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다산의 마음공부 열복과 청복 - 가스펠투데이
[전문가 칼럼] 다산의 마음공부 열복과 청복
이경용 목사
승인 2023.06.29
단양 사인암
사람은 누구나 다 복을 좋아한다. 새해 인사도 “복 많이 받으세요!”이다. 우리 조상들은 복을 받기 위해 기왓장, 대문, 장롱, 이불, 베개, 밥그릇과 숟가락에도 복(福) 자를 새겨 넣었다. 나는 복 받기 싫어 그런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복에 대한 강렬한 소망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복이란 무엇일까.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복을 두 가지로 나눈다. 열복과 청복이다. 다산은 1799년 병조참판 오대익(吳大益)의 71세 생일을 축하하는 글에서 열복과 청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소위 복(福)이란 것은 대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아가서는 대장군의 깃발을 세우고, 관인(官印)을 허리에 두르고, 풍악을 울리며 미녀를 끼고 놀고, 들어와서는 높은 수레를 타고 비단옷을 입고, 대궐에 들어 묘당(廟堂)에 앉아 온 나라의 일을 듣는다. 이를 ‘열복(熱福)’이라 한다.
또 하나는 깊은 산중에 살면서, 삼베옷에 짚신을 걸치고 맑은 샘물가에서 발을 씻으며, 늙은 소나무에 기대어 소리를 읊조리고, 마루 위에 좋은 거문고와 오래 묵은 경(磬, 옥돌로 만든 타악기), 바둑판 하나와 한 다락의 책이 있고, 마루 앞에 백학(白鶴) 한 쌍을 기르고, 기이한 꽃과 나무, 장수와 건강에 이로운 약초들을 심으며, 때로는 승려나 선인들과 더불어 오가고 돌아다니며 즐기면서 세월이 오가는 것을 잊고 나랏일이 잘 다스려지는지 어지러운지를 듣지도 않는다. 이를 ‘청복(淸福)’이라 한다.”
사람들은 화끈한 열복을 복이라 생각한다. 열복이란 소위 세상적으로 성공한 인생이다. 고위 관직에 이르고, 부자가 되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떵떵거리며 사는 삶이다. 그러나 열복의 끝은 대부분 불행으로 마치는 경향이 있다. 한때 어깨에 힘주고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사람들이 노년엔 고개 숙인 초라한 모습으로 TV에 나오는 것을 종종 본다. 다산은 사람들이 열복과 청복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각자의 성품에 따르지만, 하늘은 청복을 몹시 아껴서 소수의 사람에게만 준다고 한다.
다산의 청복 모델인 오대익(1729-1803)은 승지와 병조참판을 지낸 이로 다산이 존경하던 정치 선배이다. 다산은 부친이 울산부사(울산시장)로 있을 때, 울산에서 부친을 만나고 상경하며 단양에 들러 사인암을 보고 이런 시를 짓는다.
“옥을 깎은 붉은 절벽 만길 높이 솟았고, 푸른 물에 구름 바위 거꾸로 꽂히었네.
시랑이 학을 탔던 소나무 아직 남았고, 승상이 거문고 타던 바위 아니 잠기었네.”
시랑은 오대익을 말하고, 승상은 서애 유성룡을 말한다. 일찍이 오대익은 충북 단양 사인암에 머물며 신선처럼 지내던 사람이다. 오대익은 나무로 만든 학을 사인암 꼭대기 소나무에 매어 놓고, 종들에게 밧줄을 천천히 내리게 하고 나무 학을 타고 내려오며 부채를 부치며 아래 물까지 내려왔다. 한마디로 신선놀음을 한 것이다. 이러한 스토리를 알고 있는 다산은 사인암에서 오대익을 부러워하며 시를 지었다. 사인암(舍人岩)은 고려 시대 사인(舍人) 벼슬을 한 우탁(1263~1343)이 머물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탁은 유명한 탄로가(嘆老歌,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를 지은이다.
다산은 훗날 강진으로 귀양 가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읍내 제자들, 외가 제자들, 승려 제자들 세 그룹이다. 다산의 제자 가운데 끝까지 다산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은 황상(1788-1870)이다. 아전의 아들인 황상은 좀 둔하지만,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을 새기고 이어간 사람이다. 어느 날, 황상이 다산에게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조용하게 숨어 사는 은자(隱者)에 대해 질문하자, ‘제황상유인첩’이란 글을 지어준다. 유인(幽人)이란 은자를 말한다.
은자로 살아가려면, 산수가 그윽한 산골에서 호수를 끼고 시내를 옆에 두고 넉넉한 논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야 한다. 집은 정남향으로 서너 칸 짓고, 방안은 하얀 설화지로 도배하고, 1300여 권의 책과 모과나무로 만든 탁자를 둔다. 담장 안은 석류, 치자, 목련, 국화를 가꾼다. 집 옆에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고 붕어를 기르며, 산에서 흐르는 물을 대나무를 쪼개 물홈통으로 사용하여 물이 졸졸 떨어지게 한다. 담장 너머 채소밭엔 아욱, 파, 마늘, 오이, 고구마를 가꾸고 해당화로 담장을 만든다. 50보쯤 떨어진 물가 바위에 정자를 짓고 대나무로 난간을 만든다. 그리고 가끔 친구가 찾아오면 호수에서 배를 타고 시를 짓고 송엽주 한잔을 나눈다. 임금이 불러도 굳이 대답하지 않고, 빙긋이 웃고 나가지 않는다. 이게 바로 은자의 삶이라 한다.
허련이 그린 〈일속산방도〉, 1853년
한마디로 무릉도원의 삶이다.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의 조선판 그림이다. 놀랍게도 다산은 18년 강진 귀양살이에서 다산초당을 가꾸며 이런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갔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작은 무릉도원이다. 제자 황상도 훗날 산골에 일속산방(一粟山房, 좁쌀 한 톨만 한 작은 집)을 짓고 은자의 삶을 살아갔다. 한가지 생각할 것은 다산초당이나 일속산방이 단순히 은둔의 공간이 아니라, 창조의 산실이란 것이다.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500여 권의 책을 썼고, 황상도 “치원유고”등 문집을 남겼다. 황상의 시에 감탄한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귀양이 풀려 한양으로 가던 길에 황상을 찾아 직접 강진에 간 일도 있다.
21세기 증권이 오르내리고 쳇GPT가 오가는 뜨거운 세상에 진정한 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복이 다르겠지만, 다산이 말하는 청복도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주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셨다. 아직도 절대 빈곤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고, 농촌 미자립교회 목회로 힘든 분들이 많지만, 자족하는 마음과 청복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 여름휴가에 강진 다산초당이나 단양 사인암을 가보시길 권한다.이경용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