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1/01

토마스 머튼 - 물소리 오강남의 토마스 머튼 이야기 : 네이버 카페



토마스 머튼 - 물소리 오강남의 토마스 머튼 이야기 : 네이버 카페




토마스 머튼 - 물소리 오강남의 토마스 머튼 이야기 | 자유게시판


2019.01.0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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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Thomas Merton(1915~1968년)

-선불교와 장자에 심취했던 가톨릭 영성 지도자

“종교는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다”

20세기 미국의 사상가 중에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은 누구일까? 많은 사람이 거리낌 없으면서도 호방한 시인이자 깊은 영성의 종교인이었으며, 반전 평화 운동과 사회정의 구현에 적극적이었던 사회 활동가 토머스 머튼을 꼽을 것이다. 그가 33세에 쓴 자전적인 책『칠층산The Seven Storey Mountain』은 1948년 출판 당시 베스트셀러였음은 물론 현재까지도 여러 판본으로 세계 전역에서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가톨릭 수도원 지원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가장 열독하는 책으로 《내셔널 리뷰》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 비소설류 10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물론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나왔다. 필자도 그가 쓴 70여 권의 책 중 The Way of Chuang Tzu(장자의 길)와 Zen and the Birds of Appetite를 교과서로 사용하였고, 그 동안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같이 필자가 쓴 여러 책이나 글에서 동양 사상을 사랑하고 동서 사상의 조화를 강조했던 이 가톨릭 수도사 토머스 머튼을 수없이 인용하고 언급했다.




토머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프라드Prade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뉴질랜드 출신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던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미국인으로 명상을 중시하는 개신교 일파인 퀘이커 신도였다. 머튼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피해 미국의 뉴욕주 롱아일랜드에 있던 외가로 이주했다가 1917년 뉴욕 근교 플러싱에 정착했다. 그 후 동생 존 폴이 출생했으나 머튼이 여섯 살 되던 해인 1921년 10월 어머니가 위암으로 사망하는 슬픔을 맛보았다. 또 화가인 아버지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알제리 등지에서 예술 활동에 전념하면서 머튼은 동생과 함께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내야 했다.




청소년기를 프랑스와 영국의 기숙사 학교에서 보낸 머튼은 18세가 되던 해인 1932년 캠브리지 대학에 합격하면서 성년으로서의 자유를 만끽하려고 유럽 전역을 주유(周遊)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가톨릭의 산실인 이탈리아 로마의 어느 성당에서 본 예수의 모자이크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여러 성당을 찾아 참배하며 틈틈이 라틴어로 된 신약성경을 통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머튼은 죽은 아버지가 자신과 함께 있는 듯한 묘한 신비감을 체험했다. 그 일로 오랫동안 자기를 따라다니던 공허감의 실체와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신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기도를 드리며 어두움에서 자신을 구해줄 것을 간절히 간구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방문해 트라피스트 수도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강력히 간직하게 됐다.




그 후 이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외조부모와 함께 여름을 보냈다. 로마에서의 신비스러운 경험이 계속되면서 그는 라틴어 성경을 읽고 가톨릭 성당, 성공회 성당, 퀘이커 모임에도 열의를 가지고 참석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마음에 꼭 맞는 교회를 찾지 못했다. 조직과 규율로 움직이는 박제화된 종교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1933년 10월에 시작된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의 생활은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자서전에서 그때의 삶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에 따르면 머튼은 떠돌이처럼 다니면서 공부보다는 술집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성性적으로도 자유분방했다고 한다. 정확하게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머튼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어, 다음 해 5월 기말시험을 끝내고 캠브리지를 떠났다.




1935년 1월, 머튼은 미국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겼다. 컬럼비아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종교와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교내 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남긴 그때의 글과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걸림 없는 자유정신의 소유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시 활발했던 반전 평화 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에띠엔느 질송Étienne Gilson의 『중세철학의 정신』이라는 책을 읽고 가톨릭 사상의 정수를 맛보게 됐고 특히 올더스 헉슬리의 『목적과 수단』이라는 책을 통해 종교의 심층인 신비주의적 차원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머튼은 1938년 1월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끝내고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해 6월, 그는 그의 삶에 가장 큰 전환점을 제시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힌두교 승려인 마하남브라타 브라흐만차리와의 만남이었다. 이 특이한 힌두 승려는 그를 방문한 서양 학생들에게 각자 자기들의 정신적 뿌리를 찾아 들어갈 것을 권유하고, 머튼에게는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토머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힌두교 승려가 가톨릭 책을 추천하는 것이 너무 신기했던 머튼은 그 책들을 열심히 통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학원 논문 주제가 된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해서도 열심히 연구했다.




그는 제라드 홉킨스가 어떻게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신부가 되었는가에 대한 책을 읽고 불현듯 자신도 가톨릭 신도가 되겠다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였다. 그는 당장 근처 성당으로 가서 신부를 만나 가톨릭 신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혔고 이내 교리문답 공부를 거쳐 영세를 받았다. 그는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 학위 과정을 계속할 생각이었으나 이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인생의 행로를 수정해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어느 수도원으로 들어갈까 고민하던 그는 로마에서 구입한 라틴어 성경을 들고 아무 데나 펴서 손가락 짚이는 곳을 읽어보았다. 두 번째의 시도에서 신약 『누가복음』의 “잠잠하라” 하는 구절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것이 하늘이 주는 계시라 생각하고, 묵언정진을 강조하는 시토Cistercians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오랜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1941년 12월 10일 마침내 켄터키주 루이빌 부근 겟세마네 봉쇄 수도원에 도착했다. 그는 자기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3일간 손님방에서 머물며 창문을 모두 열어놓기도 했다. 수도원에 들어간 이후로는 겨울옷 한 벌, 여름옷 한 벌만 입고 살았고, 병이 나도 약을 쓰는 것이 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로 수행에만 전념했다. 차례대로 수도자의 단계를 거쳐 1947년 평생 수도원을 떠나지 않겠다는 ‘종신서원solemn vows’을 했으며 1949년에는 신부 안수도 받았다.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 속에 살았지만, 머튼의 재능을 인정한 수도원장의 특별 배려로 머튼은 저술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종교 서적을 번역하고 성인들의 전기를 쓰는 일, 그리고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서전 쓰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1965년부터는 수도원 내에 암자에 칩거하면서 오로지 저술활동에만 전념했다. 머튼에 대한 전기(傳記) The Man in the Sycamore Tree를 쓴 그의 친구 에드워드 라이스에 의하면 머튼의 마지막 몇 년은 “날이 새고 날이 질 때까지 머튼은 평화와 동양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쓰고 설교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 중 특히 동양 사상과 관계되는 책은 앞에서 필자가 교과서로 사용했다는 책들 외에 󰡔신비주의와 선의 대가들󰡕, 󰡔아시아 여행기󰡕, 󰡔비폭력과 간디󰡕 같은 책들이 있다.




저자로서의 위상과 영향력으로 인해 머튼은 1968년 태국에서 열리는 가톨릭과 비가톨릭 수도 생활에 관한 학회에 참석하고, 가는 김에 아시아 몇 나라를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칠층산󰡕의 판매로 엄청난 수익금을 올렸지만 한 푼도 만져보질 못한 머튼은 아시아 여행을 위해 스스로 경비를 마련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출판사에 여행기를 써서 넘기겠다는 조건으로, 말하자면 입도선매(立稻先賣)식으로 여행비를 마련해서 인도 담살라에 있던 달라이 라마를 비롯하여 티베트 스님들을 만났다. 실로 의기투합이었다. 스님들은 머튼을 보고 생불임에 틀림이 없다고 했다. 그는 스리랑카 폴론나루와에 있는 붓다 석상들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1968년 12월 10일, 54세 생일을 40일 정도 남겨둔 머튼은 수도원에 들어온 지 꼭 27년 되는 날 태국 방콕의 숙소 목욕탕에서 허술한 전기 선풍기 줄에 걸려 감전 사고로 죽었다. 일설에는 반전 평화 운동을 하던 그의 행적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평화를 위해 애쓰던 머튼의 시신은 미 공군 B-52 폭격기에 실려 미국으로 운송된 후 겟세마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머튼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책을 읽고, 힌두 승려 바라흐만차리를 만난 이후 이웃종교들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졌다. 그는 여러 종교들 중에서 특히 선불교와 노장사상을 좋아했다. 그가 선불교나 노장사상에 심취한 것은 이들 사상이 그리스도교처럼 신비주의적 차원을 잃어버린 채 ‘설명explanation’에만 의존하지 않고 ‘체험experience’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교 초기 ‘사막의 교부들’과 선사들이 체험을 중시 여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 문제를 중심으로 스즈키 다이세쓰와 서신 교환을 하기도 했다. 『장자』를 너무 좋아해 번역서들을 읽으며 5년간 명상한 끝에 장자의 중심 사상을 뽑아 시적 표현으로 재구성하여 『장자의 길』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장자를 두고 ‘나와 동류의 인물’이라고 했다.




머튼은 예수가 탄생했을 때 동방박사들이 선물을 가져다주어 그리스도교 발생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처럼 20년이 지난 오늘 그리스도교가 새롭게 활기를 되찾으려면 다시 동방으로부터 선물이 와야 하는데, 그것이 선불교와 노장사상 같은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역설했다.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인간과 그 문명 자체를 위협하는 비극을 촉진시키는” 일을 늦추기 위해서라도 동양의 정신적 유산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스스로도 틱낫한 스님 등 세계종교 지도자들과도 교류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우려 했다. 물론 머튼이 여기서 말하는 동양의 정신적 유산이란 역사적 불교나 역사적 도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역사적 종교를 배출하게 된 인류 보편의 영적 바탕, “명상의 침묵과 신비적 체험 속에서 만나는 ‘신 너머의 신’에 대한 체험” 같은 종교의 심층을 의미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동양의 종교 심층에 깔린 정신적 유산을 귀히 여기고 거기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강조한 토머스 머튼의 글을 읽을 때마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껏 우리 자신의 전통 깊은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정신적 유산을 등한시하던 우리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등잔 밑은 본래 어두운 법이라는 말로 위로를 삼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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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2019.01.01. 06:21



"종교는 설명이 아니라 체험이다." 간단하지만울림이 큰 진술이군요.. 제가 보기에는 종교는 설명으로 시작해서 체험으로 심화완성되지 않나 싶읍니다. 먼저 각자에게 와닿는 좋은 지도를 얻고, 그리고 그 지도에 따라 끝까지 걸어보는 것..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도를 얻고 영토에 도달했다고 믿거나 만족하는 것이 이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종교적 현실이기 때문에 토마스 머튼의 위 말씀은 큰 울림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soft103a작성자
2019.01.01. 06:43



맞는 말씀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올바른 안내가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누구 말대로 식당에 가서 메뉴만 보고 메뉴만 씹으면서 음식은 먹지 않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로는 explanation vs. experience 라고 대조가 잘 되는 말입니다.




soft103a작성자
2019.01.01. 06:46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머튼이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을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기독교를 설명했다면 기독교를 장자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훨 좋을 것이라는 말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