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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30

希修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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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6 hrs · <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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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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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던 ‘초기-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유익한 논쟁이었다. 첫째는 불교계 내의 가장 민감한 교리적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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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 불교학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를 계기로 진지한 학자들과 일반 불자들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공석과 사석에서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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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무엇이 불교적이고 정법에 근거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보다 깊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온갖 비불교적 요소가 판을 치는 불교계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보다는 미래의 성과가 더욱 기대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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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논쟁은 전개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낸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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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처음에 보여주었던 논점의 진지함이 논쟁이 과열됨에 따라 주제 자체보다는 인신공격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로 인해 논쟁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아쉽게 종결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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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논쟁의 마당을 제공하고 이끌었던 (법보신문〉이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사설을 통해 마녀 재판식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사설은 논쟁이라는 형식을 빌어 〈법보신문〉이 의도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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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논쟁은 결코 아직 승패가 가려진 것이 아니다. 이제 겨우 논의의 주제가 설정된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주제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재검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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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어느 쪽의 주장이 미래의 한국불교 발전에 보다 도움이 되는 견해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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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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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의된 주요 주제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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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문제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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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논쟁은 동국대 불교학과 김용표 교수의 기고문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이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이번 논쟁의 주된 쟁점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김용표의 지적처럼, 역사적·철학적·해석학적 통찰이 필요한 난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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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 혹은 초기불교에서 찾으려는 흐름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불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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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불교의 정신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역사적인 붓다의 삶 속에서만 드러난다. …… 초기불교라든가 대승불교라든가 하는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적인 붓다의 삶이라는 사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단정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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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형태의 불교이든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석가모니불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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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사적으로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가 정법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기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법의 잣대란 원래의 불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순리이지, 거꾸로 현재의 잣대로 원래의 불교를 진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상사(思想史)의 흐름에도 역행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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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성철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속에는 분명 초기불교를 낮추어 보는 대승불교 전통의 편향된 시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다. 즉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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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각은 중국에서 고안된 종파적인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교판론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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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에도 역사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스다니 후미오가 지적했듯이, 역사의 개념을 전적으로 무시한 교상판석(敎相判釋)에 근거한 작업은 모두가 그릇된 전제 위에 선 것이다. 그런 전제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그러한 교상판석에 근거한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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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아직도 인도불교는 서론에, 중국불교는 본론에, 한국불교는 결론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로부터 2,5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종갓집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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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기들이 신봉하는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호교론적 입장은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계속된 충돌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준호가 제시한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서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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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바라보는 각도가 다를 뿐 동일한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주명철의 지적처럼, “오히려 대승불교는 세존의 깨달음과 자비의 가르침의 정신을 더욱 충실히 실천하였지 진리를 부정하거나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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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이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초기 불교주의자들도 초기불교만이 진리이고, 대승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불교가 초기불교의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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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필자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그 원래의 대승불교에서 많이 일탈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완전히 초기불교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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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장은, 지금 이 시점에서 부처님의 불교, 즉 붓다의 본래 정신을 가능한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적 전통과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현재의 상좌불교도 원래의 초기불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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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필자는 부처님의 불교를 하자는 것이지, 남방 상좌부 불교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불교도들도 교단이 어지러울 때에는 언제나 원래의 불교 모습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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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흥기의 배경도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부파불교가 사회적 실천이라는 붓다의 근본 정신을 외면했기 때문에 원래의 붓다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외침이 대승불교 운동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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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그러한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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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불교를 똑바로 잘하기 위함이다.”라고 필자가 주장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러한 취지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를 정법(正法)의 토대로 더욱 굳건히 올려놓기 위해 붓다로 돌아가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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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자가 부처님의 불교를 생각해 보자고 제의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잘못된 것인 양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과연 큰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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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정당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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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대승불교의 경전관(經典觀)에 관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일방적인 입장으로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대승경전 전체를 비불설이라고 완전히 배제한다거나 부정하는 것도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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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비불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승경전은 비록 붓다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적으로 매우 훌륭한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드러낸 부분도 있는 것이다. 김성철의 주장과 같이 대승불전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도 필자는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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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승경전과 관련하여 홍사성이 주장한 내용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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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함으로써 붓다의 친설과 자신의 설을 구별하지 않은 것은 지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찬술자들의 부정직한 태도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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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假託)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승불교의 성립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종교사학적으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 자체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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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진현종과 김성철은 크게 반박하고 있다. 진현종은 나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대승불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오히려 치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붓다와 그 제자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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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도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포함시켰다. 즉 불교교단에서 붓다는 첫번째 아라한(阿羅漢)이었다. 그는 어떠한 구별도 없이 다른 아라한들과 같이 한 명의 아라한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로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한 다섯 고행자(pan?avaggiya)의 개종 이후, 붓다를 그들 중의 하나로 계산하여 당시 세상에는 여섯 아라한이 있었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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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대에 오면 처음 깨달음을 이룬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의해 나중에 깨달음을 이룬 제자와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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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동등하다고 말했다. 단지 다른 점은 붓다는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인데 반해서, 아라한들은 붓다가 밟았던 길을 따라서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아라한들은 붓다누붓다(buddha ubuddha), 즉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覺者)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했던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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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제자가 스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스승과 동등하다고 자만한 흔적은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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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는 “그리고 존자시여, 제자들은 지금 길을 쫓아서 나중에 그 길을 구현하는 자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비록 사리뿟따는 당시에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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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후대의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석가모니불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전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행위와 태도가 진현종의 주장처럼 겸손해서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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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은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은 기원전 3세기경 제3결집 때,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에 의해 편찬된 《논사(論事, Kathayatthu)》로 알려져 있다. 이때 비로소 경·율·논 삼장이 성립되었다. 그후 부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이해한 견해들을 논서로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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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직 대승경전 찬술자들만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함에 있어서 논서의 저술가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라고 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당시의 부파교단에서 강력히 반발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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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부파교도들은 ‘대승은 악마의 설’이라고까지 반박하였다. 이에 대해 대승교도들은 ‘부처님은 한 목소리로 설법하셨는데 대중이 여러 가지로 이해했다(一音異解)’며 대승이 부처님의 말씀임을 논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설은 《유마경》에서 역설한 것인데, 원래는 대중부(大衆部)에서 부처님의 신통자재한 덕을 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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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부파교도들이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극심하게 비난했던 증거들이 오히려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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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의 설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므로 부파교도들의 반발과 주장에 동요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 그대로 대승경전 속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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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경전을 논서로 남겨두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불설·비불설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홍사성이 지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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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성철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대승경전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마스다니 후미오가 그의 저서 《불교개론》에서 현대에서도 새로운 경전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은 위경(僞經)을 계속 생산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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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후대의 불제자들이 더 많은 논소(論疏)와 주석서들을 저술하여 불교사상을 보다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지, 김성철은 대승경전을 2000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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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의 주장대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대승경전을 만들어 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불경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자칭 깨달았다고 말하고, 궤변을 늘어놓아도 불설이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불경을 만들어낸다면 나중에 불설과 비불설을 누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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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을 옹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지금도 논소(論疏)나 주석서가 아닌 대승경전을 계속 만들어내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불설을 빙자한 위경(僞經)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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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역사적 실증주의는 과연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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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불교학의 연구는 정말 잘못된 것인가? 진현종은, 실증주의와 합리주의는 그 본산지에서조차 이미 박살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실증주의는 사견과 망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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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친설은 초기불전에서도 신고층(新古層)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이미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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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적 실증주의를 배제하면 불교학은 물론 학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도 어느 쪽의 주장이 더욱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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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서구 불교학의 출발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초기의 서구 불교학자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부이거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보다 확대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인도학 불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문헌비평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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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현대의 불교학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신·고층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경전에 신·고층이 있다는 진현종의 주장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실증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논리적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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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이라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불교의 특질 가운데 하나가 합리성과 미신의 배제이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불교에는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또 수행의 방법도 단계적인 순서를 좇아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종교의 학설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것을 볼 수 없는 바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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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철은 “석존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대승불교는 석존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는 붓다를 비밀교의를 펼쳤던 신비주의자로, 그리고 대승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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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불교관은 자칫 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는 부류와 기복신앙을 조장하려는 부류에 편승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 진현종은 부처님 자신도 실증주의적 입장을 거부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두르고 있는 데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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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부처님은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를 부정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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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먼저,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불교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므로 현실주의적이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如實知見). 불교는 헛된 기대 속에 살도록 우리들을 거짓으로 달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가상의 공포와 죄책감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변 세계는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완전한 자유, 평화, 평안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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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는 언제나 실증할 수 없는 것, 즉 진위(眞僞)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사후(死後)에 관한 일이라든가 미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가들의 주장과는 달라서 현실적으로 증명되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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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즉 이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에 인도하는 것,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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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문은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되풀이되는 정형구로서,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 성격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붓다 가르침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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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존귀한 자에 의하여 잘 설해진 가르침(世尊善說法), 즉 ‘표현의 명료성(善說)이다.
- 두번째의 특징은, 경험적인 내용(現見)이라는 점이다.
- 세번째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것(非時間的)이다.
- 네번째 특징은, 검증 가능성(ehipassika, 來見)이다.
- 다섯번째 특징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생활 조건(즉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 종교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나 효과(paramat.t.ha, 勝義)가 된다는 점이다.
- 여섯번째 특징은, 스스로 경험되는 것(paccattam. veditabbo, 自證)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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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둘째, 셋째, 넷째의 세 가지 항목은 붓다의 가르침이 리얼리스트(realist)의 사상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마스다니 후미오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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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것은 모두가 인생의 현실 문제였으므로, 누구라도 편견 없는 눈으로 그 진상을 관찰한다면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붓다는 결코 환상을 말하지 않았다. 붓다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또한 붓다의 법은 비밀리에 비밀법을 전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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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arinibba?a-sutta)》에서 그는 상가(Sangha, 僧團)를 통제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상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비전(秘傳)의 교설은 없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Ayariya-mut.t.hi, 師拳)’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몰래 준비한 어느 것도 결코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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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말해서 원래의 불교에는 비밀리에 법을 전해준다는 따위의 신비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러나 후대의 불교에 오면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이에 대해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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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수되는 것 중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나 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교육의 본성이 불교에 관한 아주 최근의 설명에서처럼 지나치게 신비화됨으로써, 삭발하고 가사 장삼을 걸친 채 무언의 비전을 전수받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지 않고서는 법의 실천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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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에도 신(新)·고층(古層)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현종은 어느 것도 진짜 불설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무한급수의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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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붓다의 말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불교학의 목적이다. 학자들은 지금도 어느 것이 가장 붓다의 친설에 가까운 교설인가를 계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초기경전 내부에 신·고층이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남아 있는 초기 문헌만으로도 붓다의 근본 교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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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붓다가 설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연기설·사성제·팔정도·중도 등의 기본 교설은 대·소승에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교리들을 통해 붓다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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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실증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역사적 실증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탄생지, 열반지, 초전법륜지 등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인도나 동남아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곳이 역사적으로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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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대승경전들을 직접 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진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했다는 것도, 베살리에서 유마거사가 《유마경》을 설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이 아님은 자명하다. 이처럼 비역사적인 사실은 역사라고 믿고, 진짜 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실증주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몽롱한 주장은 현기증을 유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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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모든 학문과 종교현상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실증주의에 그 바탕을 두지 않으면 신뢰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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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불다보살 신앙에 문제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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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불교의 신앙관에 관한 문제이다.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 사상은 사상적으로 위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비불교적인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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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불신관(佛身觀)에 의하면 과거·현재·미래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다불다보살 사상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보다 법신불(法身佛)이나 보신불(報身佛)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일반 불자들은 대부분 대승불교의 보살을 거의 신적(神的)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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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범신론적(汎神論的) 유신교(有神敎)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불다보살 사상은 신앙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나 권위 혹은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다불다보살 신앙을 포용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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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은 절대주의의 경향이 농후하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神)’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자가 아니다. 최고의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 타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불교인 중에는 마치 절대자를 대하는 것같이 붓다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며, 또 붓다 그분의 뜻에서도 빗나간 생각임이 명백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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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서 그는 “대승경전이 붓다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많은 진리까지도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 없다. 또 과거의 고승 대덕들이 도달한 종교적 경지에 대해서도 나는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아량을 갖고 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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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국에서는 교차로나 주택의 입구에 사면불(四面佛)이나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상등을 수호신(守護神)으로 봉안하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그 신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모든 재앙을 소멸하게 해달라고 빈다. 이러한 행위는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릇된 신앙 행위임은 말할 나위 없다. 상좌부의 스님들도 이러한 비불교적 민간신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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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현종은 불자들의 신관(神觀)과 외도들의 신관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명철은 한술 더 떠서 “대승의 붓다관을 유신론이라는 잣대로 폄하하는 점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편견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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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누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과 편견인지 이 부분의 전공자들이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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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의 비불교적인 신앙에 대해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0년 저술)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칠성과 신중에 관한 부분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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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七星)은 더욱 황당무계해서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별을 상(像)으로 하여 받들 바에는 하늘에 있는 별이 매우 많은 터에 어찌 유독 칠성만을 위하는 것인가. 또 그것이 여래(如來)의 화현(化現)인 때문이라 한다면, 천지·일월과 삼라만상이 똑같이 부처님과 일체(一體)일 터인데, 하필 칠성만이 그렇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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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제자(佛弟子)로서는 여래의 참된 상(像)을 받드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멀리 부처님의 화현(化現)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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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神衆)은 부처님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에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항상 따르던 신의 무리니, 불법(佛法)을 보호함이 실로 그들의 책임인 터이다. ……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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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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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두 신관의 차이를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불교적인 잡다한 신앙들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잘못된 신앙 형태라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도 만해 한용운은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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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불교 속에 습합된 다불다보살 신앙은 다분히 유신교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맹목적으로 강조될 경우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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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도들이 다불다보살 신앙을 통해 불교의 본질로 돌아온다면 다행이겠지만, 불교 교리에 무지한 일반 대중들이 자칫 잘못하면 미신이나 유신론으로 빠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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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기복을 부추기는 것이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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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논쟁과 아울러 제기되는 문제는 기복신앙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기복신앙이 용인되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다행히 주명철은 “한국불교의 기복문제는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단, 교파, 기성체제 속에서 대승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후학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문제를 오로지 대승불교에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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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주장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필자도 한국불교가 대승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기복 위주의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코 대승불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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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을 혼동하고 있는데, 만약 같다고 하면 이렇게 논쟁할 필요도 없고 기복을 두 손 들고 맞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지면을 통해 자세히 언급하였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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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사실은, 기복의 대안이 작복이다. 조준호의 지적처럼 “작복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복이야말로 대사회적으로 불교의 위치를 당당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외침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불교 분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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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만해 한용운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복은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부처님도 원래 화복의 주관자가 아니시니, 빌어 본대도 복을 얻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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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기복신앙을 작복신앙으로 전환하자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비판·부정하면 마치 한국불교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과민한 애종심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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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리적·이론적으로는 기복신앙이 불교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그 잘못된 신앙을 어떻게 해서든 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복의 대안인 작복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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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준호는 기복신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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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예경(禮敬)의 대상이지, 화(禍)는 물론 복을 내리는 기도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나아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대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의 기능에 있어 ‘기복’이야말로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어느 종교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종교의 중심 경전에 근거한 본연의 입장과 대치되는 대중적 차원의 신앙이 병존(竝存)하는 이중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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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종교나 신행에 있어서 분명히 이중적 구조의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지성인들과 미디어 종사자들이 앞장서서 기복신앙을 옹호하거나 조장 혹은 부추겨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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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미신적·주술적·비밀교적인 그리고 무속적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을 왜 억지로 비호하고 권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갑자기 개선하기가 어렵다 할지라도 점차 개선해야 한다는 태도가 불교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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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언론은 기복신앙을 권장하거나 부추기기보다는 오히려 출가·재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잘못된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기복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 주장이 더 미래의 불교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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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잘못된 전통까지 고수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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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의 사설에서는 “불교의 특성 중의 하나가 전파 당시 그 나라의 고유한 신앙을 습합하며 정착한 데 있다는 것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원리주의적 주장을 펴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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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1910년에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지었다. 만해는 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국불교 속의 비불교적 신앙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불가(佛家: 조선불교를 말함)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 : 절에 모신 일체의 등상과 그림을 말함)는 가리어 혼란이 없어야 하겠고, 간략하여 번잡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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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해 이전에 이미 “소회(塑繪)는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이니 전부를 들어 소각함이 상책이다. 그리하여 절을 깨끗이 해서 암흑 시대의 미신을 일소하고 진리를 배양하여 불교의 새 나라를 고쳐 세워야 한다.”는 보다 과격한 주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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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릇 모든 종교는 어느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 기존의 신앙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이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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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불교가 동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래 민간신앙을 습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민간신앙을 배제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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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래는 단순히 종교사상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함께 전래된다. 외래문화가 들어오면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가지다가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토착문화와의 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고 그것이 정착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한국불교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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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형성된 한국불교 나름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현상 자체를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거침으로 인해 원래의 불교, 즉 불교의 순수성 혹은 정체성이 희석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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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듯한 논조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명제에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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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백이 넘치던 옛 선사들이 한국불교 속에 남아 있는 산신각, 용왕각, 독성각 등을 철거하기 위해 탱화를 불살랐던 일화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이러한 행위는 한국불교의 문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만해 한용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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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의 철거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극히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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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치도 않는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고 있으니, 소회(塑繪)를 받드는 폐단이 이에 이르러 극단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능히 만천하의 이런 소상(塑像)들을 불살라 날려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로 돌이켜 흠이 없게 할 것인가. …… 설령 불교를 미신이라고 한다 해도 부처님을 미신하는 것으로 족한 터이다. 어찌 아침에는 부처님을 미신하고, 저녁에는 나한(羅漢)을 미신하고, 또 칠성(七星)을 미신하고, 또 시왕(十王)을 미신하고, 또 신중(神衆)을 미신하고, 또 천왕·조왕·산신·국사(國師) 따위를 미신함으로써 일정한 신앙이 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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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지금의 필자와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계 내부에서도 열린 시각으로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다. 만해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전혀 통용될 가능성이 없는데, 1910년대에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그 장벽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러한 토착화된 문화 혹은 종교현상은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점을 필자는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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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 잘못된 부분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야만 한국불교가 바르게 되는가? 이를테면 가문의 명예를 빛낸 인물도 있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인물도 있을 수 있다. 비록 가문을 더럽혔다고 해서 그 가문의 출신이 아닌가? 그 옳고 그름은 후대에서 판단할 몫이다. 잘못된 부분을 두둔하거나 변명한다고 잘못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부분은 잘못된 부분대로, 잘된 부분은 잘된 부분대로 인정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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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역대 조사나 사상가, 그리고 한국의 고승 중에서도 본의 아니게 부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장이나 행동을 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그 잘잘못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나 부처님께서는 후회할 나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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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안거(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날의 자자(自恣, pava?an.a?에서 나의 허물을 보거나 발견한 사람은 지적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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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대중 앞에 발로 참회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의 전통이다. 허물은 덮어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그 잘못을 지적하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짓밟는 것인가? 그 잘못을 덮어두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세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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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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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창할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과 같은 한국불교의 분위기에서도 한국불교의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초기불교 정신에 따른 한국불교 실태 파악이 수용되기는커녕 오히려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더더욱 한국불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참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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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직까지도 한국불교가 지적으로 성숙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한국불교를 주도하고 있는 주된 세력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주장들을 외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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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록 표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불교를 올바르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가를 잘 알고 있다. 이번 지상 논쟁을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다. 잘못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올바른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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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한국불교 정체성 논쟁에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오히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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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현실적으로 제도권 불교에 영합하고 편승하여 상대방을 공박하려는 태도 또한 훗날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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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새로운 한국불교의 모습은 언젠가는 올 것이고, 그러한 분위기는 굉장한 수준으로 성숙되고 있어 희망적이다. 새살이 돋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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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한국불교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기불교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기복신앙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오늘의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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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한국 분교 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마산 가야사 주지.
http://www.rip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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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댓글들도 반드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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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L.OR.KR

팔리문헌연구소




希修

Sejin Pak 참고하실 만한 글 몇개 올려 드리겠습니다.


希修

부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 기억력이 비교적 좋다고 소문난 이들 약 5백여명이 부처님 사후 모여 서로가 기억하는 부처님과의 일화를 대조, 기억이 일치되는 부분을 운문형식으로 확정하여 노래처럼 부르며 전파합니다. (글로 남기면 권력자의 정치적 목적 등에 의해 훼손될 위험이 있어서요.) 이런 결집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3차 결집까지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토씨 하나까지도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면, 영역본으로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그 긴긴 텍스트를 수천 명이 동시에 순서대로도 외우고, 맨 뒷단어에서부터 거꾸로도 외우고, 한 단어씩 건너 뒤면서도 앞뒤로 외우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 보존합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른 후 문자로 기억되는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견된 다른 판본들의 내용이 거의 완벽히 일치하게 됩니다.
암튼, 경전의 성립과정이 이렇다 보니, 경전의 내용도 제자들이 결집하여 기억을 기술한 그대로입니다. "이러저러한 날 이러저러한 곳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누구누구가 와서 이런 질문을 했고, 나는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않은 이들, 시공간적으로 너무나 많이 떨어져 있던 이들이 무수한 입을 통해 전해들은 내용을 자기 나름대로 재창작하여 기록하면서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는 구절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죠. 읽는 이들은 당연히, 그 내용이 부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오해를 하게 되구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불교발전의 역사를 모르면 엄청 헷갈리고 엉뚱한 삽질을 하게 됩니다.)
위의 2.2. 단락은 대승경전의 이 integrity 문제를 지적하는 부분입니다. 대승경전 중에도 물론 '훌륭한' '작품'들이 많습니다만, 그 자체로 철학이라 볼 수는 있어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P%C4%81li_Canon
Sejin Pak


EN.WIKIPEDIA.ORG

Pāli Canon - WikipediaPāli Canon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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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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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불교를 공부하시다 보면 차차 느끼시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양 자체도 워낙 방대하고, 그 내용도 상당한 지적능력, 특히 메타인지가 있어야만 이해와 실천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며 공덕을 쌓으면 언젠가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받고 태어나게 된다고 애초에는 생각했었습니다. 초기불교는 말하자면,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시켰듯, 인간이 그렇게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업그레이드시키는 코딩방법에 대한 매뉴얼이라고 저는 비유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엘리트 아니면 그럼 일반 대중은 들러리냐?"면서 일반 대중을 위한 대승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말씀에 대한 온갖 희석, 윤색, 창작들이 생겨나고, 그래도 여전히 일반 대중에겐 어려우니 "대중은 보시만 하면 그 보시받은 사람이 깨달아 해탈할 때 보시했던 사람도 그 등에 업혀 free ride로 함께 해탈할 수 있다"라는, 일종의 '구세주를 통한 구원의 종교'로 변질되게 됩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변질시켜 놓고서 "우리는 대중도 함께 데려가는 자비로운 大乘이고, 초기불교는 째째하게 혼자만 해탈하겠다는 小乘"이라고 폄하하여 부르기 시작한 것이죠. 사실은, 나조차 너를 도와줄 수 없다, 너를 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네 자신의 수행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가르침을 남기는 것뿐이라고, 부처님 본인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특히, 대승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인도의 중산층 이상 상류층이었기에, 그들이 이미 젖어 있었던 proto 힌두교 사상이 자연스레 대승에 배어듭니다. 그리고 동북아로 와서는 도교, 유교, 토착신앙, 무속신앙 등이 모두 혼합되구요. 현재 한국의 99.9%의 사찰들에서는 제사상에 가격표를 붙여 가며 장사를 하고 있으니, 초기경전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실은 상좌불교를 '소승'이라며 폄하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와 의식/의례에 대한 집착을 나무라는 부처님의 모습이 초기경전에는 나오거든요.) 다행히 최근엔 한국에서도 초기불교를 지향하는 스님들이 한 두 분씩 늘어나고 있지만요..
Sejin Pak



希修

여러 주장들 중의 하나.. 불교는 애초에 '기복이나 대중 위로/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기보다 각 개개인을 위한 수양방법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LHGc3JgvOg&list=PLpnKGM1FbJm6dnBBinOfd07k__h6fN2fb&index=2&t=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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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인도에서 불교는 왜 사라졌을까? [BBS TV 자신감] 20회











불교언론-42. 탐진치 - 법보신문

불교언론-42. 탐진치 - 법보신문







HOME  2019 연재모음  강병균의 불교와 수학



42. 탐진치

 강병균 교수

승인 2019.11.12



육체의 고통은 탐진치 극복해도 피할 수 없다



수학의 핵심은 논리적인 분류

불교도 독보적 분류체계 특징



육체 고통인 생로병사는 필연

생명체는 업을 타고나는 존재



수학의 장점이자 핵심은 논리적인 분류이다. 불교는 분류의 학문이라 부를 정도로 독보적인 분류 체계를 자랑한다. 분류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의학의 진단과 치료에 해당한다. 부처님을 의왕(醫王)으로 칭송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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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탐진치(貪瞋痴)를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이를 극복하면 고통을 벗어난 걸로 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에는 육체적 고통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정신적 고통만 포함되어 있다. 육체적 고통은 탐진치를 극복해도 피할 수 없다. 육체적 고통인 생로병사는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부처님도 요통·두통·이질 등을 앓고 치료받으신 기록이 있다. 법륜성왕(法輪聖王)의 붕어(崩御)의 직접적인 원인은 상한 음식(돼지고기 또는 버섯)으로 인한 설사(혈변)였다.



탐(貪)은 행(行 의지)에 해당한다. 욕망 추구에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瞋)은 수(受 감정)에 해당한다. 감정에는 반드시 호·오·중(好惡中)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치(痴)에는 ‘상과 식’(想·識 생각과 기억)이 작용한다. 



지식과 생각이 부족하면 어리석어지기 때문이다. 무아를 이해하고 깨달으려면, 지식과 생각(사유)이 필요하다. 컴퓨터에 비유하면 성능과 데이터에 해당한다.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데이터가 없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데이터가 불량하면 결과도 불량하고, 데이터가 틀리면 결과도 틀리게 된다. 종이가 아무리 좋아도 생선을 싸면 생선 비린내를 풍길 수밖에 없다.



불교는 인간을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으로 보는데, 행(行)이 탐에, 수(受)가 진에, 상(想)과 식(識)이 치에 해당한다. 오온에서 비롯된 병의 원인을 탐진치로 진단한 것이고, 그걸 고치는 치료법으로 계정혜 삼학과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 중 정어·정업·정명은 계에, 정정진·정념·정정은 정에, 정견·정사유는 혜에 대응된다.



여기에는 색(色)에 대한 질병, 즉 육체적 질병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불경은 이를 다루지 않는다. (기도나 제사를 통해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타종교가 믿음의 대가로 질병의 치유를 약속하는 것에 비해 놀라운 자세이다. 타종교의 교주들과 달리 부처는 타인의 육체적 질병을 치료하지 않았다. 자신도 몸이 아프면 정직하게 치료를 받았다. 이에 비해 타종교 교주들은 병을 숨기고 치료 받은 사실도 숨겼다. 현대에도 사이비교주들은 추종자들에게 치병을 약속하면서도 자신은 병에 걸려 병원을 드나들지만 그 사실을 숨긴다. 그러다 큰 병원에 입원해 온갖 연명장치를 달고 연명하다가 의식을 잃고 한동안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다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다.) 불교는 색신(色身 육체)을 업(業)으로 본다. (진화론적인 업, 즉 진화과정에서 쌓인 업으로 볼 수도 있다.) 업이 해소되지 않는 한 영원히 다시 태어나는 걸로 본다. 정신적인 업이 해소되어 다시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색신으로 인한 병에 더이상 걸리지 않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는 걸로 본다. 이걸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진(瞋 분노 증오)은 자신이 일으키는 진뿐만이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일으키는 진도 있다. 그 진이 내게 돌아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탐과 치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교가 연기법이라면, 탐진치에는 내가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타인에게 일으키는 것도 포함되어야 한다.



연기법(interdependent origination)에 의하면 독립적인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시공과 환경에 따라 생멸변화한다. 따라서 나의 탐진치 역시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타인의 탐진치 형성에 기여를 하며, 타인의 탐진치 역시 나에게 영향을 미쳐 나의 탐진치 형성에 기여를 한다. 생명체가 시대와 장소와 환경이 주는 영향을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 국가에 태어나면 거의 백 프로 기독교인이 되고, 회교 국가에 태어나면 회교도가 되고, 페르시아에 태어나면 배화교도가 되고, 태국 스리랑카 등 불교국가에 태어나면 불교도가 된다는 점에서, 종교도 시공간과 환경의 업이다.) 이는 시공업(時空業) 또는 움벨트(umbelt) 업이라 부를 만하다. 사실은 이게 가장 큰 업일지 모른다. 실존주의 철학의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 被投性存在)’란 이런 업을 타고나는 존재를 이른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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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호 / 2019년 1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2020/06/21

네 가지 질문 : 내 삶을 바꾸는 경이로운 힘 - 내 삶을 바꾸는 경이로운 힘, 개정판 스티븐 미첼,바이런 케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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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네 가지 질문 : 내 삶을 바꾸는 경이로운 힘 - 내 삶을 바꾸는 경이로운 힘, 개정판  epub
스티븐 미첼,바이런 케이티 (지은이),김윤 (옮긴이)침묵의향기2020-02-04 원제 : Loving What is



네 가지 질문 : 내 삶을 바꾸는 경이로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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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세계적인 영적 지도자인 바이런 케이티가 모든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법을 들려준다. 그녀는 모든 스트레스와 고통의 원인은 생각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네 가지 질문과 뒤바꾸기로 이루어진 그녀의 '작업'은 모든 생각의 족쇄를 부수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방법이다. 생각에서 풀려나면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즉시 평화가 찾아온다.

'작업'은 가족이나 친구 간의 갈등이나 인간관계, 심리적인 문제뿐 아니라 우리가 겪는 세상의 모든 문제에 적용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혁명적인 도구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녀를 새 시대의 영적 지도자로 선정했으며, 에크하르트 톨레는 "바이런 케이티의 '작업'은 우리 지구별에 위대한 축복"이라고 극찬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소울 시리즈에 바이런 케이티를 초대하여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소개했다. 29개의 언어로 번역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이며, 2003년에 초판 발행했던 책을 새롭게 번역하여 다시 펴냈다.
목차
들어가는 말
이 책에 대하여

1. 몇 가지 기본 원칙
2. 완전한 자유의 길
3. 대화로 들어가며
4. 부부와 가족생활에 대해 작업하기
5. 더 깊이 탐구하기
6. 일과 돈에 대해 작업하기
7. 자기비판에 대해 작업하기
8. 아이들과 작업하기
9. 밑바탕 믿음들에 대해 작업하기
10. 생각이나 상황에 대해 작업하기
11. 몸과 중독에 대해 작업하기
12.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과 친해지기
13. 질문과 답변
14. 스스로 작업하기

부록 스스로 작업한 사례들

책속에서
P. 36 나는 지금 있는 현실을 사랑합니다. 내가 영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현실과 다투면 나 자신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실이 지금 있는 그대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과 다투면 긴장하고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마음이 편안하거나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실에 맞서기를 멈출 때 행동은 단순하게, 물 흐르듯이, 친절하게, 두려움 없이 일어납니다.  접기
P. 41-42 이제껏 내가 경험한 모든 스트레스는 진실하지 않은 생각에 집착한 까닭에 일어났습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생각 뒤에는 늘 자기에게 진실하지 않은 생각이 있습니다. “바람이 계속 불면 안 돼”나 “남편은 내 말에 동의해야 해”와 같은 생각들. 우리는 현실에 반하는 생각을 믿고, 그 뒤 스트레스를 느끼고, 다음에는 그 느낌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만들어 냅니다. 최초의 원인인 생각을 이해하는 대신에, 우리 바깥을 바라봄으로써 스트레스 받는 느낌을 바꾸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일시적인 위안과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바꾸려고 애쓰거나 섹스, 음식, 술, 마약, 돈 등에 기대려 합니다.  접기
P. 259 질문할 수 없는 생각이나 상황은 없습니다. 모든 생각, 모든 사람, 그리고 문제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당신의 자유를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자신에게서 분리되어 있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느껴지면, 질문해 보세요. 그러면 그 생각을 믿기 전에 느꼈던 평화를 다시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마음이 들거든 ‘작업’을 하세요. 모든 불편한 느낌이 있는 까닭은, 아픔이 있는 까닭은, 돈이 있는 까닭은, 담벼락과 구름과 개와 고양이와 나무가 있는 까닭은, 세상 모든 것이 있는 까닭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입니다―당신의 자기 깨달음.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생각이 거울에 비치듯 비친 모습들입니다. 자유를 원한다면 그것을 판단하고, 조사하고, 뒤바꿈으로써 자유로워지세요.  접기
P. 266 몸은 생각하거나 상관하지 않으며, 자기에게서 아무런 문제점도 보지 못합니다. 몸은 자기를 때리거나 모욕하지 않습니다. 몸은 그저 스스로 조화롭게 유지하고 치유하려 할 뿐입니다. 몸은 완전히 효율적이며, 지성적이고, 친절하고, 슬기롭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문제도 없습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조사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나의 아픔은 몸의 잘못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에 대한 이야기를 얘기하면서, 내 몸이 문제이며 이것이나 저것이 바뀌기만 하면 내가 행복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생각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접기
우리가 느끼는 모든 스트레스는 지금 있는 현실과 다투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p35

그 일은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생각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용납하거나 시인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마음의 갈등과 혼랍 없이 지켜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p36

나는 지금 있는 현실을 사랑합니다. 내가 영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현실을 거부하면 나 자신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p36

우울과 아픔, 두려움은 “지금 당신의 생각을 바라보세요. 당신은 지금 자기에게 진실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빠져 있어요”라고 말해 주는 선물입니다. 진실하지 않은 이야기에 따라 살면 언제나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p42

당신이 지금까지 기다린 스승과 치유자는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p66

어느 누구도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이해될 거예요.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p92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나는 일을 하는 데에 열리고, 기다리고, 신뢰하고, 사랑하며 그렇게 단순하게 살면, 우리의 삶에는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p245-6

당신의 바깥에는 당신이 찾고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p265  접기 - learningbydoing
저자 및 역자소개
스티븐 미첼 (Stephen Mitchell)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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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학, 파리대학 등에서 수학했으며 지은 책으로 <개구리 왕자>, 옮긴 책으로 <도덕경>, <바가바드 기타> 등이 있다.
최근작 : <당신의 아름다운 세계>,<네 가지 질문>,<부처가 부처를 묻다> … 총 183종 (모두보기)
바이런 케이티 (Byron Katie)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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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영적 스승 바이런 케이티는 ‘생각’에 대한 믿음이 모든 스트레스와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모든 생각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자유와 평화에 이르는 단순하면서도 경이로운 방법인 ‘작업’(The Work)을 창안했다. ‘작업’은 네 가지 질문과 뒤바꾸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단한 질문으로 생각의 족쇄에서 풀려나 평화로운 마음을 경험하게 한다.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그녀를 새 시대의 영적 지도자로 선정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사막지대의 소읍인 바스토우에서, 세 자녀를 둔 어머니이자 부동산 중개인으로... 더보기
최근작 : <당신의 아름다운 세계>,<기쁨의 천 가지 이름>,<그 생각이 없다면, 당신은 누구일까요? 2> … 총 74종 (모두보기)
김윤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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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으로 안내하는 글들을 우리말로 옮기고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번역한 책으로는 《네 가지 질문》 《기쁨의 천 가지 이름》 《가장 깊은 받아들임》 《아잔 차 스님의 오두막》 《마음은 도둑이다》 《지금 이 순간》 《영원으로 가는 길》 《오늘 하루가 선물입니다》 등이 있고, 공역한 책으로는 《사랑에 대한 네 가지 질문》 《요가 수업》 《아쉬탕가 요가의 힘》 등이 있다.
최근작 : <철학을 좋아하게 만드는 책> … 총 2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29개의 언어로 번역 출간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타임지가 새 시대의 영적 지도자로 선정한
사랑의 현자 ‘바이런 케이티’의 혁명적인 행복 레시피!

우리 모두가 정말 원하는 것은, 결국 행복이다. 사람들마다 바라는 소원들은 수없이 다양하고 다를 수 있지만, 그 소원들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도 결국은 행복이다. 그렇지 않은가? 의식하든 못하든, 당신은, 나는,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이것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분명한 해답을 제시한다.

바이런 케이티,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평화와 기쁨으로 깨어나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사막지대의 소도시 바스토우에서, 세 자녀를 둔 어머니이자 부동산 중개인으로 평범하게 살던 케이티는 이혼을 계기로 점점 우울증이 심해졌고 분노와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급기야 죽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 그녀는 결국 1986년에 스스로 요양원에 들어갔다.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아침, 요양원 다락방에서 홀로 자던 그녀는 홀연히 (사람들이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절대 기쁨의 상태로 깨어났다.

“나를 괴롭히던 모든 분노와 생각, 내 모든 세상, 온 세상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동시에 깊은 곳에서 웃음이 솟아나와 넘쳐흘렀습니다.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마치 다른 무엇이 깨어난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눈을 떴습니다. ‘그것’은 케이티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기쁨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것과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것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바로 그것 자신이었습니다.”

스트레스 해방의 바이블!
생각을 믿지 않으면 스트레스는 없다

그때 케이티가 발견한 진실은 단순한 것이었다.
모든 스트레스의 원인은 ‘생각’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

생각을 믿으면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고, 생각을 믿지 않으면 평화롭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 중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현실이 지금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더 친절해야 해”, “아이들은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해”, “이웃들은 밤에 떠들지 말아야 해”, “마트 계산원은 더 빨리 계산해야 해”, “남편(아내)은 내 말에 동의해야 해”, “나는 더 날씬해야 해, 더 예뻐야 해, 더 성공해야 해”와 같은 생각들은 현실이 지금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들이며, 이런 생각을 믿을 때 우리는 예외 없이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는다.

케이티의 경우, 그녀는 양말을 거실 바닥에 벗어 놓는 자녀들 때문에 줄곧 스트레스를 받았다. 세탁바구니에 양말을 넣으라고 수없이 잔소리를 하고 나무랐지만 바뀐 것은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케이티는 번번이 화가 나고 우울했는데, 깨어난 뒤로는 바닥에 놓인 양말 자체가 아니라, “아이들은 양말을 세탁바구니에 넣어야 해”라는 생각을 믿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즐겁게 양말을 주울 수 있었고, 나중에는 말하지 않아도 자녀들이 양말을 줍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사소한 예일 수 있지만 이 원리는 모든 경우에 똑같이 적용된다. 부부나 연인 간 갈등도, 부모자녀 간 불화도, 인간관계의 문제도, 화나 불안, 우울증, 강박관념 같은 심리적인 문제들도, 질병과 관련된 고통에 대해서도, 심지어 개인의 범죄뿐 아니라 인종학살 같은 끔찍한 집단 범죄들, 나라 간의 전쟁도 그 원인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어떤 생각에 대한 믿음이 있다. 어떤 생각을 믿기 때문에 어떤 반응과 행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인과관계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반응을 조금만 살펴보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책에서 갖가지 문제들로 고통 받던 사람들이 케이티와 대화를 하면서 하나같이 상상하지 못했던 해방감을 느끼고 평화를 되찾는 이유는 그런 원리 때문이다. 생각에 대한 믿음이 문제의 원인이므로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면 모든 문제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의 족쇄에서 해방되는 혁명적인 방법!
네 가지 질문과 뒤바꾸기

에크하르트 톨레가 인간의 상태를 “생각의 감옥에 갇힌”이라고 표현했듯이, 우리는 생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혀 있다. 생각에 대한 믿음과 집착은 고질적인 습관이 되어 버렸기에 벗어나기가 너무 어려워진 것이다. 그래서 생각에서 해방되고 싶어도 그러질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생각에서 해방되어 마음 편히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참된 현실로 깨어나면서 케이티는 모든 생각의 족쇄에서 해방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네 가지 질문과 뒤바꾸기로 이루어진 ‘작업’(The Work)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남편의 태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그 원인이 “남편은 나를 무시해”라는 생각임을 발견했다고 하자. 이 생각에 대해 아래의 네 가지 질문을 차례차례 묻고 대답을 해본다. 그 다음에는 뒤바꾸기를 한다.

그게 진실인가요?
그게 진실인지 당신은 확실히 알 수 있나요?
그 생각을 믿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그 생각이 없다면 당신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뒤바꾸기를 한다.

이렇게 네 가지 질문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은 원인은 사실은 남편 자체가 아니라, 남편에 대한 생각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뒤바꾸기를 하면, “남편은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 나는 남편을 무시한다, 나는 나를 무시한다”라는 정반대의 문장들이 나오며, 이 문장들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를 살펴보게 된다. 열린 마음으로 ‘작업’을 하면, 그동안 밉게만 보이던 남편이 갑자기 사랑스러워지는, 생각지도 못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생각에 대한 집착에서 풀려나면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며, 모든 문제는 결국 생각의 문제이므로 케이티의 ‘작업’은 우리의, 세상의 모든 문제에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작업’이 어느 상황에서나 효과를 발휘하는 만병통치약인 까닭은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업’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지금 있는 현실의 아름다움을 보게 해준다. 그리고 생각에서 완전히 해방되면 완전한 평화와 행복과 사랑을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바이런 케이티의 ‘작업’은 우리 지구별에 위대한 축복입니다.”
_에크하르트 톨레

이 책은 삶에서 마주치는 온갖 문제들을 네 가지 질문을 이용하여 쉽고 명쾌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자세히 안내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주식에 투자했다가 망한 사람, 배우자가 바람을 피워 괴로운 사람, 심장병을 앓는 남자, 부하직원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사람, 심하게 울어대는 아기 때문에 상심한 엄마, 가족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는 사람, 죽음이 두려운 사람, 성폭행 당한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성 등―이 바이런 케이티와 대화하면서 네 가지 질문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평화와 행복을 찾는 17편의 사례가 함께 실려 있다.

바이런 케이티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 중 한 명이며,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녀를 새 시대의 영적 지도자로 소개했다. LA 타임스 매거진,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퍼시픽 선, 바디 앤 소울 등 다수의 언론매체에서 그녀에 대한 기사를 게재했으며, 오프라 윈프리도 소울 시리즈에 초청하여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소개하였다.

2003년에 초판 발행한 것을 새롭게 번역하여 펴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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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는 마음공부 수업에서 에크하르트톨레 님의 책과 더불어 가장 많이 인용하는 책입니다. 저의 마음공부 관련 추천 책 30 종류 중에 가장 위에 자리하기도 합니다. 더 널리 알려지길 바랍니다. 그야말로 지구별로 배달된 소중한 선물입니다. ^^  구매
타박타박 2019-10-28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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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싫어하는 상황이 바로 우리가 그동안 찾아온 것, 곧 우리 자신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p.74  구매
ooohcoach 2019-10-16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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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책은 자신이 꺠달은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식이지만 이 책은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서로 대화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보고 있는지 질문을 통해 알게해주는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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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yoang 2016-02-1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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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습니다. 저자가 하라는대로 하다보니, 화가 나기도 하고,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연유인즉,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니,나에 대한 사실이 내가 인정하기 싫어서였습니다. 아니러니하게도, 인정하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읽어보세요  구매
kangim 2019-07-2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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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게 진실인가요?

2. 당신은 그게 진실인지 확실히 알 수 있나요?

3. 그 생각을 생각할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4. 그 생각이 없다면, 당신은 누구일까요?

뒤바꿔보세요.



이 네 가지 질문으로 삶이 평안해진다?

믿기 어려웠지만 함께 심리상담 일을 하는 형의

강력한 추천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가장 간단하고 핵심적인 인지치료의 정수' 라더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당시 대학에서 상담을 하고 있던 내게

이 책은 내 상담의 비장의 무기 중 하나가 되었다.

단순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간단한듯 심오한 질문을 하고 내담자의 대답을 따라가는 가운데

많은 친구들이 '아!' 하는 경험을 했다.



솔직히 안 쉽다.

간단할수록 깊이와 정도를 조율하기가 까다롭다.

그러나 기억하고, 사용하라.

정직하게 네 가지 질문 앞에 서라.

성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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슝슝 2015-01-2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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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의 영역과 의미의 영역 새창으로 보기 구매
우리는 우리가 언어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언어가 우리를 지배한다. 언어가 등장하여 지각을 물들일 때, 우리의 지각은 사실의 영역에서 의미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나’는 언어가 만들어낸 의미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사실의 영역에 머무를 땐 ‘나’도 하나의 사실이 된다. 생각도, 모든 것도, 심지어 탐진치조차 해석되지 않고 사실의 영역으로 보아질 때는 번뇌가 아닌 것이다.



생각에 함몰된 지각이 생각 속에서 빠져나와 그 바탕에서 생각을, 언어적 사유를 응시하게 될 때. 우리는 그러한 사유와 생각이 우리가 눈을 깜빡이거나 코로 숨을 쉬는 것과 같은 생리적 부수작용에 불과함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생각과의 동일시로부터 벗어난 삶은 놀랍도록 가뿐해진다. (요점은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석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이 '나'라고 얘기하는 것을 진짜 '나'라고 믿습니다. 어느 날, 숨 쉬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숨쉬어지고 있었습니다. 또 놀랍게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는 내가 생각되어지고 있었고, 생각은 개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오늘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이미 늦습니다. 이미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저절로 나타납니다. 구름이 텅 빈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가듯, 생각은 허공에서 나와 허공으로 돌아갑니다. 생각들은 와서 머무르지 않고 지나갑니다. 진실이라 믿고 집착하지만 않으면, 생각은 조금도 해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지만, 그럴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생각을 놓아주지 않습니다. 생각을 이해로 만납니다. 그러면 생각이 나를 놓아줍니다.



생각은 산들바람이나 나뭇잎,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습니다. 생각은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질문을 통해서 생각들과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빗방울과 다툴 수 있나요? 빗방울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괴로운 생각을 이해로 만나면, 다음에 그 생각이 나타날 때는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에는 악몽이었던 생각이 이제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다음에 그 생각이 또 나타날 때는 웃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아예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있는 현실을 사랑하는 힘입니다.



------p.38~39, 바이런 케이티 저, <네 가지 질문>



바이런 케이티는 미국의 떠오르는 영성가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삶의 부조리한 고통이 '생각'을 직면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대상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 잘 정제된 네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는 아주 정교한 외과의처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에 대한 믿음'을 예리한 질문 몇가지로 해체시킨다.



이를테면 이런 것. 현재 자기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명제를 이야기하도록 한다. 이를테면 '그(그녀)는 나를 괴롭게한다'라는 식의. 바이런 케이티는 이 명제에 스스로 네 가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첫번째 질문, 그것이 진실인가? 두번째 질문, 그것이 진실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가? 세번째 질문, 그 생각을 믿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네번째 질문, 그 생각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자신이 문제라고 믿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 아닌, 현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생각)임을 확인케하고, 그 해석(생각)의 대상성을 부각하여 생각이 내가 아님을 깨닫게하는 과정이다. 저자는 특별한 지도자 없이도 스스로 종이에 네 가지 질문을 적어가며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을 해체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아주 예리하고 심플한 기법을 통해 '생각'을 조사케하고, 그 조사의 결과로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한다. 저자 자신도 언급하듯이, 이 기법은 마치 달마와 혜가가 나눈 안심법문을 연상케한다.



그녀는 현상을 다루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해석을 다룬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현상이 아닌, 현상에 대한 해석임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의 가르침은 현실적인 상황들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단지 그 현실적 상황들을 받아들이는 관점의 전환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이것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한다)



마음은 생각을 통해서만 자기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각 말고 또 무엇이 있나요? 마음이 달리 어떻게 자기를 발견할까요? 마음은 자기를 위해 실마리들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스스로 자기의 빵 부스러기들을 떨어뜨렸음을 깨닫게 됩니다(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에서 인용함-옮긴이). 마음은 그것 자체로부터 나오지만,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탐구는 빵 부스러기들이 그것 자체로 돌아가게 하는 빵 부스러기입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으로 돌아갑니다. 없음은 없음으로 돌아갑니다.



------p.364, 바이런 케이티 저, <네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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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2020-03-1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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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자유 새창으로 보기 구매
바이런 케이티는 '질문'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리얼리티로 인도합니다. 그동안 애가 얼마나 생각속에서만 살고 있었고 나를 힘들게 하는 갈등의 모든 것이 바로 그 생각이었음을 이해를 통해 만나도록 권합니다. 질문을 통해 자신을 만나는 시간은 때로는 고통스럽고 그만두고 피하고픈 나와 다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이 순간 정면으로 그 질문을 쳐다보고 대답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예상치도 못했던 자유와 만나게 됩니다. 본래 있었지만 생각의 그림자로 감추어져 있던 나의 진정한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머리로 이해하며 마음을 이해하는 것과 달리 질문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은 분명히 나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입니다. 함께 그 질문의 모험에 참여해보시길 적극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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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oo815 2015-01-2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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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깨우는 질문과 방법찾기 새창으로 보기 구매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줄줄이 적어놓는 방식으로 책을 썼다면 이 책은 질문을 토대로 자신이 직접 성찰하게 만드는 방식이 특이하다.
mongyoang 2016-01-1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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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케이티의 '네 가지 질문'을 읽고 새창으로 보기
세계적인 영적 지도자인 바이런 케이티는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관점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방법인 ‘작업(The Work)’을 창안했습니다. ’작업‘은 네 가지 질문과 뒤바꾸기로 이루어진 자기탐구의 방법입니다.



바이런 케이티는 이혼을 계기로 심한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며, 결국 요양원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아침, 요양원 다락방에서 고통이 없는 기쁨의 상태로 잠에서 깨어났으며, 그 깨달음의 자유가 그 뒤로 지속되었고,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치유되며 항구적인 평화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려졌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바꿨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질문과 뒤바꾸기는 아래와 같이 아주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1. 그게 진실인가요?

2. 당신은 그게 진실인지 확실히 알 수 있나요?

3. 그 생각을 생각할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4. 그 생각이 없다면, 당신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뒤바꿔보세요.



정말 간단합니다. 우리는 매번 진실이 아닌 생각을 가지고 여러 가지 많은 감정과 생각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대해,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네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순서에 따라 진술을 하고 나면, 모든 것은 내 생각에 대한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탐구라는 과정을 통해 이것을 바꿔가고, 올바른 믿음으로 향하게 됩니다. 내가 힘든 것은 항상 타인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를 힘들게 하는 건 그들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고, 그 생각에 대한 믿음이 부정적이었음을 깨닫게 되듯이 말입니다.



네 가지 질문은 우리가 믿고 있는 생각을 의심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불행하다. 왜냐하면 나는 현재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는 진술을 종이에 썼다고 가정해 보면, 과연 그 생각이 진실인가? 그리고 나는 그 생각이 진실인지 확실히 알 수 있는가? 그 생각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리고 그 생각이 없다면 나는 누구일까? 네 가지 질문에 맞춰 답을 해나가다 보면, 그 동안 근거 없는 생각을 믿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내 고통의 원인은 내 생각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저자는 생각을 통제하거나 내려놓을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생각을 조사하고 이해하면, 생각이 나를 놓아준다고 말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됩니다. 우리가 마음의 갈등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나 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 들어차 있을 때입니다. 사람들은 늘 남의 일이나, 신의 일에 대한 생각으로 힘들어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거짓된 생각을 진실이라고 믿음으로서 삶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삶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내 생각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네 가지 질문은 뭔가를 바꾸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지금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네 가지 질문을 통해,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생각들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을 통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던 많은 문제들이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인식하는 순간 삶은 휠씬 편안해지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저 막연하게 보이는 이 질문들을 통한 ‘작업’이 모든 생각의 족쇄를 부수는 강력한 치유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기 위해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행복하게 사는 일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추구하는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진실이 아닌 생각을 가지고 여러 가지 많은 감정과 생각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네 가지 질문을 통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나간다면 생각의 구조가 바뀌고,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뭔가 내 머리 속에서 불편한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 생각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생각들이 사실은 거짓이고, 왜곡된 생각임을 인지하게 된다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항상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이나 상황에 처해 있다면 바이런 케이티님의 <네 가지 질문>을 통하여 새로운 생각의 틀로 바꿔보시기를 권합니다.



만일 내게 기도가 있다면 이러할 것입니다. “신이시여, 부디 저를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구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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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 2015-01-3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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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첫 책 구매와 2017년에 읽은 책 목록 새창으로 보기
            새 해의 첫 책을 3권 주문하고 시간이 더 가기 전에 2017년 읽은 책을 정리해야겠다.눈이 피곤해서  책보다는 드라마의 재미에 눈을 뜬 해이기도 했는데그래도 그럭저럭 70여권은 읽은 것 같다.                    &nbs... + 더보기
혜덕화 2018-01-02 공감 (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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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4

13 알라딘: 생태사회와 녹색불교 -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순환사회를 위한 불교의 미래구상 유정길

알라딘: 생태사회와 녹색불교




생태사회와 녹색불교 -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순환사회를 위한 불교의 미래구상
유정길 (지은이)아름다운인연2013-09-30



















































296쪽
148*210mm (A5)
420g
ISBN : 9791155800058


책소개
생명평화, 생태의 관점에서 이제까지의 사회적 의제를 낱낱이 새롭게 해석한다. 불교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 또한 같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녀평등은 곧 남성화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뛰어넘어 여성성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동물에 대한 권리,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 토건과 국토개발에 대한 원칙 등을 점검하고, 생태적 시각에서 통일과 남북문제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그는 불교의 근본으로 향한 노력과 현실로 가려는 노력 사이의 중도적인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때 불교 내의 대립구도를 놓고 “민주대 반민주”라는 주장이 횡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사회의 논리이며 본질에서 “불교적이냐 비불교적이냐”를 명확히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정법을 올바로 구현하는 것이 곧 진정한 불교개혁이라고 그는 말한다.



목차


제1장 녹색의 세계관과 생태철학
생태적 시각에서 진보란 없다
위기를 초래한 직선적 세계관
순환적 사회로의 회복
인드라망의 세계와 생태적 깨달음

제2장 생명의 가치와 녹색사회
녹색정치를 위한 10대 가치
거버넌스(協治), 더 나은 녹색정치
죽임의 교육과 살림의 교육
자연과 인간을 위한 대안교육
마음의 생태학과 현대인의 심리
그림자 노동과 순환적 노동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성을 회복하라
비폭력은 생태사회의 필수적 요소
동물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잡초도 없고 해충도 없다
과학기술만으로 위기는 해결 될 수 없다
인간과 환경을 위한 ‘적정기술’

제3장 생태적 발전과 대안사회
과(過)개발시대 탈(脫)토건 사회로의 전환
후쿠시마의 재앙과 탈핵 발전
전통의 세시풍속에서 찾는 생태적 지혜
자연과의 조화를 위한 생태건축
생태적 대안사회의 모색, 공동체운동
마을만들기, 풀뿌리 지역공동체운동
생태적 국제개발협력과 ODA(공적개발원조)
리우+20, 우리가 원하는 미래
문명전환과 생태적 관점에서 꿈꾸는 통일과 평화

제4장 녹색적 생활양식과 불교
생태적 삶에서 본 행복방정식
불교국가 부탄의 국민총행복(GNH)
생태적 세계관에서 본 종교의 현실
채식이 인류를 구한다
생태적으로 여행 다니기

제5장 불교와 사찰의 생태적 가르침과 전통
생태사회를 위한 불교의 가르침
사찰 에너지 소비의 전환을 위하여
숲과 생명을 살려온 불교 문화
사찰의 생태 전통과 지혜
대안으로서 불교공동체의 실험
사르보다야 운동과 사방승가 운동
생명살림을 위한 불자청규


접기


책속에서



진보주의자로서, 옛 친구들과 길을 달리하는 사상적 변절이라고 주저하는 불교 운동가들이라면 바로 ‘전환’의 가치가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이다. 녹색, 생태, 생명, 평화, 전환의 패러다임의 강 건너편에 서면 달리 보이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 어서 건너오시라. 그리하여 더 많은 진보의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 함께 노력해 주시길 바란다. 이제 우리가 하화중생 해야 할 대상이 사람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 <머리말> 접기
오늘날 지속가능한 발전의 생태적 메시지는 인간이 지구상의 생태계의 한 일부분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모든 중심인양 지배하고 정복해왔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분석한다.
동물과 식물, 수많은 무생물적 자연에 대한 권리와 그들의 존재를 고려한 사회적 가치와 결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위기를 초래한 또 다른 이유라고 말한다. 생태적 관점에서 미래세대를 고려하지 않고 현세대들만으로 사회적 결정을 하며, 다른 생명과 자연의 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인간 중심적 의사 결정구조가 바로 오늘의 민주주의의 한계이다.
이렇게 시간적으로 현세대주의에, 생태적으로 인간중심주의에 갇혀있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더욱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미래세대와 타 생명까지 고려한 생태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 <생태적 시각에서 진보란 없다> 접기
하나하나 낱 생명, 개체 생명만이 생명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고 의존하여 서로 존재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통틀어 하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리학자인 장회익 교수는 이것을 ‘온 생명’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생명으로 정의한다면 ‘불살생’을 계율로 하는 우리에게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동물을 죽이거나 곤충을 죽이지 말라는 말로만 해석할 것인가? 그것으로만 인식하기에는 불교의 가르침은 더 깊다. ‘온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돌, 바람, 물 등의 무생물도 낱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시스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낱낱이, 촘촘히, 중중첩첩히 연기되어 변화 상호 의존하는 이 시스템이 온 생명이기 때문에, 이것을 깨거나 파괴하는 행위가 바로 살생이다. - <인드라망의 세계와 생태적 깨달음> 접기


추천글

이 책은 바로 그의 세계관 일부를 드러낸 글입니다. 생태적 세계관과 녹색적 세계관으로 과연 사회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불교운동이 어떻게 확장되어야 하는지, 나아가 인류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등에 관해 많은 깨달음을 주는 글입니다. 읽다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의식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 법륜 (정토회 지도법사)

자신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고, 인간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여 결국 모두를 파괴로 이끄는 해법이 아니라, 모두가 모두를 살리는 새로운 해법을 이 책은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태적 해법이며 녹색적 관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인식을 토대로 한 불교적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며 통칭 그것을 녹색불교라고 말합니다. 안목이 새롭습니다.

- 도법 (조계종 화쟁위원장)




저자 및 역자소개
유정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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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환경연대 산하 녹색불교연구소 소장. 국민농업포럼 공동대표, 조계종 백년대계위원, 전국귀농운동본부 정책연구소. 지혜공유협동조합 정토회 에코붓다,?한살림 모심과 살림연구소와 마음살림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생태·녹색·전환·개벽 등을 화두로 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작 :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개벽의 징후 2020>,<생태사회와 녹색불교> … 총 5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위기의 시대, 불교의 새 방향 ‘녹색불교’로 가자
근대와 탈근대를 동시에 포월(包越)하다

녹색불교는 민중불교, 실천불교의 미래이다
칠팔십 년대 한국사회는 독재 권력의 압제에 항거하고 수많은 젊은이가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정의를 세우며 분투했던 시대였다. 많은 불자 역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밑으로는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라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가르침에 따라 시대 속에 나투어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민중들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왔다. 젊은 불자들이 뛰는 가슴으로 거리에서, 지역사찰에서, 야학 현장이나 노동현장에서 온몸으로 보살의 삶을 살게 하는 바탕에는 당시 민중불교라는 이름의 실천불교론이 있었다. 그들은 사회의 진보뿐 아니라 더 나은 불교의 미래를 위해 그 이론으로 실천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제 과거의 이론으로는 현대의 과제를 해결하는데 충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몇몇 관점은 오히려 현대의 위기를 해결하는데 퇴행적이라고 주장한다. 민중불교, 실천불교 등 이른바 과거의 ‘진보주의’는 약자에 대한 배려, 평등과 민주주의를 강조하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해왔지만, 생산력주의라는 패러다임에 갇혀 있고, 인간 중심적이며, 현세대주의, 국가주의라는 틀에 한정되어 있어 자신도 모르게 위기의 원인제공자 중에 하나가 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생명, 생태, 녹색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오늘날의 과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과거식의 ‘진보주의’에 계속 안주한다면 그것은 곧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배 위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일 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히 환경문제라든가, 자연보존의 문제가 아닌 세계관의 문제이며 미망에 빠진 과거의 시각을 교정하고 올바른 미래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전망 속에 사회의 정의와 불교의 개혁을 바라보는 시각, 더 나아가 불교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구성해야 할 진보란 없다
더는 유보할 수 없는 전 지구적인 위기와 핵위협 앞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의 경쟁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폈다. 그것으로 인해 1990년대 초 결국 동구와 소련 사회주의는 무너졌다. 이후 92년 브라질에서 7만여 명이 모여 역사상 최대의 국제회의로 기록되는 유엔환경회의(UNCED)가 개최되었다. 회의는 인류가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발전, 개발, 진보를 외친다면 자신들이 주장해온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위기와 절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이제까지 당연시되어온 발전방식은 지속‘불가능’한 발전이며, 이제 그 방향을 바꿔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엔환경결의’를 했고 ‘리우선언’을 통해 지구와 인류의 새로운 방향을 제안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전환’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명, 생태, 평화, 녹색은 단지 자연환경 복원이 목적이 아니고 새로운 세계관이며 미래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붕괴는 수많은 사회운동에 비전과 전망의 혼돈을 초래하면서 과거의 과제와 새로운 과제 사이에서 혼란을 유발했다. 근대적 과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탈근대적 과제까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근대적 과제와 이와 반대로 탈성장과 생태민주주의라는 탈근대적 과제는 명백히 서로 부딪치는 관계에 있다. 이 책은 명확하게 탈근대적 과제의 입장에서 근대의 문제를 재조명하며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더 많은 풍요, 생산력의 발전, GNP · GDP라는 생산(Product)중심, 생산력주의의 진보는 그 시효가 끝났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과거의 진보는 직선적 세계관에 입각한 수직성장 선형발전론으로 미래세대가 이용할 자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현세대만의 편익을 위한 자원수탈을 강행하고, 다른 생명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아, 불교적 시각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은 다수의 반대를 외면한 채 4대강을 개발하고 원전을 당연시하는 토건족과 같은 논리의 세계관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녹색운동이나 생명운동은 기존의 약자에 대한 배려, 평등과 민주주의에 관한 한 이제까지의 진보적 사회운동의 연장선에 있고 그것의 계승자이길 바란다. 그러나 기존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물질적 풍요가 곧 우리의 미래라는 시각에서 ‘생산력의 고도화’를 진보라고 하는 생각은 명확하게 생태주의와 녹색, 생명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이제 진보는 진화해야 하며 '진보'라는 것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녹색적 관점으로 불교와 사회적 의제를 재해석하다
이 책은 생명평화, 생태의 관점에서 이제까지의 사회적 의제를 낱낱이 새롭게 해석한다. 불교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 또한 같다. 정치는 생태적 세계관과 분권화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고, 교육은 이제 경쟁교육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인간이 함께 협력해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어야 하며, 복지도 생산력주의 복지가 아니라 공동체 복지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녀평등은 곧 남성화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뛰어넘어 여성성의 사회화를 주장한다. 동물에 대한 권리,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 토건과 국토개발에 대한 원칙 등을 점검하고, 생태적 시각에서 통일과 남북문제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위기의 문제는 자원무한주의와 자기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의 미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교적 삶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라고 말한다.
그는 불교의 근본으로 향한 노력과 현실로 가려는 노력 사이의 중도적인 통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때 불교 내의 대립구도를 놓고 “민주대 반민주”라는 주장이 횡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사회의 논리이며 본질에서 “불교적이냐 비불교적이냐”를 명확히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따라서 정법을 올바로 구현하는 것이 곧 진정한 불교개혁이라고 그는 말한다. 시스템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개혁은 중요하지만 역시 근대적이다. 그러한 근대적 전망을 포괄하는 탈근대적 전망을 동시에 끌어안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포월(包越)이다. 그래서 정신과 내용 없는 시스템만을 문제 삼기보다 이제는 불교의 깨달음, 정신, 신앙과 눈 맑은 신심, 종교성 등을 깊이 살펴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재차 강조한다.
그는 일찍이 90년 초부터 녹색과 생명평화를 주장하며 활동해왔지만, 그의 실천적 경험을 책으로 엮는 데 20년이 걸렸다. 늦었지만 중요한 책이다. 불교의 사회화를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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