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근대에 복권된 양명학*
— 정인보의 양명학연론은 다카하시의 조선유학사에 대한 대항인가?
1)
이 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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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록]
이 논문은 정인보의 양명학을 제국 일본의 ‘근대양명학’과 관련해서
논의했다. 도쿄제국대학의 교수 이노우에 데츠지로는 ‘주자학에서 양
명학으로’라는 틀로 일본양명학이 근대일본을 열었다는 서사를 만들었
다.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카하시 도루는 이노우에의 유학이해를 조선
연구에 적용해 조선을 주자학 일존의 정체된 사회로 규정하였다. 이 논
문은 정인보의 양명학 현창이 다카하시에 대한 비판이며 동시에 이노
우에의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의 틀을 답습한 것임을 논했다. 그러나
이노우에와 달리 정인보는 그 자신이 양명학자로서, 그에게 ‘주자학에
서 양명학으로’는 참된 유학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에게 참된
유학을 회복하여 자신에게 가깝고 절실한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학
문은 그대로 조선학이 되고 실학이 된다. 그는 이노우에와 마찬가지로
양명학을 민족적으로 전유했으나, 양명학의 보편성을 훼손하지 않고
‘친친지쇄’를 강조하는 수준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하였다.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주제어: 정인보, 이노우에 데츠지로, 다카하시 도루, 근대양명학
Jung Inbo, Inoue Tetsujiro, Takahashi Toru, Modern Yangming School
인문논총 제76권 제3호 (2019.08.31), pp. 213~250
[DOI] https://doi.org/10.17326/jhsnu.76.3.201908.213
214 인문논총 제76권 제3호 (201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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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논총 제76권 제3호 (2019.08.31), pp. 213~250
[DOI] https://doi.org/10.17326/jhsnu.76.3.201908.213
식민지근대에 복권된 양명학*
— 정인보의 양명학연론은 다카하시의 조선유학사에 대한 대항인가?
1)
이 혜 경**
[초 록]
이 논문은 정인보의 양명학을 제국 일본의 ‘근대양명학’과 관련해서
논의했다. 도쿄제국대학의 교수 이노우에 데츠지로는 ‘주자학에서 양 명학으로’라는 틀로 일본양명학이 근대일본을 열었다는 서사를 만들었 다.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카하시 도루는 이노우에의 유학이해를 조선 연구에 적용해 조선을 주자학 일존의 정체된 사회로 규정하였다. 이 논 문은 정인보의 양명학 현창이 다카하시에 대한 비판이며 동시에 이노 우에의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의 틀을 답습한 것임을 논했다. 그러나 이노우에와 달리 정인보는 그 자신이 양명학자로서, 그에게 ‘주자학에 서 양명학으로’는 참된 유학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또한 그에게 참된 유학을 회복하여 자신에게 가깝고 절실한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학 문은 그대로 조선학이 되고 실학이 된다. 그는 이노우에와 마찬가지로 양명학을 민족적으로 전유했으나, 양명학의 보편성을 훼손하지 않고 ‘친친지쇄’를 강조하는 수준에서 민족주의를 자극하였다.
* 이 논문은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이 지원한 집담회의 성과임.
**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주제어: 정인보, 이노우에 데츠지로, 다카하시 도루, 근대양명학
Jung Inbo, Inoue Tetsujiro, Takahashi Toru, Modern Yangming School
1. 문제제기: 일본발 동아시아의 ‘근대양명학’과 ‘국학’
중국에서 양명학은 명조의 멸망을 재촉한 원인으로 지목되며 처절하 게 비판되기도 했지만, 한편에서 그 사실은 양명학이 세상을 바꿀 정도 로 득세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웅변한다. 그런데 중국과 달리 조선에 서는 양명학이 주목할 만한 세를 모은 적이 없다. 양지로 나온 적도 없었
다. 거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대가로서 위세를 떨쳤던 이황(李滉, 1501- 1570)의 양명학비판이 큰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 조선에서 양명학은 이 단시되었고, 정치경쟁에서 뒤로 처져 강화도로 이주해 살던 사람들 사이 에서 가학처럼 이어져왔을 뿐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그 양명학이 이른바 근대에 적합한 학문으로
재평가된다. 그에 앞서 서양근대의 위력이 아시아를 휩쓸면서 조선의 허 약함이 자타 공히 인정되고, 주자학이 그 허약함을 초래한 주범으로 지 목되면서 주자학의 근대부적합성이 비판되었다.
한반도에서 양명학의 복권 시도는 1910년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이 왕양명선생실기를 저술한 것이 그 시작이다. ) 형식상으로는 왕양 명의 전기이지만 저술 의도는 서양의 근대에 대응할 정신적 기둥으로 양 명의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박은식도 언급하고 있듯이 이 책은 일본 교토대학 교수 다카세 다케지로(高瀨武次郞, 1868-1950) 의 책을 표본으로 삼은 것이었다.3)
다카세 다케지로는 도쿄제국대학에서 제자백가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교토제국대학에서 중국철학을 가르쳤는데, 평생 그가 가장 주력한 분야는 양명학이었다. ) 그런데 그의 양명학 연구의 배경에는 도 쿄제국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하던 문과대학 학장 이노우에 데츠지로 (井上哲次郞, 1855-1944)가 있었다. 메이지정부는 초기의 서양화정책을 수정하고, 전통으로부터 ‘국민도덕’을 이끌어내고자 했으며, 이노우에는 메이지정부의 일꾼으로서 유학 특히 양명학에서 국민도덕의 원천을 찾
는 일을 했다.5)
메이지초기 서양화 운동을 이끈 지식인으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첫손에 꼽을 수 있다. 그는 서양근대문명을 설명하면 서, 야만사회일수록 힘이 편중되어 있고 문명으로 갈수록 다양한 주장과 힘이 서로 견제하며 공존한다고 구별했다. ) 아시아 나라들은 서양에 비 해 다양성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일본에는 천황과 쇼균이 서로 견제하며 공존해온 반면, 중국은 신적인 권력을 가진 전제군주에게 모든 힘이 집 중되어 있으므로 발전가능성이 낮은 나라라고 폄하했다. ) ‘자유’는 문명 발전의 중요한 지표인데, 단일한 교설이나 힘은 자유를 질식시키기 때문 이라는 것이 근거였다. ) 후쿠자와는 중국의 전제정권과 협력하여 독점 적 교설의 지위를 누려온 유학에 대해서, 전제군주가 세상을 지배하는데 “그 구조가 가장 편리했기 때문에 오로지 공맹의 가르침만이 세상에 전 해졌다” )고 비평했다.
후쿠자와로 상징되는 서양화노선은 이노우에에 의해 “사람을 사욕으
로 이끄는 가르침으로, 우리나라에서 종래 신성시했던 심덕을 더럽히는” “공리주의”라고 비판된다. ) 공리주의의 공격으로부터 일본이 갖고 있 었던 신성한 “심덕”(心德)을 지킨다는 기치를 걸고 이노우에는 양명학을 현창한다. ) 그러나 그는 ‘편중된 힘’이 야만의 표식이라는 후쿠자와의 주장은 받아들인다. 이노우에는 주자학과 양명학을 관(官) 대 민(民)의 대결로 도식화하여 양명학에 ‘평민주의’라는 레테르를 붙이고, ) 후쿠자 와가 유학에 부여했던 부정적인 평가들은 ‘주자학’이 전담하게 하였다. 그는 에도시대 일본 양명학의 계보를 엮고, 중국양명학과 다른 ‘일본양 명학’의 우수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양명학을 후쿠자와의 유학비판에서 자유로운 유학으로 해석함과 동시에 양명학을 일본 근대 철학의 전사로 자리매김한다.
일본사상사학자 오규 시게히로(荻生茂博)는 근대 일본에 등장한 이른 바 ‘근대양명학’은 현재의 시각을 역사에 투영해 구성한, 만들어진 ‘근대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 그는 이어 일본의 ‘근대양명학’이 중국과 한국 에 흘러가 각각의 ‘국학’으로서 국가별 사상사를 구성하게 된다고도 주 장한다. 그는 한국에서의 자신의 입론을 실증하기 위해 최남선을 검토했
다. 최남선은 박은식의 왕양명선생실기를 게재한 월간지 《소년》(1908.
11.1~1911.5.15)의 발간인이었다. 그는 최남선이 형성한 한국 ‘국문학’의 틀이 일본 ‘국문학’의 ‘근대문학’과 그 안에 깃든 ‘근대주의’를 그대로 조 선에 운반한 것이라고 논한다.14)
본 논문은 일본의 ‘근대양명학’이 그대로 한국의 사상사를 구성하게
된다는 오규의 가설을 정인보의 양명학을 통해 검토하고자 한다. 정인보 는 전통양명학의 계승자라는 점에서 오규가 규정한 ‘근대양명학’의 틀에 꼭 들어맞지 않으며, 그가 남긴 양명학관련 서적인 양명학연론은 박은 식처럼 일본학자의 책을 표본으로 삼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노우에가 일본양명학의 계보를 엮어서 양명학을 일본적으로 전유했듯이, 그는 조 선양명학의 계보를 엮으며 양명학을 한국적으로 전유한다. 또한 이노우 에가 양명학을 ‘일본의 철학’으로 서술했듯이, 정인보 역시 양명학을 ‘조 선학’으로 전유한다. 또한 정인보의 양명학 작업의 배경에는 이노우에 유학관의 또 다른 전파자였던 경성제국대학교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의 주자학중심의 조선유학사 서술이 있었다. 즉, 정인보 역시 이노우에와 마찬가지로 주자학을 뒤로 보내며 양명학을 조명했다.
지금까지 양명학연론의 저술 의도와 시대적 의미와 관련해서 여러
방면에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유학 을 재조명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15) 그런데 그가 재조명한 유학 즉, 양명학의 근대적 성격과 관련해서는 상반되는 주장들이 공존한다. 일각
14) 荻生茂博(2002), 「崔南善の日本体験と少年の出発 — 東アジアの<近代陽明学>(3-1)」, 日本思想史 60. 荻生의 작업은 일본의 이노우에 데츠지로, 중국의 梁啓超, 한국의 최남선을 검토하며, 양계초와 최남선이 일본식 국문학을 모방한 국학자라고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이 절대를 주장하는데 반 해, 자신은 동아시아에서 근대를 상대화하자는 입장이라면서, 식민지근대화론자 는 아니라고 밝힌다.
15) 1972년 삼성문화재단에서 간행한 陽明學演論(外)에 ‘해제’를 쓴 홍이섭 이래 계속된 평가이다.
에서는 그 근대성을 당연한 성격으로 주장하나,16) 근대적 성격의 부재를 주장하는 연구도 있다. ) 일본 근대양명학과의 관련성을 언급한 연구도 있으나, 구체적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나아가 식민지 본국으로서 일본과의 관련을 다룬 연구는 없는 듯하다.
정인보가 활동했던 시기가 일제강점기였다는 점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논의하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정인보는 연희전문대 학의 교수로서 다카하시와 같은 과목인 조선학을 담당했다. 정인보의 학 술활동이 다카하시와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이 논문 은 ‘일본 근대양명학’을 비교항으로 두고 정인보의 양명학이 어떤 특징을
16) 가령 유교개혁이라는 시각에서 양명학연론를 조명한 이황직(2003), 「위당 정인 보의 유교 개혁주의 사상」, 한국사상사학 20은 “민족해방과 근대화라는 이중과 제”를 “개인중심”의 “유기체사상”으로 돌파하려 했다고 평가한다. 이상호(2008), 「한국 근대 양명학의 철학적 특징 — 박은식과 정인보를 중심으로」, 양명학 20은 정제두는 양명우파의 노선이었는데 정인보는 양명좌파로 노선변경하면서 양명학을 “시대적 활동력을 갖는 학문으로 재해석”했고 이것이 정인보 양명학의 근대성이라고 평가한다.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구체적으로는 “일본적으로 근대화된 유학”20) 으로서 양명학이 한국에서 그대로 재연되는지 혹은 어떤 한국적 전개를 하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정인보의 양명학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의도로 탄생했는지에 대해 보다 입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 대한다. 나아가 그렇게 해서 드러난 정인보의 양명학이 얼마나 근대적인 지, 그리고 종래 각각의 시각에서 논의되어 온 정인보의 양명학, 실학, 조선학이 어떤 관련 속에 있는지도 설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일본 근대양명학의 등장: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일본의 정치사상사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는 오
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사상에서 자연적 질서와 인간 이해의 분리, 공과 사의 분리, 개인의 내면성 확립 등의 ‘근대서구’의 지표를 찾 아냈다. 그리하여 그는 오규 소라이의 고학(古學)이 ‘주자학적 사유를 해 체하고’ 일본의 근대를 열었다는 ‘일본사상사’를 구축했다. ) 그러나 와 타나베 히로시(渡辺浩)에 의하면 도쿠가와 시대의 계급사회에서 무사들 에게는 “주군의 명령에 따라 상해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그들의 삶과 정신세계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을” )뿐, 그것 외의 주자학적인 행위원 리는 작동하지 않았다. 일부에서 박식에 대한 동경이나 “단순한 유예(遊
藝)” )로서 주자학이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이 “체제교학”이 되었다거나 “정통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24) 와 타나베에 의하면, 고학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주자학 역시 다양한 수정을 겪으면서 수용되고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을 뿐, 고학이 주자학을 해체했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25) 즉, ‘주자학에서 고학으로’라 는 틀은 전후일본사상사를 만들기 위한 허구의 틀이라는 것이다.
오규 시게히로는 마루야마가 ‘주자학적 사유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근
대일본사상사를 구축하기 이전에, 메이지시기에 이미 ‘주자학적 사유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근대일본사상사를 구축하려 한 시도가 있었다고 지 적한다. 다만 이때의 도식은 ‘주자학적 사유를 해체’하고 ‘근대적인 양명 학으로’였으며, 이는 이노우에 데츠지로에 의해 주도된다.26)
메이지일본에서 유학의 부흥은 제국헌법발포 이듬해인 1890년에 반포
된 ‘교육칙어’에서 표면으로 드러났다. 당시 프랑스 혁명사상의 영향을 받은 자유민권운동에 대응하는 ‘반혁명’의 조치로써 유교주의교육이 채 용되었다. 관(官)의 정책 한편에서 학계로부터의 자발적인 움직임도 있 었다. 서양화노선에 반대하면서 국수를 선별하여 보존해야 한다는 데 뜻 을 같이하여 정교사(政教社, 1888-1945)가 결성되었다. 정교사의 동인이 었던 미야케 세츠레이(三宅雪嶺, 1860-1945)는 내셔널리즘[國粹主義]27) 의 기치하에 ‘민’(民)을 중심으로 한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들과 공유했는데, 그는 특히 양명학이 ‘민’의 학문으로서 “메이지유신 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그의 왕양명(王陽明)28)
24) 渡辺浩(2007), p. 23.
25) 渡辺浩(2007), p. 52.
26) 荻生茂博(2001), pp. 3-4.
27) ‘국수주의’는 nationality의 번역어였다고 한다[荻生茂博(2001), pp. 11-13 참조].
28) 1893년 정교사에서 간행되었다.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등 독일 사상가를 끌어들 여 양명을 설명하면서, 양명학을 서양사상에 대항할 수 있는 사상으로 위치를 지우는 ‘근대양명학’의 효시로 꼽힌다. 고지마 츠요시는 미야케와 정교사의 특징 을 “서양최선단의 학문과 전통적 한학의 독특한 조합이야말로 그들의 공통의 교
은 ‘당시의 실천적 이상을 역사에 투영해서 창작’한 ‘근대양명학’의 탄생 을 알리는 첫 작품이었다. 이 책에서 양명학은 실천 제일주의로 서술된다.
이노우에의 양명학 현창 역시 민의 학문으로서 실천성을 특징으로 하 는 미야케의 노선을 잇는 것이었다. 그는 ‘동양철학사’ 서술이라는 간판 을 걸고29) 실제로는 에도시대 유학사를 서술함으로써,30) 봉건시대 관학 으로서의 주자학과 근대 민중의 학문으로서 양명학이라는 도식을 정착 시키는 한편, ‘동양철학’인 양명학을 일본의 것으로 전유한다.
이노우에는 1890년부터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의 정교수가 되고 1923
년 69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일본 아카데미의 권력으로 군림하면서 엄청난 파급력을 행사했다. 현대의 한 학자는 그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60세 정년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만 68세까지 재직하 게 된 일화를 소개한다.31) 그의 영향력은 일본을 넘어 아시아에 미쳤고 당시에 이어 현재까지도 이어진다.32)
양목록”이었다고 표현한다. 미야게 세츠레이와 정교사에 관해서는 小島毅(2006), 近代日本の陽明学, 講談社選書メチエ, pp. 71-76 참조.
29) 그는 日本陽明學派之哲學을 간행하면서 그 「序」에서 “1880~81년 무렵부터
‘동양철학사’를 간행하고자 했으며” 그 일을 지금 실현한다고 말한다[井上哲次郞 (1918, 1900년 초판), 「日本陽明學派之哲學序」, 日本陽明學派之哲學, 富山房].
30) ‘에도유학삼부작’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1900년 간행된 日本陽明學派之哲學,
1902년 간행된 日本古學派之哲學, 1905년 간행된 日本朱子學派之哲學이 다. 에도유학삼부작을 소개한 논문, 이새봄(2019),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
郞)의 ‘유학삼부작’ — 근대 일본 유학사의 시초 —」, 韓國思想史學 61 참조.
31) 大島康正는 당시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은 60세 정년을 대학 자체적으 로 정했는데, 이노우에가 완강하게 70세 정년이 적절하다며 69세까지 근무했다는 이야기를, 이노우에가 당시 “철학아카데미즘의 최장로로 군림”한 예시로 제시하 고 있다[大島康正(1963), 「井上哲次郎」, 日本の思想家 2, 朝日新聞社, pp.
97-98].
32) 山下龍二(1971, 陽明学の研究⋅成立編, 現代情報社, p. 92)는 ‘국민도덕’이 라고 일면적으로 평가된 ‘일본양명학’이 그 뒤 일본의 “양명학연구의 주류가 되 었다”고 지적하며, 大橋健二(1999, 良心と至誠の精神史, 勉誠出版, p. 88)는 이노우에의 양명학연구가 당시 양명학의 성격을 이미지화하는 데 큰 영향력을
그는 17세기 초 도쿠카와시대에 “학문의 기운이 갑자기 융성하여” 후 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하야시 라잔(林羅山) 등이 주자학을 고취하 여, 결국 주자학이 도쿠카와 정부의 “교육주의”가 되었다33)고 정리한다. 철학이란 현상 뒤에 변화하지 않는 배후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이라고 받 아들인 이노우에는34), 중국에서 전개된 유학의 역사 가운데 ‘철학’이라 고 할 만한 것은 제자백가시대의 공맹과 주자학, 양명학뿐이라고 주장했
다. 그에 의하면, 주자학은 진이래 한당의 “몰정신 몰취미의 훈고학”의 “암흑시대”35)를 뚫고 나와 ‘도덕주의’로서 역할을 했다. 그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이노우에에 의하면, ‘관학’으로서 주자학
의 한계는 분명하다.
주자학을 하는 사람은 다만 충실하게 주자의 학설을 숭배하고 받들 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주자의 정신적 노예일 수밖에 없다. 그 리하여 주자학파의 학설은 거의 천편일률의 감을 면하지 못한다.36)
이노우에 역시 후쿠자와의 주장을 받아들여 ‘자유’를 위해서는 사회를
지배하는 힘들이 복수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노우에에 의하면, 에도 시대부터 이미 일본에는 유학의 분야에서조차 다양한 학파가 있었다. 다 만 주자학이 정권의 “교육주의”로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양명 학은 의심받고 탄압되어 “모반(謀叛)의 학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37)
미쳤으며, 三島由紀나 司馬遼太郞 등 현대작가가 양명학을 이야기할 때 기초자 료로 이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33) 이노우에(1900), pp. 1-2.
34) 井上哲次郎(1883), 「西洋哲學講義」, 井上哲次郎全集 卷一, クレス出版(2003), p. 2.
35) 井上哲次郎(1905년 초판), 日本朱子学之哲学, 富山房, pp. 1-2. 본 논문에서 참고한 판본은 1915년판이다. 앞으로 이 책은 이노우에(1905)와 함께 1915년 판 본의 쪽수를 표기한다.
36) 이노우에(1905), pp. 598-599.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면서 양명학의 가치는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 즉, 양명학은 민중의 시대이며 자유의 시대에 부합하는 학문이었다. 이노우에는 주자학과 달리 양명학에는 그 자체 내에 “성찰적 방면”과 “사공적 방면”이라는 두 경향이 공존한다고 말한다. ) 이러한 두 경향의 성격 부여는 중국의 양명학과 구별되는 일본양명학의 특징을 부각시키 는데 중요한 구도였다. 이노우에는 중국양명학은 ‘성찰’에 기울어 청대 이후 명맥이 끊어졌고, ‘실천’을 위주로 한 일본의 양명학이 당시까지 그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 그에 의하면, 양명학은 “일본에 들 어오고 바로 일본화하여, 저절로 일본적 성질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우 연히도 “신도와 합일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의하면, “국가적 정신을 근 본으로 하는 추세가 있다”는 점에서 양명학과 신도는 합일한다. ) 즉, 양 명학은 “때와 장소를 돌아보지 않고” “내 마음을 돌아보다 한 점 부끄러 움이 없으며 정도를 가고 정의에 의한다면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고양 하는 학문인데, 이러한 실천력은 “국가적 정신을 근본으로 한” ‘공동애 국’이 최선의 ‘도덕’이라는 것을 전제한 것이고, 그 점에서 신도와 합일
한다.41)
일본의 근대양명학이 ‘민’의 학문이라는 것은 자율적 ‘국민’의 자발적
인 ‘도덕’의 학문이라는 의미이며, 그것이 ‘일본적’이라는 의미는 일본적 ‘국가주의’ 아래 포섭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동양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유학의 일본적 전유는 근대국가 국민의 도덕이라는 의미의 ‘국민 도덕’을 제공해주는 양명학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동양철학’에 대한 이노우에의 방향설정은 이후 각 분야의 제자들에 의해 다방면으로 구체화된다. ) 서론에서 언급한 다카세 다케지로가 중 국철학 방면의 후계자라면, ) 조선학 방면의 후계자는 경성제국대학의 개교와 함께 경성제대에 부임한 다카하시 도루였다.
3. 다카하시 도루의 주자학중심의 조선유학사
이노우에가 유학에 부여한 성격규정은 경성제국대학의 탄생으로 학제 로서의 ‘동양철학’을 처음 접하게 된 식민지 조선에 거의 그대로 이식되 었다. 다카하시 도루 역시 이노우에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는 것은 다카 하시가 남긴 작업으로 증명한다. 다카하시가 조선유학사를 서술하는 기 본 기조는 이노우에의 유학관과 일치한다. 이노우에의 눈에 중국이나 조 선은 획일적인 주자학의 사회였다.
다카하시는 1902년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한학과를 졸업하고, 1905년
경성의 관립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조선 땅을 밟았다. 이후 일본제국이 패망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할 때까지 그는 이른바 ‘조선문학’ 분야에서 종 횡무진 사료를 모으고 읽었으며 왕성한 글쓰기를 하였다.44) ‘Literature’ 의 번역어로 등장한 근대 일본의 ‘문학’개념에는 “역사, 철학, 정치학 등 과 같은 이른바 이(理)문학”까지 포함되었다.45) 다카하시가 ‘조선문학’ 담당 교수로서 ‘조선문학개론’과 같은 순문학뿐만 아니라 “조선유학사” 혹은 “조선사상사” 등을 강의한 배경이다.
그의 조선유학사 서술이 조선의 사상을 ‘고착성’, ‘종속성’, ‘비독립성’
등으로 특징지으며, ) 식민지를 정당화시키고자 했다는 비판은 정설처 럼 통용되고 있다. 그가 일본인으로서의 우월감을 갖고 조선의 민족성을 운운하며 비하한 것은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식민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유학을 이해한 틀은 그의 독창이 아니라 이노우에 에게서 온 것이다. 다만 이노우에의 시야에 중국은 중요했지만 조선은 없었다. ) 이노우에는 중국유학사에서 진(秦) 이후 한당까지 철학이라 할 수 없는 훈고학이 만연했으며 주자학에 이르러 비로소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유학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 그럼에도 그는 주자학을 획일주의라 고 낮게 평가한다.
45) 三上参次⋅高津鍬三郎(1890), 日本文学史(上⋅下), 金港堂, p. 3; 임경화 (2019), 「다카하시 도루의 ‘조선문학’ 인식: ‘조선어’ 문학의 위치에 주목하여」, 東方學志 186, p. 259에서 재인용.
다카하시는 조선을 중국에 종속되어 중국과 동일한 학적 전개를 한 나 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조선에서 주자학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만사 를 지나의 문화를 이어받아 비로소 그 문화를 향상시킨 조선”이니, ) “신라부터 고려말까지는 유교는 단순히 훈고⋅기송의 학에 머물렀을 뿐, 아직 사상 및 신앙의 학에 이르지 않았다.” ) 안향이 북경에 가서 주희 의 책을 가져온 고려 말부터, “이미 학계는 일찌감치 주자학으로 통일되 었으며, 고려와 조선을 일관해서 약 620여 년 ) 동안 다른 학설이 공개 적으로 주장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52)
다카하시는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와 그 문하는 이황(李滉)을 대 단히 존경했고 이황을 왕왕 주희 이후 첫째라고 여겼”53)다는 것도 지적 한다. 그러나 이황이 조선의 주자학을 가장 번성하게 했다고 해도 “결국 주자학의 가장 충실한 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경서를 풀이하는 데도 집주를 금과옥조로 했으며, 주희 이전의 고의(古義)를 찾는 데에 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고 평한다. 결국 “그의 힘에 의해서 조선 유 학은 완전히 주자학파로 귀일했다. 그러나 동시에 학자들의 사상을 구속 하고 학계를 단조롭게 한 책임도 대부분” 이황에게 있다고 지적한다.55) 주자학이 획일주의를 면하지 못했다는 평을 이노우에나 다카하시는 중국이나 조선이나 일본 어디에든 해당시킨다. 이노우에는 일본 고학에 대해 “주자의 정신적 노예일 수밖에 없는” ) 주자학에서 벗어나, “대담 하게도 그 오류를 갈파하여 일어났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 그러나 이노우에가 볼 때 고학은 추구하는 가치가 공맹의 ‘말씀’일 뿐이다. ) 사 회진화론자로서 이노우에는 학문 역시 진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 본인으로서 중국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또 한 형이상학을 철학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추상화된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 인물의 구체적 “명언, 명문”만을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심원하 고 깊은” 철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59)
다카하시는 일본패망 후 일본에 돌아간 뒤에 조선양명학의 존재를 알
게 되고, 1953년의 시점에서 「조선의 양명학파」라는 글을 발표한다. ) 그 이전에는 조선에 양명학이 있다는 것을 몰랐으며, 그의 글에도 ‘조선 의 양명학’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조선에는 오로지 주자학만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주자학 일존주의였던 조선과 달리 일본에는 고학 이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특기했다.
일본의 오규소라이(荻生徂来),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두 사람은
호걸 유학자로 마침내 한 파의 견해를 열어, 관학인 주자학파에 대 해 크게 민간 학문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이것은 일본인과 조선인 의 차이로, 장래에도 반드시 영원히 소멸하지 않을 두 학풍의 차이 일 것이다.61)
다카하시는 일본이 주자학 외에 고학의 학풍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일
본의 특징이라고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라고 민족성의 특징으로 비약한다. 그의 「조선유학대관」 은 다음의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조선의 유학은 그 학술사에서 보면 대단히 간단하고 단조롭다. 고려 때부터 천편일률적으로 주자학 천지에 매몰되어, 학자의 학설 도 결국 주자의 진의에 합치되는가 여부를 논의하는 데 불과한 상 황이었다. … 점점 사상이 더욱 고착되어 진보발전성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자학이 일단 전래한 뒤의 640년 동안 끝내 다른 학파가 흥기하지 못했다. 그 선택이 옳았는가의 여부는 차치하고, 즉 유학의 여러 학파 가운데 가장 온건중정(穩健中正)한 것이 주자 학이라고 하더라도, 조선인은 어떻게 이처럼 단일사상에 만족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도 그 국민성의 특색을 유력하게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62)
이노우에가 중국철학을 개관하는데 일관된 방향성을 보여준 것, 그리 고 그를 이어 다카하시가 조선유학사를 규정한 것은 일본제국에서 장려 한 ‘동양학’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식민지 민족이 특정한 민족성을 갖는다고 규정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62) (1927), pp. 47-48.
4. 양명학연론의 등장: 강화학의 계승인가? ‘근대양명학’의 시작인가?
다카하시는 조선이 주자학일존의 사회였고, 그것은 중국과 똑같은 궤 적을 따른 결과였으며, 나아가 그것이 조선의 ‘민족성’과 직결된다고 낙 인찍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여러 방향에서 수행될 수 있다. 우선 그가 인 용한 글들의 해석오류를 지적하는 일에서부터 그가 해석하면서 범한 논 리적 오류들을 지적하는 일들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사료읽기의 치 함과 광범위함은 조선유학사상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다카하시 이상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사료를 다시 읽 는 일이 전제되어야 가능할 텐데, 그것이 쉽지 않음은 여전히 조선유학 사 해석의 문제에서 다카하시의 그림자가 남아있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카하시의 사관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관리라는 의도를 가진 식민 사관이었다는 비판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으나, 다카하시가 잡아놓은 조 선유학사의 기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의미 있는 비판이 되기 어렵다.63) 다카하시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비판은 그가 부정하고 매도한 주자학
의 가치를 옹호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비판은 일찍이 당대에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다카하시와 논쟁하면서 일단을 보여주었 다. 다카하시는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이용후생의 본분은 도외시하고 당
63) 김태년(2010, 「학안에서 철학사로 — 조선유학사 서술의 관점과 방식에 대한 검토」, 한국학연구 23)은 다카하시 당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학자들 이 어떻게 다카하시를 비판하며 극복하려 했는지의 궤적을 정리했다. 그러나 김 태년도 지적하듯이 다카하시의 관점은 “한편 부정되고 한편 계승되었다.”(p. 58) 가령 다카하시가 이론과 실천의 이념이었던 주자학을 이론중심으로 분석해놓은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전근대유학의 특징이었던 학파와 당파, 학문과 정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경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비판은 의 미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되며, “이론과 실천의 이념이었던 주자학”을 다시 살려 놓는 후속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쟁에 몰두했다고 비판했는데, 장지연은 실제 조선의 주자학자들은 참된 유학자가 아니었으며, 주자학의 본래 정신은 이용후생을 추구한다는 방 식으로 주자학을 옹호했다. )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현실 주자학자들에 대한 다카하시의 비판을 그대로 수용한 셈이다.
주자학과 한자문화권의 전근대를 같이 묶어서 비판하는, 이노우에 이
래의 이 시각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반론은 ‘주자학이 아시아의 근대를 열었다’고 하는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의 주장일 것이다.65)
다카하시와 동시대에 조선에 있었던 정인보 역시 다카하시의 조선학
을 비판했다고 생각된다. 정인보의 비판은 조선에는 주자학만이 아니라 양명학도 있다고 주장하는 방식이었다. 다카하시의 주자학론에 대한 정 인보의 직접적인 의견표명은 없었다. 다만 “문헌에 의존해 부회하여” “이 땅의 백성이 가장 열등함을 증명”하려는 “조선사가임네 하기를 좋아 하는” “일본학자”를 언급한 것을 보면, ) 다카하시의 조선학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정인보는 왕양명, 왕양명문하, 조선양명학을 차례대로 다룬 양명학연
론 )을 출간했다. 이 책 역시 주자학을 조선망국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으로 조선의 과거를 반성하고 ‘양명학’으로 다른 세 상을 전망한다는 점에서, 양명학연론은 이노우에의 ‘주자학에서 양명 학’으로라는 구도를 공유한다.
양명학연론이 체제나 인용 등에서 직접적으로 이노우에의 영향을 받은 흔적은 없다. 이노우에의 일본양명학파의 철학을 읽었는지도 확 인할 수 없다. 다만 책의 내용을 분석함으로써 그 관계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형식을 보자. 제목에 붙은 ‘演論’(연론)은 무슨 뜻인가? ‘演’(연) 은 시간차를 두고 이루어지는 변화, 즉, 역사적인 전개라는 의미를 갖는
다. 이 책의 제목대로 정인보는 양명학의 연원부터 조선에서의 전개까지, 즉, 양명학의 역사적 전개를 서술하고 있다. 먼저 왕양명과 세 파로 나뉜 왕양명의 제자세대를 서술한다.
그리고 조선의 양명학에 대해 서술하는데, 조선의 양명학은 다음의 세 부류로 나누어 다룬다. 즉, (1) 분명한 저술이 있거나 남긴 언설 가운데 분명한 증거를 남겨서 양명학자라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람, (2) 양명학을 비난하는 말을 남기고 있지만 전후를 종합해보면 이는 위장의 말이고 속으로는 양명학을 신봉하고 있었던 사람, (3) 양명학에 관해서 는 일언반구도 언급한 적이 없지만, 평생의 주된 정신을 보면 양명학자 임을 알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조선 양명학자가 소수였다는 열악한 상황에서 그 파편이라도 찾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이 책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을 갖고 있으며, 조선 양명학 부분 은 사적인 서술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역사적 전개’라고 하기 어려운 서술 형식이다.
내용을 들여다보자. 형식상의 특징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정인보가 조선의 양명학자로 꼽은 사람들 가운데 자타공인 양명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연 양명학자인가에 대 해서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68) 어떤 사람들을 어떤 이유로 양명학자로
포섭하고자 했는지,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가 생각하는 ‘양명학’이란 어떤 특징을 갖는 학문인지 드러내면, 양명학연론의 저술의도를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
양명학연론의 첫 챕터는 “이 저술을 하는 이유”이다. 정인보는 지난 수백 년의 조선 역사가 ‘텅 빔과 거짓’[虛와 假]의 역사였다고 비판하면 서, 학문으로 “오직 정주(程朱)를 신봉”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그 학문을 한 사람들의 폐해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사사로운 이익 추구’[私營]이며 하나는 ‘중국숭배’[尊華]이다. 그들의 구체적인 행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평생을 몰두하여 심성을 강론하나 실심(實心)과는 얼러볼 생각이 적었고, 일세를 흔들 듯 도의를 표방하나 자기 밖에는 보이는 것이 어떤 것도 없었다.69)
주자학이 중화주의를 배경에 둔 중국중심주의이므로 ‘중국숭배’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정인보가 놓여있는 민족주의의 시대, 국민국가의 시대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비판이다. 다카하시가 조선을 문화적으로 중국 에 종속된 나라로 바라보는 시각과도 공유하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그 비판 후의 적극적인 주장은 무엇인가? 정인보는 ‘거짓의
실천’과 ‘빈 학문’이 모두 ‘실심’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실심’ 이란 무엇인가? 거짓이 아닌 진짜이고 빈 것이 아니라 실물이 있는 것이 라는 문자의 의미 말고, 정인보가 가리키려한 것은 무엇인가? 그의 서술 을 분석해보면, 그 마음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옳은 마음으로 스스로만이
68) 나카 스미오(2005)는 정인보가 (1)의 부류에 넣은 최명길이 양명학자라는 것은 “저자의 억측의 소산에 불과”하다고 평하며, 마찬가지로 (1)의 부류에 넣은 張維 를 양명학자로 판단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69) (1933), p. 114.
점검할 수 있는 내면의 것이다. ) 정인보에 의하면, 진짜 학문은 수양에 의해 사사로운 마음을 누르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실심이 있 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학문이 실심을 떠났기 때문에 학문 역시 사사 로운 마음을 보호하거나 수사하는데 동원될 뿐이다. ) 정인보는 실심을 잃은 주자학이 당쟁과 파당만 일삼았다고, 다카하시와 같은 논조로 주자 학을 비판한다.
진정한 학문의 바탕이 될 실심은 “책 속에서만 진리를 구하는 태도”와 도 구별된다. “영국의 모학자, 프랑스의 모대가, 독일의 모박사, 러시아 의 모동무”의 “말씀을 세계적 대학문” )으로 받아들여 “오늘날 학문의 꼼꼼함, 똑똑함이 놀랄 만큼 발전되었” )을지는 모르나, 이는 “‘실심’을 죽이고 ‘남의 언설’[他說]을 살린 것”일 뿐으로, “실심에 비춰보지 않은 ‘남의 언설’은 어느덧 ‘사사로운 이해’를 위한 이용물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정인보는 “실심을 깨우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밝힌다.74) 실심은 사사로운 이익추구의 마음과 상대한 것으로서 공적인 마음일
것이며, 책 속의 진리가 아닌 것으로서 실천을 지향하는 마음일 것이다. 존화주의가 아닌 것으로서 민족주의적인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다음에 서 보이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대비는 독특하다.
주희는 … 후학들에게 “도를 걱정해야지 나라를 걱정하지는 마 라”고 하여 민중 밖에 따로 걱정할 어떤 도가 있는 것 같은 말을 했 다. 반면 양명은 항상 사람이 가진 고유한 “앎” 즉 “양지”를 제창하 여, 책에서만 구하지 말고, 네 “양지”에서 구하라고 하며, 마음 밖으 로는 단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가와 민중을 내 마음 속의 일로 통감(痛感)하였다. 이리하여 명말에 이르러 [양명의 학도 들은]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것도 달게 받아들였으며, [전쟁터]에서 소리 지르며 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75)
이처럼 주자학과 양명학을 비민족주의 대 민족주의의 구도로 설명하
는 방식은 정인보의 독특한 해석이다. 정인보는 결국은 주자가 추구한 ‘도’가 백성의 일용 밖의 어떤 것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양명이 주자 학을 비판하거나 청대의 대진(戴震, 1723-1777)과 같은 기철학자가 주자 학을 비판하는 논리는 주자학의 ‘리’가 ‘기’에서 유리되었다는 것으로 요 약할 수 있다. 양명이 주자학의 ‘성즉리’의 대안으로 제시한 ‘심즉리’는 ‘성’이라는 보편적인 주체 대신에 구체적 현실의 것인 ‘심’을 주목했다는 점에서 기철학의 비판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정인보는 그 ‘현실’에 서 내가 경험하는 나와 가까운 나의 생활터전이라는 의미를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비판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정인보가 실심의 핵심적인 징표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백성의 이해
와 안위가 내 몸의 통증처럼 감통되는 것”이다.76) 그리고 그 느낌에는 애틋함의 차이가 있다고 부연한다. 그는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아 … [만물과] 어떤 간격도 두지 않는다”는 대인의 마음을 묘사한 왕양명의 문구를 해석하면서, “한몸에서 느끼는 애틋함이 자연적인 후박(厚薄)에 따라 참 핏줄이 사무치고, 사무침에 후박의 절도가 지당할수록 한몸의 간격이 더욱 없어진다”고 해석한다. 즉, 그에게 실심이란 특히 조선 백성
75) (1933), p. 121.
76) (1933), p. 120.
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는 마음으로, 한 핏줄인 민족에 대한 특 별한 사랑이다. ) 이는 ‘친친지쇄’(親親之殺)를 인의 발휘 방식으로 생 각하는 유학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는 있다.
백성의 안위를 내 안위처럼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실심’은 정인보에
의하면 양명학의 ‘표식’으로서, 실제로 양명학연론에서 정인보가 ‘양 명학자’를 선택한 기준이기도 했다. 그 마음이 진짜라면 실행으로 드러 난다는 점도 정인보가 ‘실심’에 부여한 특징이다. ) 그러므로 정인보의 해석에 따르면 양명학은 백성의 안위를 살피는 마음을 실행으로 드러내 는 학문이다. 양명학도에 대한 다음의 정인보의 평은 그 양명학의 특징 을 잘 드러낸다.
실상은 양명의 학도를 강학 문중에서 찾는 것보다 자신의 몸을
던져 백성을 구한 사람들에게서 찾아나서야 할 것이요, 양명의 학설 을 전습록 속에서 구하는 것보다 이로움과 해로움의 생각을 허용 하지 않는 일념을 따라 직접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79)
정인보는 양명 사후 갈라진 양명의 제자들을 구별해 서술하면서도, 결 국은 “민중의 이해(利害)를 자신의 이해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모두 “참 된 학문” )을 했다고 평한다. 양명과 그 문하에 대한 서술이 백성들을 위한 실행에 초점이 맞춰져 서술될 뿐 아니라, 조선의 양명학자로 꼽힌 사람들 모두 그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이었다. 특히 그가 꼽은 조선의 양 명학자는 정제두(鄭齊斗, 1649-1736)나 이영익(李令翊, 1740-1780) 정도
만 제외하고 명실공히 양명학자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가 이들을 양명학자로 꼽은 이유는 바로 ‘실심’ 때문이다.
가령 그가 명백한 양명학자라고 꼽은 최명길의 경우, 정인보가 제시한
서적상의 증거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다. )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임 금과 나라를 젖혀두고 당시 모두 말하는 ‘대의’를 표방하지 못하” )고 “임금이 위험에 빠지고 종묘사직이 무너져 가는 것을 차마 바라만 볼 수 없어” ) 청과의 화친을 주장했고, 그 때문에 비난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 는 남들이 어떤 비난을 하든지 “모두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계속해서 자 신의 주장을 멈출 수 없었다.” ) 정인보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스스로 속일 수 없고 스스로 멈출 수 없는 실심의 발현이었다.
그러한 실심을 특징으로 하는 양명학자 가운데서도, “조선 양명학파” 의 “대종” ) 정제두에 관한 서술에서는 정인보의 민족주의적 열정이 다 른 방식으로 돌출된다.
[정제두의 저서는] 양명 이후 양명학파의 저서로서 가장 종 (綜密)하고 가장 절근(切近)하고 또 가장 상세하여 왕간(王艮)의 직지 (直旨)함이 있으면서도 전덕홍(錢德洪)의 법도를 겸하고, 왕기(王畿) 의 깨달음이 있으면서 나홍선(羅洪先)의 단속하는 공부를 더하고 있 다. 정제두는 단지 조선양명학파만의 대종이 아니다.86)
정인보는 정제두를 양명의 문하가 양명학의 한 줄기씩을 강조하던 것
을 다시 종합한 사람으로, 흡사 중국인 제자들을 젖히고 왕양명의 뒤를 잇는 적통으로, 나아가 왕양명에 필적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단지 조선 양명학파만의 대종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러한 의미로 들린다. 나아가 정제두는 ‘실’을 세우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므로 “정치에서는 옛것을 그 대로 지키는 것보다 변화에 따르는 것을 중시하여 ‘어떻게 하든지 나라 에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 편안한 것이면 하자’”고 말한 사람이었다. ) 정치에 관한 학문연구도 “결코 당우삼대를 공상하거나 중화 문물을 끌어 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이 땅 이때에 비추어 근거해서 실행하여 실익이 있도록 하였다.” ) 즉, 정인보에 의하면, 양명학의 대가로서 정제 두는 민족적인 주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조선 백성과 조선의 실익을 위 해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정인보가 양명학자로 꼽은 가장 예상외의 인물은 홍대용이다. 홍대용 은 통상 ‘실학자’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인보가 양명학이란 실 심의 학문이며, 백성을 위한 실제적인 방책을 도모하는 것을 ‘실심’이라 고 규정한다면, 양명학이라는 이름아래 통상 ‘실학자’로 분류되는 사람 이 포함되는 것은 무리가 없다. 정인보는 홍대용의 글에 “일언반구도 양 명학에 가까운 것이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홍대용이 “학문을 마음 밖에서 구함으로써 ‘허와 가’가 붙는다는 것을 지적해서 논의한 점” 이 양명학에서 영향을 받은 점이라고 말한다. ) 백성의 일용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실학’을 규정하고, 이것이 스스 로의 마음에서 발원하는 ‘실심’에 근원한다고 규정한다면, 양명학자는 실학자가 될 것이다. 정인보는 “나의 스승 이건방선생으로부터 사학의 대의를 받은” ) 양
명학자이다. 그는 양명학자로서 자신의 앞에 박은식도 세운다. ) 그러나
실제로 이건방과 박은식은 똑같은 양명학을 하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큰 차이는 박은식에게 양명학은 정인보에게서처럼 ‘민족의 학문’이 되었 다는 점이다. ) ‘민족’이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으나, ‘민족’만으로 는 근대의 학문이 되기에는 부족하다. 정인보의 양명학은 ‘근대양명학’ 인가? 강화학을 계승한 양명학인가? 민족주의적 지향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미 강화학과는 달라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발 ‘근 대양명학’과 같다고 하기도 어렵다고 생각된다.
5. 조선학으로의 길
정인보는 양명학연론을 쓰기 전인 1929년 성호전집을 간행하면 서 그 「서」에서 조선인이 추구해야 할 학문으로서 ‘조선학’에 관한 윤곽 을 제시한다. 조선학은 유학이 이상적 시절로 설정한 중국의 고대와 중 국의 성인을 진리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뿌 리를 두고 백성들이 보고 듣는 실제를 구하고, 가여워하는 측은한 맘으 로 백성이 의지하는 바를 자세히 통찰하는 것” )이었다.
이어 1931년 조선고서해서를 연재한 것은 그 의도부터 ‘조선학’의 명
맥을 발견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연재의 처음에 이면백(李勉伯, 1767- 1830)의 함서(憨書)를 소개하는데, 그 첫머리에 이면백이 활동하던 당 시 조선의 학풍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이때 조선의 학풍이 ‘옳음을 구하고’(求是) ‘참됨을 구하는’(求眞) 근본 길(本路)로 전향하여 정치, 경제, 역산(曆算), 지리형세[水地], 민속, 어문을 전공(專攻)하는 어려운 진전(苦進)이 있었으며, 더욱이 조선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비로소 연구인줄 통렬히 자각하게 되어 이전의 유자들에 비해 바탕이 일신하였다.94)
정인보는 청조 고증학에 가까우면서도 사회를 통찰하고 비판하는 기
상이 이면백의 독특함이라고 소개한다.95) 이 글은 “조선학을 연구하는 우리 학인으로서는 더욱이 모를 수 없는 일이다”96)라는 문장으로 마무 리된다. 조선의 현실에서 옳음과 참됨을 찾는 학문, 당시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그 학문이 바로 조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인보는 일본인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조선학을 의식하고, 그들의 왜
곡에 대항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보인다. 다음은 문일평에게 보낸 편지이다.
“최근 일본 학자가 왕왕 자기가 조선사가임네 하기를 좋아하여, 내외의 옛 역사를 증명하는데 한결같이 문헌에 의존한다고 과시하
오. 이는 문헌에 의존하여 부회하면 이 땅의 백성이 가장 열등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알기 때문이오. …… 아무개가 일찍이 이 무리에게 배워서 존경하기를 신명(神明)같이 여기며 거칠부, 이문진97)은 존경 할 만하지 않고 요즘 사람으로 신채호 같이 특출함은 미쳤다고 우 선 비웃어 대고 있소. 밤낮으로 졸졸 따라다니며 자기 선생의 자취 만 밟아서, 저들이 대충만 써대어도 아무개가 상세하게 펴내고, 저 들이 그 실마리만 들추면 아무개가 끝맺음을 한다오.98)
94) 정인보(1931), 「憨書 岱淵李勉伯 著」, 朝鮮古書解題; 담원 정인보전집 2, 연세대학교 출판부(1983), p. 3. 앞으로 朝鮮古書解題는 “정인보(1931)”와 전 집의 쪽수로 표기한다.
95) 정인보(1931), p. 3.
96) 정인보(1931), p. 4.
97) 居柒夫는 國史를 편찬한 신라인이며 李文眞은 留記를 편찬한 고구려인이다.
98) 정인보, 「與文湖巖一平書」, 薝園文錄 四; 정양완 옮김(2006), 薝園文錄 中, p. 139.
“문헌에 의존하여” “옛 역사를 증명”한다는 간판을 걸고 일본인 교수 를 중심으로 한 조선연구에 위기의식을 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러나 한편에서 위 편지에서 정인보가 문제 삼고 있는 ‘조선인’들도 있었 다. 즉, 조선의 열등함을 증명하겠다는 의도로 조선의 역사를 ‘문헌에 의 거해 실증하겠다고 하는 일본인 학자’를 신명처럼 여기며 따르는 조선인 학자들이다. 정인보는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는 조선인 은 “우리나라와 외국의 문헌을 처리함에 있어서 마땅히 자기를 억누르고 남을 따르면 안되며” 나무와 풀로 뒤덮인 산속을 헤쳐 가는 듯한 정신과 기운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99)
정인보의 조선학은 일본인의 조선학과 대결하기 위한, 동일한 조선학 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었지만, 조선의 역사를 지킴으로써 조선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 나아가 독립을 기도하는 민족주의운동의 일환이 었다. 그 의도로 정인보는 조선인들에 의해 시도되는 여러 갈래의 조선 학운동을 하나로 모으고자 생각한다.
근세 조선학의 유래는 대략 세이다. 이익을 종사로 하여 정상기까 지 이어진 한 파가 있고, 이이명과 김만중에서 시작된 한 파가 있으 며 (홍대용이 이 파에 속함, 원주), 정제두의 학을 계승한 한 파가 있 다. 이 세 파에는 드러난 흔적도 있고 숨은 흔적도 있지만, 모든 학 가의 학설을 회통해서 볼 때 자연 그 쫓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세 파의 지향이 야릇하게도 조금도 틀림없이 합하여 거의 한 선생 의 지도를 받은 것 같다. 이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당시 조선인의 절 실한 고민에서 생긴 진정한 성찰이 서로 다를 리 없기 때문이다.100)
정인보는 이익(李瀷, 1681-1763)과 정상기(鄭尙驥, 1678-1752)를 중심
으로 하는 근기남인 그룹과, 이이명(李頤命, 1658-172)과 김만중(金萬重,
99) 정인보, 薝園文錄 中, p. 138.
100) 정인보(1931), 「椒園遺藁 椒園李忠翊著」, p. 28.
1637-1692)을 한 파로 하는 서인-노론 그룹, 정제두를 계승한 소론 그룹 이 모두 조선학을 하고 있다고 파악한다.101)
일본인에 의해서 수행되는 조선학은 제국의 동양학의 한 분야로서 식 민지 경영을 위한 학문이라는 분명한 방향성을 갖는다. 실제로 경성제국 대학은 동양학의 전초기지라는 의무를 부여받아 설립되었다. 그 대학의 일본인 교수로서 다카하시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인보는 그들의 조선학 의도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 카하시의 주자학 비판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측의 조선학 에 대항하는 정인보의 조선학은 조선민족을 주체로 하여, 주자학 아닌 양명학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었다. 백성의 안위를 내일처럼 여기는 ‘실심’의 양명학에, 현실적 유능함과 변화적응성이 장착된다. 일본조선 학이 단순한 학술연구가 아니라 식민지 경영의 일환이었다면, 정인보의 조선학 역시 과거에 대한 실증연구가 아니라 현실을 진단하면서 미래를 열어가고자 염원하는 운동이었다.102)
조선학의 계보는 조선민족의 정신사이다. 정인보가 조선 정신사의 증 표로 꼽은 ‘실심’이 “백성의 이해와 안위가 나의 고통처럼 느껴져 통하 는 것”103)이며 그것이 실행으로 드러나는104) 특징을 갖는 것이라면, 이 는 공자가 ‘수기이안백성’(修己以安百姓)에 응축시킨 유학의 이상, 주자 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정식화한 유학의 이상과 다른 것이 아니
101) 조성산(2010), 「鄭寅普가 구성한 조선후기 문화사」, 역사와 담론 56, p.483.
102) 이 시대 조선인에 의한 ‘조선학’은 민족의 역사를 확인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구축 하기 위한 민족우의 운동(민족주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정인보의 조선학을 고찰한 논문으로 윤덕영(2015), 「위당 정인보의 조선학 인식과 지향」, 韓國思想史學 50 참조)이었지만, 다른 조선학의 존재가 시사하듯 ‘조선학’의 발단은 일본제국의 지역학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인들에 의한 같은 이름을 가진 대항으로서의 민족주 의 운동 역시 같은 이름을 갖고 수행된 것이다.
103) 정인보(1933), p. 120.
104) 정인보(1933), p. 125.
다. 조선 유학의 역사에서 정인보는 주자학을 존화주의와 이기주의로 비 판하고 조선의 참된 정신, 조선학자의 참된 학문으로 양명학의 ‘실심’을 내세운다. 그 실심은 애민사상과 실천으로 특징지어지는 바, 당시 새로 운 학문으로 주목되던 ‘실학’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즉, 정인보에게 ‘실 학’은 전통적으로 유학자들이 강조해온 그 실학이기도 한 것이다.105) 이 유학적 정신이 ‘조선학’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애민정신과 실천이 제대로 실행되려면 내 백성들의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의 현실과 애환을 느끼고 그 애환을 해결하고 현실을 개선하려는 실행이 동 반된다는 점에 있다. 정인보는 조선의 양명학부터 그 계보를 엮었지만, 찾아보면 그러한 정신과 실행은 한반도에 정치가 행해졌을 때부터 있었 을 것이다.106) 그러므로 그것이 한민족의 역사가 될 것이었다. 정인보는 ‘실심’으로 조선의 역사, 조선정신의 역사를 엮었다. 이는 이 노우에나 다카하시가 말하듯이 중국에 종속되고 주자에 종속된 수동적 인 민족이 아니라, 백성의 안위를 보살피는 양심을 가지고 실심을 이어 온 민족의 존재를 알리고자 한 외침이었다.
105)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2016), 「實心實學 개념의 역사적 사명」, 한국실학연 구 31]는 실학을 근대이전과 근대이후로 나누고, 근대이전의 실학을 “수기는 실 심에 해당하고” “치인은 실학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근대이후 실학이 ‘실심’이 빠진 점과 다르다고 정리한다. 이 논문에서 오가와는 ‘名’을 ‘虛’한 것으로 비판하 면서 ‘實’을 강조한 唐甄(1630-1704)을 소개한다. 오가와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실심’을 강화학파의 특징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편 노관범(2018), 「근대초기 실학의 존재론: 실학 인식의 방향전환을 위하여」, 역사비평 122는 실학연구는 “실학의식으로 조선 후기 실학파를 만들어왔던 한국 국학 세계의 실 학사상에 관한 연구”를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106) 오가와 하루히사(2016), 「實心實學 개념의 역사적 사명」은 전근대의 ‘실심실학’ 이 유학이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며, 도가적 모델도 소개하고 있다.
6. 맺는말
일본제국의 식민주의 조선학은 조선민족의 열등함을 ‘실증적’으로 규
정하려는 의도를 갖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 작업을 담당한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카하시는 조선 주자학의 역사를 제국의 의도에 맞게 정리했다. 그 이전에 주자학을 전근대의 학으로 정리한 것은 토교제국대학 교수 이 노우에였다. 이노우에는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라는 구도로, 일본양명 학과 일본의 민족정신이 메이지유신을 선도하고 일본의 근대를 열었다 는 서사를 만들고자 했다. 그가 일본적으로 전유한 이른바 ‘근대양명학’ 의 핵심은 일본국민이 자발적이고 실천적으로, “효제충신”을 바탕으로
“한결같이 애국”[共同愛國]한다는 것이었다.107) 이노우에의 동양학 구상을 조선학 분야에서 구체화한 다카하시 도루
는 조선을 주자학 일존의 나라로, 조선민족을 창의성과 독립성이 결여된 민족으로 그렸다. 정인보는 조선에 주자학만이 아니라 양명학도 있음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양명학의 정신이 바로 조선의 민족성이라고 내세웠다. 그가 묘사한 조선의 양명학은 중국본토를 능가하는 것이며 조 선이라는 공간에 충실한 것이고 실천성이 뛰어난 것이라는 점에서 이노 우에가 묘사한 일본양명학과 많이 닮은 것이었다. 즉, 정인보의 양명학 은 다카하시에 대한 대답이며, 동시에 일본의 근대가 만든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라는 틀을 답습한 것이었다.
이노우에나 정인보나 양명학을 재해석한 가장 큰 의미는 보편주의를
표방하던 양명학을 민족주의적으로 전유했다는 점에 있다. 민족주의, 애 국주의, 실천, 이러한 특징들은 두 사람이 해석한 양명학이 갖는 공통점 이다. 이노우에가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평가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8-1877) 등을 일본양
107) 井上哲次郞(1900), 「勅語衍義序」, 勅語衍義, 敬業社, p. 1.
명학의 계보에 넣은 것처럼, 정인보는 유형원을 조선양명학의 계보에 넣 었다.
그런데 정인보가 조선양명학의 핵심으로 제시한 ‘실심’은 실상은 ‘백 성을 자식처럼 여기는 군자의 정치’를 표방하는 참된 유학 정신을 가리 키는 것이었다. 양명학을 유학의 근본정신으로써 규정한 것은 정인보가 이노우에와 달리 진짜 ‘양명학자’였다는 사실에서 온다고 생각된다. 이 노우에는 양명학을 국민도덕을 위해 ‘사용’하였으나 정인보는 그 자신이 양명학자였다.
그런데 이노우에가 ‘국민도덕’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국민’국가의 시
대였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인보의 ‘양명학’이나 ‘실학’에는 ‘국민’이 보이지 않는다. 정인보가 선각자의 마음을 가진 유학자였기 때 문일 것이다. 그는 백성에게 국민국가의 주체가 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 다. 그는 다만 조선의 지식인들이 유학의 참 정신을 되찾아 성심으로 조 선의 백성을 책임지고 국권을 회복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점에서 ‘주자 학에서 양명학으로’를 관에서 민으로라는 진보로 설명한 이노우에와는 달리, 정인보의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는 허위의 학문에서 참된 학문 을 회복하는 구도였고, 거기에는 ‘진보’의 관념이 의미가 없다.108) 그 점에서 정인보의 양명학에 ‘근대적’이라는 특징을 붙이기는 어렵 다. 그에게 근대적인 특징이 있다면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 일 것이다. 그러나 유학자로서 정인보는 내게 가까운 민족의 백성을 ‘우 선’ 그리고 ‘절실하게’ 돌봐야 한다고 얘기할 뿐이지, 내 민족을 배타적 으로 돌봐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이노우에가 양명학의 ‘양심’ 을 그대로 국가주의와 연결시킨 것과는 다르다. 정인보는 민족주의자였
108) 2019년 5월 22일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국내학술대회’ “식민지근대와 고전 의 탄생” 학술대회에서 본 논문과 같은 이름을 걸고 발표된 글의 논평에서 김태년 이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김태년, 「‘식민지근대’를 헤쳐 나아가기 위한 한 유학자 의 선택, ‘조선양명학’ 만들기 — 이혜경선생의 「식민지근대에 복권된 양명학」을 읽고」, 식민지 근대와 고전의 탄생, p. 72 참조).
으나 유학의 이론 안에서 민족적 특수성을 강조한 것으로, 유학의 보편 주의를 훼손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본 논문의 머리에서 제기한 오규 시게히로의 가설, 즉, 일본의 ‘근대양
명학’이 한국에 흘러들어와 한국의 ‘국학’을 형성했는가에 대답하자면, 부분적으로 형성에 기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 학을 조선을 대표하는 학문으로 정초했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근대양명 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직접적으로는 다카하시의 자 극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인보가 구축한 한국의 양명학은 이노우 에가 만든 양명학과 중요한 부분에서 다른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하 게는 정인보는 민족주의적인 지향을 양명학에 실었으나 양명학을 민족 주의적으로 왜곡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정인보에게는 근 대가 진보이며 가치라는 관념이 없었다. 그의 양명학은 근대적인 것이 아니라 참된 유학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는 정인보는 근대 인이 아니라 근대라는 시대에 살았던 참된 유자를 희구하는 사람이었다 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기도했던 것은 ‘실심을 가진 민족 만 들기’가 아니라 ‘실심을 가진 참된 유자엘리트의 민족 만들기’였다고 생 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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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접수일: 2019년 7월 9일 심사 완료일: 2019년 8월 6일 게재 확정일: 2019년 8월 11일 ABSTRACT
Revitalized Yangming School in Colonial Modernity:
Is Jung Inbo’s Yangmyeonghak Yeonron Countering Takahashi’s History
of Korean Thoughts?
YI, Hye Gyung*
109)
This paper argues that Jung Inbo’s Yangming Studies are related to imperial Japan’s ‘modern Yangming school’. Professor Inoue Tetsujiro of Tokyo Imperial University formed the narrative that Yangming Studies in Japan was opened in modern Japan within the framework of “from Zhuxi School to Yangming School”. Takahashi Toru, Professor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applied Inoue’s understanding of Confucianism to Korean studies, and defined Korea as “the stagnant society of Zhuxi School monotheism”. This paper argues that Jung Inbo’s award of Yangming School is a criticism of Takahashi, and at the same time follows the framework of Inoue’s “from Zhuxi School to Yangming School”. However, unlike Inoue, Jung himself was a Yangmning Confucian scholar; from him, therefore, “from Zhuxi School to Yangming School” was a restoration of true Confucianism. In addition, for him, a study that worries about the safety crisis of a near-familiar nation is to be Korean studies (朝鮮學) and Sincere
* Associate Professor, Institute of Humanities, Seoul National University
Studies (實學). Although he used the study of Yangming as well as Inoue, he did not undermine the universality of Yangming School and stimulated nationalism with emphasis on “decreasing measures of the love due to relati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