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4

알라딘: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2 이도흠 2020

알라딘: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2
 |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2
이도흠 (지은이)특별한서재202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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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쪽


책소개

제1권에서 설정한 의미로 읽는 인류사에 코로나에 대한 상황인식을 곁들였다. ‘디지털 사회와 빅데이터’, ‘가상/증강현실과 재현의 위기’, ‘초연결사회와 공유경제’, ‘생명공학과 호모 데우스: 연기적 생명과 죽음의 의미’, ‘인류세/자본세에서 생명위기와 생명정치’로 나누어 4차 산업혁명을 자연과학과 인문학, 동양과 서양을 융합해 분석하고,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교육적 대안과 대안의 패러다임과 사회를 모색했다.

우리는 이제 ‘간헐적 팬데믹 시대(The Age of Intermittent Pandemics)’에 접어들었다. 코로나 사태의 근본 원인은 인간이 농장, 목장, 광산, 공장, 주거지 개발을 하고자 생태계의 순환을 담보해 줄 ‘빈틈’의 숲마저 파괴한 탓이다. IPCC는 2050년까지 탄소제로에 도달하지 않으면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목차


제1부 의미로 읽는 인류사와 과학기술

제1장 의미로 읽는 인류사 1 - 숲생활기에서 농경혁명과 경제생활기까지
1. 왜 의미로 읽는 인류사인가
2. 숲생활기
3. 석기사용기
4. 언어소통과 집단수렵채취기
5. 농경혁명과 경제생활기

제2장 의미로 읽는 인류사 2 - 철기와 종교의 시대부터 인공지능 시대까지
1. 철기와 종교의 시대
2. 과학/산업/시민혁명기
3.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

제3장 과학기술과 신, 인간, 진리의 관계 - 계몽의 변증법과 과학과 도(道)
1. 종교와 과학의 대립
2. 종교와 과학의 종합
3. 구세주로서 과학과 디스토피아의 매개로서 과학
4. 신과학/운동: 대안의 과학인가, 사이비과학인가?
5. 과학/기술과 도의 종합

제2부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제1장 자동화와 로봇화 - 노동과 자본주의의 양상과 미래
1. 노동이란 무엇인가
2. 로봇시대의 도래와 자동화
3. 로봇자동화와 일자리/불평등 문제
4. 자본주의 체제와 4차 산업혁명의 역학관계

제2장 인공지능의 쟁점 1 - 인간 본성의 프로그래밍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융합적 분석
2. 인간의 존재론과 선을 증장하는 방법
3. 인공지능의 인간화와 가능성과 한계

제3장 인공지능의 쟁점 2 - 초지능과 자유의지의 프로그래밍
1. 근본 원리의 계량화와 컴퓨팅의 발전
2. 인간의 뇌와 인공지능
3. 초지능: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을 초월할 것인가?
4. 자유의지 허구론:자유의지라고 생각하는 것만이 있다
5. 자유의지 실재론:그래도 자유의지는 있다

제4장 인공지능의 쟁점 3 - 감정의 프로그래밍과 공존의 문제
1. 감정에 대한 고전적 이론
2. 감정의 구성이론
3. 감정과 불교
4. AI는 인간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
5. AI 시대에서 인간의 존재론과 위상, 그리고 공존 문제

제5장 로봇화와 인공지능의 대안과 인류의 미래
1. 유령으로서 4차 산업혁명
2. 실상으로서 4차 산업혁명
3. 로봇화와 인공지능에 대한 대안
4.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부록 - 시적/철학적 의미의 창조와 해석의 프로그래밍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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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 - 의미로 읽는 인류사와 인공지능 2010 이도흠

알라딘: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 - 의미로 읽는 인류사와 인공지능  | 4차 산업혁명과 대안의 사회 1
이도흠 (지은이)특별한서재2020-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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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쪽


책소개
의미를 중심으로 700만 년의 인류사를 새롭게 서술한 책이다. 이 역사적 조망에 따라 과학기술과 진리의 관계를 따진 다음에 자동화와 로봇화로 인한 노동의 변화와 자본주의의 양상과 미래를 살펴보고, 인공지능의 쟁점에 대해 ‘인간 본성의 프로그래밍’, ‘초지능과 자유의지의 프로그래밍’, ‘감정의 프로그래밍과 공존의 문제’로 나누어 분석했다. 부록으로 선한 인공지능을 만드는 지혜를 인류와 공유하고자, 시적/철학적 의미의 창조와 해석의 프로그래밍 방안을 실었다.


목차


제1부 의미로 읽는 인류사와 과학기술

제1장 의미로 읽는 인류사 1 - 숲생활기에서 농경혁명과 경제생활기까지
1. 왜 의미로 읽는 인류사인가
2. 숲생활기
3. 석기사용기
4. 언어소통과 집단수렵채취기
5. 농경혁명과 경제생활기

제2장 의미로 읽는 인류사 2 - 철기와 종교의 시대부터 인공지능 시대까지
1. 철기와 종교의 시대
2. 과학/산업/시민혁명기
3.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

제3장 과학기술과 신, 인간, 진리의 관계 - 계몽의 변증법과 과학과 도(道)
1. 종교와 과학의 대립
2. 종교와 과학의 종합
3. 구세주로서 과학과 디스토피아의 매개로서 과학
4. 신과학/운동: 대안의 과학인가, 사이비과학인가?
5. 과학/기술과 도의 종합

제2부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제1장 자동화와 로봇화 - 노동과 자본주의의 양상과 미래
1. 노동이란 무엇인가
2. 로봇시대의 도래와 자동화
3. 로봇자동화와 일자리/불평등 문제
4. 자본주의 체제와 4차 산업혁명의 역학관계

제2장 인공지능의 쟁점 1 - 인간 본성의 프로그래밍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융합적 분석
2. 인간의 존재론과 선을 증장하는 방법
3. 인공지능의 인간화와 가능성과 한계

제3장 인공지능의 쟁점 2 - 초지능과 자유의지의 프로그래밍
1. 근본 원리의 계량화와 컴퓨팅의 발전
2. 인간의 뇌와 인공지능
3. 초지능: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을 초월할 것인가?
4. 자유의지 허구론:자유의지라고 생각하는 것만이 있다
5. 자유의지 실재론:그래도 자유의지는 있다

제4장 인공지능의 쟁점 3 - 감정의 프로그래밍과 공존의 문제
1. 감정에 대한 고전적 이론
2. 감정의 구성이론
3. 감정과 불교
4. AI는 인간의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
5. AI 시대에서 인간의 존재론과 위상, 그리고 공존 문제

제5장 로봇화와 인공지능의 대안과 인류의 미래
1. 유령으로서 4차 산업혁명
2. 실상으로서 4차 산업혁명
3. 로봇화와 인공지능에 대한 대안
4.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부록 - 시적/철학적 의미의 창조와 해석의 프로그래밍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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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원효 : 중생과 함께 - 불교신문 2109

[죽음을 철학하는 시간] 원효 : 중생과 함께 < 분류안됨 < 기사본문 - 불교신문

[죽음을 철학하는 시간] <30> 원효 : 중생과 함께
기자명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입력 2021.09.14 
호수 3683
 


중생을 위해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
경주 분황사에 모셔진 원효대사의 진영. ⓒ불교신문

➲ 회통(會通)의 대가

원효(元曉, 617~686)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말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원효는 전날 밤 시원하게 마셨던 물이 해골에 담긴 사실을 알고 구역질을 한다. 똑같은 물인데도 어제는 시원함을, 오늘은 구토를 느낀 것이다. 내 마음에 따라 대상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어낸 셈이다.

원효의 이야기가 실감 있게 다가온 적이 있다. 오래 전 어느 여름 복날로 기억된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복달임을 한다며 어느 음식점에 갔는데, 다른 이들은 보신탕을 시키고 나만 다른 음식을 주문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나무에 묶어놓고 개를 잡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특히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바라보던 그 눈망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기억이 무의식에 남아있어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순대 내장 비슷한 음식이 나오기에 서비스라 생각하고 먹어보았다. 무척 맛이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일행들은 ‘개고기를 못 먹는다면서 잘도 먹네!’ 하면서 웃는 것이었다. 개고기를 처음 먹게 된 순간이었다.

물론 그 음식이 개고기 수육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먹지 않았을 것이다. 원효 역시 아무리 목이 말랐더라도 해골에 담긴 물을 보았다면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원효와 나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순대 내장이라고 생각하고 먹었던 수육에서 수저를 내려놓았지만, 그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음식을 향한 나의 편견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이 음식을 즐긴 것은 아니지만, 나의 편견만은 버릴 수 있었다. 원효의 지적대로 “마음이 생기므로 모든 것이 생겼던 것이다(心生則種種法生).”

이처럼 같은 대상이나 사건을 마음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바라보는 일은 일상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내 안에서도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로 확대하면 얼마나 많겠는가. 특히 오늘처럼 진영 논리에 빠져 모든 것을 해석하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익숙한 현상이다. 이 과정에서 대립과 갈등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원효 당시에도 종파 간의 갈등이 무척 심각했다. 그들의 쟁론(爭論)이 ‘강과 바다’를 이룰 정도였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에 의견의 충돌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만은 지양해야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원수’가 될 필요는 없지 않는가. 원효는 ‘어떻게 하면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위한 논리를 개발했는데, 그것이 바로 개합종요(開合宗要)다.

개인적으로 원효를 공부하면서 감탄했던 부분이다. 그는 이 논리를 통해 종파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높은 차원에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원효는 불교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일심(一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니까 붓다 가르침의 총체인 팔만대장경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일심이 되는 것이다. 그는 각 종파에서 중시하는 소의경전을 일심의 펼침(開)이며, 이것들을 다시 모으면(合) 일심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화엄종이나 법상종과 같은 종파 또한 일심을 펼친(宗) 것이며, 다시 요약(要)하면 일심과 다르지 않다. 한마디로 일심에 즉(卽)한 개합종요의 원리인 것이다.

이 원리를 물과 얼음, 수증기에 비유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물은 필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펼칠(開) 수 있다. 여름날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는 물을 얼려야 하며, 따뜻한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끓여야 한다. 건조한 방안의 습도를 위해서는 수증기가 필요하다. 물과 얼음, 수증기는 모습이 다르지만 이것들을 모으면(合) 다시 물로 돌아간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모두가 H2O라는 동일한 본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심 또한 물과 같아서 사람들의 성향이나 필요에 따라 화엄이나 유식 등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 원효의 생각이었다. 그는 분명한 자기 철학과 논리를 갖춘 회통(會通)의 대가였다.

흔히 원효를 화쟁국사(和諍國師)라 부르는데, 이는 고려 숙종 때 내린 시호(諡號)다. 한국 회통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인물과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가 특별히 남긴 열반송은 찾아볼 수 없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그의 삶을 기록하면서 ‘원효불기(元曉不羈)’, 즉 원효는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평가하였다. 서구식으로 말한다면 일종의 묘비명이라 생각해서 소개한다.

“각승으로 처음 삼매의 축을 열고,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 바람에 걸렸네. 달 밝은 요석궁 봄날의 꿈은 지나가고,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그림자 텅 비었네(角乘初開三昧軸 舞壺終掛萬街風 月明瑤石春眠去 門掩芬皇顧影空).”

➲ 중생을 향하여

원효를 이야기할 때마다 함께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요석공주(瑤石公主)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설총(薛聰)이다. 설총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며,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그는 불지촌(佛地村), 오늘날 경북 경산군 자인면(慈仁面)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사라나무를 지나다가 산기를 느껴 그 아래에서 원효를 낳았다고 전한다. 어쩐지 석가모니 붓다의 탄생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태어난 곳도 붓다의 마을(佛地村)이 아니던가. 아마 원효가 붓다처럼 위대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와 유사하게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원효는 승속(僧俗)을 넘어선 위대한 인물이라는 긍정적인 평이 많지만, 그저 파계하고 환속한 속인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그렇다면 일연은 원효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원효불기(元曉不羈)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는 원효가 승속에 얽매이지 않는 무애(無碍)의 삶을 살았다고 보았다. 그러한 삶의 지향점은 언제나 높은 곳이 아니라 헐벗고 가난한 대중들이 살고 있는 낮은 곳이었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下化衆生)’ 대승의 이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 모습이 ‘각승으로 처음 삼매의 축을 열고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 바람에 걸렸네.’라는 구절에 녹아있다.

여기에서 각승(角乘)은 원효를 가리킨다. 그 유명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지을 때 소의 두 뿔 위에 붓과 벼루를 올려놓고 완성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또는 두 뿔을 깨달음의 바탕인 본각(本覺)과 수행을 통해 드러내는 시각(始覺)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결국 원효가 깨친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효는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깨침을 향하는 삶에서 깨침을 실천하는 삶으로 일대 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호롱박을 들고 춤을 추면서 중생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자신이 깨친 진리를 고요한 산속에서 즐긴 것이 아니라 거리로 나와 대중과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 역사가 원효를 위대하게 평가하는 이유다.

법당 벽면에 많이 그려진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 단계는 입전수수(入鄽垂手)다. 선(禪)의 최고 경지가 시장에 들어가 사람들과 막걸리 한잔 나누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는 때로는 거지들과 함께 생활을 했으며, 술집 작부들의 애환을 들어주면서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불교에서 깨침을 중시하는 이유가 보살행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중생을 향한 바람은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요석공주에게도 닿았다. 이를 파계라 할지 몰라도, 그에게 승과 속의 구분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었다. 한 여성을 구제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자신이 걸친 옷마저도 거침없이 벗어던진 인물이 바로 원효였다. 어느 봄날의 꿈이라 생각했던 이에게 시비를 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원효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그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어느 날 설총이 분황사를 찾아 소상 옆에서 절을 올리자 소상이 설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설총은 어느 봄날의 꿈으로 원효와 맺어진 인연이다. 분황사를 찾은 일연의 눈에는 아들을 향한 그림자마저 공(空)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원효는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면 모두 그르고 일심으로 소통하면 옳다고 보았다.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에도 그 의미는 크게 다가온다. 지역적으로 동과 서, 정치적으로는 보수와 진보, 종교적으로 불교와 기독교, 생태적으로 인간과 자연 등 소통해야 할 대상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여러 분야에서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날 원효의 화쟁론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 셈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가치를 존중하는 소통철학에는 공멸을 공생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그가 일심으로 돌아가라(還歸一心)고 강조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곧 모든 중생을 위한(利益衆生) 길이기 때문이다. 그 명제는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불교신문3683호/2021년9월14일자]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이도흠 / 화쟁기호학의 이론과 실제 1999

이도흠 / 화쟁기호학의 이론과 실제

이도흠 / 화쟁기호학의 이론과 실제
slowdream 2009. 1. 9. 01:30
===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이도흠 (지은이)한양대학교출판원 1999




주간동아  [이주일의 책]「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입력 1999-10-19 업데이트 2009-09-23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이도흠 지음/한양대학교 출판부 펴냄/503쪽 15,000원▼

예장 합신, “예수는 보살” 손원영 교수 “이단성”으로 규정 - 종교와 진리 2023

예장 합신, “예수는 보살” 손원영 교수 “이단성”으로 규정 - 종교와 진리


예장 합신, “예수는 보살” 손원영 교수 “이단성”으로 규정▶ ‘주기도문’도 ‘나무아미타불’도 선정에 들기 위한 수련법으로 간주... 예장통합도 ‘예의주시’ 결의
종교와 진리 | 승인 2023.09.24 14:25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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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손원영 교수의 이단성 주장 핵심
* 예수는 보살이었다. 우리도 정진바라밀 실천하면 보살이 될 수 있다.
* 기독교만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다.
* 주기도문도, 나무아미타불도 '선정'에 들기 위한 '수련법'이다.
* 기독교, 동학, 불교, 유교... 등 모두 유한한 제도적 종교다.
* 도(道)는 하나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길은 독자성이 있다.




▲ 예장합신 제108회 총회, ‘예수는 보살’ 서울기독대 손원영 교수 ‘이단성’ 규정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신 제108회 총회에서 ‘예수는 보살’ 주장하던 서울기독대 손원영 교수에 대하여 ‘이단성’으로 규정하였다.

합신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위원장 유영권)에서 연구 보고한 손원영 교수의 이단성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 다원주의적 구원론 주장

우리 민족이 믿어온 하느님과 기독교의 하나님은 동일하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유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이유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성서의 하나님과 우리 민족이 믿어온 하느님은 결코 다른 분이 아니라 같은 분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개천절’을 소중히 지키는 교회이다.”(손원영 저, 『내가 꿈꾸는 교회』, 1994, 336쪽)

“최제우의 신비체험을 신뢰한다면, 동학이 섬기는 하느님과 기독교가 섬기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다... 동학과 서학은 서로 다른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부모에게 태어난 이란성쌍둥이 형제랄까?”(손원영 저, 『내가 꿈꾸는 교회』, 1994, 353쪽)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한국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은혜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 밑에 살고 있었다... 한국에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의 일을 하고 계셨다.(「한국문화와 영성의 기독교교육」, 2009, 83쪽)

기독교만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종교가 아니다... 역사적인 기독교만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유일한 종교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역사적인 종교인 기독교만이 하나님을 독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제도적인 종교들이 모두 유한하다고 할 때, 그 중 하나를 절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라는 점을 깊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테오프락시스 교회론」, 2011, 134쪽)

따라서 불도, 유도, 노장도가 동양의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리스도는 이 여러 가지 길을 포용하는 큰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도(道)요 계시이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동양인들에게는 동양의 선지자들을 통해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불도, 유도, 노장도 등이 그것이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의 길을 다 포용하는 큰 길(大道)이다. “도”는 하나이지만 그것이 다양한 것은 민족마다의 경험과 문화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민족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길은 독자성이 있게 된다.(「한국문화와 영성의 기독교교육」, 2009, 81쪽)

종교와 상관없이 평화를 위해 일하면 하나님의 자녀될 수 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든 혹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고, 곧 국적이나 인종,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든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신다는 축복의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다.(손원영 저, 『내가 꿈꾸는 교회』, 1994, 192쪽)



2. 단번에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성 부인



▲ 2018년 12월, 불교 ‘열린선원’ 크리스마스축하법회에서 손원영 교수 설교(사진: 열린선원)


육바라밀을 실천하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중생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날 홀연히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고 모두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손원영 설교, “예수 보살과 육바라밀”, 2018, 열린선원)
(*필자 주; 지난 2018년 12월 9일, 불교 ‘열린선원’ 크리스마스축하법회에서 손원영 교수가 초청돼 “예수님은 육바라밀 실천한 보살이었다”고 설교하였다. 목사가 사찰 대웅전 법회에서 예수는 보살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은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덕목인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반야바라밀을 의미하는 것으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길이란 불교 교리다.
당시 불교닷컴에 소개된 손 교수의 설교 일부를 보면, “제가 알기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는 ‘보살사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을 때까지 모두가 다 고통에서 해방되어 부처가 될 때까지 나 스스로는 부처가 되는 길을 포기하며 중생의 해탈을 돕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의 보살입니다. 말하자면 보살은 위로는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한 자입니다. 한마디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존재입니다. 그가 보살입니다. 그렇다면 불자들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보살’입니다. 예수 보살! 따라서 오늘 불자와 기독교자 함께 공동으로 예수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는 예수가 우리 모두에게 가장 훌륭한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참 인간의 궁극적인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자가 되었든 아니면 기독자가 되었던 예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것입니다.”

손 교수는 또, “예수는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정진수행에 있어서 천천히, 꾸준히 그러나 철저하게 실천했다. 그래서 정진바라밀의 모범이었다. 우리도 정진의 이 세 원칙만 잘 지킨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훌륭한 보살이 될 수 있을 것이다.”(손원영 저, 『연꽃 십자가』, 1994, 36쪽)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선정바라밀의 수행자로 받아들이며, 주기도문을 선정에 들기 위한 수련법으로 만든다...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을 신학에서는 ‘동일본질’의 체험이라고 말한다. 호모우시우스(Homoousious)!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기도를 통해 깨달으신 모범이다. 그런 존재를 일컬어 정교에서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 곧 테오시스(Theosis/ deification/ 神話)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말하자면 기독교인의 꿈이다.

신처럼 우리의 존재가 성화되는 것! 예수께서는 또한 선정에 들기 위한 수련법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교인들은 주기도문 수행을 통해 선정에 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처럼 선정을 실천합시다. 아니 ‘선정바라밀’을 철저하게 수행합시다... 예수께서는 그 누구보다 선정바라밀을 잘 실천하신 분이다. 또 기도 중에 하나님과 하나되는 체험을 하였다.(손원영 저, 『연꽃 십자가』, 1994, 37쪽)

모세와 엘리야의 춘안거 40일 전통은 예수에게로 그대로 이어졌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나이 30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본격적으로 선포하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보내게 된다. 말하자면, 광야에서 춘안거를 보낸 것이다.(손원영 저, 『연꽃 십자가』, 1994, 70쪽)

예수는 춘안거 40일 동안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 지 치열하게 고민하였고, 결국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춘안거 40일이다.(손원영 저, 『연꽃 십자가』, 1994, 71쪽)

생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범으로 가르쳐주신 ‘주기도’를 기억하고, 제자들은 마치 그것을 하나의 주문처럼 반복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사실 동양의 종교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대부분 기도할 때 일종의 ‘주문’ 같은 기도문을 강조한다.

예컨대, 동학의 최제우는 기도할 때,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주문을 되풀이해서 암송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오직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외우라는 염불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철저한 피동의 상태에서 성령을 받기 위해 주기도문을 반복하여 외우던 중에 성령을 체험하였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다.

만약 필자의 이러한 상상이 맞다면, 초대교회는 말 없음의 기도와 주기도 주문을 기반으로 하여 탄생한 수도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관상기도와 주기도문을 철저히 수행하는 것이야 말로 성령을 받는 길이요, 또 교회가 새롭게 다시 탄생되는 비결이다. 따라서 내가 꿈꾸는 교회는 성령을 받기 위해 관상기도와 주기도문을 열심히 실천하는 기도 수행의 공동체이다.“(손원영 저, 『내가 꿈꾸는 교회』, 1994, 38쪽)

그리고. 재발방지 약속 이후에도 문제의 발언은 계속된다.

2022.8.22. 둥근소리 둥근이야기

“우리 조선 사람들이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오래 전부터 아주 대대손손 수천 년 동안 믿어 온 거를 그들이 깨닫게 된 거죠... 하나님이 선교사들 등에 엎여서 조선 땅에 들어온 분이 아니다...”

2022.10.24. 둥근소리 둥근이야기

“...우리 한국에 있었던 당시에 고등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이것을 다 포함하는 것이 풍유도고 그것이 한국의 얼이고 또 기독교의 복음은 그것과 서로 대화해야 된다.”

2023.2.5./ 새길교회 주일설교

“한국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는... 유교를 존중하며 그들을 폐하지 않고 유교의 작은 가르침 하나라도 존중하여 결국은 그걸 완성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불교를 존중하여 그들의 작은 가르침 하나라도 폐기하지 않고 그 가르침을 모두 완성한다는 의미...”

2023.6.8. 둥근소리 둥근이야기

“... 교회가 순수하게 모여서 정경 27권을 정한 게 아니고 그 배경에 로마 황제의 명에 의해서 정경을 결정하게 되었다... 로마 황제의 통치 철학하고 부합하지 않는 문서들은 정경에서 배제가 된 것이죠.”
/

합신총회는 그동안 손원영 교수가 자신의 발언에 오해가 있었다고 하였으나, 석고대죄의 심정으로 드리는 호소 및 재발방지 약속 후에도 여전히 기독론과 구원론에서 이단으로 정죄받기에 충분한 주장들을 이어왔다면서, 교회와 신자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이단성’으로 규정하고 교류금지 및 참여금지 한다고 이대위 청원서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예장 통합 제108회 총회에서도 손원영 교수에 대하여 ‘2년 예의주시’ 결의를 하였다.

Taechang Kim | 김현효 사유하는 도덕경

Taechang Kim | Facebook:








少なくとも日本と韓国で出版された老子道徳経の翻訳解説本のなかで、現在わたくし自身が手元にもっているいるものを一読し、改めて感じたことは、キムヒョンヒョう(前韓国西江大学) 教授の《思惟する道徳経》 (ソナム、初版発行日 2004年)が翻訳と解説の両面で圧倒的に充実し、更なる思考発展に善き示唆と刺激を与える力作. 他の五書はそれぞれ長点と短点がありながら、部分的に目新しさが散見されるけれど、全体的に 真摯活発な公共する深思熟慮の苦労が体感出来ない.


적어도 일본과 한국에서 출판된 노자도덕경의 번역해설책 속에서 현재 내 자신이 손에 갖고 있는 것을 한번 읽고 다시 느낀 것은 김현효(전한국 서강대학) 교수의《 사유하는 도덕경(소남, 초판 발행일 2004년)이 번역과 해설의 양면에서 압도적으로 충실해, 한층 더 사고 발전에 선한 시사와 자극을 주는 역작. 다른 5서는 각각 장점과 짧은 점이 있지만 부분적으로 참신함이 흩어져 있지만 전반적으로 진지하게 활발한 공공 심각한 숙고의 어려움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공제
사유하는 도덕경 
철학으로 다시 읽는 노자
김형효 (지은이) 소나무 2004-06-12



7
100자평 1편
리뷰 1편
세일즈포인트 635

원제 道德經양장본
552쪽
책소개
노자는 모두 81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철학시들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도道와 그 도의 덕德을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전한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도덕경>은 '길(道)에 관한 오디세이의 기록' 인데, 동 서양을 넘나들며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켜온 저자는 도의 핵심으로, 이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 보지 말고, 사실성의 도를 가르쳐주는 근원적 상황으로 인식해야 한다" 고 주지한다.

저자는 위진현학의 인과론적 해석을 기초한 왕필보다는 북송 때의 주석가인 여길보, 소자유, 이식재의 주해가 실린 <도덕경>을 자신의 텍스트로 삼는다. 그들에게서 '열린 사유 방식'이 보인다는 이유인데, 기존의 다른 <도덕경>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주해들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원인을 중심으로 하는 수직하향적인 구조의 인과적 사고가 아닌, '상관론적 사고'로 나아가자고 한다. 만물은 스스로 독자적인 고유성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모두에 대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이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도덕경>에서 사유해야할 지점이라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목차


여는 글
1장 자연의 근원적 사실로서의 도道의 본성과 현상
2장 유물有物의 대대적 차연差延과 성인聖人의 무위법
더보기



책속에서

말하자면 내가 새로이 쓰려는 노자 주석서는 기존의 주석서들과 다른 입장을 향해 가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왜 노자가 지금 21세기에 불교와 더불어 우리의 철학적 사유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데 이 졸저가 작지만 하나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보람은 없으리라. 그리고 이제는 철학적 사유가 과거와 다르게 구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을 펴기 위해 묵시적으로 애썼다.

동서고금의 철학은 결국 두 가지로 대별되는 것 같다. 그 하나는 철학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길을 열어주는 데 큰 안내의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고, 또 다른 역할은 지혜의 길을 인도하고 밝히는 데 그 길을 닦아왔다는 것이다. 전자의 방향에서 철학은 자연과학적이나 사회과학적인 지식의 예비학(propaedeutic)이었다.

 이제 그 예비학의 수명은 끝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제 과학은 철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의 실용적 길을 달려가기 때문이다. 이제 철학에게 남은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전문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의 길과 달리, 지혜의 문으로 안내하고 인도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그 전체의 모습에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류의 가장 높은 지혜의 가르침들을 터득하도록 인도하는 길 닦기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 과학적 지식이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앎을 전문적으로 추구하고자 한다면, 철학은 이 세상을 불변적 도道의 모습에서 증득證得하게 하는 지혜의 탐구와 직결된다고 여겨진다. (본문 중에서)




한국 불교의 기원과 통불교 전통(도입부터 지눌까지)

한국 불교의 기원과 통불교 전통(도입부터 지눌까지)

한국 불교의 기원과 통불교 전통도입부터 지눌까지
유투북스 2012 8 6 1116
대학때 들었던 <한국철학사> 강의의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 써놨던 글이다 대략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라
고 믿는다
불교佛敎의 한국 전파
불교는 고구려 372년에 전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백제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84년이다 이들 두 국가의 특징은 불교가 전래되고 공인
된 시기가 일치한다는 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 국가에서 불교의 전래와 공인이 구분되지 않는다 신라의 경우 불교가 전래된 지 한
참이 지나서야 527년 이차돈 사건으로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한다 신라가 가장 늦게 불교의 전파를 받은 이유는 지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
용했다 삼국시대의 불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기 때문에 남동쪽에 위치한 신라가 가장 뒤늦게 혜택을 보았던 것이다
가야의 불교 전래를 두고 많은 설이 있다 AD 1세기 경에 이미 가야에서는 불교가 전해졌다는 설이 있는데 김해의 은하사를 두고 최초
의 절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통사학은 가야 불교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향토 사학에서는 가야의 불교를 최초로 인정하고 있다 삼국의
불교는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유입된 것에 반해 가야의 불교는 인도로부터 직접적으로 전래되었다는 주장이다 인도에서는 BC 6세기 경에
불교가 전래되어 아쇼카 왕 시대 즉 BC 3세기 경에 국교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인도 불교의 출발은 원시불교로부터 부파불교로 발전하고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 대승불교大乘佛敎와 밀교密敎가 생겨난다 밀교 이후 인도에서는 불교의 전통이 끊어져 버린다
불교의 중국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BC 1세기 경의 일이다 이 때 중국은 모든 형태의 불교 즉 부파불교 대승불교 초기 불교를 동시에 흡수했다
이는 석가가 죽은 뒤 500년 후에서야 중국이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중국은 특히 대승경전을 중심으로 불교를 수용했
다 현존하는 티벳불교는 9세기 경에 본교의 저항을 받아서 성립하는데 이는 밀교와 대승불교가 결합한 형태이다 9세기 티벳불교는 쫑카
파라는 티벳의 지도자가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수용하고 밀교의 이미지를 걷어냄으로써 완성된다
인더스강 유역의 대승불교는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전래된다 한편 비단길 못지 않게 바닷길 역시 중요한 문명의 통로였다 인더스강에
서 출발한 무역상은 하롱베이와 광저우 산둥반도를 거쳐서 한반도에 상륙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연 비단길과 바닷길 중에서 무엇이 먼저
일까 많은 학자들은 정치적 분란에서 자유로운 해로가 더 유력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가야의 불교가 인도에서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중요한 것은 가야의 불교가 무엇을 남겼나 하는 점이다 아쉽게도 한국 철학사에서 가야 불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한 정보
는 전무하다 남겨진 것이 없기 때문에 가야의 불교가 설령 있었다 한들 우리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372년에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는 하지만 불교는 그 이전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불교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화
복禍福을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다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던 당시 중국을 살펴보자 동시대의 중국 불교는 격의불교隔意佛敎 시대였
다 격의불교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격의불교란 다른 이론체계의 뜻에 맞추어 불교를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나라
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자 BC 1세기 경 한나라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 때는 이미 유교가 국가적 종교로서 굳건히
다중지성추구자 홈 Writing 논문에 대한 일상과 꿈 시사이야기 Manage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도덕과 교양을 갖춘 지식인을 요구했는데 이는 한나라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이 때
학문은 이미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서 고전이 사라진 상태였다 제자 백가의 사상이 찬연하게 빛나던 지적 전통은 분서갱유 이후에 유
교 일변도로 변해갔다 이 때 학문이란 금문경서今文經書 즉 서로 옛 경전을 베끼는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유교와 불교
유교는 중국 문화를 이끌어가는 민족적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학문의 가능성이 막혀있는 현실에서 유교가 헤게모니를 쥔 것은 당연한 일
이다 한무제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하고 유교 이외의 모든 경전을 불사르려고 했다 이는 동중서董仲舒에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이
를 보면 장자가 왜 그토록 현세를 기피했는지 명확히 드러난다 장자는 철저한 현실비판가였다 국가와 정치라는 것이 결국은 사람을 해친
다는 명확한 시대인식에서 출발한 장자의 정치학은 결국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의 철학은 도피성
철학이라는 너울을 벋어날 수 없다 적극적으로 현실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철학은 비판 철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유교는 삶과 죽음의 실존적인 문제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공자는 귀신 잡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극도로 현실적인 지식인이었다
이는 공자 개인의 특성일 뿐만 아니라 중국인의 현세 중심적 사상의 표현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중국인은 도교라는 자생
적 민간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병을 잘 고쳐서 장생불사하는 방법 뿐이었다 정말 인생은 의미
가 있는 것인지 죽은 다음에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인간은 끊임없이 고민하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민간신앙의 수준에 머물러 있
었던 것이다
도교에서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흔히 혼백魂魄이라고 부르는 개념을 살펴보자 혼魂은 양기이며 영혼을 뜻
한다 이에 반해 백魄은 음기이며 육체를 가리킨다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적 기반인 氣가 흩어지면 사람이 죽는다 가령 인간이 갑자기
죽는 경우에 백은 흩어지지만 혼은 금새 흩어지지 못한다 이럴 경우 혼은 백도 없이 혼자 남아 허공을 떠도는 것이다 반면 백이 살아있는
데 혼이 죽는 경우가 넋이 나간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죽음에 관한 이론
사람들은 좀 더 세련된 죽음에 대한 설명을 원했다 이 때 바로 서역 즉 인도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던 것이다 한말에 서역을 여행한 지식인
들이 경전을 암기해 와서 번역하는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당시의 불교는 선법이라는 인도의 명상 수행법과 공사상을 담고 있는 선약 사상
이 주류를 이루었다 중국은 끊임없이 인도의 경전을 한자로 번역하는데 이는 나중에 중국에서 불교가 번성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된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불교는 동호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오랑캐가 중국인이 생각하지 못하던 철학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무
척 충격적이었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지식인들이 가장 먼저 했던 작업은 부처가 했던 말을 공자가 했던가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공자는
죽음 이후의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이 때 지식인들은 노자가 오랑캐를 교화시켰다는 꽤 진지한 논의를 만들어 낸
다 이를 보고 불도논쟁佛道論爭이라고 한다 처음에 지식인들은 노자가 인도에 가서 부처가 되었다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인도에서
부처의 스승이 되었다는 말을 만들어 낸다 이런 논의는 유치해 보이지만 실제로 2세기 경 불교가 중화의식을 뚫고 불교가 전파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의 전성시대가 지나고 중국은 위 촉 오 삼국으로 분열이 된다 오랜 평화 시대가 저물고 비로소 전쟁의 시기가 도래한 거이다 이 때 유
교적 지식인은 다시 공황에 빠진다 자칫 학문을 했다가 나중에 누구의 적이 되어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때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은 세상과 등진 도피적 지식인들이 출현한다 장안과 낙양을 뺏기고 남은 후 유교는 그 힘을 부분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유교적 지식인
은 사상의 붕괴를 바라보면서 개인 중심의 사상에 힘을 쏟았다 이 때 대승불교가 대중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행위의 주체는
본인이라는 불교의 심오한 철학과 수행전통 다원론이 매력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초기 불교수입의 특성
중국에 소개된 초기 불교의 성격은 도덕적이었고 수행적이었다 이는 불교의 중심 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평등한 존재
변화 가능한 존재로 본다 이와 같은 불교 사상의 핵심보다 중국에서는 사후세계와 같은 불교의 일부가 큰 인기를 누린다
도피적 지식인들은 현실세계 즉 유의 세계와 반대되는 무를 추구한다 형체가 없는 정신 여행을 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
이다 무심 눈에 세상을 담지 않고 세상과 대립하지 않는 무력한 지식인이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은 불교의 경전을
읽고 공空을 무無라고 번역한다
도가를 거쳐서 불교로 귀의했던 구마라지바는 원래 노자를 공부하는 사람이었으나 유마경을 읽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는 초기 중국불교의
승려 중 하나이다 당시 중국 불교에는 경經 부처님의 말씀과 율律 율법은 있었지만 론論 해설이 없었다 구바라지바는 전폭적인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경전을 번역한다 구무라지바는 당대 지식인으로서 부드럽게 경전을 번역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현장의 경전 번역은
뜻만 그대로 바꾼 것에 반해 구마라지바의 문장은 손질이 많이 가해진 문장이었다 구마라지바 시대부터 비로소 공의 의미가 제대로 이
해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 조론의 번역을 맡았던 것이 고구려 출신의 승조僧肇이다
한국불교의 특성
이와 같은 노력으로 AD 5세기가 되면 중국은 격의불교를 극복하고 종파불교縱波佛敎의 시대가 열린다 한국의 불교는 종파성이 약하다
고 말한다 이는 한국의 불교가 내세기복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일부 사건을 토대로 볼 때 극단적으로 불교냐 국가냐 하는 기로에
섰을 때 한국의 승려들은 국가를 선택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치라는 글을 써야만 했던 신라의 승려 원광이
있다 원광은 중국에 유학을 다녀온 외교문서의 달인이었다 승려는 남을 죽이면 안 된다는 종교적 가치는 국가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했
다 이 때 원광은 자신이 왕의 신하라는 생각에 문서를 작성했다 종파가 약하다 혹은 국가불교이다 라는 평은 그런 점에서 타당한 구석이
있다
승랑僧朗은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중국에서 활동했던 고구려 승려이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이래로 삼국의 승려가 모두
일본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승낭의 제자였던 길장吉藏은 한국의 선禪불교를 창시한 대가로 꼽힌다
원시 인도불교의 특성
인도불교의 특징은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부처가 사망한 이후에 중관학과 유식학 등의 학파로서 존재했다 반면 중국은 인
도에서 어느 정도 성숙한 불교를 종합적으로 전파 받았기 때문에 불교 이론이 종합되어 있는 특성을 보인다 천태종이나 화엄종은 어느 특
정한 학파의 견해라기 보다는 갖은 불교 이론들이 종합적으로 흡수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격의 불교 시대가 끝난 이후 수나라가 들어서자
드디어 중국 불교에도 종파가 탄생한다 가장 먼저 출발한 것은 삼론종三論宗이었고 다른 하나가 천태종이었다 승낭은 삼론종을 일으
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삼론종은 기본적으로 중관학파를 창시한 용수와 그의 제자의 저술을 기록한 3가지 논서를 바탕으로 한 종
파이다
경전이란 크게 소의경전所依經傳과 교상판석敎相判釋으로 나눈다 소의경전이 가장 바탕이 되는 경전이라면 교상판석은 불교 내에서
상충되는 내용을 분석하고 판별하는 작업을 말한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중국은 불교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가 전혀 없었다 따
라서 경전을 해석하는 데에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문제는 부처가 한 말이 여기 저기서 다르다는 것이었다 불교의 진짜 의미를 깨닫기 위
해서 중국의 학자들은 해석 작업에 몰두한다 그래서 교상판석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은 경부처님의 말씀과 론후대의 해설로 나뉜다 불교는 부처의 말이 곧 진리라고 보지 않는다 불교적 의미에서 말이란 진리
를 설파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중국의 교판은 이런 다양한 경전을 섭렵한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삼론종은 특히 논서에 의거하는 경향
이 강하다
방편이라는 말은 원래 불교 용어인데 목적을 이루는 데 가장 적합한 수단을 말한다 이 방편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방편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임시로 해 놓은 수단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원래의 불교적 의미와 다르다 경전 역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지 그 자체가 진리는 아닌 것이다 연기적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보편적인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는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가 방편을 강조하는 까닭은 연기적 세계관에 도달하기 위해서 도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힘을 가진다
그 힘을 이용해서 진리에 도달하고 그 이후에는 그 언어를 버릴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삼론종三論宗
삼론종은 인도의 중관학파의 견해를 이어받은 것이다 용수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 두 가지 차원의 진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진리의 가르침
을 설파하는 진제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인 속제 혹은 세제이다 진제가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면 속제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 구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둘은 어느 하나만 우선시 될 수 없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과정을 통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대상 즉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연기의 법칙과 공 사상이다 연기 사상은 기본적으로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모든 현상을 관계로 설명하는 데 주력한다 이는 인
도의 우파니샤드의 철학과는 대비되는 특징이다 우파니샤드는 리그베다의 전통을 이은 인도의 고대 사상이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이 세
상은 참된 세계가 아니다 세상은 가변적이고 모든 것이 꿈이고 거짓이며 허상이다 리그 베다에 보면 원시 세계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그 세계는 존재와 비존재 참과 거짓의 구별이 없는 미분화된 세계이다 이런 허상의 세계는 나중에 브라흐만이라는 절대적 실체에 대한 믿
음으로 구체화 된다 한편 인간의 내면에는 정신적 실체로서 아트만자아이 존재한다 이 세상의 고통을 깨닫기 위해서 인간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합일되는 순간을 맞이해야만 하는데 그래서 우파니샤드는 끊임없이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해탈에 오르지 못하면 이 고통스
러운 삶이 아트만을 통해서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 수행을 통해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하나되는 순간을 경험하면 해탈의 길에 오를 수 있다
고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우파니샤드는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이며 현세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관념적 사상이다
원시불교의 핵심적 원리
불교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실체를 거부한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이 관계를 떠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연기론이다 연기론은 인과법칙을 말하는데 이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인과율과는 다르다
인과율은 하나의 사건이 하나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일대일 대응인 반면 연기론은 다수의 원인이 다수의 결과를 만든다는 복합적인 설명이
다 한 사물의 존재 근거들은 수 많은 다른 존재들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보기 위해서는 그를 이루고 있는 단백질 그가 받은 교
육 그가 사귀고 있는 친구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모든 복잡다양한 요소들이 한 인간을 구성하고 그 인간은 또 다른 존재에 관여한
인과율의 전제는 존재는 가변적이라는 점이다 사람혹은 사물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연기론은 우파니샤드의 철학과 정 반대편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불교의 사상을 무아無我라고 하는데 여기서 我는 우주적 실체
로서의 브라흐만을 가리킨다 무아론이 마치 인간이 있으면서 없다고 말하는 웃기는 코메디처럼 보이기 쉬운데 여기서 지칭하는 我가 아
트만Atman이라는 사실을 알면 이런 오해는 해결된다
원시불교의 핵심 연기론緣起論
경험적 자아 이외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는 철저하게 현실적인 종교이다
자아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 해탈이란 윤회의 고리를 끊고 환생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해탈이란 경험
적 작용을 통해서 인성이 급격하게 바뀌는 마음의 작용이다
업보라는 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권선징악쯤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적으로 업보는 그런 의미이다 착한 일을 하면 천
국에 가고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간다 이것은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서 원래 업보의 의미를 변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적 의미에
서 업보란 인도의 까르마karma 개념으로서 원인을 말한다 인간의 행위 뿐만 아니라 마음 조차도 특정한 결과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는가 생각을 하면 인격이 바뀌고 결과가 바뀐다 업보란 지금 내가 하는 행동과 생각을 모두 포
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불교에서의 인간은 행위 하는 인간이며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는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불변하는 본
성이 없으며 사람은 악마에서부터 천사까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세상을 이루는 연기의 법칙을 위해서 마음의 수양이 강조되는 것이다
공空 사상
이번에는 연기와 함께 불교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공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자 空은 비어있다는 뜻이다 간단한 예로 자궁이 비었다는 것
과 자궁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 자궁이 비어있다는 것은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창조적 공간이 있다는 말이다 존재가 비어있는 까닭은 다시
연기하기 때문이다 원래 존재는 서로의 영향을 받고 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해 나가기에 비어있는 것이다 인간을 이루고 있는 세포는 계속
분열을 하기 때문에 7년을 주기로 인간은 완벽하게 다른 세포를 가진다 그렇다면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나인가 누구도 7년 전
의 나와 지금의 나가 완벽하게 같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나고 있는 사람 사회적 지위 가진 재산 세포까지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
다 그 때의 나가 지금의 나가 아닐 수 있는 이유는 존재가 비어있기空 때문이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연기론의 가르침을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성이 없다는 것은 결국 무아론과 통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승불교의 불성론 즉 모든 사람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논리가 과연 초기불교의 계승인지 궁금해진
다 근본적으로 불성론이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대치되지는 않는다 초기 불교의 가르침이 연기론과 공사상을 표현한 것이었다면 불성론은
그것을 깨닫기 위한 수행론에 충실한 이론이다 이 세상이 연기와 공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그것을 깨닫는 과정은 다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연기와 공을 알고 있는 사람조차도 왜 사물에 불변하는 속성이 있다고 끊임없이 기만 당할까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있다 잘못된정확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에 본성이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
다 나의 손이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상어이다 이 어법은 내가 따로 있고 내가 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언
어는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체의 생각을 뒤바꾸어놓은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의 일생을 살아간
다는 말은 더 코메디다 일생을 살아가지 않는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문장에 따르면 초월적인 내가 마치 인생
을 살아가고 있는 경험적 자아를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왜 부처는 일생 동안 설법을 하고 다녔을까 따지고 보면 부처만큼 수다스러운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80 평생을 설법
하고 다녔으니 오죽 말이 많았을까 언어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리에 도달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은 언어 밖에 없다 언어는 진
리에 도달하기 위한 유용한 방편이며 속제이다 나가르지나가 부처를 위대한 설법자라고 말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형
이상학적 말장난이나 일삼던 장자와 다른 점이다
다시 격의불교 시대로 돌아가보자 바로 진제眞鍗와 가제假鍗가 하나라는 주장을 했던 사람이 승조이다 승조는 두 진리는 다스리는 이
치가 다르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진제와 가제를 하나라고 보았다 속제俗鍗가 필요한 이유는 모든 사람의 특성이 다르기 때
문이다 그 사람의 가정환경 사상 지적 수준에 맞는 언어속제로서 그들을 깨우쳐야 하기 때문에 속제가 필요한 것이다 승낭은 승조의
논의를 복원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학자로 꼽힌다 다시 중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구바라지바와 승조 이후 불교의 관심은 불성론으로 집중된다 승낭이 공사상을 재편한 이후 삼론종과 천태종은 중관학파 위주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한편 7세기경 현장법사는 인도에서 유식학을 배워서 중국에 전파하는데 중국에서는 유식학이 법상종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때
원측圓測은 불교 지식을 갖춘 승려로서 구유식과 신유식을 집대성하여 새로운 형태의 유식학을 발전시켰다 19세기 청나라 말기에 중국
에서 불교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 때 유식학은 독일 관념론과의 비교 연구를 하면서 더욱 발전한다 이 때 다시 주목 받게 된 학
자가 바로 원측이다 원측의 불교는 티벳의 쫑카파의 저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유식학에서 원측이 얼마나 커다란 역할을 차지했는
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식학이란 무엇인가
유식은 유식무경有識無境을 줄인 말로 오직 마음만 있을 뿐 대상은 없다는 생각을 골자로 하고 있다 서양적 개념으로 보자면 유심론唯
心論에 가깝다 기본적으로 세상은 연기적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지 없는지는 마음에 의해서 결정된다
고 보는 것이 유식학의 견해이다 초기 불교에서 마음은 6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이것을 육식六識이라고 하는데 육식은 의식 신식 설
식 비식 이식 안식으로 구분된다 육식의 기본은 감각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감각은 어떠한 마음의 작용을 일으킨다 거꾸로 이
야기하면 대상이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대상을 통해서 마음이 일어나는데 바로 그 마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연기의 세계를
믿거나 혹은 믿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유식학은 의식에 대한 논의를 더 심화시켜 나간다 의식은 제6식인 法式과 제 7식인 量識 제 8식인 알라야 식으로 나뉜다 법식이란 대
상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의식이다 가령 사과나 배를 보고 이것이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바로 법식에 해당된다 양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고이다 양식이 지나치게 강하면 아집으로 발전한다 마지막으로 알라야 식은 처음에 만들어진 의식이 변화된 상태를 말한다 알라
야 식은 일종의 환영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과거의 기억이나 의식이 나중에 다른 형태로 바뀌면서 원래의 의식은 변질된다
種子그 전의 인식작용은 나중에 행위로 연결되며 행위는 다시 종자를 만들어낸다 의식이란 헛바퀴를 돌듯이 환영과 대상 사이를 넘나들
면서 사람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종자는 과거의 기억에서 만들어진 환영이기 때문에 올바른 사고를 해친다 따라서 의식의 악
순환을 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알라야식은 이 순환을 지속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고정
관념과 편견 그리고 오해는 바로 알라야식의 경향에서 출발한다 한 떨기의 백합을 볼 때 우리는 순결이라는 의미를 덧씌운다 실제 순
결과 백합은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알라야 식의 경향성은 백합을 순결한 백합으로 보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유식 사상의 문제 의식은 이 지점에 있다 세상은 공한데 왜 우리가 보는 세상은 의미로 온통 점철되어 있을까 우리의 눈이 사물을 제대
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이 편견으로 가득 하기 때문인데 이 편견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마음이다 유식은 마음을 세분화함으로써 관념
을 극복하고 실체를 직시하는 방법을 모색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문제의식은 중관의 사상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중관은 모든 것이 규정되
어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왜 이럴까 라는 문제를 더 집요하게 파고든 것이 바로 유식학이라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연기론과
공 사상은 서로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한가지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원측은 현장의 수제자로서 8식설을 제대로 배운 승려였다 현장이 인도에 갔을 대에는 이미 불성론을 받아들인 상태였는데 불성론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불성에도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열반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불성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일찬제에서는 부처
가 될 수 없는 사람도 있다고 말한다 언뜻 보면 이 둘은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서로 다른 방편으로 활용된다 모든 중생이 불성
이 있다는 말은 곧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줄 수 있다 반면 수행하는 사람에게 잘못하면 부처가 못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일찬제의 논리도 타당한 것이다
원효의 깨달음
의상과 원효는 원측에게 유식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멀리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 중 첫 번째 시도는 고구려 군대에게 적발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시도에서 원효는 해골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고 의상은 그대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에 성공한다 알려진 바로 의상이
귀족적 출신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상당부분 잘못 된 것이다 원효와 마찬가지로 의상 역시 교단 내에서는 아웃사이더였다 나중
에 의상이 귀국한 이후에 신라의 보수적 교단에서는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의상의 저술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원효는 해골물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는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유식학을 공부하러 가는 도중에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라는 깨달
음을 얻었다 마음을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마음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그에게 유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경전
에 도통하고 저술을 많이 남긴 박학다식한 승려였다 또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 그는 반속반승의 혼합된 삶을 살았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결혼해 설총을 잉태시킨 것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원효가 번역했다고 알려져 있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는 인도에 원작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중국 불교 이론의 중심이
되는 저작이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이 책은 대승불교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기 위한 책이다 책을 잠시 살펴보자 一心은 이 책을 관통
하는 중요한 사상이다 일심은 사람의 마음의 특성을 말한다 이 마음一心은 부처가 되는 마음 본래 무엇으로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마음
이다 본래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은 곧 불성佛性을 말하는데 이는 중생을 수행의 길로 이끌기 위한 수단이며 존재론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불성이 있기 때문에 수행자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는 있지만 불성 자체가 이 마음 속에 숨어있는 실체는 아닌 것
이다 살펴본 바에서도 알 수 있듯 대승기신론서에는 유식과 공 그리고 불성론이 혼재되어 있다 이 마음이 유일한 마음이다유식 이 마
음은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는다공 이 마음으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불성 대승기신론서에 나오는 유명한 비유를 보자 생선을 싼
천은 생선 비린내가 날 것이며 향을 싼 천은 향의 기운이 풍겨져 나올 것이다 마음은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을 들여다 보는 데에는 두 가
지의 문이 있는 데 그 중 하는 眞如이고 나머지 하나는 生滅이다 진여란 공의 이치를 바라보는 본질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생멸은 끊임없
이 변화하는 마음의 상태를 바라보는 현상적 관점이다 이 두 가지 문을 통해서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하나이다 마음의 특성은 다시 삼대三大로 나누어진다 삼대는 마음이 본질적으로 비어있고本 그 마음은 어떠한 작용을 일으키
며相 그 작용은 행위를 일으키는用을 말한다 마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마음을 일으킨 자가 어떤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이 바로
마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행위가 곧 행위자라고도 말할 수 있다
원효의 중심 사상은 화쟁론和諍論이다 불교 내에 다양한 이론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원효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복잡 다양한 불교를 바라보는 방법으로서 화쟁론이 대두된다 먼저 원효는 가르침의 서열화에 반대한다
이는 당시 유행처럼 이루어지던 교상판석에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교상판석은 번역과 비교를 통해서 가르침에 지위를 매기려는
수단이다 그러나 원효가 보기에 모든 가르침은 진리로 이르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에 차별적인 지위를 부여해서는 안되었다 방편은 약과
같은 것이다 건강한 사람에게 약은 무가치하지만 병자에게는 약이 필요하다 방편은 누구에게 적합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만병통치약
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중생의 어려움과 실정에 맞는 방편만이 존재할 뿐이다 일단 모든 방편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나면 화쟁론의 결과
를 또렷하게 볼 수 있다 화쟁이란 방편들이 공존하는 다원주의와 같은 역할을 한다 어떤 가르침이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차별성을 배
제하면 모든 방편을 검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방편이 존재하는 가운데 진리로 이르는 길이 더 넓어지는 것이다
신라말에 우리나라에는 선불교가 수입된다 선불교라는 말은 세종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쓰이기 시작한다 엄밀이 말하면 도의가 전한 것
은 남종선이다 당시 중국에는 북종선과 남종선이 있었는데 북종선은 신수의 <능가경>을 주 경전으로 하는 인도불교의 전통이 강했다 남
종선은 혜능의 <금강경金剛經>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더 윗대로 올라가면 선불교의 전통은 보리달마로부터 출발하는데 혜능의 금강경
은 달마의 사상과 다르기 때문에 남종선과 북종선을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혜능은 六祖壇經이라는 어록을 남겼는데 어록은 저술
과 달리 선상의 말을 기록한 책이다 어록은 있는 그대로의 말을 옮긴 것이기 때문에 고급의 한문으로 씌여진 논서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
다 그런데 육조단경이 혜능의 어록이 맞는가 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돈황에서 발견된 선종의 어록을 보면 육조단경도 내용이 조금씩 다
르기 때문이다
선불교의 정수
혜능慧能은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야 한다는 돈오점수의 사상을 가졌다면 신수는 인도의 불교 수행을 통해서 한번에 해탈에 이를 수 있다
는 점에서 달랐다 달마와 혜가의 일화를 살펴보자 달마가 설법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혜가가 찾아와 가르침을 달라고 했다 무엇이 괴롭
느냐고 달마가 물었더니 혜가는 마음이 괴롭다고 했다 혜가는 자신의 팔을 잘라서 달마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자신이 이 나라의 장수인데
자기가 죽인 사람들이 꿈 속에 나타나 자기를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달마가 말했다 마음이 괴로우면 마음을 꺼내 와라 혜가는 달마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혜능은 이 일화에서 나온 것처럼 모든 원리를 한번에 꿰뚫는 깨달음의 상태를 지향했다
혜능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나무꾼이었는데 어디에선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선불교의 5조인 홍인을 만났다 홍인은 혜능이 남쪽에서 올라왔다는 사실을 알고 오랑캐가 여기는 무엇 하러 왔느냐고 꾸짖었다 혜능
은 불성佛性에 오랑캐가 다 어디 있느냐고 받아 쳤는데 이를 보고 홍인은 혜능을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원래 홍인에게는 신수라는 총
명한 제자가 있었다 신수는 깨달음에 대해서 거울에 먼지를 털듯이 매일 자신을 닦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 혜능은 원래 아
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터는가라고 반문했다 이를 두고 홍인은 혜능을 깨달았다고 인정하고 금강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때 선불교의
전통은 신수로부터 시작되는 북종선과 혜능의 가르침을 따르는 북종선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앞서 설명했듯 혜능은 존재를 꿰뚫는 혜안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경전을 굴려야지 경전이 나를 굴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혜능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이 말은
선불교의 핵심적 사상을 응축한 것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에는 언어로서는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인데 이 말은 교판불교에 대한 비판이
라고 여겨진다 교판 불교는 경전을 해독하고 비판하는 데에 주력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선불교가 언어적
가르침을 도외시 한 것은 아니다 진리에 도달하는 데에 언어적 가르침이 필요하되 진리에 이르고 나면 말조차 필요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강을 건넜으면 땟목을 버려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것이다
의천은 남종선이 활발하던 당시 중국에 유학을 갔다 의천은 화엄종과 천태종 등 다양한 불교의 갈래들에 대해서 심도 있게 공부를 했다 그
중에서도 의천이 전공으로 했던 과목은 불교의 모든 이론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종華嚴宗이었다 중국에서는 3차례의 법란 즉
승려가 박해를 받은 일이 있었다 당나라 때에는 중국 전체에 걸쳐 불교를 탄압했는데 이 때 많은 문헌이 불타거나 소실되어서 중국 불교의
지형이 바뀌게 되었다 대부분 서적으로 남아있던 화엄학의 경전들이 없어졌다 이 때 의천도 탄압을 피해서 오월지역을 갔다 의천은 자신
이 전공으로 하던 화엄종이 박해 받는 것을 보고 내가 귀국하면 꼭 화엄종을 일으키리라고 했을 정도이다 화엄종은 교판 불교의 정수로
서 모든 불교의 이론이 종합적으로 녹아 있지만 수행론은 부족했다 반면 선종은 이론이 부족하지만 수행과 실천을 강조한다 천태종은 이
중간쯤에 위치한 것으로서 이론 불교이지만 선불교에서 수행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의천은 교판 학자로서 선불교에 대한 악감정을 가지
고 있었다 그는 화엄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에 돌아와서 천태종을 일으켰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천태종 속에 선불교의 전통
이 어느 정도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여금 선불교 자체를 없애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지눌은 모든 가르침은 하나라
고 주장하며 선불교를 적극 수용했다
통불교의 나라 한국
한국 불교의 특징을 흔히 통불교通佛敎적이라고 말한다 한국 불교에서는 종파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으며 수행론과 이론이 종합되어 있
는 특성을 보인다 우리는 원효의 화쟁사상으로부터 한국 통불교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의천은 선 불교를 배척하였기에 통불교 전통을 이
어받지 않았다 그는 원효의 사상을 찬양하였지만 그의 전통을 이어받지는 못했던 것이다 한국에 팽배한 선불교에 대한 오해는 불교가 침
묵의 종교라는 점이다 선불교는 기본적으로 행위 하는 인간을 요구한다 내 일상의 삶을 종교적 삶으로 승화하는 것이야 말로 선불교의 목
표인 것이다 게다가 선승들은 일생 동안 말로서 설법을 하고 다닌다 이런 전통을 볼 때 선불교의 전통은 말하고 행위 하는 것이라 할
만 하다
선종의 계보는 부처까지 맞닿아 있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들로부터 상당부분 조작된 것으로 사실과는 다르다 계보는 선불교가 정통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후세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족보이다 신회는 기존의 교단을 비판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승려로서 혜능
을 6조로 세웠다 이 후 신회의 계열은 사라졌으나 그의 제자인 청원 석두 마조는 중국 불교의 주류를 남종선으로 바꾸어 버린 주역들이었
다 신라에 들어온 구산선문은 마조 석두 계열의 남종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법랑은 처음으로 신라에 선을 전래하고 도의는 남종선을 배워 왔지만 기존의 보수적인 교단은 혁신적인 선불교를 배척했다 도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하지 않는 것이 전하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구속하느니 차라리 버려라 일단 신라에는 선불교가 수입되었
고 고려 건국 이후에는 교판불교와 선불교가 경쟁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지눌은 한국 불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선의 전통과 교학 불교가 공존할 수 있다는 회통론을 주장하였다 지눌은 분
명히 교판 불교의 전통을 인정하였지만 선과 교판을 똑 같은 위치에 놓은 것은 아니었다 지눌이 보기에 교판 불교는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론으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반면 크게 깨닫기 위해서는 실천과 수행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지눌은 강조한다
지눌은 수행과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당시 고려 불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있다 당시의 고려는 승려가
마치 사회 진출을 위한 도구처럼 활용되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선과라는 시험을 통해 승려를 일종의 공무원처럼 고용했다 당시의 승려들
은 진리를 얻으려는 노력 보다는 왕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자신의 신분상승만을 꾀했다 이런 부패한 상황 속에서 지눌은 승려는 수행을 통
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자신의 본분에 따라 도를 닦는데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 지눌의 주장이었다
그는 간화선看話禪의 수행론을 받아들였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 수행방법이다 화두란 어려운 말이 아니라 우리말
로 말이라는 뜻이다 이 수행을 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의심이 되는 말을 하나 정해 놓는다 그리고 나서는 이 말에 대한 의심이 풀릴 때
까지 정신을 집중하고 그 말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것은 다른 누구의 가르침이 아닌 철저한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다 간화선은 폭탄에
비교될 수 있다 폭탄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 폭탄을 이리 저리 분해해보고 폭탄의 제원을 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은 폭
탄을 터뜨려 보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수행자는 관념들이 해체되는 과정을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다 간화선으로 수행을 하다가 종
국에는 알라야식 즉 무의식에서조차 자아의 관념이 사라지는 상태가 되면 수행자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중생이 커다란 깨우침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돈오의 단계이다 돈오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으며 나와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존재론적 믿음
에 대한 깨달음이다 내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여래장이라고 표현하는 데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마음이다 마음이 공하고 연기론
적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와 같은 상태를 진여와 생멸이 다르지 않다
는 말로 표현하였고 화엄학에서는 이理와 사事는 둘이 아니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아직 깨닫지 못하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상대적인 깨끗함과 더러움에 물들어 있는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
려운데 그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학이다 여러 가지 교학적인 가르침은 중생에게 이론적으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지눌은 돈오가 없는 수행은 참 수행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돈오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부패와 세속에 찌든 고려 불교에 대한 통렬
한 비판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두번째 단계인 점수는 돈오를 바탕으로 과거의 습기習氣를 씻어내는 일이다 돈오를 경험한 이후에도 중생의 마음 속에는 번뇌가 끊이지
않는데 이를 습기라고 한다 점수는 이 습기를 없애기 위한 수행 방법이다 점수는 또한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장애를 벗어나는 단계이기도
하다 지적인 이해는 분명 수행의 길에 들어서는데 도움을 주지만 결국 그 방편 역시 장애가 되어 버리고 만다 강을 건넜으면 땟목을 버려
야 하듯 이론적 이해가 아닌 마음에만 집중하는 방법이 바로 점수의 단계인 것이다
마지막 증오證悟의 단계는 바로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경지이다 지눌에 따르면 돈오와 증오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경험적인 인격
의 변화라는 점에서 보면 증오는 돈오와 현격하게 다른 차원이다 돈오가 지적으로 이해한 깨달음이라면 증오는 그것이 나와 하나가 되는
완벽한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지눌의 수행론은 후대의 불교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간화선 등의 수행방법은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많은 수행
자와 불교인들이 그의 저서를 연구한다 그만큼 그의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지눌을 빼놓고서는 한국의 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탄허, 21세기 원효… 이젠 ‘탄허학’ 시작할 때”  < 현대불교신문 2022

“탄허, 21세기 원효… 이젠 ‘탄허학’ 시작할 때” < 학술ㆍ문화재 < 문화 < 기사본문 - 현대불교신문

“탄허, 21세기 원효… 이젠 ‘탄허학’ 시작할 때” 이전 기사보기다음 기사보기
기자명신성민 기자
입력 2022.01.25


‘탄허학 연구’ 펴낸 문광 스님

한학과 중문학 공부하던 중
불교에 관심… 출가 이어져
탄허 저서 통해 출가 당시에
막혔던 의문점들을 해결해

“마음 이야기하면 모두 내전”
‘회통’ 탄허 스님이 보인 ‘體’
易經·미래학 등 실천적 행보
현실적 적용 탄허 사상의 ‘用’

핵심 뽑은 國文 불교개론 통해
제대로 된 불교 접하도록 해야
한문 전문가 양성에도 힘써야
문광 스님은… 해인사 원당암에서 각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통도사에서 보성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직지사에서 성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동국대학교 선학과·불교학과 학사학위,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석사학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철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3년에 제월당 통광선사로부터 전강 받아 경허-한암-탄허-통광으로 이어지는 전통 강맥을 전수했다. 법호는 법운(法雲)이다.제3회 원효학술상(대학원생 부문)과 제1회 탄허학술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계종 교육아사리이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이다. 저서로는 〈탄허선사의 사교 회통 사상〉 〈한국과 중국 선사들의 유교 중화담론〉 등이 있다.

탄허택성(呑虛宅成, 1913~1983) 대종사는 평생을 불교 경전 역구와 번역에 매진하며 선교를 회통한 선지식이었으며, 동양 고전과 서양 철학을 융섭해 세상의 이치를 가르쳤던 선지자였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탄허 대종사를 “몸은 산사에 머물렀으나 눈은 우주의 운행을 꿰뚫었다”고 평했다.

이렇듯 탄허 대종사는 불교의 경·율·론과 선(禪)을 비롯해 유교, 도교, 기독교를 모두 섭렵했던 수행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렇지만 대종사의 사상에 대해 대중들은 미래를 꿰뚫은 예언 정도로만 인식했을 뿐 어떤 깊이가 있는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간 탄허 대종사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진행되지 못했다.

하지만, 한 학승의 열정은 탄허 대종사의 사상과 가르침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문광 스님(조계종 교육아사리)은 지난 2013년 탄허 선사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탄허학’을 주창했다.

당시 스님은 “대강백, 대학승, 대선사, 대종사, 대석학, 교육가, 사상가, 철학자, 대도인 등등 그 어떤 하나의 수식어를 붙여도 부족한 인물이 바로 탄허 선사”라고 규정하며 “탄허 스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찬란한 가르침인 화엄(華嚴)의 사사무애(事事無碍)로, 유불선(儒佛仙)의 심성수련(心性修練)으로, 참선(參禪)과 간경(看經)의 겸수(兼修)로 지구인 전체의 고통과 마음의 병을 치유해야 한다. 이젠 ‘탄허학’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제안했다.

그로부터 9년, 문광 스님은 탄허 스님 연구로 최초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공로로 제1회 탄허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탄허학’을 규명·정립하는 연구서인 〈탄허학 연구-21세기 한국학의 새 지평〉을 발간했다.

〈탄허학 연구〉는 문광 스님이 탄허 스님의 사상과 가르침에 대한 연구한 궤적을 담고 있으며, ‘탄허 사상’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전하고 있다.

문광 스님은 ‘탄허학’을 ‘체(體)’와 ‘용(用)’으로 구분해 설명한다. 스님에 따르면 탄허학의 ‘체’는 “마음 바깥에 외도지 마음을 이야기하면 모두 내전”이라고 했던 탄허 대종사 특유의 ‘회통’이다.

“탄허 대종사는 불교에만 국한하지 않고 유교의 심(心)이나 도교의 도(道)까지 스펙트럼을 넓혀 놓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도 넓게 해석했습니다. 탄허 대종사는 실제로 한문본 성경을 모두 외우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한문본에서는 ‘허심자 복의(虛心者 福矣)’라고 합니다. 대종사는 ‘여기에 마음이 가난한 자가 어디 있냐’고 지적합니다. 즉 ‘허심자’는 ‘마음을 비운 자’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이 복이 있고, 천국에 이른다는 것이죠. 이렇듯 마음을 이야기한다면 모두 내전이라는 게 대종사의 말씀입니다. 일주문을 저 아래까지 넓혀 놓으신 거죠.”

탄허학의 ‘용’은 탄허 대종사가 보였던 교육·역경 사업부터 미래학·경세학까지 실천적 행보라고 문광 스님은 설명한다.

문광 지음/ 조계종출판사 펴냄/ 2만 8000원

특히 문광 스님은 저서에서 탄허 대종사의 미래학과 민족사상을 총괄해 ‘간산사상(艮山思想)’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대종사가 출가하기 이전에 자(字)가 간산(艮山)이었고 대종사 역학 사상의 핵심이었던 〈정역〉도 간방과 간도수를 중심으로 지축이 바로서고 역사의 종시(終始)가 이뤄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님은 “탄허 대종사의 역학 사상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정역〉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종사가 강의 때마다 〈정역〉을 거론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학계는 아직 〈정역〉에 대한 연구가 부진합니다. 30년 전에 입적한 스님의 견해에서 진척을 보인 불교계의 정역학 연구 성과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렇듯 선교는 물론 동양 고전, 서양 철학을 아우른 탄허 대종사를 문광 스님이 20년 동안 연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문광 스님은 “출가 당시 가졌던 의문점들이 탄허 대종사의 강의와 저서를 통해 해결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탄허 대종사의 저서를 통해 의문점을 해결할 수 있던 것은 문광 스님 역시 이를 알아볼 수 있는 종자를 가졌기 때문이다.

문광 스님은 한학자인 아버지에게 한학 배워 10살 무렵에는 한시를 지을 정도의 실력이었고, 대학은 연세대 중어중문학과에 진학해 중문학을 배웠다. 이 과정에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고 결국 출가하게 됐다.

“연세대 중어중문학과 석사학위 논문이 〈한국과 중국 선사들의 유교 중화 담론〉(원효학술상 수상작)인데 준비하면서 감산덕청, 우익지욱, 퇴옹성철, 탄허택성 등 한국과 중국 선사 네 분을 비교·연구했습니다. 한데 탄허 대종사를 제외한 3명은 연구 자료가 많은 반면 대종사의 연구는 전무한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탄허 대종사를 연구해야겠다는 발원을 세우게 됐죠.”

문광 스님이 “20세기 한국 사상의 정수를 20세기 한국의 실존 인물에서 상징적으로 찾아본다고 할 때, 그 하나의 해답으로서 탄허 대종사를 꼽는다” “회통의 대가였던 탄허 대종사는 현대판 원효”라고 단언하는 것은 지난 20년 동안 연구한 결과다.

스님은 “유불선 삼교의 동양 정통 사상을 하나로 일이관지(一以貫之) 하고, 거기에 기독교와 서양 사상까지 겸해 융합회통(融合會通) 하면서도, 인간의 영원한 과제인 심성 수행을 선교겸수로 온전히 수행한 뒤 제시했다. 여기에 인재 양성과 역경·교육 사업의 보살행까지 총망라한 20세기 한국학의 ‘학종(學宗)’은 단연 탄허 대종사뿐”이라며 “대종사의 사상은 몇몇 소수자들의 연구로 그 전모가 밝혀질 수 없는 광활함이 있다. 더 늦기 전에 ‘탄허학’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광 스님은 탄허학의 연구 방향부터 승가교육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특히, “탄허 대종사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현재 이 지구상에 펼쳐지는 모든 스마트 시대의 복잡다기한 양상들을 화엄학(華嚴學)과 정역학(正易學)의 소통, 동양학과 서양 과학의 회통 등을 포함해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하며 “참선과 명상을 비롯한 불교의 정수와 유불선 삼교를 융합한 동양 정신을 바탕으로 새롭게 인류를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해 낼 수 있는 교육시스템의 구축까지 확장돼야”함을 문광 스님은 강조했다.

승가교육에 대해서는 투트랙 전략을 제시했다. 시대가 바뀌어 모두가 한문과 고문을 다룰 능력을 기를 필요가 없어진 만큼 기본교육은 제대로 된 한글 개론서로 가르치고, 전문적으로 한문과 고문을 다룰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할 것을 주문했다.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문광 스님 TV’를 통해 탄허 사상과 불교를 강의하는 문광 스님은 탄허학 연구를 위해 탄허 대종사의 강의 자료 등이 디지털 아카이브화 하는 작업도 계획 중이다.

“제가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탄허 대종사의 아카이브가 구축돼 많은 사람들이 대종사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연구자들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회통’의 탄허 ‘사상’ 집중 연구서 < BOOKS 현대불교신문 2020

‘회통’의 탄허 ‘사상’ 집중 연구서 < BOOKS < 문화 < 기사본문 - 현대불교신문

‘회통’의 탄허 ‘사상’ 집중 연구서
기자명박재완 기자
입력 2020.09.06

탄허 선사의 사교 회통 사상


민족사학술총서 73권 출간
문광 스님의 박사학위 논문
‘사교 회통 사상’ 집중 고찰

탄허 선사의 사교 회통 사상 / 문광 지음 / 민족사 펴냄 / 2만8천원



민족사학술총서 73권 〈탄허 선사의 사교 회통 사상〉이 출간됐다. 책은 한국불교의 대표적 고승인 탄허(呑虛, 1913~1983)의 사상에 관한 연구서로, 탄허 스님 전공 국내 1호 박사인 문광 스님의 박사학위 논문(한국학 중앙연구원)을 엮은 것이다.

책은 탄허 스님의 유교·불교·도교·기(기독교)를 융합하여 일이관지한 ‘사교 회통 사상’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하여 고찰했다. 탄허 스님의 사상을 단편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얼개와 일관된 사상체계로 보았다.

또 그의 회통사상을 동양의 3교와 더불어 기독교까지 확장하여 고찰했다. 다시 말해 책은 각기 독자성과 나름의 자기완결성을 가지고 별도로 존립할 수도 있는 선사상, 화엄 사상, 역학 사상, 유학 사상, 노장 사상, 기독교 사상, 간산 사상 등을 ‘사교 회통’이라는 하나의 얼개와 ‘심성(心性)’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수렴하여 연구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탄허 스님의 학술과 사상이 거대한 유기 체계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밝혔다.

△제1장에서는 연구의 연기(緣起)와 연구 목적, 연구 방법 등을 밝혔다.

△제2장에서는 탄허 스님의 생애를 ‘회통 사상의 형성’이라는 측면에 집중하여 출가 전의 학통과 출가 후의 법맥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회통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고 완성되어 갔는지 분석했다.

△제3장에서는 탄허 스님의 회통 사상의 근본 원리를 선사상과 화엄사상을 통해 추출했다. 먼저 ‘회통’의 일반적인 의미와 탄허 스님이 말하는 회통의 기본정신이 무엇인지 살폈다. 한국불교사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회통 사상의 역사를 간략히 검토하고 그가 영향 받은 원효, 최치원, 함허 등의 회통론을 고찰했다. 원효의 화쟁회통의 정신과 최치원의 포함삼교(包含三敎)의 학술은 그의 회통론의 근거가 됐고, 함허의 “천하에 두 도가 없고 성인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언명이 그의 회통 사상의 상징이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제4장에서는 불교를 중심으로 역학, 유학, 노장학, 기독교를 회통한 사교 회통 사상의 실질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제5장에서는 탄허 스님의 삼교의 말세론에 대한 해석과 앞으로 다가올 지구의 미래에 대한 예견인 미래학, 그리고 한국의 민족적 역학인 김일부의 〈정역〉에 대한 그의 독자적 해석을 분석했다. 박재완 기자 wanihollo@hanmail.net 기자의 다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