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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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텍스트를 통한 평화영성 사색 첫 번째>
언어의 근원과 목적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요6:63하)
우리가 쓰는 말은 단순히 정보를 교환하거나, 이의나 논쟁이 있을 때 설득이나 가르침을 주기 위하거나, 일이나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소통의 기능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쓰는 언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자신과 타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상대를 그리고 나 자신을 대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한 기계적인 기능을 넘어서 인격적인 차원을 말에 부여할 때, 말이 지닌 사고의 내용 전달을 넘어 상대와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기계적인 기능도 사고의 내용을 전달하고, 이를 알아들음으로써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고 사회의 유기적인 질서를 세우고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말이 장벽(barriers)이 아니라 창문(windows)의 기능을 함으로써 두려움과 불안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이 창문의 기능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상대방의 모습이 보이고, 그의 모습에 대응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게 된다. 이것이 말이 지닌 인격적인 차원이다. 상대방의 얼굴과 전신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종 상대방의 면전에서 사고의 내용에 빠져들어 상대방의 모습을 잃거나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의 인격적인 차원을 더 들어가 보면 더 ‘깊이’에서 말이 지닌 본래적인 차원과 말 자체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존재론적인 차원이 있다. 이는 말이 지닌 껍질이 벗겨져서 그 알짬이 드러나는 차원이다. 그것은 성스러움(영적인 것)과 상대방을 세우고 살리기(생명)라는 존재론적이며 구원론적인 차원을 언어가 어떻게 담아서 노출시킬 수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것이다.
정보의 소통이라는 기능적인 측면과 상대방을 잘 대우해 주는 친절한 차원인 인격적인 측면을 넘어 기독교 비폭력 실천가들은 언어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인 성스러움과 살아있음의 영역을 어떻게 개인, 조직, 사회에서 드러낼 것인지를 도전받는다. 왜냐하면 폭력은 바로 이 두 기준에 대한 결여나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 즉 성스러움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적어도 한 가지 핵심은 자기 정체성에 있어서 죄, 실패, 결핍, 두려움이 없는 참자아/영혼(“내면의 빛”)을 뜻한다. 생명은 참자아/영혼이라는 본성이 세상(타자와의 관계)에서 활동하는 이치와 그 힘을 의미한다. 즉, 타자에게도 그러한 성스러움의 에너지가 공급(giving)되어 스스로 일어서고, 자기 자신이 되며, 힘을 내어 살아가게 하는 차원을 뜻한다. 요한복음의 이 영과 생명이라는 두 단어는 누가복음에서는 각각 영광과 평화로 표현한다. 신적인 아들/딸됨으로서의 영광과 비유를 통해 거짓신념의 오류 교정과 질병의 치유로 얻는 평화가 그것이다.
이렇게 내가 하는 말이 영적이고 생명을 주는 차원을 담고 있으려면, 말하는 자로서 ‘나됨(I-am-ness)’의 기반이 내적으로 형성되어야 가능하다. 즉, 말하고 있는 ‘나’는 사고나 기억이 아니라 실재에 연결된 ‘존재(I am)’일 필요가 있다. 말하는 주인공이 사고나 기억이 아니라 존재가 말하는 이가 되려면 적어도 한 가지 필요한 것은 판단을 하는 ‘머리’에서 심장으로부터 말하기(speaking from the heart)가 연습되어야 가능해진다.
자극에 대한 충동적인 반응이나 머리의 판단이 작동하는 속도를 점차 줄이고, 가슴으로부터 말하기를 시도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사고가 말하지 않고 심장이 말하는 존재력을 회복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점차 영과 생명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심장에 마련하게 된다.
(2021.7.18.)
1 comment
황필규
빈들녁~
말은 대화는 창문이 되어야, 영과 생명( 영광과 평화), 판단의 머리가 아닌 가슴의 언어로 말하기, 주일 아침에 나됨을 위한 성찰의 단상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