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유교 (儒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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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 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1]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육왕학(陸王學) 또는 왕학(王學)이라 불렸다. 육왕학(陸王學)은 육구연(陸九淵, 1139~1192)의 학풍을 이어 왕수인이 대성한 유학(儒學)을 뜻하고, 왕학(王學)은 왕수인의 유학을 뜻한다.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 지식과 실천의 일치)은 양명학의 3강령이다.[2]
역사[편집]
양명학 이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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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학풍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수나라나 당나라 이전에는 경서의 음독이나 훈고(단어의 의미)를 중시한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때문에 학자들에 의해 유교 경전에 담겨진 공자나 맹자등의 본래 의미와 달리 왜곡되었고, 송나라 때 이르러 두 성인들이 지은 문장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따라서 학자들은 수, 당나라 이전의 훈고학을 가르치면서도, 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고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송나라 시대 이후의 유교 사상은 훈고학에서 주자학으로 새로운 학파가 생겨났다.
주자학이 중요시한 것은 훈고학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졌던 성인들의 말이나 경전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수 많은 주석서들과 탁본들을 교차 비교 검증하여 문장의 본의미에 맞게 해석하고 책들을 새롭게 편집 새 경전을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이 새 경전들은 「사서」라고 불리는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책은 「예기」로부터 분리된 「대학」과 「중용」, 그리고 이 책들보다는 하위 취급을 받고 있던 「논어」와 「맹자」 이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경전들은 내용이 짧고 잘못된 해석을 고치는 데 적당했기 때문에 이용되었다. 특히 주자학이 맹자의 「성선설」을 중요시하는 등 이 주자학은 중국 여러 지역에 점차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의 여러 지역에 퍼진 까닭은 주자학이 왕이 집권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은 중국 전역뿐만이 아니라 조선,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주자학도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 전역으로 퍼지긴 했지만, 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왕들은 왕권을 다졌고, 세월이 흘러 주자학에 대한 주석서가 만들어지고 주자학을 근본으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이 만들어져 학풍은 오히려 훈고학이 성행하던 때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인들의 본래 의미가 전혀 다른 왕의 집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주자학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어버린 것이다.
양명학의 등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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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은 군주들의 황권, 왕권 강화의 재료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한 학자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학자였다.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양명학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주자학은 정치학, 존재론[3], 주석학[4], 윤리학[5], 방법론[6] 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적인 학파였다. 유교에서 윤리학적 측면이 가장 중요했던 만큼 양명학은 그 중의 윤리학 및 방법론에 중점을 두고 연구하던 학파였다.
전개[편집]
중국[편집]
중국에서는 왕수인의 제자들이 양명학을 많이 발전시켰다. 그렇지만 양명은 공자가 그의 제자들을 가르쳤던 방식을 따라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각자의 재질이나 습성에 따라 가르쳤다. 누구에게는 본체를 강조하는가 하면, 누구에게는 정반대로 공부를 강조하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양명이 죽은 이후 제자들이 받아들인 학설의 차이에 따라 크게 귀적파(歸寂派), 수증파(修證派), 현성파(現成派)로 나뉘었다.[7] 그 뒤 양명학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 나갔다.
양명우파[편집]
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正統派)로 간주되었다. 귀적파와 수증파가 우파에 속한다.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는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가 아니고 마음이 발동할 때 이미 그 마음은 이(理)라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의 악폐(惡弊), 즉 사욕(私欲)을 극복하여서 마음을 양지(良知) 그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유파는 양명의 〈4구결(四句訣)〉에서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라 한 것을 심(心)의 본체는 지선무악(至善無惡)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성선설(性善說)과 타협하고, 심(心)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양명 심학(陽明心學)으로부터 떠나서 점차로 주자학적 이(理)를 문제로 하여 실제적·현실적 연구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양명의 문인 전서산(錢緖山, 1496~1574)이 왕용계(王龍溪, 1498~1583)와 〈4구결〉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분파한 이후, 우파에는 추수익(鄒守益, 1491~1562), 나홍선(羅洪先, 1504~1564), 유종주(劉宗周, 1578~1645) 등이 있었다.
양명좌파[편집]
양명학 유파의 하나이다. 현성파가 여기 속한다. 이 파의 왕용계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는 것은 의(意)의 움직임이며, 선(善)을 지(知)하고 악(惡)을 지(知)하는 것은 양지(良知)요, 선(善)을 하고 악(惡)을 버리는 것은 격물(格物)이라 한다는 왕양명의 〈4구결〉에 대하여, 이것은 일반 사인(士人)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설치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의 실천적 주체의 입장, 즉 실천을 주로 하는 도(道)·이(理)에의 오입(悟入) 내지는 그것의 체득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意)·지(知)·물(物)에 선악의 대립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학문은 오득(悟得)만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왕용계는 마음이 본래 무선무악(無善無惡)하면 그때 발하는 행위는 양지(良知) 그것이며, 따라서 양지는 배우지 않고 사려하지 않아도 사람이 본래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고방식은 이 파의 이탁오에게 전해지면서 한 걸음 나아가 적극적인 인욕(人欲)의 긍정으로 발전하였다. 이 파의 특색은 유(儒)·불(佛)·도(道) 3교의 혼융, 선학적(禪學的)경향, 소농(小農)·도장(陶匠)·나무꾼·염정 등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서민 교육 실천, 전통의 부정이나 반체제적(反體制的)·신비적인 점 등에 있었다. 이 파는 특색있는 사조를 형성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사상 내용을 갖지 못하고 공론적·신비적 경향만을 강조하다 오래지 않아 소멸하였다. 왕용계, 이탁오 외에 왕간, 왕벽(王檗-東崖, 1510-1587), 안균(顔鈞-山農, 생몰년 미상), 양여원(梁汝元), 나여방(羅汝芳-近溪, 1515-1588) 등이 이 파에 속하였다.[8]
그러나 청나라 시대부터 양명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증학에 밀려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양명학은 성리학을 약간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갈수록 쇠퇴해 갔다. 이후의 옹정제, 건륭제의 시대를 지나면서 청나라의 황제들은 성리학을 더욱 확립해 양명학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듯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메이지 유신으로 양명학의 영향이 중국에도 다시 부활했다. 1840년을 주기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개혁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양명학이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일본에서 양명학이 역수입되었다. 양명학은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조선[편집]
박상(朴祥, 1474~1530)의 《눌재집(訥齋集)》연보 48세 조에 “왕양명 수인의 《전습록》을 변(辨)하다. 명의 학설이 동래(東來)하였는데 동유(東儒)들은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으나 선생이 그것을 보고 선학(禪學)이라 변척하여 십청(十淸) 김세필(金世弼, 1473~1533)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삼절시(三絶詩)가 있었다.”는 내용을 볼 때 양명학 전래 시기는 중종 16년(1521년) 이전이다.[9][10][11] 이후 16세기∼18세기에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찬·반 논쟁이 전개되었다.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그 도입을 억제하고, 양명학 찬성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異端)’이라고 규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는데,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비판했다. 양명의 《대학》 친민설, 심즉리설도 여러 논변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 중에 양명학의 가장 핵심 논지인 치량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에서 그가 양명의 모든 전적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12] 또, 유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그 뒤로 퇴계의 문하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체가 양명학을 배척하여 양명학은 조선에 발 딛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는 남언경(1529년 1월 5일(음력 1528년 11월 25일)~1594년 7월 13일(음력 5월 26일)[13])과 이요가 있다. 그들을 이어 장유(1587~1638), 최명길이 미미하나마 연구했으며, 특히 장유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하였다.[14]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이후 정제두(1649~1736)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근대 초 정인보·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이어진다.
일본[편집]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반체제적인 성격을 가져 혁명가들이 주로 양명학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또는 양명학을 연구하게 되면 혁명적인 지향이 되기 쉽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양명학 역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카에 도주나 구마자와 반잔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에도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쳐서 양명학은 이후 더 발전했다. 양명학과 관련한 책이나 잡지는 수없이 만들어졌으며, 양명학 주요 책은 쇠퇴하고 있던 중국에 역수입 되었다..
양명학의 근본 사상[편집]
양명학의 사상은 《전습록(傳習錄)》, 《주자만년정록》, 《대학문(大學問)》[15] 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심즉리[편집]
심즉리(心卽理)는 양명학의 윤리학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성(태어날 때 생겨난 순수한 선성)과 정(감정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대면시킨 마음 그 자체가 리와 다름없다고 하는 사상이다.[16]
치양지[편집]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왕수인이 독자적으로 만든 사상이다. 치양지란 양지를 전면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양지에 근거하는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 되지 않는 말이다. 마음은 선악을 넘은 것이지만, 뜻에서 선악이 태어난다. 그 선악을 아는 것이 양지 말고는 안 되며, 그러므로 선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양지를 키우라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의 영향을 받았다. 양지를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과 양지를 가리고 있는 선악을 제거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양지는 양명 사후 제자들의 분파의 이유가 된다.[16]
지행합일[편집]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말과 실천은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같다는 사상이다. 말은 지, 실천은 행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본다는 것은 지(知)에,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16]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편집]
이것 역시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의 육체이며, 다른 사람의 괴로움은 스스로의 괴로움이며, 그것을 달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든 물체의 인은 양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양명학은 사회 구제의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사상마련[편집]
사상마련(事上磨鍊)은 수양처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학에서는 독서와 거경궁리를 통해서 수양을 한다고 하지만 왕수인은 이런 의견에 반대하여서 일상에서 양지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고, 실제로 일을 하면서 정신을 단련한다는 뜻이다.
격물(格物)[편집]
주자는 격물을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卽物窮理)라 하였으나, 양명은 격(格)을 정(正)으로, 물(物)을 사(事)로 보아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해석했다.[17] 전습록에 나오는 격물하고자 며칠 동안 대나무를 바라보았더니 정신만 혼미해지더라는 일화[18]에서 주자의 격물을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양명학이 연 지평[편집]
사람의 욕구[편집]
양명학은 사람의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욕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사람의 욕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노력을 했다.
붕우 관계의 중시[편집]
붕우, 즉 인간 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유교에서는 남존여비 사상과 아이가 어른을 받드는 '상하 관계' 사상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유교 이념이 지배적인 중국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양명학 주요 학자[편집]
중국[편집]
조선[편집]
일본[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 ↑ 다음 글로벌 세계대백과
- ↑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중국의 사상 > 송·명의 사상 > 송·명의 사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 리·기설
- ↑ 「사서집주」등
- ↑ 「성 즉리」설
- ↑ 「거경궁리」설
- ↑ 배영동 (1992년 4월 30일). 《명말청초사상》. 서울: 민음사. 45쪽쪽.
-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송·명의 사상〉
- ↑ 박상(朴祥, 1474~1530), 눌재집(訥齋集) > 눌재선생집 부록 제2권(訥齋先生集附錄卷第二) > <서술(敍述)> 한국문집총간 제19권 p.102c : "王陽明 守仁 文字。東來未久。東儒莫知其爲何等語。先生與金十淸。世弼公碩 見其傳習錄。斥謂禪學。有酬唱三絶。先生詩。有曰却恐人驚異所云之句。而餘皆逸。十淸和詩曰。紫陽人去斯文喪。誰把危微考舊聞。學蹈象山多病處。要君評話復云云。"
- ↑ 김세필(金世弼, 1473~1533), 십청집(十淸集) > 十淸先生集卷之二 > 7언절구(七言絶句) > 우화눌재(又和訥齋) 한국문집총간 제18권 p.221b
- ↑ 오종일, 〈양명전습록전래고〉, 《철학연구》 4집,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1978, 75쪽
- ↑ 이병도 (1987년 12월 24일). 《한국유학사》. 서울: 아세아문화사. 357~358쪽.
- ↑ 송환기, 《성담집》 권 19, 동강 남 공 묘갈명; 남구만, 《약천집》 권24, 고중조(高仲祖) 통정대부 수 전주부윤 전주진병마절제사 공 유사; 이익, 《성호전집》 권 68, 정재 남 선생 소전
- ↑ 장유, 《계곡만필》 권1, 우리나라의 경직된 학풍[我國學風硬直]
- ↑ 大學問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 ↑ 가나 다 이종란 (2006년 2월 17일). 《왕수인이 들려주는 양지 이야기》. 자음과모음.
- ↑ 풍우란 (1989년 8월 10일). 《중국철학사》. 번역 정인재. 서울: 형설출판사. 385~386쪽.
- ↑ 왕양명 (2000년 7월 21일). 《전습록》. 번역 정차근. 서울: 평민사. 416쪽.
참고 문헌[편집]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한겨레 21 2006년12월14일 제639호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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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 (요메이가쿠)은, 중국 의 명대 에, 왕양명 이 일으킨 유교 의 일파로, 묘자의 성선설 의 계보에 이룬다. 양명학이라는 명칭은 일본에서 메이지 이후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왕학 이라고 했다. 또 한당 의 훈기학 이나 청의 고증학 과의 차이를 선명하게 할 때는 송명리학 이라고 부르며, 같은 이학에서도 주자학 과 구별 할 때에는 심학 혹은 명학 , 육왕학 ( 육상산과 왕양명 의 학문의 의)라고도 한다. 서양에서는 주자학과 함께 신유학 ( 영 : Neo-Confucianism)으로 분류된다. 형체화된 주자학의 비판에서 출발하여 시대에 적응한 실천윤리를 설교 했다 . 심 즉리 , 지행합일 , 치라치의 설을 주요 사상으로 한다 [1] .
양명학 이전 [ 편집 ]
송대의 학자에 따라 유학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수련 이전에는 경서 의 음훈(음독)이나 훈사(단어의 의미)를 중시한 훈사학이 중심이었다. 이에 대해, 송요의 학자는, 훈사학자는 6경 (五経)에 담긴 공자등 성인의 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성인의 본지를 이해하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인식 도달했습니다. 그 때, 수련 이전의 훈사적 연구를 실시하면서도, 보다 솔직하게 성인과 해석자의 일체성을 강조해, 해석자의 마음과 성인의 마음이 보편이라는 전제를 구축하게 된다 했다. 그 결과 송대 이후의 유학은 공자의 사상적 측면(성인의 마음과 해석자의 마음)을 밝히는데도 힘을 쓰게 되어 결과적으로 사변성이 되었다. 그 대표가 주자학 과 양명학이었다.
주자학이 가장 중시한 것은 낡은 역사를 갖고, 마음대로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적은 경서 그 자체가 아니라, 「4서」라고 불리는 4개의 서적이었다.
4서란, 경서 안의 「예기」로부터 분할 편찬한 「대학」과 「나카조」, 그리고 준경서 취급되고 있던 「논어」와, 「소코」라고 병칭되고 있던 「묘자 」 라고 한다 네 개의 책이다. 이 책은 비교적 짧은 문장으로, 또한 멋대로 해석을 혼입시키기에 적당한 내용의 책이었기 때문에, 이용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되고 있다. 특히 주자학이 기존 유학 논의 속에서 효자의 '성선설'을 꺼내 극단적으로 존경했기 때문에 '성' '선'의 내용을 둘러싸고 논의를 부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제종의 학파간의 항쟁은 직접 성선설의 해석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게 되었다.
隋唐를 받고 북송을 경과한 유학은 남송 중경 이후 서서히 도학이라 불리는 사상집단이 머리를 담고 남송중쯤에 주희가 도학을 집대성하고 마침내 강남 사상계를 석권하는데 이르렀다. . 뒤, 전 아침에 의해 남송이 사망한 결과, 남북 중국의 교류가 시작되어 주자학은 점차 화북에도 지보를 쌓기에 이르렀다.
이 주자학의 해석은, 정통적으로는 「4서」와 구래의 경서에 대한 주석의 형태로 전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주석서는 원조 이후 서서히 과거에 등용되어, 명조 초기 에 및 과거의 사용 주석서는 모두 주자학 계통의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주자학은 염원의 왕조권력과의 일체화를 완수하고 사상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명조에 있어서 확립한 주자학의 권위는, 명조 통치하의 거의 전역에 걸쳐 거대한 힘을 가지기에 있었지만, 아사카 정권하 중에서도 가장 상업의 발달하고 있던 강남 지방 명명 초기부터 주자학과 미묘한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무주부 다카히 토현 의 고요 (康斎)나 광주 부 신회현 의 진헌장 (백사)은 주자학파에 속하지만, 그 성인이 되기 위한 수양법은 독서보다 실천·정좌를 중시 한다 등, 후세에서 보면 약간 주자학과는 다른 측면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특히 진헌장의 제자湛若水(甘泉)와 왕수진과 교류가 있는 것, 또 왕수인과 진헌장과의 학문적 관계도 절무로 되지 않는 것 등이 주목되어, 명초의 강남지방의 유학자와, 명중기 이후 양명학자와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명초기의 사상계는 주자학적 측면이 강했고, 우여여나 진헌장에 있어서도, 본인으로서는 주자학의 실천을 하고 있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상의 해석에는 일정한 역사적 근거가 주어지지만, 이러한 설명은 일본의 근대 중국 사상 연구에 있어서의 영향하에 있는 것을 미리 알 필요가 있다. 근대 이후 일본의 중국사상연구는 서양철학을 모방할 필요에 육박된 결과 주자학의 사변적 측면을 강조하여 이를 철학과 비교할 수 있다고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주자학과 그 파생형태인 양명학 속에 있는 사변적 측면에 집중적으로 연구가 더해지거나 혹은 그 사변적 측면이야말로 주자학 내지 양명학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주자학 및 양명학으로 설명되는 많은 시도는이 사상적 측면에만 주목했다.
또한 주자학 (이전의 사상에 대항하여 태어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특히 양명학 (나중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이것은 아사히가 정식으로 인정한 학문이었던 주자학에 대항하여 태어난다. 처럼 보였다)는, 패전 후의 일본에 있어서의 근대 사유·반권력·인간 해방 등의 개념과 용이하게 결합해, 주자학 및 양명학 중, 비교적 그 개념에 근사하는 부분을 뽑아, 거기 에 사상적 가치를 준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후에 설명되는 양명학의 특징도, 그러한 의미를 부여받은 결과이며, 그것이 주자학 및 양명학의 역사적·전면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지 여부는 크게 의문으로 하는 입장 도 일부에는 있다. (2006년 현재) [ 요출전 ]
주자 의 죽은 것은 1200년이지만, 그 무렵의 주자학은, 정씨 계통의 학문이나 도학이라고 불려, 반드시 지배적인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지는 않았다.
주자의 만년에 위학의 금이 일어나, 도학을 위학문이라고 하고, 도학의 학종이 관계로부터 일소되려고 한 적도 있어, 당시의 재상조 여우 이하의 명사 59명이 위당 으로 되었다 ( 경원당금 ).
그러나 원대가 되면 남방에서는 이미 학계의 주류가 되었고, 또한 허형과 유인의 두 사람에 의해 북방 으로 도 전래해 갔다.
이하, 허형과 유인의 유명한 문답만을 소개한다. 유인은 평생 이민족인 원래의 조정을 섬기지 못한 사람이며, 허형은 섬기고 장관으로까지 된 사람이다. 허형이 조정의 소명을 받고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도중 리우를 방문했다. 리우 이른바, 공이 단 한 번의 초대에 의해 일어난 것은, 너무 손쉽게는 하지 않을까, 라고. 허형 대답 이윽고, 빙글빙글부터 하지 않으면, 길, 행해지지 않고, 라고. 이어 유인에게도 소명이 내렸지만, 유인은 고사해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들었더니, “모든 것에서 벗어나면 길, 존중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어쨌든, 연유 원년에 원조가 오랫동안 끊어진 과거를 재개했을 때에는, 과거의 학과로서 주자학에서 특히 중점을 둔 4서를 세우고, 과거의 주는 주자의 이른바 「4서 집주」를 이용하기로 한다 , 그 외의 오경에 대해서도 종래의 지정학설이었던 낡은 한당 의 주석 대신에, 주자 혹은 그 제자가 만든 새로운 주가 지정되게 되었다. 즉, 주자학은 요즘에는 이미 과거시험이 그 과목으로 채용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이며, 반대로 과거의 과목이 됨으로써 주자학은 압도적인 권위 를 체질하게 되는 것이다 [2] .
왕양명의 등장 [ 편집 ]
주자학은 체제 측의 사상이 되었지만, 그러므로 체제 옹호로서의 작용이 비대화되어, 과거의 도덕주의의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재생시키려고 한 것이 왕양명이다. 주자학에서는 「리」(만물의 법칙이며, 근거, 규범. 「연소한 곳이기 때문이며, 또한 당연히 틀림없어야 하는 법」)은 모든 것에 있다고 해(「이치키 이치쿠사 다리」), 그러한 이론에 대해 독서 등 학문함으로써 이해를 깊게 한 후에 '성'(개별적으로 내재하는 이리, 오상오륜)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마음 밖에 있는 이리에 의해, 마음의 내적인 이리를 보완하지 못한 것이다.
당초는 왕양명도 주자학의 학생이었지만, '이치키 이치쿠사'의 이치에 다가오지 않고 좌절하고, 마침내 주자학에서 떠나게 된다. 그 때 왕양명은 주자학의 근본 원리가 되고 있는 ' 격물치지 ' 해석에 다음과 같은 의의를 제기했다. 우선 천하의 사물물의 이론에 격이라고 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하면 가능한가 하는 방법론에의 의의. 그리고 주자 는 밖의 이리에 의해 내가 되는 이를 보완한다고 하지만, 내가 이치는 완전하고 원래 밖의 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라는 근본 원리에 대한 의의이다. 이러한 의의에서 출발해 사색하는 가운데 육상산 의 학으로 돌아가, 그것을 정밀하게 발전시킨 것이 양명학이다. 다만 양명학은 송요의 육상산의 학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 계승은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양명학의 등장은 주자학 때만큼 극적이지 않았다. 주자학은 정치학, 존재론(이・기설), 주석학(『4서 집주』 등), 윤리학(「성 즉리」설), 방법론(「거경궁리」설) 등을 모두 포괄한다 종합적인 철학대계로서 주자의 위대함은 그 체계 내에서 매우 일관성 있는 논리를 전개한 점에 있다. 그러나 양명학은 그 중 윤리학과 방법론적 측면의 혁신일 뿐이다. 무론 유교에 있어서 윤리학적 측면은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지만, 대전환이 일어난 것은 아니고, 그 점은 주의를 요한다.
양명학의 근본 사상 [ 편집 ]
왕양명의 사상은 ' 전습록 ', ' 주자 만년 정론 ', ' 대학문 '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학문사상의 특징은 이하의 말로 응축되어 있다.
1. 마음 즉리 —양명학의 윤리학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 '심 즉리'는 육상산이 주자의 '성즉리'의 반조치로 주창한 개념으로 왕양명은 그것을 계승했다. 주자학의 테제 '성 즉리'에서는 마음을 '성'과 '정'으로 분별한다. 「성」이란 하늘로부터 부여된 순수한 선성을, 한편 「정」이란 감정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가리키고, 「정」의 극단적인 것이 인욕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코는 전자만이 「리」에 해당한다고 했다. 또 「이」란 사람에게 내재하는 이(=성)인 동시에, 외재하는 사물물의 「이」이기도 하다고 한다. 즉 「리」의 편재성·내외 관통성이 주자학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왕양명은 '리아 에 고가 마음에 밖이 아닌가' 라고 말하듯이 '성'·'정'을 아우른 마음 그 자체가 '리'에 다름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해석에서는 마음 안에 있는 「성」(=리)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외부적인 사물의 이리를 참조할 필요는 없게 된다. 이 생각은 곧 외적 권위인 경서, 나아가서는 현실 정치에 있어서의 권위의 경시에 이르기까지의 위험성을 받고 있었다. 또한 왕양명의 「심 즉리」는 기본적으로 육상산의 그것을 트레이스한 것이지만, 육이 마음에 천리·인욕이라고 하는 구별을 세우지 않았던 것에 대해, 왕양명은 주자와 같이 「 천리를 존중하고 인욕을 떠난다는 윤리실천 원리를 가지고 있던 점은 다르다.
2. 치료지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 「치라치」의 「료치」란 「묘자」의 「료치 양능」에서 유래하는 말로, 「격물치치」의 「지」를 가리키지만, 「치라치」는 그것을 바탕으로 왕양명이 만년, 독자 에 제창한 개념이다. 우선 '료치'란 귀빈에 관계없이 만인이 마음 안에 있는 선천적인 도덕치('양지양능은 어부 어부도 성인과 같다')이며, 또한 인간의 생명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 천리나 성이 하늘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상기시키는 말인데 비해 '좋은 지'는 사람이 생생한 것이라고 하는 뉘앙스가 강하다. 또한 양명학에서 매우 동적인 것으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치요치」란 이 「료치」를 전면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고, 「요치」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한 것으로 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것은 '좋은 지'에 근거한 행동은 외부 규범에 속박되지 않고, 이것을 '무선 무악' 이라고 한다. 왕양명은 '무선무악'에 대해 아래에 내거는 '사구교'를 남겼다.
무선무악시심유체 (
선 없고 악없음은 꼭
마음 의 몸) 알고 악을 아는 것은 꼭 좋다) 위선거악
시격 물
이것은, 「이 자체인 마음은 선악을 넘은 것이지만, 의(마음이 발동한 것)에는 선악이 태어난다. 일이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선악을 넘었다고 해도 효자적 성선설에서 괴리했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의 「무」는 단순한 존재로서의 유무가 아니고, 기성의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로부터는 자유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오해를 초래할 수 있는 말인 것은 틀림없이 이 해석을 둘러싸고 나중에 양명학은 분파하게 되는 계기가 되고, 또 타파의 맹렬한 비판을 초래하게 된다.
3. 지행합일 - 료지의 존재(1). 여기서의 「지」(양지)란 단적으로 말하면 인식을, 「행」이란 실천을 가리킨다. 양명학에 반감을 가진 주자학자나 일본에서는 오해되어 실천 중시론으로 이해되었지만, 이것은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이해이다. 마음 밖에 이를 인정하지 않는 양명학에서는 경서 등 외적 지식에 의해 이치를 깨닫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식과 실천(혹은 체험)은 불가분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색을 볼 때를 예로 들자면, 보는 것은 「지」에, 좋아하는 것은 「행」에 속한다. 다만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 색을 볼 때는 이미 하고 싶었기 때문에, 「지」와 「행」, 즉 인식과 체험과는 도대체 불가분이며, 양자가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고 왕양명은 말한다. 또한, 「아는 행의 시작으로 하고, 행은 지의 나름」이라고 한다. 이것이 「지행 합일」이다. 도덕적 지인 료지는 실천적 성격을 갖고, 도덕적 행위는 良知에 근거하는 것이고, 만약 「지」와 「행」이 분리된다면, 그것은 사욕에 의해 분단되고 있는 것 그렇다고 한다. 주자학에서는 「지」가 먼저 있고 「행」이 뒤가 된다고 가르친다(「지선행후」)가, 「지행합일」은 이것에 대한 반조치이다.
4. 만물일체의 仁과 良知의 결합 ― 良知の有様(2). '만물의 인'이란 사람을 포함하여 만물은 근원이 같다고 생각하며 자타일체로 간주하는 사상이다. 원래는 적당히 볼 수 있는 발상이지만, 양명은 그것을 료지와 연결시켰다 . 양명은 스스로를 포함한 만물은 말하자면 하나의 육체이며, 타인의 고통은 스스로의 고통이며, 그것을 치유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잘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 양명학은 사회구제의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5. 사상마련 - 자기 수양의 본연의 방법. 주자학에 있어서는 독서나 정좌를 중시했지만, 양명은 그러한 정적인 환경에서 수양을 쌓아도 일단 일이 있었을 경우 도움에는 서지 않는, 일상의 생활·일 속에서 료지를 닦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사상마련'이다.
『대학』의 재해석 [ 편집 ]
송명리학에서 4서는 매우 중시된 경서이다. 이 가운데 '대학'은 송 이후 현저하게 경서 중인 지위가 상승하고 주자와 왕양명으로 해석이 현저하게 나뉘었다. 이하, 주한 주자학과의 차이를 적는다.
- 텍스트
- "대학"이라는 단어의 의미
- 주자학: 대학을 '어른의 학문'이라고 규정한다. 성인은 성인의 뜻이다.
- 양명학: 소인에 대한 어른, 즉 「군자의 학문」이라고 규정한다. 난쟁이는 얻지 못한 사람의 뜻이다.
- 미츠츠나령의 「친민」
- 미츠츠나령은 '대학'의 세 가지 총괄적인 주제로, '대학'은 이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있다고 해도 좋다. 그 둘째인 친민의 해석을 둘러싸더라도 주자와 왕양명은 크게 다르다.
- 주자학: 주자는 '부모'를 '신'으로 바꾸고 '민을 새롭게 한다', 즉 '자신의 명덕을 밝힌 군자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것을 미치고 혁신한다'처럼 풀었다 .
- 양명학: 왕양명은 솔직하게 '민족을 사랑한다'고 읽는다.
- 하치조메의 「
격물치지 "- 하치조메란 미츠츠나령의 세목으로 「격물」 「치치」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8개이다.
- 주자는 독서·수양에 의해 성인의 높이에 이르게 하고, 미츠츠나령에 놓인 ‘격물치지’에 근거를 요구했다. 즉,
격 」(사물에 맞추어 합리적인 격=지)로 했다. - 한편, 왕 양명은이 부분을 재해석하고
격 "(물=사, 격=정)으로 했다. 주자에 있어서는 「지」는 도덕지와 지식지가 미가분이었지만, 양명은 독점적으로 도덕지로서 이해한다. 「사」란 마음의 움직임인 「의」의 소재이며, 「지」란 양지를 가리킨다. 「격물치지」를 「의」를 바로잡음으로써 양치를 발휘하기로 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마음의 부정을 바로잡자 왕양명은 재해석했다.
- 「성의」의 중시
- 주자학: 주자학에서 가장 요망된 것은 상기의 「격물치지」이다.
- 양명학: 양명학에서 가장 요망된 것은 ' 성의 '이다(' 대학의 요점은 의를 성실하게만 '). 다만, 양명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의가 성실하면, 료지는 하고 있고, 또, 물건도 격하고 있다. 즉 「물건을 격하고, 알게 한다」란 「의를 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양명학이 열린 수평 [ 편집 ]
- 성인관의 변화
송 이후, 「성인, 배우고 이끄는 것」이라고 말해지듯이, 성인은 독서·수양에 의해 인욕을 없앤 후에 도달해야 할 목표가 된다. 즉 이념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노력대로 성인이 되는 길이 열렸다. 단지 독서 등에 걸리는 시간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을 리가 없고, 실제로는 그 길은 닫힌 채 남았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마음 이외의 외부적인 권위를 부정하기 때문에, 이제 독서 등은 불가결한 것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만명에게 평등하게, 그리고 이미 료치가 머무르고 있는 것을 인정해 가려고 한다. 왕양명이 있는 제자의 「만가이성인」(거리에는 성인이 가득하다)라는 말은 단적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양명학에서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독서인 뿐만 아니라 보통의 서민에게도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주자학과의 연속성을 고려한다면, 송 이후에 있어서의 성인의 세속화의 움직임이, 명대 중엽·말기에 이르고 하나의 정점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 인욕 긍정에 대한 길 열기
- 마음 전체를 합리한다면 그 안에 있는 욕망만을 부정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할 수 없다. 왕양명 자신은 "천리를 살고 인욕을 떠난다"는 주자학적인 측면을 버리지 않았지만, 아래에서 언급하듯이 그 제자들은 인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긍정해 나가기 때문에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명대 중기 이후 급속히 화폐경제가 침투한다. 가볍게 사상과 경제 사이의 인과관계를 결론지을 수는 없지만, 양명학에 있어서의 인욕의 긍정이, 발전 현저한 상업 경제에 있어서 때때로 적절한 사상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 경서의 지위 저하
- 朋友 관계의 중시
- 양명학의 일파는, 강학이라고 불리는 연구회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내의 교유가 장엄한 것은 '오륜'(부자·군신·부부·장유·토모) 중에서도 특히 '토모'라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자세를 만들어냈다. 즉 지극히 동지의식·연대의식이 농후했다. 본래, 토모우 이외의 사륜은 상하 관계를 기초로 하는 것이지만, 토모우에 한해서는 수평 방향의 인간 관계이다. 그것을 중시한다는 것은 유교적 가치관에 일석을 던지는 것이었다.
양명학의 유행과 전개 [ 편집 ]
양명학 좌파-심학의 횡류- [ 편집 ]
왕양명의 고동생으로는 왕기 (龍渓), 왕정 (심사이), 서애 (요코야마), 유럽양덕(남야), 센덕홍(서산) ,鄒守益(東廓), 羅洪先( 염암), 聶豹(쌍강)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왕양명의 죽음 후, 양명학은 몇몇 파로 나뉘었다. 왕양명의 생전보다 주로 양지설에 있어서의 「무선무악」의 해석을 둘러싸고 왕룡계 등 좌파와 주자학에 재접근하려고 하는 센오야마들은 대립하고 있었지만, 사의 몰후 분열이 결정적 되었다.
양명학 좌파의 중심인물은 왕룡계와 왕심사이이며, 이 양자를 왕학의 두왕이라고 칭한다. 왕양명은 마음 자체에 선악의 구별은 없다고 했지만, '사구교'에 있는 것처럼 '의', '좋은 지', '물'에게는 선악을 인정했다. 그러나 왕룡계 등은 스승의 설은 철저히 부족하다며 '의', '좋은 지', '물'도 '무선무악'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 근거한 행동도 선악 없음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
- 왕룡계
- 왕룡계가 위에서 사왕 양명의 양지설을 혁신했다고 말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양지에 추가했다. 우선 왕양명에 있어서 료지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었지만, 제자왕룡계는 그것을 '천칙'(하늘의 말씀)으로까지 확대한 점. 다음에 「현성 료치」를 주장한 점. 「현성」이란, 눈앞에 이미 출현하고 있는 것이며, 양치를 발현시키기 위해서 작위적 혹은 의식적인 수양은 무용이며, 양치는 이미 기성의 선악을 넘어 자율적으로 올바르게 판단 한다고 주장했다. 왕룡계는 양치를 매우 동적인 것으로 재검토했다고 할 수 있다.
- 또한 이학이 그 성립 당초부터 선종 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것은 송요보다 계속 말해 온 것이지만, 양명학 좌파는 특히 불교 의, 그리고 노장 사상 의 영향이 현저하다. 이 경향은 왕양명도 가지고 있었지만, 특히 왕룡계는 이 경향을 강화했다고 한다. 그 증거로서 경서의 해석에서도 적극적으로 불교 등의 어휘를 사용하여 설명하려고 한 점이 잘 지적된다. 그리고 불교도 도교도 진리 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삼교 일치를 목표로 했다. 이 경향은 왕심사이의 일파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교가 아니라 선종의 학 이라는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 왕심사이와 태주학파
- 왕심사이도 왕룡계와 마찬가지로 '현성 양치'를 봉하고 있었지만, 사변성보다 사회를 향한 실천활동에 특징을 가진다. 구체적으로는 왕심사이는, 『효경』과 4 서를 중시했지만, 경서의 주석에 구애받지 않는 자득의 학문을 설설해, 독특한 「정남 격물」을 주장한 것, 고대를 이상으로 하는 상고 사상 으로 한 것이 그 사상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인층 이외의 계층에 양명학을 전파하는 것을 자신이 책무로 한 것이다. 왕심재들의 일파는 태주학파 라고 불리며, 이 파에서는 몇 심은 숨 , 나여방(근계), 양기원(복소), 이희 (탁고), 주여등(해문), 도망령을 배출했다. 이들은 그 몸속에서 만민을 구하겠다는 사대부적 책임감과 ‘지행합일’을 결합시켜 아래에 설명하는 사회비판을 펼쳐 나가는 것이다. 이 의식이 굉장히 고양되어 '사랑' 혹은 '유창'이라는 경지에 이르는 것도 나타났다.
- 이탁고
- 이탁고는 양명학 좌파의 꼬리를 장식하는 인물이다. 그에게도 주자학이 주창한 독서에 의한 인욕의 배제 등 이학의 기본 개념과는 전혀 정반대의 주장이 이루어졌다. 우선 리는 양지설을 개량해 '동심설'을 주창했다. 동심이란 경서 등 외적 권위·도덕을 배우기 이전의 순진한 마음을 가리키며, 독서학문에 의해 오히려 사라진다고 했다. 또 “ 천·옷·매반, 즉 꼭 인륜 물리가 된다 ”라고도 말해, 식욕이나 의복을 몸에 익히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래의 자연이라고 해, 인욕을 전 긍정했다.
양명학 우파와 동림당 [ 편집 ]
명말은魏忠賢 등宦官에 주는 閹당과 고 헌성 의 동림당이 당쟁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당과 동림당은 당시의 정치나 사회의 현황을 인정할지 여부에 의해 나뉘어진 집단이며, 사상적인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연관정치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주자학, 양명학을 불문하고 동림당에 모였지만, 동림당에 들어간 양명학 사람들은 양명학 우파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양명학 좌파의 과격한 사상이나 행동에 비판적이었다. 다만 인욕을 인간 본래의 자연으로 보는 생각을 전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그것을 인정하면서, 인욕을 제어하는 역할을 「리」에 부여함으로써 현실적인 정책이나 사상을 구상하려고 했다. 그것은 청대의 고증학이나 경세치용의 학을 낳는 단서가 된다.
그 대표적 사상가는 황종옥 이다. 황은 양명학 우파 류종주 의 제자에 있어서 ' 명이 대방록 '과 ' 명유학안 '을 두고 있다. 전자는 정치·경제·군사와 같은 여러 방면에서 국가의 본연의 자세를 논한 것으로, 특히 황제 전제 정치 비판은 혀발 날카롭고, 청말에 이르러 재평가되었다. 따라서 노란은 '중국의 루소'라고 불린다. 후자는 중국 최초의 철학사라고도 할 수 있는 저작으로, 명대의 유학사 연구에서 지금도 필독서가 되고 있다. 황종택은 양명학 좌파와 같이 오로지 유심하게 일을 논하는 학풍을 좋아하지 않고 사실에 맞는 실증적인 학문의 확립을 요구했다. 그 학풍은 고증학의 일파, 절동학파가 되어 청나라의 주요 사조가 되어 가는 것이다.
양명학 좌파 [ 편집 ]
주자 와 그 제자들은 소위 위학의 금이라는 정치적인 문제를 일으켰지만 사회적인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양명학파는 주로 정치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양명학은 양명의 사후, 오늘의 말로 말하면 좌파와 우파로 분열하고, 좌파(그 핵심은 이른바 태주학파)는 이른바 양명학의 횡류, 심학의 횡류라고 불리는 현상을 일으켰다 . 즉, 양명학파가 있는 것은 사회적 통념, 권위,에 도전해, 기성 도덕을 듬뿍 넣기 위해서나, 적극적으로는 도덕적 혼미, 사회 불안을, 소극적으로는 사회적 폐폐를 일으켰다, 라고 한다 이다. 좌파는 이론적·실천적으로 라디칼리스트 였다.
라디칼이라는 의미는, 대략 사대부 존재에 있어서, 사대부 , 독서인으로서 합당한 방식, 전통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이른바 구제라는 것과, 성인을 목표로 하는 이론·실천이라고 하는 것의 두 개의 극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경우, 성인이라는 이상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충실할 것이라고 해서, 이른바 장패를 무시하고, 풀어내는데 이르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체의 장교, 명교는 단순히 습관적인 것, 외화한 것, 임시, 위선으로 쏟아져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우파는 정통적인 사대부파, 명교호지파이다. 좌파의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우파는 자각적·무자각적으로 점점 주자학에 가까워지고, 예를 들면 양명이 사족에 불과하다고 하는 경이 적극적으로 주장될 수 있게 되기도 했다[3 ] .
明末清初의 양명학 [ 편집 ]
명조의 정치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양명학이었지만, 그 명조와 함께 쇠퇴해, 청나라에서는 고증학에 학문의 주역의 자리를 빼앗기기에 이르지만, 완전히의 절학 이라면 그러나 청초에 있어서는 우파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온건이 되어, 양명학은 「성학(=주자학)과 이동비없음」이라고 강희제가 말하는 것처럼 반드시 이학시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다만 이미 양명학 단체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보다 '주왕 일치'(주자와 왕 양명의 일치)라고 하며 주자학을 보완하는 것으로 취급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雍正帝이후 주자학의 정학화 확립, 건류 · 가경 의 고증학 전성기(이른바 건가의 학)도래에 의해 더욱 그 경향을 강하게 해, 양명학은 쇠미했다. 다시 각광받는 것은 청나라의 말기가 되고 나서였다.
청말의 양명학 [ 편집 ]
양명학의 침체 상황은 1840년 아편 전쟁 이후 서서히 변화한다. 우선 ' 해국도지 '를 저술한 위원 에 의해 양명학은 재검토되기 시작해, 강유위 의 스승인 주지코 는 '주왕 일치'를 다시 주창하는 등 양명학은 부활의 조짐을 보이게 된다. 나중에 지금 문 공양학을 내건 강유위 자신도 요시다 마츠네 의 ' 유무로 문고 '를 포함한 양명학을 연구했다고 한다.
아래의 일본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양명학은 일본에 전래하여 에도 시대 이후 일본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메이지유신 의 사상적 원동력으로서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메이지가 되어도, 미야케 유키미네가『왕양명』이라는 전기를 현저하게 양명학을 현창해, 또 양명학에 국민도덕의 기초를 요구하는 잡지『양명학』이나 그 유사 잡지가 몇 개도 창간되었다.
닛신 전쟁 이후, 메이지 일본에 청말의 지식인이 주목하게 되면, 이미 중국 본토에서는 쇠미하고 있던 양명학에도 급격히 주의가 향하게 되었다. 메이지기, 중국으로부터의 유학생이 증가의 일도를 추적하지만, 그러한 학생들에게도 이 메이지기의 양명학열이 전해져, 양명학이 중국에서도 재평가되게 된다. '양명학'이라는 호칭이 중국에 전해진 것도 요즘이었다. 청대에 금서로 된 적도 있어 거의 잊혀져 있던 이탁고의 '焚書' 와 ' 장서 '는 메이지기의 양명학열에 의해 중국으로 역수입되고 있다.
중국에서 양명학 재평가에 가장 힘이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강유위의 제자梁啓超이다. 梁啓超는 1905년 상하이 에서 ' 송음문령 '을 출판할 정도로 양명학을 봉사한 요시다 송음 을 칭양했다. 또 동시기 쓴 양의 ' 덕육감 '과 ' 논사덕 '(대표작 '신민설'의 한절)에는 이노우에 테츠지 로의 ' 일본 양명학파노철학 '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이런 梁의 경향은戊戌政변 후에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현저해지지만, 그것은 그가 당시 요구했던 국민국가 창출과 깊게 관련된다. 정합이 부족한 '산사'와 같은 중국 사람들을 강하게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국민정신, 국민도덕이 불가결하다고 梁啓超는 생각하고 있었다. 양명학 선양은 국민국가의 정신에 주입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국민국가정신에 양명학을 주입하는 양계초의 생각은 당시 메이지사조에 의한 것이 크다. 당시 일본에서는 유럽화의 진전에 의해 일본의 도덕윤리와 무사도 정신이 퇴폐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되어, 그들을 양명학으로 재생하려고 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것이 메이지 시대의 양명학 열의 배경입니다.
이러한 풍조에 양계초 등은 감화되어 메이지 일본에서 양명학의 재발견, 재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을 기둥으로 하는 국민정신창조운동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양명학 [ 편집 ]
일본에 전해진 주자학 은, 그 보편적인 질서에의 지향에 의해, 체제를 형성하는 통치자에게 선호되었다. 한편 왕양명의 의도에 반하여 양명학에는 반체제적인 이론이 태어났기 때문에 반체제 측이 선호하는 경우도 있어 자기의 정의감에 사로잡혀 혁명운동에 제시하는 자도 양명학도에게 많다.
마음 즉리 (경면과 같은 마음)가 본래 전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욕, 집착을 좋고 착각하고, 망념을 마음 의 본체의 외침과 실수로 행동으로 옮겨 버리면, 땅 에 다리가 없는 혁신 지향이 되기 쉽다는 설도 있다. 야마다 호타니 도 잘못된 이해를 하면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해 주자학을 충분히 이해하고 주자학과 양명학을 상대화하여 이해할 수 있는 문인에게만 양명학을 교수하지 않았다고 말하고있다.
에도기의 대표적인 양명학자는 나카에 토키와 제자의 구마자와 소야마 이다. 그 외, 후치오카야마 , 나카가와 켄지 , 삼륜집사 등이 있다.
막부 말기 양명학 신봉자 [ 편집 ]
막부 말기의 유신운동은 양명학에 영향을 받고 있다. 고명한 위인으로는 요시다 마츠네 , 타카스기 신사쿠 , 사이고 타카모리 , 카와이 계 노스케 , 사쿠마 코우야마 등이 영향을 받고 오오시오 헤이하치 로의 난으로 대표되도록 혁명운동 [ 의문점 ] 에 몸을 담은 자도 많다.
한편, 양명학의 조예의 깊이에서, 사쿠마 상산과 대비되는 비나카마츠야마번의 야마다 호타니는, 양명학이 가지는 위험성을 인지한 후, 제자에게는 먼저 주자학을 배워 , 유망한 제자 에게 오직 양명학을 가르쳤다.
야마다 호타니 와 사쿠마 아이야마 는 사토 이치사키가 학원을 하고 있던 창평황 에서 배우고 있다. 학장의 호타니에 어린 날의 상산이 어우러진 연야의 격론은 학원의 말초이며, 사몬의 두걸이라고 칭해졌다.
사토 이치사키 는 주자학을 봉사하는 창평황의 유관이며, 공연히 양명학의 이론을 주장할 수 없었지만, 저서의 『대학 일가 사언』은 양명학의 시점에서 쓰여진 것이며, 또한 막부 말기 의 지사에 크게 영향을 준 『언어 4록』에는 양명학의 사상이 산견된다. 또한, 이치사이가 나카에토키 를 존경하고 있던 것, 그의 문으로부터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다수 배출하고 있는 것 등으로부터, 잇사이가 양명학을 봉사하고 있던 것은 명백하다고 여겨진다. 한다. 그 때문에 '양주 음왕'의 썰매를 받았지만, 그 주로 하는 곳은 양명학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일본의 양명학 [ 편집 ]
일본에 있어서의 양명학의 전성기를, 메이지 유신 이후로 하는 설도 있다. 즉, 미야케 유키미네 가 1893년에 간행한 저서 『왕양명』을 범죄로 하는 막부 말양명학의 재흥운동이, 유럽화 정책의 반동으로서 고양한 국수주의나 무사도의 재검토의 움직임과 연결되어 , 메이지 후기 부터 다이쇼 시대 에 걸쳐 정점을 맞았다는 견해이다.
이 시기의 주된 인물로서, 상기의 미야케 유키미네와 이노우에 테츠지로 외에, 다카세 타케지로, 도쿠토미 소봉, 요시모토 양 , 히가시 케이지 , 이시 자키 동국 등이 있다 [4] [5] . 당시의 양명학은 일본 국민의 정신수양의 일환으로서 사생을 일탈한 순수한 심정과 행동력을 도자기하는 실천윤리로서 설득되는 부분이 컸다[4][ 6 ] .
또한 요즘 일본에서 양명학의 재평가가 양계초로 대표되는 청인유학생의 눈에 머물러 중국에서의 양명학 재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각계의 신봉자 [ 편집 ]
- 재계
- 이와사키 야타로 - 미쓰비시 재벌 의 설립자
- 시부자 와 에이이치 - 실업가 ,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 기타
- 히로세 타케오 - 해군 군인
- 도고 히라하치로 - 해군 군인
- 오쿠미야 켄노 - 자유민권운동가
- 유키 토쿠 아키미즈 - 메이지 시대의 사회주의자, 오쿠 미야 켄노의 아버지, 慥慥斉에 사사
- 토미오카 테츠사이 - 문인 화가, 유학자
- 미시마 나 카슈
- 미시마 유키오 - 작가. 만년에 경도 [7] . 다만 미시마는 왕양명의 '전습록'을 직접 읽고 있는 흔적은 없고 '일본양명학'의 계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미시마는 이노우에 테츠지 로의 '왕양명의 철학의 심수골자'를 읽고 있다. 미시마의 평론에는 '혁명철학으로서의 양명학'이 있다 [8] .
- 야스오카 마사아츠 - 양명학의 상을 '제왕학'으로 하고, 본래는 '심학'인 양명학의 상을 바꿨다는 의미에서 공죄가 있다고 한다. 야스오카가 동대졸업 때 출판한 ' 왕양명 연구 '는 일본과 중국의 식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야스오카의 저서는 『동양재상학』 『일본정신의 연구』 등 다방면에 걸쳐 야스오카가 반드시 양명학자로서만 자리매김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의 양명학 [ 편집 ]
한반도 의 양명학에 대해서는 중 2013 , 말연 2011 이 상세하다(본항에서는 미참조).
한반도에는 16세기 초에 꽂혔다. 그 초기에 양명학을 봉사한 자로서는 난 히코 와 이윤이 있다.
이어 허하와 장유가 나와 양명학을 발전시켰다. 허케이 는 양명학의 입장에서 주자학의 예교적 측면을 비판하고, 또 조선에서는 가장 빨리 인욕을 긍정한 사상가이다. 장유는 주자학의 '지선행후'를 논란해 양명학의 '지행합일'을 칭찬했다. 또 양명학의 개성 존중의 측면을 계승해, 「자치・자립・자주」에 중점을 둔 학설을 설했다.
그 후 장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조선 양명학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정두 (霞谷)가 나왔다. 그는 주자의 이기 이원론에 차이를 주었고, 이와 기는 도대체 불가분이라고 하며 또 '지행합일'을 칭양해 실천을 중시했다. 당시 이씨 조선에서도 주자학은 형체화되고 있었지만 정은 양명학에 의해 유교를 재생하는 것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의 양명학은 일관되게 소수파의 지위를 벗어날 수 없고, 본고장 중국 이상으로 주자학파로부터 억압되어 서서히 쇠퇴했다. 예를 들어李敉(퇴계)는 '전습록판'에서 양명학을 엄격히 비판했다.
양명학의 조선사에 있어서의 영향은 낮에 비해 높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실학이나 경세치용의 사상에는 영향이 인정된다.
대한제국 말기 부터 일본 통치시대 에는 박연식 과 정인보 가 양명학을 논했다.
각주 [ 편집 ]
- ↑ a b 『 대사천』
- ^ 시마다 학기 『주자학과 양명학』 이와나미 신서, 1967년 5월 20일, 119-120쪽. ISBN 9784004120285 .
- ↑ 시마다 학기 『주자학과 양명학』 이와나미 신서, 1967년 5월 20일, 146-147쪽. ISBN 9784004120285 .
- ^ a b 오기 2008 , p. 422-427.
- ^ 요시다 1999 , 서론.
- ^ 오기모모히로 「양명학」(『일본 역사대사전 3』(쇼가쿠칸, 2001년)ISBN 978-4-095-23003-0)
- ^ 하야시다 아키다이, 『「진설·양명학」입문』, 산고칸, 1994년, 1페이지, ISBN 4-88320-031-0 .
- ^ 미시마 유키오 「행동학 입문」( 분예춘추 , 1970년. 분춘문고 , 1974년)에 들어간다.
관련 문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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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하시 켄지 '양심과 지성의 정신사-일본 양명학의 근현대' 공부 출판, 1999년
- 오기모 히로시 ‘양명학’ ‘일본 역사대사전 3’ 쇼가쿠칸, 2001년, ISBN 978-4-095-23003-0
- 오기 시게히로 『근대・아시아・양명학』 페리칸사, 2008년, ISBN 978-4831512024
- 코지마 毅『근대 일본의 양명학』 코단샤 선서 메티에, 2006년
- 코지마 毅『주자학과 양명학』 치쿠마 학예 문고, 2013년
- 시마다 츠지 차역·해설 “중국 문명선 6 왕 양명 집” 아사히 신문사, 1975년
- 시마다 학기 『주자학 과 양명학』이와나미 신서 , 1967년, ISBN 4004120284
- 시마다 학원 역·해설 『대학・나카죠』 아사히 문고(상하), 1978년
- 나카준오 『조선의 양명학―초기 강화학파의 연구―』쿠고서원 , 2013년. ISBN 9784762929946 .
- 마부치 마사야 편 “동아시아의 양명학 접촉·유통·변용” 동방서점, 2011년.
- 미조구치 유 삼역『전습록』 신판· 중앙 공론 신사〈중공 클래식스〉, 2005년, ISBN 4121600827
- 야마다 준·스즈키 나오 지역 “전습록 ” 이와나미 문고 , 1936년 복간 다수
- 요시다 공평「일본의 양명학」페리칸사 , 1999년, ISBN 4831509213
- 요시다 공평 「양명학이 묻는 것」연문 출판〈연문 선서〉, 2000년, ISBN 487636186X
叢書[ 편집 ]
- 『시리즈 양명학』명덕 출판사 , 1989년-2010년. NCID BN03826126
- 『왕양명 전집』(전 10권) 명덕 출판사, 1983년-1987년. NCID BN00465633
- 『양명학대계』(전11권별권1) 명덕출판사, 1971년-1974년. NCID BN02307644
외부 링크 [ 편집 ]
- 왕양명 저, 사토 이치 사이(탄) 주석, 남부 보성편 “ 전습록 ”, 메이지 40년간( 국립 국회 도서관 소장)
- 오오시오 헤이하치로 “ 후루모토대학 유메 ”( 나카노시마 도서관 소장)
- 이노우에 테츠지로『일본 양명학파노철학』 토야마 방, 메이지 33년간(국립 국회 도서관 소장)
- 미야케 유키미네 (오지로) “ 왕양명 ” 정교사, 메이지 26년 간(국립 국회 도서관 소장)
- β판 양명 자료목록 집성 - 웨이백 머신 (2014년 7월 4일 아카이브분)
- 히가시 사와 사야 (마사 준)
- 삼륜집齋 : 표창전습록
Yangmingism
School of the Heart (Chinese: 心學; pinyin: xīn xué), or Yangmingism (Chinese: 陽明學; pinyin: yángmíng xué; Japanese: 陽明学, romanized: yōmeigaku), is one of the major philosophical schools of Neo-Confucianism, based on the ideas of the idealist Neo-Confucian philosopher Wang Shouren (whose pseudonym was Yangming Zi and thus is often referred as Wang Yangming). Throughout the whole Yuan dynasty, as well as in the beginning of the Ming dynasty, the magistral philosophy in China was the Rationalistic School, another Neo-Confucianism school emphasizing the importance of observational science built by Cheng Yi and especially Zhu Xi.[1] Wang Yangming, on the other hand, developed his philosophy as the main intellectual opposition to the Cheng-Zhu School. Yangmingism is considered to be part of the School of Mind established by Lu Jiuyuan, upon whom Yangming drew inspirations. Yangming argued that one can learn the supreme principle (理, pinyin: Li) from their minds, objecting to Cheng and Zhu's belief that one can only seek the supreme principle in the objective world. Furthermore, Yangmingism posits a oneness of action and knowledge in relation to one's concepts of morality. This idea, "regard the inner knowledge and the exterior action as one" (知行合一) is the main tenet in Yangmingism.[2]
It is sometimes called the Lu-Wang school by people who wish to emphasize the influence of Lu Jiuyuan.[3] Xinxue was seen as a rival to the Lixue school sometimes called the Cheng-Zhu school after its leading philosophers, Cheng Yi and Zhu Xi.[3]
Yangming's philosophy was inherited and spread by his disciples. Eventually, Yangmingism overtook the dominance of the Cheng-Zhu School and started to have followers outside China. Yangmingism became an influence on the incipient anti-foreigner movement in 19th century Japan.[4] In the 20th century, Japanese author and nationalist Yukio Mishima examined Yangmingism as an integral part of the ideologies behind the Meiji Restoration as well as further samurai resistance, in particular the Shinpūren rebellion.[5]
Some have described it as influential on the Cultural Revolution for its idea of internal transformation.[6]
Origins[edit]
In 1472, Yangming was born in a rich household in Yuyao, Zhejiang. Yangming's father ranked first place in the imperial examination in 1481, thus he had been expecting his children to inherit his knowledge and start their career by participating in the imperial examination.[7]
When Yangming was 12 years old, Yangming's father sent him to a private school to prepare for the exam. At the age of eighteen, Yangming had a talk with Lou Liang , who was one of the representative figures of Cheng-Zhu School at that time. Lou's teachings had significantly enhanced Yangming's interest in Cheng-Zhu School. After their conversations, Yangming managed to read through all of Zhu’s work, reflecting on Cheng-Zhu School’s principle that “to acquire knowledge one must study things” (格物致知). To practice this principle, Yangming spent seven days doing nothing except staring at, or so to say, studying the bamboos planted in the garden.[7]
Not surprisingly, not only did he not learn anything from the bamboos, but Yangming also fell seriously ill after sitting in the garden for seven days. Therefore, Yangming had given up on most of the Cheng-Zhu literature, as well as the idea of taking the imperial examination.[7] Instead, he began to read texts written by other Chinese philosophers, and eventually narrowed his focus on Taoism and Lu Jiuyuan, whose work had been a major opponent to the Cheng-Zhu's Rationalistic School.[8]
Though Yangming had lost his faith in the imperial examination, he still signed up for the exam for the sake of his father. He passed the exam and was later assigned to work in the construction department in the central government. In 1506, Yangming was caught in political conflicts, and soon was demoted to Guizhou, the most deserted place in China at that time.[7] Yangming soon recovered from the setback. While working on improving the living situations of people in Guizhou, Yangming developed his own philosophical principles, which were then called Yangminism, based on The Great Learning and Lu's work.[8]
Yangmingism became hugely popular in Southern China, especially Jiangxi and Jiangnan (except Suzhou), but not Anhui and Fujian, and by the sixteenth century the Cheng-Zhu orthodox school even in the North could not ignore its basic philosophical claims. The Yangmingist belief that all men were equally capable of moral behaviour led them to advocate the formation of jiangxue study communities and that participating in the state was not necessary, which in turn led to rise of the Donglin movement. Northern literati, more dependent on governmental routes to success than their Southern counterparts, were less receptive to Yangmingism.[9]
Major philosophy principles[edit]
"The Supreme Principle is Buried in One's Heart-Mind"[edit]
Yangming inherits Lu Jiuyuan's idea that everything one needs can be found in one's heart, opposing to Cheng-Zhu's idea that one must learn from the external things.[10] This was promoted with the adage "The Supreme Principle is Buried in One's Mind" (不离日用常行内,直到先天未画时).
Yangming argues that there are countless matters existing in the world, we can never get to study all of, or even most of them. However, when we are interacting with the world, we are using our consciousness to look, smell, and hear what is all around us. Thus, we can find the existence of the whole world in our minds. If we think deeper, we can even see the extensions of the world there. The recognition of extensions here doesn't mean that one can see the whole picture of Eiffel Tower even he has never been to Paris. What Yangming has been trying to prove is that, as we have a completed set of perceptions of the world in our minds, we have as well gotten a hold of the ultimate philosophy, the truth of the world, the supreme principles which have been guiding and teaching us through the ages.
Achieve the ultimate consciousness[edit]
In his book, 傳習錄, or Instructions for Practical Living and Other Neo-Confucian Writings in English, Yangming writes that "there is nothing exists outside our minds, there is no supreme principle exists outside our hearts."[10] However, the problem here is that we let all kinds of selfish desires cover up the supreme principle, so we can't practice the principle well in our daily lives. Yangming uses an example in his book to demonstrate his idea: if we see a child fall into water well, we can't help but feel bad for the child. The feeling of bad here is an embodiment of the inherent supreme principle in our minds. But, if the child happens to be the son of one's biggest enemy, he may not feel bad for the child after all.[10] This is the situation in which the supreme principle is covered by selfish desires. If one can remove all selfish desires from one's heart, then he would achieve the ultimate consciousness, which is the final purpose pursued by many Chinese philosophers throughout centuries.
One thing worth noticing here is that, the ultimate consciousness is also in accordance with Cheng-Zhu's "to acquire knowledge one must study things (格物致知)" in a way. This means that one must conduct appropriate behaviors under certain circumstances. For instance, everyone knows they should care about their families' wellbeing. But if one only asks whether his families are feeling good or bad and does nothing when he receives the answer "feeling bad", this cannot count as the ultimate consciousness. Only does one actually do things to take care of his families can be considered as knowing the ultimate consciousness.[10]
The unity of inner knowledge and action[edit]
The unity of inner knowledge and action, or "知行合一", is probably the most important and well-known concept in Yangmingism. Yangming explains this concept as "Nobody can separate the knowledge and the action apart. If one knows, one will act. If one knows but don't act, then he has never actually known it. If you can obtain both, when you know something, you are already doing it; when you are doing something, then you already know it."
"Nowadays, many people treat knowledge and actions as two distinct things. They think the need to know first, only then can they do something in this area. This lead them to do nothing, as well as to know nothing."
In other words, 知行合一 could be interpret as the consistency of one's Supreme Principle and his objective actions. In the example of a child falling into water well, the action is not trying to save the child, but "feeling bad for the child". And the knowledge, the part of the Supreme Principle used here is the sympathy for others. For those who doesn't feel bad for the child, they haven't learn the knowledge of sympathy yet, thus they cannot apply the knowledge in their actions.
Similar ideas can be found in the western literature. In Demian, Hermann Hesse writes that "only the thoughts that we live out have any value."[11] MIT's motto "Mens et Manus,"[12] or "Mind and Hand," also reflect the importance of combining the inner knowledge and actions as one.
The Four-Sentence Teaching[edit]
In 1528, one year before his death, Yangming summaries his philosophies into a doctrine called "the Four-Sentence Teaching (四句教)". The original Chinese text is "無善無惡心之體,有善有惡意之動;知善知惡是良知,為善去惡是格物".[13] which can be translated as "The Substance of the mind lacks good and lacks evil. When intentions are formed there is good and there is evil. 'Pure knowing' is knowing good and knowing evil. 'Getting a handle on things' is to do good and eliminate evil."
Education philosophies[edit]
Yangming regards education as the most efficient way to inspire people to find the Supreme Principle in their minds; it means that not only do education institutions need to teach students academic knowledge, but they also need to teach students moral and ethical principles.[14] He again emphasized the necessity of uniting knowledge and actions as one in the process of education.[10] Yangming believed that in order to achieve something, one must set up a specific goal first.[14]
Genres[edit]
Left philosophical genre[edit]
Zhezhong School[edit]
Notable figures in this genre include Nie Bao, Zou Shouyi, Xu Jie, and Zhang Juzheng. Zhezhong School emphasizes on inner virtues. Scholars in this school regard virtues and knowledge are the foundation of one's life, arguing that one should solely focus on learning instead of actively seeking fames or reputations. They emphasize the importance of education.[8]
Right philosophical genre[edit]
Taizhou School[edit]
Notable figures include He Xinyin, Yan Shannong, and Wang Gen. Taizhou School became widespread because it focuses on the general public. Scholars in Taizhou School believe that even the most ordinary person has the possibility of accomplishing extraordinary achievements. Everyone is a potential saint, as the universal truth is buried their own mind.[8] Taizhou School is rebellious against both the traditional and the Neo-Confucianism.
Critics[edit]
Chinese historian and philosopher, Wang Fuzhi, criticized that Yangming is more of a Buddhism follower than a Neo-Confucianism philosopher. Yangming's excessive concentration on minds had made his teaching contain a negative attitude coming from his early education in Buddhism. Fuzhi didn't agree with Yangming that there is no good or bad exist in both the world and people's minds. He also argued that 知行合一, the unity of inner knowledge and actions had made people can no longer separate theories and actual matter apart.
In Japan[edit]
陽明學, or ようめいがく, is the branch of Yangmingism in Japan. Yangmingism was spread to Japan in the later periods of the Ming Dynasty by a traveling Japanese monk. From 1568 to 1603, Yangmingism was at its preliminary stage in Japan. Later, when the Ming Dynasty ended, some of the Ming scholars fled to Japan and helped to develop Yangmingism there.[15] In 1789, Yangmingism became an influential philosophy among the Japanese. Yangmingism had also played an essential role to Japan's Meiji Restoration.[16]
See also[edit]
References[edit]
- ^ A source book in Chinese philosophy. Chan, Wing-Tsit. (New Impression ed.).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9. ISBN 978-1-4008-2003-0. OCLC 85996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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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阳明学的实践精神》:迥异于中国的日本阳明学 – 国学网" (in Chinese (China)). Retrieved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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