단에 의해 창조된 그야말로 우연적 존재로 보이며, 신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할 이유나 필연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성서의 창조설화는 세계 창조의 목적이나 동기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신과 세계가 별개의 실재로 간주됨에 따라 세계 없는 신의 존재 가능성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신 없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무신론의 단초를 이미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신이 세계를 창조한 이유와 목적, 섭리 같은 것을 인정한다 해도 인격적 의지에 의한 세계 창조는 예로부터 악의 존재를 설명해야 하는 변신론 혹은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부담을 지게 되어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자연계까지 포함하여 세상만사를 주관하며 인류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관여하는 하느님과, 우리가 목도하는 세계와 역사의 엄청난 비극과 부조리 사이에는 어떠한 이론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운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밖으로부터 자연계와 인간계에 개입하고 다스린다고 믿는 성서의 초자연적 신관은 현대 세계에서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신과 세계,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보는 성서의 신관과 인간관은 자연세계의 탈성화(脫聖化 desacralization)를 초래함으로써 오늘날의 생태계의 파괴와 환경위기를 초래한 이념적 근거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자연 없는 신 혹은 신 없는 자연을 생각할 수 있도록 단초를 제공한 성서의 신관은 자연으로부터 신성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또한 자연과는 별도의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 초월적 존재로서 자연에 ‘속한’ 존재라기보다는 자연을 초월하고 다스리는 존재로 인식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군림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이다.

동양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무엇보다도 신을 인격적 존재로 보는 그리스도교(유대교, 이슬람도 마찬가지)의 인격신관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신의 인격성이 인간의 초월성과 존엄성을 담보해주는 측면이 있지만,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 동양철학적 관점에서는 신의 인격성은 궁극적으로는 무한한 실재를 유한한 인간에 빗대어 유비적으로 파악한 무지의 소산이며 신격의 비하를 뜻한다. 동양 종교에서도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인격화해서 섬기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령 도교에서는 도, 유교에서는 천을 인격화하며, 불교에서는 상을 초월하는 부처를 형상화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대중의 종교적 요구에 응하는 저급한 형태의 신관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가장 정통적 사상을 대표하는 불이론적(不二論的) 베단타(Advaita Vedānta) 철학에서는 풍부한 인격적 속성을 지닌 브라흐만(saguna-brahman)과 일체의 속성을 여읜 브라흐만(nirguna-brahman)을 구별한다. 전자는 인간의 각종 필요와 욕구에 따라 다양한 형상과 이름으로 나타나는 신, 풍부한 신화를 통해 전수되며 신상을 통해 형상화되어 신전에 모셔지는 신들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일체의 속성이나 형상, 이름이나 이야기를 초월한 신, 오직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파악되는 순수 정신(cit,), 순수 존재(sat), 순수 희열(ānanda)로서의 신, 말하자면 신 아닌 신 혹은 신위의 신(God above God)을 가리킨다. 힌두교가 이렇게 현상적 신과 본체적 신, 혹은 드러난 신과 감추어진 신성을 구별하는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을 파악하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일찍부터 자각했고 잡다한 신의 모습들이란 불가피하게 인간의 자기 모습이나 욕구의 투영일 수밖에 없음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신의 인격성은 동시에 신과 인간의 거리를 함축한다. 인격성은 필연적으로 타자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적 신관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상벌을 내리고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타자적 성격을 끝까지 보유한다. 신의 사랑과 은총을 말한다 해도 신과 인간 영혼의 연합(communion, union)을 말할지언정 완벽한 일치(unity)나 하나 됨, 혹은 신과 인간의 구별을 넘어서는 그 근저에서의 동일성(identity)을 말하지는 않는다. 가령 “내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영성이나 “나의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선불교의 심즉불(心卽佛)과 같은 영성은 유일신 종교에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신과 제아무리 가깝다 해도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니며, 신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와 도덕적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양자의 완벽한 일치를 말하는 동양적 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인격적 신에 대한 신앙에 바탕을 둔 영성이 불완전하고 불안하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하튼 세계의 궁극적 실재인 신의 인격성 문제는 동서양의 신학과 영성을 가르는 가장 핵심적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들 외에도 보다 대중적 차원에서 인격신관이 지닌 문제점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캐렌 암스트롱은 인격신관의 폐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격적 신 이해에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격적 신이 인간의 필요조건, 두려움과 소망 같은 감정을 반영하는 인간의 생각의 투영에 불과한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때로 인간은 자기가 느끼고 행하는 것처럼 신도 느끼고 행하며 신이 인간의 편견과 아집을 부정하기보다는 용인하는 것으로 추정하곤 한다. 그리고 신이 재앙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 인간은 신을 냉혹하고 잔인한 존재로 이해하며, 심지어는 재앙이 신의 뜻이라고까지 믿음으로써 근본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마저 인정하기도 했다. 인격적 신 개념은 또한 신을 남성적 측면에서만 이해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는 부적절한 성 관습을 정당화했다. 이처럼 인격적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도록 하기보다는 냉혹하고 잔인하며 편협한 인간적 과오를 정당화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사랑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로 인격적 신은 인간이 타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소외시키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그럼으로 인격적 신 개념은 종교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하며 단지 종교 발전의 한 단계를 나타낼 뿐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격적 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 범주를 넘어선 초월적 신 개념을 추구해 온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이 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신이 너무나도 인간을 닮는 유치하고 저급한 신관을 조장하는 위험성을 인격신관이 지니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상과 같은 성서적 인격신관과 영성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서구 사상사에서 신플라톤주의의 일원론적 형이상학과 영성에 의해 어느 정도 수정되고 보완되어 왔다. 신플라톤주의는 세계와 신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별개의 실재로 간주하는 초자연적 신관에 근거한 영성보다는 세계의 원천이자 세계의 깊이에서 발견되는 신, 나 자신의 존재의 밑바탕에서 만나는 신, 다시 말해 밖으로의 초월이 아니라 안으로의 초월 내지 내재적 초월을 추구하는 영성을 제공함으로써 초자연적 인격신관에 바탕을 둔 성서적 영성에 대안을 제공해왔다. 베단타 사상 연구가 토르베스텐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이 베단타와 같은 동양의 종교체계들과 논란을 벌일 때 오늘날 제기하는 비판의 대종은 서구에서 플로티누스(Plotinus), 존 스코투스 에리게나(John Scotus Erigena), 엑카르트(Eckhart), 혹은 심지어 스피노자에 대한 논란에서 사용되었던 많은 점들을 항시 되풀이하곤 한다. 인격적 신 (이미 절대적 존재인)의 옹호, 인간 개개인(신이 창조한)의 독특성, 원죄의 심감성과 “위로부터 오는” 구원의 필요성이 항시 거론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베단타 측은 종종 플로티누스나 스피노자를 인용하여 반론을 제시할 수 있다. 즉, 교회의 공식적 교리와 더불어 서구에서조차 끈질기게 생존해왔으며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영원한 철학’(philosophia perennis)의 언어에 의거한 반론이다. 거의 정의 불가능한 플로티누스의 일자(One), 베단타의 무속성적 브라흐만(Nirguna Brahman), 대승불교의 공(空), 초인격적인 도(道), 엑카르트의 “신성의 근원”과 같은 개념들로서, 마치 성서의 창조주 하느님이 부정적 언사들, 아무런 의지(will)도 지니지 않고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더 정확히 말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그것”(It)의 연합전선에 의해 포위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들 사상이 “창조” 개념을 수용한다면 창조는 단지 일자로부터의 유출이며, 절대로부터의 분리처럼 보이지만 결코 독특한 의지적 행위는 아니다.... 베단타에 의하면,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신이 그것을 무로부터 창조했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하지 않아도 그만일 수 있음에도) 무한자가 그 자체의 환술(maya)에 의해 유한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초월성은 상실되지 않고 말이다. 동서양 사상의 대화에서 이와 같은 중대한 차이를 간과하는 사람은 곧 서로를 지나쳐 버리게 된다. 왜냐하면 존재를 설명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방식이 여기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또 다시 다른 모든 신학적 철학적 관념들, 특히 구원과 해탈에 관한 관념들에 영향을 준다.

서양 그리스도교에서 신플라톤주의적 영성의 대표적 사상가는 중세 도미니꼬 수도회의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 1328 사망)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사상의 영향 아래,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신관으로 대표되는 인격신(Gott)과 삼위의 속성과 관계성을 초월하는 신성(Gottheit) 그 자체를 구별했다. 신성은 힌두교의 브라흐만이나 도가의 도(道)와 마찬가지로 거기로부터 만물이 흘러나오고(exitus) 거기로 되돌아가는(reditus) 세계의 궁극적 원천이고 귀착지다. 엑카르트 영성의 특징은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영성을 넘어서 사물의 잡다한 관념과 상(像)뿐 아니라 신에 관한 일체의 상과 개념을 거부하는 철저한 초탈(Abgeschiedenheit)의 수행에 있다. 그리고 이 초탈의 영성은 “신성의 감추어진 어두움” 속으로 찾아들어가는 돌파(Durchbruch)의 영성으로까지 극단화된다. 이 돌파를 통해서 우리는 일체의 상을 여읜 "비고 자유로운" 영혼의 근저(Grund)에서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엑카르트의 신비주의 영성은 인격신관의 한계를 자각하고 극복한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완전한 일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신인합일 내지 천인합일을 말하는 동양의 일원론적 영성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오늘날 서구에서 엑카르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그에게서 전통적인 성서적-신학적 신관과 영성의 극복은 물론이고 동양 사상과의 만남과 그리스도교 영성의 탈출구를 모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대체로 보아 현재도 서구 영성 운동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복음주의나 근본주의 신앙, 혹은 각종 해방적 실천(민중, 유색인종, 여성, 자연 등) 내지 도덕적 헌신(개인적 혹은 사회적)을 통해 인격신과 만나는 성서적 신앙이 아니라 묵상과 관조를 통해 자기 영혼의 깊이에서 신성을 발견하는 신비주의적, 관조적 영성 운동들이며, 이는 크게 보아 동양적 영성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III. 현대의 통전적 영성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신플라톤주의 영성이 일원론적 존재론을 바탕으로 해서 초자연과 자연, 창조주와 피조세계의 거리에 바탕을 둔 성서적 영성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그것을 한 차원 고양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양의 형이상학적 영성 일반이 지니는 문제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 신학에 수용된 그리스 형이상학적 영성은 신플라톤주의까지 포함하여 과감하게 일원론적 관점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여전히 하느님과 세계를 이원적 대립으로 보는 성서적 신앙의 틀 내에서 수용됐다.

성서적 창조 영성이 신과 세계, 초자연과 자연의 대립적 구도에 서 있다면, 전통적인 서구 형이상학적 영성은 주로 일(一)과 다(多), 영원과 시간, 불변하는 실체와 변화하는 사물, 본체와 현상, 정신과 물질 혹은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이원적 대립에 서 있다. 이로 인해 형이상학적 영성은 물질세계와 인간의 몸을 폄하하고 세상을 도피하는 영성이라는 비판, 나아가서 자연과 성(sexuality)과 여성에 대하여 적대적인 영성을 조장해 왔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비판은 특히 현대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에서 날카롭게 제기되고 있다. 이 점에서 보면, 인간의 몸을 포함하여 물질세계 전체를 하느님의 선한 창조로 긍정하는 성서적 영성이 오히려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창조 영성, 몸의 영성이 새롭게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하튼 현대가 요구하는 초월의 영성은 자연이나 일상의 세계를 부정하고 떠나려는 영성보다는 바로 그 속에서 신성을 경험하는 내재적 초월의 영성이다. 현대적 영성은 변화하는 세계 밖에서 세계를 움직이고 조정하는 초자연적 신보다는 세계 안에 내재하며 세계와 함께 움직이는 역동적인 신, 변화 저편에 있는 부동의 실재보다는 사물과 함께 움직이면서 사물의 변화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하는 신을 지향한다. 유한에 대립하는 무한이 아니라 유한한 사물들을 감싸고 품는 무한, 상대와 상대적인 절대가 아니라 상대와 절대의 구별마저 초월하는 절대 아닌 절대, 인간 위에 군림하는 절대 군주나 인간을 종으로 비하하는 주인과 같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참 자아로 내재하는 신을 갈망한다. 현대세계가 요구하는 영성은 영원과 시간, 초월과 내재, 초자연과 자연의 대립적 구도를 넘어서는 내재적 초월의 영성이다. 인간과 자연, 주관과 객관,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을 위계적으로 대립시키기지 않고 상보적 관계로 조화시키는 통전적인 영성이다.

21세기 인류의 최대 화두는 환경/생태계 위기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137억년에 걸친 우주의 생성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이 태어나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푸른 별 지구가 인간의 끝없는 탐욕으로 인해 죽음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인간과 뭇 생명체들이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생명의 원천(source)으로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목적을 위한 자원(resource)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원시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모든 생존의 절대 조건인 자연을 성스러운 힘이나 질서로 간주해왔다. 인간은 동시에 의식을 지닌 존재로서, 자신을 자연과 분리된 주체로 의식하면서 자신과 맞서 있는 대상(Gegenstand)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근대의 과학기술과 산업 문명의 발달하기 전까지는 이 두 가지 태도가 대체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삶이 이루어졌다. 자연을 이용하고 다스리는 것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가운데 일정한 한계와 절제 속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이 자연과 투쟁을 한다거나 그 위에 군림한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근대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은 이러한 균형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근대인은 이제 더 이상 자연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마르틴 부버의 표현으로, 이제 인간은 자연을 ‘그대’(Thou)가 아니라 ‘그것’(It)으로 대하게 된 것이다.

자연을 대상화함으로써 자연에서 소외된 인간은 이제 자연을 순전히 기계적 인과율이 지배하는 물질세계로 인식한다. 심지어 사물의 색깔이나 맛이나 냄새 같은 자연계의 다채로운 속성들을 ‘이차적 성질들’(secondary qualities)이라 부르면서 실재하지도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자연을 순전히 질량 덩어리들의 체계로 파악한다. 이렇게 추상화되고 질량화된 자연이 인간적 가치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물체로 전락하면서 인간의 과학적 탐구와 정복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탈 인간화된 자연은 오직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근대 세계는 철저히 인간중심적 세계다. 자연은 인간에게 아무런 영적 의미나 도덕적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는 죽은 침묵의 물체로 변해버린 것이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 시대로 접어든 오늘의 문명은 이제 이러한 자연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성스러움이 사라지고 영적 의미가 박탈된 자연에서 다시금 성스러움을 느끼고 영적 의미를 복원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현대 영성은 따라서 무엇보다도 자연친화적, 자연정향적 영성이어야 한다. 신과 자연을 별개로 볼 것이 아니라 만물 속에서 신을 발견하고 신 안에서 만물을 보는 영성이어야 하며, 자연과 더불어 영적 교감을 나누는 영성이어야 한다.

현대의 자연친화적 영성은 ‘인간적 자연’(인간적 의미를 지닌 자연)과 ‘자연적 인간’(자연에 속한 인간)을 요구한다. 신과 함께 인간 역시 자연에 내재적인 존재임을 겸허하게 수용해야만 한다. 인간만 하느님의 모상이 아니라 자연도 하느님의 모상임을 깨닫는 영성, 인간에서만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영성이 아니라 자연계의 하찮은 미물에서도 존재의 신비와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영성을 현대 세계는 요구하고 있다. 신성한 인간의 인권뿐 아니라 신성한 자연의 권리도 존중하고 경외하는 영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을 의식의 주체로 파악하면서 인간의 초월성을 터무니없이 과장해 온 근대 서구의 인간관은 근본적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의식(Bewusstsein)이기 전에 존재(Sein)이며, 정신이기 전에 물질, 영혼이기 전에 몸이다. 이 둘은 구별은 되지만 결코 대립적일 수 없다는 통전적이고 전일적인 인간관이 필요하다. 만물을 벗으로 혹은 형제로 여기면서 자연의 창조적 순환과정 속에서 만물과 함께 나고 살고 죽는 인간의 유한성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영성, 인간뿐 아니라 뭇 생명들에게까지 도덕적 책임을 느끼는 성숙한 영성이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자세한 논의는 피하겠지만, 나는 위와 같은 현대적 영성이 동양적 사유 가운데서도 서구 형이상학적 전통 이상으로 물질세계와 육체를 폄하하는 경향이 강한 인도 사상과 영성보다는, 중국적/동아시아적 자연주의(도가나 유가 사상)나 생사와 열반을 하나로 보는 대승불교 사상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성은 초월적 실재를 인정하는 형이상학이나 현상계의 깊은 차원을 논하는 존재론의 배경 없이는 공허한 것이 된다. 문제는 현대 문명이 일반적으로 이러한 초월적 사고나 심층적 사고 자체를 거부하거나 회피한다는 데 있다. 현대 영성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에 기인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단지 물질로 설명하는 물리적 환원주의, 입증이 가능하지 않는 한 사물에 대한 어떠한 심오한 통찰이라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실증주의적 사고가 성서적 신관은 물론이고 존재의 깊은 차원에 대한 그 어떤 탐구나 믿음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불교 사상과 영성이다. 불교는 세계 종교들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형이상학적 실재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다. 불교는 창조주 하느님은 물론이고, 만물을 통일하는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실재를 말하는 모든 종류의 일원론적 형이상학을 거부한다. 불교는 또 물질과 정신,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도 배척한다. 불교적 영성은 만물을 연기적 관점,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다. 불교의 존재론이 과연 세계와 사물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는지, 혹은 존재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깊은 형이상학적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하고, 위와 같은 사실이 탈 형이상학 시대를 살면서도 물질주의나 세속주의에 만족하지 못하는 현대 서구인들 사이에 불교가 특별한 관심을 끄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불교는 물론 유물론도 아니고 실증과학도 아니다. 고정 불변하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지만 불교는 사물들의 관계나 법칙, 그리고 사물의 일반적 성격에 대한 깊은 존재론적 통찰을 갖고 있으며(緣起, 空, 唯識), 이에 기초한 철학적 영성을 지니고 있다. 불교가 상식이나 과학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실재의 깊은 차원과 성격에 대한 독특한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물질로 파악하려는 물리적 환원주의나 실증주의적 사고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 한다. 열반이라는 절대적 실재를 추구하는 상좌(소승)불교는 물론이고,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마음에 돌리는 대승불교의 유심론이나 여래장/불성 사상 또한 형이상학적 절대에 대한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여하튼, 우리 마음 안에서 부처를 구하고 마음이 곧 부처임을 말하는 선불교의 영성은 유한과 무한, 상대와 절대의 일치를 추구하는 동서양의 일원론적인 형이상학적 영성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상에서 나는 서구 영성 전통의 특징과 아울러 그 한계와 문제점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또 성서적 영성이든 형이상학적 영성이든 서구의 전통적 영성이 어떠한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했다. 그리고 현대의 새로운 영성의 모색을 위해서 동양 사상, 특히 중국적 자연주의와 대승불교 사상이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동양적 영성의 무비판적 수용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신과 세계, 창조주와 피조물, 초자연과 자연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양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인정하는 ‘이원론적’(동양적 시각에서 볼 때) 사고는 문제점 못지않게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장점이 동양 사상과 일원론적 영성 일반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절대와 상대의 존재론적 차이는 우선 상대 세계의 손쉬운 절대화를 방지한다. 세계 안의 그 어떤 사물이나 제도, 어떤 권위나 권력도 절대자 앞에서는 성스러움을 상실하고 상대화되고 세속화되기 때문이다.

성서의 유일신 신앙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한한 것을 절대화하고 숭배하는 우상숭배에 대한 강한 예언자적 비판정신이다. 유일신 신앙을 바탕으로 한 예언자적 종교에서는 절대와 상대 사이의 거리와 긴장이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인간은 결코 충족시킬 수 없는 절대자의 초월적 의지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과 비판을 해야 하며 그래야만 절대자와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동양의 일원론적 형이상학과 영성이 절대와 상대 사이의 존재론적 연속성과 불가분성을 강조한 나머지 자칫 상대적인 것의 절대화로 넘어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동양 종교에서 흔히 보이는 구루 숭배나 스승의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혹은 정치권력이나 사회제도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응 같은 것이 흔히 서구인들이 동양 종교들에 대해 품고 있는 문제의식이다. ‘윤리적 유일신 신앙’(ethical monotheism)에 기초한 성서의 예언자적 정신과 비판적 역사의식은 현대 세계에서도 결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며, 동양 사상과 영성도 진지하게 대하여야 할 정신이다.

동양 사상과 영성의 취약점으로 지적되는 또 하나의 문제도 이에 직결된다. 이른바 윤리적 비판의식의 결핍이다. 절대자를 윤리적 의지를 지닌 인격적 주체로 파악하는 유일신 신앙과 달리, 동양의 탈 인격적 실재관은 궁극적 실재 자체에 도덕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덕의 궁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도가의 도나 불교의 열반 혹은 불성은 선악의 구별과 대립을 초월하는 탈 도덕적 혹은 초 도덕적 실재다. 물론 우리가 이 탈 도덕적 실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기적 욕망을 제어하거나 포기하는 고도의 도덕적 훈련이 필요하다. 선악의 구별을 무시하지 않는 도덕성과 자기를 비우는 무위와 무욕의 삶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도나 열반 자체가 인격신처럼 도덕성을 띤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양종교에는 윤리적 노력이나 긴장 없이 절대와 하나가 되려는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다. 영성의 도덕적 차원이 때로는 도덕이 지닌 허구성과 억압성을 깨닫게 하고 도덕을 가장한 아집과 독선에서 오는 대립과 갈등을 초월하는 장점이 있다 해도, 영성과 도덕성을 분리할 수 없는 유일신 신앙의 입장 또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교의 도덕적 형이상학은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끈다. 유교의 천(天)은 분명히 도덕적 성격과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으로 동양 사회와 도덕은 천에 기초한 성스러운 질서로 간주되어 왔다. 천도(天道, 天理)가 인도이며 인심이 천심이고 인륜이 천륜이다. 유교 윤리가 천도와 사회질서를 너무 직접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불합리한 사회질서나 구시대의 윤리를 절대화할 우려가 없지 않지만, 유교적 천인합일의 영성은 도덕적 수양과 실천을 떠나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 도덕적 영성이 도덕적 무감각과 무책임성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면, 영성의 탈 이데올로기 주장 또한 경계해야 할 문제다. 영성은 흔히 정치나 사회 문제에 초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월적 실재와의 직접적 만남과 일치를 추구하는 영성 자체는 물론 특정 정치이념이나 사회사상과 유기적 관계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영성의 탈 역사성과 탈 이념성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대 역사의식은 인간의 어떠한 활동도 역사적 제약성을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영성 운동도 언제나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념적 함축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종교와 교리, 신학과 형이상학, 세계관과 인생관 등이 영성에 영향을 주는 문화적 맥락이듯이, 정치 이념이나 체제, 사회 계급이나 신분, 그리고 성별도 영성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현대 영성운동은 이런 면에서 영성의 이데올로기성 문제에 민감해야만 한다. 어떤 영성 운동도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성의 무비판적인 탈 이데올로기적 주장은 영성 운동으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 이념이나 특정 정치 체제에 쉽게 영합하도록 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영성 운동이 이념적 자기 성찰과 반성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성 운동도 특정한 사회와 역사적 상황을 떠날 수 없는 한, 자기도 모르게 인간을 억압하는 기재로 작용할 수 있다.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 자연과 초자연 등의 이원적 혹은 위계적 대립에 바탕을 둔 서양의 형이상학적 영성이 여성과 자연에 대한 억압적 기재로 작용해 왔다는 생태여성학적 비판은 그 좋은 예다. 어쨌든 영성 운동은 초월성과 순수성을 위해서라도 철저한 이념적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일원론적 형이상학에 근거한 동양적 영성의 내재적 초월 정신과 그리스도교의 성서적 영성이 지니고 있는 예언자적 정신의 창조적 만남, 그리고 영성 운동의 철저한 도덕적, 이데올로기적 자기 성찰은 현대 세계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영성의 방향이자 시금석이다.


IV. 한국 종교계의 영성적 과제

이상과 같은 동서양 영성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타당하다면, 과연 이것이 현대 한국 종교계에 던지는 문제와 과제는 무엇일까? 한국종교들은 현대인이 추구할만한 영성을 위해 과연 무슨 공헌을 할 수 있을지 우선 묻게 된다. 영성이 종교의 진수이며 존재이유인 한 이 물음은 모든 종교가 항시 물어야 하지만, 세계 종교의 집산지와도 같이 다양한 종교전통이 공존하는 현대 한국사회의 현실, 전통 사상과 서구의 각종 근현대적 사조들이 혼재하면서 사상의 다양성과 더불어 혼란과 갈등을 빚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매우 절실한 물음이다.

한국은 종교적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양대 종교가 막상막하의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회이며, 비록 제도화된 조직의 힘은 없지만 유교적 윤리와 덕목, 관습과 심성이 종교들의 차이를 넘어 모든 한국인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다. 또 그 기층에는 무속적 종교성이 짙게 깔려 있기도 하다. 이들 종교전통들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각 종교들이 한국인의 영성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상세한 논의를 요하지만, 나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늘의 한국 종교계가 단적으로 “종교냐 영성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 받고 있는 매우 중대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종교계가 현대 세계가 요구하는 영성은커녕 동서양의 중세적 영성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은 종교의 토양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는 종교의 존재이유이자 목적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계를 볼 때, 본말이 전도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영성을 고취하기는커녕 한국 종교계는 종교나 종파를 막론하고 초자연적 힘을 이용해서 인간의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복신앙을 부추기면서 번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보다는 기복신앙에 호소하여 세속적 영달과 세력 확장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한국 종교계 전체에 해당하는 말은 아니지만, 온갖 종류의 기복신앙이 한국 종교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기복신앙과 영성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한국종교계가 일반적으로 반 영성적이라고 단언한다.


혹자는 기복신앙의 불가피성을 논하면서 그 정당성을 옹호하거나 묵인하려 하지만, 나는 한국 종교의 최대 과제가 기복신앙의 극복에 있다고 믿으며 한국 종교계는 이제 기복신앙과 영성 사이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시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기복신앙을 넘어서는 영성을 키우지 못하는 종교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을 구하는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종교가 추구하는 복이 어떤 종류의 복이냐는 것이다. 기복신앙이 구하는 복은 전적으로 물질적이다. 그러나 종교가 본래적으로 추구해야할 복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축복이다. 내가 아는 한, 세계 종교들은 현세든 내세든 영적 축복을 약속하지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의 이원적 대립을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니며, 더욱이 물질이 정신보다, 영혼이 육체보다 더 귀하고 고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아니다. 사실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은 단순히 ‘정신적’이라는 개념을 넘어선다. 영성의 ‘영’(spirit)은 몸과 마음, 육체와 정신의 대립을 초월하는 보다 근원적인 실재를 가리킨다. 인간의 영은 근본적으로 초월적 실재 자체, 우주만물의 궁극적 실재 자체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 둘은 완벽히 일치한다고 가르치는 종교도 있다 - 초월성을 지닌다.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 안에 초월적 실재를 지향하며 그것을 향해 열려 있는 힘이 내재한다는 말이다. 이 힘은 영혼과 육체, 물질과 정신 모두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 전체를 변화하는 힘이며, 나아가서 사회와 역사까지도 변혁할 수 있는 힘이다. 하느님, 브라흐만(Brahman), 천, 도, 불성, 태극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에 근거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영은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의 구별을 넘는 포괄적 실재로서, 진정한 영성은 바로 이러한 실재를 자각하고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 축복은 결코 물질적 축복을 배제하거나 거기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영적 축복은 물질적 축복을 수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진정한 영성은 물질에 대한 자유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영성은 물질을 누리기도 하고 부리기도 하며, 이웃과 더불어 나누기도 하며 아낌없이 버리기도 한다. 영성은 때로는 물질적 욕망과 치열하게 투쟁하는가 하면 물질에 초연하기도 하며 자발적으로 포기하기도 한다. 기복신앙의 문제는 물질을 중시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거기에 종속된다는 데 있다. 초월의 자유를 외면하고 물질에 속박되어 영적 자유와 축복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 왜곡하고 비하하는 데 있다. 한국 종교계는 이제 이러한 저급한 기복신앙을 극복하고 질적 도약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높아진 한국인의 의식 수준에 의해 머지않아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 본연의 사명을 되찾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종교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 종교는 이미 그 존재 이유를 상실 한 것이나 다름없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는 신앙행태를 가리켜 신을 소나 양초처럼 여기는 행위라고 꼬집었다. 일단 우유를 얻고 나면 더 이상 소에 관심이 없고, 물건을 찾고 나면 더 이상 양초가 필요 없듯이, 신을 통해 신 이외의 어떤 것을 얻고 나면 신은 곧 잊어버리는 신앙 아닌 신앙을 풍자하는 말이다. 진정한 영성은 하느님 자신을 원하지 하느님 대신, 혹은 하느님과 더불어, 다른 어떤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축복이 아니라면 신은 도대체 무엇 하러 믿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아무 ‘소용’없는 신이야 말로 참 신이고 참다운 영성이 구하는 바라고 그는 대답한다. 세속의 가치 기준에서 보면 신은 실로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가?

진정한 영성은 결코 몸과 물질의 세계나 사회와 역사를 무시하지 않고 현실로부터 도피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초월적 시각에서 봄으로써 현실을 더 깊고 넓게 이해하는 지혜를 준다. 영성은 세상을 긍정하되 철저한 자기부정과 세계부정의 토대 위에서 긍정한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을 수반한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긍정, 즉 공으로서의 색의 긍정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정신과 물질, 몸과 마음의 이원적 구별을 넘어서는 전인적 구원의 세계지만, 이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세속적/세간적 가치의 과감한 부정 없이는, 그리고 거기에 매몰된 나 자신의 삶의 과감한 청산(회개, metanoia) 없이는 실현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않고는 접할 수 없는 세계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참다운 생명은 사즉생(死卽生)의 생명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종교계에는 이러한 부정의 정신이 너무나 결여되어 있다. 일차원적인 세계 긍정만이 지배하며 조잡하고 저급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다.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고 확대재생산 하는 기복신앙에 압도당해서 순수한 영성은 발을 붙일 곳이 없다. 그야말로 장사가 안 된다. 종교가 세상 혹은 세속과 아무런 긴장이나 갈등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종교는 종교가 아니며 더 이상 존재할 이유도 없다. 개인이든 사회든 그런 종교가 지배한다면, 삶에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종교계의 현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종교는 현실을 외면하고 세계 도피라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먼저 세속/세상과의 철저한 단절이 필수적이다. 섣불리 진속불이(眞俗不二)를 들먹이거나 현실참여의 명분을 내세우기에 앞서 세상/세속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종교계에는 근대적 세계긍정 이전에 중세적 세계부정의 영성이 먼저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 강한 자기부정과 세간/세속에 대한 비판의식과 초월의식의 결핍이 한국 종교계의 영적 주소를 현대적 영성은 고사하고 중세 이전으로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세간 자체, 물질 자체를 형이상학적으로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중세적 초월의 영성에도 한참 못 미치고 현세의 가치에 아무 고민 없이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신앙인들은 이것을 신앙이라고 굳게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현대인은 더 이상 종교에서 물질적 축복을 구하지 않는다. 임신을 못하거나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지 절을 찾을 필요가 없으며, 좋은 대학에 가고 싶으면 입시학원을 찾지 교회를 찾을 필요가 없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은 오히려 종교에서 순수한 종교 본연의 사명을 찾고 있다. 인류 역사를 통해 극소수의 종교 엘리트층만 누렸던 영적 특권이 현대 세계에서는 대중의 영성으로 보편화되고 있다. 과거에는 수도승이나 출가자들의 전유물이었던 각종 명상이 오늘날 대중화되고 있는 것은 그 뚜렷한 징표 가운데 하나다.

현대 세계는 종교와 세속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 나아가서 종교 간의 장벽마저 초월하는 초종교적 영성의 시대를 맞고 있다. 성서적 영성과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영성을 계승하되 그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한 보다 넓고 깊은 통합적 영성을 현대 세계는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앞에서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풍부한 종교적 전통과 영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 종교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성찰할 때가 되었다.

7,80년대를 통해 한국 종교계는 경제계와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급속한 경제성장과 더불어 종교도 ‘호황’을 구가했다. 숙명과도 같았던 가난의 멍에를 벗고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아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된 오늘, 한국 종교계는 종교 본연의 모습을 찾아 질적 도약을 이루던지 아니면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어 퇴출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종교에서 질적 도약이란 곧 영성의 회복과 심화를 뜻한다. 어려웠던 시절에 비해 물적 조건과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된 오늘의 한국 종교계는 물질과 물량의 예속을 벗어나서 종교 본연의 메시지를 전하고, 옛날에는 소수에만 국한 되었던 영적 혁명을 대중의 몫으로 만들 수 있는 공전의 기회를 맞고 있다. 조잡한 기복신앙을 과감히 청산하고 대중을 한 차원 고양된 영성의 세계로 인도할 사명을 한국 종교계는 안고 있다. 이를 위해서 한국 종교계는 중세적 세계부정의 영성 - 세계 부정과 금욕의 영성 - 과 현대적 세계긍정의 영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부정 없는 긍정은 천박한 긍정이 되고 긍정 없는 부정은 또 다른 억압을 낳기 때문이다. 중세적 영성의 가치를 현대적 안목에서 살리되 그 억압성을 극복하고 인간의 육체적 욕망과 미적 감각, 그리고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고 승화시키고 심화하는 새로운 통합적 영성이 요구된다. 세간과 출세간이 모순이 되지 않고 수도원과 시장이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 영성, 인간의 자유와 창조성을 억압하지 않고 한껏 풀어주고 고양하는 현대적 영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참다운 영성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절대와 무한과의 만남은 인간을 한 없이 고양시키며 엄청남 해방감을 안겨준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 자체를 탐닉하거나 거기에 얽매이는 영성은 참다운 영성이 아니다. 영성의 목적은 인간이 무한과의 만남을 통해 좁은 자기중심적 삶과 세상적 가치로부터 해방되어 이웃과 세상을 향해 열린 존재로 살도록 하는 데 있다. 종교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듯, 영성 또한 아무리 순수하고 숭고하다 해도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영성의 마지막 유혹은 그 자체의 탐닉이다. 영성이 주는 자유는 세상과 이웃을 향한 새로운 헌신을 위한 것이지 자유를 위한 자유가 아니다. 출세간은 세간으로의 회귀를 위함이고 자유는 진정한 사랑을 위함이다. 성속일체(聖俗一體),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진리 위에서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중생의 고통 속에서 부처의 자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한국 종교계의 갈 길이 멀고도 멀다.

[출처] 종교와 영성|작성자 심도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