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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2

알라딘: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Poul Dam

알라딘: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위대한 국가 지도자의 모범
폴 담 (지은이), 
김장생 (옮긴이) 
  누멘 2009-10-30
정가
6,000원
판매가
6,000원 마일리지 300원




8
100자평 0편
리뷰 2편
세일즈포인트 178

원제 Nikolaj Fredrik Severin Grundtvig

104쪽
128*188mm (B6)


목차

  • 머리말
  • 그룬트비의 생애와 저작들
  • 시민대학
  • 그룬트비와 어린이 교육
  • 그룬트비와 민족교회
  • 민족성
역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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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폴 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덴마크의 아버지 그룬트비> … 총 1종 (모두보기)

1921년 덴마트 코펜하겐 출생. 시민대학의 전직 교장이었고, 1964년부터 1977년까지 사회주의국민당국회의원을, 1976년부터 1977년까지는 최고회의 간부를 지냈다. 독일 점령기인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지도적 레지스탕스 그룹이었던 덴마크 연합의 비서가 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여 지도부 간부가 되었다. 그 후 시민대학 위원회를 포함한 여러 행정위원회의 비서와 주축 멤버로 활동하였다. 1954년부터 1963년까지에는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연합회 주간지를 편집하였다. 다양한 잡지들을 편집하였고, 교육뿐만이 아니라 사회 현상이나 사회사, 그룬트비의 정치적 업적과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덴마크 시민대학의 지도자였던 아른프레드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 교회.정치.문화에 관한 신문비평을 쓰며, 교회 강좌 및 대중 강좌를 활발히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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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김장생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처음 읽는 중세철학>,<사랑하며 춤추라>,<종교 속의 철학, 철학 속의 종교> … 총 13종 (모두보기)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모리대학과 스위스 제네바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통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교양교육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고통의 문제에 관심이 많고 특히나 아프리카, 아시아의 빈곤과 고난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빈곤의 사회과학》, 《신학의 저항과 탈주》, 《종교속의 철학, 철학속의 종교》, 《제3세대 토착화 신학》 등이 있고, 역서로 《신과 인간 그리고 악의 종교철학적 이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빈곤과 권력》, 《혼돈 앞에서 인간 철학을 잉태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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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아빠 2017-12-02



헬조선의 탈출구로서 북유럽의 복지 사회에 관한 관심이 지대해지는 가운데 그 뿌리가 되는 그룬트비의 활약사가 출간되어 기쁘다. 가나안농군학교와 이상촌의 김용기로부터 시작해서 하다못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역시 덴마크 농촌운동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해방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서 그룬트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도자들이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 근대화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이가 바로 그룬트비일진대, 그런데 그에 관한 자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책 역시 그룬트비를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분량과 깊이면에서 그다지 흡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반나절 읽어낼만한 입문서로는 제격이다. 바라기로는 제대로 된 평전이나 연구서가 어서 출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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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즈스피어 2019-08-15

굉장히 짧아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략히 알아보기에 좋으나.. 오타가 조금 있는게 거슬린다

“대안 교육 모델 찾는다” - 그룬트비 2002

“대안 교육 모델 찾는다” - 기독신문

“대안 교육 모델 찾는다”
근대교육이 잃어버린 지혜와 영성 기독교적 관점서 재조명 
총신유아교육학술대회-코메니우스, 기독교교육학회-그룬트비

 김은홍  입력 2002.12.03


코메니우스(John Amos Comenius)와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이 두 사람은 교육자로서 이미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그러나 일반에 알려진 이들의 면모에서는 이들의 교육사상이 기독교 신앙 또는 기독교 사상과 긴밀하게 이어져있음은 흔히 간과된다. 양보하여 세속 교육학에서야 그럴 수도 있다지만, 기독교교육학에서조차도 이들의 진면목이 ‘기독교’ 교육학의 관점에서 조명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더구나, 이들의 교육사상이 세속의 근대 학교교육이 버린 지혜와 영성의 교육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요즘의 대안교육이 상실한 지혜와 영성의 회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재조명이 더욱 절실하게 요청된다.

11월 16일 총신유아교육학술대회에서 정일웅 교수는 체코형제교회의 감독이자 교육학자인 코메니우스에게서, 11월 23일 한국기독교육학회 연차학술대회에서 송순재 교수는 덴마크 루터교회의 목사이자 교육개혁가인 크룬트비에게서 근대 학교교육이 잃어버린 지혜의 교육, 곧 대안 교육의 모델을 찾았다.

■코메니우스 “지혜를 가르쳐라”

코메니우스 교육사상의 핵심은 범지혜(pansophia)이다. 코메니우스는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골1:28)는 성경 말씀에서 범지혜 교육의 실제적인 목표와 내용을 제시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모든 지혜를 배워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완전한 자’는 윤리적으로 그러한 자라기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를 가리킨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범지혜의 배움을 일생동안 실행해야 할 교육 과제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범교육학>에서 삶의 전 과정을 학교, 곧 태아기 학교·유아기 학교·소년기 학교·청소년기 학교·청년기 학교·장년기 학교·노년기 학교·사망의 학교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기독교적 평생교육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혜의 획득을 위하여 배워야 할 기본적인 학습의 범위를 세 권의 책, 곧 자연과 정신과 성경에 한정했다. 그리고 인간이 창조세계의 질서와 관계에서, 인간성의 세 가지 기본요소인 지성과 덕성과 경건성을 쌓은 것을 범교육의 실제적인 목표로 삼았다. 지성은 자연과 관계에서, 덕성은 이웃인 인간과 관계에서, 경건성은 창조주와 관계에서 나타내야 할 인간의 기본성품이라는 것이다.
특히, 코메니우스의 ‘교육’은 오늘날 일반 교육학에서 주장되는 생존의 경쟁력으로서 ‘지식의 축적’이나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자율성의 확내나 능력의 무한한 개발”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 창조의 목적에 적합하게 창조주의 뜻을 수행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하려는 깨우침과 양육과 훈련과 돌봄에 있다.

그룬트비 “자유롭게 가르쳐라”

그룬트비는 1814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덴마크가 도입한 의무교육제도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그는 의무교육제도는 국가의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가난하고 단순한 보통 사람들을 국가 권력이 바라는 바에 따라 주물럭거려 보려는 ‘강제적 훈련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의무교육은 게으름과 무관심을 기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좀더 올바른 길은 시민됨(citizenship)을 지향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선의 학교란 “선량한 시민을 기르는 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룬트비는 하층민과 평민들 안에 깃들어 있는 가치를 정당하게 인식하려 했다. 그는 미래에는 이 사람들이 주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집에서 하는 교육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부모는 이런 교육에 책임을 져야 하고, 국가는 이 책임을 함부로 취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룬트비의 이런 사상이 현대 프리스콜레(자유학교)의 주요 틀이 됐다.
그룬트비는 자유 교육의 내용과 방법으로 생동성과 자유와 자연스러움을 중요시했다. 기계적 암기학습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그는 대신 이야기하기, 노래부르기, 놀이를 권장했다.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즐거움과 기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교호적 인간관계와 의사소통 구조를 중시했다. 학교에서 다양한 주제들 사이에서, 교사와 부모,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상호작용”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강의와 시험이 아니라 자유로운 담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룬트비는 학교에서 의무로 가르치는 교리주의적 종교수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성경과 기독교신앙은 학교의 강제적 사안이 아니라 가정에서 부모가 책임지고 교회에서 가르쳐야 할 사안이라고 보았다. 방법 역시 일방적 주입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노래하기를 권장했다.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목사/[김진홍목사]

강명원의 블로그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목사/[김진홍목사]
강명원 블로그|2004.06.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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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김진홍 목사]

지금 덴마크는 잘사는 나라 중에서도 잘사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소득이 높은

점보다 각종 복지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기에 국민들의 삶의 질이 최고 수준에

이르러 있음으로 인해서다.



그러나 150여 년 전의 덴마크는 그야말로 바닥을 헤매는 나라였다. 영국과의 명분

없는 오랜 전쟁이 패배로 끝나자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다치고 나라 안에는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상이군인들만 그득한 처지였다. 국토 중의 좋은 부분은 빼앗기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만 남겨졌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되면 번성하는 것이 도박과 싸움판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덴마크를 일으킨 정신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바로 그룬트비히 목사의 삼애 운동(三愛運動)이다. 삼애 운동이라 함은 그룬트비히 목사가 주창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겨레 사랑의 세 가지 사랑 운동을 일컫는다. 덴마크란 나라가 그렇게 거덜 나게 되었을 때에 선각자 그룬트비히는 ‘무너져 가는 나라를 바로 일으키려면 먼저 종교와 교육의 개혁이 일어나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바른 신앙 운동으로 백성들의 혼을 깨우쳐 나가는 교육 운동을 일으켜 나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작된 운동이 그 유명한 덴마크의 국민 고등

학교 운동이다


-새 교육 운동-



그룬드비히(Nikolaj Grundvig, 1783~1872) 목사가 삼애 운동(三愛運動)을

바탕으로 삼아 종교와 교육을 개혁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에

감명을 받은 한 젊은이가 있었다.



크리스텐 콜(Christen Kold, 1816~1870)이란 이 젊은이는 18세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자 그룬드비히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감명을 받은 바대로 자신이 맡은 교실에서

교육 개혁을 실천하려 하였다. 살아 있는 말을 살아 있는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 산

교육을 실천하자는 뜻에서 그는 국정교과서를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만든 교과서로 학생들에게 생생한 대화식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의 반 학생들은 한결같이 행복한 얼굴로 받아들였으나 교육청 당국으로부터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2년 만에 교직

에서 해임 당하게 되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기를 15년을 거듭하다가 35세가 되던 때에

한 섬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 학교가 덴마크 교육을 살리고 나라

까지 살리는 새 교육 운동, 새 나라 건설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헌 농가 건물 한

동을 빌려 15명의 학생들을 모아 5개월 기간으로 실시하였던 첫 번째 학기부터 그는 학생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변화시키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살고 함께 뒹굴며 산 교육을 베풀었다.


크리스텐 콜이 한 섬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세우던 때에 1851년 11월 1일을 개교일로 잡고는 첫 입학생 15명을 보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러나 입학식이 있던 전날인 10월 31일까지 단 한 명만이 등록하였다. 난감하여진 그는 11월 1일에 개학식 시간이 되기 직전까지 학교 뒤 숲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시작하는 이 학교에 학생이 겨우 한 명밖에 오지 않았습니다. 14명의 학생을 더 보내 주시옵소서”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기도를 마치고 숲에서 나온즉 마차 소리가 덜커덩거리며 나더니 한 마차에 14명의

이웃 마을 젊은이들이 타고 와 학교에 등록하겠다며 교정에 들어서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에서 크리스텐 콜은 학생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뒹굴며 가슴으로 몸으로 실천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첫 학기인 5개월이 지난 뒤에는 15명의 젊은이들의 가치관이 변하고 삶의 방식이 바뀌었다.



그들이 졸업을 앞두고 남긴 소감문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크리스텐 콜 선생이 그들에게 삶의 방향을 깨우쳐 주었고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조국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고 적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교육의 목표는 바로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대학 시절에 철학을 전공하였다. 철학을 공부하면서 크게 매력을 느꼈던 철학자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소위 유신론적 실존주의(有神論的 實存主義)의 원조 격으로 인정받는 철학자로 그룬트비히 목사와 동시대에 활약하였던 분이다.



나는 철학과를 다니는 동안에 상급반이 되면서 한 가지 고민하였던 문제가 있었다. 내가 장래에 어느 분야로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때 나는 19세기 중엽 덴마크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선각자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그 두 사람은 키에르케고르와 그룬트비히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순수 철학자다. 자신의 철학을 철저히 하기 위해 사랑하는 약혼녀까지 포기한 채 순전히 자신의 철학적 사유에 전념하였던 분이다.

그러나 그룬트비히는 같은 시대에 같은 도시인 코펜하겐에서 코펜하겐대학을 같이 다녔지만 자신을 실현하여 나가는 과정은 달랐다. 그룬트비히는 성직자의 길을 선택한 후 일반 성직자들처럼 교회 안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겨레와 백성을 살리는 운동에 헌신하였던 분이다. 말하자면 사회 개혁자로 활약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던 개혁자다. 특히 자신이 속한 덴마크 교회와 교육을 개혁하여 새로운 덴마크 국민정신을 일으키는 데 헌신하였다.



나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가장 민감하였던 대학생 시절에 키에르케고르의 길을 따라 순수 문학으로서의 철학자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그룬트비히 목사와 같이 사회 개혁자의 길을 가느냐의 문제로 갈등을 겪었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룬트비히 목사의 길을 선택하였던 셈인데 그간에 이루어 놓은 열매로써 평가한다면 그룬트비히의 그림자만 밟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 새 교육 운동-



크리스텐 콜은 그냥 교사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어버이였고 형님이었고 친구였다. 그는 학생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침실에서 잤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노동하였다. 학교가 마치 화목한 한 가정과 같았다.



그가 세운 국민고등학교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의 교육학자였으며 정규학교의 교장이었던 몬라드(D.G. Monrad)박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콜에게 학교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18세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였기에 나의 모든 삶을 바쳐 다른 사람들도 이를 배워 행복하게 되도록 도와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라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텐 콜의 이 말을 들은 몬라드 박사는 비웃는 투로 대꾸하였다. “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시구려. 그러나 잘 되겠소이까?” 형식적이고 구태의연한 교육 이론에 젖어있던 그로서는 콜의 새로운 교육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룬트비히 목사의 혼을 깨우는 설교에 감동을 받은 크리스텐 콜이 세운 국민고등학교는 헛간 같은 허름한 집에서 15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다. 다섯 달 만에 첫 학기를 끝낸 후에 학생 중의 한명이 남긴 글이 있다.



“나는 일반 국민학교에서 배웠던 것보다 더 높고 깊은 무엇인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공허함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런 나의 고민을 콜이 해결해 주었다. 욕망과 회의에 차 있었던 때에 나는 그의 두 손에 쥐어진 양초 토막과도 같았다. 그는 마치 조각가가 흙덩이를 빚어 작품을 만들 듯이 같은 방식으로 나를 만들 수 있었다.”

크리스텐 콜에게는 방황하고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혼 속에 깃들어 있는 고귀한 것들을 일깨워 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목숨을 걸고 믿고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에 젊은이들의 마음은 감동으로 채워졌다.



이런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이었을까? 교사인 콜의 인격과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혼으로부터 나오는 살아 있는 말이 살아 있는 젊은 혼에게 전하여졌을 때에 일어나는 기적 같은 힘이었다. 이런 힘이 참 교육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그룬트비히가 활약하였던 때의 덴마크는 독일의 침범을 막으려고 10여 년간 싸우다가 지치고 쓰러져 패배의 쓴잔을 마셨던 때였다. 국토 중에 아름답고 쓸모 있는 부분은 빼앗기고 국민들은 희망을 잃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그룬트비히 목사는 실의에 빠진 동포들을 향하여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토하였다. 삼애 운동(三愛運動)으로 알려진 운동이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백성들을 도우신다. 살고자 땀 흘려 일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은 도우신다.

둘째, 땅을 사랑하라! 좋은 땅은 독일에 빼앗기고 황무지 모래땅만 남았으나 그렇다고 낙망하여선 안 된다. 황무지 땅도, 모래땅도 땀 흘리고 정성들여 갈고 가꾸면 옥토로 바뀐다.

셋째, 동포를 사랑하라! 건장하고 똑똑한 젊은이들은 강대국과의 10여 년에 걸친 전쟁에서 전사하고 약자들만 남았다. 그러나 낙망하거나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 약한 사람들도 뭉치면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



그룬트비히의 심금을 울리는 애국 설교에 뜻있는 일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각 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삼애 운동을 실천하여 병든 겨레를 치유하기 시작하였다.


6월 28일자


- 죽음에 이르는 병 -



1864년이 덴마크에게는 망국의 해였다. 한 민족, 한 국가로서의 덴마크가 희망을 잃어버린 해였다. 개인도 국가도 희망을 잃어버리게 됨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제목이다.



그 책에서 이르기를 ‘희망을 잃어버림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다. 개인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개인이 망하고, 한 민족이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민족이 망하게 된다. 1864년에 덴마크는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덴마크는 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절망적인 상태에서 10년을 끌어왔던 독일과의 전쟁에서 최후로 항복하게 된 해였다. 항복하게 되면서 덴마크는 국토 중의 곡창지대였던 남쪽 땅을 독일에 빼앗기게 되고 쓸모없는 황무지나 모래밭만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실망에 빠진 젊은이들은 댄스나 당구치기로 세월을 보냈다. 어른들은 도박과 술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이런 때에 구국 운동에 발 벗고 나선 이가 그룬트비히였다.



이미 65세이 이른 그는 율랜드 반도 남쪽에 있는 스캄링스뺑컨(Skamlingsbanken)이란 곳에서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는 백성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구호 아래 날마다 강연회를 열어 백성들의 혼을 깨우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애국자 그룬트비히 ⑥

- 새 교육 운동-



크리스텐 콜은 그냥 교사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어버이였고 형님이었고 친구였다. 그는 학생들과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침실에서 잤다. 함께 대화하고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노동하였다. 학교가 마치 화목한 한 가정과 같았다.



그가 세운 국민고등학교가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자 당시의 교육학자였으며 정규학교의 교장이었던 몬라드(D.G. Monrad)박사가 학교를 방문하여 콜에게 학교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18세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였기에 나의 모든 삶을 바쳐 다른 사람들도 이를 배워 행복하게 되도록 도와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나라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텐 콜의 이 말을 들은 몬라드 박사는 비웃는 투로 대꾸하였다. “네,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시구려. 그러나 잘 되겠소이까?” 형식적이고 구태의연한 교육 이론에 젖어있던 그로서는 콜의 새로운 교육 정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덴마크 잡감 – 1 새마을운동과 류달영 선생의 유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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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pyo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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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잡감 – 1
(새마을운동과 류달영 선생의 유훈
)
독일에 숨어 있는 줄 알았던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체포됐다. 생뚱맞은 덴마크... 독일의 승마 도시 드레스덴언에 이어 이번엔 덴마크의 승마 도시다.
박정희 시대의 DNA를 온몸에 품은 손녀 정유라와 증손뻘 되는 갓난 아기는 그렇게 덴마크 경찰에 의해 영어(囹圄)이 몸이 되었다. 이 뉴스를 접하자 내 입은 벌써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 금수나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꿔가며 /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 부귀영화 우리 것이다”

1970년 시작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으로 널리 퍼친 노래 ‘잘 살아 보세’의 가사이다. 박정희, 최태민, 박근혜, 최순실, 그리고 정유라와 그 아이에게 "잘 사는 것"은 무엇이며, ‘부귀영화’란 과연 누구의 것이었을까?
 
박정희의 경제개발 계획은 도시 중심의 공업화 중심이었다. 따라서 인구의 70%가 살던 농촌의 경제 상황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박정희는 유달영 선생이 쓴 『새 역사를 위하여 :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를 읽고 실의에 빠져 있던 덴마크를 부흥시킨 국민운동가 그룬트비(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목사와 황무지 개간운동가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에게 큰 감동을 받고 소위 ‘새마을운동’을 기획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새마을 정신도 덴마크 사례를 그대로 모방한 ‘근면-자조-협동 정신’(세 잎 마크)을 강조했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정신과 방법을 동원하여도 그 목적이 추악한 동기에 기인한다면 결국 호박에 줄을 그어 수박을 만들려는 꼼수밖에 되지 않는다.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바로 그 경우였다. 69년 삼선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해 다시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농촌 방방곡곡까지 관제 선거와 상명하복 체제를 구축하고자 허울 좋은 ‘새마을운동’ 조직을 구상한 것이다.
 
내 고향 동해시의 쌍용양회에서 과잉 생산 중이던 시멘트 재고를 잔뜩 사들여 새마을 운동에 투입, 전국 리 단위 마을에 600포씩 마구 뿌려댔다. 다리, 댐, 도로 건설 등 기간산업과 방공호 구축이 더 시급했던 상황에서 전국 초가집을 없애 외견상 ‘새마을’을 일구자는 구호는 2년 뒤의 ‘유신독재체제’ 수립을 위한 효과적인 민심 정지작업이 되었다. 심지어 그 때 초가 지붕을 없애고 놓았던 슬레이트 자재들은 모두 석면으로 범벅된 것이었다. 석면의 해악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알려졌던 바, 1970년은 국제적으로 석면이 1급 발암물질로 분류된 해었다. 그런데도 박정권은 그걸로 산천지붕을 도배해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했고 무지한 국민들은 환호했다.

시읍면 등이 주도하던 관제 부정선거의 전국적 ‘점 조직화’는 ‘새마을운동’을 통해 민간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공고해졌다. 농촌 마을을 새 마을로 살리겠다는 당초 구호와는 달리, 공업 올인 정책으로 농촌은 갈수록 붕괴되었고, 농민들은 전태일 열사와 같은 살인적인 노예 노동 현장으로 내 몰렸다. 김대중 대통령도 자서전에서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이 잘 살게 됐다는 선전은 속임수”라고 일갈한 것도 그러한 점을 지적하신 것이다.
 
독재 체제 완비를 위한 조급증으로부터 탄생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위로부터의 권위적 근대화 정책의 연장선이었고, 더 나아가 만주국의 농촌진흥운동과 매우 유사하다. 그 정책은 지금의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 관료로 있을 때 입안한 것이었는데, 박정희가 장교로 근무한 관동군이 만주국 예하였음을 감안하면 그 뿌리는 덴마크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제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덴마크를 끌어들인 것은 과거 일본이 유럽의 농촌 근대화 모델 중 하나로서 덴마크를 참고한 것을 다시 모방하여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박정희의 이러한 관제 사업에 류달영 선생(전 서울농대 교수)이 동원되었던 사실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류달영 선생의 스승인 김교신 선생은, 일본의 우치무라 선생이 근대 농업국 덴마크의 부흥 사례를 일본에 처음 소개하기 위해 쓴 책 『덴마크 이야기』를 류달영에게 전달했고, 그 책에 감동받은 류달영은 평생을 농촌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1933년 수원고등농림 재학 시절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라는 수첩 크기의 작은 책을 읽고 나라 없이 살던 그 시절에 나는 국가관을 확립했다. 내가 일생 동안 할 일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일이며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드는 일이었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해방 후 서울농대 교수로 부임한 류달영 선생은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책 한 권을 낸다. 제목은 『새 역사를 위하여 :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었다. 이 책은 몇 년 만에 26쇄를 찍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 책이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가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류달영이 맡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여러 차례 직접 류달영을 만나 본부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박정희 의장은 “덴마크 연구에 조예가 깊은 류 선생을 재건국민운동의 본부장으로 위촉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 일에 박 의장이 간섭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본부장직을 수락했다고...
 
5·16 군사정부(군정) 시기 재건국민운동은 사실상 류달영이 이끌었다.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 취임한 류달영은,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곧바로 덴마크 모델로 국민운동 플랜을 만들어 실행했다. 하지만, 1년 8개월을 재직하고 63년 5월 사임하면서 후임 본부장으로 이관구를 추천했고 이관구도 류달영의 방향을 이어나갔다. 이 시절을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한결같은 이상인 동양의 덴마크를 이 국토에 건설해보겠다는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나의 숙소에는 1956년 덴마크에서 사가지고 온 대형의 그룬트비(덴마크 지도자) 사진을 걸어놓고 출근 전에 한 번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집을 나섰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박정희의 위촉으로 류달영이 주도한 재건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됐을까? 류달영은 사업 부문을 크게 국민교육, 향토개발, 생활혁신, 사회협동 넷으로 나누어 덴마크 모델에 따라 ‘농민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중앙과 도지부, 시·군지부의 3개 각급에 교육원을 두고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향토개발’은 농로·수로 개설과 농지 개간 사업으로, ‘생활혁신’은 주택과 식생활 등 생활환경 개선 지도로, ‘사회협동’은 도농 자매결연과 결식아동 급식, 학생봉사대 조직으로 전개하고자 애썼다.
 
‘덴마크’의 농촌진흥 정신으로 제대로 실천해 보려 했던 류달영 선생의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박정희의 독재 연장 도구로 점차 전락해 가는 이 사업이 훗날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관제화되는 것을 보시면서 류달영 선생은 아래와 같이 통렬한 비판을 남기셨다.

“5·16군사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이 나라의 하나의 비극으로 종말 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 존재하였고, 또 그것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중략) 군정이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결코 우리 역사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혁명만이 용납될 수 있다. 그것은 민중 자신의 자아혁신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고요한 국민의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류달영의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
 
“재건국민운동을 새마을운동의 전신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둘은 운동의 정신과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정부 각료와 각 시도 공무원들이 총동원해서 국민을 끌고 간 백 퍼센트 관 운동이었다.”(‘국회보’ 1997. 10.)
유신시절, 이른바 ‘한국식 민주주의’ 운운하며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자율적, 창의적, 혁신적 생각을 억압하는 것이 오히려 후진국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덴마크’와 바로 위 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은 그 주장이 얼마나 억지이며 허구적인지 잘 증명해 준다.
이들 북구의 나라들이 채택한 사회적 민주주의 모델은, 오히려 독재보다 민주주의와 복지정책이 경제 성장에 더욱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유럽에서 상대적인 낙후 지역이었고, 1인당 GDP도 1만 달러가 안 되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면서도 윤택한 국가들이 되어 있다.
바로 그러한 땅 덴마크에서, 박정희와 최태민의 손녀, 그리고 젖먹이 증손이 체포되었다. 나는 여기서 박정희가 유린했던 덴마크의 참 개혁정신, 농촌 살리기 정신의 통쾌한 복수극을 보는 듯하다.
이제 정유라는 한국에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는 다시금 우리의 몫이다. 덴마크에서 체포된 정유라와 그 어미 최순실과 박근혜를 우리가 어떻게 다룰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류달영 선생이 못 다 이룬 ‘동양의 덴마크’ 건설의 꿈이 다시 좌초할지 아니면 부활할지 말이다. 그야말로 우리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기권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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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김교신 영향으로 농촌계몽 참여…5·16 군정기 재건국민운동본부 이끌어
http://weekly.donga.com/List/3/all/11/1515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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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설계자들 ⑫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김교신 영향으로 농촌계몽 참여…5·16 군정기 재건국민운동본부 이끌어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입력
2015-11-16 1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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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1962년 6월 3일 경기 김포에서 모내기를 하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오른쪽)과 최고위원들. 5·16 군사정부 시절 시작된 재건국민운동은 이후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이 됐다.

류달영은 김교신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다. 함남 흥남 공장에서 김교신과 한방을 쓰며 생활하던 터였지만, 1945년 4월 잠시 개성으로 나왔다 맹장이 터져 급작스럽게 수술을 받느라 스승의 와병도 모르고 있었다. 4월 25일, 김교신 선생이 별세했다는 전보를 받았을 때를 류달영은 이렇게 기억했다. “천지가 캄캄하였다.”

류달영이 보여줬던 김교신에 대한 전적인 존경과 신뢰는 유명하다. 후일 그는 “오늘의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모두 김교신 스승과의 만남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했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류달영이 김교신을 만난 것은 18세가 되던 192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였다. 이 해는 김교신도 양정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첫해였고, 이후 류달영이 졸업할 때까지 5년간 담임을 김교신이 맡았다. 당시 양정고보는 한번 신입 1년생을 담임하게 되면 졸업까지 5년간 맡는 구조였다.

류달영은 양정고보 졸업 후 수원고등농림학교(3년제, 서울대 농대 전신)에 재학하던 시절에도 김교신의 주일 성서모임에 출석했고, 수원고농을 졸업하고 개성 호수돈여고보(4년제, 미국 감리교 계통 학교) 교사로 있을 때도 근처 송도고보로 옮겨온 김교신과 일상을 같이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터진 것은 두 사람이 함께 개성에 있을 때였다. 류달영에게 김교신이라는 존재가 지닌 절대성을 생각해보면 류달영이 김교신, 함석헌 등과 같이 가장 오랜 기간 감옥에 있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성서조선 그룹에 합류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평생을 농촌운동에 바친 류달영 전 서울대 교수(1911~2004)는 5·16 군사정부가 주도한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으나 본부가 해체되자 1964년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결성해 민간 차원에서 운동을 계속했다.

훗날 ‘농민의 대부’로 추앙받는 류달영이 처음 농촌운동의 꿈을 갖게 된 것은 양정고보 학생 시절이었다. 1931년 여름, 양정고보 4학년이던 류달영은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에 참여하면서 “일평생 농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다고 한다. 졸업 후 세브란스의학전문으로 보내려는 주변의 움직임을 물리치고, 조선 유일의 농학 고등교육기관인 수원고농에 입학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기본적으로 식민지 조선의 무교회주의자들은 일제강점기 여타 우파 민족운동 진영과 마찬가지로 청년교육과 농촌계몽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류달영이 수원고농을 졸업하고 간 곳은 개성 호수돈여고보 박물(식물·동물·광물) 교사 자리였다. 수원고농 졸업 즈음 김교신의 권유가 있었다. ‘성서조선’ 창간 동인의 한 사람인 양인성이 호수돈여고보를 떠나면서 후임 추천을 함석헌에게 부탁했는데, 그 자리를 김교신이 류달영에게 권한 것이었다.

류달영이 호수돈여고보 교사로 있던 1939년, 최용신 전기를 쓰게 된 것도 무교회주의자들이 갖고 있던 농촌운동에 대한 관심의 발로였다. 류달영의 ‘최용신 소전(小傳)’은, 심훈의 유명 소설 ‘상록수’ 속 주인공 ‘채영신’의 실존 모델인 여성 농촌운동가 최용신(1909~35)의 희생적 삶에 대한 논픽션 기록물이다. 당시 이미 출간돼 있던 심훈의 ‘상록수’가 실제 최용신의 삶에 대해 왜곡이 심하다고 판단한 성서조선 그룹이 최용신의 생애를 정확히 기록해 장차 농촌운동의 모본으로 남기고자 책을 낸 것이었다. 류달영이 집필자로 결정된 것은, 그가 최용신이 활동하던 시흥군 샘골(지금의 경기 안산)과 가까운 수원고농 출신인 데다 수원고농의 조선인학생회 일로 생전의 최용신과 몇 차례 만난 바 있었던 까닭이다. 류달영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집필을 마쳤고, 책 서문은 김교신이 썼다. 출판 비용은 김교신, 류영모, 함석헌 등이 거출해 마련했는데 출간 1년 만에 4쇄가 나갔다.

이미 양정고보 시절 농촌운동에 평생을 투신하기로 결심한 류달영이 구체적인 농촌개발 모델을 그리게 된 것은 수원고농에 입학해서였다고 한다. 우치무라 간조가 농업국가 덴마크의 부흥담을 일본에 처음 소개한 소책자 ‘덴마크 이야기’를 김교신이 여러 권 소지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권을 류달영에게 준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훗날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3년 수원고등농림 재학 시절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라는 수첩 크기의 작은 책을 읽고 나라 없이 살던 그 시절에 나는 국가관을 확립했다. 내가 일생 동안 할 일은 민족의 광복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일이며 조선을 동양의 덴마크로 만드는 일이었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해방 후 서울대 농대 교수가 된 류달영은 전쟁 와중인 1952년 피난지 대구에서 몇 년째 구상하던 책 한 권을 출간했다. ‘새 역사를 위하여 :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었다. 이 책은 몇 년 만에 26쇄를 찍을 정도로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1933년 김교신이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이 류달영, 가운데가 김교신이다.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1961년 6월 12일 열린 재건국민운동 촉진대회.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으로 이 대회에 참가한 박정희 전 대통령(앉은 이 가운데 오른쪽 맨 끝)의 모습도 보인다(왼쪽). 심훈 소설 ‘상록수’의 모델인 농촌운동가 최용신(가운데). 왼쪽은 독립운동가 황애덕, 오른쪽은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이다. 류달영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농촌운동에 대한 기록의 하나로 ‘최용신 소전(小傳)’을 썼다.

새마을운동의 모델이 된 재건국민운동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1931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브나로드운동’ 제1회 참가자 모집 사고. 브나로드운동은 약 10만 명의 문맹자를 교육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이 책이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정부가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류달영이 맡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여러 차례 직접 류달영을 만나 본부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박정희 의장은 “덴마크 연구에 조예가 깊은 류 선생을 재건국민운동의 본부장으로 위촉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 일에 박 의장이 간섭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본부장직을 수락했다.

5·16 군사정부(군정) 시기 재건국민운동은 사실상 류달영이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6월 출범 당시 초대 본부장은 유진오였지만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2개월여 만에 사임했다. 류달영은 그해 9월부터 일을 맡아 새롭게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플랜을 만들어 실행했다. 1년 8개월을 재직하고 63년 5월 사임하면서 류달영은 후임 본부장으로 이관구를 추천했고, 3대 본부장 이관구도 류달영의 운동 방향을 이어나갔다.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 취임한 류달영은 곧 덴마크 모델에 따라 국민운동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착수했다. 이 시절을 류달영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한결같은 이상인 동양의 덴마크를 이 국토에 건설해보겠다는 정열로 불타고 있었다. 나의 숙소에는 1956년 덴마크에서 사가지고 온 대형의 그룬트비(덴마크 지도자) 사진을 걸어놓고 출근 전에 한 번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집을 나섰다.”(류달영의 ‘소중한 만남’)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됐을까. 류달영은 사업 부문을 크게 국민교육, 향토개발, 생활혁신, 사회협동 넷으로 나눴다. ‘국민교육’은 덴마크 모델에 따라 ‘농민교육’에 주안점을 둔 것으로 중앙과 도지부, 시·군지부의 3개 각급에 교육원을 두고 농촌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향토개발’은 농로·수로 개설과 농지 개간 사업으로, ‘생활혁신’은 주택과 식생활 등 생활환경 개선 지도로, ‘사회협동’은 도농 자매결연과 결식아동 급식, 학생봉사대 조직으로 전개했다.

운동은 추진력 있게 이뤄졌으며, 취임 1년 만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중앙교육원과 시도지부교육원에서 각각 7000여 명과 6만4000여 명의 농촌운동 지도자를 교육했고 마을 청년회관 약 7000동, 농로 5만4000여km, 수로 3300여km를 개설했다. 부엌, 변소 등 생활환경 개선과 농촌 결식아동 급식을 실시하는 것은 물론, 41만여 명의 농어촌학생봉사대를 조직했다.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성천 류달영의 생애를 기록한 ‘나라사랑’(성천문화재단, 2006).

정부 문서상 기록으로 실제와 어느 정도 부합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여러 사정을 감안했을 때 의미 있는 결과였다. 이 사업들은 모두 새마을운동에 앞선 것으로 학계의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나, 재건국민운동이 후일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다.

류달영의 구상은 끝내 좌초하고 말았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본부장으로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국민운동을 전개해나가고자 했지만 내부에서조차 국가주의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결국 군정 세력이 선거를 통해 ‘민간’ 정권으로 옷을 갈아입은 직후인 1964년 2월, 재건국민운동법이 폐기되고 본부도 해체됐다. 결과적으로 정권에 이용당한 모습이 되자 류달영은 격분했다. 오랜 무교회주의 동지이자 ‘스승의 벗’인 함석헌이 정권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을 즈음, 류달영은 ‘동아일보’ 65년 5월 15일자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국가동원체제에 대한 혐오

‘동양의 덴마크’ 건설 꿈꾼 류달영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 류달영(왼쪽)과 김교신.

“5·16군사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이 나라의 하나의 비극으로 종말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는 군정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 존재하였고, 또 그것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중략) 군정이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두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결코 우리 역사의 자랑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 혁명만이 용납될 수 있다. 그것은 민중 자신의 자아혁신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고요한 국민의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류달영의 ‘비극의 5·16이 준 이 나라 역사의 교훈’)

근본적으로 우치무라 간조 이후 무교회주의자의 사상은 국가주의와는 상극에 놓인 것이었다. 류달영은 국가적 단위에서 ‘민간운동’을 전개해보려 했지만, 재건국민운동은 관제운동의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기 어려웠고 의도했던 목표도 완성하지 못했다. 재건국민운동본부가 해체되고 나서 류달영은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를 결성해 민간운동을 계속해나가고자 했다. 민간의 자발적인 자기개조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류달영은 훗날 사람들이 자신이 이끌던 군정기 재건국민운동을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연관 짓는 것을 싫어했다. 류달영은 이렇게 말했다.

“재건국민운동을 새마을운동의 전신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둘은 운동의 정신과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정부 각료와 각 시도 공무원들이 총동원해서 국민을 끌고 간 백 퍼센트 관 운동이었다.”(‘국회보’ 1997. 10.)

이런 생각은, 국가동원체제를 혐오하는 무교회주의 계보에 류달영이 서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류달영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실질적인 힘을 보탰다.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 원장이 된 김준 등 자신이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고 있던 시기 운동에 참여케 했던 서울대 농대 제자 가운데 많은 수가 이후 새마을운동의 주요 간부가 됐던 이유도 있었다. 류달영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농민이 잘살게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류달영은 정치 진영과 무관한 자리에서 오로지 한국 농촌과 농민만 생각했다. 82년 국정자문위원회에 참석했을 때 농촌경제를 파탄 낸 “원흉들의 집단이 바로 경제기획원”이라며 정부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류달영이 국가정책에 참여함으로써 이룬 성과는 크다. 대한민국 사회에 류달영이 기여한 것은 농촌사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평생교육’ 개념은, 1980년 헌법개정심의위원으로 참여한 류달영이 ‘평생교육’ 조항을 헌법으로 제정케 함으로써 대중화된 것이다. 이때도 류달영은 덴마크 교육모델을 참조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이룬 결과들은 적어도 스승 김교신과 무교회주의자들이 구상하던 사회의 모습은 아니었다.



주간동아 1013호 (p60~63)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대한민국 설계자들


2022/05/06

실존주의(實存主義, 프: Existentialisme)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實存主義, 프: Existentialisme)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크리스천 라이프 - 에듀 라이프



실존주의(實存主義, 프: Existentialisme)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표현은 
철학에서 존재에는 본질이 없는 생각, 관념, 모든 것의 파악하는 방법을 나타낸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자신의 강연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1945년)에서 최초로 이 개념이 제기되어 실존주의에서의 기초적인 관념·개념이 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성이라는 것은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 존재는 처음에는 무엇도 의미하는 것은 아닌, 
즉, 존재, 본질의 가치 및 의미는 당초에는 없고, 후에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이 생각에서는 주장된다.

이와 같이, 이 생각은 크리스트교 등의, 사회에서의 인간에게는 본질 (영혼)이 있어 태어난 의미를 가진다는 고대부터의 종교적인 신념을 정면으로부터 부정하는 것으로, 무신론의 개념의 하나가 되어 있다.

실존주의(實存主義, 프: Existentialisme)

‘실존주의’는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 인간 개인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라(not merely the thinking subject), 
  •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주체자(master)이다. 
19세기 중엽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에 의하여 주창된 이 사상은 후에는 야스퍼스, 마르셀 등으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보부아르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실존’이란 말은 이들의 사고양태(思考樣態)나 표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으나,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 있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先行)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실존은 ‘인간’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니힐리즘이 ‘자아’를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 반하여, 같은 ‘자아’의 실존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자아’와 세계를 연결지으려고 노력한다.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나’를 세계와 연결지음으로써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역전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가 추구된다. 
실존주의 철학은 바르트, 브루너, 불트만, 그리고 틸리히와 같은 많은 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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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실존주의의 원류는 근대 시민사회가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19세기 중엽 이후의 대중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고독한 예외자로서의 입장을 관철한 두 거성, 덴마크의 키르케고르와 독일의 니체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지성과 신앙의 차이에 괴로워하는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러시아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서도 주체성의 회복에 의해 절망을 극복하려고 하는 실존적인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 초엽에는 러시아의 셰스토프나 에스파냐의 우나무노 등 철학자나 오스트리아의 유태인 작가 카프카(1883-1924) 등이 일상적인 삶의 저변에 숨겨져 있는 음울한 허무의 심연을 응시하면서 본래적 자기의 주체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사상을 전개시켰다.
실존철학을 하나의 독자적인 ‘철학’으로서 등장시킨 것은 제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에서의 심각한 사회적 위기감의 체험이었다. 이러한 체험의 철학적 반성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1919)이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실존철학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저작이 되었다. 패전국 독일과 마찬가지의 사회적 불안이 세계 각국을 엄습하고 사람들이 심각한 인간소외감의 포로가 됨에 따라, 인간의 주체성 회복을 주제로 하는 실존철학은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실존철학을 탄생시키는 요인이 된 1차 대전 후의 인간 소외적인 사회 상황은 제2차 대전의 전후에는 더욱 심각해져서 세계의 사람들을 불안과 절망 속으로 끌어들였다. 전쟁이 일으킨 잔혹한 살육, 비참하고 황폐한 생활. 인류 절멸 병기의 출현, 내일이 없는 인생에 대한 공포, 대중사회적 상황 밑에서의 생활 전면에 걸친 획일화·수평화(水平化) 등이 일상생활을 덮은 보편적인 사실이 되자, 실존주의는 널리 세인의 주목을 끄는 사조가 되고 드디어 대중의 기분을 사로잡는 유행 사상으로서 무드화하는 경향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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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실존(existence)’은 원래 이념적인 본질(Essence)과 대비하여 상용되는 철학용어로서 ‘밖에’ ‘서 있는(Sistere)’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실존’은 첫째로 이념적 본질 밖에 빠져나와 있는 현실적 존재를 의미한다. 현실적 존재에도 여러가지가 있으나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현실 존재는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독자적인 ‘지금, 여기’를 사는, 이 현실의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실존’은 둘째로 인간으로서의 진실한 존재방식을 현실의 생존방식을 통해 실현해 가는 자각적 존재(自覺的存在)로서의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자각적 존재는 모두 이미 지정되어 있는 본질에 따라서 그 현실의 존재방식이 결정되는 것에 반하여, 자각적 존재인 인간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하므로 현재의, 이 현실의, 자기의 생존 방식에 의해서 인간 독자의 본질 ― 그 인간을 그 인간답게 하는 개성 ― 이 시시각각으로 새겨져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실존이 그 본질을 결정하고, 실존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자각적 자기가 진실한 ‘실존’이라는 이름에 맞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존에 의해 그 본질을 결정해 가는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실존의 본질은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유는 선택하는 것도 가능한 선택 이전의 ‘관념적’ 가능성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일정한 선택의 필연성을 스스로 인수하는 ‘실존적’ 자유이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가 무력하며 더럽혀져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러한 기존(旣存)의 일상적 자기를 넘어서서 ‘밖에 서 있는다’고 하는 무한의 자기초극(自己超克)과 자기초월이라는 과제를 적극적으로 인수함으로써 진실한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되려고 결단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기성관념이 나타내는 형식적 보편성을 돌파하고 유한한 단독적 자기의 입장으로 되돌아와 거기서부터 재출발함으로써, 현존하는 자기의 유한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탈자적(脫自的)인 자기초월의 결단이 인간 본래의 존재방식이며, 이러한 결단을 바탕으로 비로소 구체적인 진리도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무한한 자기초극의 노력으로써 진실한 자기를 실현하려 하고, 이러한 자기의 결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근원적 진리라고 하는 실존철학의 주장은 추상적 관념이나 객관적 제도나 대중문화의 노예가 되어 개성과 주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는 인간들에게 강력한 경종의 역할을 하고 있다. 실존철학은 모든 도그마의 절대화 경향에 반항하고 인간실존의 진실을 우선시킴으로써 현대 휴머니즘 철학으로서의 진가를 발휘한다. 특정한 주의, 주장이나 중우적(衆愚的)인 당파성에 의존해서 안이한 수면을 즐기려 하는 자에 대해 자유로운 선택의 필요성과 책임감을 각성시키는 부단한 문제 제기자로서 실존주의는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일상성에 대한 비판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며, 선택의 자유와 책임의 강조만으로는 행동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방향의 명확화는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상식이나 과학과의 적극적인 결합이 요구된다. 이러한 객관적 요구에 등을 돌리고 실존의 주관적·내면적인 입장에서 절대화시켜 실존의 ‘교설체계(敎說體系)’를 쌓아 올리고 그 안에 묻혀 있으려 할 때, 실존철학은 본래의 체계외적(體系外的)인 실존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극복하려고 했던 낡은 추상적 관념론의 입장으로 역전하는 위험성을 초래하게 된다. 여기에 실존철학의 커다란 한계가 있다. 실존 철학의 탄생을 일찍이 간파하고 크게 평가했던 철학사가 하이네만(1889- 1970)이 ‘실존’은 사상의 방향을 설정해 주는 규제 원리일 수는 있어도 사상의 내용체계를 만들어 가는 구성 원리는 아니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작가 및 작품

– 주요 작가
  • 장폴 사르트르
  • 알베르 카뮈
  • 시몬 드 보부아르
  • 앙드레 말로
  • 쇠렌 키르케고르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프란츠 카프카

– 주요 작품
  • 구토 (사르트르) 인간이 사물의 본질에 직면했을 때의 불안과 실존의식을 묘사했다. 사르트르 사상의 출발점이다.
  • 존재와 무 (사르트르)
  • 벽 (사르트르) 자아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어떻게 유지해나가야 하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 이방인 (카뮈)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허무한 본질을 버리고 자기 자신(실존)의 상태로 남아 새로운 본질을 설립해 실존주의를 나타낸 소설이다. 카뮈는 세상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소설과 세계를 연결했다.
  • 페스트 (카뮈)
  • 변신 (카프카) 현대인의 부조리한 자의식을 그린 소설이다.

– 주요 인용문
  • “신은 죽었다” — 니체
  •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리라. 이것이야말로 실존주의의 출발점이다.” — 사르트르
  •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었던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무한의 자유이며, 이 허무의 바다에서 인간을 구출하는 것은 그의 결단이고 사회참여다.” — 사르트르
  •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사르트르
  • “인간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미칠 듯한 명징에의 요구와 이 불합리한 세계의 충돌,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 카뮈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2022/05/05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아가기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아가기 < 칼럼 < 기사본문 - 더퍼블릭뉴스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 살아가기
기자명 유기쁨 서울대학교 농림생물자원학부 강사
입력 2022.04.01



공공학 공공철학


인류세, 인간에 의한 대멸종 이야기
요즘 TV를 켜면 두 갈래의 상반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편에서는 예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부의 과시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극적으로 이뤄진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도 두드러지는데, 가령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닉이 전례 없을 정도로 공중파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로 조금 늦은 시간대의 뉴스나 다큐멘터리에서는 세계 각지의 환경악화 현상 및 그로 인한 비참함이 두려울 정도로 생생하게 전달된다. 기후변화로 인한 홍수나 가뭄, 죽어가는 생명, 산불 등 빠르게 악화되는 오늘의 상황에 대한 뉴스는 두려움과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

서로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두 현상은 인류세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징후들로서, 서로 상반돼 보이지만 실은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를 부추기고 있다.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는 오존층 연구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파울 크뤼천 교수가 2000년도에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인류의 생태학적 과대 성장이 지구의 전체 시스템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지금 우리는 인간에 의한 지구상 6번째 ‘대멸종 시대’에 접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인간이 야기한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절감하는 사람들은 너무 늦기 전에 변화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려 한다. 그래서 환경 악화로 인한 세계의 비참을 고발하고, 이대로 계속될 경우 닥치게 될 암울한 종말론적인 미래상을 비관적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대로 살면) 망할 것이고 이미 망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변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전 인류가 끔찍한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등.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너무 끔찍하고 두려운 현실에서는 눈을 돌리고 싶어 한다. 어떻게 해도 인간이 악화시킨 지구환경은 다시 좋아질 것 같지 않다는 무력감과 불안감 속에서, 오히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단기적인 감각적 쾌락에 몰입하는 현상이 반작용으로 일종의 트렌드처럼 나타나는 듯하다. 어차피 인류는 충분히 변하지 않고 있고, 어차피 너무 늦었고 망할 것이니 잊어버리자, 뭐 그런 것. 역설적이게도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그러한 이야기가 실제로는 오히려 사람들의 단기적인 쾌락 추구를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되곤 하는 것이다.

절망이나 외면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행동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암울한 잿빛 전망뿐 아니라 다채로운 생명 세계의 신비에 대해, 녹색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 같다.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그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현재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의 시야는 종종 너무나 인간 중심적이라는 데 착안해서, 우리의 시야를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상’으로 넓히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인간 중심적 시각에서 시작된 인류세(Anthropocene)는 인간 중심적 시각을 넘어서야만 극복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여기서 소개하고 싶은 것은, 인류학, 철학, 종교학 등 학계의 여러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이다.

낡은 애니미즘
‘애니미즘(animism)’이란 용어는 종종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1871년에 출간된 E. B. 타일러의 『원시문화』에서 사용된 이래 널리 알려지게 된 용어이다. 1, 2권으로 이뤄진 그 책은 방대한 양의 자료 수집을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인간 문화에서 나타나는 유사성과 차이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야심찬 저술이었고, 타일러의 생전에 이미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폴란드어로 번역됐을 뿐 아니라 10판이 인쇄되는 등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책의 인기와 함께 ‘애니미즘’이란 개념도 널리 퍼지게 됐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그 책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당대인들의 관심을 사로잡았을까? 풍부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인류 문화의 보편적 법칙을 찾아내려고 시도했을 뿐 아니라 ‘애니미즘’이라는 종교 이론을 수립한 것도 『원시문화』의 인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동서고금의 종교 현상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일별한 그는 인류의 ‘하등종족’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종교현상에 주목했다. 곧 인간이 아닌 것에게 일종의 영혼이 있다고 여기면서, 곰, 사슴 같은 동물이나 삼나무 같은 식물, 나아가 무생물까지도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여기는 등의 현상 말이다. 타일러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포함해서 세계 각지의 원주민 문화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애니미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애니미즘은 “생명, 숨, 영혼”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까지, 나아가 돌 같은 사물이나 바람 같은 자연 현상까지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고 영혼이 있다고 여겼다니, 그리고 그러한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니. 하이테크놀로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일 것 같다.

타일러에 따르면, 우리의 고대 조상은 나름대로 합리적이었다. 타일러는 ‘원시인’ 또는 ‘하등종족’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설명이 요구되는 두 가지 사실을 마주하고서 합리적인 답을 찾다가 모든 존재에 존재하는 영, 영혼을 상상하게 됐으리라고 보았다. 타일러가 볼 때, 원시인들이 직면한 설명이 요구되는 첫 번째 사실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과 죽은 사람의 몸이 현격히 다르다는 점이다. 잠자는 사람이 누워있는 것과 죽은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 외형적으로는 같아도 실은 전혀 다르다. 그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두 번째 사실은 바로 꿈이었다. 꿈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돌아다니며 말하는 형상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타일러는 ‘원시인들’이 몸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혼’의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죽음과 꿈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찾았으리라고 여겼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영혼이고, 꿈속에서 나타나는 형상 역시 영혼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원시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물, 식물, 심지어 물체의 영혼을 일반화하게 됐으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 곧 영혼이 없는 존재에게 영혼이 있다고 상상하고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처럼 여기는 어린애 같은 믿음에 붙은 꼬리표가 애니미즘이었다. 근래까지 그 용어는 어리석은 자들의 유치하고 미개한 믿음을 가리키기 위해 주로 사용됐다.

새로운 애니미즘
그런데 최근에는 근대적 시각에서 이뤄진 그러한 방식의 논의를 ‘낡은 애니미즘(old animism)’으로 규정하고, 특히 북미 원주민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애니미즘 문화를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하기보다 오히려 거기서 생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인 존재론, 생활방식을 적극적으로 발견하는 ‘새로운 애니미즘(New Animism)’ 논의가 인류학, 철학, 종교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들은 지금껏 원시인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평가절하됐던 세계 각지 원주민의 존재론과 생활방식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타일러의 시대부터 비교적 근래에 이르기까지, 우월한 과학적 지식을 가진 우월한 ‘우리’가 어리석은 믿음을 가진 ‘너희’를 내려다보면서, 언젠가는 극복돼야 할 과거의 잔재로서 애니미즘을 다룬 것이 ‘낡은 애니미즘’ 논의였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우월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행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파괴해왔고, 어리석다고 여겨져 온 ‘너희’가 오히려 생태계에 적절히 깃들어 사는 방식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에서는 ‘아니마’에서 ‘영혼’보다 ‘생명’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을 비롯한 세계 각지 원주민 사회에서 발견되는 애니미즘을 ‘살아 있는 존재들이 서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공존의 생활방식’이라고 적극적으로 재조명한다.

이 세계가 인간들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 그리고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이 밀접하게 관계를 주고받으며 공생해왔다는 점, 인간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일원이기에 무수한 생명이 살아가는 세계에 적절히 깃들어 관계를 주고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점. 이것은 오늘날 생태위기에 직면한 우리가 고통스럽게 깨우치고 있는 사실이다.

독일의 동물학자이자 철학자, 의사, 화가이기도 했던 그야말로 만능 지식인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은 『생물체의 일반 형태론(Generelle Morphologie der Organismen)』(1866)에서 ‘유기체와 무기적 환경,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다른 유기체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oecologie’라는 신조어를 제안했다(그 용어는 널리 받아들여졌고, 1893년 국제식물학회의부터 오늘날과 같이 ‘ecology’로 표기).

헤켈이 제안한 생태학의 정의에서 핵심적인 것은 ‘관계’이다. 헤켈의 생태학 정의를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해보면, 오늘날 일어나는 각종 생태 문제들은 인간이 지구상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가 뒤틀려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태위기의 근원에서 우리는 관계의 위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 각지 원주민의 애니미즘적 존재론과 생활방식이 오늘날 재조명되는 이유는, 인간이 지구상 다른 존재들과 적절하게 관계 맺으며 공생하는 지혜를 거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각계의 여러 학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그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뭇 생명과 적절한 방식으로 공생해온, 오늘날의 우리가 참고할 만한 대안이자 모델로서 세계 각지의 원주민 사회, 소규모 공동체들의 애니미즘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를 본격적으로 촉발한 것이 북미 원주민인 오지브와족의 애니미즘을 재발견한 할로웰의 글이다.

인간이 아닌 사람들
인류학자인 할로웰(Irving A. Hallowell)은 1960년에 <오지브와족의 존재론, 행동, 그리고 세계관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오지브와족은 북미에 거주하는 원주민 부족이다. 할로웰은 특히 캐나다의 오지브와족을 찾아가서 연구를 진행하다가, 그들의 ‘사람(person)’ 범주가 인간이 아닌 존재들까지 포함한다는 점을 발견하고서, 그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살피게 됐다. 할로웰은 오지브와족의 관념을 영어로 기록하면서 “인간 이외의 사람들(other-than-human persons)”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곰을 비롯한 동물, 나무를 비롯한 식물뿐 아니라 바위, 벼락 등을 포함한 여러 경험적 존재들 혹은 실재들이 포함됐다. 그의 글은 새로운 방향에서 애니미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가령 인류학자인 누리트 버드 데이비드(Nurit Bird-David)는 어떤 존재를 지역의 언어를 통해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이 갖는 인식론적 기능에 주목한다. 그가 볼 때,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인간인 자기와 인간이 아닌 그가 이 세계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세계 안에 존재하는 그러한 다원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탐구적인 관심이 생겨나게 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류학자 비베이루스 지 까스뚜르 (Eduardo Viveiros de Castro)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으로 여기는 관습에 주목하면서, 타자를 알기 위해서 타자를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편,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사람으로 칭하고 그렇게 여길 때, 그들의 예민한 생태적 감수성을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초점이 맞춰진다. 가령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는 애니미즘을 매 순간 달라지는 환경 속에서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을 민감하게 지각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생활방식으로 조명한다.

이들을 비롯한 여러 학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역 생태계에서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직접적으로 얻는 이들이 특히 이러한 생활방식을 몸에 익히고 사회적으로 전수해온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인간 사회에 대해서 뿐 아니라 지역 생태계 내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도 관계적 태도로 임하며, 환경 속의 다른 존재들을 소통 가능한 주체들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계는 눈(eye)으로 가득 차 있다
근대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우리는 종종 ‘보는 자’, ‘관찰하는 자’의 자리에 인간을 둔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심지어 맨눈으로 볼 수 없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도 인간의 관찰 ‘대상’의 자리에 놓인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존재를 사람이라고 부를 때 흥미로운 부분은, 그들을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시선을 인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아닌 존재도 시점을 차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는 이를 관점성으로 지칭한다. 고양이도, 퓨마도, 악어도 저마다 하나의 시점을 차지할 수 있다. 나도 고양이를, 퓨마를, 악어를 바라보지만, 고양이도, 퓨마도, 악어도 자신의 시점에서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보면 애니미즘은, 달리 말하면, ‘나는 보는 동시에 보이는 존재’라는 사실에 좀 더 민감한 존재론으로도 재조명될 수 있을 것 같다.


호주의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Val Plumwood)의 경험을 살펴보자. 1985년 2월의 어느 날, 카카두 국립공원에서 홀로 카누를 타던 발 플럼우드는 상류의 폭우로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면서 예상치 못하게 커다란 악어를 만나게 됐다. 악어는 카누 곁으로 돌진해왔고, 플럼우드의 카누를 되풀이해서 들이받았다. 악어는 플럼우드의 다리를 꽉 물고 몇 차례나 물속으로 처박았다. 그는 온몸으로 저항하다가 겨우겨우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플럼우드가 나중에 회상하기를,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아름다운, 얼룩이 있는 황금색 눈”을 마주 보게 된 순간이 있었는데, 서로의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이야말로 인간인 자신이 다른 존재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고 한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기에, 내가 이 세계를 관찰하지만 이 세계(의 존재들)도 나를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가령, 우리는 보통 동물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의 시선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인간을 바라보는 동물의 시선, 그 의미는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대자연에 깃들어 살아온 많은 원주민 종족들의 경우, 동물이라는 인간과 다른 부류 존재의 시선을 인식하는 일은 종종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었다.
덴마크의 인류학자인 빌레르슬레우(Eske Willerslev)가 연구한 시베리아 유카기르족의 사례도 우리를 응시하는 비인간 존재의 시선에 대해 주목할 만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유카기르족은 “세계가 눈(eyes)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동물은 물론이고 강이나 호수, 나무로부터 심지어 그림자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존재는 우리의 시선을 되받는 자신의 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카기르족의 세계는 인간만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만을 위한 곳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들의 세계는 수많은 존재가 거주하면서 서로에게 감각되고 또 서로를 감각하는, 매우 감응적인 세계이다.
플럼우드는 악어의 먹이가 될 뻔한 경험 이후에 수많은 존재가 거주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적 생태학적 맥락 안에서 죽음에 대한, 그리고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펼치게 됐다. 애버리지니로 일컬어지는 호주 원주민의 애니미즘에 대한 그의 연구가 심화됐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낡은 애니미즘’과 대비되는 자신의 철학적 애니미즘 논의를 전개했는데, 그 궁극적 목적은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를 향한 종간(inter-species) 윤리를 정립하는 것이다. 플럼우드는 인간이 이 세계와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는 지구상의 비인간 타자를 동료인 행위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여겼던 것이다.
함께 살기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이고 이 세계에는 인간 이외에도 수많은 부류의 존재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학교에서 배워서 또 책을 읽어서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인, 특히 인공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도시 거주 현대인이 그러한 사실을 체감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의 시야는 이 세계를 향해 온전히 열려 있지 않으며 오로지 인간을 중심으로 좁아져 있다.
최근 들어 생태적 위기 상황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이 일어나면서, 일군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애니미즘 논의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대적 통념에서는 인간이 아닌, 심지어 생명이 없는 대상에게서 또 다른 의미의 ‘사람다움’을 발견하는 토착문화를 적극적으로 재조명하고 이를 예술 작품으로 재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자연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사람’이라는 용어를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까지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근대 서구 문명이 생태위기를 초래했다는 데 대한 반성과 대안에 대한 관심 속에 점점 더 많은 인류학자, 철학자, 종교학자들, 나아가 생태운동 활동가, 예술가, 작가들 사이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람’의 의미 확장이 시도되고 있다. ‘사람’을 인간이 아닌 존재에 적용하는 흐름에는 뚜렷한 의도와 지향점이 있다. 곧, 인간이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의 일원이며, 생태계 내 다른 존재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 그러한 인간의 기본 조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6번째 대멸종을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우리 인간이 다른 부류의 존재들과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는, 에두아르도 콘이 말하듯이 “우리가 열린 전체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감각”을 되찾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영역이 급속도로 비대해지면서 우리는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 이른바 열린 전체로 존재하는 방식을 잊었고,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세계와 다시 연결되고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기 위해서,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발견하고 그들 입장에서 우리를, 그리고 우리가 만든 세계를 바라보려는 노력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가령 우리는 도시의 길고양이, 새, 나아가 가로수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시도해볼 수 있다. 거기서부터 조금씩 시야를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니미즘은 인간적인 것보다 더 큰 세계에서의 생명성, 공동체성을 다시 사유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기쁨 서울대학교 농림생물자원학부 강사



유기쁨 서울대학교 농림생물자원학부 강사 webmaster@thepublicnews.co.kr 




2022/03/04

30년 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30년 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30년 전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30년 전쟁
유럽 종교 전쟁의 일부
The Hanging by Jacques Callot.jpg
전쟁의 엄청난 비극,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Jacques Callot)의 그림. 1632년 작.
날짜1618년 5월 23일 - 1648년 5월 15일
장소
유럽, 주로 독일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한 평화.

교전국

보헤미아 보헤미아 왕국
(-1620)
팔츠 선제후국의 기 팔츠 선제후국
(-1623)
네덜란드 공화국의 기 네덜란드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의 기 사보이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트란실바니아 공국
(1619-)
잉글랜드 잉글랜드 왕국
(1625-30)[5]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왕국
(1625-38)[6]
덴마크 덴마크-노르웨이
(1625-1629)
스웨덴 스웨덴 제국
(1630-)
프랑스 왕국의 기 프랑스 왕국
(1635-)
오스만 제국의 기 오스만 제국
(-1634)
작센 선제후국의 기 작센 선제후국
(-1635)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1635)
헤센카셀 방백국의 기 헤센카셀 방백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동 교전국
러시아 차르국 러시아 차르국
포르투갈 왕국 포르투갈 왕국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신성 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스페인 제국

덴마크 덴마크-노르웨이
(1643-1645)[3]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 폴란드-리투아니아 (-1634)
제노바 공화국의 기 제노바 공화국
지원국

교황령 교황령
지휘관

스웨덴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스웨덴 크리스티나 여왕
스웨덴 악셀 옥센셰르나
스웨덴 요한 바네르
스웨덴 렌나르트 토르스텐손
스웨덴 구스타브 호른
스웨덴 칼 구스타프 브랑엘
스웨덴 칼 10세 구스타브
스웨덴스코틀랜드 제임스 스펜스
스웨덴스코틀랜드 알렉산더 레실
스웨덴스코틀랜드잉글랜드 제임스 해밀턴
프랑스 왕국 루이 13세
프랑스 왕국 안 도트리슈
프랑스 왕국 루이 14세
프랑스 왕국 아르망 장 드 리슐리외
프랑스 왕국 쥘 마자랭
프랑스 왕국 푀키레 후작  
프랑스 왕국 앙리 콩데 부르봉
프랑스 왕국 그레몽 공작
프랑스 왕국 가스파르 3세 드 콜리니
프랑스 왕국 루이 2세 드 부르봉
프랑스 왕국 위르뱅 드 마예브레제
프랑스 왕국 튀렌 자작
스웨덴프랑스 왕국스코틀랜드 존 헵번  
보헤미아팔츠 선제후국 프리드리히 5세 폰 팔츠
보헤미아 진드리히 트런
보헤미아 크리스티안 1세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
스코틀랜드덴마크 로버트 맥스웰
작센 선제후국 베른하르트 폰 작센
작센 선제후국 요한 게오르크 1세
네덜란드 공화국 마우리츠 공작
네덜란드 공화국 피트 피터르스존 헤인
네덜란드 공화국 데 레크 영주
네덜란드 공화국 프레데리크 헨드리크
네덜란드 공화국 마르턴 트롬프
네덜란드 공화국 에른스트 카시미르 1세
네덜란드 공화국 헨드릭 카시미르 1세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찰스 1세
잉글랜드 조지 빌리어스
잉글랜드 호레이스 베레
잉글랜드 라인 공자 루퍼트
헤센카셀 방백국 빌헬름 5세
헤센카셀 방백국 아말리에 엘리자베스
포르투갈 왕국 주앙 4세
트란실바니아 베틀렌 가보르
사보이아 공국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러시아 차르국 미하일 보리소비치 셰인

오스만 제국 오흐릴리 후세인 파샤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2세
신성 로마 제국 페르디난트 3세
신성 로마 제국 알브레히트 발렌슈타인  
신성 로마 제국 프란츠 폰 메르시  
신성 로마 제국 요한 폰 베르트
신성 로마 제국 고트프리트 파펜하임  
신성 로마 제국 라이몬도 몬테쿠촐리
신성 로마 제국 피터 폰 홀차펠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오타비오 피콜로미니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오스트리아 대공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뷔쿠아 백작  
스페인 펠리페 3세
스페인 펠리페 4세
스페인 가스파르 데 구스만
스페인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스페인 암브로조 스피놀라  
스페인 카를로스 콜로마
스페인 페리아 공작
스페인 프란체스코 데 멜로
스페인 페르디난트 추기경
스페인신성 로마 제국 마티아스 갈라스
스페인 요한 체르클라에스 
신성 로마 제국 막시밀리안 1세
로렌 공국 로렌 공작 샤를 4세
 지그문트 3세 바사

 이반 시르코
병력

스웨덴 149,000명 (1632)[7]
프랑스 왕국 150,000명
덴마크 135,000명 (1625)[8]
네덜란드 77,000명 (1629)[9]
트란실바니아 6,000명[10]

오스만 제국 60,000명

스페인 스페인: 300,000명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독일: 100,000명 - 200,000명 (추정)

오스트리아 제국크로아티아 헝가리&크로아티아: 20,000명[11]
피해 규모
8,000,000명 (민간인 포함)[12]

30년 전쟁(독일어Dreißigjähriger Krieg)은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유럽 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 중 하나였으며, 사망자수는 800만 명이었다. 30년 전쟁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이는 17세기의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라고 한다.

30년 전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립으로,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전제군주정과 봉건 제도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신성 로마 제국과 이 국가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제후국 및 반대하는 제후국 간의 다툼이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각국의 이해 관계가 교차하는 근대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 국가들은 수많은 용병을 고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수록 종교적 색채는 옅어지고 유럽의 정치적 구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17세기에 종교적 믿음과 실천은 오늘날 평균적인 유럽인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유럽인은 논란의 편에 서게 되었고, 종교적 계파는 사람들의 윤리와 충성과 관련이 깊었는데 이는 그들이 충성하는 제후나 왕의 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전쟁은 새로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그의 영토에서 반종교개혁을 시행하려고 함으로써 발발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을 그의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보장받은 종교 선택의 권리가 위반되자 분노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반대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그의 이전 황제였던 루돌프 2세에 비해 독실한 로마가톨릭 신자였고, 친로마가톨릭 성향이 강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북유럽과 중앙유럽에 공포를 퍼뜨렸고,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던 개신교 국가 보헤미아 왕국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대해 프리드리히 5세 폰 팔츠 선제후를 그들의 황제로 선출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왕위를 제후동맹의 승인 없이 받아들였다. 로마가톨릭이 대부분이었던 남부의 제후국이 이에 반대했다. 이들은 바이에른 선제후를 중심으로 황제를 지지하기 위해 가톨릭 제후연맹을 결성했다.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황제군은 반란을 제압했으나 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이를 비판했다.

보헤미아에서 로마 가톨릭군의 잔학 행위가 이어지자 작센 선제후국이 마침내 개신교 제후동맹에 지지를 표하며 이들과 함께 싸웠다.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며 전쟁에 참여하자, 이에 대항해 여러 목적을 가진 개신교 국가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팔츠 선제후와 인척 관계였던 잉글랜드 왕국이 1625년 전쟁에 개입했고, 홀슈타인에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덴마크-노르웨이가 같은 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스페인에 맞서 독립 전쟁을 치르고 있던 네덜란드 공화국도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내 개신교 국가였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도 이들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덴마크의 패배 이후 이를 대신해 스웨덴 제국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도 1630년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계속 포위당하고 있던 로마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국도 스웨덴 제국 및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1635년부터 개신교 편으로 참전했다.

30년 전쟁은 독일 전역을 기근과 질병으로 파괴했다. 특히 보헤미아 왕국과 남부 네덜란드를 비롯한 독일과 이탈리아에 위치한 국가들의 인구가 급감했다. 용병과 병사들 모두 기여금을 받기 위해 공헌을 위장하거나 마을을 약탈했으며 점령당한 영토 거주민들의 생활고는 심해졌다. 참전국 대부분은 파산 위기에 몰렸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신흥 강대국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을 공인받은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잉글랜드 왕국, 프랑스, 스웨덴 제국도 전쟁 이후 상당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신해 새로운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17세기 후반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배경[편집]

네덜란드 독립 전쟁[편집]

1610년대 초에 유럽의 정세는 크게 바뀌고 있었다. 가장 큰 역사적 변화는 스페인 제국의 몰락이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오스만 제국을 레판토 해전에서 격파하고,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을 자신의 식민지로 복속한 스페인은 16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최강대국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지나친 중심집권화 및 개신교에 대한 종교 탄압은 네덜란드 개신교도의 반발을 부추겼다. 1568년부터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던 저지대 국가의 북부 지역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은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자국의 경제력을 네덜란드 반란군에 쏟아부었다.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에 의해 격파당한 이후, 스페인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네덜란드 연방은 스페인에 대한 반격을 감행해 1609년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뼈아픈 타격을 입혔다. 이에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의존하게 되었다.[13] 이후 네덜란드는 마우리츠 공을 중심으로 스페인에 대항한다.

신흥 강대국의 등장[편집]

스페인 제국이 쇠퇴를 거듭할 무렵, 유럽에서는 새로운 세력들이 등장해 스페인 제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큰 성장 세력은 프랑스 왕국이었다. 백년 전쟁 이래로 봉건제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한 프랑스 왕국은 앙리 4세의 통치 하에 중앙 집권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앙리 4세는 프랑스 내에서 지속되고 있던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교 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낭트 칙령을 발표했고, 이는 프랑스 국민이 통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오랜 적수였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는 한편, 반합스부르크 세력인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했고, 신성 로마 제국과 같은 가문이 다스리는 스페인의 확장을 막기 위해 이들과 대항하는 포르투갈 및 네덜란드 독립군을 지원했다. 외적으로도 큰 치적을 이룬 프랑스는 유럽 각국에 포도주와 곡물을 수출해 부를 축적하였다.[14]

한편 유럽의 북쪽 지대에서도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국가들이 등장했다. 스웨덴 제국엘리자베스 1세의 잉글랜드 왕국덴마크-노르웨이가 이 세 국가이다. 먼저 잉글랜드 왕국은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 이후 개신교도 국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588년 네덜란드와 연합해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잉글랜드 왕국의 해상 통제권은 스페인의 그것을 앞지르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령 동인도 회사를 창립하여 아시아에서의 무역을 증대시키는 한편, 자국 내에서 증가하고 있던 종교 분쟁도 슬기롭게 해결하였다. 구빈법 등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책도 적극적으로 편 그녀는 1603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즉위한 제임스 1세는 북아메리카에 제임스타운을 건설하는 등 해외로의 확장 정책은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지만, 자국 내부에서는 의회와 국왕의 충돌이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유럽 내부의 정세에 깊숙이 관여할 수는 없었다.[15]

이와 달리 스웨덴 제국과 덴마크 왕국은 같은 개신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다. 먼저 스웨덴 제국의 경우, 당시 스웨덴의 왕이었던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부왕의 뜻을 기려 적극적인 발트해 공략 작전을 개시했다. 그는 잉그리안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자주 침공하기도 했다. 이 무렵 스웨덴은 해상 무역이 발달하여 한자 동맹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으며, 발트 해의 세력권을 확보하여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16] 이와 반대로 덴마크-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안 4세는 발트 해와 북해를 이어주는 카테카트 해협 및 스카게라크 해협을 장악하여 이 두 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에게 통행료를 얻었다. 이는 덴마크 왕실의 권위 증가에 큰 기여를 했다.[17] 덴마크는 신성 로마 제국 내에 영지를 보유한 국가이기도 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홀슈타인의 영주로써 신성 로마 제국 북부 지역의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18] 이 두 국가는 네덜란드, 한자 동맹, 폴란드와도 경쟁하는 사이였다.

발트 해 동남부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패권에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세력이 강성해졌다. 1618년 당시 폴란드는 스몰렌스크를 점령하여 루스 차르국에 위협을 가져다 주었고, 북쪽으로는 스웨덴, 서쪽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 동쪽으로는 루스 차르국, 남쪽으로는 오스만 제국, 남서쪽으로는 헝가리 왕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북방 세력들이 분열한 상황에서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인 지그문트 3세 바사는 자국이 로마 가톨릭 국가 및 신교 국가들과 두루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내에서의 사태를 주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모두 서로의 동맹 세력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9]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외교 공작[편집]

유럽 내부에서 종교적 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서로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의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를 고립시키기 위해 더욱 더 강력한 동맹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교황,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동맹을 맺었다. 당시의 교황인 바오로 5세는 이탈리아의 지배권이 신성 로마 제국 측에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프랑스의 외교 정책에 더 힘을 싣게 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에도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중요한 발텔리나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에게 중요했지만,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 왕가는 이곳을 점령하려 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신성 로마 제국 내부[편집]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에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교황을 정면으로 공격한 이후, 1522년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따르는 라인 강 하류 지역의 기사들이 "형제단"을 세우고 신성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들이 진압당한 뒤에도 독일 곳곳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버리고 루터의 주장을 따르는 루터교회로 개종하는 도시들이 늘어났다.[20] 특히 뮌스터에서는 재세례파 위원회가 결성되어 지역 주교의 군대에 저항했다. 비록 뮌스터는 주교가 이끄는 군대에 함락당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를 버리면 기존의 로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재산들을 압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루터교회나 장 칼뱅의 개혁교회로 개종하는 영주들은 늘어만 갔으며, 이어 기사들과 도시민들도 루터교회나 개혁교회로 개종하기 시작했다.[21] 결국 1526년에 열린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 오스만 제국 등과의 전쟁을 위해 영주들의 힘을 필요로 했던 신성 로마 제국은 영주들의 루터교회의 신앙을 인정했지만, 1529년 빈 공방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승리한 이후 황제 카를 5세는 기존의 《보름스 칙령》을 다시 발표해 루터교회를 탄압하려 했다.[21] 개신교도 영주들은 1531년 2월 27일 튀링겐에 모여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고 카를 5세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저항했다. 슈말칼덴 동맹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재공격과 작센 공국의 동맹 이탈 등으로 혼선을 빚다, 작센 공국이 다시 반합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샹보르 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대신 반합스부르크 동맹은 프랑스에 캉브레, 메츠, 툴, 베르됭 등을 넘겨주기로 했다.[21]

보헤미아 반란[편집]

1618-1621[편집]

30년 전쟁의 촉매제가 된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

마티아스 황제가 아들 없이 그의 생애 동안 그의 왕조를 가짐으로써 그의 정연한 변화를 확실시 하려고 했다. 그는 열렬한 로마 가톨릭 지지자인 이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2세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왕좌로 선출하려고 했다.[22] 몇몇 보헤미아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루돌프 2세 때 루돌프 칙령 (또는 폐하의 서신)이라 불리는 종교 칙서로 당연히 인정받은 종교 권리를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했다. 그들은 개신교 제후동맹을 설립한 프리드리히 4세와 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5세를 지지했다. 그는 팔츠 선제후이기도 했다.[23] 그러나 다른 개신교도들은 로마 가톨릭이 주도하는 입장을 지지하기도 했다.[24] 1617년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 왕국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선출되었고 마티아스가 죽자 자연스레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왕의 선출 이후 2명의 로마 가톨릭 의원들이 1618년 5월 프라하 성의 대표로 보내졌다. 페르디난트는 그의 결석 동안 정부의 행정을 담당하기를 원했다. 1618년 5월 23일 개신교 의회는 그들을 포위하고 창문 밖으로 던졌다. 그들은 추락했으나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라 알려진 이 사건으로 보헤미아 반란이 시작되었다. 곧 보헤미아 분쟁은 보헤미아 왕국실레시아루사티아까지 번졌다. 모라비아는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의 싸움으로 얼룩진 상태였다. 모라비아 지역의 분쟁은 다시 프랑스 왕국스웨덴 제국네덜란드덴마크-노르웨이스페인 제국포르투갈 왕국잉글랜드 왕국 등 다른 유럽 강대국들이 이 사태에 개입하거나 아니면 예의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23]

백산 전투의 재현

보헤미아 분쟁은 여전히 지역적인 분란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마티아스 황제의 죽음 이후 개신교 반란 지도자들은 대담해졌다. 마티아스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공식적인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와 보헤미아 반란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분쟁이 서부 독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인 그의 조카 펠리페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에 맞선 동맹에 대해 결사적이었던 보헤미아 인들은 칼뱅파였던 팔츠 선제후였던 칼뱅교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의 후보로 내세우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5세는 개신교 제후동맹을 이끌고 있었다. 보헤미아는 제후동맹에 자국을 가입시켜준다면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작센 선제후국의 요한 게오르크 1세, 헝가리 왕 베틀렌 가보르에게도 같은 약속이 주어졌다. 프라하를 떠나는 모든 서신들을 가로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오스트리아 인은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공연히 알렸다.[25] 이는 보헤미아인들에 대한 지지가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고, 작센은 아예 이들에게 신임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보헤미아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귀족들 대부분이 루터파와 칼뱅파였던 오버외스터라이히가 반란에 동참했고, 곧 니더외스터라이히가 반란을 일으켰다. 1619년에는 진트리히 마타야스 트런이 비엔나 성벽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더욱이 영국 제도에서는 프리드리히 5세의 반란이 유럽의 조엘리라 묘사되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문제로 비춰지게 되었다.[26] 이는 30년 전쟁 전반에 걸쳐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흐름을 내놓기도 했다. 호레이스 베레가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이 전쟁 초기에 팔츠 선제후 지역으로 이동했고 존 세톤이 이끄는 스코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이 보헤미아로 이동했다. 그리고 후에 이들은 혼성 부대인 브르타뉴 여단에 참여하게 된다.[27] 세톤의 여단은 1622년까지 트레본 마을을 사수한 여단으로, 보헤미아에서는 최후의 개신교 동맹이었다.[27]

오스만 제국의 지원[편집]

프리드리히 5세의 초상화.

트란실바니아의 공작이자, 헝가리 개신교도의 왕이었던 베틀렌 가보르는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 때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스만 2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로마 가톨릭 공포 정치로 베틀렌은 오스만 2세에게 보호를 해달라 부탁했고, 오스만 제국은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반기를 일으키고 개신교도의 왕으로 프리드리히 5세를 선출한 이후 보헤미아 내 여러 국가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는 보헤미아의 유일한 동맹국이 되었다.[28] 하인리히 비터가 이스탄불을 1620년 1월 방문했고, 메메트 아가가 1620년 7월 프라하를 방문했다. 오스만 제국 기병은 프리드리히에게 6만 명의 기병을 주었고, 40만 명의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술탄에게 바치는 연간 조공에 대한 답례이기도 했다.[29] 이 협상은 1620년부터 1621년까지 발발한 폴란드-오스만 전쟁을 촉발시켰다.[30] 오스만 제국군은 1620년 9월부터 10월까지 30년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원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체초라 전투에서 패배시켰다.[31] 그러나 1620년 11월 백산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이 패배할 때는 오스만 제국은 개입할 수 없었다.[32] 1621년 폴란드군이 재정비해 초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패배시켰고 양국의 전쟁은 원상복귀되었다.[33]

우스코크 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던 황제는 보헤미아와 그들의 동맹국을 그의 압도하는 수로 누르려고 했다. 황제군의 사령관 부코이 백작은 에른스트 만슈펠트가 지휘하는 개신교도 제후동맹을 1619년 6월 10일 사브레 전투에서 격퇴시켰고, 이것은 트런 백작이 프라하와 연계하지 못함으로써 비엔나 포위를 푸는 계기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확대에 있어서 오랜 적이었던 사보이 공국 또한 이 전투로 피해를 입었다. 개신교도들의 중요한 동맹이었던 사보이 공국은 개신교도들에 자금을 지원해주고 라인란트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만슈펠트의 패배가 사보이의 개입을 알림으로써, 이들은 전쟁에서 잠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1630년 스웨덴 제국이 참전한 이후 다시 30년 전쟁에 개입한다.

덴마크 시대 (1625년 ~ 1629년)[편집]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 개신교 측에 서서 황제군과 싸웠다.

황제는 프리드리히에 대한 처벌로 영방의 라인팔츠와 오버팔츠에 있던 선제후위를 빼앗고, 새로이 전공을 세운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선제후가 되었다. 황제권력 앞에 정세는 긴박하게 움직여 황제 대 선제후라는 정치적 대립관계가 종교상의 대립과 미묘하게 교체하게 되었다.

또한 이 라인팔츠의 영유를 둘러싼 문제는 국제적 이해관계까지 얽히게 만들었다.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는 이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에게 오스트리아 계승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선대 황제 마티아스로부터 알자스 지방의 영토를 할양받는다는 밀약을 맺고 있었다. 이 지역은 북 이탈리아에서 프랑슈콩테를 거쳐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로 군대를 보낼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루트였다.

이 지역 문제는 그대로 프랑스의 이해 관계와 맞아 떨어진다. 이 당시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1624년 합스부크르 왕가의 세력 강화를 두려워한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 및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덴마크를 포함한 [대(對) 합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가톨릭 제후 연맹을 견제했다. 또한 프랑스, 사보이베네치아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지원 루트를 막았다.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황제군과 바이에른군의 실질적인 야전 사령관으로 30년 전쟁 중기까지 대활약한다.

1625년 5월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가 개신교 측에 참가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개신교도였고, 바이센베르크 전투(흰산 전투)의 승리에 자신감을 가진 로마가톨릭 진영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표면상의 참전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성로마제국 니더작센의 구역장으로서 오랫동안 빈 자리로 남아있는 2개의 제국내 사교직(司教職)에 자신의 아들을 취임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이를 거절하고 틸리 백작의 군대를 니더작센에 진군시켜 머무르게 한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이렇게 되자, 북 독일에서의 세력 확대와 함께 발트 해북해에 대한 패권확립을 노리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아들의 사교직 취임 문제에 대한 페르디난트 2세의 노골적인 반대를 명분으로, 프랑스, 영국, 스웨덴의 동맹국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1625년 5월에 전쟁에 참전했다. 처음엔 스웨덴과 함께 개입하려 했으나, 양쪽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져 결과적으로 스웨덴은 폴란드 문제에 주력하고 덴마크가 단독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참전에 대해 영국은 군사비를 제공하고, 만스펠트, 브라운슈바이크란 2명의 용병대장의 군대를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황제군 측의 유명한 용병대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덴마크의 참전 때문에 페르디난트 2세는 군사비 부족으로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상비군으로 응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황제는 보헤미아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을 등용하고 그의 군대에게 개신교군과 싸울 것을 의뢰했다. 한편 덴마크군과 용병부대 사이에서는 전략에 대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결국 3사람 모두 각자 행동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발렌슈타인의 각개격파 전술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버려 만스펠트는 데사우 전투에서 패배하고, 브라운슈바이크도 1626년 1월 13일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1626년 8월 크리스티안 4세는 믿고 있던 프랑스의 지원을 얻지 못해 루터 전투에서 로마가톨릭 동맹군 사령관 틸리 백작에게 완패하였다.

크리스티안 4세가 전력을 잃어버리자, 발렌슈타인과 틸리 백작의 군대는 덴마크에 침입해 덴마크가 신성로마제국 영내에 가지고 있던 포메른메클렌부르크 공작령 뿐만 아니라 유틀란트 반도도 유린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스웨덴에게 지원을 요구했고 곧 동맹이 성립되어 얼마 안 가 발렌슈타인을 덴마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결국 1629년 뤼베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덴마크는 독일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또한 같은 해 황제가 발령한 복구령은 광대한 사교령과 수도원 령의 로마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성사시켰다.

스웨덴 참전 시기[편집]

1630년 7월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황제군의 발트 해 진출에 대해 위협을 느끼는 한편, 이를 대륙진출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는 곧 개신교 옹호를 표방하고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의 군사비 원조를 얻어 28척의 전함과 수송선에 기병 16개 부대, 강력한 포병이 배속된 보병 92개 중대, 합계 13,000명의 대군을 승선시키고 북부 독일의 우제돔에 상륙했다.

한편 그해 8월 24일 레겐스부르크의 선제후 회의에서 황제는 로마 가톨릭 제후의 지원을 얻지 못해, 발렌슈타인과 그의 용병부대를 대량으로 해고하고 틸리 백작의 로마가톨릭 동맹군으로의 편입을 추진시키고 있었다. 구스타브는 곧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서 포메른 지역의 요새화를 꾀하고, 보급 병참기지를 설정하려 했으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및 개신교 제후들이 협력을 거부하여 그의 전략은 차질을 빚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마그데부르크 시(市)가 황제의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틸리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였다. 이 마그데부르크 시 구원을 위해 구스타브는 프랑크푸르트 공격을 미끼로 양동작전 등을 구사해 틸리군을 유인해 내려고 했으나, 이에 대해 틸리도 노련한 수완을 보여줘, 일진일퇴의 기동(起動)을 되풀이 하였다. 결과적으로 프랑크푸르트와 마그데부르크 양측 도시가 각자의 군대에게 약탈을 당하는 결과를 빚게 되어, 구스타브의 마그데부르크 구원 작전은 실패했다.

스웨덴군은 그 후 곧바로 방어자세로 일관했다. 1631년 7월~8월에 걸쳐 보급의 차질로 인해 위험한 상태에 빠지자 베를린에서 수비에 들어갔다. 틸리는 이곳을 2번에 걸쳐 공격했으나, 공격은 모두 실패했다. 이것을 보고, 관망하던 북부 독일의 2대 개신교파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양 선제후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9월 11일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자신의 군대를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지휘 하에 두었다. 한편 틸리군은 9월 15일 라이프치히 시에 입성했다. 군대는 약 36,000명으로 증가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스웨덴군 26,000명과 작센군 16,000명의 각 군은 북쪽 약 25마일(약40km)의 뒤펜에서 합류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는 군사박물관에서 30년 전쟁 당시의 무기와 진형을 전시한 모습

1631년 9월 17일 황제군의 명장 하인리히 파펜하임 기병장군(1594~1632)은 교묘한 기동으로 스웨덴군을 유인하여 라이프치히 북쪽 약 4마일(약6.4km)의 브라이텐펠트 평원에 포진한 틸리군과의 결전으로 구스타브 왕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구스타브는 자신의 군을 새로운 군제(軍制), 장비, 전술로 탈바꿈시키고, 신 전술의 전투대형으로 배치했다. 결과적으로 신 전술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구체제의 테르시오로 조직된 틸리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로 인해 세력관계는 단숨에 역전되어, 황제측이 수세로 몰리게 된 것과 더불어, 이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구스타브가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모델의 전술을 계승 발전시켜 횡대, 기병, 포병의 3병전술의 우수성을 실증하여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의 전투에서 승리한 스웨덴 군대와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모습을 그린 그림.

브라이텐펠트 전투 승리 후 구스타브 왕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마인 강을 건너 라인란트와 제국 여러 도시를 제압해 12월 22일 마인츠를 점령하고 남은 동절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다음해 봄 남부 독일을 침공한 구스타브는 자신이 구상하는 스웨덴 주도의 독일 개신교도 제후의 대동맹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뮌헨으로 남하했다. 그래서 1632년 4월 15~16일에 걸쳐 레흐 강 전투에서 틸리의 야영진지를 기습해 틸리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남부 독일을 점령했다. 틸리는 이 때 받은 부상으로 인해 얼마 안 가 죽고 말았다.

이 시기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크게 당황하였다. 틸리의 전사 이후 그를 대신할 만한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스웨덴군의 위협에 대항해 황제는 당시 보헤미아의 영지에서 재기를 노리던 발렌슈타인을 재기용하기로 결심한다. 황제는 1630년 8월 전횡이 극에 달했다는 이유로 면책되었던 발렌슈타인으로부터, 군대의 전권, 화평교섭권, 조약체결권의 전면 위임과 합스부르크 제국령과 선제후령의 할양"이라는 어마어마한 조건을 받아들여 그를 황제군의 지휘관으로 재소환하였다.

발렌슈타인은 빠른 시간에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1632년 7월 11일 발렌슈타인군은 스히바츠에서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군대와 합류했다. 구스타브는 2만 병력에 2배 이상 되는 45,000의 병력을 이끌고 아르테 페스에서 야영에 들어갔다. 한편 구스타브는 8월 31일부터 9월 4일에 걸쳐 야영 중인 발렌슈타인 군에 대한 기습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로, 구스타브는 북서쪽으로 각자 후퇴했다.

그 후 9월부터 10월에 걸쳐 발렌슈타인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작센에 침공했다. 후방연락선이 차단될 위협을 느낀 구스타브는 곧바로 북상을 개시했다. 그리고 나움부르크에서 11월 9일부터 15일까지 야영을 했으나, 발렌슈타인이 파펜하임에게 대증원부대를 요청했다는 정보를 얻은 구스타브는 급히 공격을 위해 출격했다.

그래서 11월 16일 라이프치히 남서쪽 뤼첸에서 기어코 결전의 서막이 열렸다. 격렬한 전투 끝에 가까스로 스웨덴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구스타브 자신은 흉탄에 쓰러져 전사하고 말았다(뤼첸 전투). 전투 후 국왕의 전사소식을 들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는 크리스티나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는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과 하이브론 동맹을 체결하고 방어전쟁이란 형식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갔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개신교 제후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웨덴과 손잡고, 로마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도 이 동맹에 참가했다. 30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구스타브의 죽음은 개신교 제후들을 동요시켰다. 거기에 스웨덴군과 개신교 제후들 간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은 황제군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황제는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 발렌슈타인을 1634년 1월 24일에 암살했다. 하지만 발렌슈타인 제거는 군사적으로는 마이너스였고, 아직도 자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제국 제후들의 의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 페르디난트의 세습을 위해 제후에게 양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개신교 측은 구스타브가 죽은 후 작센-바이마르 후작 베른하르트와 구스타브 호른이 지휘를 물려받았다. 1634년 9월 6일 스웨덴-개신교 제후군(하이브론 동맹)은 보병 16,000명, 기병 9,000명을 이끌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 추기경 황태자 페르디난트의 군대 35,000명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스웨덴군의 약점이었던 일제사격 후 재장전의 빈 틈을 노린 돌격으로, 개신교군에게 전사자 17,000명, 부상자 4,000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대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 승리로 주도권을 되찾은 황제는 아들 페르디난트를 로마 왕으로 선출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 이후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황제는 바이에른 공작과 작센 공작과도 화해하고 스페인의 참전에 용기백배하여 여러 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하였고, 그 결과 다음해 5월 30일 황제 측이 유리한 상황 하에서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황제의 위광을 높여주었지만 결국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스웨덴이 세력을 잃고, 하이브론 동맹이 붕괴의 위기를 맞게 되자 재상 옥센셰르나는 수완을 발휘해 흑막 뒤에 있던 프랑스를 직접 전쟁에 개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30년 전쟁은 제4기를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스웨덴 시대(1635년 ~ 1648년)[편집]

스웨덴의 구스타브 왕이 전사한 후 재상 옥센셰르나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로인해 서부와 남부지역의 독일 개신교 제후들로 구성된 하이브론 동맹이 와해되면서 스웨덴이 고립되어갔다. 그러자 물밑에서 스웨덴과 독일 개신교 제후둘을 돕던 프랑스가 결국 전쟁의 직접 뛰어들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1635년 5월 21일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직접 대결을 펼쳤다. 이 전쟁에서는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스웨덴의 재상 옥센셰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가 서로 맞붙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주로 스페인군과, 스웨덴군은 황제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황은 처음 수 년간 프랑스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프랑스는 훗날 명장이라 칭송받게 되는 최고의 장군인 튀렌(1611~75년)과 콩데 공(公)(1621~86년)을 전쟁에 참가시키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조금씩 전황을 역전시켜 나갔다. 이때 공세에 나선 황제군이 비토슈토크 전투에서 스웨덴군에게 패배하고, 승리한 스웨덴군은 다시 독일을 침공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반-합스부르크 세력의 전세가 호전되었고, 1640년부터는 합스부르크 세력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스페인을 격파해 요충지 브레다요새를 함락시켰다. 이 승리는 네덜란드의 독립을 확실하게 만들었고, 거꾸로 스페인의 패권이 무너졌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정세 속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했다.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아들 페르디난트가 페르디난트 3세로서 새로이 황제가 되어 즉위했다.

프랑스군의 용병대장이 된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도 공세에 나서 1638년 라인팔츠, 브라이베르크, 브라이자크를 함락시켰다. 다만 베른하르트는 프랑스와 마찰을 일으켜, 후에 작센 군과 프랑스군이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 해 스웨덴군은 하이브론 동맹을 배반한 작센 군을 켐니츠에서 격파하고 보헤미아에 침공했다. 이때 스웨덴군 베넬 장군의 야심으로 인해 통솔이 어지럽혀져 격퇴되었다. 다음 해 1639년 에르푸르트에서 프랑스군, 스웨덴군, 프로이센군이 접촉하였다. 무엇보다 프로이센군은 후에 대 선제후로 불리게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다음해 1640년 프로이센 공(公)이 되면서 방위전쟁에서 물러나 사실상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

1640년 경부터 황제는 화평을 향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그 고압적인 태도에 응하려는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군은 이 시기부터 프랑스, 네덜란드 앞에서 패퇴를 거듭해 몰락의 징후가 보이고 있었다. 그 해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포르투갈 왕국이 독립하였다.

1642년 황제군은 브라이텐펠트에서 다시 스웨덴군과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이곳은 예전에 황제군과 스웨덴군이 맞붙었던 유명한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였다. 황제는 이 패배에 굴복해 화평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제국 전체에서 전투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1642년 후반쯤 라인 강의 양쪽 강변에서 화평회의가 설치되었으나 1644년이 되어서야 교섭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것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투가 뒤섞이면서 매우 격렬해지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제국 법에 의해 국제회의는 설치되었으나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은 스웨덴이 화평회의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1642년 재상 리슐리외, 1643년 프랑스왕 루이 13세가 차례로 죽고, 리슐리외의 정책은 새로운 재상이 된 마자랭이 물려받았으나, 새로이 국왕이 된 루이 14세는 아직 어렸기에 프랑스 국내는 불안정해졌다. 그 때문에 마자랭은 물려받은 정책 중에 국왕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만들라는 야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643년 5월 19일 프랑스 왕족 콩데공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어 여기서 스페인의 군사력은 붕괴되었다. 그리고 1644년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가톨릭 동맹군의 중심이었던 바이에른 군을 격파하면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한편 스웨덴은 독일에서 전투를 벌이는 스웨덴군의 배후를 위협하던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쟁은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토르스텐손 전쟁이라 불리었다. 스웨덴군은 네덜란드 해군을 우방으로 만들어 덴마크를 굴복시키고 30년 전쟁으로 인해 중단된 발트 해의 패권을 기어코 거머쥐게 되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 구스타브 호른 장군이 복귀하였다. 황제군은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참패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승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보헤미아에 침공하였다. 1645년 프라하 근교의 얀카우 전투에서 또다시 황제군은 대패했고, 이때 프라하에 있던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으로 도망쳤으나, 이것은 예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보헤미아 왕)의 도망과 비슷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도망이라고 조소받았다.

이 사건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같은 해 바이에른군도 스웨덴군에게 패배해 바이에른 공작은 프랑스와 화해를 맺고, 고립된 작센 공작도 스웨덴군과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화평회의는 순식간에 진전되었다. 국제회의에서는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 여러 나라가 참가했다. 그러나 1646년 황제군이 얀카우 전투의 패전에서 경이적인 부활을 이루어냈다. 황제군이 바이에른과 다시 합류하는 것을 두려워한 스웨덴은 바이에른에 다시 침공하였다. 프랑스는 이것을 월권행위로 보고, 스웨덴의 견제를 위해 명장 튀렌을 파견하였다. 양군에게 포위된 바이에른은 굴복했으나, 이후 바이에른군의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군에 합류했다.

1618년 보헤미아-팔츠 전쟁이 발발했던 그곳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1648년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은 황제-바이에른 연합군을 격파하고 대세를 굳혔다. 스웨덴군은 프라하를 포위하고 이곳을 점령한 후 제국의 수도 빈을 공격하려는 태세를 준비했다. 황제는 기어코 10월 24일 화평조약에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보헤미아의 정복과 개신교화를 위해 1648년 7월 26일 이후 프라하에서 전투를 계속하였다. 로마가톨릭 진영의 최후의 요새였던 프라하는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결코 항복에 응하지 않았다. 후에 스웨덴의 왕이 된 당시 스웨덴군 총사령관 칼 10세도 원군으로 달려와 포위전은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11월 2일 프라하에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소식이 전해지자 이로써 30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친정을 개시한 크리스티나 여왕의 정책으로 인해 화평교섭에 새로운 전개가 일어나게 되었다.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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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