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과 유생의 대결 - 조선의 성상파괴와 종교개혁
한승훈 (지은이)사우202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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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280쪽
책소개
조선시대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된 종교개혁의 역동적인 과정을 살펴본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는 조선이 건국되는 시점에서 시작돼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진행되었다.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종교사를 살펴본다. 우선 풍부한 이미지를 사용하던 고려시대의 종교가 어떻게 유교화 과정에서 성상파괴적 종교문화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알아본다. 산신이나 불상만이 아니라 유교 전통에서 성인으로 받드는 공자상마저 철거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의례 개혁의 중심부인 명나라보다 오히려 변방의 나라 조선에서 더 철저하게 성상파괴를 실천한 이유는 무엇일까?
1부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조선에서 진행된 유교화가 의례적, 실천적, 물질적인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치밀하게 살펴본다. 2부에서는 민속종교의 현장에서 유교화와 무속 배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본다. 무당과 유생의 지난한 대결 과정을 생생하게 펼쳐 보여준다.
목차
머리말
1부: 조선의 성상숭배와 성상파괴
1. 산 위의 성상들
종교 부재와 종교 과잉
한국종교의 ‘프로테스탄트적’ 경관
이미지의 고려 종교
신으로 섬기던 왕건상
천자가 보낸 도사
교황이자 카이저가 되고자 한 주원장
신들에게 가족은 있는가
표준화된 신들
신상에서 신주로
유생들의 성상파괴운동
승려가 파괴한 성모상
2. 이단의 신상
왕가의 불교 신앙
불상에 절할 수 없다
불교를 좋아한 양무제와 영락제
마르고 썩은 부처의 뼈
석가모니의 누런 얼굴
이적을 일으키는 불상
목이 잘린 불상
돌아앉은 불상
귀신 들린 불상
땀 흘리는 불상
신주와 불상
신주에 대한 성상파괴
피 흘리는 십자가상
3. 유교의 성상
청년 김종직과 성주 공자묘
공자의 사당과 부처의 궁전
떠돌이 공자가 황제가 되기까지
성령과 잡귀
소상의 문묘
신주의 문묘
중국 사신들이 본 조선의 공자상
100년 동안의 더러운 풍습
바라보기에 존엄한 공자상
가정제의 의례개혁
땅에 묻힌 공자상
2부: 무당과 유생
4. 유교의 무속 정복
유교화와 기독교화
종교개혁으로서의 조선 건국
기우제의 무당들
원혼을 달래는 국가의례
공식종교와 민속종교라는 두 개의 무대
한양에서 추방당한 무당들
대궐 안의 무당들
무당에 대한 처벌
5. ‘요사한’ 무당과 ‘영웅적’ 지방관
만들어진 무속전통
기자에서 단군으로
유교 경전 속의 무당
신령한 무당과 천한 무당
사악한 무당들
아전과 무당
서문표 모델
함유일의 패배와 안향의 승리
영웅적 지방관들의 시대
모욕당한 신의 복수
6. 신과 망자를 둘러싼 투쟁
민속종교의 무대에서의 유생들
귀신을 부리는 선비들
귀신을 퇴치하는 무사들
오금잠신과 삼척 성황신
신을 고발한 허균
지리산 성모와 김종직
꿈속에서 신과 만나는 선비들
조상의 신을 모실 자격
제사와 굿 사이
선비들의 임사체험
진짜 무당과 가짜 무당
맺음말
주
참고문헌
접기
책속에서
P. 71태종이 불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일은 조선이 불교를 믿지 않는 나라임을 선언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것은 대단히 독특한 체제에 대한 구상이었다. 중국, 한반도, 베트남 등의 왕조들은 일반적으로 유교, 불교, 도교 등 삼교(三敎)를 모두 공식종교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었다. 개별 군주의 취향이나 정책에 따라 각 전통의 세력은 약해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했지만, 조선은 오직 유교만을 숭배하는 국가체제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접기
P. 96효는 왕실의 불교 숭배가 유지될 수 있는 중요한 명분이었다. 왕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불교 신앙이 깊었고, 유자를 자처하던 왕들도 부모의 장례에는 불교 의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불교는 유교 전통에 비해 죽은 자를 천도하는 기능에 탁월했다.
P. 101초기 한국 천주교의 비극은 중국에서 이런 상황이 진행된 후에 본격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도입했다는 데 있었다. 선교사의 지도 없이 서학을 공부하며 자생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조선의 신자들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중국 지역의 예수회가 해산한 이후, 청에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유교식 제사를 강경하게 금지하던 인물들이었다. 결국 조선에는 제사를 지키기 위해 천주교를 버린 인물과, 조상의 위패를 철거하면서까지 신앙을 지키려는 인물들이 남았다. 접기
P. 111공자는 천자는커녕 안정된 벼슬자리도 얻지 못하고 천하를 유랑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사당에서는 황제의 형상을 하고는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일까?
P. 155종교사적 관점에서 조선의 건국은 신유교를 통한 유교화의 개시이기도 했다. 그 신호탄은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佛氏雜辨)』이었다. 이전에도 불교의 무분별한 사찰 건립이나 정치 개입에 대한 유자들의 경계는 있었다. 그러나 정도전의 비판은 그런 차원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그는 불교의 세계관, 우주론, 형이상학, 수양론, 인간론, 도덕론을 모두 부정하며 이를 엄밀한 유교의 것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이런 일이 가능한 데에는 신유교를 받아들인 지식인들의 자신감에 있었다. 송대 신유교는 유교나 도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던 종교적 세계관을 자기완결적인 체계로 완성하려고 한 시도였다. 고려 왕조와 원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최적의 이념이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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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한승훈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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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21년 현재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다. 비교종교학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 종교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혁명을 기도하라』 (문주, 2012), 주요 논문으로 「미륵·용·성인」(『역사민속학』 33, 2010), 「개벽(開闢)과 개벽(改闢)」 (『종교와 문화』 34, 2018), 「종교 자료로서의 심문 기록」(『종교문화비평』 37, 2020) 등이 있다.
최근작 : <무당과 유생의 대결>,<혁명을 기도하라> … 총 3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조선의 종교개혁 과정에서 벌어진 성상파괴와 신들을 둘러싼 경쟁
이 책은 조선시대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된 종교개혁의 역동적인 과정을 살펴본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는 조선이 건국되는 시점에서 시작돼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진행되었다.
이 책은 두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종교사를 살펴본다. 우선 풍부한 이미지를 사용하던 고려시대의 종교가 어떻게 유교화 과정에서 성상파괴적 종교문화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알아본다. 산신이나 불상만이 아니라 유교 전통에서 성인으로 받드는 공자상마저 철거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의례 개혁의 중심부인 명나라보다 오히려 변방의 나라 조선에서 더 철저하게 성상파괴를 실천한 이유는 무엇일까? 1부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조선에서 진행된 유교화가 의례적, 실천적, 물질적인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치밀하게 살펴본다.
2부에서는 민속종교의 현장에서 유교화와 무속 배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본다. 중앙 권력과 한양에서 무속을 배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근대 국가의 통치력은 도성을 벗어나면 힘을 미치지 못했다.
민족종교의 무대에서는 예학의 논리가 먹히지도 않았고, 음사라고 비난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신들과 소통하고 죽은 자들을 위한 의례에서 무당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유자들은 무당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빼앗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에 맞서는 무당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 대결은 수백 년 뒤 군사정권 시절 ‘미신 타파’로까지 이어진다. 2부에서는 무당과 유생의 지난한 대결 과정을 생생하게 펼쳐 보여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종교사를 폭넓은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근대 한국 종교문화가 형성되고 변화해가는 모습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종교문화가 구성된 기반을 파악할 수 있다.
권위주의는 유교 탓, 기복주의는 무속 탓?
조선의 유교화 과정에서 벌어진 억압과 저항,
유교와 무속의 이중구조가 만들어진 배경을 탐구한다
건국과 함께 시작된 조선의 종교개혁과 성상파괴
흔히 한국의 제도종교는 ‘유교적’인 권위주의와 ‘무속적’인 기복주의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목사나 승려를 극진히 섬기는 가부장적 종교문화는 유교 탓이고,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학교 앞에서 합격을 비는 모습은 무속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저자는 이런 시각에 대해 인과관계가 거꾸로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한국 종교문화의 모습은 전통의 잔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한국 종교문화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됐을까?
이 책은 조선시대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된 종교개혁의 역동적인 과정을 살펴본다. 조선은 유교를 통해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 프로젝트는 조선이 건국되는 시점에서 시작돼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진행되었다. 저자는 정치, 사상,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이루어진 이 과정을 유교화라고 부른다.
유교화는 유럽의 기독교화에 대응되는 표현이다. 기독교화는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는 이단과 이교를 정복해나간 과정이다. 이교도 군주들을 개종시키고, 개인을 기독교화하기 위해 마녀사냥, 종교재판 등 폭력적인 과정이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유교는 그리스도교처럼 개종이나 배타적인 소속을 강요하지 않았다. 유자를 자처하면서도 불교와 도교식 의례나 수행을 양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송나라의 신유교가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유교가 국가의 제도와 의례 체계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신유교는 범위를 대폭 확장해 불교와 도교의 영역이던 수양론과 우주론까지 포괄했다. 이제 유자는 불교나 도교의 체계를 빌리지 않고도 수행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여말선초 유생들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
종교사의 관점에서 조선 건국은 신유교를 통한 유교화의 개시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교화의 의미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유교화는 사상적, 제도적 문제만이 아니라 문화 전반을 개조하려는 종교개혁에 가까웠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유생들은 왜 공자상을 파괴했을까?
유교화는 공식종교와 민속종교라는 두 개의 무대에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부에서는 풍부한 이미지를 사용하던 고려시대의 종교가 어떻게 유교화 과정에서 성상파괴적 종교문화로 바뀌게 되었는지를 알아본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산신이나 성황신의 신상을 진흙이나 나무, 금속으로 만들어서 모셨다. 신에게는 가족도 있어서 상으로 만들어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런 사당이 전국 곳곳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장소나 의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시대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이미지로 가득했던 신들의 거처가 파괴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유생들은 불교도 배척했다.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좋아할 수도 있고, 가족들은 불교 의례를 이어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교 국가의 왕궁 안에 불상이 있어서는 안 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유생들은 불상을 파괴하고, 신당을 불태우고, 신상을 부수어 내다버렸다. 성상파괴주의의 귀결은 유교의 가장 신성한 대상인 공자상의 철거였다. 개성과 평양에 남아 있던 유서 깊은 공자상은 국가에 의해 제거되었다. 상을 섬기는 것은 불교와 같으며, 그것은 오랑캐의 풍습이라는 논리였다.”
산신이나 불상만이 아니라 유교 전통에서 성인으로 받드는 공자상마저 철거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의례 개혁의 중심부인 명나라보다 오히려 변방의 나라 조선에서 더 철저하게 성상파괴를 실천한 이유는 무엇일까? 1부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조선에서 진행된 유교화가 의례적, 실천적, 물질적인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치밀하게 살펴본다.
유교화의 또 다른 목표는 무속타파였다. 우선 공식적인 국가 의례에서 무당이 배제되었다. 그리고 무당은 한양 밖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가뭄이나 왕족의 질병 같은 문제가 생기면 무당에게 의지해야 했다. 제도적 영역에서 무속을 완전히 배제하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결국 조선 후기에 이르면 공식종교 영역에서 무속적인 요소는 대부분 사라진다. 마침내 유교가 공식종교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누가 귀신을 다루는 데 더 유능한가?
신과 죽은 자를 둘러싼 무당과 선비의 팽팽한 대결
2부에서는 민속종교의 현장에서 유교화와 무속 배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본다. 유생들은 무당이란 음사를 일삼고 백성을 속이는 천박하고 미개한 존재라고 여겼다.
공식종교의 장에서 무속을 배제하고 추방하기는 했지만, 한동안 유교와 무속은 한동안 공존했다.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에 무당을 동원하는 정도로 무속은 제한적으로만 존재했다. 유교 예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점차 무속적 요소는 추방되었다.
같은 시기 민속종교의 장에서 벌어진 양상은 달랐다. 중앙 권력과 한양에서 무속을 배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근대 국가의 통치력은 도성을 벗어나면 힘을 미치지 못했다. 지방에서 벌어진 무속 탄압은 지방관과 재지사족이 주도했다. 유자들은 지역에서 문화적 지배력을 강화해 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이 영역은 무당과 술사 같은 민간 종교전문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서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유자들에게는 법적, 물리적 강제력이 없었다. 한쪽이 월등하게 우세하지 않다 보니 공식종교 무대에서 일어난 유교화보다 훨씬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지방관이 무속을 타파하는 방법은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제도적인 논의의 장에서 무속을 다루는 일반적인 방식은 경전의 전거와 과거의 전례를 통한 정도(正道)와 권도(權道) 사이의 저울질이었다. 그러나 지방관이 지역민들을 설득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식의 이론적, 예학적인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드러지는 것은 힘의 과시다. 무속의 타파는 대담하고 신속하고 폭력적일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신성모독을 일으킨 관리가 귀신의 보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권능이 무당의 귀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민족종교의 무대에서는 예학의 논리가 먹히지도 않았고, 음사라고 비난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신들과 소통하고 죽은 자들을 위한 의례에서 무당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유자들은 무당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빼앗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에 맞서는 무당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유생들은 무속을 타파하고자 시도했지만, 민중의 생활 속에서 무속은 유교로는 대체할 수 없는 종교적 기능을 담당했다. 이것이 유교와 무속의 이중구조라는 독특한 한국 종교문화의 구도를 만들어냈다. 2부에서는 무당과 유생의 지난한 대결 과정을 생생하게 펼쳐 보여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종교사를 폭넓은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근대 한국 종교문화가 형성되고 변화해가는 모습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종교문화가 구성된 기반을 이해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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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유교와 주술적인 무속의 통념을 깨고 민중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양자간의 대결구도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념의 차이이지 유교도 귀신에 대한 접근권을 지배하려 했다는 점을 포착한 것이 저자의 센스 같습니다.
梨谷書生 2022-04-0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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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1482호
조선 선비들이 무당과 경쟁한 이유
‘왜 광화문에 조선시대 인물들인가’라고 묻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무당과 유생의 대결>
등록 2023-10-04
<무당과 유생의 대결> 한승훈 지음, 사우 펴냄
“광화문광장을 조선시대 인물이 채우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우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23년 9월12일, 보수 성향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결성한 ‘문화자유행동’ 창립기념행사에서 최범 공동대표는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동상을 문제 삼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경향신문> 기자와의 통화에서 “세종이랑 이순신은 조선시대 사람이고 대한민국 사람은 아니지 않냐”며, 두 인물이 근대 공화국의 상징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해프닝이 최근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흉상 철거 움직임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심증’은 일단 걷어내고, 최대한 ‘선의’에 의거해 최 대표의 발언을 이해해보자. 화폐부터 광장까지 대한민국의 ‘얼굴’을 온통 조선시대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푸념은 진보 진영에서도 나왔던 만큼, 그의 문제의식 자체는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합리적인 것과 실현 가능한 것은 다른 문제겠지만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최 대표를 비롯한 이른바 ‘대한민국 국민주의자’들의 행보가 이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해 마지않는 조선시대 유자들과 놀랍도록 닮았다는 사실이다. 한승훈의 <무당과 유생의 대결>은 유럽의 종교개혁에 버금갈 유자들의 “성상파괴운동”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근대 공화국에 걸맞지 않은 ‘전근대적’ 상징물을 모두 치워버리려 드는 일부 보수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유학자들 역시 합리적인 신유교와 어울리지 않는 ‘미신적인’ 상징과 의례를 뜯어고치고자 했다. 고려시대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섬김을 받던 수많은 토착 신들은 이름과 형상을 뺏겼고, 제사 역시 표준화됐다. 심지어 유교의 큰 스승인 공자의 성상조차 신성함이라고 느낄 수 없는 신주로 교체됐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간 착실히 진행된 유자들의 종교개혁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은 국가가 주관하는 ‘공식 종교’의 영역에서 무속을 몰아냈지만, 그 바깥 ‘민속 종교’의 영역에선 무당이나 술사와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전래동화에서 귀신과 요괴를 무찌르는 주인공은 항상 ‘지나가던’ 선비라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유자들은 무당의 주술적 세계관을 깨부수기보다 자신이야말로 주술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
퇴마사가 되어버린 선비라는 결말은 자칫 조선은 겉은 유교인데 속은 무속이라는 뻔한, 다분히 멸시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이야기로의 회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합리적인’ 유생이 ‘미신적인’ 무당을 끝끝내 정복하지 못한 실패담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무당과 유생은 일상에 리듬과 질서를 부여하고, 신과 망자를 관장할 권리를 두고 대등하게 경쟁했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시민종교’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근대 공화국은 공동체를 통합하고 개인에게 의미를 제시할 의례와 상징체계를 필요로 한다. 문화자유행동이 불을 지핀 ‘역사전쟁’ 역시 국민주의를 신봉하는 근대적 우파와 종족주의를 숭배하는 전근대적 좌파의 대결이 아니다. ‘우리’의 기원과 범위를 놓고 벌어진, 서로 다른 시민종교 사이의 투쟁이다.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운지, 더 다양한 기억을 포용할 수 있는지는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다만 근대를 물신화하며 일체의 전근대적 요소를 지워버리려는 시도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근대교’를 신봉하는 21세기 유자들의 성상파괴운동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어디 한번 지켜보겠다.
유찬근 대학원생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