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2

도올 선생이 노자를 어떻게 해석하였길래...

 임원경제연구소 자유게시판 - 도올 선생이 노자를 어떻게 해석하였길래...


도올 선생이 노자를 어떻게 해석하였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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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7 11:48:31
자호*.197.80.5
http://www.imwon.net/12447
 

도올 선생의 ebs 중용 강의 중단 사태에서 비롯된 광화문에서의 1인 시위와 '나는 꼼수다' 출연 등 여러 가지가 궁금하여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네이버 ‘지식in’에서 아래와 같은 질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도올 선생이 노자를 어떻게 해석하였길래...

요즈음 철학을 하는 사람 가운데 도올 선생 만큼 비판을 많이 받는 학자도 없을 듯 합니다.

<노자> 첫 구절도 해석할 줄 모른다는 비판글을 보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석했길래 그러한 비판을 받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아래 글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올린 것입니다. (2011.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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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아래의 현행 왕필본 <노자>의 첫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에 대한 글은 기본적으로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노자>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도올 선생의 <노자> 해석은 그만의 독창적인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 기존의 <노자> 해석을 검토한 결과입니다.

 

김용옥 선생의 <노자>를 극렬하게 비판한 사람은 2000년 <노자를 웃긴 남자>와 2004년 <완역이경숙도덕경>을 쓴 이경숙입니다. 이 책들은 중앙일보의 배영대 출판담당기자를 중심으로 <노자>에 무지한 여러 일간지 기자들의 선전에 힘입어 <노자>에 대한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는 책으로 평가받았으나 실제로는 쓰레기만도 못한 책입니다. 이 일은 21세기 한국의 인문학의 실상을 말해주는 황당하고도 슬픈 사건입니다.

<노자를 웃긴 남자>가 나온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을 근거로 하여 도올 선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분들은 자기가 <노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과, 허황된 말을 믿고 남을 비방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제가 증명한 글이 있습니다
. --> blog.naver.com/jaseng54  (노바당의 취미 생활/ <완역 이경숙 도덕경> 비판 )

이경숙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인간인지, 그리고 이런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농락당했는지 아시게 될 것 입니다.그리고 이런 사람의 책을 띄워준 중앙일간지 출판담당 신문 기자들의 수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상당히 길고 어려운 듯 보이지만 평소에 <노자>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인 견해입니다.

구름은 이경숙의 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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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노자>와 노바당 / ‘도가도비상도’ 비교 해설

글쓴이 : 노바당

['구름의 말‘이라는 아래의 글은 제가 쓴 ‘<완역 이경숙 도덕경> 비판’에 대한 이경숙의 반응입니다. 이경숙은 제 비판에 대한 반론은 없이, <노바당 가르치기>라는 <노자> 번역과는 무관한 황당한 장문의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은 이경숙의 ‘구름타운’ 사이트인 cloudstown.kr이나, 안티사이트인 paxkonet.com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구름의 말

지가 옳다고 우기는 것까지는 허용되겠으나 다른 사람이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것을 방해하려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학설의 범주를 벗어나는 인신공격이나 명예훼손을 하여서도 안됩니다. 내가 도올의 노자강의를 비판하여 책을 두권을 썼고 그리고 다소 과한 표현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 비판의 대상은 도올의 강의내용에 국한된 것이었지, 강의의 내용을 벗어나는 신상에 대한 문제나 도올의 행적이나 그의 생활이나, 그의 가족관계나, 아니면 여자관계나 재산관계나 기타 등등 노자의 해석에서 벗어난 어떤 비판이나 비방도 없었다는 사실을 노바당은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런 것을 구름한테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노바당

말은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구름의 신상문제, 행적, 생활이나 가족관계, 남자관계, 재산문제 등등을 들어 구름을 비판하거나 비방한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오겹이니, 반찬집중이니 하면서 구름을 비난할 때 말리지 못한 잘못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체적 문제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여 비방한다는 것은 저 역시 가장 싫어합니다.

저는 <노자를 웃긴 남자>가 나왔을 때 인터넷에서 <노자> 1장에서 3장까지의 구름 해설을 보고 구역질이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2004년 <완역 이경숙 도덕경>이 나왔을 때 <노웃남>을 기록 확보를 위해 구입해 두었으나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구름이 <노자를 웃긴 남자>에서 도올에 대해 강의 내용에 대해서만 비판했지 인신공격도 명예훼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구역질났던 제 기억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고통스럽지만 확인을 위해 <노자를 웃긴 남자>를 읽어 보기로 했습니다. (20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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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를 웃긴 남자>의 ‘도가도비상도’ 해석 비판

구름은 한문 해석이나 <노자>에 대해 2000년 이상에 걸쳐 연구한 동양학자들이 다 틀리고 자기만 옳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전문가의 책을 참고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디에 이렇게 써 있다'고 해 봐야 구름이 '그거 다 틀렸다니까' 하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름 글의 오류와 황당함을 그 자체에서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제 <노자를 웃긴 남자>의 <노자> 1장 번역과 해설을 봤습니다.

그런데...

전에 생각한 것보다 구름의 도올에 대한 비하나 욕설이 참을 만 했습니다. 작년부터 이곳 저곳에서 본 구름의 글에 단련되어 이제는 그런 정도는 보통이 된 모양입니다. 그리고 <노웃남>의 <노자> 1장 부분을 읽어보니 당시 구름의 글을 보고 구역질났던 것은 도올에 대한 비하 때문만이 아니라, 구름의 자신감 넘치는, 그러나 개판인 <노자> 번역과 해설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후에 알고 보니 이씨의 책은 출판사에서 인터넷 판보다 욕설과 비하를 많이 순화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기질적으로 도가(道家)라고 생각합니다. <노자>, <장자>, <열자> 등 도가서를 읽으면 마음이 편하고, 그래서 이 책들을 30여년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그 내용들을 모두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처음 <노자>를 접한 것은 1970년대 초에 대학 입학하고서 입니다. 을류문화사의 문고판 <노자 도덕경/ 남만성> 을 읽었는데 지금도 그 때 현행본 <노자>의 1장 첫부분, '도가도, 비상도:'의 뜻을 알기 어려워서 애쓴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노자>의 그 유명한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부분을 <노웃남>의 해설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이 구절은 현행 왕필본 <노자>에서는 책의 제일 앞, <노자> 81장 중 제1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 알 듯 모를 듯한 구절로 시작되는 1장 전체가 상당히 철학적인 것 같고, 모호한 것 같은 소리로 되어 있어서 <노자> 전체가 어렵고 심오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 점은 전문가들이 옳건 그르건 자기가 이해한 대로 선명하게 해설을 하지 않고 애매하게 넘어가는 데서도 기인합니다.


<노자> 70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오언심이지, 심이행; 천하막능지, 막능행.

 

내 말은 정말 알기도 쉽고, 행하기도 쉽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으니, 행하기는 더욱 어렵다.

 

 

노자 자신이 <노자>에 나오는 자기의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고, <노자>라는 책 자체가 철학 연구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사회(천하)에 도움이 될 실제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쓰여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거 2000년간의 <노자> 번역이나 해석이 다 틀리고, 자신의 번역만이 옳다고 하는 구름의 말은 비상식적이고 과대망상적입니다.

그렇다고 <노자>가 한문을 안다고 해서 아무나 읽으면 이해할 수는 없고, 도가적 세계관과 사고방식의 이해라는 얼마간의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전 지식이 없이 <노자>를 읽는다면 암호문을 해독하게 되거나, 구름식의 황당한 해석과 번역을 하게 됩니다. 구름의 경우에는 <노자>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한문 해독이 불가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실 <노자> 번역에 대해서는 비판할 것도 없습니다. 한문을 못 읽는 사람이 어떻게 한문 <노자>를 번역합니까?

<노자> 책이 쓰여진 선진시대(진시황 이전, 약 2,200년 이전)에도 <노자>는 읽기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노자가 '내 말은 쉽다'는데, <노자> 책은 어렵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노자>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보면 쉬울 수 있지만 처음 접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고, <노자>가 대부분 간결한 구절로 되어 있어서 해석의 폭이 넓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 2000년 간 중국에서만 해도 <노자> 주해서가 수천 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번역이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제가 일 년 전(2007. 04)에 지금 <이경숙과 노자>라고 돼있는 <완역 이경숙 도덕경>의 비판글을 쓰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당시에 우연히 인터넷에서 도올에 대한 평을 쓴 글을 보게 됐는데 다른 부분은 모르겠으나, <노자>에 대해서는 이경숙의 번역이 이해하기 쉬워서 다른 번역보다 좋은 것 같다는 말씀이 제 맘에 걸렸습니다.

이 분 때문에 제가 하루밤 새가면서 글을 써서 현행본 <노자> 14장의 '시지불견(視之不見)에 대한 구름의 엉터리 한문 실력을 증명하였지만, 그 글로도 납득을 못하는 것 같아서 A4 용지 10포인트로 47페이지나 되는 글 <이경숙과 노자/ 주석 포함>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의 글은 블로그 '미닉스의 작은 이야기들'( http://minix.tistory.com) 에 실려있는 <내 안의 사람들/ 도올 김용옥 편> 이고, 거기에 이 분이 저에게 쓰신 <노바당님께>라는 <노자> 번역에 대한 글도 있습니다. 이글들은 제 블로그에도 올려 놓았습니다. (blog.naver.com/jaseng54) 그 때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 좋은 번역인가'에 대해 제가 짧게 답변을 한 것을 옮깁니다.(보기 낫게 칸만 바꾸었습니다.)


"오늘에야 이 글(<노바당님께>)을 봤습니다. 제가 그동안 올린 글(<이경숙과 노자>)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면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십시오.

 

그리고 김선생님은 번역이라는 것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알아먹는 번역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100%의 쉬운 번역은 불가능합니다.

 

<노자>는 당시(선진시대)의 사람들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천재(한비자, 장자, 여씨춘추, 한나라의 회남자)의 해설이 있었고 지금까지 중국에서만 1000종이 넘는 주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1장 '당기무'를 번역하면 '그 비어있음에'라는 이상의 번역은 없습니다. 그 비어있음이 뭐냐, 뭐가 비어있는거냐 하는 것은 해석이고 해설입니다. 번역문은 해설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쉽게 이해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씨의 번역문을 해설없이 원문만 읽어 보십시요. 그래도 쉽게 이해가 가실런지, 무슨 말인지 아실런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저 도올 수호하는 사람아닙니다. <노자> 수호라면 몰라도요.

번역문만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노자>는 없습니다. 11장에서 제가 최고급마차, 인테리어 어쩌고 한 것은 번역이 아니고, 그냥 그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는 해설입니다. 번역은 책 뒤에 있는 그것입니다. 우연히 미닉스님을 만나 다시 <노자>를 읽게되어 고맙습니다. 원래 전의 책(<노자 제대로 읽기>)은 인터넷에 있던 것을 출판사에서 급히 만들어주어 부족한게 많습니다. 그래서 올해 개정판을 내려 하고 있었습니다. 좁은데 쓰려니 어렵군요. 연락주십시요. jaseng54@naver.com "

한문으로 된 <노자>는 한문 사용자였던 고대 중국인들에게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주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문 '道可道, 非常道;'와 등가로 번역된 한글 번역문이 쉬울 수 있습니까? 그건 어떤 사상을 표현하는데 한글이 한문보다 쉽다는 우리나라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한문 <노자>가 중국 사람에게 어려우면, 한글 번역문 <노자>도 한국 사람에게 어려운 것입니다.

구름의 <노자> 번역문이 이해하기 쉬웠다고 하는 분들은 <노자>를 읽고 알아먹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제로는 글빨좋은 구름의 창작 동화를 읽은 것입니다. <노자>나 도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노자>의 원문이건, 번역문이건 간에 한번 읽어서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2007.04.17)

현행본 <노자> 1장의 시작 부분인 '道可道非常道'는 쉬운 한자 6자로 돼있고, '길 도(道)' 자가 3자나 포함된 간단하지만 완전한 문장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도 확실한 것입니다. 구름이 '문장 성립이 안되고,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하는 도올의 번역과 구름의 번역을 비교해 봅시다.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도올: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노자와 21세기>

 

구름: 도(는 그 이름을)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노자를 웃긴 남자>

 

 

저는 <노자>를 많이 읽어서 도올의 말을 알아 듣지만 처음 <노자>를 접하는 분들은 도올의 번역이 무슨 소린가 할 수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구름의 번역은 괄호까지 쳐가며 설명을 해 놓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됩니다. 구름의 말을 들어봅시다.

 

 

"노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이름을 '도(道)' 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도(道)' 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道)' 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구름)

 

 

한 마디로 노자가 어떤 x를 도라 불렀지만 다른 것으로 불러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이 도에 대한 설명이 아니고, 도라는 이름에 매이지 말라는 작명법 상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맞느냐 하는 것은 조금 있다가 알아보고, 구름이 앞에 인용한 글의 다음 페이지에서는 반복하여 노자가 '도'라는 것은 그냥 이름일 뿐이고 그것(이름)은 꼭 도가 아니어도 무방하다'는 의미라면서도 도올이 도를 '길' 또는 영어로 'WAY'라 한 것은 촌극이며 개그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를 조선말로 번역하면 '도'가 되고 영어로 옮기면 'TAO'가 된다. 이것을 '길'이라거나 'WAY'라고 번역하는 인간은 노자가 뭔지도 모르는 인간이다."(구름)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나 'TAO'라고 번역한 것은 음역, '길'이나 'WAY'라고 번역한 것을 훈역이라고 합니다. 불경이나, <노자> 같은 글을 처음 번역을 할 때 그 번역문을 읽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는 중요한 낱말을 음역을 하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뜻의 차이가 있더라도(어차피 언어 간에 100%의 동일성은 없음) 의미를 알기 쉽게 훈역을 하게 됩니다. 그 후 그런 사상이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면 중요한 낱말은 음역을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으므로 훈역보다 음역을 선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구름이 가르친다는 <중론>을 지은 용수(龍樹)의 원 이름은 나가르주나(nagarjuna/ 산스크리트어 주음부호 생략)이고, 나가(naga)는 용을, 아가르주나(agarjuna)는 나무를 뜻합니다. 용수(龍樹)는 '용 용'자와 '나무 수'자를 썼으므로 한문을 아는 사람은 그 이름이 '용과 나무' 또는 '용같이 생긴 나무'라는 뜻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음역하면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구름의 말대로 <노자>의 '도'를 꼭 우리 말로 '도'나 ,영어로 'TAO'로 음역해야 한다면 저도 '중론'이니 '용수'니 하고 훈역한 번역어를 쓰지 말아야 합니다.

 

용수가 지은 <대지도론(大智度論)/ 구마라집 한역>이 있는데 여기서 '대지도'라는 말이 '큰/지혜/건너간다('법도 도'는 '건너다'라는 뜻도 있습니다)'는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줄여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인 'maha prajnaparamita(마하 쁘라즈냐빠라미따)'의 중국말 음역인데 그 음역만으로는 그 뜻을 알 수 없지만, '대지도'라고 훈역을 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maha - 크다 - 大(클 대) - 摩詞(마하)

prajna - 지혜 - 智(지혜 지) - 般若(반야)

para/mita - 피안/ 건너다, 도달하다 - 度(건널 도) - 波羅/密多(바라밀다) 

음역이 좋으냐, 훈역(의역)이 좋으냐는 정해진 것이 아니고 번역된 글을 읽는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의 문제는 이런게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는 노자가 도라는 말에 매이지 말라고 했다면서, 또 도를 '깨달음', 섭리', '법칙'이라 해도 좋다고 했다면서, '길'이면 어떻고, 'WAY'면 어떻다고 그렇게 따집니까? 한마디로 제 말로는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x를 아무 걸로나 불러도 된다고 하면서...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에 대한 도올 번역은 좋은 번역이며, 저는 그 뜻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된 도는 나(노자)의 도가 아니다."(2008.04.18)

 

 

이제는,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노자>와는 상관없는 구름의 바른 번역(<노자를 웃긴 남자>에 그렇게 쓰여 있음), 쉬운 번역을 치우고 도올의 번역이 말이 되는가 봅시다.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도올 번역;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저는 도올 번역이 맞지만 표현상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道可道非常道'라는 짧지만 완전한 문장에 '길 도' 자가 3개나 있고, 나머지 '가할 가', '아닐 비', '항상 상' 자도 쉬운 한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번역이 <노자> 책마다 그렇게 다르며, 어떤 것은 완전히 틀리기도 하는 것일까요?

 

이 문장에는 3개의 '도'자가 있지만 그 의미는 다 다릅니다. 특히 가운데 '도' 자는 '길'이라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고, '말하다(to speak of)'라는 동사입니다. 이 점을 일반적인 <노자> 해설자들이 확실히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장이 어렵다고 인식된 것입니다. <노자> 번역서 중에서 이 '도' 자를 '말하다' 또는 '말로 표현하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지 않은 책은 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중국어는 단음절어로 발음의 개수가 400가지 정도고, 사성(四聲)을 포함해도 1,200가지 정도 밖에 안 됩니다. 노자 당대에도 요즘의 중국어 발음과 같이 성조(聲調)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道可道非常道'라는 글에서 3개의 '도' 자가 문자 형상은 동일하지만 가운데 '말할 도' 자의 발음(성조)은 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 고전에서 '도(道)' 자의 '말할 도'라는 훈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유가의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들어있는 <시경(詩經)>과 <대학(大學)>, 그리고 도가의 해설서라고 할 수있는 <회남자(淮南子)>에서 인용합니다.

 

 

<시경/ 용풍(鄘風)/ 장유자(牆有茨)>

牆有茨, 不可掃也; 中冓之言, 不可道也; 所以道也, 言之醜也.

장유자, 불가소야; 중구지언, 불가도야; 소이도야, 언지추야.

 

담장의 찔레는 쓸어버릴 수 없어;

방안의 얘기는 말할 수 없어;

말이야 해도 된다지만 말하면 추한거야.

 

 

<대학>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여절여차자, 도학야; 여탁여마자, 자수야.

 

깍은 듯 다듬은 듯하다는 것은 배움을 말하고, 쪼은 듯 간 듯 하다는 것은 스스로 닦음이다.

 

 

<회남자/ 원도훈(原道訓)>

是故不道之道, 莽乎大哉. 시고부도지도, 망호대재.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는 아득하고 크다.

 

 

<회남자 주(注)> (위 문장에 대한 주입니다)

道不可道, 故曰不道之道. 도불가도, 고왈부도지도.

 

도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도지도'라 하는 것이다.

 

 

<장자/ 내편/ 지북유(知北遊; 앎이 북쪽으로 놀러가다)>에 '도가도비상도'에 대한 명확한 표현이 있습니다.

 

道不可言, 言而非也. 도불가언, 언이비야.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하면 도가 아닌 것이다.

 

 


<회남자 주>; '도불가도(道)' = <장자> '도불가언(言)'

 

즉, '도' = '언' = '말하다'

 

 

그래서 앞편에서 제가 '도가도, 비상도;'의 뜻(번역이 아니라)이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된 도는 나의 도(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라고 단정지어 말한 것입니다.

 

 


유가의 '정명(正名)' 사상은 사물에 이름, 즉 어떤 일정한 지위(placement)를 부여하고 그 위치를 고정화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변화(change)와 자발성(spontaneity)을 중시하는 도가는 이름, 즉 언어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습니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말 잘하는 자, 글빨 좋은 자의 지(知)와 행(行)에 대한 의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장자는 '이름이라는 것은 실재의 손님이다.(名者, 實之賓也. 명자, 실지빈야. <장자/ 내편/ 소요유>)'라고 말합니다. 내가 주인이고 내 이름은 손님입니다.

 

<장자/ 내편/ 제물론>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도은어소성, 언은어영화.

 

도는 조그만 성공에 감춰지고, 말은 화려함에 감춰진다.

 

 

다시 도올 번역을 봅시다.

 

 

도올 번역;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도올의 번역 중 '도라고 말하면'이라 되어 있는 부분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냥 '가할 가, 말할 도'라는 훈대로 '말한다면'이라 했으면 오해는 없겠지만, 제가 보기에 문장의 흐름상 '도라고' 라는 표현을 추가하여 어감을 좋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의 '도' 자를 '말할 도'라고 해석하면 '도가도, 비상도;'는 어려울 것이 없는 문장입니다. 저는 1장 첫 구절인 '도가도, 비상도;'의 뜻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도는 알 수는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도니 뭐니 하며 떠들어 대는 것은 가짜다. 그것은 늘 그러한 노자의 도가 아니다.'

 

노바당 번역; 도를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예전부터 노자는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서 왜 도에 대해 5000자가 넘는 글을 썼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런 의문의 대표자가 장한가(長恨歌)를 지은 당나라 대시인인 백거이(白居易)입니다. 백거이는 <노자> 56장의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를 빗대어 시를 지어 노자를 비꼬았습니다.

 

 

言者不智智者默, 此語吾聞諸老君. 언자부지지자묵, 차어오문저노군.

若道老君是智者, 如何自著五千言? 약도노군시지자, 여하자저오천언?

 

말하는 자는 모르고, 아는 자는 침묵한다. 나는 이 말을 노자에게서 들었다.

만약 노자가 도를 정말 안다면, 어찌 스스로 <도덕경>을 지었겠는가?

 

 

<노자>를 어중간하게 알거나, <노자>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지만, 이 의문은 노자가 관련 있는 여러 의미를 표현하는데 하나의 한자(이 경우 '길 도(道)'자)를 사용한다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이점은 노자 당시에 사용되던 한자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노자>에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도 있습니다. 그리고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도'도 노자의 방식, 대체로 부정적인 표현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름의 말대로 노자가 어떤 x를 표현하는데 '길 도(道)' 자를 임의로 골라 쓴 것이 아닙니다. 노자는 자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무엇이 '길'의 이미지에 비교적 부합하여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길'이라는 의미의 '도(道)'라는 글자를 쓴 것입니다. '길 도(道)' 자는 다른 학파에서도 모두 쓰는 일반적 표현이고, 주로 도덕적 원칙이나 정치적 원칙이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노자>에서는 그런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역사적 경험에서 얻은 도의 의미보다, 주로 자연(천지)의 관찰에서 얻은 '천도(天道; 자연의 길)'라는 의미를 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노자는 '천도'에 배치되지 않는 인간사의 지혜라는 의미의 '인도(人道; 사람의 길)와 '천도'를 포함하며 그것들의 근거가 되는 무엇까지도 '도(道)'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노자>의 '도(道)'는 개인(人)과 사회(天下), 그리고 자연(天地)를 관통하는 '길'입니다. (2007.04.18)

 

 

['도가도비상도'라는 단 6글자로 된 간단한 문장에 대해 지금까지 쓴 글의 몇 배는 더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노자> 5000자를 언제 다 읽느냐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이 6자를 넘어가면 1장 전체를 이해하기 쉽고, 1장을 넘어가면 <노자> 81장의 절반은 읽은 셈이 됩니다. 허풍 치는 게 아닙니다. 도가(道家)의 기본 사고방식을 알면 <노자>는 어려운 게 아닙니다. 저는 생기는 거 없어도 평소에 <노자>를 읽기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한 번 더 읽는 셈 칩니다.]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도가도, 비상도;'에서 가운데 '도' 자가 '말하다'라는 뜻이란 것을 알았으므로 이제는 나머지 두개의 '길'이라는 의미의 '도(道)' 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제가 앞에서 이 두개의 '도' 자도 그 의미가 다르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도' 자는 구체적으로는 노자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는 '도', 대체로 다른 학파들의 '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반화해서 말하면 어떤 식으로 파악했던 간에 자기가 주장하는 진리 체계의 근거로서의 어떤 x를 말합니다. 즉, '도가도, 비상도;'의 맨 처음 '도' 는 대체로 개인적 통찰이나 깨달음에서 얻은 어떤 x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통찰이나 깨달음은 대체로 뭔가 정신적으로 중요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눈을 감고 오래 앉아 있거나,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미친듯이 계속 떠들거나 중얼거리고, 남들이 보면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허가되지 않은 약을 먹거나 해서 오는 뇌의 반응, 즉 사람들이 뭘 봤다, 뭘 깨달았다 할 때의 그 무엇을 말합니다.

 

그 무엇은 나보다 엄청 큰 어떤 것과의 일체감, 세상 모든 것과의 동질감, 내가 없어진 듯한 느낌 등으로 표현되고 보통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깨달음은 일상적인 의식과는 다른 의식 상태, 그리고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하고 본인에게 큰 희열감을 주지만, 그 경험 사실 만을 말할 수 있을 뿐 경험 자체의 내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은 사실이고, 여러 사람과 지역에서 비교적 공통적이기는 하지만 그 당사자의 과거 경험이나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동일한 경험도 그 해석과 의미 부여에 문화적 차이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무엇을 지역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에 따라 '신(god)',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브라만', '하나(one)', '전체(wholeness)', '도(道)', '깨달음(覺)' 등으로 부르고, 크게는 인류 공통의 경험으로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건너기 어려운 엄청난 간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대체로 개인과, 개인들이 조직화된 사회와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런 개인적 깨달음의 경험도 정도의 차이가 있고, 작은 통찰을 궁극적 깨달음(이런 게 있다 치고)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인간 사회에 대한 깊은 생각없이 이런 개인적인 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조직화 되었을 때의 문제점과 부작용은 심각합니다. 이런 점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성 종교를 포함한 온갖 사이비 종교가 횡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라는 말을 전에는 겉만 번드르르한 가짜에 속지말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는데, 요즘은 초보 깨달음, 사이비 깨달음을 경계하라는 종교적 금언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여러 종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상태의 깨달음을 얻어도 결코 지금보다 좋은 사회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일 수밖에 없고, 개인과 사회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으나 인류 역사상 이 정도의 사회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람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 개선이 가능한 사회적 체계인 법과 제도, 그리고 그것을 받침하는 과학과 기술 발달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노자가 개인과 사회의 관계, 특히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사용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노자>는 '자연(nature)으로 돌아가자' 류의 사상이 아닙니다.

 

 

<노자>에는 형이상학적 부분과 양생술에 대한 내용이 있지만 이런 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노자> 사상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전체적으로는 사회 철학이며, 당시의 최고 정치적, 군사적 실력자(성인/ 후왕/ 대자)의 리더십과 권력 사용에 대한 책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같은 도가라도 <노자>와 <장자>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우리나라의 종교적 사이비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기 때문에 '뭘 봤다'는 부분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썼으나, <노자>에도 '깨달음'에 대해 쓰여 진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 어떤 x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늘 그러한' 노자의 '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어떤 x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해서 그것이 노자의 '도'와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늘 그러한 도'는 다릅니다. 이제는 그 '도'가 무얼 말하는지 알아봅시다. (2008.04.19)

 

 

제가 인용한 왕필본 <노자> 1장의 시작 부분의 한문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에는 띄어쓰기가 되어 있고, 방점(傍點/ 문장부호)이 붙어 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에는 쉼표와 세미콜론이 붙어 있는데, 이것만 봐도 번역자가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미콜론은 하나의 문장 다음에 문장 구조가 같은 대비되는 문장이 있을 때 씁니다. '도가도비상도' 다음에는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이라는 대비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왕필본 <노자>는 띄어쓰기와 방점이 없이 장과 절의 구별 만 되어 있습니다. 화정장씨본(華亭張氏本)의 영인본 <노자 왕필 주>를 보면 <노자 도덕경> 상편, 1장 "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명'이라는 원문이 있고, 그 밑에 작은 글씨 2줄로 '가도지도지사조형비기상야고불가도불가명야'라는 해설(주)이 붙어 있습니다. 왕필(223~249)의 주를 보면 노자 시대로 부터 500년 이상 지난 시기의 왕필도 '도가도비상도'의 가운데 '도' 자를 말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可道之道, 指事造形, 非其常也. 故不可道, 不可名也.

가도지도, 지사조형, 비기상야. 고불가도, 불가명야.

 

말할 수 있는 도는 사건과 사물을 가리키고, 이르는 것으로 항상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지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노바당 역)

 

 

왕필은 주로 <노자>의 철학적 의미를 해설하였습니다. 왕필이 살았던 시대는 한(漢)나라가 망한 후 우리가 잘 아는 유비, 조조가 활약했던 삼국시대의 혼란기를 겪은 지식인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사회 도피적인 정신적 만족을 위해 <주역)>, <노자>, <장자>를 높히 평가하여 공부하였고, 그 중 사회적인 문제보다 형이상학적 부분과 개인의 정신적 자유에 대한 부분을 중시하였습니다. 이 세가지 학문을 후에 삼현학(三玄學; 뜻이 깊은 세가지 학문)이라 하고 왕필도 이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현(玄)' 자는 물론 <노자>에서 빌린 것입니다. 우리가 소설 삼국지(三國誌)로 잘 아는 유비(劉備)의 자(字)가 <노자>10장, 51장, 65장에 나오는 말인 '현덕(玄德)'이어서 후한말부터 위진시대에 이르는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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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화정장씨본 <노자 왕필 주>의 1장 부분입니다. 큰 글씨가 <노자> 원문이고 두줄로 된 작은 글씨가 왕필의 해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보는 대부분의 <노자> 번역본의 원문이 이 책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BC 300년 이전에 쓰여진 곽점 <노자>(1993년 발견)와 BC 200년 경에 쓰여진 마왕퇴 백서 <노자> 갑, 을본(1973년 발견)을 볼 수 있어서 <노자>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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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국 문헌에서의 피휘(避諱)에 대해서 <노자>와 관계된 몇 가지 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의 왕필본 그림 왼쪽 페이지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同謂之元, 元之又元, 衆妙之門. 동위지원, 원지우원, 중묘지문.

같이 일러 가믈타 한다. 가믈하고 또 가믈하니 뭇 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노바당 역)

 

 

위 번역 중 '가믈하다'고 번역한 '원(元)' 자의 원 글자는 '검을 현(玄)' 자입니다. '검을 현' 자는 '검을 흑(黑)' 자와는 뉴앙스가 달라서 깊어서 검게 보인다는 뜻인데 이 '현' 자 대신 '원' 자를 쓴 것입니다.

 

 

피휘라는 것은 주로 글을 쓸 때 황제나 왕의 이름을 피하는 것입니다. 화정장씨본 <노자 왕필 주>는 명나라 때 판각되었으나, 그 때나 그 후 언젠지는 몰라도 출판시 몇 대에 걸친 황제의 이름에 '현(玄)' 자가 들어 있어서 다른 글자인 '원(元)' 자로 바꾼 것입니다. 그 황제의 시대가 오래 지나면 다시 원래 글자로 되돌리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저는 지금과 가까운 시대인 청나라의 건륭제의 이름인 '현엽(玄燁)'을 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긴 제가 기억하는(전에는 여럿 알았을지도 모름) 황제의 이름 중 '현(玄)' 자가 들어 간 사람은 건륭제 밖에는 없습니다.

 

피휘는 마왕퇴 백서의 성립 연대를 밝히는데에도 중요합니다. 먼저 쓰여진 갑본의 경우 한고조인 유방(劉邦)의 이름인 '나라 방(邦)' 자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갑본에는 현행본 <노자>에 나오는 '나라 국(國)' 자가 모두 '방(邦)' 자로 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유방이 황제가 되기 이전에 성립되었고, 글씨체를 고려하면 전국시대 말까지는 쓰여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을본의 경우는 당시의 피휘가 당대 황제에게만 적용되었는데 '나라 방' 자가 '나라 국' 자로 바뀌어 있어서 적어도 유방이 죽은 BC 195년 이전에 성립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뀐 글자가 원 뜻과 거의 같으면 바뀐대로 둔 경우가 많고, 비슷한 뜻의 글자가 없어서 전혀 글자로 바뀐 경우는 원 글자로 되돌린 경우가 많습니다.

 

'도가도, 비상도;'의 경우 원래는 '상(常)' 자 대신 '항(恒)' 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상(常)'자도 한문제(文帝) 유항(劉恒)의 이름자인 '항(恒)' 자를 피한 것인데 이 경우는 '항' 자나 '상' 자나 그게 그 뜻이라 지금도 '상' 자를 그대로 쓰는 것 입니다. 다시 '도가도, 비상도;'로 돌아가 봅시다. (2008.04.20)

 

 


'道可道, 非常道; 도가도, 비상도;'

 

 

이제는 '도가도, 비상도;'에서 세번 째의 도 자, 제가 '노자의 도(道)'라고 부른 바로 그 도 자에 대해 알아봅시다. '아닐 비(非)' 자는 부정사니까 문제될 것이 없고, '항상 상(常)' 자를 큰 의미를 두어 설명을 길게 하기도 하는데 저는 별 의미 없다고 봅니다. 그냥 노자의 도의 한가지 특징, 즉 지속성을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상 자를 '불변의', 또는 '영원한' 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좋지 않고, 그냥 우리 말로 '늘 그러한' 또는 '항상된'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노자는 변화와 한계의 철학으로, 절대성, 완전성, 영원불변을 말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노자>에 나오는 도 자에는 여러 의미를 있고, 말할 수 없는 도도 있고, 말할 수 있는 도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의미는 크게 보아 3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만물을 낳고 기르는 노자가 파악한 실재하는 무엇(말할 수 없음) = 도(道)

 

2. 자연의 원리(말할 수 있음) = 천도(天道) = 도(道)

 

3. 인간 사회에 대한 노자의 지혜(말할 수 있음) = 인도(人道) = 도(道)

 

 

1번의 도에 관심을 기울이면 종교적 수행이나 명상 등 개인적 깨달음을 강조하게 됩니다. 2번의 도를 추구하면 현대의 과학과는 다르지만 자연에 대한 관찰과, 자연 변화의 패턴과 원리를 강조하게 됩니다. 3번의 도를 추구하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내용을 강조하게 됩니다. 그러나 <노자>에서는 이 세가지의 의미가 분리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의미 중 어느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것은 노자의 사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세가지 의미의 도를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 <노자>를 설명하는 데서 <노자> 이해의 혼란이 가중됩니다.

 

도가는 우선 자연을 깊히 관찰하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얻은 지혜, 즉 천도(天道; 자연의 길)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천도에 배치되지 않는 인간사의 지혜라는 의미의 인도(人道; 사람의 길)와 '천도'를 포함하며 그것들의 근거가 되는 무엇까지도 '도(道)'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노자> 사상이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 들어봐도 그럴 듯하고, 어떤 상황에도 적용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노자가 개인(人)과 사회(天下), 그리고 자연(天地)를 관통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자의 도를 이렇게 3가지로 분류한 것은 제 작품이 아니고 대만대학과 북경대학 교수였던 <노장 전문가> 진고응의 분류입니다. 진고응에 대해서는 제가 쓴 <이경숙과 노자>의 서문에 소개하였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 있는 <노자> 번역서와 해설서를 대부분 보았고 중국책과 영어 <노자>번역서도 여러 권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크게 배운 책은 진고응의 <노자주역급평개(홍콩 중화서국>인데 지금 책을 펴보니 1991년4월13일에 구입했군요. 이 책은 지금은 그 최신 개정판이 <노자금주금역(북경 상무인서관/ 2003)>으로 나와 있고, 그 이전 개정판을 우리나라 영남대학교 출판부에서 2004년에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라는 번역하여 출판했습니다.

 

저는 <노자>를 좀 더 깊이 알고자한다면 진고응의 책을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노장신론>과 <주역/ 유가의 철학인가 도가의 철학인가>가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진고응의 분류를 소개합니다. 진고응은 <노자>에 나오는 모든 도(道) 자를 <노자금주금역>에 이 기준에 따라 분류해 놓았습니다.

 

 

'道'的各種意義 '도'적 각종 의의

 

1) 實存意義的'道' 실존의의적 '도'

甲, '道'體的描述 갑, '도'체적 묘술

乙, 宇宙的生成 을, 우주적 생성

 


2) 規律性的'道 ' 규율성적 '도'

甲, 對立轉化的規律 갑, 대립전화적 규율

乙, 循環運動的規律 을, 순환운동적 규율

 

3) 生活準則的'道' 생활준칙적 '도'

 

 

위의 분류 중 '실존의의적 도'라고 하는 것이 노자가 말할 수 없다고 한 '도가도, 비상도;'의 마지막 도 자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도는 말할 수 없다고 해서 노자가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이것을 표현하는 노자의 방식이 있습니다. 몇 군데 예를 들어 봅시다.

 

 


<노자> 14장

視之不見, 名曰夷; 시지불견, 명왈이;

聽之不聞, 名曰希; 청지불문, 명왈희;

搏之不得, 名曰微. 박지부득, 명왈미.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차삼자, 불가치힐, 고혼이위일.

 

보려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름하여 '이'라 한다.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이름하여 '희'라 한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니 이름하여 '미'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말로 따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섞여 있어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노바당 역)

 

 

여기에 나오는 '시지불견'이 구름이 "동양 철학의 핵심을 표현한 말'이라면서 그 뜻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한 그 유명한 구절입니다. 제가 이에 대한 비판을 쓴 지 1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쓸 때 한문을 잘 모르더라도 상식이 있는 사람이 제 글을 읽고 확인해 볼 성의 만 있다면 구름의 한문 해독 능력이 제로 이하라는 것을 납득할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저의 예상이 빗나가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노자>를 읽는 것은 저의 취미고, 취미 생활의 특징은 별 쓸모없는 일을 하는 게 핵심입니다.

 

이 정도의 한문을 틀리게 읽으면서 자기가 옳다고 확신한다면 한문을 전혀 못 읽는 사람보다 더 치유가 어려운 상태입니다. 구름은 한문 못 읽습니다. (<이경숙과 노자> 참고자료 3 참조)

 

 

노자의 도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고, 말로 따져서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노자는 어떻게 자기의 말할 수 없는 도를 알았느냐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아니, 조금 아는 바는 있지만 경험은 없습니다. 다만 도를 체득하는 데에 관해 말하는 글이 <노자>에 실려 있어서 제 나름의 짐작을 하는 것 입니다.

 

일반 종교에서는 스승(또는 교주)이 깨달은 방식을 제자도 그대로 따라 수련하여 스승이 지나 온 단계를 거쳐 스승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그렇게 수행, 수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은 타고난 종교적 대천재이고, 제자들은 그런 욕구는 있지만 보통 사람인 경우는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부분, 아니 거의 전부가 이루지 못할 목표를 바라보면서 자기를 괴롭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또 설익은 깨달음으로 도가 틔었느니 하면서 뭔가 된 것 처럼 남을 가르친다는 인간도 많습니다. 구름과도 관계있었다는 단학선원의 이xx 대선사(요즘은 두뇌사업하느라 양복이고 다님)도 전에 저에게 밥 얻어먹고, 용돈(?) 타쓰고 다녔습니다. 그 때도 뭔가 이인적인 기질이 있었으나 저는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깨달음은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고, 설사 공중부양 1cm를 한다 해도 그거 해봐야 뭐 합니까? 사이비 스승 열심히 따라 하다 정신이상된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차라리 자연과 인간에 대한 스승(제 경우 노자, 버트란드 러셀)의 말을 내가 납득한다면 그 세계관에 따라 사는 삶을 택하겠습니다. (2008. 04. 22.)

 

 

<노자> 25장

有物混成, 先天地生. 유물혼성, 선천지생.

寂兮寥兮, 獨立不改. 적혜요혜, 독립불개.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주행이불태, 가이위천하모.

吾不知其名, 오부지기명,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자지왈도, 강위지명왈대.

 

섞여서 이루어진 무언가가 있는데 천지보다 먼저 생겼다.

적막하고 고요하며 홀로 서 있으면서 바뀌지 않는다.

두루 다니면서도 위태롭지 않아서,

천하를 낳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여 글자로는 道(도)라고 쓰고,

억지로 이름하여 대(大)라고 부른다. (노바당 역)

 

 

<노자> 14장이나 25장은 '도가도, 비상도;'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봐도 됩니다. <노자>에는 14장이나 지금 보는 25장같이 뭔가 어려운 듯한 내용은 많지 않고, 이 문장들이 좀 거창한 듯해서 그렇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내용은 <노자>의 주목적이 아니고, 사회(천하)에 대한 자기 생각의 근거를 추구한데서 나온 부수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대부분의 제자백가 사상이 그렇지만 <노자> 역시 우환의식(憂患意識; 천하의 무질서에 대한 우려)과 이에 대한 실제적 해결을 위한 책입니다.

 

 

여기서 '도가도, 비상도;'에서 한문장 만 더 나가 봅시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를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노바당 역)

 

 

'명가명, 비상명.'은 '도가도, 비상도;'와 대비되는 문장입니다. 그러나 그 뜻이 '도가도, 비상도;'와 같은 비중을 갖는 문장이 아니고, '도가도, 비상도;'를 보충하여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도 세 개의 '명(名)' 자는 그 의미가 다 다릅니다.

 

첫 번째 '명' 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x의 이름을 뜻하고, 가운데 '명' 자는 '이름짓다, 이름부르다' 라는 동사입니다. 맨 나중 '명' 자는 '도(노자의 도)'라는 이름을 말합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은 '도가도, 비상도;'의 번역인 '도를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와 문장 형식을 맞추기 위한 것이지만 그 뜻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x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말로 표현된 어떤 x는 노자의 도가 아니다.

 

어떤 x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어떤 x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이름 붙혀진 어떤 x는 노자의 도가 아니다.

 

 

한 마디로 노자의 도는 말로 표현할 수도, 이름붙일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제가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노자>에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이노해노;以老解老/ 노자로서 노자를 푼다.)

 

 

<노자> 14장;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승승불가명, 복귀어무물.

 

이어지고 이어져서 이름할 수 없고, 무엇이 없는 데로 돌아간다.

 

 

<노자> 32장;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도상무명. 박수소, 천하막능신야.

 

도는 항상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작지만 아무도 그것을 신하로 부릴 수 없다.

 

 

<노자> 37장;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무명지박, 부역장무욕.

 

이름이 없는 통나무는 무릇 역시 하고자 함이 없다.

 

 

<노자> 41장; 道隱無名. 도은무명.

 

도는 숨어 있어서 이름이 없다.

 

 

그래서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이라는 짧고 단순한 문장은 그 의미도 확실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의 폭은 넓어서 언어, 종교, 문명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반성케 하는 힘이 있습니다. <노자>는 자기가 파악한 그 어떤 x를 나타낼 기호로 그 중 이미지가 부합하는 '길 도(道)'라는 글자와 '클 대(大)'의 음을 '어쩔 수 없이(强/ 강)' 빌린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노자> 25장 하단부 참조)

 

현대 중국어로 도는 '따오(dao)'라 읽고, 대는 '따(da)'라고 읽지만(성조생략) 고대음은 같거나 비슷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자는 노자의 방식으로 '이름지을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말할 수 없는 것' 즉 '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 노자의 방식은 <노자>를 읽으면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의 대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 유명한, 그러나 우리 동아시아인에게는 지난 수천 년 이래의 상식인, '언어의 한계'에 대한 말을 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라."

 

 

제가 비트겐슈타인은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이 말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서양 사상의 근원에 대한 반성과 관계된다고 봅니다. 서양 문명의 기원인 그리스 철학과 기독교가 언어(말)와 관념(생각)에 대한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는 '언어에 대한 확신'을 경계합니다.

 

초월적 절대 존재의 말(명령), 즉 이 세계에 대한 질서 부여는 법칙(logos)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법칙은 고정 불변한 것이고, 인간은 이 법칙을 알아내려고 애쓰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내재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인들은 하나 뿐인 이 세계 자체를 관찰함으로써 세계의 작동 원리와 질서 형성의 패턴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노자> 1장의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 봅시다. (2008. 04. 22)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올 번역;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구름 번역; 도(는 그 이름을) 도라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름으로 (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으나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노바당 번역; 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그것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진고응 중국어역; 可以用言詞表達的道, 就不是常道; 가이용언사표달적도, 취불시상도;

                        可以說得出來的名, 就不是常名. 가이설득출래적명, 취불시상명.

 

일반적 영역; If the way can be spoken of, it is not the constant Way.

                  If the name can be named, it is not the constant Name.

 

 

구름 번역의 의미; 노자가 말하는 도라는 이름은 다른 걸로 불러도 된다.

 

노바당 번역의 의미; 도는 말로 표현할 수도, 이름붙일 수도 없다.

 

 

구름의 말이 <노자> 번역이 아니라면 '명실(名實)' 문제라는 거대한 철학적 주제를 '니 이름이 철수지만 영수라고 불러도 너는 너다'라는 식으로 유치원생도 알아듣기 쉽게 말해 준 게 됩니다. 이 말은 상식인 것 같지만 과거 왕조시대의 '피휘(避諱; 글에 왕의 이름 자를 쓰지 않음)'나 요즘도 '빨간색으로 사람 이름 쓰지말라.'고 하거나 어른의 이름을 '무슨 자, 무슨 자 쓰십니다.' 하는 등의 말이 아직 이름과 사람을 동일시하는 생각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름의 번역과 해설은 아무리 이해가 쉽고 재미가 있어도 그건 <노자> 1장의 번역이 아닙니다. <노자> 책을 볼 때 '도가도, 비상도;'의 가운데 '도' 자를 '말하다' 또는 '말로 표현하다'라고 번역돼 있지 않은 책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해석과 다른 해석을 하려면 자기의 해석이 일반적인 해석보다 어째서 우수한지, 또는 일반적인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런 내용이 없이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무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구름이 '도가도, 비상도;'에 대해 도올을 비난하면서 쓴 말을 봅시다.

 

 

"<도덕경>의 첫줄은 불과 여섯자지만 <도덕경> 전체 5천글자를 관통하는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면 노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결코 알 수 없다. 생각 함 해봐봐. 사람이 글을 쓸 때 가장 고심하는 것이 첫 줄 첫 마디 아니겠어? 노자 할아방도 마찬가지다. 노자가 <도덕경>이라는 위대한 사상서를 쓰면서 그 첫 머리를 저 따위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시작했겠어?"(<노자를 웃긴 남자> p 12)

 

 

곽점 죽간 <노자>나, 마왕퇴 백서 <노자> 갑본과 을본을 읽어 보지는 않았어도 말을 들어보신 분들은 '도가도, 비상도;'가 그 책들에서는 <도덕경>의 첫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구름이 보는 현행본 <노자>책의 한문으로 된 원문은 <노자 왕필 주>에서 왕필의 '주'를 뺀 부분이고, 여기서는 '도가도, 비상도;'가 맨 앞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 책보다 500년 이상 전에 쓰여진 곽점 <노자>에는 '도가도, 비상도;' 뿐 아니라 아예 현행본 <노자> 1장이 없습니다. 마왕퇴 백서 <노자>는 갑본, 을본 모두 '도가도, 비상도;'로 시작하는 '도경' 부분이 '상덕부덕'으로 시작하는 '덕경'의 뒤에 붙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도덕경>의 첫줄' 어쩌고 하는 구름의 말은 제가 말하는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구름이 말하는 학술과 해석의 차이의 아니라 맞고 틀리는 문제입니다.

 

 

<노자>를 현행본 1장부터 읽기 시작하면 그 형이상학적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워서(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노자>를 읽어 나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노자>에는 1장과 같은 내용은 많지 않고 오히려 리더십의 교훈이랄까, 인생의 경구같은 내용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노자>를 처음 읽는 분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뛰어 넘고 읽어도 되고, 마왕퇴 백서 <노자>의 처음 부분인 현 38장부터 읽어도 됩니다.

 

그러면 <노자>에 대한 인상이 '도가도,비상도;'부터 읽기 시작하는 것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노자>는 어떤 식으로 읽어도 상관없습니다.

다음 인용문은 구름이 도올을 '책장사, 강의 장사'라 욕하면서 써 놓는 글인데, 구름의 전문(?)이라는 불교 관계 글입니다.

 

 

"불교가 동양 정신의 거대한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의 탁월한 한역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만약 범어로 된 불경을 현장이 한문으로 번역해서 중국에 소개할 때 도올처럼 엉터리 짓을 했더라면 불교도 코메디 대본으로 전락했을 거다.

 

현장은 범어의 '니르바나'를 의역(意譯)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나는 대로 '열반(涅槃)'이라고 음역(音譯)한 것이다. 이게 위대한 번역이다. 열반에는 아무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 열반이란 이름에 어떤 뜻을 담으면 그것은 이미 열반이 아닌 것으로 돼버린다. 노자가 그것을 염려하여 첫머리에 저 말(도가도비상도명가명비상명)을 써 놓은 것이다."(<노자를 웃긴 남자> p 14)

 

 

앞에서도 음역과 의역에 대한 말을 했는데 여기서 보니 구름의 머리 속을 알아볼 수 있는 예가 있군요.

 

 

1. 현장이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잘 한역한 것은 맞습니다.

 

2. 현장이 '니르바나'를 '열반(涅般)'이라고 번역한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번역할 수도 있는 것이지 위대한 번역은 아닙니다.

 

3. '열반'이라는 음역된 한자에는 아무 뜻이 없으나, '니르바나(nirvana)'에는 뜻이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 'nirvana'에서 '니르(nir)'는 '없어지다, 끊어지다'라는 부정사이고, '바나(vana)'는 '분다'는 말입니다. 바람(지혜)이 불어 불(집착, 번뇌 등)이 꺼진 상태라는 말이고 '적멸(寂滅)'이라고 훈역하기도 합니다. 오대산에 가면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는데 '위대한 번역'을 몰라보는 '우매한' 중들은 구름 말을 듣고 빨리'열반보궁'으로 바꿔야 합니다.

 

4. '니르바나'는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산스크리트어를 읽는 사람들은 그 문자 형상을 보면 그 뜻을 압니다. 그런데 '涅槃'이라고 써 놓으면 한문을 읽는 사람도 그 뜻을 모르는 데 이게 꼭 좋은 번역이고 '적멸(寂滅)'은 나쁜 번역입니까?

 

5. 그리고 산스크리트어 'nirvana'를 우리 말로 '니르바나'라고 원음에 가깝게 음역할 수 있는데 제대로 음역도 안되는 한자음, 그것도 중국식으로 '니에판'이라고 읽는 것도 아니고 '열반'이라는, 중국인이 보면 사투리같은 음으로 읽으면 고상해 보입니까?

 

6. 그렇게 음역 좋아하는 구름은 다음 불교 용어를 어떻게 쓰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adhi)'의 음역인'삼매(三昧)'를 '선정(禪定)'이라는 의역보다 잘 씁니다. 그리고 '카르마(karma)'는 '업(業)'으로, '삼사라(samsara)'는 '윤회(輪廻)'라는 의역된 말을 씁니다. 그냥 음역이건, 의역이건 사람들이 많이 쓰는 대로 쓰는 것입니다. '위대한 번역'인 음역 좋아하는 구름은 의역인 '업'과 '윤회' 대신 어떻게 음역된 말을 쓰는지 궁금합니다.(사실은 보나 마나여서 궁금하지 않음)

 

 

저는 원래 보관용으로 <노웃남>과 <완역 이경숙 도덕경>을 책장 구석에 거꾸로 꽂아 놓았었습니다. 이 정도 읽어봤으니 원래 자리로 보냅니다. 혹 나중에라도 구름의 책에 나오는 내용으로 자기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버리지는 않습니다. 다시 <노자> 1장으로 돌아갑니다. (2008. 04.24.)

 

 

여기서 <노자> 1장의 전체적 풍경을 살펴 봅시다.

 

 

1.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2.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3.故常無欲, 而觀其妙; 常有欲, 而觀其徼.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4.此兩者, 同出而異名.                          차양자, 동출이이명.

 

5.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이게 그 유명한 <노자> 1장의 전문입니다. <노자> 1장에는 1000자의 상용한자를 벗어나는 한자는 '요(徼)' 자 밖에 없고, <노자> 전체를 보아도 어려운 한자는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만큼 <노자>에 나오는 말들을 현대의 우리도 많이 쓰고, 그 사상도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한다 해도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처음 세 줄은 '도와 명', '무명과 유명', '무욕과 유욕'으로 짝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양자동출(兩者同出)'이라고, 즉 '두 가지 것이 같이 나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서 '동위(同謂)'라고, 즉 '같이 일러 ~~다'라는 형식으로 마칩니다.

 

처음에 두 가지씩, 짝인 것을 3가지 말하고, 이 두 가지가 지금은 뭔지는 몰라도 하여튼 같이 나온 것이라고 한 다음, 이 같은 것을 '뭐다, 어떻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뭇 묘한 것이 다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도올 번역;

 

1.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2.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시작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3.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장자리를 본다.

 

4. 그런데도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 이름만 달리 했을 뿐이다.

 

5. 그 같은 것을 일컬어 가믈타고 한다.

   가믈코, 가믈토다.

   모든 묘함이 이 문에서 나오지 않는가?

 

(도올 번역은 '차양자동, 출이이명.'이라고 띄어쓰기한 것입니다.)

 

 

노바당 번역;

 

1. 도를 말로 표현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그것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2. 이름 없음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머니다.

 

3. 그러므로 늘 하고자 함이 없으면 그 감추인 것을을 보고,

   하고자 함이 있으면 그 드러난 것을 본다.

 

4. 이 두 가지는 같이 나왔지만 이름이 다른 것이다.

 

5. 이 같음을 '깊다'고 하고, 깊고 또 깊어서, 뭇 묘한 것의 문이라 한다.

 

(제 번역은 마왕퇴 백서를 참고한 것입니다. 백서에는 '양자동출, 이명동위.[兩者同出, 異名同謂]'라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는 '동출'을 붙여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노바당이 이해하는 바;

 

1. 도는 알 수는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 도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는 것은 가짜다.

   이름은 이름붙여진 그것이 아니다.

 

2. 자연(천지)에 원래 무슨 이름이 있겠는가?

   우리가 이름 붙임으로써 온갖 것의 구별이 생겨난 것이다.

 

3. 구별이 생겨난 후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생긴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데 매이지 않으면 깊은 속(묘)을 볼 수 있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데 매이면 드러난 것(교)을 보게 된다.

 

4. 이 둘은 같이 나온 것인데 이름 만 다른 것이다.

 

5. 이 둘을 통째로 보는 것을 '가믈하다(현)'고 한다. 이 통째인 것으로부터 모든 묘한 것이 나온다.

 

 

여기서는 '무명, 유명', '무욕, 유욕' 뒤에서 띄어쓰기 하였으나. 두 군데 모두 '무, 유' 다음에 띄어쓰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1장이 더 형이상학적 언설이 됩니다. 저는 위 원문처럼 띄어 쓰는 게 좋다고 봅니다.

 

 

참고로 마왕퇴 백서 <노자>의 현 1장 부분을 현대 한자로 고친 문장을 방점 표시 없이 올립니다. 보기 낫게 칸을 띄었지만 원래의 글은 쭉 이어져 있는 겁니다.

 

 

道可道也非恒道也名可名也非恒名也            도가도야비항도야명가명야비항명야

 

無名萬物之始也有名萬物之母也                  무명만물지시야유명만물지모야

 

故恒無欲也而觀其妙恒有欲也而觀其所曒      고항무욕야이관기묘항유욕야이관기소교

 

兩者同出異名同謂                                    양자동출이명동위

 

玄之又玄衆妙之門也                                 현지우현중묘지문야

 

 

1. 글자 표현은 다르지만 왕필본 <노자>에는 없는 '어조사 야(也)' 자가 많아서 일종의 띄어쓰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마왕퇴 백서 <노자> 갑본, 을본 모두 '무욕', '유욕' 뒤에 '어조사 야(也)' 자가 있어서 당시에 '무욕', '유욕' 뒤에서 띄어 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무욕', '유욕'으로 붙여 읽으면 당연히 위 문장도 '무명', '유명'으로 붙여 읽게 됩니다. 현행본의 "천지'가 백서본에서는 '만물'로 되어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른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것을 강조할 때는 천지로, 부분적인 것을 강조할 때는 만물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天者, 萬物之總名也. 천자, 만물지총명야.(<곽상 장자 주>)

 

천지는 만물을 모두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여기서 '천(天)'은 '천지(天地; 자연)'의 줄임말입니다. <노자>에 나오는 '천도(天道)'라는 것도 모두 '천지지도(天地之道)'의 줄임말입니다.

 

 

3. '묘'와 대비되는 말이 왕필본 <노자>에서는 '요(徼)'로 되어 있는데, 백서 <노자>에서는 '밝을 교( 曒)' 자와 유사한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요(徼)' 자는 벽자(僻字; 잘 쓰지 않는 한자)'이고, 고전 한문에서도 용례가 드물어 여기서 무슨 뜻인지 의견이 많습니다. '묘(妙)' 자라는 한자는 중국 글자지만 우리에게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훈도 '묘할 묘'라고 합니다. '묘' 자를 '묘하다'로 설명하면 동어반복이나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신묘(神妙)', '오묘(奧妙)', '미묘(微妙)' 등의 말을 통해서도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백서 <노자>에서 대비되는 '밝을 교' 자, 즉 밝게 드러난 것의 상대적 의미로 본다면 우리의 감각이나 논리로 파악하기 어려운, 드러나지 않게 존재하는 그 무엇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4. <노자>에서 두 가지씩 짝지어 진 것들을 하나씩 따로 따로 설명했으나, 이것들이 같이 나온 것이고 이름 만 다른 것이므로 '가믈 현(玄)' 자로 그 동일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현대의 2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어서 대비되는 '도와 명', '무명과 유명', '무욕과 유욕' 중 '도, 무명, 무욕'을 좋은 것으로, '명, 유명, 유욕'은 나쁜 것으로, 또는 그 역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노자>에서는 '명, 유명, 유욕'이 거부해야 할 나쁜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우위에 두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중묘(衆妙; 뭇 묘한 것)', 제가 '만물(萬物)'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 거기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묘' 자를 드러나지 않은 무엇이라고 했는데, '중묘', 즉 '만물'은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역설적 언어로 말해지는 <노자>의 사상이 표현돼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각하고, 말하고, 먹고, 살아가는 이 실제의 세계가 '도'에서 나왔고, '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에서 벗어나면 죽음이며, 유기체적 시스템의 종료입니다.

 

 

<노자>30장, 55장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물장즉로, 시위부도. 부도조이.

 

사물은 뻣뻣해지면 늙는 것이다.

이것을 도가 아니라 한다.

도가 아니면 일찍 끝난다. (노바당 역) (2008. 0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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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숙
2012.02.06 11:19:25
*.115.30.216

저는 (노자를 본적 없는;;) 수학, 철학에 미치다 책을 읽다가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와 처음 만났어요.

 

이해를 못하고

 

예를 들어 설명해주신 내용만 '그렇구나~'하며 본 기억이 나네요.

 

 모르는 부분이라 체크는 해두었으나 다른 번역도 봐볼까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그냥 넘어갈 확률이 큼;;

 

이 글을 통해 번역의 일면을 접해볼 수 있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댓글 수정 삭제
캐비
2012.03.08 00:48:16
*.245.153.92

니가안다고 하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깨우쳤다고 해봤자 일부부이거나 변할 것을 알았다고 하는것 뿐이다. 즉 너는 결코 도라고 하는것을 알수 없다.)

 

도는도일뿐이다.. 평상시에 도라고 함부로 말하지말라.

"부드러운 것이 늘 강한 것을 이기죠" - 매일경제

"부드러운 것이 늘 강한 것을 이기죠" - 매일경제


저자와 함께/"도덕경 해석은 誤譯역사" "완역 이경숙 도덕경" 펴낸 이경숙씨
입력 2004.01.17 00:00 0  0 
"도올의 노자 해석을 정말 웃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숱하게 많은 도덕경 번역의 거의 80%가 오역과 곡해였습니다."3년 남짓 전 김용옥 중앙대 석좌교수가 TV 노자 강의로 선풍적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 그의 도덕경 번역을 정면으로 반박한 '노자를 웃긴 남자'를 내 화제가 된 이경숙(44·사진)씨가 '완역 이경숙 도덕경'(전2권·명상 발행)을 냈다. '노자를 웃긴 남자'가 도올을 비롯한 기존 노자 해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면, 이번 책은 도덕경 번역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다. '왕필(王弼) 이후 모든 도덕경은 오역의 역사였다'고 적은 책의 띠지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그의 해석은 새롭다.

도덕경 6장의 '谷神不死 是謂玄牝(곡신불사 시위현빈)'을 도올이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고 한다'고 해석한 데 비해 이씨는 '신이 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이를 일러 현빈이라 한다'고 번역했다. "현빈이나 영백(營魄) 등은 도덕경에서 노자가 만든 단어입니다. 그걸 풀어서 해석해서는 글의 의도를 살릴 수 없습니다." 10장의 '載營魄抱一 能無離乎(재영백포일 능무이호)'를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이것이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기존 해석과 크게 다르지만 이해가 훨씬 쉽다. 도덕경을 심오한 동양철학서가 아니라 혼란의 극치였던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처세론과 통치론를 설파한 책으로 이해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체계적 한학 수련 없이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불경을 필사하면서 한문을 깨친 이씨는 한문 해석 비법의 한 가지로 "백독불여일필(百讀不如一筆)"을 든다. 눈으로 따라 읽을 때에는 의미가 불분명했던 것도 한 번 직접 써보면 그 뜻을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직역과 자구 해석, 친절하고 재미까지 곁들인 주는 물론, 꼭 해당 구절을 써보도록 따라 쓰기란을 만들었다. "평소 전사나 병법에 관심이 많아 손자병법 번역·해설서도 낼 계획"이라는 전업주부 이씨가 앞으로 국내 동양철학이나 한문학계에 또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기다려진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저자와 함께/"도덕경 해석은 誤譯역사" "완역 이경숙 도덕경" 펴낸 이경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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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함께/"도덕경 해석은 誤譯역사" "완역 이경숙 도덕경" 펴낸 이경숙씨
입력 2004.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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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노자 해석을 정말 웃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숱하게 많은 도덕경 번역의 거의 80%가 오역과 곡해였습니다."3년 남짓 전 김용옥 중앙대 석좌교수가 TV 노자 강의로 선풍적 인기를 누리고 있을 때 그의 도덕경 번역을 정면으로 반박한 '노자를 웃긴 남자'를 내 화제가 된 이경숙(44·사진)씨가 '완역 이경숙 도덕경'(전2권·명상 발행)을 냈다. '노자를 웃긴 남자'가 도올을 비롯한 기존 노자 해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면, 이번 책은 도덕경 번역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다. '왕필(王弼) 이후 모든 도덕경은 오역의 역사였다'고 적은 책의 띠지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그의 해석은 새롭다.

도덕경 6장의 '谷神不死 是謂玄牝(곡신불사 시위현빈)'을 도올이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가믈한 암컷이라고 한다'고 해석한 데 비해 이씨는 '신이 불사하는 계곡이 있으니 이를 일러 현빈이라 한다'고 번역했다. "현빈이나 영백(營魄) 등은 도덕경에서 노자가 만든 단어입니다. 그걸 풀어서 해석해서는 글의 의도를 살릴 수 없습니다." 10장의 '載營魄抱一 能無離乎(재영백포일 능무이호)'를 '온 나라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이것이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기존 해석과 크게 다르지만 이해가 훨씬 쉽다. 도덕경을 심오한 동양철학서가 아니라 혼란의 극치였던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처세론과 통치론를 설파한 책으로 이해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체계적 한학 수련 없이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불경을 필사하면서 한문을 깨친 이씨는 한문 해석 비법의 한 가지로 "백독불여일필(百讀不如一筆)"을 든다. 눈으로 따라 읽을 때에는 의미가 불분명했던 것도 한 번 직접 써보면 그 뜻을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직역과 자구 해석, 친절하고 재미까지 곁들인 주는 물론, 꼭 해당 구절을 써보도록 따라 쓰기란을 만들었다. "평소 전사나 병법에 관심이 많아 손자병법 번역·해설서도 낼 계획"이라는 전업주부 이씨가 앞으로 국내 동양철학이나 한문학계에 또 어떤 파문을 불러올지 기다려진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완역 이경숙 도덕경] 비판 – 노바당

아트앤스터디

제목 : <완역 이경숙 도덕경> 비판 – 노바당 [0]
번호 : 1765 작성자 : 노자조아 등록일 : 2009-04-27(12: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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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이경숙 도덕경> 비판 – 노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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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글머리1 - 이경숙과 노자

글머리2 - 이경숙의『완역 이경숙 도덕경』비판에 들어가며

1> 이경숙의 책 『완역 이경숙 도덕경』은 얼마나 엉망인가?

1. 원문을 잘못 입력하고, 그 잘못된 원문을 가지고 해석하는 경우

2. 반복되는 같은 구절을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

3. 자기 마음대로 문법을 만든 경우(1편; 시지불견의 경우 등)

4. 자기주장이 옳다는 근거로 허위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

5. 무식이 드러나는 경우

2> 이경숙의 한문 이해 방식에 대한 비판

3>

4> ‘『완역 이경숙 도덕경』비판’ 주석

이경숙의 ‘시지불견視之不見’ 해설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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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머리1 - 1)이경숙과 노자

 

 

저는 에코넷 뒷마당에 6월 21일과 22일에 올라 온 『완역 이경숙 도덕경』을 비판한 세편의 글과 그 글을 종합한 한편의 글을 쓴 노바당입니다. 이 글들을 쓴 이유는 지난 4월 인터넷에서 이경숙의 『노자』해설이 말이 된다는 분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제가 5,6년 만에 쓴 비교적 긴 글입니다. 단 한 분이 보라고 쓴 글이지만, 기왕 쓴 글이라 이 글을 6월 중순에 보충하여 제 블로그에 다시 올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경숙이 지금은 뭘 하는지 궁금하더군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이경숙 구름’으로 검색해 봤습니다.

 

검색을 하여 구름카페를 거쳐, 구름타운을 지나 에코넷 뒷마당까지 왔습니다. 구름타운에서 보니 한눈에 사이비 종교형 다단계 사업이더군요. 저는 다단계 사업이 정부에서 허용해서는 안 될 비인간적 기업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로 모은 사람들 데리고 다단계 사업이라니...  저는 금년에도 집에 있던 멀쩡한 정수기 내버리고 280만 원짜리 정수기를 설치했습니다. 300만원 그냥 준다는데도 꼭 실적을 올려야 한다더군요. 사이비 종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등록된 대형 종교도 대부분 사이비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에코넷 뒷마당에 와보니 저로서는 상상 불허인 2) ‘구름은 깨비다.’라는 의혹이 있더군요. 물론 저는 이 때 깨비가 도깨비 줄인 말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에코넷 뒷마당을 더 살펴보니 하루 전에 블로그에 올려놓은 제 글들이 모두 올라와 있어서 놀랐습니다. 물론 제가 올린 것 아닙니다. 저는 하루 10시간 근무하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날부터 시간이 날 때 마다 에코넷 뒷마당과 구름타운의 글을 대부분 보았습니다. 그 결과 저는 ‘구름은 깨비다.’라는 의혹이 정당하다고 봅니다.

 

저는 『노자』와 관계된 문제만을 한 번 더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경숙의 지금 상황이 『노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에 올려 진 글은 교정이 덜 된 것이고 제가 올린 것이 아니므로 조금 손보아 다시 올립니다.

   

 

 

 

‘구름은 깨비다.’, ‘구름의 글은 깨비가 쓴 것이다.’ 지금 이경숙이 ‘지금까지의 내 글은 내 남편이 쓴 것이다.’라고 인정한다면 구름과 안티구름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리고 구름타운은 구름타운대로, 안티구름은 안티구름 그만 두고 내 갈 길로 가면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구름의 글 자체, 그 내용도 의심해봐야 하는 것이다.

 

이경숙에 대한 추종자들의 존경심, 그리고 선생님, 사이비 교주(약간 전 단계?), 또한 다단계 상위 사업자로서의 이씨의 권위와 권력은 대부분 이씨의 『노자』책(『노자를 웃긴 남자』, 『완역 이경숙 도덕경』)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씨의 『노자』해석 중 기존 전문가와 다른 부분, 즉 이경숙식으로 번역한 것은 3)거의 100% 틀렸다. 내 글은 이것을 증명한 것이다. 확고한 근거가 없는 권위는 조그만 비판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문제를 일으킨다.

 

내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분들은 내 글과 본인이 가지고 있는 『완역 이경숙 도덕경』을 맞춰 보면서 공부해야한다. 믿는 것도 알고 믿어야 한다. 모르고 믿는 게 맘 편한 분들은 그냥 그렇게 살면 되지만, 모르고 믿는 것을 미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구름타운의 회원이었다가 지금은 안티구름인 분들도 마찬가지다. 이 분들은 대체로 ‘구름이 깨비다.’라는 의혹은 있지만, 그가 『노자』에 대해 쓴 글에는 아직도 존경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문이나 『노자』에 관심이 있고 공부하고자 한다면 상당한 공력을 들여야 한다. 그런 공을 들이지 않고 누구의 말이 쉽게 이해된다고 덥석 물면 평생 고생할 수 있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훌륭한 것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이경숙의 『노자』해설을 보고 혹한 사람들은 대체로 한문과 『노자』에 대한 상식과 인문학적 기본 교양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잘못인가? 한문이나 『노자』는 몰라도 되고, 『노자』를 안다고 해서 세상살이가 편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자』를 공부한 적이 없더라도 노자의 사상은 거의 2000년에 걸쳐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과 생각의 기초에 깔려 있다.

 

이경숙의 『노자』에 대한 권위가 도올 김용옥을 씹음으로써 시작된 것이므로 도올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의문이 든다. 정신이 정상인 사람들이 어떻게, 4)고려대학교 철학과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국립대만대학교와 동경대학교에서 노자철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중국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고전 한문을 읽지 못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런 정도의 수련을 거친 사람과, 책을 쓰면서 『노자』를 처음으로 다 읽어 봤다는 사람이 비교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바둑에 급수가 있는 것처럼 앎과 깨달음에도 급수가 있다. 급수라는 말 대신 차원이나 수준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 도올과 이경숙의 한문 실력이나 『노자』이해는 프로와 10급 바둑 이상의 차이가 있다. 나는 그 중간 어디에 있으나 이씨에 가깝지는 않다. 그런데 바둑을 관전하는 사람이 프로기사의 바둑과 10급 바둑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바둑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바둑을 잘 구경하려면 먼저 바둑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 10급 바둑도 여러 가지다. 정수로 두는 10급과 사이비 10급이 지금은 서로 이겼다 졌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한 사람은 그대로이고 한 사람은 저만큼 앞에 가게 된다. 나는 이씨의 『노자』 이해 수준이 사이비 10급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이비『노자』10급인 이씨에게 『노자』를 배운다는 것은 안 배우는 것보다 훨씬 나쁜 결과가 된다.

 

나는 대만 사람인 진고응(陳鼓應) 선생의 『노자주역급평개(老子註譯及評介)』(中華書局)로 『노자』공부를 했다. 지금은 이 책이 국내에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영남대학교 출판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어 있다.

 

진고응은 국립대만대학교에서 노장철학을 가르쳤고, 1970년대 말에 반정부 운동 때문에 미국으로 추방되어 버클리대학교에서 연구했다. 그 후 중국 북경대학교에 ‘대만을 비방하지 않는다. 공산당 선전을 하지 않는다. 가르치고 싶은 것만 가르친다.’는 3개항의 조건으로 초빙되어 노장철학을 가르쳤다.

 

나는 진고응 선생의 『노자주역급평개(老子註譯及評介)』가 『노자』를 읽는 사람들에게 표준적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부록에 선진시대(先秦時代; 약 2200년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노자』해설서 중 262가지 책의 목록이 실려 있다. 거기에 중국인이 아닌 사람의 책으로는 일본의 후쿠나가 미쓰지(福永光司)의 『노자』와 김용옥(金容沃)의 『노자자연철학중무위지공능(老子自然哲學中無爲之功能)』두 가지만 실려 있다. 이런 전문가들을 무대뽀로 무시하는 게 가능한 것이 우리나라의 인문학 수준이며, 고전에 관심 있다는 일반인들의 수준이다.

 

이런 모든 문제의 시작에 중앙일간지 기자들이 있다. 인문계 대학 공부를 하고 중앙일간지 서평을 담당하는 기자들이 ‘이경숙이 도올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경숙이 하버드를 이겼다’라는 말들을 만든 것이다. 게다가 ‘왕필(王弼) 이후 모든 『도덕경』은 오역(誤譯)의 역사였다’라는 이경숙의 허황된 말을 기사화하고, ‘이경숙이 노자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전해준다’는 평가를 하는 5)기자들의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를 넘어 선 것이다. 아무리 장사속이라도 기본 양심과 상식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질문을 한 기자나, 황당한 대답을 하는 이씨나 그분이 그분이다.

 

기자; 어떻게 『노자』의 해석을 그리 잘 하는가?

이경숙; 내가 노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모를 일이 뭐 있겠는가?

 

이씨의 글을 읽어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이씨의 문장력, 소위 글빨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씨의 글빨이 먹히지 않는다. 나에게는 이씨의 유창한 표현력에 앞서 그 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 유창하지만 대부분 틀린 말을 정신 나간 소리 또는 헛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씨의 글이 그냥 『노자』를 읽은 감상문이라면 나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노자』에 대해 저만 안다고 선전하여 남을 가르치려 들고, 책 팔아먹고, 사람들을 모아 다단계 사업하는 것은 나라도 참견할 수밖에 없다. 그런 걸 6)사이비 종교 사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씨가 이제는 한문이나 『노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정직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관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다단계 사업도 접기를 바란다. / 끝 2007.7.5

 

 

 

 

글머리2 - 1)이경숙의『완역 이경숙 도덕경』비판에 들어가며

 

수년 전에 중앙일보에『노자』에 대해 획기적인 해석을 하는 이경숙이라는 여자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노자를 웃긴 남자』(2001)라는 책을 썼는데 그게 말이 된다는 겁니다. 좀 7)이상한 중앙일보 신문기자가 이 여자를 띄우려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잘 안 됐습니다.

 

그 후 3년쯤 지나 이씨가 쓴 책이『완역 이경숙 도덕경』(2004)입니다. 자기 딴에는 공부도 더 했다하고, 정통파인 것처럼 젊잖은 흉내 낸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도 개판이고 거의 100% 틀린 해석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틀린 책이 어떻게 버젓이 출판될 수 있는지 궁금 할겁니다. 별거 아닙니다. 출판사 돈벌이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사람들이『노자』에 관심은 많아도 자기 자신이 생각을 하지 않고, 제대로 된 것인가 확인도 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여자의 문제는『노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해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대한 재야의 연구가 활발합니다.『환단고기』라는 책에 「천부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여자가 해석한 것을 가지고 논의를 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이 여자 말 듣고 그걸 기초로 이해하고 판단한다? 미친 짓입니다. 저는『환단고기』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서는 판본板本의 문제가 기본입니다. 

 

어제 인터넷에서 아직도 이 여자의『노자』해설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는 분이 있어서 오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글을 써 놓는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 한 약속이지만 이 글(1편) 쓰느라 하룻밤 샜습니다. (2007.4.9)

 

(참고: 아래 [종합]편은 기존의 다음 세 편을 3편, 2편, 1편순으로 재편집한 것입니다.

1편, 「이경숙의 ‘시지불견視之不見’ 해설 비판」

2편, 「이경숙의 한문 이해 방식에 대한 비판」

3편, 「이경숙의 책『완역 이경숙 도덕경』은 얼마나 엉망인가?」)

 

 

2021/06/01

“어린 시절 저를 학대한 부모님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 스님의하루

“어린 시절 저를 학대한 부모님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 스님의하루
어린 시절 저를 학대한 부모님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저의 고민은 부모님과의 관계입니다. 아버지는 툭하면 윽박지르고 심한 욕설을 해서 인격적으로 실망스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폭행과 성추행으로 얼룩진 나날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안 보내주셔서 4년간 거의 혼자 지냈습니다.

제가 직장이 없을 때는 인연을 끊자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다가 직장을 갖게 되자 자주 만나려고 하고 카드를 가져가십니다. 이런 도의에 어긋난 아버지의 모습들을 보면 안 만나고 싶다가도 막상 안 만나면 마음이 쓰입니다. 지금은 부모님과 같이 살기 싫어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데, 한편으론 부모님과 좋은 기억들도 많아서 저 혼자 편하게 지내려니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앞으로 부모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며 지내는 게 현명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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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는 부모님처럼 애먹이는 남편 만나서 부부간에 싸우면서 살고 싶어요? 부모님처럼 안 살고 싶어요?”

“부모님처럼 안 살고 싶어요.”

“부모님처럼 안 살고 싶으면 이제 정을 끊어야 해요.”

“정을 끊으라는 말씀은 부모님을 아예 만나지 말라는 건가요?”

“만나는 건 누구든지 만날 수 있죠. 죄를 지어서 교도소에 있는 사람에게도 면회는 가 줄 수 있듯이요. 만나고 안 만나고가 문제가 아니라 정을 딱 끊는 게 핵심이에요.


미리 ‘안 만난다’ 하고 정하면 만나고 싶을 때 내가 정한 것 때문에 속박을 받게 돼요. 또 미리 ‘만나자’ 하고 정하면 만나기 싫을 때 내가 정한 것 때문에 속박을 받게 됩니다. 만나고 안 만나는 것을 미리 정하면 거기에 자신이 속박을 받아요. 그러니 만나고 안 만나는 것은 미리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핵심은 부모님과의 정을 끊는 거예요.

‘지금까지 저를 낳아주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제가 스무 살이 넘었으니 부모님의 도움 없이 제 인생은 제가 살겠습니다.’

정을 끊으려면 이렇게 기도하면 돼요.”

“그런데 제가 마음으로는 정을 끊은 것 같거든요.”

“지금 질문자가 말하는 걸 들어보면 자석에 쇠붙이가 끌려가듯이 털끝만큼도 정을 끊은 게 아니에요. 그냥 고통이 올 때 싫어하는 거죠. 정을 끊으면 싫어하는 마음도 안 생겨요. 정을 끊어버렸는데 싫어하고 좋아할 게 뭐가 있어요. 지금 질문자가 ‘만나야 합니까? 안 만나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아직 정을 못 끊었다는 겁니다.

정을 끊어버리면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져요. 질문자는 이웃집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을 만나야 할까, 안 만나야 할까?’ 이런 고민을 안 하잖아요. 비록 옆집에 살아도 그 사람하고 정이 없기 때문에 볼일 있으면 만나고, 볼일 없으면 10년이 가도 안 만납니다.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볼일 있으면 자주 만나는 것이고요. 그것처럼 정을 딱 끊어 버려야 해요. 정을 딱 끊는 방법은 감사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동안 저를 때렸든 어쨌든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낳아주고 키워주셨으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제 스무 살이 넘었으니 부모님께 야단맞고 의지하고 도움받고 살 때는 지났습니다. 저는 독립해서 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렇게 감사 기도를 하고 더 이상 연연할 필요 없이 정을 끊고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저 하나여서 부모님이 걱정됩니다.”


“부모님에게 자식이 하나든 둘이든 열이든 그런 생각할 필요 없이 내가 정을 끊어야 해요. ‘자식이 나 하나라서 부모가 걱정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정을 못 끊겠다는 거잖아요. 정을 못 끊으면 또다시 부모한테 가서 싸우고 정붙였다가 또 울고불고 싸우고 이렇게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괜찮아요.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바에야 스님한테 물을 필요가 없잖아요. 지금 질문자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물으니까 스님이 조언을 해주는 겁니다.”

“나중에 부모님이 연세를 많이 드셨을 때는 어떻게 하죠?”

“그런 질문 자체가 정이 안 끊어져서 하는 질문입니다. 이웃집 할머니가 아무리 늙어도 혼자 살든 말든 신경이 안 쓰이듯이 정을 딱 끊어버리면 부모님에 대해 그런 걱정이 안 들어요.

제가 어제 길을 가는데 이웃집 할머니가 혼자서 뭘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뭐 하세요?’ 물어보니 고라니가 밭에 들어와서 상추를 다 먹어버려서 울타리 치려고 말뚝을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 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제가 좀 거들어드릴까요?’ 했더니 ‘아니야, 나 혼자 할 수 있어’ 이러시더라고요.


이렇게 아무런 정이 없어도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요. 필요하다고 하면 도와드리고,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 못 도와드리는 겁니다. 설령 병원에 실려 가시더라도 그 집 자식이 알아서 하든지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두면 돼요. 내가 도움이 되면 도와주고, 내가 도울 형편이 안 되면 안 도와주고, 그건 내 자유입니다.”

“제가 만약에 정을 안 끊으면 저도 부모님처럼 그렇게 살게 되는 건가요?”

“100%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게 아니라 부모님이 사는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부모님처럼 살게 될 확률이 높다는 거예요. 새끼 고양이는 어미 고양이를 흉내 내고, 강아지는 어미 개를 흉내 내고, 송아지는 어미 소를 흉내 내듯이, 그건 자연의 이치예요. 자신이 자란 환경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막상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까르마’라고 합니다.”

“그럼 제가 명절이든 생신이든 어버이날이든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옆집 사람처럼 생각나면 만나는 정도로 부모님과 지내면 되는 건가요?”

“정이 끊어지면 그런 질문 자체를 할 필요 없이 저절로 돼요. 정에 끌려서 가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원한이 있어서 안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됩니다. 어버이날이니까 전화 한 통을 드릴 수도 있고, 부모님 댁에 인사를 드리러 갈 수도 있고, 그때 부모님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그 말에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부모님 댁에 갔더니 ‘다음부터는 오지 말라’ 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안 가면 돼요. 그래도 가고 싶으면 가면 됩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이웃집이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이렇게 됩니다.


질문자는 정이 안 끊어졌기 때문에 열 가지 백 가지 질문이 생기는 거예요. 정을 붙여놓고 머리를 굴리는 수준으로는 밤새도록 얘기해도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정만 딱 끊어버리면 만 가지 질문이 필요 없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러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그 이상은 정을 딱 끊어야 해요.

부모가 나를 보살필 책임도 없고, 나도 더 이상 부모를 보살펴야 할 책임도 없고,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할 책임도 없고, 부모를 돌봐야 할 책임도 없어요. 의무 관계가 다 끊어진 겁니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을 산다’ 이런 관점을 분명하게 가져야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상대가 질문자를 독립된 한 사람으로 만나서 살 수 있어요. 그게 아니고 질문자 뒤에 부모가 있으면 상대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이 불행해지는 지름길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 여기서 딱 정을 끊어야 합니다.

인생이 참 재미있습니다. 질문자가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마치 변소간에 구더기를 연상하게 되거든요. 구더기가 변소간에서 기어 나오려고 해서 건져 내놓으면 다시 변소간으로 들어갑니다. 질문자는 실컷 조언을 해줘도 다시 기어들어 가고, 도저히 못살겠다고 해서 다시 끄집어 내놓으면 또 기어들어 가는 수준이에요. 악담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질문자가 그만큼 위험한 수준이라는 거예요. 부모 하고는 정을 딱 끊고 이걸로 끝을 내야 합니다. 이웃이라는 관점에서 필요하면 돌봐줄 뿐이에요. 그래도 나를 키워주었으니까 어버이날에 찾아가서 인사를 드릴 수는 있지만, 바쁘면 못 가는 겁니다. 아버지가 나를 추행했느니 때렸다느니 이런 얘기 자체도 이제는 버려버려야 해요.

정을 끊으라는 말은 미워하지도 말고, 정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무감도 갖지 말고 미워하지도 마세요. 부모는 더 이상 미워할 대상도 아니고, 책임져야 할 대상도 아닙니다. 이런 가족관계일 때는 정을 딱 끊고 좋은 마음으로 그저 편안하게 지내는 게 좋아요.”

“그러면 어떤 기도문을 갖고 수행을 하면 좋을까요?”


“기도문 타령하지 말고 정만 끊어버리면 됩니다. 별도로 기도문이 필요 없어요. 기도문을 만 번 외워도 정을 못 끊으면 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굳이 기도문이 필요하다면 매일 절하면서 이렇게 되내어 보세요.

‘부모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제 인생 살겠습니다. 정은 끊었습니다.’

‘정을 끊겠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게 아니고 ‘정을 끊었습니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정을 끊겠다는 말은 아직 정을 못 끊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정은 끊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대답만 잘하지 말고, 실제로 정을 딱 끊어야 해요. 정을 못 끊고 살면 앞으로 질문자의 인생에 불행이 눈에 훤히 보여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불행하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집안에 태어났든, 그동안 어떤 고통을 겪고 학대를 받았든, 지금만 딱 정신 차리면 누구나 다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과거에 생긴 트라우마에 매이거나 정에 매이게 되면 늘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듯이 그 울타리에서 못 벗어나게 됩니다.”

“네, 스님 말씀대로 정을 끊겠습니다.”

“또 정을 끊겠다고 하네요. ‘스님 말씀 듣고 이제 정을 딱 끊었습니다’ 이렇게 말해야죠. 정을 끊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정을 못 끊었다는 얘기입니다.”

“네, 스님 말씀 듣고 정을 딱 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엎드려 절 받기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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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웃는 질문자를 뒤로 하고 다음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남편과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숙여지지가 않아 많이 다투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시댁에서 시어머니와 아가씨들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다시 남편에게 상처를 주고, 그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힘듭니다.
회사에서 1년에 한 번씩 업무분장을 하고 일을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업무를 많이 받아서 억울한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식용 목적의 개 농장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한국에서 개 식용이 없어질까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친 후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부모님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다고 했던 질문자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인 기독교인의 글을 읽으라]

[한국인 기독교인의 글을 읽으라]

한국인 기독교인의 글을 읽으라
사용자 lutheroak 2021. 2. 28.

몇 분이 어디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해서 올린다 지난 세대의 글부터 읽으면 된다
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역사

(1) 일단 한국 기독교인의 저작 중 전집 형태로 나와 있는 저자들의 저서들을 읽자. 이들의 책을 중고서점이나 새책으로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면 된다. 더 있겠지만 눈에 바로 띄는 것은 다음과 같다. ()안 숫자는 권수. (e= e-version)

  1. 길선주, 
  2. 김교신(8), 
  3. 김인서(6), 
  4. 김재준(18: e), 
  5. 김정준, 
  6. 김흥호, 
  7. 나운몽(24), 
  8. 문익환, 
  9. 박형룡(20), 
  10. 백낙준, 
  11. 변선환, 
  12. 안병무, 
  13. 안창호, 
  14. 양주삼, 
  15. 유동식, 
  16. 유영모, 
  17. 윤성범, 
  18. 이근삼, 
  19. 이명직(16), 
  20. 이성봉, 
  21. 이승만, 
  22. 이용도, 
  23. 이종성, 
  24. 장준하, 
  25. 최병헌,
  26. 최태용, 
  27. 한경직, 
  28. 함석헌(20) 등의 전집.

(2) 신문과 잡지를 읽으면 된다. 대표적인 신문 잡지는 다음과 같다. 복쇄되어 구입할 수 있다. 해방 이전에 수 십종이 더 있다.

1897-1903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7-1907 그리스도신문; 
1900-1909 신학월보; 
1909- 시조; 
1915-1937 기독신보; 
1916- 신학세계; 
1918- 신학지남; 
1922- 활천; 
1927-1942 성서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