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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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작성자 바보새 16-01-29 02:13 조회9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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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滅不滅을 초월하는 至上 자아
 
 
 
 
13장에서 크리슈나는 몸과 영혼(아트만)에 대한 이치와, 겸하여 삼캬론에서 말하는 그와 비슷한 프라크리티와 푸루샤의 차이를 설명했고, 14장에서는 세 가지 구나(性)의 결과로 인하여 각 개인의 천성에는 서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말하고 난 다음, 그러므로 선성의 사람, 동성의 사람, 암성의 사람이 각각 종국에 가서 어떤 지경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말했다. 그는 3 성초월(三性超越, trigunatita)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삼캬론에 의한 브라마의 경지는 어떤 것이며, 그리고 그러한 경지에는 어떤 방법에 의해서 도달되는 것이냐 하는 것을 설명했다. 그 모든 설명이 다 삼캬론의 말로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것은 삼캬론의 이원론을 받아들이면서 한 것은 아니다. 프라크리티와 푸루샤가 다 그이의 나타남인, 유일의 파라메슈바라의 영적, 또는 경험적 지식으로 그것을 한다. 이러한 파라메슈바라의 형상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거기 더하여서 그는 또 제 8장에서 아지 야즈나(adhiyajna)와 아쟈트마(akhyatma)와 아지다이바타(adhidaivata) 등의 차이를 말씀했고, 또 만유를 꿰뚫는 유일의 파라 메슈바라가 계신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는 또 몸 안에 와 계시는 아트만이시기도 하다는 것을 말했다. 이제 여기서 크리슈나는 왜 어찌해서 파라에슈바라로부터 우주적 전개가 창조되었느냐, 혹은 다른 말로 한다면 이름과 형상에 의한 파라메슈바라의 흩어짐(擴散)은 왜 있게 됐느냐 하는 것을 한참동안 하나의 나무, 혹은 숲에 비하면서 그려내고는, 나중에 그들 절대의 나(絕對我, Purushottama)로 그린다. 그것이 곧 파라메슈바라의 최고의 형상이다. ―틸라크
 
거룩하신 주 말씀하시기를
 
1. 불멸의 보리수는 그 뿌리를 위에 두고 그 가지를 아래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잎은 베다의 노래요, 그것을 아는 이는 베다를 아는 이니라.
“뿌리를 위에 두고 가지를 아래에 두는 이 세계의 나무는 영원한 것이다.”(「Katha UP.」) 산사라브리크샤(sansaravriksha), 곧 우주의 나무다. 「마하바라타」는 우주진화를 하나의 나무에 비하면서 그것은 위대한 지식의 검(jnanena paramasina)으로만 찍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나무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뿌리를 위에다 두었다 한 것이고, 그것이 세계로 뻗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가지를 아래로 두었다고 한다. 이 세계는 초월해 있는 이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체다. 옛날의 신앙에 의하면, 이 세계는 베다에서 하는 희생의 바침으로 유지되어간다. 그래서 그 잎을 베다의 노래라고 했다.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살려가는 것은 잎이기 때문이다.「리그베다」1,2,4, 7을 보라.
그리고 다른 데에는 “이 우주의 나무를 만든 것은 나다”(「Taittiriya UP.」1, 10)라고 했으며, 또 다른 데에서는 우리 몸은 흙에서 난 것이고 혼은 하늘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땅과 별이 돋는 하늘의 아들이지만, 내 종족은 하늘에서만 온 것이다.”(Petelia orphic tablet)
플라톤(「Timaios」)을 보면, “우리 영혼의 가장 존귀한 부분에 대하여 말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는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귀한 영혼을 넣어주셨다. 그것이 우리 몸의 가장 위인 정수리에 있어서 우리를 땅에서 들어 올려 하늘에 있는 우리 동족에게로 향하게 한다. 우리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속한 나무이기 때문이다. ―라다크리슈난
보리수 즉 아슈바타(ashvatta), 슈바타는 내일이라는 뜻, 아슈바타라면 내일까지 가지도 못한다는 말. 이 감각의 세계는 아주 덧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언제나 흔들리는 덧없는 것이지만, 그 뿌리는 브라만이기 때문에 불멸이다. 그것을 보호하고 지지해주는 것이 베다의 잎, 곧 다르마다. 감각의 세계는 그런 것인 줄을 알고 또 다르마를 아는 사람이 참으로 아는 이, 곧 베다를 아는 사람이다. ―간디
이 아슈바타를 대개는 인도 말로 피팔(peepal) 나무로 해석하는데 또 어떤 책에는 반얀(banyan) 나무라고 한 데도 있다. 반얀나무란 가지가 어느 정도 자라면 그 가지에서 뿌리가 내려서 하나의 나무가 되고 또 뿌리가 내리고 해서 나중에는 숲이 되고 마는데, 아마 이렇게 뿌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기 때문에 이것으로 번역한 듯하지만, 그 비유하는 전체의 의도로 보나, 또 그 나무의 생긴 당당한 모습으로 보나 피팔나무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피팔은 한문으로 된 문헌에도 필발나수(畢鉢羅樹)라고 음으로 번역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석가모니가 그 밑에서 도를 깨달았다고 해서 각수(覺樹) 혹은 도수(道樹)라고도 번역되는데. 불교가 퍼진 이후부터 흔히 보리수(菩提樹)로 불린다. 보리는 옳게 발음하면 ‘보디’ 라 해야 할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보리로 발음해온다.
피팔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한다면 느티나무와 성질이 비슷해서 크게 자라고 가지가 넓게 퍼져 그 밑에서 쉬고 명상하기에 좋다. 간디가 가장 오래 있었던 세바그람 아슈람에 가면 그 뜰에 간디가 손수 심었다는 피팔나무가 한 그루 있다. 1971년 내가 가봤을 때 이미 아름이 넘었다. 저녁 다섯시가 되면 그 아슈람에 있는 수도자들이 간디의 생시에 하던 대로 나와 맨땅에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맨 앞에 전에 간디가 앉던 자리에는 방석을 하나 놓아서 보이지는 않으나 그가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자리 뒤에는 조그만 칠판 같은 것을 세워놓았는데, 거기에는 “예배하기에 가장 적당한곳은 큰 성당이나 절 같은 데가 아니라, 활짝 열린 바깥, 그중에서도 특히 큰 나무 밑이다. 그래야 가난하고 낮은 사람들이라도 다 마음 놓고 올 수가 있다”는 간디의 말이 씌어 있었다.
장자가 슬슬 거닒(道遙遊)을 했다고 하는 큰 저(樗)라는 나무도 그런 나무였을까? 아담 부부가 낙제를 했던 그 나무도 역시 그 우주의 나무가 아닐까? ―함석헌
 
2. 아래로 위로 그 가지는 벋고, 바탈에 의해 그 진액을 받고 감각의 대상에 의해 그 순을 내며, 그 뿌리가 아래로 서리어 인간 세상의 짓에 얽힌다.
바탈 구나, 3성.
순 잔가지, 싹(芽)
짓 카르마, 업. 작위(作爲).
샹카라의 주석에는 아래로 서리는 뿌리는 전생의 행동의 결과로서 혼이 가지고 있는 바사나(vasana,욕망)라고 했다. —라다크리슈난
이것은 깨닫지 못한 마음들이 보는 감각세계의 나무의 모양을 그린 것이다. 그들은 위로 브라만 속에 있는 그 뿌리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감각의 대상에 애착하게 된다. 그리고 세 구나로 그 나무에 물을 주며 속세의 카르마에 얽매어 있게 된다. ―간디
아슈바타 나무의 뿌리가 위에 있고 가지가 아래 있다는 것이「카다 우파니샤드」에 나와 있는데, 그것을 ‘영원한 불멸의 브라만’ 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언제나 덧없는(可滅) 그러면서도 그 덧없음에서 영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슈바타는 틸라크가 결정적으로 단정한 대로 피쿠스 텔리지오나(ficus religiona), 혹은 피팔나무다. 그 뿌리, 즉, 원초적인 씨는 브라만인데, 시적으로 표현해서 ‘위’ 라 했고, 그 무성하게 퍼진 가지는 환하게 우리 눈앞에, 아랫세상에 있다. 그러나 2절에서 그 뿌리가 아래 있다고 한 것은 이 죽을 인생들은 언제나 그 정말 뿌리는 잊어버리고 세상적인 뿌리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가지가 위로 아래로 퍼졌다고 한 것은, 행동은 과거 행동의 결과로 되는 것인데 그것이 또 행동으로 나타나서, 나서는 죽고, 죽어서는 또 나는 끊임없는 반복을 보여 주고 있다. 힐(Hill)이 “피팔나무는 새 뿌리를 박기 위해 기근(氣根)을 내지는 않는다”고 한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도 자라서 노목이 되면 한다. 라나데(Ranade) 교수는 그의 우파니샤드 철학 연구에서 칼라일의「영웅숭배론」속의 명문을 빌어서 아슈바타 나무를 스칸디나비아 신화의 익드라실나무(tree igdrasil)에 비교하고 있다. “그 가지는 그 움틈과 잎 떨어짐으로—사건들, 겪었던 일들, 이루어진 일들, 재난들—모든 나라와 시대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 한 잎새마다가 한 인물의 전기 아닌 것이 있으며, 그 한 엽맥에 한 행동이나 말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 가지는 민족들의 역사요, 그 설렁거리는 잎소리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오는 인간 생존의 소리다. 인간 심정의 숨소리가 설렁거리며 자라고 있다. 이것은 익드라실, 존재의 나무다. 이것은 과거요, 현재요, 미래다. 된 것이요, 되고 있는 것이요 될 것이다. 한다는 동사(do)의 무한한 연결이다.” 라나데 교수는 한 가지 중요한 반대되는 점에 주의를 하고 있다. 즉, 익드라실은 그 뿌리를 헬라(Hela) 곧 죽음의 나라에 깊이 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2절의 말씀을 잊고 있는 듯하다. 거기서는 뿌리들이—1절에서와 같이 그 뿌리가 아니고—아래로 서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비교는 학식 많은 교수가 했던 것보다 도리어 더 가깝게, 더 교훈적이 된다. 한다는 동사의 연결이란 것은 영원한 카르마(業)의 얽어맴이다. 혹은 다른 말로 한다면 끝없이 되풀이되는 죽음이다. 간디가 15장 2절에서 설명한 것같이, 사람이 만일 눈을 떠서 위에 있는 불멸의 뿌리를, 그것이 곧 죽음 없는 지경인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12장 7절을 보라. 거기는 산사라(sansara, 나고 죽음을 되풀이하는 세상)가 곧 죽음이라고 되어 있다. ―마하데브 데자이
모든 주석가들의 말이 아슈바타나무가 ‘산사라’ 곧 감각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서는 일치하나, 그 자세한 해석에서는 제각기 다르다. 샹카라는 뿌리는 브라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위에’ 있다고 했고, 가지는 삼캬론의 타트바(tattva, 25개의 원리)들이므로 현실세계에서 보는 대로 ‘아래’에 있다고 하고, 더 나가서 이 가지들은 “아래에도 위에도”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산사라’ 안에서는 인간이 중간에 있고 위에는 브라마와 데바(deva)가 있고 아래는 낮은 단계의 생물들이 있기 때문 이다. 그는 또 1절의 물라(mula, 뿌리)와 2절의 물라니(mulani, 뿌리들)를 구별해 말했다. 둘째 것은 제2의 뿌리, 곧 인간세상에서 선악의 행동을 하게 하는 바사나(vasana,욕망)들이기 때문이다. 라마누쟈는 위에 있는 뿌리를 일곱 세계 위에 앉아 계시는 브라마라고 생각하는 이 외에는 샹카라와 한 가지 의견이다. 샹카라는「베다」는, 옳고 끓고를 다루는 의미에 있어서는, 이 세계를 보호하기를 마치 잎이 나무를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찬도가 우파니샤드」참조) 그는 마드바(madhva), 슈리다라(Sridhara) 또 그외의 사람들과 한가지로 아슈바타(ashvattha)를 아슈바스타(a-shvah-stha, svo pisthata)에서 끌어내온다. 그 이유는 이 세계는, 비록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불멸이기는 하지만, 변전무상(變轉無常)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주석가의 해석을 다 보자면 한이 없는 일이다. 톰슨(J.C. Thomson)이 아슈바타를 반얀나무(banyan tree)라고 믿고 그 가지가 아래로 내려와서 새 뿌리가 된다고 한 것은 잘못 알고 한 말이다. 이것은 잘못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왜 특별히 아슈바타나무가 뿌리를 위에 두고 가지를 아래로 뻗는다고 했느냐 하는 것을 설명해보자는 하나의 시험이라고는 할 수 있다. 주석가들이 이 점을 전연 무시하고 있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다음에서 하려는 말은 완전치는 못하지만 이 나무를 왜 골랐느냐 하는 것을 설명해보려고 하는 말이다.
아슈바타여(ashvattha, 아마도 ashvah-stha, 즉 그 밑에 말들이 서 있는 나무라는 데서 끌어내온 것인 듯한데)는 피쿠스 렐리지오나 혹은 피팔나무인데 인도에서는 누구나 잘 아는 나무요, 힌두교도들이 매우 존경하는 나무다. 이것은 그와 비슷한 나무인 반얀나무처럼 가지에서 기근(氣根)을 내어 땅에 가 닿아 새 뿌리를 박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뿌리를 위에 두고 가지를 아래로 뻗는다고 했을까? 이 나무는 그 자라는 법이 독특해서 뿌리가 다른 나무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무통이 굵게 자람에 따라 그 모양을 전연 볼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그 일부분이 땅 위로 쑥 삐져올라와서 여러 개의 가지를 내어 얼크러지게 되고, 그 여러 개의 뿌리가 제각기 가지와 뿌리를 낸다. 그래서 뿌리와 가지가 서로 구별을 할 수없이 하나로 된다. 그래서 가지가 땅으로 내려왔다고도 할 수 있고, 뿌리가 위로 올라 왔다고도 할 수 있게 된다. 그 구절을 그렇게 해석하면 왜 상징으로 아슈바타를 택했느냐 하는 설명이 될 뿐 아니라 그 비유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럴 때는 ‘위’는 눈에 보이는 이 세계 땅 위란 뜻이고, ‘아래’는 땅밑의 보이지 않는 밑이란 뜻이다. 뿌리와 가지를 하나로 하면 프라크리티이고, 땅 밑은 아뱍타(avyakta) 곧 감각할 수 없는 것. 땅 위는 뱍타(vyakta) 곧 감각할 수 있는 것. 1절의 뿌리와 2절의 뿌리들은 구별할 필요도 없다.—힐
 
3. 여기서는 그 실상을, 그 끝도 시작도 뿌리도 알지 못한다. 먼저 이 꽉 뿌리박힌 아슈바타나무를 날카로운 무집착의 칼로 찍어라.
 
4. 그런 다음 사람이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지경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오직 이 태고 이래의 모든 세계가 그리로 좇아 나오는 그 맨첨의 영이신 분에게만 귀의하기를 원하노라 하면서.
맨첨의 영이신 분 최초의 인간(primal person, primal being, original personality of godhead), 원인 (原人). 원아(原我).
 
5. 오만함이 없고, 헤매임이 없는 사람, 집착에서 오는 사악을 이기고 항상 참 자아에 머물러있어 애욕을 가라앉히고 고락의 상대에서 해방되어 현혹당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불멸의 지경에 이르느니라.
 
6. 해도 달도 불도 비치는 일이 없으며, 한번 들어가면 다시 돌아옴이 없는 곳, 거기가 나의 머무는 가장 높은 곳이다.
 
7. 내 몸의 한 가는 부스러기조차도 생명계에서 한 산 혼이 되어 영원히 있으면서 자연계에 있는 마음까지를 합한 육감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있느니라.
가는 부스러기 미립자(particle), 미분(微分), 미진(微塵).
생명 지바(jiva). 유한한 생명.
자연계 자성, 프라크리티.
마음 의식.
육감 빛, 소리, 냄새, 맛, 감촉의 오감과 의식.
이것은 최고의 주재자가 사실로 자기 몸을 가는 티끌로 갈라놓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은 최고 주재의 한 운동이요 한 삶(大生命)의 한 초점이다. 자아는 하나의 핵심이어서 자신을 확대하여 온 세계를 안을 수 있고, 마음과 혼을 긴밀하게 통일한다. 실지로 나타나는 그 모양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나, 개인 영혼의 실상은 거룩하신 이 그대로다. 그러나 인간적인 나타냄은 그것을 온전히 할 수는 없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하늘 땅을 연결하는 다리다. 각 개인은 우주 안에서 영원한 의미를 가진다. 그가 자기의 한계성을 벗어날 때 그는 초개인적 절대 속에 녹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 속에 살게 되는 것이고 우주적인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동참자가 되는 것이다.
샹카라는, 자아는 최고 주재의 한 부분인 것이 마치 항아리 속이나 방 속에 있는 공간이 대우주 공간의 한 부분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라마누쟈에게서 영혼은 사실로 하나님의 한 부분이다(amsha).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개인 영혼의 실체가 되는 것이고 감관의 종살이를 하게 됨으로 인해 얽어매임을 당한다. ―라다크리슈난
 
8. 몸의 주인이 어떤 몸을 가질 때나 또 그것을 떠날 때는 그것들을 가지고 간다. 마치 바람이 향기를 그 있던 곳에서 걷어 가지고 가듯이.
몸의 주인 이슈바라(Ishvara).
그것들 감각과 의식.
 
9. 그는 귀와 눈과 촉감과 미감과 냄새맡음과 의식에 붙어 있으면서 감각의 대상을 즐긴다.
 
10. 그가 3성(三性)과 짝이 되어 떠나고, 머물고, 즐기고 할 때에 미혹한 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오직 지혜의 눈을 가진 자만이 그것을 본다.
 
11. 요가를 닦는 사람은 힘쓰면 그가 자기 속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볼 것이니라. 그러나 생각 없고 자아훈련이 되지 못한 사람은 비록 힘쓴다 해도 그를 볼 수 없느니라.
 
12. 저 태양에서 나와 은세계를 비치는 광명, 달에도 있고 불에도 있는 그 광명, 알지어다, 그것은 다 내게서 나온 것이니라.
 
13. 땅에 들어가서는 내 힘으로 만유를 지지하고, 또 감로의 진액이 되어 모든 초목을 내가 기른다.
 
14. 나는 일체몸불이 되어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 몸속에 있으며, 또 오를숨 내릴숨에 짝해 다니며, 네 가지 식물을 소화시킨다.
일체몸불(ᅳ切人火) 바이슈바나라(vaishvanara), 체온, 생명체의 몸속에 와있는 아그니(Ahni, 火神).
네가지 식물 끽(喫, 마심), 담(噉, 씹어먹음), 지(舐, 할아먹음), 철(啜, 빨아먹음) 곧 모든 음식물.
 
15. 나는 모든 사람의 심장 속에 들어가 있으며 기억과 지식과 잊어버림은(혹은 의심을 쫓아냄, 혹은 결핍은) 내게서 나간다. 또 모든「베다」에서 알려졌어야 할 것은 나요, 실로「베다」의 종국을 지은 것은 나다. 또「베다」를 아는 것도 나다.
 
16. 이 세계에는 두 사람이 있다. 멸과 불열이다. 모든 존재는 멸이요, 변함없는 것이 불멸이다.
 
17. 그러나 그것들 말고 가장 높으신 분이 계신다. 이를 지상의 자아라고 부른다. 그 불멸의 주는 삼계에 들어가 그것을 지지 하신다.
지상(至上)의 자아 파라마트마(paramatma).
 
18. 나는 멸을 초월하며 또 불멸보다 높으므로, 세계에 있어서도「베다」에 있어서도 지상의 자아로 존경을 받는다.
 
19. 바라타의 아들아, 미혹하지 않는 자는 그와 같이 나를 지상의 자아로 앎으로 하여 그는 일체를 아는 사람이요 전존재로써 나를 신봉하는 사람이니라.
 
20. 오, 죄없는 자야, 신비 중에 가장 신비인 이 성전이 나에 의하여 가르쳐졌으니, 바라타의 아들아, 이것을 아는 자는 깨달은 자가 될 것이요,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다 완성한 것이 될 것이니라.
깨달은 사람 부디만(buddhiman)이란 말은 여기서는 혹은 부다(buddha), 즈나나(jnana), 인식아(認識我, knower)의 뜻이다.「바라타」(Bharata)에서는 부다라는 단어와 크리타크리차(kritakritya)라는 단어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으로 쓰는 부다라는 말, 즉 “화신으로 태어난 부처님”이라는 의미의 말은「마하바라타」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의 제15장 멸(滅) 불멸(不滅)을 초월하는 지상(至上)의 자아의 끝이니 이는 브라만의 지식에서 요가를 가르쳐주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문답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