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07

최현민 > 비교 영성 -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불교를 이해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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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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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공과 하느님2-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은 같은 분인가 다… 관리자 05-09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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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공과 하느님2-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은 같은 분인가 다… 관리자 05-09 271

33 공과 하느님1-불교의 공사상 이해(3) 관리자 05-09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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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C. G. Jung의 禪佛敎와의 만남 관리자 05-02 320

29 그리스도교의 청빈서원에 대한 고찰 관리자 04-15 388

28 그리스도교와 선불교 간의 대화의 난제(難題) 관리자 04-14 400

27 2016 3월 강좌 주역 1 관리자 03-28 274

26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관리자 03-25 292

25 명상의 기본 태도 관리자 04-27 347

24 호흡명상과 걷기명상 관리자 04-13 430

23 뇌과학과 명상 관리자 04-13 417

22 존재하기 관리자 04-13 332

21 몸의 이해 관리자 04-13 406

20 불교와 그리스도교 관점에서의 몸.마음,명상 관리자 05-19 668

19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불교를 이해할 것인가? 관리자 02-20 374

18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관리자 02-20 359

17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의 해석학적 고찰2 관리자 02-20 427

16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의 해석학적 고찰1 관리자 02-20 575

15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비교영성 -종합토론 관리자 01-24 635

14 연기와 자비 관리자 01-24 460

13 예수의 유일성 문제 관리자 01-24 500

12 불자들의 기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기도 관리자 01-24 418



11 종교 대화가 나아갈 방향 관리자 01-24 287

10 씨튼연구원의 스무해를 되돌아보며 관리자 11-01 414

9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생태영성> 최현민 공저, … 관리자 10-29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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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만나다 관리자 09-13 239

6 제 1강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비교영성 관리자 09-13 243

5 청빈서원과 무소유정신 관리자 09-13 264

4 C. G. Jung의 禪佛敎와의 만남 관리자 12-20 670

3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비교영성 입문 - 종전의 비교연… 관리자 12-08 561

2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불교를 이해할 것인가 관리자 10-25 639

1 이스라엘 다녀와서 관리자 10-25 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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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불교와 그리스도교 수행론 비교    관리자 07-18 765

40 불교와 그리스도교 심성론 비교    관리자 07-18 509

39 공과 하느님    관리자 07-18 441

38 그리스도교1- 융    관리자 07-18 704

37 공과 하느님2-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은 같은 분인가 다…    관리자 05-09 281

36 공과 하느님2-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은 같은 분인가 다…    관리자 05-09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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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공과 하느님2-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은 같은 분인가 다…    관리자 05-09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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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강좌 2016.314
동아시아영성을 통한 현시대읽기 1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최 현 민

1. 자본주의의 허상

왜 지금 동아시아영성인가. 본 강좌를 시작함에 있어 문제의식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역을 주역 자체로, 공자 맹자 장자 사상을 문헌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이 강좌를 연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깊이 재인식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지 그 지혜를 동양사상에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저는 이 강좌를 마련했습니다. 왜 우리가 2016년이라는 현대에 주역을 공부하면 되지 않은가 그 당위성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거의 종교의 수준에 와있습니다. 현대인을 아울러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종교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치관이 우리의 삶, 정신세계 안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중세는 낙원, 유토피아를 내세에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종말론적 사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세와 현재의 긴장관계가  있지만, 천국하면 내세를 떠올립니다.

이에 반해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유토피아는 사후의 세계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현대 신자유주의시장경제가 확립되면서 시장 자체가 힘이 되었고 자본주의 가치는 종교가 되어버린 현실. 사람들은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그들을 따라가지 않으면 왠지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 서로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등바등합니다. 대학가는 스펙쌓기 위해 여념이 없죠. 자신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발버둥치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하나둘 단절되고 흩어져 소외되어버린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1) 진보의 의미와 그 허상

 자본주의의 개념들인 현대화, 세계화. 진화하고 발전하고 진보하고 있다는 표현을 우리가 끝없이 씁니다. 현대화는 80년도에 많이 쓰이던 개념입니다. 15 16세기를 기점으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산업화, 도시화,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자본주의, 이런 것들의 물꼬를 터트린 세계사의 물결을 현대화라고 말합니다. 이 현대화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현상이 세계화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 간의 국경을 넘어서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경영시스템으로 묶어집니다. 세계 기업은 무한경쟁에 돌입했고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능력과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는 20대 80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리고 점점 그 수치는 극단적으로 되어갑니다. 20%만이 안정된 삶을 살고 80%는 실업자 노동자의 삶을 사는 형태가 되면서 점점 많은 이들이 허탈감과 소외감,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점점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는 빈익빈 부익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우리가 발전하고 진보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발전인지를 말입니다.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우리가 접하게 되는 광고물은 더 편리하고 안락한 기기들에 대한 선전들입니다. 기술적인 발전에 의해서 내가 원하는 행복은 안락한 차를 타고 스마트폰에서 찾은 맛집에 가서 맛있는 것 먹고 경치 좋은 곳에 드라이브 하는 것정도로 생각합니다.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직업은 요리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기술적 향상으로 인해 삶이 더 편리해지고 안락해진 것이 진정한 의미의 진보이고 발전인지를... 생태계의 파괴문제는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힘든 현실입니다.
생태계 파괴는 곧 인간중심적 사유, 아니 더 나아가 생명의 경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 생명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돈) 아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첫 번째 순위는 경제가치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그 세월호 참사의 아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참사야말로  생명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보다 하위권에 놓은 적나라한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진보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사유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현대 진보사상의 밑바탕에는 어떤 이론이 깔려있는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2) 근대진보사상을 지향해온 이론적 배경
 
 고대에는, 최초의 완벽한 상태로부터 조금씩 쇠퇴해진다는 역사관에서 가능한 한 그 쇠락해지는 상태를 최소한 늦추는 일을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중세에 와서 그리스도교적 역사관이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서 역사를 시작과 과정, 종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신이고, 인간은 신의 계획을 실현하고 그것에 봉사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세지향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세지향적 구원의 약속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지상천국의 약속으로 바뀌었습니다. 유토피아는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다는 현세지향적인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근대 과학적 사유가 있습니다. 그 사유 중에서도 근대 고전물리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근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데카르트를 들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고대나 중세의 철학으로부터 자신의 철학의 확실한 기초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성의 힘으로 확실한 기초를 찾고자 했고 의심을 그 방법으로 택했습니다.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유명한 말이 그의 방법적 회의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생각하는 존재이고 정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적 기초에서 데카르트는 “수학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 중 가장 강력한 지식획득의 수단이라고 확신한다. 수학이야말로 모든 것의 원천이다.”고 말합니다. 데카르트의 세계관이 뉴턴에게 이어집니다. 이런 흐름의 기저에 있는 것이 기계론적 사유입니다.
 기계론적 사고란 실체를 중심에 두는 사고입니다. 뉴턴의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미분과 적분의 수학적 방법 이라는 세 가지 전제 역시 기계론적 사유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뉴턴은 우주란 하나의 기계이고 이 기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연은 생명이 없는 물질적인 재료입니다. 이것이 물리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자리 곳곳에 스며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경제학을 들 수 있습니다.


3) 근대 기계론적 페러다임과 근대 자본주의

오늘날 현대에 자본주의 발생을 소급해 올라가면 아담스미스를 만나게 됩니다.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시장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자본가의 자본과 노동자의 노동에 의한 생산력, 두 바퀴가 잘 맞아서 돌아가는 나라가 부유한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장경제이론을 펼치게 됩니다. 아담스미스의 인간론은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영리를 추구하게 되면 개인의 영리가 모여서 사회가 부유하게 되고 국가가 부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계론적인 패러다임이죠. 이기적인 각 개인들이 돈을 벌면 사회가 부유하게 되고 국가가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부가 골고루 분배되느냐는 것입니다. 부의 불균형,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사회문제의 심각한 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편리하고 안락해졌지만 경제적 발전 뒤에 있는 그림자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죠. 제가 말씀드렸던 생태파괴,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 개인주의 발달로 인해서 인간관계의 단절, 더 나아가 인간성의 파괴, 자살, 정신질환들, 기술에 의한 스트레스(테크노 스트레스), 범죄율의 증가, 이런 것들이 현대사회 안에서의 그림자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은 기술발전으로 인해서 생태계가 점점 더 무질서하게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우리는 인간인 내가 주체이고 자연은 객체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체와 객체로.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얼마나 큰 오류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자연이 나에게 공급해주는 산소가 없이 이 시간 이렇게 존재할 수 있으까요? 주변의 이 모든 것 없이 내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이 파괴된다는 것은 곧 내가 파괴됨을 의미합니다. 단지 자연만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파괴된다는 자각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2. 고엔트로피 사회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부르는 열역학 제2법칙을 기억하시나요. 엔트로피는 무질서한 정도를 의미합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물질이나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그건 바로 무질서한 방향이라는 것입니다.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변하고, 획득가능한 상태에서 획득불가능한 상태, 질서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흘러갑니다.
 생태계 파괴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무질서의 정도인 엔트로피는 점점 증가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쓰레기는 점점 증가하고 무질서도 증가해 가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엔트로피를 없앨 수는 없으나 그 속도를 낮출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형태를 변화시킴으로써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해법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 어떻게 엔트로피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느냐입니다. 다시 말하면, 점점 고엔트로피의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속도를 늦춰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느냐 이거죠. 그렇게 되려면 지금 우리가 지닌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안돼요.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에게 접해온 가치관의 인식이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동양사상 안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제가 2, 3년 전에 중국 상하이에 잠깐 들려서 하루 이틀 머문 적이 있습니다. 예전에 중국에 갔을 때는 사람, 자전거, 자동차로 혼잡했었는데,  지금의 상하이는 유럽, 미국처럼 호화롭더군요. 중국이 19세기를 지나면서 서구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자본주의체제의 일부를 받아들이면서 굉장히 변하기 시작합니다. 중국은 서구의 세속주의적인 교육과 경제시스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발전된 현실의 뒷면에는 엄청난 생태계 파괴가 있었습니다. 이제 중국은 고민에 빠진 것이죠.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중국이 들고 나온 것은 놀랍게도, 공자사상입니다. 공자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국 사유의 근본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지금 중국이 처한 이 혼란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자각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앞서 기계론적인 패러다임이 문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근대 서구의 기계론적 사유방식 이전에, 서구의 근본적인 사유를 살펴보면 그 중심에 존재론적인 사유가 있습니다. 서양철학은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 무엇일까를 질문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흙이냐, 물이냐, 불이냐, 바람이냐. 이 4대 요소 안에서 자연과 세계를 설명해보려 했습니다. 서양철학의 최초는 아르케가 무언지 존재가 무언지 묻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서구의 사유의 뿌리는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3.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1) 영육이원론

기원적 7세기전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묻기 시작했을 때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있다고 이해해왔습니다.
실존인물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기원전 7세기 오르페우스가 고대 그리스에 깊은 영향을 준 건 사실입니다. 오르페우스교가 그리스 전역에 퍼졌으니까요. 인간의 영혼은 사악한 육체에 잡혀있어서 윤회를 계속 하는데 윤회로부터 벗어나려면 금욕생활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펼쳤고 이것이 종교화되었어요. 오르페우스교에서 몸은 죽은 물질에 불과해요. 중요한 것은 영혼입니다. 바로 이러한 오르페우스의 사상은 서양의 철학의 밑바탕인,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플라톤의 사유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플라톤은 오르페우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이데아의 세계, 그건 바로 영혼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잠시 머물러 있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참된 사람은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영혼이고 육체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고향인 영적인 세계,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가장 큰 이상으로 생각해왔고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비판하면서 이데아가 내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역시 영혼이원론을 극복하지 못했어요.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영육이원론으로 되어있다는 것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인간을 이해하는 근본이 되어온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 영육이원론적인 사유 안에서 존재를 이해해 왔습니다.

2) 양자물리학에 의한 자연이해

  아까 뉴턴은 실체를 중심으로 해서 자신의 역학을 펼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뉴턴의 역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무너졌습니다. 20세기에 양자물리학이 나오면서 뉴턴의 실체, 물질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것이구나, 실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변화하는 것이구나, 처음에 고정되어 있다고 봤던 건 확률에 불과하는 것이구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구나 하는 발견과 전환이 양자물리학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양자물리학이 얼마나 깊게 우리의 삶에 들어와 있는지 못 느껴요. 여러분이 병원에서 받는 모든 검사, MRI, CT 유전공학 모든 반도체가 양자물리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턴의 역학은 무너지고 양자물리학이 들어섰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해왔던 존재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양자물리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체중심의 존재이해가 왜곡되었음을 입증해준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코페루니쿠스적인 전환이 아니겠습니까?
  자연은 물체중심의 사유에서 사건중심의 사유로의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물체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뉴턴은 물체는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원자의 집합체들이 절대공간에 일정하게 점유되어 있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우리가 물질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의 한계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가 존재를 이해할 때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건너가야 하는 강이 있는데 우리는 존재론적인 사유방식에서 다른 큰 강을 건나야 한다는 것이죠. 동양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큰 강을 건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다, 주역의 핵심입니다. 3000년 전 중국인들이 지닌 사유의 중심에는 모든 존재가 변화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뉴턴이 절대성을 이야기했다면 양자역학은 상대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이중성을 말합니다. 양자론에서 소립자들은 파동성과 입자성의 두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의 존재요소들은 이중성을 갖는다”라는 명제를 받아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습니다. 물체의 처음상태를 완벽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양자역학의 입장에서는 어떤 물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봅니다. 단지 확률적으로 알 뿐이지요.
 이것을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실체이론이 무너졌기 때문에 불확정성의 원리가 나온 겁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는 생각하는 건 착각에 불과하고 우리는 확률적으로 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25 명상의 기본 태도    관리자 04-27 347

24 호흡명상과 걷기명상    관리자 04-13 430

23 뇌과학과 명상    관리자 04-13 417

22 존재하기    관리자 04-13 332

21 몸의 이해    관리자 04-13 406

20 불교와 그리스도교 관점에서의 몸.마음,명상    관리자 05-19 668

19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불교를 이해할 것인가?    관리자 02-20 374

18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관리자 02-20 359

17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의 해석학적 고찰2    관리자 02-20 427

16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의 해석학적 고찰1    관리자 02-20 575

15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비교영성 -종합토론    관리자 01-24 635

14 연기와 자비    관리자 01-24 460

13 예수의 유일성 문제    관리자 01-24 500

12 불자들의 기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기도    관리자 01-24 418


불자들의 기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기도

(본고는<불교와 그리스도교, 영성으로 만나다, 최현민 저>
제9강 ‘그리스도교의 기도명상’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불자들 중에는 ‘기도’를 자력 수행의 길로 가기 힘든 사람들이 하는 타력 신앙 행위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틱낫한 스님은 몇 년 전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셨습니다. 스님은 그 책에서 1996년에 자두 마을(Plum village)에 사는 비구니 제자 두 분을 프랑스에 있는 가톨릭 수녀원에 보낸 경험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느낌을 전했다고 합니다.
“태이(스승이라는 뜻), 수녀님들은 모든 일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것 같아요. 그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며 사는 것이 저희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까요. 우리는 참선해야 하고, 호흡을 관찰해야 하잖아요. 우리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가끔 그것은 너무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우리도 어딘가에 의탁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또 틱낫한 스님은 플럼 빌리지를 찾아온 분들과 함께 걷기 명상(walking meditation)을 하곤 하는데,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은 과연 있나요? 기도의 효과가 있기는 있는 겁니까?” 이러한 질문과 앞서 언급한 당신의 제자들이 지녔던 ‘불자들은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스님은 󰡔기도󰡕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틱낫한 스님께서도 언급했듯이, 방법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종교인이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기도를 합니다. 틱낫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기도의 공통점은 자신의 뜻을 어떤 위대한 힘에 연결시키려는 열망과 행복에 대한 깊은 소망에서 비롯된다. 그 위대한 힘이 우리 밖에 있든 안에 있든, 우리는 그 위대한 힘에 우리의 사랑과 자비와 믿음을 보내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즉 기도는 혼자서 자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위대한 힘(부처님이나 하느님)과 연결되려는 열망이라고 하신 스님 말씀이 깊이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이 모든 것을 이미 다 결정해버린 상태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신과 내가 함께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기도의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간다는 것이지요.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바뀌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은 ‘기도’를 통해 내 안에 새로운 에너지를 전환시켜 나가면, 그 전환된 에너지가 나를 변화시키고 나와 연결되어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상대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이렇듯 틱낫한 스님은 기도는 그 어떤 위대한 힘, 그리고 너와 나의 관계를 묶어주고 깊게 해줄 뿐 아니라 ‘좋은 변화를 이끌어주는 선순환의 도구’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기도에 대한 이러한 틱낫한 스님의 견해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런데 일면 기도에 대한 스님의 해석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차이도 없다’는 스님의 해석이 그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신과 인간, 부처와 인간의 관계를 가역적可逆的 관계로 보기 때문이지요. 종범 스님께서도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한 ‘하느님을 여의도록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것에 대해 “그냥 떠나면 되지, 왜 떠나려고 하느님께 기도하는가”라고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잡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연못에서 달을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견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불교 명상 간의 차이를 극명하게 잘 드러내 주지 않나 싶습니다.
선불교 학자인 히사마츠 신이치(久松眞一)는 그리스도교가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견지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는 신과 인간 간에 초월적 불가역성을 넘어서 가역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신’을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견해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히사마츠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상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느님을 존재 자체(esse ipsum)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을 유일신이라고 칭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존재 자체이시기에 어떤 존재와도 비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초월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유일’의 의미는 둘, 셋 등에 대비되는 숫자적 개념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수의 원천이고 근원’으로서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엑카르트는 신(Gott)과 신성(Gottheit)을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속성을 지닌 삼위의 하느님, 곧 성부 성자 성령은 ‘신’에 해당되며, 이는 존재 자체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인 ‘신성’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히사마츠가 비판했듯이 대상화된 신관神觀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히사마츠의 비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신관을 다시금 성찰해 보도록 촉구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타키자와 가츠미(瀧澤克己)가 히사마츠의 그리스도교 비판의 일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면서도 타키자와는 불교 또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와 인간 사이에 불가역적 관계는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眞如의 세계 또한 인간의 어떤 행위나 자각 이전에 이미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실재와 인간의 깨달음 자체는 동일시되어선 안 되며 그러기에 양자 간에는 불가역적 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진여의 세계, 곧 깨달음을 가능케 해준 존재론적 근거와 인간의 깨달음 간에 불가역성을 말한 타키자와의 주장과 양자 간의 가역성을 말한 히사마츠의 주장은 분명 양 종교 간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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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불교를 이해할 것인가
                 
              들어가는 말   
              1. 타종교를 이해하는 3방식
              2. 붓다의 깨달음
              3. 공
              4. 공과 하느님
              5.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과학의 발달로 인해 세계는 모든 방면에서 하나가 되었고 더 이상 고립되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인류가 한 덩어리가 되는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세계는 국가 단위가 아닌 하나가 되었고 세계역사 또한 단일 역사로 탈바꿈해가고 있다. 이렇게 세계가 일체화되어 가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다원성이 공존하고 있다. 인류사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온 종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종교도 이제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타종교와 만나 그 안에서 새로운 구원의 메시지를 던져 주어야 할 시대적 사명과 요청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뿐 아니라 한국은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종교상황을 지녔다. 그것은 다름아닌 불교 개신교 가톨릭 유교 즉 여러 종교가 거의 대등한 힘을 지니고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여러 종교가 있어도 그 중 주된 종교가 있지 우리나라처럼 막상막하의 힘을 갖고 여러 종교가 공존하진 않는다. 이런 한국의 다종교상황 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관과 구원관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여할지 물어야 한다.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전인류의 하느님이라면 우리 신앙공동체를 통해서만 구원의 손길을 뻗치실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즉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만 당신을 보여주셨을까? 우리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그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데 그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즉 그리스도를 모르고 산 뭇사람들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래서 먼저 타종교를 어떤 입장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타종교를 이해하는 3가지 방식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보다 먼저 종교다원사회 안에서 타종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 왔다. 그 생각들은 오늘날 새로운 신학으로 발전해 왔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신학이다. 거기서 말하는 타종교를 이해하는 입장으로는 크게 3가지로 본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가 그것이다.

1] 이를 하나 하나 설명하면 먼저 배타주의 입장은 단순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 이외에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이 기독교에만 있으므로 구원받으려면 기독교로 다 개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타종교 안에서의 구원을 인정하지 못한다. 교회 안에서만의 구원을 고집하는 교회중심주의적 입장인 배타주의는 오늘날 대다수의 개신교 교인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다원성을 다루는 사람 중에는 배타주의 입장에 선 사람은 드물다. 배타주의의  대표적 신학자로는 칼 바르트를 들 수 있다.

2] 배타주의의 입장을 극복하기 위해 나온 것이 포괄주의이다. 이 입장의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가톨릭의 대표적인 신학자 칼 라너이다. 포괄주의 입장은 기독교의 진리를 포괄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입장으로 타종교에서의 좋은 것을 기독교의 울타리 안으로 포괄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교의 신자가 되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따르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불교신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선한 산다면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말이 다르고 개념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제도가 다르지만 타신앙을 갖고 그 안에서 올바른 삶을 살면 그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칼 라너는 이러한 타종교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했다.

2']  물론 그 사람이 양성적 기독인이면 더 좋고 기독교의 진리를 알면 더 풍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개종을 강요하진 않는다. 이러한 포괄주의의 입장에서는 신학도 약간 달라져서 예수를 역사적인 예수로만 보지 않고 우주적 그리스도로 생각한다. 즉 타종교에 있는 진리까지 포함하여 모든 진리가 우주적 그리스도 안에 포괄된다고 보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배타주의가 교회중심적 종교신학이라면, 포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 즉 타종교인들도 자신의 신앙의 중심을 그리스도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우주적 그리스도 안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괄주의도 문제점이 드러났다. 그것은 타종교인의 입장에 있는 사람의 반응으로 왜 멀쩡하게 다른 종교로 잘 사는 사람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느냐 하는 것이다. 즉 타종교인은 포괄주의에서 자기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그 자체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타종교인들은 자기네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넓게 망을 쳐서 그 안에 훓어버리려고 한다고 포괄주의의 입장을 비판했다.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집어넣고 자기만족만 하는 것이지 이는 인격을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타자를 타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는 비판을 했다. (가톨릭 입장)

3] 그래서 나온 것이 다원주의이다.(존휙,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이것은 너는 너의 길 가고 나는 내 길 가도 다 구원받는다는 입장이다. 구원의 길이 여럿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의 균등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동등성이 아님)  이러한 다원주의적 입장은 신중심적 신학이다. 포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로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아직 고집하고 있는데 반해 다원주의 입장은 그리스도는 기독교적 개념이므로 그리스도를 빼고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하느님 중심의 신학을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은 신을 추구하고 있고 신께로 가는 길이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같은 종교가 문제가 된다. 즉 신중심적 신학이 신개념을 사용하는 한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다원주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옳은 지적은 아니다. 이러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신개념은 좁은 의미의 신개념이기 때문이다. 불교도 그리스도교적 신을 인정하진 않지만 불교식의 신개념이 있다. 이는 후에 공과 하느님을 다루면서 언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앞서 본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신대신 실재(Reality)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다원주의를 비판하는 새로운 입장이 최근에 나왔는데 그것은 마크 하임의 Mark Heim Salvations이라는 책자이다. 아직 나온지 얼마 안되어 학계에서의 반응이 나오지 않았지만 이 이론에 대해 긍정하는 사람도 있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여기서 그의 이론을 잠시 살펴보면 거기서의 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원주의는 각 종교전통을 뛰어넘는 하나의 실재가 있음을 가정하여 각 종교의 차이를 극소화하고 각 종교마다의 특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이것을 믿어도 구원되고 저것을 믿어도 구원된다고 함으로써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어 자기 종교에 헌신할 당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각기의 종교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그리스도교에서 예수, 이슬람에서는 코란)에 온전한 헌신을 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임은 주장하기를 위 3가지 입장을 경우에 따라 다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 종교 안에 자기가 헌신해야 할 때 배타주의의 주장은 정당하다. 내가 믿는 종교가 유일하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헌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말하는 배타주의는 다른 사람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종교전통에 헌신함을 인정해준다. 즉 남이 다른 길을 택함을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 전통적 배타성처럼 나만 옳고 남은 틀렸다고 본 전통적인 배타주의와는 다르다. 

둘째 포괄주의적 입장은 내가 결단에 의해서 택했던 하나의 길이 있기 때문에 나의 전체 삶은 그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단 나의 삶의 여정 중에서 다른 신앙에 대해 알게 되고 배움으로써 내 신앙 상태가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종교 체험이 안테나가 되어 그 안테나를 통해서 다른 이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고 서로 나눌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세째의 다원주의 입장은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할 때이다. 학문적 입장에 설 때, 종교 간의 대화를 할 때는 다원주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 이와 같이 형편에 따라서 3입장을 취하면서 종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을 하임은 orientation Pluralism이라고 하기도 하고  포괄적 다원주의라고도 한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입장 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타종교를 인정하고 타종교에서 말하는 진리가 나의 종교관을 넗혀준다는 사실이다. 그런 입장에서 불교에 접근해보기로 한다.

2. 붓다의 깨달음

佛敎란 말 그대로  부처님(BC 560-480)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에게는 칭호가 여럿이 있는데 석가모니, 고타마 싯달타, 붓다가 그것이다. 석가모니 혹은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또는 줄여서 석존이라고도 하는데 석가(Sakya)는 그의 나라 이름이고 무니(muni)는 조용한 사람 혹은 聖者라는 출가자를 말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란 말은 석가의 출가자 내지 석가의 성자이라는 의미가 있다.

두번째 이름은 싯달타로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준 이름이다. 말 뜻은 ‘네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 지리라’라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한 자란 뜻이다. 고타마는 그가 소속된 씨족이름으로 성이다. 이와 같이 석가모니, 고타마 싯달타는 그의 출생과 연결된 이름이다.

우리가 보통 부르는 부처는 인도어 붓다(Buddha)를 음역한 것이다. 이는 깨달은 자(覺者)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부처는 고유명사는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누구나가 다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 그 자체보다 그의 깨달음에 집중한다. 부처에게 집착하는 것 그것은 깨달음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선사들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다.(殺佛殺祖) (조사: 선의 법맥을 이어온 스승로 보리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혜능)

 붓다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가 태어날 당시 점쟁이 아시타가 점을 쳤는데 그가 전륜왕(바퀴를 굴리는 임금, 즉 법륜을 돌리는 임금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왕이거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인간의 구원자)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이 말을 듣고 첫번째 왕이 되게 하려고 고생을 모르게 키워 16세때 야쇼다라와 결혼시켜 라훌라(자기를 얽어맴)이란 아들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붓다는 29세때 노인, 병자, 시체를 보고 세상의 허무를 느껴 출가하여 6년간 극단적인 고행을 했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고행이 구원의 최고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행을 통해 무아경을 체험하지만 얼마 안가서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자기가 무아경에 들어갔을 때는 번뇌가 없어졌는데 다시 무아경에서 나왔을 때는 그 전과 똑같은 자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의 고행에서 오는 황홀경이 참된 해탈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가 얼마나 지독한 고행을 했는지는 갈비뼈가 다 드러난 부처님 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소녀가 주는 우유를 받아먹고 난 뒤 지나친 고행도 아니고 지나친 쾌락도 아닌 중도의 길을 선택한다. 그러자 그의 5명의 제자가 그의 곁을 떠났다. 붓다는 혼자서 보드가야(Bodh Gaya)에 가서 명상하면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거기서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는 거기서 깨달음을 얻은 후 7주간동안 명상을 계속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칠 것이냐로 고심했다고 한다. 부처 이전에도 깨달은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깨달음은 자기가 해야한다는 것때문에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는 그의 자비심 (카르마 )때문에 가르치기로 결정했는데 이 결정이 오늘날의 불교를 낳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붓다의 생에 있어서 깨달음의 체험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그가 正覺의 체험 후에 자신이 꺠달은 진리를 자기만의 것으로 삼지 않고 무지로 인해 고통당하는 중생에 대한 깊은 자비심으로 그들을 위해 설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붓다는 녹야원에서 첫설법을 하여 80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45년간 설법하셨다. 불교는 한마디로 말해 붓다의 지혜와 자비를 근본으로 하고 있는 종교이다. 

즉 2600년전 보드가야의 보리수 밑에서의 한 사람의 깨침이 불교의 시원점이 되었고 그를 추종하는 모든 불자들은 부처님의 깨침에 똑같이 이르려함을 목표로 삼는다. 이렇게 볼 때 불교를 안다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아는 것이 된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 당시 인도사상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꺠달음의 경지는 梵我一如였다. 우주적인 실체인 브라흐만 즉 梵과 개인적인 실체인 아트만이 일체라는 이 사상에서 부처님은 실체성인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인 안아트만(Anatman)을 주장했다. 我는 생멸변화하지 않고 영원불멸한 존재의 실체나 본질을 말하는데 부처님은 이러한 我를 부정한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고 생멸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과학의 설명과 다르지 않다. 옛날에는 고정 불변의 물질로 보았던 원자도 오늘날에는 불변의 것이 아니라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 중간자 등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운동체라고 본다. 불교에선 이를 諸行無常이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自性이 없고 모두가 인과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緣起라고 한다. 연기야 말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연기설의 가장 기본적인 원형은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하면 그것이 생기한다.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그것이 멸한다”는 문구이다.

아버지가 있음으로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으므로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학생이 있으므로 선생이 되고 선생이 있으므로 학생이 되는 것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더불어 있으며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나와 남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너로 인해 내가 있고 나로 인해 너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이 존재의 관계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인과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면 각 존재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붓다는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기에 자성이 없다는 무아설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무아설이 각 개체의 자성을 부정한 것이라면, 연기설은 전체적 측면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 측면에서 연기가 성립되려면 각 개체들이 무아일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무아의 개체적 측면에서 볼 때 그 무아 속에는 우주 전체(연기)가 들어와 있게 된다.

이러한 연기사상이 서기 150년 이후에 태어난 용수(나가르주나)시대에 와서 공으로 표현되었다. 결국 연기는 곧 공이며 공은 곧 연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사상이 불교전통 내에 면면히 이어져 왔고 궁극적으로 불교에서 깨달음이라 하면 공을 의미한다.

3.공

공은 무엇인가? 텅 비어 있다는 것, 그러나 이는 有의 상대개념인 無가 아니다. 여기서의 무는 상대무인데 공은 상대무가 아니라 유무를 넘어선, 아니 이를 포괄하는 절대무를 말한다.

돌아가신 성철스님의 법어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가 있다. 이 말은 그 자체로 너무도 당연한 말이라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 말이 의미를 지닌 것은 이 말과 반대되는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말이 선가에서의 깨달음의 출발점이 된다.

사실 산은 산이 아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언어활동과 논리의 기초가 되는 동일률을 범하기에 말이 안되는 말이다. 거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 선사들이 말하려는 각의 세계는 동일률이 통하지 않는 세계이다. 즉 言語道斷의 세계이다.

불교에선 동일률은 언어에서만 통하는 인위적인 법칙이며 실상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올바른 인식의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즉 실상의 세계에선 어떤 것도 고립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물들은 상호의존적이며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A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선 B C D 등 다른 여건들이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여기 종이가 있는데 이것은 여러 조건들이 충족되어 지금 종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된 것이지, 따지고 보면 이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름, 비, 물, 공기, 태양 숲, 나무, 나무꾼, 각종 도구들, 목재소, 제지소, 연료, 운송차, 도매상, 소매상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요소들이 연합하여 내 앞에 놓여 있는 종이를 산출한 것이다. 굳이 종이라고만 부르는데 문제가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어떤 한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 사물의 진정한 모습 즉 연기성, 의타성으로서의 공성을 왜곡하고 만다.  이름과 개념으로부터 오는 제한되고 편벽된 시각을 타파하기 위해서 선사들은 “산은 산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공의 지혜에서는 언어야말로 진리의 적이다. 언어야말로 사물들이 상호의존적으로 얽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것들이 각기 고유한 성품을 지닌 독자적인 존재인 양 착각을 일으키게 한 주범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언어에 속아서 존재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이것과 저것을 차별하고 자와 타를 구별하며 온갖 집착에 빠진다는 것이다. 온갖 집착, 온갖 편견은 사물의 연계성과 상대성을 무시하고 차별성과 독자성만을 보게 하는 언어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상호의존적이며 조건적이며 자존적 실체성을 지닌 것은 하나도 없다. 이를 불교에선 연기라고 부르고 이 무자성성 무실체성을 다른 말로 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어떤 것도 자성이 없다면 우리가 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재로 산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 순간 산이라 불렀지만 찰나 그 산은 벌써 변한 것이다. 모든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이와 같이 언어로부터 오는 모든 고정관이나 편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언어의 병을 치유해주고자 선사들은 언어 활동의 가장 기본적 법칙인 동일률을 무시하고 “산은 산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파악했을 때 우린 ‘산은 산이 아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또 산은 산이다라고 하는가? 왜 다시 상식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는 단순한 상식의 세계가 아니라 부정을 거친 긍정이다. 반야심경의 유명한 문구대로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색이 곧 공이라는 것은 산이 산이 아니다에 해당하는 것이고 공즉시색은 다시 부정을 거친 후의 긍정을 한 산은 산이다에 해당된다.

즉 만물은 자신의 자성을 갖고 있지 않고 타에 의존해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대로 각기 이름을 갖고 존재한다.  즉 모든 것이 공이지만 우린 각 사물 안에 고유한 이름을 붙힌다. 산은 산이 아니지만 산인 것이다. A는 A가 아니지만 A인 것이다. 즉 방편적으로 A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는 妙有라고 한다. 제일 처음의 산과는 달리 후자의 산은 이미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다음에 방편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바로 이 사물의 실상이 공임을 깨닫고자 한다. 즉 공이야말로 깨달음의 실재이다. 공의 깨달음을 통해 사물의 실상과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생멸변화 속에 있기에 어디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부처님까지도 집착해선 안된다.

단하천연스님이 木佛을 태운 일화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단하스님이 萬行 중에 날이 저물어 한 절에 찾아갔다. 마침 주지는 출다중이고 방은 찻다. 군불을 지피려고 땔나무를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마침 법당에 모셔진 나무 불상을 보고 업어다가 도끼로 쪼개어 군불을 지폈다. 바싹 마른 목불이 얿마나 잘 탔겠는가. 출타했던 주지스님이 돌아와 그 광경을 보고 “부처를 태운 놈이 어디 있느냐”고 야단이 났다. 그런데 단하는 “이게 정말 부처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래 그게 부처 아니고 무어냐?”고 답하자 그는“부처는 화장하면 사리가 나오는데 이렇게 태워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데 무슨 진짜 부처냐 가짜지”했다고 한다.

부처마저도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불자들의 철저한 무집착의 수행은 바로 사물의 실상, 자신의 실상인 진여을 깨닫기 위함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면 실지로 달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존재의 실상 즉 공을 깨닫는데 손가락의 역할을 하신 분이다. 이렇게 존재의 실상인 진여을 깨닫게 되면 이제 더 이상 부처와 중생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하나임음 깨닫게 된다. 열반은 생사를 떠나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의 세계가 바로 열반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생사 즉 열반인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의 세계, 공의 세계는 대립의 세계, 분별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대립이 사라진 무분별의 세계인 것이다.

4. 공과 하느님

불교에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공관에 의해서 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성이 없고 무아인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자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절대자까지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존재자에 실체성을 인정하므로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나와 너라는 이원론적 사고 체계를 갖게 된 것이다. 불교가 깨닫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를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즉 분별하는 지식인 분별지는 불교에서는 안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분별한다는 것은 각각의 자성을 인정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존재의 무자성성을 말한 불교의 공은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다. 절대자 하느님까지도 그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비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햐 하는가? 먼저 그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실체(Substance)인가?

공관은 우리들이 신앙하는 하느님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흔히들 불교는 공을 깨닫는 覺의 종교이고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은총을 믿는 은총의 종교라고 보기도 하며, 불교는 자력신앙이고 그리스도교는 타력신앙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상반되는 종교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이 양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인가?

저는 그렇게만 보는 것은 양종교를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겉에서 그렇게 다르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가 공관을 깊이 이해하게 될 때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깊이 깨달아 갈 때 양종교는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불교인들이 비판하듯이 그런 실체적 존재자가 아니다. 즉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이 지닌 존재의 허무성을 지니신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불교인들은 신을 인도의 데바신 정도로 생각한다. 즉 아직 윤회를 계속하는 존재로 생각한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게끔 하는 존재의 근원, 존재자를 떠받쳐주는 실재 그 자체이시다. 그래서 폴틸리히는 하느님은 궁극적 실재라고 했고 하이데거는 하느님은 존재자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말하길 “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하느님은 존재자일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하느님을 대상화시키고 존재자로서 생각한다면 그런 신관은 여지없이 공관 앞에서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공에서 말하듯이 모든 존재하는 것은 실지로 계속 변화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자와는 구별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존재자를 떠받혀주는 궁극적 실재, 철학에서의 제1원리, 피조물과는 구분되는 창조주, 절대자라는 개념도 공은 여지없이 공격한다.

하느님은 존재자체이다라고 할 때 흔히 인용하는 성서귀절이 출애굽기 3,14의 모세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나다”고 하신 그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틀을 구성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다시 숙고해야 한다. 즉 히브리어 hayah는 헬레니즘적 사고에서는 ‘존재한다’는 뜻이지만 히브리어적 사고방식에서는 ‘되다, 활동하다, 일어나다’라는 의미이다. 즉 헬레니즘적 사고에 의하면 하느님은 절대존재이지만, 히브리어적 사고에서는 하느님은 ‘존재와 창조를 위해 일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즉 존재와 생성의 역동적인 통일‘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에 장벽을 튼 신학자 다끼자와 가쓰미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은 바로 이러한 불교에서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서 독창적인 임마누엘 신학을 펼쳤다. 그는 인간이 깨닫든지 꺠닫지 못하든지 간에 하느님은 임마누엘 원사실 그 자체로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의 기반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초월성보다 내재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 존재의 기반은 우리의 존재 밖에 있는 어떤 대상적인 존재나 절대의 존재로서가 아니라 나를 나이게끔 만들어 주는 바로 실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엑카르트의 영성은 거기까지 갔다. “내가 그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그 눈은 그 안에서 하느님이 나를 보는 눈과 동일하다.” “하느님을 아는 것은 아무런 간격이 없는 일이니 나는 오로지 하느님이지 않으면 안되며 하느님은 바로 나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그의 체험의 표현이 급기야 그의 파문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공사상과 가장 가까운 그리스도교 영성을 찾으라면 그건 바로 엑카르트의 영성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하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하셨다. 인간은 있으면서 없는 존재인데 반해 하느님은 없으면서 있으신 분이라고 표현하셨다. 동서양의 사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신 분이셨기에 불교의 공사상도 깊이 아신 분이셨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을 공이라고도 표현하셨다. 

이와 같이 우린 불교의 공관을 통해 우리의 신관을 다시 한번 재점검해 보고 숙고하게 된다. 대상화된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나이게끔 하는 나의 존재 자체이신 분, 존재하는 모든 것이 존재하게끔 존재를 떠받혀주는 바로 그 실재 자체이신 분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관은 우리 신앙의 신관을 정화시켜주며 사물의 존재의 실상의 바로 보도록 우리를 재촉해 준다.

공관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이거나 텅비어있다는 허무의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앞서 살펴보았다. 공관은 존재자의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하여 있는 그대로의 진여의 모습으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따라서 불교를 허무주의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오해이다. 오히려 허무주의를 극복한 종교이며 현대과학적 사고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보편종교이다. 이제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가 왔다. 사물의 실상을 공으로 파악한 불교와 존재의 실상을 하느님으로 파악한 그리스도교의 실재는 다른 것이냐?과연 양종교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냐?  공관과 신관이 서로를 배우고 서로 안에 대화를 할 수 있는 여지는 없는 것이냐? 양종교가 실재에 대한 표현양식이 다를 뿐 실재 그 자체는 같은 것이 아니냐? 불교는 극단적인 부정의 논리로 실재를 설명하려 했고 그리스도교는 절대적인 긍정의 논리로 실재를 설명하려 한 것은 아니냐? 하는 것이다.

종교 안에 모든 표현 양식은 그 시대와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 그래서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우리의 신앙을 담는 표현양식도 바뀌어야 한다. 옛날 유대문화의 그릇에 담긴 그 표현양식을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답습한다면 이는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며 모든 것이 달라진 오늘날에 우리의 신앙은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전통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의 진리추구는 전통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전통은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의 근거이며 뿌리이다. 다만 우리의 신앙의 내용을 담는 그릇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신앙전통은 오늘날의 시대적 지평과 문화적 지평과 끊임없이 만나 그 안에서 새롭게 우리의 신앙을 해석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가다머의 해석학에서 말하는 “지평의 융합”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전통의 지평과 오늘의 지평, 과거와 현대의 지평, 우리신앙이 발생한 문화의 표현양식과 현재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문화의 지평간의 끊임없는 만남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표현되어져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오늘의 시대에 맞게, 우리의 문화에 맞도록 표현해내는 일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토착화이다. 단순히 타종교를 자기 종교와 비교하는 차원이 아니라 신앙적 차원에서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린 한국문화 속에 뿌리내린 종교의 실상을 우리의 신앙 안에서 어떻게 소화해야 할 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시대적 요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보살)

지금까지 공과 하느님 비교에서는 신관의 차원에서의 비교였다. 이를 그리스도론적으로 비교한다면 예수와 보살을 비교할 수 있겠다. 붓다는 누구에게나 출가생활을 권장했지만 그는 항시 재가신자들을 접하며 살았고 기회있는데로 그들에게도 설법을 베풀어주고 그들도 궁극적인 깨달음이 얼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파불교(붓다 사후에 그의 사상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파가 나누어짐) 시대에 이르러선 재가자들의 종교행위는 주로 물질적 보시를 통해 내세를 위한 공덕을 쌓는 일이나  붓다의 유골을 모신 탑을 참배하며 공양하는일에 국한되고 출가승려들은 사원에서 자신들만의 종교적 추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출가승이 추구하는 이상을 모든 속세의 번뇌를 끊어버린 아라한이 되어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의 삶에 있어 재가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란 거의 없었다. 대승불교는 이런 상황에 대한 불교내부로부터의 반성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대승불교운동의 주도자들은 무수한 중생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해탈에 힘쓰는 아라한의 이상을 비판했다. 그들의 눈에는 아라한은 붓다가 보인 중생에 대한 자비와는 대조적인 삶을 사는 존재로 보였다. 따라서 대승운동의 주도자들은 아라한의 이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들고 나왔다.

보살이란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약어로서 깨달음(菩提 Bodhi)를 추구하는 존재(薩陀) 혹은 꺠달음을 이룬 존재라는 뜻이다. 보살은 본래 깨달음을 얻기 전의 붓다를 가리키는 말로서 소승경전에서는 붓다 스스로가 성불 전의 자신을 보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대승에서 붓다가 보살로서 행한 자비행을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내세우게 된 것이다.

보살은 자신들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만의 해탈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건져 함께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보살은 제도할 중생이 단 하나라도 남아 있는 한 열반에 들기를 포기하고 생사의 탁류 속에 남아 중생과 고통을 같이하고 그들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한다.

보살이 지닌 자비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不二智의 깨달음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즉 生死와 涅槃, 차안과 피안, 성과 속이 둘이 아님을 아는 지혜이다. 모든 분별과 집착을 떠난 무분별의 지혜이다.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는 한 보살은 생사를 피하고 열반에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보살은 생사가 생사가 아님을 알고 생사의 세계에 뛰어들며 번뇌가 번뇌가 아님을 알고 번뇌를 안고 산다. 이러한 무분별지는 바로 공의 진리를 말한다. 일체 상이 공임을 깨닫는 지혜 거기서부터 중생의 현실세계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아라한과 같이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불를 구별하여 집착하는 한 보살은 중생을 멀리하고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보살은 不二智에 근거하여 두려움없이 중생계에 투신할 수 있다.

이러한 보살의 모습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 죄인과 의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완벽한사랑을 깨달은 예수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보살이 지닌 자비 바로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예수의 사랑도 그가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를 예수이게끔 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자각과 
보살을 보살이게끔 해 주는 공의 자각은 
통하는 것이 아닌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음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마르 8,35)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체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는 관계를 떠나 자기 안에 머뭄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관계와 자기 이탈을 통해서만 자기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 말은 A라는 하나의 개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B,C,D 등의 타자를 필요로 하며 B C D도 A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 부정을 통한 긍정, 죽음을 통한 생명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모든 존재의 실상인 공과 통하는 것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바는 바로 본래의 인간을 되찾고자함에 있다. 그리고 본연의 자기는 인간네에 있는 존재근거인 실재를 자각함으로써 드러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즉 지혜는 궁극적으로 붓다의 자비와 만날 때 완성된다. 그리스도교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깊은 자각을 한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자각하며 살아갈 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나오는 말

타종교를 말할 때 나의 신앙을 저만치에 두고 타신앙을 접할 수는 없다. 그것을 종교학에선 판단중지라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타종교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판단중지를 통해선 불가능하다. 나의 신앙과 타신앙의 지평이 만나 그 안에서 새로운 지평이 형성된다. 변증법적 방법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되어간다.

하느님의 다양한 구원의 방법을 배움으로써 나의 신앙의 지평이 확장된다. 즉 불교의 공관을 배움으로써 나의 신관이 변화된다.

산이 산이 아니다는 것을 깨달은 후의 ‘산은 산이다’라고 했을 때 그 깨달음 이전의 고백과 다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부정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은 비로소 진정한 하느님이 될 수 있다. 공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내재성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하느님은 임마누엘이시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신 분으로 고백하게 된다. 임마누엘은 하느님의 실재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모든 존재를 떠받혀주는 실재, 모든 존재를 존재이게끔 하는 바로 그 실재가 하느님이다. 그 하느님은 존재 밖에 계신 분이 아니며 대상으로 실체로 계신 분이 아니고 존재 그 자체 나의 眞我이시다.

불교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박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은 바로 대상으로써의 하느님이다. 내가 그런 신관을 갖고 있다면 공관을 만날 때 여지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결국 공이라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우상숭배를 거부하도록 하는 사상이 아닌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공관을 통해 신관을 정화할 수 있었다면 불자들도 자신의 공관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은가? 불교인에게 하느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을까? 

하느님은 공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 아닌가? 하느님이 공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볼 수는 없는가? 공의 진리를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냐? 공을 통해서 덧없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도록 하신 것이 아니냐? 무상하고 덧없는 유한성, 우연성을 깊이자각하는 가운데에서 그 현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사물들 간에 상호 의존성과 개방성 속에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현존을 간접적으로 감지한 것이 아닌가. 그들이 공이나 열반으로 표현했지만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란 개념은 유대인에게서 나온 것일 뿐이다.

공을 통해서 불교인들은 세상에 대한 초월을 배운 것이 아닌가?

하느님 체험은 불교의 공사상이 말해주지 않는 여러가지 실재의 성격을 드러내주고 있다. 인격성의 문제, 인간의 자율성, 도덕적 책임성의 문제라든지 역사의 의미문제라든지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깊이 생각해 왔다. 그런데 공사상에서 어떻게 이런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태초의 존재의 신비에 대해서 불교에선 말하고 있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 불자들은 그리스도교에서 배울 것이 있지 않은가?

참고문헌

<<종교신학연구>> 제6집1993, 제7집 1994, 분도출판사.
스즈끼 저, 강영계 역, <<엑카르트와 선>> 1991 주류 일념.
한스 발덴펠스, 김승철 역, <<불교의 공과 하느님>> 1993, 대원정사.
히사마쯔 신이찌, 정병조 역, <<무신론과 유신론>> 1994, 대원정사.
아베 마사오, 변선환 역, <<선과 현대신학>> 1996, 대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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