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3

처사(處士) - 유자 儒者

처사(處士) - sillokwiki

처사(處士)

주요 정보
대표표제 처사
한글표제 처사
한자표제 處士
관련어 거사(居士)
분야 사회/사회구성원
유형 직역
시대 조선
집필자 이규대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처사(處士)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세종실록』 10년 11월 16일

조선시대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목차
1 개설
2 담당 직무
3 변천
4 참고문헌
5 관계망
개설
조선시대에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지식인을 처사(處士)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교양으로 삼았던 자들에게 관직자의 길과 처사의 길은 그들의 이념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길이었다.

담당 직무
처사는 후학의 양성과 향리(鄕里)의 풍속을 진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들은 비록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상소 형태로 정치적 소견을 올리기도 하였고, 후기 사회에서는 산림(山林)이라는 이름으로 등용되는 제도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 사회에서 학파가 형성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변천
조선초기에는 관(官) 우위의 정책이 추진되었고,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는 비록 학덕을 겸비한 처사라고 하더라도 우대를 받기 힘들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특징적 요소라고 할 예학(禮學)이 발달하면서 각종 의례에서 관권 우위의 질서가 확립되었으며 의식주 역시 여기에 따라 규정되었는데, 세종대 예조(禮曹)에서는 시향(時享) 복장에 대해서도 주자의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들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문공가례』에 "정지(正至)·삭망(朔望)에는 참알(參謁)한다."고 하였고, 그 주(註)에는, "주인 이하는 성복(盛服)한다. 무릇 성복이란 것은 관작이 있는 이는 복두(幞頭)·공복(公服)·대(帶)·화(靴)·홀(笏)을 갖추고, 진사(進士)는 복두와 난삼대(欄衫帶)를 착용하며, 처사(處士)는 복두와 조삼대(皂衫帶)를 착용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세종실록』 10년 11월 16일). 이와 같이 처사는 관직에 있는 사람과 차별화 되었다.

그러나 국가 이념인 조선의 성리학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4대 사화(士禍)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정변을 겪으면서 처사로서의 생활을 지향하는 자들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참고문헌
신병주, 「16세기 처사형(處士型) 사림(士林)의 대두와 학풍」, 『규장각』21, 1998.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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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동음이의어) 
최근 수정 시각: 2023-03-26 13:01:31

분류 동음이의어한자어유교
1. 과일 유자

2. 인명
3. 유생의 동의어
4. 일본 야마가타현의 정
1. 과일 유자[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유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 인명[편집]
유자(래퍼) - 대한민국의 가수 곽유진의 예명.
유자(劉慈) -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유자 왕 - 중국의 피아니스트
유자(원피스) - 일본 만화 원피스의 등장인물 코자의 오역.[1]
유자(유자소전) - 유자소전 속 주인공 유재필의 별명


3. 유생의 동의어[편집]
儒者.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선비"라는 뜻. 
넓은 의미의 유자는 유학을 공부하는 자를 뜻하며 따라서 조선시대의 지배층인 양반 계층 및 유학을 공부하는 상민, 천민 등을 포함하는 말이다. 

조선전기에는 신분제가 양천제(良賤制)였으며 양인이라면 모두 과거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물론 고급 관직 및 주요 관직은 개국세력인 신진 사대부들이 독식하였으나 과거시험의 응시자격은 있었다정도로 해석함이 옳다. 
이후 조선 중후기에 이르면 신분이 분화되면서 확고한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고정되었고 유자라는 말은 이때부터 주로 계층적으로 좁은 의미로 썼으며 특히 양반층을 뜻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의 소설 호질에서 나오는 유자[2]도 이 뜻이다.
 

4. 일본 야마가타현의 정[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유자마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단행본에서 역자가 코(コ)를 유(ユ)로 잘못 읽어서 유자라고 개명당했다.
[2] 호랑이에 따르면 유자는 더럽다고 하며, 유자의 유는 諛(아첨할 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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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儒者, 순자

유자儒者인가 유학자儒學者인가

by소학Nov 18. 2015

https://brunch.co.kr/@soha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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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는 공자와 다르다'
처음 <순자>를 완독 한 후 매우 혼란스러웠다.
학창 시절 배웠던 공자와 순자의 관계에서 많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그 후로 <순자> 뿐만 아니라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를 수 없이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내렸던 결론은 '순자는 공자와 다르다.'

유학자儒學者, 공자


종종 '유자儒者'와 '유학자儒學者'를 혼용해서 사용하는 분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엄연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상商나라 때 농경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제사가 주周나라 이후 정치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공동체 질서가 서열 중심의 계급 사회로 변형되었다. 쉽게 말해서 적장자嫡長子가 집안 혹은 공동체의 대표가 되어 제사를 비롯한 가례家禮의 최종 결정권자가 되었다. 이러한 적장자 상속의 원칙은 국가에까지 발전이 되어 왕위 계승에 있어 장자가 왕위를 잇는 최우선 순위가 된 것이다. 이를 종법宗法이라고 부른다.

공자가 주나라 종법을 사상의 핵심으로 삼으면서 유자 사상에 변혁이 일어났다. 정명正名론(이후, 정명)을 내세워 신분 제도를 강화시킨 것이다. 공자의 정명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거기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인간의 욕망을 억제시킨다. 그래서 권력 집단의 신분에 따른 권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이러한 공자를 따랐던 무리들을 '유학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자儒者, 순자

순자는 공자와 다른 정명을 말하면서 인간이 가진 욕망을 인정하고 있다. <순자> 제16권 22편 정명편을 보면 인간은 살고자 하는 욕망과 죽고 싶지 않은 욕망이 강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그 욕망을 억제하기 보다는 인정하고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힌다.

정명은 단지 사물의 뜻을 명확히 해주는 역할만 할 뿐 확대 해석하지 말고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 순자의 정명론이다. 따라서 순자는 공자의 정명처럼 신분 제도에 갇혀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시스템을 거부한다. 순자에게 있어서 신분 제도는 능력에 따라 변동 가능한 유동적인 시스템이다. 이러한 순자의 신분 개념은 계급 구조의 적장자 상속의 원칙과는 시작부터 다르다. 수염을 기른 성인 남자라면 누구든지 일정한 교육 후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주나라 이전, 유자의 제사 시스템과 들어맞는다.

따라서 순자는 유학자가 아닌 '유자'이다.







탈공자脫孔子

후에 제3권 6편 비십이자非十二子편에서 자세히 언급을 하겠지만 순자의 공자 탈출기(이하, 탈공자)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 정명正名이란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개념으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 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 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라는 정명론의 핵심 구절이다.
* '유儒'는 갑골에서 비雨와 수염, 즉 성인 남자를 뜻하는 이而 가 합해져서 만들어진 글자로 기우제를 지내는 성인 남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자 이전까지 이들을 '유자'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