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 디지털안동문화대전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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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 ID GC02400406
한자 兩班
영어음역 Yangban
영어의미역 Aristoratic Class
이칭/별칭 사대부(士大夫),사족(士族),선비(士),사림(士林),유생(儒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정진영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안동 지역에서 지배층을 이루던 신분.
[개설]
양반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지배층을 이루던 신분으로 ‘상놈’의 상대어이다. 원래 고려시대 문반과 무반, 혹은 동반과 서반을 지칭한 데서 유래하였다. 처음에는 문무반(文武班), 동서반(東西班) 등 두 개의 반을 의미하다가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 그에 소속된 사람과 그 후손, 그리고 문무반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과 그 후손이나 인척 등으로 의미가 확대되어 갔다.
[양반의 의미와 동의어]
양반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지배 신분층이란 의미 외에도 행동과 행실이 반듯하다, 또는 아내가 제3자에게 자기 남편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그리고 상대에게 경멸과 적대감을 강하게 표현할 때 쓰기도 한다.
양반의 동의어는 선비, 사대부(士大夫), 사족(士族), 사림(士林), 사림파(士林派), 유자(儒者), 유생(儒生), 학생(學生), 처사(處士), 유학(幼學) 등 매우 다양하다. 사대부는 가끔은 양반 사대부라는 말로도 쓰인다. 이러한 말들은 유래가 양반과는 다른 것에서 왔거나 역할이나 직업, 직역 등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다.
가령 양반들이 글 읽는 사람이란 뜻에서 선비, 선비의 집단인 사림, 사림이 정치적 세력이 되어 훈구파와 대립하자 사림파,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유자·유생, 유자·유생의 집단을 일컫는 유림(儒林), 국가의 공문서에 일반적인 양반의 신분 표기로 쓰이는 학생·유학 등이 그것이다.
1. 선비·사(士)·유자
양반이란 말은 좀 더 일반적으로 선비란 말과도 통용된다. 선비란 사(士) 또는 유자 등을 일컫는 우리말이다. 양반과 선비는 이렇듯 통용은 되지만, 관련성은 전혀 없다. 그것은 말의 유래가 서로 다른 때문이다. 양반은 고려시대의 문무반을 지칭한 데서 유래한 반면, 선비는 중국의 선진 유학인 공자와 맹자로부터, 좀 더 직접적으로는 송나라의 사대부에서 유래한 것이다.
선비들의 학문은 유학이었으므로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또는 그 집단이란 의미로 유자·유림이 널리 사용되었다. 즉 농사에 힘쓰는 사람을 농부라 하고,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는 사람을 스님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맹자』에서는 일정한 수입이 없어도 떳떳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며, 천하의 넓은 곳에 거처하고 바른 자리에 서서 큰 도를 행하다가 뜻을 얻으면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고, 뜻을 얻지 못하더라도 홀로 도를 행하여 부귀와 무력으로도 그 뜻을 꺾지 못하며, 빈천하더라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 사람을 선비라고 했다.
선비는 정치적으로는 인정(仁政)을 행하는 담당자로서 군주와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군주라도 함부로 부를 수 없으며, 군주가 찾아가 배움을 청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이런 선비를 특별히 대장부라고도 하고, 성현이라고도 했다.
2. 사대부
중국 송나라를 흔히들 사대부 사회라고 한다. 사대부란 사(士)와 대부(大夫)의 합성어이다. 사(士)란 독서하는 사람이고, 흔히 선비로 일컬어지는 지식인을 말한다. 선비가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관직을 가지게 되면 대부가 된다. 조선시대로 치면 가선대부·통정대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왕조는 송나라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바로 앞 시대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조선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성리학 또는 주자학이라고 하는 신유학(新儒學)이 바로 남송의 주자(朱子)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부터 성리학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들의 학문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것이 다름 아닌 조선의 사대부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서울에 거주하면서 주로 조상의 음덕을 통해 벼슬에 나아갔던 불교적인 고려의 귀족들과는 달리 신유학과 과거를 통해 관료로 성장하였고, 또 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던 지주들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 사대부가 다름 아닌 조선 양반의 근간이 되었다. 선비란 이런 유래를 가지면서 양반의 또 다른 이름으로 조선 사회에 자리 잡게 되었다.
3. 사족·사림·사림파
조선 사회에서 선비라는 존재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혈연 집단의 구성원이고, 신분도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으니 곧 사족이라는 신분이 된다. 점차 선비들의 집단이 형성되면서 이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림이 등장하게 되었고, 사림은 성종 연간 이후 점차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 세력과 대립하는 정치 세력이 되면서 사림파로 불리었다.
4. 학생·유학
선비가 관료가 되는 일반적인 방법은 과거를 통해서였다. 양반이 참여하는 과거에는 문과와 무과가 있고, 다시 각 과마다 대과와 소과가 있다. 문과와 문과의 대과 합격자를 급제(及第)라고 하고, 소과 합격자를 생원·진사 또는 출신(出身)이라 하였다. 공신 또는 고관을 역임한 자들의 자손에게는 음직(蔭職)이 주어지기도 하였고, 충순위(忠順衛)·충찬위(忠贊衛) 등을 두어 국가 유공자의 후손을 예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양반이 관직이나 품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일부는 서울의 성균관이나 사부학당, 또는 지방의 향교에 적을 두고 있어서 이들을 학생 또는 교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점차 관직이나 품계를 가지지 않은 이들을 통칭해서 유학(幼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양반이란 크게는 유학층을 기반으로 하여 전직·현직 관료와 품계(品階)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농업 등의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대체로 16세기 이후에는 국가에 대한 군역의 부담을 지지 않는 특권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양반과 중인·평민·천민]
조선시대의 신분은 특권층이자 지배층인 양반을 정점으로 하여 그 아래에 중인·평민·천민이 존재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편제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는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었을 뿐이다. 양인 가운데 벼슬에 나아간 사람들을 양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관료 예비군인 선비들을 사족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양인층 중에서도 상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점차 경제적·사회적·정치적인 특권을 장악하여 특권적인 양반 신분층으로 성장하면서, 양인층이지만 이러한 특권을 확보하지 못한 평민층과는 차별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양반과 평민 사이에 고급 전문직종인 법률, 의학, 통역 종사자와 중앙과 지방 관청의 행정 실무 담당자를 중심으로 한 중인층이 분화됨으로써 마침내 4개의 신분층이 형성되었다.
양인층은 초기에 상당한 개방성이 있었지만, 점차 유교적인 의식과 체제가 확립되면서 신분 간의 배타적인 체계가 확고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양반은 배타적이면서도 특권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가면서 양반 이외의 계층을 상민(常民)으로 상대화하여 반상제(班常制)를 확립해 나갔다. 이로써 흔히 말하는 양반과 상놈의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안동과 양반]
안동은 흔히 양반 고을로 불릴 만큼 양반이 많은 곳이다. 이 같은 사실은 곧 과거 합격자와 관리로서 현달한 인물, 유행(儒行)이니 문학(文學)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고을마다 작성되었던 읍지류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안동(예안현 포함)의 문과 급제자는 290명, 생원·진사 합격자는 370명, 음사(蔭仕)로 벼슬에 나아간 사람은 212명, 유일(遺逸)로써 천거되거나 유행이나 문학으로 이름난 사람은 각각 82명·41명·137명으로 총합계는 1,132명이다. 이를 안동의 양반 총수로 하여, 군현의 호구 수(2,061호)와 토지 면적(12,191결)과 대비하여 보면 호(戶)와 결(結) 각각 0.55명과 0.09명이 된다.
영남 지방의 비슷한 계수관(界首官)인 경주는 각각 0.12명과 0.01명, 상주는 각각 0.19명과 0.03명, 진주는 각각 0.16명과 0.03명으로, 안동은 비슷한 규모의 다른 고을에 비해 약 3~4배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이로서도 안동에 양반이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안동의 양반 문화]
1. 주거 환경
안동 지역의 양반들의 주거 환경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는 바로 안동 하회마을이다. 이곳은 대대로 풍산류씨가 살아온 전형적인 동성마을이며, 빼어난 자연 경관과 민속·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양반촌이다. 삼면이 낙동강으로 둘러 싸여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연화부수의 지형이라 불리기도 하고, 산태극 수태극의 형상이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하회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피해를 입지 않아 전통적인 양반 가옥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회마을 양반 가옥의 대표적 예인 안동 양진당을 통해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데, 대개 안채는 ‘ㅁ’자형으로 되어 있고 사랑채는 일자형으로 되어 있다.
2. 놀이 문화
안동 지역에서 행해지는 선유줄불놀이는 안동 지역 양반들의 놀이 문화를 잘 드러내고 있다. 선유줄불놀이는 해마다 음력 7월 16일 밤에 하회의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부용대 단애 밑을 흐르는 강 위에서 행했던 선유시회를 겸한 불꽃놀이이자 축제이다. 이 놀이는 높이 70m가 넘는 부용대 단애, 그 밑을 흐르는 강변의 백사장, 소나무들의 세 요소가 잘 갖추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문화(文華)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했으므로 서민들이 중심이 되었던 하회 별신굿 탈놀이와는 대조를 이루었다.
3. 음식 문화
대부분의 음식 문화는 양반의 음식 문화에서 유래되게 마련으로,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인 안동간고등어·헛제사밥 등도 양반의 음식 문화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바다에서 꽤 떨어진 안동에서 생선은 양반들이나 먹을 수 있는 무척 귀한 산물이었다. 당시에 이동 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가까운 바다에서 고등어를 가져오는 데 통상 이틀이나 걸렸는데, 긴 이동 시간으로 인해 고등어가 상하기 쉽기 때문에 고등어의 장기간 보존을 위해 소금 간을 한 데서 안동간고등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양반이 많았던 안동에서는 예부터 제사를 지내는 일이 빈번하였는데, 특히 기제사를 지내고 나면 제사상에 올렸던 여러 가지 나물을 얹어서 비빔밥을 만들고 각종 산적과 해물을 곁들여 제삿밥을 먹었다. 헛제사밥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제삿밥과 똑같이 비빔밥과 산적·탕국 등과 함께 먹는 음식인데, 공부하는 유생들이 밤에 출출하면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제사를 핑계 삼아 먹게 된 데서 유래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