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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4

Philo Kalia - 현재 일본에 철학이 있는가? 일본현대철학이란 어떤 철학인가? 어제 대화모임에서 나온 질문이다.... | Facebook

Philo Kalia - 현재 일본에 철학이 있는가? 일본현대철학이란 어떤 철학인가? 어제 대화모임에서 나온 질문이다.... | Facebook

Philo Kalia
  · 
현재 일본에 철학이 있는가?
일본현대철학이란 어떤 철학인가?
어제 대화모임에서 나온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김태창 선생님은 교토 학파의 창시자인 기타로 니시다(Kitaro Nishita, 1870-1945)를 예로 들면서 그의 절대무의 철학, 場所의 철학을 언급하셨다. 

나는 감신 대학원 시절 변선환 선생님으로부터 귀가 따가울 정도로 교토 학파에 관하여 많은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름만 들었지 그 철학의 내용에 대한 가르침은 없었다. 

선생님의 학위 논문 가운데 야기 세이이치의 장소적 그리스도론이 있어 읽은 적이 있지만 이해하기도 어려웠거니와 금새 잊었다. 
선생님은 기독교-불교와의 만남과 대화에서 붓다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끝내 말씀을 아끼시고 그냥 신비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 말씀을 늘 흐렸다.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 신학생들에게 파격적인 말씀으로 받을 충격을 염려하신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나 대화는 늘 기독교 측에서 심한 의심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이단 재판으로 귀결되기 일쑤이다.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인 사람들 불교 좀 공부하시라고, 성경을 읽고 신학을 공부하듯 정성스럽게 공부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그 후 이 책 <참 자아의 주님이신 붓다-그리스도>(Der Buddha-Christus als der Herr des wahren Selbst, 1982)를 알게 되었다. 저자인 프릿츠 부리는 바젤 대학 신학부 교수였는데 이 책에서 교토학파의 종교철학과 기독교를 다루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자아의 주님이시라면 붓다는 불교인들에게 참자아의 주님이시라는 내용이다. 물론 주님은 상징어이다.

  • 프릿츠 부리는 교토 학파의 8명의 철학자를 논의하는데, 
  • 기타로 니시다를 일본의 위대한 철학자요 교토학파의 창시자로,
  • 하지메 타나베(Hajime Tanabe, 1885-1926)에게는 “참회의 철학과 죽음의 변증법”을, 
  •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다이제츠 타이타로 스주키(Daisetz Teitaro Suzuki, 1870-1966)는 “서양인들을 위한 선불교”로, 
  • 신-이치 히사마추(Shin-ichi Hisamatsu, 1889-1980)는 “무신론적 불교”라는 제목으로, 
  • 게이지 니시다니(Keiji Nishitani, 1900-1990)는 “禪의 종교철학”으로, 
  • 요시노리 타케우치(Yoshinori Takeuchi, 1913-2002)는 “불교적 실존주의”로, 
  • 시추테루 우에다(Shizuteru Ueda, 1926-2019)는 “자기상실적 자기의 삼위일체 속에서 대상적 실체 사유의 돌파”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 마사오 아베(Masao Abe, 1915-2006)는 “선불교와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서술했다. 


나는 이 방대하고 어려운 책보다는 한스 발덴펠스(Hans Waldenfels)의 “절대무(Absolutes Nichts)”라는 책을 복사해서 두세 번 읽은 적이 있다. 
주로 게이지 니시타니의 “空의 철학”을 연구하여 제출한 학위논문이다. 

1989년 겨울 학위논문 완성을 앞두고 하이데거 생가는 꼭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하이데거의 고향 독일 남부 메스키르히를 찾아 생가와 바로 옆에 있는 교회를 보고 들길을 걷고 하이데거 아키브를 들어갔을 때 마침 거기에는 게이지 니시타니의 흉상이 있었다. 
둘 사이의 사상적 깊은 관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흉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후 이 분야를 더 이상 공부하지 못했다. 


과정철학 사상이 더해져 하느님은 無이고 空이고....


김태창 선생님은 교토학파의 일본철학은 한국철학 수립을 위한 좋은 거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신다. 동의하고 싶은 말씀이다. 
선불교적 전통에서 서양철학을 연구하고 다시 서양철학을 선불교를 통해 해석하고, 선불교를 서양철학을 통해 해석하는 상호 교류, 만남, 논쟁, 대화 속에서 교토학파와 같은 일본철학이 형성됐으리라 생각한다. 
교토학파의 일본철학은 아베 마사오 이후 계승되고 있는가? 잘 모르겠다. 


5월 27일이 부처님 오신 날인데 기독교-불교, 불교-기독교의 만남이 한국 사상의 풍요로움을 위하여, 한국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 한국인의 영성 제고를 위해 여러 차원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10명에서 100명이 되고, 1000명이 되고 10,000명이 되고 10만 명이 되고 100만 명, 1,000만 명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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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comments
이찬수
어제야말로 참석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고 죄송했습니다. 결혼33주년 1박2일 여행다녀오느라...^^
김태창 선생님께도 인사여쭙겠습니다
Reply14 h
Philo Kalia
이찬수 교수님 부재의 자리가 컸지만 33주년 결혼기념일을 축하합니다.
Reply7 h


오범석
멋진 박사님의 통찰과 고민, 그리고 신헉자로서의 기조가 좋습나다.
Reply14 h
Philo Kalia
오범석 공감의 마중글 감사드려요
Reply7 h


차건
학부 시절 스즈키 선사의 <선불교 입문>을 영어로 읽고 싸대기 한대 맞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죠.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죠. "당신은 왜 당신의 존재에 대해서 유감을 느끼는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제대로 각성하게 해준 한 마디였습니다. 그 뒤 스즈키의 물음을 복음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면 나의 신앙은 끝나겠다고 생각했었죠.
Reply13 hEdited
Philo Kalia
건차 공감합니다. 스즈키의 <서양의 길과 동양의 길>, <선불교에 대한 강연> 등을 읽었던 강렬한 느낌이 생각납니다.
Reply7 h


박상진
목사들이 불교를 공부하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일천하지만 불교를 공부할수록 그 깊이에 매료되어,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
Reply13 h
Jongsoo Lim
연등은 곱고, 아롱진 얘기는 깊고 어려우니요. 연등 한 점 걸겠습니다. "깨닳음을 허하소서."
May be a doodle of lighting and text
Reply7 h
Philo Kalia
Jongsoo Lim 아롱지다는 말, 참 좋네요. 연등이 세상 곱게 만들어 인간들 아롱져 大通하길 바랍니다.
Reply7 h


변상규
페북에서
가장 좋은글 늘 감사합니다 심교수님
Reply5 h
Philo Kalia
변상규 변교수님, 안부인사 전합니다.
마중글에 감사합니다
Reply2 h


알라딘: 근대초극론 -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 일본의 현대 지성 5 히로마쓰 와타루

알라딘: 근대초극론


근대초극론 -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 일본의 현대 지성 5 
히로마쓰 와타루 (지은이),김항 (옮긴이)민음사2003-05-30

원제 : '近代の超克'論 - 昭和思想史への一視覺 (1989년






Sales Point :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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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절 확인일 : 2010-10-31


책소개
이 책은 1942년 잡지「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인 '근대의 초극'은 당시 일본 지성계를 대표하는 키워드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금기시되어 온 용어이기도 하다.

당시 지성인들은 일본의 전쟁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성전(聖戰)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전후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고발되었다. 지은이는 전후엔 논의조차 사라져버린 이 주제를 다시 끌어내어 '근대의 초극'은 당시 일본 사상계를 대변하는 키워드임과 동시에, 언제라도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무서운 이데올로기임을 보여주고 있다.


목차


서문

1. '문학계' 좌담에 대하여
2. 고오사카 마사아키의 견해를 다시 읽는다
3. '세계사의 철학'과 세계 대전의 합리화
4. 전시 '일본 사상' 비판의 한 이정표
5. 국가 총동원 체제와 역사의 간지(奸智)
6. 미키 기요시의 '시무의 논리'와 애로(隘路)
7. 민족주의적 자기기만
8. 절망의 여염(餘炎)과 낭만주의적 자조
9. 교토 학파와 세계사적 통일의 이념
10. 철학적 이념과 현실의 어긋남

(해설) 근대의 초극에 대하여 - 가라타니 고진
(옮긴이 후기) 지금 이곳의, 혹은 이미 지나간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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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히로마쓰 와타루 (廣松涉)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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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에 태어나 1994년에 세상을 떠났다. 도쿄대 교양학부 교수를 역임했으며, 사물적 세계관에서 탈피한 사건적 세계관, 사지 구조론, 공동 주관성 등을 축으로 서양 근대 사상과 비판적 대화를 계혹해 왔다. 1960년대 후반의 신좌파 중 특히 분트(공산주의자 동맹) 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은 책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지평>, <존재와 의미>, <자본론의 철학>, <유물사관의 본모습>, <과학의 위기와 인식론> 등이 있다.

최근작 : <근대초극론> … 총 27종 (모두보기)

김항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도쿄대학교에서 수학했고, 표상문화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관심은 문화이론 및 한일 근현대 지성사이며 지은 책으로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2009), 『제국일본의 사상』(2015), 『종말론 사무소』(2016)이 있고, 옮긴 책으로 『예외상태』(2009), 『정치신학』(2010) 등이 있다.

최근작 : <뉴래디컬리뷰 2021.겨울>,<[큰글자도서] 제국일본의 사상 >,<레드 아시아 콤플렉스> … 총 22종 (모두보기)



전전과 전후의 단절... 그러나 연속

현대 일본은 전전과 전후를 분리하여 사고하려고 하고 그런 사고 속에 전전의 가해자에서 벗어나 전후의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려고 한다. 물론 가해자의 책임과 반성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러나 이러한 피해자되기는 경제부흥의 여파로 자신감을 회복한 이후 다시 전전의 자심감을 표현하는 논리로 전환하고 있다. 그 논리가 전전의 논리를 계승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과거 지식인의 논의가 현재에도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는, 그리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불철저성을 근대 일본 지성사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밝히고 있다.
대장장이 2003-08-1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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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도 사상이 있는가



아침신문에서 고른 '오늘의 책'은 '일본사상사'들이다. <현대일본사상론>과 <근대 일본사상사>가 동시에 출간됐는데, 일본문학이나 사상을 챙겨둘 만한 여유는 없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에서 멈춰있는 '교양'을 업그레이드해야 할 필요성은 느끼게 된다. 최근에 한 학술발표회에 참석했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는 일본인이 (즉 일본인의 시각에서)직접 쓴 <한국문학사>가 단 한권도 없었다(몇몇 한국인/재일동포가 쓴 오래 된 문학사들만이 남아있다). 우리의 경우는 사정이 어떠한지(우리 나름의 시각으로 쓴 일본문학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여하튼 '가까운 이웃'이란 말이 무색한 게 현실이다. 미래적인/전향적인 한일관계에 대해 말들은 많지만 일단은 서로의 전통과 생각에 대해 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한국문학사>의 표지에 욘사마를 쓰는 건 어떨까? <한국문학사>를 읽고 있는 욘사마!). 자꾸만 거꾸로 가는 듯싶은 사상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신문(06. 12. 07) ‘근대 일본사상사’ 등 번역출간…日 다시 전체주의로 갈까

일본에 또다시 내셔널리즘이나 전체주의가 부상할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방법은 그들의 사상의 궤적을 보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일본 근·현대 사상사 서적이 최근 잇달아 번역돼 나왔다. ‘근대일본사상사’(소명출판)와 ‘현대일본사상론’(논형)이다.



두 책은 집필 방식이나 사상계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군국주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 근·현대 사상계의 어제와 오늘을 더 총체적으로 드러내보인다. ‘근대일본사상사’는 지식인들의 사상에, ‘현대일본사상론’은 민중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일본사상사’가 막번체제 말기~전후(1950년대 후반)를, ‘현대일본사상론’은 전후~현재를 다루고 있어 시기적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근·현대 사상흐름 비판적 추적교과서 검정제도 위헌소송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이에나가 사부로 전 도쿄교육대교수가 엮은 ‘근대일본사상사’는 일종의 개론서다. 마루야마 마사오, 다케우치 요시미 등 전후 일본 사상학계를 대표하는 당시로선 소장학자들이 집필에 참여했다. 1959~61년 지쿠마서방(筑摩書房)이 낸 ‘근대일본사상사 강좌’ 시리즈의 제1권 ‘역사적 개관’을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옮겼다.

이 기획은 패전에도 불구, 한국전쟁의 어부지리 등에 힘입어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사회가 “더 이상의 전후(戰後)는 없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전(戰前)의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보인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군국주의 패전의 역사를 ‘일부에 의한 실수’로 치부해 버리려는 태도 뒤에는 어떤 정신구조가 있는 것일까.

해답은 일본이 서양문명과 본격적으로 만난 메이지시대 ‘문명개화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문명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나라독립’이라는 목적을 위해 ‘문명개화’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소했다. 국내 민주주의를 강조한 자유민권론자들도 어느덧 하나 둘 정한론에 동조했고 청일전쟁이라는 경험 속에 일본 지식계 내 국내민주주의 주장은 국권의 우월함에 완전히 밀렸다.

저자들이 일본 사상사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가치는 가족과 국가이다. 가족과 국가의 위계로 촘촘히 짜여진 도덕 교육은 천황제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했고, 천황제의 결과 더욱 강화된 것이기도 했다. 1910년대 이후 일본 지식계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했던 사회주의자들이 이른바 ‘쇼와 10년대(1930~40년대)’라고 부르는 시기에 대규모 전향해버린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뛰어난 공산주의자로서 단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심려를 끼칠까봐 걱정했다”는 것이나 “내 안에 자리잡은 국제애의 본능은 내 안의 자기보존 본능과 도저히 맞설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지기 쉽고 빈약하다”는 당시 지식인들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비해 ‘일본현대사상론’은 야스마루 요시오라는 필자가 자신의 사상사 연구를 정리한 것으로 제자인 박진우 숙명여대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야스마루는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자들과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동시에 비판했다. 그에게 민중은 마루야마 등이 말하는 계몽의 대상이나 몽매한 주체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민도 아닌 생활세계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생활자일 뿐이다.

국가중심주의가 만든 천황제그는 일본사회의 보수화가 현저해지는 70년대 중반 이후에 특히 주목한다. 쇼와 천황이 입원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동조를 강요한 자숙과 조의의 표현으로 상징되는 권위적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사상은 어떠했는지가 주요 관심사다.

저자는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던 에너지인 민중의 힘은 그들의 가장 일상적 생활규범이었던 근면·검약·정직·효행 등과 같은 ‘통속도덕’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통속도덕의 실천이라는 광범한 민중의 자기단련·자기해방의 노력 과정에서 분출된 비대한 사회적 에너지가 사회질서를 밑에서부터 재건한 일본 근대화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속도덕의 진지한 실천에 의해 평온한 생활을 희구하는 민중의 평범한 이상이 현실세계의 난관에 부딪혀 난파하게 됐을 때 민중은 스스로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라는 매개를 찾게 됐다. 상징천황제가 파고들 수 있었던 사정이다.

근·현대 일본 지식계와 민중의 정신구조 형성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하는 이 책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일본 내 다수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학계 내 목소리 역시 약하지 않다. 어쩌면 일본사회의 앞날을 그리 절망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아닐까.(손제민 기자)

06. 12. 07.

















P.S. 과문하지만 일본사상사에 관한 책 몇 권을 꼽아본다. 가노 마사나오의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소화, 2004)는 일단 '길잡이'란 말이 눈에 들어온다. 저자는 생소하지만 역자가 일본사상사 전문가라는 점이 믿음을 준다(같은 저자의 <일본의 근대사상>(한울, 2003)과는 어떤 관계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분량이 입문서로서는 적격이다). 그리고 물론 일본사상사의 '천황'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들이 기본서들이겠다. 여러 권이 번역돼 있지만 가장 얄팍한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을 '입문서'로 골라둔다. 그리고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다룬 바 있는, 히로마쓰 와타루의 <근대초극론>(민음사, 2003). '일본 근대 사상사에 대한 시각'이 부제이고, "이 책은 1942년 잡지 문학계'에서 개최된 '근대의 초극 좌담회'에 대한 해설임과 동시에 넓게는 1920년대부터 1945년 패전할 당시까지의 일본 지성사를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당대의 키워드이기도 했던 '근대의 초극'론으로 일본의 현대사상을 재구성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해설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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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2-07 공감 (1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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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 에피소드(21)





사담 후세인이 체포되었다는 것이 어제오늘의 톱뉴스이다(*이 글은 2003년 12월 중순에 씌어졌다). 부시가 재선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어제 문득 들었지만(*예감은 언제나 실현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체포되는니(우리의 KAL기 사건처럼 타이밍을 맞춰서), 미리 체포되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차피 곧 연말이니까 두주쯤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아니다! 그에 대한 재판이 남아있다!...











연말연시는 비교적 좋은 책들이 나오는 계절이다. 주머니가 좀 넉넉해지는 시기인 만큼 (실제적인 통계는 갖고 있지 않지만) 책에 대한 소비도 다소 헤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눈길이 가는 책들이 많이 나왔고, 책 소개의 주기도 빨라졌다.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건(가장 먼저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케밀 파야의 <성의 페르소나>(예경)이다. 지난주 한겨레 서평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책이다.



원제는 'Sexual Personae'(1990)이고, 번역서의 분량이 916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원서도 718쪽에 이른다). 지난주 구내서점에 포장된 채로 들어왔길래 무슨 책인가 궁금했었는데, 알고 보니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보던, 다소 싸구려틱한(!) 표지의 책이었다. 인터넷교보에 자세히 소개가 되어 있고, 몇 군데에서 신간리뷰로 다루기도 했으니까 찾아보시면 될 듯하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에 의하면 "서구 문화의 역사를 바로 이 3중의 이분법으로, 다시 말해 디오니소스=자연=여성 대 아폴론=문명=남성의 대립으로 이해함으로써 논란을 불러일으킨 책이다." 논란만 불러일으켰다면, 그저 호사가적 관심거리만 될 터이지만, 내가 제임슨의 신간과 함께 이 책을 주문한 것은(내일쯤 책을 받아봐야 내용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해롤드 블룸의 추천사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이 말의 좋은 의미에서 '센세이션Sensation'이며, 이에 비견할 만한 책이 없다는 호평을 하고 있다. 나는 거물들의 그런 말에 잘 넘어간다.















두번째 책은 민음사에서 나오는 '일본의 현대지성' 시리즈의 7번째 책인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이다(*<문화의 두 얼굴>, <근대초극론> 등도 이 시리즈의 책들이다). 어제 영풍문고에 들렀을 때에도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이 시리즈의 책은 모두 읽을 만하다는 경험적 판단에 근거하여 추천할 수 있다. 알라딘의 소개글에 의하면, "이 책은 커먼 센스 commom senses, 상식, 공통감각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의 화가 에스헤르, 초현실주의자 마그리리트 등의 회화론, 지각 심리학의 역전 시야에 대한 지각 문제, 그리고 데카르트파 언어학과 촘스키의 생성문법의 이론까지, 심지어 베르그송의 기억의 문제까지 논의를 확대시키고 있다." 저자는 바슐라르, 푸코 등을 일어로 번역한 바 있는 일본의 중진학자이고, 역자는 마루야마 게이자부로의 <존재와 언어>(민음사)를 번역했던 고동호 교수이다.















세번째 책은 박홍규 교수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이다. 이쯤되면 박교수의 놀랄 만한 생산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는데, <오리엔탈리즘>의 역자이기도 한 그가 올 한해 (번역서를 제외하고) 낸 책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으로 모두 7권이다. 이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 듯하지만, 이에 견줄 만한 글쓰기의 생산성이라면, 강준만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 두 사람의 글은 스피디하게 읽힌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어쨌든 지난번에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저작 한권 정도는 서가에 꽂아둘 만하다(*다른 입문서로는 2005년에 나온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가 있다). 굳이, 박교수의 흠을 덧붙여 지적하자면, 교정이 섬세하지 않다는 것. 하긴 우리 출판계에서 교정이 잘 돼 있는 책을 손에 꼽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네번째 책은 남미문학의 거장인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Llosa)의 <세상종말전쟁>(새물결)이다. 나는 그의 책 가운데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초역판은 다른 제목이었다)를 부분적으로 읽고, '대단한 구라'라는 생각을 한 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신간은 그의 최고작이라고 한다. 당연히 한번쯤 읽어봄 직하지 않은가. 아마도 올해 번역돼 나온 남미문학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들 가운데는 가브리엘 마르케스나 카를로스 푸엔테스 정도가 그와 견줄만한 생존작가들이다.














다섯번째 책은 프란스 드 왈의 <보노보>(새물결)이다. 보노보에 대한 화보들이 실려 있는(그래서 책값이 256쪽에 35,000원이다) 이 생태 연구서는 제인 구달의 말을 빌면 "이 4번째 거대 유인원의 진가를 세상에 알려줄 책"이다. 4대 유인원이란,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그리고 덩치가 작아서 '피그미침팬지'라고도 불리는 이 보노보를 말한다.

내가 보노보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건,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하버드대 교수)과 과학저술가 데일 피터슨의 <악마 같은 남성>(사이언스북스, 1998)에서였다. 거기서 야만적인 폭력성을 드러내는 다른 가부장적 영장류들과 달리 보노보는 온화한 가모장적 사회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소개되었다. 요컨대,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거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보노보에 대한 드문 연구소개서인 만큼 관심을 둘 만하다.

참고로, 보노보는 동성애도 즐기는 프리섹스주의자들이라고. 저자인 영장류 학자 드 왈은 <정치하는 원숭이: 침팬지의 정치와 성>(동풍, 1995)의 저자이기도 하다(*이 책은 <침팬지 폴리틱스>로 다시 나왔다. 드 왈(드 발)의 최신간은 작년 12월에 나온 <내 안의 유인원>이다).

이 책들을 언제 다 읽을 것인가?!...

2003.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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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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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보고야 만 자의 씁쓸함
등록 :2015-06-2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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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근대초극론>, 히로마쓰 와타루(廣松涉) 지음
김항 옮김, 민음사, 2003
일본 교토의 리츠 칼튼 호텔 지점 건물은 소박하다(안 들어가 봐서 내부는 모른다). 몇 걸음 건너 맞은편에 작은 가게가 있다. 이 도시는 간판이 크지 않아서 무슨 사무실인지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 곳이 많다. 쇼윈도에 수십개의 ‘예술 접시’가 사각형으로 전시되어 있어서 처음엔 당연히 미술관인 줄 알았다. 그다음엔 화원, 한의원인 줄 알았다가 동물 병원으로 ‘판명’되었다.
내게 그 가게는 ‘일본’을 상징한다. “일본인은 본심을 알 수 없다”는 혼네(ほんね, 속마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잘 모르는 나라’다. 일본에 대한 무지는 식민성과 관련이 있다. ‘해방’ 후 점령자가 교체되면서 남한은 미국의 51번째 주를 자처, 그들과 동일시하면서 일본으로부터의 탈식민 투쟁(성찰과 공부) 대신 손쉬운 비하를 택했다.
<근대의 초극(超克)>은 1920~1945년에 걸친 근대성 극복을 주제로 한 일본 지식계의 논쟁을 마르크스주의 석학 히로마쓰 와타루가 해설한 유명한 책이다. 비서구 일본의 입장에서 서구에서 시작된 근대성(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을 극복하자는 논의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근대 자본주의는 서구에서 시작되었지만(모더니즘) 아시아의 일본에서 더 발달했다(포스트/모더니즘). 공간과 시간의 불일치.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는 지름길은 일본 연구라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진입한다)는 개화기 일본의 강박이었다. 일본은 추월에 성공했다. ‘원본’인 서구를 초과 달성한 것이다. ‘근대의 초극’ 논쟁은 제국이 되고자 했던 일본이 자신을 알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수십권의 전집을 낼 만한 걸출한 지식인들이 탄생했으며 일본 특유의 인문학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일본은 따라잡으려는 대상을 치열하게 논파했다. 유럽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가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서구가 비서구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서구를 열심히 연구하다 보면 질문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만든 이들을 거쳐야 한다. 비서구, 여성, 장애인… 모든 타자들에게 인생이란 이렇게 멀고 복잡한 우회로이다. 이는 피식민자의 자기 찾기는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해준다.
근대 유럽의 철학과 역사, 미술, 음악에 두루 정통했던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렇게 말했다. “근대의 초극을 우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근대가 나쁘니까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오자는 이야기가 아니므로 근대인이 근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근대에 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일본) 고전으로 통하는 길이, 근대성의 벼랑 끝이라고 믿는 곳까지 걸어가서야,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히로마쓰의 해석은 “그의 말에는 서구 문명의 밑바닥을 보고야 말았다는 자부라기보다는 오히려 적막감을 동반한 안도감 같은 것이 존재하며, ‘보고야 만 자의 씁쓸한 감정’이 묻어난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국수주의적 자만심이 아니다. 깨인 상대주의, 단순한 회의주의가 아니라 어디엔가 깊게 빠졌다가 나온 사람 특유의 고뇌와 적막감이 함께하는 깨달음이다.”(184쪽)
지배(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받는 자기 개념과 싸워야 하는 타자로서 울컥하지 않을 수 없는 구절이다. 무엇인가에 깊이 빠졌다가 나온 사람 특유의 “고뇌와 적막감”. 나도 처음 여성주의를 공부할 때 그랬다. ‘남자들의 책’(더구나 동서양!)을 다 읽어야 한다는 조급함과 강박이 지나간 후 찾아오는 허탈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극복, 사랑, 혐오… 목적이 무엇이든 상대를 알기 위해 “벼랑 끝까지 걸어간” 적이 있는가. 나는 한국 사회에서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주류 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의문에 뛰어들 수 있는 인식론적 특권. 끝을 보고야 마는 것은 최고의 저항이다. 자신을 해명하기 위해 끝을 보려는 이들은 비교나 절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는다. “끝을 보고야 만 사람의 씁쓸함”. 진실은 달콤하지 않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연재[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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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마쓰 와타루, 『근대초극론』, 김항옮김, 민음사, 2003.
12. 26일 『근대초극론』을 읽다. 책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넓은 의미의 ‘탈근대’ 혹은 ‘근대초극’의 논리가 지닌 반동성에 대한 비판이란 일정부분
이미 익숙한 주제이기 때문이기도 하고(한국에 있어 저널의 차원에선 탈근대에 대한 논의가 유행할 때 항시 ‘유행에 대한 비판’도 짝을 이루며 유행했
었고 그것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비판적 논리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이 책이 추적하고 있는, 근대초극론과 천황제파시즘의 연루란 것도
일본 근대사 자체에 대한 관심과 다소 동떨어진 위치에서 읽었을 때는, 두뇌 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즉 일반적인 사항 정도로 축약되어 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근대비판과 초극에 관한 의식이 한국에서는 어떤 굴절과정을 겪으며 연속되고 있었던가’란 궁금증을 가져보았는데, 그런 위치
에 있는 인물들의 저작을 조금씩이나마 직접 접해보고 비평해 보는 과정이 일반적인 차원으로 요약되어버릴 포괄적인 논의들에 접근하는 것보다 바
람직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저자가 인용했던 비평가 가토 슈이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그 발언이 세계구조의 편제상 열등한(?) ‘동양’에서의
사상적 발화상의 교착(膠着)지점을, 현상적인 기술로서 잘 요약해준다는  이유에서다. ; “일본 낭만파가 말의 기교를 가지고 사람들을 매혹시켰다면, 교
토학파는 논리의 기교를 가지고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일본 낭만파가 전쟁을 감정적으로 긍정하는 방법을 궁리해 냈다면, 교토 학파는 똑같은 전쟁을
논리적으로 긍정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일본 낭만파가 몸에 맞지 않는 외래 사상의 어색함을 거꾸로 뒤집어 국수주의를 고취하는 데 열중했다면, 교토
학파는 외래 논리가 지닌, 생활과 체험과 전통과 동떨어져 어디든지 적용할 수 있다는 편리함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금세 ‘세계사의 철학’을 날조해
냈다. 일본 지식인들에게 따라붙기 마련인 사상의 외래성을, 교토학파의 ‘세계사의 철학’만큼 극단적으로 과장해서 희화화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논의
가 구체적인 현실과 맞닿으면 철저하게 엉터리가 된다는 점과, 이와는 대조적으로 논리 자체는 아주 그럴 듯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사상의 외래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191쪽)
아래는 한번 읽은 ‘기억’을 유지놓기 위한 의무적인 정리인데, 1의 첫 문장을 쓸 때 신문의 <책 소개>란 처럼 정리할까하다, 2로 넘어가면서는 그냥 날
위해 정리해 두자는 식으로 책 내용의 대강을 요약했다. 
1. ‘근대초극론’은 협의로는 일본에서 1942년 《문학계》란 잡지를 통해 이루어진 좌담을 지칭하는데, 거기에는 교토학파의 인물들, 일본 낭만파,《문학
계》동인등 당시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집단들이 참여했다. ‘근대초극론’의 의미를 확장하자면 일본에서의 ‘서양=근대’의 시스템이 지닌 현실적 아포리
아를 넘어서려 했던 시도들 전반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광의의 의미로 파악했을 때, ‘근대초극’이란 여전히 매우 현실적인 문제라 할 것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전체적인 구성이란 바로 서양에서 18~19세기에 걸쳐 형성되었던 이념적·제도적 토대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시에 현실의 불안정 역
시 바로 ‘근대’가 내포하고 있는 거시적인 틀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근대초극론』이 다루고 있는 문제, 즉 일본에서 1940년대에 전
개되었던 ‘근대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란 과제가 어떻게 그 한계에 봉착했고, 변질되었는지를 따라 가보는 독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토대에 대
해 재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2. 히로마쓰 와타루는 ‘어떻게 근대초극에 대한 담론이 일본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묻고 있는데, 그가 이 주제를 다루
기 위해 접근하고 있는 줄기는 크게는 네 가지의 계열이다. (1) 금융자본주의가 봉착한 모순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국면, (2) 니시다 기타로
로부터 교토학파로 이어지는 이른바 ‘세계사의 철학’, (3) 미키 기요시로 대표되는 전향 좌파의 근대초극의 논리, 즉 협동주의 철학, (4) 맑스주의의 좌
절이란 분위기에서 태동한 일본낭만파의 논리.
관념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해 본다면 이 책의 1장과 2장에 실려 있는 ‘근대성 비판’의 논리는 흔히 현대에 무슨 거창한 타이틀을 건 좌담회에서 제시되
는 논의 틀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정도로 당시의 논의수준으로서도 그것은 꽤나 선진적인 셈이며, 지금으로서도 공감할 수 있는 내
용들이다. 이론들은 자본주의·자유주의·개인주의에 대한 극복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이른바 "탈(Post)-"로 표상되는 담론들과 커다란 차이를 지
니고 있지는 않다. 핵심은 일견 이 시기를 둘러싼 담론들이 일견 파시즘을 부정하면서(외견상 심지어는 정부의 탄압을 받아가면서도) 파시즘으로 성립
되었던 경위이다.
아무튼 간에 위의 네 계열 중, 현실을 해석하는 이론으로서의 이 세 가지 계열이 결국은 (1)이 나타내는 현실적 국면, 즉 ‘천황제 파시즘’의 옹호논리로
둔갑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저자가 결정적인 굴절점으로 생각하는 것은  ‘국체’(즉 천황제)란 사회·경제·정치적인 실제에 대한 ‘이론’의 억압 내지는 외
면이다. 각각의 계열이 지닌 문제는 다음과 같다.
(2)계열 : 교토학파가 제시한 ‘세계사의 철학’은 유럽중심의 보편사관을 비판하며, 동시에 서양의 근대가 만들어놓은 인간중심주의와 기계화, 소외란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간학’을 표상한다. 인간존재의 사회성, 민족, 국가등을 사고하는 문제에 있어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면서도 그들은 성급하게 그
‘불비’와 ‘결락’을 비판하며 기각하며 휴머니즘으로 넘어가 버린다. 따라서 그들은 ‘근대초극’을 위한 구체적인 이론적·실천적인 방향에 대해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때, 상당히 추상적인 차원으로 비약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것은 그들이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과 초극을 모색해야 했을 때, 구체적인
현실로 대결했어야 할 ‘天皇=國體’란 문제지점을 외면하였다는 점에 있다. 정치·경제적인 매개를 배제한 상태에서 나타났던 그들의 형식은 걸맞는 내
용이 지니지 못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는 전시상황 속에서 ‘서양=근대’란 질병에 대항하는 세계사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동양의 대표자로서의 일본의
위치를 옹호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서양 제국주의와 어떠한 차이도 없는 일본의 아시아 지배란 현실을 외면 내지는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그로 변질된
다. 감성적인 차원에 대한 긍정 및 유기체적 발상은 일본 낭만파와 연속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3)계열 : 전시체제란 국외적 상황, 그리고 재벌과 정당간의 야합으로 특징 지워진 금융자본주의적 체제의 한계·모순(공황으로 인한 농촌경제 붕괴 및
계급투쟁의 격화)이란 국내적 상황 속에서 군부는 쇼와유신에 착수한다. ‘사적 소유’의 절대적 인정,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자
유주의 경제시스템은 중앙 국가에 의한 통제경제(국가 독점 자본주의 : 사유재산의 상한선 설정, 토지국유화, 대자본의 국영화)로 이행하게 되는데, 군
[독서일기] 히로마쓰 와타루ㅣ근대초극론
노백성
2005. 12. 27. 22:45
 이웃추가
4
韜光養晦
5/24/23, 8:24 PM [독서일기] 히로마쓰 와타루ㅣ근대초극론 :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n69/120020818307 2/3
작가
출판
발매
부가 내세웠던 논리는 ①천황친정, ②자본주의 타도, ③계급대립 극복, 국위의 세계적 발양이다. 금융자본주의로부터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 그
리고 ‘천황제 파시즘’의 성립이 이 시기 역사의 국내적인 정세였다. 대대적인 좌파 탄압 속에서 일본 공산당은 거의 괴멸단계에 이르렀는데, 이 때 대
대적인 좌파들의 전향이 시작되었다. 전향이란 단순한 ‘배신’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논리적인 이유’에 근거한 전향이었다.
전시체제의 대중적 민족주의의 흐름 속에서 좌파적 실천론자들은 대중적 실천이란 의식 속에서 ‘천황제 타도’란 구호를 폐기하며, 교조적인 지시를 내
리던 코민테른에 대한 반감을 폭발시킨다. 이 당시 좌파들의 논리적인 전향을 가능하게 했던 이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미키 기요시의 ‘협동
주의 철학’이다. “그는 소위 블록 경제로의 길을 밟아가고 있던 당시의 세계정세를 인식하면서 ‘일본과 만주와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협동체’를 구상하
고 ‘동양적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하는 ‘게마인 샤프트(공동사회)’와 ‘게젤샤프트(이익사회)의 종합’으로서의 고차원적인 광역체제를 지향했다.”(137쪽)
그와 같은 전향좌파들에게 있어서는 “국가총동원, 통제경제의 형태로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셨다는 망상,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천황
을 정점으로 하는 협동체 국가라는 망상이, ‘근대의 초극’ 논의를 존립시킬 수 있었던 이유”(118쪽)였던 셈이다.
우익과 군부에게 있어 ‘황군의 위기’, ‘황국의 위기’를 통감하고 ‘천황 곁의 가신’, ‘정치기구와 결탁한 경제권력’을 제거하여 천황친정을 복구하자는 복
고적 주장이, 좌파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자본주의 극복이란 표상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근대초극론’이란 환상으로 봉합되었던 셈이다.
(4) 계열 : 야스다 요주로를 대표로 하는 일본낭만파는 ‘근대초극’에 관한 논의에서 대중적으로 흐르던 어떤 정서를 표상해 준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좌절과 전향이란 현실의 부산물이다. 당시 서양이론의 최첨단의 정수로 이해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 당사자들에게 있어 서구
근대문명의 모든 사상과 가치관을 단적으로 초월하는 것으로 당사자들에게 인식되었다. 현실적인 실천의 장에서의 패배를 매개로 한 환멸과 냉소의
탈출구는 서구문명의 한계를 반성적으로 자각한 국수적인 미의식이었다. 절망한 그들의 내면이란 결과적으로 도착적인 현실(혁명?) 긍정으로 나타나
는데, 그들은 “절망적인 뻔뻔함”(183쪽)을 가지고, 일본의 만주국 건국의 슬로건인 ‘오족협화’, ‘황도낙토’등에 ‘근대초극’적인 공감을 표했다.
‘근대=서양’이란 질병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결과적으로 비유럽적이고 동양적인 원리에 대한 주목으로 현상하는데, 그러한 근대초극론은 정작 그것은
해결해야 될 ‘현실의 문제자체’(아포리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미 해결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고, 문제적 현실을 추인하는 기능을 했다.
히로마쓰 와타루의 평이다 ; “돌아보면 당시의 ‘근대의 초극’에 관한 논의는, 일본이 세계 일대 강국이 된 정황을 기반으로 한 민족적 자각을 투영하면
서, 메이지 유신 이래의 유럽화와 그 귀결에 대한 자기 비판적인 심정을 계기로 존립했다.”(216쪽), “논리로는 장대한 과제의식을 표명한 추상태로 제
시되었고, 정서로는 일종의 낭만주의적인 국수주의에 의해 겨우 생기를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 ‘근대의 초극’을 주술과 같은 통일적 슬로건으로 만들어
준 요인일 수 있었다.”(222쪽)
근대초극론







교토 학파 - 위키백과, 京都学派 Kyoto School

교토 학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교토 학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교토 학파(京都学派)는 서양의 철학과 종교적 사상을 완전히 이해하여 그것을 동아시아 문화 전통에 특화된 종교적, 도덕적 내면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용한 교토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철학 운동에 붙여진 이름이다.[1] 그러나 이는 또한 교토 대학에서 교수하고, 교토 학파를 창립한 사상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의 고유성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발달시킨 몇 명의 전후 학자들을 이르기 위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두 번째 뜻에 포함되는 사상가와 작가는 교토 대학 인문과학 연구소(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대략 1913년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에서 시작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심각한 논쟁에서 살아남아 유명하고 활동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교토 학파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같이 전통적인 학파의 의미에서 철학 "학파"는 아니다. 대신 교토 대학을 중심으로 모인 학자 그룹은 독자적인 사상을 장려하였다.

제임스 하이직(James Heisig)에 따르면 교토 학파라는 이름은 1932년 니시다의 제자와 다나베 하지메(田辺元)가 처음 사용하였다.[2] 도사카 준(戸坂潤)은 그 자신을 학파의 막시스트 좌파의 한 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일본 밖의 미디어와 다른 학술 기관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에 널리 받아들여진 용어가 되었다.

각주[편집]

  1.  D.S. Clarke, Jr. "Introduction" in Nishida Kitaro by Nishitani Keiji, 1991.
  2.  Heisig 2001,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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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学派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京都学派の人々が思想を育んだ哲学の道

京都学派(きょうとがくは、英語: Kyoto School)とは、一般に西田幾多郎田邊元および彼らに師事した哲学者たちが形成した哲学の学派のことを指すが、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を中心とした学際的な研究を特色とした一派も、京都学派、あるいは哲学の京都学派と区別するために、新京都学派とも称する。その他にも様々な学問分野において「京都学派」と呼ばれるグループが存在している。

京都学派(哲学)[編集]

その詳細な定義は国や研究者によって異なり、未だに世界各国で盛んな研究の対象となっている。主なメンバーとして、西田幾多郎田邊元波多野精一朝永三十郎和辻哲郎三木清西谷啓治久松真一武内義範土井虎賀壽下村寅太郎上田閑照大橋良介らが挙げられ、また左派としては三木清以外に戸坂潤中井正一久野収らが挙げられる。とりわけ中井は後述する京都学派(人文研)の桑原武夫や、京都学派(近代経済学)の青山秀夫とも懇意であった。また桑原は父親が京大文学部教授であったこともあって西田とも若い頃から接していたという。

京都学派は西洋哲学東洋思想の融合を目指した『善の研究』などで表される西田哲学の立場に立ち、東洋でありながら西洋化した日本で、ただ西洋哲学を受け入れるだけではなくそれといかに内面で折り合うことができるかを模索した。しかしながら東洋の再評価の立場や独自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模索することは次第に「西洋は行き詰まり東洋こそが中心たるべき」との大東亜思想に近づくことになった。特に京都学派四天王(西谷啓治・高坂正顕高山岩男鈴木成高)らは、「世界史の哲学」や「近代の超克」を提唱し、海軍に接近した。このため太平洋戦争の敗戦により、戦前の京都学派はいったん没落した。だが戦後も高坂、高山らは自民党などの保守政治に接近し、京都学派と政治とのかかわりは今日に至るまで脈々と続いている。なお、陸軍が海軍に較べて圧倒的な力をもっていた時代において、海軍への接近は軍部政権への翼賛というよりは、軍部の方針を是正しようとする体制批判の行動であったと、大橋良介は評している。また、大島康正メモによると、この海軍のブレーントラストとしての京都学派の集まりに、京都学派(東洋史学)の宮崎市定も常連として参加していたと大橋は指摘する。

なお、大橋の著書では梯明秀の分類に依拠しながら、京都学派と京都哲学とを分けて捉えることを提案する。要するに、「何らかのかたちで<無>の思想を継承・展開した思想家のネットワーク」を京都学派と捉え、西田や田辺に学び、単に彼らの知的ネットワークの下にいるものを京都哲学に分類する。その場合、三木は微妙な立ち位置になるとされるが、多くの左派の弟子たちは京都学派に含まれない。また弟子として西田の著作の編集や解説を書きつつ、自分自身の研究は歴史的な方向へと向かった下村寅太郎もたぶん含まれないであろう。また京都大学とは縁はないので一般に京都学派に含めないし、大橋も言及していないが、鈴木大拙は西田の親友で、「<無>の思想を継承・展開」するという点でも相互に影響を与え合っているし、京都の大学(大谷大学)に務めてはいるので、大橋の定義に従えば鈴木も京都学派ということにもなる。他方、中村雄二郎は『共通感覚論』 (1979) において、三木や戸坂や中井(それに京大卒ではないが戸坂と親しい三枝博音の名が挙げられる)の共通感覚への言及を追っていくと、西田哲学の「場所の論理」の批判的乗り越えが可能となると示唆する。その点からも京都学派(哲学)を狭く捉えすぎない方が、生産的であるとも考えられる。

京都学派四天王は戦時中の自分たちの言動について一切総括や弁護の類いをしなかった。1965年に、粕谷一希が高山に対し「私の戦争責任」を論じるよう懇願したこともあったが、高山はそれを断った[1]。下村寅太郎は4人の沈黙に関して「京都学派の人々が自己弁護をしなかったのは、批評を甘受したのでなく無視したという方が正確である。批判は「勝てば官軍」の立場であって、自力によるものでもなく、思想そのものの実力によるものではない」と述べている[2]。 

京都学派(哲学)の人物[編集]

京都学派(近代経済学)[編集]

戦前の日本で「国際的に評価された最初の経済学者」[3]である柴田敬を中心に、その一般均衡理論の師であり「日本のマーシャル」とも呼ばれた高田保馬、高田門下で戦後多くの俊秀を育てた青山秀夫の3人の京大教授を挙げて、「近代経済学の京都学派」と名付けたのは、東大の根岸隆[4]である。

また、森嶋通夫も、「戦前日本の代表的経済学者は、高田保馬、園正造、そして柴田敬の3人の京大教授」[5]だと言っている。

柴田敬は、京大で河上肇のゼミ生としてマルクス経済学を河上に、一般均衡論を高田保馬に、国民主義経済学を作田荘一に学んだ後、黄金時代のハーバード大やケインズ革命勃興期のロンドンに留学し、シュンペーターケインズからも日本人経済学者として最も高い評価[注釈 1]を受けた理論経済学者であったが、留学から帰国後、京都学派(哲学)や近衛文麿等の新体制運動の経済理論上の指導者となり、戦後、公職追放となった。しかしながら、近年、根岸隆、福岡正夫等から、柴田経済学の再評価が行われている[注釈 2]。また柴田の代表的な弟子の一人が杉原四郎である。杉原は柴田の師匠である河上を研究し、また書誌学・図書館学と経済思想史を結びつけた研究を展開した[6]。また、柴田の恩師の河上は山口高等商業にて西田幾多郎からドイツ語を学び、その縁で京大時代も西田と交流をもち、近衛も西田と河上に学ぶために東大から京大に転学しており、柴田ならびにその周辺は京都学派(哲学)と縁が深く、さらに西田ら京都学派(哲学)が蓑田胸喜の執拗な攻撃の対象となったのも、昭和研究会、近衛の延長上に彼らがいたからであるとの説も紹介されている[7]

京都学派(京大人文研)[編集]

また、上記とは別に戦後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京大人文研)にて頻繁に共同研究会を開き、活発な討論を行っていた一派も、京都学派と呼ばれるが、上記の京都学派とは直接の関係はない。こちらは東洋史学の貝塚茂樹塚本善隆藤枝晃中国文学吉川幸次郎フランス文学桑原武夫植物学中尾佐助生態学から人類学にまたがる成果を挙げた今西錦司らが特に著名である。この顔ぶれからも推察されるように、この京大人文研の活動範囲は狭義の人文科学から自然科学の領域にまでまたがった学際的なもので、今西は自らの学問領域を自然学とも称した。今西の弟子筋にあたる個体群生態学のパイオニアである森下正明は、自然科学の研究であった。大興安嶺探検に今西を隊長とし、森下が副団長として、隊員として参加し国立民族学博物館へと活躍の場を移した梅棹忠夫(生態学→民族学人類学)や、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の設立に尽力した梅原猛(哲学)らも、この京大人文研の京都学派に含める。また桑原によって京大人文研助教授に迎えられた鶴見俊輔、同助手でのちに教育学部助教授に配置換えとなった加藤秀俊らは一般に京都学派に含めないが、桑原武夫をはじめ多くの人文研スタッフとともに思想の科学研究会の主要メンバーでもあった(鶴見はメンバーというよりも会の創設者)。鶴見らは京都学派(哲学)の中井正一、久野収らとも懇意で、中井、久野と一緒に運動を行った世界文化同人の多くが思想の科学研究会に加わっていて(例えば武谷三男。なお武谷は上記人文研の貝塚茂樹の弟湯川秀樹の共同研究者としても名高い)、その点で、京都学派(哲学)の左派と京都学派(人文研)二つをつなぐ媒介項に、鶴見、桑原、思想の科学研究会があったともいえよう。なお京都学派(哲学)の主流には思想の科学研究会は批判的で、例えば同研究会『共同研究 転向』第2篇第2章第6節「総力戦理論の哲学―田辺元・柳田謙十郎」(後藤宏行)では田辺に代表される京都学派の主流が戦争協力した点を断罪し、中井正一らの着想によってそれが乗り越えられるとしているし(その点で先述の中村雄二郎『共通感覚論』での指摘の先駆でもある)、また鶴見も「哲学の言語」(『思想』1950年)で西田が「即というコプラ」を多用することを批判的に捉える。

評価[編集]

西田門下の下村寅太郎は、京大人文研の活動に対し、「桑原武夫などの音頭とりで形成された集団であって、何ら思想もなく中心となる思想家もいなかった」「桑原武夫自身、「大学教授」ではあるが、学者でなく、何にでも一言をもつだけのジャーナリスト、せいぜいで啓蒙家であるにすぎない。二、三年前、文化勲章を貰ったが、どのような文化的功労があったのか自他共にわからない」という辛辣な評価を下している[8]

京都学派(東洋史学)[編集]

東洋史学分野における京都学派は、京都帝国大学教授だった内藤湖南桑原隲蔵(人文研の桑原武夫の父)、羽田亨を創始者とし、他に狩野直喜矢野仁一等がいる。弟子に宮﨑市定田村実造三田村泰助谷川道雄、ほか多数の東洋学者たちがおり、京大人文研の一角をなした島田虔次川勝義雄吉川忠夫(吉川幸次郎の子)等もいる。

その特色は、内藤が提唱し、宮﨑らが発展させた時代区分の唐宋変革論である。時代までを上古(古代)、魏晋南北朝時代を中世以降を近世アヘン戦争以降を近代とする四時代区分法を中心に中国史の研究を展開した[9][10]大戦後には、前田直典唯物史観を基にした[注釈 3]時代区分法(唐中期までを古代とし、宋以降を中世とする)を唱える学者たち(東京学派東大派・歴研派と呼ばれる)との間で激しい史学論争が行われた(時代区分論争)[11]

京都学派(憲法学)[編集]

佐々木惣一大石義雄阿部照哉佐藤幸治らを中心とした憲法学の学派。東京大学を中心とする東京学派の政治学的解釈に対する法律学的解釈を志向するなどを特色とする。

京都学派(精神医学)[編集]

今村新吉初代教授により京都大学医学部精神医学教室には哲学的精神病理学の方向性が示された。その後三代目村上仁教授によって精神病理学の伝統は受け継がれ、後に加藤清笠原嘉木村敏藤縄昭など時代を代表する精神医学者を多数輩出した[12]。なお木村敏は西田哲学会で「西田哲学と私の精神病理学」という演題の講演を行っており[13]、京都学派(哲学)と京都学派(精神医学)との関係は深い。

関連人物[編集]

哲学[編集]

近代経済学[編集]

憲法学[編集]

精神医学[編集]

参考文献[編集]

東洋史学[編集]

評伝[編集]

関連項目[編集]

脚注[編集]

注釈[編集]

  1. ^ 「日本の経済学者でシュンペーターのもとを訪れた者のうち、シュンペーター自身が、来る前から異常に高く評価したのは柴田敬であり、来た後に高く評価したのが都留重人であって、これ以外の人についてはほとんど評価していない」、「ケインズの日本人嫌いの理由の一つには、日本の経済学者でケインズのところへ来た人間にろくなやつがいなかったということがあります。論争らしい論争をやったのは柴田さん一人ですか」宮崎義一、伊東光晴「忘れられた経済学者・柴田敬」経済評論53/8月号
  2. ^ 国際的な経済学大辞典 (The New Palgrave1987) の独立項目にその名を記す日本人経済学者は僅か5人を数えるのみであるが、その一人として、柴田敬が選ばれている
  3. ^ ただし、元々の唯物史観での東アジアはアジア的生産様式での停滞を前提としており、宋以降中世説は日本独自の発展と言える。

出典[編集]

  1. ^ 粕谷一希『反時代的思索者 唐木順三とその周辺』,57頁
  2. ^ 下村寅太郎「汀の散歩Ⅰ」,524頁
  3. ^ 根岸隆:「経済思想10日本の経済思想2」鈴木信雄編 第4章 柴田敬 国際的に評価された最初の経済学者
  4. ^ 根岸隆:「現代経済思想の散歩道」倉林義正ほか編2004年7月15日 日本評論社 第8章 近代経済学の京都学派
  5. ^ 宮崎義一伊東光晴「忘れられた経済学者・柴田敬」経済評論S53/8月号
  6. ^ 後藤嘉宏 「社会科学における書誌作成の意義と根拠:杉原四郎における経済思想史の方法論と図書館学的関心の関わり」『図書館学会年報』44巻2号(1998年9月)、pp.49-64
  7. ^ 小林敏明『西田幾多郎の憂鬱』岩波現代文庫,2011年
  8. ^ 下村寅太郎「汀の散歩Ⅰ」- 「著作集13 エッセ・ビオグラフィック」、524頁(みすず書房、1999年)
  9. ^ 内藤、1944。
  10. ^ 宮﨑、1999。
  11. ^ 谷川編、1993。
  12. ^ 藤縄昭『私家本 仏像遍歴』ナカニシヤ出版、2002年2月、94頁。ISBN 9784888486729
  13. ^ 西田哲学会 第10回年次大会プログラム”. 2014年4月閲覧。
  14. ^ 新文明学:New Philosophies of Japanese Civilization”. 2017年7月4日閲覧。
  15. ^ 「新文明学」シリーズ創刊”. 2017年7月4日閲覧。

外部リンク[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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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학파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교토학파 사람들이 사상을 키운 철학의 길

교토 학파 (쿄토가쿠는, 영어: Kyoto School)란, 일반적으로 니시다 기타로와 타나베모토 및 그들에게 사사한 철학자들이 형성한 철학 의 학파 를 가리 키지  , 교토 대학 인문과학 연구소 를 중심으로 한 학제적인 연구를 특색으로 한 일파도, 교토 학파, 혹은 철학의 교토 학파와 구별하기 위해, 신교토 학파라고도 칭한다. 그 외에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교토 학파'라고 불리는 그룹이 존재하고 있다.

교토 학파 (철학) 편집 ]

그 상세한 정의는 국가나 연구자 에 따라 다르며, 아직도 세계 각국에서 활발한 연구 의 대상이 되고 있다. 주요 멤버로서, 니시다 기타로 , 타나베 모토 , 하타노 세이이치 , 아사나가 산쥬로, 와쓰지 테츠로, 미키 키요시, 니시 타니 케이지  마츠 신이치 , 다케우치 요시노부 , 도이 토라 가가단 , 시모무라 토시로 우에다 한스케 , 오하 시 요스케 등 또, 좌파로서는 미키 키요 이외에 토사카 준 나카이 마사 이치 , 쿠노 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나카이는 후술하는 교토 학파(인문연)의 쿠와 하라 타케오 와 교토 학파(근대 경제학)의 아오야마 히데오 와도 간호했다. 또 쿠와하라는 아버지가 교대문학부 교수였던 적도 있어 니시다와도 어렸을 때부터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교토 학파는 서양 철학과 동양 사상 의 융합을 목표로 한 「선의 연구 」등으로 표현되는 니시다 철학의 입장에 서서 동양 이면서 서양화 한 일본에서, 단지 서양 철학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내면에서 접을 수 있는지를 모색했다. 그러나 동양의 재평가의 입장과 독자적인 정체성을 모색하는 것은 점차 “서양은 막혀 동양이야말로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대동아 사상에 접근하게 되었다 . 특히 교토학파 시텐노 (니시타니 케이지· 타카 사카 마사히 토· 타카야마 이와오 · 스즈키 나리타카 ) 등은 ' 세계사의 철학 '과 ' 근대의 초극 '을 제창해 해군 에 접근했다. 이 때문에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전쟁 전 교토 학파는 일단 몰락했다. 하지만 전후에도 타카사카, 타카야마 등은 자민당 등의 보수 정치에 접근해, 교토 학파와 정치와의 관계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맥박하게 계속되고 있다. 또한, 육군이 해군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시대에 있어서, 해군에의 접근은 군부 정권에의 익찬이라기보다는, 군부의 방침을 시정하려고 하는 체제 비판의 행동이었다고, 오하시 료스케는 평가하고 있다. 또한, 오시마 야스 마사 메모에 따르면,이 해군의 브레인 트러스트로서의 교토 학파의 모임에, 교토 학파 (토요 사학)의 미야자키 시정도 단골로서 참가하고 있었다고 오하시는 지적한다.

또한 오하시의 저서에서는 사메이 히데의 분류에 의거하면서 교토 학파와 교토철학을 나누어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요컨대, 「어떠한 형태로 <무>의 사상을 계승·전개한 사상가의 네트워크」를 교토 학파라고 파악해, 니시다나 타나베에 배워, 단순히 그들의 지적 네트워크 아래에 있는 것을 교토 철학으로 분류한다. 그 경우, 미키는 미묘한 서 위치가 된다고 여겨지지만, 많은 좌파의 제자들은 교토 학파에 포함되지 않는다.  제자로서 니시다의 저작의 편집이나 해설을 쓰면서, 자신의 연구는 역사적인 방향으로 향한 시모무라 토모타로도 아마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또 교토 대학과는 인연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교토 학파에 포함하지 않고, 오하시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스즈키 오오츠키는 니시다의 친구로, 「<무>의 사상을 계승・전개」한다는 점에서도 상호 영향 교토의 대학 ( 오타니 대학)에 맡고 있기 때문에, 오하시의 정의에 따르면 스즈키도 교토 학파라고도 된다. 한편, 나카무라 유지 로는 「공통 감각론」(1979)에 있어서, 미키나 토자카나 나카이(게다가 교대졸은 아니지만 토사카와 친한 미에에히로의 이름을 들 수 있다)의 공통 감각에의 언급을 쫓아 가면 , 니시다 철학의 「장소의 논리」의 비판적 극복이 가능하다고 시사한다. 그 점에서도 교토학파(철학)를 좁게 파악하지 않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된다.

교토 학파 시텐노는 전시 중 자신들의 언동에 대해 일체 총괄이나 변호의 종류를 하지 않았다. 1965년 에, 유키타니 카즈키가 타카야마에 대해 "나의 전쟁 책임"을 논할 것을 간청한 적도 있었지만, 타카야마는 그것을 거절했다 [1] . 시모무라 토요로는 4명의 침묵에 대해 “교토 학파의 사람들이 자기 변호를 하지 않은 것은, 비평을 감수한 것이 아니라 무시했다는 것이 정확하다.비판은 “이기면 관군”의 입장이어서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상 자체의 실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 

교토학파(철학)의 인물 편집 ]

교토 학파 (근대 경제학) 편집 ]

전쟁 전 일본에서 「국제적으로 평가받은 최초의 경제학자」[3] 인 시바타 케이 를 중심으로, 그 일반 균형 이론 의 스승이며 「일본의 마샬」이라고도 불린 타카다 호마 , 타카다몬시타 에서 전후 많은 슌히데를 키운 아오야마 히데오 의 3명의 쿄다이 교수를 들고, 「근대 경제학의 교토 학파」라고 명명한 것은, 동대의 네기시 타카시[4 이다 .

또, 모리시마 츠오오도 , 「전전 일본의 대표적 경제학자는, 타카다 호마, 소노마사조 , 그리고 시바타 케이의 3명의 경대 교수」[5] 라고 말하고 있다.

시바타 타카시는 경대에서 가와카미  의 세미나로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河上로, 일반 균형론을 타카다 호마에, 국민주의 경제학을 작다 소이치에 배운 후, 황금 시대  하버드 대나 케인즈 혁명 발흥기의 런던에 유학해, 슌페터 나 케인즈 로부터도 일본인 경제학자로서 가장 높은 평가 [주석 1]를 받은 이론 경제학자였지만, 유학으로부터 귀국 후, 교토 학파(철학)나 근위 문면  신체제 운동 의 경제이론상의 지도자가 되어 전후 공직추방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네기시 타카시, 후쿠오카 마사오 등에서 시바타 경제학의 재평가가 진행되고있다 [주석 2] . 또 시바타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 스기하라 시로 이다. 스기하라는 시바타의 스승인 카와카미를 연구하고, 또한 서지학·도서관학과 경제사상사를 연계한 연구를 전개했다[6 ] . 또한 시바타의 은사 가와카미는 야마구치 고등 상업 에서 니시다 기타로로부터 독일어를 배우고, 그 인연으로 쿄다이 시대도 니시다와 교류를 갖고, 긴에도 니시다와 가와카미에 배우기 위해 토다이에서 쿄다이로 전학 시바타 및 그 주변은 교토 학파 (철학)와 인연이 깊고, 니시다 등 교토 학파 (철학)가 혼다 유키의 집요한 공격의 대상이 된 것도, 쇼와 연구회, 근위의 연장상에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의 설도 소개되고 있다[7 ] .

교토 학파 (경대인 분연) 편집 ]

또, 상기와는 별도로 전후 교토대학 인문과학연구소 (교대인문연)에서 자주 공동연구회를 열고 활발한 토론을 하고 있던 일파도 교토학파라고 불리지만, 상기 교토학파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이곳은 동양 사학 의 가이즈카 시게키 , 츠카모토 요시타카 , 후지에 아키라 중국 문학 의 요시카와 유키지로 , 프랑스 문학 의 쿠와하라 타케오 , 식물학  나 카오 사스케 , 생태학 으로부터 인류학 에 걸치는 성과를 든 이마니시 니시키사 등이 특히 저명 이다. 이 얼굴 흔들림으로부터도 추찰되는 바와 같이, 이 교토 인문연의 활동 범위는 협의의 인문 과학으로부터 자연 과학의 영역에 이르는 학제적인 것으로, 이마니시는 스스로의 학문 영역을 자연학 이라고도 칭했다 . 지금 서쪽의 제자근에 해당하는 개체군 생태학의 개척자인 모리시타 마사아키 는 자연과학의 연구였다. 대흥 안령 탐험에 이마니시를 대장으로 삼아, 모리시타가 부단장으로서 대원으로서 참가해 국립 민족학 박물관으로 활약의 장소를 옮긴 우메사다 타다오 ( 생태학 → 민족학인류학 )이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의 설립에 노력한 우메하라 맹 (철학) 등도 이 교대인문연의 교토학파에 포함한다. 또한 쿠와하라에 의해 교토 인문 연조 교수로 맞이한 츠루미 토스케, 동 조수 이후 교육 학부 조교수로 재배치된 카토 히데토시 등  일반적으로 교토 학파에 포함하지 않지만, 쿠와하라 타케오를 비롯한 많은 인문연 스탭 와 함께 사상의 과학연구회 의 주요 멤버이기도 했다(쓰루미는 멤버라기보다는 회의 창설자). 쓰루미 등은 교토학파(철학)의 나카이 마사이치, 쿠노수 등 모두 간의로, 나카이, 히사노와 함께 운동을 실시한 세계문화 동인의 대부분이 사상의 과학연구회에 참가하고 있어(예를 들면 다케 야 삼남 . 또한 타케야는 상기 인문연의 조카즈카 시게키의 동생 유가와 히데키  공동 연구자로서도 유명하다), 그 점에서, 교토 학파(철학)의 좌파와 교토 학파(인문연) 2개를 잇는 매개항에, 쓰루미, 쿠와하라, 사상의 과학연구회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교토학파(철학)의 주류에는 사상의 과학연구회는 비판적이며, 예를 들면 동연구회 『공동연구전향』 제2편 제2장 제6절 쥬로」( 고토 히로유키 )에서는 타나베로 대표되는 교토 학파의 주류가 전쟁 협력한 점을 단죄하고, 나카이 마사이치 등의 착상에 의해 그것이 극복된다고 하고 있고(그 점에서 앞서 설명한 나카무라 유지로 “공통 감각 논」에서의 지적의 선구이기도 하다), 또 츠루미도 「철학의 언어」(「사상」1950년)에서 니시다가 「즉이라는 코프라'을 많이 사용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파악한다.

평가 편집 ]

니시다몬시타의 시모무라 토모타로는 , 쿄대인 분연의 활동에 대해, 「쿠와하라 타케오 등의 소리로 형성된 집단으로서, 아무런 사상도 없고 중심이 되는 사상가도 없었다」 「쿠와하라 타케오 자신, 「 「대학교수」이지만, 학자는 아니고, 무엇이든 한마디를 가질 뿐의 저널리스트, 기껏해야 계몽가일 뿐이다. 둘째, 삼년 전 문화훈장을 받았지만 어떤 문화적 공로가 있었는지 자타 모두 모르겠다”는 신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8 ] .

교토 학파 (동양 사학) 편집 ]

동양사학 분야에서의 교토학파는 교토제국대학교수였던 나이토 코난, 쿠와하라 타쿠 조 ( 인문연의 쿠와하라 타케오의 아버지), 하네다  를 창시자로 하고, 그 밖에 가노 나오키 야노 히데이치 등이 있다. 제자에 미야자키 시정 , 타무라 미즈조 , 미타무라 야스스케 , 타니 가와 미치오 , 다수의 동양 학자 들이 있어, 교대 인문연의 일각을 이룬 시마다 효지, 카와카츠 요시오, 요시카와 타다오 ( 요시카와 코지로 의 아이 ) 등도 있다.

그 특색은 나이토가 제창하고 미야﨑 등이 발전시킨 시대 구분의 당송 변혁론 이다. 진한 시대까지를 상고( 고대 ),魏晋南北朝隋唐時代를 중세 ,  이후를 근세 , 아편 전쟁 이후를 근대로 하는 4시대 구분법을 중심으로 중국사 의 연구를 전개했다 [9] [10 ] ] . 대전 후에 는, 마에다 나오토리 등 유물사관을 바탕으로 한 [주석 3] 시대 구분법(당중기까지를 고대로 해, 송 이후를 중세로 한다)를 주창하는 학자들(도쿄 학파 · 동 대파 · 역연 파라고 불린다)와의 사이에서 격렬한 사학 논쟁이 행해졌다(시대 구분 논쟁) [11] .

교토 학파 (헌법학) 편집 ]

사사키 소이치 , 오이시 요시오 , 아베 테루야 , 사토 코지 등을 중심으로 한 헌법학 의 학파. 도쿄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도쿄학파 의 정치학적 해석에 대한 법률학적 해석을 지향하는 등을 특색으로 한다.

교토 학파 (정신 의학) 편집 ]

이마무라 신요시 초대 교수에 의해 교토대학 의학부 정신의학 교실에는 철학적 정신병리학 의 방향성이 나타났다. 그 후 3대째 무라카미 히토시 교수에 의해 정신병리학의 전통은 계승되어 나중에 가토 키요시 , 가사와라 카 , 기무라 토시 , 후지나와 아키라 등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 를 다수 배출했다 [12] . 덧붙여 기무라 토시는 니시다 철학회에서 「니시다 철학과 나의 정신 병리학」이라고 하는 연제의 강연을 실시하고 있어[13], 교토 학파(철학)와 교토 학파(정신 의학)의 관계는 깊다 .

관련 인물 편집 ]

철학 편집 ]

현대경제학 편집 ]

헌법학 편집 ]

정신의학 편집 ]

참고 문헌 편집 ]

동양사학 편집 ]

평전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 "일본의 경제학자로 슌페터를 방문한 자 중 슌페터 자신이 오기 전부터 비정상적 으로 높이 평가한 것은 시바타 존경이며, 온 후에 높게 평가한 것이 미쓰히데이다 .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평가하지 않았다." 있습니다. 논쟁 같은 논쟁을 한 것은 시바타 씨 혼자입니까? "미야자키 요시이치, 이토 코 하루"
  2.  국제적인 경제학대사전(The New Palgrave 1987)의 독립항목에 그 이름을 적는 일본인 경제학자는 겨우 5명을 세는 것 뿐이지만, 그 1명으로서, 시바타 케이가 선택되고 있다
  3. ^ 단, 원래의 유물사관에서의 동아시아는 아시아적 생산양식 에서의 정체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송 이후 중세설은 일본 독자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편집 ]

  1. ^ 粕谷一希『반시대적 사색자 가라키 준조와 그 주변』, 57쪽
  2.  시모무라 토요로 「뱃의 산책Ⅰ」,524페이지
  3. ^ 네기시 타카시:「경제사상10 일본의 경제사상2」스즈키 노부오 편 제4장 시바타 케이 국제적으로 평가받은 최초의 경제학자
  4. ^ 네기시 타카시:「현대 경제 사상의 산책길」쿠라바야시 요시마사 외편 2004년 7월 15일 일본 평론사 제8장 근대 경제학의 교토 학파
  5. ↑ 미야자키 요이치 _ _
  6. ^ 고토 카히로 「사회과학에 있어서의 서지 작성의 의의와 근거:스기하라 시로에 있어서의 경제 사상사의 방법론과 도서관 학적적 관심의 관계」 「도서관 학회 연보」44권 2호(1998년 9월), pp.49- 64
  7.  고바야시 토시아키 “니시다 기타로의 우울” 이와나미 현대 문고, 2011년
  8. ^ 시모무라 토요로 “뱃의 산책Ⅰ”- “저작집 13 에세 비오그래픽”, 524페이지(미스즈 서방, 1999년)
  9.  나이토, 1944.
  10.  미야﨑, 1999.
  11.  타니가와 편, 1993.
  12. ↑ 후지나와 아키『사가본 불상 편력』나카니시야 출판, 2002년 2월, 94쪽. ISBN  9784888486729 .
  13. ↑ “ 니시다 철학회 제10회 연차 대회 프로그램 ”. 2014년 4월 열람.
  14. 일본 문명의 새로운 철학 ". 2017년 7월 4일 액세스 .
  15. ↑ “ “신문명학” 시리즈 창간 ”. 2017년 7월 4일 열람.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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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to School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Kitaro Nishida, considered the founder of the Kyoto School of philosophical thought, c. 1943

The Kyoto School (京都学派Kyōto-gakuha) is the name given to the Japanese philosophical movement centered at Kyoto University that assimilated Western philosophy and religious ideas and used them to reformulate religious and moral insights unique to the East Asian philosophical tradition.[1] However, it is also used to describe postwar scholars who have taught at the same university, been influenced by the foundational thinkers of Kyoto school philosophy, and who have developed distinctive theories of Japanese uniqueness. To disambiguate the term, therefore, thinkers and writers covered by this second sense appear under The Kyoto University Research Centre for the Cultural Sciences.

Beginning roughly in 1913 with Kitarō Nishida, it survived the serious controversy it garnered after World War II to develop into a well-known and active movement. However, it is not a "school" of philosophy in the traditional sense of the phrase, such as with the Frankfurt School or Plato's Academy. Instead, the group of academics gathered around Kyoto University as a de facto meeting place. Its founder, Nishida, steadfastly encouraged independent thinking.

According to James Heisig, the name "Kyoto School" was first used in 1932 by a student of Nishida and Hajime TanabeJun Tosaka considered himself to be part of the 'Marxist left-wing' of the school.[2] Afterwards, the media and academic institutions outside Japan began to use the term. By the 1970s it had become a universally accepted term.

History[edit]

Masao Abe writes in his introduction to a new English translation of Nishida's magnum opus that if one thinks of philosophy in terms of Kant or Hegel, then there is no philosophy taking place in Japan. But if it is instead thought of in the tradition carried out by Augustine and Kierkegaard, then Japan has a rich philosophical history, composed of the great thinkers KūkaiShinranDōgen, and others.[3]

The group of philosophers involved with the Kyoto School in its nearly 100-year history is a diverse one. Members often come from very different social backgrounds. At the same time, in the heat of intellectual debate they did not hesitate to criticise each other's work.

The following criteria roughly characterize the features of this school:

  1. Teaching at Kyoto University or at a nearby affiliated school.
  2. Sharing some basic assumptions about using Asian thought in the framework of Western philosophical tradition.
  3. Introducing and rationally investigating the meaning of "nothingness" and its importance in the history of philosophical debate.
  4. Expanding on the philosophical vocabulary introduced by Nishida.

Generally, most were strongly influenced by the German philosophical tradition, especially the thought of KantHegelNietzsche, and Heidegger. In addition, many employed their cultural resources in formulating their philosophy and bringing it to play to add to the philosophical enterprise.

While their work was not expressly religious it was informed significantly by it. For example, Tanabe and Keiji Nishitani wrote on Christianity and Buddhism and identified common elements between the religions.[4] For this reason, some scholars classify the intellectual products of the school as "religious philosophy."

Although the group was fluid and largely informal, traditionally whoever occupied the Chair of the Department of Modern Philosophy at the University of Kyoto was considered its leader. Nishida was the first, from 1913 to 1928. Hajime Tanabe succeeded him until the mid-1930s. By this time, Nishitani had graduated from Kyoto University, studied with Martin Heidegger for two years in Germany, and returned to a teaching post since 1928. From 1955 to 1963, Nishitani officially occupied the Chair. Since his departure, leadership of the school crumbled — turning the movement into a very decentralized group of philosophers with common beliefs and interests.

Significance of its notable members[edit]

The significance of the group continues to grow, especially in American departments of religion and philosophy. Since the mid-1980s, there has been a growing interest in East/West dialogue, especially inter-faith scholarship. Masao Abe traveled to both coasts of the United States on professorships and lectured to many groups on Buddhist-Christian relations.

Although Daisetz Teitaro Suzuki was closely connected to the Kyoto School and in some ways critical to the development of thought that occurred there — he personally knew Nishida, Tanabe, and Nishitani — he is not considered a true member of the group.[5]

Kitaro Nishida[edit]

Nishida, the school's founder, is most known for his groundbreaking work An Inquiry into the Good and later for his elucidation of the "logic of basho" (Japanese: 場所; usually translated as "place," or the Greek τόπος topos). This brought him fame outside Japan and contributed largely to the attention later paid to philosophers from the Kyoto School.

Nishida's work is notable for a few reasons. Chief among them is how much they are related to the German tradition of philosophy since Schopenhauer. The logic of basho is a non-dualistic 'concrete' logic, meant to overcome the inadequacy of the subject-object distinction essential to the subject logic of Aristotle and the predicate logic of Kant, through the affirmation of what he calls the 'absolutely contradictory self-identity' — a dynamic tension of opposites that, unlike the dialectical logic of Hegel, does not resolve in a synthesis. Rather, it defines its proper subject by maintaining the tension between affirmation and negation as opposite poles or perspectives.

Nishitani describes East Asian philosophy as something very different from what the Western tradition of DescartesLeibniz or Hume would indicate.

It is 'intuitive and practical,' with its emphasis on religious aspects of experience not lending themselves readily to theoretical description. True wisdom is to be distinguished from intellectual understanding of the kind appropriate to the sciences. The 'appropriation' of Nishida's thought,...'embraces difficulties entirely different from those of intellectual understanding'...and those who 'pretend to understand much but do not really understand, no matter how much they intellectually understand' are the object of his scorn.[1]

Nishida wrote The Logic of Place and the Religious Worldview, developing more fully the religious implications of his work and philosophy through "Absolute Nothingness," which "contains its own absolute self-negation within itself."[6] By this Nishida means that while the divine is dynamically paradoxical, it should not be construed as pantheism or transcendent theism.

Nishitani and Abe spent much of their academic lives dedicated to this development of nothingness and the Absolute, leading on occasion to panentheism.[citation needed]

Hajime Tanabe[edit]

Keiji Nishitani[edit]

Nishitani, one of Nishida's main disciples, became the doyen in the post-war period. Nishitani's works, such as his Religion and Nothingness, primarily dealt with the Western notion of nihilism, inherited from Nietzsche, and religious interpretation of nothingness, as found in the Buddhist idea of sunyata and the specifically Zen Buddhist concept of mu.

Masao Abe[edit]

Shizuteru Ueda[edit]

A disciple of Keiji Nishitani.

Eshin Nishimura[edit]

Criticism[edit]

Today, there is a great deal of critical research into the school's role before and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ajime Tanabe bears the greatest brunt of the criticism for bringing his work on the "Logic of Species" into Japanese politics, which was used to buttress the militarist project to formulate imperialist ideology and propaganda. Tanabe's notion is that the logical category of "species" and nation are equivalent, and each nation or "species" provides a fundamental set of characteristics which define and determine the lives and outlooks of those who participate in it.

Members[edit]

References[edit]

  1. Jump up to:a b D.S. Clarke, Jr. "Introduction" in Nishida Kitaro by Nishitani Keiji, 1991.
  2. ^ Heisig 2001, p.4
  3. ^ Masao Abe, "Introduction" in An Inquiry into the Good, 1987 (1921).
  4. ^ Tanabe in Philosophy as Metanoetics and Demonstratio of Christianity, and Nishitani in Religion and Nothingness and On Buddhism.
  5. ^ Robert Lee, "Review of The Buddha Eye: An Anthology of the Kyoto School," in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42, No.4 (Aug.,1983).
  6. ^ The Kyoto School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7. ^ Jannel, Romaric (26 July 2022). "Nāgārjuna's Tetralemma in Yamauchi Tokuryū's Philosophy"The Eastern Buddhist. Third Series. 2 (1): 55–68. doi:10.15070/00011240. Retrieved 14 February 2023.

Bibliography[edit]

Scholarly books
  • The Buddha Eye: An Anthology of the Kyoto School. Edited by Frederick Franck. New York: Crossroad Publishing, 1982.
Seventeen essays, most from The Eastern Buddhist, on Zen and Pure Land Buddhism.
Anthology of texts by Kyoto scholars themselves, with additional biographical essays.
  • The Thought of the Kyoto School, edited by Ohashi Ryosuke. 2004.
Collection of essays dealing with the history of its name, and its members contributions to philosophy.
Excellent introduction to the School's history and content; includes rich multilingual bibliography.
  • Absolute Nothingness: Foundations for a Buddhist-Christian Dialogue, Hans Waldenfels. New York: Paulist Press, 1980.
Good early work, focuses mostly on Nishitani's relevance for the perspective of Buddhist-Christian dialogue.
  • James W. Heisig, John C. Maraldo (Ed.): "Rude Awakenings. Zen, the Kyoto School, & the Question of Nationalism",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4.
Journal articles
  • "The Religious Philosophy of the Kyoto School: An Overview," by James Heisig. Japanese Journal of Religious Studies Vol.17, No.1 (1990), p51-81.
  • "Heidegger and Buddhism," by T. Umehara. Philosophy East and West, Vol.20 (1970), p271-281.
  • "Nishida's Philosophy of 'Place'," by Masao Abe, International Philosophical Quarterly Vol.28, No.4 (Winter 1988), p. 355-371.
  • "In Memoriam: Keiji Nishitani (1900-1990)," by E. Kawamura-Hanoka. Buddhist-Christian Studies, Vol.12 (1992), p241-245.

Readings by members[edit]

  • For further information, see the Nanzan Institute's Bibliography for all Kyoto School members
  • Kitaro Nishida, An Inquiry into the Good, translated by Masao Abe and Christopher Iv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7 (1921).
  • ——, Art and Morality, translated by D. Dilworth and Valdo Viglielmo.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73.
  • ——, Intelligibility and the Philosophy of Nothingness, translated by Robert Schinzinger. Westport: 1958.
  • Tanabe, Hajime, "Demonstratio of Christianity", i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Tanabe: According to the English translation of the seventh chapter of the demonstration of Christianity, translated by Makoto Ozaki, Rodopi Bv Editions, January 1990, ISBN 90-5183-205-2,ISBN 978-90-5183-205-1ASIN B0006F1CBU.
  • --, "The Logic of The Species as Dialectics," trns. David Dilworth; Taira Sato, in Monumenta Nipponica, Vol. 24, No. 3, 1969, pp. 273–288. [Available as pdf through JSTOR]
  • --, Philosophy as Metanoetics (Nanzan studies in religion and culture), Yoshinori Takeuchi, Valdo Viglielmo, and James W. Heisig (Translato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April 1987, ISBN 0-520-05490-3.
  • Keiji Nishitani, Religion and Nothingnes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2. ISBN 0-520-04946-2
  • ——, The Self-overcoming of Nihilism, translated by Graham Parkes and Setsuko Aihara.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0.
  • Yoshinori Takeuchi, The Heart of Buddhism, translated by James Heisig. New York: 1983.

Secondary sources on members[edit]

  • Nishida Kitaro, by Nishitani Keiji, translated by Yamamoto Sesaku and James Heisig.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1.
  • The Religious Philosophy of Tanabe Hajime, edited by Taitetsu Unno and James Heisig.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 The Religious Philosophy of Nishitani Keiji, edited by Taitetsu Unno.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External links[ed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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