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9

崔明淑 독서모임에서 퇴계 이황의 사상을 높히 평가 -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와타나베 히로시

Facebook

 
과거에 이런 독서 기록을 했었구나.

독서모임에서 퇴계 이황의 사상을 높히 평가하며
서양의 여러 사상이나 종교에서 찾으려 했던 것을 멀리 갈 필요없이 여기에 다 들어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퇴계는 주자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더 발전시겼다고 한다.
理를 주자는 고정적으로 보았지만 퇴계는 능동적으로 보았다고 하지만 내용을 잘 모르겠다.

[농암집 ]
조선의 명 문장가 김창협의 글 모음집.

스승 송시열과 아버지 김수항이 숙종때 아마 장희빈의 아들 세자책봉 관련이었던 것 같은데 정쟁으로 사약을 받고 죽었고 5년 후 다시 복권이 되어 수십차례 왕이 요직을 권하였지만 벼슬길은 나가지 않았다.

고전의 좋은 점.

당대 선비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는 드라마에 그려지는 남을 모략하며 정쟁이나 일삼는 속세인이 아닌 구도자적 기상이 서린 학자들이었다. 상당히 스토익하고 삶에서도 엄격함이 있었다. 강한 일가의 결속과 학문을 통한 우정과 편지를 통한 주자학 격론 등 ...

아버지가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 묘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하는데 그 편지글에는 사약을 받는 아버지 김수항의 초연한 모습과 자제들, 친인척에게 남기는 말 들이 묘사되는데 당대 선비들의 높은 수양의 정도를 보여준다. 역사에서 당시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과 현실과 괴리된 주자학의 세계에 혐오를 느끼는 마음이 일반적이라면 이 책은 고결하고 엄격한 선비라는 학자들이 지조를 지키는 기상찬 인간으로 다가오게 한다. 송시열 사당을 관람 할 때에도 비슷하게 느꼈었다. 농암집이란 책은 조선시대의 선비란 무엇인가를 느끼게했다.

(송시열이나 김창협은 서인의 노론계 선비들임.시대를 현실적으로 판단하여 국난을 면하게 하거나하는 점에 취약할 수 밖에 없던 점은 재고가 필요함)



===

농암집 -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  | 한국고전선집
김창협 (지은이),송혁기 (옮긴이),최채기 (감수)
한국고전번역원2016-09-19



10.0 100자평(0)리뷰(1)

책소개

한국고전선집. 농암 김창협은 명문 안동 김씨 가문의 자제이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제자로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당대의 주류에 속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쟁으로 인해 아버지 김수항과 스승 송시열이 형벌을 받아 죽게 되자 수십 차례 계속된 관직 제수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고 철저히 처사(處士)의 삶을 살아갔다.

결국 김창협의 삶을 채운 것은 대부분 학문과 문학, 그리고 산수 유람이다. 특별한 이력이나 눈에 띄는 공적이 없으니 그의 삶이 우리의 주목을 끌지 못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김창협은 오늘날 우리의 인지도와는 달리,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 최고의 학자나 문인을 꼽을 때 몇 손가락 안에 들던 인물이다.

김창협의 문집 <농암집>은 그의 사상사.문학사적 성취를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가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삶의 굴곡과 역정, 나아가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상.사회상까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목차


한국고전선집을 펴내며 4
김창협은 누구인가 13

제 1 장 학문의 길 위에 서다
어린 날의 추억, 해주 25
나의 스승 정관재 28
책선(責善)해 주는 벗이 있어 33
시험에 떨어진 동생에게 37
성악설 비판 41
금강산 유람기 48
도봉서원에서 우암의 시에 차운하다 58

제 2 장 은거를 마음먹다
월출산 구정봉에 오르다 63
애틋한 마음 나눌 형제들이 있어 66
얼음 뜨는 노래 68
환경을 탓할 것인가 환경을 바꿀 것인가 71
험한 산골에 사는 이유 75
고을살이는 거문고 연주와 같으니 77
고관 자제의 곤궁한 은거 82
나귀 빌려주어 고맙네 89
자신의 깨달음이 없으면 93
은거의 자세 97

제 3 장 의리로 세상을 논하다
나의 수명 덜어서라도 꽃다운 너의 생을 이어 줄 수 있다면 105
솜씨 좋은 대장장이의 자식이 가죽옷도 잘 만든다 112
어른이 된다는 것 116
의문 없이는 학문도 없음을 왕에게 가르치다 121
역졸 아이 녀석의 풍류 125
시다운 시란 무엇인가 126
변방에서 130
약소국의 살 길 132
왕의 잘못을 지적하다 140
한가위 달빛 아래 작은 배에 누워서 150
어리석은 뒷집 부인의 충고 152

제 4 장 아버지와 스승의 죽음을 겪다
어느 달 밝은 밤 흥에 겨워서 157
스승을 위하는 마음과 공정한 판단 159
아버지의 묘표를 스승에게 부탁하다 164
마음을 잠재우다 172
폭포를 찾아서 178
풍경이 되어 버린 사람, 사람으로 완성되는 풍경 183
꼼꼼한 『논어』 읽기 189
좋은 문학이란 무엇인가 198
벼슬할 수 없는 이유 208
아버지 대신 지은 동생의 묘지명 214
절교를 선언하다 220

제 5 장 학문을 논하고 문학을 평하다
하나뿐인 스승으로서 내 어이 자넬 잊겠는가 227
성정과 천기로 지은 시 236
요절한 젊은이와 외로운 노인을 위하여 240
지(智)와 지각(知覺)은 어떻게 다른가 245
조선의 문장을 평하다 250
눈 오는 밤 산사에서의 약속 255
맑은 밤 밝은 달의 즐거움을 누리려면 259

제 6 장 시련 속에서 학문을 꽃피우다
조선 시대 여성으로 산다는 것 265
시 벗 아들을 잃다 272
둘째 딸마저 연이어 잃다 278
퇴계와 율곡을 넘어서 사단과 칠정을 논하다 283
청의 지배와 중화 문명 292
슬픔의 금강산 297
조선의 학자를 평하다 301
화창한 봄날 병상의 와유 306
병든 몸에 쌓이는 글 빚 309

제 7 장 학문과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다
졸기 317
학문 320
문장 323

연보 328
참고 문헌 337
접기


책속에서



더보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창협 (金昌協) (지은이)

조선 숙종조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은 물론이요, 문학, 서화에도 뛰어난 실력이 있어 비록 행공(行公)은 하지 않았지만 대제학에 뽑힌 인물이다.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동음거사(洞陰居士)·한벽주인(寒碧主人),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부친은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형 김창집, 동생 김창흡·김창업·김창집·김창립 모두가 서화에 능했던 것으로 전한다.

최근작 : <팔대가문십선>,<조선후기 한문비평 1>,<한국 산문선 5> … 총 11종 (모두보기)

송혁기 (옮긴이)
저자파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한문학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구 분야는 한문학 비평 및 한문산문이며, 현재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후기 한문산문의 이론과 비평』 『농암집: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 『고전의 시선: 우리 산문 다시 읽고 새로 쓰다』를 펴냈고, 『나를 찾아가는 길: 혜환 이용휴 산문선』 외에 다수의 공저와 공역서 및 연구논문이 있다.

최근작 : <나만이 알아주는 나>,<훈민정음 해례본>,<고전의 시선> … 총 11종 (모두보기)

최채기 (감수)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연수부, 상임연구부) 졸업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現)

논문 및 역서
<退溪 李滉의 朱子書節要 編纂과 그 刊行에 관한 硏究>, <圃隱集의 編纂과 刊行에 관한 硏究>, <한국에서의 朱子文集 수용방식> 등
≪拙藁千百≫, ≪記言≫(공역), ≪明齋遺稿≫(공역), ≪弘齋全書≫(공역), ≪星湖全集≫(공역) 등

최근작 : <고전적정리입문>,<생각, 세 번> … 총 1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나는 조선의 문학을 말할 때에 농암(農巖)과 연암(燕巖)을 제일류로 추대하고자 한다.”

1936년에 현상윤 선생이 『삼천리(三千里)』라는 잡지에 게재한 글의 일부이다. 연암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대문호인 박지원(朴趾源)의 호라는 사실은 대개 알고 있지만, 그와 동등하게 거론된 농암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농암 김창협은 명문 안동 김씨 가문의 자제이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의 제자로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당대의 주류에 속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쟁으로 인해 아버지 김수항과 스승 송시열이 형벌을 받아 죽게 되자 수십 차례 계속된 관직 제수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고 철저히 처사(處士)의 삶을 살아갔다.
결국 김창협의 삶을 채운 것은 대부분 학문과 문학, 그리고 산수 유람이다. 특별한 이력이나 눈에 띄는 공적이 없으니 그의 삶이 우리의 주목을 끌지 못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김창협은 오늘날 우리의 인지도와는 달리,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선 최고의 학자나 문인을 꼽을 때 몇 손가락 안에 들던 인물이다.

조선 후기 주자학의 가장 높은 봉우리

조선에서 이루어진 주희 저술에 대한 주석서는 120여 종에 이르는데, 이는 중국에서도 찾을 수 없는 성과다. 경서 본연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된 주석과 해석들은 각 시대의 문제들을 반영하여 더디지만 새로운 진전을 이룩해 갔다. ‘주자로 학문하기’ 역시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 평가절하할 일은 아니다. 김창협은 19세기까지도 조선에서 거의 절대적인 주류를 이루었던 주자학에서 최고봉에 오른 대학자이다. 김창협은 매우 정교한 사유와 치밀한 논리, 그리고 섬세한 언어 구사를 통해서 주자학을 한 단계 더 심화시켰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로 오면서 주자학이 사각 지대에 놓여 있다 보니, 그 안에서 최고봉에 올라 있던 김창협의 학문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에 대한 질문과 김창협 자신의 견해를 담은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은 조선 주자학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 주는 명저이다. 이제 주자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김창협의 학문 세계를 주목해 볼 때다.

문학사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다

김창협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비평가들이 숙종대 최고 문장가로 꼽을 정도로 문장가로서의 명성이 매우 높았다. 조선 후기 대부분의 문장 선집에 김창협의 문장이 수록되었는데, 담박하고 정갈한 한시 작품들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문장가로서의 명성은 주로 한문 산문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김창협은 사상적으로 썩 이채로운 작품을 쓴 일도 없고, 정통의 문체를 벗어난 파격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학문적으로 주자학을 고수하고 심화한 것처럼, 문장에서는 한문 산문의 정통이라 할 수 있는 당송고문(唐宋古文)을 추구했다. 김창협의 산문은 장르의 규칙과 모범적 전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탁월한 수준에 올랐다고 평가된다.

김창협은 박학한 문예지식을 바탕으로 분석적이고 전문적인 비평 작업을 행한 탁월한 비평가이기도 하다. 김창협의 예리한 비판력과 섬세한 감식안은 이전의 논의와 다른 새로운 문학사적 흐름을 형성하는 데 일조하였다. 당대의 지식과 문화 수용을 선도하고 정계 주류에서 시대의 흐름을 목도할 수 있었던 김창협은 학문적 엄정성과 문학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조선조 최고 수준의 비평을 제출하였다. 비단 조선뿐만 아니라 18세기 초입 동아시아의 지적 수준이 갈 수 있는 한 정점을 우리는 김창협의 비평에서 볼 수 있다.

지금의 우리가 김창협의 삶과 글을 지금 다시 떠올려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조선 후기의 사상사와 문학사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돌아보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창협의 문집『농암집』은 그의 사상사·문학사적 성취를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그가 한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삶의 굴곡과 역정, 나아가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상·사회상까지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오랫동안 주목하지 못하고 있던 대학자·대문호의 삶과 성취,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구성

이 선집은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창협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모은 마지막 장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개 장은 김창협의 삶의 궤적을 따라 시기별로 구분한 것이다. 시기별로 주요 작품을 정선(精選)하여 번역하고, 각 작품 뒤에 작품을 짓게 된 배경 등을 설명한 평설을 실어 작품 이해를 도왔다.

1장 ‘학문의 길 위에 서다’에서는 24세까지 지은 작품들을 통해 젊은 시절 김창협의 지향과 고뇌를 엿볼 수 있다.
2장 ‘은거를 마음먹다’에는 25세부터 30세까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간은 당쟁으로 인해 유배길을 떠난 아버지 김수항을 따라 유배지인 전라도 영암과 강원도 철원을 수시로 오가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작품을 통해 선비의 출처(出處)에 대한 고민과 결단을 엿볼 수 있다.
3장 ‘의리로 세상을 논하다’에는 31세부터 38세까지의 작품을 담았다. 이 시기에 김창협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 홍문관 교리, 함경북도 병마평사, 성균관 대사성, 승정원 우승지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관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때 지은 작품을 통해 당시 국정에 대한 김창협의 강한 비판 의식을 살필 수 있으며, 특히 왕에게 올린 글을 통해 당쟁으로 혼란스러웠던 조정에서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직간하는 그의 강직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4장 ‘아버지와 스승의 죽음을 겪다’에는 39세부터 45세까지의 작품을 모았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해 아버지 김수항과 스승 송시열이 형벌을 받아 세상을 떠난다. 이에 벼슬할 뜻을 접고 은거를 시작한 김창협의 사유와 행적이 이 시기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5장 ‘학문을 논하고 문학을 평하다’에는 46세부터 48세까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완숙기에 접어든 김창협의 학문과 문학 세계를 엿볼 수 있으며, 그중에서「지(智)와 지각(知覺)은 어떻게 다른가」는 이후 벌어지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주요 논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6장 ‘시련 속에서 학문을 꽃피우다’에는 김창협 만년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김창협의 만년은 가족의 죽음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50세 때 셋째 딸 오씨 부인이 죽은 것을 시작으로, 5년 사이에 외아들 김숭겸, 백부 김수증, 둘째 딸 이씨 부인, 어머니 나씨 부인까지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시기에 지은 작품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는 슬픔에 매몰되어 있지만은 않았다. 김창협의 만년은 자신이 평생 파고든 학문적 성과가 완성된 시기이기도 했다. 특히 51세에 완성한「퇴계와 율곡을 넘어서 사단과 칠정을 논하다」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절충하여 이기(理氣) 논변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7장 ‘학문과 문장으로 일가를 이루다’에는 조선왕조실록과 각종 문집, 필기잡록에 수록된 김창협의 학문과 문장에 대한 평가를 모았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와 같은 학문과 한문산문의 모범으로 추앙되는 구양수와 같은 문장을 겸비했다는 평은 김창협이 조선 후기 사상사·문학사에서 갖는 위상을 잘 보여 준다.
이 책의 서두에는 김창협의 삶을 요약하여 서술한 해제를 실었고, 말미에는 연보를 첨부하여 김창협의 삶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접기






BLOG.NAVER.COM
이퇴계의 보편성
* 특별기고 이퇴계와 ‘보편성’ 와타나베 히로시* 목 차 1. 들어가며 2. 현대국가와 주자학 3. 도리 4. 보...



===
https://m.blog.naver.com/sunonthetree/222262165282?fbclid=IwAR2skUVm5jXpE0GOci8xgH4qargZe7XVV9uhkDTOl966LL_Vb6c4C-PxLSo
온계 퇴계 (眞城李門)


이퇴계의 보편성


동산 몽천 2021. 3. 2

* 특별기고 이퇴계와 ‘보편성’

와타나베 히로시*



* 와타나베 히로시(渡辺 浩): 도쿄대학 명예교수.
** 이 논문은 2020년 11월 16일 국제퇴계학회에서 주최한 제28차 퇴계학국제학 술회의 ‘現代人의 삶, 退溪에게 묻다’에서 발표된 「이퇴계와 ‘보편성’」을 수정, 보완한 것임.

목 차

1. 들어가며

2. 현대국가와 주자학

3. 도리

4. 보편성

5. 세계인식과 도리



일본에서는 李退溪와 같은 성리학자가 지폐의 초상화가 된다는 것 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16세기의 주자학ㆍ성리학자가, 자유로운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분명히 朱子學ㆍ性理學 자체는 대한민국과 같은 현대국가의 사상
ㆍ신조가 될 수는 없는데, 왜일까요? 아마도 고상한 도덕을 추구하는 퇴계의 이상주의적인 태도가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는데, “四端”과 “七情”을 구분하는 그의 독특한 이론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마 보편성의 중요성에 대한 퇴계의 확고한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에게,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치우치지 않는 道里과 합치하게 행동한다는 것인데, 이는 어떤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이 과도하게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퇴계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상징이 되는 것이 납득 됩니다.



주제어: 보편성, 退溪 李滉, 朱子學ㆍ性理學, 四端七情, 道里.



1. 들어가며



한국을 처음 방문한 많은 일본인들은 1,000원짜리 지폐를 보고, 거기에 그려진 초상이 16세기를 살았던 성리학자 退溪 李滉(1501∼1570) 이라는 설명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성리학자가 지폐의 초상이 된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첫째, 보통 일본에서 유학ㆍ주자학은 이른바 ‘봉건적인’ 시대의 케케묵은 교설의 체계라고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상적 전통은 ‘현대의 국민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기해야 하는 것’이라고는 일반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둘째, 일본에서 유학ㆍ주자학을 중국의 사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아마 상당수의 일본인은 외국인 중국의 사상을 잘 이해하고 실천했다는 것은 독립국으로서 자랑할 일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입 니다. 즉, 일본에서 유학자를 현창하는 일은 내셔널리즘의 감정에 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최근 일본의 지폐 초상은 근대의 학자ㆍ문학자뿐입니다. (2024년부터 경제인 1명이 추가될 예정)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퇴계와 같은 성리학자가 현대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의 상징적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한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요? 아래에서 이 의문에 대한 저의 해답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한국의 여러분이 판정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현대국가와 주자학

우선 현대의 한국이 퇴계를 상징적인 인물로 삼은 것은 그가 믿었 던 주자학의 사상체계 전체를 현재에 그대로 신봉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국가적 차원에서 결정했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퇴계의 聖學十圖 제1도는, ‘태극’이 움직여서 ‘음양’ 과 ‘오행’이 생겨나고, 그 운동과 운행에 의해 춘하추동의 계절이 순환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태극’과 易의 ‘괘’를 그린 그림을 국기로 삼고 있다고 해서, 한국의 과학자가 ‘음양오행’을 가지 고 빅뱅 이래의 우주와 지구의 현상을 설명하려 하는 일은 있을 수 없겠지요. 또 퇴계는 ‘三綱’, 즉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라 고 하는 세 가지 상하관계를 이 세상 질서의 근간으로 생각했지만, 아마도 현대사회에서도 그렇게 여긴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애당초 한국은 ‘민국’, 즉 공화국이고 거기에 군주는 없습니다. 대통령은 임금이 아니고 재벌도 임금은 아니지요. 회사의 상사와 부하의 관계도 ‘군신관계’는 아닙니다.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도 현대 한국 여성들은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국에는 많은 크리스트교인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독교와 유교의 양립 여부는 16세기 중국에서 시작된 이래 격렬한 논쟁이 되고 있는 큰 문제입니다. 모든 크리스트교인에게 주자학을 신 봉하라고 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자학이 그대로 현대 한국의 國是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주자학, 혹 더 넓혀서 유학ㆍ유교가 그대로 현대한국의 정통 사상ㆍ신조(orthodoxy)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퇴계의 사상 중 어떤 것이 현대사회에서도 존중하고 배워야 할 측면일까요?



3. 도리

퇴계 사상의 현대적 존숭점과 배워야 할 측면의 하나는, 현실이 어 떻든 간에 이상ㆍ이념ㆍ규범을 높이 세우고, 그것을 현실과 명확히 구 별하여, 현실을 조금이라도 그 이상ㆍ이념ㆍ규범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퇴계의 태도를 잘 상징하고 있는 것이 그가 성리학자 중에 서 독특한 면모를 보이는 ‘四端理發ㆍ七情氣發’의 이론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단리발ㆍ칠정기발’ 이론에 대한 연구 상황을 잘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완전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 다만, 이하에서 우선 ‘사단리발ㆍ칠정기발’론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四端’ 즉 맹자가 말하는 ‘惻隱ㆍ羞惡ㆍ辭讓ㆍ是非’의 네 가지 마음 (孟子 「公孫丑 上」)과 ‘七情’, 즉 禮記 「禮運」편에서 말하는 ‘喜ㆍ 怒ㆍ哀ㆍ懼ㆍ愛ㆍ惡ㆍ欲’의 일곱 가지 ‘情’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요? 

먼저 맹자가 말하는 네 가지 ‘마음’이란 ‘情’의 의미라고 하는 해석을 전제로 하겠습니다. 이 해석을 전제로 했을 때, 이 네 가지 정과 일곱 가지 정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맹자에 따르면,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우물에 떨어질 것 같은 상황을 보고, “앗, 위험하다, 불쌍하다!”라고 느끼는 ‘깜짝 놀라 측은해 하는 마음[怵惕惻隱之心]’이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不善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불선을 미워하는 ‘수오지심’도, 자신을 버리고 남에게 양보하려는 ‘사양지심’도, 善을 알아서 그것을 옳다고 여기고 惡을 알아 그것이 잘못이라고 여기는 ‘시비지심’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는 본성, 즉 ‘天理’가 (마음의) 그릇 안에 있는 것의 단서, 즉 실마리가 밖으로 비어져 나온 것 처럼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주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孟子集註). 한편 예기에서는 “무엇을 사람의 情이라고 하는가? 희ㆍ노ㆍ애ㆍ구 ㆍ애ㆍ오ㆍ욕이 그것이다. 이 일곱 가지는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것 이다[何謂人情? 喜怒哀懼愛悪欲, 七者弗學而能]”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는 이 네 가지 ‘情’과 일곱 가지 ‘情’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성리학자들이 다음과 같이 설명할 것입니다.

​‘情’은 사람 ‘마음’의 ‘氣’의 움직임이다. 사람의 ‘마음’은 ‘외물’(마음 밖에 있 는 모든 사물)에 접하는 일이 전혀 없으면, ‘마음’의 본체인 ‘性’, 즉 ‘理’(즉, 사 람이 가져야 할 본연의 자세,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 마땅히 그러한 것) 와 함께 있어서 고요한 상태이다. 그러나 ‘외물’을 접하면, 그것에 반응하여 ‘마 음’이 움직인다. 그것이 ‘情’이다. 다만 情의 움직임 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 쁜 것도 있다. 좋은 ‘情’은 사람의 ‘性’, 즉 ‘理’에 따라서 ‘氣’가 움직인 결과다. 나쁜 ‘정’은 그 ‘리’에서 일탈하여 ‘기’가 움직인 결과다. 그런데 ‘사단’은 모두 ‘리’에 따른 것, 즉 ‘리’의 발현이므로 모두 다 좋은 ‘정’이다. 이에 반하여 칠정 에는 좋은 정과 나쁜 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자기의 이익만 되면 그 실현을 목표로 하는 ‘사욕’도 칠정의 하나인 ‘欲’인데, 이는 나쁜 것이다.

​즉, “‘사단’은 네 가지 좋은 ‘정’을 가리키고, 이에 대비하여 ‘칠정’은 나쁜 ‘정’과 좋은 ‘정’을 종합한 표현이다” 라는 것이 보편적인 해석이 라 생각됩니다. 달리 말하면, “‘정’은 모두 ‘기’의 움직임인데, 그것이 ‘리’에 합치하는 경우와 합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사단은 합치되는 네 가지 정을 말하고, 칠정은 합치되는 경우와 합치하지 않는 경우를 포함해서 말한다” 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퇴계는 그 설명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사단과 칠정을 엄격하게 구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리에 발하고, 칠정은 기에 발한 다[四端之情, 理發而氣随之. …… 七者之情, 氣發而理乗之. …… 若氣 發不中而滅其理, 則放而爲惡也. 「進聖學十圖劄」 退渓先生文集 巻之 七]1)” 라고 정리했습니다. 

1) [역자주] 이 문장을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라고 번역하지만, 저자 원문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여기에서는 이와 같이 번역했음을 밝혀둡니다. 일본어 원문은 “四端は理に発し、 七情は気に発する”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하 한문 번역문 또한 저자의 일본 현대어 번역의 의도를 살리고자 했습니다.


이 양자는 모두 리와 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미암아 오는 곳 [所從來]과 그 主로 하는 바, 그 중요한 바에 따라 말하자면, 한 쪽은 리이고 한 쪽은 기라고 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겠는가[二者雖曰皆不外乎理氣, 而因其 所從来各指其所主與所重而言之, 則謂之某爲理某爲氣何不可之有乎]?

............(「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一書」」 退渓先生文集 卷之十六)2)

2) 또한 「答奇明彦」(논사단칠정제2서)에서는 與所重의 세 글자를 삭제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리에 지배되어 있고 기가 거기에 따른다. 칠정은 기에 지배되고 있고 리가 거기에 탄다. 그렇기 때문에 端은 희미해지기 쉽고 정은 폭주하기 쉽다 [四端主於理而氣随之. 七情主於氣而理乗之. 故端易微而情易暴].

............ (「答李仲久」 退渓先生文集 卷之十)


왜 퇴계는 이처럼 사단과 칠정을 엄격하게 구별하려 했을까요?

그것은 퇴계가 “최근 羅整庵(羅欽順, 1465∼1547)이 리기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설을 제기하여 朱子(1130∼1200)의 설을 잘못이라고 말하기까지 이르렀다[近世羅整菴倡為理気非異物之説, 至以朱子説為 非](「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一書」 退渓先生文集 卷之十六)”, “整庵 의 글은 요즘 사람들이 많이 그 毒에 빠져 있다[整菴書, 今人多中其 毒](「答奇明彦 丁卯」 退渓先生文集 卷之十七)” 라고 하여, 나흠순에 대해 강한 경계심을 나타낸 것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3)

3) 퇴계는 奇明彦의 설이 羅整庵의 “리ㆍ기가 둘이 아니라는 설[理氣非二物之 說]”에 가깝다고 앞서 말한 것이 잘못됐다며 한 번 그 의견을 철회했습니다 (「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二書」 後論, 退溪先生文集 卷16). 그러나 그 후 다시 정암설과 부합한다고 지적했습니다(丙寅, 「重答奇明彦」, 別紙, 退溪先生文 集, 卷16).

나흠순은 王守仁(1472∼1528)와 동시대인 명나라 사람으로, 퇴계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중화의 최신 사상 동향을 보여주는 인물입니 다. 정암은 ‘氣’가 여러 가지로 운동ㆍ운행하는데, 거기에는 흐트러지 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며, “그러한 까닭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는 것-그것이 이른바 理이다. 본디 기와 별도로 하나의 사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리는 기에 의존하여 서고, 기에 붙어서 운행하는 것이다[有莫 知其所以然而然, 是即所謂理也. 初非別有一物. 依於氣而立, 附於氣以 行也](困知記 卷上 第十一条).” “리는 단지 기의 리이다. 기가 순환 하는 곳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理只是氣之理, 當於氣之轉折處觀之] (困知記 續巻上 第三十八条)” 라는 이론 등등을 주장했습니다. 현실 의 ‘기’와는 별개로, 즉 현상의 깊숙한 바탕에 ‘리’가 있는 것이 아니 라, 현실 속에 리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퇴계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다른 사물을 통째로 삼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결국 ‘기’로써 사람의 본성을 논한다고 하는 폐단에 빠져, 마침내 인욕을 천리로 간주하게 된다고 하는, 그러한 위험성이 있는 사고방식입니다[夫講學而惡分析, 務合爲一説, 古人謂之鶻圇呑棗. 其病不少, 而如此不已, 不知不覚之間, 駸駸然入於以氣論性之弊, 而堕於 認人欲作天理之患矣](「答奇明彦 論四端七情第一書」 退渓先生文集 卷之十六).

​미묘한 차이입니다만, 퇴계는 ‘천리’와 ‘인욕’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싶었습니다. 내 입장에서 좋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바람과는 모순될 수 있는 욕망을 스스로 ‘천리’ 라고 이해하고, 그렇게 지칭해 밀어붙이 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도 ‘칠정’의 일 종이라든가, ‘칠정’ 중에서 좋은 것을 ‘사단’이라고 한다든가 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선악의 구별이 모호해질 수 있으니, 악으로 흐를 것을 스스로 경계해야 할 ‘칠정’과 순수하게 올바른 ‘사 단’은 명확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퇴계의 ‘사단리발, 칠정기 발’설의 의미이자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理發’, ‘氣發’이라는 표현도, 퇴계가 지적하듯이, 朱子語類 에 그 예가 있습니다(卷53, 第83條 “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 또, 주자는, ‘인심’과 ‘도심’[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尚書 「大禹謨」). 즉, 현실의 人心과 천리에 근거하는 사람의 본심과 의 구별을 설명하고, 각각을 ‘형기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난 것’과 ‘성명 의 바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以爲有人心道心 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朱熹 中庸章句序). 이는 유사한 표현이니만큼, 퇴계가 주자학자로서 일탈했다는 것을 의 미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상과 같이 이해한다면, 퇴계의 ‘사단리발, 칠정기발’설이란, 요컨대 존재와 가치, 사실과 규범, 현실과 이상, 이들 두 항의 구별을 엄격히 하고, 사실ㆍ현실이 어떻든 규범ㆍ이상ㆍ이념을 높게 내세우는 태 도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현실을 이상ㆍ이념과 모호하게 혼동 하고 정당화하기를 거부하겠다는 자세의 선언입니다. 그것은 결코 ‘봉건적’인 것도 아니고 케케묵은 느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에서 이 성리학자의 초상화가 국민을 고무시키는 일에 내세워지는 것에 대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4. 보편성

더욱이 퇴계는 ‘私’를 싫어하고 ‘公’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私’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우리들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 는 태도입니다. ‘公’은 그 반대입니다.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은 결국 ‘공’인 것이고, 악은 ‘사’입니다. 퇴계는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私는 一心의 해충이요 적으로서, 모든 악의 근본입니다[私者一心之蠹賊, 而 萬惡之根本也]. (「戊辰 經筵啓劄二」 退渓先生文集 卷之七)

성인의 지위에 있더라도, 여전히 편벽된 사사로움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여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雖至聖人地位, 猶恐或有偏僻之私, 常懍懍爲戒]. (「戊辰 經筵啓劄二」 退渓先生文集 卷之七)


그래서 예를 들어 선배의 학설을 비판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가 스승의 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義理天下之公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이것인지 저것인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는, 오직 무엇이 지당한가에 의한 것이니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해(解: 黃仲擧(黃俊良, 1517∼1563)의 「白鹿洞規集解」)는 그대의 門人 중에서 도리를 알고 옳고 그름을 공변되게 하는 자와 그 득실을 논하여, 버릴 부분은 버리고 남길 부분은 남겨서, 다시 원고를 만들어 세상에 드러나게 한다 면, 後學에 있어서 다행일 것입니다
[以弟子而議師門之書, 不以爲嫌者, 豈不以義 理天下之公也? 何先何後, 何師何弟, 何彼何此, 何取何舎, 一於至當而不可易耳. 故是解也, 得與其門人之識道理公是非者, 考其得失, 而去其所可去, 存其所可存, 改刊以行於世, 則後學之幸也]

...........(「重答黃仲擧」 退渓先生文集 卷之十九).

선배나 스승의 학설이라고 해도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義理天下之公’이 우선인 것입니다.


‘公’이라는 한자는 영어로 public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의미는 상당히 다릅니다. Public이란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가장 권위 있는 영어사전인 Oxford English Dictionary(Second Edition, Clarendon Press, 1989)에서는 먼저 Pertaining to the people of a country or locality(국가 또는 지역의 사람들과 관련)라고 설명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습니다.

Of or pertaining to the people as a whole; that belongs to, affects, or concerns the community or national, popular(사람들 전체에 대한 또는 관 련; 지역 사회 또는 국가에 속하거나 영향을 미치거나 우려하는 것).

즉, 무엇인가 특정한 나라나 지역 사람들 전체와 관련된다는 것이 ‘public’의 의미입니다. 한 집단의 사람들 전체와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public-spirited(공공심이 있다)라는 것은 그 집단 안에서는 존경받는 일이지만, 그 집단의 외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편협할 수도 있습니 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public spirit을 가진 사람이 America First를 외치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public이 바로 보편적인 도덕적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이에 비해 이퇴계가 말하는 ‘公’이란 특정 국가나 지역과 관련된 것 이 아닙니다. 어디에서든 공평하고 치우침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좁은 범위에서의 공평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왕왕 인류 전체에 통용된다는 의미입니다. ‘공변된 것’인 ‘의리’는, 경상도에서만 통용되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것도 아니며, 온 인류에게 올바른 것임이 분명합니다. 자기에게만 유리한 것은 ‘공’이 아니며, 자기들에게만 유리한 것도 ‘공’이 아닙니다. 온 ‘천하’를 향해 떳떳하 지 못한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이 진짜 ‘공’입니다. 언제나 더 넓은 ‘공’, 더 큰 ‘공’에 비추어 한 점의 편파ㆍ불공평의 그늘이 없도록 하며, 최 고의 인격자인 聖人조차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윤리적 올바름이란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화 가능성을 가 진 판단이 윤리적인 것이다” 라는 입장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윤리철학 입장과 상당히 공통됩니다. 아시다시 피 칸트는 ‘자기 의사의 준칙이 일반적인 입법의 원리인지 아닌지’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라고 주장했습니다(실천이성비판).

마찬가지로 퇴계에 있어서는, ‘仁ㆍ義ㆍ禮ㆍ智ㆍ信’이라고 하는 덕목은, 양반에게만 통용되는 것도 아니고, 한인에게만 통용되는 것도 아니며, 만인에게 통용되는 것입니다(현대에도, 예를 들면 원칙적으로는 사람 에 대하여 ‘仁’한 것은, 누가 봐도 좋은 일이겠지요).4)

4) 다만, 예를 들어 기본적 인간관계[五倫]의 하나로서 ‘夫婦有別’을 믿은 것은 현대의 관점에서는 보편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도 남성도 사람이라는 점에서 보면, 그 출생만으로 상하가 정해져, 한 쪽은 재혼해도 되지만 다른 쪽은 해서는 안 되고, 한 쪽은 오로지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같은 인간이면서(아이가 언젠가 부모가 될 가능성이 있고, 연장자도 더 나이 많은 사 람이 보면 연소자인 것 같은) 치환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관계입니다.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편벽된 사사로움[偏僻之私]’이 아닐까요?

그런데, ‘편벽된 사사로움’이 없는지 어떤지에 대해 단지 스스로 주의하면 되는 것일까요? 스스로 돌이켜보고 경계한다면 그것으로 충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자기기만이 생길 가능성이 있 습니다. 자신은 ‘공’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칭하고 있어도, 실은 ‘私’ 라고 하는 위선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막는 중요한 수단이 ‘講習討論’입니다. 주자가 大學章 句 전3장에서 ‘배움[學]이란 강습토론을 말한다[學謂講習討論之事]’ 라고 했던 그 ‘강습토론’입니다. 혼자 자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의논을 교환하여 자신이 정말 옳은지 어떤지 상호 비판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자신의 선생님의 학설이라고 하더라도 비판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친구의 학설이라면 당연한 것 입니다. 퇴계가 奇高峯(明彦, 奇大升, 1527∼1572)과 10년 이상 지속 한 서간에 의한 토론도 그런 하나의 예입니다. 그때 퇴계는 자신의 설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면 당당하게 정정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견이 다르다면, ‘천하의 공론을 기다릴 뿐’입니다(「答奇明彦 論四端 七情第二書」 後論, 退溪先生文集 卷之十六). 퇴계의 제자도 “선생은 배우는 자들과 강론하다가 의심스러운 곳에 이르면, 당신의 생각을 위 주로 하지 않고 반드시 널리 衆論을 취하였다[先生與學者講論, 到疑處 不主己見, 必博采衆論]......(退陶先生言行通録 巻之二 「類編·学問第一」)” ​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논의하는 것입니다. 이는 ‘義理天下 之公’을 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공변된 도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퇴계에게 토론의 자유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습니다. 인간관계나 지위를 초월한 논의에 의해 보장된 보편성의 추구, 이 또한 현대 한국에서 퇴계가 국민 전통이 자랑할 만한 상징이 된 이유가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5. 세계인식과 도리

​그런데 다음과 같은 퇴계의 글들은 현대에서 보면 다소 문제가 있 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 두 명의 왕이 없다. 春秋의 大一 統은 천지의 항상된 벼리이고 고금의 공통된 뜻이다. 대 명나라는 천하의 종주이며, 바다 한 구석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땅까지 臣服하지 않은 곳이 없다[天 無二日民, 無二王. 春秋大一統, 乃天地之常經, 古今之通義也. 大明爲天下宗主, 海隅日出罔不臣服]. (「禮曹答日本國左武衛将軍源義清」 退渓先生文集 巻之八)

​즉, 중국대륙의 왕조인 명나라를 전 세계의 ‘宗主’로 인정하고 ‘조선 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명조에 신복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현대에 있어서 통상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국가관계에 대한 이해와는 다릅니다. 현대에는 평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가 병립하고, 권리가 평등한 국가끼리 조약을 체결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국제관계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퇴계가 말하는 臣服은 명조의 경제력이나 군사력을 경외하 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국 내의 정치에 대해 모두 명조의 지시에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도덕을 가장 먼저 발견한 ‘聖人’이 태어난 땅으로서,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도덕을 잘 구현하고 있는, 도덕의 중심으로서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명나 라가 보편적인 도덕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 인식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도리를 믿는다면, 세계 각지에서는 그 실현의 정도에 차이가 있고, 어느 곳에 선가 그것이 가장 잘 구현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보편적 도리가 보편적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공통된 기준이 없다면(힘에 의한 것이 아님)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습니다.

​퇴계는 대륙의 왕조가 청조로 교체된 이후의 조선의 ‘小中華’주의자 처럼 자국만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당시, 명조의 중국이 중심이었다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국 숭배 가 아닙니다. 보편적 도리의 신봉의 결과입니다. 그에게는 유학·유교 는 ‘중국의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에 있어서, 예컨 대 ‘사람인 이상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될 기본적인 인권이 있습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도리이다.’라고 믿는 사람이, 자국보다 ‘어딘가의 외국 에서 이 도리가 잘 실현되고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외국 숭배 가 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기본적 인권의 원리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서양에서 발달했다고 해서 ‘서양사상’ 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보편적 도리를 자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실현되고 있다고 믿고 자기 만족하는 사람보다는 자국은 아직 불충분하다고 인 정하는 사람이 더 진지하게 자기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을까요?

​결국 현대 한국에서 퇴계가 국민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뛰어난 성리학자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 그것이 아니라 기성 현실에 매몰되어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자기만족하기를 예리하게 거부하고, 
  • 보편타당성 있는 도리ㆍ이상ㆍ이념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논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며, 자기기만과 위선을 피하고, 
  • 그러한 도 리의 추구를 통해 자기와 사회를 보다 낫게 만들어 가고자 했던, 
  • 그러한 태도가 훌륭했기 때문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청중 여러분의 판단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