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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4

동양포럼 / 노년철학 제3회 국제회의 '21세기 초고령사회의 노년의 의미와 가치'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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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 / 노년철학 제3회 국제회의 '21세기 초고령사회의 노년의 의미와 가치'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8.10.28 

송시열이 보인 늙음의 의미와 가치: 김용환(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용환(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충북 옥천 출신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성씨에 ‘자’를 붙여 ‘송자’로 불린 ‘대로(大老)’의 성리학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회자되었던 성리학자이며 봉림대군의 스승이다.

노년기 우암이 시골 초려에서 보낸 삶은 넉넉한 삶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암은 자급자족 생활을 이어가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노욕을 줄이면서 ‘올곧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었기에 우암을 통해 늙음의 의미와 가치를 새밝힘할 수 있다. 공공재산으로 환원함으로써 우암은 주변에 풍요로움을 선사하였다.

먼저 우암은 노년에 접어들면서 ‘주경(主敬)’의 수양공부를 이어갔다. 우암에게 늙음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 수용의 의미로 나타났다. 흔히 늙어가면서 스스로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거나 되돌아가서 현재의 늙은 모습을 부정하는 경향이 많아진다. 그러나 우암은 자신의 늙어가는 모습과 정반대의 현실로 투영되어 있는 손자의 모습에서 마음의 평상심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늙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우암에게 ‘주경’공부는 우주생명 이치를 탐구하며 인간본성을 회복하고, 생명이치에 따름으로써 생명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공부를 말한다.

또한 우암은 노년기에 이르러 ‘옳음(義)’의 사색을 지속하였다. 점차 쇠약해진 자신의 건강으로부터 스스로의 학문적 고립과 나태함을 절감하면서 옳음의 의미를 성찰하고 반문하였다. 그에게 옮음의 반대 의미는 ‘그름’이라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구함’이다. 그는 ‘옳음’의 원칙으로부터 ‘이익’을 마주대하고 ‘이익’을 앞세워 이익을 탐하는 도리를 사색으로 경계하였다. 특히 제도적 모순과 그 역할의 회복을 마음에 두면서, 경직된 판단과 편견에서 벗어나 시의적절한 생각을 파고들면서 심사숙고하였다. 이를테면, 주자가례 관점에서 보면, 당일 제사지낼 한 분의 위패만을 모시고 제례를 치르는 것이 원칙이다. 우암은 주자가례 원칙에서 한 발자국 나아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한 자리에 모시는 파격으로 정감을 살리면서 배려의 폭을 넓혀갔다.

그리고 노년기 우암은 나이가 들수록 일에 대한 반응, ‘응사물(應事物)’로서 ‘올곧음(直)’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흔히 옳은 생각은 하기 쉽지만,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인간 마음이 욕심으로 치달아 올곧음은 왜곡되고 굴절되기 쉽다. 늙음이 깊어갈수록 노회하게 되고 그 굴절이 심각해지기에 편파적이며 굽은 노인이 되기 쉽다. 그래서 노인을 ‘꼰대’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비꼬기도 한다. 노인이면서 ‘꼰대’가 되지 않고자, 우암은 인욕과 천리 사이를 ‘올곧음’으로 매개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우암에게 ‘올곧음’은 노년기 빈곤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실천적 처방이다. 노년에 들면서 우암은 ‘늙음’, ‘병듦’, ‘죽음에 다가섬’이라는 세 고통에 직면하였다. 그는 과거시절로 회귀하기보다 노년으로 살아가는 대안을 모색했다. 초라하고 불쌍하며 외로운 늙은이로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일상을 ‘올곧음’으로 매개하려고 노력하였다.

남인 출신,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숙종은 원자로 책봉하고 종묘에 고하였다. 우암은 인현왕후가 젊은데, 후궁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반대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화가 났다. 종묘에 고한 것을 번복하라는 주장은 대역죄에 해당하기에, 우암을 제주로 유배 보냈다. 남인들은 송시열을 국문해야 한다며 한양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숙종은 국문으로 인한 정치파장을 우려하고, 금부도사를 보내 우암이 정읍에 도착했을 때 사약을 내렸다. 사약을 받은 송시열은 금부도사가 건넨 사약, 세 사발을 마시고선 83세로 숨을 거두었다.

노년기가 깊어갈수록 노욕이 나타나서 천리보다 인욕에 사로잡히기가 쉽다. 우암은 이에 대한 실천철학으로써 ‘생명 사랑-옳은 생각-올곧음 실천’의 삼원사유를 이어갔다. 생명 사랑으로 자신의 기운도 활성화하면서 생각을 할 때마다 옮음의 기준에 두고 옳음의 생각과 이익을 향하는 경계선에서 일상에서 올곧음으로 실천하는 삶을 자신에게 주문하고 실천했다. 스스로 이 실천에 앞장섰기에 우암은 ‘송자’로서 존중되었다. 현실에서 맛있는 것을 선호하고, 즐거운 것을 보고지고, 남녀 애욕에 이끌리더라도, 탐닉 대상을 향해 오감을 사용하기보다 ‘올곧음’을 이어주고 매개하다보면, 인욕과 천리의 갈등에서 벗어나 올곧음을 유지할 수 있다.

우암은 조선조가 행한 주자의 사창(社倉)제도에서 하급관리가 원칙에 매달려 충실하면 할수록 때에 맞추어 적합성을 찾는 ‘시중(時中)’의 묘책을 함께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조선의 곡물대여 기관으로서 알려진 ‘사창’은 노년에게 도움을 주는 곳이면서 동시에 나라가 관할하는 곳으로 사회적 공공성이 있는 ‘관아’로서 역할을 하였다. 우암은 백성에게 보다 많은 혜택을 줄 수 있는 여지를 사창제도를 통해 살리고자 하였다. 말년의 우암은 나라가 자신에게 부여한 봉록까지 반납하면서 노욕으로 이익을 취하려는 자신의 경향성을 ‘올곧음’으로 성찰하고, ‘서추’로부터 과분하게 받았다고 생각한 봉록마저 되돌려주는 결단을 실천에 옮겼다.

노년기의 우암을 통해서, 노년의 의미와 가치를 살릴 수 있는 실천철학을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생명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태도가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생각이 일어나면 날 때만다 항상 ‘옳음’의 기준을 염두에 두고 옳지 않은 생각을 멈추거나 폐기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생활실천으로 이어가고자 ‘올곧음’을 실천 잣대로 삼아 풍속을 고려하면서 경직되지 않도록 항상 살피도록 함이다. 아울러 ‘이익’을 택하기보다 ‘올곧음’을 택하는 일관성을 견지함으로 노인 주체성을 스스로 살림을 일깨워 주었다.

우암이 ‘올곧음’을 향심으로 삼아 공부한 일상을 <송자대전>에 나타난 다음 구절을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내 일생동안 착하지 않은 점이 있었지만, 이를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비록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착하지 않은 점이 발견되면 다른 사람에게 모두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오로지 이 마음을 체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마음은 ‘올곧음’으로 주자가 실제로 전수받은 것이며 공자가 말씀하신 바이다. 이에 따라 사람이 살아가는 원칙은 ‘올곧음‘’이고, 이것이 없는 삶은 다행스럽게 죽음을 면할 뿐이다. 맹자가 말한 바이지만, ‘스스로를 돌이켜 반성하여 거짓이 없으니 비록 천만 사람이 있을지라도 나는 그 앞에 당당하게 나가겠다.’고 다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올곧음으로 기르며, 해가 없더라도 천지에 가득 찬다.’ 주자가 공맹 도통을 계승한 것은 오직 이 한 글자뿐이다.” 하였다.

우암이 은거하며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 구곡을 ‘화양구곡’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화양동 계곡은 괴산 선유동 계곡과 7km거리에 있으며 푸른 산과 맑은 물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화양 제1곡은 ‘경천벽(擎天壁)’으로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며 우암의 ‘주경’을 닮아있다. 이 바위에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는 우암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한 화양 제4곡은 금모래 ‘금사담(金沙潭)’으로 화양구곡 중심으로 우암이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새겨 ‘옮음’을 바로 세우고자 학문을 연마하였고 후진을 양성한 곳으로 알려졌다. 화양 제9곡은 ‘파천(巴串)’으로 개울 복판에 흰 바위가 펼쳐 있으니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 산수경관을 찾아 이곳을 찾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넓은 반석 위에 앉기를 원한다. 이 반석은 우암의 ‘올곧음’을 표상하기에 오랜 풍상을 겪는 사이에 씻기고 갈리고 많은 세월을 견디며 반석이 되어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노년기 우암을 통해, ‘늙음’은 ‘생명을 깊이 사랑하자는 의미’로 다가오며, ‘올곧음’은 ‘그것의 실천가치’로서 체화되어 간다.

동양포럼 / 21세기 초고령사회의 노년의 의미와 가치 < 황진수 - 동양일보, 2018

동양포럼 / 21세기 초고령사회의 노년의 의미와 가치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 21세기 초고령사회의 노년의 의미와 가치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8.10.28 

늙음의 의미와 가치 사회복지적 측면 : 황진수(한성대 명예교수·대한노인회 중앙회 선임이사)
황진수(한성대 명예교수·대한노인회 중앙회 선임이사)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노인복지의 영역

첫째 빈곤이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빈곤하다. 선진국처럼 노령연금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공적 부조 범위도 광범위하지 않다. 노후 적정 생활비 251만원이고, 최소 생활비가 177만원인데 응답자의 73%가 최소 생활비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응답한다. 우리나라는 국민연금 급여액이 39만원(2016)으로 하위소득 70%에 해당되어 기초연금을 추가로 받더라도 총 60만원 선이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OECD국가 중 빈곤지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우리나라 노인이 처한 불평등의 상황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증거이며, 충분하지 않은 개인 자산과 사회서비스 자원, 빠른 경제 성장과 서구이념의 도입 등으로 야기된 문화 충돌은 노인을 더욱 불안하게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노인들은 가난해서 일자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일자리를 가져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는 노인의 건강이다. 노인 중 만성 질환이 1개가 있다고 응답한 노인이 18.2%, 2개 22.8%, 3개 49.6%로 전체 노인의 90.4%가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으며, 만성질환을 2개 이상 지니고 있는 복합이환자가 72.2%로 나타났다.

질병치료를 위한 의료비 부담은 노년기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질병의 고통으로 길어진 노년기를 더욱 불행하게 보내는 노인들도 많아지고 있다. 또한 장기간 케어를 필요로 하는 치매, 중풍 등을 앓는 노인이 증가함에 따라 이들을 돌봐야하는 수발문제가 사회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가족관계의 핵가족화, 여성의 사회진출, 효개념의 퇴화 등으로 인해 케어인력의 부족, 부양의식의 결여로 노부모 부양기능은 크게 상실되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는 노인학대, 가족해체의 문제를 증가시키는 새로운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셋째, 역할의 상실이다. 노인들은 직장에서 물러나는 것 이외에 자녀들의 독립, 친구들의 사망 등으로 인한 관계의 상실 그리고 경제적 여건과 건강의 악화 등으로 역할이 줄어들게 된다. 역할의 상실은 노인 개개인의 자아개념과 사회적 정체감의 혼란을 가져오고, 사회적응상의 곤란을 유발시킨다. 사회학의 현대화이론에 의하면, 노인이 갖고 있는 농경사회 지식과 기술은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고 새로운 기술 분야에 익숙한 젊은이에게 역할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무력감(無力感)속에서 노년기의 적절한 역할과 규범을 찾지 못하고 무료하게 노후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넷째, 고독이다. 노인들은 정년퇴직을 한 후 역할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보다는 젊은 세대에 밀려 자신의 인생목표를 상실한 것 같은 허탈감과 소외감을 갖게 된다. 노인들은 고독감과 소외감이 점점 심화되고 사회적 의미를 상실하면서 삶의 의욕을 잃고 죽음을 재촉하는 경우도 있다.



●노인복지의 과제

(1) 노인의 의식개혁과 봉사

노인세대는 새로운 의식으로 무장해야한다. 오로지 후배세대인 자식세대를 위한다는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를 위한 봉사를 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의 사회봉사율은 15% 남짓하고 노인 사회봉사율은 5% 정도이다. 미국국민 사회봉사율 49%에는 한참 못 미친다.

논어에 적선지가 필유여경(績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하여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가정)은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의 사회봉사와 착한 일을 후손에게도 영향이 있다고 본다.

사회를 더 맑게 아름답게 하는 일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사회봉사를 한 노인과 봉사를 하지 않는 노인의 삶의 만족도 조사 등에서 그 차이점이 사례로 발표되고 있다.

(2) 소득보장이다.

우리나라 노인 재취업 정책은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여 정책전환을 해야 한다.

첫째, 고령자 인재은행을 만들어야 한다. 통계청 통계를 활용하여 학력, 기능, 취업 장소 별 인적카드를 만들어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력을 추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한다. 우리나라는 어느 분야는 사람이 남아돌고, 어느 분야는 인력이 부족한 미스매치(mis match)를 시정해야 할 것이다.

둘째, 고령자 중 단기적응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해야한다. 예를 들면, 건강하면서 빈곤한 노인을 위해 재취업 정책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실행해야한다. 빈곤하면서 건강이 나쁜 노인을 위해 국민기초수급자에 편입시키거나 그에 상응하는 복지혜택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정년 연장은 우리나라 노인에게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최선의 복지정책이다. 그러나 정년연장을 획일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업종·직업 영역에 따라 신축성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또 미국의 경우처럼 연령차별금지(age discrimination)를 함으로써 고용주와 노동자가 능력평가에 따른 고용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노인건강을 위한 제도 개선이다.

우리나라 노인을 위한 의료보장프로그램은 의료보험, 의료급여, 노인건강진단으로 나뉜다. 노인의료는 장기보호와 연계되어 있어 장기요양프로그램도 포함될 수 있다. 의료급여는 저소득층의 의료보장을 위한 공적부조제도이다. 노인건강진단프로그램은 질병의 조기발견 및 치료로 건강의 유지와 증진을 하고 노인복지를 도모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노인에게는 의료욕구가 다른 계층보다 강하다.

(4)노인권익운동이다.

노인의 빈곤문제, 의료보장 등 복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과 국가와 사회, 자녀세대에게 봉사한다는 기본철학을 가지고 노인권익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노인권익운동의 목적은 정부나 의회의 정책결정과정에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각종 사회갈등을 중재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우리나라의 노인권익운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결정변수가 있는데 정치문화, 정책유형, 리더십, 재정력, 구성원의 자의식수준, 이념 지배적인 가치 등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노인들은 적절한 영양, 위생∙안전∙오염되지 않은 생활환경, 운동∙휴식 등의 생활양식, 예방적∙치료적∙재활적 의료서비스, 비 의료적인 개인적∙사회적 지지 서비스 등을 요구한다.

(5)장수노인전략이다

우리나라의 건강기대 수명은 남자 78세, 여자 84세로 장수국가군(群)에는 들지 못하지만 장수노인이 많은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수명은 100세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사회의 모든 제도 및 시스템과 국민의식은 여전히 80년대에 머물고 있다. 선진국 선 경험 지원시스템과 정책벤치마킹과 함께 우리국민 욕구에 걸 맞는 맞춤형 고령사회로의 대응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책과 기술개발∙지원을 위한 가칭 장수사회복지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를 거점으로 한 R&D 실천 예산과 인력시스템이 투입되어야 한다. 장수사회가 가지고 있는 그늘의 문제인 고독사, 노인의 사회적 방치, 빈곤에 허덕이는 하류노인(下流老人)의 문제 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과 정책 수행이 있어야 한다.

동양포럼 - 노년철학 국제회의 감상문, 오가와 하루히사, 동양일보 2018

동양포럼 - 노년철학 국제회의 감상문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 노년철학 국제회의 감상문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8.12.09

오가와 하루히사(일본 동경대 명예교수·동아시아실학연구회장)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3회 노년철학 대화 보고

(11.15~11.27 보은군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

●노년기의 등장이 인간세(人間世)의 탄생

초고령화사회에 돌입하고 있는 가운데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늙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철학 대화가 지난 11월 15일~17일까지 보은 속리산 숲체험 휴양마을에서 개최되었다. 일곱 번 째의 한· 일 학술회의로 노인철학을 주제로 한 3번째의 철학대화이다. 발표자는 한극 측 6명, 일본 측 6명이었다. 첫날은 ‘노년의 자각: 자기인식과 점검’, 이틀째는 ‘노년의 빛과 그림자: 일상의 실상’, 사흘째는 ‘노년의 사회적 인식과 그 재구축’을 주제로 삼았는데, 다음 여섯 개의 내용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싶다. 이번에 처음으로 참가한 자로서의 중점적인 정리· 보고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먼저 이 철학대화의 취지가 주최하는 측의 김태창 주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노령문제는 일본이 선진국이다. 언제까지나 보호 세대, 간호 대상이 아니라 노인의 가치와 귀중함을 밝힐 필요가 있고, 한국과 일본이 모델을 만들 필요가 있다. 청년세대, 장년세대, 노년세대가 서로 힘을 합쳐서라고 했다. 이하의 보고는 발표순이 아니라 발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노년의 현상과 그 대책

-일본의 경우

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鈴鹿醫療科學大學 강사, 저널리스트) 씨는 현재 일본에서 간행된 노인 관련 도서를 16권 소개했다. <무연사회>, <노인표류사회>, <노후파단>, <끝난 사람>, <폭주노인>, <절망노인>, <고독사대국>, <훔치기 노인>, <죽지 못한 노인>, <탈출노인> 등. 모두 부정적인 노인의 실상을 주제로 한 것뿐이다. 오오하시씨는 “일본 노인의 가장 큰 문제는 고독이며 갈 곳이 없는 것이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서양근대의 수용에 있다고 하면서 서양근대의 특징을 두 가지 지적했다. 하나는 경제사회, 사회의 경제화이고 그것은 “보다 많이, 보다 많이” 만들라는 지향이다. 부채질의 에토스(부채질 문화)이다. 또 하나는 자아의 발견이고 높은 자아의 추구이다. 개인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버리고 타자와의 연계가 약해진다. 회사인간이었던 자가 퇴직해서 노인이 되자 고독해지고 갈 곳이 없게 된다. ‘부채질 문화’의 귀결이다. 이 상황에 대한 일본정부의 대응을 보니까 노인에게 일을 시키는 방향이다. 정년 연장과 평생 현역이라는 방향으로. 이것은 “노인이 활약할 장소를 다시 비즈니스의 세계로”라는 것으로 ‘젊은이부터 일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오오하시 씨는 강하게 비판하였다. 발상을 바꾸어야 한다. 노동을 마친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눈이 깰 지적이다. 노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한다면 수입은 줄어든다. 가난함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는 쓰치다 다카시(槌田劭) 씨가 주창하는 ‘공생공빈(共生共貧)’이라는 삶의 방식이 있다. 철학이란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청년시대에는 강한 개체로서, 노년 시대에는 약한 개체로서 말이다. 오오하시씨는 헤겔이 1818년 베를린대학에 취임했을 때의 연설에서 말한 ‘인생의 일요일 ─철학의 일요일’을 소개했다. 다시 사는 시간, 배움의 시간·장소로써 노년기는 철학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하면 젊은이의 일자리를 빼앗는 일도 없게 된다. 노인이 철학을 향하게 되면 ‘부채질 문화’를 ‘가라앉히기 문화’로 바꿀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황진수씨(한성대 명예교수, 대한노인회 이사)에 의하면 한국사회는 급속히 늙어가고 있다. 일본 이상이라고 하였고 노인의 사고(四苦)로 가난, 병약, 고독, 역할 상실을 들었다. 특히 노인의 빈곤율은 OECD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다고 한다. 노인연금은 현재 65세부터이지만 20년을 걸쳐서 단계적으로 70세 이상으로 하자는 안이 나와 있다. 2016년 대학가 학생 시위에서 ‘연금 인상 찬성’의 구호가 나왔다고 한다. 황진수 씨는 대한노인회 이사를 다년간 맡고 있는 전문가로서 동양일보 10월 29일에 게재된 노인복지의 5가지 가제(1. 노인의 의식개혁과 사회봉사, 2. 소득보증, 3. 노인 건강을 위한 제도개혁, 4. 노인권익운동, 5. 장수노인전략) 중 2와 3은 돈이 들어갈 문제이지만 그밖에는 노인의 의식운동이나 사회 전체의 노인문제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운동으로 중요하다. 1의 사회봉사로는 한국 국민의 사회봉사율은 15%, 그 중 노인은 5%이었다. 이 비율을 높이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미국 시민은 49%) 동아시아 시회는 아주 뒤떨어지고 있다. 황진수 씨는 유명한 고언인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난다. <주역> 곤괘坤卦)을 인용했는데 아주 좋은 고전의 인용이다. 노인권익운동은 “노인의 빈곤문제, 의료보장 등의 복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과 국가와 사회, 자녀세대에 봉사한다는 기본철학을 가지고 노인권익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국가, 사회, 젊은 세대에 봉사한다는 기본철학”의 내용이 노년의 존재가치와 그 사회공헌이라는 것이리라. 이번 회의에서 논의되고 밝혀진 것(후술)은 바로 그것이었다.

조추용씨(꽃동네대학 교수)는 발표 논문을 도표와 함께 동양일보지(11월 9일호)에 게재했는데 수치(數値)가 매우 구체적이고 흥미롭다. 먼저 노인 여가문화의 중요한 관심사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서 소개한다. 제1단계는 젊은이, 장년과 같은 사회적 관심을 계속 가지고 있다. 제2단계는 인간관계에 관심이 옮김과 동시에 금전감각(수입, 저축) 위주가 된다. 제3단계는 자기 연령이나 신체적 변화(체력저하, 노화)를 알게 된다. 제4단계는 건강· 질명 문제(당뇨병 질환이나 사망, 지병)에 대한 관심. 제5단계는 인생관(인생의 종말, 종교)에 관심이 모아진다. 노인의 인생의 관심사의 변화(다섯 단계)는 노인문제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조추룡 씨는 이들 단계에 입각하면서 노인문화가 어떻게 구축되어야 될까를 생각해야 한다고 먼저 말하고, 가장 약한 입장의 독거노인문제와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치매 문제에 한정해서 한국의 현재 상황을 제시하였다.



노인 중에서 가장 약한 대상은 노인부부세대와 독거노인세대라고 한다. 한국은 2000년에 고령화률 7.3%로 고령화사회로, 2017년 8월에 14.2%로 고령사회로 돌입했다. 2020년대에 초고령사회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65세 이상의 노인 가족을 유형별로 보면 1인 세대의 비중은 33.4%로 가장 많고, 다음은 노인부부 32.7%, 부부와 자녀 9.8%, 부모 한쪽과 자녀 5.5%의 순서이다.(고령자통계, 2017년) 독거노인의 성별 비율은 여성이 74%, 남성은 26%로 여성의 비율이 높다. 평균수명의 증가에 따라 70대 노인부부로 배우자가 죽고 독거노인이 될 경우가 많다. 전체 노인세대(주인이 65세 이상) 중 독거노인세대의 수는 1990년과 비교하면 2000년에는 급속히 늘어나고, 1990년의 20%부터 2016년 33.14%로 13.4%도 증가하고 있다. 자식(장남)이나 딸(장녀)이 결혼해서 재산분여(財産分與)를 하지 않는 한 독거노인이 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치매노인이다. ‘치매관리법’ 제2조 제1호에 의하면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치매는 퇴행성 뇌질환 혹은 뇌혈관계 질환에 의해 기억력, 지남력, 판단력 및 수행능력 등의 기능이 저하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지장이 생기는 후천적, 다발성의 장애를 수방한다.” 2012년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의 치매 유병률(有病率)은 6.18%로 54만명, 17년마다 두 배로 늘어나고, 202년에는 100만 명, 2041년에는 200만명을 넘을 것이라고 전망되어 있다. 2018년에는 치매노인이 약 75만 명, 경도인지장애노인은 166만명, 모두 합치면 32.7%로 세 명 중 한 명이 이에 해당된다. 치매노인 한 사람의 하루의 간호 시간은 6~9시간, 비용은 연간 2074만 원, 전체로 약 15조원, 2050년에는 약78조원에 이른다고 추정되고 있다. 치매노인에 대한 국가의 정책은 2011년 8월에 치매관리법 공포, 2012년에는 약 78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치매노인에 대한 국가의 정책은 2011년 8월에 치매관리법이 공포되고 2012년 2월에 시행되었다. 5년마다 치매관리종합계획(1-2차) 발표, 현재 제3차 계획(2016-2020)이 시행중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부터 치매국가책임제를 시행했다. 2019년부터 256개 시(市)·군(郡)·구(區)에 치매안심센터(직원 15-40명을 각각 배치)를 짓고 운영하고자 하고 있다고 한다. 직원은 모두 국가공무원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조추룡 씨의 이상의 발표에 대해 고멘테이터의 오오하시 켄지 씨는 일본에서는 여가는 노인에게 있어서 지옥이지 빛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치매가 된 시어머니와의 동거는 지옥상태가 되고 마침내 시설에 맡기게 되었다. 내가 사는 시골 동네에서도 매달 15만 엔은 걸린다. 한국의 경우고 치매노인을 시설에게 맡길 경우 가족의 부담을 얼마나 되는가라고 질문했다. 자기 부담을 각가지 비용을 합쳐서 100만원 정도가 아닐까라는 조추용씨의 대답이었다. 일본에서는 노인복지시절에서 간호사와 노인을 사이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젊은 간호사가 노인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설에서의 노인 간호는 월급에 대해 힘든 직장의 하나가 되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는 노인복지의 일을 싫어한다고 말해진다. 지금 일본의 국회에서 정부가 심의도 제대로 안 한 채 밀어붙이고 있는 입국관리법 개정은 외국인 노동자를 더 많이 받아들이려 하고 있고, 치매노인을 돌보는 데에 외국인을 더 많이 쓰고자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용도 들고 엄청난 노동문제이기도 하다.



2. 노인에 대한 경비와 인력 부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건강하고 자립된 삶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츠치다 다카시(槌田劭)씨의 ‘공생공빈’ 법의 실천

일본이 초고령화 사회에 들어가고 한국도 금방 그렇게 된다고 한다면, 돈과 일손이 소요되는 사태가 더더욱 늘어난다. 노인과 젊은이들의 세대간 모순과 싸움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이것에 대한 대책으로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은 노인이 되도록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자립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체력이 쇠약해지고 노화와 치매를 피할 수 없는 가운데서 말은 쉽지만, 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는 분이 일본에서 참여한, 올해 83세가 되는 쓰치다 다카시씨이다. 쓰치다씨는 교토대학 물리학의 조교수였다. 지금부터 50년 전의 대학분쟁 속에서 당신은 현실을 모른다고 심하게 비판을 받고 과학기술의 진보가 사람들을 정말로 행복하게 만들었는가를 반성하고 대학을 그만두고서, 유기농법을 중심으로 하는 가난하면서도 자립된 생활을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나는 쓰치다 선생과 만나게 된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어렸을 때 병약했다고 하는 쓰치다씨는 조그마한 편이지만 건강 그 자체였다. 쓰치다 선생이 이번에 준비한 개요의 후반 부분을 한국어로 번역돼 동양일보에도 게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양일보 11월 12일자 지난 9월 23일 일본 교토에서 열린 좌담화가 실려 있고 후반부에서 언급도 되어 있기 때문에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사진과 함께.

문명의 어려움・그 자각과 자기변혁

1973년부터 1회용 시대를 반성하고 협동조합식의 농업운동을 시작했다.

1974년부터 78년까지 시코쿠전력(四國電力) 이카타(伊方) 원전 중지재판에 원고(原告) 주민 측 증인으로 법정에 섰다가 1978년에 부조리한 판결이 나와서, 과학기술의 범죄성을 확인하고, 이듬해 과학자를 그만두고(교토대 사직) 자기 길을 살아가는 행복의 길에 들어섰다.

미래를 살아갈 가능성 (1) ─무엇보다 먼저 자기 건강에 자각적 책임을 진다

・ 불건강한 체질의 자각(변비/저체온/저혈압/냉증・ 자율신경실조)

・ 건강에의 노력(소식을 자비의 사상으로 실천/ 단식(斷食) 지원/ 체질의 격변/…)

쓰치다 씨는 소식이 자연의 이법과 맞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의 기본은 자연의 이치를 알면 알수록 좋은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무리하게 살고자 한다면 무리가 따라다니게 됩니다.”(앞과 같음 11월 12일 좌담회에서)

・ ‘심신일여(心身一如)’(마음도 몸도 부드럽게/ 조체법操體法/ 단전丹田호흡법/…)

・ ‘증상 즉 요법’(증상이 일어났을 때의 고통은 병과의 긴장・ 자연치유)

・ 자기 몸은 자기 책임으로/ 의사에게 맡기기・ 대증요법의 무책임

미래를 살아갈 가능성 (2) ─평화로운 삶, ‘공생공빈’에 안심안정을

・ 마음과 몸의 건강・ 급식의 건강(다양성의 존중에 의한 안정 균형을)

・ 하늘에서 주어진 ‘살아갈 힘’에 감사하기(환경에 적응하는 생물 신화의 역사가 안정된 환경에서 살아갈 힘을(보여준다)/ 현존하는 생물은 생존・ 엘리트/ 씩씩한 생명력이 자연에게 주어지고 있다/ 자연을 신뢰하고 자연에게 수순隨順할 것/…)

・ 유기농업은 평화의 사상(안 보이는 지하에 공생의 풍요로움/ 농사의 즐거움을/…)

・ ‘인류멸망’을 두려워하지 말고…(멸망에의 길을 걷는 책임 자각/ 멸망 때 입회하지 못한 무책임/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마음가짐 자체에 지복(至福)이 있다고 믿고…유언반실행(有言半實行)・ 흐지부지함의 행복)

마지막의 ‘인류멸망’ 운운은 과학자로서, 생활자로서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깊은 통찰에 기초한 것이겠지만.

이상의 개요 후반부에서 읽어내고 싶은 것은 ‘공생공빈’의 사상이다. 가난함은 풍요로움이라는 것을 위 지적에서 배우고자 한다.

그럼 여기서 취향을 바꾸고 역사적 인물을 다룬 두 발표를 소개하고자 한다.



3. 노년의 미학─붓다와 송시열(宋時烈)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서

이번에 매우 나의 관심을 끈 발표는 죽음에 직면한 붓다의 모습을 다른 것이었다. 원혜영(동국대학교 강사) 씨의 발표이다. 80세가 된 붓다가 열반하기 전에 출가하기 전에 살았던 곳을 찾아다니는 긴 여행을 한 것을 나는 몰랐다. 250km, 2~3개월에 걸친 여행이었다고 한다. 도중에서 병에 걸리고 노화로 인해 다리나 허리 등이 아파지는 가운데, 여행 끝에 고향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고 한다.

“아난다여!(내가 지금까지 여러 번 바라본) 베사리 두시가 아름답구나! 고요한 탑묘(塔墓)들도 웅장하구나! 여래가 원한다면 일 겁 일 겁(一劫一劫) 이상 여기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상 장면은 붓다가 생전에 머물렀던 곳을 다시 돌아보고, 자기 생이 끝나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말로 유명하다고 한다.

또 늙음과 죽음은 업보가 아니라 자연의 추이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붓다가 자기 죽음에 직면하면서 마음이 흔들린 것을 ’늙음의 미학‘으로 이름 짓고 마지막으로 다음 두 가지를 지적했다.

“그 흔들림에 의해 겸허함과 미련에 닿고 소중한 것에 대한 최대치가 무엇인가를 직관(直觀)한 것이 아니었을까.” 주어는 붓다이다. 인간 붓다가 80년의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를 직관했다고 원 교수는 이해한 것이다. 대단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늙음을 말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차이를 느끼자. 늙음을 말하고 있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늙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붓다가 늙음을 말하는 방식이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신선하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이것 또한 대단한 지적이다. 생각해 보자. 붓다의 그것을 늙음의 미학으로 그녀가 이름 지은 까닭이다.

또 하나의 발표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노년기를 다룬 김용환(충북대 교수)씨의 발표이다. 송시열은 병자호란에 의한 치욕적인 만주족에의 굴복을 체험하면서 효종을 도와 북벌을 실행하려 한 북벌사상의 중심인물이자, 노론파의 영수로 군림한 정치인이자 유학자이다. 한국사 중에서 성씨에 학자로서 ‘자(子)’자를 붙이는 것이 허락된 유일한 인물이자 <송자대전(宋子大全)>, <조선왕조실록>에서 무려 3000번도 거론될 정도로 사람 입에 이름이 많이 올렸던 거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탄핵을 반복하고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으며 오로지 주자학만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크게 평가가 갈라지는 인물이다. 김용환 씨는 송시열을 높이 평가하면서 노년철학회의의 취지에 비추어서 송시열이 노년기를 지낸 방식을 다루었다. 대개 노년기는 천리가 인욕에 지기일쑤이지만 송시열은 ‘생명 사랑─올곧은 생각─직(直)의 실천’이라는 3원적 사유로 인욕을 극복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송시열은 의(義)의 사상가로 말해지기만 김용환 씨는 직(直)의 사상가로 본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올곧음에 의해 키운다고 하는 <맹자>의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제자가 물었다) “감히 묻습니다. 어떤 것을 호연지기라고 이릅니까?”

(맹자가 말하기를)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기운이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센 것이므로 올곧음(直)으로써 키워서 해치지 아니한다면 바로 천지 사이에 퍼지게 될 것이다.”

송시열은 자주 하야하면서 향리에서 일관되게 곧게 살았다고 한다. 특히 사창(社倉)에 의거하면서 재야로 있을 때에는 중앙에서 내려질 녹봉을 사양했다고 한다. 향리에 있을 때에는 화양동(華陽洞)의 자연을 사랑하고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화양구곡(華陽九曲)으로 이름을 지었다. 거대한 바위(반석磐石)가 있고 하늘을 찌르듯 솟아나온 경관에서 송시열은 직의 기운을 키웠다고 한다. 네 명의 임금을 섬긴 그도 장희빈(張禧嬪)이 낳은 아들을 숙종(肅宗)이 세자로 종묘에 보고한 것에 대해 시기상조하다고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으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에 유배된 후 사약이 내려지고 83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독배를 두 번이나 마지면서도 죽지 않았고 세 번째로 눈을 뜬 채 절명했다고 한다. 신심 단련의 성과라고 말해졌다. 김용환 씨는 송시열을 깊이 존경하고 노년철학의 모범으로서 그 ‘생명 사랑─올곧은 생각─직의 실천’이라는 3원 사유를 높이 평가한 것이지만, 평자로 지명된 나는 크게 당혹했다. 15일 당일에 그것을 알게 되고 아무런 준비도 못했던 것과 크게 평가가 갈라지는 인물이 다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을 사문난적으로 규정하면서 독자적인 유교해석을 학자들을 배격한 송시열에 대해 나는 존경심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나는 코멘테이터로서는 부적격이었다. 주최자 측에 반성을 요구하고 싶다. 하지만 올곧음으로 일관한 송시열의 마지막은 늙음의 미학의 하나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송시열 만년의 삶을 노년기의 삶의 모범으로 본 김용환씨의 의도를 충분히 헤아릴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바이다.



4.노년을 바라보는 세 가지 시점─생물・ 동물학의 입장, 할머니를 모범으로 한 노인의 역할에서

생물・동물학에서 “생물학적으로는 노년기에 의미는 없다. 생식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놀라운 지적으로부터 시작하신 것은 시세이칸대학(至誠館大學) 학장을 마친 하라다 켄이치(原田憲一)씨다. 하라다씨는 지질학자로 암석에 대해 잘 안다. 이번 대회의 전날에 유성종 선생의 안내로 법주사를 견학했는데 큰 암벽의 석층(石層)이 겹치는 모양을 여러 차례 설명해 주었다. 발표에서는 화이트보드를 쓰면서 동물─식물─미생물의 상생상극 순환도, 천(天; 태양권)─지(地; 암석권)─수(水; 수태水態)의 생물태(生物態)를 둘러싼 농축작용과 확산작용, 환경정화와 자원생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설명했다.

생물계에서는 자기 죽음은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는 것으로 생물순환이 성립된다. 이것이 지구상의 다양성을 보장한다. 지구의 아름다움은 “다양성 속의 조화”이다. 4억 년 전에 식물이 탄생했다. 46억 년 전에 지구가 탄생했고 10억 년 전에 인간이 탄생했다. 그리고 인간의 노년기가 등장하면서 인간성이 탄생했다고 한다. 노년기의 등장에 의해 인간성의 탄생했다는 지적은 몇 번이나 반추(反芻)할 만하다. 노년철학의 근본명제라고 생각한다.

노년기는 생식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노년기는 인간만이 획득한 기억하는 기능에 의해 지혜의 축적과 전달이 이루어진다. 노인의 존재의의가 군거공동체(群居共同體) 속에서 인정되고 노인은 윗자리에 앉히게 된다. 그러나 산업화・ 공업화에 따른 사회의 급속한 변화로 인해 농업만의 지식・ 지혜는 비중이 낮아지고 노인은 윗자리에서 끌어내려지게 되었다. 인간의 노년기의 의의와 가치는 인간의 생애를 총괄하는 철학과 인생을 마음껏 즐기는 예술에 있다. 인간은 예술동물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린이는 점토(粘土)를 받으면 무언가를 만들고자 한다. 막대기를 받으면 물건을 때린다. 그리고 춤을 춘다.

하라다 씨는 총괄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죽음으로 후세에 삶의 모범을 제시하고 동족을 구하고 있다. 생명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동족을 위해 죽는 생물이 되었다.”

-할머니를 모범으로 삼고

원광보건대학 교수인 김자옥 씨는 할머니부터 매우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한다. 할머니 젖에서 떼기 위해 어머니가 아주 고생했다. 그런데 김자옥 씨는 할머니를 모델로 했다고 여겨지는 네 가지 노년 규정을 제시하셨다. 자세한 내용은 동양일보 11월 9일호 게재의 논문을 보시기 바란다.

① 노년은 경험을 기반으로 한 지혜이다.

② 노년은 한없이 자애로 가득 찬 사랑이다.

③ 노년은 자기 자비이다.

④ 노년은 사회적 활동이다.

④에 대해서는 고독을 회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연수를 받음으로써 외국의 노인들이 공공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실을 목격하고 신선함을 느꼈다고 한다. 스포츠관람센터에서의 자석의 배치, 승차표 검사, 안전 확보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약간 설명이 필요하다 싶은 것은 ③의 ‘자기 자비’ 규정이다. 그녀는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 자비는 스스로를 따뜻하게 돌보고 내가 고통 속에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는데, 쿨함(Cool), 시크(Chic), 시니컬(Cynical)함을 멋으로 여기는 현 세태와 반대로 따뜻함과 배려를 바라는 마음을 스스로에게 적용함으로써 심리적 안녕감에 도움이 되는 자기개념으로 연대감과 공감능력을 높여준다.” 고독감을 해방하고 타자와의 연대감을 높이는 것이 자기 자비의 개념이라고 한다. 자비의 마음을 자기에도 적용하고 모두들 안에 있다고 하는 감정을 말한 것 같다. 이것은 인간에는 누구나 필요한 것이지만, 고독하기 쉬운 노년기에는 특히 필요하다고 한다. 자기애가 아니라 자기를 자애로워하는 마음이다. 세 번째의 노년 규정은 시간을 걸어서 생각하고 맛볼 만한 규정이다. 그녀는 결론짓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행복이라도” 그대로 넘기지 말아야 된다. “이러한 가치들이 한데 어우러져야 자기 자신의 노년철학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노인에게 요구되는 것 : 노년의 역할

주오가쿠인대학(中央學園大學)의 미네 마이코(峯眞依子) 씨는 ‘늙음이 전 인류에게 이익이 될 때’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동앙일보 11월 9일자에 전문이 실려 있으므로 살펴주시기 바란다. 여기서는 첫 부분과 말미의 결론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녀는 첫 부분에서 사상가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생애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노인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고 적어도 돌봐주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잉태한 여성에게 충분한 휴가와 급료를 주고 충분히 육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실현되면 역사는 그만”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안 읽었지만 내가 젊었을 때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아주 유명하고 젊은이들이 많이 읽었다.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상가・ 평론가였다고 생각되는데 엄청 대단한 말이다. 노인과 임부(아이도 포함)를 경제적으로 안심시킬 수 있다면 역사는 그만이라고 한다. 요시모토 다카아키 씨가 말하는 역사가 그만할 경제는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물어보고 싶지만, 이 보고서 1에서 본 노인문제의 경제적 심각성을 생각할 때, 요시모토 씨의 이 제언은 현실성이 있다. 미네 씨는 첫 부분의 이 제언으로 되돌아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어찌됐든 마지막에는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일이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움직이지 못한, 일을 하지 못한 경험을 통해 원래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을 고령자가 사회에 제시해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젊은 사람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조금뿐이니 그런 쓸데없는 일은 안 해도 돼’라고 그들이 보여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바뀔 것인가. 늙음에는 인간이 사는 의미와 인생의 질을 높여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우리 인류 전체의 이익이다. 또한 늙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노인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는 것과 연결된다.”

미네씨는 국제무대에서도 활약한 가수로서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요청에 따라 희의장에서도 노래를 피로해 주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5. 노년이야말로 철학할 때─인생 2모작과 그 실천

-인생 2모작

병을 무릅쓰고 참가하신 83세의 강신표 인제대 명예교수는 문화인류학자로서 1966년에 하와이로 건너가 일본계 하와이인 3대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서 1세의 일은 3세를 통해 2세가 배우는 관계를 보고하였다. 2세는 1세에 대한 반발성이 강하고 그것이 희박한 3세의 1세 이해를 통해 2세가 1세를 배운다고 한다.

강신표 씨는 그 뒤에 미국의 학자 William Sadler의 핫 에이지(Hot Age)론을 소개하였다. Sadler는 Third Age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은퇴한 이후 30년의 삶이 새롭게 발견되어가고 있다고 하면서 Hot Age라는 이름을 짓고 그 시기 사람들이 다음 6R의 시간을 구가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①육체의 부활(Renewal)

②원기 회복(Revitalization)

③영적 재생(Regeneration)

④자아의 재발견(Rediscovering)

⑤회춘(Rejuvenation)

⑥인생의 방향 수정(Redirection)

Hot Age를 살고 있는 퇴직자들을 조사해서 알게 된 여섯 가지 공통점을 들어본다.

①자기가 바라는 진정한 생이란 무엇인가를 잘 파악하고 있다. 젊었을 때의 돈, 명예, 사회적 지위 등과 달리 그들은 주로 내면적인 만족을 추구하고 있다.

②과거에는 가족, 친구, 자녀, 직장 등을 위해 살아왔지만, 지금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도 이기적이라는 지탄을 안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③그들은 은퇴 후에도 일을 계속하고 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과거에 하고 싶었던 일, 여가를 즐기는 일을 하고 있다.

④정신적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호기심, 웃음, 밝음(명랑성), 상상력을 발휘하고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

⑤가족, 친척 이외에 보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을 하면서 그것으로 행복해지는 사람이 많다.

⑥그들은 누구나 죽어가는 것과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죽음에 대해 준비가 잘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강신표 씨는 노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오늘의 현실은 보통사람도 인생 2모작을 해야 할 때이다. 빨리 준비하고 실행해야 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된다. 결국 모든 노년은 자기가 준비한 만큼 산다는 것이 현실이다. ‘부지런한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갖게 된다.’─서양의 격언”

병을 무릅쓰고 참가하신 강신표 선생에게 감사를 드린다.



-노년철학의 엣센스

이제 노년철학 구축의 때이다. 노년의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포함해서, 빛과 그림자도 포함해서 노년철학은 구축될 필요가 있는데, 야마모토 쿄시(山本恭司) 미래공창신문 사장은 ‘초고령 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의미와 가치’라는 제목으로 10항목의 개요를 준비하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사전에 한국어로 반역되어 있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 중에서 핵심으로 여겨지는 명제를 소개하고 싶다. 이것은 노년철학의 긍정적인 면의 기본원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지적이 한 가지 있으므로 그것은 핵심의 소개 뒤에 다루고자 한다.

①노인은 정신적으로는 영혼을 계속 갈고 닦아온 사람에게는 노숙기이고 수확기이고 제2의 탄생의 시기이다.

②노년기에는 사물의 진상이 여실히 보이게 된다. 순화된 영혼은 ‘참’에 가까워진다.

③노인은 그때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보은의 증거로 청장년, 젊은이 세대와 장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지는 심경에 이른다. 전쟁의 비참함을 체험한 노년세대는 체험을 이야기하고, 배우고, 차세대에게 그것을 전달해야 된다.

④인생을 진지하게 살아온 노인은 도의, 올바름, 도리가 훤히 보인다. 모든 체험과 지식을 체계화시켜 하나의 철학을 구축하는 것은 노년세대만이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노년철학이다.

한 가지만 숙고하고 싶은 것은 다음의 지적이다. “젊었을 때부터 자기 자아를 살피고 반성하며 타자를 생각할 마음을 가져온 사람의 노년기는 자기 확대・ 자기실현의 자아가 아니라 우주력(宇宙力)에 호흡을 맞춘 자기수축・ 타자실현의 자기에로 180도 전환된다. 무조건 남을 공경하는 ‘경(敬)’의 체인자(體認者)가 된다.”

‘자기실현의 자아’부터 ‘타자실현의 자아’에의 대전환, 말은 쉬우나 실현은 용이하지 않다. 해야 되는 과제를 아직 못하고 있는 노년에게 ‘자기실현의 자아’는 버릴 수 없다. 다만 ‘타자실현의 자아’라는 규정은 신선하다. ‘우주력에 호흡을 맞춘 자기수축’이라는 규정도 눈이 끌린다. 나는 지금 일본의 농민철학자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1895~1933)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의 <농민예술개론강요(農民藝術槪論綱要)>에는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다.

“자아의 의식은 개인에서 집단사회 우주에로 점차 진화한다.……바르고 강하게 산다는 것은 은하계(銀河系)를 자기 속에 의식하면서 그것에 응해가는 것이다.”

야마모토 씨가 말하는 대전환은 발상으로써 중요할 것이다. 다만 나는 공존할 수밖에 없고, 전환은 마이페이스로 서서히 진행시키고 싶다고 생각한다. 무조건에 남을 공경하는 ‘경(敬)’도 목표이다.



6. 노년철학과 여성

이상 지금 노년철학대화에서 발표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발표에 언급했다. 마지막이지만 시종 코디네이터로서 총괄토론에서 발표한 김태창 선생의 발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 김태창씨가 가장 솔직하게 말한 것은 두 여성의 일화와 여성의 영성의 깊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명은 시오자와 미도리(鹽澤みどり)라는 분. 김태창 주간은 2014년 가을에 나가노현(長野縣) 도가쿠시(戶隱) 옆에 있는 이이즈나고원(飯綱高原)의 생명의 숲 문화재단, 스이린(水輪)을 사흘 통안 방문하고 체류하였다. 거기에는 시오자와 미도리씨 부부와 39세 나이로 몸져누운 딸이 있었다. 39년전 부부에게 중도의 신체장애인의 딸이 태어났다. 부부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가노현 산중의 이이즈나고원으로 옮겨 살고 들판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밭을 가는 생활을 시작했다. 살아가야 되기 때문에 산야를 개간하여 지금은 훌륭한 농장이 되어 있다고 한다. 딸은 몸져누운 채 아무 말도 못한다. 그러나 부부는 그 딸이 병상 속에서 사계적마다 자연의 변화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격려되면서 간신히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번 노년철학 대화 뒤에 이 보고의 글을 쓰기 위해 야마모토 쿄시씨가 보내준 ‘생명의 숲 통신’ 2015년 1월 1일호에 의하면 딸(사오리早穗理)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이 달려 있었다. “출산시의 의료사고로 인해 전두엽 뇌손상이라는 최중도의 뇌장애를 당하게 되고, 39세의 오늘날도 스스로 걷거나 마시거나 말할 수 없고, 거의 몸져누운 생활을 하고 있다. 부부는 시설에 맡기지 않고 24시간체제로 자택 간호하면서, 재단 활동을 하고 있다.” 이 통신에 시오자와 미도리씨가 지은 시가 4편 개제되어 있었으므로 네 번째의 ‘사오리의 노래’에서 ‘봄의 사오리’ 부분만 소개하고자 한다.

“봄 따뜻하고 작은 새 울며/ 눈석임물 수면에 봄빛 비치며/ 잠에서 깬 새잎의 냄새/ 산뜻해/ 뺨 스치는 솔솔바람의 소리/ 민들레꽃 관을 싣고/ 가볍게 봄의 여신과 사오리가 논다/ 동근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고/무 엇을 말하고 있는지/ 가끔 부끄럽게 웃고 끄덕거리네.

봄의 하루/ 오브라트에 싸인/ 부드러운 햇살 속에서

이 사오리의 평안은/ 이 사오리의 미소는/ 운하 속의 소우주

이 사오리의 잠잔 얼굴은 이 사오리의 눈동자 속/ 운하 속의 소우주

이 사오리의 평안은/ 이 사오리의 미소는 운하 속의 소우주”

김태창 주간이 거론한 또 한 명의 여성은 세계적인 정신의학자인 에릭 에릭슨(1902~1994)의 딸이다. 그녀도 저명한 정신의학자이다. 에릭슨은 태어난 첫 아이가 신체 장애아였다. 그런 아이를 키우면서 미국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마이너스가 된다고 생각하고 부부는 그 아이를 시설로 보냈다. 사실상 그 아이를 버린 것이다.

나중에 딸도 그 사실을 알고 아버지를 위선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나의 생명을 버려놓고 다른 생명의 행복을 실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이다. 김태창 주간은 시오자와 미도리 씨나 에릭슨의 딸의 아버지 비판을 알고 여성의 영성이 남성의 영성보다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김태창 주간은 빛이 그림자가 되고 그림자가 빛이 되는 것이 노년철학의 핵심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두 분 여성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남성은 creative, 그러나 여성은 generative이라고.

생명이 차세대를 낳는 귀중함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남성은 여성보다 뒤떨어진다는 것을 그 두 사람을 통해 확실히 배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무용무책(無用無策)한 인간인가를 통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0명 이상의 학자・ 연구자와 대화하고 공공철학운동을 20여 년 동안 계속해온 김태창 주간의 이와 같은 자기인식에 당목(瞠目)하지 않을 수 없다.

최종일의 종합토론 자리에서 김태창 주간은 <옹동론(翁童論)>(총 4권, 가마타 토지鎌田東二 저)에서 “인간 중에서 가장 제대로 된 사람은 어린이와 노인이다”라는 지적을 소개하면서, 노인→죽음→어린이→노인 이라는 연쇄에 기초하면서, 노인과 어린이를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제기하셨다. 이 지적도 노년철학을 생각할 중요한 시점이 될 것이다.



7. 두 가지 노래

이틀째 낮에 가수였던 미네 마이코(峯眞依子) 씨가 노래를 두 곡 불렀다. 이탈리아의 노래와 오키나와의 노래다. 아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이탈리아의 노래는 ‘넬라 판타지아(환상 속에서)’라는 제목으로 김태창 주간에 의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가사이다.(동양일보 2016년 11월 28일자에서)

“나는 환상 속에서 모든 것에 정직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본다. 나는 저 떠 있는 그름처럼 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깊은 곳까지 인간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을…. 나는 환상 속에서 밤조차도 어둡지 않는, 밝은 세상을 본다. 저 하늘에 뜨는 그름과 같이 늘 자유로운 영혼을 꿈꾼다. 깊은 곳까지 인간 사랑으로 가득 찬 영혼을….”

또 하나는 오키나와의 민요이다. ‘The flower of Tensagu’라는 제목이다.

“어버이 말씀을 잘 명심해/…어버이 가르침은 끝이 없다/ 어버이는 북두성과 같다/ 정직한 자는 천대(千代)에 걸쳐 번영하다.…(그 뒤에 어버이의 가르침의 핵심이 이어진다)”

오키나와의 옛 노래는 어버이의 가르침의 소중함을 부른 것으로 결과적으로 이번 노년철학 대화와 어울린 것이었다. 김태창 주간은 지난 번(제2회) 때는 젊은 여성의 그림이었는데, 이번에는 노래가 금상첨화(錦上添花)해 주었다고 칭찬했다. 예술의 요소는 노년철학에서 뗄 수 없는 것이다.



8. 속리산 기슭의 자연─들국화와 감사의 말씀

마지막으로 회의장과 숙사를 둘러싼 들국화와 자연, 대화를 지탱해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먼저 들국화이다. 시종 도와주셨던 최장로이신 유성종 동양포럼운영위원장은 들국화는 꽃은 작지만 향기가 짙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많은 들국화에 쌓인 것은 나는 처음이었다. 이토 사치요(伊藤左千夫)의 <들국화의 무덤>이라는 소설이 있지만, 일본에서 이와 같이 들국화가 왕성하게 꽃비는 곳이 과연 있을까. 참가자의 한 사람인 김영미 시인이 “국화 향기처럼 노년철학이 널리 퍼지는 것을 기원합니다.” 라고 말했다.

목조의 숙사는 아주 잘 만들어져 있었다. 식당에서의 식사도 속리산 기슭에서 채취된 산채가 위주로 이것도 자연이 가득 차 있었다. 바쁜 가운데 몇 번이나 찾아와 준 정상혁 보은군수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이름의 과자를 나눠 주었는데 찾아보니까, 중국 고전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5년의 고사에 유래하는 말이었다. 딸을 순사(殉死)에서 면해 주신 은인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었을 때, 그 아버지가 풀을 맺고 적장이 다리가 걸려 넘어지게 하고 잡히도록 하는 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했다는 고사이다. 결초(結草)란 말 그대로 풀을 맺는다는 의미이다. 또 군수가 대추를 많이 선물해 줬다. 대회 전날에 법주사 입구 매점에서 생대추를 사다 먹었는데, 생대추를 먹은 것도 처음이었다. 작은 사과와 같은 맛이었다. 들국화 이외에 또 하나 대추가 (속리산) 보은군의 상징이 됐다.

한일학술대화이기 때문에 통역진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 원광대학교의 조성환씨와 야규 마코토씨, 동덕여자대학교 이선영씨에게 깊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동양포럼 운영위원장으로 최장로인 유성종 선생에게는 거듭 감사말씀을 드리고 싶다. 발표・토론을 모두 참가・방청하시고 숙사와 회의장의 송영까지 모든 일에 배려해 주었다. 이번 회의는 아주 많은 결실이 있었다고 말씀해 주신 것도 반가웠다.



●처음 참가한 자로서의 감상

나는 77세이지만 자기를 노인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늙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해보라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양하고자 했다. 전화로 의뢰자인 야마모토 쿄시 미래공창신문 사장에게 말씀드리자 김태창 선생이 올해 봄 죽음 직전까지 가는 경험을 하였고 그 경험에서 노년철학을 구상하였다고 하였기에, 마지막 작별 인사의 뜻으로 참가해야 된다고 다시 생각하고 발표 원고를 써서 제출했다. 자기를 억지고 노인으로 만들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네 가지고 정리해서 썼다. 지금 죽을 수 없는 사정(세대로서의 과제 의식을 포함해서), 신변정리, 지금에야 알게 된 것, ‘보본반시’의 마음의 네 가지이다. 자세한 내용은 동양일보 10월 29일자에 게재되어 있으므로 살펴보시기 바란다. 당연한 일이 위주가 된 발표이지만 주목할 점이 두세 가지 있었다. 나는 우리 세대의 과제책임으로 지금 일본국헌법 제9조의 전쟁포기 조항을 지키는 과제와 북조선의 무시무시한 강제수용소를 없애는 과제를 들었다. 코멘테이터의 선생에서 인권은 상대적인 개념이니까 북한 쪽의 주장도 있지 않을까라는 반론을 받았다. 그것에 대해 나는 인권이란 생명을 지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다. 북조선은 인권을 국권으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지극히 그릇된 견해, 말도 안 되는 견해라고 반론했다. 끝난 후 여성 참가자가 인권에 대한 말씀이 아주 인상 깊었다고 하여 나는 기뻤다. 내가 50년 가까이 연구해 온 에도시대(江戶時代)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자 미우라 바이엔(三浦梅園)은 하루에 세 번(아침・ 낮・ 저녁) 성묘했다. ‘보본반시’(<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편)의 정신으로 미우라 바이엔은 ‘감시사본(感始思本)’으로 바꿔 말했는데 김태창 선생은 “‘본’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천지자연, 조국, 신세를 진 사람들, 평화”라고 대답했다. ‘보본반시’(감시사본)은 노년철학의 한 요소로 놓아도 좋다고 말해 주었다. 사흘간의 노년철학 대화에 참가하면서 나는 다양한 것을 배웠다. 불교를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붓다의 마지막 여행 이야기는 각별히 내 관심을 끌었다. 이틀째에 야마모토씨가 이번 대화의 보고문을 1만6000자(400자 원고지 40장)로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한국말도 약간 할 줄 알기 때문에 거절할 수도 없어서 승낙했다. 귀국 후 1주일간, 내 필기메모를 정리하고 동양일보에 게재된 한국 측의 글도 정독해서 이 보고와 같은 구성으로 정리해서 1만6000자를 채울 노력을 했다. 솔직히 말해 힘든 작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인이 아니라 하지만 노인이라는 자각에 도달했다. 대회 주최자, 참가자 전원에 감사를 드린다. 만나보니까 김태창 선생은 정정하고 건강하였다. 억지로 노인으로 만들어진 나였지만 지금은 상당히 노인으로서의 자각이 일어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노년기의 등장에 의해 인간성이 탄생했다”는 말로 이 보고를 마치기로 한다.

동양포럼/ ‘장수윤리’ , 김용환 < 동양일보 2019

동양포럼/ 목요강좌 ‘장수윤리’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목요강좌 ‘장수윤리’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9.02.10
김용환(충북대 교수)
김용환(충북대 교수)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일보는 올해 24차시의 시민공개 목요강좌를 개설하고, 고령화 사회에서의 장수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강좌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과 함께 장수철학을 각각 8차시 분량으로 맡아 담당하기로 했다. 

‘장수윤리’를 맡은 입장에서 지면을 통해 개략적 안내를 하고자 한다. 장수윤리는 ‘노소동행의 개신윤리(開新倫理)’에 토대한다. 노소가 동행하며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인근의 배재대에서는 21회 노인의 날을 맞아 ‘2회 노소동행 축제’를 개최했다. 이 축제는 지역대학과 어르신이 함께하는 고령친화대학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축제에는 어르신 150여명이 참석해 흥겹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2017년에 이어 2018년, 두 번째로 개최된 노소동행 축제에서는 지역 어르신을 초청해 20대 학생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노소동행으로 성공한 장이 됐다.



실제적으로 배재대 콘서트홀에선 실버보건학과 학생들이 노래와 율동을 선보이는 환영무대를 선사했다. 학생들은 어르신들과 일일 손자손녀 결연의식을 맺고 세대 간 나눔의 정을 이어갔다. 특히 재즈 트리오 공연, 유등노인복지관 어르신의 댄스공연 등 문화 창달에도 기여했다. 대학생활을 겪어보지 못한 어르신들의 막연한 거리감을 해소하고 젊은 학생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노소동행 축제를 앞으로 지속함으로 한국사회에서 고령친화 대학축제로서 지속적으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대순사상 심우도를 참고해 볼 때, 노소동행의 개신윤리는 생각-생명-생활의 세 단계로 전개될 수 있다. 먼저 개신윤리 첫째 단계, 생각의 이화단계는 ‘심심유오(深深有悟)’로서 드러난다. 심심유오(深深有悟)는 ‘깊고 깊은 생각 속에 천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음’으로 생각의 이화단계를 중시한다. 동자가 소나무 밑에서 고민한다. 일상생활에 익숙해 있던 동자가 어느 순간 인간 존재의 근원에 의문을 갖는다. 깊이깊이 감추어져 있는 이치를 찾아 감추어진 진리를 찾아 나선다. ‘노소합덕(老少合德)’의 이치를 생각하면서 소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그 다음 개신윤리 둘째 단계, 생명 기화단계는 성실에 성실을 가하는 ‘성지우성(誠之又誠)’으로 생명력 확충의 ‘기감(氣感)으로 드러난다. 기감을 느끼고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며 도를 찾고자 생명실상에 몰입한다. 해원상생과 보은상생으로 자타상호 호혜의 실천윤리로 나아가며, 생명기화에 몰입하고 상극 기운과 타성에서 벗어나 노소상생의 실천윤리로 전환한다.

그리고 개신윤리 셋째 단계, 실화단계는 노소통명(老少通明)으로 일상으로 도를 체화하는 단계이다. 피리를 불며 흰 소를 타고 가는 동자 모습에서 도를 일상으로 체화된 경지가 노소통명으로 밝아진다. 노소동행이 인간존엄이 살려진 세계를 구현한다. 동자는 처음 흰 소의 꼬리를 보았지만 마침내 흰 소와 일체가 되어 신선으로 전환된다. 이 같이 바뀐 세상에서 선녀들은 음악을 들려주고, 불로초는 피어나고, 학들이 노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모습을 제시한다. 이에 삼차연동으로 나타난 개신윤리의 전개과정을 구조화할 수 있다.

동자는 소를 찾아 좁고 험한 산길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인다. 노소동행은 마침내 결실을 맺어 흰 소와 상봉한다. 동자는 ‘흰 소’로서 표상이 되는 도와 상봉한다. 후천개벽 실화기제를 통해 도로써 밝아진 후천세상을 이룬다. 노소합덕의 노력을 경주하면, 정신안정이 이루어진다. 살아가는 데는 의식주를 비롯한 여러 활동상황에 재화가 요청된다. 넉넉하면 정신적 안정도 함께 갖추어진다. 노인과 소년이 상호 배려를 실천한다. 이러한 상호 배려윤리는 노소합덕 이치를 살리는 윤리가 된다.

노소동행 윤리지향은 상호배려를 중시한다. 따라서 배려윤리는 노소동행을 상호배려 관점에서 바라보고 실천함이다. 중장년층에서는 공정성과 보편성을 정의윤리 중심으로 실천한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사회약자인 노소의 동행에는 상호배려를 실천하고 호혜의 동반자관계를 형성하면서 노소가 서로 마주 바라보며 보완한다. 이에 노소동행의 ‘배려윤리(the ethics of considering)’는 상호 배려의 실천지향을 다각도로 모색한다. 중장년층의 윤리가 정의구현의 실천윤리인데 반해서, 노소합덕의 배려윤리는 노소가 상호호혜를 이루어 서로를 배려하고 천리에 다가서면서 세대 간의 다름과 차이를 수용하는 동반자의 실천윤리라고 할 것이다.

생명기화 차원에서 닦고 또 닦아 생명실상을 깨달음으로 드러내고, 진여실상을 감득한다. 아울러 자기본위의 이기성에서 벗어나 타자본위의 생각으로 상생으로 나아가 원만하게 구족함으로서 그 기운이 보다 밝아진다. 상호대립과 투쟁은 상극에 기인한다. 사적 욕심에 탐닉하여 상도의 공공작용을 도외시하기 쉽다. 탐욕의 상극으로 말미암아 천지가 상도를 잃어 온갖 재앙이 난무하기에, 제재원리를 깨달아 자신을 정화하고 선하며 참되도록 정신무장을 한다.

노소가 동행하면서 ‘남을 잘 되게 하는’ 동반자본위의 의식으로 노소상생이 이루어져 상호염려하며 자신도 잘 되고 동반자도 살리며 서로를 살릴 수가 있다. 새로운 밝힘을 위한 개신(開新)의 새 밝힘 윤리는 미래개벽을 향한 공감실천이다. 생명기화로 살려냄은 거짓 없는 생명실상을 회복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북정상도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 핵을 실제로 폐기하며 통일에 접근한다면 미래를 새롭게 여는 디딤돌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상생은 개인차원을 넘어 사회구조적 차별과 적폐를 바로잡고 사람이 귀하게 존중받는 시대를 구현함으로 인간자율에 근거한 평등사회를 이룰 수 있다. 상생의 방향은 자유에서 평등으로 나아감이다.

상생을 바탕으로 노소동행 가치를 지속적으로 향유하기 위해 노소가 ‘동반자(partner)’로 거듭나는 사회로 바꾸어 나갈 수가 있다. 차별의 적폐를 제거하기 위한 윤리는 ‘보살핌의 윤리(the ethics of caring)’이다. 이를 통해 상부상조할 수 있게 된다. 상생은 자신의 이익보다 동반자 이익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고통보다 동반자 고통을 먼저 헤아리며, 자신의 안위 대신에 동반자를 우선적으로 보살핌의 실천을 다각도로 모색한다. 자신의 욕구가 동반자와 상통함으로 생명기화를 소중히 여기며 보살핌을 일상화한다.

또한 상생은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동반자 우선의 생명기화를 실천한다. 상생으로 노인과 소년, 부자와 빈자 사이에 있었던 폐단과 적폐가 사라져야 비로소 삶의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게 된다. 개신윤리 실천은 개인적 안위나 개인영달에서 벗어나 사회적 공공작용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이제 노소동행이 일상생활에서 가능한 실천변화를 생명기운으로 살려감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노소동행은 중장년층에 종속된 노소우대에서 벗어나 노소동행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상생존재로 대우하겠다는 인식전환이 선결과제이다. 노소합덕이 육체적 노쇠와 유약에 대한 차별수정 차원의 배려형태라고 한다면, 보살핌의 윤리에 근거한 노소의 조화는 노화의 정신 성숙을 내포하는 노숙(老熟)에 근거한다고 할 것이다. 노숙에서는 거친 소를 자연스럽게 놓아두더라도 저절로 갈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이에 노소동행 개신윤리는 생활실천으로 이어지면서 끊임없이 개선할 여지를 남긴다.

불로초는 장엄하게 피어나고 학들은 장수생명이 되어 함께 노닌다. 도의 기운으로 서로가 밝아지는 도지통명은 정신계와 물질계를 비롯하여 천지인삼재가 회통됨이고 인간은 지상신선의 길을 열게 됨이며 민족종교에서 염원하던 선경세상도 살릴 수가 있다. 신선은 무병장수하고 지혜가 충만하며 용력을 발휘하며 활연관통하기에, 인간존엄의 생활실화를 구현할 것이다. 상처받은 내면세계 치유는 심리치료와 달리, 마음에 상처받은 노인은 자신의 ‘내면아동’을 재발견하고 고통을 느끼는 아동은 자신의 ‘내면노인’을 지혜차원에서 발견함으로 인격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아직 치료받지 못한 ‘내면아동’과 ‘내면노인’의 상처로 인해 이어지던 대인관계와 가족관계에서 받던 학대, 폭력, 중독 등의 고통장애에서 벗어나 동반자의 도움으로 생활을 개선하게 된다. 이에 노소동행에 근거한 내면치료는 ‘치유윤리(ethics of healing)’로 나아가 인간존엄을 회복하는 새로운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청정자성을 회복하는 치유활동으로 노소동행 독서토론으로 활성화 시킬 수 있다. 다채로운 독서활동을 노소동행으로 실시함으로 독서에 대한 흥미와 자발성을 촉진시키고 노인과 소년이 밝음으로 소통되는 노소통명의 새 길을 열게 된다. 스토리텔링의 독서토론과 영성자각에 근거한 영성의 깨어남을 수반함으로써 독서는 치유공간이 되어 서로 통하면서 내면세계는 더욱 밝아질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을 지방자치기구와 연계하여 우수실천 사례를 발굴하고, 밝아짐의 기반을 구축하며, 독서교육 역량개발의 내실화를 꾀할 수 있다.

독서능력의 향상이라는 기능중심의 독서에 초점을 두기보다 교양인성과 역량인성을 강화하여 내면치유 방향으로 노소동행 독자층을 형성하고 인성과 진로지도에 활용하면 노소통명의 내실화를 근본적으로 꾀할 수 있다. 노소동행 독서교육을 교육정책으로 전환시킨다면, 미래공창의 영성치유로 나아갈 수 있다. 중장년층의 특성을 반영하는 관점에서 노소동행의 도덕성을 평가절하 되기에 노소동행을 윤리적으로 열등하다고 평가하기가 쉽다. 이에 노소동행의 가능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중장년층의 정의윤리와 구별되는 노소동행 생명실화의 치유가 필요하다. 노소동행에게 가족과 친구가 중요하기에 소망, 필요, 관심 그리고 열망 등을 중심으로 치유를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열어갈 수 있다.

노소동행에서는 상반되거나 대립된 관점에서 벗어나서 공적 상황과 사적 상황을 함께 아우르며 공공차원의 치유를 다양하게 생활차원으로 수렴시킨다. 노소동행 독서활동에 근거한 노명의 생활지혜는 노소통명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에 따른 마음의 결은 서로 다른 차원을 원융으로 회통시킬 것이다. ‘조용히’ 이루어지는 노소합덕의 배려윤리에서, ‘따뜻이’로 전환되는 노소상생의 보살핌 윤리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깨끗이’ 밝아지는 노소통명 치유가 되어 영성차원의 각성도 수반될 수가 있을 것이다.

노소합덕을 조용한 배려윤리라고 한다면. 노소상생은 따뜻한 보살핌윤리가 될 것이며, 노소통명은 깨끗한 치유윤리로서 그 효과를 발휘하기에 노소동행은 삼차원 상관연동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노소동행을 통해 노소 각자는 종속존재가 아니라 고유한 인격존재가 되어 서로 배려하는 방법을 보다 구체적 양태로 변화시킬 수 있다. 노소동행을 통해 서로는 자신의 이기심을 꾸짖고 상대방의 존재를 발견함으로 자신의 내면성을 열어 두고 초월을 향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노소동행에 따른 주체성은 상대방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치유관계를 형성하며 서로를 섬기는 동반자로 인식함으로 상호소통을 통한 밝음으로 나아간다. 배려가 노소상호 간에 자신과 동반자를 소중히 여기는 생각에서 시작하면, 보살핌은 배려 생각을 행동으로 바뀜이고 치유는 동반자를 섬기는 공공활동으로 이행함이다. 동반자를 배려하는 생각이 깊어지면서 저절로 보살피는 덕행이 우러나오며, 자연스럽게 인간존엄 가치를 생활을 통해 살릴 수 있다.

이러한 생활 속의 실천은 생명을 바라보는 눈을 긍정적으로 가짐이며 마음의 결을 치유로 선회시킨다. 이는 곧 배려의 사고력과 상생의 생명력 그리고 치유의 생활력이 상관연동을 이루어 개체생명이 우주생명의 근원적 빛으로 복귀하는 새 길이 될 것이다. 노소동행의 대화는 일상생활을 통해 편안하게 느끼는 자연스런 대화를 이어가면서 서로를 살릴 수가 있다.

그동안 노년개념을 신체노쇠에 초점을 두었기에, 장수축복에서 가능한 영성차원의 성숙함으로서 노숙과 밝음으로서 노명의 실효가치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 노소동행 개신윤리 정립을 통해, 노숙에 따른 노소상생의 따뜻함이 보살핌윤리로 이어지고, 노명에 따른 노소통명의 밝음과 깨끗함이 치유로 전환되면 이를 함께 매개할 수 있다. 이에 노소동행 개신윤리를 토대로 삼아 이루어지는 ‘장수윤리’ 목요강좌를 통해 고령화 사회의 노년층의 삶은 황혼기에서 벗어나 황금기로 전환되고 미래의 공감지평으로 연결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장수윤리 목요강좌를 통해서는 ‘옛 것’과 ‘새 것’을 이것이냐 저것이냐 분리하고 선택하는 변증법적 택일을 하지 않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옛 것’속에 ‘새 것’, ‘새 것’속에 ‘옛 것’을 대화로서 연결하고자 한다. 장수윤리에서는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세대상생이 중요한 위상을 이룬다. 고령화 사회의 장수윤리는 오래 살 수 있는 축복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한다. 이에 장수생명 실천이 어떻게 전통적 홍익인간 구현으로 이어지고, 파괴되는 생태계를 어떻게 함께 살릴 수 있는가를 강구하기에 점차 생태계 살리기를 위한 사회운동으로 전개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아울러 장수시대를 사는 생활지혜로서 장수명상 습관을 함께 형성토록 할 계획이다.

오는 4월 4일, 장수윤리 1차 강좌에서는 ‘장수생명 실천’을 주제로 배려의 장수재세 이화, 보살핌의 장수생명 화육, 치유의 장수삼재 소통을 세부적으로 다룬다. 4월 18일, 장수윤리 2차 강좌에서는 ‘장수홍익 인간’을 주제로 배려의 장수홍익가치, 보살핌의 장수풍류신명, 치유의 장수원만 구족을 세부적으로 다룬다. 5월 2일, 장수윤리 3차 강좌에서는 ’장수생태 실천‘을 주제로 배려의 장수생태 운동, 보살핌의 장수생태 과제, 치유의 장수생태 방향을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5월 16일, 장수윤리 4차 강좌에서는 ‘장수명상습관’을 주제로 장수명상행법, 장수명상습관, 장수명상지속을 구체적으로 다룰 것이다.

아울러 장수시대에 안전인성 전략을 수립하고 장수사회를 복락사회로 변모시키기 위한 방법과 평화의식 모색도 함께 다룰 필요가 있다. 이에 장수시대에 요구되는 시민성 함양의 실천방안도 살리고자 한다. 이에 따라 11월 7일, 장수윤리 5차 강좌에서는 ‘장수안전 인성’ 주제로 배려의 장수생존 교양, 보살핌의 장수안전 훈육, 치유의 장수애정 역량을 다룰 것이다. 11월 21일, 장수윤리 6차 강좌에서는 ‘장수사회 복락’ 주제로 배려의 장수사회 정서, 보살핌의 장수사회 장엄, 치유의 장수사회 행복을 다루게 될 것이다.

12월 5일 장수윤리 7차 강좌에서는 ‘장수상생 평화’ 주제로 배려의 장수상생 의식, 보살핌의 장수상생 문화, 치유의 장수상생 보람을 세부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12월 19일 장수윤리 8차 마감강좌에서는 ‘장수시민성 함양’을 주제로 배려의 장수시민성 과제, 보살핌의 장수시민성 실천, 치유의 장수시민성 방향을 다룰 예정이다. 모쪼록 이 강좌를 통해 황금 돼지해에 장수의 축복이 되는 비밀 열쇠를 함께 열어 장수시대가 더 이상 세상의 짐이 되지 않고, 오히려 삶의 축복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박장미 pjm8929@dynews.co.kr

2023/07/18

'청석학원 공동 설립자인 석정 김영근 선생의 생애와 업적'- 증산도(Jeung San Do) 공식 홈페이지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신상구 국학박사 동양포럼 참가기 - 증산도(Jeung San Do) 공식 홈페이지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신상구 국학박사 동양포럼 참가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신상구


동양일보(회장 : 조철호)는 충북 청주에서 발간되는 충청도의 대표적인 일간지이다. 동양일보는 일간 신문 이외에도 <푸른시대 만들기 동양일보 20년>(2011) 등 수많은 단행본을 발간하고, '만물박사' '부탄 투어' '동양포럼' 등 수많은 행사를 하여 충청지역의 언론 창달과 문화 발전에 많이 기여하고 있다.

동양포럼은 동양일보의 질적 향상을 위해 마련된 학술토론회로 동양3국의 공통사상을 정립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유성종 전 충북교육감에 의하면, 동양포럼은 세계 일간 신문 발간 역사상 처음 시도된 유일한 포럼이라고 한다.

2017년 6월 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된 동양일보 포럼은
 '청석학원 공동 설립자인 석정 김영근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주제로 삼아 충북대 명예교수인 김태창 박사의 사회와 동양일보 취재부 박장미 기자의 진행으로 전개되었다. 

  • 먼저 전 충북교육감인 유성종 명예박사가 "내가 뭘 했다고 그러나? - 석정 김영근 선생의 위대한 침묵"이란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했다.
  •  그 다음 충북대 사범대 윤리교육과 김용환 박사가 "그리운 한국인, 김영근"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한 다음, 
  •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신상구 국학박사가 "수기 상인 독지가인 석정 김영근 선생의 생애와 업적과 사상"이란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끝으로 김태창 박사가 토론 내용을 요약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다.

주제 발표를 한 유성종(劉成鍾) 명예박사는 석정 김영근 선생을 '선비상인 의인(義人)'으로, 김용환 박사는 '한 분의 보살(菩薩) '로, 신상구 박사는 '수기상인(修己商人=고결한 상인, noble merchant) 독지가(篤志家)'로 기렸다.
 그리고 김태창 박사는 1300년대 <직지심체요정(直指心體要節)>를 발간한 흥덕사 백운선사(白雲和尙, 1299~1375)의 무심(無心), 사주당 이씨(師朱堂李氏, 1739∼1821)가 1800년(정조 24)에 아기를 가진 여자들을 위하여 한문으로 글을 짓고, 아들인 유희(柳僖)가 음의(音義)와 언해를 붙여 1801년(순조 1)에 발간한 책인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언급하면서 청주정신을 '개신(改新)의 얼'로 표현하고 석정 김영근 선생을 '무심활명개심(無心活命改新)'으로 기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무심활명개심'이란 무의 경지에서 새로 태어남을 말한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태안승언리상여 소고」,「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1950년대 이전의 대전문학사」등 8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한비문학>․<오늘의문학> 문학평론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동양포럼/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 동양일보

동양포럼/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기자명 박장미
입력 2019.02.24 


(왼쪽부터) 오강남 캐나라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김용환 충북대 교수,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동양포럼운영위원회는 고령화 시대 새로운 노인상과 노년철학 구축을 지향하며 철학 대화를 펼치고 있다. 지난 12월 7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비교종교학 명예교수, 김용환 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가 참석한 가운데 도마복음과 도덕경, 장자가 노년철학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도마복음은 지금 성경에는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 당시 복음서적이 여러 개 있었는데 기독교는 그 중에서 4개만 뽑고 나머지는 폐기처분 시켰습니다. 그 폐기된 복음서들은 대부분 깨우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도마복음입니다. 4세기 이집트 나카마디라는 수도원은 폐기된 복음서적은 항아리에 모아 땅에 묻었습니다. 그러다가 잊어버려서 1945년 어떤 농부가 거름을 채취하다가 땅에서 발견했다고 해요. 도마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그것이 자유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본받아야 잘산다는 것이 기본인데 도마복음은 속에 있는 하나님을 찾아라, 그러면 자유를 준다는 내용입니다. 도마복음 내용 중에서 노인과 아이에 대한 내용을 뽑아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실 도마복음에는 예수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오직 어록 114개만 있습니다. 도마복음 4절에는 “여러 날을 보낸 늙은이도 칠 일밖에 안 된 갓난아기에게 생명이 어디 있는가 물어보기를 주저해서는 안된다. 그리하면 그 사람은 살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 될 것이고, 모두가 결국은 하나가 될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남자아이의 경우 8일째에 할례를 하는데 여기에서 7일은 아직 성별이 갈라지지 않은 때입니다. 이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직 안된 상태 즉 순수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죠. 나이든 사람도 초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갖게 되면 아이처럼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순수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런 것을 깨달으면 어린아이고, 깨닫지 못하면 깨달은 사람에게 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길 잃은 양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에서는 길 잃은 양이 불쌍한 존재ㅈ만 도마복음에서 길 잃은 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훌륭한 양이에요. 인습적인 세상에 머물 수 없는 특출난 존재로 자신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남은 99마리의 양보다 네가 더 소중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통속적인 사고방식에 만족하지 못하고 탈출하는 이야기인데 도마복음은 보통사람처럼 삶을 살지 말고 특출한 사람이 되어라. 내 속에 있는 신적 요소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늙은이가 아이한테 배우라는 것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동양사상의 음양도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것입니다. 노인들이라고 해서 연령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깨치면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마지막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른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의 참모습을 믿지 않고, AD4세기에 로마가 세계 종교학에 많은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예수를 믿고 있기 때문에 노년 사회에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을 극진히 모신 자식에게는 유산을 주지 않고, 모두 교회에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사람을 천사라고 칭송했고, 마지막 남은 집도 교회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님을 모시려니까 너무 돈이 많이 들어서 교회에 가서 기부한 것을 조금 돌려달라고 호소를 했지만 교회는 거부를 했다고 해요. 왜 그분이 그런 결정을 했느냐 생각해보면 죽어서 천국에 가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노인을 위해서, 너무 천국에 집착을 하고 있으니 도마복음을 통해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을 다시 찾고, 그를 통해 인간의 상식수준이 회복되어야 온전한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 교수 “도마복음에는 천당이나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깨우쳐서 자유로움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절에 “추구하는 사람은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면 놀랄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다른 차원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 처음엔 당황, 혼란, 더 궁구해보면 ‘아 그럴수도 있나’하는 놀라움을 갖게 되고 마지막으로 자유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절대적인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요즘 신학자 중에는 마르크스 볼브라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가 지금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 패러다임에 입각한 기독교 즉 인습적인 기독교,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기독교로 나누고 인습적인 기독교는 천당, 지옥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특징 지었습니다. 새로운 기독교는 변화의 기독교 즉 의식의 변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의식의 변화를 가지고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본 사람으로 예수님처럼 새롭게 눈을 뜨자는 것을 추구합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오늘 주제와 관련해 말씀드리면 노인상은 전통적인 것과 변혁적 노인상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점은 믿음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와 깨달음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가 있다는 것. 일본에 쿠우카이(空海)라고 하는 불교 지도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신자가 이것 저것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진리를 요약을 했으니 그것을 믿고 날마다 암송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이초(最澄)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믿음과 깨달음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데 이것을 노인상과 연결짓는다면 전통적인 노인상이라는 것은 ‘노인은 이래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영어로 하면 Transformational 노인상인데 지금 정해져 있는 노인상을 바꾸자는 것입니다. 과거지향적이고, 고정되고, 비관적이고, 모든 면에서 비건설적인 노인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노인은 지혜가 있고, 경험이 풍부하고, 어느 세대보다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대로 바꾸자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다가 미국에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남성 청장년 중심사회라는 것입니다. 여성이나 아이, 노인은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사회였다고 느꼈습니다. 어린아이와 늙은이는 청장년과 무엇이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애를 낳아서 키우는 것을 다 끝내면 가치가 없느냐, 아니에요. 생물학적인 생산성은 없지만 문화적인 생산성은 더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손자를 통해 개체생명과 우주생명과 연결된다고 느꼈습니다. 아침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는데 그 손을 잡을 때마다 제 개체생명을 넘어서는 역동하는 생명성을 느꼈어요. 그래서 도마복음에서 오늘 인용해주시는 말을 보고 진정한 혼과 혼이 통하는 관계가 맺어지면 우리는 어린아이로부터 우주생명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되고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미래를 여는 원동력을 얻을 수 있구나 느꼈습니다.”



▷오 교수 “서양에서는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주의라는 말도 나왔는데 에이지즘이 너무 보편적입니다. 사실 동양에서는 나이가 많을수록 좋았어요. 우리 속담에 늙으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아이의 단순성, 진실성과도 관계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속설로는 아이가 누구에게 의지하듯 노인도 누구에게 의지한다는 것인데 깊이 들어간다면 기존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아이처럼 초이분법적 상태로 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일본에 옹동론(翁童論)이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라는 노인과 아이고 중장년은 불안정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아동과 노인의 힘이 상생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데 그 첫 단계가 바로 깨달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주생명과 연결된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가질 때 어린아이와의 마주침 속에서 노인이 그것을 다음 세대로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405060세대는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와 가족을 먹여 살리는 시기에요. 하는 일에 힘을 전부 쏟기 때문에 현세중심이 됩니다. 하지만 그 일이 다 끝나서 708090세대가 되면 우선 직장에서 나오고, 사회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이 드물게 되니까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여를 해야 합니다. 노년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노인상에서는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일본사회에서도 숨어서 기여 하는 노인들이 있다. 일본 사회가 굉장히 청결한데 사람들이 다니기 이전에 노인들이 눈에 뜨이지 않게 청소를 합니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데 계속 이렇게 한다면 혐노 의식만 커지고 세대 간 관계가 개선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노인을 철저하게 싫어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노년층을 ‘노인충’이라고 부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 해주신 말씀들이 이러한 인식을 바꾸는 하나의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 “제가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1절에 “이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하는 사람은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입니다.”라는 구절입니다. 노인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공포라고 생각합니다. 노인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도마복음의 이 구절은 뜻하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오 교수 “풀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인 것, 심적인 것, 영적인 것, 신비주의적인 해석이 있는데 보통 1~2층에서 끝납니다. 3~4층까지 가면 신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희랍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두가지가 있어요. 비오스와 조에인데 비오스는 생물학적인 생명력, 조에는 의미있는 삶, 깨어진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몸은 죽은 것이에요. 몸은 죽지만 신과 하나가 되었을 때 의미 있는 삶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저의 생각은 조에는 생물학적 생명이에요. 비오스는 도시국가 안에서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생명력이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조에와 똑같이 개체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체생명이면서 동시에 우주생명과 연결되는 것은 영성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호흡이라고도 하는데 우주의 기를 들여 마시고 자기 속에 있었던 오염된 공기를 뿜어내면서 순환을 하는 과정에서 우주생명과 개체생명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비오스와 조에는 생물학적 생명과 사회학적 생명인데 개체생명을 구성하는 요인이고, 이것을 넘어서는 우주생명은 영성, 영혼이라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하는 것은 생물학적이고 정치사회학적인 생명은 죽지만 우주생명과 연결이 됐을 때는 죽지 않는다는 그런 말씀인 것 같습니다.”



▷오 교수 “도덕경의 기본 가르침은 도. 도를 우주의 기본 원리, 실제로 여기고 그것에 따라 살면 덕을 본다고 합니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에요. 도를 말로 제약하면 그것은 더이상 도가 아닙니다. 그것을 가장 강조하고 있습니다. 56장에 보면 지자불언 언자불지(知者不言 言者不知)라는 말이 있는데 아는 사람은 말이 없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신에 대해서, 도에 대해서 안다고 떠드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교, 도마복음 어디나 똑같습니다. 도덕경은 ‘무위’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행동, 억지로 하는 행동, 이기적인 행동을 다 배제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무위는 노년이 되어서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년이 되면 무위자연을 할 수 있는 요건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공로를 인정하지도 않고 다투지도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 일방적인 사고, 고정관념, 선입견을 하루하루 없애는 것이 도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노년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김 주간 “저도 노년철학을 하는데 있어서 동양의 전해 내려온 문헌을 하나 찾아서 거기서 여러 가지 발상의 근거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도덕경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저는 ‘무’를 명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하다’라는 동사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장년에는 유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큰데 노년이 되어서는 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무나 공을 이해하는 단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소년기에서 중장년기에 열심히 배운 뒤 노년기에 가서 배운 것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며 벗어나고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기를 이렇게 받아들어야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중장년기처럼 앎을 추구하면 안되고 거기서 벗어나서 영혼의 탈식민지화해야 합니다. 노년은 노년답게 자연스러워야하고 젊음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연령차별이 굉장히 심각한 사회입니다. 생각을 바꿔서 우선 연령차별을 바꾸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거기에 오늘 요약을 해주신 것이 노년기 철학적 마음가짐에 기본이 된다고 생각이 되어서 공감을 합니다.”



▷오 교수 “장자에 붕새 이야기가 있습니다. 북해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나중에 새가 되면 붕(鵬)이라고 합니다. 크기도 무척 커서 날개를 피면 하늘 구름과도 같다고 합니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이면 남해(南海)로 날아간다고 해요. 9만리 정도는 올라가야 바람이 날개 밑에 그만큼 쌓이게 되어, 남쪽으로 날아가는데 매미와 작은 새는 그것을 보고 붕새를 비웃습니다. 자기들은 있는 힘을 다해 팔짝 뛰어 날아서야 겨우 나무 위에 올라가는데 뭐하러 9만리나 날아서 남쪽으로 가냐는 겁니다. 저는 붕처럼 되지는 못해도 붕을 비웃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우물 안 개구리’도 장자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제약을 벗기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세계는 더 깊은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변화되고, 그만큼 자연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한쪽 면만 보는 사람은 융통성을 가질 수 없어요. 양쪽을 다 봐야 합니다. 양쪽을 다 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장자에서 말하는 의식의 변화입니다. 장자 2편에는 남곽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곽자가 책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빙그레 미소지으니까 옆에 있던 시종이 “오늘은 예전 모습과 달라서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남곽자는 자신이 오상아(吾喪我)를 했다고 대답했어요. 오상아는 내가 나를 여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자기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서 특수 인식을 활성화 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특수인식을 활성화시킨 대표적인 사람으로 포정이 나옵니다. 포정이 소를 춤추듯이 잡으니까 왕이 기술이 좋다고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포정은 이것은 기술이 아니고 도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다가 기술 경지를 넘어서면 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 오상아를 해서 인식이 변화하는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인데 유교에서도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의식의 변화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의식의 변화를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는 좌망(坐忘)이 있습니다. 안회는 공자에게 자신이 무엇인가를 이룬 것 같다고 보고했어요. 공자가 자기는 인이니 의니, 예니, 악을 다 잊었다고 했고 결국에는 좌망을 했다고 했습니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서 큰 트임(大通)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또 심재(心齋)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마음을 굶긴다는 것입니다. 공자와 안회가 등장하는데 위나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니 안회가 가서 돕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안된다고 했어요. 마음을 굶어야 한다고 했지요. 지금 마음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장자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눈을 뜨는 것을 강조합니다. 의식이 변화한다는 것은 모든 수행의 기본입니다. 장자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자는 부인이 죽었는데 북을 치면서 춤을 췄다고 합니다. 자기도 감정적으로는 슬펐지만 죽음은 사계절의 변화와 같아 철이 바뀐다고 울어봐야 공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물의 실재를 직관함으로써 죽음과 삶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물의 두면이라는 것을 알고 슬픔을 극복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죽음과 삶이 문제되지 않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오른 것이죠. 죽음을 슬퍼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 노인상과 연관 지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노자, 장자를 그대로 따라할 수 없지만 이정표로 삼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노년이 됐을 때 이러한 경지에 오르면 살기 편해지지 않을까요.”



▷김 교수 “장자가 노년철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러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초연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절대화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어떤 특정 교리에 얽매여서 굴복되고 왜곡되어선 안된다는 모습을 자세하게 제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세가지 키워드 오상아, 좌망, 심재. 인상 깊었고 오늘 노인철학에 주는 메시지는 깨달음의 밝은 빛을 통해 노인의 어두움을 벗어버리면 노년이 황혼기라는 착오에서 벗어나 황금기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빛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 주간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그 이후를 생활하는 것이 오상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무장화된 자기 자신을 말하는데 70세 정도 넘으면 그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상’은 장사를 지낸다는 것인데 무장된 자기를 장사지내는 과정이 바로 노년기의 인생입니다. 오상아를 하지 못하는 노인은 젊은 세대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는 다섯 개의 구멍을 말하는데 첫째가 귀. 귀로 들을 소리를 듣고, 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는 듣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눈인데 안봐도 되는 것은 보지 말고 봐야 될 것만 보라는 의미. 세 번째는 입이고 네 번째는 코입니다. 우주 생명을 순환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항문입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대장, 소장, 직장, 항문을 연구한 의사가 있는데 그 사람은 오래살려면 장이 건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목구비까지는 신경을 쓰는데 항문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먹어서 속에 넣는 것만 생각하지 내놓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순환을 코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항문도 똑같은 비중으로 순환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다섯가지의 구멍이 제대로 기능을 하는 것을 ‘오’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지식이나 재산이나 명예로 무장된 자기를 장사지내고 온전한 자신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오상아’라고 합니다. 제가 노년기의 삶은 바로 오상아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상아는 과정일 뿐입니다. 오상아를 하면 자기를 비우고 타자를 제대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타자와 진정한 만남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A, 죽어서 가는 세상을 B라고 할 때 A에서 죽으면 B에서 어린아이로 태어나 살게되고, 또 거기서 죽으면 다시 A로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탈바꿈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선생님 말씀을 듣고 굉장히 좋은 점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앞으로도 오 교수님께서 노자와 장자를 통해 어떻게 노년철학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 소스를 발견, 연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리 박장미 기자>



동양일보TV




박장미 pjm8929@dynews.co.kr

동양포럼 1주년...인문학적 사고 통해 삶을 성찰하다 - 동양일보 2017

동양포럼 1주년...인문학적 사고 통해 삶을 성찰하다 < 사회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1주년...인문학적 사고 통해 삶을 성찰하다
기자명 조아라 기자
입력 2017.03.27

동양일보 창사 25주년 기념으로 지난해 10월 1~3일에 열린 ‘동양포럼-한·중·일 회의 Ⅱ’ 토론 모습. <사진·최지현>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 동양일보가 창사 25주년을 맞아 ‘철학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해 온 동양포럼이 28일 1주년을 맞았다.

동양일보는 지난해 3월부터 현대인들이 인문학적 사고를 통해 삶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하는 ‘철학하는 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 일환으로 충북도교육감, 주성대(현 충북보건과학대) 학장 등을 역임해 온 충북 교육의 거목 유성종 전 꽃동네대 총장과 ‘교토포럼’을 주재하며 전 세계에서 철학 담론을 펼쳐온 공공철학의 석학 김태창 박사(한·중·일이 함께 공공하는 모임 대표)가 뜻을 함께 한 동양포럼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유성종 전 총장을 운영위원장으로, 김태창 박사를 주간으로 발족한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지난해 3월 28일 이들의 대담을 동양일보 지면에 게재하며 동양포럼의 시작을 알렸다.

동양포럼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천착하고 사상과 문화의 탐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공통 가치를 찾아보고자 ‘동아시아의 공통 가치를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좌담, 대담, 토론, 특강, 콜로퀴엄, 기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돼 왔으며 그 결과물은 매주 둘째·넷째 주 월요일 마다 동양일보 지면에 특집으로 연재됐다.

지난 1년 간 특강 7회, 대담 3회, 콜로키움 2회, 학술회의 3회, 좌담 5회, 인터뷰 4회 등이 진행됐으며 이 결과물과 한·중·일 석학들의 기고문이 동양일보 지면에 38회에 걸쳐 게재됐다.

지난해에는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두 차례의 매머드급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며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지난해 5월 3일에는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을 주제로 한국과 일본의 석학 16명이 참석한 ‘한·일 회의’가, 10월 1~3일에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연다-동아시아 활명연대(活命連帶) 제안’을 주제로 한국, 일본, 중국의 전문가 34명이 참석한 ‘한·중·일 회의’가 열렸다. ‘한·중·일 회의’는 3일 간 10명이 10개의 발제를 한 뒤 각각의 발제에 대한 토론과 종합토론, 전체토론, 발전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특히 이 회의는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세미나나 토론회와 달리 참석자 전원이 둘러 앉아 전 일정을 함께 하며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돼 눈길을 모았다. 김태창 주간이 운영했던 교토포럼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었다.

올해는 오는 8월 14,15,16일 3일 동안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주제로 한국의 조명희,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 중국의 루쉰을 비교 분석하는 ‘한·중·일 문학-철학대화모임’이 개최될 예정이다.

2023/07/17

한·일 ‘생명철학의 대화’ 물꼬 트다 < 동아시아의공통가치를찾아서 - 동양일보 2016

한·일 ‘생명철학의 대화’ 물꼬 트다 < 동아시아의공통가치를찾아서 < 지난 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한·일 ‘생명철학의 대화’ 물꼬 트다
기자명 조아라 기자
입력 2016.05.03 

청주서 ‘동양적 생명관 재조명’ 첫 자유토론
▲ 동양포럼 첫 번째 ‘한·일 회의’가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을 주제로 3일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사진·최지현>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권일찬 교수 “주역은 살아있는 생명의 영원한 진리”

야마모토 발행인 “동양생명관은 사후보다 현세주의적”

김연숙 교수 “생명의 근원적 관계성은 ‘온양’에 바탕”


동아시아의 중심지 청주에서 한국과 일본의 첫 번째 철학 대화가 시작됐다.

‘철학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동양포럼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유성종)는 3일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첫 번째 ‘한·일 회의’를 개최했다.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을 주제로 한 이날 회의는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이뤄지는 세미나나 토론회와 달리 참석자 전원이 둘러 앉아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자유롭게 토론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한·중·일이 함께 공공하는 철학대화모임 대표)이 운영했던 교토포럼의 형식을 차용한 것으로, 김 주간은 25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전 세계 57개국에서 300여회가 넘는 회의를 개최해 온 바 있다.

특히 이날 회의를 위해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츠치다 타까시 전 정화대 교수, 변영호 도유문과대 교수 등 3명의 일본 지식인들이 청주를 찾았다.

이날 회의를 열며 김 주간은 “일본과 중국, 한국이 과거의 다난한 역사와 불확실한 미래에도 불구하고 뜻을 모아 모두 행복해지는 공공의 세계를 열어갔으면 좋겠다. 우리가 살아있는 의미를 정리하고 어떻게 살아야 삶다운 삶이 되는지 생명에 관한 문제부터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주제를 정했다”며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주제 발표가 있었다. 먼저 주역연구가인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가 ‘동양적 생명관-주역학의 입장’을 주제로 주역에서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설명했다.

권 교수는 “주역은 우주론적으로 변화하는 천인합일적 유기체론적 생태론적 자연의 이치(천도)에 따라서 천지의 뜻과 이상인 생을 펼치기 위해 사대 성인이 완성한 궁극적 진리인 종교, 철학, 과학기술이 통합된 살아 있는 생명의 궁극적이면서 영원한 철학이고 과학기술”이라고 밝혔다.

야마모토 교시 발행인은 ‘동양적 생명관-일본 불교의 입장’을 주제로 교리 중심의 한국 불교와 달리 실천적이며 생활적인 일본 불교에서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발표했다.

그는 “서양에 비해 동양의 생명관은 사후보다 현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현세주의적 생명관이 농후하다”며 “동아시아에서는 초월적 절대자인 신불(神佛)과 범부의 ‘단절’ 보다도 중생의 능동적인 ‘신심(信心)’에 의한 신불로의 귀명, 본존과의 일체화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밝혔다.

김연숙 교수는 태아를 잉태한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한 김선우 작가의 작품 ‘탯줄’ 등을 예로 들어 ‘한국적 생명관’을 이야기했다. 김 교수는 “생명의 근원적 관계성은 살려는 것과 살리려는 것의 ‘조응’이라고 본다. 생명체가 편안하게 자라도록 따뜻하게 감싸며(온양·穩養) 살려는 것을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 주는 어머니의 몸과 같은 것”이라며 “‘살려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고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보다 근원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각각의 발제 후 자유토론이 이어졌으며 마지막으로 세 사람의 발표 내용에 대한 종합 토론이 이뤄졌다.

토론에는 주최 측인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과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전 꽃동네대 총장)을 비롯, 장준호 전 청주대 부총장, 김용환 충북대 교수, 홍민기 한국교통대 교수, 이성도 한국교원대 교수, 박영대 화가, 조성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네모토 마사쓰구 충북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이종각 전 충북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이날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은 마무리 인사를 통해 “이 동양포럼이 국민들이 삶의 가치를 생각하며 살게 하는 기본적 토양이 될 수 있을 것이란 큰 기대를 한다”며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들, 특히 멀리 일본에서 오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동양포럼 한·일회의’ 내용은 5월 23일자에 게재 됩니다.

첫번째 한·일 회의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 < 동아시아의공통가치를찾아서 - 동양일보 2016

첫번째 한·일 회의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 < 동아시아의공통가치를찾아서 < 지난 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첫번째 한·일 회의 <6>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6.05.22 

한철학적 생명관의 핵심은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 지난 3일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동양포럼 운영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첫 번째 ‘한·일 회의’에서 참가자들이 열띤 논쟁을 펼치고 있다.



● 때 : 5월 3일
● 곳 : 충북예총 따비홀

● 발제자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김연숙 충북대 교수
●토론자
△츠치다 타까시 전 교토대 교수
△변영호 도유문과대 교수
△장준호 전 청주대 부총장
△김용환 충북대 교수
△홍민기 한국교통대 교수
△이성도 한국교원대 교수
△이종각 전 충북대 교수
△박영대 화가
△네모토 마사쓰구 충북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조성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지영 원광대 요가연구소 연구원

●주최자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 기록 : 조아라·박장미 취재부 기자
● 사진 : 최지현 사진부 기자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



주역 관점에서 본 동양적 생명관
생명은 ‘기(氣)’, 양기와 음기의 묘합
생명은 ‘역(易)’, 늘 변하며 변하지 않는 것


■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불교 관점에서 본 동양적 생명관
생명은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인 ‘불성’
산천초목은 모두 불성을 지녀


■ 김연숙 충북대 교수 
작품 ‘탯줄’ 통해 본 한국적 생명관
생명은 치열한 생존충동이며 생존의지
살려는 것과 살리려는 것의 ‘조응’



동양포럼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유성종)는 지난 3일 충북예총회관 따비홀에서 첫 번째 ‘한·일 회의’를 개최했다. ‘동아시아의 공통가치를 찾아서’라는 동양포럼의 가치와 지향에 따라 그 첫 주제로 동양적 생명관의 특징을 한·중·일 비교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회의에는 야마모토 교시 미래공창신문 발행인, 츠치다 타까시 전 교토대 교수, 변영호 도유문과대 교수 등 3명의 일본 지식인과 국내 교수, 학자, 예술인들이 참석해 열띤 논쟁을 펼쳤다.
먼저 주역연구가인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가 ‘동양적 생명관-주역학의 입장’을 주제로 주역에서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설명했다. 
이어 야마모토 발행인은 ‘동양적 생명관-일본 불교의 입장’을 주제로 교리 중심의 한국 불교와 달리 실천적이며 생활적인 일본 불교에서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발표했다. 

김연숙 충북대 교수는 태아를 잉태한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한 김선우 작가의 작품 ‘탯줄’ 등을 예로 들어 ‘한국적 생명관’을 이야기했다. 

한국과 일본 간 철학 대화의 물꼬를 튼 이날 회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주>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먼저 오늘의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하필이면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 26년에 걸쳐 일본을 거점으로 한·중·일의 공통 가치를 찾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공통인식이 형성되는가 싶으면 도중에서 그것이 부서지고 또 어느 정도 정리되는가 싶으면 파괴되면서 많은 좌절과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공들여온 끝에 중국과 서양, 일본과 서양 사이에는 괄목할 만한 공통인식이 공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인 제가 항상 가슴 아프게 느꼈던 것은 한국 안에서 한철학과 한사상에 관한 공통인식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밖에서 내세울만한 것이 별로 없고 외국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구태여 불러서 들을만한 내용이 없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 사람을 따로 불러서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날로 강화돼 가고 있었습니다. 없으면 만들기라도 해서 당당하게 대화를 나누고, 공통의 세계를 열어간다는 염원이나 의지 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정리가 안 되고 공부했다는 사람도 원숭이 흉내 내기에 바빴다는 것이고 그저 서양 것, 중국 것을 번역하고 설명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스스로가 연구하고 이해한 범위 내에서 한사상과 한철학을 일본에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는지 모릅니다. 한·중·일의 공통 인식을 정리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열기 위해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차원을 열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한·중·일이 함께 생각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삶다운 삶이 되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생명에 관한 문제부터 정리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문제는 겉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저는 유성종 선생님과 함께 동양포럼을 일으키고 ‘철학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키치를 들고 출발했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등의 생각과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문헌들을 읽고 해석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문제를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의 가슴으로 느끼고 스스로의 팔다리로 행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결코 전문지식인들이 벌이는 고답적인 공리공론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에 조금 더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보태서 너와 나와 그들의 공감, 공명, 공진의 영역을 펼쳐가자는 것입니다. 공리공론이 아니라 실심, 실행, 실천입니다. 여기에 최우선되는 것이 생명이라는 화두입니다. 우리들의 생명관을 잘 들여다 보면 알게 모르게 서양적 생명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입니다. 요즘 방송 매체나 신문, 잡지 등을 보면 생명이란 유전자라는 생물과학적인 생명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과학적인 생명관인데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가서 몸과 마음과 얼이 감동하는,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눈이 떠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동양적 생명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세 분의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먼저 주역 공부에 모든 것을 걸어오신 권일찬 교수께 청탁해 중국 고전의 으뜸으로 치는 주역에서 생명을 어떻게 파악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두 번째는 일본 불교에서는 생명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에 대해서 야마모토 발행인께 들어 보고자 합니다. 야마모토 발행인은 미래공창신문사를 창설하기 이전에 불교 전문지의 불교전문기자였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많은 취재를 했고 많은 사람을 만나 고민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단불교 또는 교리불교가 아닌 생활불교 또는 실천불교에 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김연숙 교수는 자신의 따님인 김선우씨가 그린 그림을 통해 새로운 생명관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저는 스물한 살 밖에 안 된 그녀의 그림을 보고 그 제목으로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는 천부경의 한 구절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철학적 생명관의 진수가 거기에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분이 순차적으로 말씀하시고 각각에 대한 토론을 한 뒤 자유토론을 하겠습니다. 이번의 첫 번째 국제 포럼을 통해 ‘동아시아의 공통가치를 찾아서’라는 본 포럼의 기본 지향을 되새겨볼 때 생명이야말로 한·중·일이 함께, 더불어, 진솔하게 머리와 가슴을 맞대고 공구공론(共究共論)해야 될 긴급의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주역의 관점에서’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주역연구가)


동양에는 수천 년의 역사와 문화가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문화와 역사의 배경이 되는 학문이 있습니다. 그러한 학문 중에서 천부경과 주역이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학문입니다. 따라서 천부경과 주역을 모르고는 동양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학문을 근본적이고 주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천부경과 주역의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핵심 개념은 태극입니다. 태극은 불경의 부처, 성경의 하나님, 도교의 도 그리고 힌두교의 브라흐만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태극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기(일기)와 음양오행론(도와 리에 해당됨)입니다. 동양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학문은 다른 말로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태극의 문화이고 태극의 역사이며 태극의 학문입니다.
태극과 태극에서 비롯된 기와 음양오행론의 동양학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면 상수역으로 동양오술인 명리학, 점, 의학, 상학, 산학, 천문기상, 오운 욕기 그리고 율려 등이 있고, 의리역으로는 유가, 도가, 묵가, 주자학(성리학) 그리고 제자백가가 있습니다.
태극의 개념과 이론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면 첫째, 태극의 본질적 개념으로써 무극일기(내향적 신비체험)가 있고 둘째, 실존적으로는 기의 작용과 변화 원리를 나타낸 음양 오행론(외향적 신비체험)이 있습니다.
기와 기의 작용과 변화원리를 나타낸 주역의 원리(태극의 원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천인합일사상으로 천지인 셋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과 만물 만사는 태극 일기에서 모두 탄생했으므로 기 일원론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천지인이 기로 형성되어 있으며 기의 매체로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정신 물질 일원론적 유기체론적 생태론적(시스템 이론) 세계관을 나타낸 살아 있는 생명철학입니다.
둘째, ‘일음일양지위도’는 음양 간에 상호 반복운동을 하는 것이지 어느 하나가 영원히 지배 독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동적 균형’인 도를 향해서 음양 간의 변화작용을 나타낸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주는 그리고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은 영원히 존속될 수 있는 생명의 도입니다.(종즉유시)
셋째. ‘생생지위 역’, ‘천지지 대덕 왈 생’은 음양이 서로 교감함으로써 만물이 변화 생성한다는 의미입니다. 천지의 큰 덕을 일컬어 낳는 것, 즉 생이라 합니다. 역경은 인생을 낙관적으로 봅니다. 역에서는 죽음보다 삶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생생을 역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주역의 생은 우리 민족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유교의 인, 불교의 자비,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개념입니다.
넷째,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는 궁극에 이르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도는 수없이 움직이며 머무르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사물은 변해야 항구할 수 있고 항구한 것은 변화하기 때문에 항구합니다. 주역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다섯째, 중정의 원리는 인간의 행위가 시와 중에 부합해야 합니다. 일의 성공을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와 환경에서 실행해야 합니다. 사람은 적절한 때에 행동하고 적절한 시기에 멈춰야 합니다. 시와 중을 터득하면 사람들은 진취적으로 변하며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도 갖게 됩니다.
결국 주역은 우주론적으로 변화하는 천인합일적 유기체론적 생태론적 자연의 이치(천도)에 따라서 천지의 뜻과 이상인 생(生)을 펼치기 위해 사대 성인이 완성한 궁극적 진리인 종교, 철학, 과학기술이 통합된 살아 있는 생명의 궁극적 영원한 철학이고 과학기술입니다. 또한 이에 근거하여 인간의 삶을 이해 설명하면서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주고 ‘수시변역 이종도야’라는 원리에 따라서 인간이 삶의 문제를 지혜롭게 대처(피흉추길)하고 해결해주는 학문입니다.
특히 주역의 철학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내용 있는 현대물리학 차원의 과학기술(역학 역술)이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다른 철학 종교경전과 다를 뿐 아니라 뉴턴 데카르트적인 이원론적 기계론적 고전물리학적 과학기술이 지나치게 발달하여 나타난 현대사회 위기와 문제를 보완 극복하고 21세기 새로운 문명 창조, 즉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조화를 위해 가장 의미 있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시대적으로 더욱 차별화된 의미와 가치입니다.
태극에서 비롯된 주역은 인류와 지구를 살릴 수 있는 동서양의 유일한 진리로서의 학문입니다.
동양학적 생명관은 태극과 태극에서 비롯된 역학 역술과 홍익인간 이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일본 불교의 관점에서
야마모토 교시(山本恭司) 미래공창(未來共創)신문사
발행인


불교적 생명관의 핵심은 생명은 불성(佛性)이요 불성은 다름 아닌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중생은 각각 개체적 생명체인데 하나하나의 개체생명의 가장 깊숙한 곳에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 내재(內在)하고 있다는 것이 ‘산천초목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山川草木悉皆有佛性)’라는 불교의 생명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는 아주 극진히 귀하게 여겨야 하고 절대로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비심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대의 공포는 ‘죽음’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불안을 완화시키기 위해 사후의 천국이라는 지복세계(至福世界)를 추구하고, 성직자에게 재물을 바침으로써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손에 넣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죽었고”(니체), 성현들의 계략은 이미 간파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란 ‘죽음’을 완성하는 사람이라면서(‘파이톤’), 태연하게 독배를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사랑의 사람(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서양 종교는 ‘죽음’(십자가·종말)이나 사후세계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향성을 니체는 생명력의 쇠퇴라고 지탄했습니다.
서양에 대해서 동양의 생명관은 사후보다도 현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卽身成佛)는 생각이 강합니다. 불교, 유교, 주역, 노장, 한사상, 동학, 일본 신도 등등 하나같이 현세주의적 생명관이 농후합니다. 공자의 “아직 삶(生)을 모르는데 죽음(死)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정토교에서는 서방의 십만억토(十萬億土)를 기쁜 마음으로 원하는데 반해, 중국불교의 주류를 이룬 천태 지의(智?)는 이것을 ‘방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일본에서 정토신앙을 널리 알린 신란(親鸞)도 정토에 갔다가 곧장 사바(娑婆=예토穢土)로 돌아와서 중생을 구한다고 하면서(?超), 사바의 정토화 쪽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초월적 절대자인 신불(神佛)과 범부의 ‘단절’보다도 중생의 능동적인 신심(信心)‘에 의한 신불(神佛)로의 귀명(歸命=나무南無), 즉 본존(本尊)과의 일체화(타자가 자기에 드러난다)를 지향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여기에는 동서의 ’인간관‘의 차이도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피안(천국)보다도 차안(사바)을 중시하는 종교가 중에 일본의 니치렌(日蓮)이 있습니다. 니치렌은 구마라즙이 번역한 ‘법화경’을 최고의 교전(敎典)으로 삼고, “남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창제행(唱題行)으로 자기 내면 깊은 곳(內奧)의 제 9식을 환기시킴으로써 범주즉극(凡夫卽極·범부에게 가장 종귀한 생명이 용솟음쳐 드러남(現)}의 현증(現證)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니치렌의 이러한 생명관은 서학(천주교)에 대해서 인간생명의 평등과 존엄(인내천)을 주창하다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와 그의 제자 최시형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니치렌의 입정안국(入正安國)이나 동학의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실천철학의 근저에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있고, 거기에는 종교적 도그마를 뛰어 넘은, 지극히 소박한 인간적 직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니치렌은 내 마음(己心)에는 십계(十界)의 생명이 구비되어 있고(일념삼천·一念三千), 나의 생명상태는 우주에 넘쳐흐르는(?漫) 십계의 생명과 감응하여 순식간에 변화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보살에 이르는 구계(九界)의 생명은 윤회하지만, ‘불계(佛界)’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니치렌은 어느 미망인(신도)에게 “당신의 죽은 남편은 살아있을 때에는 생불이고 지금은 사불이다. 생사 모두 부처이니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는 법문은 이것을 말한다”라며, 사후에서도 불계에서 즐겁게 노니는 망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生死卽涅槃). 니치렌은 이것을 ‘활(活)의 법문’이라고도 부릅니다.
니치렌은 또한 하루의 목숨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전 우주)의 재물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생명이 끝나는 시점, 즉 임종의 생명상태(행복과 불행의 정도)는 그대로 우주에 용해되고, 다음 생명으로 인연이 맺어질 때까지는 줄곧 같은 생명상태라고 하는 ‘임종정념관(臨終正念觀)’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동학적 생명관의 특징인, 사바세계에서 실제로 사는 하루하루를 최대한 후회 없이 올바르게 살자고 하는, 둘도 없는 현세를 중시한다는 생명관이 나타나 있습니다.

 
● 살려는 것의 치열함을 그리다
김연숙 충북대 교수


생명을 가진 것들의 본성은 ‘살려는 것’입니다. ‘살려는 것’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드는 생각은 치열함입니다. 김선우의 그림 ‘탯줄’에서도 치열함이 드러납니다. 곧 터질듯이 불러진 배는 물론이거니와 엉덩이 사이사이의 터져 나온 핏줄들은 그야말로 살려는 것들의 아우성을 보여줍니다. 생명체를 품고 있는 그녀의 몸체는 그야말로 볼 만합니다. 천지 사이에 거침없이 드러낸 그녀의 나신은 의연하다 못해 장엄합니다. 그런데 엄청난 몸체의 수난을 겪는 이의 얼굴 표정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한없이 내어주고 있지만 아까워하지 않는, 염려하는 듯하지만 담연합니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몸과 얼굴이 이렇게 대조적일 수 있을까요? 치열함의 주체는 그 몸 안에서 잉태되고 있는 생명체입니다. 그 얼굴은 바로 ‘살려는 것’을 품고 있는 ‘살리려는 이’의 표정인 것입니다. 아직 형체를 이루지 못한 것(미형·未形)을 사랑하고, 형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待) 보호하는 지극한 정성(첩응·貼膺)을 담고 있는 이의 얼굴인 것입니다.
요즘은 생명체들 사이의 다툼과 경쟁을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적 관계성은 살려는 것과 살리려는 것의 조응이라고 봅니다. 자신의 포태 속에 있는 생명체가 편안하게 자라도록 따뜻하게 감싸며(온양·穩養) 살려는 것을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 주는 어머니의 몸과 같은 것, ‘살려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고 온전하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보다 근원적인 것입니다.
이런 근원적 관계는 먼 곳의 타인과의 관계나 천지사이에 존재하는 동물, 식물에게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김선우의 그림 ‘자신이 낳지도 않은’에서 보듯이, 마더 테레사는 한 어린애를 애처롭게 품에 안고 있습니다. 어떤 연고나 혈통, 인종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단지 불쌍한 것을 보면 즉시 일어나는 자애로운 마음(긍발·矜發)이 그녀의 몸짓과 얼굴 표정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약해져가는 아이를 향한 연민과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눈은 불의를 고발하는 눈빛이며, 어린 생명체들을 죽어가게 만든 전 인류를 향한 질책, 선의의 의분으로 강개(慷慨)한 눈빛입니다. 불쌍한 것을 보면 즉시 일어나는 자애심인 긍발이나 동식물이라도 무고한 생명들을 해치는 것에 대해 강개하는 것이 우리네의 고유한 직관적 정서입니다. 살려는 것을 살리려는 근원적 관계성은 만물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즉 호물(護物)로 확대됩니다. 오직 사람만 위하는 것을 고집하면 사람도 만물도 살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습니다. 인간과 천지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지만, ‘천부경’에는 “인간 안에서 천지가 하나이다(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연을 정복한다’, ‘자연의 일부분이다’, ‘자연을 모범으로 삼는다(道法自然)’는 다양한 관점들이 있지만, ‘인중천지일’이란 말은 그 의미가 현묘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대단하다할지라도 그 사람 안에서 천지가 하나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더 작은 것 안에 더 큰 것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20여년의 삶의 경험과 연상을 알기 쉬운 직관으로 표현한다”는 작가 김선우의 말처럼, ‘탯줄’을 보노라면 ‘인중천지일’의 의미를 직관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천지 사이에 있습니다. 살려는 것을 살리려는 저 어머니를 다시 보십시오. 자기 안에서 자라고 있는 작은 생명체를 키워내고자 하는 더 큰 생명체인 어머니의 몸체를 주도하는 것은 그녀 안에서 잉태되고 있는 작은 생명체입니다. 땅에 기대고 있지만 머리 부분을 하늘을 향해 담담히 들고 있는 그녀는 천지자연의 온생명에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녀의 몸체가 잉태된 태아의 포태이듯이, 뭇생명체의 포태인 천지자연은 그녀를 감싸고 있습니다. 영겁처럼 깊고 단단한 대지는 새로운 생명을 정성스럽게 기다리는 그녀를 지지하고 있으며, 이미 스며든 새벽의 신성한 기운은 그녀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새날의 희망찬 밝은 빛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자유토론>
▷김태창 주간 “발제하신 분들의 말씀을 잘 들어보았습니다. 먼저 권일찬 교수의 말씀은 ‘생명은 ‘기(氣)’다. 양기와 음기가 서로 묘합하는 것이 생명의 핵심이다’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역(易)이다’, ‘늘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두 개의 명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야마모토 선생의 말씀은 ‘생명은 불성이며 불성이란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여기서 생명과 생명력과는 다릅니다. 생명은 생명 현상이고 생명력은 그 생명을 생명으로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을 얘기합니다. 

김연숙 교수는 ‘생명은 치열한 생존충동 또는 생존의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철학적 생명관의 핵심에서는 하늘기운(天氣)과 땅기운(地氣)이 사람기운(人氣)의 함께 더불어 고르게 아우르는 작용을 통해서 비로소 이루어지며 그것은 삶과 죽음이 서로 어우러지는 데서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명의 참모습이 예술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김선우 작가의 그림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송계 박영대 화백의 ‘생명-율’, ‘율-생명’이라는 그림에는 주역적(음양오합적) 생명의 실상이 훌륭하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한철학과 중국 주역 철학의 생명관의 핵심이 두 분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제시되었다는 것은 오늘의 모임이 갖는 또 하나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학과 예술은 함께 가야 한다는 것도 동양인문학의 특성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자유롭게 여러분들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성도 한국교원대 교수 “우선 야마모토 교시 선생님 말씀 듣고 의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실천적으로 생명이 생명다운 생명이 되게 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실천은 무엇입니까?”

▷장준호 전 청주대 부총장 “야마모토 선생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불교적 생명관의 근본은 근원적 생명력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것이 다름 아닌 불성이라고 하셨는데 불교에서 얘기하는 인간은 객체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아(無我)가 아닙니까? 불성도 마찬가지로 객체적인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닌지요?”

▷야마모토 발행인 “이성도 교수님의 물음에 대해서는 자비행(慈悲行)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삼라만상이 모두 한결같이 불성,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하나하나의 존재물이 지닌 불성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개별별의 개체 생명을 우주생명의 구현체로 보고 소중하게 여기는 행위양식입니다. 그것은 개체 생명만을 귀하게 여기고 거기에만 집착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생명을 생명답게 할 수 있는 실천이란 개체생명과 우주생명이 서로 아름답게 조화·상생하도록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장준호 교수님의 물으심에 대해서는 ‘무아’라는 것이 생명이라는 실체를 완전히 부정한다기 보다는 개체 생명이 가진 모든 지위, 재산, 명예 같은 실체적 부속물을 제로로 해야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 온전히 활동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체험적 진실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야마모토 선생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 불교와 한국 불교의 차이점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불교에서는 석가모니에서 불교가 시작됐다고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광대한 생명력이 석가모니라는 한 인간에게 잠시 출현했을 뿐이지 그가 출발은 아니라고 합니다. 출발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일본은 무사도가 사회를 지배했어요. 많은 사람이 아사로 죽어가는 마당에 염불만 외워서 내세에 간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중 불교로 가는 길입니다. 권일찬 교수가 말씀하신 중국적, 주역적 생명관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생명=태극이라는 생각에는 개체생명에 대한 존중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 제기입니다. 개체 생명을 무시하고 우주생명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자칫하면 무서운 전체주의 사상에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일본의 불교는 한국 불교와 달리 석가모니 숭배가 아니고 우주적 근원적 생명력이 개체적 근원적 생명력과 잘 아우러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츠치다 타까시 전 교토대 교수 “어제 김태창 선생님으로부터 생명을 한 마디로 말하면 무엇이냐는 날카로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오늘 이 자리에서 ‘생명은 기적’이라는 저의 대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서로 돕고 행복하게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기본적인 생명관입니다. 저는 80년 전 부모님의 사랑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태어난 것을 기적이라 느끼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도 수많은 정자 중 단 하나가 난자에 착상하는 것은 수억분의 일의 확률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인도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생명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받은 제 생명은 또 다시 많은 생명에 의해 지탱 받고 포용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아름다운 나무, 숲, 아름다운 자연을 봤는데 이것 역시 기적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의 생명 덕분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할 때 비로소 우리의 밝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아름다운 경치, 아름다운 풍경에서 살아가는 장소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아까 야마모토 선생님이 생명=불성=우주적·근원적 생명력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그런 생명력이 저 자신에 나타난 기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의 불성을 늘 감사하고 자각하는 마음으로 서로 돕고 사는 사회를 만듭시다.”

▷박영대 화백 “오늘 이 좋은 자리에 참가하게 돼 기쁩니다. 사실 이런 자리는 처음입니다. 평생 그림만 그리다 여러 학자들을 많이 뵙게 돼 좋은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여기 야마모토 발행인과 츠치다 교수님께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30년 전부터 일본을 매년 한, 두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미술 교류를 해 왔습니다. 한국 작가로는 일본에 친구가 가장 많은 사람일 것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의 좋은 점을 많이 배웠습니다. 큰 힘이 됐고 앞으로도 조금 더 노력해 좋은 작가가 되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2007년 최고의 상이라는 일본 그랑프리를 받고 이듬해에 전년도 수상작가라 해서 특별전을 열어줬습니다. 좋은 시간을 같이 해 주신 여러분께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성환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오늘의 동양포럼에서 전개된 바를 제 나름대로 정리해보면 일본의 생명관은 일원론의 생명관, 중국의 생명관은 이원론의 생명관, 그리고 한국의 생명관은 삼원론의 생명관이 되겠지요. 일본이 전체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화의 세계를 추구한다면 중국은 음과 양의 대립, 한국은 천지인, 삼태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절망적인 소리를 들을 때가 많습니다. 이유는 세대 간의 단절 때문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지 않아 숨을 쉬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인의 생명력이 쇠퇴하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을 불식하기 어렵습니다. 불통을 통으로 전환시킴으로서 생명력의 소생과 약동을 진작시키는 논의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영호 도유문과대 교수 “저는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한국에 대해 특별히 배울 만한 것이 있느냐는 말을 듣곤 했습니다. 결국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에 대해 마음속에 항상 모자란 느낌이 있었습니다. 김태창 교수님에 대해 저는 많은 매력을 느낍니다. 일본에서 교토포럼을 주재하실 때 많은 어려움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청주에서 새롭게 동양포럼을 일으키셨다는 말씀을 듣고 달려 왔습니다. 청주가 이렇게 좋은 분들이 많은 곳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중심에 있다는 것 인재가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지영 원광대 요가학연구소 연구원 “김연숙 교수님의 발표에서 엄마의 가슴으로 느끼는 생명관에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엄마의 가슴의 차원과는 다른 영성의 차원에 연결되는 생명관의 필요성도 아울러 느꼈습니다.”

▷이종각 전 충북대 교수 “저는 나이가 더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실감하면서도 생명력의 소중함을 더더욱 절감하고 있습니다. 결국 철학도 사상도 문학도 예술도 모두 근원적 생명력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생명에 대한 성찰을 다시 해볼 생각입니다.”

▷네모토 마사쓰구 충북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말로는 있다(有)와 없다(無)를 생명체나 비생명체에 두루 쓰는데 일본말로는 생명체에는 ‘이루’와 ‘이나이’를 쓰고 비생명체에는 ‘아루’와 ‘나이’를 써서 서로 구별합니다. 여기서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있고 없음을 구별하는 생명관의 일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홍민기 한국교통대 교수 “언젠가 김태창 교수께서 중국인의 생명관은 삶 중심과 죽음 불언급의 특징이 있고 일본의 생명관은 죽음 중심과 삶 경시의 특징이 있는데 한국인의 생명관은 삶과 죽음의 상관연동이라는 특징이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생각에 공감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것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 부총장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텃밭을 운영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이와 같은 포럼을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다른 분들이 워낙 좋은 말씀 많이 하셨는데 텃밭 운영하며 느낀 것은 생명이 지닌 씨앗과 토양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협동하고 협력하는 것이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땀을 흘리고 씨앗을 뿌리고 며칠 후 땅 속을 헤쳐 나가는 생명력을 볼 때는 진한 감동을 느끼고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학교에 있을 때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느낌을 생명을 보며 느끼곤 합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자연을 끈질기게 황폐화시켜 인류를 전멸시키는 지경에까지 왔는데 생명을 소중하게 느끼면서 인간과 자연이 협력의 관계, 조화의 관계, 협동의 관계가 돼야 하지 않겠냐는 새로운 각성을 합니다. 직접 땀을 흘리면서 농사를 지어 보니 벌레 먹은 감자, 찌그러진 고구마도 이 속에 생명이 들어 있다는 생각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이것을 섭취해 생명을 유지한다는 감격도 듭니다. 실제로 농사를 지어 보신 분이라면 한·중·일의 그 어느 분이라도 가장 기본적인 공통 가치가 생명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김연숙 ■ 고령자 시대의 고령자를 생각한다(1) < 동양포럼 - 동양일보

김연숙

[저]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 - 본질의 저편 읽기

충북대학교 윤리교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윤리교육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북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레비나스의 타자윤리학』, 
『레비나스의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읽기』 등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쓴 몇 편의 논문과 도덕·윤리교육에 관한 논문이 있다.
 




동양포럼 / 기고문 ■ 고령자 시대의 고령자를 생각한다(1) < 동양포럼 < 기획·특집 < 기사본문 - 동양일보



동양포럼 / 기고문 ■ 고령자 시대의 고령자를 생각한다(1)
기자명 동양일보
입력 2018.02.25 

아버지의 노년, 그 전과 후

김연숙 충북대 교수

● 쌓여만 가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 살아계실 때도 점잖으시더니 돌아가시는 것도 점잖게 돌아가셨군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제가 마지막으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사자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아버지의 체온은 순식간에 더 떨어져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디디고 있는 이 대지가 마치 스케이팅을 타는 것처럼 미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이 대지는 제가 정박할 단단한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가도 희석되지 않았습니다.

해소 불가능한 그리움이 쌓여간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 죽음 이후를 알 수는 없지만 죽어서도 아버지를 만날 가능성이 적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에 한이 쌓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사후에라도 뵐 수 있으려면 비슷한 삶이어야 할 텐데, 농사일을 하신 아버지는 등이 굽고 손이 닳도록 노동을 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성정상 유명을 달리하신 분으로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을 기웃거릴 것 같지가 않아서 아버지를 어떤 방식으로 뵐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도 아픔이었습니다.



● 주려는 아버진 24만원, 받는 이장은 19만원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84세에 임종하실 때까지 거의 10년 이상을 홀로 사시면서 노년기를 보내셨습니다. 평생 애써 마련하신 농지를 아끼면서 힘닿는 만큼, 서로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해가야 하는 농사일이지만, 농업기계화가 된 덕분에 이웃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럭저럭 꾸려 가셨습니다. 특히 농지를 일구고 논에 모를 심는 것과 같은 힘든 농사일은 트랙터와 같은 기계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느 날은 농대 졸업 후 농업에 종사하는 구역 이장님이 아버지를 방문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네, 지난 농기계 사용료가 24만원이지?”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장님은 “아닙니다, 어르신, 19만원입니다.” 아버지는 거듭 24만원을 주려하고 이장님은 19만원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비용을 주는 사람은 더 주려하고 받는 사람은 적게 받으려고 애를 쓰는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 농총 고령인구 위한 사회적 지원 절실

이 일을 회상하면서 저는 농촌의 고령인구를 위한 사회적 지원이 절실함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도시에서는 실업자를 위한 자금지원이나 공공근로 형식의 고용형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농촌의 고령인구의 경제활동지원을 위한 어떤 적절한 사회적 조치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농업이 기계화되는 추세에 맞춰 마을 단위의 기계지원과 기계를 다루는 인력 등을 공적으로 지원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은 어르신들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장려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 “어차피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똑같다”

농사일이 없을 때면 아버지는 동네 노인정에서 동네 분들과 시간을 보내시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정부에서 난방비와 약간의 지원금을 보조했으므로, 이를 쓴다는 명분으로 동네의 젊은 분들이 식사를 준비하여 함께 나누시곤 하였습니다. 또한 버스를 타고 시장에 있는 노인정에 나가셔서, 친구 분들을 만나 점심을 드시고 가끔씩 다방에 가서 쌍화차를 드신 후 늦지 않게 귀가하시는 일과를 종종 보내셨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를 찾아뵈면, 식사 후 거실에서 따뜻한 맥심 커피를 마시면서, 다정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하셨습니다. 언젠가는 함께 하시던 친구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셔서 몇 분 남지 않았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간은 자랑스럽게 80세를 넘겨 사는 것은 드문 일이며, 옛날에는 60을 넘겨 살기도 어려웠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멀리 창문 밖에 펼쳐진 마을 앞산을 바라보시면서 “이제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 아버지도 노년기엔 요양원 신세 지게 돼

생로병사라는 삶의 순환과정이 있듯이, 노년기에는 특히 누구나 요양원이나 병원 신세를 지게 됩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아버지도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고 응급실로 가신 적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당신의 건강이나 병 그리고 현대 의료나 병원 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지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요양원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있습니다.

지역에 빈 집이 생기면서 그것을 개량하여 요양원을 짓는 일이 벌어졌고, 구역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하여 소송을 걸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의견을 여쭈니 “요양원을 짓는 것이 어떻다고 그러냐. 그럼 이 다음에 우리 같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가라고 반대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구역에 요양원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동네 분들이 노쇠해지거나 병약해지시면 입소하게 되었고, 아버지도 친구 문병하러 들러보시고 오시더니 “음식도 잘 나오고 요양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서 좋은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차후에 더 노쇠해지면 당신도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상기해 볼 때, 요양원과 같은 사회적 시설은 사회로부터 격리될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함께 자리하고 누구에게나 오픈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요양시설의 노인 폭행이나 학대와 같은 문제가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통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병원에 있는 것도, 집에 있는 것도 다 좋다”

대체로 아버지는 몸이 편찮으신 경우 병원을 가기보다는 그냥 홀로 겪으신 적도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자연치유를 믿어서라기보다는 병원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더불어 그저 병고가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감내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싶습니다. 한번은 대학의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습니다. 출근하면서 입원실로 찾아뵙고 좀 어떠신지 여쭤보니, “병원에 있는 것도 좋고 집에 있는 것도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화투를 꺼내셔서 재수 띠기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주치의 선생님 등 대여섯 분의 의사선생님들이 회진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가타부타 말없이 재수 띠기를 계속 할 뿐이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의 병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으신 채.



● 임기응변 중환자실 입원에 “당장 이것들 빼”

노년기의 아버지는 또 한 차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습니다. 일반병실이 없어서 임기응변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중환자실로 면회를 갔더니, 다른 환자분들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어지럽게 오가는 의료진들의 바쁜 발걸음 등으로 말미암아 심란하실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버지가 드시는 약을 가져오라고 하였고, 오랫동안 복용해오던 고혈압 약을 보여줬더니, “아버님은 고혈압이 없으셔서 안 드셔도 되는 약입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농사일로 적당히 활동하시고 약주를 거의 안하시면서 음식을 담백하고 간소하게 드시기 때문에 고혈압이라는 말이 좀 의아하기는 하였습니다. 이틀 후에 문병을 갔더니 아버지는 일반실로 옮겨계셨습니다. 마침 올케 언니가 정갈하고 맛깔스럽게 삼단 도시락을 싸와서 아버지께 드시라고 권하고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긴 영문을 물으니,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에게 “뭣들 하는 건가, 당장 이것들 빼라”고 무섭게 화를 내셔서 일반실로 옮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고모. 제가 시집와서 20년 넘는 결혼생활 중에 아버님이 그렇게 무섭게 화내시는 거 이번이랑 해서 딱 두 번 뵈었네요. 생전 화내시지 않는데… 또 한 번은 어머니 제사음식 준비하고 있을 때예요. 저 혼자 주방에서 일하고 있고 오빠랑 삼촌이 방에서 바둑 두고 있으니까 ‘얘들이 나와서 거들지 않고 뭐하는 거냐’라면서 엄청 무섭게 혼내셨거든요.”



●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중한 것”

병실에서 식사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는 문득 아버지가 연세도 있으시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으시니, ‘티벳사자의 서’의 이야기를 전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버님과 책에 나온 이야기를 나눈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병원에 입원해 계신 분께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이 좀 꺼려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책에는 단 한 번만 듣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열반에 들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책에서 본 건데요. 돌아가시면, 이런저런 무시무시한 소리와 빛들과 험상궂은 형상들이 단계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형상이자 나 자신을 돕기 위해 나타나는 평화의 신이라는 것을 알아채야 한답니다. 알아차림만으로도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해요.” 조용히 저의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의 표정에 아주 잠깐이나마 약간의 긴장감이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 듣고 나더니 즉각적으로 “교회나 절에 다니는 것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잘하는 놈 대학보낸다”

그 때, 저는 마치 죽비로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책에서 읽은 내용이라고 변명하듯 중얼거렸습니다. 아버지는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어떤 실망감이 얼굴에 스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알 것 같았습니다. 문맹이시지만 아버지는 늘 막내딸인 제게 공부에 힘쓸 것을 독려하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들이건 딸이건 공부 잘하는 놈은 누구든 대학을 보낸다.”라고 말씀하셔서 대학이 좋은 것이고 그곳에 가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게 되니, 아버지는 제가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게 될까봐 크게 아쉬워하셨습니다. 제가 공부를 계속해 온 데는 아버지의 뜻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그런 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동안 공부한 내용, 책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자마자 바로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갈하셨던 것입니다. 책을 읽으신 적이 없으셨기에 공부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존경심을 가지셨고 책 속에 엄청난 훌륭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선친과 거의 마지막으로 나눈 이 대화는 부단히 저를 소환하여 왔습니다.



● 영정사진 속 아버지 눈빛엔 깊은 슬픔 서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제가 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눈치도 못 챈 것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영정사진을 모셔두고 49일이 되는 날까지 기도를 올리던 중,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영정사진을 뵐수록 그동안 평안하고 담담하다고 생각해 오던 아버지의 눈빛에 깊은 슬픔이 서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앞에서만은 모든 자식들이 조심하고 온화하였으며 용돈도 곧잘 챙겨드렸고, 또한 시골 농촌공동체의 오랜 인연 속에서 주변 분들과도 늘 화목하게 살아오셨기 때문에, 전혀 짐작하지 못한 ‘슬픔’이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욕심 없이 자족하면서 노년의 삶을 살아내셨던 것 같은데, 그 슬픔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거듭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마음에 걸리는 일들을 적어봅니다.



● 애별리고(愛別離苦), 외로우셨을 것

무엇보다도 애별리고(愛別離苦), 외로우셨을 것으로 봅니다. 아버지는 막내딸인 저를 매우 사랑하셨고, 저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연로해지실수록 여러 가지 일들이 닥쳐서 점점 더 전화도 제대로 못 드리고 찾아뵙지도 못하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자식이 소식을 자주 전하지 못해서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즈음 아버지가 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받고 집으로 모셔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집에 가보니 원만하셨고, 오히려 오랜만에 보게 된 이 딸을 딱하게 쳐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네가 참으로 불쌍하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사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똑같다. 아버지가 옛날에 6.25 전쟁에 참전하였을 때, 큰 배에 태워져 남쪽에서 속초인가로 가게 되었다. 군인들을 먼저 태우고 사람들을 태웠는데, 난리를 치면서 바글바글 탔단다. 간신히 배에 타고 가는 중에도 풍랑을 만나 모두들 배 멀미를 하면서 여기저기 나자빠지고 쓰러져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원래 하루면 갈 것을 풍랑을 만나 며칠씩 더 걸리면서 간신히 도착하여 살아난 것이다. 그때 ‘멀리서 보면 바다가 평탄한데 막상 바다 속으로 들어오니 이렇게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이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사람 사는 모습도 바다랑 아주 똑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탄하게 사는 것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다들 풍랑을 겪으면서 사는 것이다.” 라고 걱정하시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셨습니다.



● 외식 나가면 늘 짜장면만 드셨던 아버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면 애별리고의 고통을 겪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한 자식의 삶의 반경은 부모님의 삶의 반경과 매우 다릅니다. 아버지의 경우, 자식들 집을 방문하셔도 늘 가축을 챙겨야 한다는 이유로 서둘러 귀가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당신의 삶의 반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좀 더 즐겁게 사실 수 있는 생활여건이 되셨다면 조금은 덜 슬프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경우 식사는 담백하고 검소하셨습니다. 대체로 보리밥이나 칼국수를 드시곤 하였으며, 외식을 나가면 늘 짜장면을 선택하셨습니다. 오빠들이 오리백숙과 같은 건강음식을 사오면 매우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 급기야는 “대관절 이런 것을 어떻게 다 먹으라고 사오느냐”라고 나무라셨습니다. 반면 아버지가 자주 방문하시던 노인정에서의 식사에 대해 여쭈자 “노인정에서 화투치고 생기는 개평과 정부에서 보조하는 지원금을 모아서 점심밥을 짓는 아주머니를 고용하고 있단다. 아주머니가 먹던 음식을 다시 내오는 일이 없어 깨끗하고 손맛도 좋아서 다들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작은 공동체에 실질적 지원 이뤄져야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는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고 노년기를 맞이하신 분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혹자는 “노인정과 같은 곳에까지 사회적 지원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노년기의 삶이 우울하고 가난하고 그래서 병이 들어 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소하게 되면 건강보험 등을 통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공적으로 지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역의 노인정과 같은 작은 공동체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잠재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 노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치유제가 된다

공동체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노년기의 삶이 안정되면 그 안에서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과 생활이 안정되어 그 파급효과가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사회에는 정로(定老)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현명한 노인을 스승으로 모셔 교화를 펴고 전하며 덕을 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노인을 어르신으로 모셔 교화를 정성스럽게 지켜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와 적절한 휴식을 누리는 노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요즘과 같은 피로사회의 스트레스를 줄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도 없고 출구도 없는 경쟁적인 삶의 사이클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기를 추구함이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는 노인들의 존재모습은 그 자체로 치유제가 될 수 있기도 합니다.

2023/06/20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 콜로키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 콜로키움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대한 리뷰(야규마코토) 관리자 2017.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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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의 시도」에 대하여2 MONTHS AGO BY 무영 정 IN 다시 개벽이다 TAGGED: 개벽, 개벽신문, 개벽신문 63호, 개벽하는 사람들, 원광대학교, 콜로키움


* 이 글은 개벽신문 63호에 게재되었습니다.

– 제5회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

야규 마코토(柳生眞)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대학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지난 3월 17일,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의 제5회 대학중점연구 콜로키움이 개최되었다. 이번 콜로키움에서는 <교토학파와 일본 기독교의 문화내개화(文化內開花)의 시도>라는 제목으로 일본 난잔대학(南山大學) 난잔종교문화연구소의 김승철(金承哲) 교수를 발표자로,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이찬수 HK연구 교수를 토론자로 모시고 일본을 대표하는 철학 학파인 교토학파(京都學派)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일본에서의 토착화, 일본 문화와 기독교 사상과의 조화·융합 시도, 기독교와 불교사상 혹은 자연과학과의 대화에 대해 논의했다.

교토학파(京都學派)는 교토대학(京都大學)을 중심으로 활약한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1870~1945)와 그의 제자들로 서양의 사상·철학·종교와 동양(혹 일본)의 융합을 시도한 학파로 잘 알려져 있다. 교토학파는 크게 그 내용이 다양하고 종교색이 강한 우파(右派)와 마르크스주의에 접근한 좌파(左派)로 나뉘는데 이번 발표에서는 교토학파 우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상의 일본 토착화, 기독교와 불교의 사상적·철학적 융합 시도에 대해 다루어졌다. 김승철 교수가 발표에서 문화 내 ‘개화(開花)’라고 쓴 것은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바깥에서 들어온 기독교라는 ‘씨앗’을 어떻게 뿌리내리게 하고 키우고 꽃피우게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일본 기독교의 특수성
일본의 기독교 포교는 1549년 성 프란시스코 자비엘이 전국시대 일본에 와서 로마가톨릭 선교를 시작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금교령을 내린 이래로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시대를 통틀어서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기로 약속한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서양국가와의 외교·통상 관계를 전면 금지시키고 철저한 기독교 탄압정책을 취했다. 1853년에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의 내항으로 인해 도쿠가와 일본이 개국했다. 그 이후 일본에 오는 서양인이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믿거나 서양인끼리 성당·교회를 가지는 것은 허락되었으나 일본인이 기독교를 믿거나 일본인에게 포교하는 것은 계속 금지되었다.

심지어 유신 초기의 메이지정부(明治政府)도 애당초 기독교 탄압 정책을 계승했고 가쿠레 키리시탄(숨은 기독교신자. 몰래 가톨릭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했다. 서양 각국의 압력과 비판을 받고 메이지정부가 기독교 탄압을 중지한 후에도, 또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공포, 1890년 시행)으로 신앙의 자유(제국헌법제28조)가 보장된 이후에도 일본 기독교는 늘 반일본적이고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이유로 사회 지도층, 보수층의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 사이에 기독교에 입신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기독교를 일본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게 하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1945년의 패전 후 일본국헌법에서는 “국가의 안녕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한”이라는 규정이 없어지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다(일본국헌법 제20조 제1~3항). 그 후 옛날과 같은 기독교에 대한 시기와 적대감, 경계감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기독교(가톨릭, 성공회 등도 포함해서) 신자 수는 일본 인구 약 1억2천만 명 중 불과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 혼합적인 일본의 풍토를 가리켜 흔히 “일본인은 연초에 신사(神社)에 참배하고, 기독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절에서 장례식을 지낸다.”고 농담처럼 말해진다. 기독교가 운영하는 학교나 대학, 병원도 많다.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기독교 유래의 연중행사가 정착된 지도 오래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 오늘날 일본에서 기독교는 표면적, 주변적, 부수적인 것은 잘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면에 가장 핵심적인 유일신(唯一神) 신앙, 혹은 하나님과 1대1로 맞서는 강렬한 자아의 개념은 여전히 서양적인 것, 또는 비일본적인 것으로, 다시 말하면 일본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몇 백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낯선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계 내에서는 다수파의 일본인에게 어떻게 유일신 신앙을 수용시키느냐가 계속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한편 일본을 거울삼아 기독교 스스로를 보았을 때,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이 너무 비타협적이고 불관용적이어서 다른 문명·문화·종교와에 갈등, 대립을 빚지 않았을까, 다종교·비기독교문화에 대해 너무 억압적이고 패권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으로 임하지 않았을까, 너무 인간중심주의가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도 제기되었다.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의 종교와 사상, 특히 불교와의 대화는 그러한 기독교의 자기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토학파의 기독교와의 대화
종교 간 대화를 추진해 온 신학자인 얀 반 브라흐트(Jan Van Bragt)는 기독교가 불교와 대화해야 할 동기에 대해 다음 세 가지를 들었다.

첫 번째는 토착화의 동기, 즉 너무 서구 기독교를 직수입한 일본 기독교를 “일본인의 마음의 금선(琴線)에 와 닿는 예수의 얼굴을 찾아서”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알리게 한다는 동기이다. 가톨릭 문학자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는 일본인 기독교도로서 영성, 죄와 구원, 그리고 “예수란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려 했다. 최근에 영화화된 『침묵(沈默)』에서 그려진 예수의 모습, 탄압을 견디지 못해 후미에(踏畵)1를 밟고 기교(棄敎)하려 한 선교사로 도리고 신부 앞에 예수가 나타나 “밟아라. 너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왔다.”고 말한 “동반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에는 교회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두 번째는 대화의 동기, 즉 소수파로서의 기독교인들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불교도와 대화하고 신학적 통로와 중계를 마련하려는 동기이다.

세 번째는 탈 서양적 형이상학의 동기이다. 이것은 지상적 존재를 정초(定礎)하려고 형성된 그리스 철학의 논리가 종교적 사실, 특히 셈족(유태)적 사고방식에 그 근원을 둔 기독교를 표현하는 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각과 함께 그 희랍적 범주나 논리를 가지고 표현된 신학(과 그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앙과 이성”의 대립)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구적 기독교 신학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신앙과 자유와의 갈등, 대립을 불교철학의 논리를 도입함으로써 풀고자 하는 것이다.

혼다 마사아키(本多正昭)는 기독교인으로서 불교의 “즉(卽)의 논리”와 만나면서 기독교에의 입신이 단순한 불가역성(不可逆性)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에 사랑과 자유와 신뢰와 사귐은 가역성의 지평에서 피어나는 꽃이기 때문에 저 불가역성이 이러한 가역성의 인(因)이라고 해야 된다고 말했다. 또 가톨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오노데라 이사오(小野寺功)는 가톨릭 신학과교토학파의 총수인 니시다 기타로 철학의 “장(場)의 논리” “절대무(絶對無)의 장소”를 접목시킴으로써 일본적 영성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니시다의 ‘장소’론은 기독교적인 ‘삼위일체가 거기에 있는 장소’(三位一體のおいてある場所)로서 파악할때, 실로 의미 깊은 해결책이 마련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일본적 영성의 실존적 자각의 논리인 ‘절대무의 장소’의 사상과, 성서와 교회의 신앙적이고 계시진리의 근본적인 논리 구조를 나타내는 삼위일체론은 가장 깊이 상접(相接)하는 하나의 진실의 사태가 된다.”고 말했다.

오노데라는 일본적 영성(靈性)을 “대지적 영성”, “대지성(大地性)”이라고 설파한 불교학자이자 일본 선불교와 선문화를 영어로 외국에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와도 친교가 두터웠다. 그는 “우리들의 이성에 있어서 절대무인 근원은 기독교적인 신앙 의식에 있어서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취한다. 그리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절대와 상대가 교류하는 장소, 또는 참된 신성과 참된 인성이 탄생하는 ‘장소’인 어떤 대지적(大地的) 영성(靈性)의 이념화의 시도이고, 성경의 ‘거기에 있어서 있는 장소’로써 절대자의 자기사영점(自己射映點)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절대무의 근원이 기독교적인 신앙의식으로는 삼위일체론이 되고, 니시다가 말하는 절대무의 장소는 대지적 영성의 이념화임과 동시에 절대자가 스스로를 투영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가톨릭 신학과 니시다 철학, 스즈키 다이세츠의 철학을 아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자인 야기 세이이치(八木誠一)도 기독교인으로서 불교를 배우고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구원이란 인간의 개인적·사회적인 본래성, 전체성의 회복이고, 그 중심은 원래 자기·자아인 인간이 자기·자아로써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지만, 이 ‘자각’은 기독교적 메시지의 중심임과 동시에 불교적 깨달음(覺)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또 야기는 “… 예수는 사람이 어떠한 교단에 속하는 어떠한 교의를 받들고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방식이 사실상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가가 문제라고 가르쳤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비판했다.

교토학파를 비롯한 일본의 종교철학자·신학자·사상가들의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접목 시도는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를 시도한 반 브라흐트나 종교다원 주의를 주장한 존 힉(John Hick)과 같은 기독교 절대주의와 배타성에 반대한 종교 철학자·신학자와도 호응하면서 니시다의 “절대무의 장소”,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 그리고 불교의 “깨달음”(覺)의 논리 등을 통해 기독교 신학과 불교와의 접목, 서구기독교의 배타성(排他性)·독선성(獨善性) 배제, 그리고 일본의 지적 풍토에의 기독교 토착화를 시도했다.

한국적 상황에서 보는 교토학파와 기독교와의 대화
일본이 근대화한 이래로 기독교 또는 서양문명·철학을 수용하거나 그것에 대응·대결할 때에는 불교사상 중에서는 특히 선불교(그리고 그것에 유래하는 니시다의 장소론, 스즈키의 대지적 영성론)를 내세웠다. (유교사상을 내세울 때는 양명학(陽明學)을 내세워 기독교나 독일관념론과 대비시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김승철 교수는그 배후에 서구 근대적 사유의 근간이 되는 근대적 자아에 대한 일본 지식층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적한다.

다만 종교다원주의의 사상적 전통과 시도는 일본만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인도, 중국, 한국 등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던 범아시아적인 사상적 맥이다.
동서양의 사상적 대화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그때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어떤 사상이 주로 서구사상 또는 기독교를 맞이할 “호스트” 역을 맡느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승철 교수는 불교의 경우 한국에서는 한용운(韓龍雲)이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내세웠고, 중국에서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이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이찬수 교수는 “김 교수님의 발제 내용은 한국적 상황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논평하면서 “두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했다. 하나는 교토학파의 니시다의 수제자이자 니시다철학의 비판자인 타나베 하지메(田邊元)의 사상이다. 타나베는 니시다의 “즉(卽)”의 논리에게는 “매개”가 결여되고 있어서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할 적에 공(空)을 색(色)과 “즉(卽)”하게 해주는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매개를 중시하지 않고서는 절대무가 자기를 한정해 사물의 세계로 나타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식의 근저에서 “인식하려는 의지(Willezur Erkenntsis)”가 도덕적 실천을 통해 인간적 오성과 신적 직관을 연결하는 매개로 적용한다고 지적했다.

타나베는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개조인 신란(親鸞)의 사상을 들어서 아미타불(阿彌陀佛), 그리고 그 본원(本願), 중생의 신심(信心)의 세 가지를 중요한 요소로 요약할 때 “신심”은 바로 매개에 해당된다고 한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극락정토에 인도하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본원을 세우셨고, 아미타불의 은총과 중생의 신심은 별개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신심이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을 구체화시켜주는 매개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신심이 없는 중생은 아미타불의 본원을 인식하고 깨달을 수 없다). 타다베는 신란의 사상에서 니시다가 보지 못했던 “매개”의 구조를 발견한 뒤 이것을 진리 체험의 타력적 차원에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교토학파이면서 니시다적인 “절대무의장”이론에 부족한 “매개”에 주목하여 독특한 구제론(救濟論)을 전개한 것이다.

또 이찬수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그림으로 표시하면서 양자 사이에는 서로 겹치는 공통성의 겹치지 않는 문화적 차이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에도 역시 일종의 도그마성이 있고, 또 불교 자체가 기독교나 서양철학과 만나서 변화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문화내(文化內)”가 아니라 서로가 문화의 틀을 뛰어넘는 것이 필요할 거라고 덧붙였다.

남은 과제들
종합토론에서는 “왜 한국 사람으로서 종교다원주의라고 말하고 종교회통주의(宗敎會通主義)라고 말하지 않는가?”라는 지적이 나왔다. “종교다원주의”는 오히려 하나의 신성(神性)이 다양한 모습(종교)으로 표현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다원(多元)”이라는 말은 어색하다. 그것보다 오히려 원효(元曉)의 화쟁회통(和諍會通) 이래 흔히 쓰여 온 “회통”이라는 말이 더 바람직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조선 시대에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에서 많은 서학(西學) 서적들을 가져와 동서 회통을 시도한 적이 있고, 19세기의 최한기(崔漢綺)와 같이 자타(自他)의 통(通), 동양전통의 기철학과 서양과학과의 통, 정치의 통, 사회경제의 통, 심지어는 교(敎)와 교 사이의 통까지 포괄적으로 논리화한 사상가도 있었다. 그리고 동학(東學)의 최제우(崔濟愚)는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라고 하는 기독교와도 불교, 또는 유교와도 완전히 다른 영성론을 주장했다. 이렇듯 한국에는 깊고 오래된 사상적 전통이 있고 서구 기독교와의 대화도 충분히 가능한 역량과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쪽에 더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이번 회의에 청중으로 참석한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26년간 교토포럼을 주재해 온 경험에서 “대화할 때 대화자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면 가장 일본적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일본과 대화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 내 개화”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일본은 외부의 문화·사상을 받아들여서 자기 토양 속에 끌어들여서 “개화”시키는 것은 잘 해왔기 때문에 이제 문화의 문화 사이의 “문화 간 개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교토포럼을 하면서 교토학파의 학자들과 늘 논쟁을 벌여온 것이 바로 니시다 철학의 “절대모순(絶對矛盾)의 자기동일(自己同一)”의 논리였다고 한다. 이 논리는 필경 동화(同化)의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필요한 것은 한사상·한철학이 지니는 “절대모순의 자타상생(自他相生)”의 논리, 즉 자기와 타자가 모순이 있어야 오히려 서로, 함께 산다는 논리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주석
1 후미에는 예수 또는 성모마리아를 부조한 동판을 가리킨다. 에도시대에 몰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천

2023/04/30

오구라 기조 小倉紀藏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조선사상전사' , '새로 읽는 논어 ' ,

Ogura Kizo오구라 기조 小倉紀藏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조선사상전사' , '새로 읽는 논어 ' , + : 네이버 블로그



Ogura Kizo오구라 기조 小倉紀藏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조선사상전사' , '새로 읽는 논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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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30.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리와 기로 해석한 한국사회)



별점8.0점 | 네티즌리뷰 7건 (동작,영등포,마포아현,강남,강서,양천,고척,용산,동대문,개포,종로,정독,
저자 오구라 기조|역자 조성환|모시는사람들 |2017.12.20
원제 韓國は一個の哲學である <理>と<氣>の社會システム
페이지 272|ISBN 9791188765003|판형 규격외 변형


韓國は一個の哲學である 〈理〉と〈氣〉の社會システム (講談社學術文庫 2052) (文庫)


韓國は一個の哲學である (<理>と<氣>の社會システム)
小倉紀藏 저 | 講談社 | 1998

별점0.0점 | 네티즌리뷰 0건
저자 오구라 키조|講談社 |2011.05.12 재발간
페이지 264|ISBN 9784062920520

목차
0 韓國.道德志向的な國
1 上昇への切望――<理>志向性のしくみ
2 <理>と<氣>の生活空間
3 <理>と<氣>の文化體系
4 <理>と<氣>の社會構造
5 <理氣>の經濟.政治.歷史
6 <理氣>と世界.日本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1998)의 후기에서 “이 책은 무엇보다도 한국에 대한 찬탄과 비판의 책이다. 이 책의 제목에 두 가지가 모두 들어 있다. 찬탄은 ‘철학’이라는 말에, 비판은 ‘하나’라는 말에 담겨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2150600075&code=910100&sat_menu=A074#csidxb20f4e03b85726fa1f7f1c20a52f04b




문고판 후기
p.258-259

... 이로 인해 일본과 한국의 아카데미즘은 점점 더 서구의 세계관으로 도배질되게 되었다.

대학이라는 장은 서구적 세계관의 대리인들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지배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 연구라는 분야에 과거에는 없었던 '우등생'이라는 사람들이 대거 가담하게 되어, 이 식민지화는 점점 더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이나 한국의 시험 우등생 같은 이들이 어찌 한국을 인식할 수나 있겠는가? 권위를 인정받은 저명한 서구적 세계관(방법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한국을 인식했다는 흉내를 내고, 적당한 논문을 써서 대학에서 자리를 얻고, 대량의 예산(세금)을 확보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하는 주구( )들을 나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한국 인식 같은 것은 못하고 있다. 내 인식의 성장은 이 책과 그 후에 쓴 한 두 권의 책으로 멈추고 말았다. 그 외에는 의미 있는 글은 없다.

그래도 다시 한번 내가 한국에 접근하는 일이 있을까? 한국이 나에게 접근하는 일이 있을까?

모른다.


2011년 3월

교토 후카쿠사에서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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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리'와 '기'의 생활공간




2. 리기의 생활학




2) '리'의 위광( )과 '리'의 상품




p.68

...

<제일의 리 = 달>은 근원적인 단지 하나의 '리'이다.

<제이의 리 = 달>은 만물에 동등하게 분배된 '리'로, 이것을 '분수리(分殊理 )'라고 한다.

단지 만물은 '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드러난 '리'도 각각 다른 것이다.







3.'리'와 '기'의 방법론




1)이분법의 극복




p.77




아니 그런데 이 책의 방법론 자체가 '리'와 '기'의 이분법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두 세계를 분리하기만 하는 분석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리'의 세계와 '기'의 세계를 단지 나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붙어 있다. 두 세계는 서로 뒤섞여 있으면서 떨어져 있다. 이것을 주자학의 용어로는 '리'와 '기'는 '불상잡( ) 불상리( )' (서로 뒤섞여 있지도 않고 서로 떨어져 있지도 않다) 라고 한다.







2) '리'와 '기'의 상호 관계




...

'리'와 '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관계에 있다. 주자가 말하듯이 '리'와 '기'는 불상리(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리'와 '기'는 불상잡( )이기 때문에 서로 완전히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둘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것으로, '기'가 '리'를 가리고 있다. 그리고 '기'의 맑고 탁한 정도에 따라 '리'를 드러나는 정도도 달라진다.







4장

'리'와 '기'의 문화 체계




14)




15) 의상의 리리무애법계 理理無碍法界




p.101

...

그런데 의상은 이 네 개 법계의 사상이 성립되기 이전에 '리리무애법계'라는 신기한 개념을 주장했다. 이것은 '리'에 어긋난 듯한 기묘한 생각이다.

즉 유일절ᆞ평등무차별ᆞ융통편재( )한 '리' (이것은 물론 주자학의 '리'가 아니라 화엄의 '리')들이 서로 무애하다(=장애가 없다) 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해서는 이즈쓰 도시히코( )가 이슬람 철학자 Ibn al-'Arabi 이븐 아라비(1165-1240)의 사상을 빌려 설명한 것이 참고할 만하다.

이즈쓰는 '리리무애법계'의 '리'란 유일하고 절대적인 '리'가 개별적인 '리'로 자기분절(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이것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분수리(分殊理 )'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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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종법계(四種法界),四法界사법계 four realms of reality




사종법계(四種法界),四法界 four realm..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t/l/s/t/j/s/0/1/2/5님의 블로그 : 네이버 블로그
자기소개가없습니다. ............................ 연구 목적,정보 블로그 (상업목적 이웃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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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理)[8]와 리(理)의 의존관계(상즉相卽)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8] 이때 리(理)는 사(事)와 일체로서의 리(理)이며, 개체적 리(理)를 인정하기에 가능한 교설이다.




의상(신라) - 나무위키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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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理一分殊(이일분수) : 우주의 근원은 하나이지만, 이것이 나뉘어지면 각각 다른 형태와 성질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理壹分殊(이일분수) 이치는 하나이나 나뉘어 다르니




* 리일분수(理一分殊); 세계 보편적 진리인 리일(理一: 하나의 리)이 각 개체에 부여된 것이 분수리(分殊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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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범신론은 만물이 개별의 이(理)를 구유하고 있지만 그 개별의 ‘이’는 보편적인 하나의 ‘이’와 동일하다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명제와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과 각일기성(各一其性)으로 명쾌하게 설명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있는 보편성과 특수성, 전체성과 개체성의 합일을 표징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사상의 현대적 부활은 그의 철학체계 속에 나타난 신, 자연, 인간 그리고 자유와 행복에 대한 그의 주장이 지속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이며, 그의 사상으로부터 오늘날에도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대안문명 건설의 단초가 거기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 최민자 , '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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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思想全史



별점0.0점 | 네티즌리뷰 0건
저자 小倉 紀藏|筑摩書房新書 |2017.11.01
ISBN 9784480071040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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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읽는 논어



별점7.0점 | 네티즌리뷰 2건 (동작,영등포,구로,강서,양천,개포,정독,
저자 오구라 기조|역자 조영렬|교유서가 |2016.05.09
원제 新しい論語
페이지 268|ISBN 9788954640435|판형 규격외 변형


‘애니미즘’적 세계관이란 삼라만상에 생명이 깃든다는 세계관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생명’이 드러난다는 사상이다. 저자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이제까지 인류가 확실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관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자라는 사람의 생명철학이라고 강조하며, 공자의 세계관에 다가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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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논어』의 세계관에는 〈애니미즘〉의 색채가 짙다고 본다. 그러나 주자학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애니미즘〉을 부정하고, 『논어』와 유교 전반을 〈범령론汎靈論〉적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범령론〉이 〈애니미즘〉을 몰아낸 최종단계였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논어』 텍스트를 통해 밝히면서, 동아시아 〈애니미즘〉의 복권에 관해 철학적으로 논의한다.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인류가 확실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관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자라는 사람의 생명철학이라는 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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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생명〉에 대한 동아시아의 두 가지 해석, 즉 〈애니미즘〉과 〈범령론〉에서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범령론〉을 ‘범신론’이라 해도 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신神’이라는 글자가 일신교적 신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범령론〉이라 부른다. 〈범령론〉이란, 세계 혹은 우주가 하나의 ‘영靈(spirit)’ 혹은 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도 큰 의미에서는 〈범령론〉인데, 동양에서는 ‘기氣 사상’이 대표적인 〈범령론〉이다. 왜냐하면 ‘기’라는 것은 순수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나 넋을 포함한 ‘영적인 물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 전체가 하나의 기로 되어 있다고 보는 도가나 유가 등의 기 사상은 〈범령론〉이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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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외친 ‘인仁’이라는 개념도 흔히 ‘도덕’이나 ‘사랑’으로 이해하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둘 이상 있을 때 그 관계성 〈사이〉에서 문득 드러나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파악한다. 즉 공자의 ‘인’은 〈사이의 생명〉이라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자적 〈애니미즘〉 역시 〈제3의 생명〉의 세계관이다. 이에 비해, 〈범령론〉은 〈제2의 생명〉의 세계관이다. 이 책에서 〈범령론〉은 세계(우주)에 하나의 보편적이고 비육체적인 생명이 가득하다고 보는 사상 일반을 가리킨다.

애니미즘이라는 단어는 흔히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을 가리키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주관共同主觀에 의해 〈생명〉을 문득 드러내는’ 세계관을 괄호를 붙여 〈애니미즘〉이라 일컫는다. 그러면서 이런 〈애니미즘〉을 보통의 애니미즘과 구별하기 위해 〈소울리즘soulism〉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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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3.<제3의 생명>의 부활을 향하여




p.249

<생명>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갑자기,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똑같은 하늘을 보아도 <생명>을 느끼는 사람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제3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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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지금, 영적이고 보편적인 <생명>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물( ) <사이>, 물과 물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생명>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실은 많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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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사이의 생명>, <제3의 생명>적인 세계관은 공자적 애니미즘 (명료하게 표현해서 soulism)인데 이를 이어받은 후대는 범령론(통상적인 범신론)으로 오인하고 곡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주자학 이후에는 애니미즘 (공자적 애니미즘인 소울리즘 마저도)이 동아시아에서도 배격되어졌다고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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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마 츠요시(小島毅) 일본 도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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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61) /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1)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동양일보가 연중 펼치고 있는 ‘동양포럼’으로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온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최근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전사(朝鮮思想全史)’ 책 두 권을 펴냈다.‘한국은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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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원불교사상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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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61) /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2)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내가 생각하기에 이 땅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대략 1940년생 세대로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형효나 김경재 세대). 그 이후의 세대들은 이른바 ‘전문화’의 길로 들어서거나 ‘근대화’의 세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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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9일 이화여대에서 강연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

출처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http://www.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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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62) / 동양포럼 ‘한·중·일 회의’ 참가자 기고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새해에, 한국어의 탁월함을 생각한다 저는 일찍이 한국을 알게 되고, 한국말의 특출한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해 왔습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저 자신이 느낀 한국어의 탁월함을 다시금 확인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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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생명 즉 ‘제3의 생명’은 ‘문득 나타나는 생명’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생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그것을 ‘미(美)’라든가 ‘아우라’라든가 ‘모노노 아와레 (일본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지만 실은 그것들은 ‘생명’인 것입니다. 다만 그것들은 육체적인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생명과는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어 왔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이 그림에는 생명이 있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생명을 정확히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겠는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육체적인 ‘제1의 생명’도 아니고 영적인 ‘제2의 생명’도 아니기 때문에 ‘제3의 생명’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3의 생명’은 간주관적(間主觀的) 생명, 우발적 생명, 미적(美的) 생명이며, 다른 말로 하면 ‘사이의 생명’, ‘나타나는 생명’입니다.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면서 원래 주제인 한국어의 미의식이라는 내용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원래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 ‘생각’, ‘한’, ‘멋’ ... 한국어의 미의식과 생명

저는 ‘생각’, ‘한’, ‘멋’이라는 한국어에 ‘제3의 생명’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에 관해서는 동양포럼주간이신 김태창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 말의 본래 문자는 ‘생각’이며 이는 글자 그대로 ‘생명의 각성’을 나타내는 것이겠습니다.
즉 한국어의 ‘생각하다’는 합리적인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약동(Elan Vital)을 수반하는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생각하다’에 관한 김태창 선생님의 이러한 해석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생각하다’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 번째는 ‘생각’의 ‘생’을 육체적인 ‘제1의 생명’이라고 파악하여 ‘생각하다’란 육체적 생명이 각성하는 작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각’의 ‘생’을 영적인 ‘제2의 생명’이라고 파악하여 ‘생각하다’ 란 우주의 보편적인 섭리를 각성하는 작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生覺)하다’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의 ‘생’을 육체적인 ‘제1의 생명’과 보편적인 ‘제2의 생명’이 아니라 우발적인 ‘제3의 생명’이라고 해석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생각하다’는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에 불꽃처럼 번쩍이는 미적인 감동과 정감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다’라는 아주 평범한 행위 자체가 한국어의 세계에서는 개개의 육체적 생명의 각성과 우주의 보편적 생명의 각성, 그리고 일상에서의 미적 순간의 지각이라는 다양한 층위를 포함한 생명적 행위인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까요? 다음은 ‘한’입니다. ‘한’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인 감정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미의식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이란 동경이다’라고 해석합니다. 한국어의 고유어에 동경에 해당하는 어휘가 없고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한’이라는 말이 애초에 ‘동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은 이상적인 상태 즉 ‘아름답다’에 대한 동경과, 그 이상적인 상태와 주체가 합치되어 있지 않은 것에 따른 슬픔과 원통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제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한’이라는 말의 뜻이 한일사전에는 ‘うらみ(원망)’라고 나와 있는데, TV 방송에서 한국인이 ‘공부가 한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가 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은 ‘원망’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부에 대한 동경과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 원통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요? 이 ‘한’이야말로 한국인의 일상 세계에서 지속과 순간이라는 상반되는 시간성을 응축시킨 미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속되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보편성에 대한 동경과 원통함입니다. 한국인의 마음을 늘 강한 동경과 원통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동경을 정적으로 내성화시키면 ‘곱다’라는 미(美)가 됩니다만, 때때로 동경은 고통스러운 원통함과 합체되여 ‘한’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한’이 언젠가는 풀리기를 늘 기원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순간에 기적처럼 ‘한’이 풀리는 일도 있습니다. 이 순간 동경과 원통함은 동시에 해방되어 ‘아름다운 세계’가 개벽합니다. ‘한을 풀다’란 보편적인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는 동경과 그 세계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는 슬픔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생각되다가 어느 순간 단숨에 작열하듯이 풀리는 순간의 절대적인 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에너지가 강한 ‘제3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멋’입니다. ‘멋’은 한국어에 나타난 ‘제3의 생명’의 미의식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낸 말일 것입니다. ‘멋’은 우주적인 범위를 지닌 말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신 세계에서는 ‘아름답다’ 같은 보편적인 미의식 즉 ‘제2의 생명’에 의한 세계관이 일본보다 더욱 강하기 때문에, 이 우주적인 보편성에 바람구멍을 내어 우발적인 생명을 나타내려면 그를 위해 필요한 자유의 힘도 강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멋’에 해당되는 일본어 ‘이키’는 지극히 인공적이며 섬세한 정감의 미묘한 작용에 관한 개념입니다만 한국의 ‘멋’은 인간관계 및 사회뿐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자유자재로 발휘됩니다. 보편성의 규범이 지나치게 강하면 ‘멋’은 그곳에 자유를 위한 바람구멍을 냅니다. ‘아름답다’는 보편적인 미이지만, 이 보편성이 틀에 박히면 억압이 되고 맙니다. 그때 ‘멋’은 미의 헤게모니를 해체시키거나 흐트러트립니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미가 ‘제2의 생명’관에 기초하고 있다면 ‘멋’은 ‘제3의 생명’에 기초한 미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은 저자가 2016년 1월 9일 이화여대에서 강연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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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는 앞으로도 오구라 교수의 한국학 저서를 지속적으로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오구라 기조 교수는 현대일본에서 한국철학이나 한국사상을 연구하는 학회 또는 연구회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이상(異常)한 상태’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일본 사회에서 한국철학을 비롯한 한국학(韓國學) 연구 및 활성화를 견인하는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학자로 유명하다.

http://news1.kr/articles/?3201023

일본 오구라 교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한글판 출간
(익산=뉴스1) 박슬용 기자 | 원광대학교(총장 김도종) 원불교사상연구원 조성환 박사가 지난 20년간 일본에서 한류 관련 인문학 분야 베스트셀러였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한글판을 출간했다고 8일 밝혔다.이 책은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에서 한국철학을 강의하는 오구라 기조(小倉...
news1.kr














서양을 비롯한 현대문명은 어떤 의미에서 앞길이 막힌 궁경에 빠졌기에 어떻게 해서 현대문명을 구해낼 수 있는 새로운 철학을 구축하고자 철학자들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동양적인 가치와 세계관을 재평가함으로써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만들어내고 인류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학자는 적지 않습니다. 김태창 주간도 그러한 한 분입니다. 김 주간은 끈질기게 동아시아의 영성을 탐구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 노력에 감복하고 있습니다.

출처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http://www.dynews.co.kr)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4795

동양포럼(60) / 국제포럼 ‘한·중·일 회의’ 소감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지난해 8월 저는 교토대학 오구라 연구실의 일원으로 한국에서 세 개의 포럼에 참가했습니다. ● 국제영성포럼-공공하는 영성지난해 8월 4~6일 꽃동네대학교의 주최로 국제 영성(靈性) 포럼이 개최됐습니다.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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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島の文明と大陸の文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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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小倉 紀藏|PHP硏究所 |2020.10.28
페이지 254|ISBN 9784569847542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8942

139. 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 을 읽고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동양일보 동양포럼 기자]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와 야규 마코토(柳生眞)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이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일본 교토대 교수가 지난해 10월 발간한 의 서평을 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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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의 서평






‘대륙의 문명’과 ‘군도(群島)의 문명’은 비교문명학의 기본 틀인 ‘중심-주변’이라는 ‘수직적인 축’을 답습한다. 한편으로 과거에는 중국문명, 오늘날은 미국발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의 서양문명에 흠뻑 빠진 일본과 한국이라는 ‘주변문명’ 즉 일본-한국이라는 ‘수평적인 축’에서 일본문명을 비춰보고 고찰한다. 이와 같은 고찰에 있어서 현대 일본에서는 저자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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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의 생명: 생물학적· 육체적 생명=개별적· 객관적· 상대적· 물질적 생명.

제2의 생명: 영적 생명=보편적· 절대적· 종교(정신)적· 비물질적· 집단적 생명

제3의 생명: 미적 생명=간주관적· 우발적· <사이>적 생명, ‘지금· 여기’에 밖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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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머니 자본주의에 의한 세계 지배 아래, 격차사회에 따른 분단과 이질적인 타인에 대한 불관용이 만연하는 현대 세계에서, 군도적(群島的)인 ‘제3의 생명적’, ‘사이적’ 문명을 일본이 앞장서서 세계에 제창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하면서, ‘공창(共創)하는 동아시아로’라고 호소한 것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신형코로나바이러스로 가로막히고 먹구름이 드리우는 나날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사는 세계 사람들, 거대한 재앙에 신음하는 현대문명에 대해 한 가닥의 밝은 빛을 비춰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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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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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자가 보기에 ‘제2의 생명’과 ‘제3의 생명’은 원래 그 원천이 다르다. 저자가 밝혔듯이 덧없이 살다 죽는 한계(제1의 생명)를 가진 인간이 영원하고 보편적인 ‘하나(1)’라는 관념을 극도로 추구한 결과 도달하게 된 것이 ‘제2의 생명’이다. 이에 대해 ‘제3의 생명’은 개별성, 순간성, 감각성을 지닌 것이고, 또한 어린 아이가 철들기 전에 많이 느끼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아이를 잘 살펴보면 그들은 이미 나날을 그렇게 살고 있다. 어른에는 생명이 없어 보이는 물건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을 걸어주고 다루는 것을 보게 된다. 어린 아이가 아끼는 인형과 말하고 역을 떠나는 열차에게 손을 흔드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바로 그때 그(녀)와 인형이나 열차 사이에는 ‘제3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도 ‘다오야메부리(たおやめぶり)’ 즉 “덧없고 아녀자(兒女子)같은 것”이며 여성적이고 유약하고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것이 인정(人情)의 본래 모습이고, 이것이 곧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라고 말했다. 노리나가에 의하면 무사적인 “올곧고 씩씩한” 마음가짐은 오히려 ‘가라고코로(漢意)’ 즉 불교・ 유교와 같은 외래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꾸며진 정신이라는 것이다. (유약함이 곧 일본의 원래 정신이라는 노리나가의 주장은 무사사회 일본에서는 아주 이색적이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오구라의 절묘한 균형 감각이 가장 잘 드러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민주주의 등의 정치, 새로운 복지와 교육, 리얼리즘도 설계주의도 아닌 외교 방식 등 사회의 여러 가지 분야에서 저자가 ‘아니미즘’이라고 부르는 세계관에 의해 변혁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오구라 생명론과 문명론이 장차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하면서 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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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규 마코토(柳生眞)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출처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http://www.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