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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2

최고번역본을 찾아서, 노자의 <도덕경>/ 김시천 : 노바당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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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번역본을 찾아서, 노자의 <도덕경>/ 김시천

노바당

2009. 3. 2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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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번역비평: 최고번역본을 찾아서, 노자의『도덕경』


인문학의 향기 / 2006년 03월 04일 김시천 호서대

‘노자’ 혹은 ‘도덕경’ 번역비평을 위해 관련 번역서들을 책상 위에 모아 놓았다. 열권이 훨씬 넘는 분량이었다. 지난 십여 년간 학술적 토대가 있다고 판단이 된 것들만 모았는데도 상황이 이러하다.

일반적으로 널리 읽히는 ‘노자’, 백서본 ‘노자’, 초간본 ‘노자’, 게다가 왕필의 ‘노자’가 있고 하상공의 ‘노자’가 있으며 초횡의 ‘노자익’과 같은 것도 있다. 다석 유영모나 씨알 함석헌의 것이 있는가 하면, 서양철학자인 김형효의 것도 있다. 어느 누구라도 이같은 상황에서 ‘노자’ 번역서의 비평을 쓴다는 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공자의 ‘논어’ 번역에 대해 쓰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노자’의 전범, 함석헌과 김용욕

‘노자’의 문장은 짧고 간결한 운문형식이다. 게다가 고유명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구 형식이며, 일반적이고 축약적인 표현을 금과옥조로 여긴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헌이다. 달리 말하면, ‘노자’의 주석자나 번역자가 어떤 ‘맥락’을 갖고 들어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문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상공의 ‘노자’와 왕필의 ‘노자’를 사상적으로 비교할 순 있어도, 하상공 ‘노자’ 번역과 왕필 ‘노자’ 번역을 비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양자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차선책으로 우리시대 ‘노자’ 읽기의 특징을 드러내는 몇 가지 번역서를 중심으로 ‘노자’ 번역을 비평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 가운데 우리시대의 ‘노자’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번역서들을 중심으로 살피겠다는 것이다.


‘노자’ 번역에서 현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가독성을 지닌 것으로 학문적 토대를 갖춘 번역서로는 무엇보다 김용옥의 ‘길과 얻음’(1989)을 꼽을 수 있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번역, 주석서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바탕으로 한 깔끔한 우리말 완역의 최초 사례다. 이 책은 특히 ‘노자’의 가장 핵심개념인 ‘道’와 ‘德’을 ‘길’과 ‘얻음’이라 번역함으로써 우리말화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의 ‘노자’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은 것은 필자로선 무척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함석헌의 것이라 해야 맞다. 함석헌은 ‘노자’ 제1장의 첫 구절을 “길 길 할 수 있으면 늘 길 아니요”라고 번역함으로써 한자개념을 우리말로 풀어 ‘노자’를 이해하는 것도 가능함을 보여줬다. 물론 그에게 영향을 준 유영모의 것도 있으나, 유영모의 ‘노자’를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함석헌과 김용옥은 ‘노자’를 기독교와 과학이라는 두 요소를 의식적으로 개입시키면서 번역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다만 함석헌의 번역이 화해적이라면 김용옥은 긴장적이라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

깔끔한 한글표현이 장점인 김용옥의 번역 ‘여섯째 가름’(6장)은 “골의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 한다. 가믈한 암컷의 아랫문은 바로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고 돼있는데, 함석헌은 이를 “골짜기 검은 아니 죽어 그 이름이 까만 암컷 까만 암컷의 문이 하늘 땅의 뿌리”라고 옮긴다. 이를 보면 김용옥의 ‘노자’는 함석헌의 해석을 계승하면서 나름의 시각에서 다듬은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다만 ‘골의 하느님’은 분명 문제 있는 번역어다. ‘노자’의 ‘神’과 현대우리말 ‘하느님’의 연상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노자’는 수많은 판본을 가진 문헌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도 20세기 후반 마왕퇴와 곽점에서 ‘백서노자’와 ‘죽간노자’의 발굴은 노자연구에 새로운 자극과 가능성을 열었다. 9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이러한 신출토 문헌의 판본과 그 연구 성과를 수용한 여러 ‘노자’ 번역이 시도됐는데, 그 가운데 돋보이는 건 최진석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과 김홍경의 ‘노자: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다.


철학적 재구성의 성과, 최진석과 김홍경


최진석의 것은 한 시대가 공유하는 ‘철학적 문제의식’ 속에서 ‘노자’ 번역을 시도한다. 해석상 가장 난해한 첫 구절을 그는 새롭게 발굴된 ‘성자명출’의 “오직 인도만이 가도가 된다”는 구절을 통해 ‘可道’의 찬반 논쟁의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준다. 또한 ‘노자’에서 크게 부각된 ‘유무’의 문제는 유가와 다른 노자의 본질주의적 입장을 반영한 구절로서 ‘有無相生’은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 주고”(2장)으로 번역한다. 최신의 연구성과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최진석의 ‘노자’는 또 다른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김홍경의 ‘노자’ 또한 읽는 재미가 아주 쏠쏠한 책이다. 게다가 중국은 물론 서구학자들의 ‘노자’ 번역과 해석까지 샅샅이 연구해 반영했다. 그에 따르면 ‘노자’는 秦나라에서 편집된 문헌이며, 일종의 제왕학 서적으로서 신비주의나 형이상학, 정기양생론이 아닌 삶의 기술에 관한 어느 현자의 노래라는 문헌학적 주장까지 갖춘 도발적인 번역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번역상의 이견이 많았던 ‘上德不德, 是以有德’을 “뛰어난 덕은 덕에 마음을 두지 않으니 이 때문에 덕이 있고”와 같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번역을 구사하는 장점이 있다. 그의 번역은 그렇게 상식적 이해를 소중히 여기는 미덕이 있다. 가령, 42장의 ‘萬物負陰而抱陽’을 “만물은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껴안아”라고 한 건 난해한 음양론적 해석을 상식적 의미로 바꾸어 놓은 전형적인 번역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식성을 ‘노자’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노자’의 우리말 번역서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은 善本인가를 따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여기서 두 가지 기준, 즉 한글번역이란 측면과 학술적 토대라는 두 입장에서 각각 두 가지를 선정해 간단히 살펴봤다. 물론 여기엔 필자의 개인적 선호가 상당히 작용했고, 다른 필자라면 다른 판단이 나올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건 최근 쏟아져 나오는 주석서 번역에 대해서다. 예컨대 왕필의 ‘노자’는 두 가지, 하상공의 ‘노자’도 두 가지, 백서본 ‘노자’와 초간본 ‘노자’도 이미 번역됐다. 이 가운데 이석명의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는 판본상의 문제, 치밀한 연구에 바탕했기에 돋보인다. 우리가 흔히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준다(상대적이다)”는 뜻으로 읽는 2장의 ‘難易之相成’이 하상공에 따르면 “어려움을 보면 쉬움을 행한다”는 뜻이다. 즉 상대적 세계관을 표현한 언명이 아니라 행위적 지침으로 읽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석명의 ‘노자’는 ‘노자’의 이해가 시대마다 달랐고, ‘노자’의 번역이 다양할 수 있으며, 과거에도 그랬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좋은 사례다.

과거의 ‘노자’ 번역은 도가 연구자에 의한 것이 아닌 한학자에 의한 것, 개인적 관심이나 취향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전문가가 심화된 연구에 바탕해 번역한 성과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일 주석서의 경우도 2종 이상의 번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통사회에서 ‘노자’가 다양한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했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다양한 관심에서 다양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노자’를 마주하는 상황에 다다른 듯하다. 즐거운 일이다.


김시천 / 호서대·동양철학


필자는 숭실대에서 ‘노자의 양생론적 해석과 의리론적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철학에서 이야기로―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 등의 저서가 있다.



[노바당]; 참고 자료


통행본(<노자 왕필 주>)의 <노자> 1장 원문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고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차양자동출이이명 동위지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함석헌

길 길할 수 있으면 늘 길 아니요

이름 이름할 수 있으면 늘 이름 아니라

이름 없음이 하늘 땅의 비롯이요(없음을 이름하야 하늘 땅의 비롯이라 하고)

이름 있음이 모든 것의 어미다.(있음을 이름하야 모든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하고저함 없이 써 그 아득함을 보고(늘 없음은 써 그 아득을 보고저 하고)

늘 하고저함 있어 써 그 끝을 보나니(늘 있음은 써 그 갈래길을 보고저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이름은 다르나 같이 일러 까맣다

까맘의 또 까맘이

뭇 아득의 오래니라.




김용옥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만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앞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믈타고 한다.

가믈고 또 가믈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최진석

도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이 세계의 시작을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언제나 무를 가지고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나타내려 하고,

언제나 유를 가지고는 구체적으로 보이는 영역을 나타내려 한다.

이 둘은 같이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같이 있다는 그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







<마왕퇴 백서 노자> 하편 첫 부분/ 갑본, 을본 상호보충 원문



道可道也非恒道也 名可名也非恒名也 도가도야비항도야 명가명야비항명야

無名萬物之始也 有名萬物之母也 무명만물지시야 유명만물지모야

故常無欲也以觀其妙 常有欲也以觀其所曒 고상무욕야이관기묘 상유욕야이관기소교

兩者同出 異名同謂 양자동출 이명동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김홍경 (백서 <노자> 번역>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불려질 수 있다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처음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을 때 그 미묘함을 보고

항상 욕심이 있을 때 그 밝게 드러난 모습을 본다.

두 가지는 한곳에서 나와서 이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같으니

현묘하고 또 현묘해서

모든 미묘함의 문이 된다.


#김시천
#노자번역
#함석헌
#김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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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3

노바당의 취미 생활 : 이경숙노자 비판 21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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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31

[지혜의 향연] 도덕경,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힘 (김시천 교수)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 『노자』와 『장자』, 함곡관(函谷關)에서 종로(鐘路)까지 - 대학지성 In&Out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 『노자』와 『장자』, 함곡관(函谷關)에서 종로(鐘路)까지 - 대학지성 In&Out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 『노자』와 『장자』, 함곡관(函谷關)에서 종로(鐘路)까지

대학지성 In & Out 기자
승인 2020.08.02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9강>_ 김시천 상지대학교 교수의 「<노자> <장자> -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9강 김시천 교수(상지대 교양대학) 강연의 주요 대목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시천 교수는 노자(老子)가 지었다는 책, 『도덕경(道德經)』 혹은 그의 이름을 딴 『노자』와 그리고 『장자(莊子)』라는 “두 텍스트에 들어 있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을 소개”하는 대신, 주(周)나라 시절 함곡관(函谷關)에서의 『노자』와 20세기 한국 종로에서 강연을 통해 확산된 『노자』 사이 “차이와 간극을 보여주려” 한다고 이야기한다. “달리 말해 『노자』라는 위대한 ‘전통’의 기원이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논리적 비약과 시대의 초월을 통해 우리의 ‘상식’과 그것이 터 잡고 있는 ‘현실’의 기반 위”에서, “한국에서 ‘노장(老莊)’ 읽기가 갖는 독특성과 현주소를 ‘무위(無爲)’를 중심으로 조망”해보고자 한다고 말한다.
▲ 지난 7월 4일, 김시천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노자』와 『장자』, 함곡관에서 종로까지

공자(孔子)가 살아 있던 시절의 어느 날, 주(周)의 수장실(守藏室) 사관인 노자(老子)는 함곡관(函谷關)을 나서 서쪽의 변경으로 길을 떠난다. 관문을 지키던 관리가 노자가 기이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노자는 ‘도(道)’와 ‘덕(德)’에 관한 두 편으로 된 5000여 글자를 남기고 훌훌 떠났다고 한다. 이것이 한(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기록한 ‘노자’와 그가 지었다는 책, 『도덕경(道德經)』 혹은 그의 이름을 딴 『노자(老子)』에 얽힌 전설이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한국의 종로, 1970년 4월 19일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 씨알 함석헌은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 『노자』와 『장자』를 주제로 공부 모임과 공개강좌를 진행했다. 이 강좌에서 함석헌은 “박정희가 유교의 충효를 강조한 데 반해 노장(老莊)의 자유 정신과 초월 사상을 강조했다.” 특히 『도덕경』은 씨알의 삶에 최소한의 간섭만을 하는 최상의 통치자의 모습으로 ‘무위(無爲)’를 주장하는데, 이는 곧 함석헌이 보기에 최소의 정부가 최선이며 소외된 소수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에게 『노자』의 ‘무위’는 무정부주의적인 정치의 모범이자 씨알의 사회 정치적 참여를 가능케 하는 것인 동시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서구 문명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동양적’ 대안으로 보였다. ‘무위’가 무엇보다 치자들의 씨알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이자 씨알 저항의 토대였던 것이다. 사실상 이런 저항적 의미의 ‘무위’는 『노자』가 아닌, 오로지 『장자(莊子)』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이념이자 실천 논리였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노장 전통(老莊 傳統, the Lao-Chuang tradition)’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과연 함곡관을 떠나며 남겼다는 그 책이, 1970년대 종로 YMCA에서 함석헌이 강론한 책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문제가 많은 태도’이자 어쩌면 황당한 판타지 소설에 가까울지 모른다. 한자로 된 ‘원문(原文)’을 읽는 것이 곧 그 텍스트가 가진 ‘원(原, original)’ 사상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몰역사적인 시각 또한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노자』와 『장자』라는 두 텍스트에 들어 있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을 소개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관심은 함곡관의 『노자』와 종로의 『노자』의 차이와 간극을 보여주려는 데에 있다. 달리 말해 『노자』라는 위대한 ‘전통’의 기원이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논리적 비약과 시대의 초월을 통해 우리의 ‘상식’과 그것이 터 잡고 있는 ‘현실’의 기반 위에서, 21세기 한국에서 ‘노장’ 읽기가 갖는 독특성과 현주소를 ‘무위’를 중심으로 조망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을 찾아서

20세기 『노자』와 『장자』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새로운 문헌의 발굴 덕분이었다. 특히 1973년 마왕퇴(馬王堆) 백서(帛書) 『덕도경(德道經)』의 발굴은 『노자』에 대한 해석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노자』에 대해 ‘도(道)’ 중심의 해석에서 ‘덕(德)’ 중심의 해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도’가 고대 그리스의 ‘로고스(logos)’에 비견되면서 우주론, 인식론 등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 유사한 것으로 해석되던 경향은, 1980년대 이래 보다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해석과 사상사적 접근으로 전환되었다. 아마도 그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았던 것은 ‘황로학(黃老學)’에 대한 관심과 위진(魏晉) 현학(玄學) 논쟁이라 할 수 있다.

김용옥이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한(漢) 초(初)의 종합적 사상 경향으로 황로학에 주목할 것을 촉구한 것과 더불어, ‘현학 논쟁’은 1990년대 한국의 도가철학회를 중심으로 ‘노장(老莊)’을 역사적으로 접근하게 해주었다. 특히 ‘유무(有無)’를 논하는 고원한 형이상학 담론으로 여겨지던 위진 시대의 현학 논쟁이 실질적으로는 제도와 본성을 둘러싼 논쟁이었다는 점을 환기시켜주었다. 그 이후 한국의 ‘도가’ 연구자들은 20세기 초반 중국의 철학사가들이 만들어낸 ‘철학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주석사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백서 『덕도경』의 발굴이 가져온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노자』와 『장자』를 별개의 텍스트로 분리해 보는 시각이 체계화되었다는 점이다. 『노자』가 황로학 계열의 문헌이라는 인식은, ‘도’ 중심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관심에서 벗어나 ‘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상적 텍스트로 이해하게 되면서, 나아가 ‘도’와 ‘법(法)’의 친연성을 눈여겨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용어인 ‘도가(道家)’ 대신 ‘도법가(道法家)’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노자』는 이제 『장자』보다 『한비자(韓非子)』, 『회남자(淮南子)』 혹은 『손자(孫子)』와 같은 병가(兵家)와도 함께 해석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이러한 연구 경향의 반영이 이른바 ‘노학(老學)’ 또는 ‘장학(莊學)’으로 표현되었다면, 한국의 경우 주석사를 통해 『노자』와 『장자』를 구분하여 접근하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함으로써 ‘노장 전통’을 보다 객관적인 시야에서 조망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을 말하는 데 있어 기존의 논의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그 하나가 조선 유학자들에 의한 『노자』와 『장자』 주석 전통이라면, 다른 하나는 20세기 기독교 계열 —유영모, 함석헌은 물론 오강남, 이현주 등 다수의 저서나 역서 그리고 대중적 독자층이 있는— 사상가들에 의한 『노자』와 『장자』 해석 전통이다. 내가 보기에 함곡관을 나서서 역사를 가로질러 서울의 종로에 이르는 『노자』로 이어지는 과정은, 논리적 방법으로 이해되거나 텍스트 연구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에서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노장 전통’은 중국 철학사와 한국 철학사의 연속적 서술을 통해 해명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베이징의 『노자』와 서울의 『노자』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서는 역사의 거리, 20세기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밴 살아 있는 역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 터 잡고 있는 ‘노장 전통’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치 물리학의 퀀텀 점프처럼 해석학적 초월(the hermeneutical quantum jump)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3. 무위(無爲)의 기원과 『노자』 전승

20세기 한국인에게 『노자』 하면 가장 친숙한 표현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된 ‘무위자연’은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지”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포털사이트에서 ‘무위자연’을 검색하면 언제나 ‘도가’ 또는 노자와 함께 검색어로 추천된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 ‘무위’는 노자가 아닌 공자가 최초의 발화자이며, 사전적 정의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의미는 『노자』와는 상관이 없고, 『장자』와 결합되면서—즉, ‘노장’ 전통— 등장하는 전혀 새로운 의미이다.

역사상 ‘무위’를 가장 처음 언급한 것은 공자의 『논어(論語)』이다. 공자는 “무위하면서 다스렸던 분은 아마도 순(舜)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남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논어』 「위령공(衛靈公)」)라고 말한다. 이는 「위정(爲政)」에서 덕치(德治)—더불어 군주가 덕으로 다스릴 때 모든 신하가 자신에게 주어진 적절한 예(禮)를 행함으로써 전체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는 예치(禮治)가 구현된 상태—를, 마치 가만히 있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뭇 별이 공전하듯이 도는 모습에 비유한 것과 연결되어 이상적인 통치를 묘사하는 말로 해석되곤 한다. 그런데 공자의 이 비유는 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제자백가 공통의 유산이기도 했다.

가장 앞서 ‘무위’가 고대 중국의 역사 과정과 어떤 연관을 갖는가를 잘 보여준 것은 크릴(H. G. Creel)이다. 크릴은 『노자』의 무위의 기원을 소급하면서 공자를 언급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은 신불해(申不害)로부터 기원하는 통치 행정과 관련된 기술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고대 중국의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출현과 그에 따른 관료제의 발전의 근거를 ‘무위’와 연관 지어 이해한 것이다. 즉 신하의 유위(有爲)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국가 행정과, 이에 대해 인사권, 감찰권, 상벌권을 운용하면서 이루어지는 군주의 무위는 『노자』의 “무위를 행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3장: 爲無爲則無不治)”라는 문장을 깔끔하게 이해시켜준다.

하지만 크릴의 설명은 고대 중국에서 관료제적 통치 체제로서의 ‘무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생, 발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해명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도가적 무위’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숙제로 남기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노장사상’이 등장하는 배경이자 맥락이 된다. ‘노장사상’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나는 ‘노장사상’에 대한 정확한 의미 규정은 “유학자들이 『장자』를 통해 해석하는 『노자』 전승”이라고 보고 싶다.

4. 『장자』의 ‘무위’와 ‘노장 전통’

『노자』 계열의 문헌군에서는 ‘노장 전통’의 싹을 찾아볼 수 없다. ‘노자 전승’이란 『노자』라는 ‘텍스트’와 다양한 고사가 엮이는 과정이며, 다른 한편 한 초의 공자 전승과 노자 전승이 대립하는 정치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하지만 『노자』의 무위와 『장자』의 무위는 본래부터 전혀 상이한 의미와 맥락을 지닌 것이었다. 오늘날 『노자』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된 첫 문장 “도를 도라 말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에 대해 「도응훈」은 수레바퀴 깎는 장인인 윤편(輪扁)과 제(齊) 환공(桓公)의 고사를 인용해 설명한다.

성인의 글을 읽고 있던 환공에게 윤편이, 알맹이는 성인이 가슴에 품고 죽었으니 다만 찌꺼기만 남았을 것이라 조소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노자를 운운하며 “도를 도라 말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를 인용한다. 이는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언어철학보다는 노하우(know-how)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도응훈」이 보여주는 『노자』 이해는 매우 실제적이고 명쾌하며, 지극히 정치적이다.

사실 이러한 해석의 기조는 『노자』의 ‘무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에게 오늘날 친숙한 ‘무위자연’의 개념이 『노자』에는 없다. 『노자』에서 ‘무위’의 주체가 성인 혹은 후왕(侯王)이라면 ‘자연’의 주체는 만물이다. 즉 일반적인 구조는 “주체인 성인의 무위를 원인으로 객체인 만물의 자생성(자발성)이 결과로서 도출된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형성된 ‘무위’는 모두 통치 행위와 관련되지만 유일하게 이에 대한 저항적 혹은 비판적 의미의 ‘무위’가 등장하는데 이는 『장자』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사상이다. 이 무위는 『장자』의 ‘소요(逍遙)’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서 일종의 자유 혹은 불간섭의 상태와 같은 맥락을 보여준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마지막 이야기에 나오는 혜시와의 대화에서, 혜시(惠施)가 장자의 말은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다며 박에 비유하고 나무에 비유하며 조롱하자 장자는 이렇게 답한다.

장자가 이에 대해 말하였다. “그대로 살쾡이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몸을 바짝 낮추고 엎드려서 나와 노는 작은 짐승들을 노리고 또 먹이를 찾아 동으로 서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덫에 걸리기도 하고 그물에 걸려 죽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저 이우(斄)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으니 이 소는 크기는 하지만 쥐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 이제 그대에게 큰 나무가 있으면서도 그 나무의 쓸모없음이 걱정이 된다면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고을, 끝없이 펼쳐진 광원막대한 들판에 심어놓고 그 옆에서 자유롭게 거닐면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고 그 아래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낮잠이라도 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이 큰 나무는 도끼에 잘릴 염려도 없고 아무도 해칠 자가 없을 것이니 세속적인 쓸모가 없긴 하지만 괴롭게 여길 것 하나도 없다.”(『장자』 「소요유」)


장자의 무위는 여기서 앞서 등장했던 군주의 통치 행위와 전혀 상이한 맥락으로 바뀌어 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림[無爲]”은 ‘방황(彷徨)’과 짝하고, “누워서 잠자기[寢臥]”는 소요(逍遙)와 짝하며 서술된다. 실상 여기서 묘사하는 ‘방황’과 ‘소요’는 현대의 해석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절대 자유의 경지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도 해칠 자가 없는 상태”에서 오는 여유로움, 즉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고 농사짓는 농사꾼이 한낮에 가질 수 있는 잠시의 빈둥거림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란(戰亂)과 정치적 갈등으로부터 오는 부정적 심리는 장자에게서 인간에 대한 무정한 태도를 촉발한다. 혜시가 장자에게 ‘무정’의 의미를 따지자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자네의 말은 내가 말하는 ‘정’이 아니라네. 내가 ‘무정하다’고 하는 말은,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으로 안으로 자신을 해치지 않고, 늘 자연을 따라 ‘타고난 생명[生]’에 무언가를 더 보태려 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라네.”(『장자』 「덕충부(德充符)」)

『장자』의 후학들에게서 염담(恬惔), 적막(寂漠), 허무(虛無), 무위(無爲) 등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태도는 자유에 대한 갈구 이전에 상처받지 않고자 하는 본능이며, 자신을 복속시키려는 외부의 강력한 힘을 통제하지 못할 때 스스로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스스로의 감정만이라도 다스리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 치유였다. “마음의 죽음[心死]”(「전자방(田子方)」)이라도 모면하고자 하는 처절한 외침이다.

이런 ‘무정’과 ‘무위’는 군주에서 개체로, 정치에서 삶으로 그 축을 뒤흔들어 놓는 주체의 변화를 가져온다. 전국에서 한 초의 혼란기에 저술된 『장자』의 편들은 하나로 묶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서가에 잠든 채 읽히지 않다가 진퇴(進退)의 고뇌를 다시 겪어야 했던 위진(魏晉)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유행하게 되면서 『장자』가 널리 읽히고, 오히려 『노자』를 『장자』를 통해 해석하며 새로운 흐름으로서 ‘노장 전통’을 세우게 된다.

5. ‘도화원기(桃花園記)’와 조선조 『노자』의 ‘도’

사실 ‘노장 전통’을 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철학보다는 문학과 예술이다. 진(晉) 태원 연간의 전란기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귀거래(歸去來)’를 읊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이런 정조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노장 전통’이라 부르는 일종의 문화적 감수성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이르러 완성된다. ‘노장 전통’은 단지 『노자』와 『장자』라는 텍스트 속의 관념으로 이루어진 사상 체계가 아니라, 정치와 전쟁이라는 험난한 삶의 체험이 갈마들고, 조(朝)와 야(野)를 넘나드는 진퇴(進退)의 부침 속에서 피어난 일종의 심태(心態)이자 문학과 예술로 표현되는 내면의 풍경이기도 하다.

이는 송유(宋儒)에 의해 왕필(王弼)의 『노자』가 재발견되고,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면서 유사한 체험을 지닌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공동의 유산이 되었다. 비록 이단(異端)으로 치부되었음에도 널리 읽혔던 『노자』와 『장자』는 조선에서 5종의 주석서를 남기는데, 그런 조선조 ‘노장 전통’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계기는 ‘도’가 ‘리(理)’가 되고, 둘 다 ‘자연(自然)’으로 수렴된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인들이 지닌 『노자』에 대한 이해에 가장 가까운 저서는 실상 홍석주의 『노자』이다.

도(道)란 저절로 그런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도로 여겨야 한다고 하면 인위적인 것으로 헤아린 것이니, 내가 말한 저절로 그런 도가 아니다. 도는 하늘서 나왔고, 이름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있게 되었다면 또한 저절로 그런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이름으로 여겨야 한다고 하면 이름과 실질이 나뉘고 지(知)와 교묘함이 일어나니, 또 내가 말한 저절로 그런 이름이 아니다.

상(常)이란 저절로 그런 것을 말한다. 사람의 힘으로 작위하는 것은 반드시 오래갈 수 없다. 오래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오직 저절로 그런 도이니, 이를테면 하늘이 높고 땅이 두텁고 해와 달이 빛나고 산악이 우뚝 솟아 있고 강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것들이며, 사람에게는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의 윤리가 만고에 구하여 변할 수 없는 것들이니, 모두 저절로 그런 것일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항상된 것이다.(『정노(訂老)』, 김학목 역, 2001: 33-34)

홍석주의 『노자』 이해에서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와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의 원리는 『노자』의 도에서 하나가 되고, 그것은 다시 리(理)로서 일종의 섭리처럼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섭리의 대명사로 ‘자연’은 최고 상위의 원리처럼 이해되어 나간다. 이제 이러한 ‘도’ 혹은 ‘자연’은 하나가 되어 20세기 한국의 『노자』 이해의 기반이 되고, 모든 인위에 대립하면서 궁극의 지위 혹은 신의 섭리와 같은 위상으로 올려지게 된다.


6. 함석헌과 ‘노장 전통’: 성인의 무위, 씨알의 무위

『노자』 60장에 보면 “치대국(治大國), 약팽소선(若烹小鮮)”, 즉 “큰 나라 다스림이 작은 생선 지짐 같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 보면 정치의 신중함을 조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70년대 종로 YMCA회관에서 씨알 함석헌이 들려주는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생선을 지지는 법인즉 건드리면 못쓴다. 건드리면 다 부스러져 그 맛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작은 생선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작은 생선을 지지는 사람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나라는 큰 것이지만, 잘못하면 상하기 쉬운 것이 작은 생선 같으니, 정치하는 사람이 특별히 마음을 써서 국민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 그러니 정치하는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해서 재주보다 원리 원칙을 믿어야 하고, 국민은 또 이것을 알아 설혹 정치가 건드리고 못살게 굴더라도 절대 건드림을 받지 않는 정신을 길러야 할 것이다. 즉 스스로를 작은 생선으로 알고 지켜야 한다. 그 작다는 데 깊은 진리가 있다.”(함석헌)

오늘날 우리가 ‘노장’ 해석에서 상식적으로 강조하는 자연주의, 평화주의, 불간섭주의의 지향과 그 보편적 의의를 강조하는 태도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 역사적ㆍ현재적 해석 갈래와 차별화되는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의 특징이다. 따라서 2000여 년에 걸친 역사상의 수많은 노장 해석의 갈래에서 보면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는 독창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함석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너무나 자연스러운 『노자』 해석으로 받아들인다. 함석헌에게 ‘건드리지 말라’는 것은 권위주의적 정부가 씨알을 간섭하는 것, 인위적 개입[有爲]으로 자연성을 파괴하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논의이다. 이러한 함석헌의 이야기는 198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붐을 타고 일어난 ‘노장’의 생태주의ㆍ환경철학적 해석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20세기가 저물어갈 때 도올 김용옥은 이를 ‘허(虛)의 무위론’으로 발전시킨다.

노자는 그 컵을 채우려는 인간의 행위를 유위라고 부른다. 유위란 곧 존재에 있어서 허의 상실이다. 그러니까 그 반대 방향의 행위, 즉 빔을 극대화(極大化)하는 방향의 인간의 행위를 바로 무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 노자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채우는 방향의 우리의 심적 작용이 곧 유위요, 마음을 비우는 방향의 심적 작용이 곧 무위인 것이다.(김용옥)

도올의 해석에 따르면, 『노자』는 “빔(emptiness)=가능태(potentiality)”의 철학을 천명한 동양 자연주의의 중요한 한 전형이며, 전통 동아시아 사상의 핵을 이루는 중요한 고전이다. 이러한 도올의 해석은 이미 함석헌의 ‘이야기’ 속에 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일반적으로 『노자』는 유위 : 무위, 문명 : 자연, 간섭 : 아나키, 사회적ㆍ규범적 가치 : 자연적ㆍ소박한 사회 모형에서 후자를 주창했으며, 정신의 자유를 주창한 철학 전통이라고 이해된다.

이와 같은 함석헌의 이야기는 『노자』 해석의 전통에서 볼 때 연속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장 전통’은 하나의 선형적인 주석 전통이 아니라, 『노자』는 『장자』를 통해 재해석의 과정을 거치고 역사와 삶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해석학적 초월’을 함으로써 오늘의 ‘노장 전통’에 이른 것이다.

적어도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는 서구 과학과의 화해를 긍정하였고, 또한 ‘근대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관점에서 『노자』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정도에 비례하여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는 전통과 불연속적이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의 노장 이야기는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노자』에는 인권, 민주주의, 권리와 같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노자』를 읽던 제왕과 그 측근들의 손에서 벗어나 『장자』를 통해 읽어온 사람들이 사대부, 씨알로 변천하면서 형성된 ‘노장 전통’은 오늘 지금 여기 씨알의 자리까지 와 있다. 거기서 우리는 대자연의 섭리이든 신의 명령이든 “건드리지 말라”로 압축되는 일종의 비판철학에 마주하고 있다.

‘무위자연’은 애초부터 하나의 말이 아니었으나, 이제 한국의 현실에서 ‘무위자연’은 정치와 평화, 생태와 환경, 더 나아가 삶의 안정과 정신적 내면 상태를 호위하는 강력한 무기로 호명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베이징의 『노자』와 서울의 『노자』가 다른 지점일 수 있고,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를 결정할 커다란 힘이 될 수도 있다. 그 의미가 어떻게 규정되는가는 바로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천에 달린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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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지성 In & Out 기자

2021/05/26

알라딘: 펑유란 자서전

알라딘: 펑유란 자서전


펑유란 자서전 - 현대사의 격랑에 맞선 한 철인의 삶   
펑유란 (지은이),김시천,황종원,송종서,이원석 (옮긴이)웅진지식하우스201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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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624쪽152*223mm (A5신)1123gISBN : 9788901136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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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사상 최초로 중국 철학의 방대한 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적의 철학자이자 근현대 격동기 중국의 희망과 좌절을 함께 느끼며 살아낸 민중의 철학자 펑유란. 그는 격변의 시기에 서양의 물질문명을 부러워하지도, 국수적으로 중국의 전통을 고집하지도 않고 동양과 서양, 근대와 전근대의 사이에서 단단히 균형을 잡은 진정한 지성인이다.

<펑유란 자서전>은 동양 문화의 정수를 복원한 철학의 화신 펑유란의 유일한 자서전이다. 철학을 안고 역사를 짊어진 인생을 담담하게 풀어놓는 이 책을 통해, 학인(學人) 펑유란의 학문과 인간과 시대를 느낄 수 있다. 평생을 학문에 헌신하고 죽는 순간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은 이의 열정과 사유, 열린 세계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목차
옮긴이의 말

제1부 사회

1장_청 제국 말기 : 농사와 공부의 가문 | 한 가정의 글공부 | 충양 현관 발령길 | 관아 도련님이 본 풍경 | 열 경의 땅을 일군 어머니 | 수재가 되어 가업을 잇다

2장_민국시대 : 혁명 속 귀향, 중화민국이 수립되다 | 파란 속의 대학 시절 | 근본적인 힘, 칼과 돈 | 새신랑 미국 유학에 나서다 | 접시를 닦으며 공부하다 | 신임 대학교수 펑유란 | 과거제도에 통탄하다 | 안심입명을 바라는 학자 | 서방의 봉건 사회 영국을 만나다 | 유럽과 미국, 그리고 중국 |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다 | 피란 행렬 속 학도들 - 시난 연합대학교 | 전란 속에서 가르치고 배우다 | 장제스의 거짓 입헌을 보며 | 여장부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 | 승리 그리고 또 다른 격동의 서막

3장_중화인민공화국 시기 : 혁명의 불길 타오르다 | 또 다른 혁명의 나라 인도 | 철학을 지니고 세계를 누비다 | 마오쩌둥과 나눈 계급과 철학 이야기 | “중국인이 일어났다!” | 홍위병, 철학자에게 모자를 씌우다 | 빼앗긴 집과 흩어진 책 | 격랑에 휩쓸리며 나아가다 | 집으로 돌아오다 | 마오와 저우를 위한 시 한 수

제2부 철학

4장_1920년대 : 철학문에 들어서다 | 사상은 동서양으로 나뉘지 않는다 | 철학, 그 새로운 인생

5장_1930년대 : 대강이 아닌 철학사 | 고전 믿기와 고전 의심하기 | 나의 『중국철학사』|《철학평론》 편집장이 되어

6장_1940년대 : 인류의 정신을 반성하다 | 자연, 진정한 철학의 문제 | 사회, 마르크스주의로 사유하다 | 인생, 안심입명을 구하다 | 또 다른 저서들 | 차이를 인식하고 또 초월하라

7장_1950년대와 그 이후 :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 | 추상이냐 구체냐 | 반론 공세를 받다 | 도덕과 사회의 관계 | 마오쩌둥의 『실천론』을 말하다

제3부 대학

8장_베이징 대학교 : 태학을 기원으로 삼다 | 각양각색 총장들 | 탁 트인 학문의 전당

9장_칭화 대학교 : 세계를 배우는 학교 | 학술화의 성공 | 대학의 임무란 무엇인가 | 항일운동을 지원하다

10장_시난 연합대학 : 전란 속의 상아탑 | 정치의 대학이 열리다 | 격동의 8년을 기리는 기념비

추고_ 이상을 펼치다
주석
부록_ 간추린 펑유란 후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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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40-43
아버지와 함께 관아에서 살 때, 나는 관아의 건축물에 대해 개략적인 관찰을 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소박한 건축물이기는 했으나, 일정한 구조와 형식을 지녔으며, 그러한 구조와 형식은 현관이 그 현에서 갖는 지위를 나타내고 있었다. (...) 베이징의 고궁 같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은 현 관아에 비해 수백 배, 수천 배 나아 참으로 비교하기 어렵지만, 고궁과 현 관아의 구조나 형식만큼은 일치했다. 그러므로 현 관아는 구체적이고 작은 황궁이고, 황궁은 백 배, 천 배로 확대한 현 관아라고 하겠다.  접기
P. 62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어떤 유명 인사로부터 자신은 자손대대로 한림이 나오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오로지 자손대대로 수재가 나오기만을 바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 말이 매우 일리가 있다고, 자손대대로 한림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자손대대로 수재가 나오는 것은 가능하며 또 필요한 일이라고 설명하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 학자 집안이라는 전통이 이어지고, ‘농사와 공부로 가업을 잇는’집안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접기
P. 122
“제게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사업이고, 다른 하나가 학문입니다. 사업에 있어서 저는 포부가 큰 편이 아닙니다. 그저 좋은 대학 하나를 만들고 싶습니다. 중저우 대학은 우리가 함께 만든 것으로서 저는 중저우 대학을 좋게 만드는 것을 저의 사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저에게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말하면 저는 교무주임이 되고 싶습니다. 만약 총장님께서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학문 연구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럴 경우 저는 학문의 중심지로 갈 필요가 있기 때문에 카이펑을 떠나려고 합니다.”  접기
P. 151
강연 원고를 다 쓴 후에 나는 한 부를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선생에게 부쳤다. 그는 내게 보낸 답장에서 “영국인들은 중국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십시오”라고 했다. 편지를 타자기가 아닌 손으로 썼으니, 이는 편지가 본인의 친필로 쓴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P. 272-273
회의가 끝나고 나서 마오쩌둥은 내 손을 끌어당기면서 “열심히 자기 목소리를 내세요. 백가쟁명이라 했으니 선생님은 일가(一家)를 이룬 분 아닙니까? 선생님이 쓰신 글은 빠짐없이 볼 겁니다.” (...) 나는 마오쩌둥과 류사오치(劉少奇) 좌석 바로 뒷줄 중간에 섰는데, 마오쩌둥은 자리에 앉으려고 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내 손을 잡고 “선생님 몸이 저보다 좋아 보이네요”하고 말했다. 내가 “주석님이 저보다 큽니다”라고 말하자, 마오쩌둥은“저는 틀렸습니다. 벌써 늙은 티가 납니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중국철학사 신편』의 진행 상황이 어떠냐고 묻고 “중국철학사를 다 쓰신 후에는 서양철학사도 쓰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말했다. “저는 중국 것밖에 쓸 줄 모릅니다. 서양철학사를 집필하는 임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마오쩌둥이 말했다. “공자에 대해서 선생님과 궈모뤄(郭沫若) 선생은 같은 파이시지요.”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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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철학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고자 한다면 펑유란 선생을 찾아가라. 나는 펑 선생의 글은 빠짐없이 볼 것이다. - 마오쩌둥 
펑 선생의 글은 현대 중국철학사에서 가장 해박하며 깊이가 있다. 이 분의 저서는 분명히 전 세계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칠 것이다. 수많은 한학자와 서구의 중국학자들이 그의 저서를 세기의 책이라고 보는 데 이의가 없다. - 조지프 니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1년 12월 03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1년 12월 03일 '실용기타'
조선일보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11년 12월 03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펑유란 (馮友蘭)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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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서 1895년 하남성 당하현에서 태어났다. 1918년 베이징(北京)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존 듀이 문하에서 수학하며 1924년 논문 「인생 이상의 비교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7년 프린스턴 대학 200주년 개교기념일에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와 칭화(淸華) 대학교와 베이징 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1933년에는 영국의 초청으로 영국의 각 대학에서 중국철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34년 그의 저명한 『중국철학사』 상?하권을 상무인서관에서 출간하였으며 1938년부터 이른바 ‘정원육서’라고 하는 『신리학』(1938), 『신사론』(1940), 『신세훈』(1940), 신원인』(1943), 『신원도』(1945), 『신지언』(1946)을 발표하여 자신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또한 1946년에는 본서의 영문판『간명한 중국철학사』를 출간하였다. 대륙이 공산화된 뒤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전향하였고, 196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 사상 입장에서 고쳐 쓴 『중국철학사신론』을 발간하였다. 문화대혁명(1966~1976) 기간 동안 ‘자아비판’을 거치는 등 온갖 시련을 겪어낸 뒤 1982년부터 1990년,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중국철학사 신편』(전 7권)을 완성하였다. 이 중 7책이『중국현대철학사』라는 이름으로 홍콩에서 1992년 출간되었다(역자 번역 국내 출간됨). 그 밖의 저서로는『인생철학』(1926),『중국철학논문집』 (1958),『40년의 회고』(1959)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간명한 중국철학사>,<펑유란 자서전>,<현대 중국 철학사> … 총 11종 (모두보기)
김시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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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상지대학교 교양대학에서 공부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4년부터 인문학 전문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제작, 진행해 왔고, 2020년부터는 유튜브에서 새로운 인문학을 소개하는 방송 〈휴프렌즈〉와,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사는 지혜를 모색하는 방송 〈휴애니프렌즈〉에 출연하고 있다. 그동안 쓰고 옮긴 책으로, 『철학에서 이야기로』,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논어, 학자들의 수다 : 사람을 읽다』, 『무하유지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장자』, 『죽은 철학자의 살아 있는 위로』(공저), 『마이클 샌델, 중국을 만나다』(공역), 『펑유란 자서전』(공역)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동양철학산책>,<똥에도 도가 있다고?>,<근대 사상의 수용과 변용 1> … 총 44종 (모두보기)
황종원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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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유학과를 졸업하고 베이징대학에서 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이징대학 한국어문화학과에서 부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단국대학교 철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유가철학, 한중 근현대 철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는데, 주요 논저로는 『장재철학』(2010),『한국에 영향을 미친 중국 근대 지식과 사상』(2019), 『한국을 다시 묻다: 한국적 정신과 문화의 심층』(2016),「이택후 서체중용론의 정치사상적 함의와 기술철학적 토대」(2019),「최시형의 생태학적 사유와 평화」(2018),「하린의 지행합일신론 연구」(2017)... 더보기
최근작 : <시대 속의 맹자, 주제 속의 맹자>,<동아시아 전통 지식 이론의 발전과 그 근대적 굴절>,<지식의 확산과 공유> … 총 29종 (모두보기)
송종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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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홍콩중문대학, 중국 우한대에서 현대 신유가들의 저작을 읽었고, 「현대 신유학의 형이상학과 문화의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현대 신유학의 역정』 『한국유학과 열린 사유』(공저) 등이 있다. 공역으로 『중국과 한국의 포스터 디자인 미학』 『도가 철학 이야기 100』 『불교 철학 이야기 100』 『선 철학 이야기 100』 『펑유란 자서전』 등이 있다.
최근작 : <현대 신유학의 역정>,<한국유학과 열린사유> … 총 7종 (모두보기)
이원석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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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에서 「북송대(北宋代) 인성론 연구」(2011)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공저로 근현대한국총서 시리즈 여섯 권(『서학의 충격과 접변』, 『동도서기의 의미지평』, 『서양 정치사상과 유교 지평의 확장』, 『사회사상과 동서접변』, 『동서사상의 회통』, 『동서접변 연구의 평가와 전망』)이 있고(2020), 역서로 『주희의 역사세계』(2015), 『이 중국에 거하라』(2012), 『주자와 양명의 철학』(2012)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정조와 윤행임의 「대학장구 서문」 해석과 인물성... 더보기
최근작 : <성리와 윤리>,<사회사상과 동서접변>,<서양 정치사상과 유교 지평의 확장> … 총 12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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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강원국의 어른답게 말합니다>,<인간 생존의 법칙>,<수학이 만만해지는 책>등 총 270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1위 (브랜드 지수 225,331점), 심리학/정신분석학 2위 (브랜드 지수 303,872점), 경제학/경제일반 4위 (브랜드 지수 265,954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철학에 대해 약간이나마 알고자 한다면
펑유란을 찾아가라”-마오쩌둥
동양 문화의 정수를 복원한 철학의 화신 펑유란
유일한 자서전으로 읽는 파란만장한 인생과 역사의 궤적

“이 책을 다 쓰고 나면 나를 죽게 내버려 두어라”
배우고 깨우치는 힘으로 혼돈의 시대를 건넌 대가의 삶을 만난다

청나라가 중화인민공화국이 된 시대, 그 혼돈과 변화의 세월을 살아갔던 철학자가 있다. 사상 최초로 중국 철학의 방대한 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적의 철학자이자 근현대 격동기 중국의 희망과 좌절을 함께 느끼며 살아낸 민중의 철학자 펑유란. 그는 격변의 시기에 서양의 물질문명을 부러워하지도, 국수적으로 중국의 전통을 고집하지도 않고 동양과 서양, 근대와 전근대의 사이에서 단단히 균형을 잡은 진정한 지성인이다.
철학을 안고 역사를 짊어진 인생을 담담하게 풀어놓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학인(學人) 펑유란의 학문과 인간과 시대를 느낄 수 있다. 철학이라는 인류 정신의 빛나는 동력을 배우고 가르치며 격동의 20세기를 살아낸 철인의 삶은 오늘날 중국을 이해하는 동시에 혼란에 빠진 현대를 읽어낼 수 있는 프리즘이 된다.
철학이라는 소명으로 온 생애를 후회 없이 살아갔던 거장의 모습은 아름답다. 평생을 학문에 헌신하고 죽는 순간까지 배움을 멈추지 않은 이의 열정과 사유, 열린 세계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이 책에서 우리는 한 시대의 거대한 초상과 만나게 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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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천교수의 함석헌과 『노자』1-14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김시천교수의 함석헌과 『노자』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제2강 『노자』에 관하여
제3강 『노자』와 무위 1
제4강 『노자』와 무위 2
제5강 『노자』와 페미니즘 1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제9강 상상력과 과학
제10강 『노자』와 자연
제11강 『노자』와 성인 1
제12강 『노자』와 성인 2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2021/05/25

알라딘: [전자책] 노자도덕경주 왕필 (지은이),김시천 (옮긴이)

알라딘: [전자책] 노자도덕경주

[eBook] 노자도덕경주 - 노자도덕경주  pdf 
왕필 (지은이),김시천 (옮긴이)전통문화연구회2018-08-28 



노자도덕경주


전자책정가
15,000원
종이책 페이지수 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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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왕필의 ≪노자주≫를 저본으로 동양의 역대 주석서를 비롯하여 현대 중국에서 발굴된 마왕퇴백서본馬王堆帛書本 ≪노자≫와 곽점초간본郭店楚簡本 ≪노자≫를 검토⋅종합하였으며, 특히 서양의 연구 성과를 대폭 채용하여 역주에 반영함으로써, 동양뿐 아니라 서양의 연구 경향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또한 1951년 왕유성王維誠이 처음 확인한 왕필의 저서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의 번역을 부록하여 왕필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사기史記≫ <노자열전老子列傳>도 번역하여 부록함으로써 노자의 삶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노자의 양생론적 해석과 의리론적 해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학자 김시천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책이다. 김시천 교수는 디지털인문학연구소에서 동양고전 전문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통해 ≪노자≫에 관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노자≫ 전체 81장의 각 장章에 해설을 달아 설명함으로써 일반 독자들도 쉽고 편안하게 노자의 사상을 읽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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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東洋古典譯註叢書를 발간하면서
解 題
參考書目
凡 例

老子道德經注 上篇
제1장 / 49
제2장 / 57
제3장 / 63
제4장 / 69
제5장 / 73
제6장 / 79
제7장 / 83
제8장 / 85
제9장 / 88
제10장 / 91
제11장 / 97
제12장 / 100
제13장 / 103
제14장 / 107
제15장 / 111
제16장 / 115
제17장 / 121
제18장 / 124
제19장 / 127
제20장 / 129
제21장 / 135
제22장 / 139
제23장 / 143
제24장 / 149
제25장 / 153
제26장 / 160
제27장 / 164
제28장 / 169
제29장 / 175
제30장 / 178
제31장 / 182
제32장 / 184
제33장 / 188
제34장 / 191
제35장 / 194
제36장 / 197
제37장 / 200

老子道德經注 下篇
제38장 / 203
제39장 / 213
제40장 / 217
제41장 / 221
제42장 / 227
제43장 / 232
제44장 / 235
제45장 / 237
제46장 / 240
제47장 / 242
제48장 / 245
제49장 / 248
제50장 / 253
제51장 / 256
제52장 / 260
제53장 / 265
제54장 / 268
제55장 / 271
제56장 / 276
제57장 / 280
제58장 / 284
제59장 / 289
제60장 / 293
제61장 / 296
제62장 / 301
제63장 / 305
제64장 / 308
제65장 / 313
제66장 / 316
제67장 / 318
제68장 / 322
제69장 / 324
제70장 / 327
제71장 / 331
제72장 / 333
제73장 / 336
제74장 / 340
제75장 / 342
제76장 / 344
제77장 / 346
제78장 / 348
제79장 / 351
제80장 / 353
제81장 / 356

[附錄 1]
老子微旨例略 上篇
제1장 / 359
제2장 / 363
제3장 / 368

老子微旨例略 下篇
제4장 / 370
제5장 / 371
제6장 / 374

[附錄 2]
老子列傳 / 382

[附錄 3]
索 引 / 393

[附錄 4]
圖版 目錄 /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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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왕필 (王弼) (지은이) 
중국 삼국시기 위나라 사람이며, 산양 가오평에서 태어났다. 字는 보사이며 상서랑을 지냈다. 위진 현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유가와 도가를 회통하는 현학적 시각으로 18세에 '노자주'를, 20대 초반에 '주역주'를 지어 이름을 떨치다 23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저서로는 <노자주>, <주역주>및 <논어석의>가 남아있다.
최근작 : <譯註 老子道德經注>,<주역 왕필주>,<왕필의 노자주> … 총 17종 (모두보기)


김시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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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상지대학교 교양대학에서 공부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4년부터 인문학 전문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제작, 진행해 왔고, 2020년부터는 유튜브에서 새로운 인문학을 소개하는 방송 〈휴프렌즈〉와,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사는 지혜를 모색하는 방송 〈휴애니프렌즈〉에 출연하고 있다. 그동안 쓰고 옮긴 책으로, 『철학에서 이야기로』,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논어, 학자들의 수다 : 사람을 읽다』, 『무하유지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장자』, 『죽은 철학자의... 더보기
최근작 : <동양철학산책>,<똥에도 도가 있다고?>,<근대 사상의 수용과 변용 1> … 총 4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 동양아시아 전통의 문을 연 신비한 고전古典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부르는 ≪노자老子≫는 중국의 선진시대에 출현한 이래, 동아시아의 전통사상과 문학, 예술, 종교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천언五千言이라 불릴 정도로 짧은 문헌이지만, 그 문장의 간결함과 함축성 때문에 지극히 다양하게 해석되고 이해되어 왔다.
특히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라 할 수 있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비롯한 여러 고대문헌에서, 유가儒家의 성인聖人 공자孔子가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는 유명한 일화와 어우러져 ≪노자≫는 그 출발부터 역사와 전설의 공간을 넘나들며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때로는 공자조차 예를 물었을 정도로 지혜로운 고대의 현인賢人으로, 때로는 불사不死의 선인仙人으로, 후한後漢 이래로는 교단화된 도교道敎의 신神으로, 또 불교佛敎의 진리를 체현한 위대한 스승으로 추앙되면서 전설적 인물이 된 노자는, 그가 세상을 떠나 은둔하면서 남겼다는 ≪노자≫를 그만큼 신비로운 고전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 위진현학魏晉玄學을 대표하는 천재, 왕필王弼
왕필(226-249)의 자字는 보사輔嗣이다. 사회정치적으로 지극히 혼란한 삼국시대三國時代를 살다간 천재 왕필은 후한後漢에서 조위시대曹魏時代까지의 유력한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왕필의 조부 왕개王凱가 유표劉表의 딸과 혼인하였고, 또 후일에 위魏 문제文帝의 주선으로 왕필의 아버지 왕업王業이 ‘건안칠자建安七子’로 불리는 왕씨 가문의 가장 유력한 인물 왕찬王粲의 양자로 들어가, 왕필은 유표의 외손자이자 왕찬의 후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왕필의 학문은 역학易學의 명가 왕창과 유표의 형주학풍荊州學風을 모두 잇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왕필은 24세라는 짧은 생애 동안 ≪노자≫, ≪주역≫, ≪논어≫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세 가지 문헌에 뛰어난 주석을 하였다. 중국의 철학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왕필이 ≪주역주周易注≫를 통해 한대漢代 이래 번쇄한 상수역象數易에서 의리역義理易으로 전환을 이루었고, 또한 ≪노자주≫는 도가연구자들 사이에서 ≪노자≫의 종지宗旨를 가장 명쾌하게 밝힌 탁월한 주석으로 평가하고 있다.

 왕필王弼의 ≪노자주老子注≫, 철학哲學을 담다
현존하는 ≪노자≫의 주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老子道德經河上公章句≫이다. 이것은 한나라 초기에 유행한 황로학적黃老學的 사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양생론養生論’의 입장에서 ≪노자≫를 해석하였다. 이는 주로 도교道敎와 한의학漢醫學 전통에 수용되었다.
반면 위진魏晉시대에는 현학玄學이 유행하였는데, ‘현玄’이라는 말은 ≪노자≫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용어로 ‘그윽한’, ‘어두운’, ‘가물거리는’ 등의 의미를 갖는다. 현학사조에서는 ‘매우 심오하고 형이상학적이며 관념적인 것’으로 이 세계의 현상 배후의 그 무언가를 형용하는 말로 풀이한다. 이는 서구에 ‘현묘한 학문(Mysterious Learning)’ 또는 ‘형이상학파(Metaphysical School)’로 소개되는 것에서 잘 드러나듯이 오늘날의 의미에서 ‘철학(philosophy)’에 가장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리론義理論’의 입장에서 ≪노자≫를 해석한 왕필의 ≪노자주≫는 송대宋代 이후 문인들에게 수용되다가 청淸나라 말기 이후에 철학적 해석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특히 19세기 서구와 조우遭遇하면서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다시 주목받게 되었을 때, 왕필의 ≪노자주≫는 도가철학道家哲學의 중요한 정통으로 강조되었으며, 20세기 중국철학의 성립과정 속에서 ≪노자주≫는 연구의 기초문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 이 책의 특징 –동서양의 연구성과 대폭 반영, ≪노자미지예략≫⋅≪사기≫  <노자열전> 부록
왕필의 ≪노자주≫를 저본으로 동양의 역대 주석서를 비롯하여 현대 중국에서 발굴된 마왕퇴백서본馬王堆帛書本 ≪노자≫와 곽점초간본郭店楚簡本 ≪노자≫를 검토⋅종합하였으며, 특히 서양의 연구 성과를 대폭 채용하여 역주에 반영함으로써, 동양뿐 아니라 서양의 연구 경향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또한 1951년 왕유성王維誠이 처음 확인한 왕필의 저서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의 번역을 부록하여 왕필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사기史記≫ <노자열전老子列傳>도 번역하여 부록함으로써 노자의 삶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은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노자의 양생론적 해석과 의리론적 해석≫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소장학자 김시천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책이다. 김시천 교수는 디지털인문학연구소에서 동양고전 전문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통해 ≪노자≫에 관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노자≫ 전체 81장의 각 장章에 해설을 달아 설명함으로써 일반 독자들도 쉽고 편안하게 노자의 사상을 읽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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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되는 책인것 같습니다. 
최강진지 2020-06-1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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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노자번역서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믿음이 가는 책. 
akronicle 2020-06-15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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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라는 이름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서양에 '스피노자'가 있다면, 동양에는 '노자'가 있으며, 현대에는 '박노자'가 있다. 한결같이 시대의 반항아로 살아가며,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한다. 이들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그중에서 동양의 '노자'는 가장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노자를 만날 수 있는 '도덕경'이라는 책이 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도덕경'해설서 중에서 김시천 교수의 '역주 노자도덕경주'를 골랐다.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에서 보여준 김시천 교수의 실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자, 노자를 통해서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만나러 길을 떠나자.

 

1. 노자! 교육을 말하다.

  고전은 시대가 변해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도덕경'은 2천 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견디며 오늘날에도 많은 혜안을 주고 있다.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듯이, 도덕경이라는 거울은 우리의 교육에 어떤 통찰을 주고 있을까?

  많은 학생들이 선행학습을 한다. 예습과 선행학습은 엄연히 다르다. 예습은 다음날 배울 것을 간단히 살펴보는 공부라면, 선행학습은 1년전에 혹은 6개월전에 한과목을 미리 배우는 것이다. 선행학습에 대해서 노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전식자 도지화이우지시(前識者 道之華而愚之始 )"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미리안다는 것! 선행학습은 학생들에게 허황된 꽃이며,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키는 시작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기에 수업에 참여할 흥미를 떨어뜨린다. 수업시간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잠을 자는 경우가 있다. 이미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했는데, 이미 다아는 것인데, 왜? 또 공부를해야하느냐며 잠을 청하기도 한다. 교과서 진도를 빨리 나가면 실력도 타인보다 앞서 간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학부모와 학생들이 많다. 그러나 노자는 말한다. 선행학습은 겉모습만 화려한 꽃이며, 참다운 공부의 질을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이라고....

  노자가 한국에 온다면 한국 어머니에게 해줄말은 무엇일까? 자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우리이의 어머니에게 아마도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시부재 시이현덕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낳으면서 가지지 않고, 하되 의지하지 않으며, 자라게 하되 다스리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신묘한 덕'이라 한다.

 

  과거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노후연금으로 생각했다. 자녀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자녀를 위해서 희생을 하면 노후에 자녀가 자신에게 효도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아집은 집착과 소유욕으로 이어진다. 자녀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고 자녀가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란다. 자녀의 꿈보다는, 자녀의 행복보다는 타인에게 자랑할 수 있는 직업과 학력을 가진 자신의 아바타가 되어주길 바란다. 내가 낳았으니, 자녀는 나의 소유라는 이기적인 생각은 자녀에게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폭력이다. 노자는 말한다. 한국의 학부모여! 자식을 낳았으되, 소유하려하지말라! 자녀를 길렀으되 자녀에게 의지하려하지 말라, 자녀의 올바른 성장을 바란다면 자녀가 하고 싶은 일을 부모가정하지 말고 자녀가 결정하게하라! 이러한 양육방법을 오묘한 덕이라한다. 진로문제로 자신의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를 죽였다는 기사가 우리를 놀라게했던 적이 있다. 자녀를 소유하고 의지하고 다스리려한다면, 자녀가 부모의 노예가 되던지, 부모가 자녀의 희생물이 될 수도있다.

  노자가 우리 학교를 방문해서, 보통의 교장들의 모습을 본다면 어떠한 말을 해줄까? 초빙교장, 응모교장들이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해서 각종 사업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노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민지난치 이기상지유위 시이난치(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사람들이 무언가 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대전의 어느 학교에서 교육청에 민원이 들어왔다. 교장이 자신의 치적을 쌓기 위해서 연구학교를 신청했다. 그런데, 교사의 찬성율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재투표를 했고, 그래도 찬성율이 저조하자, 교무부장이 이를 조작했단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그 학교만의 일이 아니다. 내가 보아왔던 많은 학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찬성율이 나오면 재투표를 했고, 투표를 하기 전에는 "선생님들은 아무일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승진을 하셔야하는 주변의 선생님을 위해서 부디 찬성표를 던져주세요"라는 멘트를 넣는다. 정에 약한 한국사회에서 승진에 목을 메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찬성표를 던진다. 그리고 그결과는 비참하다. 보여주기 위한 행정이 시작된다. 학생과 상담하며 알찬 수업준비를 하기 위해서 쏟아야할 시간을 보여주기 위한 행정에 소비해야한다. 가득이나 바쁜 학교생활이 더욱 바빠지고, 그 스트래스는 자연스럽게 학교 구성원들 모두에게 퍼지게된다. 서로 이해하고 넘어갈 일도, 신경질적으로 대하며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서로 이해하며 몸이 아파서 병가를 쓴 선생님의 교실에 누가 들어갈 것인지를 두고 신경질을 부린다. 나도 힘들고 시간이 부족하기에 남을 돌볼 여유가 없다. 이러한 우리의 학교 현장을 보며 노자는 말한다. "교사와 학생이 힘들어하고 그들을 조화롭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교장과 교감이라는 관리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만들기 때문이다. 교육의 핵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을 만들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노담 선생님(노자) 힘든 학교생활은 어떻게 해나가야하나요"라고 내가 묻는다면, 노자는 어찌 답할까?

 

 " 시이성인욕상민, 필이언지하, 욕선민, 필이신후지(是以聖人欲上民, 必以言下之, 欲先民, 必以身後之)"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 위에 있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할 때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물린다.

 "자현자불명 자시자불창(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자벌자무공 자긍자 불장(自伐者無功 自矜者 不長)"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하며 큰소리를 치는 사람은 별로 무섭지 않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녹음기를 들고와서 자신이 필요한 질문을 차근차근하면서 논리적으로 사건을 따져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당장의 화풀이 보다는 법적으로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자신의 화를 감추고 얼굴에는 미소를 띈다. 가장 무서운 관리자는 폭력적, 강압적으로 교사와 학생을 짓누르는자가 아니다. 자신을 낮추며 그들을 앞세우고 자신을 뒤로 물리는 자이다. 폭력적 관리자는 민원을 제기하고 법적으로 그를 상대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관리자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내가 경험했던 000 교감이 있다. 겉보기에도 유약해보이고 겸손했다. 선생님이 타주는 커피를 받아들고도 다른 선생님들은 커피를 마셨냐며 자신의 커피를 주려하였다. 큰일을 결정할 때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만, 일단 결정이 되면 그 어떤 반발에도 굴하지 않는다. 자기 것을 취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먼저 베풀었기에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먼저 챙겨주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장 많은 것을 얻었다고 그는 자주 말한다. 노자는 말한다. 사회생활을 현명하게 하고자한다면, 아랫사람들 대할 때 자신의 말과 행동을 낮추라, 그들을 이끌고 가고 싶다면 그들 뒤에서라! 가기 싫어하는 소를 억지로 앞에서 끌고 가기 보다는 그 소와 친구가 되어 뒤에서 소를 몰고가라!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말고, 스스로 뽐내지 말고, 스스로 자랑하지 말자! 그러면 남이 먼저 나를 알아줄 것이다.

  노자가 우리의 교실에 들어와서 변화하고자하는 교사에게 어떠한 조언을 해줄까?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해야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그들에게 어떠한 수업을 해야할까?

 

  "대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진약투(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매우 흰 것은 마치 욕된 듯하고, 넓은 덕은 마치 부족한 듯하고, 확고 부동한 덕은 야박한 것 같고, 질박한 참됨은 마치 더러운 듯하다.

 

  1타 강사들이 학원가를 휩쓸고 있다. 최태성, 설민석을 비롯한 많은 스타강사를 보면서, 나도 저들처럼 수업을 하려했다. 나름 강의식 수업에는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나의 확고 부동한 강의식 수업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결에서 이세돌이 승리했다. 더 이상 암기를 많이 시키는 수업은 새로운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다. 변화해야한다. 변화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 우리 교육이 변화해야한다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막상 변화하고 있지 못하다. 새로운 시대를 대비할 수 있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 우리 교사에게 노자는 무어라 말해줄까? 매우 흰 것은 마치 욕된 듯하다. 넓은 덕은 마치 부족한 듯하다. 확고 부동한 덕은 야박한 것 같다. 질박한 참됨은 마치 더러운 듯하다. 좋은 수업은 서툰듯하다. 교사가 모든 것을 학생에게 알려주는 수업은 완벽한 수업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헛된 수업일 뿐이다. 참된 앎을 전해주고 싶다면, 마치 서툰듯, 비어 있는듯 수업을 해야한다. 교사는 가만이 있지만, 학생들은 바삐 움직이며 배움을 터득해간다. 학생이 스스로 친구들을 가르치고 배워간다. 교실에서 교사는 마치 한가히 노는 백조인 듯 하다. 요즘, 강조하는 학생 중심 수업을 실행하라.

  학생들에게 성적문제, 이성문제 등등 수많은 고민거리가 있지만,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자신의 진로문제이다.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해서 고민하는 학생, 자신의 성적으로는 자신이 가고 싶은 학과에 진학할 수 없기에 꿈을 바꾸어야할지 고민학는 학생들이 많다. 노자가 진로를 고민하는 우리 학생들에게 다가가 무엇이라 말할까?

 

  "천하난사, 필작어이 천하대사 필작어세 시이성인, 종불위대, 고능성기대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 終不爲大 故能成其大)"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성인은 끝내 큰일을 행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그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거대한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지만, 현실은 너무도 초라하다. 태산앞에 자신의 위치는 너무도 낮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모한 도전을 할 것인가? 큰꿈을 가지라 했기에 무조건 큰 꿈을 갖고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이들 학생들에게 노자는 조언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된다.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태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 함부로 태산을 한걸음에 오르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은 끝내 큰일을 행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태산을 오르는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금 내딛어야하는 작은 걸음을 시작하자. 자신의 꿈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서 서점을 찾아가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 천하의 어려운 일도, 천하의 큰일도 작고 세세한 것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노자! 한국사회를 말하다.

  노자선생이 대한민국에 온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말들을 해줄까? 노자를 초대해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뒤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는 우리 현실을 노자의 눈을 통해서 바라보자.

  노회찬이 갔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지만, 너무도 두려운 존재 삼성을 상대로 굴하지 않았으며, 503호 공주님과 맞짱을 뜨며 약자의 편에서서, 노동자의 편에서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게 강한 사람이 드루킹 사건에서 불거진 선거자금 문제에 너무도 힘없이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不失其所者久(불실기소자구)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으며, 제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가고,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다.

 

  노회찬은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유신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외쳤다. 여러 책들을 읽으며 진리를 얻고자했다. 한국의 명문대학을 나오고서도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용접을 배웠다. 자신의 삶을 힘써행하는 그의 모습에는 뜻이 있었으며, 노동자를 위한 삶을 버리지 않은 그는 서민을 위한 정치인으로 오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도 강해보이는 그가, 자신의 티끌 같은 오점을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허공속에 내던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있었던 사람도 그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삶은 노무현의 삶과 오버랩된다. 약자를 위해서, 약자를 위한 정의를 만들기 위해서 시대와 정면대결했던 그들의 삶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그래서 노자는 말한다.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다.' 노회찬은 우리 가슴속의 밀알이 되어 영원히 우리곁에 살아갈 것이다.

 

  "부유병병, 시이불병(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성인불병, 이기병병, 시이불병(聖人不病, 以其病病, 是以不病)"

  대저 오로지 병을 병으로 여기는 까닭에 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이 병폐가 없는 것은 그 병을 병으로 여기는 까닭에 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땅의 진보세력은 자신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니, 그를 지켜보는 우리들이 그것을 강요한 측면도 강하다. 몇백억을 집어삼키고서도 뻔뻔하게 잘도살아가는 사람이, 노무현이 자살했을 때 '사람이 마음이 약해서..'라고 말하며 혀를 찼단다. 그들에게는 돈 얼마 받아먹은 것이 전혀 허물이 되지 않는가 보다. 결국 그들의 허물이 쌓여서 적폐가 되었다. 이 땅의 진보세력들은 자신의 병폐를 병으로 여긴다. 병폐를 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진보세력이 아니다. 여기에서 진보세력의 딜레마가 시작된다. 진보세력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병폐를 병폐로 여기고 이를 용납하지 않아야한다. 그러기에 진보세력에게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완결성을 요구한다. 이로인해서 진보세력의 거두들이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 병폐가 적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도덕적 완결성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정도의 도덕적 흠을 용납해야할까? 이 풀기 어려운 딜레마 속에서도 나는 믿는다. 이 땅의 진보세력이 언제까지나 약자의 편에서서 모두를 위한 사회를 만들려 노력하리라는 사실을.... 도덕경 20장은 고 노회찬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 같다.

 

"荒兮 其未央哉.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春登臺 황혜 기미앙재. 중인희희 여향태뢰 여춘등대 

我獨泊兮 其未兆 如嬰兒之未孩 儽儽兮 若無所歸 衆人皆有餘 而我獨若遺 아독박혜 기미조 여영아지미해 래래혜 약무소귀 중인개유여 이아독약유 

我愚人之心也哉 沌沌兮 俗人昭昭 我獨昏昏 俗人察察 我獨悶悶 아우인지심야재 돈돈혜 속인소소 아독혼혼 속인찰찰 아독민민 

澹兮 其若海 飂兮 若無止 衆人皆有以 而我獨頑似鄙 담혜 기약해 요혜 약무지 중인개유이 이아독완사비 

我獨異於人 而貴食母 아독이어인 이귀식모"

 

황량한 모습이 텅 빈 곳에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뭇사람들이 희희낙락하며 큰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것 같고, 봄날 누각에 오르는 것 같다.

나 홀로 담박하여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모습이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기 같으며,

몹시 지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는데 나홀로 잃어벌니 듯하니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로구나.

혼돈스럽다.

세간의 사람들은 똑똑한데 나홀로 흐리멍덩하고

세상 사람들은 자롣 살피는데, 나홀로 어리석도다.

담담하여 바다 같고, 고고하여 그칠 줄을 모르는 듯하네,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홀로 완고하고 비루하다.

나홀로 다른 사람과 다르고자 하여 만물을 먹이는 어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을 살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우리 사회가 전체주의로 회귀하는 일이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 대해서 비판하려하면 좌빨로 바라보는 노년세대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치 이야기를 싫어하는 주변인들을 바라보며, 우리사회에 우경화를 걱정했다. 노자는 이명박근혜 정권을 보면서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天下  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천하  개지미지위미  사오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고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천하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추한 것이다. 천하가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이루어주고, 긺과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악소리와 노랫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모두가 좋아하고 절대다수가 사랑하는 사회에서는 히틀러가 총통이 될 수 있는 사회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기 않기에, 아름다움만이 존재해야한다는 믿음이 지배하기에, 나와 다른 유대인과 아름답지 않은 장애자들을 죽였다. 노자는 모두가 Yes할때 No를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Yes할때, No를 외치기는 너무도 힘들다. 폭력으로 No를 외치지 못하게 만들기도하고, 사회 분위기가 No를 금기시하기도한다. 획일적인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사회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세상을 아름답게하기 위해서라도 추함과 아름다움은 조화를 이뤄야한다. 2000년전 노자는 서양보다 먼저 똘래랑스를 알고 있었다.

  취직이 잘되지 않고, 그래서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중에는 비트코인에 빠져서 대학 등록금을 날린 대학생들도 있다. 이들에게 노자는 어떠한 말을 할까?

 

  "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民心不亂(부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말아 백성들이 도둑이 되지 않게 하라.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말아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하라.

 

  일확천금을 얻으려 대학등록금을 날린 젊은이들은 정부를 탓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이를 정권탓으로 돌린다. 그렇게하면 일시적 위안은 느낄 수 있다. 마치 자신의 누명을 인정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아Q'처럼....위정자라면,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여, 땀흘려 일하기 보다는 한탕으로 부자가 되려하지 않게 해야한다. 투기성 비트코인을 보다 일찍 규제하여, 투명하고 안전하게 만들고, 비트코인의 위험성을 젊은이들에게 알려야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새로운 창조적인 도전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한다.

  요즘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코에 플라스틱 빨대가 박힌 바닷거북을 보면서 인간의 편리함이 자연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알았다. 그래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

  천하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천하의 모든 것들은 있음에서 생겨나는데 있음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없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석유라는 유에서 플라스틱이라는 있음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마땅히 플라스틱은 없음으로 돌아가야한다. 그래야만 천하만물이 순환하며 자연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은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거나, 돌아가는 시간이 너무도 길다. 있음을 위해서 없음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인간이 만든 플라스특은 거스르고 있다. 반면 질그릇은 진흙이라는 있음에서 탄생했으나, 다시 없음으로 돌아간다. 있음을 위해서라도 없으로 돌려보내야한다.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는 있음은 만들어서는 안된다. 비단 플라스틱만이 아니다. 핵발전소를 비롯한 수많은 있음들은 없음으로 돌아가지 않아 자연을 위협시키고 있다. 있음은 없음을 근본으로 삼아야한다는 노자의 말에 인간이여 귀를 기울여 조시오....

 

3. 노자! 정치를 말하다.

  노자라는 책이 제왕학의 교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노자와 법가가 결합하여 '황로학'이 성립한다. '황로학'은 중국 한나라 시기에 경제때에 중국 황제들에 의해서 번성했다. 어떤이는 도덕경을 병법서라고 말한다. 도덕경에는 병법에서나 볼법한 글귀들이 많이 있다. 노자가 말하는 정치학을 만나보자.

 

 

  "重爲輕根 靜爲躁君(중위경근 정위조군)"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내하만승지주 이이신경천하)

   輕則失本 躁則失君(경즉실본 조즉실군)"

  무거움은 가벼움의 근본이 되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가 된다.

  전차 만대를 부리는 주인이면서 어찌 그 몸을 천하에 가볍게 처신하겠는가. 가볍게 처신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히 굴면 군주의 지위를 잃게 된다.

 

  진정 정치를 하는자는 신중하고 냉철해야한다 한비자 '망정'편을 보는 듯하다. 군주가 신중하지 않고 가볍게 처신을 한다면, 근본을 잃게 되고 심지어는 군주의 지위를 잃게 될 수도 있다. 항상 신중하게 자신의 권위를 사용해야한다. 그 권위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군주를 4등급으로 분류할 수 있다. 도덕경 17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태상 부지유지 기차 친이예지 기차 외지 기차 모지)"

  대인이 윗자리에 앉아 다스릴 때에는 아래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며, 그 다음 사람은 그를 친하게 여기고 기리게 하며, 그 다음 사람은 그를 두려워하게 하며, 그 다음 사람은 그를 모멸한다.

 

  이를 역사와 관련지어 설명해보자. 군주가 윗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만을 알 정도 정치를 잘하는 단계(下知有之)에는 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요임금과 순임금을 들 수 있다. 그다음 그를 친하게 여기고 예찬하는 단계(親而譽之)는 우리나라 세종과 정조 대왕을 예로 들수 있다. 임금을 두려워하 단계(畏之)는 연산군을 들 수 있다. 인조반정 전의 신하들은 연산군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찼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왕의 주변을 떠나거나 반정군의 편에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임금을 모멸하는 단계(侮之)는 인조를 들 수 있다. 두번씩이나 수도를 버리고 도망간 무능한 왕이다. 자신의 못남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아들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는 칭찬을 받기 보다는 두려운 존재가 되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자는 두렵고 멸시받는 군주를 최하등급으로 두고, 무위의 통치자와 유능함으로 다스림으로써 사랑받는 통치자를 가장 윗자리에 두었다. 503호의 국정농단을 겪으면서 한국의 대통령들은 두렵우면서도 경멸을 받는 존재인지,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생각해본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란 "전쟁은 나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 행위다."라고 말했다. 전쟁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정치의 연장선이다. 그렇다면, 노자가 말하는 전쟁론을 살펴보자.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불이병강천하  기사호환 사지소처 형극생언)"

  군사로 천하에 강자 노릇하지 않으니, 그런일을 되돌리기를 좋아한다. 군대가 머물던 자리에는 가시덤불만 돋아닌다.

 

  전쟁을 모르는 자들이 전쟁을 쉽게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과거 이명박 정권에서 NSC가 열렸는데, 군필자가 국방부장관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유명하다. 전쟁을 모를 수록, 군을 모를 수록 전쟁을 쉽게 말한다. 손자병법에도 가장 좋은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이라했으며, 전쟁은 신중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런점에서 노자는 정쟁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쟁이 임할때는 당연히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善爲士者不武 善戰者不怒 善勝敵者不與 善用人者爲之下(선위사자불무 선전자불노 선승적자불여 선용인자위지하)"

  장수 노릇을 잘하는 자는 무용을 뽐내지 않고 싸움을 잘하는 자는 분노하지 않고 적을 잘 이기는 자는 함께 다투지 않고, 남을 잘 부리는 자는 자신을 낮춘다.

 

  싸움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전쟁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일이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신중을 기해야만이 패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잘 싸우는자는 분노하지 않고 적과 함께 다투지 않는다. 외교로, 경제를 무기로 적을 제압하며,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을 사용한다. 트럼프가 오바마처럼 싸드를 비롯한 무기로 중국을 압박하기 보다는 경제로서 압박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노자가 생각하는 국제질서는 무엇일까? 그가 생각하는 대국은 어떠한 면모를 가지고 있어야할까? 도덕경 61장에는 노자가 생각하는 국제질서의 단초가 있다.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 빈상이정승모 이정위하)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고대국이하소국 즉취소국 소국이하대국 즉취대국)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고혹하이취 혹하이취 대국불과욕겸축인)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所欲 大者宜爲下(소국불과욕입사인  부양자각득소욕 대자의위하)"

  큰 나라는 강과 바다처럼 아래쪽에 처하니 천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요. 천하 사람들이 돌아오는 암컷이다. 암컷은 늘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아래가 된다. 그러므로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 아래에 처하면 작은 나라를 취하고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 아래에 처하면 큰 나라에게 취해지니 그러므로 어던 경우는 아래에 처하여 취하고 어떤 경우는 아래에 처하여 취해지는데 큰 나라는 다른 사람들을 다 거느리기를 바랄 뿐이고, 작은 나라는 다른 사람밑에 들어가 섬기기를 바랄 뿐이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 둘이 각자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큰 나라는 마땅히 아래에 처해야한다.

 

  도덕경 61장은 '조공 책봉'이라는 동아시아 외교 질서를 상정해 놓은 듯하다.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무너져 내려가던 시기에 살았던 노자의 머릿속에는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불러 회맹을 맺고 작은 나라들이 이에 순종하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생각한듯하다. '조공 책봉'이라는 동아시아 외교 질서가 무너진 지금, 중국이 걸어야할 바람직한 외교질서는 무엇일까? 바로 도덕경 61장에 있다. 큰 나라는 강과 바다처럼 낮은 곳에 임하여 천하의 모든 것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야한다. 대국굴기를 하려는 중국은 야심차게 일대일로를 추진하고 있다. 차이나머니를 앞세워 주변국들에게 각종 투자를 하는듯하지만, 그 과실은 중국이 가져가고 주변국들은 중국의 경제치투에 신음하고 있다. '도광양회'하면서 미국의 발톱을 피해가던 중국이 이제는 대국굴기를 외치며 세계로 폭주하고 있다. 중국은 노자의 말에 귀기울여야한다.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천하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도록 그들을 품어야한다. 지금의 폭주하는 중국의 모습은 약소국에게는 모멸의 시선을 받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라는 경제적, 군사적 견제를 불러 일어킨다.

 

4. 역주 노자도덕경주를 말하다.

  김시천은 노자를 전공한 학자이다. 그의 '도덕경'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가 번역한 '역주 노자도덕경주'에 대해서 몇마디 할말이 있다.

  첫째, 김시천은 지나치게 바그너의 학설을 따른다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외국 학자들의 '도덕경' 관련 서적을 많이 본 김시천은 외국 학자들의 학설을 많이 받아들였다. 외국학자들의 주장이 나름의 타당성이 있어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외국학자들 중에서 특히 바그너의 주장을 많이 따르고 있는 점은 약간 불편한 느낌을 준다. 도덕경 23장 " 德者 同於德(덕자 동어덕)"이라는 문장은 하상공본과 왕필본 도덕경에 모두 실려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바그너가 왕필 주문에 있는 내용을 근거로 '덕'을 '득'으로 고쳐서 '得者 同於得(득자 동어득)"으로 수정하였다. 왕필본과 하상공본에 똑같은 내용이 전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수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행동이다.

   둘째, 주문을 근거로 본문을 고친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도덕경 34장 "萬物歸焉而不爲主(만물귀언이불위주) 可名爲大 (가명위대)"를  "萬物歸之而不於主(만물귀지이불어주) 可名爲大 (가명위대)"로 수정한 것이 대표적이 예이다. 저본의 '언'을 주문의 '귀지'에 근거하여 '지'로 수정했다. 이번에도 바그너의 주장을 따른예이다. '위'를 '어'로 수정하 것은 앞의 문장과 짝을 이루기 위해서 수정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김시천의 해석에 대한 불만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왕필의 해석에도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도덕경 57장에 "民多利器 國家滋昏(민다리기 국가자혼, 백성에게 이로운 기물이 많으면 국가는 더욱 혼란해진다.)"를 왕필주에는 "백성이 강하면 국가는 약해진다."라고 적어 놓았다. 백성이 강해지면 국가가 약해진다는 말은 현대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설명이며, 노자를 바르게 해설한 것도 아니라고 판단된다. 백성이 이로운 것만 추구하면 국가가 혼란해진다.라는 뜻으로 해설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백성이 자신의 이로운 것만을 추구하다가 국가에 해를 끼친사례는 비트코인 사태를 들 수 있다. 단기적 이익을 쫓다가 개인은 물론, 국가와 사회에도 해독을 끼쳤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내 나름의 해석도 해보았다. 도덕경 27장에 "常善救物 故無棄物

(상선구물 고무기물, 늘 만물을 잘 구하는 가닭에 버려지는 물건이 없으니)"라는 문장을, 항상 물건을 잘 구하기에 그래서 버려지는 물건이 없다. 즉, 한번 물건을 살 때, 제대로 된 물건을 장만했기에 벌빌 물것이 없다. 로 해석했다. 어떤가? 괜찬은가??

 

 

  노자를 읽으면서 20여년전 도올 김용옥 선생이 TV에 나와 했던 강의가 새록새록 기억난다. 그의 강의를 들으며 도덕경이 이렇게 재미있고 쉬울 수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때 '도덕경'을 사서 원문을 공부하며 강의를 들었다면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까? 아쉬움이 밀려온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도 고민이 많았다. 대학을 다니며, 앞으로 먹고살 걱정을 해야했다. 사랑을 생각하며 가슴아파하기도 했다. 이제 다시한번 만나게된 '도덕경'은 그 시간 동안 성숙한 나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먼 훗날, 도덕경을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무르익은 내가 도덕경의 감동을 더욱 진하게 느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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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8-11-30 공감(2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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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 삶의 모순과 철학의 위안 김시천

알라딘: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 삶의 모순과 철학의 위안   
김시천 (지은이)책세상2013-11-05
368쪽

책소개

노자와 장자를 전공한 동양철학자가 그간의 노장 공부의 결과들을 모아 엮은 책으로, 텍스트의 문맥을 놓치지 않는 전공자의 시선을 통해 노장에 대한 통념이 실제의《노자》,《장자》와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노자》를 정치적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을 위한 기술적 지침서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며 반대로《장자》는 정치적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 지식인들을 위해 세상과의 불화를 해소하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이해한다.

두 문헌이 이렇게 이질적임에도《노자》와《장자》는 ‘노장’이라는 말로 한데 묶여 실제와는 동떨어진 고정관념을 낳아왔으며, 이러한 고정관념에 일조한 주제들 중 대표적인 것이 노장을 대변하는 개념이 ‘무위無爲’라는 것,《노자》가 페미니즘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것,《장자》가 기술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해에 따르면 무위는 노장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간주될 만큼 노장의 독보적인 개념도 아니고 자연스러운 삶과 연관되는 개념도 아니다.

목차
책을 펴내며 / 9

서장 _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 15

제1부 《노자》, 칼의 노래

1장 노자와 《노자》
-‘전설’을 해체하고 ‘인간’을 보다 / 31
1. 누구의, 누구를 위한 《노자》인가 / 31
2. 하나이면서 여럿인 《노자》, ‘노자열전’ / 34
3. 성인과 제왕, 그리고 범인 -《노자》 속의 인간들 / 55
4. 호모 임페리알리스의 《노자》 / 63

2장 《노자》의 두 전통
-통치술에서 철학의 지혜를 찾다 / 67
1. 하상공과 왕필, 두 밀레니엄 두 가지 해석 / 67
2. 논리와 해석 방법의 차이 -훈고와 의리 / 70
3. 우주와 인간, 기와 도 / 82
4. 우주론에서 심성론으로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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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시천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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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상지대학교 교양대학에서 공부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4년부터 인문학 전문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제작, 진행해 왔고, 2020년부터는 유튜브에서 새로운 인문학을 소개하는 방송 〈휴프렌즈〉와,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사는 지혜를 모색하는 방송 〈휴애니프렌즈〉에 출연하고 있다. 그동안 쓰고 옮긴 책으로, 『철학에서 이야기로』,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논어, 학자들의 수다 : 사람을 읽다』, 『무하유지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장자』, 『죽은 철학자의... 더보기
최근작 : <동양철학산책>,<똥에도 도가 있다고?>,<근대 사상의 수용과 변용 1> … 총 4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무위자연의 신화를 넘어 치열한 삶의 이야기로
- 우리 시대 노장을 읽는 아주 특별한 방법
《노자》와《장자》는 유교 중심의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공맹과 대등한 사상적 지위를 누려보지 못한 채 늘 이단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한국에서는 동아시아 고전 중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책이 되었다. 특히 1999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라는 강연은 노자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다양한 대중 강연이 노자와 장자를 다루어왔다. 한때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서구 이론의 영향을 받은 해체론적 노자 해석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대중에게《노자》와《장자》에 대한 어떤 고정된 인상이 각인되었다. 탈속, 자연, 유유자적, 현자, 탈정치, 반문명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인상은 과연 올바른 이해의 결과일까?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는 노자와 장자를 전공한 동양철학자가 그간의 노장 공부의 결실을 모아 엮은 책으로, 텍스트의 문맥을 놓치지 않는 전공자의 시선을 통해 노장에 대한 통념이 실제의《노자》,《장자》와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즉 이 책은 두 문헌의 내부에 있는 ‘사상’을 체계적으로 해명하기보다는 기존의 연구 성과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상식으로 굳어진 노장 철학의 주제들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의 시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기존의 논의와 다른 해석의 지평을 열어 보이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노자》는 천하의 정치적/ 사상적/ 사회적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사람들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문헌으로서 정치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을 위한 기술적 지침서와 같은 책이며, 반면《장자》는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 지식인들을 위해 세상과의 불화를 해소하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문헌이 이렇게 이질적임에도《노자》와《장자》는 ‘노장’이라는 말로 한데 묶여 실제와는 동떨어진 고정관념을 낳아왔으며, 이러한 고정관념에 일조한 주제들 중 대표적인 것이 노장을 대변하는 개념이 ‘무위無爲’라는 것,《노자》가 페미니즘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것,《장자》가 기술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이해에 따르면 무위는 노장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간주될 만큼 노장의 독보적인 개념도 아니고 탈속적/ 반문명적인 삶과 연관되는 개념도 아니다. 또《노자》와 페미니즘,《장자》와 기술 문명 비판을 연결 짓는 것은 문맥을 간과한 채 원문을 선별적으로 인용하거나 잘못 이해한 것으로, 전통과 탈근대적인 것을 잘못 연결한 결과이다.
저자는《노자》와《장자》를 이렇게 읽어내는 것에서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노장을 어떻게 삶에 유의미한 것으로 지속시킬 수 있을지를 모색한다. 그리하여 노장을 도가나 도교라는 이름의 철학이나 종교로 받아들이지 말고,《장자》의 ‘유遊’(노님) 개념에 입각해 ‘도술道術Tao-techniques’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도술이란 신비한 초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부정하거나 삶에 종속되지 않고 삶을 누리는 기술, 정치와 문명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누리는 기술을 말하며, 이러한 시각은 철학과 종교의 이분법, 이론과 실천의 괴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결국 이 책은《노자》와《장자》에서 삶의 기술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국내 학자의 독창적인 노장 연구서가 드문데다, ‘무위자연’이라는 표현이 대변하듯 탈속적/ 탈정치적/ 반문명적 사상이라는 노장 사상에 대한 일면적 통념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노자》와《장자》에 대한 역사적 해석과 쟁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삶의 양식으로서의 ‘도술’이라는 21세기 노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이 책은 저자가 줄곧 견지해온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대한 학문적/ 실천적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래하는 노자의 칼, 춤추는 장자의 방패 - 노장과 ‘모순’
이 책의 제목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는《노자》와《장자》를 둘러싼 여러 차원의 모순을 환기한다. 우선 글자 그대로 ‘창(칼)과 방패’로서의 ‘모순’이다. 저자의 이해에 따르면《노자》는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자질이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과 같은’ 책이고,《장자》는 권력의 중심부로 나아가지 못한 자가 다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방패와 같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격이 다른 두 책이 마치 동질적인 것인 양 ‘노장’이라는 말로 함께 묶여 거론되니 이 또한 모순이다.
한편,《노자》와《장자》는 유교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조선 사회에서 이단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지만, 모순되게도 이이, 박세당, 홍석주, 서명응, 한원진 같은 정통 유학자들에 의해 주석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에 박세당의《신주도덕경》과《남화경주해산보》, 이이의《순언》, 홍석주의《정노》, 한원진의《장자변해》같은 노장 주석서가 쓰이고 읽혔다. 요컨대 조선 시대에《노자》와《장자》는 이단이면서도 ‘바깥’에 있지 않고 ‘안’에 있었던 셈이며, 저자는 이러한 모순을, 성리학이라는 정치적 교조를 고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금단의 노장을 읽으며 자유를 꿈꾸었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분열된 내면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저자는《노자》와《장자》에서 이런 중층의 ‘모순’을 읽어내며, 결국 삶 자체가 그렇게 모순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게다가《노자》와《장자》모두 단일 저자에 의해 쓰인 책이 아니어서 여러 목소리를 내는데다 모호한 언어로 되어 있어 해석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니, 노장 읽기는 모순으로 가득해 종종 길을 잃게 만드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 저자는 노장의 모순이 삶의 모순과 유비를 이루기에 오히려 삶에 위로를 준다고 말하며, 나아가 도가나 도교 대신 ‘도술’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철학이나 종교 아닌 삶의 기술로 받아들여 현실적 동반자로 삼을 방법까지 모색한다.

《노자》- 패권 지망자들의 책, 권모술수의 책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노자》는 전국 시대 말기에서 한나라 초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된 책이다. 그리고《노자》의 저자는 노자라는 한 사람의 역사적 실존 인물이 아니라 신원을 알 수 없는 여러 사람이다. 이 복수의 저자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는《노자》텍스트에서 어떤 사람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통념과 달리《노자》에는 “정치적 세계의 비정함에 냉소를 보내고 문명을 비판하고 유가와 같은 도덕적 엄격주의에 식상한 인간, 환경과 자연의 가치를 긍정하고 페미니즘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노자》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상은 오히려 성인聖人, 후왕侯王, 사士 같은 권력자들이다. 이는《노자》의 저자나 독자가 패권 지망자들이었음을 짐작게 하고, 실제로《노자》는 내용상 권모술수를 포함한 “권력의 기술”에 대한 책이나 다름없다.
《노자》에 대해서는 수많은 주석자들에 의해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졌고 그러한 해석들에서 공통의 기반과 의미를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대표적인《노자》해석으로는 한나라 하상공과 위나라 왕필의 해석이 꼽힌다. 두 사람의 주석서는 똑같이《노자》를 다루면서도 아주 다른 해석으로 나아간다. 하상공이《노자》자구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충실한 편이라면 왕필은 유가의 입장에서《노자》를 해석한다. 그리하여 하상공의 해석은 도교의 차원과 연결되고 왕필의 해석은 유학자들의 해석의 토대가 되면서 다양한 조류를 만들어나가게 되었다. 그런 만큼 어떤 주석서를 통해《노자》를 읽는가에 따라《노자》의 얼굴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조선 사회에서는《노자》가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유학 아닌 것은 이단으로서 철저히 배척했던 조선조에서 뜻밖에도 이이의《순언》, 박세당의《신주도덕경》, 홍석주의《정노》, 서명응의《도덕지귀》등 모두 다섯 권의《노자》주석서가 쓰였으며,《선조실록》에는 과거시험 답안지에 노장의 문장이 인용된 것을 놓고 임금과 신하가 왈가왈부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이는 모두 임금과 신하들, 그리고 과거에 응시한 선비가《노자》와《장자》를 읽어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이단의 문제점을 알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읽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우긴 했지만, 어쨌든 이는 조선 사회에서 정통인 유가와 이단인 도가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장자》- 출사하지 못한 비운의 지식인의 책, 세속에서 노니는 기술을 이야기하는 책
《장자》는 긴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문헌으로 추측되지만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장자》는 진晉나라의 곽상이 틀을 갖춘 것으로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장자가 지은 것은 ‘내편’ 7편뿐이고 나머지는 후학들의 글이라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따라서《장자》에는 서너 갈래의 다른 목소리가 뒤섞여 있으며, 이는《장자》해석의 어려움을 낳는다.《장자》의 어느 편에 초점을 두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중국 철학계에서《장자》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중국인의 패배주의와 노예근성의 정신적 근원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에 중국 고유 종교인 도교의 사상적 원류, 유가를 계승한 사상, 중국 예술 정신의 원류라는 등등의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한국 학계에서도 이런 식의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저자 김시천은《장자》의 이야기들에서 얻을 수 있는 장자에 대한 정보를 통해서 “뜻을 품었으되 가난해 벼슬에 나아갈 기회를 얻지 못한 지식인”을 장자의 일관된 모습으로 포착해내고,《장자》를 “비운의 지식인”의 책으로 본다. 치자의 영광과 명예로 나아가지 못하고 불행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삶의 기술을 이야기한 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자가《장자》에서 가장 주목하는 개념은 ‘유遊’이다. ‘유’는 ‘노닐다’에 가까운 개념으로, 잠정적 ‘떠남’과 떠났다가 ‘돌아옴’을 전제한다. 떠남이 정치적 야망이나 사회적 관계를 포함하는 세속의 삶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는 것이라면, 돌아옴은 그렇게 거리를 둔 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에서의 깨달음을 안고 세속의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돌아왔을 때는 삶의 태도가 바뀌어 다툼과 경쟁과 갈등에서 벗어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삶의 태도가 “탈속적 태도”도 아니고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거나 변화시키려는 변혁적 실천”도 아니며, 다만 “한 개체가 겪는 갈등과 억압을 승화시킨 태도”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유’는 삶의 보전이라는 ‘양생’의 논리와 이어지며, 또한 문화와 예술에 영감과 창조적 활력을 준다고 본다.
《장자》역시 조선 시대에 유학자들 사이에서 읽혔고 박세당, 한원진에 의해 주석되었다. 다만《장자》는 대체로 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이단’이라기보다는 ‘사이비’에 가까운 존재였다.

《노자》와《장자》에 대한 통념은 올바른가
두 문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인위나 억압을 거부하고 자연 속에서 초탈한 태도로 살아가는 현자의 격언쯤으로《노자》와《장자》를 떠올리는 통념과 거리가 있다. 저자는 노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많다고 보고 이를 점검한다. 여기서의 논점은 ‘무위자연’이 노장을 대변하는 개념인가,《노자》가 페미니즘과 닿아 있는가,《장자》가 기술 문명에 반대하는가 하는 것이다.
유가는 ‘유위有爲’를 주창했고 노장은 ‘무위’를 주창해 유가를 비판했으며, 유위는 인위에 상응하고 무위는 자연에 상응한다는 것이 통념상의 도식이다. 하지만 저자는《논어》,《맹자》,《순자》,《묵자》등 여러 고전 문헌들의 ‘무위’ - ‘유위’ 용례를 분석해, 무위와 유위가 대립되는 개념이고 무위와 자연이 상응하는 개념이라는 상식은 틀린 것임을, 그리고 무위란 “제자백가의 공통 개념으로서 어느 특정 학파가 전유한 것이 아니며, 기본적으로 정치 행위 이론”임을 밝힌다. 따라서 무위자연을 도시와 문명을 떠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과 연관 짓고, 무위자연이 노장이 추구하는 삶의 대명사라고 이해하는 것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럼《노자》와 페미니즘의 관계는 어떠한가? 저자는《노자》가 여타 문헌에 비해 여성성을 중시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그것이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이야기하는 페미니즘의 차원은 아니라고 말한다.《노자》의 몇몇 표현들을 들어《노자》를 페미니즘과 연결시키는 것은, 유가는 뭔가 부정적인 사상 체계이고 도가는 뭔가 긍정적인 사상 체계라는 도식적 선입견 때문에《노자》에 나오는 여성성 강조의 표현 하나도 과도한 의미를 담아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더욱이 역사적으로 노자의 시대는 가부장제 완성의 정점이었는데 그러한 시대에 노자가 여성을 찬양하고 페미니즘 철학을 전개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일이냐고 저자는 반문한다.《노자》에서 볼 수 있는 여성성의 강조는 여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적 강함에만 의지하는 정치는 온전하지 못하니 군왕은 여성의 유약함을 가장하는 교묘한 ‘술수’ 또한 겸비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자》가 기술 문명을 비판했다는 상식 또한 잘못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식이〈천지〉편에 나오는 ‘기심機心’이란 말을 “편리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원문의 맥락을 따른다면 ‘기심’을 “최소 투자 최대 효과의 심리”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그렇다면〈천지〉편의 이야기에서 기심을 비판하는 것은 “기회주의적 심리를 비판한 것이지 고도의 기술적 성취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양생주〉편에 나오는 포정?丁의 이야기에서는 기술에 대한 긍정을 읽을 수 있다. 소를 잡는 데 있어서 기술을 넘어 도의 경지에 오른 포정의 칼놀림을 보고 문혜군이 ‘양생의 도’를 터득했다는 이 이야기로 미루어,《장자》에서는 기술이 비판되는 것이 아니라 도에 이를 수 있는 방법으로서 긍정됨을 알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노장, 삶의 기술로서의 ‘도술’을 위하여
-21세기에《노자》와《장자》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 ‘노장’은 “《노자》와《장자》라는 텍스트에 담긴 내용 혹은 그와 관련된 문헌에 담긴 철학적, 사상적, 종교적 전통”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노장이 유가 전통에 포섭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노자》와《장자》가 한대漢代 이래 제자백가의 하나인 ‘도가’로 분류되고 20세기에 ‘도교’의 기초 경전으로 이해되면서 노장은 철학적, 종교학적으로 언제나 도가와 도교라는 더 큰 범주와 철저하게 관련돼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노장을 철학이나 종교로서 대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지속시키며 향유할 방법을 모색하자고 말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은 노장을 도가/도교 아닌 ‘도술’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며 이를 위해 저자는 다시 ‘유遊’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저자는 ‘유’ 개념을 현대라는 패러다임으로 가져와 ‘유’를 정치를 부정하기보다 정치를 누리고, 문명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문명을 누리는 태도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유’에 이르도록 해주는 것이 양생養生nourishing-life의 기술(자의적 권력에 맞서 자신의 생명과 삶을 보전하는 기술)과 달생達生mastering-life의 기술(양생의 기술을 삶의 다양한 영역에 적용하는 기술)이며, ‘도술’이란 이러한 삶의 기술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우리 시대라는 틀 안에서의 고전 읽기를 고민해온 저자는 이처럼 노장 전공자로서의 진지한 노장 읽기를 통해 통념에 가려져 있었던《노자》와《장자》의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는 동시에 이러한 고전을 삶 속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그리하여 이 책은 저자 자신의 바람처럼 학술적 연구서이면서 작은 이야기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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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장자를 알고 싶다면 꼭 봐야 할 책! 뒤섞이고 엉클어져 길을 헤매는 동양철학을 구원할 진리.  구매
서재필 2013-12-10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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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7책] #15 - 노장을 해체하라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새창으로 보기 구매
《노자》를 읽는다고 하니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노자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기본적으로 나는 마음의 위안 따위를 경계하는 입장이라 저런 이야기를 들으면 불편하다. 편안하다는 것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읽었다는 뜻이다. 이런 식의 태도는 성서를 읽는다는 평범한 교인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위해 성서를 읽는다. 문제는 그런 독해가 심각한 오독의 가능성을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기 위해 읽기. 그런 읽기는 특정 부분만 닳고 닳도록 주무른다. 마치 관광지에서 특정 부위로 유명한 동상을 만지는 것처럼. 복을 바라는 저 손길!

 

흥미롭게도 그런 신앙인들은 교회 밖에서도 발견된다. 동양철학이라는 분야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유가'에 경도된 사람들은 주희의 주석을 보석처럼 받드는 반면, '도가'에 경도된 이들은 주석 따위는 별로 상관치도 않고 생태니 자유니 하는 말을 멋대로 갖다 붙인다는 점이다. 공통점은 자구 해석에 집착한다는 점인데 이는 마치 성서에 한 점 오류가 없음을 주장하는 저 신앙인들에 비견할만하다. 그러니 역사니, 해석이니, 문헌 비평이니 하는 문제는 전혀 고려할만한 게 아니다.

 

《노자》를 좀 공부하면서 발견한 흥미로운 점은 대중들이 그토록 《노자》를 사랑하면서도 그에 관한 이론적 연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삼키기 쉬운 유동식 마냥 잘 가공된 《노자》에 젖었기 때문이며, 그것만이 《노자》의 본 모습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이야기하는 노자와 장자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노자》가 사실은 권력을 취득하기 위한 방편을 제공하는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벽창호가 되어 버리곤 한다.

 

대체 왜 이런 것일까? 그것은 이른바 '동양 철학'을 소비하는 특정한 버릇 때문이라 생각한다. 자연, 자유, 평등, 생태... 이런 개념을 버리고 다른 식으로 읽을 길은 없을까? 나에게는 저 말들이 내용없는 껍질처럼 느껴진다. 마치 십자가 아래 부르짖는 공허한 소리들 처럼. 그런면에서 이른바 노장철학이라는 것을 대중적으로 소비하는 데 기독교적 관점이 크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은 숙고해볼 만한 부분이다. 

 

여러 곳에서 발표한 논문을 묶어서 한 권의 책이라기 보다는 논문집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나름 한 권의 책 구색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나 아쉬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장점이 많은 책이다. 《노자》와 《장자》를 공부한다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이야기하면, 이 책을 읽은 뒤 《노자》나 《장자》를 읽을 욕망이 사라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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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취두부 2015-11-0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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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물러나 노자와 장자 보기 새창으로 보기 구매
노자와 장자에 관심을 가지고 읽는 분들중에 한권의 주석서나 해설서만

보신 분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책이다.

 

한 걸음 물러나 노자와 장자라는 책을 좀 더 크고 다양한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만드는 책이다.

 

제목의

노자의 칼에서 칼은 가지기 위한 행위이고,

장자의 방패에서 방패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위이다.

삶은 가지기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분주한 모순이라는 얘기다.

 

 

지금 우리는 이런 모순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나에 대한

해결책을 노자와 장자의 도가적 전통을 통해 찾아보자고 말한다.

 

쉽게 읽히는 듯 하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다.

다음에는 좀 더 깔금하게 정돈된 글쓰기 김시천 선생이 도가사상에 대한

책을 내주시기를 기대한다.

 

이 책과 철학에서 이야기로라는 책 모두 읽이보면,

김시천 선생은 노자와 장자를 읽는 행위를

우리 삶의 현실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노자와 장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물론 우선 그 내용을 알아야하지만),

그래서 노자와 장자를 통해서 우리 삶이 어떻게 윤택해질 것인가야말로

시간들여 노자와 장자의 지혜를 빌리는 이유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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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휴암주 2016-06-0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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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시대에 따라 달리해석된다! 새창으로 보기
  이책을 처음 알게된 것은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에서였다 김시천, 오상현!! 이두분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는 논어 한구절을 중심으로 주제를 잡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기존에 논어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오해를 이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많이 걷어냈다. 그리고 도올김용옥 선생의 '논어 한글역주'를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김시천 쌤이 자신의 전공인 '노자'에 대해서 강의를 하시기 시작했다. 그의 책!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를 읽겠다는 생각도 이때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번 무더운 여름을 이책을 읽으며 지내보기로 결심하고 책을 빼들었다.

 

1. 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노자!!

  김시천 쌤이 가장 난감해하는 질문이 '좋은 도덕경 해설서 있으면 추천해달라'라는 말이라한다. 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노자! 그런데,어떤 책을 추천해주어야할까? 막막하기만 하단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도올의 도덕경 강의에서 알고있는 노자에 관한 상식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노자의 여러얼굴중 하나였다. 도덕경이 병법서로도 읽힌다는 사실을 아는가? 호모 임페리얼리스인 노자가 군주들을 위해서 쓴책을 우리는 패미니즘적 시작에서 생태환경적 시각에서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통쾌하게 깨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경에 대한 상식들은 유학자들에 의해서 해석된 도덕경이라는 사실도 아울러 지적해준다.

  이책을 쉽게 읽으려면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 - 노자 편들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팟캐스트를 듣고 혹은 같이 듣고 읽는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유학자들이 종하한 장자!!

  이 책은 장자라는 책을 과연 노자와 같은 부류의 책으로 읽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유학자들이 왜? 장자라는 책을 좋아하는지, 특히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이에 대해서 설명해준다. 그리고 장자에게 갖고 있었던 갖가지 오해들을 말끔히 설명해준다. 그런데,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도 '장자'라는 책을 읽어 봐야겠다. 읽지 않고 이책을 읽다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 -노자편에서 장자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기는 하지만, 설명이 안된 부분을 읽다보면,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3. 평범한 상식에 도전하라!!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평범한 상식에 도전하라는 말이었다. 우리가 당연시하며 알고있었던 상식들을 이책은 통쾌하게 반박한다. 과연 그것이 맞을까? 어떤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갖고 있었던 오해! 그 오해를 걷어내려면 상식에 도전해야한다.

  또한가지, 평범한 진리이지만, 고전이란, 천의얼굴을 하고 있다. 고전을 읽으면서도 과거의 책 속에서 현재의 지혜를 얻으려 하기에, 자연스럽게 과거의 책은 오늘의 문제에 답을 해주도록 읽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얼굴을 바꿔가며 지혜를 주는 책이 바로 '도덕경'이다. 그래서 도덕경을 논어 다음으로 읽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평범한 상식에 도전하고, 이시대의 도덕경과 장자 읽기에 대해서 고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천의 얼굴을 하고 있는 고전의 재미에 빠져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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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6-08-02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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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철학에서 이야기로 - 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 김시천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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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이야기로 - 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4 
김시천 (지은이)책세상200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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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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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노자>와 <장자>를 통해 오늘날 한국에서 철학하기의 의미를 되짚어봄으로써 서구의 방식에 따른 철학'만들기' 가 아닌, 우리 시대의 철학'하기' 를 제안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진리' 를 담고 있는 닫힌 경전이나 체계적인 철학서라는 이름을 버리고, 역사와 함께 전해진 '삶의 이야기' 로서 <노자>와 <장자>를 보자고 제안한다.

1장은 근대화, 서구화, 보편화를 지향했던 20세기 한국의 역사 과정이 동양철학의 영역에 남긴 자취를 탐색한다. 
2장은 서구인의 <노자>읽기를 검토하고, '열린 텍스트' 로서의 가능성을 따져 본다. 
3장에서는 <장자>의 이상사회론의 다양한 갈래를 다루고, 그 안의 유토피아의 비전을 생각한다. 
4장은 기존의 <노자>와 <장자>의 해석이 지닌 문제를 살펴보고, 지금-여기를 통해 <노자>와 <장자>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노자>와 <장자>를 우리의 것으로 해석하면서, 고전을 통해 우리의 현실, 사회의 문제를 담아내자고 제안한다.


목차
들어가는 말 - <노자>와 <장자>의 한국적 읽기를 꿈꾸며

제1장 철학만들기에서 철학하기까지 - 우리시대 전통 도가 철학담론의 양면성
1. 김치-햄버거 철학을 위한 변명
2. 서양 철학의 그늘
3. 도가의 철학 만들기 - 근대화 혹은 자생적 오리엔탈리즘
4. 철학하기의 어려움 - 우리에게 과연 철학은 있는가

제2장 닫힌 경전에서 열린 텍스트로 - 서구인의 <노자>읽기를 돌아보며
1. 노자, 서방으로 가다
2. 서구 세계의 노자 번역
3. 노자 번역의 유행과 그 이유
4. 두 개의 거울
5. 프리즘 - 동양 문명의 분석 혹은 새로운 사유를 찾아서
6. 우리들의 노자읽기 - 경전에서 텍스트로

제3장 <장자> 텍스트 해체의 가능성 - 이상사회론을 통해 본 <장자>사상의 다양성
1. 도가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2. 이상사회론의 유형학
3. 도가적 아르카디아
4. 도가적 유토피아
5. 아르카디아에서 유토피아까지

제4장 역사에서 이야기로
1. <노자>와 <장자> 역사에서 이야기로
2. 도가 혹은 노장을 넘어
3. <사기>의 중국 혹은 역사를 넘어
4. 역사의 그늘 아래에서
5. 이제 우리의 이야기로

맺는 말 - 우리 사회의 삶 속에서 <노자>, <장자> 이야기하기
부록- 1980년대 이후 서구-영미권의 도가 연구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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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요컨대 동아시아 철학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행복한 삶이 가능한,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다만 우리가 아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했던 것은 그러한 사회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온 동아시아의 위대한 스승들과 사상들은 그런 살기 좋은 사회를 수립하기 위한 사색과 논쟁의 산물들이라 할 수 있다. 
무위와 자연을 노래했던 도가든,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법가든, 가족간의 끈끈한 사랑의 행위를 확장하여 이를 전체 사회 속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유가든, 그들의 목적은 모두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색과 논쟁이 담긴 그릇이 동아시아의 고전들이다. 
(본문 158쪽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시천 (지은이) 

동양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상지대학교 교양대학에서 공부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4년부터 인문학 전문 팟캐스트 〈학자들의 수다〉를 제작, 진행해 왔고, 2020년부터는 유튜브에서 새로운 인문학을 소개하는 방송 〈휴프렌즈〉와,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사는 지혜를 모색하는 방송 〈휴애니프렌즈〉에 출연하고 있다. 그동안 쓰고 옮긴 책으로,
 『철학에서 이야기로』,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논어, 학자들의 수다 : 사람을 읽다』, 
『무하유지향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장자』, 
『죽은 철학자의... 더보기
최근작 : <동양철학산책>,<똥에도 도가 있다고?>,<근대 사상의 수용과 변용 1> … 총 44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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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몸인가 옷인가?

버스는 너무 흔들려서 책보기가 좋질 않다. 버스에선 바깥구경 아니면 잠이다. 근자 기차를 이용할 일이 많아져서 덕분에 책볼 일이 한결 많아졌다. 그동안 사모아놓기만 하고 읽기를 게을리했던 <책세상문고-우리시대>는 상하행 왕복이면 한 권씩이 떼져나간다. <책세상문고>는 알차고, 개성 넘친다. 그래서 풍성하고 신선하다. 

막 떼넘긴 30대의 동양철학자 김시천이 지은 <철학에서 이야기로-우리시대의 노장읽기> 역시 그러하거니와, 개인적으로는 '철학' 일반의 정체 하나를 확연히 밝혀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 철학은 그 자체로 근원적·본질적·일반적인 무엇이었다. 말하자면 '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또한 그 개적(皆的)들의 몸에 걸쳐진 '옷'일 수 있다는 사실, 혹은 가능성을 나는 이 책에서 읽었다. '철학이고 싶어하는' 무엇이 '철학'을 만드는 것이라는 얘기다. 요컨대, <도덕경>과 <장자>가 철학에 못박혀 읽히지 않고 다르게, 가령 정치학적으로 읽히는 건 훼손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스로의 무게를 벗어나면 자유는 코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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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먹는하마 2005-08-31 공감(0)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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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4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최진석 > 자유게시판 | 바보새함석헌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최진석 > 자유게시판 | 바보새함석헌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최진석
작성자 바보새 17-01-07 08:08 조회1,1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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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kyobobook.co.kr/images/book/large/185/l9788971393185.jpg
 
 
우리말의 전범 함석헌·김용옥…재해석의 성과 최진석·김홍경

고전번역비평: 최고번역본을 찾아서 (25)노자의 『도덕경』
2006년 03월 04일 김시천 호서대

‘노자’ 혹은 ‘도덕경’ 번역비평을 위해 관련 번역서들을 책상 위에 모아 놓았다. 열권이 훨씬 넘는 분량이었다. 지난 십여 년간 학술적 토대가 있다고 판단이 된 것들만 모았는데도 상황이 이러하다.

일반적으로 널리 읽히는 ‘노자’, 백서본 ‘노자’, 초간본 ‘노자’, 게다가 왕필의 ‘노자’가 있고 하상공의 ‘노자’가 있으며 초횡의 ‘노자익’과 같은 것도 있다. 다석 유영모나 씨알 함석헌의 것이 있는가 하면, 서양철학자인 김형효의 것도 있다. 어느 누구라도 이같은 상황에서 ‘노자’ 번역서의 비평을 쓴다는 건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공자의 ‘논어’ 번역에 대해 쓰는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노자’의 전범, 함석헌과 김용욕

‘노자’의 문장은 짧고 간결한 운문형식이다. 게다가 고유명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경구 형식이며, 일반적이고 축약적인 표현을 금과옥조로 여긴 사람들이 만들어낸 문헌이다. 달리 말하면, ‘노자’의 주석자나 번역자가 어떤 ‘맥락’을 갖고 들어가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문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상공의 ‘노자’와 왕필의 ‘노자’를 사상적으로 비교할 순 있어도, 하상공 ‘노자’ 번역과 왕필 ‘노자’ 번역을 비교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양자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차선책으로 우리시대 ‘노자’ 읽기의 특징을 드러내는 몇 가지 번역서를 중심으로 ‘노자’ 번역을 비평하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천의 얼굴을 가진 ‘노자’ 가운데 우리시대의 ‘노자’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번역서들을 중심으로 살피겠다는 것이다.




‘노자’ 번역에서 현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가독성을 지닌 것으로 학문적 토대를 갖춘 번역서로는 무엇보다 김용옥의 ‘길과 얻음’(1989)을 꼽을 수 있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번역, 주석서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바탕으로 한 깔끔한 우리말 완역의 최초 사례다. 이 책은 특히 ‘노자’의 가장 핵심개념인 ‘道’와 ‘德’을 ‘길’과 ‘얻음’이라 번역함으로써 우리말화의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의 ‘노자’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은 것은 필자로선 무척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함석헌의 것이라 해야 맞다. 함석헌은 ‘노자’ 제1장의 첫 구절을 “길 길 할 수 있으면 늘 길 아니요”라고 번역함으로써 한자개념을 우리말로 풀어 ‘노자’를 이해하는 것도 가능함을 보여줬다. 물론 그에게 영향을 준 유영모의 것도 있으나, 유영모의 ‘노자’를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함석헌과 김용옥은 ‘노자’를 기독교와 과학이라는 두 요소를 의식적으로 개입시키면서 번역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다만 함석헌의 번역이 화해적이라면 김용옥은 긴장적이라는 점에 큰 차이가 있다.


깔끔한 한글표현이 장점인 김용옥의 번역 ‘여섯째 가름’(6장)은 “골의 하느님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 한다. 가믈한 암컷의 아랫문은 바로 하늘과 땅의 뿌리라 한다”고 돼있는데, 함석헌은 이를 “골짜기 검은 아니 죽어 그 이름이 까만 암컷 까만 암컷의 문이 하늘 땅의 뿌리”라고 옮긴다. 이를 보면 김용옥의 ‘노자’는 함석헌의 해석을 계승하면서 나름의 시각에서 다듬은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다만 ‘골의 하느님’은 분명 문제 있는 번역어다. ‘노자’의 ‘神’과 현대우리말 ‘하느님’의 연상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노자’는 수많은 판본을 가진 문헌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서도 20세기 후반 마왕퇴와 곽점에서 ‘백서노자’와 ‘죽간노자’의 발굴은 노자연구에 새로운 자극과 가능성을 열었다. 9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이러한 신출토 문헌의 판본과 그 연구 성과를 수용한 여러 ‘노자’ 번역이 시도됐는데, 그 가운데 돋보이는 건 최진석의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과 김홍경의 ‘노자: 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다.

철학적 재구성의 성과, 최진석과 김홍경


최진석의 것은 한 시대가 공유하는 ‘철학적 문제의식’ 속에서 ‘노자’ 번역을 시도한다. 해석상 가장 난해한 첫 구절을 그는 새롭게 발굴된 ‘성자명출’의 “오직 인도만이 가도가 된다”는 구절을 통해 ‘可道’의 찬반 논쟁의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밝혀준다. 또한 ‘노자’에서 크게 부각된 ‘유무’의 문제는 유가와 다른 노자의 본질주의적 입장을 반영한 구절로서 ‘有無相生’은 “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 주고”(2장)으로 번역한다. 최신의 연구성과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최진석의 ‘노자’는 또 다른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김홍경의 ‘노자’ 또한 읽는 재미가 아주 쏠쏠한 책이다. 게다가 중국은 물론 서구학
자들의 ‘노자’ 번역과 해석까지 샅샅이 연구해 반영했다. 그에 따르면 ‘노자’는 秦나라에서 편집된 문헌이며, 일종의 제왕학 서적으로서 신비주의나 형이상학, 정기양생론이 아닌 삶의 기술에 관한 어느 현자의 노래라는 문헌학적 주장까지 갖춘 도발적인 번역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번역상의 이견이 많았던 ‘上德不德, 是以有德’을 “뛰어난 덕은 덕에 마음을 두지 않으니 이 때문에 덕이 있고”와 같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번역을 구사하는 장점이 있다. 그의 번역은 그렇게 상식적 이해를 소중히 여기는 미덕이 있다. 가령, 42장의 ‘萬物負陰而抱陽’을 “만물은 음지를 등지고 양지를 껴안아”라고 한 건 난해한 음양론적 해석을 상식적 의미로 바꾸어 놓은 전형적인 번역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상식성을 ‘노자’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노자’의 우리말 번역서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좋은 善本인가를 따진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여기서 두 가지 기준, 즉 한글번역이란 측면과 학술적 토대라는 두 입장에서 각각 두 가지를 선정해 간단히 살펴봤다. 물론 여기엔 필자의 개인적 선호가 상당히 작용했고, 다른 필자라면 다른 판단이 나올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건 최근 쏟아져 나오는 주석서 번역에 대해서다. 예컨대 왕필의 ‘노자’는 두 가지, 하상공의 ‘노자’도 두 가지, 백서본 ‘노자’와 초간본 ‘노자’도 이미 번역됐다. 이 가운데 이석명의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는 판본상의 문제, 치밀한 연구에 바탕했기에 돋보인다. 우리가 흔히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준다(상대적이다)”는 뜻으로 읽는 2장의 ‘難易之相成’이 하상공에 따르면 “어려움을 보면 쉬움을 행한다”는 뜻이다. 즉 상대적 세계관을 표현한 언명이 아니라 행위적 지침으로 읽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석명의 ‘노자’는 ‘노자’의 이해가 시대마다 달랐고, ‘노자’의 번역이 다양할 수 있으며, 과거에도 그랬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좋은 사례다.


과거의 ‘노자’ 번역은 도가 연구자에 의한 것이 아닌 한학자에 의한 것, 개인적 관심이나 취향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80년대 이후에는 전문가가 심화된 연구에 바탕해 번역한 성과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동일 주석서의 경우도 2종 이상의 번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통사회에서 ‘노자’가 다양한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했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도 다양한 관심에서 다양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노자’를 마주하는 상황에 다다른 듯하다. 즐거운 일이다.

김시천 / 호서대·동양철학

필자는 숭실대에서 ‘노자의 양생론적 해석과 의리론적 해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철학에서 이야기로―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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