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4

[박장영_종가이야기]퇴계종택

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 [박장영_종가이야기]퇴계종택 박장영

(cultureline@naver.com)2017-05-22     박장영     

 종택이 있는 곳 퇴계종택(退溪宗宅)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번지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 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종택은 도산면 도산파출소 맞은편 육산문학관 방면으로 접어들어 개천을 따라 2.6㎞ 들어가면 있다. 또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새로 난 도로를 따라 가도 된다.   당호의 유래 종택의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추월한수(秋月寒水)라는 말은 송나라의 주자가 "공경히 생각건대 천년을 내려온 마음이 가을 달빛에 비치는 한수와 같다." 하여 옛 성인의 마음을 말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퇴계선생의 제자인 고봉 기대승이 선생을 일러󰡐선생지신(先生之心) 여추월한수(如秋月寒水)󰡑라 하여 퇴계선생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였다.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 이 건물은 퇴계 선생의 손자인 동암 이안도 공이 지은 집으로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1715년(숙종41)에 정자인 추월한수정을 건축하였다. 이 정자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창설재 권두경 공이 퇴계 선생의 도학을 추모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 후 퇴계 선생의 10대 손인 고계 이휘녕 공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는데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다 불타버렸다. 지금의 종택은 1926에서 1929년 사이에 13대손 하정 이충호 공이 이곳에 세거하던 임씨들의 종택을 매입하여 이건하였으며 ‘추월한수정’도 옛 건물처럼 재건하였다. 야산을 등지고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동남동향으로 자리 잡은 이 종택은 5칸의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이 있고, 우측에 5칸 솟을대문과 한수정이 있으며 뒤에 사당이 있다.           1) 사랑채와 안채 본채인 ㅁ자형 정침은 사랑마당을 면한 사랑채가 전면에 있고 뒤에 안채부분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안채부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좌익사는 앞에서부터 중문간, 광, 방, 문간이 각각 1칸이고 우익사는 창고, 방, 방, 문간이 각각 1칸이다. 이 건물에서 중문을 전면에 내지 않고 우측면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통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반가에서 여성들의 생활공간이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설치하는 내외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정침은 총 34칸으로 민도리집이고 기둥은 방주를 세


  • [박장영_종가이야기]퇴계종택
  • 박장영(cultureline@naver.com)2017-05-22

 

 

박장영

 

 

종택이 있는 곳
퇴계종택(退溪宗宅)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68-2번지에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 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종택은 도산면 도산파출소 맞은편 육산문학관 방면으로 접어들어 개천을 따라 2.6㎞ 들어가면 있다. 또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새로 난 도로를 따라 가도 된다.

 

당호의 유래
종택의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추월한수(秋月寒水)라는 말은 송나라의 주자가 "공경히 생각건대 천년을 내려온 마음이 가을 달빛에 비치는 한수와 같다." 하여 옛 성인의 마음을 말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퇴계선생의 제자인 고봉 기대승이 선생을 일러󰡐선생지신(先生之心) 여추월한수(如秋月寒水)󰡑라 하여 퇴계선생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하였다.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
이 건물은 퇴계 선생의 손자인 동암 이안도 공이 지은 집으로 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1715년(숙종41)에 정자인 추월한수정을 건축하였다. 이 정자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창설재 권두경 공이 퇴계 선생의 도학을 추모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 후 퇴계 선생의 10대 손인 고계 이휘녕 공이 구택의 동남쪽 건너편에 새로 집을 지어 옮겨 살았는데 1907년 왜병의 방화로 두 곳 종택이 다 불타버렸다.

지금의 종택은 1926에서 1929년 사이에 13대손 하정 이충호 공이 이곳에 세거하던 임씨들의 종택을 매입하여 이건하였으며 ‘추월한수정’도 옛 건물처럼 재건하였다. 야산을 등지고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동남동향으로 자리 잡은 이 종택은 5칸의 솟을대문과 ㅁ자형 정침이 있고, 우측에 5칸 솟을대문과 한수정이 있으며 뒤에 사당이 있다.

 

 

 

 

 

1) 사랑채와 안채
본채인 ㅁ자형 정침은 사랑마당을 면한 사랑채가 전면에 있고 뒤에 안채부분이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안채부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좌익사는 앞에서부터 중문간, 광, 방, 문간이 각각 1칸이고 우익사는 창고, 방, 방, 문간이 각각 1칸이다.
이 건물에서 중문을 전면에 내지 않고 우측면에 중문을 두어 안채로 통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반가에서 여성들의 생활공간이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설치하는 내외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정침은 총 34칸으로 민도리집이고 기둥은 방주를 세웠으며 5량가에 제형판대공을 올렸다.

 

2) 추월한수정
계단이 좌우에 설치된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앉아 있는 추월한수정은 정면이 5칸 반이고, 측면이 2칸 반인데 5량가에 제형판대공을 올린 민도리집이다. 이 현판은 향산 이만도 선생의 손자인 이고 이동흠 공의 글씨이다.

 

3) 사당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전 벽면은 반 칸이 약간 넘게 뒤로 물려 전퇴를 두었다. 기단은 화강석이고 지붕은 팔작기와 이며 내부에는 퇴계 선생의 불천위 신위를 비롯하여 4대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관련인물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은 조선중기의 대유학자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진성이며,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옹(陶翁)이다. 예안 온혜의 노송정 종택에서 진사 식(埴)의 제7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춘천박씨가 공자가 대문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하여 태실이 있는 노송정 큰 댁 대문을 ‘성림문’이라 한다.
선생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엄한 가르침 속에 자랐다. 6세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12세 때는 숙부인 송재(松齋)에게 논어를 배웠다. 20세 무렵에 주역 등을 공부하였는데 침식을 잊으며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1523년(중종 18)에 성균관에 들어가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어 박사, 전적, 지평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문학, 충청도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1543년에는 성균관사성에 이르렀다. 이 때 낙향하려고 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1546년 예안 하계의 동암 곁에 양진암을 짓고 토계의 지명을 퇴계로 고치고 아호로 삼았다. 그 후 대사성, 형조·병조참의, 부제학, 공조판서를 거쳐 1568(선조 1)에는 우찬성을 역임하고 양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듬해 정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으로 고사하고 귀향하여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관직에 무려 140여회나 임명되었으나 79회를 사임하였으며 높은 관직보다는 낮으면서도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할 수 있는 외직을 주로 봉행하였다.
선생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성(誠)’을 기본으로 하고, 일생동안 ‘경(敬)’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키고 이기호발설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였다. 선생은 계상서당과 도산서당을 건립하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선생의 학풍은 뒤에 문하생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의  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이는 이이의 기호학파와 사상적으로 대립된다. 후일 선생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직자로, 학자로, 교육자로 선생의 일생은 만세의 사표가 되었으며, 선생이 모신 중종, 명종, 선조로부터도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76(선조 9)에 문순공의 시호를 받았다.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도산서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모셔졌다.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에『퇴계전서: 수정천명도설, 성학십도, 자성록, 심경석의, 주자서절요, 상례문답, 사칠속편』외 많은 저술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도산십이곡』, 글씨에『퇴계필적』이 있다.

 


전하는 이야기
1) 퇴계와 두향
퇴계 선생은 매화를 매우 사랑해서 매화를 노래한 시가 1백수가 넘는다. 이렇게 놀랄 만큼 큰 집념으로 매화를 사랑한데는 바로 단양군수 시절에 만났던 관기 두향(杜香) 때문이다. 단양군수로 부임한 퇴계 선생은 당시 48세였고, 두향의 나이는 18세였다. 그러나 두향은 첫눈에 퇴계 선생에게 반했지만 고매한 유학자라 두향의 애간장만 녹았다. 두향은 시(詩)와 서(書)와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매화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는 일이 잦아졌고, 앞서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보낸 선생은 한 떨기 설중매와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이 경상도 풍기 군수로 옮겨가자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은 겨우 9개월 만에 끝이 났다. 두향은  짧은 인연 뒤에 찾아온 갑작스런 이별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고, 이 이별은 1570년 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이어진다. 선생이 단양을 떠날 때 두향이가 준 수석 2개와 매화 화분 하나로 마음을 달랬다. 특히 매화 화분은 퇴계 선생에게 큰 기쁨으로, 선생은 평생 동안 이 매화를 가까이 두고 사랑을 쏟았다. 선생의 모습이 초췌해지자 매화에게 그 모습을 보일 수 없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했다고 한다. 한편, 선생이 떠나자 두향은 간곡하게 청하여 관기에서 빠져나와 퇴계 선생과 자주 갔었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치고 선생을 그리며 여생을 살았다고 한다.


이토록 애달픈 두 사람의 사랑은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남겼던 한 마디에서도 잘 드러난다.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매화에 물을 주어라." 고 했다 한다. 두향을 그리는 선생의 집에는 매화향이 가득하고, 선생의 가슴에는 두향이 가득했으리라. 퇴계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4일간을 걸어서 선생의 집으로 오고, 모퉁이를 돌면 상갓집이나 순간 자신이 나타나면 선생께 누가 될까 눈물을 삼키며 다시 단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 상이 끝나던 날, 선생만 생각하며 지내던 두향은 저승에서 다시 모시겠다는 일편단심으로 자신의 유해를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가 강선대(降仙臺) 아래에 묻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26세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유언에 따라 400여 년 동안 그 곳에 묻혀 있다가 충주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기게 되자 퇴계의 후손들이 두향의 묘를 단양팔경중의 하나인 옥순봉(玉荀峰) 맞은편 제비봉 기슭에 이장하고 두향지묘(杜香之墓)라는 오석 묘비를 세웠다.


2) 퇴계 선생에 얽힌 풍수 전설
옛날에 퇴계 선생의 5대조가 진보현 아전으로 있을 때, 풍수에 밝은 원님이 아전인 5대조를 대동하고 산천을 둘러보다가 감람골[청송군.파천면.신기리]의 지세를 눈여겨보고 돌아와 아전에게 말하기를 "달걀을 가지고 가서 봉우리 위에 파묻고 자시까지 기다려 닭이 우는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고 오라"고 하였다. 

 

아전은 원님이 시키는 대로 했고, 자시가 되자 정말 달걀이 병아리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병아리를 보고 놀란 것도 잠시, 아전은 이내 다른 생각을 품었고, 그는 그곳에 일부러 썩은 달걀을 묻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원님께 아뢰었다. 다음날 원님은 감람골에 자신이 지시했던 봉우리에 올라가 직접 땅을 파 보았다. 땅속에서 썩은 달걀을 꺼낸 원님은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썩은 달걀이니 이내 수긍하고는 그 일을 잊어 버렸다. 후에 원님은 임기가 끝나 승진하여 한양으로 올라갔다. 

 

달걀이 병아리가 되어 나온 자리라는 사실을 혼자서만 알고 있던 아전은 훗날 부친상을 당하자 그 시신을 그 산 그 자리에 안장 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관을 묻고 돌아서면 관이 땅 위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깊이 파고 다시 묻어도 관이 자꾸만 땅 밖으로 튀어 올랐다. 관을 묻으면 다시 관이 튀어 오르고, 묻고 나면 또 튀어 오르기를 여러 번, 관을 묻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때야 아전은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아전은 그길로 한양에 있는 옛 원님을 찾아가 죽을죄를 지었다며 그 때의 사실을 이실직고 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원님은 ‘그러면 그렇지.......명당은 주인이 따로 있는 법이거늘 이것도 인연인가.’하며 자신이 입었던 헌 관복을 내어 주면서,󰡒그 터는 대인이 묻힐 곳이니 당상관의 관복을 입혀서 묻으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전은 원님에게 조아려 백배 감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친의 장례를 치루니 과연 아무런 탈이 없고, 명당의 음덕인지는 몰라도 당대에 발복을 받아 본인은 안사공신 송안군이 되었고, 6대만에 퇴계 선생 같은 훌륭한 대학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3) 며느리 재가시킨 이야기
퇴계선생의 아들이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한창 젊은 나이의 맏며느리는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었다. 퇴계 선생은 홀로된 며느리가 늘 걱정이었다.

"남편도 자식도 없는 젊은 며느리가 어떻게 긴 세월을 홀로 보낼까?"

그리고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퇴계 본인의 집이나 사돈집 모두에게 누(累)가 될 것이기에, 한밤중이 되면 자다가도 일어나 집안을 순찰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 선생은 며느리의 방으로부터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점잖은 선비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며느리의 방을 엿보지 않을 수 없었다. 몰래 며느리의 방을 엿보니, 젊은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 놓고 짚으로 만든 선비 모양의 인형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었다. 기이한 모습에 퇴계 선생은 방문 쪽으로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며느리는 인형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고, 인형 앞 잔에 술을 가득 채운 며느리는 󰡒여보, 한 잔 잡수세요.󰡓라고 하고, 인형을 향해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흐느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남편 인형을 만들어 대화를 나누는 며느리…,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흐느끼는 며느리….

이 장면을 본 퇴계 선생은 '윤리는 무엇이고 도덕은 무엇인가?  젊은 저 아이를 수절시켜야 하다니... .' 하고 탄식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저 아이를 윤리 도덕의 관습으로 묶어 수절시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다, 인간의 고통을 몰라주는 이 짓이야말로 윤리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인간이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 저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이튿날 퇴계 선생은 사돈을 불렀다. 그리고는 단호하게 사돈을 향해 말을 건넸다. 

 

"자네, 딸을 데려가게."
"아니, 내 딸이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 없네. 무조건 데려가게."


친구이면서 사돈관계였던 두 사람이기에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었지만, 딸을 데리고 가면 두 사람의 친구 사이마저 절연하는 것이기에 사돈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보게 거 다짜고짜 데려가라니..이게 무슨 소린가? 안되네! 한번 짝을 지어 원앙금침을 함께 썼으면 죽어서도 그 집 혼이 되는 일이 당연한 일이거늘 양반 가문에서 이 무슨 일인가?"
"나는 할 말이 없네. 자네 딸이 내 며느리로서는 참으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지만 어쩔 수 없네. 데리고 가게."
"자네 지금 내 딸을 데려가는 것이 나와 어떻게 될 일인지 알고 하는 얘긴가?"

 

퇴계 선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 퇴계선생은 사돈과 절연하고 며느리를 보냈다.
몇 년 후 퇴계선생은  한양으로 올라가다가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날이 저물기 시작했으므로 한 집을 택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그런데 저녁상을 받아보니 반찬 하나하나가 퇴계선생이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더욱이 간까지 선생의 입맛에 딱 맞아 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이 집 주인도 나와 입맛이 비슷한가 보다.' 퇴계 선생은 상을 물리고는 배부른 저녁식사에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상도 마찬가지였다. 반찬의 종류는 어제 저녁과 달랐지만 여전히 입맛에 딱 맞는 음식들만 올라온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 식성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토록 음식들이 내입에 맞을까? 혹시 며느리가 이 집에 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퇴계선생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막 떠나가려는데 집주인이 버선 두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양 가시는 길에 신으시라." 며 주었다. 신어보니 퇴계선생의 발에 꼭 맞았다.' 아! 며느리가 이 집에 와서 사는구나.' 퇴계 선생은 확신을 하게 되었다.


'집안을 보나 주인의 마음씨를 보나 내 며느리가 고생은 하지 않고 살겠구나. '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짐작만 하며 대문을  나서는데 한 여인이 구석에 숨어 퇴계선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퇴계선생은 이렇게 며느리를 재가 시켰다.
 

 

 

 

 

 

글쓴이 : 박장영
현 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전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콘텐츠연구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