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 Kalia
2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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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선 거버넌스 제4회 심포지엄에서 ”생태, 생명신학, 파시즘 그리고 한국사회“라는 제목으로 토론을 위한 발표를 했다. 발표시간 30분, 토론 시간 90분.
오늘은 태재 대학생 4명이나 참석한 바람에 흐뭇한 설렘 속에서 발표했다. 그리스도인이라 밝힌 그중 한 명이 단톡방에 다음의 코멘트 및 질의를 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강의 참석한 태재대학교 1학년 김00입니다. 우선 좋은 강의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질의응답 또한 유익했습니다. 다만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제가 기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알고 있던 부분과 다른 내용을 접하면서 혼란이 오기도 했습니다. 특히 성경 말씀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관점을 들으며 '이건 내가 믿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른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정확한 복음 위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000박사님의 코멘트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의 의견이 앞으로 본 모임의 방향성을 잡아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답글을 써야 옳은지 무척 망서려집니다. 우선 학생과 나 사이에 경험과 이해의 지평이 너무나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답변이 또 한 번 더 혼란을 주면 어떡하나 염려스럽기 때문입니다. 숙고한 끝에 페북을 통해 답변하기로 했습니다. 직접 댓글을 달기가 망서려지고 두려움도 있습니다. 단톡방이 자칫 논쟁의 장으로 변하면 곤란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첫째, 이 심포지엄은 공공선을 위한 토론의 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재 도달한 믿음의 소중함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저는 죽도록 의심한 데카르트적 회의를 통해 도달한 철학자의 신보다 파스칼이 만난 성서의 하느님, 초등학교도 못 나왔던 우리 엄마 김중현 권사가 만난 인격적 하느님을 더 애지중지 선호합니다. 그러나 구렁에 빠지더라도 철저한 방법적 회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둘째, 신앙에 대해 그 학생이 제기한 신앙이해를 저도 청소년 시절 정말 똑같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대학에 다니며 그 아성이 깨지면서 정말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신비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구나 하는 탄성이었습니다. 판소리꾼이 얻었다는 得音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은 19-20세기 그리고 오늘의 온갖 철학적, 과학적 물음과 질문 앞에서 자기 방어(defence)적 아성을 쌓는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이란 몸과 맘을 휘저어 놓는 그런 질문들과 씨름하면서 마침내 꿰뚫고 열려진 광장으로 나가는 강력하면서도 부드러운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 광장에도 여전히 사회 인문학적 도전과 자본주의화된 예술, 문화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1세기 어려운 사회적 문제들이 혼재해 있는 시대, 특히 지구위기의 시대에 믿음을 지키고 발현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믿음은 이러한 모든 난제들을 피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씨름하는 과정에서 익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나는 김00학생에게 임한 혼란을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지식은 대개 혼란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그 혼란은 새로운 인식을 위한 출발이기도 합니다. 인식지평의 확대는 혼란의 과정을 통해 생기기 때문입니다.
넷째,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고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결국 인간의 인식과 언어와 경험을 통해 알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과 철학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자체“를 설정했지만, 그것은 실제가 결여된 허구적 관념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것은 실체론적 범주를 남긴 플라톤의 이원론이지 성경적 인식은 아닙니다. 실체가 범주가 되던 시절이 지나고 근대에는 역사가 해석의 주범주가 되었다가 지금은 유기물과 무기물로서의 ‘생명’이 주요 범주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인식에는 예외없이 이해의 지평과 해석학 및 자신이 처한 자리, 실천의 컨텍스트를 고려해야 합니다. 결국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상정한 진리도 변하는 인간의 이해와 역사와 상황을 통해 알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거나 소유하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강하게 지속적으로 계속 주장한다면 변화하고 생성하는 세계와 인간의 역사와 생생변역(生生變易)하는 자연과 어떻게 살갑게 교제하고 교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변하지 않고 소통 불가능한 성곽에 유폐시키는 꼴이 될 것입니다.
다섯째, ”정확한 복음 위에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복음의 정확성이란 무엇인가요? 나는 복음의 정확성이라는 말보다는 복음의 능력,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누가 ”정확한 복음“을 소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번 주제중 하나가 파시즘을 비판하고 극복하자는 것인데, 복음의 이름으로 폐쇄적인 생각이나, 너는 부정확하고 나는 정확하다는 독선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독선은 파시즘에 가까이 가는 길입니다.
여섯째, ”저의 의견이 앞으로 본 모임의 방향성을 잡아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유연하게 말했지만, 이 의견대로만 모임의 방향성을 잡는다면 질의와 토론 및 비평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비평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칸트가 마련해놓은 비판(비평)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대학의 학문은 비평을 기본으로 합니다. 대학의 지성은 성서만 예외라고 생각하는 주장과 함께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진리도 공론장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공론장에서 비평하고 토론될 수 없는 진리는 저들만의 진리로 축소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사는 성경말씀을 다르게 해석해온 역사입니다. 우리는 다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화합은 다른 것들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화합하는 목적은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禾)을 많은 다른 입(口)들이 골고루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和 = 禾 + 口)
대학에서는 서양 근대 사상가, 렛싱, 스피노자, 슈바이처 등을 자유롭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상의 중요한 축인 성서비평을 배제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공공선의 공공성(公共性)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시작이니까 한계가 있겠지만 운영 위원, 연구위원, 논문 발표자들 중 여성을 대폭 영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쪽밖에 되지 못하는 불구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앞으로 공공선에 부합하기 위해 서양 사상 일색이 아니라 철학, 정치, 사회, 예술에 관한 동양 사상, 한국 사상가들을 직접 발표해야 합니다. 서양 사상가들을 발표하고 그것을 한국사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아직도 사상적 종속에 불과한 수입 사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Francis Minchang Kang
고민이 되는 지점입니다. 공공선 거버넌스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이냐에 따라 보다 유사한 협소한 스펙트럼의 신자와 불신자들이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고, 보다 포괄적인 스펙트럼과 품의 코어그룹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교회 자체가 진영화되어 있고 서로를 부정하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예컨대 비평주의의 수용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면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튕겨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어떤 무브먼트라도, 결과적으로 포괄적 인적 참여를 성취하더라도 그 핵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의 신학적, 철학적 유사성은 필요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진흙처럼 공고한 코어그룹이 발생해야 모래와 자갈들이 함께하는 굳은 토대작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누구나 나의 철학이나 신학적 지점이 이 공동체나 운동의 기본 입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특히 60대 이후 오랜 연륜을 통해 공부와 경험을 누적하신 분들이 토론이나 학습을 통해 융합적 위치 이동이 되어 공동체적 수렴이 되는 것은 마치 기적과 같은 일처럼 힘든 과정이 될 것이라 봅니다.
사실 대부분의 운동은 코어그룹 형성에 기반한 커뮤니티 형성에서 출발한다고 봅니다. 어떤 운동이 그런 커뮤니티 빌딩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활동과 조직만 늘려간다면 필경 사상누각을 세우려는 것과 같이 늘 붕괴 위험에 노출된 건물과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3년 이상 지속되지 않고 사라지는 앞선 대안운동들이 그런 패턴을 많이 갖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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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Francis Minchang Kang 목사님의 염려를 저도 공감, 공유합니다. 그룹을 공고히 형성해야하는 현 시점에서 선택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코어그룹의 정신은 열린 대화와 상대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자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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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24 July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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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선 거버넌스(Common Good Governance) 출범식이 한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신여고내 교회에서 열렸다.
강치원 교수(원탁토론아카데미)의 헌신적 노력의 결과물이다.
2024년 제10회 원탁 학술대회 발표자로 추천되어 참석하게 되었다.
첫 강사인 손봉호 교수는 기독교는 ‘정의’의 종교임을 성서와 서양 여러 철학, 신학자들을 예를 들어 역설했다. 한국기독교가 NGO활동과 민주주의 시민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진력할 것을 주문했다.
둘째 강사인 가톨릭의 성염 대사(교황청)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에서 로마제국의 해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제시된 ‘사랑’이 또한 공공재임을 역설했다.
결국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정의와 사랑을 약속이나 한 듯이 두 분이 반반 나누어 말씀하신 것이다. 기독교를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하자면 정의와 사랑의 바퀴를 달고 굴러가는 마차라 할 것인데, 정의와 사랑을 각각 말씀하심으로써 오늘 가톨릭과 개신교를 대표한 분들이 기독교의 완성체를 잘 보여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교회가 우편향의 보수주의와 개교회주의로 알려져 미래가 없어진 듯 생각되었지만,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복음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공공선’의 가치를 펼치자고 모인 것이다. 이 가치는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를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부터 먼저!
공공선의 사상적 토대인 ‘공공신학’의 특징을 강치원 교수는 5가지로 요약한다.
1)복음과 소명은 세상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여! 세상 사랑하기를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한나 아렌트)
성염 대사에 의하면 EU가 형성될 때 교황청에서 적극 지지의사를 표명했고, EU 헌법전문에 기독교적 가치를 명시하기를 은근히 요구했으나, 기독교는 공공선에 기여한 바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고 전했다.
2)신앙과 신학의 언어와 내용은 비신자를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포용성과 접근가능성을 지녀야 한다.
불법체류자 의료보험과 남북나눔운동을 진행한 이문식 목사는 세상 안에서 기독교가 자신의 이름을 내려놓는 익명성을 강조했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타종교인과 비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을 넓혀야 한다고 역설했다.
3)그리스도인은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해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국제사회와 세계평화를 위한 공론장에 참여해야 한다.
손봉호 교수는 자국의 이익에 눈이 어두어져 군수산업을 증강하고 전쟁물자를 수출하여 돈버는 것을 기독교인이라면 반대하는 것이 마땅한데 속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4)교회의 예배와 시설은 개교회의 소유가 아니라 공공재의 성격이 강화되어야 한다.
5)개교회주의를 지양하고 공교회의 성격을 강화해야 한다.
정의와 사랑의 공공적 가치를 말하면서 서양 신학이나 철학의 전통만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의 전통도 언급하는 모범을 보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공공선(公共善)은 공공眞의 탐색으로부터 출발하여 공공美로 나가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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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24 September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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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공선 거버넌스가 주관(강치원 교수)하는 제3회 콜로키움이 있었다.
발표는 한면희 박사(21세기 공화주의클럽), “마이클 샌델의 공화주의와 파시즘, 한국사회”.
그의 강의 중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첫째, 우리 헌법 제 3조에 공화주의에 관한 이념(철학)을 삽입하자는 것과
둘째, 정치인과 시민 모두 덕을 갖춘 자유와 자치로서의 공공선을 주장했다.
역사적으로 덕을 갖춘 정치인이 누가 있겠느냐는 질문에
미국의 링컨, 케네디, 그리고 오바마를 예로 들었다.
한국의 도산 안창호 선생, 마하트마 간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
마이클 샌델의 10장 “공동선의 정치”를 인용했기에 꺼내어 다시 읽는다.
샌델은 진짜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구상하고 그런 문제를 성이나 낙태만이 아니라 경제와 시민의 관심이라는 폭넓은 영역으로 끌어낼 것을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문을 인용하여 주장한다. 케네디의 정의란 단순히 국민총생산(GDP)의 규모와 분배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더 높은 도덕적 목적과 관련이 있다. 다음은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 중에서,
“우리 국민총생산은 한 해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기오염, 담배 광고, 시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교도소의 건설도 포함됩니다. 미국 삼나무 숲이 파괴되고, 무섭게 뻗은 울창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
그러나 국민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총생산에는 우리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장점, 공개토론에 나타나는 지성, 공무원의 청렴성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학이나 용기도, 우리 지혜나 배움도, 국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나 열정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1968년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한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 1968년이라는 연도에 이런 주장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하다. 안타깝게 그는 그 뒤 석 달이 지나지 않아 암살되었다.
마이클 샌델은 시민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이 존중되며 거기에 기초하는 정치를 마지막 결론으로 삼는다. 이것도 놀랍다. 도덕과 종교적 신념을 가능한 배제한 이성적 양심과 법이 아니라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라니. 이 책(『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문장이다.
“도덕에 기초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정의로운 사회 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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