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붓다, 일어서다 - 21세기 한국과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eBook] 붓다, 일어서다 - 21세기 한국과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epub
손석춘 (지은이) | 들녘 | 201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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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인가?”, “불교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획득하는가?” 하는 물음을 안고 손석춘 저자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생각의 결과물을 글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개인과 사회, 정치와 경제, 과거와 미래 등 목전의 고민거리들을 불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조용히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개인의 성찰을 자극하고 독려하는 것 외에 진정한 “소통”의 열망을 노래한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불자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무런 불교적 시각을 갖추지 못하면서 당신은 과연 자신을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그러면서 이제는 불교가 ‘산중의 금불상’ 앞에 절하며 기복을 갈망하는 데서 벗어나
십우도의 마지막처럼 “시장”으로 내려갈 것을 강조한다. 부처 본연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 책은 세상을 초연하게 보는 데 익숙한 불교인들에게는 급속도로 변화해가는 세상을 불교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주고, 또 불교를 낯설게 여기거나 고루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에겐 붓다의 가르침이 “지금 여기서” 생생한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경험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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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말_이건희는 행복할까?
여는 글_21세기와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1부 깊은 산 50년 선승은 뭘 권할까? -살불살조殺佛殺祖
1. 소유욕에 집착하는 이유를 짚어라
2. 무한경쟁으로 살 게 아니라 무한향상을
3. 얻는 것 못잖게 버리면 좋은 걸 왜 모르나
4. 어찌 죽일 게 부처나 조사만인가.
5. 욕망 채울수록 병은 깊어간다
6. 모든 걸 놓아라. 그래야 보인다.
7. 모든 사람을 부처로 대하라
2부. 심리치료를 넘어 불교의 뜻은? -회두토면灰頭土面
1. 붓다가 될 권리
2. 아름다운 절로 가는 길
3. 세속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4. 살인과 포화 앞의 슬기
5. 재산을 모두 호수에 버린 경지
6. 신문과 방송의 정견(正見)
7. 모든 기득권 툴툴 턴 붓다
8. 불교 개혁 어디까지 왔나?
9. 인터넷 시대 불교의 길
3부. 해탈 다음에 왜 시장이라 했을까? -입전수수入廛垂手
1. 십우도의 끝이 시장인 까닭
2. 탐욕의 경제와 불교적 대안
3. 참 잘 사는 길
4. 우리는 왜 ‘천년의 미소’를 잃었을까?
5. 불교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6. ‘선진국’의 뜻과 불교 싱크탱크
7. 오늘 한국 불교의 화두는?
8. 누가 이건희에게 ‘보시’를 가르칠까?
9. 붓다처럼
닫는 글_붓다가 일어선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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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 세속의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산문에 홀로 들어온 스님들과 달리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등바등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가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스님이 얻은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서였다.
“부처님께 와서 기도하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갑갑한 일이 있을 때 친구에게 하소연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후련해지고 풀리지요. 하물며 부처님 앞에서 자신이 부닥친 문제를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 때에도 자신을 도와줄 부처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필요가 있어요.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기도 들어줄 어떤 부처도 없습니다. 그런 부처가 있다면 대자대비하신 데 이미 기도하기 전에 다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어떤가. ‘부처님’을 ‘하나님’으로 바꿔도 통하는 이야기 아닐까?
적명 스님은 이어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스님의 뜻은 간명했다.
기도보다는 스스로 부처가 되라고 권고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는 기독교의 전통과 확연히 대비된다.
“밖에서 찾는 것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안에서 찾아야지요. 제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게 참선입니다. 한꺼번에 많은 시간동안 참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꾸준히 하는 참선입니다. 일상생활에 쫓기는 분들이 오랜 시간 참선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 하루 10분 내지 20분이라도 날마다 하겠다는 결심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일상생활 가운데 근원적 해탈을 위한 시간을 정해놓고 지속적으로 참선을 하면 자신의 생각이 열려 간다는 사실을 곧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 건강을 위해 보건체조를 하지 않던가요? 날마다 참선을 해 나간다면 바로 그것이 정신적 보건체조이겠지요.”
스님에게 산문으로 출가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묻자 싱긋이 웃었다.
“머리를 깎고 안 깎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핵심은 스스로 부처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일체 모든 게 미망임을 알고 놓아버리세요. 뭔가 밖에 들을 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님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지녀야 할 미덕은 소유욕을 버리는 데 있다고 단언했다. 소유욕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실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하고 그것이 숱한 갈등을 빚는다고 강조했다.
“모든 게 실체가 없음(제법무아)을 꿰뚫으면 집착이 없어져 머물지 않게 됩니다. 그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으면 그것이 곧 무념입니다”
적명스님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선방으로 돌아갔다. 기기암 선방에서 맑은 입정소리가 오래오래 울렸다._“소유에 집착하는 이유를 짚어라” 중에서
미국 월스트리트에 몰아친 ‘금융 허리케인’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적 금융기관들이 줄지어 파산하자, 미국은 7000억 달러를 ‘구제 금융’으로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럽과 아시아의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실물 경제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래서일까. 더러는 경제가 어려워가는 상황에 불교가 ‘종교 편향’ 문제로 지나치게 정부를 물고 늘어진다고 눈 흘긴다. 심지어 종단 내부에서도 그런 목소리들이 솔솔 흘러나온다.
(…) 국민 통합은 결코 관념적 요구가 아니다. 부익부빈익빈을 심화시켜갈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을 바로 잡지 않는 한 국민 통합은커녕 경제 살리기도 불가능하다. 기실 이명박의 경제 살리기는 처음부터 잘못 짚었다. 지난 10년 동안 수출 대기업은 죽기는커녕 해마다 엄청난 순이익을 올렸기 때문이다. ‘경제 살리기’가 절실한 사람들은 비정규직을 비롯한 대다수 노동자, 농민, 영세자영업자, 중소기업이었다.
그럼에도 보라. 경제를 살리겠다는 대통령은 취임 뒤 줄곧 부익부빈익빈 정책을 추진해왔다. 대통령과 장관의 종부세가 한 해에 수 천만 원 줄어드는 감세정책을 제 손으로 강행했다. 바로 그것이 사회 분열 아니던가. 바로 그것이 탐욕 아니던가.
불교가 ‘경제 제대로 살리기’를 이참에 적극 주창하길 제안한다. 비단 다가올 범불교도대회만이 아니다. 국민 대다수와 소수 기득권층 사이에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분열을 치유하고 국민을 통합해가는 데 불교가 적극 나서야 옳다. 경제 살리기에 몰입해도 부족할 판국에 이명박 정권은 촛불시민 수사에 여전히 눈 빨갛다.
진정한 화합과 통합, 경제 제대로 살리기를 불교가 선구할 때다.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을 벅벅이 보여줄 때다._“경제 제대로 살리기로 진정한 화합을” 중에서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공안정국을 더 강화하기 위해 ‘검찰 서열’을 무시하고 천 씨를 검찰총장으로 발탁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문화방송 피디와 인터넷 논객 수사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용산 철거민 참사를 바라보는 자세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용산 참사에서 살아남은 철거민들까지 살천스레 사법처리한 서울중앙지검장을 높이 평가했다는 기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찬찬히 짚어볼 일이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철거민 유족까지 사법처리한 검찰 책임자, 천성관 서울중앙지검장은 그동안 떳떳하지 못한 돈으로 호화생활을 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바로 그런 생활을 누리던 검사가 철거민들의 피맺힌 죽음과 눈물을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터다.
더 큰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국정을 어떤 가치로 펴가고 있는지 또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권위주의적 사고나 부자 중심의 정책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천 씨에 대한 높은 평가에서 우리는 그의 ‘생명 경시’를 간파할 수 있다. 실제로 대통령은 용산 참사 앞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천 씨를 검찰총장으로 발탁한 이유가 역설이지만 왜 사과하지 않고 있는지를 입증해준다. 이명박 정권의 1년 6개월을 톺아보면 생명에 대한 경시 정책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책도,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독려하는 모습도 그 보기다. 사회보장제도가 미약한 나라에서 노동자를 위협하는 법안과 정책을 무람없이 강행하는 밑절미엔 생명에 대한 경시가 깔려있다. 이른바 ‘4대강 정비 사업’도 마찬가지다. 토목사업으로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숱한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불교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는 더 크다. 불교는 생명의 소중함을 어떤 종교보다 더 중시한다. 이명박 정부가 펴나가는 정책들은 불교의 가치와 정면으로 위배된다. 생명을 존중하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통령이 눈 뜰 수 있도록 끊임없는 문제 제기가 절실하다. 대한민국의 최고 의사결정권을 지닌 정치인이 ‘무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만의 불행이 아니다. 국가적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_“붓다의 가르침이 목마른 계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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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손석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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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커뮤니케이션 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사단법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과 이사장을 역임했다. 『민중언론학의 논리: 정보혁명시대 네티즌의 무기』,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람은 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쓸까』, 『신문 읽기의 혁명』(1·2권)을 출간했다.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논설위원으로 일하며 민주언론상, 통일언론상, 한국언론상, 한국기자상,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수상했다. 소설 『아름다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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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사람들이 무사무탈을 비는 종교, 수능 날 <9시 뉴스> 첫 화면에 나오는 종교, 이따금 “00사 분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종교……변색된 불교의 몇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다. 오랜 세월 불교와 함께 호흡해온 이 땅이지만 정작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교와 그리 친하지 못하다. 소통하려는 노력도 보기 드물다. 어쩌면 오늘날의 불교는 21세기 한국 사회 곳곳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과 젊은 세대에게 그저 고색창연한 유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만나게 될 한국 최고의 선승들이 던지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 불교는 본래 산중의 화두로 머무는 종교가 아니었다. 기복 신앙의 모체도 아니다. 불교를 “산중수행”에 “기복 신앙의 특성”을 가진 종교쯤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절대적인 오해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탓이다.
이 책은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인가?”, “불교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획득하는가?” 하는 물음을 안고 저자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생각의 결과물을 글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개인과 사회, 정치와 경제, 과거와 미래 등 목전의 고민거리들을 불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조용히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이 책은 개인의 성찰을 자극하고 독려하는 것 외에 진정한 “소통”의 열망을 노래한다. 불교를 오해하고 있는 불자들, 그리고 불교를 전혀 몰라서 생각의 물꼬를 트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 책의 울림이 오묘하며 깊고, 때로 서늘하다고 느끼는 근거이다. 저자는 또 대한민국의 불자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무런 불교적 시각을 갖추지 못하면서 당신은 과연 자신을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그러면서 이제는 불교가 ‘산중의 금불상’ 앞에 절하며 기복을 갈망하는 데서 벗어나 십우도의 마지막처럼 “시장”으로 내려갈 것을 강조한다. 부처 본연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 책은 세상을 초연하게 보는 데 익숙한 불교인들에게는 급속도로 변화해가는 세상을 불교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주고, 또 불교를 낯설게 여기거나 고루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에겐 붓다의 가르침이 “지금 여기서” 생생한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경험하게 해준다. 종교인은 물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모든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21세기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불교
아놀드 토인비는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으로 새로운 문명이 열릴 것으로 전망했다. 너무 많이 회자된 명제라 식상한 말이 되었지만, 그 의미를 온전히 성찰한 사람도 드물다. 세계 문명의 흥망성쇠를 평생 연구한 토인비는 왜 그런 결론에 이르렀을까? 사실 2012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대다수는 서양 문명의 세례를 받으면서 자랐다. 그 터전을 ‘근대 사회’라고 부르든 ‘자본주의 체제’라고 말하든 서양 중심의 문명이 지난 300여 년에 걸쳐 지구촌을 지배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문명의 배경에는 기독교가 있다. 토인비조차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이렇듯 지구촌의 문명의 기저가 된 기독교와 오랜 세월 동양의 정신 · 문화를 일궈온 불교가 소통해야만 새로운 역사의 지평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탓이다. 그만큼 지구촌에는 동서양의 만남이 중요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기독교와 불교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서양 문화의 중심축이던 기독교는 종래의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교리 중심주의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이 나라에서만 편협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 불교도 낡은 종교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이 땅의 전통문화를 살리는 일은 물론, 세계적 흐름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불교의 세계관을 하루 빨리 정립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21세기와 불교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착상은 별로 새롭지 않다. 불교는 이미 서구에서도 명상과 심리치료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본령은 과연 “심리치료”나 “수행” 혹은 “개인의 각성”에 있는 것일까?
붓다에게 “당신의 역할”을 묻다
불교는 이제까지 지구촌 사람들의 정서적 불안과 정신 장애를 해결하는 심리치료제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심신이 지친 사람들은 곧잘 산 중 사찰을 찾아가거나 미리 예약을 한 뒤 템플스테이를 떠난다. 사람들의 어지러운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붓다의 가르침 역시 고통을 넘어서는 데 있으므로 심리치료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면 그 또한 불교의 적절한 역할이라 하겠다. 하지만 불교가 21세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심리치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 되어서도 안 된다. 불교는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물음을 던지고 구체적인 답을 주어야 한다. 새로운 각도에서 또? 전혀 고답적이지 않은 발상 아래서 정치와 경제, 사회, 인권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것들을 조망하고 비판할 수 있는 건강하고 공정한 시각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의 불교는 여전히 대다수 국민에게 “산중 종교” 또는 “기복 종교”로 각인되어 있다.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에 견주어볼 때 훨씬 더 치열하고 야만적인 경쟁 체제에 놓인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어쩌면 계층 간의 위화감, 서로에게 묻어나는 적대감이 너무 큰 탓에 종교(종교인)가 일찌감치 겁을 집어먹고 산사山寺로 혹은 대리석 성전으로 도망을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이 책에서 살펴보겠지만-불교의 고갱이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사실 현대인의 정신적 장애는 물론 사회적인 위기를 넘어서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불교는 원래 “산중 종교”가 아니라 “시장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가는 불교
이 책의 1부는 산중문답으로 구성되었다. ‘깊은 산 50년 선승은 뭘 권할까?’는 제목 그대로 저자가 한국의 깊은 산에서 50년 안팎 참선에 전념해온 일곱 명의 고승들을 찾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은 뒤 정리한 글들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는 <임제록>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의 대표적 선승 임제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떤 물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꿰뚫어 해탈하여 자유자재하게 된다”고 선언했다. 매우 통렬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2부는 ‘심리치료를 넘어 불교의 뜻’을 묻는 글들을 모은 것이다. 회두토면(灰頭土面)은 머리에 재를, 얼굴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 모습을 이른다. 바로 누구든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혼자 수행할 게 아니라 세속의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라는 뜻이다. 2부는 그런 가르침을 담았다. 따라서 1부의 산중문답에서 세속으로 내려와 흙먼지와 재를 덮어쓰며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일상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찾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쟁점이 되었던 일들, 앞으로도 우리 삶의 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사 문제들을 불교적 시각에서 조명한 글들이다. 3부는 ‘해탈 다음에 왜 시장이라 했을까?’는 물음에 그 뜻을 성찰하고 답한 글들이다. 기실 그 물음은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廛垂手)를 이른다. 십우도(十牛圖)는 선의 입문부터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동자(童子)나 스님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서 묘사한 선종화(禪宗畵)다. 심우(尋牛), 견적(見跡), 견우(見牛), 득우(得牛), 목우(牧牛), 기우귀가(騎牛歸家), 망우존인(忘牛存人), 인우구망(人牛俱忘), 반본환원(返本還源)에 이어 마지막이 입전수수다. 해탈에 이른 뒤 시장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라는 가르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현대인이 살아가는 구체적 생활의 시대적 과제와 정면으로 마주치라는 가르침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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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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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일어서다 새창으로 보기
푸하핫 ㅣ 2012-04-21 ㅣ 공감(0) ㅣ 댓글 (0)
불교는 중생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예전에 불교에 대해서 공부할때 불교의 사성제에 대해서 공부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불교의 사성제를 공부하면서 불교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어떤의미일까 참 많이 궁금했었는데 불교는 알면 알수록 중생들을 이끄는 묘한 매력이 있는것 같다
이책은 손석춘 저자가 불교에 대해서 지금 현대가 앓고 있는 질병과 사람들의 마음 그리고 지금 현 시점에서 불교란 어떤 의미인지 한권의 책으로 집대성하게 풀어 놓은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깨달음과 성찰 반성을 하게 만들며 자신의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삶을 바로볼수 있게 해주는것 같다
우선 이책의 목차는 크게 3부로 되어있다
1부는 깊은 산 50년 선승은 뭘 권할까 살불살조
2부는 심리치료를 넘어 불교의 뜻은 회두토면
3부는 해탈 다음에 왜 시장이라 했을까 입전수수
여기서 살불살조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회두토면은 더러운 얼굴. 겉으로만 꾸며 체면을 닦는 데 뜻이 없다 라는 뜻이며
입전수수는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로 동자가 지팡이에 큰 포대를 메고 사람들이 많은 곳을 향해 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3부에서 말하는 시장이란 우리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곳을 뜻하는게 아니라 시장 즉 배고픔을 말한다
이책은 1부에서 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서 뒷통수를 한대 후려갈긴다 그렇기 때문에 1부는 읽는데 조금 충격적이며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생각에 변화를 이끄는것 같다
2부는 부처님의 진리에 대해서 진정한 불교의 뜻에 대해서 알아갈수 있게 해주며 3부는 불교에서의 해탈이란 어떤의미인지를 짚어주는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책은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는 책 같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불교의 참뜻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사람을 이끌수 있으며 삶을 바로볼수 있게해주며 타라하고 병든 인간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깨달음을 주는지 그리고 삶에 대한 바른 생각과 가치관을 형성할수 있게 해주는지 이책을 보면서 많이 반성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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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일어서다 _ 인류 보편적인 가르침을 불교를 통해 얻다 새창으로 보기
앨리스 ㅣ 2012-04-16 ㅣ 공감(1) ㅣ 댓글 (0)
친가는 불교, 외가는 천주교이다 보니 양 쪽 종교를 골고루 접하며 자랐다. 다행히도 친가, 외가 모두 타 종교에 대한 배타심이 전혀 없었던지라 나에게 어떤 종교도 강요하지 않았고 스스로 선택하기를 권장하셨다. 나이가 먹어서 난 천주교 신자가 되었지만, 철학으로서 한 학문으로서의 불교에 대한 경외심은 늘 가지고 있다.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불교 소설을 쓴 최인호 작가의 <길 없는 길>을 보며, 불교가 종교를 넘어서 인간 본연의 도리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강해졌었다.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도 절에 가는 일은 멈출 수 없었다. 절에 간다는 것은 종교적인 예의를 갖추기 보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이었다. 조용한 산 속의 절에 가서 스님들의 목탁 소리를 듣고 처마에 걸린 종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세상에서 얻은 근심들이 사라지는 듯 했다. 이렇게 불교란 내게 종교 이전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불교를 둘러싼 비리나 잡음들이 들려올 때면 괜히 내 마음이 심난했다. 하지만 늘 그것들은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고 몇몇 잘못 된 사람들에 의해 변색된 것일 뿐이었다. 진정한 철학으로서의 불교, 그것은 늘 우리에게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가르친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나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음은 드러난다.
3개의 장을 통해 불교에서 중요시하게 여기는 3개의 화두를 던지는 이 책은 그 화두 속에서 오늘날의 우리를 바라보게끔 한다. 즉 이 책은 단지 불교를 종교로서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읽어봄직 하다. 살불살조殺佛殺祖, 회두토면灰頭土面, 입전수수入廛垂手가 바로 그 화두 들이다. 임제록에 수록 된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믿는 신을 죽이라고 하는 이 종교가 어떻게 보면 이해되지 않겠지만, 이것은 무소유와 일통한다. 자신의 마음이 비어있으면 부처나 조사 그 어떤 관념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세상이 정해 놓은 관념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즉, 신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해 놓은 관념을 버림으로써 나 스스로가 부처의 가르침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니, 여러 관념들 속에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나 세상을 어지럽게 바라보는 현대의 모두에게 꼭 필요한 화두임에 틀림없다. 회두토면灰頭土面은 겉으로만 꾸며 체면을 유지하는 데 급급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더러운 세상이라도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에게 그 깨달음을 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불교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산 속에서 도를 닦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말해준다. 우리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에 대한 답, 그 모든 것이 불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니 이것은 내가 그동안 생각해 온 불교가 가진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철학과도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이 가르침은 마지막 장에서 나오는 입전수수入廛垂手와도 뜻을 함께 하는데, 입전수수란 선종의 최고 이상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것은 선을 닦고 본성을 찾아 헤메다가 깨닫게 되는 최고의 경지가 중생의 제도라는 것을 나타낸다. 즉, 불교의 가르침을 잘 받았다면 결국 세상의 제도 속에 들어가 그것들의 문제를 마주하는 데에 큰 뜻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 아버지는 약간의 아쉬움을 표하시면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더랬다. '너의 종교는 아무래도 좋다. 단, 무엇을 믿음에 신중하고 무엇을 믿더라도 보편적인 가치를 전해주는 가르침은 놓지 말아라.' 그 말의 뜻도 잘 모르고 귀찮은 마음에 대충 고개만 주억거린 나는 이 책을 통해 아버지의 말씀을 찾았다. 아버지는 내가 종교로서가 아닌 철학으로서 불교를 존중함을 알고 계셨고, 그러니 한가지 종교에 치우치지 말고 여러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강조하셨던 것이었다. 그것이 이 책의 세가지 화두에서 드러났고 그럼에 이 책이 더 고마웠다. 이 책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어느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난 그에 앞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스스로의 문답에도 익숙치 않은 나는 아직 가엾은 중생일 뿐이었다. 부처처럼 큰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부처의 가르침은 받아들이고 싶다던 나는 30년 째 제자리 걸음이었다. 그런 내가 대한민국을 논하기엔 버거웠지만, 이 책을 통해 딱 두 가지는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똑바로 눈을 뜨고 문제를 직시하고 나 하나부터 올곶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말로 표현하는 대신 이 책을 전해드리는 일로 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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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일어서다를 읽고 새창으로 보기
노박사 ㅣ 2012-04-09 ㅣ 공감(0) ㅣ 댓글 (0)
『붓다-일어서다』를 읽고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 종교의 역할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지만 각자 나름대로 선택의 자유가 있고, 선택한 종교에 대해서는 얼마만큼 열심히 믿고 따르냐도 순전히 자유이다. 그래서 더욱 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그런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종교가 각각 다르다 보니 보이지 않는 갈등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직 자신만이 믿는 종교만이 최고이다 보니 다른 종교는 그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편협된 생각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종교인이라면 넓은 아량과 함께 활짝 열린 마음으로 오히려 개방이 되어서 더 많은 활동을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만의 종교에 매몰되다 보니 더욱 더 폐쇄된 모습을 볼 때에는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유의 자연 신을 포함하여서 나름대로 전통적인 신앙도 있지만 삼국 시대에 들어온 불교가 결국 고려시대까지 전성시대를 이루다가 조선왕조에서 성리학인 유교가 국교로 되면서 조금은 침체되면서 산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조선 말의 근대에는 서양으로부터 크리스트교(천주교, 개신교)가 들어오게 되었고, 일제 통치 시대를 거쳐서 지금의 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할 수 있다. 종교를 믿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불교와 크리스트교를 신봉하고 있다. 역시 도심을 중심으로는 교회와 성당이, 산중을 중심으로 사찰이 있어 많은 신도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모두가 개인만의 이익에 앞서 주변 사람들을 위한 본래의 종교적인 이념을 실천해 나가는 모습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개인적으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부모님이 시골 마을 뒷산에 있었던 조그마한 사찰에 다니게 되어서 그런지 불교가 마음을 더 편하게 한다. 불교는 특히 다른 종교와 다르게 열심히 노력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더욱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붓다의 자비로움을 실천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의 힘은 대단함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종교 신도들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세상 속으로 편하게 들어와서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말 불교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 원리들을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노력할 때 진정한 종교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이야기대로 붓다가 대웅전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기보다는 활달하게 사람 속으로 나와서 서로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이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에 있어서 생생한 울림을 통한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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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과 불교의 소통을 바라며... 새창으로 보기
아이비 ㅣ 2012-04-05 ㅣ 공감(1) ㅣ 댓글 (0)
"사회가 썩어갈 때, 그것을 건강하게 할 책임이 네 군데 있어요. 종교계, 교육계, 언론계, 법조계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네 곳이 더 썩지 않았습니까? 가장 많이 썩은 게 종교계지요. 그러니 모든 사람이 돈만 좇을 수밖에요." (-30쪽)
종교... 언제부턴가 우리는 종교이야기를 하면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심한 경우 자신의 종교를 자신있게 앞세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마음의 안식을 찾기 위해서라는 궁극의 목적을 잃어버린 탓이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수단이 되어버린 종교..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작금의 상황으로 볼 때 종종 종교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그 누구의 잘못이라고 꼬집어 말 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쓰러져가는 혹은 무너져내리는 어떤 것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누군가는 다가가야 하고 또 누군가는 힘을 써야하는 까닭이다.
얼마전 우연히 TV를 보다가 변해가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다큐를 보게 된 적이 있었다. 불교적인 명상수행이 그들의 기도처에서 행해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도 그것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했던 말이 생각난다. 종교를 통해 진정한 마음쉼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가 아니겠는가,라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사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같을테니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절집이 세상으로 내려와야 한다는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은 산중의 붓다가 이제는 '시장'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단순하게 형식적인 의미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종교가 기독교가 되었든, 불교가 되었든 세상속으로 걸어들어올 만큼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따져보고 싶은 것이다. 우뚝 선 모습으로 우리 삶의 지렛대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처럼 멋진 일도 없을테니... 변화를 위한 그들만의 노력도 책을 통해 알려주긴 하지만 세상이 소수보다는 다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니 쉽진 않아 보인다. 나와 다른 소수를 안아주지 못하는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인 것을...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안타까움에 마음을 졸였다.
책을 읽던 중에 문득 생각나 표지의 그림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머리위의 초에서 흘러내린 촛농이 마치 부처의 굵은 눈물처럼 보여 보는 마음을 싸하게 만들었다. 저 부처는 떨어지는 촛농이 뜨거워 우는 것은 아닐까? 차마 눈을 뜨지 못한 채 굳게 다문 입술로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많은 의미를 담은 듯한 그림을 보면서 이 책이 종교서적인가를 묻고 싶었다. -21세기 한국과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이란 부제를 달아놓긴 했어도 종교를 빌미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말하고 있는 까닭에 읽으면서 조금은 껄끄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종교와 사회적인 현상을 빗대어 말했는지 그 깊은 속내를 알 수는 없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이나 성철스님처럼 우리에게 이정표가 되어줄 인물이 없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큰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들지않아도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도 없을테지만, '불교적 시각'이라는 어려운 말속에서 '소통'이라는 열망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무리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불자가 아니어서일까?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그랬다는 말이다.
사실 나는 아직까지 종교가 없다. 친구따라 주변따라 어린시절 교회에 나가본 적은 있지만 나이들어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천주교인이나 불자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때때로 성당이든 법당이든 들어가 기도하고 잠시 앉아 있기도 한다. 붓다의 가르침이 '지금 여기서'라는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책을 읽고 얄팍하게나마 전해받은 느낌이 있기는 있다. 하지만 책장을 덮으면서도 흔히 말하는 '진보성향'이라는 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방심하고 있다 돌려차기에 당한 그런 느낌이랄까? 내가 순수한 종교서적을 생각하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해 종교보다는 우리곁에 만연한 사회적 현상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직설적으로. 뒤에 남는 여운이 그다지 명쾌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절박함에 공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학습되어져버린 가치로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교육의 현실은 또다시 나를 아프게 한다.
'1+9=ㅁ' 와 같은 문제 유형을 보자. 우리가 흔히 비교하는 핀란드나 스웨덴 학교에서는 '1+9=ㅁ'와 같은 문제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ㅁ+ㅁ=10'의 유형이다. 1+9=ㅁ에서 ㅁ안에 들어갈 정답은 하나지만 ㅁ+ㅁ=10의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무궁무진이다. 1과 9나 2와 8만이 아니다. -48과 +58을 적은 친구도 나오고, 2.13과 7.87 따위로 적은 학생도 있다.(-181쪽 참조)
창의적인 사고를 외치는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은 아닐테니 더욱이나 그렇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해버리거나 나아닌 누군가가 나서주기를 바라는... 그 스님의 말씀처럼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불교의 존재원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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