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09

산하의 오역 임보라 목사님.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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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라 목사님.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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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문’이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가문’ 따위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코웃음부터 나는 처지이지만,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 ‘가문’에는 130년쯤 전부터는 제사가 없다. 두만강 근처에 살다가 만주로 넘어갔던 내 증조부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제사를 폐했던 것이다. 즉 나는 따지고 보면 그리 흔하지 않은 4대째 기독교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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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이라 말하기는 하고, 종교란에 꼬박꼬박 기독교를 채워 넣기는 하지만 통상 한국에서 말하는 독실한 ‘기독교인’과는 거리가 멀다. 아주 멀다. 십일조 같은 건 평생 해 본 적 없고, 예수천국 불신지옥 류의 선무당같은 신앙고백을 해 본 적도 없다. 주일성수도 그다지 엄하게 지키지 않았고, 대학 입학한 이후에는 교회와도 거의 담을 쌓았다. 그래도 무슨 교회에든 적을 두어 달라는 부모님의 성화에도 쇠귀에 성경 읽기쯤으로 대응하다가 찾은 교회가 향린교회였다. 지금은 여러 사정으로 그 교회에서도 이방인이 됐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사반세기를 교인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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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는 기독교 장로회 소속이다. 요즘 분위기는 또 다르다지만 기독교 장로회, 곧 기장은 한국 개신교의 진보성을 독보적으로 담보했고, 향린교회는 속사정이야 어떻든 그 맨 앞 대열에 끼어 있었다. 앞에서 ‘습관처럼’ 이 교회의 신도였다고 한 이유는 이 교회의 충실한 신도였다기보다는 역력한 ‘날나리’였기 때문이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는 않기 위한 알리바이로서 향린교회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불경하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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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는 ‘사회 선교’에 관심이 많은 교회였고, 교회에 나오다 보면 당시의 첨예한 사회적 이슈를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탄핵 촉구 촛불 시위 때는 교회 사람들을 항상 만날 수 있었고, 뉴스를 장식한 여러 사건과 현장, 사람들과 본의 아니게 조우했다. 사회적 이슈가 교회 안에서 불거져 갑론을박이 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 중 하나의 예를 들면 2012년 있었던 동성 결혼식 대여 무산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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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향린교회는 교인들의 결혼식장으로 활용돼 왔다. 그런데 어느 성적 소수자 커플이 향린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고 이 문제는 교회 안의 뜨거운 감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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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동성애는 죄’라고 우기는 사람들을 보면 웃어 넘기기 십상이고, 성적 소수자들을 ‘치료’해서 이성애자로 만들 수 있다고 떠드는 이들을 보면 히틀러 꼬붕 바라보듯 한다. 하지만 고백컨대 당시의 나는 그들을 ‘인정’하되 ‘이해’하지는 못했고 (지금도 그럴 여지가 있다는 것 인정한다.) ‘배려’하되 ‘존중’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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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 게시판에 몰려와서 ‘동성애는 죄악입니다.’ 떠드는 ‘개독교인’ (이 단어를 이 글에서 몇 번 쓸텐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즉 사람을 차별하고 단죄하고 저주하기를 즐기는 부류를 지칭한다.)들에게는 가차없는 독설과 조롱을 날리고 겉으로는 “결혼식 못할 게 뭡니까.” 얘기는 하면서도 굳이 ‘교회’에서, 그것도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그 결혼식을 감행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나의 이중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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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임보라 목사는 향린교회 부목사였다. 교회 안을 떠도는 유령 같은 신도였던 관계로 얼마나 치열한 내부 논의가 있었는지는 얼마나 격론이 오갔는지는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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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것은 끝내 성적소수자들의 결혼식이 무산됐고, 그로 인해 적잖은 교회 내부의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에는 임보라 목사도 있었다. 임보라 목사는 후일 성적소수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들을 위한 목회를 선포하게 되거니와, 당시 교회 내에서 논란의 태풍의 눈 오른편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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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안이 마무리된 뒤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 임보라 목사를 만났다. 예의 그 환한 미소를 바라보며 인사를 나눈 뒤 슬그머니 얘기를 꺼냈다. 고생 많으셨다는 인사치레를 하고 아무튼 향린교회가 겪어야 할 일이었던 것 같다고 위로를 건넸는데 임보라 목사는 내게 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질문을 던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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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님은 어떠셨어요.”
“아 저요? 저야 뭐.....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분들의 결혼을 이단이라거나 무슨 죄악이라거나 하는 건 아닌데 굳이 향린교회에서 결혼해야 하는가 하는 데에는 좀 그랬어요. 교회 교인도 아닌데 말이죠. 교인이 아닌데 아무나 결혼한다고 교회 빌려주지는 않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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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임보라 목사의 미소가 걷혔다. 그리고 차분하게 대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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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결혼과는 달리 세상에서 환영받기 어려운 결혼이었으니까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단이고 권리인데,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받아야 마땅한 선택인데 그걸 부정당하는 자체가 말이 안되잖아요. 걸인, 창녀, 세리들한테도 팔을 벌렸던 게 교회잖아요. 사랑은 동등할 때 가능해요. 사랑한다는 건 차별하지 않는 거잖아요. 저는 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더 우리 교회가 그분들한테 문을 열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차별을 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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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네 네 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이놈의 삐딱한 성정이 그만 매를 부르고 말았다. “네 말씀은 맞는 말씀인데..... 좀 뭔가.....” 그러자 임보라 목사는 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우아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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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 뭔가가 우리가 뛰어넘어야 될 거 같아요. 왜 옛날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던가요. 교양 있고 인종 차별 개념 없다고 자부하던 백인 신사가 딸이 흑인 사윗감을 데려오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용의 영화요. 저는 향린교회가 딱 그 모습이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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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끝으로 역시 화사하게 다른 교우들과 인사 나누러 고개를 돌리는 임보라 목사를 바라보면서 무척 빰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난다. 백지영의 노래 가사를 좀 바꿔 부르면 “뺨 맞은 것처럼 정신이 너무 없어 웃음만 나와서 그냥 웃었어 그냥 웃었어 그냥 허탈하게” 웃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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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지극히 지지찬동하나 가슴께에서는 뭔가 미적거리게 만드는 눅진눅진한 가래같은 지점을 콕 찍혔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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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해였나 임보라 목사는 향린교회의 분가 선교 일환으로 섬돌향린교회를 세워 나갔고 그 이후로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동성애 죄악론을 펴는 개독교인들의 표적으로서, 개독교인들의 독랄하고도 어이없는 이단 심판의 대상으로 곧잘 언론에 오르내렸기에 얼마나 고충이 클지, 마음 고생을 할지에 대해서는 종종 마음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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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워낙 강단이 출중하고 성정이 굳었다 여겼기에 각다귀 개독교인들의 앵앵거림 따위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튼튼히 오래오래 그 손길 필요한 이들과 함께 하시리라 기대하고만 있었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부음을 듣는다. 그 죽음을 두고도 입초시에 올려 조잘거릴 개독교인들도 있으리라. 그 사악하게 못난이들 가운데에서 유난히 우뚝했고 현저하게 빛났던 한 목사의 소천을 슬퍼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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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젊은 시절 <새하늘 새땅>이라는 노래패의 일원이었다고 들었다. 그 중 먼저 간 친구를 유난히 안타까워했고 그 추모 포스팅을 여러 번 올리기도 하고 언젠가는 술자리에서 그녀를 추억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옛날 노래 <찬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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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를 입에 걸면서 인사를 맺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목사님. 천국에서 평안하시길. 먼저 간 친구도 만나 즐거워하는 와중에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힘 주는 것도 잊지 않으시길. 감사했습니다.


거리엔 찬바람 불어오더니
한잎 두잎 낙엽이 지고
내사랑 먼길을 떠난다기에
가라 가라 아주 가라했네
갈사람 가야지 잊을건 잊어야지
찬비야 내려라 밤을 새워 내려라
그래도 너만은 잊을수 없다
너무너무 사랑했었다
내사랑 먼길을 떠난다기에
가라 가라 아주 가라했네
갈사람 가야지 잊을건 잊어야지
찬비야 내려라 밤을 새워 내려라
그래도 너만은 잊을수 없다
너무너무 사랑했었다
너무너무 사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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