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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9

생명이야기 - 풍류에 대하여 검은 호수 서정록

생명이야기 - 풍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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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말들] 풍류에 대하여




일찍이 최치원 선생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이땅에 현묘지도가 있으니 곧 풍류라 한다. 가르침의 내력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포함삼교하고 접화군생하니....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說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선사(仙史)란 화랑의 역사를 말합니다. (신라에서는 나중에 화랑을 국선(國仙)이라 불렀습니다.) 최근에 공개된 김대문의 <화랑세기>와 같은 책들이 여기에 든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동안 학계에서는 위의 최치원 선생의 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왔습니다. 즉 유불선이 들어온 후 그들의 장점을 취합해 ‘풍류’를 만들어 어리석은 민중을 교화했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중국으로부터 유불선이라는 학문다운 학문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정신이 깨어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동안 역사 교과서에서 유불선 이외의 사상이나 정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으니 유불선이 들어오고 나서야 비로소 새로운 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이러한 해석은 얼핏 매우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중국에서 유불선이 전래되기 전에는 이땅에 문화랄 만한 것이 없었고, 유불선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화되었다는 시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벽화를 보면 당시 샤마니즘이 문화적으로 중심적 위치에 있었음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즉 샤마니즘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천상계와 지상계가 나누어져 있고, 각각의 공간에는 그에 상응하는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불선은 오히려 주변적이거나 부수적인 위치에 불과합니다. 그만큼 샤마니즘적 세계관이 확고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현상은 백제, 신라,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땅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식의 해석은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기존의 해석에 의하면 유불선의 장점을 취해 이땅의 현묘지도인 ‘풍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불선의 위치는 퇴락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문화든지 최번성기를 맞았을 때 그것을 배우고, 거기서 무엇인가를 취하는 것이지 이미 사양길로 들어섰을 때는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따라서 퇴락한 유불선의 장점을 취해 이땅의 새로운 풍류문화를 만들었다는 시각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유교를 봅시다. 한나라 때 유교가 국교로까지 신봉되었지만, 곧 위진남북조 시대(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로 넘어가면서 한족(漢族)들은 북방민족들의 지배를 받아 강남(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내려가게 됩니다. 그와 함께 유교의 가르침은 땅에 떨어지고 지식인들은 노장풍의 은둔생활과 술과 시문으로 세상을 한탄하며 지내는 이른바 ‘청담(淸談)’, ‘현담(玄談)’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이 시대는 유교사에서 볼 때 가장 암흑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교는 애당초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이땅에 전래되었고, 그 후에는 귀족들을 중심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말까지 계속되었지요. 때문에 당시 일반백성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당나라의 불교는 엄청난 사원전답을 소유하게 되면서 타락할 대로 타락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새롭게 백성을 교화한다는 생각 또한 맞지 않는 것입니다. 훗날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주자는 “불교 가지고는 새로운 문화를 일으킬 수 없다” 하여 대신 신유학, 즉 주자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도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원래 중국의 신선사상이란 고대 동북아의 샤마니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초기 신선사상의 경전이었던 <태평경>에 고구려의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 탔던 오룡거(五龍車)가 나온다든지, 부여의 샤만 등에 대한 언급 등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원래는 중국에도 샤마니즘이 있었습니다. 고대 동이족인 은나라가 샤마니즘 국가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 유교가 국교로 되면서 샤마니즘은 사실상 잠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교는 영혼의 세계와 내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자연히 샤만의 활동도 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중국의 민중신앙은 개인의 불로장생을 비는 기복의 형태로 변화하게 됩니다.그들의 이상이었던 ‘신선’이란 호흡법이나 연단술(鍊丹術) 등을 통해 불로장생의 도를 깨우친 사람을 말합니다. 결국 신선이 이상화되면서 일상의 행위 속에서 신성함을 찾는 고대의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지혜는 사라지고, 다분히 magic화한 기복적 도교 형태로 발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유불선에서 장점을 취해 이땅의 현묘지도인 풍류를 만들어 민중을 교화했다는 기존의 해석은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채 억지로 갖다붙인 해석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퇴락해가는 유불선을 취합해 새로운 풍류도를 만든다는 것은 한마디로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있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치원 선생이 “포함삼교(包含三敎)”라고 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이땅에는 현묘지도의 아름다운 풍류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국가가 생기고 계급이 생기고 물질의 욕망이 생기면서, 그리고 여기에 중국의 유불선이 덮어씌워지면서 그 아름다운 도가 점점 잊혀지고 말았다고 말이지요.



최치원 선생이 난랑비기에서 풍류에 대한 언급한 것은 바로 그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현묘지도가 유불선의 가르침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최치원 선생의 다음 말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니 이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자연의 법을 어기지 않고 무위적인 삶을 살며,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를 낮추고 침묵을 사랑하니 이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고 악행을 멀리하고 선함을 위해 힘쓰니 이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같도다.”



여기서 우리는 최치원 선생이 말하는 풍류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으니 바로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고 자연의 법을 어기지 않고 무위적인 삶을 살며,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를 낮추고 침묵을 사랑하고 악행을 멀리하고 선함을 위해 힘썼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현묘지도의 아름다운 문화는 샤마니즘의 순수한 영적인 삶과 문화를 들고 있는 시베리아의 일부 소수민족이나 북미 인디언들의 삶의 내용과 거의 똑같습니다. 북미 인디언 역시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며, 자연의 법을 거스르지 않고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나를 낮추고 모든 생명을 공경하며 침묵을 사랑하는 삶을 살며 늘 선함을 위해 노력하는데, 이것은 위의 최치원 선생의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최치원 선생이 살았던 9세기 중엽만 해도 이땅의 아름다운 현묘지도, 즉 풍류의 문화가 민중들 속에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최치원 선생이 현묘지도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19세기 중엽에 태동된 동학은 바로 이런 풍류의 아름다운 도(현묘지도)가 민중적 지혜의 형태로 오랫동안 보존되어 오다가 구한말에 꽃을 피운 거라 할 수 있습니다.



* 다움 카페 <바람이 꽃이 되어> 검은 호수 서정록 님의 글을 옮김

2023/05/23

생명이야기 - 최치원 - 풍류(風流) - 접화군생

생명이야기 - 풍류(風流)

생명이야기

[살림의 말들] 풍류(風流)


우리는 ‘풍류’하면, 일반적으로 고구려나 부여 등 고대 한반도 사람들이 단오나 가을걷이에 함께 모여(國中大會) 사흘 낮밤을 무리지어 음주가무(群聚飮酒歌舞)했다거나 선비들이 산천경계(山川境界)의 풍광(風光)을 완상(玩賞)하면서 탁주 한 잔 걸치고 시 한 수 읊는 것을 떠올립니다. 우리들 머리에는 풍류하면 잘 ‘노는 것’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잘 노는 것’속에 생명사상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를 우리 춤을 생명운동 차원으로 끌어올린 채희완 선생님과 인디언 문화 속에서 현대문명의 대안을 찾고 있는 서정록 선생님의 글 속에서 확인해 봅니다.



생명원리와 가치는 한국고대사상의 한 상징인 풍류도(風流道)에 이미 실현되어 있다. 풍류도는 화랑도(花郞道)와 맞닿아 있으며,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천부경(天符經)에서 그 시원적 물줄기를 만나게 된다. 풍류도의 내용을 가장 적확하게 전해 주는 것으로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난랑비서(鸞郞碑序)의 글이다.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왈풍류(曰風流) 설교지원(設敎之源) 실내포함삼교(實乃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핵심은 ‘접화군생’에 있다. 
접화군생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무기물, 우주만물, 흙, 물, 바람, 공기, 티끌까지도 마음 깊이 가까이 사귀어 감동, 감화, 교화시키고 진화까지 시켜서 서로 완성되고 해방된다는 뜻이다.



이런 논의는 보이는 것만을 규명해 보려고 했던 과학 체계의 미비점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과학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라고 하는 차원, 이를테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 이들이 동시에 과학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학문 체계의 요구이기도 하다. 특히 ‘비과학적인 것의 과학화’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접화군생을 사람 사이의 문제로 좁혀 보면 
  • 한 사람의 개체적 삶이 사회에서 살아 나가는 데 여러 가지로 닥치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사이의 연관성 문제가 된다. 
  • 말하자면 한사람의 개체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을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의 문제이다. 
  • 이는 개인이 지닌 무한한 창조적 개성이 계발되고 확산되는 것과 함께 인간해방, 노동해방, 사회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동시에 실현되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 개인과 집단이 유기적이고 교호적 상호관계를 맺으며 이를 협동적으로 진전시킨다는 것인데, 이 점이 바로 생명사상의 사회적 기초 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특히 집단 속에 깔묻혀 갈 수밖에 없는 오늘의 대중 사회에서 창조적 개인으로서 어떻게 구제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새삼 중요한 문화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 채희완 <한국 전통춤의 생명사상> 중에서



아침에 동녘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라. 마른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을 맞아 보라. 시름에 잠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스치는 바람을 기억해 보라. 길가에 핀 풀 한 송이가 피워낸 꽃을 보라. 푸른 하늘을 유유히 흐르는 흰구름을 보라.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라. 그리고 그 얼굴이, 그 표정이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라. 밤하늘에 뜬 달과 별들을 보라. 그 해와 그 달과 그 바람과 비를 그저 단순한 물질덩어리라 말할 수 있는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는 신성함이 내재해 있다. 해와 달도 신성하다. 바람도 신성하고, 비도 신성하다. 벌레도 신성하고, 풀 한 포기도 신성하고, 돌멩이 하나도 신성하다.



우리는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나의 숨에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숨결이 들어와 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존재들에는 나의 숨결이 들어가 있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숨을 쉰다. 동식물은 물론 바위도, 해도 달도 숨을 쉰다. 그리고 숨을 쉬는 동안 서로 하나가 된다. 물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에 나뉘어 들어가 있는 물은 언젠가 바다로 흘러가고 다시 무수한 생명으로 그 모습을 바꾸며 돌고 돈다. 그렇게 순환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물은 하나다. 바람이 하나이듯이. 또 우리의 말과 행위는 다른 존재에게 영향을 끼치고 또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명은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세계의 ‘그물망’을 샤마니즘에서는 영혼으로 푼다. 그리고 그 영혼의 울림과 떨림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것을 바람, 흐름, 결이라 하니, 그것이 바로 최치원 선생이 말한 풍류요, 그 근본원리를 말한 것이 ‘접화군생(接化群生)’인 것이다.



접화군생이란 무엇인가?



바람이 없으면 생명은 살 수 없다. 비가 없으면 식물은 자랄 수 없다. 물이 없어도 그렇고, 변화와 움직임이 없어도 마찬가지이다. 바람, 흐름, 결, 즉 풍류가 있기에 뭇 생명이 나고 자라는 것이다. 힘겨우면 힘겨운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모두들 이 세상의 바람, 흐름, 결 속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만나고, 서로를 공경하고, 서로의 존재를 섞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바람, 흐름, 결 속에서 영혼을 가진 뭇 생명들이 나고 산다는 접화군생이다.



이러한 풍류의 삶 속에서는 일상과 종교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곧 일상이 종교요 기도이다. 한마디로 일상 속에 신성함이 깃들어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지극히 고귀해지는 순간이다. 이를 가리켜 최치원 선생은 ‘포함삼교(包含三敎)’라 하였으니, 이 땅에 유불선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들의 도(道)를 다 포함하는 아름다운 삶이 있었음을 지적했던 것이다.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이웃과 부족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과 같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침묵을 사랑하는 것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으며, 악행을 멀리하고 선함을 위해 힘쓰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과 같으니” 그 안에 이미 유불선이 다 들어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고운(孤雲) 선생의 위의 말에는 유불선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그 아름다운 도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짐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배어 있다. - 서정록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 이 글은 채희완의 <한국 전통춤의 생명사상>과 서정록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두 자료 모두 <우리의 오래된 미래>, 모심과 살림 연구소 자료집, 2003)에서 풍류에 관한 이야기를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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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풍류(風流)란 접화군생(接化群生)

작성자향상일로|작성시간22.10.20


우리 전통사상에서 자유분방은 특이하지만 추앙받는 삶의 덕목이었다.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가 지나치게 형식화된 규칙이나 절차에 얽매이면 그 사회 분위기는 무거워지고 사람들은 삶의 멋과 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했다. 왕만 홀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백성이 함께 즐거워야 한다고. ‘여민락(與民樂)’이 좋은 정치인 것이다. 민중이 절로 흥이 나려면 지도자가 위선의 탈을 벗어야 한다. 딱딱한 절차와 규정에 얽매이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바람의 흐름처럼 자유롭고 유연한 삶의 원리인 풍류를 아는 지도자야말로 착하고 어진 백성(百姓)을 살리는 진정한 지도자가 된다.



남북국시대에 통일신라 출신인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은 고조선의 전통사상에서 바람처럼 흐르는 멋과 흥, 신명이 나는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 선생은 이를 풍류도(風流道)라고 명명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생은 『난랑비서문(鸞碑序文)』에서 밝히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교(敎)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삼교(三敎: 유,불,선)를 포함하여 모든 중생을 접화(接化)하는 것이다.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孔子)의 뜻이요,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교를 행함은 노자의 종지(宗旨)요,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神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최치원 선생에게 풍류란 방탕한 ‘주색잡기’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전통적인 선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풍류도는 이기적 유아(唯我)주의도 아니며, 군중심리로 획일화된 전체주의도 아니다. 도리어 풍류도는 개체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휘가 공동체의 발전과 화합으로 이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선생은 풍류의 핵심 원리를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고 표현한다. “군생(群生)에 접(接)하여 화(化)한다.” 즉 “만물과 접하면서 교화한다(조화된다).”는 원리이다. 다시 말해 풍류는 이기적인 충동에 휩싸여 무책임한 태도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방탕과는 사뭇 다르다. 한 사람의 자유로움은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때 진정으로 얻어진다. 이렇듯 정치 지도자나 사회 지도자가 뭇 생명과 만나 서로 신나는 품격으로 변모하는 것 이‘접화군생’의 진정한 뜻이며 풍류의 원리인 것이다.



글: 김성우 (철학저술가) 참조


2021/07/20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2) 보은취회 | Facebook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박맹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이 글은 몇 년 전, 강원 원주시에서 있었던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현판식 기념 강연 내용을 필자가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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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1983년에 결혼을 했는데 그 때 집사람이 80년부터 사북(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83년에는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부론중학교, 85년에는 원주 시내에 있는 학성중학교로 전근을 와서 그때부터 저도 자연스럽게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5월 광주항쟁(1980년)을 겪었습니다. 그 때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사단 사령부 벙커에서 연락 장교로 근무를 했는데, 매일 새벽 6시에 사단장님이 출근하면 그 전날부터 새벽까지 일어난 일을 브리핑하는 게 주된 일과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나오는 커다란 지도(地圖) 앞에 서서 2미터 넘는 지시봉을 들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날짜별 시간대별로 브리핑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81년 6월말에 제대(除隊)를 하고 나오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우리 국군이 정반대로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부터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국민을 학살하는 군대의 하수인 노릇을 한 제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서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81년 9월부터 전북 익산시에 있는 원불교중앙총부에서 처음으로 교역(敎役)에 임했지만 마음은 늘 “왜 광주학살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왜 나는 그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다가 82년부터 ‘삼동야학(三同夜學)’이란 야학교를 만들어 후배들과 함께 야학을 통한 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학운동을 하면서 80년 5월의 광주학살의 문제는 어떤 개인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및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광주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야학운동을 병행하면서 1983년에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의 근원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어 83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東學)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1986년 봄에 연구자 중에서는 최초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에 대한 석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바로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도중이었는데요.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교로 계셨던 최성현 선생(<<좁쌀 한 알>>의 저자)으로부터 우연히 해월 선생과 동학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하시는 도사님 한 분이 강원도 원주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지요. 왜냐면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광주학살 때문에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사회를 변혁(變革)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 때문에 모두들 동학혁명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에 대해서만 주목하던 시절이었는데, 해월 선생을 좋아하신다는 도사님이 계신다니 저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사님 소식은 접했지만 어떻게 연락드릴 길이 없어 마음속으로만 기억해 두고는 그만 몇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원주에 내려갔더니 집사람이 무위당 선생님께서 참여하고 계신 어떤 모임에서 나온 소식지를 가져와 보여주더군요. 그때 저는 “아 그렇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염원하면 서로서로 기운이 통하여 만나게 되는 수가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소식지를 보고 바로 연락을 드린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때 무위당 선생님과 연락이 닿게 해 주신 분이 당시 강원도 원주시에서 ‘천하태평’이라는 식당을 경영하고 계셨던 선종원 선생님이셨습니다. 선 선생님을 통해 연락을 드리니 “어디어디로 나와라”하는 연락이 바로 왔습니다. 약속한 날, 약속된 장소로 나갔더니 박준길 선생님이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미리 와 계셨습니다. 선생님 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C도로 근처 2층 횟집으로 기억되는 데요. 생선회를 진수성찬으로 차려 놓고 미리 오셔서 저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처음 뵌 순간을 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물으셨던 첫 질문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얘 맹수야! 넌 다른 놈들은 다 전봉준에 미쳐서 거기에 푹 빠져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해월 선생을 연구하게 되었냐?” 이 질문을 몇 번이고 저에게 물으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놈이 그때의 시류(時流)와는 다르게 해월 선생을 연구한다는 말씀에 대단히 기분이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때 제가 선생님 앞에서 말이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를 서너 시간 가량을 떠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다 들어주셨던 것이 저 뇌리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고, 바로 그것이 선생님에게 사로잡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이렇게 선생님과 인연이 돼서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원주에 내려오면 반드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찾아뵈었습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해월 선생에 대한 연구만 했지, 사실은 군대 안에서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불덩어리’ 그 자체였어요. 무엇이고 만나면 온통 다 태워버릴 기세의 ‘불덩어리’말입니다. 작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더 큰 폭력으로 민중을 압살하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해서든지 근본적으로 엎어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원생 신분이었는데도 굵직굵직한 시위나 정치적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어요. 그런 저를 보실 때마다 선생님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주셨던 말씀이 “전두환을 사랑해야 한다” 바로 그 말씀이셨어요. 군대 안에서 광주의 비극을 직접 겪었던 제가 어찌 전두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니,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그렇게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과는 다르게 반대 방향으로만 반대 방향으로만 달려갔습니다. 87년 6월 항쟁 때는 수원과 익산 등지에서 가두연설을 하며 데모에 앞장서는가 하면, ‘인천사태’ 당시에도 가두시위에 참가했고,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공정선거감시단’을 결성하여 활동했습니다. 198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노조 발기인이 되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어서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데모를 주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학원에서 저의 목을 조여 오는데, 처음에는 지도교수를 바꾸라 하더군요. 지도교수를 특별한 이유 없이 바꾸는 것은 대학원 규정에 없어 못 바꾸겠다고 했더니, 그럼 자퇴해라 그러더군요. 제가 어용교수로 지목했던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부임하여 그런 압박을 가해 오니 어쩔 수 없이 자퇴를 결심하고 가슴에 벌겋게 불이 난 상태로 원주로 내려 왔습니다. 그때 저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시험에 응시하여 필기시험에서는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합격되었고, 데모 주동자라는 낙인 때문에 시간 강사 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어요. 그리고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시절 ‘북한바로알기 운동’에 호응하여 북쪽에서 간행된『조선전사』보급 책임을 맡아 연구자들에게 보급했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어 안기부 수배 리스트에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 저에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혁명가의 로망(낭만)’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서 난을 한 점 쳐 주셨어요. “낭만주의자여야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로망(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해 주시면서 “내유천지(內有天地)하면 외무소구(外無所求)니라”를 화제(話題)를 써서 주셨어요. “안으로 천지, 즉 온 우주를 가지고 있으면 밖으로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느니라.” 네 안에 바른 중심만 서 있으면 바깥 일이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씀은 당시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저에 대한 선생님의 무한한 사랑과 격려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화제가 쓰인 난 한 점을 주시면서 “절대로 니가 먼저 자퇴하지 마라, 버틸 때까지 버텨라” 하시면서 응원해 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자퇴하지 않고 10년을 버티었습니다. 10년을 버틴 끝에 박사 과정에 입학한지 꼭 10년째 되던 1996년에 가까스로 해월 선생님에 관한 박사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월 최시형 연구-주요 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지나간 80년대를 돌이켜 보면, 무위당 선생님께서 계시지 아니했더라면 저의 동학 공부는 진즉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선생님의 뜨거운 격려에 힘입어 10년을 버티면서 돈이 조금 생기면 해월 선생 은거지 답사를 계속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원주에 오는 날이면 꼭꼭 선생님을 찾아뵙고 결과 보고를 드리곤 했지요. 그런 과정에서 선생님께서는 수시로 해월 선생님 말씀을 해주시고, 시(侍)에 대한 말씀도 해주시고 그러셨어요. 선생님과 저와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더욱이 무위당 선생님의 세상을 바라보시는 경륜을 생각할 때 저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은 존재였지만, 동학을 좋아하시고 해월 선생님을 존경하고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겁도 없이 이것저것 참 많은 질문을 드리곤 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동학에 관심을 가지시게 되었습니까?” “한국전쟁 무렵, 여기 원주에 오창세라는 친구가 있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했지”라고 하시면서 그 친구로부터 동학을 알게 되고, 수운과 해월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동학, 천도교 쪽 분들이 ‘민족자주’를 기치로 했던 혁신 정당이었던 근로인민당에 많이 가입했는데, 보도연맹사건 때 억울하게 학살당하셨다고 증언해 주셨어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순간이었지요.

제가 한 30년 동학(東學) 공부를 하긴 했는데요. 아직도 동학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시면 주저주저하곤 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동학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제 발과 제 힘,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특정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제 결대로 제대로 사는 것을 지향한 ‘생명사상’, 바로 그것이 동학의 진정한 면모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따라서 창도(創道) 당초부터 제 힘으로,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을 지향했기에, 동학이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한결같이 ‘민족자주’를 고민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죠. 바로 이것 때문에 동학은 외세(外勢) 및 그 외세와 결탁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협공을 당합니다. 오창세라는 분도 그런 가운데 희생되신 분이지요.

강원도 원주는 해월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땅입니다. 두 군데 유적이 있는데, 1898년 6월에 체포되신 호저면 송골이라는 곳과 1890년대 후반 몇 개월간 은신해 계셨던 수레너미라는 곳이 있습니다. 수레너미는 원주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져 버려 갈 수가 없습니다. 횡성에서 안흥을 거쳐 들어가는 길만 있어요. 어느 날 제가, 횡성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수레너미까지 답사를 간 적이 있었어요. 답사를 마친 뒤 선생님을 뵙고 산세가 이렇고 저렇고 라고 말씀드렸더니 “앞으로 거기다가 한살림 수련원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호저 송골에 해월 선생님 추모비를 세울 적에는 원주에서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셨던 ‘치악동우회’ 회원들의 합력이 컸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경남 하동에서 올라온 해월 선생님 후손인 도예가 최정간 선생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해월 최시형 피체지 묘비 제막식



이렇게 무위당 선생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을 무렵, 원주에서 출범한 ‘한살림’이 서울로 올라가고(박재일 회장님이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차린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한 쪽으로는 ‘한살림모임’의 주도로『한살림선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을 뵈오니,『한살림선언』이라는 작은 책자 한 권을 주시면서 “이것 공부해라. 네 생각이랑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시면서 ‘한살림모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살림모임’에 참여하면서 저는 꿈에도 그리던 김지하 시인을 비롯하여, 박재일 회장님, 김민기 선배님, 최혜성 선생님, 서정록 선생, 윤형근 선생 등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돈 없는 가난한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인 김지하’님께 몇 번이나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인 김지하’ 선생님에게 밥 얻어먹은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 시절 그다지도 염치가 없었던 제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저는 지금도『한살림선언』을 처음으로 접했던 순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충격이란 무어라고 할까, 제 인생에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 바로『한살림선언』을 처음 접했던 순간입니다. 저의 인식의 대전환은 무위당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결정적인 대전환은 바로『한살림선언』을 손에 넣고 읽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선언을 읽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은 “동학이 바로 이거야”였습니다. “동학이 바로 이거야”란 동학이 새롭게 부활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한살림선언』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한살림선언)이 해월 선생께서 38년 동안 조선팔도를 전전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알려주고, 깨우쳐주시려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게 무위당 선생님께서 평생토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했던 바로 그 (생명)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에 제가 그대로『한살림선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그때서야 비로소 “아 내가 미친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그 전까지만 해도 선배와 친구들에게, 그리고 지금 생존해 계신 진보적 역사학자로 유명하신, 상지대 총장님도 역임하셨던 강만길 교수님께 어느 학회 모임에서 1893년 보은취회에서 해월 선생님이 하신 역할을 얘기했다가 엄청 얻어맞은 적이 있었어요. “역사학은 학문의 골키퍼인데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라면서 저를 엄청나게 꾸짖었어요. 잘 아시다시피 강만길 선생님은 당시만 해도 역사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문제, 사회경제적 상황이 전체를 좌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지니고 계셨죠. 그런 선생님 앞에서 전봉준 대신에 해월 선생님 역할을 강조하고,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사상과 정신 문제를 말했으니 혼이 날 법했죠. 그런 강 선생님도 지금은 완전 달라지셨지요. 그리고 1998년 1월에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札幌市)에서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따뜻하게 저를 진심으로 격려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여튼 사회경제적 문제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80년대 내내 저는 학회에서 ‘미친 놈 아니면 조금 모자라는 놈’ 취급을 당했고, 동학의 사상적 중요성이나 해월 선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제 발언은 언제나 반대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의 벌떼 같은 공격으로 초토화되곤 했었습니다. 그런 삭막한 상황 속에서 해월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주목하신 무위당 선생님을 뵙게 되고, 그리고 동학의 핵심 사상을 생명사상으로 새롭게 해석해 낸『한살림선언』을 읽었을 때, “아! 내가 80년 광주학살 이후 그토록 찾고자 했던 동학의 핵심 사상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40여 년에 이르는 해월 선생의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고 이렇게 부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 시작하였고, 그 때서야 비로소 “내가 나사가 몇 개 빠진 모자란 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내가 그토록 어렵게 찾아 헤매며 해결하고자 했던 주제= 해월 연구가 결단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확신이 들고, 그렇게 확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동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원불교 교단에서 ‘영산원불교대학’이라는 대학을 신설하게 되는데, 저는 그 대학 창립 멤버로 포함되어 강원도 원주를 떠나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때 제가 “영산원불교대학 창립 멤버로 발령이 나서 전라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벌써 소식을 들으시고 “일체중생 하심공경 시수행인 청정심야(一切衆生 下心恭敬 是修行人 淸淨心也)”라는『육조단경』말씀을 화제(話題)로 써서 주시더라구요. 이 글이 어디에 나오는 글귀이고 너에게 왜 준다는 그런 내용이 담긴 편지까지 미리 써서 준비해 두셨더라구요. “모든 중생(사람 뿐 아니라 벌레 한 마리와 같은 미물 곤충까지도 포함)을 하심(下心)을 해서 늘 공경을 해야 그게 종교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니가 이 경구대로만 살면 아마도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후학(後學)을 기르기 위해 떠나는 저에게 무한한 신뢰와 격려를 실어 주셨습니다. 정말 선생님의 큰 사랑을 입은 저로서는 이 경구가 영원한 화두(話頭)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광주학살 이후에 동학, 그 중에서도 해월 선생님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무위당 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가슴 한 구석에 갈등과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저는 원불교라는 신생종교의 교역자 신분의 종교인이지만 ‘혁명’을 하고 싶었고, ‘혁명’을 하면서도 종교적인 심성, 영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자 고민이었어요.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제 삶으로 통합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해월 선생님 연구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다시 무위당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두 분 모두 영성과 혁명을 탁월하게 통합한 어른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박사 논문에서 해월 선생님이 바로 혁명과 영성을 통합한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아무도 인정해 주시지 않습디다. 박사논문 심사를 받을 당시에는 관련 기록이 김구 선생님 자서전인『백범일지』에만 나왔기 때문이예요. 전봉준 장군(혁명)과 해월 선생(영성)이 손을 잡고 혁명을 하는 기록이 백범 선생님 자서전에서만 나오니 심사위원들께서 근거가 약하다며 인정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포기하고 있다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 유학을 하게 되어 일본 측 자료를 널리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한국 학자로서는 최초로요. 4년 동안 일본 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찾아보니 해월 선생께서 전봉준 장군과 협력하여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1차 사료(史料)들이 10여 개 이상 나오더군요. 두 분이 비밀 연락 루트까지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구요. 거기서 저는 어떤 결론을 얻었냐 하면, 동학혁명 당시에 영성과 혁명이 통일되어 있던 분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시고, 그런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해월 선생님을 무위당 선생님께서 그토록 존경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월 선생님의 참 모습, 즉 영성과 혁명을 당신의 인격 안에 온전히 통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본어로 써서,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 박사 논문으로 제출하여 일본 교수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 평생의 화두를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1년 4월에 일본어 박사 논문을 들고 귀국하자마자 원주로 편지를 드리고, 다음 해 5월에 무위당 선생님 묘소에 논문을 올리고, 그리고 술 한 잔을 올리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지난 1백 년의 비참했던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회한과 슬픔, 분노의 눈물인 동시에, 제 인생 전체를 걸고 고투했던 화두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해월 선생님과 무위당 선생님의 크신 가르침과 삶의 모범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온통 어우러진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생전의 무위당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언제나 100년 전의 해월 선생님께서 부활하셔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해월과 무위당이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라 늘 한 분이셨어요. 100년 전의 무위당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현재의 해월이 바로 무위당 선생님이셨지요. 그런데 그 두 분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풀뿌리 민초(民草)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무한한 관심 그 자체 말입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 봉산동에 있는 댁을 나오셔서 시내로 오는 길은 천천히 걸어야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두 시간 넘게 걸려서 시내로 나오시곤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닌가요. 두 시간 동안 내내 걸어 나오시는 동안 길거리에서 좌판 장수를 하시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시고, 리어카 끌고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와도 장사 이야기 나누시느라 그러셨다지요.








해월 최시형



100여 전의 해월 선생님도 무위당 선생님처럼 민초들에 대한 시선이 똑 같았어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 소개하지요. 해월 선생님 제자 중에 서장옥(徐璋玉)이라는 이가 있어요. 서인주(徐仁周)라고도 합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서장옥은 의협심이 대단히 강해서 불의(不義)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저와도 약간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아요. 그런 서장옥의 눈에 동학(東學)을 ‘한다’는 죄목 때문에 동지들이 무수하게 잡혀가 억울하게 죽기도 하고, 귀양 가기도 하고,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참다참다 못해 항의를 하다가 관에 잡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 때가 1880년대 말엽 아니면 1890년대 초엽의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해월 선생께서도 신변이 위태로워져서 강원도에서 충청도 쪽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종일 빗속을 뚫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밤이 되어 어느 이름 모를 주막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어졌는데도 해월 선생께서 주무시지를 않습니다. 옆에 모시고 있던 제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쭙습니다. “종일 비를 맞으셔서 감기가 들지도 모르고 피곤도 하실 텐데 왜 주무시지 않습니까?” “장옥이가 지금 동지들을 위해 일을 하다가 잡혀 감옥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는데, 내가 어찌 이만한 일로 따뜻한 이불을 덮고 편한 잠을 잘 수 있겠느냐”하면서 꼬박 밤을 지새우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가슴 찡한 이야기 아닌가요. 해월 선생께서는 또 “내가 젊었을 때 남의 집 머슴살이를 많이 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머슴 놈, 머슴 놈’ 하면서 멸시를 하곤 했을 때 참 가슴이 많이 아팠느니라. 사람이 곧 하늘님이니 너희들은 사람 모시기를 하늘님 모시듯이 해야 한다”고 평생토록 강조하셨다고 익산 출신 동학 접주이자 해월 선생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지영 선생이『동학사』에다 써 놓았습니다. 이 모두 해월 선생님 역시 민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자 그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혁명 대열에 동참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의 꿈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우리들은 비록 시골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볼 수가 없어 팔도(八道)가 마음 을 합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義)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塗炭)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기로써 맹서(盟誓)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 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太 平聖代)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위 내용은 문맹률이 80-90%가 넘던 시절인 갑오년(1894) 음력 3월 20일경에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걸고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조선 팔도를 향해 포고(布告)한「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에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 민초들의 간절한 꿈이 너무나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동학군들이 어찌 폭도(暴徒)요 비도(匪徒)란 말입니까? 저는 바로 이런 민초들의 모습을 가장 절절하게 이해하시고, 가장 깊게 사랑하신 분들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무위당 선생님이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021/06/04

원주 봉천, 무위당의 길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원주 봉천, 무위당의 길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원주 봉천, 무위당의 길
등록 :2015-12-15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그의 집엔 거지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인기척이 나면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가, 손님 오셨다.’ 정부가 토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침을 발표하자, 소작인들에게 부쳐먹던 땅을 무상으로 나눠준 할아버지였다. ‘땅값은 그동안 받은 소작료로 충분했다.’
선생의 사유는 인간에 의한 자연과 생명 파괴의 문제로 확장됐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게 1983년 10월 농산물의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이었다. 평생 수천 점의 서화를 쓰고 그리고도 돈 받고 판 적이 없는 그였지만, 한살림의 밑돈 마련을 위해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원주역 플랫폼에 들어서면 항상 반갑게 맞아주는 이가 있다. 역사 허름한 창고 회벽에서 밝게 웃고 있는 무위당 장일순이다. 선생을 기리는 이 지역 대학생들이 그린 벽화 속에서 선생은 언제나 그랬듯이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다.’

 역사 왼쪽 해가 잘 비치는 자리였을 것이다. 노점상, 지게꾼, 행상, 건달 등 역에 터잡고 살아가는 이들로 항상 북적이는 곳이다. 언젠가 선생은 그곳에 자리를 깔았다.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놓고 아침부터 그곳 사람들과 술자리를 벌였다. 영락없는 노숙자였다. 기행은 계속됐다. 자초지종이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한 시골 아낙이 선생을 불쑥 찾아왔다. 딸 혼수 비용을 마련해 원주로 내려오다가 기차 안에서 몽땅 소매치기당했다는 것이다. 아낙은 선생에게 매달렸다. 찾아달라고. 선생이 역전에 자리를 깐 것은 아낙을 돌려보내고 나서였다.
선생의 노숙생활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계속됐다. 그런 어느 날 한 남자가 조용히 찾아왔다. 그는 말없이 돈뭉치를 건넸다. 쓰고 남은 돈이었다. 선생은 그 돈에 당신의 것을 보태 원금을 채워 아낙에게 전했다. 그 뒤에도 선생은 가끔 역전에 갔다. 스리꾼에게 위로의 술을 건네려는 것이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자 한잔 받으시고, 날 용서하시게.”
‘원주의 아버지’. 김지하는 선생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는 일 없이 안 하시는 일 없으시고/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었다.”
그의 말마따나 선생은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서울공대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를 다니다 국대안 반대데모 때 제적당하고 다시 서울대 미학과를 입학했으나 중도에 귀향해 고등공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교 살림이 어렵게 되자 아예 인수해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원주엔 고등학교가 없었다. 선생은 손수 교실을 짓고 교사 겸 재단 이사장 노릇을 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5·16 군사정권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3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서 쫓겨났다.
원주 봉산동 자택엔 10명의 대가족이 살았다. 한 지붕 아래 안방엔 부모님, 옆방엔 동생들, 문간방엔 선생 내외가 기거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안방 앞에 무릎 꿇고 문안 인사를 드렸다. ‘밤새 평안하시었습니까.’ 내어놓은 요강을 뒷간에 비우고, 깨끗이 씻은 뒤 물을 가득 부어놓았다. 한번도 거르지 않았던 그 일은 사실 집안 어른의 가르침을 몸에 새기는 과정이었다.
그의 집엔 거지가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인기척이 나면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가, 손님 오셨다.’ 어머니는 바가지를 들고 온 이들에겐 밥과 반찬을 가지런히 담아 보냈고, 빈손인 손님에게는 건넌방에 상을 차려주었다. 해방이 되고 정부가 토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 방침을 발표하자, 소작인들에게 부쳐 먹던 땅을 무상으로 나눠준 할아버지였다. ‘땅값은 그동안 받은 소작료로 충분했다.’ 어머니는 선생이 옥살이하는 동안 단 하루도 이불을 깔고 주무시지 않았다.
“쥐를 위해 늘 밥을 남겨 놓는다/ 모기를 염려해 등불을 붙이지 않는다/ 절로 돋아나는 풀을 위해/ 계단을 함부로 밟지 않는다.” 선생이 즐겨 소개한 묵암선사의 선시는 그런 가풍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석방된 이후 선생은 보안관찰 대상으로 묶였다. 골목 어귀에 파출소도 들어섰다. 선생은 그때 다시 붓을 들고, 할아버지(여운 장경호)와 차강 박기정 선생에게서 배운 글씨와 난을 다시 쓰고 치기 시작했다. 유홍준 교수가 훗날 조선의 마지막 문인화라며 ‘민초도’로 명명한 장일순 난은 이때 잉태했다.
언젠가 정현경 전 이화여대 교수가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선생님을 도인이라고도 하는데, 언제 수련하시나요.” “방축을 걷는 것이죠.” 자택에서 시내까지는 20여분 거리. 파출소를 지나 둑보다 낮은 동네를 가로질러 방축에 오르면 봉천이다. 개봉교를 지나 쌍다리에 이르면 건너가 시내다. 방축 밑 노천시장을 따라 중앙시장 쪽으로 가다 보면 밝음신협이 나온다.
“땅에 뿌리를 박고 밤낮으로 해와 달을 의연히 맞아들이는” 방축의 풀들이나, 가난한 노점상, 이발소, 구멍가게, 식당 사람들은 그를 일깨우는 스승이었다. 대성학원 설립자 시절부터 그가 선 주례만 2천여건. 서민들에게 그는 좋은 주례였다. 때문에 대개 인연이 닿는 이들이었다. ‘잘 지내셨느냐’ ‘건강하신가’ 따위의 인사가 오가고, 아이들 소식, 살림살이, 작황, 벌이 등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그러다 보면 20분 거리가 두어시간 걸리기 일쑤였다. 선생은 그렇게 ‘물속을 천리라도 기어’ 갔다.
방축을 따라 돌아가는 길. ‘저 산 보이지.’ ‘치악산이요?’ ‘모월산이야. 하는 일 없는 것 같지만 안 하는 일이 없는 게 없는 어머니 달 같은 산이지.’ 그가 꿈꾸고 닮으려 한 것은 그런 산이었다. ‘오늘 또 내가 허튼소리를 많이 했구나.’ ‘이 못난 사람을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주시는구나.’ 반성이 뒤따랐다.
1968년부터 시작된 신용협동조합운동의 싹은 그 속에서 돋아났다. 농민이나 도시 서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저리의 융자와 남은 돈을 유익하고 안전하게 맡길 곳이었다. 지학순 주교와 함께 시작한 원주의 신협운동은 강원도 일대 농촌과 어촌 광산촌으로 퍼져나갔다.
1972년 남한강 지역을 휩쓴 대홍수 때 독일의 가톨릭 구호단체에서 가톨릭 원주교구에 거금 187억원을 보내왔다. 선생은 지 주교를 설득해 그 돈을 좀더 근본적인 사회 개혁에 쓰기로 하고, 기금은 각 지역의 농민회, 노동자회, 어민회, 영세시민회 등 풀뿌리 조직의 싹을 틔우는 데 썼다. 그 결과 유신시대, 원주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실질적 구심점이 되었다.
유신체제가 말기로 접어들면서 선생의 사유는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서 인간에 의한 자연과 생명 파괴의 문제로 확장됐다. 그때 함께 고민한 이들이 김지하, 박재일, 김영주, 최혜성, 서정록 등이었고 그 결과로 태어난 게 1983년 10월 농산물의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이었다. 평생 수천점의 서화를 쓰고 그리고도 돈 받고 판 적이 없는 그였지만, 한살림의 밑돈 마련을 위해 그는 처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좁은 문간방은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전국의 활동가들이 충전이 필요하면 그곳을 찾아왔다. 1군사령부의 별 단 군인들도 왔고, 그를 회유하려던 5공 실세도 있고, 상지대의 김문기도, 교수협의회 교수들도 찾아왔다.
그런 그의 집에는 스승이 또 한 분 있었다. 하는 일 없이 바쁜 그를 오롯이 지켜준 부인 이인숙이었다. 서울대를 나온 재원이었지만 그와 살면서 밤낮없이 북적대는 손님들에게 따듯한 밥상을 내어놓았다. 뜰에는 꽃다지, 냉이, 제비꽃이 피고 지고, 배추와 푸성귀가 넘쳐났다. 뒷간에서 나온 거름을 먹고 잘도 자랐다. ‘찬은 없었지. 그저 된장찌개에 마당에 있는 질경이 뜯어 볶아내고, 울타리의 아네모네 이파리를 수도 없이 무쳐서 냈지.’ 선생이 옥살이를 할 때는 영치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화시장에 납품하는 봉제공장에서 시다 노릇을 했던 아내였다.
그런 아내에게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남향의 문간방은 여름이면 몹시 더웠다. 더위를 많이 타는 아내는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다. 선생은 부채질로 아내의 더위를 쫓아 잠들게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선생이 떠나고 집은 쇠락했다. 동생(화순)네와 함께 쓰던 마당이 중간에 길이 나는 바람에 더욱 옹색해졌다. 미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내는 집을 혼자 지키고 있다. 지팡이에 의지해야 할 만큼 다리도 불편하다. “힘들지 않으세요?” 빙그레 웃기만 한다. 또 묻는다. “나처럼 앞뒤 꼭 막힌 여자가 아니라 좀더 똑똑한 사람 만났으면 좀더 편하셨을 텐데….” 이번엔 딴소리다. “깊은 골 사람이 없다 하여 난은 그 향기를 그치지 않는다.”(幽蘭不以無人息其香) 이 화제와 난은 필경 선생이 부인을 그리며 쓰고 친 것 같았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선생은 1994년 예순일곱에 ‘제 몸 안으로 찾아온 손님’(위암)과 함께 세상을 떴다. 지인들은 병명을 사리암이라고 했다. 술을 못 하는 선생이 저희를 생각해 마신 술이 사리(암)가 되었다는 것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21955.html#csidxbe25f755efd741da89ff3d092adb8a1 

2021/05/21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 성산기획

[박맹수]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 성산기획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동학, 그리고 생명평화*



박맹수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이 글은 몇 년 전, 강원 원주시에서 있었던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 현판식 기념 강연 내용을 필자가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제가 1983년에 결혼을 했는데 그 때 집사람이 80년부터 사북(강원 정선군 사북읍)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83년에는 원주시 부론면에 있는 부론중학교, 85년에는 원주 시내에 있는 학성중학교로 전근을 와서 그때부터 저도 자연스럽게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5월 광주항쟁(1980년)을 겪었습니다. 그 때 고급 정보를 취급하는 사단 사령부 벙커에서 연락 장교로 근무를 했는데, 매일 새벽 6시에 사단장님이 출근하면 그 전날부터 새벽까지 일어난 일을 브리핑하는 게 주된 일과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나오는 커다란 지도(地圖) 앞에 서서 2미터 넘는 지시봉을 들고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날짜별 시간대별로 브리핑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데, 81년 6월말에 제대(除隊)를 하고 나오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우리 국군이 정반대로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접하고 나서부터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어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국민을 학살하는 군대의 하수인 노릇을 한 제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서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81년 9월부터 전북 익산시에 있는 원불교중앙총부에서 처음으로 교역(敎役)에 임했지만 마음은 늘 “왜 광주학살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왜 나는 그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거듭하다가 82년부터 ‘삼동야학(三同夜學)’이란 야학교를 만들어 후배들과 함께 야학을 통한 민주화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학운동을 하면서 80년 5월의 광주학살의 문제는 어떤 개인 한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및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광주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근현대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야학운동을 병행하면서 1983년에 한국학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문제의 근원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 들어 83년부터 본격적으로 동학(東學) 공부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1986년 봄에 연구자 중에서는 최초로 해월 최시형(海月 崔時亨, 1827-1898) 선생에 대한 석사논문을 마무리하고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도중이었는데요.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교로 계셨던 최성현 선생(<<좁쌀 한 알>>의 저자)으로부터 우연히 해월 선생과 동학을 무지무지하게 좋아하시는 도사님 한 분이 강원도 원주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지요. 왜냐면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광주학살 때문에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사회를 변혁(變革)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 때문에 모두들 동학혁명 최고 지도자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 1855-1895)에 대해서만 주목하던 시절이었는데, 해월 선생을 좋아하신다는 도사님이 계신다니 저로서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사님 소식은 접했지만 어떻게 연락드릴 길이 없어 마음속으로만 기억해 두고는 그만 몇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원주에 내려갔더니 집사람이 무위당 선생님께서 참여하고 계신 어떤 모임에서 나온 소식지를 가져와 보여주더군요. 그 때 저는 “아 그렇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염원하면 서로서로 기운이 통하여 만나게 되는 수가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소식지를 보고 바로 연락을 드린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 때 무위당 선생님과 연락이 닿게 해 주신 분이 당시 강원도 원주시에서 ‘천하태평’이라는 식당을 경영하고 계셨던 선종원 선생님이셨습니다. 선 선생님을 통해 연락을 드리니 “어디어디로 나와라”하는 연락이 바로 왔습니다. 약속한 날, 약속된 장소로 나갔더니 박준길 선생님이 무위당 선생님을 모시고 미리 와 계셨습니다. 선생님 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C도로 근처 2층 횟집으로 기억되는 데요. 생선회를 진수성찬으로 차려 놓고 미리 오셔서 저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처음 뵌 순간을 저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물으셨던 첫 질문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얘 맹수야! 넌 다른 놈들은 다 전봉준에 미쳐서 거기에 푹 빠져 있는데, 무슨 생각으로 해월 선생을 연구하게 되었냐?” 이 질문을 몇 번이고 저에게 물으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께서는 젊은 놈이 그 때의 시류(時流)와는 다르게 해월 선생을 연구한다는 말씀에 대단히 기분이 좋으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 제가 선생님 앞에서 말이 되는 얘기, 안 되는 얘기를 서너 시간 가량을 떠들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다 들어주셨던 것이 저 뇌리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고, 바로 그것이 선생님에게 사로잡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이렇게 선생님과 인연이 돼서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원주에 내려오면 반드시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고 찾아뵈었습니다. 저는 그때만 해도 해월 선생에 대한 연구만 했지, 사실은 군대 안에서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불덩어리’ 그 자체였어요. 무엇이고 만나면 온통 다 태워버릴 기세의 ‘불덩어리’말입니다. 작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더 큰 폭력으로 민중을 압살하는 정치체제를 어떻게 해서든지 근본적으로 엎어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대학원생 신분이었는데도 굵직굵직한 시위나 정치적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여했어요. 그런 저를 보실 때마다 선생님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주셨던 말씀이 “전두환을 사랑해야 한다” 바로 그 말씀이셨어요. 군대 안에서 광주의 비극을 직접 겪었던 제가 어찌 전두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니,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하지만 저는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그렇게 간곡하게 당부하시는 말씀과는 다르게 반대 방향으로만 반대 방향으로만 달려갔습니다. 87년 6월 항쟁 때는 수원과 익산 등지에서 가두연설을 하며 데모에 앞장서는가 하면, ‘인천사태’ 당시에도 가두시위에 참가했고,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공정선거감시단’을 결성하여 활동했습니다. 1988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노조 발기인이 되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이어서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데모를 주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학원에서 저의 목을 조여 오는데, 처음에는 지도교수를 바꾸라 하더군요. 지도교수를 특별한 이유 없이 바꾸는 것은 대학원 규정에 없어 못 바꾸겠다고 했더니, 그럼 자퇴해라 그러더군요. 제가 어용교수로 지목했던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부임하여 그런 압박을 가해 오니 어쩔 수 없이 자퇴를 결심하고 가슴에 벌겋게 불이 난 상태로 원주로 내려 왔습니다. 그 때 저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 시험에 응시하여 필기시험에서는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불합격되었고, 데모 주동자라는 낙인 때문에 시간 강사 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어요. 그리고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시절 ‘북한바로알기 운동’에 호응하여 북쪽에서 간행된『조선전사』보급 책임을 맡아 연구자들에게 보급했다가 그것이 문제가 되어 안기부 수배 리스트에까지 올라가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 저에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혁명가의 로망(낭만)’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서 난을 한 점 쳐 주셨어요. “낭만주의자여야 진정한 혁명가가 될 수 있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포기하지 말고 ‘로망(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격려해 주시면서 “내유천지(內有天地)하면 외무소구(外無所求)니라”를 화제(話題)를 써서 주셨어요. “안으로 천지, 즉 온 우주를 가지고 있으면 밖으로 아무 것도 구할 것이 없느니라.” 네 안에 바른 중심만 서 있으면 바깥 일이 제대로 되는 것 하나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씀은 당시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저에 대한 선생님의 무한한 사랑과 격려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화제가 쓰인 난 한 점을 주시면서 “절대로 니가 먼저 자퇴하지 마라, 버틸 때까지 버텨라” 하시면서 응원해 주셨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자퇴하지 않고 10년을 버티었습니다. 10년을 버틴 끝에 박사과정에 입학한지 꼭 10년째 되던 1996년에 가까스로 해월 선생님에 관한 박사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월 최시형 연구-주요 활동과 사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지나간 80년대를 돌이켜 보면, 무위당 선생님께서 계시지 아니했더라면 저의 동학 공부는 진즉 중단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선생님의 뜨거운 격려에 힘입어 10년을 버티면서 돈이 조금 생기면 해월 선생 은거지 답사를 계속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원주에 오는 날이면 꼭꼭 선생님을 찾아뵙고 결과 보고를 드리곤 했지요. 그런 과정에서 선생님께서는 수시로 해월 선생님 말씀을 해주시고, 시(侍)에 대한 말씀도 해주시고 그러셨어요. 선생님과 저와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더욱이 무위당 선생님의 세상을 바라보시는 경륜을 생각할 때 저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은 존재였지만, 동학을 좋아하시고 해월 선생님을 존경하고 계시다는 이유 때문에 겁도 없이 이것저것 참 많은 질문을 드리곤 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동학에 관심을 가지시게 되었습니까?” “한국전쟁 무렵, 여기 원주에 오창세라는 친구가 있었다. 인격적으로 훌륭했지”라고 하시면서 그 친구로부터 동학을 알게 되고, 수운과 해월 선생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동학, 천도교 쪽 분들이 ‘민족자주’를 기치로 했던 혁신 정당이었던 근로인민당에 많이 가입했는데, 보도연맹사건 때 억울하게 학살당하셨다고 증언해 주셨어요. 눈시울이 뜨거워지던 순간이었지요.

제가 한 30년 동학(東學) 공부를 하긴 했는데요. 아직도 동학의 핵심 사상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시면 주저주저하곤 합니다. 그런데 단 하나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어요. 동학을 ‘하는’ 분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제 발과 제 힘,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과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특정 종교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제 결대로 제대로 사는 것을 지향한 ‘생명사상’, 바로 그것이 동학의 진정한 면모라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따라서 창도(創道) 당초부터 제 힘으로, 제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된 삶을 지향했기에, 동학이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한결같이 ‘민족자주’를 고민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었죠. 바로 이것 때문에 동학은 외세(外勢) 및 그 외세와 결탁한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협공을 당합니다. 오창세라는 분도 그런 가운데 희생되신 분이지요.

강원도 원주는 해월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땅입니다. 두 군데 유적이 있는데, 1898년 6월에 체포되신 호저면 송골이라는 곳과 1890년대 후반 몇 개월간 은신해 계셨던 수레너미라는 곳이 있습니다. 수레너미는 원주 쪽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숲이 우거져 버려 갈 수가 없습니다. 횡성에서 안흥을 거쳐 들어가는 길만 있어요. 어느 날 제가, 횡성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수레너미까지 답사를 간 적이 있었어요. 답사를 마친 뒤 선생님을 뵙고 산세가 이렇고 저렇고 라고 말씀드렸더니 “앞으로 거기다가 한살림 수련원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호저 송골에 해월 선생님 추모비를 세울 적에는 원주에서 선생님과 함께 활동하셨던 ‘치악동우회’ 회원들의 합력이 컸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경남 하동에서 올라온 해월 선생님 후손인 도예가 최정간 선생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던 기억도 납니다.






해월 최시형 피체지 묘비 제막식



이렇게 무위당 선생님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을 무렵, 원주에서 출범한 ‘한살림’이 서울로 올라가고(박재일 회장님이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는 이름의 가게를 차린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한 쪽으로는 ‘한살림모임’의 주도로『한살림선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을 뵈오니,『한살림선언』이라는 작은 책자 한 권을 주시면서 “이것 공부해라. 네 생각이랑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시면서 ‘한살림모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살림모임’에 참여하면서 저는 꿈에도 그리던 김지하 시인을 비롯하여, 박재일 회장님, 김민기 선배님, 최혜성 선생님, 서정록 선생, 윤형근 선생 등을 만나게 됩니다. 그 때만 해도 저는 돈 없는 가난한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에 가난하기 그지없는 ‘시인 김지하’님께 몇 번이나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인 김지하’ 선생님에게 밥 얻어먹은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 시절 그다지도 염치가 없었던 제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납니다.

저는 지금도『한살림선언』을 처음으로 접했던 순간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충격이란 무어라고 할까, 제 인생에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 바로『한살림선언』을 처음 접했던 순간입니다. 저의 인식의 대전환은 무위당 선생님과의 만남에서도 이루어지지만, 결정적인 대전환은 바로『한살림선언』을 손에 넣고 읽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선언을 읽자마자 바로 떠오른 생각은 “동학이 바로 이거야”였습니다. “동학이 바로 이거야”란 동학이 새롭게 부활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한살림선언』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한살림선언)이 해월 선생께서 38년 동안 조선팔도를 전전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알려주고, 깨우쳐주시려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이게 무위당 선생님께서 평생토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 했던 바로 그 (생명)사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로 이거다.” 라는 생각에 제가 그대로『한살림선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그때서야 비로소 “아 내가 미친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그 전까지만 해도 선배와 친구들에게, 그리고 지금 생존해 계신 진보적 역사학자로 유명하신, 상지대 총장님도 역임하셨던 강만길 교수님께 어느 학회 모임에서 1893년 보은취회에서 해월 선생님이 하신 역할을 얘기했다가 엄청 얻어맞은 적이 있었어요. “역사학은 학문의 골키퍼인데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라면서 저를 엄청나게 꾸짖었어요. 잘 아시다시피 강만길 선생님은 당시만 해도 역사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문제, 사회경제적 상황이 전체를 좌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지니고 계셨죠. 그런 선생님 앞에서 전봉준 대신에 해월 선생님 역할을 강조하고,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사상과 정신 문제를 말했으니 혼이 날 법했죠. 그런 강 선생님도 지금은 완전 달라지셨지요. 그리고 1998년 1월에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札幌市)에서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는 정말 따뜻하게 저를 진심으로 격려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여튼 사회경제적 문제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80년대 내내 저는 학회에서 ‘미친 놈 아니면 조금 모자라는 놈’ 취급을 당했고, 동학의 사상적 중요성이나 해월 선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제 발언은 언제나 반대 의견을 가진 연구자들의 벌떼 같은 공격으로 초토화되곤 했었습니다. 그런 삭막한 상황 속에서 해월 선생님의 삶과 사상을 주목하신 무위당 선생님을 뵙게 되고, 그리고 동학의 핵심 사상을 생명사상으로 새롭게 해석해 낸『한살림선언』을 읽었을 때, “아! 내가 80년 광주학살 이후 그토록 찾고자 했던 동학의 핵심 사상이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구나. 40여 년에 이르는 해월 선생의 고난이 결코 헛되지 않고 이렇게 부활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 시작하였고, 그 때서야 비로소 “내가 나사가 몇 개 빠진 모자란 놈이 결코 아니었구나! 내가 그토록 어렵게 찾아 헤매며 해결하고자 했던 주제= 해월 연구가 결단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구나!”하는 확신이 들고, 그렇게 확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동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에 원불교 교단에서 ‘영산원불교대학’이라는 대학을 신설하게 되는데, 저는 그 대학 창립 멤버로 포함되어 강원도 원주를 떠나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 때 제가 “영산원불교대학 창립 멤버로 발령이 나서 전라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 때 무위당 선생님께서는 벌써 소식을 들으시고 “일체중생 하심공경 시수행인 청정심야(一切衆生 下心恭敬 是修行人 淸淨心也)”라는『육조단경』말씀을 화제(話題)로 써서 주시더라구요. 이 글이 어디에 나오는 글귀이고 너에게 왜 준다는 그런 내용이 담긴 편지까지 미리 써서 준비해 두셨더라구요. “모든 중생(사람 뿐 아니라 벌레 한 마리와 같은 미물 곤충까지도 포함)을 하심(下心)을 해서 늘 공경을 해야 그게 종교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으로, “니가 이 경구대로만 살면 아마도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후학(後學)을 기르기 위해 떠나는 저에게 무한한 신뢰와 격려를 실어 주셨습니다. 정말 선생님의 큰 사랑을 입은 저로서는 이 경구가 영원한 화두(話頭)가 되고 있습니다.

저는 광주학살 이후에 동학, 그 중에서도 해월 선생님을 공부하면서, 그리고 무위당 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가슴 한 구석에 갈등과 고민을 안고 살았습니다. 저는 원불교라는 신생종교의 교역자 신분의 종교인이지만 ‘혁명’을 하고 싶었고, ‘혁명’을 하면서도 종교적인 심성, 영성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자 고민이었어요.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구원을 제 삶으로 통합하는 것이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해월 선생님 연구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다시 무위당 선생님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겐 두 분 모두 영성과 혁명을 탁월하게 통합한 어른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박사 논문에서 해월 선생님이 바로 혁명과 영성을 통합한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섯 분 심사위원 선생님들이 아무도 인정해 주시지 않습디다. 박사논문 심사를 받을 당시에는 관련 기록이 김구 선생님 자서전인『백범일지』에만 나왔기 때문이예요. 전봉준 장군(혁명)과 해월 선생(영성)이 손을 잡고 혁명을 하는 기록이 백범 선생님 자서전에서만 나오니 심사위원들께서 근거가 약하다며 인정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포기하고 있다가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 유학을 하게 되어 일본 측 자료를 널리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어요. 한국 학자로서는 최초로요. 4년 동안 일본 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찾아보니 해월 선생께서 전봉준 장군과 협력하여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1차 사료(史料)들이 10여 개 이상 나오더군요. 두 분이 비밀 연락 루트까지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구요. 거기서 저는 어떤 결론을 얻었냐 하면, 동학혁명 당시에 영성과 혁명이 통일되어 있던 분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시고, 그런 온전한 인격을 갖추신 해월 선생님을 무위당 선생님께서 그토록 존경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해월 선생님의 참 모습, 즉 영성과 혁명을 당신의 인격 안에 온전히 통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일본어로 써서, 홋카이도대학(北海道大學) 박사 논문으로 제출하여 일본 교수님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제 평생의 화두를 해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1년 4월에 일본어 박사 논문을 들고 귀국하자마자 원주로 편지를 드리고, 다음 해 5월에 무위당 선생님 묘소에 논문을 올리고, 그리고 술 한 잔을 올리면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눈물은 지난 1백 년의 비참했던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회한과 슬픔, 분노의 눈물인 동시에, 제 인생 전체를 걸고 고투했던 화두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해월 선생님과 무위당 선생님의 크신 가르침과 삶의 모범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온통 어우러진 그런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생전의 무위당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언제나 100년 전의 해월 선생님께서 부활하셔서 이 자리에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해월과 무위당이 서로 다른 두 분이 아니라 늘 한 분이셨어요. 100년 전의 무위당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현재의 해월이 바로 무위당 선생님이셨지요. 그런데 그 두 분에게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풀뿌리 민초(民草)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무한한 관심 그 자체 말입니다. 무위당 선생님께서 봉산동에 있는 댁을 나오셔서 시내로 오는 길은 천천히 걸어야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두 시간 넘게 걸려서 시내로 나오시곤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널리 알려진 사실 아닌가요. 두 시간 동안 내내 걸어 나오시는 동안 길거리에서 좌판 장수를 하시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시고, 리어카 끌고 군고구마를 파는 아저씨와도 장사 이야기 나누시느라 그러셨다지요.








해월 최시형



100여 전의 해월 선생님도 무위당 선생님처럼 민초들에 대한 시선이 똑 같았어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하나 소개하지요. 해월 선생님 제자 중에 서장옥(徐璋玉)이라는 이가 있어요. 서인주(徐仁周)라고도 합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서장옥은 의협심이 대단히 강해서 불의(不義)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저와도 약간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아요. 그런 서장옥의 눈에 동학(東學)을 ‘한다’는 죄목 때문에 동지들이 무수하게 잡혀가 억울하게 죽기도 하고, 귀양 가기도 하고,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참다참다 못해 항의를 하다가 관에 잡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요. 그 때가 1880년대 말엽 아니면 1890년대 초엽의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해월 선생께서도 신변이 위태로워져서 강원도에서 충청도 쪽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종일 빗속을 뚫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밤이 되어 어느 이름 모를 주막에서 하루 저녁을 지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밤이 늦어졌는데도 해월 선생께서 주무시지를 않습니다. 옆에 모시고 있던 제자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쭙습니다. “종일 비를 맞으셔서 감기가 들지도 모르고 피곤도 하실 텐데 왜 주무시지 않습니까?” “장옥이가 지금 동지들을 위해 일을 하다가 잡혀 감옥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는데, 내가 어찌 이만한 일로 따뜻한 이불을 덮고 편한 잠을 잘 수 있겠느냐”하면서 꼬박 밤을 지새우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가슴 찡한 이야기 아닌가요. 해월 선생께서는 또 “내가 젊었을 때 남의 집 머슴살이를 많이 했는데, 그 때 사람들이 ‘머슴 놈, 머슴 놈’ 하면서 멸시를 하곤 했을 때 참 가슴이 많이 아팠느니라. 사람이 곧 하늘님이니 너희들은 사람 모시기를 하늘님 모시듯이 해야 한다”고 평생토록 강조하셨다고 익산 출신 동학 접주이자 해월 선생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오지영 선생이『동학사』에다 써 놓았습니다. 이 모두 해월 선생님 역시 민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자 그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혁명 대열에 동참했던 이름 없는 민초들의 꿈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합시다.

우리들은 비록 시골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지만 이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이 땅에서 나는 것을 입고 사는 까닭에 나라의 위태로움을 차마 볼 수가 없어 팔도(八道)가 마음 을 합하고 억조창생(億兆蒼生)들과 서로 상의하여 오늘의 이 의(義)로운 깃발을 들어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塗炭)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것을 죽기로써 맹서(盟誓)하노니, 오늘의 이 광경은 비록 크게 놀랄 만한 일이겠으나 절대 로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각자 자기 생업에 편히 종사하여 다 함께 태평성대(太 平聖代)를 축원하고, 다 함께 임금님의 덕화를 입을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이겠노라.

위 내용은 문맹률이 80-90%가 넘던 시절인 갑오년(1894) 음력 3월 20일경에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걸고 전라도 무장(茂長)에서 전면 봉기한 동학농민군 지도부가 조선 팔도를 향해 포고(布告)한「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에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 민초들의 간절한 꿈이 너무나 절실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동학군들이 어찌 폭도(暴徒)요 비도(匪徒)란 말입니까? 저는 바로 이런 민초들의 모습을 가장 절절하게 이해하시고, 가장 깊게 사랑하신 분들이 바로 해월 선생님이셨고, 무위당 선생님이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020/06/05

12 알라딘: 몸-마음 에콜로지 유정길

알라딘: 몸-마음 에콜로지

몸-마음 에콜로지 | 마음인문학 대중총서 1
유정길 (지은이)공동체2012-08-28

책을 내면서: 에콜로지에서 마음의 길을 찾다

제1부
01 살림의 마음과 몸 에콜로지_ 유정길
02 불안한 먹거리, GMO: 농사와 생태 그리고 삶의 방식_ 김성순
03 강정사태: 인간안보에 대한 두어 가지 생각_ 김레베카
04 비건채식으로 우리 자신과 지구를 구하자!_ 최행식
05 자본과 생태: 독일의 대체에너지를 말한다_ 양대종
06 숲 생태: 생물 다양성을 중심으로_ 최원형
07 몸살림, 생활살림, 마을살림: '몸 생명학'과 문명의 전환_ 주요섭

제2부
08 마음 에콜로지와 미래문명: 생태영성의 삶과 그 문명을 위하여_ 이병철
09 인디언 영성 이야기: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_ 서정록
10 환경.생태문제와 풍수지리설: 몸과 망므의 에콜로지
11 영화 '아바타' 나비족과 나비문명: 생명과 소통하는 마음_ 정혜정
12 자연아 미안해: 노장의 마음으로 자연과 화해하기_ 윤지원
13 바깥-환경에서 우리-환경으로_ 이기흥



370쪽
152*223mm (A5신)
545g
마음공부 공동체를 찾아서 - 미국편
마음공부 공동체를 찾아서 - 오세아니아편
마음공부 공동체를 찾아서 - 유럽편 - 유럽 마음공부 공동체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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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을 내면서: 에콜로지에서 마음의 길을 찾다

제1부
01 살림의 마음과 몸 에콜로지_ 유정길
02 불안한 먹거리, GMO: 농사와 생태 그리고 삶의 방식_ 김성순
03 강정사태: 인간안보에 대한 두어 가지 생각_ 김레베카
04 비건채식으로 우리 자신과 지구를 구하자!_ 최행식
05 자본과 생태: 독일의 대체에너지를 말한다_ 양대종
06 숲 생태: 생물 다양성을 중심으로_ 최원형
07 몸살림, 생활살림, 마을살림: '몸 생명학'과 문명의 전환_ 주요섭

제2부
08 마음 에콜로지와 미래문명: 생태영성의 삶과 그 문명을 위하여_ 이병철
09 인디언 영성 이야기: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_ 서정록
10 환경.생태문제와 풍수지리설: 몸과 망므의 에콜로지
11 영화 '아바타' 나비족과 나비문명: 생명과 소통하는 마음_ 정혜정
12 자연아 미안해: 노장의 마음으로 자연과 화해하기_ 윤지원
13 바깥-환경에서 우리-환경으로_ 이기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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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유정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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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환경연대 산하 녹색불교연구소 소장. 국민농업포럼 공동대표, 조계종 백년대계위원, 전국귀농운동본부 정책연구소. 지혜공유협동조합 정토회 에코붓다,?한살림 모심과 살림연구소와 마음살림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생태·녹색·전환·개벽 등을 화두로 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최근작 : <세계는 왜 한국에 주목하는가>,<개벽의 징후 2020>,<생태사회와 녹색불교> … 총 5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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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평생교육프로그램 개발>,<발달장애 학생을 위한 특수교육 중재>,<마을복지계획 어떻게 세울까>등 총 844종
대표분야 : 교육학 10위 (브랜드 지수 95,730점)

2018/09/01

알라딘: 무엇을 할 것인가 (상) - 열린책들 세계문학 088



알라딘: 무엇을 할 것인가 (상) - 열린책들 세계문학 088







프롤로그

제1장 베라 빠블로브나의 소녀 시절
제2장 첫 번째 사랑과 결혼
제3장 결혼과 두 번째 사랑



제3장 결혼과 두 번째 사랑(계속)
제4장 두 번째 결혼
제5장 새로운 인민의 출현과 대단원
제6장 장면의 전환

진보와 인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 연보







지은이 :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키 (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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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무엇을 할 것인가 (천줄읽기, 큰글씨책)>,<무엇을 할 것인가>,<무엇을 할 것인가 - 하> … 총 11종 (모두보기)
소개 :
19세기 러시아 사상계를 대표하는 급진적인 정치적 사상가이며, 문학 비평가이자 과격한 혁명가이고 소설가에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다.

체르니솁스키는 1828년 7월 28일 볼가 강 근처의 중부 도시 사라토프의 한 성직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학시절 그 유명한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러시아, 프랑스, 독일에서 출판된 많은 사회학 서적을 섭렵했으며 1853년 당대의 급진적 문학잡지인 ≪동시대인≫에 기고하며 문학적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1860년대의 급진주의적인 젊은 세대들에게 과격한 진보주의적 사상과 미래...




옮긴이 : 서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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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인라케시 알라킨>,<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마음을 잡는 자, 세상을 잡는다> … 총 25종 (모두보기)
소개 :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살림모임 창립멤버이다. 문화사를 중심으로 고대 동북아시아 역사에 관한 책을 쓰고 있으며, 2000년 이후에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제3세계 원주민들의 문화와 영성에 대해 공부해오고 있다.

그에게는 두 번의 큰 열림이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무위당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세상에 대한 모든 번뇌와 갈등이 얼음 녹듯이 사라졌으며, 스승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두 번째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레닌을 감동시키고 뜨로츠키를 움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원형

러시아의 정치사회 소설의 대표 작가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의 대표작이다. 저자가 수용소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집필한 이 소설은 사회주의 이념을 최초로 구현한 소설일뿐만 아니라 레닌, 스딸린, 뜨로츠끼 등의 읽고 큰 영향을 받은 책으로 유명하다. 레닌은 자신의 책 제목을 이 책의 제목에서 따와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책은 러시아의 혁명적인 인텔리겐찌야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인텔리겐찌야의 자기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비합리적인 아버지 세대에게 '누구의 죄인가'라는 무력한 비판의식이, 아들 세대에 와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행동으로 전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보여 주는 진보와 인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당대 지식인들뿐 아니라 수많은 청년들을 움직이게 했다. 러시아 지식인들을 움직이게 했던 체르이셰프스끼의 진정한 힘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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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 당시 여자의 삶은 단순했다. 탄생, 결혼, 죽음.. 여기서 자유와 행복을 외치고 밖으로 나선 여성을 그린다는 것은 혁신임에 틀림 없다. 읽어 볼 만한 책이지만 번역이 영 신통치 않다 마치 기계가 번역한 것 같음.
ock9014 ㅣ 2015-10-23 l 공감(0) ㅣ 댓글(0)



상당히 괜찮네요. 처음에 제목이 좋아서 사게 되었는데 읽어보니까 참 좋아요.
sevenrosekim ㅣ 2011-04-14 l 공감(1) ㅣ 댓글(0)








총 : 3편




[서평] 19세기 혁명적 인텔리겐찌야의 자기 희생적인 모습 <무엇을 할 것인가?> 붉은구름 ㅣ 2015-10-31 ㅣ 공감(0) ㅣ 댓글 (0)
[서평]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Chernyshevksy, Nikolai) 저, 서정록 역 <무엇을 할 것인가? (상,하)>를 읽고 / 2009. 02., 748쪽, 열린책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러시아의 정치사회 소설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는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1828-1889)의 대표작이다. 소설 작품임에도 저자는 단락마다 독자와 대화하는 것처럼 주인공과 이야기 전개 흐름에 대해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별로 접해보지 않은 색다른 방식이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요!”
소설은 ‘자유’를 향한 베라 빠블로브나의 당찬 외침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그녀가 처한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다.
성년이 되었으나 가난하고 비천한 대저택 관리인의 딸, 19세기 중반 러시아에서 그런 여성에게 허락된 삶이란 자신을 구원해 줄 남자를 기다리거나 하급 노동자가 되는 것뿐이다. 이미 정해진 삶만이 강요되는 곳, 누구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 곳, 베라는 이런 자신의 현실을 ‘지하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지하실’에 ‘사랑’이 넘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바로 이 ‘사랑’이 곧 그녀를 구속하는 지하실의 정체다. 흔히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에 불과하다.
베라의 어머니가 ‘사랑’을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삶을 딸에게 강요하고, 부잣집 아들 이반이 오로지 헌신적으로 남편을 보필해줄 여성을 배우자로 찾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모순투성이의 관계와 억압상태가 지속되는 한 베라에게 자유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베라는 이 ‘지하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의 모험을 감행한다.


베라와 사랑에 빠지게 될 두 남자 로뿌호프와 끼르사노프.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이기적 유물론자'들이다. 물론 여기서 ‘이익’과 ‘유물'은 화폐적 척도로 계산되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를 충만하게 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선택을 말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원하는 것들의 ‘무게를 하나씩 달아’보고 ‘그중에서 가장 유리한 것을 선택’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동정, 연민, 희생으로 점철된 관계는 서로를 구속하고 괴롭게 한다. 그러니 오로지 저 자신을 위하여 사랑하고, 일하고, 관계하는 이 이기적 계산법에 따라 베라는 집을 나오고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고자 노력하는 신청년, 로뿌호프와 결혼을 한다.


베라와 로뿌호프의 사랑은 그 자체가 ‘지하실’로부터 탈출하는 일이며, 동시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부부 관계는 아주 파격적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방을 썼고, 각방에서도 서로의 자유와 독립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립의 방’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외부와 소통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또한 베라는 자신의 꿈을 살려 가난한 여자들과 함께 운영하는 ‘봉제공장’을 만든다. 구성원 모두가 공장의 주인이기에 그들은 각자의 관심과 능력에 따라 소비조합, 공동주택, 배움터 등의 새로운 관계와 생활들을 조직해 간다. 공장은 이제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노동의 현장이 아니다. 그곳은 새로운 관계와 실험 속에서 가난한 여성들이 삶을 바꾸고 존재를 충만하게 하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베라와 로뿌호프는 단지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 일련의 행보들이 구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바꾸고 외쳤던 바로 그 혁명의 실천이 된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혁명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이제 사회를 바꾸고, 일상을 바꾸는 것을 넘어 존재의 근본적인 고양을 시도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베라와 로뿌호프의 결별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들의 사랑 또한 머무르지 않는다.


19세기 중반 저자가 짜르 치하의 수용소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집필한 이 소설은 '사회주의 이념을 최초로 구현한 소설’로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레닌, 스딸린, 뜨로츠끼 등 20세기 초반 소련의 혁명가들이 읽고 큰 영향을 받은 책으로도 유명하다. 레닌은 자신의 책 제목을 이 책의 제목에서 따와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살벌한 짜르 체제에 의해 옥중에서 감시와 검열이라는 처지에서 저술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체르니셰프스끼는 자신이 당시의 청년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을 소설 작품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이 책은 1860~70년대 러시아의 ‘인민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체르니셰프스끼는 베라와 로뿌호프, 끼르사노프와 라흐메또프(그는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데, 자기의 생활을 포기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면서도 민족과 사회를 위해 사히적 책임을 다하려는 비판적 지식인이다) 등 러시아의 혁명적인 인텔리겐찌야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모델-새로운 도덕적 정열을 지닌 합리적이고 유물적인 인물들-을 제시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인텔리겐찌야의 자기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다른 이들의 삶을 함께 변화시키는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모델인 것이다. 또한 비합리적인 아버지 세대에게 '누구의 죄인가'라는 무력한 비판의식이, 아들 세대에 와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행동으로 전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보여 주는 진보와 인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리고 '새로운 인민의 출현'에 대한 확신은, 당대 지식인들뿐 아니라 수많은 청년들을 움직이게 했다. 러시아 지식인들을 움직이게 했던 체르이셰프스끼의 진정한 힘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체르니셰프스끼는 1828년 7월 28일 볼가 강 근처의 중부 도시의 한 성직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학시절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러시아, 프랑스, 독일에서 출판된 많은 사회학 서적을 섭렵했으며 1853년 당대의 급진적 문학잡지인 <동시대인>에 기고하며 문학적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1860년대의 급진주의적인 젊은 세대들에게 진보주의적 사상과 미래에 다가올 이상적 사회와 인간상, 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현재의 삶의 목표와 실천해야 할 점 등을 설파했다.
1862년 혁명적 사상을 고취하던 잡지 <동시대인>은 출판 정지를 당하고, 진보적 사상 전파의 선봉에 서 있던 체르니셰프스끼는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형무소에 투옥된다. 1863년 이 감옥 생활 중 그의 대표적인 사회·정치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동시대인>에 연재하게 된 것이다.


체르니셰프스끼는 애초부터 예술적 형상화라든가 <예술을 위한 예술> 같은 것에는 애시당초 관심이 없었다. 그는 삶(生)을 능가하는 예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예술의 기능은 인간의 삶에 내포되어 있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즐기는 데 도움을 주는 '생의 교과서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인간관을 실천함으로써 사회를 개선시키는 것이었고, 그 실천의 일환이 바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기 위한 소설쓰기였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히 소설로만 읽을 책은 아닌 것이다. 문학적으로는 분명히 빈약하기 짝이 없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이 소설이 높은 명성을 누려 온 것도 쟁쟁한 혁명가들의 칭송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출간 당시인 1860년대부터 기존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거부코자 햇던 젊은 지식인들과 대학생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다. 이는 이 책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지적이고 감성적이고 도한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민들의 삶이나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필자는 작품의 주인공 베라와 로뿌호프의 말과 행동이 당시 청년들이나 지식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미쳤는지 느끼기 어렵다. 다만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여러 자료들은 '유럽의 산업화가 가져온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참한 모습과 귀족과 소시민들의 이기적이고 부패한 사회’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이 큰 파장을 일으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에 만연한 비참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부정부패와 이기주의는 21세기 한국 사회도 많은 부분 닮았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지배층과 기득권 세력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지만, 진보와 개혁을 주창해왔던 많은 인사들과 지식인들이 베라와 로뿌호프 정도의 헌신과 열정, 그리고 사랑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 번째로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작품 하나만으로도 체르니셰프스끼는 기나긴 복역과 유배 끝에 1889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지금까지도 전세계 청년들과 진보주의자들에게 숭배와 영감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 2015년 9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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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것인가. 체르니셰프스키 태양석주 ㅣ 2013-12-11 ㅣ 공감(0) ㅣ 댓글 (0)자금 읽어도 너무나 신선하고 충격적인 내용이다.나를 깨우는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 ... 사랑 쥬베이 ㅣ 2013-09-14 ㅣ 공감(5) ㅣ 댓글 (0)


1.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한권짜리 신판 양장, 분권된 세계문학판을 모두 갖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갖고 있던 거'지 읽진 못했다. 제목이 왠지 인문서를 연상시켜서 '지루하지 않을까'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책은 읽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남녀 간 사랑, 삼각관계, 우정과 갈등 등이 마치 주말연속극을 보는 듯 흥미롭게 이어진다. 이 때문에 1800년대 텍스트를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다.



2.



프롤로그에 이어, 이야기는 '베라 빠블로브나'(베로치카)의 소녀시절부터 시작된다. 베로치까의 가족은 아버지(빠벨 콘스탄찌노비치 로잘스키), 어머니(마리아 알렉세예브나), 베로치카, 남동생 표도르 이렇게 4식구인데, 아버지는 관청 서기보이며 어머니는 전당포를 운영하고 금전대여를 한다. 어머니의 관심은 베로치카를 돈 많고, 힘있는 집안에 시집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부잣집 장교 '미하일 이바노비치 스토레쉬니코프'가 베로치카를 원하자, 어떻게든 그와 딸을 결혼시키려 안달을 한다.



하지만, 베로치카는 미하일 이바노비치의 청혼을 거절(p.77)한다. 그러자, 마리아 알렉세예브나는 이런 반응을 보인다. 딸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너 정신이 나갔구나, 이 바보 같으니? 감히 순종하지 않고, 어디 다시 한번 말해 봐!"(p.77) / "짐승 같은 년! 베르까!(베르까는 베로치카를 경멸하듯 부르는 명칭임) 그가 네 얼굴에 미쳐 너를 원하는 것만 아니라면 피가 나도록 흠씬 때려 줬을 거야! (중략) 이 지긋지긋한 바보 같은 년!"(p.78) 마리아 알렉세예브나가 어떤 성격인지, 딸을 어떻게 대하는지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거라 믿는다.



그러던 중, 남동생 표도르의 가정교사로 '로뿌호프'(드미트리 세르게이치)가 들어오고, 베로치카와 로뿌호프는 서로 묘한 감정을 느끼는데...과연 베로치카는 마리아 알렉세예브나의 압박에서 벗어나 사랑을 쟁취할 수 있을까?



3.



구성상 주목한 것은, 작가가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직접 개입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로뿌호프의 독백장면 바로 뒤에서, "나는 독자들에게 미리 경고해 두고자 한다. 로뿌호프의 이 독백이 장차 로뿌호프와 베라 빠블로브나의 관계이 미칠 어떤 중요한 동기를 내포하고 있다고 미리 넘겨짚지 말라는 것이다."(p.206)라는 식으로 말이다. 특히, 프롤로그의 [서론을 대신하여](p.21)에서는 무려 5페이지 가까이 개입하는데 마치 [작가후기]를 땡겨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점이 불만요소는 아니다. 크게 작품흐름을 끊지도 않았고, 작가와 호흡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도리어 좋았다.



4.



<무엇을 할 것인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지만, 사실 저런 걸 몰라도 상관없다. 베로치카가 봉제조합을 설립하는 p.274이전까지는 그냥 남녀 간 사랑을 다룬 연애소설로 읽어도 된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쟁취한다는 점에서,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느낌도 받았다. (물론, 봉제조합 설립이후, 조합운영이나 이익분배 장면은 사회주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아니, 처음에 우정, 갈등, 삼각관계도 있다면서 왜 이야기 안하지?"라고 궁금해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른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되니, 살짝만 던지고 가겠다. 로뿌호프의 베스트프렌드, '끼르사노프'란 인물이 있다. 어느 정도 절친인가 하면, 베로치카가 하루 종일 붙어다니는 둘을 (반쯤 장난식으로) 질투할 정도였다. 그런데, 끼르사노프는 로뿌호프, 베로치카 커플을 보고 점점 심한 마음의 갈등을 일으킨다. 왜? 아시죠? ^_^ 그런데, 또 그런 끼르사노프를 짝사랑하는 '나스쩬카'란 아가씨가 있으니, '아, 사랑은 어렵군.'



5.



생소한 작가, 1800년대 작품, 엄청난 분량, 분명 <무엇을 할 것인가>의 첫인상은 부담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생소한 작가의 1800년대 작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소개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걸작이니 뭐니 상관없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그냥 읽어서 재미있고 즐거운 소설이다. 대충보고 절대 겁먹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