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호 사설 - 천방(天放) 선생의 ‘경의설(敬義設)(1)
김선욱
승인 2023.10.11
조선 최초 ‘경의설 篇’ 되었을 것 … 위백규 “유실되어 매우 아쉽다”
16세기 초 천방 유호인은 성리학자로서 ‘중용차이(中庸箚疑)’ 말고도 ‘대학도(大學圖)’와 ‘경의설(敬義說)’도 저술했지만, 병란 등으로 일실(逸失) 되어, 『천방선생문집』에는 수록되지 못했다.
많은 시편을 포함하여 경의설(敬義說) 등 학문적 결과물이었을 학문 편(篇)들이 온전히 보존되어 유문집(遺文集) 출판에 포함이 되었다면, 특히 ‘경의설(敬義說)’이 유문으로 남겨졌더라면, 아마 조선조 사림계(士林界)에서 거의 유일한 ‘경의설 편’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조 성리학에서 ‘경의(敬義) 사상’을 대표 사상으로 결집했던 이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이었지만, 남명도 ‘경의설’ 이름을 내세운 독자적인 유문 편(篇)은 없었기 때문이다.
‘경의(敬義) 사상’은 남명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전에는 ‘경의(敬義) 유학’보다는 ‘경(敬)’의 유학과 ‘의(義)’의 유학으로 널리 쓰였고, 남명이 비로소 그 경(敬)과 의(義)의 유학을 합치하여 ‘경의(敬義)’ 유학을 새롭게 창출해 낸 것이었다.
그 경의(敬義)라는 유학, 그리고 그 유학의 두 뿌리라 할 수 있는 ‘경(敬)’과 ‘의(義)’는 당초부터 천방 선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질기고 깊은 인연을 함께해 온 정통유학이었다.
천방은 남명으로부터 성리학은 배웠다. 그렇다면, 천방의 ‘경의설’ 역시 남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난데없이 천방이 ‘경학(經學)’도 아니고 ‘경의설(敬義說)’을 집필했다면, 그것은 바로 남명의 경의(敬義) 학설에서 영향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경(敬)’은 대체로 공경하다, 삼가다 등의 뜻으로, 군자가 지녀야 할 도덕적 정신을 가리키는 유교 용어였다.
‘경의(敬義) 사상’은 남명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전에는 ‘경의(敬義) 유학’보다는 ‘경(敬)’의 유학과 ‘의(義)’의 유학으로 널리 쓰였고, 남명이 비로소 그 경(敬)과 의(義)의 유학을 합치하여 ‘경의(敬義)’ 유학을 새롭게 창출해 낸 것이었다.
그 경의(敬義)라는 유학, 그리고 그 유학의 두 뿌리라 할 수 있는 ‘경(敬)’과 ‘의(義)’는 당초부터 천방 선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질기고 깊은 인연을 함께해 온 정통유학이었다.
천방은 남명으로부터 성리학은 배웠다. 그렇다면, 천방의 ‘경의설’ 역시 남명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난데없이 천방이 ‘경학(經學)’도 아니고 ‘경의설(敬義說)’을 집필했다면, 그것은 바로 남명의 경의(敬義) 학설에서 영향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경(敬)’은 대체로 공경하다, 삼가다 등의 뜻으로, 군자가 지녀야 할 도덕적 정신을 가리키는 유교 용어였다.
즉 경(敬)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유학의 도덕률이었다. 다시 말하면, 유학의 윤리사상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이 바로 경(敬)이었던 것이다.
『논어』에서도 “경으로 자신을 닦는다 子路問君子. 子曰 修己以敬”(『논어』, ‘헌문(憲問)’편) 등으로 자기를 수양하는 의미로서 경(敬)에 관한 언급이 20여 회나 출전되고 있다.
경(敬)에 관하여 그 개념적 외연을 좀 더 분명히 밝히는 문헌은 『주역』의 ‘문언전(文言傳)’이다. 즉 “군자는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방정히 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德)은 외롭지 아니하다.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는 설명에서, 경(敬)을 의(義)와 견주어 내심(內心, 내적인 것)의 정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송나라의 성리학자 정이(程頤)는 유가 경전에서 주창되는 경(敬)을 아주 중요한 수양정신으로 파악하고, 본격적인 해명을 시도했던 유학자였다. 그는 어록(語錄)에서 “마음을 기르는 데는 반드시 경(敬)으로써 해야 하며, 학문으로 나아가는 데는 치지(致知)가 필요한 것이다.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정씨유서(程氏遺書)』 제18(第十八)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이(程頤)의 주장을 뒤에 주자(朱子)가 전폭적으로 받아들였고, 보다 구체적인 이론으로 전개시켰다. 그는 경(敬)을 가리켜,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그 목적에 이르기까지 요구되는, 이른바 “경(敬)은 성학(聖學)의 시종을 이루는 것이다. 경자 聖學之所以成始成終者也”라고 하였으며(『朱子語類』, 卷第12, ‘學6ㆍ持守’), 또 “경(敬)은 일심(一心)의 주재(主宰)이며 만사의 근본이다. 敬一心 之主宰 萬事之根本”라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경(敬)의 유학’을 정립하고 발전시켰던 유학자가 정이(程頤)요, 주자(朱子)였다. 그런데 천방은 이 정이와 주자를 매우 흠모하고 그들의 저서를 독파하며, 그들의 유학 정신을 궁구(窮究)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이,주자 등의 학문을 종(宗)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至其晩年 學文精熟 直以周程張朱爲宗焉“(『천방선생문집』,정경달 行狀). 이에 따라 천방에게는 경(敬)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며 유학의 또 하나의 실천적인 수행법이었던 의(義)와도 연결하는 공부도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의(義)의 유학’ 역시 ‘경(敬)의 유학’처럼 유학의 중심 사상이었다.
공자는 유교의 도덕·정치 이념으로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주창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도리로 포함시킨 의(義)는 유학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행하는 중심적인 윤리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군자는 천하의 일을 대함에 꼭 그래야 한다는 것도 없고 절대로 안 된다는 것도 없으니 오직 의로움만을 좇을 뿐이다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논어』, 里仁편)면서, 의(義)를 인간의 실천 원리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인(仁)을 최상위 가치로 삼았으므로, 의(義)는 인(仁)의 하위 개념이었지만, 맹자시대에 오면서 세상이 매우 혼탁해지고 부덕(不德)이 심화되면서 공자의 인(仁)에 대한 더욱 구체적이고 강한 실천 방안이 요구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맹자의 ‘의(義)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맹자는 “생(生)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義)도 내가 바라는 바인데,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면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맹자』, 고자상)라고 설할 만큼, 의(義)를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중요한 실천적 행동의 윤리로 규정하고 주창하였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러한 의(義)의 사상은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신(道學精神), 사육신의 절의정신(節義精神), 임란 때 국가 수호를 위해서 창의한 수많은 선비들의 의병(義兵) 정신, 외세에 항거하여 일어난 동학혁명, 조선 말 일본군에 대항한 의병운동과 3·1운동·독립운동, 4·19학생의거 등이 모두 이러한 ‘의(義) 사상’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ʻ경(敬)ʼ과 ʻ의(義)ʼ는 유가(儒家)의 실천적 수양론에서 그 주체자의 내면(敬)과 외면(義)에 관계되는 개념이었다. 이것이 사회적인 실천의 영역으로 확장되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의미로 설해진다. 그런데 남명 조식(曺植)은 이 두 개념을 합치하여 ʻ경의(敬義)’ʼ라는 나름의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고 이를 적극 실천하였다. 이것은 『주역』의 ʻ경으로써 의를 곧게한다는 내명자경(內明者敬)’과 ʻ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ʻ외단자의(外斷者義)ʼ로 바꿔 쓰면서 두 개념을 합치하여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남명 조식의 ‘경의(敬義)’ 사상은 ʻ안(敬)ʼ과 ʻ밖(義)ʼ을 설정하고 안으로 자기수양(敬)과 밖으로 사회적 실천(義)이 서로 유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하면서 경의(敬義)를 수양과 실천의 덕목이 되는 유악자의 중심적인 윤리로 파악한 것이다.
남명 조식은 진정으로 경의(敬義)를 자기 학문의 실천 지표를 삼았던 성리학자였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경의(敬義)의 학풍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으며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 임진왜란의 의병장 출신으로 남명의 제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남명의 이러한 ‘경의(敬義)’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방 선생 역시 정통 유학을 궁구(窮究)한 도학자요 성리학자로서 ‘경의(敬義)’ 가치 실현을 위해 전력투구하면서서 군자(君子)로서, 처사(處士)로서, 선비로서 정도(正道)의 삶을 영위하였던 지역의 사표(師表)였다.
그러한 천방이었기에 경의설(敬義說)을 집필했을 것이다.
아, 아쉽고 또 아쉽고 참으로 안타깝도다. 선생의 그 ‘경의설’이 일실(逸失)되고 말았으니…
그 기록이 남아졌다면 남명 조식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새로운 경의(敬義) 학풍에 크게 일조했을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남긴 유작 시편에서나마 그 경의(敬義) 사상의 흔적을, 그 시편에 녹아내린 선생의 경의설(敬義說)을 볼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논어』에서도 “경으로 자신을 닦는다 子路問君子. 子曰 修己以敬”(『논어』, ‘헌문(憲問)’편) 등으로 자기를 수양하는 의미로서 경(敬)에 관한 언급이 20여 회나 출전되고 있다.
경(敬)에 관하여 그 개념적 외연을 좀 더 분명히 밝히는 문헌은 『주역』의 ‘문언전(文言傳)’이다. 즉 “군자는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방정히 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德)은 외롭지 아니하다.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는 설명에서, 경(敬)을 의(義)와 견주어 내심(內心, 내적인 것)의 정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송나라의 성리학자 정이(程頤)는 유가 경전에서 주창되는 경(敬)을 아주 중요한 수양정신으로 파악하고, 본격적인 해명을 시도했던 유학자였다. 그는 어록(語錄)에서 “마음을 기르는 데는 반드시 경(敬)으로써 해야 하며, 학문으로 나아가는 데는 치지(致知)가 필요한 것이다.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정씨유서(程氏遺書)』 제18(第十八)라고 하였다.
이러한 정이(程頤)의 주장을 뒤에 주자(朱子)가 전폭적으로 받아들였고, 보다 구체적인 이론으로 전개시켰다. 그는 경(敬)을 가리켜,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그 목적에 이르기까지 요구되는, 이른바 “경(敬)은 성학(聖學)의 시종을 이루는 것이다. 경자 聖學之所以成始成終者也”라고 하였으며(『朱子語類』, 卷第12, ‘學6ㆍ持守’), 또 “경(敬)은 일심(一心)의 주재(主宰)이며 만사의 근본이다. 敬一心 之主宰 萬事之根本”라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경(敬)의 유학’을 정립하고 발전시켰던 유학자가 정이(程頤)요, 주자(朱子)였다. 그런데 천방은 이 정이와 주자를 매우 흠모하고 그들의 저서를 독파하며, 그들의 유학 정신을 궁구(窮究)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이,주자 등의 학문을 종(宗)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至其晩年 學文精熟 直以周程張朱爲宗焉“(『천방선생문집』,정경달 行狀). 이에 따라 천방에게는 경(敬)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며 유학의 또 하나의 실천적인 수행법이었던 의(義)와도 연결하는 공부도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의(義)의 유학’ 역시 ‘경(敬)의 유학’처럼 유학의 중심 사상이었다.
공자는 유교의 도덕·정치 이념으로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주창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도리로 포함시킨 의(義)는 유학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행하는 중심적인 윤리였다. 그리하여 공자는 “군자는 천하의 일을 대함에 꼭 그래야 한다는 것도 없고 절대로 안 된다는 것도 없으니 오직 의로움만을 좇을 뿐이다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논어』, 里仁편)면서, 의(義)를 인간의 실천 원리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인(仁)을 최상위 가치로 삼았으므로, 의(義)는 인(仁)의 하위 개념이었지만, 맹자시대에 오면서 세상이 매우 혼탁해지고 부덕(不德)이 심화되면서 공자의 인(仁)에 대한 더욱 구체적이고 강한 실천 방안이 요구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맹자의 ‘의(義)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맹자는 “생(生)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義)도 내가 바라는 바인데,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면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맹자』, 고자상)라고 설할 만큼, 의(義)를 죽음도 불사할 정도의 중요한 실천적 행동의 윤리로 규정하고 주창하였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러한 의(義)의 사상은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정신(道學精神), 사육신의 절의정신(節義精神), 임란 때 국가 수호를 위해서 창의한 수많은 선비들의 의병(義兵) 정신, 외세에 항거하여 일어난 동학혁명, 조선 말 일본군에 대항한 의병운동과 3·1운동·독립운동, 4·19학생의거 등이 모두 이러한 ‘의(義) 사상’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ʻ경(敬)ʼ과 ʻ의(義)ʼ는 유가(儒家)의 실천적 수양론에서 그 주체자의 내면(敬)과 외면(義)에 관계되는 개념이었다. 이것이 사회적인 실천의 영역으로 확장되면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의미로 설해진다. 그런데 남명 조식(曺植)은 이 두 개념을 합치하여 ʻ경의(敬義)’ʼ라는 나름의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고 이를 적극 실천하였다. 이것은 『주역』의 ʻ경으로써 의를 곧게한다는 내명자경(內明者敬)’과 ʻ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ʻ외단자의(外斷者義)ʼ로 바꿔 쓰면서 두 개념을 합치하여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남명 조식의 ‘경의(敬義)’ 사상은 ʻ안(敬)ʼ과 ʻ밖(義)ʼ을 설정하고 안으로 자기수양(敬)과 밖으로 사회적 실천(義)이 서로 유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하면서 경의(敬義)를 수양과 실천의 덕목이 되는 유악자의 중심적인 윤리로 파악한 것이다.
남명 조식은 진정으로 경의(敬義)를 자기 학문의 실천 지표를 삼았던 성리학자였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경의(敬義)의 학풍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냈으며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해 임진왜란의 의병장 출신으로 남명의 제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남명의 이러한 ‘경의(敬義)’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방 선생 역시 정통 유학을 궁구(窮究)한 도학자요 성리학자로서 ‘경의(敬義)’ 가치 실현을 위해 전력투구하면서서 군자(君子)로서, 처사(處士)로서, 선비로서 정도(正道)의 삶을 영위하였던 지역의 사표(師表)였다.
그러한 천방이었기에 경의설(敬義說)을 집필했을 것이다.
아, 아쉽고 또 아쉽고 참으로 안타깝도다. 선생의 그 ‘경의설’이 일실(逸失)되고 말았으니…
그 기록이 남아졌다면 남명 조식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새로운 경의(敬義) 학풍에 크게 일조했을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남긴 유작 시편에서나마 그 경의(敬義) 사상의 흔적을, 그 시편에 녹아내린 선생의 경의설(敬義說)을 볼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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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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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의 역사인물(6)/天放 劉好仁 천방(天放)의 삶과 그리고 학문‧시문학(1)
장흥투데이 승인 2019.05.30 16:42 댓글 0기사공유하기
당대 최고 석학 조식-“천방은 내게 넘치는 벗”이라며 교유(交遊)
성리학 최고봉 이황(李滉)-“천방은 호남 제일의 선비”라고 인정
율곡(栗谷) 문인 돼-천방 귀향 때, “내 道가 남으로 간다” 탄식
천방 선생의 묘소(중앙)-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산 60-2번지
천방 선생의 묘소(중앙)-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산 60-2번지
(1)천방 선생의 생애를 고찰한다
장흥 출신 성리학자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1502∼1584). 그의 자(字)는 극기(克己)이고 임금으로 받은 사호(賜號)는 천방(天放)이고, 우호(又號)가 산당(山堂)이다.
그의 생애를 잠시 들여다 보자,
*1502년 장흥읍 건산리에서 태어나다
*1534년(32세) 진사에 급제하다.
그러나 선생은 과업을 포기하고 처사(處士)로서 삶을 고수하다. 성리학(性理學)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을 찾아가 그들과 교유(交遊)하며 학문에서 전념하다.
*1552년경(50여세) 고향으로 돌아와 장동 연하동(煙霞洞) 선영 곁에 초가를 짓고 은거하다
*1570∼1573년(68-71세) 선생이 70여세일 때 34세나 연하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찾아가 사승(師承) 관계를 맺다.
*1574년(72세) 가뭄으로 기우제를 명받고 섶단에 올라가, 자기 몸을 스스로 불사르려는 정성으로 기도하여 비를 얻었다. 이러한 선생에 대해 임금은 ‘하늘에서 그를 죽음에서 석방했다’고 하여 선생에게 ‘천방(천天放)’이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당시 장흥부사는 통정무(通政武) 송중기(宋重器, 재임 1574.4∼1574.11)였으며, 선생의 실록은 조선왕실의 계보를 적어 놓은 전적인 ‘선원보감(璿源寶鑑)’에 게재되어 있다.
*1582년(80세) 부인 오성(筽城:영광의 옛지명) 정씨(丁氏)가 향년 82세로 별세하다. 묘는 선생과 합장하다.
*1584년(82세) 2월 28일 별세. 향년 82세이다. 장지는 연하동 선산이다.
이상은 천방 선생의 간단한 생애의 이력이다.
선생의 생애 이력이 이처럼 간단한 것은, 32세 때 진사에 급제한 것 외에 평생을 관직으로 나아가지 않고 재야의 선비로, 재야의 학자로 보냈기 때문이다.
또 호방하고 초탈한 성정으로 명리(名利)를 탐하거나 하지 않았던 선생으로서 문장을 짓고 작시(作詩)는 했지만 일지(日誌) 등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생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 남명 조식(曺植), 퇴계 이황(李滉) 등 중앙의 거물급 석학들과 교유(交遊)하며 학문 탐구에 전념했고, 나중에는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이 되어 공부하며 당대 재야의 성리학자로 입지하였던 인물이었다,
귀향 후 연하동에 은거하며 수많은 후학(인근 향리에서 수백인의 배우러 오는 자가 무려 수백인었다. ‘遠近鄕隣來者 無慮數百人’-정경달)을 양성하고 학문을 전수하면서 평생을 통해 일군 학문적 세계를 비롯하여 시인(詩人) 또는 문인(文人)으로서 문학의 세계가 비범하여 생전에도 수많은 선비들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사후에도 선생의 평가는 당당하여 당대 장흥 고을의 대표적인 제1의 사표(師表)로 공인되었으며 그가 일군 학문 및 시적(詩的) 세계가 비범했던 것으로 공인받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처사(處士)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일군 학문적·시문(詩文)에서 위업이나 평생토록 쌓은 덕행과 덕망으로 인해, 그는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을 비롯하여 장성의 송계사(松溪祠), 순천시 월계사(月溪祠) 등 3곳의 사당에서 그를 배향할 정도의 큰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제, 선생의 유고집의 서문, 행장, 묘갈명 등 여러 후록, 주변인의 증언록 등의 내용을 통하여 선생의 생애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천방, 효동(孝童)으로 이름 떨쳐
선생은 자(字)는 극기(克己)요, 본관(本貫)은 강릉(江陵)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인 유선보(劉善寶)요, 어머니는 낙안(樂安) 김씨(金氏)였다.
선생은 1502년 3월 3일 생으로, 성장하면서 천품(天稟)이 순수하고 용모(容貌)가 출중하여 대인(大人)의 풍채를 지녔다. 사서(四書-論語, 孟子, 中庸, 大學)와 오경(五經-易經, 書經, 詩 經, 禮記, 春秋) 그리고 사기(史記-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史書, 史乘, 史籍, 史冊)에 박통(博通)하고, 문사(文辭)가 잘 다듬어져 화려하되 사치하지 아니하고 소박하고 순진하되 속(俗)되지 않았다(‘천방선생문집’, 행장–정경달)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한 효동((孝童)이었다.
하여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가 이러한 선생의 소년기를 평하기를, “선생은 어려서부터 ‘베게머리에서 부모님께 부채를 부쳐드리고 귤을 품어 부모님을 봉양한 지극한 효심’, 즉 하늘이 낸 천품으로 인근 향리 등에서 효동으로 불리었다(在髫齡扇枕懷橘之誠 出 於天性 鄕隣稱以孝童)”고 적었다(‘천방선생문집’, 추록2)고 적었다.
여기서 베게머리에서 부채질하고 귤을 품어 부모님께 드린다는 지극한 효심(在髫齡扇枕懷橘之誠)은 중국의 유명한 고사에 나온 말이다. 즉 중국 후한 때 황향(黃香)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나 깊고 간절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효자라고 하였다. 그는 특히 고생을 낙으로 삼아 부지런히 일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모셨는데 여름날 아버지의 베개와 이부자리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해드리고 추운 겨울에는 아버지의 이부자리를 먼저 그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드렸다고 한다. 이 고사가 ‘황향 선침(黃香扇枕)’ 고사이다.
또 육적(陸績)은 중국 후한 말의 관료이자 대학자로, 그가 소년이었을 때, 원술이라는 사람이 귤을 먹으라고 주었는데 귤을 받아든 육적이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품에 간직하려다가 떨구었고, 귤을 품속에 넣은 이유를 묻자, ‘저의 어머니가 귤을 좋아하여 어머니께 드리고자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여 육적은 이후 효(孝)의 대명사가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회귤’의 유래이다.
그러므로 존재 선생은, 천방의 지극한 효심을 ‘황향선침’ 및 ‘회귤’ 유래와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선생은 또 15세 때는 작은 일 등에 걸림이 없이 호방(豪放)하고 호협(豪俠)한 기상이 있어 활쏘기와 칼 쓰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다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등 ‘고문(古文) 과독’(課讀-10세 이상은 매일 과제로 공부하게 하고 30세 이상은 매월 과제를 주어 학문하게 하는 교육법이었다)에서는 경서 등의 뜻을 깊이 이해하려고 하였고, 한 번 보면 바로 외웠을 뿐만 아니라 외운 내용을 종신토록 잊지 않았으며, 말을 하면 언변이 논리가 있어 문장을 이루어 사람들을 자칫 놀라게 하였다(‘천방선생문집’ 묘갈명 병서1, 宋哲憲, 위백규)
20세에 이르러 전의(專意-오로지 한 가지로)로 독서에 전념하여 사람이 지켜야 도리인 의리(義理)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으며, 당시 풍조이던 옛사람의 글귀를 따서 글을 짓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선생의 ‘지극한 자존감’을 이해하게 된다
20세 무렵의 나이에도, 용모가 뛰어난 용맹스러운 자태였고 몸매가 장대하고 키도 훤칠하였으며 언행이 바르고 몸단속을 엄밀하게 하였기에, 비록 선생보다 나이가 많아 어른의 서열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모두 그를 아끼고 존경하는 벗(畏友)으로 인정할 정도였다고 한다(‘천방선생문집’, 序-朴景來, 위백규)
선생의 풍모에 대한 증언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부친(반곡 정경달)을 따라 연하동으로 가서 유 선생을 뵌즉, 신장이 8∼9척이고 수염이 2척 여가 되어 보였다. 의젓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데 음성과 용모가 어질고 사나이다웠다” (余於童穉時 隨父親往煙霞洞 見劉先生 則身長八九尺 髥長二尺餘 儼然端坐 音容宣郞-‘천방선생문집’, 후록-丁鳴說)
진사 이후 과업 폐기, 학문에만 정진
32세 때 선생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에 올랐지만, 과업(科業)을 버리고 과거의 뜻도 과감히 잊은 채 실학(實學)을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하며 연구하였으며(‘潛心實學’ 위백규), 성현의 중요한 말들을 탐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여 식사하는 것도 잊고 지낼 정도였다(‘探究聖賢旨訣 樂而亡食’-宋哲憲)
선생은 특히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보는 것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면서 장구(章句)는 물론 주해(註解)까지 놓치지 않았고, 비록 한 글자의 작은 의문이나 막힘이 있으면 이불 속에서도 깊이 생각에 잠기다 갑자기 깨달아지면 이를 기뻐하고 기록해두었다(宋哲憲).
삼벽(三僻) 넘어서-조식(曹植)‧이황 등과 교유(交遊)
선생은 사마시 급제 후, 더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홀로 실학(實學), 경사(經史) 연구에만 몰두하며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지만, 항상 사우(師友)의 힘이 미치지 않음을 한탄했다.(‘恨無師友之力’-宋哲憲).
그러던 중 당대 퇴계 이황과 비견되는 성리학의 거두였던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 선생의 학풍과 사표로서 위명을 전해 듣고, 먼 길을 걸어 남명(南冥) 조식을 찾아가 그와 교유(交遊)하게 된다.
남명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도학자로서 동시대인인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문을 이루어,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위 학자요 선비였다.
그러한 남명 선생이 천방 선생과 대면하고는 구면처럼 대해 주었고, 당시 남명과 교우(交友)가 깊었던 당대의 대학자였던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1504∼1559)에게 말하길 “유모((劉某)는 나에게 넘치는 벗이다(吾益友也)”고 할 정도였다.
또 선생은 남명에서 그치지 않고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도 찾아간다. 천방을 만난 퇴계는 천방을 만나고 “호남 제일의 선비(湖南第一士)”고 했다.
선생이 70여세일 때 노구를 이끌고 선생보다 34세나 연하인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찾아가 율곡과 사승(師承) 관계를 맺었다. 당시 율곡은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 경기도 파주 율곡촌(栗谷村) 등지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율곡은 선생을 ‘대가(大家)’라고 칭찬했으며, 선생이 귀향할 때 “탄식하며 내 도가 남쪽으로 내려간다(歎吳道之南)‘”고 했다.
천방의 수제자였던 반곡 정결달의 ‘연기(年記)’에는 “천방은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배워 성리학을 깨우쳤다”(劉先生學於南冥曺先生 〔諱植, 字 建中〕 之門, 得性理學-‘반곡정경달 시문집1’, 336면)”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반곡집> 여러 곳에, 반곡의 스승이었던 천방과 관련해서 남명 조식이 언급될 정도여서, 천방 선생과 남명 선생의 교우(交友)는 매우 깊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남명 조식에 대해서 차후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로 한다).
이처럼 천방은 소위 ‘삼벽(三僻 : 존재 선생이 자신이 처한 환경을 한탄하며 토로했다는 말. 곧 지벽地僻, 인벽人僻, 성벽姓僻)’의 고을 장흥 땅’을 벗어난 중앙 무대에서도 당대 대석학들과 교유(交遊)하였고, 특히 남명과 퇴계로부터 학문과 사람됨을 인정받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천방 선생은 많은 학자들과 교우지계(交友之係) 맺고 학문을 강론하곤 했다. 대독 성운, 삼족당 김대유, 황강 이희운, 중봉 조헌, 사계 김장생, 구봉 송익필, 북창 정렴, 지산 조호익, 월정 윤근 수 등 강호 제현들과 막역간의 교우가 되었다.(自此與成大谷運 金三足大有 李黃江 諸賢爲莫逆之交-위백규, ‘천방선생 문집’-유사 유전하여 오는 사적)등이 천방과 교유한 학자들이었다.
천방이 교유(交遊)했던 학자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대곡(大谷) 성운(成運, 1497~1579)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성운은 16세기 당대 속리산 일대를 학문의 무대로 삼으며 재야 선비로 살았던, 전형적인 ‘처사형 사림(士林)’의 입지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로 남명 조식과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그의 학풍과 사상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높은 평가가 있었다. ‘대곡집(大谷集)’을 남겼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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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의 역사인물/천방(天放) 유호인(7) - 천방 유호인의 시 세계를 고찰한다(2)
김선욱 승인 2019.07.19 10:26 댓글 0기사공유하기
천방-‘도덕 실천궁행(實踐躬行)의 대표적인 장흥 성리학자’
‘천방은 이황, 이이, 조식이 인정한 최고의 성리학자로 위명’
格物致知 사상, 觀照의 미학, 正道的 선비의 삶-모든 詩에 투영
<지난호에 이어>
천방의 ‘영소(詠梳-여기서는 ‘소梳:빗’)눈 천방의 다른 시들인 ‘관대冠帶’ ‘검儉’ ‘편鞭:째찍’ 등과 함께 <대동시선大東詩選>(張志淵 編.1-2 /大正7,1918년)에 실리기도 했다.
(劉好仁冠 字克己 賜號天放 江陵人 宣祖甲年進士 // 冠帶-正冠垂帶儼威儀 要在中心敬自持 堪笑世人無人內守 沐貅輕躁更倡技 //梳-<箕雅此詩誤載無名氏> 木梳梳了竹梳梳/亂髮初分虱自除/安得大梳千萬尺/盡梳黔首無餘 //儉-我有龍泉一長劍 寒光直射斗牛間 河當一獻丹墀下 斬斷鯨鯢四ㅒ海安 // 鞭-枯藤爲柄革爲垂 一着能令馬自馳 祗解策他迷策己 前修正軌孰能追)
<대동시선>은 고조선에서부터 한말까지 2,000여 시인의 각체시(各體詩)를 선집하여 만든 것으로, 한시선집 중 가장 방대힌 시선집이다.
이 <대동시선>은 “<동문선> <청구풍아靑丘風雅> <기아箕雅> <동시선東詩選> <소대풍요昭代風謠> <풍요속삼선風謠續三選> <대동명시선大東名詩選> 등 역대의 대표적인 시선집을 토대로 하여 증선(增選)하고 속보(續補)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대동시선>이라 한다”고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시(漢詩)의 전통이 사실상 종장에 이른 당시 현실에서 <대동시선>의 편찬은 편자 개인의 단순한 선시(選詩)의 작업에서 그치지 않고 그동안 한국사 전체의 한시 유산을 총정리하였다는 것에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시선집에서 천방의 시 4편이 게재된 것은 그만큼 천방 한시의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천방의 ‘빗을 읊은 시(詠梳詩)’는 당대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없애야 한다는 우의시(寓意詩)로 당시 시인 묵객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었던 시였다.
하여 유정양(柳鼎養)은 ‘시서2(시(詩序二)’에서 영소시를 평하기를 “…(당시에는)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어둡고 횡포한 풍속이 관리들에게는 만연되었다 것이다. 아, 이제 누가 빗(梳)으로서 그런 자들을 빗긴다는 것인가 처사 (천방)의 시에는 그런 감정이 넘치고 있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천방은 당시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야인, 즉 처사로서 삶을 유지했지만, 성리학자로서 당대 인륜(人倫)과 천륜(天倫)에 어그러져 있는 세태, 사리사욕에 물든 위정자(爲政者)들의 행태 등을 시로써 비판하고 풍자하며 고발하는 이른바 현실 참여주의의 시를 썼던 것이다.
당시 겉만 치장하는 벼슬아치들에 대해 비판하는 시로서 ‘관대공복(冠帶公服)’-‘겉만 꾸미는 자들(外蝕自衆)’이란 시도 이와 다름이 없다.
正冠垂帶儼威儀 관(冠)은 바르고 띠(帶)를 두른 위엄한 것이지만
要在中心敬自持 요컨대 중심에 스스로 공경함을 지켜야 하네
堪笑世無人內守 속을 안 지킨다면 세인들 웃음을 사리
沐貅輕躁更倡技 짐승의 머리나 방정맞은 창기와 무엇이 다르랴
보통 우리가 시(詩), 특히 한시(漢詩)를 생각할 때 공자(孔子)의 시(詩)에 대한 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시(詩)에 대한 정의에서, ‘시로서 흥기한다(興於詩-논어 泰伯篇‘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시로서 흥기하고, 예에서 서며, 음악에서 이룬다)’고 했다.
공자는 또 <시경詩經>에 나오는 시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여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고 했다. 한 마디로 시는 ‘감흥을 일으키고, 삿됨이 없다’는 의미이다.
천방의 시 세계는 선비로서 성리학자로서 성리학의 공부인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사상과 관조의 미학을 잘 드러낸 천부적 시인으로서 면모를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그의 시 소재나 제재가 대부분 사소한 기물이거나 용기거나 짐승이거나 벌레들이었지만, 그러한 시를 읽다 보면 절로 감흥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시들의 주제는 전혀 삿됨이 없다. 인간의 삿됨을 경계하고 인간의 바른 본성을 지향하는 도학적인 가치관을 충언하는 의미가 담긴 시들뿐이기 때문이다.
조식(曺植)-성리학 연구보다 도덕 실천 강조
천방-조식학풍 수용, 시(詩)에서 반영
천방은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은 인간이 우주의 보편타당한 법칙(天理)을 부여받은 것으로 인식했으며 인간성(性)을 본질적으로 신뢰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나치거나 부족한(過不及) 기질(氣質)을 교정하면 선(善)한 본성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보고 그 보편타당한 법칙을 궁구(窮究), 자신의 본성을 다 발휘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원리를 온전히 인지하고 온전히 체득(體得) 위한 방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론을 제시했다. 즉 자연세계와 사물 등 즉 사사물물(事事物物)에 깃들어 있는 이치(理)를 궁구하여 인간의 앎을 확장할 것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이 만개한 16세기, 조선의 3대 성리학자는 이황(李滉, 1501~1570)과 이이(李珥, 1536~1584), 조식(曺植, 1501~1572)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황과 이이가 성리학의 연구와 이론에 치중했다면, 조식은 연구보다 도덕 실천을 중시했다.
조식은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성리학의 문제들이나 이론적 탐구는 제대로 해명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도덕 실천에 더욱 힘쓸 것을 강조하는 학풍을 수립했던 성리학자였다.
조식의 이러한 성리학풍을 이어받았던 학자요 대쪽 선비였던 천방은 성리학이 추구하는 도덕적인 정도(正道)를 걷는 길을 몸소 실천하였던 성리학자였다,
천방은 시들이, 그러한 곧은 선비로서 당연히 지녀야 할 가치, 즉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도덕, 윤리적 가치에 대해 훈계하거나 선비로서 정도(正道)를 가도록 충언하는 시들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사상
천방-거의 모든 시에 반영
특히 천방이 성리학의 격물치지의 공부를 자신이 쓴 거의 모든 시들에서 투영시켰다는 것은 이채롭다.
그는 114편의 시를 남겼다. 300여 편를 작시(作詩)했다고 알려졌으나, 이들 대부분이 임진란등 병화(兵火)로 소실되고 그 일부인 100여 편만 반곡 정경달에 의해 수습되었던 것인데, 이는 참으로 안타깝다.
그런데 이들 시 90%가 화초나 수목 등 자연세계(연꽃, 해바라기, 동백, 국화, 복숭아, 목화, 버들개지, 파초, 살구꽃, 귤, 대추나무, 밤, 배, 곶감, 산포도, 소나무, 매화, 버들 뽕나무, 대나무, 달 등) 그리고 복장(의상, 관대, 모시옷 등), 기물(器物-검, 활, 지팡이, 짚신, 벼루, 먹, 붓, 종이, 병풍, 책상, 활, 갑옷, 투구, 항아리, 뒤주, 병, 부채, 등불 등), 식재료(마늘, 상추, 표주박 등), 가축(말, 개, 고양이, 닭 등), 짐승(호랑이, 쥐, 매, 까마귀, 까치, 꾀꼬리, 제비, 백로, 솔개, 뱁새, 굴뚝새), 벌레(나무좀, 누에, 귀뚜라미, 여왕벌, 매비, 파리, 모기, 벼룩, 거미, 개똥벌레. 나비, 개구리 등)를 소재나 제재로 한 시들이다.
즉 천방이 모든 동식물과 자연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소한 사물들을 소재나 제재로 선정하여 시를 썼다는 것은, 바로 사물의 궁구(窮究)를 추구하던 격물치지의 사상을 시를 통해 표현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역대 한시인들 중에 이처럼 철저하게 격물치지의 사상을 시를 통해 구현했던 시인은 천방이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천방의 이러한 시들은 성리학자들의 수행 방법이었던 바로 격물치지의 의미와 크게 다를 것이 없던 관조(觀照)의 수행을 통해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모든 시들이 나름대로 그 사물들의 고유적이고 개별적이며 특특한 의미를 담고 있고 이러한 의미 규정은 관조나 통찰력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격물치지와 관조(觀照)의 삶
시 작품에 투영하다
성리학자들에게 관조는 매우 중요한 공부 방법이었다.
이미 천지만물에는 이치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사물에 정신을 집중한 채 보고 있으면 사물의 이치가 그대로 나에게 이르러 오며 그걸 통해 활연관통(豁然貫通-불교의 해탈의 경지 같은 의미)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자연을 관조하려고 노력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를수록 자연을 있는 그대로 핍진하게 담아내는 시들이 늘어나게 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년∼1805년)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의 아들 박종채가 아버지에 대해 남긴 기록인 <과정록>에서 관조하려 노력하였던 박지원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연암협에 살 때 아버지는 당을 내려오지 않을 때도 있었는데 그러다 관심이 있는 외물을 만나면 아무런 말도 없이 느긋이 내려다보며 “비록 외물의 지극히 은미한 것, 예를 들면 풀과 짐승과 벌레들은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만들어진 자연스런 오묘함을 볼 수가 있다(雖物之至微, 如艸卉禽蟲, 皆有至境, 可見造物自然之玅.)”고 말해 준다. 사물 안에 이미 만물의 이치가 구비되어 있으니 그것을 보려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조선조에서 특히 초야에 묻혀 살았던 처사(處士)들은 집이나 거주지에 대나무 소나무 등 온갖 수목이나 온갖 화초 등을 심고, 자연과 책을 벗 삼아 소요(逍遙)하며 자적(自適)하기 일쑤였다. 그 속에서 학문연구와 도학적인 사유에 잠겨 우러나오는 관조의 미학을 시로 읊어대곤 하였다. 그러한 시들이 앞에서 열거한 모든 사물과 자연에 대한 시였던 것이다.
처사였으며 실천궁행(實踐躬行)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던 천방이 그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선비요 시인이었던 것이다.
천방의 거주 연하동-
‘유유자적‧관조했던 삶터’
존재 위백규는 천방이 살던 곳을 ‘도학을 강론하거나 연마하던 곳’(先生卜居是洞 以爲道學講 磨之所)이라고 하였다.
반곡 정경달은 “(선생이 거주하던 곳의)…獅子山(제암산)이 명승(名僧)이다. 뫼와 바위, 샘물과 돌들이 골골마다 모두 절승(絶勝)이니, 이 연하동에 홀로 유거(幽居-속세를 떠나 그윽하고 외딴 곳에 묻혀 삶)하지 않으랴. 선영(先塋)이 있으니 곁을 지키고, 조석으로 무덤가의 나무도 가꾸며 몸소 쓸고 살피는 것을 후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권면함이라
…그 마을은 연하(煙霞-고요한 산수의 경치)라 부르고 편액(扁額)은 정정(定靜)이며 연못은 완묘(玩妙)이고 정자 이름은 양호(養浩)라…대저 가벼운 서책을 들고 느릿느릿 무심히 오가니 심중으로 분별(分別)하여 마음을 정(定)하고 경계는 고요한 시기를 얻어 밝은 만상(萬狀)을 적시며 혼혼(混混)히 쉬지 않는 못이 완묘지(玩妙池)다. 눈을 높아 들어 장청을 보고 기상(氣像)이 시원스레 트인 정자가 양호정(養浩亭)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종년(終年)에는 수 권의 서책뿐이니, 선생이라 자처하지 않고, 오는 사람 가르치고, 술을 안마시나 남에게는 취하도록 권하였다. 조용히 다가가면 잠긴 낯빛으로 대상(臺上)에 기대어 해가 질 때까지 그대로 쓸쓸하게 자거나 그러다 깨어나면 신선옹(神仙翁) 이라는 고목같이 자신을 잊은 듯 돌아오고, 세상에도 무심하고 사람들에게도 무정함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학문의 공력(功力)으로 마음을 수양하는 곳이라, 알려고 해도 얻어질 수 없는 곳이다.“ (‘천방선생 문집’ 번곡의 ‘정정당기’에서)
여기서 우리는 연하동에 거주하였던, 자유로운, 그러나 여유로운, 그러나 외롭고 쓸쓸한 한 고고한 처사요 고독한 선비의 삶을 능히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니 그의 관조의 삶과 관조의 미학이 담긴 시들의 배경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율곡은 연하동을 방문해 시를 썼을 것으로 추측되는 ‘호연정에서 달을 보다(浩然亭見月)’라는 시에서,
千放空疎客 천방은 소원(疏遠)하고 공허(空虛)한 나그네
逍遙江上山 강위의 산을 할 일 없이 거니네
登臨夕陽盡 높은 곳에 올라 저녁노을이 지면
月出海雲間 구름바다 사이로 뜨는 달을 보네
라고 읊었다.
이 시에서 묻어나는 느낌은 치열하게 관조의 삶을 살았을 한 위대한 선비요 시인의 모습이다.
<다음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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