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渓李滉と日本
기자명 아시아씨이뉴스
입력 2017.04.04
広島大学講師 教育学博士金炫勇(キム・ヒョンヨン)
日韓思想史において一番大きな影響を与えた人物の一人は、退渓李滉(トェグェ イ・ファン1501-1570)であろう。李滉(李退渓とも)は、朱子(1120-1200)が集大成した儒学を継承・発展させ、独自的な哲学を樹立した学者であり、「東洋小朱子」、あるいは「東洋の聖人」とも称されている。彼は朝鮮王朝時代の十八賢の一人として成均館大成殿に奉安されている。また、現在韓国の千ウォン紙幣の表には李滉の肖像が描かれており、裏には彼が建てた陶山書院が印刷されている。
李退渓の著書とその思想は、朝鮮(韓国)だけではなく、日本の江戸時代から現代に至るまで数多くの学者や文人たちに影響を与えた。江戸時代の政治、経済、社会、文化、教育など、社会全般の土台を整えたのは儒教であり、その儒教の中身は退渓朱子学だ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また、退渓が人格形成の具体的な実践方法として示した「敬」と「礼」は、日本の武道思想の成立にも大きく寄与している。たとえば、日本の武道伝書にみられる敬思想と「礼に始まり礼に終わる」という日本武道特有の礼法は、退渓思想を受容した結果である。
退溪李滉(韓国学中央硏究所蔵)
これだけではない。退渓思想は日本の近代化を導いた熊本実学や明治維新にも影響を与えており、また近代化期に日本の教育の原動力であり、精神的な柱となった「教育勅語」の成立にも寄与している。このように、退渓思想は、日本文化史の形成に大きく貢献したにもかかわらず、現代の日本人は退渓について、特定の人以外はあまり知らない。
朝鮮朱子学の伝来
日本に朝鮮朱子学(退渓学)が伝来したきっかけは、対馬藩の文書偽造事件がそのスタートである。宣祖23年(1590)、秀吉は対馬を通して「明国を服属させるつもりなので,朝鮮はその案内役をせよ(仮道入明)」という脅迫文書を朝鮮に渡すように命じる。しかし、朝鮮との貿易を重視していた対馬藩主の宗義調(1532-1589)と義智(1568-1615)の父子は、新政権樹立・祝賀使節団派遣を要請する内容に改作した。結局、宣祖23年(1590)、正使黄允吉(ファン・ユンギル)と副使金誠一(キム・ソンイル)などの朝鮮使節団が来日し、同年12月3日、秀吉に会った。このとき、金誠一が日本に朝鮮朱子学(退渓学)をはじめて紹介することになる。金誠一は、李退渓門下の三傑中の一人と呼ばれた人物である。
藤原惺窩(東京国立博物館所蔵)
その後、朝鮮朱子学の第二次伝来は、朝鮮出兵(韓国では任辰倭乱)である。 朝鮮朱子学を日本に伝えた人物として姜抗(カン・ハン)が有名である。宣祖30年(1597)9月、姜抗は眷族10余名と一緒に日本の藤堂高虎の捕虜となった。姜抗は伏見城に移監されたが、そこで、後で日本近代儒学の開祖者となる藤原惺窩(1561-1619)に出会う。そもそも惺窩は禅宗の僧侶であったが、朝鮮朱子学、特に退渓学に接し、儒学者へと改宗した。また、惺窩が受け入れた退渓学は、惺窩の門人の林羅山(1583-1657)を通して、江戸社会の文化発展に大きく寄与することになる。羅山は、江戸文化を開いた人物として評価されている。その後、退渓学は、江戸初期から中期にかけて江戸および京都を中心に朱子学を広めた山崎闇斎(1618-1682)、土佐と熊本で実学を開いた大塚退野(1678-1750)、明治維新後の新政権に参与した横井小楠(1809-1869)、そして日本の教育の原動力になった「敎育勅語」を制定した元田東野(1818-1891)などに継承された。このように、退渓の思想は、日本に西洋文物が流入される以前まで日本社会の文化および思想的基盤になっている。
退渓の著書『自省錄』
宣祖23年(1590)、朝鮮使節団を通して朝鮮朱子学をはじめて接した日本の学者たちは退渓の著書を入手しようと努力した。退渓の著書は、朝鮮出兵を通して一部入手したが、そのほとんどは江戸初期に対馬藩を通して日本に入った。退渓の著書の中、特に『自省錄』は、藤原惺窩と林羅山の改宗に直接影響を与えたものである。『自省錄』は、門人や友人に与えた約二百通の書簡中から退渓自身が選んで、自身の考えや反省を加えた備忘録である。興味深いことに、『自省錄』は、母国の朝鮮より日本の儒学者の間で重んじられ、訓点を付けた和刻本が日本で先刊行された。このような理由から、一般的に『自省錄』は日本語版が底本として用いられている。また、『自省錄』は江戸時代から明治維新期にかけて日本全国で朱子学の教材として重んじられた。最近、李退溪著・難波征男校注,『自省錄』,平凡社(2015)が出版されている。江戸時代の日本の禅僧と陽明学者が自分の道をかえるほど、大きな霊感と悟りの感動を感じたいと思う方は一読をお勧めしたい。
退渓学の現代的な価値
われわれは、「儒教」というと古くて、非現実的な考えであると思いがちである。一体、退渓学の現代的な価値は何だろうか。退渓李滉の魅力は、退渓自身終始一貫して自分の考えと生き方が一致できるように努力・実践したところにある。すなわち、退渓学は理論と実践、量と質、技と心、自然科学と人文科学をともに志向すること、また偏らないことを強調しており、普遍的な課題を述べている。今日の社会は、量的成長、成果主義、自然科学に偏り、質的成長、心の修養、人文科学などを軽視する傾向が顕著にみられる。退渓学は、われわれの社会とその構成員たちが正しく成長する方法として、とこにも偏らないこと、均等な成長を志向するべきであると教え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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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과 일본
기자명 아시아씨이뉴스 입력 2017.04.04 16: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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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대학 강사 교육학 박사 김희용(김현영)
한일사상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은 퇴계이황(토계이환 1501-1570)일 것이다. 李滉(이퇴계 모두)는 주자(1120-1200)가 집대성한 유학을 계승·발전시켜 독자적인 철학을 수립한 학자이며, '동양 코주자' 혹은 '동양의 성인' 모두 칭한다. 그는 조선왕조시대의 18현의 한 사람으로 성균관 대성전에 봉안되고 있다. 또 현재 한국의 천원지폐 표에는 이황의 초상이 그려져 있으며 뒤에는 그가 지은 도산서원이 인쇄되어 있다.
이퇴계의 저서와 그 사상은 조선(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에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학자와 문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에도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의 토대를 정돈한 것은 유교이며, 그 유교의 내용은 퇴계주자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퇴계가 인격형성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으로 나타낸 '경'과 '예'는 일본의 무술사상의 성립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무술전서에서 볼 수 있는 경사상과 ‘예로 시작하여 예로 끝난다’는 일본 무도 특유의 예법은 퇴계사상을 수용한 결과이다.
퇴溪李滉
이것만이 아니다. 퇴계 사상은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구마모토 실학이나 메이지 유신에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또한 근대화기에 일본의 교육의 원동력이며, 정신적인 기둥이 된 「교육 훈어」의 성립 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처럼 퇴계사상은 일본문화사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인은 퇴계에 대해 특정인 이외에는 별로 모른다.
조선 주자학의 전래
일본에 조선 주자학(퇴계학)이 전래한 계기는 쓰시마 번의 문서 위조 사건이 그 시작이다. 선조 23년(1590), 히데요시는 쓰시마를 통해 “명국을 복속시킬 생각이므로, 조선은 그 안내역을 하라(가도 입명)”라는 협박 문서를 조선에 건네달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조선과의 무역을 중시했던 쓰시마 번주의 종의조(1532-1589)와 요시토모(1568-1615)의 부자는 신정권 수립·축하사절단 파견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개작했다. 결국 선조 23년(1590) 정사 황윤길(황윤길)과 부사금 성일(김성일) 등 조선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해 같은 해 12월 3일 히데요시를 만났다. 이때 김성일이 일본에 조선주자학(퇴계학)을 처음 소개하게 된다. 김성일은 이퇴계문 아래 삼걸 중 한 명으로 불린 인물이다.
후지와라 히나와(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이후 조선주자학의 제2차 전래는 조선출병(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이다. 조선 주자학을 일본에 전한 인물로 강항이 유명하다. 선조 30년(1597) 9월 강항은 민족 10여명과 함께 일본의 도도 타카토라의 포로가 되었다. 강항은 후시미성으로 이감되었지만, 거기서, 나중에 일본 근대 유학의 개조자가 되는 후지와라 히나와(1561-1619)를 만난다. 원래 오와와는 선종의 스님이었지만 조선 주자학, 특히 퇴계학에 접해 유학자로 개종했다. 또, 오와가 받아들인 퇴계학은, 오와의 문인의 임라산(1583-1657)을 통해서, 에도 사회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나산은 에도문화를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퇴계학은, 에도 초기부터 중기에 걸쳐 에도 및 교토를 중심으로 주자학을 전파한 야마자키 암사이(1618-1682), 토사와 구마모토에서 실학을 연 오오츠카 퇴노(1678-1750), 메이지 유신후 의 신정권에 참가한 요코이 코쿠스(1809-1869), 그리고 일본의 교육의 원동력이 된 ‘소육장어’를 제정한 모토다 히가시노(1818-1891) 등에 계승되었다. 이처럼 퇴계의 사상은 일본에 서양문물이 유입되기 이전까지 일본사회의 문화 및 사상적 기반이 되고 있다.
퇴계 저서 '자성녹'
선조 23년(1590) 조선사절단을 통해 조선주자학을 처음 접한 일본 학자들은 퇴계 저서를 입수하려고 노력했다. 퇴계의 저서는 조선 출병을 통해 일부 입수했지만, 대부분은 에도 초기에 쓰시마번을 통해 일본에 들어갔다. 퇴계의 저서 속, 특히 '자성 녹'은 후지와라 사와와 임라산의 개종에 직접 영향을 준 것이다. '자성 녹'은 문인이나 친구에게 준 약 2백통의 서한 중에서 퇴계 자신이 골라 자신의 생각이나 반성을 더한 비망록이다. 흥미롭게도 '자성 녹'은 모국의 조선보다 일본 유학자들 사이에서 무거워지고 훈점을 붙인 일본 각본이 일본에서 선간행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반적으로 '자성 녹'은 일본어판이 저본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자성 녹'은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기에 걸쳐 일본 전국에서 주자학 교재로 중점을 받았다. 최근 이퇴계저·난바 정남교주, '자성 녹', 평범사(2015)가 출판되고 있다. 에도시대의 일본 선승과 양명학자가 자신의 길을 바꿀수록 큰 영감과 깨달음의 감동을 느끼고 싶은 분은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퇴계학의 현대적인 가치 우리는
, 「유교」라고 하면 낡고,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도대체 퇴계학의 현대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퇴계 이황의 매력은 퇴계 자신의 시종 일관되게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실천한 곳에 있다. 즉 퇴계학은 이론과 실천, 양과 질, 기술과 마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함께 지향하는 것, 또 치우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보편적인 과제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사회는 양적 성장, 성과주의, 자연과학에 치우쳐 질적 성장, 마음의 수양, 인문과학 등을 경시하는 경향이 현저하게 보인다. 퇴계학은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제대로 성장하는 방법으로서 사촌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균등한 성장을 지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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