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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鄭齊斗, 1649년 8월 5일(음력 6월 27일)∼1736년 9월 15일(음력 8월 11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영일,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추곡(楸谷)이다. 성리학자였으나 양명학에 관심을 갖고 양명학자가 되었으며 강화학파의 시초가 되었다. 윤증의 문인이다.
생애[편집]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어려서 조실부모하여 현종 때 우의정을 지낸 할아버지 도촌 정유성 밑에서 자랐다. 일찍이 학문에 뜻이 있어 백가(百家)에 통달하였고, 박세채와 윤증의 문인이다. 숙종 때에 6품(六品)·대성(臺省)·방백(方伯)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전생애의 대부분을 학문 연구에 바쳤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곧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20여세 때부터 양명학(陽明學)에 심취(心醉), 41세에 안산(현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楸谷)으로 이거하여 당시 학계와 정계에서 이단으로 몰려 배척당하면서도 조선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학변學辯 존언存言 저술) , 그의 이러한 학문은 비판적인 그의 학풍과 함께 61세 이후 강화도 하곡(霞谷)로 이주하여 신작(申綽)·이광사(李匡師)·유희(柳僖) 등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왕양명의 학설 중 제일의(第一義)라고 할 수 있는 '치량지설(致良知說)'의 '양'(良)이 '지'(知)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치지'의 '지'(知)가 지식의 '지'(知)가 아니라 선천적 지혜라고 했다. 그러므로 '양'(良)는 생래적으로 얻은 혜명(慧明)한 선천적 지성을 뜻한다고 했으며, '양지'가 있으므로 경험이 가능하고 지식을 지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성현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속에 흐르는 논리가 중요한 것이요, 논리보다도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양지가 더욱 귀하다고 했다.
그의 학풍은 조선과 한국의 학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는 왕양명의 학설 중 제일의(第一義)라고 할 수 있는 '치량지설(致良知說)'의 '양'(良)이 '지'(知)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치지'의 '지'(知)가 지식의 '지'(知)가 아니라 선천적 지혜라고 했다. 그러므로 '양'(良)는 생래적으로 얻은 혜명(慧明)한 선천적 지성을 뜻한다고 했으며, '양지'가 있으므로 경험이 가능하고 지식을 지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성현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속에 흐르는 논리가 중요한 것이요, 논리보다도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양지가 더욱 귀하다고 했다.
그의 학풍은 조선과 한국의 학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학술사상의 본령(本領)은 양명학에 있었다.
그의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設)> <존언(存言)> <서(書)> <성학설(聖學說)> <대학설(大學說)> <중용해(中庸解)> 등이 있다.[1]
각주[편집]
↑ 〈조선후기의 철학사상〉[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글로벌세계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한겨레 21 2006년12월14일 제6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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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
최근 수정 시각: 2023-10-10 02:07:44
https://namu.wiki/w/%EC%A0%95%EC%A0%9C%EB%91%90
분류 1649년 출생조선의 유학자연일 정씨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
정제두(鄭齊斗, 1649-1736)는 독창적인 안목으로 우리나라 양명학(陽明學)의 체계를 완성한 조선후기의 유학자(儒學者)입니다. 호는 하곡(霞谷)이고 자는 사앙(士仰)이며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의 11대손입니다. 그는 효종 1년인 1649년에 한양에서 태어나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대립의 정치적 파란의 시기였던 영조시대(1724-1776 재위)까지 살았던 인물이며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당시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던 학문인 성리학과 억압받고 있던 학문인 양명학의 양면을 두루 섭렵하여 높은 안목을 갖추었던 인물입니다. 그러한 안목을 토대로 당시 억압받아오던 양명학을 연구하여 하곡학파, 혹은 강화학파로 불리는 한국적 양명학을 체계화하였으며 200년 이상 대를 이어 내려올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하곡은 사상적으로 한국적 양명학이라는 독창적인 사상체계를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로 은둔하여 학문에 몰두하였음에도 정치적으로도 높은 영향력이 있었으며 영조에게 탕평책을 진언하여 어려웠던 시기 정국의 안정에 크게 기여한 인물입니다. 또한 경세학, 자연학 등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제자로는 조선후기 명필로 이름난 원교 이광사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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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두 (鄭齊斗)
목차메뉴 접기정의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학문세계와 저서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하곡문집 / 학변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학변』, 『존언』 등을 저술하였으며, 양명학을 발전시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학자.
이칭자사앙(士仰)호하곡(霞谷), 추곡(楸谷)시호문강(文康)
인물/전통 인물성별남성출생 연도1649년(인조 27)사망 연도1736년(영조 12)본관영일(迎日)더보기
접기/펼치기정의
조선 후기에, 『학변』, 『존언』 등을 저술하였으며, 양명학을 발전시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학자.
접기/펼치기개설
서울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 추곡(楸谷).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상징(鄭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주1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1672년(현종 13)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부시주부 ·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상령군수 · 종부시주부 · 사헌부장령 ·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1709년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옮겨 살았으며, 호조참의 · 강원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 ·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1722년(경종 2) 사헌부대사헌 · 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성균관좨주 ·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26년(영조 2) 이정박(李廷撲)이 정제두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했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다. 1728년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1672년(현종 13)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부시주부 · 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상령군수 · 종부시주부 · 사헌부장령 · 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1709년 강화도 하곡(霞谷)으로 옮겨 살았으며, 호조참의 · 강원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 ·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1722년(경종 2) 사헌부대사헌 · 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성균관좨주 ·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26년(영조 2) 이정박(李廷撲)이 정제두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했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다. 1728년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학문세계와 저서
정제두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다가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정제두는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정제두는 당시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풍에 대해 학문적 진실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오늘날에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핑계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대는 데에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정제두는 송시열(宋時烈)과 서신을 통해 경전의 뜻과 처신의 의리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고, 스승 박세채를 비롯하여 윤증(尹拯) · 최석정(崔錫鼎) · 민이승(閔以升) · 박심(朴鐔)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양명학의 문제를 토론하였다.
박세채는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고,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버리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제두는 “왕수인(王守仁)주2의 학설에 애착을 갖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며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민이승과는 여러 차례 만나서 토론을 벌이거나 서신을 통해 조목별로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 · 지행합일 · 친민(親民) 등 양명학의 문제들에 관해 논의함으로써 양명학과 주자학에 관한 본격적인 토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이승에게 왕수인의 글을 초록하여 제시하기도 하고,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와 「여명체용도(麗明體用圖)」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과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정제두는 왕수인의 심즉리를 받아들여 주자가 마음[心]과 이(理)를 구별하는 것을 비판하고 마음과 이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기(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이기합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나아가 이가 마음과 일치되어 마음 밖에 이가 따로 존재할 수 없게 되기에 이가 공허하지 않고 실실하게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정제두는 양지의 개념에 대해서 지각이나 지식의 뜻과 구별하여 성체(性體)의 지(知)요, 본연의 선(善)이며, 오상(五常)의 지(知)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여 성의 본체라 하였다. 「양지체용도」에서도 중심의 원 속에 마음의 성과 인의예지(仁義禮智), 마음의 본원과 양지의 본체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바깥의 가장 큰 원은 천지만물인 동시에 마음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정제두는 심(心) · 성(性) · 정(情)의 관계도 성은 양지의 본체이고, 정은 양지의 작용이며, 마음은 바로 양지의 전체라 이해하였다. 또한 지행합일설에 대해서도 지와 행을 둘로 나누어 놓는 것은 물욕에 가려진 것이라 하고, 양지의 본체에서 보면 지와 행이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정제두는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도 비판하면서 양명학의 확립에 전념하였다. 아들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하여 윤순(尹淳), 김택수(金澤秀), 이광사(李匡師) 형제 등이 정제두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정제두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되어갔다.
저서로는 양명학의 치양지설(致良知說)과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받아들여 저술한 『학변(學辨)』 · 『존언(存言)』, 경전 주석서인 『중용설』 · 『대학설』 · 『논어설』 · 『맹자설』 · 『삼경차록(三京箚錄)』 · 『경학집록』 · 『하락역상(河洛易象)』, 송대 도학자의 저술에 대한 주석서인 『심경집의(心經集義)』 · 『정성서해(定性書解)』 · 『통서해(通書解)』 등이 있다.
정제두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다가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정제두는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정제두는 당시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풍에 대해 학문적 진실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오늘날에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핑계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대는 데에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정제두는 송시열(宋時烈)과 서신을 통해 경전의 뜻과 처신의 의리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고, 스승 박세채를 비롯하여 윤증(尹拯) · 최석정(崔錫鼎) · 민이승(閔以升) · 박심(朴鐔)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양명학의 문제를 토론하였다.
박세채는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고,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버리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제두는 “왕수인(王守仁)주2의 학설에 애착을 갖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며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민이승과는 여러 차례 만나서 토론을 벌이거나 서신을 통해 조목별로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 · 지행합일 · 친민(親民) 등 양명학의 문제들에 관해 논의함으로써 양명학과 주자학에 관한 본격적인 토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이승에게 왕수인의 글을 초록하여 제시하기도 하고,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와 「여명체용도(麗明體用圖)」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과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정제두는 왕수인의 심즉리를 받아들여 주자가 마음[心]과 이(理)를 구별하는 것을 비판하고 마음과 이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기(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이기합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나아가 이가 마음과 일치되어 마음 밖에 이가 따로 존재할 수 없게 되기에 이가 공허하지 않고 실실하게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정제두는 양지의 개념에 대해서 지각이나 지식의 뜻과 구별하여 성체(性體)의 지(知)요, 본연의 선(善)이며, 오상(五常)의 지(知)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여 성의 본체라 하였다. 「양지체용도」에서도 중심의 원 속에 마음의 성과 인의예지(仁義禮智), 마음의 본원과 양지의 본체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바깥의 가장 큰 원은 천지만물인 동시에 마음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정제두는 심(心) · 성(性) · 정(情)의 관계도 성은 양지의 본체이고, 정은 양지의 작용이며, 마음은 바로 양지의 전체라 이해하였다. 또한 지행합일설에 대해서도 지와 행을 둘로 나누어 놓는 것은 물욕에 가려진 것이라 하고, 양지의 본체에서 보면 지와 행이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정제두는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도 비판하면서 양명학의 확립에 전념하였다. 아들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하여 윤순(尹淳), 김택수(金澤秀), 이광사(李匡師) 형제 등이 정제두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정제두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되어갔다.
저서로는 양명학의 치양지설(致良知說)과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받아들여 저술한 『학변(學辨)』 · 『존언(存言)』, 경전 주석서인 『중용설』 · 『대학설』 · 『논어설』 · 『맹자설』 · 『삼경차록(三京箚錄)』 · 『경학집록』 · 『하락역상(河洛易象)』, 송대 도학자의 저술에 대한 주석서인 『심경집의(心經集義)』 · 『정성서해(定性書解)』 · 『통서해(通書解)』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참고문헌
『하곡집(霞谷集)』
『한국의 양명학』(유명종, 동화출판공사, 1983)
『조선시대의 양명학연구』(윤남한, 집문당, 1982)
「하곡철학의 양명학적 이해」(유승국, 『동양철학연구』, 근역서재, 1983)
「양명학연론」(정인보, 『정인보전집』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양명학의 전래와 이해」(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78)
『하곡집(霞谷集)』
『한국의 양명학』(유명종, 동화출판공사, 1983)
『조선시대의 양명학연구』(윤남한, 집문당, 1982)
「하곡철학의 양명학적 이해」(유승국, 『동양철학연구』, 근역서재, 1983)
「양명학연론」(정인보, 『정인보전집』2, 연세대학교출판부, 1983)
「양명학의 전래와 이해」(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